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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원 살인사건 그 후 14년…피해자 어머니 이복수씨 인터뷰
- 2011. 10. 28 16:32 화제
- 지난 10월 10일, 일명 ‘이태원 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인 아서 패터슨이 미국에서 붙잡혀 한국 송환 여부에 대한 인도재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1997년 4월 일어난 한 대학생의 죽음은 피해자와 용의자는 있으나 범인은 밝혀지지 않은 미해결사건으로 남아버렸고, 그렇게 14년이 흐른 지금 다시 한번 세상의 눈과 귀를 집중시키고 있다. 그리고 아직도 아들 생각에 밤잠을 설친다는 어머니는 이번에는 반드시 아들의 한을 풀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사건의 전모 아직도 많은 이들이 1997년 발생한 ‘이태원 살인사건’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사건의 자세한 전말은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아무도 죗값을 치르지 않은 ‘이상한’ 사건으로 남았다는 것 정도는 세간에 잘 알려져 있다. 1997년 4월 3일 밤 10시께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의 한 햄버거 가게 화장실에서 홍익대 휴학생이던 조중필씨(당시 23세)가 휴대용 주머니칼에 찔려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피투성이인 채로 소변기 옆 귀퉁이에 쓰러져 있던 중필씨는 오른쪽 목 부위 세 곳, 가슴 부위 두 곳, 왼쪽 목 부위 네 곳, 무려 아홉 곳이 칼에 찔려 있었다. 급히 도착한 119구조대가 상태를 살폈을 때 이미 그는 사망한 상태였다.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은 두 사람이었다. 당시 같은 가게에서 햄버거를 먹다가 중필씨가 있는 화장실에 들어간 아서 패터슨(당시 18세)과 에드워드 리(당시 17세). 두 사람은 모두 미국 국적 소지자로 리는 미국에서 태어난 재미교포였고,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패터슨은 주한미군인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와 있는 상황이었다. 수사당국은 이튿날 패터슨을 검거했고, 리를 쫓기 시작했으나 리는 4월 8일 검찰에 자수했다. 두 사람은 각각 살인죄와 증거 인멸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됐다. 당시 검찰은 리를 살인범으로 판단하고 수사를 진행했다. 근거는 부검 결과와 주변인들의 진술 그리고 거짓말탐지기 결과였다. 부검의의 소견에 따르면 가해자는 피해자보다 키나 덩치가 크고 힘이 센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수사가 진행될 당시 패터슨의 키는 170cm에 못 미쳤던 반면 리는 키가 180cm가 넘고 몸무게가 100kg 가까이 나가는 체격이었다. 거짓말탐지기 또한 리는 거짓을 말하는 것으로 판독되면서 리가 범인일 가능성에 좀 더 무게가 실렸다. 결국 살인죄로 기소된 리는 1997년 10월 서울지방법원과 1998년 1월 서울고등법원에서 징역 20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다시 항소한 1998년 4월 대법원은 ‘단독 범행을 단정하기 어렵다’라는 이유로 무죄 취지의 판결을 내리며 다시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이후 서울고등법원은 리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1999년 9월 열린 재상고심에서 대법원은 무죄 확정 판결을 내렸다. 그 사이 패터슨은 1998년 1월 서울고등법원에서 증거 인멸 등의 혐의에 대해 징역 장기 1년 6월, 단기 1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하던 중 그해 8·15 특사로 풀려났다. 피해자 가족은 리가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난 데 대해 항의하며 정황상 범인으로 판단되는 패터슨을 살인 혐의로 고소했고 검찰은 재수사를 발표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알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출국금지 상태에서 패터슨을 수사하던 검찰이 출국금지 연장을 제때 하지 않는 바람에 그 틈을 탄 패터슨이 미국으로 출국해버렸고 사실상 수사는 중단되고 만 것이다. 