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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견으로 보지 말아주세요” 두 장애인의 결혼 분투기
- 2013. 02. 06 15:35 화제
- ‘결혼 소식’은 반갑게 전해질 때가 많다. 결혼을 당연시하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추세지만 두 사람이 힘을 합해 한 가정을 꾸리기로 선택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한 사람이 장애인의 경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게다가 장애인끼리의 결혼이라면 더더욱.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데, 어떻게 배우자나 가족을 돌볼 수 있을까. 얄팍한 전제들을 뒤집어보면 사실 장애인끼리의 결혼이야말로 ‘사랑과 신뢰’ 없이는 유지되기 힘든 관계임을 알게 된다. 적어도 영화 ‘나비와 바다’로 엿본 우영씨와 재년씨의 결혼 이야기는 그랬다. 2년에 걸쳐 이 커플이 만나 사랑하고 결혼에 골인하는 장면을 다큐멘터리 영화 ‘나비와 바다’에 담은 박배일 감독은 두 사람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고 했다. 그럼에도 장애인의 사랑과 결혼에 대해 알리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 “우영이 형과 같이 다큐멘터리를 공부했는데 둘 다 장애인에 관한 내용을 찍고 싶어 했어요. 당시 형을 재년 누나와 5년 넘게 사귀고 있었는데 왜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지 못하는지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어요. 그 후 놀이공원에 가서 프러포즈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결혼하는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한 거죠.” 장애인에게도 쟁취해야 할 권리가 있다면 원하는 곳으로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와 성별을 막론하고 성적인 존재로서 자신을 인정받을 권리가 아닐까. 장애인들에게 결혼은 그 의미만큼이나 부담도 크다. 결혼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반려자가 생기고 자신의 삶과 더불어 누군가의 삶을 계획하는 데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통계상 인구의 10%가량이 장애인이라고 한다. 하지만 독립적으로 경제활동을 하다가 연애와 결혼에 이르는 장애인은 극소수이다. 거동이 불편하거나 지적장애가 있으면 더욱 그렇다. 길에서 장애인과 일상적으로 마주치지 않는 것은 그들 대다수가 집에서 생활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장애 아동을 둔 어머니는 ‘죄인’이 되고, 성인이 되도록 늘 자녀를 돌봐야 하며 자신보다 자녀가 먼저 죽는 것이 차라리 맘이 편하다고 말한다. 장애인의 이동과 사회활동을 돕는 활동보조인 등의 제도가 있지만 제한적이며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장애인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장애 자체가 아니다. 장애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편견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감옥이다. 장애인에게도 보통 사람들과 똑같은 욕구가 있고 사랑도 할 수 있는데 이를 범죄라도 되는 양 싸늘하게 보는 이들도 많다. 8년 차 커플 우영씨와 재년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 달에 한 번 어렵게 만나 카페에서 데이트라도 할라치면 그들에게 어김없이 불편한 시선이 쏟아졌다. 갇힌 공간을 박차고 나온 두 사람은 탁 트인 놀이공원, 산책로, 복지관 등에서 데이트를 했다. 연애 기간이 길어지자 각자 집으로 돌아갈 걱정 없이 마음 놓고 함께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우영씨가 결혼에 대한 강력한 의지와 끈기로 망설이는 재년씨를 설득했다. 우리, 이렇게 결혼했어요 놀이공원에 가서 도시락을 나눠 먹는 등 두 사람의 데이트는 여느 커플과 다를 바 없이 로맨틱하다. 의사 표현은 우영씨가 훨씬 적극적으로 하는 편이지만, 말이 별로 없는 재년씨도 곧잘 애교를 표현한다. 휠체어를 탄 우영씨와 똑바로 걷기 힘든 재년씨. 두 사람이 서로의 속도에 맞춰 느리게 걸어가는 뒷모습이 불편해 보이기보다는 아름다운 까닭이다. 물론 연애하는 데도 불편함은 많았다. 데이트를 앞두고 도와줄 사람이 없으면 우영씨는 혼자 밥을 차려 먹고, 샤워를 하고, 옷을 입는 과정이 힘겹다. 우영씨는 전형적인 ‘부산 사나이’다. 프러포즈도, 청혼도 사람들 앞에서 화통하게 하고 “넌 나 없으면 결혼도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재년씨가 자신에게 올 것임을 확신했다. 재년씨는 오래도록 답을 하지 않았다. 왜냐고 이유를 물어도 별반 대답을 하지 않던 그녀의 속내는 결혼에 대해 고민해본 여성이라면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건강한 몸으로도 시댁에서 살림하기가 쉽지 않은데 장애가 있는 몸이니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댁 식구들에게 부담을 지울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랜 침묵 끝에 재년씨가 결혼을 승낙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결혼을 받아들인 이후부터는 재년씨에게 아무런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가을에 결혼하고 싶다”라고 해도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우영씨의 어머니는 “몸은 좀 건강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하면서도 재년씨를 며느리로 맞아들였다. 결혼식을 앞둔 재년씨는 장애인 성교육 비디오를 보았다. 전문가라는 사람이 나와서 “테크닉보다는 서로의 사랑이 중요하다”라며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이른바 ‘결혼 적령기’에 들어선 이들이 실질적인 성에 관련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통로가 많지 않듯이 성은 아직 ‘드러내 말하기 힘든’ 부분이다. 하물며 장애인의 성은 오죽할까. 재년씨는 말없이 화면만 바라보았다. 마침내 결혼식 날이 밝았다. 곱게 화장을 하고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재년씨는 우영씨의 손을 맞잡고 환하게 웃었다. 그런데 아뿔싸, 주례사가 압권이다. “성경에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라’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다음에 또 성경에서 명명하기를 ‘복종하라’라는 단어도 많이 나옵니다. 무조건 따라가야 하는 것이 ‘복종’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경외하라’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공경하고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요즘 드라마에 보면 아내가 남편에게 베개를 집어 던지고 어떤 경우엔 남편의 뺨을 치기도 하는데, 이건 아주 좋지 못한 것입니다. 남편을, 즉 주인으로서 공경하고 존경하고 두려워해야 하는데….” 아무리 보수적인 교회에서도 이런 말을 대놓고 하지는 않는다. 수천 년 전의 경전을 문자 그대로 적용한다는 게 곤란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요즘은 듣기 힘든 일방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주례사였다. 공식적으로 ‘기혼녀’가 된 재년씨의 실망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자그마치 첫날밤에 남편이 한다는 말인즉슨 “아줌마가 뭐냐고? 