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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총 7 건 검색)

[정태겸의 풍경](28)파주 덕진산성(2022. 05. 27 13:52)
2022. 05. 27 13:52 문화/과학
ㆍ철책을 가로질러 경기도 파주의 민간인 통제선을 넘었다. 이 길을 따라 마지막으로 북쪽을 향해 다녀온 게 어언 15년 전이다. 당시에는 개성 시내를 향해 가는 길이었다. 지금은 철책을 넘어 북으로 향하는 것이 요원하기만 하다. 다만 먼 발치에 서서 북쪽을 바라볼 뿐이다. 일반인에게는 아직도 쉬이 열리지 않는 민간인 통제구역이지만, 그 안에도 다녀올 만한 유적지가 꽤 많다. 경기도 파주 임진강변의 덕진산성이 대표적이다. 2014~2015년의 발굴조사 결과 이 산성은 삼국시대에 고구려가 처음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아주 오랜 기간 주요 방어시설로서 역할을 해왔다. 논두렁 곁에 차를 대고 일행과 산성에 올랐다. 대략 15분 정도. 덕진산성의 치에 닿았다. 치는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의 접근을 감시하는 망루와도 같은 기능을 한다. 발아래로 임진강이 굽이치며 남과 북을 가로지른다. 평온하기만 한 그 풍경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언제쯤 우리는 임진강을 가로질러 다시 북녘에 닿을 수 있을까. 강물은 말이 없고 바람에 펄럭이는 태극기만 굳건하다.
정태겸의 풍경
[원희복의 인물탐구]민족민주열사 명예추모위원장 박중기 “파주 휴전선 근처 민주공원 만들자”(2018. 06. 11 15:45)
2018. 06. 11 15:45 사회
6월은 ‘추모의 달’이다. 대통령이 참석한 6월 6일 현충일 행사는 군인·경찰·소방 등 주로 ‘공무원’을 추모하는 행사라면, 9일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열린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는 ‘공권력에 의한 피해자’를 위한 추모식이다. 민족민주열사·희생자란 1959년 이승만 정권에 맞서다 사형당한 조봉암 진보당 당수부터, 박정희 정권에서 숨진 인혁당 사건 희생자, 전두환·노태우 정권에서 숨진 학생·노동자·농민 등 680여명을 말한다. 스물일곱 번째인 이번 추모제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출발한 ‘학생열사’ 추모대열과 청와대 분수대에서 출발한 ‘노동열사’ 추모대열이 오후 3시 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만나 종교의식과 추모시(송경동 시인) 추모공연(춤꾼 이진희) 등을 이어갔다. 특히 이번 추모제는 박근혜 정권에 항거해 분신한 이남종씨와 세월호 유족과 함께 단식투쟁 중 암으로 숨진 김승교 변호사(전 통합진보당 최고위원) 등도 추모대상에 포함됐다. ‘죽은 자’에 관심 쏟는 진보운동 원로 이번 범국민추모제는 김중배 전 문화방송 사장,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총회장, 이석태 전 민변 회장, 함세웅 신부, 그리고 박중기 추모연대 명예의장 등이 명예추모위원장을 맡았다. 그 중 박중기 명예위원장(84)은 오랫동안 진보운동을 하면서도 특히 ‘산 자’보다 ‘죽은 자’에 대해 더 많은 애정과 관심을 쏟는 원로다. “1989년 이창복(현 6·15 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이 ‘자꾸 사람이 죽어가는데, 향이라도 피워주는 단체가 하나 있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으로 민족민주열사추모연대를 만들었어. 이창복이 초대 의장을 하다 나중에 국회의원 되니까 다른 사람에게 맡겼어. 그런데 그 사람이 ‘나는 가족 먹여 살려야 한다’면서 이 일을 나에게 다시 떠맡긴 거야. 그 친구가 그때 ‘친구가 많지 않나’ 하는데, 그 말은 ‘인혁당 사건으로 죽은 사람 모두 가까운 친구들이잖아’라는 말이지. 참 안 맡을 수도 없이… 할 수 없이 끌려 들어간 것이 지금까지 하고 있는 것이지.” 사실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산 사람 챙기기도 어려운데 죽은 사람 챙기기는 더 힘든 일이다. 게다가 전국에 ‘누워 있는’ 사람을 한 날 한 시 한 곳에 불러 모을 수도 없다. 최소한 기일에 일일이 찾아다녀야 한다. 같은 민주화운동을 했더라도 정부 유공자(4·19 학생혁명 관련자나 5·18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자)는 단일묘역이라도 있어 그나마 찾기 편하다. 하지만 정부가 관리하지 않는 680여 영혼은 광주 망월동에서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서울 망우리 공동묘지까지 전국에 흩어져 있다. 김대중 정부는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희생당한 이들을 위한 민주공원을 추진해 이명박 정부 때 완성됐다. 경기도 이천에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가 인정한 사람을 위한 묘역 120위를 조성했다. 그러나 이곳에 안장된 민족민주열사는 몇 명 되지 않는다. 대부분 이곳에 묻히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마석 모란공원에 있는 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이 이천 민주공원으로 이장을 거부하는 이유는 뭔가. “모란공원은 전태일이 죽고 서울 근교에 묻히지 못하게 해 쫓기다시피 해 쓴 공동묘지야. 시간이 흐르다 보니 박종철과 문익환 목사도 그리 모시고, 계훈제·조영래·YH 농성에서 숨진 김진숙 등 지금 146위가 있어. 지금도 모란공원에 묏자리 하나 쓰려면 1600만원이나 들지. 여기 있던 민주열사 3명만 이천 민주공원으로 가고 다들 안 가려 해. ‘이천으로 가느니 야스쿠니로 간다’고 할 정도지.” -이천 민주공원은 조성과정부터 논란이 많았다. “그것 한 번 취재해 봐. 이천 민주공원 주변에 권력자 형의 땅이 많다고 해. 주민들도 민주공원이 들어서는 것에 반대했는데 인터체인지를 만들어주는 조건으로 동의했지. 