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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재 후] 성폭력 피해자들은 더 많이 말해야 한다(2024. 07. 10 06:00)
- 2024. 07. 10 06:00 사회
- 이혜리 기자 성폭력 피해자를 취재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어떤 독자들은 성폭력 피해자의 이야기를 다룬 기사가 피해자 관점에 지나치게 치우친 것 아니냐 할지 모른다. 실제론 그렇지 않다. 최대한 사실에 부합하는 기사를 쓰기 위해 기자는 피해자에게 피해 본 과정을 세밀하게 묻고, 또 묻는다. 각종 자료를 확인하고, 필요하면 교차 검증도 한다. 피해자로서는 고통스러운 순간을 되뇌어야 하고, 2차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취재에 응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성폭력 피해자의 이야기는 숨겨지지 말아야 한다는 게 2018년 미투(#MeToo·나는 고발한다) 운동의 취지였다. 이는 각자의 마음속에 담아뒀던 성폭력 피해를 세상으로 끄집어내고 공적인 공간에서 말하면서 함께 해결을 도모하자는 것이었다. 주축은 여성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해 대검찰청 통계 기준 성폭력 범죄자의 96.5%는 남성, 피해자의 87.5%는 여성이었다. 여전히 피해는 피해로 다뤄지지 못한다. “검찰은 무리한 기소를 했어요. 제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피해자는 이럴 것’이라는 범위에서 조금 벗어나니까 꽃뱀을 보는 시각으로 ‘그게 말이 돼요?’라고 묻는 거예요. 말이 안 될 이유는 무엇인가요? 제가 정말로 겪은 것인데요.” 교제폭력(데이트폭력)을 신고했는데 검찰이 무고죄로 기소했고 최근 법원에서 무죄를 확정받은 A씨의 말이다. 피해자 진술 신빙성을 판단할 때 이른바 ‘피해자다움’의 편견을 가져선 안 된다는 대법원 판례가 나온 지 6년이 됐지만, 성폭력 피해자들은 가해자에게 역고소를 당하거나 무고죄로 수사받을 수 있다는 부담에 시달리고 있다. 기자가 만나본 그 어떤 판사도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 피해자의 진술을 믿는다”고 한 사람은 없지만, 편견을 배제하려는 노력조차 흔히 피해자 관점에 지나치게 치우친 것 아니냐는 반론에 부딪힌다. 급기야는 ‘피해의 경쟁’도 벌어진다. 여러 독자가 교제폭력 문제를 다룬 기사에 “남성 피해는 왜 외면하느냐”, “데이트 꽃뱀이 더 위험하다”고 댓글을 썼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 성별이 무엇이든 성폭력 피해를 본 사람은 보호받아야 한다. 타인을 무고한 사람은 마땅한 책임을 져야 한다. 동시에 어떤 맥락에서 성폭력이 발생하고 처리되는지, 본질이 무엇인지도 같이 고민해야 한다. 피해는 모두 피해다.
- 취재 후
- [취재 후] 피해자를 괴롭히지 않았기를(2024. 07. 03 06:00)
- 2024. 07. 03 06:00 사회
- 김찬호 기자 ‘사적 제재’를 적었다, 지우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현상을 멀리서 보는 것과 가까이서 하나하나 뜯어볼 때 생기는 괴리감이 문제였습니다. 사회적 분노가 들끓고 있는 상황에서 가장 쉬운 방법은 ‘동조’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적 제재가 괜히 나오겠나. 가해자 처벌하라’는 논리에 편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선 눈 감아야 하는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유튜버의 폭로에 불안한 ‘피해자의 목소리’였습니다. 사회적 ‘분노’의 힘은 대단했습니다. 수십 년 전 사건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데 이어 직·간접적으로 엮인 사건 주체들이 속속 사과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 결과를 자꾸만 돌아보게 되는 것은 ‘이 분노가 누굴 위한 것인지, 그 결과는 무엇을 파괴하고 만든 것인지’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유튜버의 가해자 공개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과거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과정에서 피해 사실이 나오게 됩니다. 사람들의 호기심은 선의로만 작동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사건을 찾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이를 돈벌이 기회로 여깁니다. 그렇게 50만 유튜버, 300만~400만 조회수의 영상이 탄생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의 의견’은 끼어들 자리가 없었습니다. 가해자가 모두 공개되고, 관계자들이 대국민 사과를 하면 속이 시원한 것이 사건을 까맣게 잊고 살아온 ‘나’인지, 긴 시간을 고통 속에 산 ‘피해자’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전문가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는 유명 사건 피해자의 ‘일상’에 관해 설명하며 “긴 시간 동안 조금씩 조금씩 봉합돼 가던 상처가 이런 일 한 번으로 다시 터져버린다. 그리고 피해자는 ‘그때 그 사건 걔’로 사람들 기억 속에 남는 것에 괴로워한다”고 말했습니다. 감히 ‘사적 제재’의 기화가 된 사건이 무엇인지 정확히 지칭하지 못하겠다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기사에 쓴 문장 한 줄, 사용한 단어 하나가 혹시라도 피해자를 괴롭히지 않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 취재 후
- “사람 죽었는데 벌금형? 피해자 탓하는 사측과 끝까지 싸울 것”(2024. 07. 01 06:00)
- 2024. 07. 01 06:00 사회
- ‘5년의 투쟁’ 고 정순규씨 아들 정석채씨 인터뷰 경동건설 산재사고 사망자 고 정순규씨의 아들 석채씨가 지난 6월 25일 주간경향과 인터뷰하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은 후 ‘불과 먼지’라는 단편소설을 썼던 이창동 영화감독은 오래전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그 소설을 썼을 때는 뭔가 남겨놓아야 하겠다는 생각이었어요. 흔적이 없다는 게 제일 견디기 어려웠거든. 사람의 죽음에는 남이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죽음이 있어요. 예를 들어 5·18의 죽음이 그렇죠. 하지만 어떤 죽음은 아무도 말하지 않아요. 놀랍지 않아요? 나는 놀라웠어요. 인간의 삶이 그럴 수 있다는 것이.” (2007년 3월, 씨네21 ‘끈질긴 이야기꾼의 도돌이표, 영화감독 이창동’) 우리는 어떤 죽음은 오래도록 얘기하지만 어떤 죽음엔 침묵한다. 2019년 10월 건설현장 산재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정석채씨(39)는 이런 차별에 몸서리치며 5년의 세월을 보냈다. “처음 1년여간은 그 누구도 손잡아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의 아버지 고 정순규씨는 부산의 한 아파트 공사현장 임시가설물(비계)에서 추락사했다. 사망에 이른 사실관계에 대해 사측인 경동건설과 하청업체는 고인 책임을 주장했는데 초동조사에 이 입장이 일부 반영됐다. 이어진 재판에서 사측은 안전조치 미비에 대해 유죄 판단(업무상과실치사죄·산업안전보건법 위반)을 받았지만, 형량은 집행유예와 벌금형으로 가벼웠다. 아들 석채씨는 아버지 시신의 상태로 미루어볼 때 사측 주장이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재조사를 위해 처절하게 싸웠지만, 이상하게도 사회적 주목은 받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사측 관계자는 고인 장례식장에서 폭행·감금·협박 피해를 입었다며 유족을 고소한 뒤 “사건을 종결하면 고소를 취하해주겠다는 압박까지 했다”고 한다. “사회적 관심 받지 못했던 처절한 싸움··· 청년 노동자였다면 분위기 달랐을 것. 중년 노동자의 죽음도 똑같이 억울하다는 것 말하고 싶어. 다큐 영화로라도 이 억울함 끝내 알릴 것.” 산재사망률이 경제협력개발국가(OECD) 최상위권인 ‘산재국가 한국’. 일하다 죽지 않을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져 중대재해처벌법이 제정되는 등의 성과가 있었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산재 유족들이 진상규명을 위해 거리에서 싸우고 있다. 특히 석채씨처럼 대중의 관심을 얻지 못한 유족들의 싸움은 더욱 처절하다. 지난 6월 25일 경향신문사에서 석채씨를 만나 아버지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싸운 지난 5년에 관해 들었다. -아버지인 고 정순규씨의 죽음의 진상이 밝혀졌다고 보나. “사측은 사고 직후부터 책임을 면하기 위해 재해자 과실로 인한 사망으로 몰아갔다. 아버지가 임시가설물(비계)에 부착된 사다리를 위험하게 이용하다가 추락사했다는 주장이었다. 첫 단추인 노동청의 재해조사에 사측 주장이 그대로 반영됐고, 노동청으로부터 사건을 송치받은 검찰은 재해조사대로 기소했다. 당시 경찰 판단은 달랐다. 경찰은 아버지가 비계 위에서 작업하던 중에 옹벽과 비계 틈 사이로 여러 차례 튕기면서 추락했을 것으로 봤다. 시신에 수많은 골절이 있었고, 작업복은 갈기갈기 찢겨 있었기 때문에 경찰 추정이 맞았다고 본다.” -항소심에서도 집행유예 선고는 뒤집히지 않았다. “사고현장이 사라진 상태에서 노동청 재해조사 결과를 뒤집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저희에게 유리한 진술을 해주셨던 아버지 동료가 계셨는데 정작 수사기관에선 말씀을 바꾸셨다. 사람이 일하다 죽었는데 벌금 2000만원에 끝나버렸다. 설사 실수가 있었더라도 죽지는 않게 안전조치를 해놓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최근 하청업체 소장을 ‘사문서 위조’로 고소했고, 소장에게는 벌금 500만원이 선고됐다. “피해자 과실로 몰아가는 사측 행태를 어떻게든 밝혀내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다. 재판기록에서 아버지가 당시 현장의 안전관리 담당자였다는 사측 제출 서류를 봤다. 아버지가 안전관리자였기 때문에 안전조치 미비에 대해 아버지 책임도 있다고 주장하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제가 아는 아버지 필체가 아니었다. 필적 감정을 의뢰해 위조 사실을 확인했다. 검찰이 하청업체만 약식기소했는데, 원청인 경동건설의 개입을 밝혀내지 못한 것이 아쉽다.” 건설현장 산재사망에서 사측이 ‘피해자 과실’을 주장하는 사례는 흔하다. 2019년 4월 경기도 수원의 한 건설현장 엘리베이터에서 추락사한 청년노동자 고 김태규씨의 사건에서도 사측은 고인이 발을 헛디뎌 사망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다만 김씨의 사건에선 재판부가 사측의 주장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다. 안전수칙 위반 등을 엄중하게 따져, 사측 관계자들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고 정순규씨의 사건 항소심을 담당했던 이주희 변호사는 “건설현장의 산재는 녹화 영상도 없고, 그 순간을 정확히 목격한 사람을 찾기도 어렵다는 특성이 있다”면서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원칙을 따르는 형사법정에선 사고경위 부정확성이 사측의 책임을 덜어주는 결과로 종종 이어져 답답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산재사망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졌지만, 고 정순규님의 사건은 사회적 주목을 많이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사건 초기 공론화가 이뤄져 사망 원인만 바로잡았어도 사측의 책임을 제대로 물을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별 관심을 얻지 못했다. 1년이 흘러 2020년 가을 강은미 정의당 의원이 국정감사에서 다뤄주면서 ‘중대재해 없는 세상만들기 부산 운동본부’와 천주교의 도움을 받게 됐다. 