남편과 시어머니가 있고, 시댁 식구들의 눈치를 봐야 하고, 남편한테 밥을 해줘야 하고, 남편이 일하러 가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며, 남편 걱정을 해야 하는 그런 게 바로 아줌마다. 다른 건 몰라도 오빠한테 온 것 후회하지 않게 해줄게”였다. 영화 ‘나비와 바다’는 여기에서 끝나버린다. 관객들은 졸지에 재년씨가 처한 현실에 마음을 졸이며 그녀의 삶을 걱정하게 됐다. 그리고 2년이 지났다 두 사람이 결혼에 이르는 과정은 영화 ‘나비와 바다’에 담겼고 결혼이라는 과정의 이면에 숨겨진 불합리함을 드러내며 호평을 받았다. 그렇게 2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부산에서 만들어진 영화로는 이례적으로 전국 개봉까지 하게 됐다. 그간 부부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기자가 구구절절 질문을 써서 보냈고, ‘나비와 바다’를 만든 박배일 감독이 재년·우영씨 부부를 찾아가 직접 인터뷰했다. 재년씨는 의사소통이 쉽지 않아 박 감독이 질문을 하면 우영씨가 다시 설명해주고 들은 내용을 다시 확인받는 식으로 진행했다. 연애 시절 데이트하는 모습에서 설렘이 무척이나 잘 느껴졌는데 후반으로 갈수록 말도 웃음도 잃어가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결혼 앞에서 망설이는 심정, 짐작할 수 있었고요. 결혼 앞에서 누구라도 계산기를 두드리게 될 텐데 재년씨로서는 얻을 것이 ‘사랑’밖에 없었잖아요. 조금이라도 재년씨의 삶이 행복해졌다면 다행이겠지만요. 요즘 어떠세요? 재년 지금은 전업주부예요. 결혼 전에 무궁애원(장애인복지시설)에서 일할 때가 좋았어요.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직접 돈을 번다는 게 좋았고 아침저녁으로 일을 다니면서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어울릴 수도 있었거든요. 지금은 제가 집안일을 잘 못해서 대부분 어머님이 해주시니까 미안한 마음이 커요. 가끔씩 오빠가 미울 때(말을 얄밉게 할 때)가 있지만 나를 아끼고 좋아해줘서 고마워요. 영화가 완성되고 시일이 꽤 지났는데, 봤을 때 어떤 마음이 드셨어요? 재년 저는 ‘나비와 바다’보다 ‘내 사랑 제제(박배일 감독의 단편영화)’가 더 좋았어요. 이유는 ‘내 사랑 제제’에서 제가 더 예뻐 보였거든요. 영화 안에서 갈등하는 저의 모습을 보고 ‘내가 진짜 저때 저랬을까?’ 생각했어요. 하지만 만약 그때 갈등을 하지 않았더라면 후회했을 것 같아요. 갈등한 이유는 결혼 이후의 제 모습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거든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듯한데, 결혼하고 나니 좀 편해졌지요? 우영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지 않습니까!(웃음) 그 정도로 자신이 있었습니다. 제제가 날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결혼할 거라 믿고 있었죠. 단지 결혼이라는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고 제제나 제가 장애가 있어 걸리는 부분도 있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조금 겁나서 피했던 것뿐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었어요. 오히려 지금이 많이 두렵습니다(한숨).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늙고, 늙으면 죽는데 그것까지 생각하다 보니까…. 솔직히 제가 제제를 챙길 때가 많거든요. 지금처럼 (인터뷰에) 의사소통이 힘들 땐 제가 나서야 하고 나이 차가 많아서 어린 제제에게 맞추다 보니 사람들에게 나잇값 못한다는 소리도 많이 들어요. 나중에 제제가 혼자 됐을 때 어떻게 살아갈까, 그런 걱정도 가끔 듭니다. 결혼 전보다 결혼 후에 둘이 있을 때 사소한 걱정들이 많아지고 두려워져요.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 안 좋은 소리를 듣지는 않을까, 걱정 안 했나요? 우영 장애인이 자신과 같은 장애인과 결혼을 한다는 내용의 영화를 비장애인들이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요? 막말로 ‘병신’ 어쩌고 그러지 않을까요? 사회의 시선이 곱지 않으니까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결혼을 하면 헌신이라는 관점에서 좋은 영화나 미담거리가 될 것 같은데, 장애인들끼리의 결혼을 과연 좋은 시선으로 볼까, 하고 걱정했어요. 무궁애원에서 열심히 일하는 제제의 가슴에 공연히 불을 질러서 데리고 오는 나쁜 놈으로 보지는 않을지 두렵기도 했고요. 사회의 시선이 예전보다는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까지도 장애인이라 하면 좀 그렇게 보니까요. 어머니와의 가사 분담은 어떤 식으로 이뤄지고 있나요? 우영 가사 분담이라 말하긴 좀 그렇고요. 거의 어머니가 하세요. 어머니가 가사를 안 보시면 일이 안 돌아가니깐. 예를 들어 10개의 일이 있다 하면 9개의 일은 어머니가 하고 1개의 일은 제제가 한다고나 할까요? 재년씨를 인생의 파트너로 점찍은 이유나 계기는 무엇인가요? 우영 내가 눈이 삐었지(웃음). (재년씨도 옆에서 마찬가지라고 했다) 만날 맞고 살아요(웃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잖아요. 제가 휠체어를 타니깐 아내는 걸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물론 직업학교에는 제제보다 몸이 더 건강한 친구들도 많았지만, 결국 제제를 파트너로 점찍은 이유는 정말 착하기 때문이죠. 이후 영화 계획은요? 우영 제가 촬영하던 작품이 있었는데 더 진행하기가 힘들어졌어요. 끝까지 완성을 해보고 싶어요. 직장에 다니면서 영화를 제작하는 게 힘들지만 계속하고 싶네요. 작품의 수준을 떠나서 끝까지 제 손으로 장편영화를 완성하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등장인물 1 결혼하고 싶은 남자_우영 돌이 지날 무렵 앓은 뇌성마비로 목발에 의지하게 됐다. 도전을 좋아하는 성격의 소유자로 연극 활동에 매진하던 중 스물여덟 살에 사고로 머리를 다치고 휠체어에 의존하게 된 뒤 공부해 고입·대입 검정고시 패스는 물론 정보처리산업기사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이후 다큐멘터리 제작에 흥미를 느껴 촬영 작업에 열심이다. ‘장애인이 직접 장애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진실된 것’이라는 믿음으로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 활동에 몰두하고 있으며, 8년간 사랑을 키워온 재년씨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제제에게 가는 길’(박배일·강우영 공동 연출. 제제는 우영씨가 재년씨를 부르는 애칭이다)을 만들었다. 재년과의 사랑은 2003년에 시작됐다. 장애인직업전문학교에서 공부를 지도하다가 사랑의 감정이 싹텄다. 띠동갑이라는 나이 차와 휠체어에 의존해야 하는 몸 상태를 극복하고 알콩달콩 사랑을 키우면서 그녀와 함께라면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생겼다. 한 달에 한 번, 한정된 곳에서만 만나야 하는 데이트를 얼른 끝내고 언제나 함께 있고 싶은 열망으로 시작된 프러포즈. 마흔이라는 나이와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녀의 답은 들을 수 없었지만 프러포즈는 계속됐다. “오빠가 다 책임질게”, “너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게”, “나만 믿어라”라고 몇 번이고 외쳤다. 그에게 결혼은 ‘행복한 미래’이자,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홀로서기를 위한 필연적 과정’이었다. 등장인물 2 결혼을 망설이는 여자_재년 뇌병변 1급 장애가 있다. 내성적이지만 명랑함을 잃지 않는 성격. 데이트하는 날이면 아침 일찍 일어나 화장을 하고, 도시락을 싸는 등 부지런을 떨었다. 스물셋이 되던 해에 처음으로 들어간 직업학교에서 만난 우영은 든든했다. 때론 오빠처럼, 때론 아빠처럼 이것저것 챙겨주는 그의 친절함이 좋았다. 그렇게 서로 의지하며 평생을 함께해도 좋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프러포즈를 받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결혼이 현실로 다가오자 핑크빛 환상이 걷히고 두려움이 밀려왔다. 