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옵션
닫기
범위
전체
제목
본문
기자명
연재명
이슈명
태그
기간
전체
최근 1일
최근 1주
최근 1개월
최근 1년
직접입력
~
정렬
정확도순
최신순
오래된순

경향신문(총 4,314 건 검색)

“요건 못 갖춘 비상계엄 위헌·위법” 계엄 피해자 44년만에 무죄 선고
“요건 못 갖춘 비상계엄 위헌·위법” 계엄 피해자 44년만에 무죄 선고
2025. 01. 14 13:16사회
1980년 전두환 정부 시절 비상계엄 때 ‘순화 근로봉사대원’으로 노역하다 도주한 혐의로 징역형을 확정받은 피해자가 재심을 통해 44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14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尹 탄핵심판 시작
“국가의 2차 가해, 피해자에게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국가의 2차 가해, 피해자에게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2025. 01. 11 09:00사회
... 피해자를 이기려 드는 국가의 태도를 법정에서 계속 문제 삼겠다. 지금과 같은 국가 변론은 피해자에게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정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따지자 ‘피고 대한민국’ 측은...
반성하지 않는 국가…왜 피해자와 싸워 이기려 하나
반성하지 않는 국가…왜 피해자와 싸워 이기려 하나
2025. 01. 11 09:00사회
... 생활을 했던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내부 상황 설명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490명을 피해자로 인정했다. 정부는 국가기관인 진실화해위가 인정한 피해자에게 ‘피해를 다시 입증하라’고...
‘12·3 비상계엄’ 피해자들 “포고령 위헌” 헌법소원
‘12·3 비상계엄’ 피해자들 “포고령 위헌” 헌법소원
2025. 01. 07 21:15사회
당시 국회 앞 시민 등 20명 윤석열·박안수 상대로 청구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 활동가가 7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비상계엄 선포와 포고령의 위헌성 확인을 요구하는 헌법소원...
尹 탄핵심판 시작

스포츠경향(총 1,209 건 검색)

아크링크, 몸캠피싱 방지 ‘피싱 피해 정보 유출 차단 및 피해자 보호 시스템’ 특허 출원
아크링크, 몸캠피싱 방지 ‘피싱 피해 정보 유출 차단 및 피해자 보호 시스템’ 특허 출원
2025. 01. 11 09:00 생활
디지털 보안 전문 기업 아크링크(Arklink)가 지난 3일 몸캠피싱 등 디지털 범죄로부터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피싱 피해 정보 유출 차단 및 피해자 보호 시스템’ 특허를 출원했다고 10일 밝혔다. 이번 특허는 개인정보 유출을 방지하는 동시에 피해 데이터를 보호하며, 범죄자가 가짜 데이터를 실제 정보로 오인하도록 설계된 혁신적인 기술이다. 특히, 몸캠피싱 피해자의 신체 노출 영상이 유포되더라도 지인들이 이를 악의적으로 조작된 정보로 인식하도록 유도해, 피해자의 수치심을 완화하고 2차 피해를 방지하는 기능을 포함하고 있다. 아크링크는 또한 피해 경로를 추적하고, 피해자에게 실시간으로 대응 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 디지털 범죄 예방과 대응력을 동시에 강화했다. 아크링크 박민재 대표는 “이번 특허 출원은 디지털 범죄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피해자 보호를 위한 실질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며, “앞으로도 몸캠피싱과 같은 디지털 범죄 예방과 보안 기술 혁신을 통해 더 안전한 온라인 환경을 만들어가겠다”고 강조했다. 이번 특허는 디지털 범죄로 인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접근법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아크링크는 이를 기반으로 국내외 시장 확대와 딥페이크 추적 기술 등 추가적인 보안 기술 개발에도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 디지털 보안 시장에서 아크링크의 선도적인 행보가 앞으로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주목된다.
‘LA 산불’ NBA 집어 삼켰다···레이커스 홈경기 취소, 레딕 감독 등 피해자 속출
‘LA 산불’ NBA 집어 삼켰다···레이커스 홈경기 취소, 레딕 감독 등 피해자 속출
2025. 01. 10 15:31 스포츠종합
10일 미국 LA 팰리세이드 지역을 강타한 산불로 마을이 잿더미로 변해 있다. AFP연합뉴스 미국 서부 최대도시 로스앤젤레스(LA)에서 발생한 동시다발 산불 피해가 엄청나게 늘어나는 가운데, 미국프로농구(NBA)도 큰 타격을 받고 있다. 경기가 전격 취소되고, 산불 피해를 본 선수들이 급증하고 있다. NBA 사무국은 10일 이날 LA 크립토닷컴 아레나에서 열릴 예정이던 LA 레이커스와 샬럿의 경기를 취소했다. 산불 여파 때문이다. 산불은 지난 8일 LA 퍼시픽 펠리세이즈에서 시작돼, 사흘째 인근을 휩쓸고 있다. 피해 규모는 눈덩이 처럼 불어나고 있다. 인근 지역에 거주하는 약 20만명의 주민이 긴급 대피했고, 5000여개의 건물이 소실됐다. 연기된 경기의 추후 일정은 아직 미정이다. LA 레이커스는 12일부터 4경기가 예정돼 있지만, 연기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LA 산불 여파로 10일 열릴 예정이던 LA 레이커스와 샬럿의 경기가 취소됐다. 레이커 르브론 제임스가 지난해 샬럿전에서 드리블하는 모습. AFP연합뉴스 NBA 선수들도 적잖은 피해를 봤다. ESPN에 따르면 LA 클리퍼스 스타 카와이 레너드와 샌안토니오 간판 크리스 폴, LA 레이커스 감독 J.J. 레딕과 골든스테이트 스티브 커 감독 등이 피해를 입었다. 레딕 감독은 집을 잃고 가족이 모두 대피했다고 전했다. 레딕은 “내 고향의 집, 친구의 집, 어린 시절 지냈던 집을 모두 잃고 학교도 사라졌다. 도시는 파괴된 것처럼 보인다. 초현실적이지만 그래도 모든 사람이 탈출했다”고 전했다. 스티브 커 감독은 “우리 가족을 포함한 많은 분들이 충격에 빠졌다. 들리는 소리와 불어오는 바람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겁을 먹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두가 안전하기를 기도할 따름”이라고 밝혔다. 10일 미국 LA 지역의 한 여성이 산불로 폐허가 된 집터를 돌아보고 있다. AFP연합뉴스 NBA는 “이 어려운 시기에 LA 커뮤니티에 생각과 지지를 보낸다. 우리는 엄청난 용기를 보여준 수천 명의 지역 소방관과 응급구조대원들에게 감사드린다. 우리의 기도는 산불로 인한 상상할 수 없는 피해를 입은 사람들과 함께 있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TXT 휴닝카이, 무안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 피해자 위해 5000만원 기부
TXT 휴닝카이, 무안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 피해자 위해 5000만원 기부
2025. 01. 03 19:30 연예
그룹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멤버 휴닝카이. 사진 스포츠경향DB 그룹 투모로우바이투게더(TXT)의 멤버 휴닝카이가 무안국제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 피해 지원을 위해 5000만원을 기부했다. 3일 대한적십자사(회장 김철수)는 그룹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멤버 휴닝카이가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 피해 지원을 위해 지난 1일 성금 5000만원을 기부했다고 밝혔다. 휴닝카이는 피해 유가족들이 하루빨리 안정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전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성금은 사고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피해 유가족을 지원하고, 피해 복구 구호활동을 위해 쓰일 예정이다. 휴닝카이는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갑작스러운 사고 소식에 큰 안타까움과 슬픔을 느꼈다. 피해 유가족분들께 작은 도움이라도 드리고 싶은 마음에서 기부를 결정했다. 슬픔을 겪고 계신 분들께 애도와 깊은 위로를 전한다”고 밝혔다. 지난달 29일 벌어진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이후 많은 연예인들이 기부를 통해 유가족을 돕고 있다. 3일만 해도 그룹 방탄소년단의 멤버 제이홉, 가수 김범수가 기부행렬에 합류했다.
불스원, 교통사고 피해자 지원 ‘2천 7백만원 기부’
불스원, 교통사고 피해자 지원 ‘2천 7백만원 기부’
2025. 01. 03 11:22 생활
국내 1위 자동차용품 전문 기업 불스원이 한국교통안전공단 교통사고 피해자지원 희망봉사단 ‘희망VORA’에 2천7백만원 상당 성금품을 기부했다. 교통사고 피해자 지원 성금은 불스원의 ‘러브 브리지(Love Bridge)’ 기부 캠페인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불스원 러브 브리지 기부 캠페인은 임직원 급여 끝전을 자발적으로 기부하면 회사도 동일 금액 이상을 추가로 기부하는 매칭 그랜트 운영 방식으로 더 큰 기부 효과를 체감할 수 있어 참여하는 임직원의 만족도가 높은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달 24일 서울 강남 소재의 불스원 본사에서 진행된 성금품 기부 전달식에는 불스원 전재호 대표이사를 비롯해 기부에 참여한 불스원 임직원 및 희망VORA 김영준 사무국장이 참석했으며, 기부금 외에도 교통사고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피해자와 유가족의 편안한 숙면을 도와주는 ‘밸런스온 기능성 경추베개 컴포트’ 400개도 함께 전달했다. 이번 기부를 통해 전달된 성금과 기부 물품은 한국교통안전공단 등을 통하여 교통사고예방 및 전국 각지 교통사고 피해자와 유가족의 후유증 치료, 편안한 잠자리 환경 마련에 쓰일 계획이다. 불스원 전재호 대표는 “임직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진 러브 브리지 기부 캠페인을 통해 조금이나마 교통사고 피해자들에게 희망의 마음을 전달할 수 있어 뜻 깊게 생각한다”며 “불스원은 국내 1위 자동차용품 전문기업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적극적으로 이행하며, 안전하고 건강한 교통 문화 조성에 꾸준히 노력할 것”이라고 전했다.

