주간경향(총 36 건 검색)
- 법원, ‘정부 정책 통제’ 어디까지 가능할까(2024. 05. 27 06:00)
- 2024. 05. 27 06:00 사회
- ‘의대 증원 논란’으로 본 실태와 쟁점 지난 5월 16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이 있는 서울법원종합청사 건물 앞을 한 시민이 걸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법원은 정부 정책에 대해 어디까지 판단할 수 있을까. 지난 5월 16일 서울고등법원 행정7부(구회근·배상원·최다은)가 내놓은 의대 정원 증원 관련 결정이 법조계에서 큰 논쟁거리다. 1심 법원이 일관되게 원고들에게 소송을 낼 자격(원고·신청인 적격)이 없다고 판단했지만, 2심 재판부는 의대생에게 원고적격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 문제는 단순치 않다. 행정소송은 법원이 위법한 정부 정책에 제동을 거는 효과적인 수단이지만, 법원이 사실상 정책을 좌지우지한다는 지적과도 떨어질 수 없다. ■‘새만금 판결’로 원고적격 기준 정해 의대생, 의대 교수, 전공의, 수험생이 정부의 의대 증원을 중단해 달라며 법원에 낸 여러 건의 집행정지 신청사건 핵심 쟁점은 ‘원고적격을 인정할 것인지’였다. 의대생, 의대 교수, 전공의, 수험생은 의대 증원의 직접적인 대상자(대학 총장)가 아니라 ‘제3자’다. 원고적격을 인정하지 않으면 법원이 증원의 적법성을 따져보지도 않고 소송을 끝낸다. 원고적격을 인정하면 증원의 적법성을 구체적으로 따지는 단계로 넘어간다. 법원의 판단 범위도 넓어지는 셈이다. 행정소송법은 “처분의 취소를 구할 법률상 이익이 있는 자”가 취소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2006년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새만금 판결’은 원고적격 기준을 정한 대표 판례다. 환경단체가 정부의 새만금 사업계획을 취소해 달라고 청구한 소송에서 대법원은 환경단체의 원고적격을 부인했다. 대법원은 관련 법령이 정부 처분에 관해 개별적·직접적·구체적 이익이 있다고 규정하면 제3자도 행정소송 원고가 될 수 있지만, 국민 일반이 가지는 일반적·간접적·추상적 이익만 있다면 원고가 될 수 없다고 했다. 환경단체 쪽은 헌법이 ‘환경권’을 국민의 기본권으로 명시한다며 원고적격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대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시민단체들은 “새만금 갯벌과 생명에 대한 사형선고”라며 대법원을 비판했다. 이후 학계에서는 원고적격을 확대하기 위한 논의가 이뤄졌다. 박재윤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행정소송은 일반 공중의 관점에서 처분이 적법한지 아닌지를 따져보는 제도”라며 “누구든지 대표할 만한 사람이 따질 수 있게 해주면 그 이익은 처분과 직접 관련된 사람이 아니더라도 일반 공중에 미칠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원고적격 확대 논의가 이뤄졌다”고 했다. 정부 정책의 영향을 받는 시민이 행정소송을 낼 수 없다는 것은 부당하고, 행정소송이라는 공론장을 통해 정책의 적법성을 다툴 수 있다는 점에서 원고적격 확대의 긍정적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새만금 판결에도 불구하고 법원이 원고적격을 보다 넓게 인정한 사례도 종종 나왔다. 이런 맥락은 이번 의대 증원 건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서울고법 재판부는 우선 “제3자에게 원고적격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증원에 관해 그 누구도 다툴 수 없다는 결론이 된다”고 했다. 대학이 원하는 증원을 처분의 대상자인 대학 총장들이 다툴 가능성은 없기 때문에 제3자로 원고적격의 문턱을 낮출 필요가 있다고 했다. 재판부는 그러면서 의대생을 원고로 인정하는 근거를 헌법에서 끌어왔다. 헌법 제31조의 ‘교육받을 권리’다. 재판부는 학습권은 단순히 추상적·상징적 의미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법적 효력을 가지는 권리라고 했다. 재판부는 “전국의 거의 모든 의대가 즉시 2000명을 증원하면 사실상 의학교육이 불가능하다고 호소하고 있다”며 “현재 약 3000명에서 2025학년도에는 (2024학년도 의대 신입생들이 모두 유급하면) 한 학년에 8000명이 함께 교육받게 되면서 의대 교육이 파행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했다. 적어도 의대생에게는 교육환경이 기존보다 열악해지거나 교육시설 참여기회가 봉쇄된다고 볼 만한 특별한 사정이 있기 때문에 행정소송으로 증원의 적법성을 다툴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1심 법원들이 내리 각하 결정을 한 것은 전통적인 새만금 판례 법리를 따른 것이었다. 특히 서울고법 결정 이후인 지난 5월 21일 서울행정법원 행정4부(재판장 김정중)는 또다시 각하 결정을 하면서 서울고법 결정 내용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이 재판부는 “의대생에게 어떠한 개별적·직접적·구체적 이익이 있다고 볼 만한 사정을 찾아볼 수 없다”, “증원으로 인해 재학생들의 교육 참여기회가 형해화된다고는 도저히 보기 어렵다” 등 격한 어조로 원고적격을 부인하는 이유를 결정문에 썼다. 이 재판부는 증원으로 인해 열악해지는 교육환경은 대학이 해결할 일이지, 증원 자체와는 직접 관련이 없다고 했다. 대법원은 조만간 최종 판단을 할 것으로 보인다. 환경소송과 같은 공익소송에서 원고적격 확대의 필요성이 논의되는 것과 이번 의대 증원 건은 결이 다르다는 지적도 있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지역주민이 환경피해에 직접 소송을 내기 어렵다는 점에서 대신 소송을 내는 환경단체는 공익성이 있지만, 의료인은 증원과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고 사회적 약자는 아니지 않느냐”고 했다. 또 대학생에게 원고적격을 인정하면 교수 임용, 폐과 등 각종 대학 관련 조치에 대해 학습권 침해를 이유로 행정소송을 낼 수 있다는 말이냐며 서울고법 결정을 비판하는 의견도 있다. ■정치의 사법화 속 법원의 입장 주목 서울고법 결정이 주목받는 또 다른 이유는 결과적으로 법원이 의대 증원이라는 정부 정책의 타당성을 인정하는 모양새가 된 점에도 있다. 집행정지는 ‘공공복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을 때’는 허용되지 않는다. 서울고법 재판부는 이 요건을 검토하면서 “필수의료·지역의료의 회복·개선을 위한 기초 내지 전제로서 의대 정원을 증원할 필요성 자체는 부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 결정 후 한덕수 국무총리가 “현명한 판단”이라고 밝힌 것은 법원 판단이 정부 정책을 뒷받침하는 역할로 활용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정치의 실종에 따라 대화와 협상으로 해결해야 할 사안을 법원에 가져가 판단받는 소위 ‘정치의 사법화’ 현상 속에서 행정소송의 확대는 법원이 정국을 주도하고 결정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 그러나 법원은 입법부·행정부와 달리 선출된 권력으로 구성되지 않고, 판단 과정에서 시민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는다. 김중권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독일에서는 모든 종류의 재판에 참심제를 도입해 사법의 민주적 정당성을 추가로 보강하고 대국민 신뢰를 강화해 사법부가 사회의 살아 있는 일부가 되고 있다”며 “가령 1심 행정재판의 경우 직업법관 1명에 명예법관 2명이 함께 사건을 판단한다”고 했다. 차동욱 동의대 행정학과 교수는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사안이 해결이 안 되고 자꾸 소송으로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는 않다고 본다”며 “진영논리가 강화되면서 정치의 사법화가 계속될 텐데 그 과정에서 법원도 사법의 정치화가 될 것인지, 고유의 중심을 잡을지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했다.
