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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교 흔들지 마세요”…정치권 막말에 상처받는 학생들
“우리 학교 흔들지 마세요”…정치권 막말에 상처받는 학생들(2024. 12. 02 06:00)
2024. 12. 02 06:00 사회
김혜지 서울시의원이 되살린 혁신학교 흔들기…그 오해와 진실 “고정관념으로 판단 말라” 학생·학부모 항의에 김 의원은 침묵 서울 강동구에 있는 선사고 학생들이 주간경향에 적어 보낸 학교에 대한 생각/정지윤 선임기자 정치권의 무책임한 한마디에 또 다시 아이들이 상처받고 있다. 지난 11월 18일 정근식 서울시교육감을 상대로 진행된 시정 질의에서 김혜지 서울시의원(국민의힘)이 쏟아낸 발언이 문제가 됐다. 이날 김 의원은 서울 강동구에 있는 혁신학교인 ‘선사고’를 콕 집어서 “공부하지 않는 학생들에게는 최고의 학교”, “졸업할 때 가장 (대학) 잘 간 친구가 누구냐고 했더니 ‘경희대’라고 하더라”, “혁신학교가 정치적 배경 없는 중립적인 학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해당 발언을 실시간 중계, 언론 기사, 유튜브 동영상 등으로 확인한 학부모들이 김 의원에게 면담을 요청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한 선사고 학부모는 “(김 의원이) 너무 바빠서 종일 시간이 없다고 했다. 그럼 시간 나실 때 찾아가겠다고 하니 아직 돌이 안 된 아이를 키우고 있어서 안 된다고 하더라”며 “남의 아이가 받은 상처는 무시하고, 본인 아이는 돌봐야겠다는 말에 어처구니가 없었다”고 말했다. 학부모들은 김 의원이 전화를 받지 않자 문자메시지로 면담과 사과를 요구했다. 역시나 일주일이 넘도록 아무런 답도 오지 않았다. 2009년 경기도에서 시작한 혁신학교는 2011년부터 각 시도교육청이 공교육 정상화를 목표로 도입하며 전국으로 확대됐다. 진보 성향 교육감들이 혁신학교 도입을 주도했고, 이 때문에 정쟁 대상이 됐다. 2022년 전국 교육감선거 때도 진보는 자율형 사립고 폐지, 보수는 혁신학교 재검토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해당 학교 학생들은 모교가 ‘사회적 병폐’로 지목되는 상황을 지켜봤다. 그로부터 2년여가 지났다. 지난 11월 18일 김 의원의 선사고 관련 발언 역시 특별한 교육 현안이 있어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이날 시정 질의 답변자가 진보진영 단일 후보로 출마해 당선된 정근식 교육감이라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선사고에 다니는 학생들도 이러한 상황을 알고 있다. 선사고 학생회는 지난 11월 26일 “저희의 입장은 정치적 신념과는 무관하며, 오로지 학생들이 주체가 돼 작성한 것임을 분명히 밝힙니다”로 시작하는 입장문을 발표했다. 학생회는 입장문 곳곳에서 “저희 학생들과 문제가 없던 학교가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된 점이 유감스럽다”거나 “저희 재학생들은 선사고가 더 정치적 도구로 사용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호소했다. 그리고 “(김 의원) 발언으로 학교에 대한 오해가 생기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당부를 전했다. 지난 11월 26일 방문한 서울 강동구 선사고등학교 전경./정지윤 선임기자 혁신학교를 가면 대학을 못 간다? 혁신학교를 둘러싼 모든 오해의 중심에는 ‘대학 진학률’이 있다. “혁신학교에 다니면 대학에 못 간다”는 말이 마치 진실처럼 통용된다. 학생·학부모보다 주로 입시와는 큰 관계도 없는 정치인 등의 입으로 소문이 만들어지고 퍼진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은 ‘느낌적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먼저 서울시교육청은 고등학교별 대학 진학률을 공개하지 않는다. 대입 결과는 학교의 위치, 입학생의 특성과 같은 종합적 요소와 관련되기 때문에 교육청은 자료 자체를 수집하지 않는다. 또 ‘대학 진학률’은 합격했지만 등록하지 않는 경우, 등록만 하고 재수를 하는 경우, 한 학생이 복수의 대학에 합격하는 경우 등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진학률이라며 공개된 자료마다 수치가 다르고, 학생·학부모의 체감과도 다른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도 혁신학교는 대학 진학률을 기준으로 ‘수준이 낮다’며 공격받는다. 그렇다면 혁신학교의 대학 진학률은 실제로 어떨까. 대학 진학률을 공개하고 있는 대표 사이트로 ‘학교알리미’가 있다. 이곳에서 학교별 ‘졸업생 진로 현황’ 확인이 가능하다. 가장 최근 연도 공시인 2023년 11월 자료를 기준으로 이른바 강남 8학군 학교들의 ‘대학 진학률’을 보면 서울고 37.4%, 개포고 36.4%, 서초고 37.5%, 양재고 37.4%, 반포고 36.7%다. 같은 기준으로 선사고의 대학 진학률은 44.1%다. 이를 두고 대학 진학률과 ‘명문대 진학률’은 다르다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실제로 김 의원은 시정 질의에서 선사고 면학 분위기를 비판하는 익명의 졸업생 인터뷰를 띄워두고 “너희 졸업할 때 가장 (대학) 잘 간 친구가 누구냐고 했더니 ‘경희대’라고 하더라”고 말했다. 선사고의 최근 3개년 입시 통계(2022~2024)를 살펴봤다. 매해 수시·정시를 포함해서 이른바 스카이 대학(서울대·고려대·연세대) 합격생이 있었다. 또 재수생을 제외한 대학 합격자의 20% 이상이 성균관대, 한양대, 중앙대 등 이른바 ‘인 서울’ 대학교로 진학했다. 선사고가 있는 강동구에는 선사고보다 대학 진학률이 낮은 학교도 있지만, 학력에 대한 비판은 오로지 선사고에만 쏟아진다. 정연정 선사고 교장은 “이른바 상위권 대학에 합격한 아이들이 너무나 자랑스럽지만, 그 아이들을 내세워 학교 홍보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며 “다만 혁신학교 역시 대학 진학률이나 상위권 대학 입학 비율이 다른 일반 학교와 유의미한 차이가 있지 않다는 점만큼은 꼭 말씀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 11월 26일 서울 강동구 선사고등학교 정연정 교장이 주간경향과 인터뷰하고 있다./정지윤 선임기자 혁신학교는 어쩔 수 없이 다닌다? 