주간경향(총 93 건 검색)

사죄 대신 싸우려는 국가, 왜 피해자에 이기려 하나
사죄 대신 싸우려는 국가, 왜 피해자에 이기려 하나(2025. 01. 13 06:00)
2025. 01. 13 06:00 사회
2022년 8월 24일 서울 중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열린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사건 진실규명 결정 발표 기자회견에 참석한 피해 생존자가 당시 정근식 위원장의 발표를 들으며 괴로워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부산 영도구에 살던 일곱 살 꼬마는 친구들과 세발자전거 타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영도대교 건너 남포동 일대와 자갈치시장을 자주 쏘다녔다. 1975년의 어느 날도 그런 날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영도대교를 달리다 건널목 앞에서 신호가 바뀌었다. 친구들은 먼저 달려 나간 뒤였다. 홀로 남아 신호등 색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소년 앞에 화물 탑차가 멈춰 섰다. 훗날 설수영씨(56)가 “골백번도 더 떠올리는” 인생이 바뀐 순간이다. “갑자기 물건처럼 들려 탑차 안으로 내던져졌어요. 그 안에 이미 적지 않은 아이들이 있더라고요.” 설씨의 형제복지원 생활은 이렇게 시작됐다. 설씨는 군대식 생활을 하며 형제복지원 내 건설 현장 등에서 강제노역을 했다. 구타는 일상이었다. 누군가 밥을 흘리면 아이들 전부가 몇 시간이고 토끼뜀을 뛰었다. ‘줄빠따’ 신고식에선 평생 다리를 저는 장애도 갖게 됐다. 도망친 아이가 죽도록 맞은 뒤 “거적에 싸여 수레에 실려 나가는 장면”도 여러 번 봤다. 거적에선 피가 뚝뚝 흘렀다. 몸이 성치 않았던 소년은 1978년 다른 보육원으로 보내졌다. 형제복지원과 달리 학교도 보내주는 곳이었다. 그러나 늘 불안했다. “여기도 처음에는 가만히 풀어줬다가 형제복지원같이 나를 또 패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따라다녔다. 결국 이 보육원을 도망쳐 나왔다. 그 후 47년이 흘렀다. 법정의무교육조차 받지 못한 채 세상에 홀로 던져진 소년의 인생은 험난했다. 신문 배달, 음식 배달, 일용직 등으로 생계를 어렵사리 이어나갔다. 10년 전 뇌출혈까지 얻어 말도 어눌해졌다. 지금은 기초생활보장수급자로 홀로 살고 있다. “만약에 그 일이 없었더라면 내 인생은 어땠을까.” 설씨에게도 꿈은 있었다. 노래를 잘 불렀기에 “트로트 가수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달콤한 상상도 해본다. 3년 전, 47년 만에 상봉한 동생에게는 이미 장성한 자녀들이 있었다. 자신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평범한 행복 앞에서 그는 눈물이 났다. “시간을 되돌린다면,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을 겁니다. 그 화물차가 제 앞에 서지 못하도록, 힘이 닿는 데까지 달려서 친구들처럼 건널목을 건널 겁니다. 그러면 제 인생은 달라졌을까요.” ■법정에서 만난 국가의 얼굴 지난해 12월 3일 반헌법적 계엄이 선포되고 해제된 지 한 달이 지났다. 다수의 시민에게 국가폭력의 그림자는 다시 옅어지고 있다. 그러나 설씨와 같은 과거 국가폭력 피해자들에게 국가는 여전히 잔인한 얼굴이다. 2022년 8월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국가의 부당한 공권력 행사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이라고 판단했고, 설씨 등 490명은 이 사건의 피해자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피고 대한민국’은 용서를 구하는 대신 “손해배상을 할 수 없다”라고 맞섰다. 국가는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이 1심에서 이기면 항소했고, 2심에서 이겨도 상고했다. 그중 피해자 28명이 낸 소송 2건은 현재 대법원까지 올라가 있다. 정부는 1심에서 국가배상 책임이 인정된 또 다른 형제복지원 소송 21건에 대해서도 모두 항소했다. 피해자들은 묻는다. “가해자인 국가가 왜 피해자와 싸워 이기려 합니까”(이향직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 대표). “가해자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때 피해자가 받는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정부는 우리가 죽어 배상 책임이 없어질 때까지 버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설수영씨). 또 다른 형제복지원 피해자인 김의수씨는 정부의 판결 불복 움직임을 접하고 지난해 11월 자살을 시도했다가 닷새 만에 어렵게 깨어났다.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법정에서 만난 ‘국가의 얼굴’을 형제복지원 사건을 중심으로 들여다봤다. 국가폭력 손해배상 소송에서 국가의 태도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한국의 현 대통령과 기이하게 닮았다. 1987년에 찍힌 부산시 형제복지원의 전경 / 경향신문 자료사진 ■배상 책임, 왜 부인하나 국가기관(진실화해위)으로부터 국가폭력 피해자임을 인정받은 이들에게 정부는 어떤 논리를 대며 손해배상 책임을 부인할까. 형제복지원 1·2심 소송에서 정부가 펼친 변론을 보면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는 피해사실의 증명이 충분하지 않다는 논리다. 현재 대법원에 올라가 있는 형제복지원 소송의 경우 정부는 특히 ‘개별 공무원의 범법행위를 지목해 피해를 증명하라’고 요구했다. 국가 측 변호인이 지난해 8월 재판부에 제출한 서면에는 이런 주장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개별 공무원의 직무위반 행위를 특정하여, 이로 인한 국가배상 책임 성립 여부를 판단하여야 합니다.”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을 대리하고 있는 이정일 변호사는 말한다. “피해자들이 어떤 공무원에 의해 거기(형제복지원)에 들어가게 됐는지를 증명하라는 겁니다. 사실상 불가능한 요구를 하는 거죠. ‘거리에 있다가 갑자기 합동 단속 차량에 실려서 가 봤더니 형제복지원이었다, 나오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라는 것이 피해자들의 증언입니다. 누가 자신을 잡아갔는지 피해자들이 어떻게 지목합니까.” 시계를 되돌려 1975년으로 돌아가 보자. 당시 내무부는 ‘부랑인의 신고·단속·수용·보호와 귀향 및 사후관리에 관한 업무처리지침’이라는 훈령(내무부 훈령 제410호)을 제정한다. 시·군·구청과 경찰로 구성된 단속반이 부랑인으로 지목한 사람은 어떤 형사 절차도 없이 무기한 강제 수용할 수 있는 훈령이었다. 부산시는 심지어 같은 해 형제복지원과 위탁계약을 체결해 형제복지원이 직접 부랑인을 단속할 수 있도록 했다. 형제복지원은 아이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였고, 그럴수록 더 많은 보조금을 받을 수 있었다. 설씨와 같은 피해자들이 느닷없이 형제복지원에 감금된 이유다. 50년 전 아이였을 때 겪은 일이다. 설씨와 같은 피해자들이 자신을 잡아들인 시·군·구청 공무원, 경찰, 형제복지원 직원을 지목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부산시에 있던 형제복지원의 식당 전경 / 경향신문 자료사진 ‘가해 공무원의 범법행위를 특정하라’는 정부의 요구엔 진실화해위의 조사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태도가 깔려 있다. 2022년 8월부터 지난해 3월까지 진실화해위는 피해 당사자의 진술, 형제복지원의 신상기록 서류, 피해자 주변인의 진술, 형제복지원 생활을 했던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내부 상황 설명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490명을 피해자로 인정했다. 정부는 국가기관인 진실화해위가 인정한 피해자에게 ‘피해를 다시 입증하라’고 요구한다. ‘피해자가 가해 공무원을 특정해야 국가가 배상할 수 있다’는 정부의 논리는 1심 재판부에 의해 기각됐다. 그러나 정부는 항소심에서도 같은 주장을 다시 펼쳤다. 