도로공사는 바로 인근에 호법 인터체인지가 있어 새로운 인터체인지 설치에 반대했는데 갑자기 허가하고. 인터체인지가 생기고 인근 땅값이 20배나 올랐다고 하지.” -그래도 예산을 들여 만든 민주공원인데 어떻게든 활용해야 하지 않을까. “이천 민주공원은 120위를 모실 수 있으나 아무리 늘려도 300위 이상 안돼. 광주 망월동 묘역과 4·19묘역을 빼고 우리가 관리하는 민족민주열사·희생자가 680위야. 심사로 선별한 것이 이 정도인데, 더 발굴하면 800~900명 정도 될 거야. 민주묘지 만든다면 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어야 해.” 사실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법에 따른 민주공원은 애초부터 문제가 있었다. 처음 이 법의 적용대상을 ‘1969년 8월 7일부터 현재(2000년)까지’로 규정했다. 대부분 이 법의 적용대상을 1960년 5·16 쿠데타 이후 민주화운동자로 예상했지만 변질된 것이다. 이유는 DJP연대로 김종필(JP) 총리가 중앙정보부장 등 자신의 권력실세 시기를 대상에서 뺀 것이다. 69년 8월 7일은 바로 JP가 실권을 잃은 3선개헌 발의일이다. 그러다 보니 1961년 5·16 쿠데타 직후 벌어진 <민족일보> 사건을 비롯한 무차별 탄압,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 1967년 동베를린 사건 등은 모두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명박(MB) 정권에서 이 법은 또 변질됐다. 이 법 적용시점을 1964년 3월 24일로 개정한 것이다. 이날은 3월 6일 대일 굴욕외교 반대 범국민투쟁위가 만들어지고, 서울에서 첫 대학 시위가 있던 날이다. 바로 MB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만들기 위해 법을 개정한 것이다. 소위 ‘과거사’ 법안은 이렇게 정략적으로 변질됐다. 게다가 이 법으로 만든 이천 민주공원은 권력자 친척의 땅 투기의혹까지 있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숨진 열사들이 이천 민주공원을 외면하는 것은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친일 경찰이 묻힌 국립묘지를 외면하는 것과 일면 비슷하다. 부산에서 지하 서클 만들어 활동 박 명예위원장은 1934년 경남 밀양 태생이다. 6·25전쟁이 터지자 부산으로 가 경남공업학교를 졸업하고 <국제신보> 영업부 사원으로 일했다. 그때 부산에서 만난 사람이 나이는 세 살 아래, 학교는 한 학년 위인 이수병이다. 그는 부산사범을 다니던 이수병과 ‘암장’이라는 지하서클을 만들어 ‘이승만 독재 반대투쟁’을 꾀했다. 동향인 김금수(노무현 정권 때 KBS 이사장)도 이때 같이 활동했다. 이수병은 서울 경희대로 편입해 <민족일보> 기자 시험에 합격했으나 1차·2차 인혁당 사건에 연루됐다가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박 명예위원장도 서울로 올라와 1958년 건국대학교 정외과에 입학했다. 그는 “동숭동 서울대 도서관에서 촉탁으로 일하면서 밤에는 낙원동에 있는 대학을 다녔다”면서 “등록금과 자취비를 벌기 위해 휴학하는 등 힘들게 학교를 다녔다”고 말했다. 군 미필자를 강제로 군대에 보내는 시책으로 군대에 간 그는 전방 군부대에서 4·19 학생혁명 소식을 들었다. 군에서 제대한 그는 학교보다 ‘운동’에 뛰어들었다.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조직위원회 청년부장으로 통일·청년운동에 나선 것이다.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에 관련돼 이수병과 함께 1년여를 복역했다. 그는 “민자통의 민족·자주·통일 3대 원칙에 공감하는 사람들과 만나 얽히게 된 것을 반국가단체라는 이름으로 끌고가 때려서 엮은 것이 인혁당 사건”이라며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죄를 엮어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수병이 <조선일보> 기자가 될 뻔 했던 일화를 소개했다. “당시 <조선일보> 편집국장 출신으로 조선통신사(현 KBS 전신) 사장이던 송지영이 <민족일보> 사건으로 수감돼 있었지. 이수병은 송지영에게 감방에서 한문과 일본어를 배웠어. 송지영은 이수병이 뛰어난 젊은이라는 것을 알았어. 이수병은 출감해 한동안 내 단칸방에서 같이 사는데 하루는 나에게 ‘송지영이 추천하는데 <조선일보> 기자 할까?’라고 묻더라. 내가 ‘<조선일보> 가서 무슨 글을 쓸래?’라고 반문했어. 이수병이 한참 고민하더니 ‘안 갈게’라고 하더라.” 박 명예위원장은 이 일화를 소개하며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만약 그때 이수병이 <조선일보> 기자로 가도록 놔 뒀으면 나중에 인혁당 사건에 엮여 억울하게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회한을 얘기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는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 때도 끌려갔고, 1974년 2차 인혁당 사건 때는 6개월 동안 곤욕을 치르고 집행유예로 나왔다. 이 인혁당 사건으로 이수병을 비롯한 8명이 사형에 처해졌고, 이날은 사법 암흑의 날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인혁당 사건은 박정희가 대구·경북 정서가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이를 개편하려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박중기 명예추모위원장을 비롯한 범국민추모위원회 관계자들이 5월 31일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행사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민주공원 문제 문재인 정부가 매듭짓기를 억울하게 죽더라도 신원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나마 다행이다. 