한 남자의 억울한 죽음에 얽힌 전모를 살펴보면 대강 이렇다. 그리고 2011년 10월 그동안 행적을 알 수 없던 용의자 패터슨이 지난 8월 미국 LA 현지 사법당국에 체포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건이 발생한 지 14년 만이다. 살인죄 공소시효는 15년. 이제 6개월도 채 남지 않은 시간이다. 하지만 범죄인 인도 결정에 관련한 재판은 대개 길게는 3, 4년씩 걸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다양한 방안을 강구해봐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인생의 전부였던 아들, 암흑 같던 14년의 시간 지금 이 순간 패터슨의 송환 결정을 누구보다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아마 피해자 고(故) 조중필씨의 가족일 것이다. 1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는 어머니 이복수씨(69)는 하루 빨리 패터슨이 한국으로 송환돼 법의 심판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죄를 저지른 사람이 벌을 받아야 (사건이) 끝나는 거죠. 패터슨이 미국에서 체포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번에는 정말 억울하게 하늘나라로 간 우리 중필이 한을 풀어주고, 14년을 울면서 살아온 우리도 한을 풀게 되나보다 했더니 일단 그쪽에서 재판이 끝나봐야 안다고 하네요. 재판이 1년이 될지 그보다 더 길어질지도 알 수 없는데 그저 답답하기만 해요. 나는 점점 늙어가는데 결국 범인은 잡지도 못하고 가버리면 중필이 얼굴을 어찌 보나 싶고…. 아직까지 죽은 아들 붙잡고 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범인이 잡히지 않았으니 끝이 난 게 아니잖아요.” 애지중지 키우던 아들을 황망하게 잃은 뒤, 어머니는 하루도 마음 편히 누워본 적이 없다. 게다가 범인을 눈앞에서 놓치고, 풀어주고, 결국에는 아무도 죗값을 치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어머니를 더욱 분하고 서럽게 만들었다. “지금도 그 이야기를 꺼내기만 해도 온몸이 덜덜 떨려요. 분하고 억울하고 속상하고 서럽고, 어떤 말로도 제 마음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거예요. 가슴에 굉장히 무거운 덩어리를 얹어놓고 사는 기분이었어요. 요즘도 자주 아들의 마지막 모습을 생각하곤 해요.” 사건이 있었던 1997년 4월 3일 밤, 그 시간부터 어머니의 세상은 암흑이 되었다. 아들이 병원에 있다는 경찰의 전화가 걸려왔을 때까지만 해도 그저 교통사고가 나서 입원을 했나보다 생각했었다. 급히 달려간 순천향대병원에서 아들의 얼굴을 보러 들어가려는 자신을 막아선 사람들이 “칼에 찔린 상태다”라고 이야기하기에 “우리 아들은 싸움은커녕 생전 욕 한 번 안 하던 아이인데, 다른 사람에게 잘못 연락한 거 아니냐”라고 물었던 어머니였다. 언제나 순하고 착했던 아들이 한밤중에 칼에 찔려 영안실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결코 믿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 이복수씨는 앨범 속 아들의 모습을 가만가만 손으로 쓰다듬었다. “참 훤칠했네요”라는 기자의 말에 “어릴 때부터 키가 컸어요. 초등학교 입학 때도 맨 뒤에 섰는걸요. 팔 다리가 길고 몸이 날씬해서 양복 입으면 모델같이 멋있었어요. 주변 사람들도 멋지다고 그랬어요. 중필이가 아주 미남은 아니지만 호감 가는 얼굴이거든요”라며 오랫동안 혼자서 속으로만 생각했던 아들의 이야기를 이것저것 꺼내놓았다. “당시에 저는 제대로 중필이를 보지도 못했어요. 사람들이 아버지만 들어가서 보고 저는 가지 말라고 하도 말려서요. 아홉 곳이나 칼에 찔렸다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처참했으면 다들 못 보게 했겠어요. 사실 제 눈으로 확인하면 믿고 싶지 않아도 사실이 될까봐 겁이 나기도 했어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때 얼굴이라도 만져볼 걸 그랬다는 생각에 후회가 돼요.” 위로 세 딸을 낳고 뒤늦게 얻은 귀한 아들이었다. 아들인데도 막내라 그런지 살가운 성격이었던 중필씨는 엄마를 자상하게 챙겼다. 공부도 잘하고 바른 성격이라 학교 선생님들이나 동네 어른들께도 늘 칭찬만 받았었다. “저는 제 인생에서 중필이를 전부로 생각하고 살아왔어요. 그때만해도 딸을 낳으면 죄인 취급받던 분위기였는데, 딸 셋을 낳고 중필이를 얻었으니 얼마나 소중했겠어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쁜 마음으로 애지중지 키웠던 아이예요. 