- “온열환자? 압사 위기도! 잼버리 현장, 통제가 전무했다”(2023. 08. 18 10:48)
- 2023. 08. 18 10:48 사회
- 태풍 카눈의 북상에 따라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 참가자들의 퇴영이 시작된 지난 8월 8일 전북 부안군 새만금 야영지 대집회장에 의자만 남아 있다. / 부안 | 조태형 기자 “‘여기서 지낼 수 있을까’ 걱정부터 앞섰다.” 스카우트 대장 A씨는 2023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대회 첫날인 지난 8월 1일 야영지에 들어설 때부터 대회 ‘파행’을 예감했다고 한다. 야영지 입구 곳곳에서 물웅덩이가 눈에 띄었고, 웅덩이 주변 바닥은 진흙탕으로 변해 있었다. 이날 전북 부안지역 낮 최고기온은 34.5도. 폭염 위기경보 수준은 4년 만에 가장 높은 ‘심각’ 단계였다. 한낮 폭염에 습기를 머금은 야영지 체감온도는 이보다 훨씬 높았다. A대장은 “7월 말까지 부안에 폭우가 쏟아졌는데, 그 영향으로 야영지 안에 물웅덩이가 꽤 있었다”고 했다. A대장은 2015년 일본 야마구치 잼버리, 2019년 미국 웨스트버지니아 잼버리에도 참여한 ‘잼버리 베테랑’이다. 그런 그가 봤을 때 부안 잼버리 야영지 환경은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많았다. 야영지 내에 나무가 보이지 않았고, 땡볕을 가려줄 그늘도 거의 없었다. 덩굴터널에서 분사되는 물은 뜨뜻미지근했다. A대장은 “어느 정도 힘들 것이란 예상은 했지만, 실제 와서 보니 너무 준비가 안 돼 있는 느낌이었다. 어린 대원들은 더 힘들어했다. 그나마 우리 야영지 상태는 나은 편이었다. 텐트는 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첫날 오후 늦게까지 텐트도 못 치고 대기하고 있던 외국 대원도 많았다. 영국 대표단이 그랬다”고 했다. 첫날부터 온열환자가 속출했다. 병원 앞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50개 남짓 병상은 온열환자들을 수용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한증막으로 변한 화장실과 샤워장은 이용하기 힘들 정도로 더럽고 악취가 심했다. 그마저도 개수가 부족해 대기줄이 길게 늘어섰다. A대장은 “화장실은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위생 상태가 좋지 않았고 벌레도 엄청 많았다. 샤워장은 물과 섞인 갯벌 흙이 굳어버린 채로 배수구를 막아 바닥에 쓰레기와 머리카락, 흙탕물이 흥건했다”고 했다. 어린 대원들이 마실 물도 부족했다. 인솔자들이 야영지 밖에서 생수를 사와 대원들에게 나눠줬다. 생숫값만 100만원 넘게 들었다고 한다. 황당한 건 조직위의 대응이었다. 마실 물이 부족하다고 하니까 조직위에서 ‘대원들이 씻는 물은 먹어도 안전하니 그걸 먹어도 된다’고 했다. 다만 음식은 알려진 것과 달리 충분히 제공됐다고 한다. A대장은 “일부 (곰팡이 핀 달걀 등) 문제가 있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야영지 내 음식은 부족했던 게 아니라 오히려 넘쳐났다”고 했다. 개영식(개막식)이 열린 대회 이틀째 140명에 가까운 온열환자가 발생했다. 대규모 온열환자보다 힘들고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A대장은 “(개영식에 참석한) 대통령 경호 문제로 대원들 소지품 검사를 했는데, 2~3시간을 줄 서서 대기해야 해서 어린 친구들이 많이 힘들어했다. 전체적인 프로그램도 꼬였다. 조직위가 당초 마련한 프로그램 순서가 바뀌거나 빠지면서 무대에 오르기로 한 대원들이 오르지 못한 경우가 있었다. 문제는 행사가 끝난 다음이었다. 대통령이 행사장을 빠져나간 후 군중을 통제하는 주체가 없었다. 대원들이 한꺼번에 행사장을 빠져나가는 상황인데, 누구 하나 제대로 통제하고 안내하는 사람이 없었다. 압사 사고 안 난 게 다행일 정도로 당시엔 아찔했던 순간이었다”고 했다. 조기 퇴영, 태풍, 역차별…거듭된 파행 이후에도 파행은 거듭됐다. 이번 대회에 가장 많은 4400여명의 청소년과 지도자를 파견한 영국을 비롯해 미국과 싱가포르 등 대표단이 열악한 환경을 이유로 조기 퇴영을 결정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나서 총력 지원을 지시하고 전 부처가 수습에 나섰지만, 현장의 문제점들은 단기간에 개선되지 않았다. A대장은 “현장에서는 바로 체감하기 어려웠다. 외부에서 들여온 얼음물은 야영지 외곽 길가에 그대로 쌓인 상태로 방치됐고, 이후엔 미지근한 상태로 대원들에게 지급됐다. 하루 이틀 후엔 따지도 않은 물병들이 땅바닥에 굴러다닐 정도로 넘쳐났다. 다른 지급품도 제대로 전달이 안 됐다. 폭우 대비용으로 지급된 우산은 (대원들이) 구경도 못 하고 (영지를) 나왔다. 기왕 지원하기로 했으면 제때 필요한 만큼 했으면 좋았을 텐데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2023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 개막일인 지난 8월 1일 전북 부안군 야영지 일부가 물에 잠겨 있다. / 연합뉴스 A대장은 한덕수 국무총리가 8월 4일 변기에 묻은 오물을 직접 휴지로 닦고 있는 사진이 화제가 된 것을 두고 “언론 홍보용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는 “정치인들이나 고위관료들이 오면 현장은 혼선만 커진다. 조직위가 이런저런 눈치 보느라 준비한 일정이나 프로그램도 제대로 못 하는 느낌을 받았다. 전문가들에게 현장을 일임하고 필요한 게 뭔지 물어 제때 적절하게 지원해주면 된다”고 했다. 태풍 ‘카눈’을 피해 잼버리 참가자 전원이 야영지에서 철수한 8월 8일 이후에도 조직위 운영은 부실했다. 대회 개최 전 자신했던 ‘폭우 시 사전 지정된 8개 시·군의 342개 실내 구호소로 대피’ 대책은 정작 태풍 앞에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은 8월 8일 ‘왜 대피소를 활용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342개 구호소는 일시적으로 수용하고, 다시 영지로 돌아올 수 있다는 전제하에 운영하는 것”이라며 “이번 태풍은 전국적인 재난이기 때문에 그럴 경우 여기서 (참가자들을) 소거(퇴영)하는 매뉴얼이 있다. 그에 따르는 것”이라고 했다. 기본적인 인원 점검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입국도 안 한 예멘·시리아 대원들을 대학 기숙사와 연수원에 배정했고, 남학생이 사용하는 대학 기숙사에 스위스 여자 잼버리 대원들을 배치했다가 다시 호텔로 옮기는 일도 있었다. 공무원·공공기관 강제 동원 논란도 일었다. 8월 11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폐영식과 K팝 콘서트 지원인력으로 공공기관 직원 약 1000명이 동원됐고, 아이돌 차출 논란이 일면서 권위주의적 행태라는 지적까지 받았다. A대장은 “탁상행정의 극치였다”고 했다. 그는 “조직위의 부실한 준비와 허술한 대응이 이번 대회 파행의 가장 큰 원인이다. 현장과 조직위 간에 소통이 전혀 안 됐다.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난리가 나니까 현장과 동떨어진 지침이 나올 수밖에 없고 결과적으로 사태를 더 키우게 된 것”이라고 했다. 폭염이나 위생 문제로 어린 대원들을 챙기는 일도 버거웠지만 정작 A대장을 화나게 한 건 국내 대원들에 대한 역차별이었다고 한다. 국내 대원과 해외 대원 간 역차별 문제는 대회 기간 내내 제기돼왔다. 숙소 배정 과정에서 외국 대원들은 호텔이나 연수원 같은 곳에 배정된 반면 국내 대원들은 교회 강당 바닥에서 별다른 침구 없이 얇은 매트를 깔고 잠을 잔 일이 그렇다.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지난 8월 2일 전북 부안 새만금 부지에서 열린 2023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 개영식에서 스카우트 최고의 예우를 표하는 장문례를 받으며 입장하고 있다. / 대통령실 제공 A대장은 개영식 때부터 역차별을 당했다고 했다. 그는 “맥가이버 칼(다목적 스위스 군용 칼)을 소지한 대원이 많았다. 개영식 때 소지품 검사를 하는데 국내 대원들은 수거하면서 해외 대원들이 가지고 온 맥가이버 칼은 수거하지 않았다. 햄버거와 같은 음식도 국내 대원들은 반입을 막고 해외 대원들은 막지 않았다”고 했다. 역차별 사례는 또 있다. A대장은 “대회 내내 온열환자가 많이 발생했는데 외국 대표단의 경우 그때마다 대표단 차량이 영내를 수시로 들어와 대원들을 점검하고 했다. 반면 우리 대표단은 영내 차량 진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외국 대표단 영지에서 수도꼭지가 고장났을 땐 수리 요구 후 30분도 안 돼 시설 정비팀이 와서 고쳐주고 갔지만, 우리 대표단이 요구했을 땐 듣는 시늉도 안 했다”고 했다. 8월 11일 열린 퇴영식 때도 마찬가지였다. A대장은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폐영식과 K팝 콘서트에서 외국 대원들은 순찰차로 경호하고 숙소까지 공무원이 안내한 반면 국내 대원들은 좌석 배치, 간식, 경호 등 지원이 거의 없었다”고 했다. 스카우트 대장들이 모여 있는 단톡방엔 조직위 등을 성토하는 글이 넘쳐났다. A대장은 “자국에서 벌어진 대회에서 차별을 당해야 했던 어린 대원들한테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미안했다”고 했다. 국내 스카우트 대장들은 집단행동에 나설 예정이다. A대장은 “더 이상 이런 일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 정부와 한국스카우트연맹에 공식 항의하기 위해 9월 2일 국내 스카우트 대장 150여명이 모처에 모여 행동에 나설 계획”이라고 전했다. 2023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 참가자들이 지난 8월 4일 전북 부안군 잼버리 야영장 내 덩굴터널에서 휴식하고 있다. / 연합뉴스 잇단 경고음에도…결국 국제 망신 대회 차질 우려는 수년 전부터 제기됐다. 2016년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새만금 잼버리 타당성 조사 보고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2023년 8월 1~12일 2023 세계잼버리 기간 한반도에 폭염이 가장 심하고 태풍과 폭우 등 자연재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라고 했다. 지역 정치인들과 시민사회단체의 경고 목소리도 수차례 있었다. 정확히 1년 전인 지난해 8월 18일 이원택 더불어민주당 의원(전북 김제·부안)은 국회 여성가족위원회(여가위) 전체회의에서 주무부처 장관인 김현숙 여가부 장관에게 “빨리 (잼버리) 현장에 가보셨으면 좋겠다. 거기 배수시설이라든가 상하수도, 대집회장, 샤워장, 화장실 등이 전체적으로 늦어지고 있다. 잘못하면 준비 상태가 상당히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또 여성가족부 폐지 논쟁이 한창이던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서 “폭염이나 폭우 대책, 비산 먼지 대책, 해충 방역과 감염 대책을 정말 점검해야 한다. 철저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대회가 어려운 역경에 처할 수 있다. 과연 주무부처(여성가족부)가 사라진 조건에서 잼버리가 제대로 될 수 있겠냐”고 따져 물었다. 이에 김현숙 여가부 장관은 “저희가 태풍, 폭염에 대한 대책도 다 세워 놓아서 보고드리겠다”고 자신 있게 답했다. 하지만 김 장관은 이후부터 잼버리가 임박한 4월 말까지 단 한 번도 현장에 가지 않았다. 김 장관은 대회 내내 말실수 논란을 일으켰다. 8월 6일 잼버리 영내 성범죄 의혹에 대해서는 “경미한 것으로 보고받았다”고 했고, 8월 8일 잼버리 조기 철수 사태와 관련해선 “한국의 위기대응 역량을 전 세계에 보여주는 시점”이라고 말해 물의를 빚었다. 프레잼버리가 열리지 않은 것에 대한 우려도 컸다. 잼버리 주최국은 본 행사 개최 전에 프레잼버리를 열어 시설과 운영 등을 점검한다. 그러나 조직위는 코로나19 재유행을 이유로 지난해 8월 개최 예정이던 프레잼버리를 2주 전에 돌연 취소했다. 지난해 11월 여가위 수석전문위원이 작성한 ‘2023년도 여성가족부 소관 예산안 및 기금 운용계획안 검토보고서’는 “행사 개최가 1년도 남지 않은 2022년 9월 말 현재까지도 기반시설 설치가 계속 지연되는 상황이다. 잼버리의 시행착오를 최소화하고, 문제점을 사전에 발굴 및 보완할 수 있는 프레잼버리 없이 2023년에 본 행사를 개최하게 되고, 보조금 이월로 인해 사업 추진도 지연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향후 여가부와 전라북도는 행사 준비를 더욱 철저히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경고음을 무시한 대가는 처참했다. 역대 최대 규모인 세계 158개국에서 4만3000여명의 스카우트 대원과 지도자가 참가한 새만금 잼버리는 잼버리 역사상 가장 큰 오점을 남겼다. 아마드 알헨다위 세계스카우트연맹 사무총장은 8월 7일 트위터에 “스카우트 잼버리는 100년 역사상 처음으로 복합적인 도전에 직면했다”고 표현했다. 외신의 평가는 냉정했다. 대회 초반부터 온열환자 속출과 같은 영내 피해 상황을 보도해온 영국 BBC방송은 8월 8일(현지시간) 새만금 잼버리에 참가한 대원의 학부모를 인용해 “끔찍했다”고 전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8월 4일부터 홈페이지 상단에 “한국에서 열린 세계스카우트잼버리에 대한 당신의 경험을 말해달라”는 제목으로 별도 제보 코너를 만들어 운영했다. 