솔직히 청년 노동자의 이야기였다면 분위기는 달랐을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중년 건설노동자의 산재사망도 똑같이 억울한 죽음이다. 우리 같은 유가족의 얘기도 많이 들어줬으면 좋겠다.” -사측이 유족을 되레 고소한 적도 있다고 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틀 뒤 빈소에 하청업체 관계자 두 사람만 찾아왔다. 유족과 친지, 지인들이 ‘왜 경동건설은 오지 않고 너희만 오느냐’며 화를 냈다. 누군가는 그들 멱살을 잡기도 했는데, 이것을 가지고 하청업체가 유족을 감금·폭행·협박으로 고소했다. 그러고는 ‘고소 취하해줄 테니 여기서 끝내자’라고 제안하더라. 나중에 수사기관이 ‘혐의없음’으로 종결하자, 항고해 제 친구 두 명이 벌금형을 받았다. 아버지 사망 직후엔 ‘술 먹고 일하다 그렇게 됐다’는 등의 명예훼손성 댓글이 붙었고(구급대가 혈중알코올농도를 측정했지만, 음주 상태가 아니었다) 지금도 관련 기사에 저를 조롱하는 댓글들이 붙는다. ‘정석채 XX, 네가 돈이 끝까지 필요 없는지 두고 보자’ 하는 식이다.” -아버지의 사건에 대해선 형사 처벌이 완료됐다. 그럼에도 산재 관련 집회 등에서 계속 싸우고 있다. “제발 좀 그만 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저희같이 관심 못 받는 산재 유족에게 힘을 보태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올해 1월 서울 마포구의 건설현장 비계 위에서 노동자가 떨어져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70세의 고 문유식님이다. 안전수칙을 어긴, 매우 위험한 비계였는데 저희 때와 마찬가지로 사측이 고인 과실을 주장하며 장례식장에도 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건 역시 다들 별 관심이 없다. 저라도 돕고 싶어서 얼마 전 기자회견 자리를 만들었다.” -유명 연예인들의 스타일리스트로 일하다 생업을 접고 싸워왔다. 앞으로 계획은. “계속 말하고 쓰지 않으면 잊히는 것 같다고 생각해왔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세상에 남기기 위해서 다큐영화를 준비 중이다. 최근 한 단편영화제에 시나리오를 출품했다가 기획상도 받은 만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저에겐 저만의 투쟁이 아직 남아 있다. 영화 <다음 소희>, <한공주>를 보고 같이 분노하는 이들이 많이 생겨난 것처럼, 언젠가 제 영화도 산재 피해자들에게 그런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 “묻고 싶다, 피해자에게 미칠 영향 고민한 적 있나”(2024. 06. 24 06:00)
- 2024. 06. 24 06:00 사회
-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인터뷰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이 지난 6월 18일 서울 마포구 사무실에서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이겨내 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잊지 않고 관심 가져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지난 6월 13일 한국성폭력상담소가 공개한 밀양 성폭력 사건 피해자의 편지 속 내용이다. 사건이 알려진 지 이미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해당 편지 속 피해자는 ‘여전히 가끔 죽고 싶거나 우울증이 심하게 와서 멍하니 누워만 있을 때도 있다’고 일상을 설명했다. 그에게 지난 시간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온 상처의 연속’이었던 셈이다. 피해자의 편지는 지난 한 달, 밀양 성폭력 사건이 재공론화된 과정을 돌아보게 한다. 가해자를 처벌한다는 ‘미명’ 아래 사건은 다시 헤집어졌고, 피해자의 목소리까지 공개됐다. 모든 과정에서 피해자의 동의는 없었다. 문제 제기가 있자 이번에는 “정의를 위한 것이니 피해자는 가만있어라, 협조하라”는 요구까지 나왔다. 어느 날 갑자기 20년 전 사건을 떠올린 이들이 20년을 고통받아온 이에게 던지는 충고, 비난은 대체 ‘정의’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한다. 지난 6월 18일 밀양 사건 피해자를 지원해온 한국성폭력상담소를 방문해 김혜정 소장을 만났다. 김 소장은 사건에 대한 사회적 분노부터 피해자가 받을지 모르는 상처까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의 말속에는 “우리 사회가 피해자를 다시 고통으로 내몰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근원적 물음이 담겨 있었다. -밀양 성폭력 사건이 피해자 의사와 무관히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보나. “우리는 피해자 말고도 생존자라는 용어를 쓴다. 피해 이후에도 삶을 살아가는 존재라는 뜻이다. ‘역사적인 사건’의 피해자들도 마찬가지다. 살아남아 꿋꿋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끔찍하다’고 여겨지는 사건들이 종종 영상으로 만들어진다. 기성 언론을 포함해 유튜버까지 과거 사건을 꺼내 콘텐츠로 만든다. 공익목적으로 제작되는 경우라도, 사건 당사자인 피해자들은 트라우마가 자극되고 일상 안정이 깨지게 된다. 묻고 싶다. 영상을 제작할 때 ‘피해자에게 어떤 영향이 있을지 고민한 적 있나’, ‘자극적으로 조회수를 늘리는 데만 집중한 것은 아닌가’. 가해자를 고발하고 사건을 ‘끌올’해 정의를 구현하겠다면 그 영상으로 인해 피해자가 짊어져야 할 짐까지 함께 나눠질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어떤 ‘분노’든 피해자의 일상회복과 삶을 고려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게 정의야’라고 말하기 전에 평등하게 연대하는 사람이 많아질 때 정의는 가능해진다.” -유튜버가 ‘미뤄진 정의’를 실현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국가도, 기성 언론도 못 하는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대중적 분노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밀양 성폭력 사건 가해자 공개 과정을 보면 피해자와 가족들이 영상을 내려 달라고 호소해야 했고, 사실관계를 다퉈야 했고, 유튜버를 옹호하는 사람들로부터 비난까지 받았다. 또 가해자 신상 공개를 하거나 판결문을 공개할 때는 피해자 동의가 있었거나 뜻인 것처럼 말했다. 적어도 공개한 사람이 따로 있는데, 그 후 발생하는 문제의 책임은 피해자에게 귀결되면 안 되는 것 아닌가.” -가해자 폭로를 하는 대표적인 유튜버는 여전히 ‘정확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피해자의 일부 가족으로부터 공론화시키는 쪽이 맞다고 들었다’고 밝혔다. “기자회견 등을 통해 이미 밝혔다. 왜 피해자 가족들과의 연락 중 일부만을 발췌해 소통이 끝났고, 모두 동의했다고 주장하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유튜버의 개인적 주장이 반영된 선택적 편집이다. 피해자는 동의한 바 없다. 이런 상황이 만드는 모순은 피해자들이 유튜브 계정 주인들과 ‘위험한 소통’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언제 영상을 내려줄지 몰라 계속 기다리고 전전긍긍하며 부탁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왜 피해자가 이들의 시혜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 내몰려야 하나.” -밀양 사건이 다시 주목받으니 ‘잘된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피해자가 내일은 또 어느 방송, 유튜버가 사건을 공개할지 불안에 떨어야 하는 상황이 정말 잘된 것이라고 할 수 있나. 이 사건을 둘러싼 여론을 보면 네 가지 스펙트럼이 있다. 우선 ‘피해자는 빠져라. 우리는 가해자를 나락 보내는 것이 목표다’라는 분들이다. 이들은 국민 알권리를 내세우며 피해자의 평온할 권리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와 정반대로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공론화 영상을 보지 않겠다’는 분들이 있다. 이들 사이에는 ‘힘들다는 것은 알겠는데 피해자가 공론화에 나서 달라’고 요구하는 분들,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은 현실은 분노스럽다. 그럼 무엇을 해야 하느냐’ 고민하는 분들이 있다. 어떤 ‘분노’든 피해자의 일상회복과 삶을 고려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게 정의야’라고 말하기 전에 평등하게 연대하는 사람이 많아질 때 정의는 가능해진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이 지난 6월 18일 서울 마포구 사무실에서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서성일 선임기자 -피해자 입장을 고려해 달라고 하면, ‘도와주려고 했더니 관심 끄겠다. 알아서 하라’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도 있다. “밀양 사건 피해자는 경찰 조사만 8~9번을 받았다. 사건의 실체가 알려진 것은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운 피해자의 용기 덕분이었다. 숨죽이고 아무것도 못 한 채 살아온 사람이 아닌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한 사람이란 것이다. 밀양 성폭력 사건이 ‘끌올’될 때마다 피해자는 2004년 열다섯 살 당시로 되돌아가야 한다. 동시에 완전히 무력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전형적 피해자로 묘사된다. 피해자의 주체성이 사라지는 것이다. 생존자와 같은 입장에서 상처를 극복할 수 있게 동료가 돼 달란 것이지, ‘너는 가만히 있어, 내 방식대로 해결해 줄게’라고 요청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가해자를 응징해야 한다는 의견도 여전히 많다. “가해자 신상 공개만이 미뤄진 정의를 바로잡는 것인가. 피해자가 우리 사회에서 잘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 역시 ‘정의를 바로 잡는 것’이다. 또 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피해자 의료, 법률, 주거 지원 예산확충 등 사람들의 관심, 노력이 필요한 곳이 많다. 이러한 부분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는 것 역시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사적 제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나. “밀양 사건 재점화 과정이 피해자가 답답하고 무력감을 느끼는 시간이 되면 안 된다. 그렇기에 피해자가 ‘내 뜻이 아니다’라고 하면 존중하고 반영했으면 좋겠다. 피해자가 일상을 회복하는 것 역시 중요한 정의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삶의 여정을 이해하고 깊이 지지하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면 좋겠다.”