그런데다 크면서 말썽 한 번 부린 적 없고, 딸들보다 저한테 더 살갑게 구는 정말 ‘엄마라면 껌뻑 죽는’ 그런 아들이었어요. 아버지도 그래서 중필이를 아꼈고, 누나들도 싹싹한 동생을 예뻐했고요.” 이 세상 어느 누가 제 자식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있겠냐마는 중필씨는 그렇게 어머니에게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존재였다. 가족 사이에서도 늘 웃을 일을 만드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중필씨가 하루아침에 사라졌고 그때부터 가족은 눈물로 남은 세월을 살아왔다. “집에 ‘웃음’이란 게 없어졌어요. 중필이 생각이 나도 남편이나 딸들 모두 힘든 거 아니까 이야기도 못 꺼냈어요. 다들 만날 울면서 지냈어요. 남편은 한때 저를 무척 원망하기도 했었어요. 그때 중필이가 군대에서 다쳐서 의가사제대를 하고 지내던 상태였는데 만약에 그냥 군대에 있었으면 이런 일은 없지 않았겠냐는 거죠. 남편은 그냥 있으라고 했는데 제가 의가사제대를 고집했거든요.” 다시는 볼 수 없는 아들을 생각하면 지나간 모든 일이 후회스럽고 아쉽지만, 특히 틈만 나면 “가족끼리 같이 여행 한 번 가자”라고 말하던 아들의 그 바람을 들어주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아프게 마음에 남아 있다. “중필이가 대학생이 되고 그렇게 클 때까지, 한 번도 가족 여행을 못 갔어요. 2006년이었나, 군대 가기 전 시간이 있을 때 진해군항제에 벚꽃 구경 가려고 했는데 제가 허리가 너무 아파서 결국 떠나질 못했어요. 그 다음해 봄에는 통증이 더 심해져서 또 못 가고요. 그 일이 있기 얼마 전에 가까운 데라도 다녀오자는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렇게 되고 만 거죠.” 죽지 않고 살았더라면 이제 서른여덟. 한창 왕성하게 사회생활도 하고 바쁘게 살아갈 시기다. 아마도 마음 따뜻한 좋은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주말이면 올망졸망 귀여운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아빠가 되어 있을 것이다. “14년 동안 매일 ‘중필이가 살아 있었다면’을 그려왔던 것 같아요. 이것도 했겠지, 저것도 겪었겠지, 이런 모습이 되었겠지, 저런 일도 있었겠지, 하면서요. 늘 사무치게 보고 싶지만 추석이나 설날 같은 때는 그리움이 더해요. 식구들 웃음소리가 새어나오는 다른 집을 보면 아들 생각이 더 많이 나기도 하고, 분한 마음이 다시 치밀어 오르기도 하고 그래요.” ‘잘못한 사람이 벌을 받는’ 상식이 이루어지는 사회 어머니 이복수씨를 비롯한 가족은 지난 14년 동안 조중필씨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여왔다. 도움이 될만한 시민단체를 찾아다니고 검찰, 국회 등의 권력기관에도 적극적인 해결을 촉구했다. 패터슨의 한국 송환과 재수사를 요구하는 집회를 하고, 시민들을 상대로 일일이 서명을 받으러 다녔다. 석연치 않았던 부실한 검찰 수사에 대해서는 대법원까지 가는 법정 투쟁을 벌여 2006년에 배상금 3천400만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아들이 세상에 없는데, 그리고 그 아들을 죽인 이들이 아무런 벌도 받지 않고 버젓이 살아가고 있는데, 돈이 무슨 소용이겠으며 어떻게 단념하고 조용히 살 수 있었겠는가. 어느 날 갑자기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故 조중필씨. 그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사진은 사건이 일어나기 얼마 전 조카와 함께 올림픽 공원으로 나들이를 나섰을 때와 대학 시절의 조중필씨 모습. 그는 지금 하늘나라에서 어떤 모습으로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을까. “얼마 전에 신문 보도를 보니 미국에서 잡힌 패터슨이 ‘한국에서는 나를 절대 못 데려 간다’라고 조롱했다면서요. 너무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더라고요. 사건 직후 재판받을 때도 그랬어요. 두 사람 모두 우리한테 미안한 기색 하나 없었어요. 그 사람들 부모들도 사과 한 번 없었고요. 그리고 저는 살인범이 내 자식을 죽여놓고 어떻게 그렇게 편하게 지낼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시비가 붙었던 것도 아니고, 재미로 찔렀다고 했다잖아요. 기가 막힐 뿐이었죠.” 