외신의 눈에 비친 K팝 콘서트는 ‘전체주의적 사고’의 상징이었다. AFP통신은 8월 12일 ‘K팝이 구출? 한국, 스카우트 잼버리 폐막 콘서트에 올인’ 기사에서 “정부가 재앙이 된 행사를 수습하기 위해 수백만달러의 비상 자금을 투입했지만, K팝 팬들부터 공공부문 직원에 이르기까지 한국 정부의 접근 방식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로이터통신은 “한국에서 열린 폭염, 비위생적 환경에 대한 문제 제기, 대피로 얼룩진 세계스카우트잼버리대회가 K팝 콘서트와 사과로 끝났다”고 전했다. 2023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 대원들을 태운 버스가 지난 8월 8일 전북 부안군 잼버리 야영장을 떠나고 있다. / 부안|한수빈 기자 낯뜨거운 책임 공방과 향후 쟁점 대회 파행은 ‘기본’을 갖추지 않은 데서 비롯됐다. 영국 대원들이 조기 퇴영 이유로 내걸었던 위생, 음식, 폭염, 의료 등 문제만 봐도 그렇다. 화장실과 샤워장 위생을 철저히 했다면, 덩굴터널을 늘렸다면, 시원한 생수를 충분히 공급했다면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으리란 뜻이다. 의지만 있었다면 한두 달 안에 대비가 가능했던 문제들이다. 이런 기본적인 요소들이 구비되지 않은 가장 큰 원인은 명확한 컨트롤타워가 없었기 때문이다. 잼버리 공동조직위원장은 김현숙 여가부 장관,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김윤덕 국회의원(전주갑), 강태선 한국스카우트연맹 총재 등 모두 5명이다. 조직위 아래 집행위원장은 김관영 전북도지사다. 공동조직위원장 중 3명이 현 정부 국무위원이다. 조직위 주무부처는 여가부로 돼 있지만, 정부 부처 장관 3명이 조직위원장을 맡다 보니 어느 한 곳도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동시에 누구도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지 않았다. 컨트롤타워의 부재는 2018년 12월 말 새만금 잼버리에 대한 국가의 행정·재정적 지원을 규정한 세계잼버리 지원 특별법 제정 후 주체별로 분담 과제가 주어졌음에도 제대로 굴러가지 않은 결과로 이어졌다. 또한 윤석열 대통령이 공약으로 폐지하겠다던 여가부를 총괄로 둔 것 또한 첫 단추가 잘못 꿰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대회 종료 후 벌어지고 있는 정치권의 책임 공방은 낯뜨거운 수준이다. 여당인 국민의힘은 잼버리 파행 사태를 ‘뻘밭 대참사’로 규정했다. 여당이 타깃으로 정한 책임 주체는 문재인 정부, 여가부, 전북도 등이다. 김기현 대표는 8월 13일 페이스북에서 “문재인 정권과 전북도는 매립과 기반시설 확충, 편의시설 등 대회 준비를 위해 제대로 한 것이 없다”고 말했다. 박대출 정책위의장은 같은 날 문재인 전 대통령이 페이스북에 “(우리는) 국격을 잃었고, 긍지를 잃었다”고 적은 데 대해 “그렇게 5년 허송세월 보내놓고 죄책감도 없이, 뒤집어씌우기만 하면 능사인가”라고 비난했다. 더불어민주당은 윤석열 대통령의 사과와 한덕수 국무총리의 사퇴, 국정조사를 요구하고 있다. 이재명 대표는 8월 16일 최고위원 회의에서 “잼버리 파행에 대한 국조(국정조사)를 추진하겠다. 표류하는 국정을 바로잡고 정부 여당이 더는 국민을 무시하고 퇴행하지 않게 하겠다”고 말했다. 잼버리 집행위원장인 김관영 전북도지사는 8월 14일 기자회견에서 “전북이 맡은 일에 관해서 문제가 생겼다면 전북이 책임을 지고, 조직위에서 문제가 생겼다면 조직위 담당자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면서도, 화장실과 샤워장 등 시설 준비 미흡 지적에 대해서는 “화장실에서 가장 문제가 됐던 것은 청결 문제였는데, 조직위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전북도가 맡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감사원은 정부 차원의 대대적인 감사와 조사를 예고했다. 잼버리 개최지로 새만금이 선정된 2017년 8월부터 지난 6년간 준비·추진 상황 등을 전반적으로 들여다보겠다는 계획이다. 특히 이번 잼버리에 투입된 총예산 1171억원 중 74%를 차지하는 870억원이 조직위 운영비와 사업비로 잡힌 경위 등을 집중 조사할 방침이다. 조직위에 따르면 조직위 예산 외에 상하수도와 하수처리시설, 덩굴터널 등 기반시설 조성에 205억원, 화장실과 샤워장, 급수대 등 편의시설 설치에 130억원이 각각 배정됐다. 아울러 여가부와 전북도 공무원 등의 외유성 출장 수십 건에 대한 조사도 이뤄질 전망이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새만금 잼버리 조직위는 총괄의 주체가 명확지 않고, 민간이 주도적으로 끌고 갈 수 있는 구조도 아니었다. 대회 이전엔 현장의 얘기를 귀담아듣지 않다가 문제가 터지니까 정부가 모든 자원을 동원해 총력 지원하고 나섰는데, 이 또한 국가주의에 매몰된 방식일 뿐이다. 이번 새만금 잼버리 주최기관은 세계스카우트연맹과 한국스카우트연맹이다. 민간이 주최하는 국제행사는 현장 전문가 그룹인 민간이 주도하고 정부가 지원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되, 이런 틀에 맞춰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역할을 담은 가이드라인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 언론 통제로 민심 가리려는 에르도안 정권(2023. 03. 10 11:13)
- 2023. 03. 10 11:13 국제
- 지난 2월 14일 튀르키예 강진 피해 지역 카라만마라슈에서 한 집단 매장지를 취재할 당시의 일이다. 이곳은 본래 카피참 국유림에 인접한 공원이었다. 강진 희생자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쏟아져 나오며 하루아침에 공동묘지가 됐다. 포클레인이 길게 도랑을 파면, 그 구덩이에 관도 아니고 가방에 담긴 시신이 줄줄이 놓였다. 포클레인이 다시 흙을 덮고 널빤지로 만든 묘비를 꾹 누르는 것으로 매장 절차가 끝났다. 지난 2월 26일(현지시간) 튀르키예 이스탄불 보다폰파크에서 열린 FC베식타스와 FC안탈리아스포르의 축구 경기에서 관중들이 강진 희생자를 추모하는 차원에서 인형을 그라운드로 던졌다. / AP연합뉴스 이 참상을 취재하고 있는데, 한 경찰이 갑자기 다가와 끌어냈다. 그는 “트위터 같은 곳에서 왜곡이 될 수 있으니 우리가 제공한 사진만 쓰라. 여기는 취재를 하면 안 되는 곳”이라고 했다. 튀르키예 외교부가 발급해 준 임시 프레스카드를 보여줬지만 소용없었다. 이 경찰은 이러한 취재 제한이 튀르키예 대통령실까지 올라가는 사안으로, 정보 요원들이 장례식장이나 매장지 같은 민감한 현장에 깔려 기자들을 막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미 다른 외신기자가 잡혀간 바 있고, 너희도 적발될 경우 구금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로부터 약 한 달 가까이 지났다. 이 경찰의 경고는 허풍이 아니었다. 그 사이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지진 피해와 정부 대응 문제, 구조 실태 등을 보도한 기자들을 잡아들이고 있다.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는 명분이지만, 종신집권을 꿈꾸는 에르도안 정권이 권위주의 본색을 드러냈다는 평이 나온다. 강진 사후 대책이 절실한 현재, 에르도안 정권이 이토록 가리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에르도안의 적은 에르도안? 강진 이후 정부 부패로 인한 부실한 건축 관행이 피해를 키웠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토건 사업은 에르도안 대통령이 속한 정의개발당(AKP)의 지지 기반이다. 에르도안 대통령 당선 이후 정부가 내준 주택 허가 건수가 3배 뛰었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은 전했다. 또한 2019년 3월 에르도안 정부는 지방선거를 몇 달 앞두고 불법 건축에 대한 전국적인 사면을 단행했다. 이번 지진으로 크게 무너진 건물 중 당시 사면 조치를 받았던 사례가 연일 보도되고 있다. 아이러니한 점은 에르도안 대통령과 정의개발당이 1만명 넘는 사망자를 낳은 1999년 이즈미트 지진 당시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며 인기를 얻었다는 사실이다. 이를 기점으로 에르도안 대통령은 2002년 총선 승리와 2003년 총리 취임을 거머쥐었다. 지난해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 1999년 지진 기념일을 맞아 미래의 재난에서 국민을 보호할 ‘도시 변환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그러면서 “인간으로서, 재난을 막는 일은 우리 손에 달려 있지 않다. 그러나 재난의 파괴적 영향에 대한 조치를 취하는 일은 우리 손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이렇듯 ‘지진으로 흥한’ 정치 이력은 20년을 지나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이번 강진 이후 “구조대가 제때 오지 않았다”, “며칠 동안이나 소방관과 군인, 경찰을 볼 수 없었다” 등의 생존자 증언이 보도되며 소위 ‘골든타임’을 놓친 현 정부의 초기 대응이 도마 위에 올랐다. 실제로 1999년 지진 당시 신속히 배치됐던 군이 이번에는 이틀이 지나고서야 투입됐다. 과거 에르도안이 현재 에르도안의 적이 된 모양새다. 에르도안 정권은 지진 발생 초기 트위터를 차단하고, “군인이나 경찰을 본 적이 없다”와 같은 거짓 진술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놨으나 불만이 퍼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건설업자 등 부실 공사와 부정부패 혐의가 있는 자들을 무더기 구속하고 수사를 확대하고는 있으나, 이것만으로 민심을 달래기엔 부족해 보인다. 케말 클르츠다로울루 튀르키예 공화인민당(CHP) 대표가 3월 6일(현지시간) 대선에서 에르도안 대통령과 맞설 대항마로 선출됐다. / AP연합뉴스 21세기 술탄, 최대 위기 맞다 5월 14일 대선과 총선을 앞둔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번 강진으로 정치 인생의 최대 위기를 맞았다. 그는 조만간 대선 출마 의사를 공식화할 것으로 관측된다. 최근 여론조사에서의 지지율은 50% 정도로 안정적인 수준이지만 지진 대응을 비롯해 경제 문제, 권위주의적 여론 통제 등이 발목을 잡고 있다. 튀르키예는 지난해 말 24년 만에 85%가 넘는 초인플레이션을 기록했다. 달러 대비 리라화 가치가 지난 10년 동안 10분의 1 수준으로 폭락했다. 여기에 더해 세계은행은 이번 지진의 물리적 피해가 약 342억달러(약 45조1600억원)에 달한다고 추산했다.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최대 2%포인트 낮아지리란 분석도 있다. 무엇보다 300만명에 가까운 이재민이 발생했다는 점이 민심 악화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은행과 정부를 믿지 못해 집에 금이나 달러의 형태로 자산을 보관해 온 튀르키예 시민들이 지진으로 무너진 자신의 집을 뒤지며 이를 찾고 있다는 외신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지진 초기 강경했던 태도를 정부 책임을 일부 인정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그는 지난 2월 말 아디야만을 방문해 이재민 아동들에게 직접 성금을 나눠주며 “불행히도 지진의 파괴적 영향, 불리한 기상조건 등의 어려움으로 인해 우리가 원하는 효율로 (구조 및 수색) 작업을 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해 여러분의 용서를 구한다”고 말했다. 이 틈을 파고들어 튀르키예의 야권이 결집했다. 지난 3월 6일 6개 야당 연합은 케말 클르츠다로울루 공화인민당(CHP) 대표(74)를 대선에서 에르도안 대통령과 맞설 대항마로 선출했다. 클르츠다로울루 대표는 경제학자 및 관료 출신이다. 온화하고 조용조용한 말투를 비롯해 안경을 쓴 모습이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를 닮아 ‘간디 케말’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반부패 운동을 벌이고 ‘깨끗하고 정직한 인물’이란 이미지를 얻으며 현 정권의 부패 혐의와도 거리를 뒀다. ‘21세기 술탄’, ‘스트롱맨’으로 불리는 에르도안 대통령과 여러모로 대조적이다. 물론 ‘스트롱맨’이 쉽게 물러나리라 전망하긴 이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지난 20년간 선거에서 12차례 이상 승리를 거둔 노련한 정치인이다. 강진이 터진 이후 이번 대선 및 총선을 6월로 미루자는 논의가 잠깐 나왔다. 지진 피해 지역에서 선거를 제대로 치르기 어렵고, 흉흉해진 민심이 현 정권에 불리하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그러나 5월을 고수했다. 일단은 그의 자신감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확실한 건 언론 통제와 탄압으로 민심을 숨길 순 없다는 사실이다. 이미 소셜미디어에서, 거리에서, 심지어는 축구 경기장에서 현 정권을 향한 분노가 분출됐다. 오는 5월 튀르키예 대선 및 총선은 분노한 민심이 향방을 가를 전망이다.