혁신학교를 둘러싼 또 하나의 오해는 ‘학생들이 강제로 배정이 돼서 어쩔 수 없이 다닌다’는 것이다. 선사고를 포함한 혁신학교는 매해 학기 말이면 구성원을 대상으로 ‘만족도’ 조사를 한다. 5점 만점을 기준으로 통계를 내는데 올해 결과는 학생 4점, 학부모 4.1점, 교직원 4.8점이다. 최근 3년 동안 진행된 조사에서 모든 구성원의 만족도가 한차례도 4점 밑으로 내려간 적이 없다. 학부모 만족도는 매해 학생보다 조금씩 높게 나온다. 혁신학교에 비판적인 시선대로면 학부모들이 불안에 떨어야 할 것 같지만, 지표는 오히려 반대다. 김 의원은 구성원 만족도가 높은 것을 두고 “공부 안 하는 친구들은 너무 좋아한다니까요, 이 학교를”이라고 말했다. 선사고에는 지난 11월 28일 기준, 총 658명(1학년 214명·2학년 232명·3학년 212명)이 재학 중이다. 한 해 동안 이사(7명) 및 학업중단(9명)을 제외한 순수 학교 간 전학은 총 5명이 있었다. 이중 2명이 특성화고(마이스터고)로 전학을 갔다. 나머지 3명은 인근 자사고로 전학했다. 종합하면 각종 사유로 총 21명 전출이 발생했다. 해당 수치를 역시 강남 8학군 내 공립학교와 비교해봤다. 2023년 한 해 기준, 전출 및 학업 중단은 서울고 60명, 개포고 53명, 서초고 47명, 양재고 34명, 반포고 46명이었다. 인근 학교와도 비교해봤다. 강동고 16명, 강일고 20명, 광문고 27명, 동북고 31명, 둔촌고 21명 등이다. 선사고에 배정된 것이 불만이기 때문에 학생들이 전학을 선택한다고 볼 만한 유의미한 차이는 없었다. 오히려 주목할 점은 선사고는 전입이 없다는 것이다. 혁신학교인 선사고는 이미 학급별 인원이 교육감 지침으로 정한 24명을 초과해 전학을 받을 수 없다. 정 교장은 “만약 전입생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자사고에서 우리 학교로 전학을 오는 학생도 분명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선사고에서 운영 중인 학문 간 융합 수업 목록/선사고 제공 마지막 오해는 ‘혁신학교는 일반고와 달리 대입 공부를 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혁신학교도 공립학교다. 이에 따라 수업은 초·중등교육법에 근거한 ‘국가수준교육과정’을 벗어날 수 없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교육과정 운영 측면에서 혁신학교에 부여되는 별도의 자율성은 없다. 다만 교사들이 동료 교사들과 함께 국가수준교육과정 틀 안에서 교육과정 및 수업혁신을 적극적으로 해나가는 것”이라며 “오히려 혁신학교에서 이뤄진 노력이 이미 2022 개정교육과정 등에 다양한 방식으로 반영됐다”고 말했다. 혁신학교 수업 역시 법에 근거한 교육과정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교사들이 자발적으로 협력해서 만든 수업 몇 가지가 더해진다는 것이다. 지난 11월 26일 방문한 선사고에서는 1학년 3반의 연극 수업이 한창이었다. 학생들은 연기뿐만 아니라 작가, 연출 등의 스태프로도 참여해 연극 한 편을 함께 만들고 있었다. 게시판에는 학교에서 열리는 수업 홍보물도 있었다. 제목을 보면, ‘언어와 사회 현상은 어떤 영향을 주고받을까?’, ‘나와 세계는 어떻게 연결될까?’, ‘수학은 우리 삶에 왜 필요하고, 어떤 도움이 될까’, ‘우리 고장 암사동의 생물 다양성은 얼마나 풍부할까’ 등이었다. 대부분 학문 간 융합을 통한 다면사고를 해야 하는 것들이다. 이를 위해 수학·국어 교사가 협업해 수업을 개설하는 식이었다. 연세대를 비롯한 유명 대학이 입시에서 강조하는 것이 ‘다면사고’다. 1, 2학년 때는 전교생이 참여한 탐구 발표대회를 한다. 1학년은 교과 과목과 관련한 소주제를 선정해 연구 및 발표를 하고, 2학년은 진로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식이다. 올해 학생들이 발표한 교과심화탐구 주제 중에는 ‘미얀마 쿠데타로 보는 유엔 보호 책임의 한계와 해결방안’, ‘세균배양을 통한 천연 항생물질 찾기’ 등이 있었다. 지난 7월 선사고에서 진행한 ‘교과심화탐구’ 결과 발표회 모습/선사고 제공 학생들이 참여하는 수업 및 활동은 모두 생활기록부에 기재된다. 실제로 혁신학교의 이러한 수업방식을 입시에 반영하기 위해 개교 초 대학 측이 입학사정관을 파견하기도 했다. 선사고의 대학 합격 비중 역시 정시보다 수시가 높다. 그런데도 김 의원은 선사고를 두고 “공교육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어정쩡한 학교”, “학생들이 너무 안타깝고 희생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학생들은 “선사고는 학생들이 다양한 방면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학교”라고 반박했다. 책임 없는 한국식 정치 구성원 모두가 만족하는 완벽한 학교는 있을 수 없다. 입시 구조상 학생들에게는 성적을 기초로 등급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친구, 학교를 향한 갈등이 생기고 자퇴나 전학을 선택할 수 있다. 또 졸업 후 학교에 대한 원망이 남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을 두고 어떤 학교에는 정상적인 입시 과정으로, 또 다른 학교에는 존폐를 따져야 할 사례로 언급된다면 이는 발언자의 의도를 의심해 볼 수밖에 없다. 