결혼은 낭만적인 이벤트가 아니었다. 둘이서 알콩달콩 꾸릴 가정에 대한 설렘도 잠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 하는 현실 앞에서 ‘아내’와 ‘며느리’라는 역할에 부담이 느껴졌다. 장애인 부부의 삶을 걱정하는 주변의 우려 섞인 시선도 자꾸만 의식됐다. 자신도 잘 가누지 못하는 몸으로 결혼생활을 잘 해나갈 수 있을지 겁이 났다. 그래서 좀처럼 답을 주지 못했다. 결국 저돌적인 구애에 못 이겨 결혼을 결정했지만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재년에게 결혼은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삶’인 동시에 ‘헤쳐나가야 할 또 하나의 두려움’이었다. Mini Interview ‘나비와 바다’를 만든 박배일 감독 Q 지방에서 영화를 만드는 것만 해도 쉽지 않은데, 전국 개봉에 해외 상영까지 좋은 성과를 내신 듯해요. 장애인의 삶과 가부장적 결혼제도의 문제는 독립영화에서는 해묵은 주제지만 함께 토론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서 불편한 현실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편집했어요. 다큐멘터리가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는 거니까, 지역에서도 할 이야기가 많아서 큰 어려움은 없어요. 단지 관객들이 이 현실을 어떻게 봐줄지 설레고, 두렵습니다. 대만에서도 상영했는데 영화를 보고 많은 분들이 장애인이 살아가는 모습 자체를 내밀하게 보여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시더라고요. Q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요? 카메라 때문에 더욱더 시선을 받게 되면서 이를 불편해하는 재년씨와 우영씨를 2년간 지켜보는 것이 정말 힘들었어요. 그들은 비장애인과는 달리 태어날 때부터 몸이 비틀리고 다리에 장애가 있어 휠체어로 이동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살아왔어요. 비장애인의 경우 지나다가 다른 사람의 시선을 받으면 기분이 나쁘다며 싸움이 일어나기도 하잖아요. 그만큼 남의 시선은 그 자체로 폭력이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런 폭력을 평생 당해온 이들이 카메라 때문에 더 많은 시선을 받게 되는 상황이 되자, 저 역시 고통스러웠어요.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통해 제가 말하려 했던 의도를 이해하고, 자신의 삶이 변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뿌듯하죠. Q 영화를 통해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은 무엇인가요? 우리 사회가 비장애인만을 위한 환경으로 만들어져 있잖아요. 장애인이 가족이란 울타리에서 벗어나 우리와 함께 부대끼며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면 어떤 것이 필요한지 이야기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가족 부양의 역할을 수행하고 어머니가 가사와 양육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에도 문제를 제기하고 싶어요. 누구나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계획하고 실천으로 옮기고 싶은 욕망이 있죠. 아내들도 “나도 하고 싶은 게 있단 말이야. 그러니 내 욕망도, 네 욕망도 실현시킬 수 있는 우리 가족의 모습을 상상해보자”라고 당당하게 외쳐야 합니다. 당연한 것을 요구해야 하는 현실이니까요. 설령 ‘정상’에서 벗어났다 해도 각자 나름의 모양과 가치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셨으면 해요. <■글 / 위성은(객원기자) ■사진 제공 / 시네마달 ■취재 협조 / 오지필름>
- 휠체어 탄 ‘미모의 여의사’ 류미씨의 좌충우돌 분투기
- 2011. 10. 07 11:33 화제
- 세상에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 선 사람들이 있다. 겉보기에는 아무 이상 없어 보이지만 신체적(때론 정신적) 기능과 능력이 평범한 사람들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을 뜻한다. 10분 이상 서 있을 수 없고, 30분 이상 걷지 못하는 의사 류미씨도 여기에 속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중간에 선 그녀의 고군분투 의사 도전기를 공개한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날, 인터뷰를 위해 찾은 종로구 부암동의 한적한 골목에 위치한 초콜릿 전문점은 류미씨(37)의 단골 카페다. 이곳은 주차를 한 후에 골목길을 여러 번 돌아와야 하기에, 다리가 불편한 류미씨가 자주 찾기에는 마땅치 않아 보였다. 그런데 창문 너머로 인적 드문 골목에서 짐을 잔뜩 짊어진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추석을 맞아 현재 근무지인 경남 창녕에서 인천의 부모님 댁으로 가기 위해 짐을 바리바리 싸서 올라온 듯 보였다. 차에서 내려 카페로 들어서는 그녀는 휠체어를 타거나 목발을 짚지도 않았고 절뚝거리지도 않았다. 남들처럼 서 있고, 걸을 수 있는, 겉보기엔 너무도 평범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여기까지는 어머니가 태워다주셨어요. 인터뷰가 끝나면 친구가 데리러 오기로 했고요. 워낙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어떻게든 이동 수단이 마련되더라고요. 너무 걱정 마세요(웃음).” 경남 창녕에 위치한 국립부곡병원에서 신경정신과 의사로 근무하고 있는 류미씨는 경상도 생활 1년 반 만에 유창한 사투리 실력을 자랑할 정도가 됐다. 이제는 표준어가 더 어색하다며 웃는 그녀는 경상도 억양과 표준어가 어색하게 섞인, 어눌한 듯 정감 넘치는 어투로 기자와 첫인사를 나눴다. 그렇게 구김 없이 편안한 인상의 그녀가 대학에 세 번 입학했고, 의사가 되기 위해 많은 길을 돌아와야 했던, 남들보다 더 할 말 많은 인생에 대해 담담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사고, 예기치 못한 통증 사건의 발달은 1991년 고등학교 3학년 때 학교에서 사고를 당하면서 시작됐다. 유명 특목고등학교에 다니며 중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던 그녀는 입시를 코앞에 두고 사고를 당해 한 달간 등교하지 못했다. 그녀는 아직도 그때의 사고에 대해 쉽게 털어놓지 않는다. 남들은 겪지 않는 특별한 사건이었고, 이를 다른 방법을 통해 세상에 알리고 싶은 마음도 있기 때문이다. “그다지 긴 이야기는 아니지만, 누군가에는 아주 특별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아직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구체적으로 생각한 것은 없지만 언젠가는 꼭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사건의 경위야 어찌 됐건 그 당시에는 어떻게 해서든 입시를 치러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성적은 이미 곤두박질친 상태였지만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는 부담감에 떠밀려 연세대학교 의생활학과를 선택했다. 두 발에 깁스를 한 채 휠체어를 타고 대입 시험을 치렀다. 결과는 합격. 목발을 짚고 버스와 택시로 등하교를 하며 시작한 대학생활은 몸이 불편한 신입생에게는 듣던 것처럼 낭만적이지도, 여유롭지도 않았다. 한 학기가 지나도록 목발을 뗄 수 없었고 불편한 몸으로 원하지 않는 공부를 하는 것도 곤혹스러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 상태가 정확히 어떤지 몰랐어요. 의사들 말로는 저와 비슷한 상태인 환자들이 각기 다른 증상을 보인다고 했어요. 전혀 통증을 못 느끼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아파서 걷지도 못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죠. 극과 극의 상황에서 제가 어느 정도의 통증을 느끼게 될지 의사도, 저도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어요.” 