- [전성인의 난세직필](8)‘금융권 내부통제’ TF 잠정안의 문제점(2022. 12. 02 11:09)
- 2022. 12. 02 11:09 경제
- 지난 11월 29일, 금융위는 ‘금융권 내부통제 제도개선 T/F’의 중간논의 결과(이하 ‘T/F 잠정안’)를 발표했다. 해외금리 연계 파생결합상품(DLF) 사태를 비롯한 작금의 대형 금융사고와 관련해 금융사의 내부통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따가운 시선을 의식한 몸짓으로 보인다. 오늘은 이 T/F 잠정안의 문제점을 짚어보려 한다. 2020년 1월 금융정의연대와 DLF피해자 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앞에서 DLF 제재 관련 은행장 해임요청 진정서 제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결론부터 살펴보자(보도자료 앞부분에 나와 있는 여러 훌륭한 말씀은 넘어간다). 보도자료 4쪽 마지막 행에 나와 있는 개선방향 제1번은 “중대 금융사고에 한정”해 대표이사 책임을 묻도록 하자는 내용이다. 이거 뭔 소리지? 느낌이 벌써 쎄하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보도자료 5쪽 상단에는 “중대 금융사고가 발생했다고 무조건 대표이사를 제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통제제도를 마련하고 관리했다면 감경 또는 면책까지 해주자고 돼 있다. 결국 T/F 잠정안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중대 금융사고가 아닌 모든 금융사고에 대해 대표이사는 무조건 면책이다. 설사 중대 금융사고가 발생한 경우에도 내부통제제도를 마련하고 관리했다면 감경 또는 면책이다. 이게 내부통제제도를 강화하자는 방안인가, 아니면 대표이사를 면책시켜주기 위해 노력하자는 방안인가. DLF 사태 관련자에 면죄부 될 우려 일단 제일 먼저 드는 느낌은 T/F 잠정안이 현재 대법원에서 재판 중인 DLF 사태 관련자들에게 꿀 같은 면죄부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왜? 대표이사에게 ‘지금부터 의무와 책임을 강화하자’는 말은 뒤집어 말하면 ‘이제까지는 의무와 책임이 별것 없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상황이 그럴진대, 정신없는 금융감독원장이 애먼 금융회사 대표이사를 제재했으니 천부당만부당하지 않겠는가? 과거는 그렇다 치고, 그럼 T/F 잠정안대로 하면 앞으로는 금융회사의 내부통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인가? 회의적이다. 현재 방안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대표이사에 대한 제재가 유효하게 작동해야 한다. T/F 잠정안은 멀쩡한 개활지에 대표이사를 위해 2개의 방어진지를 구축해 주었다. 제1차 방어선은 “중대 금융사고”가 아니라고 우기는 일이다. 중대 금융사고만 아니면 몇몇 꼬리 자르기를 통해 대표이사는 무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그 기준이 무엇일까? 100명의 재산을 홀랑 날리면 중대 금융사고이고, 99명의 재산을 홀랑 날리면 보통 금융사고일까? 더 논란이 되는 건 제2차 방어선이다. ‘삐까번쩍’한 내부통제제도를 만들고 이 제도가 “정상적으로 작동되도록 관리”했다면 봐주겠다는 내용이다. 삐까번쩍한 내부통제제도는 지금도 있다. 문제는 “정상적 관리” 부분이다. 무엇이 정상적 관리인가? 정기적으로 내부통제 관련 회의하고 여기서 “잘 운영하라”고 대표이사가 발언하면 관리한 것인가? 참 어려운 얘기다. 그렇다면 왜 이런 방안이 거론되고 있는 것일까? 애초부터 대표이사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해서? 그럴 수도 있다. 꼭 그렇게 악의적으로 프레임을 짜지 않더라도 지금처럼 “잘못된 길”로 T/F가 방향을 잡게 된 다른 정황도 생각해볼 수 있다. 금융회사 대표이사의 의무와 책임 그리고 그것을 감독해야 할 금융감독기구의 정책 수단에 대한 이해가 혹시라도 부족했을 가능성이다. 이 가능성을 조금 더 살펴보자. 금융회사의 대표이사는 (중대하건 아니건) 금융사고가 났을 때 3가지 책임에 직면한다. 첫 번째는 형사 책임이다. 금융회사가 금융관련 법령을 어겨 벌금형에 처해지면 양벌규정에 따라 (별도의 합리적 반증이 없는 한) 대표이사 역시 형사처벌을 받게 된다. 두 번째는 민사 책임이다. 금융사고를 일으킨 금융회사가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을 해준 경우, 회사는 대표이사에게 회사가 입은 손해를 보전하도록 구상권을 행사할 수 있다. 만일 회사가 미적거리면 주주들이 대표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다. 세 번째는 감독상 책임이다. 금융회사 경영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금융감독기구의 적격성 심사(fit and proper test)를 통과한 자에 한해 주어지는 특권이다. 그런데 금융사고를 일으킨 대표이사는 적격성에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고, 금융감독기구의 수시 적격성 심사에 직면해 자신의 적격성이 유지되고 있음을 입증해야 한다. 그 입증에 실패하면 적격성을 상실해 경영에서 물러나야 한다. ‘감독상 책임’에 대한 이해 부족 문제는 이 3가지 책임이 처벌의 강도나 침익성 등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처벌의 근거, 입증의 주체나 입증의 강도 등에 차별성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형사 책임은 개인의 재산권이나 자유권이라는 헌법적 권리를 국가가 제약하는 일이기 때문에 매우 신중하게 결정돼야 한다. 따라서 처벌의 근거가 법률에 있어야 하고(죄형법정주의), 입증의 강도도 합리적 의심의 범위를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강해야 한다. 민사 책임은 상당히 다르다. 대표이사는 상법상 이사로서 설사 명문의 규정이 없더라도 당연히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duty of care)를 부담한다. 그 구체적 갈래의 하나로서 감시의 의무(duty of oversight)를 진다. 입증의 강도는 “그렇지 않을 가능성보다는 그럴 가능성이 조금 더 크다”는 정도면 된다. 금융회사 대표이사에게 가장 불리한 경우가 감독상 책임이다(그리고 바로 이점이 행정법원이나 이번 T/F가 명확히 인식하지 못한 부분이다). 전술했듯이 금융회사를 경영하는 행위는 보편적인 헌법적 권리가 아니라 금융감독기구가 규정한 “적격성 요건”을 구비한 자에 한해 예외적으로 허용한 특권이다. 원칙적으로 금융회사 대표이사는 정기적으로 그리고 필요시에는 수시로 자신의 적격성을 감독당국에 입증해야 할 책임이 있다. 감독상 제재는 특정 자격을 구비한 자에게 예외적으로 허용했던 특권을 자격 미달에 기인해 회수하는 조치로 봐야 한다. 금융사고는 금융회사를 경영해온 대표이사의 적격성에 중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다. 단순히 사고방지 제도를 만들고 잘해보라고 말했다고 그 적격성에 문제가 없었다거나 하자가 치유됐다고 당연시할 수는 없다. 이번 T/F 잠정안의 가장 큰 문제는 종합적으로 내려야 할 적격성 유지 여부의 판단을 팽개치고, 대표이사 면책을 위한 간단한 충분조건을 새로 설치해 주었다는 점이다. T/F는 이번 잠정안의 목적을 우리 사회가 (금융사의) 내부통제를 “경영전략이나 조직문화”로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데 있다고 보았다. 틀린 말이다. 내부통제는 “대표이사가 이사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여러 업무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금융회사를 경영하기 위한 적격성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해야 할 업무”다. 바로 여기가 삐딱선의 갈림길이었다.