항소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이 사건 훈령의 적용·집행 과정에서 수많은 공무원의 행위가 개입되었고, 오랜 시간이 지나 현재 위 공무원들의 위법한 직무 집행을 특정하거나, 그들의 고의·과실을 개별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위 요건들을 엄격히 요구하게 되면 국가 작용에 의한 원고들의 기본권 침해가 명백함에도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할 수 없다는 불합리한 결론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정부는 이 판결에 불복해 지난해 11월 28일 상고장을 제출했다. 2022년 8월 24일 오전 서울 중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열린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사건 진실규명 관련 기자회견에서 한 피해자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김창길 기자 국가가 배상책임을 외면하며 내세우는 또 다른 논리는 ‘손해배상 청구권의 시효 소멸’이다. 정부는 형제복지원 소송에서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권은 ‘불법행위 종료일’로부터 5년 이내에 행사하지 않아 시효가 소멸했다는 논리를 제시했다. 형제복지원의 인권 유린 실태가 드러나 원생 3000여명이 퇴소 조처된 1987년으로부터 5년을 넘었으니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의도적으로 외면한 것에 가깝다. 2018년 헌법재판소는 ‘민간인 집단 희생 사건’,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조작 의혹 사건’에 정부가 주장한 것과 같은 ‘장기 소멸 시효’를 적용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실제로 1심 법원은 헌재의 이런 결정과 대법원 판례를 들어 정부 주장을 기각했다. 이어진 항소심에서 정부는 이번엔 ‘단기 시효’(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 내 행사하지 않으면 소멸하는 시효)의 소멸을 주장했지만, 이 역시 ‘억지 변론’이다. 국가폭력 사건에서 단기 소멸 시효는 ‘진실화해위 결정으로부터 3년’으로 판례가 확립돼 있다. 항소심 재판부 역시 “시효가 소멸했다”는 정부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가는 왜 재판에서 뻔히 기각될 주장을 펼치며 피해자에 맞서는 것일까. 어쩌면 정부가 가장 마지막으로 내세우는 방어 논리에 진짜 이유가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피해자가 요구하는 배상액 혹은 1심에서 인정된 배상액이 과다해 받아들일 수 없다”는 주장이다. 다음은 정부의 ‘논리 구조’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재판 장면이다. 법정에 출석한 이향직 대표가 기록한 내용이다. ■재판부조차 “이것은 2차 가해 아닌가요” 재판부 “피고(대한민국) 측 서면을 보면, 불법행위 자체를 전면 부인하는 건가요?” 정부 측 변호인 “(생략) 저희가 추가로 하고자 하는 부분은 1심에서 기본적으로는 피해사실을 면밀하게 들여다보거나 진실화해위 조서 내용을 특별히 문제 삼진 않았었는데요. 1심에서 인정된 금액(손해배상액)이 너무 커지다 보니까 (원고들이 이 사건의 피해자에 해당하는지) 해당성 여부에 대해서 다투는 것으로 방향이 (정부와) 얘기가 되어서….” 재판부 “한마디만 드리면, 이제 와 뒤늦게 (원고들의 피해를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변론) 한다는 것은 2차 가해 아닌가요. 2021 가합 사건입니다(2021년에 시작된 소송이라는 뜻).” 지난해 8월 22일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이 낸 국가 상대 손해배상 소송 항소심 재판이 열린 서울고등법원의 한 법정. 선고를 앞두고 열린 마지막 변론기일에서 정부 측 변호인은 원고들이 형제복지원 피해자가 맞는지를 따져보는 것으로 “(정부와) 얘기가 됐다”고 말한다. 이유는 “1심에서 인정된 금액이 너무 커서”다. 재판부조차 “2차 가해가 아니냐”고 꼬집을 정도로 가해자로서는 뻔뻔한 태도다. 1심에서 인정된 배상액은 수용 기간 1년당 8000만원. 이 소송의 피해자들은 대개 3~4년간 수용돼 있었기 때문에 3억원 안팎의 배상액이 인정됐다. 이들은 아동기에 가족과 생이별한 채로 수용돼 법정의무교육 기회를 박탈당했다. 상당수는 지금까지도 생계수단이 일정치 않고 일부는 평생 장애를 지니고 살아가고 있다. 정부 측 변호인은 지난해 8월 재판부에 제출한 서면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1심 기준에 의한 위자료 산정 시 국가 예산이 최소 20조원 이상 소요되는바, 판결에 따른 위자료 지급 의무가 확정되면 국가 재정 문제가 심각해져 예산상 한계로 인해 긴급한 재정투입이 필요한 비상상황에 대한 국가의 대응 능력이 저해될 우려가 있습니다.” 20조원이라는 금액은 어떻게 나온 것일까. 2022~2024년 진실화해위에서 형제복지원 피해자로 인정된 이들은 총 490명이지만 1975~1986년 형제복지원 수용자 총 규모는 3만8000명이다. 이향직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 대표는 “진실화해위에서 피해자로 인정된 이들 외에 부산시의 형제복지원 피해자종합지원센터에 피해를 접수한 인원까지 다 합해도 약 1200명으로, 정부의 20조원 운운은 말이 안 된다”고 말한다. 설사 3만8000명이 모두 나서 배상을 요구한다 해도 정부에게 이를 거부할 명분이 있을까. 국회 예산정책처 분석에 따르면 윤석열 정부가 지난해 추진했던 상속·증여세 최고세율 인하 등을 담은 세법 개정안은 고소득자 세 부담을 4년간 20조원 넘게 줄여준다. 고소득층에 20조원을 안겨주는 법 개정을 추진할 때는 염두에 두지 않았던 “국가 예산의 한계”를 왜 국가폭력 피해자들에게 들이댈까. ■한동훈 약속은 ‘쇼’였나 국가폭력 손해배상 소송에서 국가가 태도를 바꾸려던 때도 있었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가 법무부 장관으로 있던 2022~2023년 법무부는 ‘대학생 강제징집·프락치 강요 사건’ 등 7건의 국가폭력 사건 소송에서 항소·상고를 포기한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국가의 책임이 명백히 확인된 이상, 신속하게 재판을 종료하여 피해자들의 피해를 회복(하게 하겠다)”, “국민의 억울한 피해가 있으면 진영논리와 무관하게 적극적으로 바로잡겠다.” 당시 보도자료에 적혀 있는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말들이다. ‘피해자 친화적’ 법무부로 거듭나려는 노력에 박수가 쏟아졌지만 기미는 ‘반짝’이었다. 2023년 말 형제복지원을 시작으로 삼청교육대, 선감학원 등 다른 국가폭력 사건들에서 법무부는 줄줄이 항소·상고하고 있다. 법무부의 태도는 왜 후퇴했을까. 형제복지원 국가배상 소송에서 왜 상고했는지를 묻자 법무부는 이렇게 답했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현재 다수 사건이 법원에 계속 (심리) 중이고, 이번에 최초로 항소심 판결이 선고된 사건이 다른 사건들의 선례가 될 수 있어, 이에 관한 상고심의 판단 및 기준 확립을 통하여 향후 형제복지원 사건에 관하여 피해자 간 형평에 반하지 않는 일관된 조치가 이루어질 수 있게 하려고 상고하게 되었습니다.” 형평성을 저버리는 것은 오히려 법무부다. 삼청교육대 피해자 등을 대리하고 있는 이영기 변호사는 말한다. “한동훈 전 장관이 사과하고 항소를 포기했던 ‘대학생 강제징집·프락치 강요’ 사건의 경우 이후 이어진 소송들에서 정부는 일체 항소를 포기하고 있습니다. 반면 대학생 출신이 아닌 민중이 피해를 입은 형제복지원, 선감학원, 삼청교육대 사건에서는 거의 다 악착같이 항소를 하고 있어요. 배상액이 아주 형편없이 나오는데도요. 이건 계급 차별 아닙니까.” 과거사 사건을 오랫동안 다룬 또 다른 변호사는 “한동훈 전 장관은 국가폭력 피해자들과 법정에서 다투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여 박수받았지만 결과적으로 변화는 없었다”면서 “결국 쇼한 것 아니면 무엇이냐”고 말했다. 재판에선 누구나 어떤 변론이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는 다르다. 국민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국가는 국가폭력 사건에서 이 의무를 저버리고 시민의 삶을 짓밟았다. 1975년 부산 영도대교의 건널목에 서 있었던 설수영씨에게 진 빚을 갚으려면 국가는 그에게 50년의 세월을 되돌려줘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상, 적어도 국가에 국가폭력 피해자를 더 아프게 할 ‘자유’는 없지 않을까.