제주 4·3은 물론, 고양 금정굴 등 전국적으로 공권력에 의해 민간인 학살이 자행된 곳이 한두 곳이 아니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이 유골은 안장할 곳을 찾지 못하고 이리 저리 옮겨 다니고, 심지어 컨테이너에 보관되고 있다. “발굴된 아이들 유해는 신발만 있고 뼈도 거의 남아있지 않아. 여자도 가락지만 남고 뼈는 다 삭았어. 이렇게 죽은 사람이 엄청나. 지금 발굴하고 있는 충남 홍성군에서만 약 800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해. 아이들과 아주머니가 무슨 사상과 관련이 있겠어. 그냥 정부가 죽인 거야. 그런 사람들은 어디 호소할 데도 없어. 그들은 신문지 깔고 야채 담는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겨 있지. 우리가 보상은 못해줄 망정 이들을 안장이라도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어. 그나마 문재인 정부 들어 이들을 납골당 형태로 안장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는 걸로 알아.” 수시로 잡혀 들어가는 그가 제대로 취업하긴 어려웠다. 그는 “별 거지짓 다했다”고 말했다. 고물장사도 하고 옷장사도 했다. 그는 “안식구가 고생 많이했다”고 말했다. 박 명예위원장은 2016년 5월 27일 제11회 ‘임창순 상’을 받았다. ‘민주평화 진보혁신 운동에 불요불굴의 활력을 더한 든든한 맏형’ ‘자애로운 원로이자 준엄한 선배’라고 선정 이유를 설명했다. 이날 시상을 한 강만길 청명문화재단 이사장은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민주·인권·평화·통일을 위해 헌신한 박중기님께 이미 늦었지만 더 늦기 전에 작은 기념패 하나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다시 민주공원 문제로 돌아왔다. 그는 700~900명에 이르는 민족민주열사·희생자를 모실 민주공원 문제를 문재인 정부가 매듭짓기를 원했다. 그는 “거기(이천) 있겠다는 사람은 있게 해도, 절대 자리가 부족하니 옳은 자리 하나 마련해야 한다”면서 “파주 휴전선 근처 넓은 공간에 역사·자료관과 함께 만드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남북을 오가게 되면 북쪽 사람들도 향불 하나 피우고…”라고 말했다.
원희복의 인물탐구
[언더그라운드. 넷]파주의 흔한 라면집, 그 후
[언더그라운드. 넷]파주의 흔한 라면집, 그 후(2015. 07. 07 14:17)
2015. 07. 07 14:17 사회
“이 집에 사세요?” 주차를 하니 동네 주민이 물었다. “아니 저 밑의 가게에 잠깐 들르려고….” “아 라면 먹으러 왔구먼.” 동네 주민도 이제는 그 존재를 알고 있었다. ‘파주의 흔한 라면집’이라는 제목의 사진이 인터넷을 강타한 것은 지난 2월 중순이었다. 파주의 한 시골 가게. 간판도 없었다. 그런데 끓여 내놓는 라면의 비주얼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더 놀라운 것은 가격. 2800원이다. ‘가성비 끝판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가성비는 ‘가격 대비 성능’이라는 뜻의 누리꾼 말이다. 한 번 방문해야지, 라고 생각했는데 간간이 이런 소문이 들렸다.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 주인 할머니가 힘들어 한다는 이야기였다. 기자가 방문한 날은 7월 2일. 혼잡함을 피해 평일을 택했다. 그대로였다. 여전히 간판은 없었다. 사진과 차이라면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여름이라 대문 주변에 무궁화꽃이 활짝 피어 있는 정도? 연인으로 보이는 한 팀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홀의 크기는 2평(6.6㎡)쯤 돼 보인다. 메뉴판은 따로 없지만 파는 라면은 두 종류다. 매운 맛과 안 매운 맛. 벽에 ‘라면 2800원, 잔돈으로 주세요’라는 손글씨 종이가 붙어 있다. 주문하려고 주방에 들어섰다. 도마에 칼질을 하고 있던 할머니가 답했다. “잠깐만요. 나 음식하는데, 귀에 안 들어와요.” 조리가 끝나면 주문하라는 말이다. 약 20분 후. 라면이 나왔다. 맛은 사진 이상으로 훌륭했다. 오징어, 팽이버섯, 표고버섯, 애호박, 당근…. 재료만 푸짐한 것이 아니다. 국물도 맛보지 못한 독특한 미감이다. 반찬으로 나온 알타리 무김치와도 환상의 궁합이다. 지난 2월 중순 ‘파주의 흔한 라면집’이라는 제목으로 인터넷에 퍼진 ‘파주시 황소바위길 129’의 간판 없는 라면집. | 정용인 기자 “뜨겁지? 땀구멍에서 땀이 나와야 피부가 좋아지는 거야. 예전에 우리 딸이 여드름이 나서 내가 미역국을 맥였어. 싫증날 정도로. 그랬더니 피부가 괜찮아지더라고.” 무뚝뚝할 줄 알았다. 그런데 기자 팀만 남으니 할머니의 이야기꽃이 피었다. 원래는 백반이나 닭도리탕, 보신탕 같은 걸 팔던 가게였다. 이곳에 산 지는 29년. 주손님은 인근 군부대와 공장 직원들이었다. 1990년도에 크라운베이커리 공장이 들어온 뒤에는 먹고 살 만했다. 그런데 2~3년 전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살기 팍팍해졌다고 한다. 인터넷에 뜬 후 너무 손님이 몰려 힘들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지금도 주말이면 가족 단위의 손님이 오는데 솔직히 그때는 힘들어. 오전 10시에 문을 여는데 9시30분부터 와서 줄을 서는 사람도 있어. 12시에는 그래도 남아 있는 인근 공장 사람들이 점심 먹으러 오는데 그때는 피해줬으면 좋겠어.” 궁금한 것은 그 가격에 저렇게 팔아서 남는 이문이 있냐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아파트 경비원을 하셔. 그래도 여기서 애들 다 키워 시집 장가 보냈어. 아들이 회사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의 꾐에 넘어가 주식을 하다 빚을 졌는데, 할아버지가 50만원, 내가 50만원씩 매달 이자 보태고 있어.” 인터넷에 소문이 났다고 떼부자가 되는 건 아닌 모양이다. 건강하게 해로하시길.