- 전성인의 난세직필
- 세제실은 국세청 통제하는 기관?(2022. 08. 05 14:38)
- 2022. 08. 05 14:38 경제
- ㆍ세법 시행령 개정·세수 예측 등 조세정책 총괄 ㆍ“국세청 세무조사 대상·시기 등은 보고받지 않아” “국세청은 기획재정부 세제실이 관장한다.” 김대기 대통령 비서실장이 지난 7월 24일 행정안전부 내 경찰국 신설의 당위성을 강조하면서 한 말이다. 이른바 3대 권력기관(검찰청·경찰청·국세청) 중 하나인 국세청을 견제 또는 통제하고,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기재부 세제실이 하고 있다는 의미다. 결론부터 말하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정부세종청사 기획재정부 / 기획재정부 기재부 세제실은 세법 시행령 개정과 세수 예측 등 조세정책을 총괄한다. 세법개정안을 심사하고 세제 관련 각종 리스크를 관리하기 위한 조세정책심의회에는 세제실 실장, 국장, 조세정책과장, 조세분석과장이 참여한다. 한 중앙부처 관계자는 “세제실은 정책 수립 부서이고 국세청은 집행기관이어서 업무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다. 개선이 필요한 세제 정책이나 이슈에 대해 세제실이 국세청의 의견을 반영해 판단을 내릴 수 있고, 국세청의 중복 세무조사 등 납세자가 이의를 제기한 과세 이슈를 기재부가 부당과세라고 결정내릴 수도 있다”고 했다. 국세청에 대한 인적 통제는 하지 않지만, 국세청이 운영하는 납세자보호위원회 위원 선임에 관여할 수 있다. 국세청 본청과 지방국세청 등에서 납세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운영하는 납세자보호위원회의 위원들은 기재부 등 외부기관이 추천한 전문가들로 구성된다. 기재부 세제실이 국세청의 인사 등에 직접 관여하지 않지만, 국세기본법 등에 의거해 업무적인 통제는 가능하다는 의미다. 또 요즘엔 뜸하지만 기재부 세제실과 국세청 직원들 간 인적 교류도 가능하다. 이 관계자는 다만 “세제실의 ‘국세청 통제’라는 부분은 시각차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 있다. 세제실은 국세청으로부터 특정 기간 어떤 세목에서 세금을 얼마나 거둬들였는지 등에 대해서는 보고를 받지만, 국세청 세무조사의 대상이나 시기 등에 대해서는 보고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집행기관인 국세청은 기재부 소속이면서 독립적인 행정업무를 하는 외청이다. 정부조직법(제27조)에서 규정한 국세청의 사무는 내국세의 부과와 감면, 징수 등이다. 독립적으로 인사·조직·예산권을 갖고 있다. 국세청장은 대통령이 임명하지만, 세무조사 등 주요 업무에서는 기재부 세제실의 지휘·감독을 받지 않는다. 국세청은 필요한 최소한의 범위에서 세무조사를 실시하도록 한 국세기본법 등에 따라 일정한 절차대로 세무조사를 벌인다. 납세지 관할 세무서장 또는 지방국세청장이 실무를 맡는다. 국세청은 국세기본법 등에 따라 사전에 조사계획을 수립해 중복조사 해당 여부를 검토하고 중복조사에 해당하면 세무조사에서 제외한다. 1년에 두 번 열리는 전국 세무관서장회의도 국세청장이 주관한다. 구재이 납세자권리연구소장(세무사)은 “세제실은 세법을 만드는 곳이지 국세청을 통제하기 위한 곳이 아니다. 기재부 세제실이 국세청을 통제한다는 주장이 성립하려면 최소한 세제실 내에 ‘국세행정과’와 같은 관리파트가 있어야 한다. 두 기관은 업무적으로 협력관계에 가깝다. 납세자 보호와 국세 행정심의 등 역할은 다수의 외부위원으로 구성된 납세자보호위원회가 맡고 있다”고 말했다.
- 표지 이야기
- 협업툴, 자율과 통제의 경계는 어디쯤일까(2022. 04. 22 15:12)
- 2022. 04. 22 15:12 경제
- ㆍ2021년 직장인 79%가 사용… 재택근무 활성화의 명암 코로나19 이후 재택근무가 확산하면서 협업툴 사용이 늘었다. 협업툴은 메신저와 e메일, 문서공유, 영상회의 서비스 등을 통합해 업무 생산성을 높이고, 팀원 간 소통과 협업을 돕는 프로그램을 말한다. 수평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해 업무와 관련한 의견 교환과 토론이 활발하다는 장점이 높게 평가받고 있다. 업무 진척 상황이 실시간으로 공유되면서 일의 흐름이 빨라지고, 문서화로 업무를 파악하고, 인수인계할 때도 용이하다. 기존에 e메일이나 범용 메신저로 이뤄지던 외부 고객이나 협력사와의 소통도 협업툴 안에서 이뤄지는 사례가 많아졌다. 워커힐호텔의 재택근무자를 위한 패키지 / 워커힐호텔앤리조트 제공 협업툴이 원격 근무를 위한 필수 도구처럼 인식되면서 전염병 확산 이후 국내외에서 사용이 크게 증가했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가트너가 지난해 8월 발표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협업툴을 사용하는 직장인은 2019년 55%에서 2021년 79%로 증가했다. 최근 거리 두기 해제로 사무실 출근이 늘어날 것으로 보이지만 협업툴 이용은 이런 변화와 상관없이 계속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4월 7일 인크루트가 직장인 939명을 대상으로 ‘협업툴 활용 현황과 엔데믹 이후 수요 예상’을 주제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의 87.0%가 코로나19가 종식돼도 수요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다. 디지털 기술이 생산성을 해친다면 이런 분위기 속에서 협업툴 시장은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마켓앤마켓의 지난해 7월 조사를 보면 글로벌 협업툴 시장 규모는 지난해 약 472억달러(약 58조원)에서 2026년 858억달러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시장 규모는 4000억~5000억원으로 추산된다. 지난해 7월 세일즈포스에 인수된 슬랙(Slack)이 선두주자로, 마이크로소프트의 팀즈(Teams), 구글의 지스위트(G Suite) 같은 외산 툴과 함께 토스랩의 잔디, NHN의 두레이, 네이버웍스, 카카오워크 등 토종 협업툴이 이 시장을 놓고 치열한 경합을 벌이고 있다. 기업은 협업툴을 기반으로 언제 어디서나 원격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디지털 본사’를 구축 중이다. 직원들은 협업툴 덕분에 원격근무가 용이해지면서 출퇴근 시간을 아끼고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됐다. 처음엔 어색하고 낯설었던 화상회의도 점차 익숙해지면서 출장을 가거나 대면 회의를 할 필요성이 줄었다. 임일 연세대 경영대학 교수는 “어디서나 일을 할 수 있고, 자료를 주고받거나, 회의를 하기 위해 만나러 가는 비용이 줄면서 효율성이 높아져 종합적으로 보면 장점이 훨씬 많다”면서 “누가 어떤 일을 했는지 정확히 기록이 남으니 부정적으로 보면 책임소재 추궁이 우려스럽기도 하지만, 과거의 잘못을 돌아보고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 또한 도움이 된다”고 평가했다. 두레이를 서비스하는 NHN 관계자는 “카톡으로 일하는 분이 많지만, 오히려 일과 생활을 분리하는 데 협업툴이 더 좋아보인다”면서 “아직은 제공되지 않지만 협업툴에 데이터가 쌓이면 인사평가 측면에서도 활용도가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일례로 협업툴은 직원 개인의 감이 아니라 데이터에 기반을 둬 동료평가 시 상대방을 추천할 수 있다. 프로젝트 안에서 서로를 언급하거나 대화를 한 데이터가 누적되면서 인사평가할 때 누구와 함께 일을 하면 좋겠다는 게 드러나는 식이다. 해당 직원을 중심으로 인적 네트워킹이 어떻게 짜여 있는지 볼 수 있고, 새 업무를 등록한 이후 얼마나 지속했고,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참조했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평가의 직접적인 지표는 아니지만 유용한 참고자료가 될 수 있다.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다. 단점은 역설적으로 생산성을 높이는 도구가 꼭 생산적이지만은 않다는 데서 나온다. 필요에 따라 여러 협업툴을 사용하면서 혼란스럽고, 주고받는 메시지가 많아지면서 업무에 집중하기 어렵다는 호소가 대표적이다. 생산성 분석 회사인 ‘Time Is Ltd’에 따르면 미국 대기업 직원들은 평균적으로 주당 200개 이상의 슬랙 메시지를 보낸다. 대면회의보다 일정을 잡기 쉬운 덕분에 화상회의가 수시로 열리면서 더 바빠졌다는 반응도 있다. IT업계에서 일하는 A씨는 “화상회의가 하루에도 여러 번 잡히는데 임원이 된 듯 바쁜 느낌”이라면서 “메시지가 수시로 튀어나오고, 날 지목해 호출하는데 많은 사람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슬랙 소통을 게을리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모두가 오가는 메시지를 볼 수 있다 보니 인간적이고 정서적인 부분은 다 제거되고 업무 이야기만 하면서 진짜 인공지능이 된 느낌”이라고 덧붙였다. 업무와 관련된 사람이 모두 들어와 의견을 자유롭게 교환하는 건 좋지만 때론 “사공이 많아 배가 산으로 가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고 했다. 협업툴 ‘슬랙’의 스크린숏 / 슬랙 제공 일터에서 과도하게 디지털 기술을 사용할 경우 오히려 생산성을 해칠 수 있음을 풍자한 그래픽 / Darius Foroux 감독과 감시 사이의 균형 찾기 협업툴의 장단점은 직군마다 개인마다 달리 느낄 수 있다. 임일 교수는 일의 종류에 따라 협업툴의 유용성이 달라진다고 봤다. 임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자료만 주고받아도 충분할 경우에 협업툴의 장점이 극대화된다. 사람 간의 관계가 중요한 일은 협업툴에만 의존할 경우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영업·판매직만이 아니라 연구개발(R&D) 분야에서 특히 그렇다. 매체에 따라 주고받을 수 있는 정보의 깊이가 달라진다는 ‘매체 풍부성 이론’에 따르면 e메일, 전화, 화상회의, 면대면 만남의 순으로 정보의 깊이가 깊어진다. 임 교수는 “연구개발은 단순히 자료를 주고받는다고 협업이 되는 게 아니라 물리적인 장소에서 함께 일하면서 얻을 수 있는 게 많기 때문이다”면서 “결국 업무 특성에 따라 그에 맞는 매체를 써야 한다”고 설명했다. 협업툴은 관리자들이 좋아할 만한 감시의 툴로 활용될 수도 있다. 모두가 모두를 감시하면서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성과가 투명하게 공개되기 때문에 뒤처진다는 이미지를 주지 않기 위해 ‘자기 착취’에 나설 수도 있다. 퇴근이라고 표시해놓고 야근하면서 보고서를 작성해 다음날 일찍 협업툴에 올려놓는 식이다. 조양석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요즘 줌으로 강의할 때가 많은데 학생 입장에선 그냥 강의실에서 수업 들을 땐 남들이 날 확인할 것 같지 않은데 줌으로 하면 사람들이 나를 계속 보고 있을 것 같은 불안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면서 “내가 남을 보듯, 남도 나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일을 알아서 더 열심히 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오계택 한국노동연구원 임금직무혁신센터 소장은 “직종차와 개인차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성취 욕구가 강한 사람은 재택근무를 할 때 업무가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면서 “지금은 인간 관리자가 있기 때문에 허술한 면도 있지만 앞으로 ICT 기술의 발달로 성과 관리가 엄격해지고, 알고리즘이 업무까지 분배한다면 ‘최적화’만 따지는, 훨씬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업무가 할당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비즈니스 e메일 서비스를 제공하는 미국의 ‘프론트(Front)’가 2020년 11월 조사·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조사 응답자의 57%는 원격근무 이후 스트레스를 더 받고 있으며, 66%는 업무량이 상당히 증가했다고 답했다. 