일부 정치권이 혁신학교를 바라보는 잣대가 공평한가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취재가 시작된 후 선사고 학생들은 주간경향에 이번 사태에 대한 생각, 하고 싶은 말 등을 자유롭게 적어 보냈다. “우리 학교가 진짜 어떤 모습인지 알고 말하면 좋겠다”, “공부를 안 해서 행복한 학교라고 하는 건 저희의 명예를 훼손하신 것과 같습니다”, “고정관념, 편견, 선입견으로만 우리 학교를 판단하지 마세요”, “선사고 선생님들께서는 학생들을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언급하신 문제들은 혁신학교뿐만 아니라 모든 고교에서 발생합니다”, “입학 전에는 선사고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고3인 저는 선사고의 시간이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대학 진학률만으로 ‘교육의 성공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지나치게 협소한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사고 재학생으로서 우리 학교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어야 하는 이런 상황이 바로잡힐 수 있길 간절히 바랍니다” 등이 그 내용이다. 정 교장은 “이번 일로 학교공동체에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생겼고, 학생들의 분노도 상상 이상으로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어른으로서, 그리고 교장으로서 학생들에게 죄송하다. 의원님의 진정어린 사과를 바란다”고 밝혔다. 학부모들 역시 입장문을 내고 “김 의원이 수백 명의 재학생과 졸업생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해 달라”고 요구했다. 주간경향은 김 의원에게 연락했지만 그는 전화를 받지도, 문자에 답을 하지도 않았다. 김 의원은 선사고가 있는 강동구 제1선거구에서 국민의힘 공천을 받아 선출됐다. 시민과의 소통 강화를 위해 임명하는 서울시의회 대변인이기도 하다. 교육감을 상대로 30여 분간 선사고 비판을 쏟아냈던 그는 정작 학생·학부모의 항의에는 침묵하는 중이다. “제발 정치적 목적으로 학교를 흔들지 말아달라”는 학생들의 바람을 들어줄 정치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특집
작은 시골 학교의 ‘행복한 스파이크’
작은 시골 학교의 ‘행복한 스파이크’(2024. 11. 25 06:00)
2024. 11. 25 06:00 사회
철원 와수초 여자배구부, 유소년 클럽 대회 우승 돌풍…전국 대회선 아쉬운 탈락 지난 11월 20일 강원도 철원군 와수초등학교 여자배구부 선수들이 체육관에서 리시브 연습을 하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너희들 왜 진 것 같아?” 지난 11월 20일 오후 강원도 철원군 와수초등학교 체육관에 여자배구부 선수들이 반원을 그리며 앉아 있었다. 초등학교 3~6학년인 선수들은 손톱을 만지거나 시선을 땅으로 떨궜다. 와수초 여자배구부는 강원도 대표로 지난 11월 16일부터 광주에서 열린 ‘2024 전국 학교 스포츠클럽 축전’에 나섰다가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와수초는 지난 10월 ‘2024 제천 전국 유소년 클럽 배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이번 대회 ‘다크호스’로 꼽혔으나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배구부를 지도하는 이학영 교사는 대회를 마치고 처음으로 열린 이날 훈련에서 지난 경기를 복기했다. 이번 전국 대회 예선 3경기에서 와수초는 1승 2패를 거뒀다. 돌아보니 승부처는 첫 경기였다. 첫 경기, 1세트를 시작하자마자 와수초는 내리 8실점했다. 8 대 0에서 18 대 18까지 따라붙었지만, 서브 범실로 자멸하면서 세트를 내줬다. 와수초가 2세트를 따내면서 이어진 마지막 3세트도 초반에 벌어진 점수 차, 서브 범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졌다. 벼랑 끝에서 맞이한 두 번째 경기는 세트스코어 2 대 0으로 완승을 거뒀지만, 마지막 경기는 2세트 동안 15득점에 그치며 거짓말처럼 맥없이 졌다. “자, 처음부터 다시 하는 거야. 기초 훈련부터.” 이 교사의 말에 아이들은 일렬로 서서 “마이”를 외치며 리시브 훈련을 시작했다. 이것은 와수초 배구부의 쓰라린 패배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전교생 150명의 작은 시골 학교에서 아이들이 배구를 시작하고, 좋아하고, 꿈을 갖는 일에 관한 이야기다. 작은 학교가 전국을 제패하는 ‘기적’이 없더라도, 와수초의 배구는 흔들림 없이 계속된다. 지난 11월 20일 강원도 철원군 와수초등학교 여자배구부 선수들이 파이팅을 외치며 자세를 취하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여학생 3명 중 1명이 선수 와수초는 강원도 철원군 서면 와수리에 있는 전교생 150명 규모의 작은 학교다. 여자배구부는 3학년부터 활동할 수 있는데, 3~6학년 여학생 49명 중 17명이 배구부다. 여학생 3명 중 1명은 배구를 하는 셈이다. 부원 대부분이 와수리에서 나고 자랐다. 와수초 배구부가 강해지기까지 학교의 작은 규모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대부분의 팀이 5~6학년 위주로 경기에 나서는 것과 달리, 와수초 6학년 학생들은 선수가 부족해 4학년 때부터 경기를 뛰기 시작했다. 와수초 배구부 선수들은 오래 손발을 맞춰 조직력이 좋고, 경기 경험도 또래보다 풍부하다. 이학영 교사가 강조하는 ‘기초 훈련’으로 갈고닦은 서브, 리시브 등 기본기도 비교적 탄탄하다. 이번 전국대회에서 맞붙은 상대 팀 지도자는 “와수초 경기 영상을 미리 받아서 분석해 봤는데 마땅한 구멍이 보이지 않는다”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이학영 교사는 “작년이나 재작년에는 월등한 아이들이 하나둘 있었지만, 실력이 조금 부족한 선수가 있는 자리를 상대 팀이 집중적으로 공략하면 잘하는 애들도 무너졌다. 올해는 특출나진 않아도 골고루 잘하니 누가 못 받아도 ‘쟤가 실수했겠지, 다음엔 잘 받겠지’ 하고 서로 믿는다. 그러고 보면 배구는 혼자 하는 경기가 아니다”라고 했다. 올해 와수초 배구부는 강했다. 지난 9월 강원도대회에서 3년 연속 우승에 성공했다. 원주시, 강릉시, 춘천시 등 도시 학교 사이에 “면단위 초등학교가 섞여서 우승했다”. 정점은 지난 10월 열린 ‘제천 전국 유소년 클럽 배구대회’였다. 전국 17개팀이 참여한 대회에서 와수초는 결승까지 5게임을 하는 동안 단 한 세트도 내주지 않고 우승을 차지했다. 물론 완벽하지 않다. 