목발을 떼고 나서 처음 지하철을 탔을 때 그녀는 자신의 상황과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예전처럼 무심히 지하철을 탔지만 몸은 이미 예전의 몸이 아니었다. 10분이 지나도 자리가 나지 않자, 견딜 수 없는 통증이 밀려왔다. 전혀 아프지 않은 사람과 아파서 걷지 못하는 사람 중에 그녀는 중간쯤이라고 해야 할까. 류미씨는 10분 이상 서 있을 수 없었고 30분 이상 걷지 못했다. 그 시간이 지나면 아파서 걸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그녀의 병명은 ‘박리성 골연골염’으로 무척 낯설다. 사고로 연골과 뼈가 망가져 완쾌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 ‘아플 수도 있고, 아프지 않을 수도 있는 병’이다 보니 아무리 아파도 ‘장애등급’을 받을 수 없었다. 그녀가 겪는 통증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지도 않고 수치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서 객관적으로 증명해낼 길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두 다리 멀쩡한 젊은 여자가 엄살떠는 것처럼 보이기 십상이었다. 통증의 속성상 아무리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일지라도 당사자가 아니면 그 고통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소견이었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는 외로움.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통증에 대해 쉽게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슬퍼할 새도 없었고 좌절할 새도 없었죠. 슬픔보다 늘 통증이 앞섰거든요. 마음은 모호하고 육체는 명료해요. 슬픔 이전의 통증은 언제나 급박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를 만들어주었죠.” 한 학기 만에 휴학계를 낸 그녀는 마음을 추스르고 이과에서 문과로 진로를 바꿔 이듬해 서울대학교 불어불문과에 진학했다. 입학 시험 당시 휠체어를 탄 그녀의 모습을 모두가 기억하고 있었던 연세대학교 의생활학과와는 달리 서울대 불문과에서는 4년간의 대학생활 동안 그녀의 신체적 비밀을 알고 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버지가 외과 의사셨어요. 그럼에도 부모님께조차 제 상황을 정확히 알리지 못했어요. 대학교에 진학한 후부터 인천 집을 떠나 서울에서 혼자 생활했고, 가끔 만나는 부모님께 짐을 안겨드리고 싶지 않아서 말씀드리지 않았죠. 스무 살의 어린 나이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그 심정이 오죽했겠어요.” 아픈 발목이 인생의 발목을 잡다 일상적으로 생각하기엔 살면서 10분 동안 서 있고, 30분 동안 걸을 일이 그렇게 많은가라고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우리는 무심코 해왔던 일이기에 기억조차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늘 일어나는 일이다. 류미씨는 살면서 불편한 발목 때문에 난감하고 힘든 상황에 늘 노출되어 있다. 일단 버스, 지하철을 탔을 때 10분 만에 자리가 나지 않으면 난감해진다. 깁스를 한 것도 아니라 자리를 양보해주는 사람은 없다. 늦은 밤까지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못하는 일 중에 하나가 됐다. 그렇잖아도 택시 잡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10분 만에 택시를 탈 수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MT에 참가할 수도 없었고, 가족과 마트에서 장을 보는 것도 그녀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친구들과 팔짱 끼고 번화가를 거닐거나,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는 것도 꿈꿀 수 없었다. 류미씨는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나눠 인생을 리모델링해 살았다. 이렇게 구별을 짓고 나니 남들보다 활동 반경이 줄어들기는 했어도 생활하는 데는 크게 지장이 없었다. 친구들을 만나도 주로 영화를 보거나 커피를 마시는 등 활동성 없는 일을 주로 했다. 쇼핑도 인터넷으로 해결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아픈 발목이 끝내 그녀 인생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졸업을 앞두고 언론사 입사 시험을 치를 때였어요. 1차 작문 시험을 통과한 후 현장 취재와 기사 작성으로 치러진 2차 시험도 무난히 해냈는데, 마지막 3차 관문을 통과하지 못했어요. 1박 2일로 진행된 합숙 중 등산을 끝까지 마치지 못했거든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오래 걷지 못한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던 무모함이 만들어낸, 인생의 첫 탈락이었죠.” 그럼에도 이를 발판 삼아, 기자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재차 도전해 결국 「경향신문」에 입사했다. 그 후 3년간 편집기자로 활동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몸이 불편하다 보니 조직 생활에서도 자꾸만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게 됐다. 더구나 활달한 에너지가 많은 그녀에게 내근직인 편집 업무는 무난하지만 오래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격증을 따서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결심은 그녀에게 본격적인 제2의 인생 서막을 열어주었다. 진통제 50알로도 지울 수 없는 통증 “의대에 가겠다고 결심하고 나니, 주변에서 ‘붙기만 하면 길이 열릴 거다’라며 응원해주셨어요. 그중에는 의사도 많이 계셨지만 막상 제 상황을 정확히 모르셨기 때문에 저에게 꼭 필요한 조언을 해주지는 못하셨어요. 아버지도 ‘개업의는 힘들다’라고만 말씀하셨을 뿐이에요. 저 또한 실습이나 인턴, 레지던트 생활을 실감하지 못했던 터라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 짐작만 하는 마음으로 의대 진학을 준비했죠.” 그녀는 이과에서 문과로, 다시 문과에서 이과로 진로를 바꿔 27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가톨릭대 편입에 성공했다. 덕분에 예과 2년은 건너뛰고 본과 공부부터 시작됐는데, 문제는 본과 3학년 2학기 때부터 1년간 진행되는 병원 실습에서 불거져 나왔다. 실습은 말 그대로 병원 생활을 그대로 체험하는 것이기에, 회진을 돌고 수술방에서 참관을 하거나 스크럽(보조)을 선다. 각 과마다 사정은 달랐지만 보통 회진은 30분 이상이 기본이고 수술실에서 반나절 이상 서 있는 경우도 흔했다. 건강한 체력을 가진 젊은 학생들에게도 힘들고 고된 작업이었다. 때문에 류미씨에게 병원 실습은 ‘서기’와 ‘걷기’의 반복이었고, 통증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생활하는 데 불편하기는 해도, 견딜 수 없는 정도는 아니었어요. 하지만 병원 생활이 시작되면서 큰 벽에 부딪치기 시작한 거죠. 겉보기에는 멀쩡하니까 사람들이 저를 이해해주지 못했어요. 그때 처음으로 이럴 바에야 누가 봐도 몸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장애가 오히려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그렇다면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는 외로움은 없을 테니까요.” 실제 실습 도중 흉부외과 수술방에서 주임교수에게 “너보다 외팔이가 더 낫다”는 말을 들으며 쫓겨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상황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동기들 덕분에 불가능해 보였던 실습 과정을 어렵사리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더 거대한 산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99%의 합격률을 자랑하던 모교 인턴 모집에서 떨어지게 된 것이다. 