언더그라운드. 넷
[표지이야기]세월호 유가족 단식농성장 찾은 만화작가 엠마뉘엘 르파주 인터뷰(2014. 08. 18 17:30)
2014. 08. 18 17:30 사회
ㆍ“김영오씨 진실함이 마음을 움직였다” “분노는 진실을 요구하게 합니다. 진실을 요구하며 싸우는 이곳에서 그들과 강하게 연결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8월 12일 오후 서울 광화문의 세월호 유가족 단식농성장을 한 프랑스인 작가가 찾았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단식농성 중인 ‘유민이 아빠’ 김영오씨가 있는 천막이었다. 세월호 희생자를 상징하는 소녀의 얼굴을 그려 건넨 그는 이어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플래시몹 대열에도 합류해 대형 인간 리본을 만드는 데 동참했다. 엠마뉘엘 르파주. 2008년 두 달에 걸쳐 체르노빌 현지를 탐사한 경험을 그림과 함께 르포 형식으로 풀어내 2012년 출간한 은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한국에서도 지난해 부천만화대상 해외작품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르파주는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소련은 물론 작가가 살고 있던 프랑스가 진실을 감추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이는 데 실망했다. 22년 만에 직접 찾아간 체르노빌에서 작가는 그곳에 자리 잡고 실제 삶을 살아가는 주민들의 목소리를 통해 잊혀진 진실과 마주했다. 13일부터 열린 제17회 부천국제만화축제 참석차 한국에 온 그가 세월호 유가족 농성장으로 먼저 발걸음을 향한 이유도 똑같았다. 바로 “인간성과 진실에 대한 추구”였다. 8월 12일 서울 광화문 세월호 단식농성장을 찾은 르파주 작가가 유가족인 김영오씨에게 직접 그린 그림을 전하고 있다. | 김태훈 기자 세월호 농성장을 직접 찾은 느낌은 어떤가. “제대로 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생동감 있는 모습이 가슴에 와닿았다. 과거 체르노빌에서처럼 국가가 은폐한 진실을 요구하는 현장을 직접 와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오게 됐다. 딸을 잃은 김영오씨의 모습에서 가족을 잃은 아픔과 그 진실한 목소리가 나라의 경계를 넘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김영오씨에게 그려준 소녀의 얼굴은 누구를 염두에 두고 그린 것인가. “유민이의 얼굴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릴 수 없었다. 그림의 소녀는 어느 한 희생자의 얼굴이 아니라 세월호 사고로 희생된 모든 이들을 상징하는 뜻으로 그린 얼굴이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그리고 세월호에서 공통된 인상을 찾을 수 있나. “체르노빌 당시 10대였는데 그때 프랑스 정부는 체르노빌의 방사능 위험이 프랑스까지는 미치지 않는다며 진실을 숨겼다. 단지 아이들에게 하듯 시민들을 안심시키려고만 한 것이다. 2년 전 일본 후쿠시마를 방문했을 때도 같은 것을 느꼈다. 인류가 과거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는 사실 말이다. 세월호 사고도 비슷하다. 사고가 난 이유와 대처방법에 대한 진실은 그것이 고통스럽더라도 어른답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민들을 애들처럼 보는 정부는 진실은 숨기고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만 늘어놓는다.” 한국은 원자력발전소의 밀집도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후쿠시마 이후 국가 정책의 전환은 없었다.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프랑스는 가장 많은 원전을 갖고 있는 나라다. 그리고 그 대부분이 노후해 설계수명을 지나서까지 연장가동하는 비율도 높다. 그럼에도 원전의 전력공급을 대체할 방안을 못 찾았다며 계속 가동 중이다. 그 이면에는 원전을 수출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는데, 결국 원전문제는 어느 한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답이 나온다. 체르노빌의 여파가 유럽 전체로, 후쿠시마는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로 문제가 확산된 것처럼 핵문제를 비롯해 수많은 사회문제가 인류 전체의 문제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작가 엠마뉘엘 르파주 | 이상훈 선임기자 국가가 진실을 감췄다는 점 외에 인간이 만든 재앙으로 인간의 삶을 앗아간 사건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체르노빌에 가기 전 그곳이 온통 잿빛의 음울한 곳일 거라는 막연한 짐작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그곳에서 본 봄의 풍경은 작품에서도 표현한 것처럼 생명력 넘치는 자연의 모습 그대로였다. 