지금도 법정에서 봤던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몸서리가 처질 정도로 소름이 돋는다는 이복수씨는 이번만큼은 꼭 용의자를 데려와 한국 재판정에 세우고 범인을 명확히 밝혀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단순한 분노나 복수심을 넘어 그렇게 되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14년 전 대한민국의 법과 권위를 믿고 아들의 사건을 맡겼던 어머니는 앞으로도 끝까지 대한민국 정부와 법을 원망하고 불신하며 살고 싶지 않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 나라 국민이 아무 이유 없이 이 땅에서 목숨을 잃은 거잖아요. 적어도 내 나라 국민만큼은 지켜주는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선량한 우리 국민은 지키지 못하고, 살인범은 두둔해서 이제껏 잘 살게 내버려둔 걸 생각하면 분해서 몸이 덜덜 떨리지만 그래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이번만큼은 제발 잘 해결해주길 부탁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이복수씨는 최근 잇따라 발생하고 있는 미군 성범죄사건 등을 바라보면 마음이 더 무거워진다고 했다. 그리고 아들의 사건을 꼭 해결해야겠다는 각오를 더욱 다지게 된다고. 높은 자리에 있고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 좀 더 책임감과 의무감을 갖고 적극적으로 노력해주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한편으로는 가족만큼은 아니겠지만 국민들도 중필씨 사건을 잊지 말고 힘을 실어주었으면 하는 생각도 해본다. 마지막으로 “배운 것 없고, 아는 것 없다”라고 말씀하시고는 어머니가 기자에게 물었다. “그런데 잘못한 일을 저지른 사람한테 잘못한 만큼 벌을 받게 하는 게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일인가요?”라고. “상식적으로 잘못을 했다면 뉘우치고 사과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라고. 그의 물음이 끝까지 의문으로 남지 않도록 이제는 모든 진실이 명확히 밝혀지고 상식적인 판결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란다. <■글 / 이연우 기자 ■사진 / 이성원>
- ‘만삭 부인 살해 사건’ 피해자 아버지 심경 인터뷰
- 2011. 09. 28 17:28 화제
- ㆍ“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딸, 이제 좋은 곳으로 가 편히 쉬었으면…” 8개월 동안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며 이목을 집중시킨 만삭 부인 살해사건에 대한 법원의 판결이 내려졌다. 법원은 만삭인 아내를 목 졸라 숨지게 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남편 백씨(31)에게 징역 20년형을 선고했다. 지난 9월 15일, 만삭의 부인을 목 졸라 살해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의사 남편에게 법원이 유죄를 선고했다. 남편 백씨는 징역 20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남편 백씨는 자신의 아이를 임신해 출산을 한 달 남긴 아내를 목 졸라 태아까지 사망에 이르게 해 비난의 가능성이 매우 크다”라며 “사건 직후 현장을 떠나 적극적으로 알리바이를 만들려 했고 피해자와 태아에 대한 애도 또한 보이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덧붙여 백씨가 예민한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이고 형사처벌 전력이 없는 점을 고려했다고 양형의 이유를 설명했다. 지난 1월 4일 만삭의 박 모씨(29)가 자택 욕조에 목이 꺾인 자세로 사망한 사건에 대해 검찰은 목 눌림에 의한 질식사를, 남편 측은 이상 자세에 의한 질식사를 주장하며 치열한 법정공방을 벌여왔다. 이로써 사건 발생 후 8개월 가까이 끌어온 이 사건은 법원이 의사 남편의 살해 혐의를 인정하며 일단락됐다. 현재 검찰과 백씨 측 모두 항소한 상태다. 1심 공판에서 검찰은 무기징역을, 백씨의 변호인 측은 “무죄가 아니면 사형을 선고해달라”라며 무죄를 주장했었다. 양쪽 모두 항소함에 따라 지루한 법정 공방은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이지만 진실이 밝혀지길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피 말리는 심정으로 지내온 피해자 가족에게는 희망적인 소식이 아닐 수가 없다. 떠났지만 보내지 못한 눈물의 8개월 판결이 내려지고 나흘 뒤인 19일, 피해자의 아버지 박창옥씨(58)와 전화 인터뷰를 통해 그간의 마음고생과 재판 결과에 대한 심경을 들을 수 있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동시에 말할 수 없는 허망함이 묻어났다. 