표지 이야기
[취재 후] 성폭력 피해자들은 더 많이 말해야 한다
[취재 후] 성폭력 피해자들은 더 많이 말해야 한다(2024. 07. 10 06:00)
2024. 07. 10 06:00 사회
이혜리 기자 성폭력 피해자를 취재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어떤 독자들은 성폭력 피해자의 이야기를 다룬 기사가 피해자 관점에 지나치게 치우친 것 아니냐 할지 모른다. 실제론 그렇지 않다. 최대한 사실에 부합하는 기사를 쓰기 위해 기자는 피해자에게 피해 본 과정을 세밀하게 묻고, 또 묻는다. 각종 자료를 확인하고, 필요하면 교차 검증도 한다. 피해자로서는 고통스러운 순간을 되뇌어야 하고, 2차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취재에 응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성폭력 피해자의 이야기는 숨겨지지 말아야 한다는 게 2018년 미투(#MeToo·나는 고발한다) 운동의 취지였다. 이는 각자의 마음속에 담아뒀던 성폭력 피해를 세상으로 끄집어내고 공적인 공간에서 말하면서 함께 해결을 도모하자는 것이었다. 주축은 여성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해 대검찰청 통계 기준 성폭력 범죄자의 96.5%는 남성, 피해자의 87.5%는 여성이었다. 여전히 피해는 피해로 다뤄지지 못한다. “검찰은 무리한 기소를 했어요. 제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피해자는 이럴 것’이라는 범위에서 조금 벗어나니까 꽃뱀을 보는 시각으로 ‘그게 말이 돼요?’라고 묻는 거예요. 말이 안 될 이유는 무엇인가요? 제가 정말로 겪은 것인데요.” 교제폭력(데이트폭력)을 신고했는데 검찰이 무고죄로 기소했고 최근 법원에서 무죄를 확정받은 A씨의 말이다. 피해자 진술 신빙성을 판단할 때 이른바 ‘피해자다움’의 편견을 가져선 안 된다는 대법원 판례가 나온 지 6년이 됐지만, 성폭력 피해자들은 가해자에게 역고소를 당하거나 무고죄로 수사받을 수 있다는 부담에 시달리고 있다. 기자가 만나본 그 어떤 판사도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 피해자의 진술을 믿는다”고 한 사람은 없지만, 편견을 배제하려는 노력조차 흔히 피해자 관점에 지나치게 치우친 것 아니냐는 반론에 부딪힌다. 급기야는 ‘피해의 경쟁’도 벌어진다. 여러 독자가 교제폭력 문제를 다룬 기사에 “남성 피해는 왜 외면하느냐”, “데이트 꽃뱀이 더 위험하다”고 댓글을 썼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 성별이 무엇이든 성폭력 피해를 본 사람은 보호받아야 한다. 타인을 무고한 사람은 마땅한 책임을 져야 한다. 동시에 어떤 맥락에서 성폭력이 발생하고 처리되는지, 본질이 무엇인지도 같이 고민해야 한다. 피해는 모두 피해다.
취재 후
[취재 후] 피해자를 괴롭히지 않았기를
[취재 후] 피해자를 괴롭히지 않았기를(2024. 07. 03 06:00)
2024. 07. 03 06:00 사회
김찬호 기자 ‘사적 제재’를 적었다, 지우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현상을 멀리서 보는 것과 가까이서 하나하나 뜯어볼 때 생기는 괴리감이 문제였습니다. 사회적 분노가 들끓고 있는 상황에서 가장 쉬운 방법은 ‘동조’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적 제재가 괜히 나오겠나. 가해자 처벌하라’는 논리에 편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선 눈 감아야 하는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유튜버의 폭로에 불안한 ‘피해자의 목소리’였습니다. 사회적 ‘분노’의 힘은 대단했습니다. 수십 년 전 사건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데 이어 직·간접적으로 엮인 사건 주체들이 속속 사과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 결과를 자꾸만 돌아보게 되는 것은 ‘이 분노가 누굴 위한 것인지, 그 결과는 무엇을 파괴하고 만든 것인지’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유튜버의 가해자 공개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과거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과정에서 피해 사실이 나오게 됩니다. 사람들의 호기심은 선의로만 작동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사건을 찾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이를 돈벌이 기회로 여깁니다. 그렇게 50만 유튜버, 300만~400만 조회수의 영상이 탄생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의 의견’은 끼어들 자리가 없었습니다. 가해자가 모두 공개되고, 관계자들이 대국민 사과를 하면 속이 시원한 것이 사건을 까맣게 잊고 살아온 ‘나’인지, 긴 시간을 고통 속에 산 ‘피해자’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전문가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는 유명 사건 피해자의 ‘일상’에 관해 설명하며 “긴 시간 동안 조금씩 조금씩 봉합돼 가던 상처가 이런 일 한 번으로 다시 터져버린다. 그리고 피해자는 ‘그때 그 사건 걔’로 사람들 기억 속에 남는 것에 괴로워한다”고 말했습니다. 감히 ‘사적 제재’의 기화가 된 사건이 무엇인지 정확히 지칭하지 못하겠다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기사에 쓴 문장 한 줄, 사용한 단어 하나가 혹시라도 피해자를 괴롭히지 않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취재 후
“사람 죽었는데 벌금형? 피해자 탓하는 사측과 끝까지 싸울 것”
“사람 죽었는데 벌금형? 피해자 탓하는 사측과 끝까지 싸울 것”(2024. 07. 01 06:00)
2024. 07. 01 06:00 사회
‘5년의 투쟁’ 고 정순규씨 아들 정석채씨 인터뷰 경동건설 산재사고 사망자 고 정순규씨의 아들 석채씨가 지난 6월 25일 주간경향과 인터뷰하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은 후 ‘불과 먼지’라는 단편소설을 썼던 이창동 영화감독은 오래전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그 소설을 썼을 때는 뭔가 남겨놓아야 하겠다는 생각이었어요. 흔적이 없다는 게 제일 견디기 어려웠거든. 사람의 죽음에는 남이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죽음이 있어요. 예를 들어 5·18의 죽음이 그렇죠. 하지만 어떤 죽음은 아무도 말하지 않아요. 놀랍지 않아요? 나는 놀라웠어요. 인간의 삶이 그럴 수 있다는 것이.” (2007년 3월, 씨네21 ‘끈질긴 이야기꾼의 도돌이표, 영화감독 이창동’) 우리는 어떤 죽음은 오래도록 얘기하지만 어떤 죽음엔 침묵한다. 2019년 10월 건설현장 산재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정석채씨(39)는 이런 차별에 몸서리치며 5년의 세월을 보냈다. “처음 1년여간은 그 누구도 손잡아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의 아버지 고 정순규씨는 부산의 한 아파트 공사현장 임시가설물(비계)에서 추락사했다. 사망에 이른 사실관계에 대해 사측인 경동건설과 하청업체는 고인 책임을 주장했는데 초동조사에 이 입장이 일부 반영됐다. 이어진 재판에서 사측은 안전조치 미비에 대해 유죄 판단(업무상과실치사죄·산업안전보건법 위반)을 받았지만, 형량은 집행유예와 벌금형으로 가벼웠다. 아들 석채씨는 아버지 시신의 상태로 미루어볼 때 사측 주장이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재조사를 위해 처절하게 싸웠지만, 이상하게도 사회적 주목은 받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사측 관계자는 고인 장례식장에서 폭행·감금·협박 피해를 입었다며 유족을 고소한 뒤 “사건을 종결하면 고소를 취하해주겠다는 압박까지 했다”고 한다. “사회적 관심 받지 못했던 처절한 싸움··· 청년 노동자였다면 분위기 달랐을 것. 중년 노동자의 죽음도 똑같이 억울하다는 것 말하고 싶어. 다큐 영화로라도 이 억울함 끝내 알릴 것.” 산재사망률이 경제협력개발국가(OECD) 최상위권인 ‘산재국가 한국’. 일하다 죽지 않을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져 중대재해처벌법이 제정되는 등의 성과가 있었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산재 유족들이 진상규명을 위해 거리에서 싸우고 있다. 특히 석채씨처럼 대중의 관심을 얻지 못한 유족들의 싸움은 더욱 처절하다. 지난 6월 25일 경향신문사에서 석채씨를 만나 아버지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싸운 지난 5년에 관해 들었다. -아버지인 고 정순규씨의 죽음의 진상이 밝혀졌다고 보나. “사측은 사고 직후부터 책임을 면하기 위해 재해자 과실로 인한 사망으로 몰아갔다. 아버지가 임시가설물(비계)에 부착된 사다리를 위험하게 이용하다가 추락사했다는 주장이었다. 첫 단추인 노동청의 재해조사에 사측 주장이 그대로 반영됐고, 노동청으로부터 사건을 송치받은 검찰은 재해조사대로 기소했다. 당시 경찰 판단은 달랐다. 경찰은 아버지가 비계 위에서 작업하던 중에 옹벽과 비계 틈 사이로 여러 차례 튕기면서 추락했을 것으로 봤다. 시신에 수많은 골절이 있었고, 작업복은 갈기갈기 찢겨 있었기 때문에 경찰 추정이 맞았다고 본다.” -항소심에서도 집행유예 선고는 뒤집히지 않았다. “사고현장이 사라진 상태에서 노동청 재해조사 결과를 뒤집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저희에게 유리한 진술을 해주셨던 아버지 동료가 계셨는데 정작 수사기관에선 말씀을 바꾸셨다. 사람이 일하다 죽었는데 벌금 2000만원에 끝나버렸다. 설사 실수가 있었더라도 죽지는 않게 안전조치를 해놓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최근 하청업체 소장을 ‘사문서 위조’로 고소했고, 소장에게는 벌금 500만원이 선고됐다. “피해자 과실로 몰아가는 사측 행태를 어떻게든 밝혀내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다. 재판기록에서 아버지가 당시 현장의 안전관리 담당자였다는 사측 제출 서류를 봤다. 