- 표지 이야기
- 전세사기 구제책에도 피해자는 불안하다(2024. 06. 10 06:00)
- 2024. 06. 10 06:00 사회
- 시행 시점과 소급 여부 불투명…실질 지원에 의구심 한 동짜리 아파트 전체가 전세사기를 당한 인천 미추홀구의 A아파트에서 2023년 6월 29일 오전 한 피해자가 이사를 가고 있다. 이 아파트 입구와 복도에는 입주민들이 제작한 “집을 보러 오신 분께서도 또다른 피해자나 공모자가 될 수 있다”는 현수막이 붙어 있다. 김송이 기자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사건이 터진다. 2022년부터 수면 위로 올라온 전세사기 이야기다. 지난 6월 4일에는 경기도 오산에서, 그다음 날에는 서울 관악구와 광주에서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는 피해 사례가 전해졌다. 2022년 9월 첫 범정부 대책이 나오고 2년 가까이 지났지만 전세사기 피해는 현재도 진행형이다.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 특별법이 시행된 2023년 7월 이후 인정된 피해자만 1만7000명을 넘어섰다. 정부는 특별법이 일몰되는 2025년 7월까지 인정 피해자 수가 3만6000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한다. 이쯤 되면 “젊은 분들이 경험이 없다 보니 덜렁덜렁 계약했다(박상우 국토교통부 장관)”라고 볼 수 없는 문제다. 오히려 집값이 내려가는 악조건을 상정하지 않고 전세 시장이라는 풍선에 바람을 넣어왔던 역대 정부에 정책 실패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윤 대통령, 야당 특별법안에 거부권 사회구조적 위기에서 비롯됐다는 점, 피해자금의 성격, 피해 규모 등을 고려하면 대책을 내놓는 건 정부의 권리가 아니라 의무에 가깝다. 그럼에도 윤석열 대통령은 ‘선(先)구제 후(後)회수’를 골자로 하는 야당 주도의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정부는 이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기 하루 전인 지난 5월 27일 새로운 피해자 지원책을 내놨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전세사기 피해 주택을 경매로 사들이고 최장 20년까지 살 수 있도록 피해자들에게 임대하는 것이 골자다. LH는 감정가에서 경매 낙찰가를 뺀 금액을, 보증금을 한 푼도 건지기 어려운 후순위 피해자들에게 나눠 지급하기로 했다. 이사를 원하는 피해자는 이 방식으로 보증금 일부를 받아 이사를 할 수 있다. 정부는 정부안이 ‘선구제 후회수’ 방식보다 피해 구제에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선구제 후회수 방식은 보증금을 회수하기 어려운 피해자들의 채권(전세보증금)을 공공기관이 매입해 보증금의 30%가량을 먼저 돌려주고, 추후 채권 추심·매각 등을 통해 공공기관이 재원을 회수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그러나 정부는 피해자들의 채권 가치를 평가하는 것부터 쉽지 않다고 본다. 채권 평가를 위한 별도의 인력이 필요해 추가 행정비용이 소요되고, 보증금의 완전한 회수도 불가능할 것이라는 게 정부 설명이다. 정부는 재원 부담에 대한 우려도 몇 차례나 언급했다. 반면 정부의 매입임대 방식은 기존에 편성된 공공임대주택 예산을 활용하기에 예산의 즉시 투입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기존 사업과 구조가 유사해 행정비용도 가장 적다. 거부권 행사에 반발했던 피해자들도 정부안에 기대를 하고는 있다. 동시에 불안도 있다.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기존 대책에 대한 불신이다. 정부는 전세사기 피해가 폭증한 2022년 9월부터 여러 차례 대책을 내놨다. 정부가 분류하는 지원방안의 가짓수만 16개다. 지난 4월 말 기준 이들 지원책의 누적 이용 건수는 1만400여건. 피해자가 1만7000명이니 피해자 한 명이 한 건의 지원만 받았다고 해도 약 7000명은 지원을 하나도 받지 못한 셈이 된다. 이번 정부안의 골자인 매입임대도 지난해 시행된 특별법에 기본 틀이 담겨 있다. 그러나 지난 1년간 LH가 피해 주택을 실제 매입한 사례는 단 2건에 그쳤다. 피해 구제를 위해 백방으로 알아봐도 각종 까다로운 조건으로 지원이 거절된 경험이 있는 피해자들은 이번 대책도 실질적인 지원책이 되지 못할 것이라 우려한다. 정부는 그간 매입대상에서 제외했던 불법 증축 등 위반 건축물, 신탁사기 주택도 매입하기로 한 만큼 매입이 원활히 이뤄질 것으로 본다. 둘째는 정부안에 정교함이 빠져 있어 실제 구제가 어떤 방식으로 이뤄질지 가늠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핵심 중 하나는 대책의 시행 시점과 소급 여부다. 전세사기 피해가 발생하고 이미 상당한 시간이 지나 하루가 다르게 피해자들의 상황은 악화하고 있다. 이는 피해자들이 빠른 구제가 가능한 선구제 후회수안을 선호했던 이유기도 하다. 정태운 대구 전세사기피해자대책위원장(33)은 대구 침산동 신탁사기 피해자다. 가짜 임대인은 신탁사 소유의 건물을 자기 것처럼 속여 정 위원장과 전세계약을 맺었다. 신탁사는 모르는 계약이라며 정 위원장의 퇴거를 요구하는 명도 소송을 제기했다. 신탁사기 주택도 매입하겠다는 정부 방침이 뒤늦게 나왔지만 정 위원장의 명도 소송 결과는 코앞인 오는 6월 14일 나온다. 그는 “신탁사들은 재산권 보호를 위해 경매보다 명도 소송을 먼저 진행한다. 명도부터 유예할 수 있게 해줘야 하는데 쫓겨나고 대책이 나오면 무슨 소용이냐”고 했다. 거부권에 가로막힌 특별법 개정안에는 명도 소송을 유예하는 방안이 있었지만, 정부안에서는 빠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권리관계가 복잡해질 수 있다. 예컨대 부산의 한 전세사기 피해 건물은 20여 세대가 사는 다세대 주택인데, 세대 전체를 공동담보로 한 근저당이 설정돼 있다. 문제는 세대별로 경매가 진행돼 오는 6월 말이면 낙찰되는 세대가 나올 수도 있다는 점이다. 공동담보 건물의 특성상 경매가 모두 마무리돼야 보증금 회수가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세대별로 낙찰이 이뤄져 피해 세대와 일반 세대가 뒤섞이면 LH가 매입임대를 하더라도 건물 관리 등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선구제 후회수안 병행 추진돼야” 피해자들은 정부안과 ‘선구제 후회수’안이 병행 추진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안이 보호하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있기 때문이다. 정부안은 매입임대 후 10년간은 주거 비용을 피해자에게 받지 않아 피해 주택에서 계속 거주를 희망하는 피해자들에게 유리하다. 다만 전세사기 피해자 중 2030세대가 73.7%를 차지해 취업, 결혼, 출산 등 생애주기에 따라 이사가 불가피할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보증금을 최대한 회수하는 것이 중요한데, 일부 피해 사례에서 정부안은 선구제 후회수안보다 보증금 회수에 효과적이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예컨대 경기도 화성의 한 오피스텔 전세사기 사례는 보증금이 1억원인데 감정가에서 경매 낙찰가를 뺀 금액은 1000만원이다. 정부안대로면 피해자는 보증금의 10%인 1000만원만 회수할 수 있다. 30% 회수를 보장한 선구제 후회수안이 더 유리하다. 장선훈 대전 전세사기피해자대책위원장은 “피해 구제를 정부만 고민할 것이 아니라 선순위 채권자인 금융사들도 함께 고민했으면 한다. 무분별한 전세 대출이 피해 규모를 키우는 데 일조했다. 금융사들이 이자 징수를 중지하고 원금 배당만 신청하는 것으로도 후순위 피해자들이 보증금을 더 회수할 수 있다”고 했다.