정말 놀라웠다. 다만 그런 아름다운 모습과 달리 높은 방사능 수치 때문에 인간은 겉으로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세월호 사고 같은 경우도 역시 결국은 인간이 스스로를 땅에서, 삶의 공간에서 추방시킨 것이나 마찬가지다.” 작품에서는 그런 재앙 이후에도 삶을 이어가려는 사람들의 생명력을 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동이 멈춘 발전소 건물이나 금지구역의 시가지 건물은 흑백 톤의 직선을 써서 죽어 있는 모습으로 그렸다면, 사람이 살고 있는 공간은 부드러운 곡선에 따뜻한 색조를 써서 대비시켰다. 죽음의 공간이라는 그곳에서도 사람이 살아가고 있다는 걸 말하려고 표현기법을 달리한 것이다. 이곳(세월호 농성장)에서도 은폐된 진실 때문에 죽어가기는커녕 오히려 진실을 요구하는 목소리로 생명력이 넘치는 광경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여러 작품을 통해 국제적 차원의 문제에서 그 중심에 선 예술가로 참여해 오는 동안 어떤 목표가 있었나. “어려운 질문인데, 우선 나의 창작이 단순한 메시지 전달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밤중에 화살 쏘기’란 프랑스 속담처럼 쏜 화살을 어디서 찾을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내 작품이 불러올 결과가 어떤 것일지도 내다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예상 못한 놀라운 결과를 만난다. 이번에 한국에 오게 된 것, 세월호 농성장까지 와서 투쟁하는 사람들과 연결된 것 모두가 그렇다. 체르노빌도, 세월호도 하나의 특수한 사건이지만 그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공감을 이끌어내고 서로 떨어져 있는 이들을 연결시키는 것을 경험했다.” 체르노빌에서 경험한 현지 주민들의 삶이 세월호 유족을 포함한 한국인들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있다면 어떤 것일까. “서로를 갈라놓는 차이보다 서로를 연결해주는 공통분모와 연대감이 더 중요하다. 체르노빌에도 비극과 불행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소와 행복도 있었다. 우리가 친밀감과 연대감을 느끼는 것은 누군가의 불행이나 행복을 나와 가깝게 공감하는 데서 온다. 진정한 인간성이란 삶의 모든 모습들을 함께 추구하는 싸움 안에 자리 잡고 있다. ‘팔을 떨어뜨리지 말라’는 표현이 있다. 포기하지 말고 힘을 내라는 뜻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하는데 이 기회에 오히려 한국의 사회문제들이 그저 잊히지 않고 새롭게 관심을 일깨울 수도 있을 것이다.”
표지 이야기인터뷰
[정윤수의 도시 이미지 읽기]구경거리일 뿐인 파주 ‘지혜의 숲’(2014. 07. 14 16:33)
2014. 07. 14 16:33 사회
장차 100만권을 목표로 하는 서가 면적은 1244㎡이고 길이는 3.1㎞에 달한다. ‘숲’을 걸어보았다. 조금 멀리 서서 보니, 이 숲은 관상용이었다. 읽기 위한 숲이 아니라 보여주기 위한 숲. 어떤 점에서 보면 ‘사진 찍기’ 좋은 곳이었다. 이런 구경거리를 위해 왜 이 귀한 세금이 쓰여야 하는지, 의문스럽다. 우리집 큰애가 한창 자랄 때 얘기다. 오늘날의 부모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우리도 딸아이에게 책을 많이 읽히려고 했다. 그러자면 책을 많이 사야 했다. 우리 부부가 읽고 또 모은 책이란 대여섯 살 아이에게 아무 짝에도 소용없었다. 그래서 동화책을 많이 샀고 더러 전집도 샀다. 아이 방이 책방으로 변해버렸다. 문제는 나와 아내의 성격 차이에 있었다. 나는 깔끔한 걸 추구했다. 뭐든지 정리정돈이 되어 있어야 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연구실의 큼직한 책상 두 개를 정리한다. 뭐라도 쓰려고 펼쳐놓은 게 있으면 그 다음 작업 때는 반드시 다 치우고 새로 판을 깔았다. 그 버릇 때문에 아이방도 내가 치웠다. 아주 말끔하게 치워버렸다.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지혜의 숲’ 내부의 모습. | 정윤수 헝클어진 헌책방이 주는 즐거움 그럴 때마다 아내가 핀잔을 줬다. 성격 탓이니 무조건 말릴 수는 없지만 애 방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아이 눈에는 어쩌면 정리가 되어 있을 수 있다고도 했다. 책도 그렇다. 내가 출판사 별로, 저자 별로, 크기 별로 정리해 놓으면 아이는 어김없이 아무렇게나 뽑아서 읽고는 아무 곳에나 꽂아 놓았다. 아니, 방바닥에 던져 놓기도 했다. 그걸 나는 다시 분류별로 꽂으려고 들어가는데, 아내가 문을 가로막곤 했다. 이 책과 저 책이 좀 섞여 있으면 어떠냐고 했다. 