몸이 불편하다는 진실, 거기에 당당할 수 없었던 그녀는 면접관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고시를 치르면 의사 면허가 주어진다. 진료 행위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개업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특별한 전공과목이 없던 터라, 의사 면허만 가지고 개업한들 성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대부분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거치는 수련의를 끝내고 ‘전문의’가 되는 것이 수순이다. 하지만 그녀는 번듯한 의사 자격증을 가지고도 취업을 할 수 없었다. 모교 인턴 모집에서 떨어진 후 다른 병원에 인턴으로 입사했지만 그마저도 녹록지 않았다. 그녀를 이해하고 도움을 주고자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았다. “어떤 레지던트는 ‘이거 먹고도 못 서 있느냐’리며 진통제 한 움큼을 들이밀기도 했어요. 통증과 제일 가까이에 있는 의사조차 제 통증을 이해할 수 없었던 거죠. ‘그걸 한꺼번에 다 먹어버릴까’ 그 순간에는 그런 마음도 들었죠. 하지만 제 통증은 진통제를 아무리 먹어도 진정될 수 없는 거예요. 전혀 소용이 없거든요. 그러니 그걸 누가 이해할 수 있겠어요.” 힘들게 시작한 인턴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또다시 도전했다. 이번에는 오래 서 있고 걷는 대신 앉아서 이동할 수 있는 ‘휠체어’로 병원을 활보했다. 하반신 마비가 더 낫겠다고 할 정도로 절망했던 그녀는 외려 ‘휠체어’에 앉으니 못할 것이 없었다. 회진은 물론, 수술방 참관도 어렵지 않았고 각종 처치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턴 생활 중 깨달은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한 발자국이라도 걸을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휠체어로 이동한 후 필요에 따라 서서 하는 의료적 행위도 할 수 있다. 막상 ‘휠체어’를 타고 보니 잠시라도 서 있고, 잠시라도 걸을 수 있다는 것이 그토록 고마울 수가 없었다. 우리는 모두가 ‘도전자’ 류미씨는 전쟁 같았던 인턴 과정과 레지던트 1년 차를 마치고 이제 ‘당직에서 자유로운’ 레지던트 2년 차에 들어섰다. 최근에는 한 언론사에서 진행한 원고 공모에서 우수상을 받고 「도전받은 곳에서 시작하라-휠체어 탄 의사 분투기」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하지만 이 책은 역경과 고난을 이겨낸 성공 스토리가 아니다. 그녀는 “앉아 있을 때는 통증이 전혀 없기 때문에 내가 다리가 아프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다”라며 “지금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라고 한다. 그녀의 말처럼 책 속의 류미씨는 고난을 만나 좌절하기도 하고, 역경을 재치 있게 뛰어넘기도 한다. 그리고 때론 함정 속에 퐁당 빠지기도 한다. 구구절절한 감정적 호소 없이, 유쾌하고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녀는 비단 신체적 통증이 아니더라도 이 시대 누구나 아픔을 가지고 있고, 여러 가지 통증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이 모든 것을 극복해 나가는 ‘도전자’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한다. 류미씨는 ‘전문의’가 되는 단기간의 목표 외에 작가로서의 의욕도 감추지 않았다. 책은 물론 인터뷰 내내 함구했던 고3 시절 당한 사고에 대한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의 중요한 소스가 될 것이다’라며 끝까지 말을 아꼈다. 한편으로는 다양한 인생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정신과 의사로서의 생활도 글로 옮겨 놓고 싶다. 인터뷰를 하다보니 그녀에게 궁금한 것이 생겼다. 세상에는 하루 종일 의자에만 앉아 있는 직업도 많은데 그녀는 왜 굳이 기자나 의사와 같이 활동성 많은 직업을 선택한 것일까? “주변에서는 ‘네가 몸이 불편하니까 이 정도 하고 산다’라고들 해요. 불편하지 않았으면 더 많이 돌아다니며 살았을 거라는 거예요. 주변 반응이 그 정도니, 마음껏 돌아다니지 못하는 저는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편집기자나 정신과 의사를 선택한 것도 제 몸 상태를 어느 정도 감안한 거죠.” 인터뷰를 마치며 편집기자로 3년 동안 근무했던 경험을 살려 자신의 기사에 어울릴 만한 제목으로 어떤 게 좋겠냐고 물었다. “뭐, 특별한 게 있겠어요? ‘미녀 의사’ 정도가 좋겠네요. 아, 이건 정말 농담입니다(웃음).” 아닌 게 아니라, 그녀는 예뻤다. 큰 눈에 하얀 피부도 그랬지만, 오랜 시간 아픔과 함께하면서도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지 않았던, 긍정적인 마음이 그녀를 더 맑고 예쁘게 빛내주고 있었다. 장애는 Disable 아닌 Challenged이다 “장애인은 영어 ‘Disable’를 번역한 말이다. 지금 영미 지역에서는 이 말을 쓰는 사람을 미개인 취급한다. 장애인은 뭔가를 ‘할 수 없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쓰기 시작한 용어는 ‘Challenged’이다. 그들은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도전받은’ 것이다. ‘도전받았다’고 생각하면 용기가 생긴다. 어떤 경지에 이르면 용기를 넘어서 의욕 같은 것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런데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면 의욕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도전 받은 자’가 희망을 바라보는 말이라면 ‘할 수 없는 사람’ 은 절망을 내재하는 말이다. 이렇게 볼 때 내 상황에 적당한 단어를 찾자면 ‘중간 도전인’ 정도가 될 것이다. 책 「도전받은 곳에서 시작하라 - 휠체어 탄 의사 분투기」 중 <■글 / 진혜린(객원기자) ■사진 / 이성원 ■장소협찬 / MONOS(02-391-1109)>
- 122kg에서 95kg으로, 신용칠씨의 눈물겨운 다이어트 사투기
- 2011. 02. 28 15:55 화제
- ㆍ“20년 동안 방 안에서만 살았는데…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느낌이에요” 122kg의 엄마가 침대에서 좀처럼 내려오질 않는다. 밥도 침대에서 먹는다. 거실까지 걸어서 나오는 건 1년에 한 번 있는 연중행사다. 곧 있을 딸의 상견례에는 큰어머니나 이모를 대신 참석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런 엄마를 보다 못한, 딸은 ‘초고도비만 엄마’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굳은 결심을 하게 됐다. 딸이 보낸 눈물의 편지가 만들어낸 기적 약 3개월전, 122kg의 초고도비만 엄마 신용칠씨(55)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야겠다는 생각을 한 사람은, 둘째 딸 유소영씨(29)다. 올 5, 6월께 오랫동안 교제해온 남자친구 부모님과의 상견례를 앞두고 있는 그녀. 하지만 엄마는 혼자서 열 발자국도 걷기 힘든 초고도비만 환자다. 하루 종일 침대에만 누워 있으며, 밥도 침대에서 먹는다. 방 안에 있는 화장실만 겨우 다닐 뿐, 혼자서 방 밖으로 나오는 일은 드물다. 엄마는 그렇게 무려 20년이나 살아왔다. 때문에 엄마는 조만간 있을 소영씨 남자친구 부모님을 만나는 자리에 큰어머니나 이모를 대신 참석하게 할 참이다. 이런 엄마를 보고 있던 소영씨는 참을 수 없는 짜증과 우울함을 느껴 눈물을 흘리며 방송국에 편지를 썼다. “저에게 엄마가 없는 것도 아닌데 남들한테 비웃음 받기 싫고, 창피하다고 큰어머니께 상견례를 대신 가라니요. 이런 현실이 정말 짜증이 나서 울면서 방송국에 사연을 보냈죠.” 