안부를 묻는 질문에 “식음을 전폐하고 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딸을 떠나보낸 지 8개월, 떠났지만 보내지 못한 그 시간 동안 속은 이미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슬픔도 사치라 생각하며 참아왔던 눈물은 재판 결과를 듣는 순간 터져 나왔다. 지금은 다시 냉정을 되찾으려 노력하는 중인 듯했다. “재판 결과에 대해서는 사법부의 판단이기 때문에 제가 왈가왈부하지는 않으려고 해요. 20년형이라는 형량이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법원에서 진실을 가려줬다는 것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합니다.” 식음을 전폐하고 있다는 말에 건강 상태를 물으니 “다른 사람들에게 걱정 끼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라며 “앞으로 끝까지 진실을 밝히려면 건강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라고 덧붙였다. 박씨를 포함한 가족에게 지난 8개월은 슬픔과 불안의 나날이었다. 사건 당일 딸의 시신을 보고 타살을 직감했지만 진실은 쉽사리 밝혀지지 않았다. 치과 의사 모녀 살해사건과 비교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이번 사건은 대학병원 의사가 만삭의 아내를 살해했다는 혐의로 수사를 받게 되며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1995년에 발생했던 치과 의사 모녀 살해사건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당시 범인으로 지목됐던 외과 의사 이 모씨는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사건은 결국 진범을 밝혀내지 못한 채 미제 사건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사위 쪽이 공판에서 캐나다 토론토대 법의학센터장을 증인으로 세웠을 때 치과 의사 모녀 살해사건을 벤치마킹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당시에도 무죄 판결을 받는 데 해외 법의학자가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국내에도 믿을 만한 법의학자 분들이 계신데 그렇게까지 하는 걸 보고 사위 쪽이 치과 의사 모녀사건을 벤치마킹해서 분위기를 몰고 가려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어느 한 군데 초점이 맞춰지면 계속해서 그 쪽으로만 생각하게 되잖아요. 진실을 밝혀준 검찰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장례는 9월 중 불교식으로 치를 예정 재판 과정 중에 사위 측에서 합의나 연락을 취해온 적이 있는지 묻자 그는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그럴 사람들도 못 된다”라고 말했다. “연락 한 번 없었어요. 그간의 마음고생이야 이루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그 쪽 가족에게 마음의 상처를 많이 입었어요. 사위야 구속되어 있으니 직접적으로 부딪힐 일이 없었지만 그 쪽 가족은….” 그는 한숨을 쉬며 말을 줄였다. 사건 직후 사위가 바로 용서를 구했다면 모든 걸 덮어줄 마음도 있었지만 이제는 모든 게 소용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자기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쳤을 때 용서라는 것이 가능하잖아요, 제가 한 인터뷰 기사에 ‘사위가 건강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한 것으로 나갔는데 그건 정신적으로 건강했으면 좋겠다는 말이었어요. 지금은 용서를 하고 싶어도 용서를 할 대상이 없습니다.” 27년을 애지중지 키운 딸이었다. 딸은 시집을 가면 집을 떠나야 하는 출가외인이라, 그는 아들보다 딸을 더 애틋하게 키웠다. 사위와 6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했을 때만 해도 이런 비극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딸이었어요. 모든 부모가 그렇듯 저도 그렇게 딸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현재 가족과 딸의 장례를 준비하고 있다. 딸의 죽음을 밝히지 못한 상황에서 장례가 치러지면 진실도 함께 땅에 묻힐까봐 여태 장례도 치르지 못했다. 2백80일 동안 차디찬 냉동고에 갇혀 있던 딸을 이제는 보내줄 수 있을 것 같다. 