와수초 배구부의 약점도 학교의 작은 규모와 떼어 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배구는 신장이 중요한 종목이다. 작은 학교이다 보니 뽑을 수 있는 선수의 폭이 좁아 신장이 큰 선수가 많지 않다. 와수초 배구부의 평균 키는 149.9㎝, 최장신이 160㎝다. 이번 대회에서 맞붙은 팀들에는 “머리 하나가 더 큰 선수”들이 많았다. 실제로 이번 전국대회 우승팀은 전교생이 2000명이 넘는 학교로, 웬만한 성인 남성보다 키가 큰 선수도 있었다. 기본기로 극복할 수 없는 운동신경, 순발력 부족도 이번 대회를 통해 노출됐다. 없는 살림에도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됐다. 와수초 배구부는 “키가 크다”, “운동 신경이 좋다”는 이유로 이학영 교사의 꼬임(?)에 배구부에 가입한 아이들과 그 친구들로 구성돼 있다. 지난 11월 20일 강원도 철원군 와수초등학교 여자배구부 선수들이 이학영 교사가 던져주는 토스에 맞춰 스파이크를 때리는 훈련을 하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기적이 없어도 배구는 계속된다 “체쌤(체육선생님의 준말로 이학영 교사를 부르는 말)이 간식 준다고 해서(6학년 김하늘)”, “살 빠지고 키 큰다고 해서(6학년 서하선)”, “하선이가 재밌대서(6학년 최영원)”, “체쌤이 배구부 들어오라고 따라다니면서 애들 데려오래서(5학년 윤현진)” 등의 이유로 들어온 아이들은 금세 배구의 재미에 빠졌다. “체쌤이 계속 먹을 걸 줘서 살이 안 빠졌”지만 배구부는 나가지 않았다. 우리 쪽 코트로 넘어온 공을 3번 안에 상대 코트로 넘겨야 하는데, 각자의 순간적인 판단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그 다채로움이 재미를 줬다. 지난 11월 20일 훈련 말미에 치른 3·6학년팀과 4·5학년팀의 연습 경기에서도 아이들은 손이 아프다면서도 교체를 거부하고, 이미 2세트까지 끝난 상황에서도 “한 세트만 더”를 외쳤다. 이학영 교사는 “남자배구부도 만들어 보려 했지만, 남자아이들은 버티질 못했다. 배구는 축구처럼 공만 주면 경기를 바로 시작할 수 없으니까. 리시브와 서브가 돼야 하는데 리시브만 ‘주구장창’ 연습하다가 그만둬버린다. 여자애들은 리시브 자체도 재밌어한다. 평상시에 남자애들이 공을 다 뺏어가서 그런지, 여자애들은 공을 만지는 걸 재밌어했다”고 했다. 배구부에서 기술만 갈고닦은 것은 아니다. 학부모들도 아이들의 변화를 체감했다. 6학년 구가현양의 어머니 김희정씨는 “가현이 4학년 때 첫 경기를 보고 감동했다. 가현이는 자기가 잘해야 한다는 욕심이 있는 아이인데, 그때 가현이는 잠깐 코트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교체선수였다. 그런데 교체되고 나서 응원을 너무 열심히 하더라.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는데 벤치에서 견디며 열심히 참여하는 게 정말 좋았다”고 했다. 엘리트 선수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와수초의 배구는 중학교, 고등학교, 그 너머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와수초 학생들이 주로 진학하는 김화여중과 김화고에는 배구 스포츠클럽이 있다. 와수초의 선배들이 고스란히 진학해 활약 중이다. 애초 이학영 교사가 2015년에 와수초 배구부를 창단할 때 중·고등학교와의 연계도 염두에 뒀다. 와수초 6학년생들도 김화여중에 진학해 배구를 계속할 생각이다. 와수초 배구부 창단선수인 유아연씨는 대학생이 된 지금도 배구동호회 활동을 하고 있다. 자신이 이학영 교사에게 배웠듯 유소년들에게 배구를 가르치고 싶어 배구 심판 자격증을 땄고, 생활체육지도자 자격증도 준비 중이다. 유아연씨는 “고3 때 보니 배구를 같이하는 선수 9명 중 초등학교 때부터 같이 뛴 친구들이 6~7명이더라. 배구를 하면서 친구도 얻었고 꿈도 얻었다”고 했다. 와수초의 배구가 멈춘다면 그건 아마도 지역소멸 때문일 것이다. 한국배구연맹(KOVO)은 유소년 스포츠클럽에 지도자를 파견해 훈련을 돕는데, 와수초는 현재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KOVO가 보낸 지도자 1명이 통상 2개 학교를 가르치는데 철원군에는 와수초 외에는 배구를 가르치는 학교가 없다. 와수초 상황도 그리 좋지 않다. 작년에 비해 학생 수가 20명 이상 줄었고, 학급 수는 3학급이나 감소해 8학급이 됐다. 임금록 와수초 교감은 “매년 학생 수가 줄어드는 상황이라 이학영 선생님이 더 어려워지실 것 같다. 그래도 우리는 아이들이 행복해하는 한 배구를 계속할 생각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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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프리뷰] 아메바 소녀들과 학교괴담: 개교기념일-호러 코미디로 비튼 K공포물의 유산(2024. 11. 13 06:00)
2024. 11. 13 06:00 연예
애니메이션에서 볼 법한 코믹 설정을 실사로 옮겨놓았다. 분명 대놓고 웃으라고 만든 장면인데 배급사와 평론가, 기자 등 영화관계자들이 참석한 시사회장의 반응은 고만고만했다. 개봉 후 극장에서 이 영화를 마주하게 될 관객들의 반응은 어떨까. /㈜스튜디오 산타클로스엔터테인먼트 제목: 아메바 소녀들과 학교괴담: 개교기념일(Idiot Girls and School Ghost: School Anniversary) 제작연도: 2024 제작국: 한국 상영시간: 90분 장르: 공포, 코미디 감독: 김민하 출연: 김도연, 손주연, 정하담, 강신희 개봉: 2024년 11월 6일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공동제공/배급: ㈜스튜디오 산타클로스엔터테인먼트 제공/제작: ㈜26컴퍼니 “영화제 화제작이란 거, 특수한 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시사회가 있던 날, 상영을 기다리며 극장 로비에서 대기하던 중 한 영화평론가의 말이다. 영화제에서 화제를 모았다고 무조건 믿고 볼 건 못된다는 설명이다. 동의한다. <아메바 소녀들과 학교괴담: 개교기념일>은 ‘제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왓챠가 주목한 장편과 감독상’을 받았다는 점을 내세웠다. 