사연을 접수한 MBC-TV ‘기분 좋은날’ 제작팀은 신용칠씨와 가족에게 “트레이너와 함께 계획적인 다이어트를 해보자”고 제안했고, 가족은 뜻밖의 선물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문제는 ‘엄마가 과연 이 도전을 해낼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신용칠씨는 “딸이 방송국에 사연을 보내서 전문 트레이너께 운동을 배울 수 있게 됐다고 하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죠. 딸들의 성화에 하는 수 없이 따라나서기는 했는데, 몇 번을 포기하려고 했어요. 너무 힘들어서 매일 아이처럼 큰 소리로 울었어요.” 육중한 몸으로 스스로 열 발자국도 걸은 적이 없는 신용칠씨. 처음 운동을 시작하고는 걸음마부터 배워야 했다. 처음에는 세 발자국을 떼고는 힘들어서 주저앉기 일쑤였다. 하지만 트레이너와 주변 사람들의 끊임없는 격려 덕분에 일어나서 걸었다. 이런 엄마를 보며 딸들은 엄마가 운동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122kg일 때 둘째 딸이 찍어준 사진(왼쪽). 결혼 초의 날씬했던 모습. 큰딸 유영주씨(31)는 “속으로는 ‘설마, 엄마가 끝까지 할 수 있겠어’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며 “하지만 그래도 엄마한테 ‘두 딸들 시집갈 때 결혼식장에는 가봐야지’라고 격려를 하면서 엄마에게 파이팅을 외쳤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운동 시작 후 7주 만에 무려 23kg을 감량한 것. 그리고 처음과는 달리 이제는 웃으면서 걸어 다닐 수 있게 됐다. 딸이 눈물로 쓴 편지가 만들어낸, 기적 같은 일이었다. “방송 후, 많은 사람들이 절 알아보시는 거예요. 시장이나 마트에 가면 모르는 사람들이 저를 알아보시고는 ‘살이 많이 빠졌다. 열심히 하라’고 격려도 해주시고, 칭찬도 해주세요. 20년 동안 방 안에만 갇혀서 세상과 단절된 채 혼자 살아왔던 저를 ‘스타’처럼 알아봐주시니 정말 기분이 좋은 거예요. 그동안은 우울증까지 겹쳐서 잔뜩 인상을 쓰고 살았는데, 이제는 그 우울증도 싹 없어졌어요.” 가족간에 웃음과 대화가 생겼다 방송에 출연하고 살이 빠진 뒤 많은 것들이 변했다. 일단 고질적으로 그녀를 괴롭히던 ‘통증’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동안 통증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고 살았던 20년의 세월이 아깝기만 하다. 신용칠씨가 처음 살이 찌기 시작한 건, 20년 전이다. 척추와 자궁이 좋지 않아 수술을 한 후 그동안 해오던 음식 장사 때문에 제대로 운동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가게에 앉아 있었던 게 화근이었다. 수술 후에도 계속 통증에 시달렸는데, 운동을 하지 않고 약만 먹으면서 참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 뼈가 으스러지는 것 같은 통증이 찾아왔다. 정말 참기 힘들었다. 그 통증 때문에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침대에 누워 있는 생활이 시작됐고, 유일한 낙인 먹는 걸로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인터뷰를 위해 스튜디오를 찾은 신용칠·유재완 부부와 두딸 유영주·유소영씨의 즐거웠던 사진촬영 모습. “제 키가 153cm인데, 가장 심할 때는 140kg까지 나간 적이 있어요. 그때는 거의 인생을 포기했었고, 너무 아파서 죽으려고 몇 번이나 결심을 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신기한 건 살이 빠지니까 그 지독했던 통증이 사라졌다는 거예요. 통증이 없으니까 이제야 사는 것 같아요. 살이 더 빠지면 지금보다 더 괜찮아질 거라니까 열심히 더 빼야죠.” 방송에 출연하기 전까지는 가족 중 아무도 신씨에게 ‘운동’을 권유할 생각을 못했다. 체중이 너무 많이 나갔고, 아예 걷는 것조차 불가능했기 때문에 운동을 통해서 살을 뺀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던 것이다. 유소영씨는 “방송국에 사연을 보낼 때도 ‘지방 흡입으로 살을 빼면 어떨까요’라고 제안했다”며 “하지만 방송국에서 여러 방면으로 알아본 결과 운동으로 살을 빼는 게 가장 효과가 좋다고 권유해, 그때서야 운동이 가능하다는 걸 알았다”고 말했다. 다이어트를 하고 난 뒤 신용칠씨에게 달라진 두 번째 변화는 ‘삶에 열정이 생겼다는 것’이다. 건조했던 부부 사이에도 열정이 생겼고, 단절됐던 가족간에도 대화를 하게 됐다. 그 전보다 서로 모여서 이야기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웃는 시간도 많아졌다. 신용칠씨는 “요즘은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딸의 상견례와 결혼식, 꼭 참석하겠다!” 20년 동안 침대에만 누워 생활한 아내를 대신해 모든 집안 살림과 병 수발을 해온 남편 유재완씨(58)의 고충은 이루 말하기 힘들 정도다. 어릴 때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봐온 유영주, 유소영 자매는 “아빠가 집안일을 하고, 학교 행사에 참석하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고 말했다. “다른 집들과는 완전히 달랐죠. 아빠가 엄마 역할을 대신했으니까요. 딸들 운동회나 졸업식에 꼭 오셨어요. 어릴 때는 친구들이 너희는 ‘엄마가 없냐’고 물어보기도 해서 상처를 받기도 했고, 엄마의 역할이 절실했던 청소년기에는 속상한 마음에 엄마를 원망한 적이 많았죠.” 공무원인 유재완씨는 딸들이 보기에도 대단할 정도로 가정에 충실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청소하고 빨래를 한 뒤 저녁 식사를 만들었다. 그리고 아픈 아내를 위해 침대까지 밥을 가져다주고, 아내가 비타민을 먹어야 한다며 매일 과일을 사다놓았다. 또 거동이 불편한 아내의 목욕과 기타 수발은 모두 남편인 유재완씨의 몫이었다. “아내가 아픈데 어떻게 하겠어요. 내가 해야지”라고 말하는 참 착한 남편이자 아버지다. 하지만 아내가 아파서 침대 생활을 시작할 무렵, 유재완씨도 중풍으로 하반신에 마비가 오면서 가족 전체에 위기가 오기도 했다. “당시에는 병원비가 한 달에 1백50만원씩 들어갔고, 그로 인해 생활비가 부족해서 고생을 많이 했어요. 오죽하면 ‘가족이 모두 죽어버릴까’라는 생각을 했겠어요.” 다행히 유재완씨의 중풍은 기적처럼 3개월 만에 나았고, 지금은 99% 정상인과 똑같은 상태다. 유재완씨는 “아내가 다시 일어서다니 꿈만 같고 20년 동안 고생한 보람이 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가족이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라며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었다. 유소영씨는 무엇보다 아빠가 행복해져서 기쁘다. “평소 언니와 아빠에 대해 많은 대화를 했어요. 아빠가 언제까지 저렇게 엄마의 수발을 들으면서 살아야 하는지 안타까웠거든요. 아빠가 당신 생활을 포기하면서 사는 게 무척 속상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아빠도 자신의 인생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유재완씨는 “결혼해서 아내와 신혼여행을 못 갔다는데 소원이 있다면 아내의 몸이 좀 더 좋아져 신혼여행을 가는 것”이라고 밝혔다. 신용칠씨는 “지난 20년 동안 못해본 많은 것들을 해보고 싶다. 예쁜 옷을 사 입고 자신 있게 돌아다니고 싶고, 자신이 받은 관심과 격려를 다른 사람에게도 꼭 전해주고 싶다”며 운동 전도사로 나설 계획임을 밝혔다. 유소영, 유영주 자매는 “지금처럼 엄마가 열심히 운동을 하고, 마음도 강해져서 두 딸이 시집갈 때 꼭 예쁜 한복을 입고, 엄마의 자리에 앉아 계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딸의 이 같은 바람에 신용칠씨는 “조만간 있을 작은딸의 상견례에는 꼭 가겠다”면서 “지금보다 더 날씬해진 모습으로 나가서 우리 딸의 기를 확 살려줄 테니, 기대해도 좋다”고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었다. 방송 이후 계속 다이어트를 해온 신용칠씨의 현재 몸무게는 95kg이다. 하지만 앞으로 80kg까지 빼는 게 첫 번째 목표고, 최종 목표는 60kg까지 빼는 것이다. 시작이 반이라고, 다이어트에 성공했더니 이제는 살 빼는 게 두렵지가 않다는 신용칠씨. 가족의 노력으로 20년 만에 다시 찾은 이들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스튜디오가 떠나갈 듯 유쾌하기만 하다. 