우리 눈에는 위인전이고 동화책이지만 꼬마 아이 눈에는 다른 분류체계가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분류체계는 없어 보였지만, 듣고 보니 영 틀린 말도 아닌 듯했다. 장난감과 책이 조금 뒤섞여 있기로서니 무슨 난리라도 나겠는가, 그제야 나는 포기했다. 아이 방은 더 헝클어졌고 책과 장난감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그 속에서 아이는 큰 탈 없이 컸다. 내가 아내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게 된 것은, 신뢰하게 되면 생활이 편리해지는 까닭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 무렵 자주 가던 동네 헌책방에서의 체험 때문이었다. 어느날 나는 참고서 더미 속에서 귀한 평론집 하나를 수확한 적이 있다. 그 헌책방 주인은 책은 조금은 무신경하게 관리하는 편인데, 최소한의 분류, 그러니까 참고서, 잡지, 그리고 나머지 책들이 분류체계의 전부였다. 그러니 한 서가에 같이 있을 수 없는 책들이 뒤섞여 있게 마련인데, 그런 복잡한 질서 안에서 뭔가를 획득하는 것은 상당한 쾌감이었다. 마치 보물찾기에서 1등이라고 쓰여 있는 쪽지를 발견하는 느낌이었다. 죽어가는 책 하나를 살리는 기분이었다. 나로 인하여 폐지 신세가 될지도 모를 귀한 평론집 하나가 목숨을 건진 셈이었다. 헌책방은 그런 즐거움이 있는 공간이다. 경기도 파주출판도시에 신설된 ‘지혜의 숲’에 대하여 내가 유일하게 존중하는 대목이 바로 이 점이다. 지난 6월 19일 문을 연 이 곳에는 20만여권의 책이 비치되어 있다. 현재 확보한 양이 50만권에 달하고 장차 100만권을 목표로 한다. 서가 면적은 1244㎡이고 길이는 3.1㎞에 달한다. 나는 이 ‘숲’을 걸어보았다. 자연의 숲이 그렇듯이 내 책의 숲도 수많은 책들이 섞여 있었다. 일정한 분류체계대로 꽂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일반 도서관처럼 십진분류표 식으로 정렬되어 있지는 않다. 일반 도서관이라면 소설책이 소설 서가에 꽂혀 있어야 하지만 여기서는 평론집과 함께 있다. 역사책들 사이에 과학사 책도 있는데, 그럴 만하다고 여겨졌다. 이 책이 엄밀한 분류에 따라 자연과학 쪽에 있게 되면, 역사의 폭은 줄어들 수도 있을 것이다. 아주 엄격하게 보면 분명히 저 쪽에 있어야 할 책인데 이 쪽에 있는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는 이 쪽에 있는 편이 자연스럽고 또 학술적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말하자면 이 곳은 엄격한 도서관이 아니라 일종의 잘 만들어진 헌책방처럼 무수히 많은 책들의 오솔길로 구성된 곳이었다. 그래서 좋았다. 장식용 전락한 8m 높이 서가의 책들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다. 조금 멀리 서서 보니, 이 숲은 관상용 숲이었다. 읽기 위한 숲이 아니라 보여주기 위한 숲이었다. 어떤 점에서 보면 ‘사진 찍기’ 좋은 곳이었다. 같은 건물에 호텔이 있고 근사한 로비가 있고 아늑한 커피숍이 있다. 구경하기 좋고 사진 찍기 좋은, 그런 책들의 장관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책을 읽기보다는 책을 구경하며 다녔다. 몇몇은 꺼내서 읽기도 했지만, 서서 넘겨볼 뿐 독서다운 독서, 공부다운 공부를 할 만한 여건은 못 되었다. 내 눈에 정말 아찔한 것은 높이 8m에 달하는 서가였다. 인간이 팔을 아무리 높이 들어도 2m 이상 되는 곳의 책을 꺼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저 거대한 ‘숲’의 3분의 2를 가득 채운 책들은 뭐란 말인가? 전시용? 글쎄, 정녕 전시를 위하여 저 많은 책들을 모았단 말인가. 2m 높이 이상에 꽂혀 있는 책들은 어떻게 꺼내볼 수 있을까? 도서관용 사다리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높이 3m 안팎으로 제한되어야 한다. 그 이상 올라가는 것은 안전사고가 날 확률이 높다. 특히 이 곳은 아이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높은 곳에 올라갔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쩔 셈인가. 어른이나 아이나 2m 이상 높은 곳에는 올라가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 위의 책은 누가 어떤 기준으로 밑에 꽂혀 있는 책과 맞바꿔 가며 꽂아놓을 것인가. 만약 그럴 계획조차 없다면 2m 이상 높은 곳에 꽂혀 있는 책들은, 전시용이요 관상용이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이런 타당한 질문 앞에 이 공간은 실질적인 답을 내놓기 어려울 것이다. 전시된 책, 구경거리로서의 책, 냉혹하게 말해서 블로그에 올리고 페북에 올리고 어디 가서 뭐 보고 왔다고 인증샷 하기에 좋은 오늘날의 ‘소비로서의 중산층 교양문화’의 집적체였다. 이런 구경거리를 위해 국비가 7억원이나 투입되었다고 하는데 고사 직전에 이른 출판산업의 현실에 비춰보면 도대체 왜 이 귀한 세금이 이렇게 쓰여야 하는지, 의심스럽다.