못 가 본지 한 10년 됐나, 부천국제영화제엔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일단 영화를 대하는 관객들의 태도. 너그럽다. 웃어야 할 대목에서는 박장대소하고 무서운 대목에서는 ‘아낌없이’ 비명을 지른다. 지금은 국제적 거장이 된 봉준호 감독을 인터뷰하다 참관기를 들은 적 있는데, 미국의 대표적인 독립영화제인 선댄스 분위기도 그렇다고 한다. 다시 말해, 한없이 관대하고 적극적으로 응원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영화제 관객과 편당 1만4000원~1만5000원의 자기 돈을 내고 입장한 영화 저관여층 ‘일반 극장 관객’들의 반응은 사뭇 다르다. 실제 여러차례 경험했다. 영화제에서 볼 때는 분명 박장대소했는데, 한 몇 달 후 쯤 일반극장에서 다시 볼 때 관객반응은 ‘팔짱끼고 그래서 어쩌라고?’ 분위기인 경우도 꽤 있었다. 귀신 숨바꼭질 학교 괴담 세강여고에는 학교 전설이 있다. 수능 한 달 전쯤이 개교기념일인데, 이 개교기념일에 출몰하는 귀신과 숨바꼭질에서 이기면 수능 만점을 받는다는 전설이다. 영화는 1998년 조악한 가정용 비디오(VHS) 화질로 찍힌 ‘귀신 숨바꼭질’ 영상으로 시작한다. 숨바꼭질은 이런 의례로 이뤄진다. 개교기념일, 학교의 문이 닫히면 참가자들은 저주 인형의 배를 갈라 자신의 머리카락과 손톱을 잘라 넣는다. 화장실 개수대에 인형을 집어넣은 뒤 참가자들의 이름을 두 번씩 말하고, 이 저주 인형에 이름을 부여한다. 그 뒤 소금물을 입에 머금고 동틀 때까지 귀신을 피해 숨어 있으면 이긴다. 단 한 사람이라도 귀신에게 붙들리지 않으면 참가자 전체가 이긴 거로 된다. 1998년 비디오 속 숨바꼭질은 성공했을까. 시간은 흘러 2024년. 수능은 포기한 방송반 고3 3인방이 있다. 감독이었던 지연(김도연 분)은 밤늦게 남아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편집하다 캐비닛 속의 <1998년 귀신 숨바꼭질> 비디오를 발견한다. 호기심에 그걸 재생한 뒤로 비디오 속 귀신이 불만 끄면 출몰한다. 악몽에 시달리던 지연은 1998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기 위해 학교 앨범을 뒤지고 비디오 속 세 소녀 모두 그해 수능 만점을 받았다는 걸 알게 된다. 귀신 숨바꼭질에 이긴 것이다. 그렇다면 방송반 3인방 ‘아메바 소녀’들도 수능 만점을 받을 수 있을까. 아메바 소녀는 이 학교 교사가 수능을 포기한 낙제점 소녀들에게 붙인 별명이다. 세 소녀는 확실하게 이기고자 ‘용병’을 영입한다. 학교 지하실, 홀로 종교 반 동아리 방에 머무는 후배 민주(정하담 분)다. 일본문화 마니아라는 설정인데, 딱히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들도 숨바꼭질에서 이길 수 있을까. 관객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부천영화제에서 이 영화가 상영됐을 때 관객의 반응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너그러운 영화제 관객들은 ‘오버액션’을 하며 열광했을 것이다.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의도된 작위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귓속말하는 대목에서 이들은 관객들에게 들리게 문자 그대로 ‘속닥속닥’이라고 말한다. 귀신을 피해 이들이 각각 숨는 장면에선 만화 캐릭터처럼 두 손을 모아들고 사뿐사뿐 걷는다. 강신희가 맡은 방송반 촬영감독 현정 역은 이 코너에서 리뷰한 적이 있는 일본영화 <대결! 애니메이션>(2024)의 주인공 여성감독인 사이토 히토미 캐릭터를 참조한 듯한다. 애니메이션에서 볼 법한 코믹 설정을 실사로 옮겨놓았다. 분명 대놓고 웃으라고 만든 장면인데 배급사와 평론가, 기자 등 영화관계자들이 참석한 시사회장의 반응은 고만고만했다. 사실 이런 시사회 자리에서 코미디 영화 뿐 아니라 다른 장르영화에 대한 반응도 미지근하기는 마찬가지다. 산전수전 다 겪고 무뎌진 감성이라고나 할까. 개봉 후 극장에서 이 영화를 마주하게 될 관객들의 반응은 어떨까. 영화가 패러디로 비튼 K호러와 J호러의 유산 /씨네2000 <아메바 소녀들과 학교괴담: 개교기념일>에서 귀신 숨바꼭질 ‘비디오’가 찍힌 해는 1998년, 박기형 감독의 <여고괴담>이 나온 해다. 그해 <여고괴담>의 등장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했다. ‘한국 공포 영화사’를 보면 1980년대 중반까지 꾸준히 제작돼 오던 공포 영화들의 명맥이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중반까지 끊긴다. 왜였을까. 1980년대 중반 무렵부터 폭발적으로 늘어난 가정용 비디오 플레이어 보급도 그 원인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비디오 플레이어 보급에 비디오용 영화 수입도 대폭 늘어났다. B급 공포물뿐 아니라 오늘날 공포영화 장르 쪽 거장으로 불리는 감독들의 영화도 듣도 보도 못한 해괴한 제목을 달고 대거 출시됐다. 인터넷 포르노 동영상이 한국의 성인 에로영화 시장을 붕괴시켰듯, 외국 공포영화의 수입 증가가 1980년대까지 외국 히트작 번안 수준에 머무르던 한국공포 영화의 극장 수요도 무너뜨린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괴력난신(怪力亂神)을 혐오하던 유교적 심성이 밑바탕에는 깔려있었겠지만. 그리고 그 ‘가정용 비디오로 재생된 공포물’로 영화를 공부한 새 세대들이 충무로에 진출해 메가폰을 잡은 첫 영화가 <여고괴담>이다. 그러니까 한국 공포 영화사의 시기 구분은 <여고괴담> 전과 후로 나뉜다. <아메바 소녀들과 학교괴담: 개교기념일>은 여러 대목에서 이 ‘K호러 영화‘의 유산을 인용한다. <여고괴담>이 개봉됐을 당시 가장 많은 화제를 모았던 것이 점프 컷 장면(사진)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점프 컷 장면이 그대로 인용된다. 귀신과 숨바꼭질하던 지연은 귀신이 ‘점프 컷’으로 쫓아올 것을 예상, 선제 대응(!)한다. 괴물이 ‘영상을 매개로 자기 복제’를 한다는 아이디어는 아무래도 일본 J호러 붐의 시작인 <링>(나카타 히데오 감독)에서 가져오지 않았나 싶은데, 이 역시 일본에서 처음 공개된 시점이 1998년이다.