아버지가 안전관리자였기 때문에 안전조치 미비에 대해 아버지 책임도 있다고 주장하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제가 아는 아버지 필체가 아니었다. 필적 감정을 의뢰해 위조 사실을 확인했다. 검찰이 하청업체만 약식기소했는데, 원청인 경동건설의 개입을 밝혀내지 못한 것이 아쉽다.” 건설현장 산재사망에서 사측이 ‘피해자 과실’을 주장하는 사례는 흔하다. 2019년 4월 경기도 수원의 한 건설현장 엘리베이터에서 추락사한 청년노동자 고 김태규씨의 사건에서도 사측은 고인이 발을 헛디뎌 사망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다만 김씨의 사건에선 재판부가 사측의 주장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다. 안전수칙 위반 등을 엄중하게 따져, 사측 관계자들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고 정순규씨의 사건 항소심을 담당했던 이주희 변호사는 “건설현장의 산재는 녹화 영상도 없고, 그 순간을 정확히 목격한 사람을 찾기도 어렵다는 특성이 있다”면서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원칙을 따르는 형사법정에선 사고경위 부정확성이 사측의 책임을 덜어주는 결과로 종종 이어져 답답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산재사망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졌지만, 고 정순규님의 사건은 사회적 주목을 많이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사건 초기 공론화가 이뤄져 사망 원인만 바로잡았어도 사측의 책임을 제대로 물을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별 관심을 얻지 못했다. 1년이 흘러 2020년 가을 강은미 정의당 의원이 국정감사에서 다뤄주면서 ‘중대재해 없는 세상만들기 부산 운동본부’와 천주교의 도움을 받게 됐다. 솔직히 청년 노동자의 이야기였다면 분위기는 달랐을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중년 건설노동자의 산재사망도 똑같이 억울한 죽음이다. 우리 같은 유가족의 얘기도 많이 들어줬으면 좋겠다.” -사측이 유족을 되레 고소한 적도 있다고 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틀 뒤 빈소에 하청업체 관계자 두 사람만 찾아왔다. 유족과 친지, 지인들이 ‘왜 경동건설은 오지 않고 너희만 오느냐’며 화를 냈다. 누군가는 그들 멱살을 잡기도 했는데, 이것을 가지고 하청업체가 유족을 감금·폭행·협박으로 고소했다. 그러고는 ‘고소 취하해줄 테니 여기서 끝내자’라고 제안하더라. 나중에 수사기관이 ‘혐의없음’으로 종결하자, 항고해 제 친구 두 명이 벌금형을 받았다. 아버지 사망 직후엔 ‘술 먹고 일하다 그렇게 됐다’는 등의 명예훼손성 댓글이 붙었고(구급대가 혈중알코올농도를 측정했지만, 음주 상태가 아니었다) 지금도 관련 기사에 저를 조롱하는 댓글들이 붙는다. ‘정석채 XX, 네가 돈이 끝까지 필요 없는지 두고 보자’ 하는 식이다.” -아버지의 사건에 대해선 형사 처벌이 완료됐다. 그럼에도 산재 관련 집회 등에서 계속 싸우고 있다. “제발 좀 그만 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저희같이 관심 못 받는 산재 유족에게 힘을 보태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올해 1월 서울 마포구의 건설현장 비계 위에서 노동자가 떨어져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70세의 고 문유식님이다. 안전수칙을 어긴, 매우 위험한 비계였는데 저희 때와 마찬가지로 사측이 고인 과실을 주장하며 장례식장에도 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건 역시 다들 별 관심이 없다. 저라도 돕고 싶어서 얼마 전 기자회견 자리를 만들었다.” -유명 연예인들의 스타일리스트로 일하다 생업을 접고 싸워왔다. 앞으로 계획은. “계속 말하고 쓰지 않으면 잊히는 것 같다고 생각해왔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세상에 남기기 위해서 다큐영화를 준비 중이다. 최근 한 단편영화제에 시나리오를 출품했다가 기획상도 받은 만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저에겐 저만의 투쟁이 아직 남아 있다. 영화 <다음 소희>, <한공주>를 보고 같이 분노하는 이들이 많이 생겨난 것처럼, 언젠가 제 영화도 산재 피해자들에게 그런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레이디경향(총 3 건 검색)

이태원 살인사건 그 후 14년…피해자 어머니 이복수씨 인터뷰
2011. 10. 28 16:32 화제
지난 10월 10일, 일명 ‘이태원 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인 아서 패터슨이 미국에서 붙잡혀 한국 송환 여부에 대한 인도재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1997년 4월 일어난 한 대학생의 죽음은 피해자와 용의자는 있으나 범인은 밝혀지지 않은 미해결사건으로 남아버렸고, 그렇게 14년이 흐른 지금 다시 한번 세상의 눈과 귀를 집중시키고 있다. 그리고 아직도 아들 생각에 밤잠을 설친다는 어머니는 이번에는 반드시 아들의 한을 풀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사건의 전모 아직도 많은 이들이 1997년 발생한 ‘이태원 살인사건’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사건의 자세한 전말은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아무도 죗값을 치르지 않은 ‘이상한’ 사건으로 남았다는 것 정도는 세간에 잘 알려져 있다. 1997년 4월 3일 밤 10시께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의 한 햄버거 가게 화장실에서 홍익대 휴학생이던 조중필씨(당시 23세)가 휴대용 주머니칼에 찔려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피투성이인 채로 소변기 옆 귀퉁이에 쓰러져 있던 중필씨는 오른쪽 목 부위 세 곳, 가슴 부위 두 곳, 왼쪽 목 부위 네 곳, 무려 아홉 곳이 칼에 찔려 있었다. 급히 도착한 119구조대가 상태를 살폈을 때 이미 그는 사망한 상태였다.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은 두 사람이었다. 당시 같은 가게에서 햄버거를 먹다가 중필씨가 있는 화장실에 들어간 아서 패터슨(당시 18세)과 에드워드 리(당시 17세). 두 사람은 모두 미국 국적 소지자로 리는 미국에서 태어난 재미교포였고,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패터슨은 주한미군인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와 있는 상황이었다. 수사당국은 이튿날 패터슨을 검거했고, 리를 쫓기 시작했으나 리는 4월 8일 검찰에 자수했다. 두 사람은 각각 살인죄와 증거 인멸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됐다. 당시 검찰은 리를 살인범으로 판단하고 수사를 진행했다. 근거는 부검 결과와 주변인들의 진술 그리고 거짓말탐지기 결과였다. 부검의의 소견에 따르면 가해자는 피해자보다 키나 덩치가 크고 힘이 센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수사가 진행될 당시 패터슨의 키는 170cm에 못 미쳤던 반면 리는 키가 180cm가 넘고 몸무게가 100kg 가까이 나가는 체격이었다. 거짓말탐지기 또한 리는 거짓을 말하는 것으로 판독되면서 리가 범인일 가능성에 좀 더 무게가 실렸다. 결국 살인죄로 기소된 리는 1997년 10월 서울지방법원과 1998년 1월 서울고등법원에서 징역 20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다시 항소한 1998년 4월 대법원은 ‘단독 범행을 단정하기 어렵다’라는 이유로 무죄 취지의 판결을 내리며 다시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이후 서울고등법원은 리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1999년 9월 열린 재상고심에서 대법원은 무죄 확정 판결을 내렸다. 그 사이 패터슨은 1998년 1월 서울고등법원에서 증거 인멸 등의 혐의에 대해 징역 장기 1년 6월, 단기 1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하던 중 그해 8·15 특사로 풀려났다. 피해자 가족은 리가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난 데 대해 항의하며 정황상 범인으로 판단되는 패터슨을 살인 혐의로 고소했고 검찰은 재수사를 발표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알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출국금지 상태에서 패터슨을 수사하던 검찰이 출국금지 연장을 제때 하지 않는 바람에 그 틈을 탄 패터슨이 미국으로 출국해버렸고 사실상 수사는 중단되고 만 것이다. 한 남자의 억울한 죽음에 얽힌 전모를 살펴보면 대강 이렇다. 그리고 2011년 10월 그동안 행적을 알 수 없던 용의자 패터슨이 지난 8월 미국 LA 현지 사법당국에 체포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건이 발생한 지 14년 만이다. 살인죄 공소시효는 15년. 이제 6개월도 채 남지 않은 시간이다. 하지만 범죄인 인도 결정에 관련한 재판은 대개 길게는 3, 4년씩 걸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다양한 방안을 강구해봐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인생의 전부였던 아들, 암흑 같던 14년의 시간 지금 이 순간 패터슨의 송환 결정을 누구보다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아마 피해자 고(故) 조중필씨의 가족일 것이다. 1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는 어머니 이복수씨(69)는 하루 빨리 패터슨이 한국으로 송환돼 법의 심판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죄를 저지른 사람이 벌을 받아야 (사건이) 끝나는 거죠. 