정윤수의 도시 이미지 읽기
[이주의 우수작]파주 헤이리에서
[이주의 우수작]파주 헤이리에서(2010. 06. 23 14:39)
2010. 06. 23 14:39 사회
안녕하세요. 오늘 경향신문을 구독 신청하면서 사진 공모 글을 봤습니다. 가끔 한두 장 저도 참여해 보려고 합니다. 경기도 파주시 헤이리에 갔다가 잠시 인형을 파는 곳에 들러서 찍은 사진입니다. 인형이 많으니까 서인이가 아주 좋아하던 기억이 납니다. 눈, 코, 입이 달려 있으면 서인이 눈에는 인형이 아니라 영혼이 있는 친구로 보이나 봅니다. 서로 얘기도 하고…. 저도 어렸을 때 기르던 강아지랑 얘기하던 기억이 있네요. _  최현식 이달의 최우수작 _ 곽동훈씨  「Weekly 경향」 사진공모전 우수작 가운데 이달의 최우수작에 곽동훈씨의 작품이 선정됐습니다. 기념촬영 같은 집단포트레이트 사진은 배경 처리나 각 인물의 표정을 잘 나타내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진에서는 깔끔한 배경 처리와 인물 개개인의 표정이 나타나는 순간을 잘 포착했습니다. 전체적으로 꽉 찬 구성 역시 돋보였습니다. 응모 요령 소재나 주제 제한이 없습니다. 다만 과도한 보정은 사양합니다. 합성한 사진도 곤란합니다. 촬영 장소와 시간을 밝혀 주시고, 짧은 글도 덧붙여 주십시오. 응모 방법 seokgu@kyunghyang.com으로 사진과 글을 보내 주세요. 상품 매월 ‘이달의 최우수작’ 수상자에게 니콘 디지털 카메라 S230 1대 수여.(기종은 추후 사정에 따라 바뀔 수 있습니다) 발표 및 게재 매주 Weekly 경향 지면. 월별 최우수작은 다음달 첫째주.
[독서일기](21) 비- 마르탱 파주
[독서일기](21) 비- 마르탱 파주(2007. 07. 17)
2007. 07. 17 문화/과학
빗방울은 과일이다 그것들을 따서 깨물어보라! 마르탱 파주· 이상해 옮김·열림원·2007 빗방울을 자세하게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빗방울은 위쪽 끝에 정자의 꼬리를 닮은 끈이 달린 작달막한 몸을 갖고 있다.” 당신이 비를 좋아한다면 틀림없이 이 책도 좋아할 것이다. 이 책은 비에 관한 모든 지식, 혹은 비를 위한 송가(頌歌)다. 비에 관한 멜랑콜리하면서도 연금술적인 상상력이 펼쳐지는 이 책의 유일한 단점은 책이 얇다는 것이다. 파주의 비에 관한 상상은 때로는 시적이고, 때로는 철학적이며, 때로는 유쾌한 장난기로 가득 차 있고, 때로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에로틱하다. 기상대의 비 예고는 빗나가기 일쑤다. 비를 품은 구름조차 언제 이 비를 땅에 투하해야 할지 잘 모른다. 비가 땅에 내리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다름 아닌 비 자신이다. 비는 오랜 내적 숙고 끝에 땅으로 내려가야 할 때를 정한다. 기상학이란 “부정확과 착오의 과학”이다. 비는 항상 갑자기 온다.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먼 데서 천둥이 운다. 비가 오려는 예고다. 비는 오기 전에 먼저 기별을 보낸다. 그런데도 비는 항상 갑자기 온다고 느낀다. 비가 내리려면 해류와 기압과 대기온도, 이 모든 조건이 성숙되어야 한다. 비는 언제는 너무 빨리 오거나 너무 늦게 온다. 그러나 때가 무르익으면 비는 내려오게 마련이다. 비는 구름의 자궁에서 터져나오는 양수다. 아, 비가 왜 그렇게 따뜻하고 피의 비릿한 냄새를 풍겼는지 알겠다. “구름의 자궁이 수축된다. 하늘의 배가 살짝 열린다. 거기서 양수가 흘러나와 우리를 덮친다.” 빗속에서 우리는 마음이 편안해진다. 우리의 DNA에는 비의 기억이 새겨져 있다. 파주도 이렇게 쓴다. “나는 내 몸에 비의 지문이 찍히는 걸 좋아한다.” 자궁은 아직 발아하지 못한 수많은 비의 씨앗을 간수하는 곳이다. 세상에 태어나기 전 우리의 임시체류지인 자궁은 무수한 빗방울이 모여 만든 바다다. 비가 오면 마음은 달뜨고 감정의 전압은 높은 볼티지로 급상승한다. 수만㎞의 먼 바다에서 끝내 모천을 찾아오는 연어떼와 같이 우리 역시 태어나기 전에 머물렀던 그 원초의 바다에 대한 그리움으로 사무치기 때문이다. 봄비는 죽음과 관련이 있다. 봄비는 죽은 땅을 두드려 깨우고 망각 속에서 방치되던 씨앗과 구근들에서 싹을 틔운다. T. S. 엘리어트의 ‘황무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추억과 욕정을 뒤섞고/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마른 구근 (球根)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주었다”. 봄에 내리는 비는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구근들에서 싹이 돋게 한다. 이렇듯 비는 잠과 망각 속에 잊힌 대지의 생명들을 일깨우는 각성제다. 땅은 “시체들의 창고”다. 봄비는 도굴꾼들처럼 지팡이로 이 시체들의 창고를 두드린다. 비는 잃어버린 사체들과 방황하는 죽음을 찾아다닌다. 비는 잔인하다. “비는 시체를 찾는 죽음의 혀이며/실을 찾는 죽음의 바늘이다.”(파블로 네루다) 비는 죽은 동물의 사체들을 찾아 분해한다. 