초고도비만 신용칠씨의 다이어트 비법 (1)가족이 함께 운동을 시작했다 초고도비만 환자는 운동을 권해도 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가족이 말만 할 것이 아니라 함께해줘야 한다. 함께 걷거나 윗몸일으키기부터 하면 차츰 스스로 혼자 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신용칠씨는 집에서도 늘 남편, 딸들과 함께 윗몸일으키기를 했다. (2)가족이 꾸준히 칭찬을 했다 혼자 운동을 하는 건 정말 지겹고 힘든 일이다. 특히 초고도비만 환자라면 정도가 더 심할 수 있다. 이럴 경우 가족이 항상 전화를 걸어 따뜻한 격려의 말이나 칭찬을 해주고, 혼자 힘들게 운동하는 것이 아님을 느끼게 해준다. (3)무조건 강요하지 않았다 환자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채 무조건 운동을 강요하는 것은 역효과를 내기 쉽다. 그런 경우 오히려 “운동 힘들면 그만하자”, “그냥 옛날처럼 다시 초고도비만 환자로 방에서만 살자”고 강하게 나간다. 그럼, 다시 운동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낄 수 있다. (4)남편과 자식의 애정 표현이 중요하다 가족에게 버림받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아무것도 할 힘이 생기지 않는다. 스킨십과 “사랑해”라는 애정 표현은 초고도비만 환자에게도 무척 힘이 되는 말이다. (5)하루에 6시간씩 운동했다 신용칠씨는 오전에 3시간, 오후에 3시간 총 하루에 6시간을 운동했다. 걷기, 조깅, 윗몸일으키기, 웨이트트레이닝, 스트레칭 등을 꾸준히 반복했다. (6)식이요법을 철저하게 했다 과거에는 하루 종일 밥 한 솥을 다 먹어치웠던 신용칠씨. 하지만 운동을 시작하면서 샐러드와 닭가슴살로 먹는 양을 대폭 줄였다. 살이 빠지는 게 눈에 보였기 때문에 먹는 것도 즐겁게 줄일 수 있었다. 다행히 채소와 닭가슴살이 입맛에 잘 맞았다. 이와 함께 하루에 물 2L도 챙겨 먹었다. <■글 / 김민주 기자 ■사진 / 이성원>
- [재테크 지상특강]서점을 점령한 부동산 열풍과 ‘투기’의 허무함
- 2008. 06. 24 재테크
- 지난달의 피로는 수익률이 씻어줬다. 완벽하게 회복한 건 아니지만 속속 플러스로 돌아서는 중이다. 코스피 지수도 순항 중이다. 낙관적인 전망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공부나 한번 해볼 생각으로 들른 서점에서 구입한 부동산 관련 서적에는 영 손이 가지 않는다.부동산 책 하나, 시집 하나 과연, 대형 서점에는 부동산 투자 관련 서적이 쌓여 있었다. 하나같이 ‘부동산 투자로 부자 되라’고 말하고 있었다. ‘부동산으로 돈 번 사람들이 책 팔아서 또 돈 버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속표지에는 저자의 동영상 강의 CD도 붙어 있었다. ‘책 쓴 사람들이 강의로 또 돈을 버는구나’ 계속 배알이 꼴렸다. 그래도 이명박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분석해 적절한 투자법을 알려주겠다고 장담하는 책을 한 권 샀다. ‘10년을 준비하는 부동산 투자가 당신을 성공으로 이끌 것이다!’ 의심이 가시지 않았지만 어쨌든 샀다. 그리고 시집도 한 권 빼들었다. 정서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얄팍한 자기 위안으로써. “지금 난리죠. 저도 남는 시간엔 서점에 가요. 일주일에 한 번은 대형 서점에 가죠. 트렌드를 읽을 수 있으니까요. 굳이 사야 한다기보다는, 그냥 서서 20, 30분 정도만 읽어도 많이 볼 수 있어요.” 대개 이런 책의 수명은 길지 않다. 출판사는 ‘부동산 투자의 정석’을 알려주려고 책을 만드는 게 아니다. 시류에 맞는 내용에 ‘섹시’한 제목을 달아 단기간에 팔아치운다. 오늘 진열된 책이 2주 후엔 자취를 감추는 경우도 적지 않다. “책은 두 부류가 있다고 봐요. 기본적인 컨셉트를 정리하는 책이 있는가 하면, 당시에 화두가 되는 내용을 판촉용으로 쓴 책도 있습니다. 빨리 써서 단기간에 파는 거죠. 그런 책은 고수나 전문가가 쓰는 책이라기보다는 ‘짜깁기’한 책이 많아요. 전문가의 입장에서, 썩 도움이 되는 책은 아니죠. 오히려 안쪽 서고에 가보면, 과거에 발행된 책 중에 괜찮은 책들이 많아요.” 처음 사본 부동산 투자 지침서는 아직 공들여 읽지 않았다. ‘강북을 주목하라’ ‘한강을 따라 투자하라’는 소제목들은 왠지 내 얘기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복잡한 부동산 정책들을 공부하는 데 바쁜 시간을 쪼개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어떤 책이든, 대략의 컨셉트를 잡는 데는 도움이 될 겁니다. 인터넷 서점을 통해 부동산 투자 부문 베스트셀러부터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기껏 구입한 책을 아직도 읽지 않고 있는 건, 아직 관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 달에 70만원씩 하는 펀드 투자가 이제 약 7개월에 접어드는데, 종자돈이 모였을 리 만무하다. 속속 플러스로 접어드는 수익률에 가슴 쓸어내리며 소소한 재미를 느끼는 정도니까. ‘관심’은 지금부터다. “부동산 투자는 자금 규모가 크죠. 억 단위 이상의 투자가 주를 이루니까요. 기간도 오래 걸리고, 환금성과 유동성도 펀드에 비해 떨어지죠. 매물이 큰 경우에는 대출을 끼고 투자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이자 비용도 생각해야 하고, 매도했을 경우에는 양도세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자 비용까지 계산했을 때 수지타산이 맞는지까지 생각해야 하니까, 우성씨의 부동산 투자는 여유를 갖고 생각해보세요. 일단 종자돈부터 차분하게 마련하시고요(웃음).” 좋든 싫든 한국에서 부동산 투자를 무시할 수는 없다. 게다가 이건 ‘내집 마련 성공기’니까, 투자가치가 있는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공부부터 해야 하니까. 하지만 당장은 투자할 여력도, 지식도 없다. 수익률 체크합니다 지난달엔 질렸더랬다. 매일 요동치는 코스피 지수를 검색하는 것도, 환율이니 뉴욕 증시니 신경 쓰는 것도 다 귀찮았더랬다. “세계 증시의 흐름에 동참하는 기분도 쏠쏠하다”고 썼던 게 언젠가 싶었다. 정성기 매니저는 “그게 바로 주식 투자의 피로감”이며, “주가는 그럴 때, 자포자기 했을 때 오른다”고 말했다. 진짜 그랬다. “우성씨 수익률 어때요? 저는 원금 회복했던 걸요? 남미가 효자예요. 거의 다 올라왔어요. 거의 회복했고, 중국하고 인도는 아직 회복을 못하고 있네요.” 정성기 매니저는 포트폴리오를 공개했다. 중국에 투자하는 펀드만 -13.74%일 뿐,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투자하는 펀드가 11.54%, 남미는 20%를 넘었다. 정성기 매니저의 포트폴리오는 나와 다르지 않다. 중국과 인도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종목의 펀드가 플러스로 돌아섰다. 남미의 약진은 주목할 만했다. 17% 정도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현재 투자하고 있는 일곱 개 종목의 펀드 중 7개월 동안 17%의 수익률을 낸 것은 남미가 처음이었다. 정성기 매니저의 20%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것은 가입 시기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지난 5월 9일 코스피는 1,823.70으로 마감했다. 1,500선까지 하락했던 증시가 서서히 회복되고 있는 추세다. 마이너스 일색이었던 포트폴리오의 수익률이 속속 플러스로 들어서고 있는 것은 국내 증시의 호조 탓도 무시할 수 없다. 실제로 지금 투자 중인 미래에셋의 국내 주식형 펀드는 -20% 가까이 떨어졌다가 3% 정도로 회복됐다. 출시 당시 시장 자금을 모두 흡수하는 괴력을 보였던 ‘인사이트 펀드’의 수익률 회복은 그에 못 미쳤다. 정성기 매니저는 “인사이트 펀드는 중국 투자 비중이 높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올해 말까지의 주가지수 상승을 2,100~2,300 정도로 예측하되, 1,850~1,950 선에서는 한동안 횡보할 것”이라는 분석도 맞아 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은밀한 움직임. “지금 증권사에는 신규 채용이 많아요. 