가장 큰 고충은 소통 과정에서 너무 많은 앱을 사용(41%)하거나 주고받는 메시지의 양이 증가(34%)한 데서 왔다. 응답자의 84%는 재택근무를 시작한 후 회사가 새로운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플랫폼을 한개 이상 추가했다고 밝혔는데, 이들 중 56%는 새 도구를 추가한 결과 주당 4시간 이상 근무 시간이 늘었다고 말했다. 국내 상황도 비슷할 수 있다. 핀테크 업계에서 일하는 B씨는 “슬랙 알림이 밤늦게 올 경우 바로 답해야 하나 아니면 아침에 출근해서 해도 되는지 알쏭달쏭한 때가 많다”고 말했다. 협업툴 안에 쌓이는 내용이 많지만 정작 필요한 정보를 찾기 어려운 상황도 있다. B씨는 “워낙 많은 콘텐츠를 안에서 주고받다 보니 다 파악하지 못하고 압도당할 때가 있다”면서 “그래서 특정 주제를 확인해야 할 때 협업툴 안에서 검색하면 너무 다양한 이야기가 나와서 결국 관련해서 깊이 아는 분에게 따로 물어보게 된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이런 상황이 2000년대를 전후해 붐이 일었던 ‘지식관리시스템’ 도입으로 생긴 문제와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지식관리시스템은 직원이 가진 노하우와 기술을 혼자 갖고 있지 말고 문서화하면 다른 사람이 쓸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에서 출발했지만 정작 지식을 문서화하는 것도 힘들고, 구축한 후에도 추가 작업이 필요한 정보가 많아 활용도가 기대에 못 미쳤다. 이 문제는 협업툴 안의 검색도구와 문서화 체계를 개선하면 해결할 수도 있다. 협업툴 선용하는 조직문화 필요 협업툴에 인공지능을 접목할 경우 메시지나 업무 현황 등을 파악해 도움이 필요한 직원이나 장시간 노동 등 이상징후를 보인 직원을 가려낼 수 있다. 직원 간 상호작용을 파악해 협업 과정을 개선할 수도 있다. 물론 감시와 통제, 자기 착취의 수단으로 오용될 가능성도 있다. 이광석 서울과학기술대 IT정책대학원 교수는 “실시간으로 자신의 활동이 온라인상에서 기록되면서 끊임없이 동료와 비교하게 되고, 성과가 밖으로 드러나는 방식이라 상호경쟁을 부추기고 상당한 스트레스를 줄 수 있다”면서 “물리적 공간에서 업무평가를 하기 어려워지다 보니 협업툴이 보완적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10년 전인 2012년 조사이긴 하지만 컨설팅회사 맥킨지에 따르면 직장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직원 생산성을 최대 25%까지 높일 수 있다고 한다. 협업툴이 생산성을 높이는 도구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앞다퉈 기업들이 도입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협업툴의 단점을 말한 이들도 협업툴이 긍정적인 기능이 있다는 데는 의문을 달지 않았다. 결국 역효과 방지 대책이 필요하다. 우선 정서적 소통이 부족하다는 단점은 이모티콘을 적절히 활용하면 보완할 수 있다. 퇴근 후에는 알람이 오지 않도록 설정하거나, 개인이 설정한 업무 시간 외에 누군가 메시지를 보낼 때 근무 중이 아니라는 알람이 뜨게 하는 식으로 ‘알람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무엇보다 협업툴을 선용할 수 있는 조직 문화가 중요하다. 과거 ‘카톡 지옥’이 또 다른 마이크로한 형태로 반복될 수 있기 때문에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하는 논의를 시작할 때가 됐다. 오계택 소장은 “오후 4~5시에 다음날 아침까지 보고하라는 업무를 부과하면, 그건 오후 6시 이후 야근하라는 말과 같다”면서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고, 업무시간을 명확히 하는 것 못지않게 업무시간에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일을 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법규 정비도 필요하다. 임일 교수는 “협업툴에서 나오는 정보는 언제 접속했고, 누구에게 뭘 보냈는지 알 수 있는 ‘로그’ 정보라 사생활 침해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면서 “협업툴에 접속한 IP를 추적해 근무지를 파악하거나 메시지와 자료를 들여다보는 것도 회사가 사용자의 동의를 받았다면 법적으론 면피할 수 있겠지만 윤리적으로 타당한지는 별개의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협업툴로 얻은 정보를 어디까지 활용할 수 있는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 [2050 과학오디세이]서창호 카이스트 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 “인공지능 악용, 사회적 통제로 막아야”(2021. 04. 16 11:08)
- 2021. 04. 16 11:08 문화/과학
- 인공지능(AI)은 과학이 새롭게 개척해가는 영역 중 기대만큼이나 불안도 함께 안겨주는 분야다. 게다가 인공지능 과학기술이 다른 어떤 분야보다 수학 의존도가 높다는 점은 쉽게 다가가기 어렵겠다는 마음의 벽까지 만들어낸다. 하지만 서창호 카이스트 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43)는 인공지능과 그 바탕에 있는 수학적 언어를 경원시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는 인공지능 기술이 가진 힘과 확장 범위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자칫 악용될 소지에 대해서는 끊임없는 성찰과 통제가 따라야 한다면서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류의 삶 속 깊숙이 자리 잡아 더 나은 미래를 열어갈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서 교수는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UC버클리)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며 정보통신학의 선구자 클로드 섀넌이 제기한 해당 분야의 난제를 해결한 연구 실적으로 화제가 됐다. 전기전자공학자협회(IEEE)를 비롯 UC버클리 등에서 각종 논문상을 수상한 그는 2011년 박사학위를 받고 MIT에서 1년가량 박사후연구원을 지낸 뒤 2012년부터 모교인 카이스트로 돌아와 연구와 교육을 이어가고 있다. 수학에 대한 관심으로 출발한 그의 연구 이력은 통신수학과 정보이론, 인공지능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과학기술을 개발하는 방향으로 계속되고 있다. 4월 13일 대전 카이스트 캠퍼스에서 서 교수를 만나 과학자로서의 삶과 연구 방향에 관해 들어봤다. -과학자의 길에 들어서게 된 동기가 궁금하다. “어릴 때부터 수학을 좋아하고 잘했다. 수학을 잘해 자연히 접점이 있는 물리도 좋아졌고, 보다 깊이 물리를 공부하고 싶어 그쪽을 파게 됐다. 수학과 물리가 좋아 과학고에 갔고, 졸업 후 대학에 들어올 때만 해도 내가 미래에 어떤 과학자가 돼야겠다는 상을 그리진 않았다. 사실 별생각 없이 잘하는 게 있으니 자연히 좋아하게도 되고, 또 잘하는 것을 하다 보면 사회에 영향력도 미치고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을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다.” -현재의 연구 분야를 택한 것도 계획적이진 않았다는 말인가. “학부 때는 방황하던 시기였다. 처음엔 물리학, 그중에서도 양자역학이 재미있어 보이고 또 실제로도 재미가 있었다. 상상하기 어려운 것들이 실제 일어나고 있고, 그것을 설명한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대학에 와서 선배들의 말을 들어보니 물리학을 전공하면 취직하는 데 현실적인 벽이 있다고 해 현실과 타협했다. 그래도 물리 대신 택한 전자과 안에서 특히 수학과 많이 관련된 통신 분야에 관심이 생겼고, 이쪽으로 가면 내가 더 잘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당시엔 국내에서 통신수학으로 박사를 하기가 쉽지 않아 유학을 택했다.” -통신수학에서 연구한 실적으로 상도 많이 받고 1100회가 넘게 인용되는 논문도 냈다는데. “좀 자세히 설명하자면 1948년 클로드 섀넌이라는 학자가 정보통신 분야에서도 특히 통신을 거쳐 오가는 정보량이 어떻게 결정되는지 수학적으로 밝히며 통신수학의 시대를 열었다. 그때부터 제기된 몇가지 난제 가운데 하나를 연구해 논문으로 냈다. 통신신호를 주고받는 링크들이 늘어나면 서로 간섭되는 신호 때문에 통신에 장애가 생기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링크를 늘려도 일정 수준 이상은 통신 용량이 증가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전까지 약 40년 동안의 통설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 통설을 뒤집고 간섭에 무관하게 용량이 증가할 수 있다고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당연히 통신 분야에서 새로운 진전을 이끌어낼 수 있는 연구여서 감사하게도 많은 주목을 받았다.” -어릴 적부터 키워온 수학에 대한 관심과 열의가 성과로 나타난 셈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수학이 꽃피울 수 있는 가능성보다는 ‘수포자’ 등 수학교육의 어려움만 부각되고 있다. “교수가 되어 학생을 가르치게 되면서 나도 그 이유를 많이 고민하고 해결책도 찾으려 애썼다. 과학 선진국인 미국과 비교해 봤을 때도 한국은 수학에 좀 더 관심도 많고, 실제로 학생들이 수학을 잘한다. 그럼에도 수포자도 많고 수학을 두려워하는 분위기도 공존하는 게 안타까운 현실이다. 중요한 것은 언어다. 즉 소통하고 정보 교류를 하기 위해 쓰는 것을 언어라고 규정하면 수학에도 언어가 있다. 플러스·마이너스 기호가 다 약속이고 언어다. 그런데 수학에 쓰이는 언어는 사칙연산 말고도 지수·로그나 미적분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언어들도 많이 있다. 이 많은 언어가 모두 중요하지만, 초·중·고교 시기에 학생들에게 너무 많이 쏟아지는 게 문제다. 모든 것을 다 가르치려고 하는 데서 학생들이 벽을 느끼는 거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대학에서 자연과학이나 공학을 배우려면 기하·벡터 정도는 당연히 배우고 와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기초적인 능력을 배양해야 학문을 잘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런 지적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학생들이 관심과 흥미를 잃지 않게 하고, 두려워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각자 좋아하는 게 있을 텐데 아예 수학에 관심을 잃고 수포자가 돼 버리면 관심을 끌어올리기가 쉽지 않다. 대학에 가서 필요한 게 있으면 그때부터 알아서 공부해도 된다. 반대로 수학에 관심 가지는 저변을 키우는 교육이 잘 이뤄지면 그만큼 나라도 부강해진다.” -수학뿐 아니라 과학의 전문적인 언어도 대중과 잘 소통이 이뤄지지 않는 문제가 있다고 보나. “전문적인 과학의 언어를 설명하는 게 쉽지는 않다. 학계 용어들을 일상적인 대화에서 사용하는 순간 대화에 벽이 생긴다는 걸 알게 됐다. 그 뒤로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선 어떤 언어를 써야 하는지 알고 소통도 더욱 늘었다. 물론 그런 소통 능력을 개발하길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알리는 게 뭐 그리 중요하냐며. 그런데 나는 일단 교수니까 학생들과 소통하고 가르쳐야 하는 의무가 있고, 사회적으로도 과학이 발견하고 알아가는 것들이 사회에 영향을 줘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영향을 미치려면 이게 어떤 연구인지 이해시키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과학자 사회 안에서도 논문을 써서 소통해야 해당 연구의 권위가 생기듯.” -수학의 언어가 인공지능 연구와도 관련이 있나. “인공지능은 수학 의존도가 매우 높은 연구 분야다. 