들쥐와 고양이들의 사체가 비를 빨아들여 한껏 부풀어오른 뒤 이윽고 낱낱의 원소로 분해되면서 땅의 자력에 끌려 땅속으로 스며들어간다. 사체들의 형태는 사라지고 몇 개의 흰뼈만 남는다. 비는 그 분해물들로 숲의 이끼류와 버섯류의 번식을 장려한다. 비가 공중에 뿌리는 습기들은 집 구석구석에 곰팡이들을 키운다. 비는 뭐든 빨리 번식하는 생물을 키우는 데 관심이 많다. 비가 내리면 모든 것이 수직으로 돋아난다. 비의 자양분을 힘껏 빨아들이며 돋아나는 새싹, 떡잎, 생각들. “비가 내리면 우리는 발아한다. 비옥함은 정신의 한 자질이다. 새싹, 떡잎, 생각들이 자라난다. 우리는 그 과일들을 수확한다.” 비는 여름 아침에 연주하는 악사들이다. 악사들은 혼자 오는 법이 없다. 그들은 항상 무리로 온다. 천국의 오븐에서 방금 구운 빗방울들이 차르륵 톡 차르륵 톡 리듬을 타고 내려온다. 내 귀의 달팽이관 속으로 저 타악 주자(奏者)들이 걸어들어온다! 저 비들을 수평으로 고요히 받아내며 땅 위에는 우산 꽃들이 핀다. 누가 맨 처음에 제 머리 위의 하늘을 꽃으로 가리려고 했을까! “비는 우리 문명에 파견된 식물, 동물, 광물의 대사다.” 비오는 날 창가에 앉은 소녀가 입을 다무는 것은 그 때문이다. 비의 대사를 경청하려는 것이다. 때로 비는 실연의 피난처다. 실연당한 젊은이들이 빗속으로 망명하는 까닭은 거기에 있다. 비는 위로의 말을 건네고, 눈에서 흐르는 눈물과 합해져 눈물의 염도를 낮춘다. 빗속에서는 코끼리만큼 덩치가 큰 남자가 울고 있어도 부끄럽지 않다. 얼굴에 흐르는 것이 비인지 눈물인지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이다. 비는 잘 웃고 잘 우는 감정 기복이 심한 처녀와 같다. “비는 감상적이고, 열정적이고, 소심하고, 발랄하다.” 비의 처녀도 실연당한 경험이 있다. 아주 많이. 비가 실연당한 이의 마음을 잘 아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우리가 여름날의 비를 반기는 것은 뻔뻔하고 집요한 태양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비를 범죄, 가난, 질병과 연관시킨 것은 태양의 유해성을 은폐하려는 태양의 로비스트들이다. 실은 “태양은 노출증에 걸린 거대한 거시기”다. 그 실상을 안다면 태양을 불신하고 비를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가을의 비는 여름의 땡볕 속에서 탱탱하게 잘 익은 열대과일이다. 혹시 빗방울을 깨물어본 적이 있는가? 대지의 정수를 머금고 탱탱하게 익은 붉은 토마토와 같이 빗방울은 우리의 이빨 아래에 으깨지며 달콤한 즙을 피처럼 줄줄 흘린다. 토마토는 대지에 뿌리를 박고 머리 위에 태양을 이고 있다. 태양은 늘 뿌리를 가졌거나 두 발로 걷는 영장류의 머리 위에서 이글거린다. “태양은 눈을 내리깔도록 강요하는, 늘 켜져 있는 플래시다.” 토마토의 붉은 유전자는 태양에게서 온 것이다. 토마토가 대지의 과실이라면 빗방울은 하늘의 과일이다. “빗방울은 과일이다. 그것들을 따서 깨물어보라. 그 작디 작은 리치들은 입천장과 혀 아래에서 신선하게 폭발한다.” 빗방울을 깨물면 비의 달콤하면서도 신선한 즙이 입천장과 혀를 충분하게 적신다. 가을의 비는 낙엽들, 추수한 낟가리, 죽은 사마귀, 매미 허물, 부서진 나무의자, 폐쇄된 공장, 공동묘지, 침울함에 잠겨 있는 산맥들 위로 내린다. 아직 동면할 자리를 찾지 못한 뱀들은 누렇게 시든 풀숲에 숨어 전전긍긍한다. 황국(黃菊)이 지고, 숲의 나무들은 헐벗었다. 황토는 더욱 붉어지고, 울울창창한 숲에 가려졌던 늙은 갈보의 몸과 같이 메마른 산하의 곡선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비. 날은 스산하게 춥고, 벌거벗은 채 내리는 비는 앙상하게 여위었다. 겨울비는 거의 쓸모가 없이 쏟는 잉여의 물. 그 잉여성 때문에 겨울비는 눈총을 받는다. “비는 왕따당하는 천덕꾸러기, 운동장 한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는 외로운 아이, 거지, 팔레스타인인, 유대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비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삶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반면, 비가 오면 뭔가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내부에서 공격해오는 우울증과 날카롭게 찌르는 불행감, 그리고 편두통은 비로 인해 다소 경감되었다. “비는 여러 언어로 말하고, 다양한 춤을 알고 있다.” 아아, 이 재주 많은 비에 감사해야 한다. 참, 이 비들은 어디서 오는가? 그들의 출발지는 다 다르다. “나는 내 비의 형제누이들을 생각한다. 떨어지는 빗방울은 아프리카 호수, 벨기에 맥주, 어린 병사의 땀방울 혹은 여공의 눈물방울로부터 온 것이다.” 〈시인·문학평론가 장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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