미래에셋 증권에서도 소매 영업하는 분들이 많이 늘어나고, 신규 인원 채용을 공격적으로 늘리고 있어요. 이것은 회사가 ‘2차 자금 대이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움직임은 시장으로 몰리는 자금을 모두 소화하겠다는 증권사의 의지로 풀이할 수 있다. 지난 10월의 ‘중국펀드 열풍’ 때 인원이 모자라 시장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던 증권사들이 이번엔 미리 준비하고 있다는 뜻이다. 증권사로 돈이 몰린다는 건, 투자자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큰 장이 곧 들어선다는 뜻이기도 하다. 부동산 전망은 조금 다르다. “부동산이 많이 떴다는 말이 들리는데, 특별히 호재가 있었던 지역의 얘깁니다. 강북의 일부 저평가 지역, 즉 노원, 도봉의 경우죠. 그 지역은 작년 말 대비 1억 가까이 올랐어요. 작게는 5천에서 1억5천까지 올랐죠. 이런 상황에서 다시 부동산으로 돈이 몰릴 것 같지는 않아요.” 6월 1일부터 실시되는 종합부동산세 부담은 ‘버블세븐’ 지역 고가 주택들의 매매 기류를 냉각시켰다. 참여정부가 실시한 8.31 부동산 정책의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부동산은 이런 상황, 주식 시장은 활황을 예측하는 사람이 많다. 자금이 어디로 흘러들어갈지를 예측하는 것은 개인의 몫이다. 사회 현상의 이면을 주목하세요 “아파트로 돈 버는 분들은 아파트로, 토지로 버는 사람은 토지로, 재개발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재개발로 벌죠. 지금은 아파트도, 재개발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에요. 하지만 하나의 트렌드를 말씀드릴 수는 있습니다.” 정성기 매니저는 FTA(한미자유무역협정) 체결 이후의 상황을 가정하고 말을 이었다. “FTA는 한국 경제를 수출 지향적으로 이끌어가겠다는 뜻입니다. 대신 농업을 일정 부분 포기하겠다는 거죠. 그렇다면 경작률이 줄어들고, 축산업도 쇠퇴할 가능성이 있어요. 시장을 내줬으니까,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죠. 그렇다면 이런 부분의 개발을 유도하는 정책이 나올 수 있어요. 까다로웠던 농지 취득 요건이 완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이건 시장에서 접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다. 핵심은 ‘농지에 투자하라’가 아니다. 한국에서 투자로 돈을 벌고 싶다면 ‘사회 현상’에 주목하라는 얘기다. “미국 남북전쟁 이후 서부 개척시대를 생각해보세요. 금광을 찾아서 떠나는 사람이 많아 ‘골드러시(Gold Rush)’라는 말도 생겼죠. 그때 돈을 번 사람들은 금광으로 떠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청바지 장사였죠. 어떤 현상이 벌어지면, 그 이면에서 법은 어떤 방향으로 바뀌고 또 돈은 어디로 흘러가느냐를 고민해야 합니다.” 질기고 때가 타지 않는 청바지는 광부의 작업복이었다. 광산을 향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작업복 수요가 늘어나는 것은 뻔한 일이지만, 남들이 다 광산 갈 때 청바지를 만들어 파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시각의 차이다. 현상을 좇는 사람과 이면에 주목하는 사람의 돈은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마련이다. “반사이득을 취할 수 있는 업종을 봐야 합니다. 남들이 다 펀드로 갈 때 같이 펀드에 투자해서 돈을 버는 것은 쉽지 않아요. FTA가 체결되면 당장 수출 기업들이 수혜를 보겠지만, 도시인에게는 농지를 개발할 수 있는 정부의 후속 조치가 뒤따를 것이라는 것도 예측할 수 있죠.” 재개발 열풍도 마찬가지다. 이미 시장을 휩쓸었다. 지분 가치 자체가 상승했기 때문에, 시세 차익은 줄어들었다. 투자 대비 비용을 고려하면, ‘썩 나이스한 투자는 아니다’ 라는 게 정성기 매니저의 분석이다. “농지 취득 자유화랄지, 이런 얘기들이 흘러나오고 있어요. 시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예측이 가능한 상황이죠. 관심을 가져야 해요. 관심이 없는데 갑자기 부자가 되는 경우는 없거든요. 부동산도 포트폴리오의 일부로 생각하고 장기투자 하셔야죠. 단기 시세차익을 볼 수 있는 부동산은 어디에도 없습니다.”“그래서 어디가 좋으냐”고 묻는 말에 대하여 부동산, 혹은 펀드로 돈을 벌고 싶다. 여유 자금도 있다. 그러나 공부하긴 싫다. 이런 경우는 대개 “그래서 어디가 좋으냐”고 묻는다. 고수익이 보장된 나라는 어디냐, 재개발 호재가 예상되는 곳은 어디냐. 콕 집어주는 게 속 시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이 얘기는 주식 투자보다 펀드 투자가 안전한 이유에 대해 설명했던 ‘정우성 기자의 내집 마련 성공기’ 2회 때 이미 언급한 원리다. 핵심은 정보다. “일반인들이 접하는 정보, 전문가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정보에 빠른 사람들은 이미 투자가 끝난 상황에서 일반인들에게 흘러가는 거죠. 개발 호재가 있다고 해도, 전문가들이 이미 이익을 보고 떠난 땅에 일반인들이 몰리게 돼 있습니다.” ‘효율적 시장 이론’은 정보가 시장에서 가장 빠르게 전파된다는 가설이다. 정보는 이미 예측치까지 시장에 반영된 이후에 일반에 전달된다는 뜻이다. 오를 만큼 오른 땅을, 오를 만큼 오른 종목을 전문가가 매도할 때 일반인이 산다. “내가 알았을 때는 이미 시세차익을 낼 수 없다는 겁니다. 2의 100제곱 정도를 거치고 난 뒤에야 정보가 시장에 나온다는 거죠. 책이나 언론, 미디어에 공개되는 정보들이 그렇습니다. 언론의 정보를 접하고 일반인들이 투자를 준비할 때, 전문가들은 이미 시세차익을 다 누리고 빠져나올 궁리를 하고 있는 거죠. 정보가 다 맞는 것도 아닙니다. 기획 부동산은 거짓 정보를 흘리기도 하죠.” 펀드도 마찬가지다. 코스피 지수가 1500대 중반에 머물러 있을 때, 정성기 매니저는 “지금 시장에 들어가시는 것도 괜찮다”고 누누이 말했다. 지난 5월 9일의 종합주가지수 1,823.70을 생각해봐도, 충분히 수익을 낼 수 있는 구간이었다. “전문가들, 펀드매니저들은 이미 매수 움직임에 들어가 있는 종목들에 실적이 반영되면 주가가 오르는 겁니다. 개미 투자자는 그때 움직입니다. 주가가 오르는 것을 보고, 더 오를 것을 기대하고 시장에 들어가는 거죠. 이번에도 보세요, 1,900선 넘어가면 시장으로 자금이 몰릴 겁니다.”‘투기’의 허무함에 대하여 그렇다면, 부동산과 주식으로 돈을 벌고 싶은 사람은 전문가가 되라는 얘긴가. 낡은 정보에 일희일비하는 ‘일반인’은 허무하다. “그래서 어떤 종목을 언제 사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자산 배분의 원칙에서 보면, 타이밍이나 종목은 중요하지 않아요. 수익의 3% 정도를 좌우할 뿐이죠. 그보다는 자산 배분을 어떻게 하느냐, 포트폴리오를 어떻게 짜느냐가 97%의 수익을 좌우합니다. 그래서 ‘지금 어디가 좋으냐’고 묻는 말은 ‘투기를 한번 해보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부동산이나 주식이나, 장기투자 하셔야죠(웃음).” 여유 자금을 더 불리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성급해선 안 된다. 펀드 투자의 포트폴리오를 구성할 때와 마찬가지로 접근해야 한다. 중국펀드 열풍이 불었을 때도 중국펀드의 편입 비율은 20% 정도로 제한했던 것처럼, 부동산도 다양한 종목을 고려해야 한다. “부동산과 펀드의 편입 비율을 어떻게 할 것인가. 부동산 안에도 토지, 상가, 아파트 등이 있는데, 어떤 분야에 투자할 것인가를 생각하시는 게 첫걸음이 돼야 합니다. 저 같은 경우 보세요. 작년에 8천 하던 아파트가 2년 만에 2억이 됐습니다. 펀드나 변액 보험도 수익을 많이 내지는 못했지만 1년 반 정도에 20~30%의 수익을 냈어요. 부동산에 올인하지도, 펀드에 올인하지도 않았습니다. 부동산에서 수익이 나기도 하고, 많지는 않지만 펀드가 수익을 내주기도 하는 거죠.” 소액투자를 시작하는 입장이라면 주식보다는 펀드가, 부동산으로 투자할 여력이 있는 경우는 ‘내집’ 혹은 3억 이하의 작은 토지 정도로 분배하는 게 좋다. 단기 시세차익을 노리고 ‘대형투기집단’의 일원이 될 필요는 없다. 자칫, 몸과 마음이 상할 수도 있다.■글 / 정우성 기자 ■ 사진 / 이주석, 이성훈, 경향신문 포토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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