- [신간]피해자인 줄만 알았는데…(2024. 03. 27 06:00)
- 2024. 03. 27 06:00 문화/과학
- 오리들 케이트 비턴 지음·김희진 옮김·김영사·2만9800원 캐나다의 유명 만화가 케이트 비턴의 첫 장편 그래픽 노블이다. 그가 명성을 얻기 직전 2년간 앨버타의 오일샌드 채굴 현장에서 보낸 경험을 기록했다. 2005년 당시 21세였던 작가는 고향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학자금 대출의 덫에서 벗어나고자 돈을 많이 준다는 석유회사의 채굴 현장에 취업했다. 노동자들에게 공구를 내주는 단순한 일이지만 근무 환경은 열악했다. 겨울엔 영하 40도까지 내려가고 오염된 공기로 기침과 가래가 끊이지 않았다. 더 괴로운 건 남녀 성비가 50 대 1인 상황에서 비롯된 비정상적 문화였다. 첫 만남에서 대뜸 ‘예쁜이’라고 부르거나 면전에서 아무렇지 않게 성적 농담을 했다. 어느 날 광산 인근 호수의 오리가 떼죽음을 당하고, 원주민 공동체가 오랫동안 심각한 질환을 앓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비턴은 자신이 폭력과 트라우마를 당하는 쪽이라고만 여겼는데, 환경을 파괴하고 원주민의 터전을 빼앗는데 연루됐음을 깨닫고 혼란에 빠진다. 노동과 환경, 젠더와 인간의 부조리를 담은 걸작이라는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아적쾌락 북경생활 박현숙 지음·후마니타스·1만7000원 칸막이 없는 공중화장실에서 대여섯 명이 줄줄이 앉아 담소하며 볼일을 보던 시절은 갔다. 10시간 넘게 오줌을 참아가며 서서 가야 하는 내몽골행 만원 열차도 없다. 시진핑이 ‘화장실 혁명’을 언급하자 무선 인터넷과 ATM기를 갖춘 최첨단 화장실이 등장했고, 베이징역에서 고속열차를 타고 세계로 향하는 일대일로와 중국몽의 시대가 도래했다. 생의 반을 중국에서 산 경계인이자 여행자인 작가는 가장 빠른 변화의 시기, 매일의 삶을 사는 진짜 중국인의 재미있고 슬프고, 꿋꿋한 이야기를 담아냈다. 멸종 동물 소원 카드 배달 왔어요 윤은미 지음·김진혁 그림·철수와영희·1만6000원 우리 주변 멸종위기 야생동물의 생활사를 그림으로 구성하고, 소원 카드 형식으로 꾸몄다. 소똥구리와 장수풍뎅이부터 덩치 큰 곰과 호랑이까지 18종의 야생동물이 어떻게 살았고, 왜 사라졌거나 사라지는지 동물들의 소원 카드를 통해 배울 수 있다. 블랙아웃 도니엘 클레이턴 외 지음·류기일 옮김·문학동네·1만6800원 대정전이 일어난 한여름 뉴욕을 배경으로 작가 6인이 6편의 연작 소설을 썼다. 참여 작가의 조카가 “왜 흑인 여자아이들은 제대로 된 사랑 이야기를 가질 수 없냐”고 물은 데서 영감을 얻었다. 흑인 10대의 영화 같은 사랑 이야기는 실제 영화로 나온다. 괜찮은 정치인 되는 법 브라이언 C. 해거티 지음·박수형 옮김·서해문집·1만7500원 미국 선출직 정치인이 오랜 경험을 토대로, 정치인이 성공하기 위해 배워야 할 모든 것을 읽기 쉽도록 간결하게 정리했다. 성공하는 정치인의 10가지 습관, 옷차림과 몸가짐, 기억에 남는 연설하기, 이미지 만들고 관리하기, 소셜미디어 활용법 등이 포함된다.
- 신간
- 성희롱 피해자 기어코 해고한 남도학숙(2024. 01. 26 16:30)
- 2024. 01. 26 16:30 사회
- 계속된 2차 가해에 질병 악화…휴직 신청 거부하고 무단결근으로 징계위 열어 서울 동작구 대방동에 있는 남도학숙 동작관 /정희완 기자 남도학숙이 직장내 성희롱 피해자에게 해고 처분을 내렸다. 장기간 무단결근이 해고 사유였다. 성희롱 피해자 측은 그러나 남도학숙이 명확한 내부 규정이 없는데도 질병휴직을 거부한 뒤 징계 조치했다고 반발한다. 정치권과 시민사회에서도 이번 해고를 두고 남도학숙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남도학숙은 광주·전남 출신 학생들을 위한 재경 기숙시설로, 광주시와 전라남도가 공동운영하는 공공기관이다. ■질병휴직 거부 뒤 무단결근 처리 남도학숙은 2023년 12월 28일 A씨를 해임한다는 내용이 담긴 공문을 보냈다. 해임일은 올 1월 29일이다. 해고 이유는 ‘업무복귀 명령에 반한 장기 무단결근 행위’다. 2023년 6월 30일자로 출근하라고 여러 차례 명령했지만, A씨가 이를 따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A씨는 2014년 남도학숙에 입사해 직장 상사로부터 성희롱을 당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성희롱 피해를 인정했고, 가해자는 감봉 1개월의 징계를 받았다. A씨가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법원도 가해자는 물론 남도학숙의 책임을 일부 인정했다. A씨는 2015년부터 우울증과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등 업무상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성희롱 피해에 더해 2차 피해가 원인이 됐다. A씨는 이를 근거로 근로복지공단에 업무상 질병에 따른 산업재해 요양을 신청했다. 2017년 3월부터 2019년 1월까지 요양을 승인받았다. 이어 1년 동안 질병휴직을 했다. 이후 2020년 복직했으나 직장내 괴롭힘과 2차 가해를 호소하며 업무상 질병이 악화했다. 이에 A씨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재요양을 신청했고, 2022년 11월까지 요양 기간으로 인정받았다. A씨는 2023년 들어서도 질병이 낫지 않아 정신과 진료를 받았다. 남도학숙 내부 규정에 따라 180일 동안 병가를 썼다. 2023년 6월 말 병가가 종료되기 전, A씨는 남도학숙에 질병휴직을 신청했다. 대학병원 등 3차 의료기관 2곳의 진단서도 첨부했다. 여기엔 “증상의 충분한 호전을 위해 향후 3개월 이상의 지속적인 치료와 안정이 필요한 상태”라는 내용이 담겼다. A씨는 “어떻게든 회사에 출근해 보려고 담당 주치의와 진료 및 상담, 검사까지 했으나 소송 등 직장내 스트레스 상황 및 안전하지 않은 회사의 근무환경으로 인해 건강이 아직 회복되지 않아 정상 근무하기는 어려운 건강 상태라는 것을 확인받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남도학숙은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A씨는 두 차례 더 질병휴직원을 제출했지만 남도학숙의 답변은 같았다. 남도학숙은 “동일 질병에 대해 최대 1년 이내로 휴직 기간이 한정된다”는 이유를 밝혔다. A씨가 이미 같은 질병으로 1년간의 휴직을 사용했기 때문에 추가 질병휴직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2023년 7~10월 4차례 걸쳐 출근명령과 경고가 담긴 공문을 A씨에게 보냈다. A씨가 응하지 않자 무단결근으로 처리, 징계위를 열어 해고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A씨는 남도학숙의 이번 해고가 부당하다는 입장이다. 명확한 규정이 없다는 것이다. 남도학숙은 ‘남도학숙 인사규정’ 제33조를 근거로 들었다. ‘신체·정신상의 장애로 장기요양이 필요할 때는 1년 이내’로 휴직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동일 질병’이라는 명시적인 표현은 없다. 전체 재직 기간 동안 질병휴직은 무조건 1년 이내로 한정한다는 것인지, 질병휴직 1회당 최대 기간이 1년이라는 것인지 등 해석의 여지가 크다. 이 때문에 논란이 되는 것이다. ‘같은 질병은 1년 이내로 제한한다’고 해석한다고 하더라도, A씨는 이번 질병휴직이 기존 휴직과는 별개의 상황 및 질병에 따른 것이라는 견해를 나타냈다. 이번 질병휴직 신청의 경우 2020년 1월 말 회사 복직 후 추가로 발생한 직장내 괴롭힘과 2차 가해 등으로 악화한 질병이 원인이라는 얘기다. ‘재발성 우울병 장애, 현존 중증도’, ‘공황장애’ 등처럼 기존과 다른 질병의 명칭(코드)도 포함됐다. 법제처가 2023년 8월 내놓은 지방공무원법상 질병휴직 관련 해석에서도 ‘질병휴직 기간 동안 다른 종류의 질병휴직 사유가 새로 발생하는 경우에도 추가 질병휴직이 가능하다’는 취지로 밝히고 있다. 또 자신이 앞서 2019년에 사용한 질병휴직도 자의가 아니었기 때문에 남도학숙에 책임이 있다고 했다. 남도학숙은 2017년 1월 복무지침을 개정해 ‘정신병으로 인한 병가는 사용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신설했다. A씨는 애초 병가를 신청했지만, 남도학숙은 해당 조항에 따라 임의로 질병휴직 처리했다. 이 조항은 2022년 광주시 국정감사에서 차별적이고 인권침해적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광주시와 전남도 측도 여러 차례 문제가 된 조항의 삭제를 권고했다. 남도학숙은 2022년 10월에야 삭제 조치했다. A씨 측은 남도학숙이 노동자에 대한 안전배려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성희롱 및 2차 가해 예방과 재발 방지를 위한 ‘안전한 근무환경’ 조성을 요청했지만 제대로 된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남도학숙은 A씨의 성희롱 피해 사건 발생 이후인 2019~2021년 직원 119명(중복 포함)이 성희롱 피해 예방 등 직장내 법정교육을 이수하지 않은 것으로 전남도의 감사 결과 드러났다. 당시 전남도는 “119명의 소속 직원이 교육을 이수하지 않고 있는데도 (남도학숙이) 이를 독려하거나 이수 현황을 점검하지 않은 채 방치했다”라고 지적했다. 이상호 남도학숙 원장이 지난해 11월 6일 전라남도 무안 전남도의회에서 진행된 행정사무감사에서 의원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전라남도의회 영상회의록 갈무리 또 앞서 A씨가 산재 승인을 받자 남도학숙은 이에 불복해 2017년 감사원에 심사청구를 제기했다. 