시네프리뷰
[꼬다리] ‘딥페이크 피해 학교 지도’가 보여주는 것
[꼬다리] ‘딥페이크 피해 학교 지도’가 보여주는 것(2024. 08. 30 16:00)
2024. 08. 30 16:00 사회
‘딥페이크 피해 학교 지도’에 딥페이크 피해를 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학교들이 표시돼 있다. 온라인 화면 캡처 ‘내 주변에서도 범죄가 발생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처음 든 것은 스무 살 때였다. 재수 학원에 다닐 때였는데, 옆 반 담임 강사가 학생들을 불법 촬영한 혐의로 경찰에 잡혀갔다. 사건은 ‘강남 유명 학원 강사 여학생 몰카’라는 기사로 짧게 보도됐다. 그전까지 나에게 범죄는 <그것이 알고 싶다> 같은 심각한 방송 프로그램에서나 보던 예외적이고 흉악하고 비일상적인 무언가였는데, 기사에서 다뤄지는 디지털 성범죄 사건이 매일매일 가는 학원에서 벌어진 것은 충격이었다. 사건은 또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몇 년 지난 때였다. 갑자기 만들어진 고등학교 여자 동창 단톡방에서 나쁜 소식이 전해졌다. 우리가 학교에 다녔던 그 기간에 학교 기숙사를 불법 촬영한 사람이 있었고, 그 영상이 지금 온라인에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화가 났고 무서웠다. 무엇보다 3년 동안 먹고 자며 집처럼 지낸 기숙사에서 불법 촬영 사건이 벌어졌다는 사실에 기함했다. 내가 10대와 20대를 특별히 범죄에 취약한 환경에서 보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일상 속에서도 범죄는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불쑥불쑥 나타났다. 성인이 돼서 주변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기자로서 여러 사건을 목격하면서 디지털 성범죄가 평범한 사람의 일대기에 무작위로 불쑥 끼어드는 경험이 꽤 흔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최근 딥페이크 성착취물 사건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굳히게 된다. 몇몇 대학교에서 먼저 드러난 딥페이크 성착취물 피해가 초·중·고등학교, 군대, 가정에서도 발생했다는 폭로가 나오고 있다. 10년도 넘게 지났는데 여성들의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에서 디지털 성범죄가 발생하는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카메라에서 인공지능(AI)으로 도구와 방법만 바뀌었을 뿐이다. 소셜미디어 엑스(X·구 트위터)에서 딥페이크 피해가 발생한 학교 리스트가 공유되고, ‘딥페이크 피해 학교 지도’까지 만들어진 것도 봤다. 지도에 표시된 피해 학교는 제보를 통해 수집된 거라 정확하지 않다고 하지만 500개가 넘는다. 조그만 땅덩어리를 그린 지도에 빽빽하게 피해 학교가 표시된 것을 보고 암담해졌다. 피해 학교 지도를 만드는 것이 바람직한지 아닌지를 떠나서, 그 지도야말로 “언제 어디서든 디지털 성범죄가 발생할 수 있다”는 말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언제 어디서든 디지털 성범죄가 발생할 수 있다”는 말이 “피해자가 평소에 더 조심했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거나 여성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말로 쓰이지는 않았으면 한다. 마음 놓고 쉬어야 하는 집이나 길게는 하루의 절반 가까운 시간을 보내는 직장이나 학교에서 뭘 어떻게 어디까지 조심할 수 있는지 감도 안 잡히기 때문이다. 이 말이 부디 모두의 일상을 위협하는 디지털 성범죄를 경각심을 가지고 몰아내는 데 쓰였으면 좋겠다. N번방 사건 때도, 그리고 이제는 잊힌 수많은 디지털 성범죄 사건이 드러날 때마다 매번 지겹게 하는 이야기이지만 말이다.
꼬다리
[편집실에서] 공허한 학교 성교육
[편집실에서] 공허한 학교 성교육(2024. 08. 21 06:00)
2024. 08. 21 06:00 오피니언
홍진수 편집장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넷플릭스 드라마 중 재밌게 본 작품으로 저는 항상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를 첫손에 꼽습니다. 2019년 시즌 1이 나왔고, 저 말고도 재밌게 본 시청자가 많은지라 시리즈가 이어져 지난해 시즌 4로 막을 내렸습니다. 한국에서는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라는 제목이 붙었는데, 이 드라마의 영어 제목은 ‘Sex Education’, 직역하면 ‘성교육’입니다. ‘비밀 상담소’보다는 훨씬 재미없는 제목이죠. 이 드라마의 배경은 영국의 한 고등학교입니다. 주요 등장인물은 이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과 그들의 부모, 교사입니다. 이것만 보면 청소년들이 봐야 할 것 같은데 한국에서 시청등급은 ‘청소년 관람 불가’, 이른바 ‘19금’입니다. 학생들의 ‘성생활’과 ‘성정체성’, 이를 둘러싼 고민이 시리즈의 주요 주제이고, 여기에서 많은 이야기가 빚어집니다. 이를 묘사하는 장면의 수위가 상당히 높아서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이 붙었습니다. 유럽이라면 개방적으로, 거침없이 성교육을 할 것으로 여겼는데 드라마를 보면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입니다. 한국어 제목으로 유추할 수 있듯이 주인공 오티스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비밀리에 유료 성 상담을 해줍니다. 오티스는 같이 사는 어머니가 전문 성 상담가이기에 누구보다 이론에는 밝습니다. 오티스는 어른들이, 또는 공교육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틈새를 파고들어 ‘사교육 시장’을 개척합니다. ‘진짜’ 성 전문가인 오티스의 어머니가 아들이 다니는 학교의 현실과 동떨어진 성교육 내용에 충격을 받고 직접 학교로 들어가 성교육을 하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유럽에서도 성교육은 가벼운 주제가 아닙니다. 한국은 어떨까요. 주간경향 이번 호는 표지 이야기로 한국의 성교육 문제를 전해드립니다. 한국에서 ‘과외 성교육 시장’은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학교 성교육이 아이들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부모가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학교 성교육은 ‘공허하다’는 평을 많이 듣습니다. 법에 따라 성교육을 하도록 규정돼 있지만 정작 성교육 가이드라인은 없습니다. 2015년 나온 성교육 표준안과 지도자료는 많은 문제점이 발견돼 사실상 폐기됐습니다. 그렇다고 성교육을 사교육 시장에 맡겨둘 수는 없습니다. 성교육은 누구나 받아야 하는데 모두가 사교육 시장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또 사교육 시장에서는 부적합한 내용을 걸러내기도 쉽지 않습니다. 학교 성교육을 바로 세우려는 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이들이 지향하는 성평등 관점의 성교육, 학생을 성적 욕망의 주체로 인정하는 성교육이 무엇인지도 살펴봤습니다. 가정에서 성교육을 고민하는 양육자를 위한 Q&A도 준비했습니다. 포괄적 성교육 철학을 갖고 학교, 공공기관 등에 다양한 성교육을 제공하고 있는 ‘성교육연구소 라라’의 노하연 대표가 다양한 질문에 다정하게 대답해 드립니다. 독자님들이 이미 집에서 아이들에게 받아본 질문도 있을 겁니다. 저도 정독하겠습니다.