인공지능 모델을 개발할 때 그 메커니즘은 수학을 써서 설계한다. 수많은 데이터를 학습시키는 과정을 보는 눈을 가지려면 수학의 언어를 알아야만 가능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학의 모든 언어를 다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대학에 들어와 인공지능을 배우면 활용하는 수학적 언어는 한정돼 있다. 행렬과 최적화, 이 두가지만 알면 된다. 많은 숫자를 행렬을 활용해 쉽게 기술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고, 최적화는 말 그대로 인공지능이 학습할 때 최적의 방법으로 할 수 있게 해주는 방식을 알아야 하니 필요하다. 미적분은 몰라도 크게 상관없다. 그래서 일반인들도 이해하기 쉽게 강좌도 많이 만들었다.” 서창호 카이스트 교수가 4월 13일 대전 카이스트 연구실에서 주간경향과 인터뷰하고 있다. -현재 연구 중인 인공지능 기술을 바탕으로 일상생활의 언어와 과학의 언어를 통역해주는 것도 가능할까. “그런 것도 충분히 나올 수 있다. 한국어와 영어, 프랑스어를 동시통역하는 기기가 이미 나오고 있듯이 과학의 언어도 통역해주는 것이 가능하다. 아직 그런 연구가 많지는 않아도 충분히 구현 가능하다.” -주력하고 있는 인공지능 연구는 어떤 것들이 있나. “크게 세가지 연구에 주력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는 자동차 자율주행에 관한 것이다. 이 기술에 대해선 일반적으로도 많이 인지하고 있고 중요도도 인정받고 있다. 인공지능이 할 수 있는 역할을 구상해 하나하나 실현하기 위한 연구들을 펴나가고 있다고 보면 될 듯하다.” -두 번째는 어떤 연구인가. “또 하나 10년 정도를 잡고 단기적으로 진행하는 연구는 인공지능이 인권문제에 개입되는 지점에 관한 연구다. 인공지능이 너무 큰 화두가 되다 보니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을 기계로 대체하기 시작하면서 인권과 공정성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3년 전 아마존에서 입사지원자를 뽑을 때 과거 데이터를 바탕으로 학습한 기계에 지원서류를 걸러내게 한 적이 있다. 그런데 기계가 학습한 데이터가 편향된 데이터이다 보니 여자 지원자를 다 떨어뜨리는 이슈가 불거졌다. 애초에 여성 인력의 비율이 낮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학습했기 때문인데, 이를 해결하려면 가장 간단하게는 데이터를 많이 모으면 된다. 하지만 인종이나 성별을 가리지 않는 대량의 데이터를 모으기가 쉽지 않을 뿐더러 그것조차 편향될 수 있다. 미국에서 과거 판결 자료를 가지고 인공지능 재판관이 학습하면 백인한테는 유리하고 흑인에겐 가혹한 형량을 내는 재판결과가 나올 수 있는 것처럼. 그래서 애초에 편향된 데이터를 가지고 학습하더라도 편향되지 않은 결과를 내놓을 수 있게 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보다 장기적으로 접근하는 연구도 있나. “세 번째 연구 주제가 30~40년을 바라보고 진행하는 장기적인 연구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DNA 데이터를 분석해 어떤 질병에 걸릴 확률이 어느 수준인지 파악하게 하는 것이다. DNA에 담긴 유전정보 자체가 엄청나게 큰 빅데이터이다. 그래서 그냥 놔두면 이 데이터를 가공하는 인공지능을 만들기가 어렵다. 하지만 DNA의 수많은 데이터 속에서도 특정 형질이 발현되는 시퀀스, ‘스닙스(SNPS)’라고 하는 부분은 전체 데이터 중에서도 아주 일부에 불과하다. 어떤 두사람이 있다고 할 때 그들의 시퀀스 패턴은 0.0001%의 차이만 보인다. 그럼 그 차이를 나타내는 부분만 뽑아 학습시켜 가령 호흡기 질환이라든가 간암에 걸릴 확률은 얼마인지 판별할 수 있는 거다. 확률을 알면 예방이 가능하고 인류의 평균수명을 크게 연장시킬 수 있다.” -인간의 DNA 염기서열이 다 밝혀졌으니 어쩌면 시간문제라고도 할 수 있지 않나. “기간이 오래 걸리리라고 보는 건 데이터 수집에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이 엄청나게 필요하다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다. 인공지능이 데이터를 학습하려면 사람들의 데이터가 최대한 많이 수집돼야 한다. 각 개인이 병원에 가서 피를 뽑게 하기도 어렵고, 그 사람이 가진 모든 질병정보와 유전정보를 알아야 해서 일일이 동의도 받아야 한다. 또 그 혈액을 가지고 DNA 시퀀싱을 거쳐야 하고, 앞서 말한 스닙스 패턴을 알아내는 기술도 굉장히 중요하다. 내가 이 기술 특허를 하나 갖고 있긴 하지만 앞으로 그 기술을 구현하는 데 필요한 장비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현실적인 이유든 기술적인 이유든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지만 점차 구현되는 시대는 반드시 올 것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가장 내밀한 정보까지 대량으로 수집해 학습하는 세상이 희망적이면서도 걱정스럽기도 하다. “인공지능에 대해 우려하는 대표적인 두가지가 바로 일자리 문제, 그리고 기계가 인간을 지배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다. 우선 일자리 문제는 걱정 안 해도 된다. 왜냐면 새로운 문화가 창출되면 그에 맞게 모든 것이 맞춰져 없어지는 직장도 생기지만, 새로 생기는 직장이 더 많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내가 더 우려하는 것은 두 번째 위험이다. 세상엔 선한 사람도 많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이들이 기술을 악용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인공지능도 사람이 만드는 건데 악용되면 큰 피해를 끼칠 수 있다. 이 문제에 관해선 과학자들도 충분히 공감하고 있어 인공지능 윤리학이라는 연구 분야도 발전하고 있다. 여기에 데이터 수집 역시 윤리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수집될 여지가 있지만 그럼에도 그 결과물을 윤리적으로 만드는 기술 역시 나란히 개발할 수 있다.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고, 적절한 사회적 통제와 기술 윤리가 작동하면 문제를 막을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최전선에 있는 과학자 사회 내에서 건강한 연구가 이어질 수 있게 하는 게 최우선일 텐데, 과학고를 나온 대부분이 의대에 지원하는 현실에서 과학자들에게 돌아가는 사회·경제적 보상은 충분하다고 보는지 궁금하다. “과학고가 많이 세워지던 초창기에 입학했는데 사실 그때도 지금처럼 졸업하면 의대를 지망하는 인원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의사가 된 친구들이 실제로 나보다 돈도 더 많이 번다. 과학 아닌 다른 분야는 내가 몸담은 적이 없으니 조심스럽긴 하지만 대표적으로 예술 같은 분야는 당장 살아 있는 동안에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걸 보면 그보다는 과학계가 다양한 보상을 충실히 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가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일할 때는 좋아하는 일, 그리고 잘하는 일을 해야 만족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 그래야 임팩트도 끼칠 수 있고, 칭찬도 받더라.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다 보니 수학과 연관된 분야 인공지능까지 연구하게 됐는데, 돈을 더 많이 버는 다른 길을 밟지 않았다고 해서 후회는 없다.”
- [특집]코로나 생존기- 인도, 전면 통제와 부분 완화를 반복(2020. 09. 24 16:41)
- 2020. 09. 24 16:41 국제
- 내가 있는 주는 인도 북동부 지역에 있는 마니푸르(Manipur)주다. 수도는 임팔이다. 이곳은 인도 내의 ‘작은 한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한류가 강한 지역이다. 인도 내의 코로나19 확진자가 매일 9만명가량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병원시설이 열악한 북동부의 상황도 갈수록 어려워져 가고 있다. 인구 300만명인 마니푸르주는 하루에만 확진자 수가 100여명씩 나오고 있다. 인도 마니푸르주에서는 길거리에서 채소를 파는 상인들을 만날 수 있다. 확진자가 급증하면서 지금은 골목에서 상인들을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 이현경 제공 지난 3월 첫 확진자가 나왔을 때 주 정부는 24시간 계엄령을 내렸다. 갑자기 닥친 일이라 생필품을 제대로 구비해 놓지 못했다. 다행히 한 학생의 친척이 운영하는 식료품 가게에서 생수를 구했다. 또 학교에서 마련한 번개 장터에서 어렵게 채소나 생필품을 구했다. 계엄령 선포 3주 뒤 인도 중앙정부의 방침에 따라 주정부가 완화 조치를 실시했다. 하지만 확진자 수가 급증하면서 중앙정부의 완화 정책을 따르지 않고 3주간씩 통행금지와 부분 완화를 반복해서 실시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7개월이 지났다. 지금은 봉쇄 4기를 맞아 아침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가게들이 격일로 문을 열 수 있지만, 코로나19 확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많은 가게가 여전히 문을 열지 않고 있다. 게다가 한 동네에서 확진자가 발생하면 바로 격리구역(Containment Zone)으로 지정이 되고, 그 지역의 상점들은 문을 닫아야 한다. 임팔은 마트에서 채소를 팔기보다 밭에서 농사지은 것들을 가지고 나와서 길거리에서 파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확진자가 9000여명에 가까워지면서 골목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게 됐다. 가끔 차를 타고 지나다니다가 번개처럼 잠깐 싣고 와서 채소를 파는 사람들이 보이면 차를 세워두고 필요한 것을 빨리 사야 한다. 온라인 매장인 아마존이나 플립카트(Flipkart)에서 주문하는 것도 어렵다. 완전 봉쇄령이 내렸다 풀렸다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확진자 발생하면 바로 격리구역 지정 9학년인 아들이 다니는 중고등학교는 지난 6월부터 온라인 수업을 시작했다. 말이 온라인 수업이지 실시간 수업을 할 만큼 인터넷이 보급되어 있지 않고, 전기도 수시로 나가는 상황이라 하루에 두 번씩 과목별로 수업내용과 숙제를 그룹 톡에다 올려주는 정도였다. 지난 8월부터는 온라인 플랫폼으로 하루에 두 번 45분씩 수업을 하지만 반 학생들 70명 중에 3분의 2인 40여명 정도만 참석하고 있다. 하늘길도 거의 막힌 상황이다. 국내선 항공기가 제한적으로 운항되고 주를 옮겨갈 때마다 격리시설에서 격리기간(14일)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이동이 쉽지 않다. 인도-한국 간에는 한 달에 한편씩 한국 기업인들을 위한 특별기가 있다. 하지만 편도요금이 평상시보다 비싸고 인도에서 출국하는 즉시 가지고 있는 기존 비자의 효력이 상실되기 때문에 언제 다시 인도로 돌아올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2005년부터 인도에서 살고 있지만 이렇게 길게 나라 전체가 정체된 듯한 상황은 처음이다. 힌두교가 워낙 모든 것을 수용하는 종교라 팬데믹 상황에서도 특유의 인내심으로 시민이 버텨왔다. 하지만 인도 북동쪽은 민심이 조금씩 변해가고 있음을 느낀다. 확진자 치료에 대한 시설이나 대처팀이 제대로 갖춰져 있질 않아 스스로 조심하고 또 조심하며 백신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다.