패터슨이 미국에서 체포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번에는 정말 억울하게 하늘나라로 간 우리 중필이 한을 풀어주고, 14년을 울면서 살아온 우리도 한을 풀게 되나보다 했더니 일단 그쪽에서 재판이 끝나봐야 안다고 하네요. 재판이 1년이 될지 그보다 더 길어질지도 알 수 없는데 그저 답답하기만 해요. 나는 점점 늙어가는데 결국 범인은 잡지도 못하고 가버리면 중필이 얼굴을 어찌 보나 싶고…. 아직까지 죽은 아들 붙잡고 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범인이 잡히지 않았으니 끝이 난 게 아니잖아요.” 애지중지 키우던 아들을 황망하게 잃은 뒤, 어머니는 하루도 마음 편히 누워본 적이 없다. 게다가 범인을 눈앞에서 놓치고, 풀어주고, 결국에는 아무도 죗값을 치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어머니를 더욱 분하고 서럽게 만들었다. “지금도 그 이야기를 꺼내기만 해도 온몸이 덜덜 떨려요. 분하고 억울하고 속상하고 서럽고, 어떤 말로도 제 마음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거예요. 가슴에 굉장히 무거운 덩어리를 얹어놓고 사는 기분이었어요. 요즘도 자주 아들의 마지막 모습을 생각하곤 해요.” 사건이 있었던 1997년 4월 3일 밤, 그 시간부터 어머니의 세상은 암흑이 되었다. 아들이 병원에 있다는 경찰의 전화가 걸려왔을 때까지만 해도 그저 교통사고가 나서 입원을 했나보다 생각했었다. 급히 달려간 순천향대병원에서 아들의 얼굴을 보러 들어가려는 자신을 막아선 사람들이 “칼에 찔린 상태다”라고 이야기하기에 “우리 아들은 싸움은커녕 생전 욕 한 번 안 하던 아이인데, 다른 사람에게 잘못 연락한 거 아니냐”라고 물었던 어머니였다. 언제나 순하고 착했던 아들이 한밤중에 칼에 찔려 영안실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결코 믿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 이복수씨는 앨범 속 아들의 모습을 가만가만 손으로 쓰다듬었다. “참 훤칠했네요”라는 기자의 말에 “어릴 때부터 키가 컸어요. 초등학교 입학 때도 맨 뒤에 섰는걸요. 팔 다리가 길고 몸이 날씬해서 양복 입으면 모델같이 멋있었어요. 주변 사람들도 멋지다고 그랬어요. 중필이가 아주 미남은 아니지만 호감 가는 얼굴이거든요”라며 오랫동안 혼자서 속으로만 생각했던 아들의 이야기를 이것저것 꺼내놓았다. “당시에 저는 제대로 중필이를 보지도 못했어요. 사람들이 아버지만 들어가서 보고 저는 가지 말라고 하도 말려서요. 아홉 곳이나 칼에 찔렸다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처참했으면 다들 못 보게 했겠어요. 사실 제 눈으로 확인하면 믿고 싶지 않아도 사실이 될까봐 겁이 나기도 했어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때 얼굴이라도 만져볼 걸 그랬다는 생각에 후회가 돼요.” 위로 세 딸을 낳고 뒤늦게 얻은 귀한 아들이었다. 아들인데도 막내라 그런지 살가운 성격이었던 중필씨는 엄마를 자상하게 챙겼다. 공부도 잘하고 바른 성격이라 학교 선생님들이나 동네 어른들께도 늘 칭찬만 받았었다. “저는 제 인생에서 중필이를 전부로 생각하고 살아왔어요. 그때만해도 딸을 낳으면 죄인 취급받던 분위기였는데, 딸 셋을 낳고 중필이를 얻었으니 얼마나 소중했겠어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쁜 마음으로 애지중지 키웠던 아이예요. 그런데다 크면서 말썽 한 번 부린 적 없고, 딸들보다 저한테 더 살갑게 구는 정말 ‘엄마라면 껌뻑 죽는’ 그런 아들이었어요. 아버지도 그래서 중필이를 아꼈고, 누나들도 싹싹한 동생을 예뻐했고요.” 이 세상 어느 누가 제 자식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있겠냐마는 중필씨는 그렇게 어머니에게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존재였다. 가족 사이에서도 늘 웃을 일을 만드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중필씨가 하루아침에 사라졌고 그때부터 가족은 눈물로 남은 세월을 살아왔다. “집에 ‘웃음’이란 게 없어졌어요. 중필이 생각이 나도 남편이나 딸들 모두 힘든 거 아니까 이야기도 못 꺼냈어요. 다들 만날 울면서 지냈어요. 남편은 한때 저를 무척 원망하기도 했었어요. 그때 중필이가 군대에서 다쳐서 의가사제대를 하고 지내던 상태였는데 만약에 그냥 군대에 있었으면 이런 일은 없지 않았겠냐는 거죠. 남편은 그냥 있으라고 했는데 제가 의가사제대를 고집했거든요.” 다시는 볼 수 없는 아들을 생각하면 지나간 모든 일이 후회스럽고 아쉽지만, 특히 틈만 나면 “가족끼리 같이 여행 한 번 가자”라고 말하던 아들의 그 바람을 들어주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아프게 마음에 남아 있다. “중필이가 대학생이 되고 그렇게 클 때까지, 한 번도 가족 여행을 못 갔어요. 2006년이었나, 군대 가기 전 시간이 있을 때 진해군항제에 벚꽃 구경 가려고 했는데 제가 허리가 너무 아파서 결국 떠나질 못했어요. 그 다음해 봄에는 통증이 더 심해져서 또 못 가고요. 그 일이 있기 얼마 전에 가까운 데라도 다녀오자는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렇게 되고 만 거죠.” 죽지 않고 살았더라면 이제 서른여덟. 한창 왕성하게 사회생활도 하고 바쁘게 살아갈 시기다. 아마도 마음 따뜻한 좋은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주말이면 올망졸망 귀여운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아빠가 되어 있을 것이다. “14년 동안 매일 ‘중필이가 살아 있었다면’을 그려왔던 것 같아요. 이것도 했겠지, 저것도 겪었겠지, 이런 모습이 되었겠지, 저런 일도 있었겠지, 하면서요. 늘 사무치게 보고 싶지만 추석이나 설날 같은 때는 그리움이 더해요. 식구들 웃음소리가 새어나오는 다른 집을 보면 아들 생각이 더 많이 나기도 하고, 분한 마음이 다시 치밀어 오르기도 하고 그래요.” ‘잘못한 사람이 벌을 받는’ 상식이 이루어지는 사회 어머니 이복수씨를 비롯한 가족은 지난 14년 동안 조중필씨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여왔다. 도움이 될만한 시민단체를 찾아다니고 검찰, 국회 등의 권력기관에도 적극적인 해결을 촉구했다. 패터슨의 한국 송환과 재수사를 요구하는 집회를 하고, 시민들을 상대로 일일이 서명을 받으러 다녔다. 석연치 않았던 부실한 검찰 수사에 대해서는 대법원까지 가는 법정 투쟁을 벌여 2006년에 배상금 3천400만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아들이 세상에 없는데, 그리고 그 아들을 죽인 이들이 아무런 벌도 받지 않고 버젓이 살아가고 있는데, 돈이 무슨 소용이겠으며 어떻게 단념하고 조용히 살 수 있었겠는가. 어느 날 갑자기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故 조중필씨. 그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사진은 사건이 일어나기 얼마 전 조카와 함께 올림픽 공원으로 나들이를 나섰을 때와 대학 시절의 조중필씨 모습. 그는 지금 하늘나라에서 어떤 모습으로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을까. “얼마 전에 신문 보도를 보니 미국에서 잡힌 패터슨이 ‘한국에서는 나를 절대 못 데려 간다’라고 조롱했다면서요. 너무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더라고요. 사건 직후 재판받을 때도 그랬어요. 두 사람 모두 우리한테 미안한 기색 하나 없었어요. 그 사람들 부모들도 사과 한 번 없었고요. 그리고 저는 살인범이 내 자식을 죽여놓고 어떻게 그렇게 편하게 지낼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시비가 붙었던 것도 아니고, 재미로 찔렀다고 했다잖아요. 기가 막힐 뿐이었죠.” 지금도 법정에서 봤던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몸서리가 처질 정도로 소름이 돋는다는 이복수씨는 이번만큼은 꼭 용의자를 데려와 한국 재판정에 세우고 범인을 명확히 밝혀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단순한 분노나 복수심을 넘어 그렇게 되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14년 전 대한민국의 법과 권위를 믿고 아들의 사건을 맡겼던 어머니는 앞으로도 끝까지 대한민국 정부와 법을 원망하고 불신하며 살고 싶지 않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 나라 국민이 아무 이유 없이 이 땅에서 목숨을 잃은 거잖아요. 적어도 내 나라 국민만큼은 지켜주는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선량한 우리 국민은 지키지 못하고, 살인범은 두둔해서 이제껏 잘 살게 내버려둔 걸 생각하면 분해서 몸이 덜덜 떨리지만 그래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이번만큼은 제발 잘 해결해주길 부탁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이복수씨는 최근 잇따라 발생하고 있는 미군 성범죄사건 등을 바라보면 마음이 더 무거워진다고 했다. 그리고 아들의 사건을 꼭 해결해야겠다는 각오를 더욱 다지게 된다고. 높은 자리에 있고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 좀 더 책임감과 의무감을 갖고 적극적으로 노력해주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한편으로는 가족만큼은 아니겠지만 국민들도 중필씨 사건을 잊지 말고 힘을 실어주었으면 하는 생각도 해본다. 마지막으로 “배운 것 없고, 아는 것 없다”라고 말씀하시고는 어머니가 기자에게 물었다. “그런데 잘못한 일을 저지른 사람한테 잘못한 만큼 벌을 받게 하는 게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일인가요?”라고. “상식적으로 잘못을 했다면 뉘우치고 사과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라고. 그의 물음이 끝까지 의문으로 남지 않도록 이제는 모든 진실이 명확히 밝혀지고 상식적인 판결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란다. <■글 / 이연우 기자 ■사진 / 이성원>
‘만삭 부인 살해 사건’ 피해자 아버지 심경 인터뷰
2011. 09. 28 17:28 화제