딸의 장례는 9월 넷째 주 중 불교식으로 치를 예정이다. 그는 “20년 이상 키워온 아비로서 딸에겐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뿐입니다다”라며 “이제 좋은 곳으로 가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애틋한 마음을 드러냈다. 그리고 관심을 갖고 사건을 지켜봐준 이들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했다. “다들 누군가의 부모고 자식이기 때문에 남 일 같지 않게 느껴주신 게 아닌가 합니다. 관심 가져주신 분들께 감사해요.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는 끝으로 “부모님께 잘하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힘든 상황이었지만 그는 침착하고 성의 있게 인터뷰에 임했다. 때때로 감정이 복받칠 때도 평정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에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자식과 손주를 가슴에 묻은 아버지의 마음을 무슨 말로 위로할 수 있을까. 가족의 상처가 하루빨리 아물기를 바라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 27년만에 간첩누명 벗은 ‘송씨 일가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 송기복씨
- 2009. 11. 09 15:26 화제
- ㆍ“그래도 나는 행복한 피해자… ㆍ여전히 숨어 사는 다른 피해자들에게 힘이 돼주고 싶어요” 여름이 깊어가던 지난 8월의 어느 날 서울고등법원의 한 법정, 선고가 끝났지만 송기복씨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27년 동안 자신과 가족을 옥죄여 온 간첩 누명을 벗는 순간, 그저 눈물도 나오지 않고 가슴이 뻥 뚫렸을 뿐이다. 27년 전 멈춰진 시간, 그녀는 2009년 서른아홉의 가을을 맞고 있다. 1982년 멈춰버린 그녀의 봄 1982년 월북자를 가족으로 둔 송씨 일가 친·인척 28명에게 간첩 누명을 씌운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에 대해 지난 8월 28일 무죄판결이 내려졌다. 국가가 27년 만에 법정에서 공식적으로 사건의 조작을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판결이 내려지고 두 달 후, 사건의 피해자 송기복씨(67)를 서울 신림동 자택에서 만났다. 하얀 얼굴에 또렷한 음성, 밝게 웃으며 기자를 맞이하는 그녀에게서 억울하게 죄인으로 살았던 지난 30여 년의 세월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고운 피부 탓일까. 겉모습은 고생 없이 산 여느 60대 여성이지만 가슴속은 누명을 쓰고 산 천년 같은 세월에 까맣게 타들어간 지 이미 오래다. 신광여중에서 미술을 가르치던 그녀에게 안기부 직원들이 찾아온 건 1982년 봄이었다. “새학기 첫날 3교시 수업 중이었어요. 교장실에 손님이 왔다는 호출을 받고 갔더니 검은색 점퍼를 입은 남자 두 명이 앉아 있었어요. 친정아버지에 대해 물어볼 것이 있다며 함께 가자고 하더라고요. 사색이 되어 계신 교장선생님의 표정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죠.” 당시 그녀의 남편 송영섭씨는 공군 중령으로 공군본부작전상황실에 근무 중이었다. 상황을 남편에게 알렸고 남편이 안기부 직원들에게 영장을 요구했지만 그들은 “간단하게 몇 가지만 물어보고 오늘 내로 돌려보내겠다”라는 말을 남기고 그녀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지옥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그로부터 116일 동안 안기부 조사실에 불법 구금된 채 온갖 고문과 협박을 당해야 했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그녀는 “북한에 다녀온 것을 불라”며 시작된 모진 매질에 결국 “다녀왔다”고 거짓 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입에서 6·25때 월북한 아버지 ‘송창섭’이라는 이름이 나온 것은 매질을 견디던 어느 날이었다. 그해 9월, 안기부는 그녀를 포함한 송씨 일가 28명이, 북한에 체류 중인 ‘송창섭’을 정점으로 간첩 활동에 가담했다고 발표했다. ‘송충건’이라는 가명을 쓰는 이가 남파되었다는 한 전향 간첩의 진술에, 국가가 이들 가족을 전대미문의 가족 간첩단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간첩이라면 전염병 환자 보듯 했던 시절, 그녀는 주위의 차가운 눈초리와 간첩이라는 멍에를 쓴 채 사반세기를 견뎌야 했다. 