감사원이 이를 기각하자 남도학숙은 2018년 법원에 A씨의 산재승인을 취소해 달라며 행정소송도 제기했다.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비판 여론이 일었고 행정소송은 결국 취하했다. 이어 성희롱 사건 관련 손해배상 소송에서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오자 피해자 A씨에게 소송비용을 달라며 남도학숙이 법원에 비용 확정 신청을 내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 소송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A씨가 질병휴직을 신청하면서 함께 제출한 3차 의료기관 2곳의 진단서에는 이와 관련한 내용도 담겨 있다. “지속되는 우울감과 수면 부전, 불안감, 신체증상, 삶에 대한 무망감과 자살사고 및 직장내 가해자와 분리조치가 되지 않는 등의 직장내 스트레스 상황, 지속되는 소송에 대한 스트레스 등에 대한 전문의 면담 시행하고 있다.” A씨의 대리인인 최정규 변호사(법무법인 원곡)는 “직장내 성희롱뿐 아니라 이후에 남도학숙이 A씨를 상대로 보여준 여러 가해 행위가 A씨의 정신적 상황에 상당한 영향을 줬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라며 “이를 고려하지 않은 채 동일한 상황에서 발병한 같은 질병이라고 재단하는 건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이어 “A씨가 오랜 기간의 치료에도 불구하고 완치되지 않고 고통을 받는 책임의 상당 부분은 남도학숙에 있다”고 했다. 정의당 전남도당·광주시당도 지난 1월 10일 A씨의 해고 등을 두고 “호남민의 민주인권 의식과 동떨어진 엄연한 반인권·반노동 행정”이라고 비판했다. ■예견된 해고 A씨는 대응 방안을 검토 중이다. 그는 “애정을 가지고 성실하게 직장생활을 했던 성희롱 피해 노동자에 대한 남도학숙의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인 해임 처분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며 “법적 구제 절차를 통해서라도 해고 처분의 부당함을 입증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A씨의 이번 해고는 남도학숙이 그간 A씨를 바라본 시각에 비춰 예견된 수순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이상호 남도학숙 원장은 지난해 11월 전라남도의회의 행정감사에서 소송비용 문제와 관련해 A씨를 향해 “떼를 쓴다”고 말했다. 또 A씨가 법원에 제출한 항고장에 항고 이유와 구체적인 액수를 적었음에도 이 원장이 “(A씨가) 항고를 하면서 구체적인 사유나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는 취지로 말해 위증 논란이 불거졌다. 앞서 2015년 11월 당시 김완기 남도학숙 원장도 행정사무감사에서 A씨를 두고 “인생이 불량한 여자가 잘못 들어온 케이스”라며 깎아내린 적이 있다. 광주여성민우회는 지난 1월 10일 낸 성명에서 “광주시와 전남도가 공공기관의 성희롱 사안이 성인지 감수성을 바탕으로 해결될 수 있도록 조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남도학숙 성희롱 사안을 긴 시간 동안 무책임하게 방기한 것에 대해서 큰 유감을 표한다”고 말했다. 이어 “성평등한 조직문화는 피해 당사자를 문제시하고 꼬리 자르기 식으로 잘라낸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 [단독]남도학숙 원장, 성희롱 피해자에 “떼를 쓴다”(2023. 12. 01 16:40)
- 2023. 12. 01 16:40 사회
- 도의회서 소송비용 관련 발언 논란 피해자에게 책임 떠넘기려는 발언도 서울 동작구 대방동에 있는 남도학숙 동작관 건물 /정희완 기자 전라남도·광주시가 공동 운영하는 남도학숙의 원장이 최근 공개석상에서 직장내 성희롱 피해자를 폄훼하는 발언을 해 논란이 일고 있다. 남도학숙과 피해자가 소송비용 문제로 대립하는 상황을 두고 피해자를 향해 “떼를 쓰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또 피해자가 소송비용과 관련한 자료를 법원에 제출하지 않아 결정이 지연되고 있다는 취지의 발언도 했다. 피해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듯한 허위성 짙은 내용이다. 과거에 다른 남도학숙 원장도 같은 성희롱 피해자를 향해 “인생이 불량한 여자”라고 비하해 논란이 된 바 있다. 또 피해자가 신고한 직장내 괴롭힘 사건 등을 남도학숙이 신고 1년이 지난 뒤에야 처리한 것으로 파악됐다. 피해자는 외부 조사기관 선정과 조사 진행 과정에서 피해 당사자가 배제돼 객관성과 신뢰성을 잃었다며 비판하고 있다. ■피해자 “2차 가해” 반발 전라남도의회 기획행정위원회는 지난 11월 6일 전남 무안군 전남도의회에서 남도학숙을 대상으로 행정사무감사를 실시했다. 행정사무감사는 지방자치법에 따라 매년 지방의회가 산하기관을 대상으로 진행한다. 국회의 국정감사와 유사한 성격이다. 남도학숙은 전남·광주 출신 학생들을 위한 재경 기숙시설로, 전남도와 광주시가 운영하는 공공기관에 해당한다. 이날 행정사무감사에서는 남도학숙에서 발생한 직장내 성희롱 사건과 관련한 질의가 나왔다. A씨는 2014년 상사로부터 여러 차례 성희롱을 당했다. 이에 가해자는 감봉 1개월의 징계를 받았다. 이후 A씨는 가해자와 남도학숙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2심 재판부는 남도학숙의 책임도 일부 인정, 가해자와 남도학숙이 공동으로 A씨에게 300만원을 배상하라고 선고했다. 대법원은 2022년 8월 원심을 확정했다. 남도학숙은 그러나 성희롱 피해자 A씨로부터 소송비용 380만원을 회수하기 위해 법원에 액수 확정을 신청했다. 법원은 지난 5월 138만원만 인정했다. 이에 A씨는 지난 6월 불복해 항고한 상태다. 이상호 남도학숙 원장은 이날 “소송비용 문제에 대해서 본인(A씨)이 애로가 있다고 해서 항고했고, 그러면서 (A씨가) 자료를 제출하고 끝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라며 “본인이 여성단체 또는 정당 쪽을 통해서 그걸 본인이 유리한 방향으로 무조건 해달라는 식으로 떼를 쓰고 있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남도학숙이 법원에 소송비용 확정 신청을 제기한 뒤, A씨와 광주여성민우회 등 시민사회단체 240여곳은 공익소송 등을 이유로 소송비용 회수 절차를 철회할 것을 요구해왔다. 강은미 정의당 의원과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 등도 같은 취지의 의견서를 제출하는 등 A씨의 목소리에 힘을 보탰다. 이를 두고 이 원장이 “떼를 쓴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상호 남도학숙 원장이 지난 11월 6일 전라남도 무안 전남도의회에서 진행된 행정사무감사에서 의원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전라남도의회 영상회의록 갈무리 당사자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A씨는 이 원장의 발언을 두고 “피해자를 폄훼하는 2차 가해”라며 “큰 충격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박다현 광주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장도 “이 원장이 한 막말은 2차 가해”라며 “기관장의 인식이 그 기관의 조직문화에서 2차 가해를 만연하게 만들어 버리게 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남도학숙이 대법원 확정판결 직후인 2022년 9월 홈페이지에 성희롱 피해자에 대한 사과문을 올린 점을 언급하며 “대외적으론 사과 입장을 밝혔으나 피해자가 ‘떼를 쓰고 있다’는 게 남도학숙의 진짜 입장은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강은미 의원실 관계자는 “소송비용 문제에 대한 의견을 제출한 것은 합리적인 방식으로 피해자의 억울한 부분을 해소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며 “떼를 쓰는 걸 무조건 해주는 국회의원으로 매도하는 건 상당히 유감”이라고 밝혔다. 이어 “이상호 원장은 면담 요구조차 거부하는 등 문제 해결을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해결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정작 책임져야 할 사람이 책임을 안 지고 문제를 질질 끌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용혜인 의원 또한 “피해자가 시민사회와 정당과 협력해서 정당하게 피해를 구제받으려는 것을 ‘떼를 쓴다’고 표현한 것은 명백한 2차 가해”라고 말했다. 또 “기관장이 성희롱 피해에 대해 반성하기는커녕 공공연하게 2차 피해를 유발하는 발언을 한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라며 “남도학숙 원장은 이제라도 피해자의 요구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경청하고 책임지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라고 촉구했다. 