ㆍ“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딸, 이제 좋은 곳으로 가 편히 쉬었으면…” 8개월 동안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며 이목을 집중시킨 만삭 부인 살해사건에 대한 법원의 판결이 내려졌다. 법원은 만삭인 아내를 목 졸라 숨지게 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남편 백씨(31)에게 징역 20년형을 선고했다. 지난 9월 15일, 만삭의 부인을 목 졸라 살해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의사 남편에게 법원이 유죄를 선고했다. 남편 백씨는 징역 20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남편 백씨는 자신의 아이를 임신해 출산을 한 달 남긴 아내를 목 졸라 태아까지 사망에 이르게 해 비난의 가능성이 매우 크다”라며 “사건 직후 현장을 떠나 적극적으로 알리바이를 만들려 했고 피해자와 태아에 대한 애도 또한 보이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덧붙여 백씨가 예민한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이고 형사처벌 전력이 없는 점을 고려했다고 양형의 이유를 설명했다. 지난 1월 4일 만삭의 박 모씨(29)가 자택 욕조에 목이 꺾인 자세로 사망한 사건에 대해 검찰은 목 눌림에 의한 질식사를, 남편 측은 이상 자세에 의한 질식사를 주장하며 치열한 법정공방을 벌여왔다. 이로써 사건 발생 후 8개월 가까이 끌어온 이 사건은 법원이 의사 남편의 살해 혐의를 인정하며 일단락됐다. 현재 검찰과 백씨 측 모두 항소한 상태다. 1심 공판에서 검찰은 무기징역을, 백씨의 변호인 측은 “무죄가 아니면 사형을 선고해달라”라며 무죄를 주장했었다. 양쪽 모두 항소함에 따라 지루한 법정 공방은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이지만 진실이 밝혀지길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피 말리는 심정으로 지내온 피해자 가족에게는 희망적인 소식이 아닐 수가 없다. 떠났지만 보내지 못한 눈물의 8개월 판결이 내려지고 나흘 뒤인 19일, 피해자의 아버지 박창옥씨(58)와 전화 인터뷰를 통해 그간의 마음고생과 재판 결과에 대한 심경을 들을 수 있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동시에 말할 수 없는 허망함이 묻어났다. 안부를 묻는 질문에 “식음을 전폐하고 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딸을 떠나보낸 지 8개월, 떠났지만 보내지 못한 그 시간 동안 속은 이미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슬픔도 사치라 생각하며 참아왔던 눈물은 재판 결과를 듣는 순간 터져 나왔다. 지금은 다시 냉정을 되찾으려 노력하는 중인 듯했다. “재판 결과에 대해서는 사법부의 판단이기 때문에 제가 왈가왈부하지는 않으려고 해요. 20년형이라는 형량이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법원에서 진실을 가려줬다는 것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합니다.” 식음을 전폐하고 있다는 말에 건강 상태를 물으니 “다른 사람들에게 걱정 끼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라며 “앞으로 끝까지 진실을 밝히려면 건강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라고 덧붙였다. 박씨를 포함한 가족에게 지난 8개월은 슬픔과 불안의 나날이었다. 사건 당일 딸의 시신을 보고 타살을 직감했지만 진실은 쉽사리 밝혀지지 않았다. 치과 의사 모녀 살해사건과 비교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이번 사건은 대학병원 의사가 만삭의 아내를 살해했다는 혐의로 수사를 받게 되며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1995년에 발생했던 치과 의사 모녀 살해사건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당시 범인으로 지목됐던 외과 의사 이 모씨는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사건은 결국 진범을 밝혀내지 못한 채 미제 사건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사위 쪽이 공판에서 캐나다 토론토대 법의학센터장을 증인으로 세웠을 때 치과 의사 모녀 살해사건을 벤치마킹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당시에도 무죄 판결을 받는 데 해외 법의학자가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국내에도 믿을 만한 법의학자 분들이 계신데 그렇게까지 하는 걸 보고 사위 쪽이 치과 의사 모녀사건을 벤치마킹해서 분위기를 몰고 가려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어느 한 군데 초점이 맞춰지면 계속해서 그 쪽으로만 생각하게 되잖아요. 진실을 밝혀준 검찰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장례는 9월 중 불교식으로 치를 예정 재판 과정 중에 사위 측에서 합의나 연락을 취해온 적이 있는지 묻자 그는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그럴 사람들도 못 된다”라고 말했다. “연락 한 번 없었어요. 그간의 마음고생이야 이루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그 쪽 가족에게 마음의 상처를 많이 입었어요. 사위야 구속되어 있으니 직접적으로 부딪힐 일이 없었지만 그 쪽 가족은….” 그는 한숨을 쉬며 말을 줄였다. 사건 직후 사위가 바로 용서를 구했다면 모든 걸 덮어줄 마음도 있었지만 이제는 모든 게 소용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자기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쳤을 때 용서라는 것이 가능하잖아요, 제가 한 인터뷰 기사에 ‘사위가 건강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한 것으로 나갔는데 그건 정신적으로 건강했으면 좋겠다는 말이었어요. 지금은 용서를 하고 싶어도 용서를 할 대상이 없습니다.” 27년을 애지중지 키운 딸이었다. 딸은 시집을 가면 집을 떠나야 하는 출가외인이라, 그는 아들보다 딸을 더 애틋하게 키웠다. 사위와 6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했을 때만 해도 이런 비극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딸이었어요. 모든 부모가 그렇듯 저도 그렇게 딸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현재 가족과 딸의 장례를 준비하고 있다. 딸의 죽음을 밝히지 못한 상황에서 장례가 치러지면 진실도 함께 땅에 묻힐까봐 여태 장례도 치르지 못했다. 2백80일 동안 차디찬 냉동고에 갇혀 있던 딸을 이제는 보내줄 수 있을 것 같다. 딸의 장례는 9월 넷째 주 중 불교식으로 치를 예정이다. 그는 “20년 이상 키워온 아비로서 딸에겐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뿐입니다다”라며 “이제 좋은 곳으로 가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애틋한 마음을 드러냈다. 그리고 관심을 갖고 사건을 지켜봐준 이들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했다. “다들 누군가의 부모고 자식이기 때문에 남 일 같지 않게 느껴주신 게 아닌가 합니다. 관심 가져주신 분들께 감사해요.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는 끝으로 “부모님께 잘하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힘든 상황이었지만 그는 침착하고 성의 있게 인터뷰에 임했다. 때때로 감정이 복받칠 때도 평정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에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자식과 손주를 가슴에 묻은 아버지의 마음을 무슨 말로 위로할 수 있을까. 가족의 상처가 하루빨리 아물기를 바라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27년만에 간첩누명 벗은 ‘송씨 일가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 송기복씨
27년만에 간첩누명 벗은 ‘송씨 일가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 송기복씨
2009. 11. 09 15:26 화제
ㆍ“그래도 나는 행복한 피해자… ㆍ여전히 숨어 사는 다른 피해자들에게 힘이 돼주고 싶어요” 여름이 깊어가던 지난 8월의 어느 날 서울고등법원의 한 법정, 선고가 끝났지만 송기복씨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27년 동안 자신과 가족을 옥죄여 온 간첩 누명을 벗는 순간, 그저 눈물도 나오지 않고 가슴이 뻥 뚫렸을 뿐이다. 27년 전 멈춰진 시간, 그녀는 2009년 서른아홉의 가을을 맞고 있다. 1982년 멈춰버린 그녀의 봄 1982년 월북자를 가족으로 둔 송씨 일가 친·인척 28명에게 간첩 누명을 씌운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에 대해 지난 8월 28일 무죄판결이 내려졌다. 국가가 27년 만에 법정에서 공식적으로 사건의 조작을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판결이 내려지고 두 달 후, 사건의 피해자 송기복씨(67)를 서울 신림동 자택에서 만났다. 하얀 얼굴에 또렷한 음성, 밝게 웃으며 기자를 맞이하는 그녀에게서 억울하게 죄인으로 살았던 지난 30여 년의 세월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고운 피부 탓일까. 겉모습은 고생 없이 산 여느 60대 여성이지만 가슴속은 누명을 쓰고 산 천년 같은 세월에 까맣게 타들어간 지 이미 오래다. 신광여중에서 미술을 가르치던 그녀에게 안기부 직원들이 찾아온 건 1982년 봄이었다. “새학기 첫날 3교시 수업 중이었어요. 교장실에 손님이 왔다는 호출을 받고 갔더니 검은색 점퍼를 입은 남자 두 명이 앉아 있었어요. 친정아버지에 대해 물어볼 것이 있다며 함께 가자고 하더라고요. 사색이 되어 계신 교장선생님의 표정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죠.” 당시 그녀의 남편 송영섭씨는 공군 중령으로 공군본부작전상황실에 근무 중이었다. 