고통의 순간 그녀를 지탱해준 남편의 사랑 신광여중 교사 재직 시절 학생들과 함께.서른아홉 청춘이었던 그녀는 이제 예순일곱의 노인이 되었다. 잃어버린 30년의 세월을 누가 보상해줄까.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를 ‘행복한 피해자’라고 말한다. 한 줄기 희망도 보이지 않던 절망의 순간 크고 작은 빛이 되어준 좋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고생한 거에 비해 곱게 나이 들었다고 하셨죠? 안기부에 끌려가 100일이 넘는 시간 동안 죽지 않을 만큼 고문을 당했어요. 그 후 누명 쓰고 살아야 했던 세월도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고요. 어떻게 곱게 늙을 수가 있겠어요. 그래도 지금 이렇게 천진하게 웃을 수 있는 건 다 남편 덕분이에요.” 그녀의 남편 송영섭씨는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한때 대통령 전용기를 몰던 전도유망한 공군 중령이었다. 하루아침에 간첩의 남편이 되어 강제로 예편당하고 안기부에 끌려가야 했지만 단 한 번도 원망이나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실이 밝혀질 날이 반드시 올 거라며 그녀와 가족을 위로한 사람이었다. “남편은 애국자였어요. 제가 교도소에 있을 때 면회를 와서 저에게 큰절을 하더라고요. 국민을 대표해서 당신에게 사과를 한다고. 자기는 내가 죄 없는 거 안다면서요. 제가 교도소에 있었던 116일 동안 딱 하루 빼고 매일 면회를 왔어요. 오죽했으면 교도관들이 제 사건을 ‘춘향이 사건’이라고 불렀겠어요. 그렇게 저에게 용기를 준 사람이에요. 그런 남편이 있었기에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시간을 보낼 수 있었어요.” 그녀가 고문 후유증으로 교도소에 있을 때보다 더 괴로운 시간을 보낼 때에도 남편은 꿋꿋이 그녀 옆을 지켰다. “제가 안기부라는 지옥을 나와 집에 돌아왔을 때에는 가족들이 지옥이었어요. 고문 후유증 때문에 집안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죠. 주변에서 다 이혼하라고 했어요. 너무 괴로워서 저조차도 남편한테 이혼하자고 했을 정도예요. 그래도 남편은 끝까지 제 곁을 지켜줬어요. 간첩 누명까지 썼던 제가 ‘복 많은 여자’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건 남편 덕분이에요.” 안기부에서는 그녀가 엘리트 장교라는 이유로 남편에게 접근했다고 모함했지만 두 사람은 같은 고향 출신이다. 충북 음성에서 함께 학교를 다닌 두 사람은 한국전쟁 때 헤어졌다 성인이 된 뒤 다시 만났고 사랑하는 사이가 됐다. 월북자를 아버지로 뒀다는 이유로 어렸을 때부터 손가락질을 당해야 했던 그녀를 지켜준 것이 남편이었다. “한국전쟁 직후 국시(國是)가 반공이던 시절이었어요. 학교에서도 ‘빨갱이 자식’이라 손가락질 받기 일쑤였죠. 항상 혼자 담벼락에 숨어 울고 있으면 남편이 저를 데리고 가 놀아줬어요. 그때가 일고여덟 살 아주 어렸을 때였는데 그때 남편이 저를 보고 ‘이 사람은 내가 지켜줘야겠다’고 생각했다고 그러더군요.” 빨갱이 자식이 빨갱이 가족을 만드는 게 싫어 그녀는 수녀가 되고 싶었다. 게다가 두 사람은 동성동본이었다.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두 사람이 결혼에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남편의 절대적인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일평생 사랑을 주기만 했던 남편은 끝내 그녀가 누명을 벗는 걸 보지 못하고 2002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지난 7월, 그녀는 법정 최후 진술에서 남편의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적셨다. “눈감는 날까지 저에게 용기를 잃지 말고 진실을 밝히라고 격려했던 남편, 이 자리를 그 누구보다도 기뻐할 남편의 무덤에 무죄라고 적힌 판결문을 바치고 싶습니다.” 생명의 은인 황인철 변호사 그녀는 지난 1993년 세상을 떠난 고(故) 황인철 변호사와도 인연이 깊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 1978년 동일방직 노동사건, 박종철 손해배상 청구 등 남들이 꺼려하는 시국사건 변론을 마다하지 않았던 황인철 변호사는 그녀를 누명의 굴레를 벗겨준 은인이다. 