이상호 원장은 행정사무감사에서 해당 발언 직전 A씨를 두고 “본인이 취직한 지 9년이 됐는데 다음해 성희롱 사건이 발생해 5년 동안 근무하지 않았다”라며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근무한 건 4년뿐”이라고 말했다. A씨는 직장내 성희롱 사건 이후 성희롱과 2차 피해로 인한 우울증 및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등을 진단받았다. 이에 2017·2021년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두 차례나 산업재해를 승인받아 요양 생활을 했다. A씨는 “산재 요양 기간에도 남도학숙은 산재 취소 행정소송까지 걸었다. 이 때문에 질병이 더욱 악화하는 등 긴 시간 고통을 겪었다”라며 “이런 피해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피해자의 근무 기간이 짧다는 점을 강조하며 밝히는 건, 그 책임이 오로지 피해자에게 있는 것처럼 외부에 비칠 수 있다”고 말했다. ■남도학숙 원장 거짓말 의혹 이상호 원장은 또 소송비용 확정 절차가 마무리되지 않는 원인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말도 여러 차례 했다. 이 원장은 A씨가 소송비용 확정 결정에 불복해 지난 6월 항고를 제기한 사실을 거론하며 “항고를 하면서 구체적인 사유나 이유를 밝히지 않고, 그냥 항고만 한 상태로 법원에서 계류 중”이라고 했다. ‘법원의 결정이 언제쯤 나올 것 같냐’는 취지의 질의에도 “항고를 한 본인이 무슨 이유로 어떻게 항고를 했고, 어떻게 해주십시오 하는 구체적인 내용을 제출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라며 “법원에서는 본인이 그 자료를 제출해야 판단할 수 있을 텐데, 법원에서도 무작정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A씨와 법원의 설명은 다르다. 이 원장의 주장과 달리 A씨는 법원에 제출한 항고장에 구체적인 항고 이유를 밝혔다. “소송비용 액수가 확정되는 과정에서 녹취록 작성 비용, 병원 진료 증빙서류 발급 비용, 정보공개 관련 비용 등이 반영되지 않았고 그 이유도 설명하지 않았다”는 취지의 내용이다. 각 비용의 구체적인 액수도 적었다. A씨의 대리인인 최정규 법무법인 원곡 변호사는 “항고장에 항고 이유를 적시했고 녹취록 작성 등 3가지 비용과 관련한 각종 증빙자료는 이미 앞선 재판에서 모두 제출한 상태”라며 “항고 사건에서 법원이 추가로 자료 제출을 요구한 적도 없다”라고 말했다. 이어 “만약 법원에서 자료를 더 내라고 하면 이에 응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라고 했다. 담당 법원 관계자도 “보통 항고심 사건의 처리 기간에 비춰 보면, 이번 사건이 아직 진행 중인 게 특별한 상황은 아니다”라며 “항고장이 제출된 이후 현재까지 다른 사안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미경 전남도의회 의원(정의당)은 “이 원장이 의회에 출석해 증인선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짓 진술이나 답변을 했다면, 위증죄로 고발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남도학숙 직장내 성희롱 피해자가 지난 6월 5일 법원의 소송비용 확정 결정에 불복해 제출한 항고장에 항고 이유가 적혀 있다. 피해자 대리인 제공 남도학숙을 대표하는 원장이 피해자 A씨를 깎아내리는 발언을 한 건 처음이 아니다. 2015년 11월 전남도의회의 행정사무감사에서 김완기 당시 남도학숙 원장은 직장내 성희롱 사건을 두고 “성희롱이 아닌 하극상”이라고 말했다. 김 전 원장은 “신참 직원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지나친 표현이나 순화되지 않은 표현을 한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라며 “마치 성희롱을 당한 것처럼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해서 학숙의 명예를 훼손하는 건 있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김 전 원장은 “도의회에 진정도 들어올 수 있을 것 같아서 이야기하자면, 한마디로 인생이 불량한 여자가 잘못 들어온 케이스”라며 원색적인 비난을 이어갔다. 당시는 A씨가 성희롱 피해를 인권위에 진정하면서 인권위의 조사가 진행 중인 때였다. 조사 결과가 나오지도 않았는데도 피해자가 진정했다는 이유만으로 피해자를 조직의 명예를 실추시킨 거짓말쟁이로 폄훼한 것이다. 그러나 인권위는 결국 2016년 3월 A씨의 성희롱 피해를 인정했다. ■직장내 괴롭힘 조사 절차에서 피해자 배제 피해자 A씨는 남도학숙이 최근 직장내 괴롭힘 및 2차 가해 신고를 처리하는 과정의 객관성과 신뢰성에 의문을 나타내고 있다. A씨는 지난해 7월 당시 남도학숙 원장 등 2명이 자신을 괴롭히고 2차 가해를 했다며 회사에 신고했다. 2019년 온라인으로 생방송되는 행정사무감사 도중에 피해자의 실명을 무단으로 공개했다는 점, A씨와 면담 중에 A씨에게 회사 명예를 실추시킨 직원이라고 모욕한 점 등이 신고 내용이다. 그러나 이들 2명이 지난해 8월 퇴직할 때까지 본격적인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신고 접수 후 1년이 지난 올 7월 A씨가 신고 사건의 처리 결과 등을 문의하자 남도학숙은 그제야 조사를 위한 절차를 시작했다. 남도학숙은 지난 7월 A씨에게 보낸 공문에서 그간 조사가 진행되지 않은 이유를 두고 “가해 행위자가 사업주 및 고충처리위원회 위원장으로 조사에 어려움이 있어 보류했다”라며 “A씨가 주장하는 내용을 고용노동부에 의뢰해 조사받기를 희망해 기다리고 있었다”고 답했다. A씨는 그러나 “지난해 7월 신고 접수 후 올해 공문을 받을 때까지 회사로부터 노동부에 의뢰하라는 등의 안내를 받은 적 없다”라며 “지난해 7월 가해자들이 퇴직하기 전에 회사에 신속히 조사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했으나 1년 이상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남도학숙은 지난 8월 고충처리위원회를 구성해 직장내 괴롭힘 등의 사실 확인을 위해 외부의 노무법인을 조사기관으로 선정했다. A씨는 그러나 고충처리위원회 구성을 문제 삼았다. 위원 대부분이 소송 관련인, 2차 가해자 등이라는 것이다. A씨는 “이런 구성의 고충처리위가 독단적으로 선정한 조사기관에서 조사를 진행하는 것은 결코 객관적일 수 없으니 피해 당사자와 협의를 거쳐 조사기관을 다시 선정해 달라”고 요구하며 조사를 거부했다. 남도학숙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강은미 의원이 남도학숙에 외부 조사기관 선정 과정에서 작성한 조사기관별 사전 조사서와 회의 자료 등을 요구했지만, 남도학숙은 자료가 없다고 답했다. 남도학숙은 “직장내 괴롭힘을 전문적으로 처리하고 조사역량이 있는 노무법인을 인터넷 검색을 통해 선정했다”고 밝혔다. 전남도 관계자도 “특정 금액 이상이 돼야 공개입찰을 진행하는데, 이번 외부 조사기관 선정은 금액이 낮아 수의계약을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외부 기관의 조사 결과 ‘괴롭힘 없음’과 ‘판단 불가’ 결정이 났다. 고충처리위원회는 지난 9월 이 결과를 그대로 인용했다. 남도학숙 측은 “외부의 객관성 있는 노무법인에 맡겨 조치를 한 것으로 마무리지었다”는 입장이다. A씨는 그러나 피해자 배제 등을 이유로 조사의 공정성에 문제가 있다며 조사 결과의 철회를 남도학숙에 요청한 상태다. 주종섭 전라남도의회 의원(더불어민주당)은 지난 11월 6일 행정사무감사에서 이런 상황을 두고 “너무 후진적이고 낡은 일이 진행되고 있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처럼 직장내 괴롭힘 조사의 객관성·신뢰성 논란은 관련 법이 만들어진 이후 줄곧 제기되고 있는 문제다. 2019년 7월 근로기준법이 개정되면서 직장내 괴롭힘 금지 조항이 마련됐다. 사용자는 직장내 괴롭힘을 접수하거나 발생 사실을 인지한 경우에는 지체없이 ‘객관적으로 조사’를 실시해야 한다. 다만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한 상세한 규정은 없는 실정이다. 객관적 조사의 핵심은 ‘조사 주체’에 대한 신뢰다. 현재 회사가 자체적으로 조사하지 않고, 외부 조사기관에 조사를 맡기는 방법을 채택하는 사례가 이미 있다. 나아가 일부 공공기관에서는 조사기관 선정 과정에서 피해자의 의견을 듣는 방식으로 운영하기도 한다. 다만 모두 자발적 조치다. 사측이 조사기관 선정 과정에서 피해자와 협의를 거치거나 선정 과정을 공개해야 할 ‘의무’는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객관성 확보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들을 법령에 명시하고 제도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박점규 직장갑질119 운영위원은 “회사가 외부 조사기관 후보를 복수로 제시한 뒤, 피해자와 협의해 한 곳을 선정한다면 조사 결과에 대한 불신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재심 제도 도입도 대안으로 언급했다. 그는 “보통 회사에서 징계를 내리면 이에 불복해 재심을 받을 수 있지만, 직장내 괴롭힘 사건에서는 괴롭힘이 인정되지 않으면 재심 절차가 없다”라며 “준사법기관인 노동위원회를 재심 기관으로 활용하는 방안이 거론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다만 “노동위원회가 많은 양의 사건을 모두 다룰 수 있을지 등 현실성을 두고 의문을 갖는 시각이 있다”고 했다.