- 특집
- [표지 이야기]통제 불능 상태로 드론 추락 땐 흉기(2020. 03. 06 14:34)
- 2020. 03. 06 14:34 사회
- ㆍ드론 교관에게 듣는 Q&A, 내년부터 2㎏ 이상은 필기·실기시험 통과해야 드론이 농약 살포, 환경감시, 정찰·수색, 측량 등 여러 분야에서 활용되면서 이를 운용할 수 있는 조종사에 대한 수요도 늘고 있다. 드론 조종사 자격이 하나의 취업 스펙으로 부상하는 상황이다. 국토부 통계에 따르면 조종자격을 보유한 사람의 수는 2016년 1326명에서 지난해 6월 2만3408명으로 17배 이상 증가했다. 드론 교육기관은 국토부 지정 전문교육기관과 개인이 운영하는 사설 교육기관을 합해 500곳에 이른다. 코로나19가 전국에 확산되면서 초·중·고 개학이 3주 연기된 가운데 3월 4일 경남 창원시 성산구 반송여중에서 해양환경공단 직원들이 드론으로 학교 시설물에 대한 방역작업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드론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 궁금해할 만한 내용을 두 드론 교관의 설명을 종합해 정리했다. 최경용 한국항공대학교 비행교육원 수석교관(52)과 강미진 대한상공회의소 충남인력개발원 교관(46)이 도움을 줬다. -드론 조종사가 되려면. “현재 자체무게 12㎏을 초과하는 드론을 사용해 방제사업과 항공촬영 등을 하려면 반드시 드론 조종자 자격증을 취득해야 한다. 만 14세 이상으로 20시간의 비행경력을 갖추면 한국교통안전공단이 주관하는 시험 응시자격을 얻게 된다. 시험은 항공법규와 항공기상, 비행이론 및 운용을 보는 학과시험과 실기시험으로 나뉜다. 하지만 자격증만 취득했다고 현업에서 바로 활용하기는 어렵다. 방제나 촬영 등 본인 목적에 맞는 연습을 별도로 해야 한다.” -드론 교관, 드론 실기 평가자가 되려면. “조종자격의 위 단계로 교관 과정이 있다. 만 20세 이상으로 80시간의 비행경력을 더 쌓고(총 100시간) 필기시험을 비롯해 교통안전공단에서 실시하는 3일간의 집체교육을 받아야 한다. 거기에 50시간을 더해 150시간을 채우면 실기 평가자가 될 수 있다. 지금은 이 단계까지 도전하는 분도 많다.” -정부는 최근 항공안전법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개정했다. 드론 조종자격과 관련해 무엇이 바뀌나. “내년 1월부터 완구용(250g 이하)을 제외한 모든 드론에 조종자격이 필요하다. 250g 초과~2㎏ 미만의 취미용 소형드론을 조종하려면 온라인 교육만 받으면 된다. 하지만 2㎏ 이상일 경우 일정 시간 이상의 비행경력을 갖추고 필기·실기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드론 학과를 이수하는 데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 “드론의 비행 원리를 배우는 항공역학을 가장 어려워한다. 대학에서 몇 년을 배우는 걸 5시간 정도 기초만 배우기 때문이다. 항공법규도 생소하게 여긴다. 어떤 기체가 항공안전법상의 무인멀티콥터 혹은 무인고정익기로 편재되어 있는지, 규정을 위반해 비행할 경우의 과태료는 얼마가 될지 등이다. 항공기상은 무인멀티콥터와 관련된 내용만 공부해 특별히 어렵지 않다. 운용이론은 기체에 문제가 생겼을 때 대처하는 법을 배운다.” -드론 교육이 중요한 이유는. “드론은 장난감이라는 생각에 대충 날리면 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드론이 부품 결함이나 기상에 따른 조종 불능이나 외부요인으로 위성항법장치(GPS) 신호가 끊겨 통제 불가능 상태로 추락할 때 엄청난 흉기가 될 수 있다. 실제 상당수 드론 사고가 조종 미숙으로 건물 외벽에 부딪히거나 전선 등에 걸려 드론이 떨어지면서 생긴다. 안전 불감증을 막기 위해서 기본적인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 -드론을 날릴 경우 비행허가를 받아야 하는가. “비행금지구역이나 제한공역인 줄 모르고 날리는 경우가 많다. 취미용이라도 원전 부근, 서울 강북지역, 휴전선 등 비행금지구역이나 관제권(공항 주변 반경 9.3㎞), 고도 150m 이상에서 날릴 경우에는 장치무게나 비행 목적과 관계없이 비행승인을 받아야 한다. 기체신고와 비행승인을 국토부 온라인 민원 서비스 ‘원스톱(www.onestop.go.kr/drone)’에서 할 수 있다. 국토교통부와 한국드론협회가 공동 개발한 스마트폰 앱 ‘레디 투 플라이(Ready to fly)’를 이용하면 전국 비행금지구역·관제권 등 공역 현황과 지역별 기상정보, 일출·일몰시각, 지역별 비행허가 소관 기관과 연락처 등을 조회할 수 있다. -야간에 비행하거나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범위의 비행도 가능한가. “항공안전법에 따라 야간에 비행하거나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범위에서 비행하려면 특별비행승인을 받아 그 승인 범위 내에서 비행 가능하다.” -드론으로 사진촬영을 할 때 허가가 필요한가. “그렇다. 국방부에서 항공사진 촬영 허가를 받아야 한다. 촬영 일주일 전 국방부로 항공사진촬영 허가신청서를 보내거나 원스톱에서 신청할 수 있다. 항공촬영 허가를 받아도 비행승인은 별도로 받아야 한다.” -국토부 지정 전문교육기관과 사설교육기관의 차이는. “전문교육기관은 법적으로 강의실과 사무실, 한 명 이상의 교관을 갖춰야 한다. 드론 대수는 일정 수를 채우고 자체 제작 교재가 있어야 한다. 실기교육을 위한 모의비행실과 훈련비행장을 갖춰야 한다. 이런 기반시설과 행정 요원을 갖추기 위한 초기 투자비용이 많다. 그래서 전문교육기관의 교육비가 250만~350만원인 데 비해 사설기관은 이보다 100만원 정도 싸다. 대신 전문교육기관에서는 필기시험을 자체 필기시험으로 대체해 학과시험 부담을 덜 수 있고, 실기시험도 내가 연습한 공간에서 치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사설교육기관은 기본적인 안전교육 외에는 이론 교육을 따로 하지 않고 드론 대여도 어려운 경우가 많다. 실기시험도 상설시험장에서 봐야 한다. 그래서 처음부터 교육을 제대로 받고 싶다면 전문교육기관을, 이론 과정을 건너뛸 능력이 있고 비행경력만 인정받고 싶다면 사설교육기관을 택하면 된다.” -드론 수업을 받는 이들의 특징은. “드론 자격증 취득 후 뭘 할 것인지 물으면 절반은 농약 살포 등 방제 분야에서 일할 것이라고 한다. 농촌 고령화로 60~70대 어른들이 보호장구도 없이 농약을 쳤는데 이젠 드론을 이용한 방역으로 대신하려는 분들이 많아 쓰임새가 늘고 있다. 나머지 절반은 다양하다. 최근에는 드론병으로 군에 입대하겠다는 젊은이들이 많이 늘고 있다. 2018년 드론병과의 부사관을 모집했을 때 경쟁률이 28.8 대 1로 굉장히 높았다.”
- 표지 이야기
- [표지 이야기]“알고리즘 통제도 사용자의 통제다”(2020. 02. 14 15:50)
- 2020. 02. 14 15:50 사회
- ㆍ장귀연 노동권연구소 소장, 법적 개선 강조 “플랫폼 노동은 알고리즘에 의한 관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알고리즘이 일감 배분과 보수 등을 결정하지만 그 결정 기준을 외부에서 알긴 어렵죠.” 장귀연 노동권연구소 소장이 2월 12일 경향신문 사옥에서 과 인터뷰하고 있다./강윤중 기자 장귀연 노동권연구소 소장은 지난 2월 12일 <주간경향>과의 인터뷰에서 스마트폰의 앱을 ‘플랫폼’ 삼아 일감을 얻는 플랫폼 노동의 노동조건이 불안정하고 불투명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고리즘’에서 찾았다. 장 소장은 국가인권위원회의 ‘플랫폼 노동 종사자 인권상황 실태조사’의 코디네이터를 맡아 올해 1월 조사 결과를 발표한 플랫폼 노동 전문가다. 장 소장은 “우버 같은 호출형 플랫폼의 경우 운전자의 별점이 특정 점수 이하로 내려갈 경우 콜을 주지 않는데 어떤 기준으로 벌점이 축적되는지 알기 어렵고, 쿠팡플렉스도 건당 보수가 매일 다르게 공지되는데 어떻게 변할지 몰라 노동자는 불안해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크몽·오투잡 등 프리랜서가 자신의 채용 조건을 제시해 이용자의 선택을 받는 중개형 플랫폼에서는 자리 배치나 후기와 별점으로 나타나는 평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장 소장은 “중개형 플랫폼에선 앞에 노출되느냐 뒤에 노출되느냐가 일감을 얻는 데 결정적인데, 실제 추천순 정렬 등으로 필터링해보면 그 순서대로 되지 않아 또 다른 기준이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인공지능적 기술에 의한 또 다른 종속” 장귀연 소장은 플랫폼 노동의 확산과 함께 사용자가 노동자를 통제하는 방식이 사람의 직접 지시에서 데이터와 알고리즘에 의한 통제로 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알고리즘이 결정하는 기준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노동자는 자발적으로 노동강도를 높이게 된다. 언제 좋은 콜이 뜰지 몰라 늘 지켜봐야 하고, 좋은 평점을 받기 위해 ‘갑질’에도 제대로 대응하기 어렵다. 중개형 플랫폼은 고객의 응답시간도 평가하기 때문에 문의가 있으면 빠른 시간에 답해야 한다. 장 소장은 이를 “컨베이어 벨트와 같은 인공지능적 기술에 의한 또 다른 종속 상태”라고 표현했다. 플랫폼 노동자는 개인사업자로 분류되면서도 자기 사업이 아닌 오직 노동만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특수고용 노동자에 속한다. 하지만 보험설계사·학습지 교사 같은 전통적인 특수고용 노동자에 비해 플랫폼 노동자는 더 짧게 단속적으로 일하고, 여러 플랫폼을 사용해 누가 사용자인지 특정하기 쉽지 않다. 플랫폼 노동은 노동 불안정화의 ‘끝판왕’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1월 1일 발효된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AB5’ 법안이 주목을 받고 있다. 이 법은 우버 기사처럼 기업과 계약을 맺고 일하는 사람도 일정 조건을 갖추면 고용된 직원으로 인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핵심은 노동자·사용자 관계의 부정을 사용자 측이 입증하도록 한 것이다. 장 소장은 “지금까지 소송에서 노동자가 고용관계에 있음을 입증해야 했지만 이 법은 고용계약을 맺지 않아도 그 기업을 위해서 일하면 일단 사용자·노동자 관계로 간주하고, 그렇지 않다는 점을 사업자 측이 입증하도록 해 노동자의 부담을 크게 줄였다”고 평가했다. 장 소장은 “한국에서는 노동자성을 판단할 때 직접 지휘 감독했느냐가 중요한 기준이지만 지금 같은 기술 시대에서는 직접 지시하지 않아도 통제가 가능하다”면서 “알고리즘에 의한 통제 역시 사용자의 지시나 통제로 보는 법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표지 이야기
이전1
2
3
4
다음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