편집실에서편집실에서
사교육에 기댄 성교육, 학교서 제대로 세워야
사교육에 기댄 성교육, 학교서 제대로 세워야(2024. 08. 19 06:00)
2024. 08. 19 06:00 사회
경향신문 자료사진 대구에 사는 박모씨(42)는 올해 1월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에게 ‘성교육 과외’를 받게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성에 대한 아이의 궁금증은 커지는데 학교에선 제대로 해소되지 못하고, 그렇다고 직접 성교육을 해주기에는 막막했다. “아이가 작년부터 ‘아기는 어떻게 생기냐?’고 계속 물어봤어요. 그동안엔 결혼하면 생긴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모가 결혼하고 나니 이젠 ‘이모는 결혼했는데 왜 아이가 왜 안 생겨?’라고 묻더군요. 그 무렵, 여성 성기를 비하하는 욕설을 배워와 종종 내뱉기도 했고요. 더는 미룰 수 없다고 생각했죠.” 주로 ‘소그룹 성교육’으로 불리는 성교육 과외는 2~6명의 아이를 모아 성교육 업체 강사를 초청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박씨도 아들 친구들의 부모들에게 제안해 ‘그룹’을 만들어 수업을 듣게 했다. 이후엔 “성에 관한 호기심이 더 많은 편이라서” 그룹 대신 ‘일 대 일’ 과외를 세 번 더 받았다. 네 차례에 걸친 성교육 과외에 든 비용은 총 115만원. 박씨는 “돈이 아깝지 않았다”고 했다. “아이가 (과외를 통해) 성기 비하 욕설의 뜻을 알고 놀란 것 같더라고요. 이제는 그 욕설을 하지 않아요. 몸의 소중함과 상대 존중에 대해 배운 다음 성관계가 뭔지도 알려주셨어요. 남자, 여자가 성관계하는 그림을 보여주셨다고 하는데, 저도 투명하게 알려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으면 아이는 다른 경로로 찾아보려 할 테니까요. 사실 제가 가장 원한 건 ‘절대로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가 돼서는 안 된다’는 걸 인식시키는 것이었어요. 욕설을 자제하는 걸 보니 그런 측면의 인성교육도 잘 진행이 된 것 같아요.” 1990년대 ‘아름다운 우리 아이들의 성을 위하여’(아우성)란 구호를 내걸고 텔레비전에 자주 나왔던 스타 성교육 강사 구성애씨를 기억하는가. 그룹 과외 성교육은 구씨가 세운 ‘푸른 아우성’이란 기업이 2010년대 초반 고안했다. 이후 다른 기관과 강사들이 잇따라 ‘과외 성교육’에 뛰어들면서 시장이 형성됐다. 시장 규모는 나날이 커지고 있다. ‘여성주의 관점으로 본 청소년 성교육의 시장화’(김선아·이화여대 석사학위논문·2023)에 따르면 한 성교육 기업의 경우 2022년 전체 유료강의(3463회)의 75%(2662회)가 과외 성교육이었다. 또 다른 성교육 기업 역시 2022년 과외 성교육 횟수가 4년 전보다 세 배 이상으로 늘었다. 10대 가해자가 다수 포함된 N번방 사건 등이 공론화되면서 자녀의 성교육을 고민하는 부모가 늘었지만, 학교는 성을 적극적으로 다루지 않아 사교육 시장이 이 틈을 파고든 것으로 보인다. 초등학생 아들에게 과외 성교육을 받게 한 박씨는 이렇게 말했다. “학교에서 임신을 어떻게 배웠는지 아이에게 물어봤어요. ‘정자와 난자가 만난다’ 이상은 못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학교에서 성교육을 적극적으로 해주는 게 먼저라고 생각해요.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가지고 집에서 대화도 하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학교에선 여전히 성에 대해 쉬쉬하고 있으니까 답답한 거죠.” 교육부는 2015년 <학교 성교육 표준안>과 교사용 지도서 등 교육자료를 만들어 배포했으나 잘못된 성폭력 통념과 성별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내용으로 인해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교육부 성폭력 표준안 교육자료 캡처 ■학교 성교육, 매년 15시간씩 하고 있다? 올해는 학교 성교육이 의무화된 지 24년째 되는 해다. 초·중·고교의 성교육은 2001년부터 연간 10시간씩(성폭력예방교육 2시간 포함) 진행돼 오다가 2013년부터는 15시간(성폭력예방교육 3시간 포함)으로 늘었다. 매해 10~15시간은 적지 않은 시간이지만 많은 이들이 ‘성교육을 별로 받아보지 못했다’라고 기억한다. 왜 그럴까. 성교육은 독립된 교육시간이 배정돼 있지 않은 ‘범교과 영역’이기 때문이다. ‘성’은 보건, 체육, 생물, 가정 등의 교과 수업 때 가르치거나 창의적 체험활동(특별활동)을 통해 가르치게 돼 있다. 통상 별도로 이뤄지는 성폭력예방교육을 제외하면 유명무실하게 흘러가기 쉬운 구조다. 제대로 된 교육과정이 없는 것도 문제다. 교육부는 연간 15시간에 이르는 성교육에 대해 국가 차원의 체계적 성취기준이 없다는 비판이 계속되자 2015년 <학교 성교육 표준안>과 교사용 지도서 등 교육자료를 만들어 배포했다. 그러나 잘못된 성폭력 통념과 성별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내용으로 여성단체와 교육단체로부터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여성은 한 특정 남성에게만 성적으로 반응하는 데 비해 남성은 성적으로 매력적인 여성들과 널리 성교할 수 있다” “여자는 무드에 약하고 남자는 누드에 약하다” 등 남성 성욕은 본래 여성보다 왕성하며 제어하기 힘든 것이라는 암시가 담긴 내용이 대표적이다. 발표 후 몇 차례 수정을 거쳤음에도 “여성들은 외모를 가꾸는 데 공을 들여야 하고, 남성들은 경제적인 능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등의 성차별적 예시 내용은 그대로였다. 