- 남도학숙성희롱
- “상인·주민도 피해자…기억·안전 추구 동의”(2023. 10. 27 11:21)
- 2023. 10. 27 11:21 사회
- ㆍ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 피해자권리위원장 맡은 대한성공회 자캐오 신부 159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1년이 흘렀다. 참사의 기억을 지우거나 왜곡하려는 모습이 곳곳에서 보인다. 하지만 기억하지 않으면 참사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과 함께 ‘기억 투쟁’을 벌이는 이들이 있다.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기억해야 할 이야기를 기록한다. 이들은 말한다. “진실과 기억의 힘이 우리를 나아가게 한다”고.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 피해자권리위원장인 대한성공회 자캐오 신부가 지난 10월 19일 서울 용산구 용산나눔의집에서 주간경향과 인터뷰하고 있다. / 서성일 선임기자 이태원 참사의 기억공간인 ‘10·29 기억과 안전의 길’이 조성되는 ‘과정’ 또한 주목 받고 있다. 유가족은 물론 지역 상인 및 주민들까지 동참해 이들의 의사가 반영됐다. 자칫 갈등을 빚을 수 있는 여러 주체가 조율을 거쳐 한뜻을 모았다는 점에서 특히 의미가 있는 것이다. 참사 발생 1주기에 앞서, 참사 현장에 기억공간을 마련할 수 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엔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 내 피해자권리위원회가 큰 역할을 했다. 피해자권리위원회는 유가족과 상인 및 주민 사이에서 갈등을 조정했다. 책임과 권한이 있지만 손 놓고 있던 용산구 등 지방자치단체의 움직임도 조금이나마 이끌어냈다. 피해자권리위원장을 맡은 대한성공회 자캐오 신부는 “희생자와 유가족뿐 아니라 이태원의 상인과 주민 모두를 피해자로 보고 대화를 시도했다”라며 “제대로 된 기억이 우리를 안전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설득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 상인 모임인 이태원관광특구연합회가 협약을 맺고 기억공간 조성에 합의했다. 자캐오 신부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참사 현장 주변을 정비하고 소통하면서 상인들도 신뢰를 갖게 됐다”라며 이번 기억공간은 서로 간 신뢰와 존중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평가했다. 자캐오 신부는 “참사를 제대로 기억하고 이를 통해 핼러윈 축제를 안전하게 진행하는 게 중요하다”라며 “이는 사회적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공동체를 회복하는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그는 ‘용산나눔의집’ 원장 사제로 미등록 이주민의 체류권과 성소수자의 주거권 등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자캐오 신부를 지난 10월 19일 서울 용산구 용산나눔의집 사무실에서 만났다. -기억공간 조성의 전반적인 과정은 어땠나. “갈등 요소가 많았다. 참사 이후 이태원역 1번 출구 일대에 추모공간이 자연스레 형성됐다. 유족들 사이에서는 시민들의 마음이 담긴 이 공간을 마음대로 정리해도 되는지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처음에는 상인들을 접촉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이들은 참사의 목격자이고 구조자이기도 했다. 참사 당시 처참한 모습이 떠오른다고 했다. 또 자신이 한 말이 자칫 오해를 낳거나 오용될까 두려워 누구한테 마음껏 털어놓기가 두렵다고 토로했다. 여러 번의 거절 끝에 만날 수 있었다.” -상인들과는 어떤 방법으로 접촉을 시도했는지. “피해자권리위원회는 희생자와 유가족, 생존자뿐 아니라 이태원 상인, 주민, 공적 구조자 모두 피해자 범주에 포함된다고 봤다. 상인들에게도 ‘여러분은 잘못한 게 없다. 피해자다’라고 말했다. 피해자 권리라는 맥락에서 접근한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상인들이 놀랐는데, 마음을 연 계기가 된 듯하다. 대화의 접점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설득은 어떻게 했나. “처음에는 모든 얘기를 경청했다. 대형 참사가 발생한 사실은 억지로 지운다고 지워지지 않는다. 지울 수 없는 이야기를 두고 어떻게 갈등을 전환하고 사회적 의미로 승화시킬지를 말해야 한다. 제대로 된 기억과 애도만이 우리를 다시 안전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상인들을 설득했다. 지난해 12월 추모공간을 1차로 정비한 이후에도 언론에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여러 차례 정비를 이어갔다. 이를 지켜본 상인들이 신뢰를 갖게 된 것 같다.”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 유가족이 지난 10월 26일 서울 용산구 참사 현장에 조성된 ‘10·29 기억과 안전의 길’의 표지판을 어루만지며 슬퍼하고 있다. / 권도현 기자 -상인들은 어떤 입장이었나. “코로나19로 인해 상권이 초토화된 이후 지난해 핼러윈에 많은 기대를 했는데, 이태원 참사가 발생했다. 상인들로선 유족의 마음은 알겠으나, 추모공간이 정리되길 바랐다. 과거 참사 때처럼 피해자와 피해자가 갈등하는 상황에 이르면 안 되겠다, 사전에 방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족과 상인들이 서로 반목하면 결국 모두가 피해를 보게 된다.” -기억공간의 명칭에 담긴 ‘기억과 안전’이라는 표현도 협의를 통해 결정한 것인가. “그렇다. 지난해 12월부터 시작해 긴 시간 대화와 설득 과정을 거쳤다. 유족, 상인 모두 기억과 안전을 추구한다는 점에선 의견이 같았다. 특히 안전이라는 단어가 상당히 중요하다. 유족들의 일관된 입장이 있다. ‘이태원과 핼러윈이 참사의 원인도 본질도 아니다’라는 것이다. 축제에 간 이들은 잘못이 없다. 안전을 지키지 못한 시스템과 정부의 대응이 문제였다. 이런 맥락에 비춰 참사가 발생했으니 핼러윈을 그만두라는 것은, 결국 핼러윈 때문에 참사가 발생한 것처럼 오인될 우려가 있다. 핼러윈 자체는 안전하게 진행돼야 한다. 이 생각에 상인들도 동의한 것이다.” -용산구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는데. “참사 이후 용산구에는 참사대책추진단이라는 조직이 생겼다. 그런데 뭐하는 곳인지 모를 정도로 역할이 거의 없었다. 지난 8월 기억공간 조성에 용산구가 적극 나설 것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한 뒤에야 용산구 측에서 연락이 왔다. 우리는 박희영 구청장은 배제하라고 요구했고 추진단과 협의를 시작했다. 용산구는 법적 근거가 없다, 선례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사실 유족과 상인 사이에서 판을 만들고 중재하는 것은 그런 책임과 권한이 있는 용산구나 서울시 등 지자체의 역할이다. ‘나 몰라라’ 회피하다가, 유족과 상인들이 안을 다 만든 뒤에야 용산구는 테이블에 나왔다. 물론 뒤늦었지만, 그렇게라도 용기를 갖고 움직인 일부 공무원들이 있다는 건 다행이라 생각한다.” -용산구가 ‘10·29 기억과 안전의 길’을 같은 이름의 ‘명예도로’로 지정했다. “명예도로 지정도 우리가 먼저 용산구에 요청한 사안이다. 지방정부가 참사의 책임을 일정 부분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참사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이처럼 유가족, 시민사회, 지역 주민과 상인들의 빠른 협의를 거쳐서 참사 현장을 명예도로로 지정한 건 처음인 것으로 안다. -소통하는 과정은 어땠나. “기본적으로 기억공간은 유가족협의회의 결단과 양보, 수용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결과적으로 상인들도 공감할 수 있는 형태로 설치물이 들어서게 되면서 이들도 수용했다. 사회적 의미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나 같은 다양한 사회활동가와 주민, 시민들의 생각도 함께 반영했다. 실낱같은 희망이 있으면 갈등과 답보 상태도 이겨낼 수 있고, 아무리 그럴듯한 내일을 얘기해도 변화할 것이란 희망이 없으면 견뎌내지 못한다. 이를 사회활동을 하면서 여러 차례 경험했다. 사회활동가는 이런 ‘숨 쉴 틈’을 만드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고 본다. 꽉 막힌 벽에 난 틈과 같은 희망 하나만으로도 유족, 주민과 시민사회, 상인, 공적 기관이 한 단계 앞으로 나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갈등 국면을 전환하기 위해 양쪽 얘기를 서로에게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전달하려 노력했다. 쉽게 단정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반복했다.” -기억과 안전은 어떤 관계인가. “물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유족들은 죽음과 상실의 기억이 클 수밖에 없다. 지역 주민과 상인은 이곳을 매일 지나다니고 여기서 살아가야 한다. 유족과 상인이 날 선 채로 공격하는 게 아니라 배려를 통해 사회적 의미를 만들기 위해 함께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참사가 ‘기억’되는 것, 핼러윈을 ‘안전’하게 진행하는 것, 이 두 가지가 중요한 요소다. 제대로 된 기억을 통해 안전한 핼러윈 축제가 만들어질 때 비로소 사회적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첫걸음을 뗄 수 있는 것이다. 이게 바로 공동체의 회복이다. 기억과 안전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기억공간은 수많은 시민이 안전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질문하는 공간이 될 것이다.” 지난 10월 26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 이태원 참사의 기억공간인 ‘10·29 기억과 안전의 길’을 알리는 명예도로 표지판이 설치돼 있다. / 정희완 기자 -기억공간의 사회적 의미는. “기억공간을 통해서 참사가 유족뿐 아니라 ‘우리’의 얘기가 될 수 있다. 아직 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기소된 일부 책임자들의 1심 선고도 나오지 않았다. 만약 유족과 상인이 추모공간을 두고 갈등했다면 유족들의 고립감은 더 커졌을 수도 있다. 기억공간 조성 과정에서 진행한 소통과 합의에 큰 의미를 두는 이유이다. 길이 열린 것이다. 기억공간 조성이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의 디딤돌이 될 수도 있다.” -디딤돌이 된다는 게 어떤 뜻인지. “과거 참사를 보면 정부가 ‘적극적인 책임 회피’와 ‘소극적 권한 행사’를 통해 피해자들끼리 갈등하게 하면서 진상규명도 어려워지는 상황이 자주 반복됐다. 피해자끼리 다투게 하면서 진짜 가해자와 싸울 힘을 상실케 하는 것이다. 정부가 왜곡된 프레임을 짜서 전파하는 등 여론의 물꼬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잡아서 피해자들을 공격하게 했다. 이는 사회적 트라우마를 심화시켰다. 이번 기억공간은 이런 왜곡된 흐름에 쐐기를 박았다고 본다.” -현재 기억공간은 ‘미완성’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중간단계, 중간정비이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재발방지 대책도 제대로 얘기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억공간을 완성했다고 하면, 마치 모든 게 마무리된 것처럼 잘못 비칠 수 있다. 중간단계라는 표현에는 또 사회적 트라우마를 넘어서는 발판, 시작점이 된다는 의미도 있다.” -아쉬운 점은 없는지. “책임과 권한이 있는 공적 기관이 제 역할을 해야 한다. 참사 이후에 시민들이 분노한 이유도 정부와 책임자들이 적극적으로 책임을 회피하고 제대로 된 권한을 행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 기억공간 조성은 그 결과와 과정에서 분명히 의미가 있다. 다양한 주체가 합의해 1주기에 맞춰 기억공간을 만든 건 드문 일이다. 그러나 한계도 많다. 당연하다. 책임과 권한이 없는 이들이 문제를 푼 것이기 때문이다. 조성 과정에서 미처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점이 많았다. 이런 과정들도 기억되고 공유될 때 아픔이 반복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이를 어떻게 기록하고 공유할 것인가는 사실 어려운 지점이다. 잘못하면 피해자가 다른 피해자를 공격하는 일이 될 수도 있어서다. 서로 간 신뢰와 존중만으로 여기까지 왔다는 점과 함께, 공적 기관의 제대로 된 역할과 책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 표지 이야기