그녀가 처음 황 변호사를 만난 건 1982년 1심에서 간첩죄로 10년 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고등법원에서 간첩방조죄로 2년으로 형량이 낮춰져 수감 중이었던 서대문구치소에서였다. “수감자 운동시간이 돼서 하얀 담벼락에 기대선 채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한 무리의 여수인(女囚人)들이 제 이름을, 세례명을 부르고 뛰어가더라고요. 데모하다가 집시법 위반으로 잡혀온 학생들인 것 같았는데 교도관 몰래 한 명씩 와서 저에게 암호 같은 말을 하고 가는 거예요.” 한 명이 와서 “아줌마가 율리아(송기복씨의 본명)씨예요?”라고 묻고 가면 또 한 명이 와서 “아줌마 가족을 만나고 싶어 하는 변호사가 있어요”라고 했다. 다음 학생이 와서 “그분이 황인철 변호사예요”라고 말하는 순간 그녀는 표현할 수 없는 긴장감과 함께 어렴풋이 빛이 보이는 걸 느꼈다. 혹시나 그 이름을 잊을까 방으로 돌아와 수없이 되뇌이고 또 되뇌었다. “어떤 변호사이기에 문둥병 환자보다 못하다는 간첩단 사건의 피의자 가족을 만나고 싶어 할까 싶었죠. 안기부만 나오면 법정에서 나의 모든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는 믿음은 산산이 깨져버린 지 오래였고 나는 이렇게 간첩이 되는가 보다 하고 자포자기한 상태였어요. 우리 가족을 만나고 싶어 하는 변호사가 있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누구인지는 몰라도 내 누명을 벗겨줄 변호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갖 상념이 교차되던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렇게 학생들로부터 황 변호사의 뜻을 전해 듣고 이번에는 남편에게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한 ‘007 작전’이 펼쳐졌다. 남편이 면회를 오면 입회 교도관이 대화 내용을 기록하지 않는 틈을 타 한마디, 한마디씩 남편에게 말을 전했다. 남편이 황인철 변호사가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채기까지 몇 날 며칠이 걸렸다. 후에 남편으로부터 들은 얘기가 “이 여자가 죽도록 고문을 받았다더니 이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구나” 하고 기막혀했다고 한다. “사건이 있기 전까지 전 간첩행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조차 몰랐던 평범한 교사였어요. 간첩 피의자가 되고 나서 변호사 선임을 위해 간첩 같은 짓을 하는 걸 보고 쓴웃음이 나왔죠.”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맨 처음 황 변호사를 만났을 때 그가 했던 말이 “율리아씨는 정말 행복한 분입니다”였다. 보통 부부 중에 어느 한쪽이 간첩죄의 피의자가 될 경우 거의 예외 없이 다른 한쪽도 간첩 피의자가 되는데 그녀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첫 번째, 지극정성으로 아내와 아이들을 돌보며 아내의 구명운동을 위해 노력하는 남편이 있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그리고 머지않아 세상이 이번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될 것이고 누명을 벗을 것이라는 것이 세 번째 이유였다. 1984년 이들 사건이 재재파기환송심에서 최종 유죄판결이 내려지기까지 무려 7차례나 재판이 진행될 정도로 사법 사상 유례 없는 ‘핑퐁재판’을 벌이긴 했지만 그때 황 변호사의 말대로 이제 국가가 그녀의 무죄를 인정하고 세상이 그녀의 결백을 알았다. 누명을 벗은 이 순간을 그들과 함께 나누지 못하는 것은 한이 되지만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삶을 밝혀준 좋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여생을 보낼 생각이다. 그녀는 요즘 민주화 관련 NGO단체들과 함께 여러 활동에 참여 중이다. 얼마 전에는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의 요청으로 대학 강단에 서기도 했다. “저는 그래도 행복한 피해자예요. 저를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았고 그나마 글이라도 배워서 억울함을 외칠 수 있었지만 아직도 사회의 시선 속에 숨죽여 사는 분들이 많아요. 그분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죄송한 마음입니다. 제가 도움을 받았던 만큼 저도 그분들께 힘을 보태며 남은 인생을 보내고 싶습니다.” ■글 / 노정연 기자 ■ 사진&사진 제공 / 원상희, 송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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