상황을 남편에게 알렸고 남편이 안기부 직원들에게 영장을 요구했지만 그들은 “간단하게 몇 가지만 물어보고 오늘 내로 돌려보내겠다”라는 말을 남기고 그녀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지옥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그로부터 116일 동안 안기부 조사실에 불법 구금된 채 온갖 고문과 협박을 당해야 했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그녀는 “북한에 다녀온 것을 불라”며 시작된 모진 매질에 결국 “다녀왔다”고 거짓 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입에서 6·25때 월북한 아버지 ‘송창섭’이라는 이름이 나온 것은 매질을 견디던 어느 날이었다. 그해 9월, 안기부는 그녀를 포함한 송씨 일가 28명이, 북한에 체류 중인 ‘송창섭’을 정점으로 간첩 활동에 가담했다고 발표했다. ‘송충건’이라는 가명을 쓰는 이가 남파되었다는 한 전향 간첩의 진술에, 국가가 이들 가족을 전대미문의 가족 간첩단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간첩이라면 전염병 환자 보듯 했던 시절, 그녀는 주위의 차가운 눈초리와 간첩이라는 멍에를 쓴 채 사반세기를 견뎌야 했다. 고통의 순간 그녀를 지탱해준 남편의 사랑 신광여중 교사 재직 시절 학생들과 함께.서른아홉 청춘이었던 그녀는 이제 예순일곱의 노인이 되었다. 잃어버린 30년의 세월을 누가 보상해줄까.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를 ‘행복한 피해자’라고 말한다. 한 줄기 희망도 보이지 않던 절망의 순간 크고 작은 빛이 되어준 좋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고생한 거에 비해 곱게 나이 들었다고 하셨죠? 안기부에 끌려가 100일이 넘는 시간 동안 죽지 않을 만큼 고문을 당했어요. 그 후 누명 쓰고 살아야 했던 세월도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고요. 어떻게 곱게 늙을 수가 있겠어요. 그래도 지금 이렇게 천진하게 웃을 수 있는 건 다 남편 덕분이에요.” 그녀의 남편 송영섭씨는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한때 대통령 전용기를 몰던 전도유망한 공군 중령이었다. 하루아침에 간첩의 남편이 되어 강제로 예편당하고 안기부에 끌려가야 했지만 단 한 번도 원망이나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실이 밝혀질 날이 반드시 올 거라며 그녀와 가족을 위로한 사람이었다. “남편은 애국자였어요. 제가 교도소에 있을 때 면회를 와서 저에게 큰절을 하더라고요. 국민을 대표해서 당신에게 사과를 한다고. 자기는 내가 죄 없는 거 안다면서요. 제가 교도소에 있었던 116일 동안 딱 하루 빼고 매일 면회를 왔어요. 오죽했으면 교도관들이 제 사건을 ‘춘향이 사건’이라고 불렀겠어요. 그렇게 저에게 용기를 준 사람이에요. 그런 남편이 있었기에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시간을 보낼 수 있었어요.” 그녀가 고문 후유증으로 교도소에 있을 때보다 더 괴로운 시간을 보낼 때에도 남편은 꿋꿋이 그녀 옆을 지켰다. “제가 안기부라는 지옥을 나와 집에 돌아왔을 때에는 가족들이 지옥이었어요. 고문 후유증 때문에 집안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죠. 주변에서 다 이혼하라고 했어요. 너무 괴로워서 저조차도 남편한테 이혼하자고 했을 정도예요. 그래도 남편은 끝까지 제 곁을 지켜줬어요. 간첩 누명까지 썼던 제가 ‘복 많은 여자’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건 남편 덕분이에요.” 안기부에서는 그녀가 엘리트 장교라는 이유로 남편에게 접근했다고 모함했지만 두 사람은 같은 고향 출신이다. 충북 음성에서 함께 학교를 다닌 두 사람은 한국전쟁 때 헤어졌다 성인이 된 뒤 다시 만났고 사랑하는 사이가 됐다. 월북자를 아버지로 뒀다는 이유로 어렸을 때부터 손가락질을 당해야 했던 그녀를 지켜준 것이 남편이었다. “한국전쟁 직후 국시(國是)가 반공이던 시절이었어요. 학교에서도 ‘빨갱이 자식’이라 손가락질 받기 일쑤였죠. 항상 혼자 담벼락에 숨어 울고 있으면 남편이 저를 데리고 가 놀아줬어요. 그때가 일고여덟 살 아주 어렸을 때였는데 그때 남편이 저를 보고 ‘이 사람은 내가 지켜줘야겠다’고 생각했다고 그러더군요.” 빨갱이 자식이 빨갱이 가족을 만드는 게 싫어 그녀는 수녀가 되고 싶었다. 게다가 두 사람은 동성동본이었다.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두 사람이 결혼에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남편의 절대적인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일평생 사랑을 주기만 했던 남편은 끝내 그녀가 누명을 벗는 걸 보지 못하고 2002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지난 7월, 그녀는 법정 최후 진술에서 남편의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적셨다. “눈감는 날까지 저에게 용기를 잃지 말고 진실을 밝히라고 격려했던 남편, 이 자리를 그 누구보다도 기뻐할 남편의 무덤에 무죄라고 적힌 판결문을 바치고 싶습니다.” 생명의 은인 황인철 변호사 그녀는 지난 1993년 세상을 떠난 고(故) 황인철 변호사와도 인연이 깊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 1978년 동일방직 노동사건, 박종철 손해배상 청구 등 남들이 꺼려하는 시국사건 변론을 마다하지 않았던 황인철 변호사는 그녀를 누명의 굴레를 벗겨준 은인이다. 그녀가 처음 황 변호사를 만난 건 1982년 1심에서 간첩죄로 10년 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고등법원에서 간첩방조죄로 2년으로 형량이 낮춰져 수감 중이었던 서대문구치소에서였다. “수감자 운동시간이 돼서 하얀 담벼락에 기대선 채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한 무리의 여수인(女囚人)들이 제 이름을, 세례명을 부르고 뛰어가더라고요. 데모하다가 집시법 위반으로 잡혀온 학생들인 것 같았는데 교도관 몰래 한 명씩 와서 저에게 암호 같은 말을 하고 가는 거예요.” 한 명이 와서 “아줌마가 율리아(송기복씨의 본명)씨예요?”라고 묻고 가면 또 한 명이 와서 “아줌마 가족을 만나고 싶어 하는 변호사가 있어요”라고 했다. 다음 학생이 와서 “그분이 황인철 변호사예요”라고 말하는 순간 그녀는 표현할 수 없는 긴장감과 함께 어렴풋이 빛이 보이는 걸 느꼈다. 혹시나 그 이름을 잊을까 방으로 돌아와 수없이 되뇌이고 또 되뇌었다. “어떤 변호사이기에 문둥병 환자보다 못하다는 간첩단 사건의 피의자 가족을 만나고 싶어 할까 싶었죠. 안기부만 나오면 법정에서 나의 모든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는 믿음은 산산이 깨져버린 지 오래였고 나는 이렇게 간첩이 되는가 보다 하고 자포자기한 상태였어요. 우리 가족을 만나고 싶어 하는 변호사가 있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누구인지는 몰라도 내 누명을 벗겨줄 변호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갖 상념이 교차되던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렇게 학생들로부터 황 변호사의 뜻을 전해 듣고 이번에는 남편에게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한 ‘007 작전’이 펼쳐졌다. 남편이 면회를 오면 입회 교도관이 대화 내용을 기록하지 않는 틈을 타 한마디, 한마디씩 남편에게 말을 전했다. 남편이 황인철 변호사가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채기까지 몇 날 며칠이 걸렸다. 후에 남편으로부터 들은 얘기가 “이 여자가 죽도록 고문을 받았다더니 이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구나” 하고 기막혀했다고 한다. “사건이 있기 전까지 전 간첩행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조차 몰랐던 평범한 교사였어요. 간첩 피의자가 되고 나서 변호사 선임을 위해 간첩 같은 짓을 하는 걸 보고 쓴웃음이 나왔죠.”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맨 처음 황 변호사를 만났을 때 그가 했던 말이 “율리아씨는 정말 행복한 분입니다”였다. 보통 부부 중에 어느 한쪽이 간첩죄의 피의자가 될 경우 거의 예외 없이 다른 한쪽도 간첩 피의자가 되는데 그녀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첫 번째, 지극정성으로 아내와 아이들을 돌보며 아내의 구명운동을 위해 노력하는 남편이 있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그리고 머지않아 세상이 이번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될 것이고 누명을 벗을 것이라는 것이 세 번째 이유였다. 1984년 이들 사건이 재재파기환송심에서 최종 유죄판결이 내려지기까지 무려 7차례나 재판이 진행될 정도로 사법 사상 유례 없는 ‘핑퐁재판’을 벌이긴 했지만 그때 황 변호사의 말대로 이제 국가가 그녀의 무죄를 인정하고 세상이 그녀의 결백을 알았다. 누명을 벗은 이 순간을 그들과 함께 나누지 못하는 것은 한이 되지만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삶을 밝혀준 좋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여생을 보낼 생각이다. 그녀는 요즘 민주화 관련 NGO단체들과 함께 여러 활동에 참여 중이다. 얼마 전에는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의 요청으로 대학 강단에 서기도 했다. “저는 그래도 행복한 피해자예요. 저를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았고 그나마 글이라도 배워서 억울함을 외칠 수 있었지만 아직도 사회의 시선 속에 숨죽여 사는 분들이 많아요. 그분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죄송한 마음입니다. 제가 도움을 받았던 만큼 저도 그분들께 힘을 보태며 남은 인생을 보내고 싶습니다.” ■글 / 노정연 기자 ■ 사진&사진 제공 / 원상희, 송기복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