- [윤형중의 정책과 딜레마](22)전세사기 피해자의 최우선변제권 보장(2023. 06. 16 11:48)
- 2023. 06. 16 11:48 경제
- 5월 26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열린 정부차원의 전세사기·깡통전세 추가대책 마련 및 대통령 면담 재차 촉구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사망한 피해자를 추모하며 묵념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전세사기 특별법이 오랜 진통 끝에 지난 5월 25일 국회에서 통과됐다. 전세사기 피해가 공론화된 뒤 너무 늦은 대응이었고, 그사이에 다섯 명의 피해자가 세상을 떠났다. 늦은 만큼 제대로 된 해법이 나온 것도 아니었다. 특별법 제정 직후부터 후속 대책을 둘러싼 논의가 분분하다. 전세사기를 넘어 전세 제도 자체에 대한 논의가 다소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 임차인이 알기조차 어려운 최우선변제권 문제는 논의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쟁점마다 충분한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럴 땐 논의의 갈래부터 나누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현재 전세사기와 관련된 논의는 크게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특별법이 언제,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대한 현장의 혼란이다. 피해자 인정, 경·공매 유예와 대행, 전환 및 신규 대출의 조건과 실행 등을 둘러싸고 피해자들은 여전히 혼란을 겪고 있다. 정부의 조속한 대응이 필요한 부분이다. 둘째는 특별법 제정 막판까지 쟁점이었던 전세보증금 보전 방안과 피해자 요건의 사각지대다. 피해자들은 보완 입법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셋째는 전세 제도 개선 방안과 역전세난 대응이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수명이 다한 전세 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개편 작업에 들어가겠다”고 했다가 “전세를 제거하려는 접근은 하지 않겠다”며 갈팡질팡 행보를 보이고, 정부·여당이 임대차 3법을 원인으로 지목하는 등 전세사기조차 정쟁적 사안으로 접근하고 있지만, 여야뿐 아니라 시장에서도 전세에 혜택을 줬던 전세대출과 전세보증 제도를 손봐야 한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아울러 하반기에 본격화될 깡통주택 위기와 역전세난을 앞두고 임대인에 대한 대출 확대 등이 대안으로 논의되고 있다. 이 세 가지 갈래의 논의가 모두 중요하기에 함께 다뤄지곤 한다. 하지만 각각의 논의가 혼란스럽게 전개되지 않고, 쟁점이 하나씩 정리되며 성과를 내려면 어떤 논의를 하는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전세보증금 보전 방안 중에서 최우선변제권에 대해서만 다루려 한다. 전세사기 특별법을 제정하면서 막판까지 쟁점이었던 사안은 피해자 범위, 전세보증금 반환 채권의 공공 매입 여부, 최우선변제금 보전 방안 등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이중 최우선변제금 보전 방안은 여러 전세사기 피해자 가운데에도 가장 벼랑 끝에 몰린 이들에게 중요한 사안이었다. 사망한 다섯 명의 전세사기 피해자 가운데 두 분이 최우선변제금조차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들은 전 재산에 대출까지 받아서 냈던 7000만원과 9000만원의 전세보증금을 전액 날릴 상황이었다. 피해자 대책위는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 가운데 500명 이상이 최우선변제금조차 받지 못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들이 새로 전세를 얻을 때 최우선변제금만큼 무이자 대출을 지원하겠다는 내용이 특별법에 담겼다. 피해자 대책위는 ‘전 재산을 날린 피해자들에게 새로 더 빚을 내라는 무자비한 대책’이라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일부 피해자들은 왜 최우선변제금조차 받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을까. 현행 주택임대차보호법은 임차인이 임대인에게 맡긴 보증금 가운데 우선적으로 돌려받을 수 있는 권리(최우선변제권)를 보장한다. 이 권리가 정하는 한도액이 최우선변제금이다. 다만 이 최우선변제권은 소액임차인에게만 적용된다. 그러면 사망한 두 피해자는 소액임차인이 아니었을까. 이들이 계약한 시점이 전세난이 절정이었던 2021년이고, 임차한 주택의 위치가 인천시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전세보증금 7000만원과 9000만원이 고액이라고 보긴 어렵다. 실제로 당시 주택임대차보호법 시행령에서도 인천 지역 소액임차인의 기준은 보증금 1억3000만원 이하였다. 이들은 이 기준에 충족했다. 문제는 이들보다 선순위로 근저당권을 가진 채권이었다. 최우선변제권을 가지는 소액임차인과 우선 변제금액의 기준 시점은 임차인의 계약일이 아닌, 선순위 근저당이 설정된 날짜다. 이로 인해 2021년에 입주한 임차인은 이 시기의 법령이 아닌, 임대인이 집을 담보로 대출받은 시점의 법령을 적용받는다. 실제로 첫 번째 사망자는 임대차계약 시점보다 무려 10년 앞선 2011년의 법령을 적용받았다. 임대인이 그때 빚을 냈기 때문이다. 2011년 기준 소액임차인의 기준은 6500만원으로 2021년 전세보증금 7000만원을 맡긴 임차인은 최우선변제권이 보장되지 않았다. 세 번째 사망자의 사례도 마찬가지다. 그는 2019년 전세보증금 7200만원에 계약했고, 2021년 재계약 시 임대인의 요구에 따라 보증금을 9000만원으로 올려줬다. 이 증액이 문제였다. 이 집의 선순위 근저당이 설정된 시점은 2017년 7월로, 이 당시 소액임차인의 기준은 8000만원이었다. 원래는 소액임차인이었으나, 전셋값이 올라 기준을 넘은 것이다. 이렇게 최우선변제권의 기준 시점이 선순위 근저당 설정일이라는 것을 대부분의 임차인뿐 아니라 임대인조차 알지 못한다. 극히 일부의 법률 전문가와 업계 종사자만이 아는 ‘법률 기술’에 가깝다. 그게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갈랐다. 전세사기 피해 지원을 위한 특별법 시행 첫날인 6월 1일 서울시청 서소문 별관 내 전·월세 종합지원센터를 찾은 피해자가 직원의 도움을 받아 상담신청서를 작성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상한 법률 해석 바꾸고 법 개정해야 삶과 죽음을 가른 이상한 법령에 대해 좀더 파고들고자 한다. 임차인이 계약 시점의 법령이 아닌, 선순위 근저당 시점의 법령에 적용을 받는 근거는 주택임대차보호법 시행령 부칙에 있다. 이 부칙의 제2조를 그대로 옮기면 “(소액보증금 보호에 관한 적용례 등) 제10조 제1항 및 제11조의 개정규정은 이 영(令) 시행 당시 존속 중인 임대차계약에 대해서도 적용하되, 이 영 시행 전에 임차주택에 대하여 담보물권을 취득한 자에 대해서는 종전의 규정에 따른다”이다. 좀 어려워 보이지만, 우선변제를 받는 금액(제10조)과 소액임차인의 기준(제11조)에 대한 규정 개정 전에 임차주택을 담보로 잡고 대출을 내준 채권자에겐 이전의 규정에 따른다는 의미다. 이 규정을 기계적으로 해석한 결과가 현재까지의 판례다. 법원은 줄곧 최우선변제권을 가지는 임차인의 기준을 선순위 근저당이 설정된 시점으로 판결해왔다. 그런데 다시 한 번 엄밀히 따져보자. 이 부칙은 담보물권자의 권리를 규정하지만, 임차인의 권리를 규정하진 않는다. 담보물권자는 대출을 내줄 당시의 최우선변제금만큼 상환을 못 받을 가능성이 있고, 따라서 법령이 바뀌더라도 마땅히 자신의 권리가 온존하길 바란다. 하지만 소액임차인의 기준은 이후에 전셋값이 올라가면서 바뀌는 것이 당연하고, 과거의 기준을 적용하면 소액임차인의 범위는 지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소액임차인의 기준이 바뀌더라도 담보물권자의 입장에선 이전보다 손해를 입거나, 권리가 침해되는 것이 전혀 없다. 최우선변제금이 이전과 동일하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부칙 조항은 ‘적확하지 않은 애매한 문장으로 각 주체의 권리 관계를 명확히 규정하지 않은 한계’가 분명하고, 담보물권자에 대해 적용되는 이 규정이 신규 임차인에게 적용된다고 추론하기까지는 여러 인과적 연결고리가 있어야 하지만, 이 법령에선 반드시 갖춰야 하는 연역적 연결고리가 부재한다. 결국 부칙으로 적힌 이 애매한 문장이 수백명, 수천명의 전 재산을 빼앗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게 만든 것이다. 정부와 정치권은 정책적 개입을 해야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번 전세사기 사태로 인해 이 문제에 대한 공론화가 거의 처음 시작됐고, 국회에서도 개선하려는 시도가 나온다는 점이다. 맹성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6월 8일 공인중개사가 임차인에게 최우선변제의 세부사항을 의무적으로 설명하도록 하는 내용의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 법안은 그러나 지나치게 미온적이다. 국회는 법령의 부칙에 대한 유권해석을 정부에 요구하고 해석을 바꾸도록 목소리를 내며, 이참에 최우선변제권을 보장받는 소액임차인의 기준을 아예 삭제하도록 법률을 바꿀 필요가 있다. 언뜻 보기엔 고액임차인을 왜 보호해야 하느냐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집값과 전셋값이 급등하는 한국사회에선 이 소액임차인의 기준이 지속적으로 문제가 됐다. 애초에 임차인을 나눌 필요 자체가 없는 일이었다. 집을 담보로 잡고 대출을 내주는 금융기관들이 처음부터 최우선변제금을 고려해 대출 금액을 정하면 될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금융기관은 대출의 기간을 정하고, 기간마다 대출 일부를 상환하게 하거나, 금리를 바꾸는 권한도 가지고 있다. 자신들의 리스크를 통제할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법령이 금융을 과보호하고 있는 셈이다. 힘센 자들을 과보호하느라 약자들이 죽어가는, 이 상황을 더 이상 방치해선 안 된다. 법령 해석과 법률 개정의 노력만으로는 피해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정책적 개입’이다. 최우선변제금을 최대한 보전하기 위한 여러 정책적 방안은 분명 있다. 정부는 그저 ‘사기 피해자에게 재정을 투입할 수 없다’며 완고한 입장을 보이지만, 이런 태도는 대안을 강구하지 않겠다는 ‘무의지’와 ‘무능’을 보여줄 뿐이다. 최우선변제금을 보장하지 못하는 근거가 된 선순위 채권을 공공이 인수해 최우선변제금의 재원으로 삼는 방안 등 공공이 가진 권한과 시장의 기능을 활용하는 대책들이 충분히 나올 수 있다. 다른 지원과의 형평성을 고려하더라도 재정이 일정 수준의 역할을 하는 방안을 전향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더 이상의 희생과 고통을 방치하지 않길 정부와 정치권에 바랄 뿐이다.
- 윤형중의 정책과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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