결국 교육부는 2018년 성교육 표준안 개편을 약속했지만, 아직 구체적인 계획을 발표하지 못하고 있다. 교육부 관계자는 “교육과정 편성에 대한 업무는 국가교육위원회로 이관됐기 때문에 성교육 표준안 같은 것을 교육부 차원에서 다시 만들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면서 “대신 성교육 수업에 도움을 주는 학습자료를 만드는 것은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현재 학교 성교육 수업에 성교육 표준안을 적용해야 하는지 묻자 “성교육 표준안은 2015년 개정 교육과정이었고, 지금은 2022 개정 교육과정이 적용되고 있다”고 답했다. 사실상 폐기 상태란 의미다. ■금욕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학교 성교육이 ‘정자와 난자가 만난다’는 피상적 성 지식 전달이나 ‘안 돼요, 싫어요, 하지 마세요’로 상징되는 성폭력 예방교육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2010년대 말부터 본격화된 백래시, 혐오 현상과도 연관이 있다. 학교와 공공기관 등에서 아동·청소년 대상 성교육을 해온 이유정 한국청소년성문화센터협의회 사무국장은 이렇게 말한다. “페미니즘에 대한 공격 ‘백래시’가 여러 영역에서 있었는데 교육계에선 성교육과 성평등 교육을 향해서 쏟아졌다고 생각해요. 사실 많은 학교 선생님들이 적극적으로 성교육을 하고 싶어하세요. 하지만 경기도 도서관에서 성교육·성평등 도서 2500권이 보수단체의 민원 때문에 사라진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생각지 못한 민원이 들어올 때가 많습니다. 학교와 교육청 입장에선 신중해지는 거죠.” 일부 보수단체의 ‘민원 공격’은 결국 ‘아무 얘기도 하지 않는’ 기존의 금욕주의 성교육을 강화시켰다. 성교육 연구자들은 말한다. “(성과 관련해) 대립하는 양쪽 주장 중 아무 주장에도 치중하지 않기 위한 노력, 더불어 주목을 끌 만한 지점을 담지 않으려는 노력이 강화됐다. 기존에 강조되던 ‘교육의 정치적 중립’만큼이나 성과 관련된 쟁점을 다루는 것이 금기시되며 교육부 및 시도교육청, 단위학교까지 성교육으로 인한 민원이 발생하지 않도록 많은 노력을 집중하는 경향이 나타났다.”(학교에서 섹슈얼리티를 말하라, 남미자·심에스더·이희진 지음, 학이시습) 문제는 지금 이대로의 금욕주의 성교육이 낳는 폐해다. 유엔의 교육문화과학기구인 유네스코는 다양한 연구 결과에 근거해 금욕적 성교육에 대해 이렇게 판단을 내린 바 있다. “금욕 프로그램은 성행위 시작 시기를 늦추거나 섹스 횟수 및 섹스 파트너 수를 줄이는 데 효과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금욕 프로그램은 청소년의 성 및 재생산 건강과 권리에 효과적이지 않으며 잠재적으로 해로운 것으로 판명됐다.”(<국제 성교육 가이드>·유네스코·2018, 이하 서울시립청소년성문화센터 번역판) 유네스코가 2018년 발표한 <국제 성교육 가이드> 표지. 유네스코는 이 가이드에서 ‘포괄적 성교육’을 권하고 있다. / 유네스코 ■포괄적 성교육은 재밌고 효과적이다 그렇다고 한국의 성교육 미래가 꼭 어두운 것만은 아니다. 성행위 시작 시기를 지연시키고, 성행위 빈도와 파트너 수, 위험한 행동 등을 감소시키는 것으로 확인돼 유네스코가 권고하는 ‘포괄적 성교육(CES·Comprehensive Sexuality Education)’을 공부하고 교실에서 실천하는 교사들이 있기 때문이다. 포괄적 성교육은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성의 모든 문제를 포괄하는 교육으로 성에 관한 전인교육이자 시민교육, 인권교육, 관계맺기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포괄적 성교육을 교실에서 실천해본 교사들은 “학생들의 반응부터 달랐다. 교육효과를 확실히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생리, 질, 음경, 사정, 동의, 발기, 대안생리대…. 22년차 초등학교 교사 A씨는 수년 전부터 초등학교 5~6학년을 대상으로 ‘낱말게임 성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낱말카드에 쓰인 성적 개념에 대해 자신이 아는 것을 설명하면 점수를 얻는 방식이다. 모둠별로 모인 아이들은 서로서로 거들며 설명을 만들어나가고, 선생님에게 달려와 쉴 새 없이 질문을 던진다고 한다. 초등학교 5학년이 이런 단어를 알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묻자 A씨는 “성교육은 몸과 마음이 건강한 시민을 길러내는 교육이고, 아이들은 자신의 성 건강을 위해 성 지식을 정확히 알 권리가 있다”면서 “윗몸 일으키기를 배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초등학생이 알기엔 너무 노골적인 단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수업은 유네스코 권고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유네스코가 제시하는 9~12세 청소년의 성교육 학습 목표엔 이런 내용이 있다. “임신을 위한 신체의 주요 기능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 (예: 월경주기, 정액 생산 및 정액 사정)”, “월경주기와 정자의 사정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이해한 것을 자신 있게 표현할 수 있다.”(<국제 성교육 가이드>·유네스코·2018) ‘포괄적 성교육’을 실천하고 있는 한 초등학교 교사는 금욕주의적 성교육을 깨고 성 지식을 올바르게 전달하기 위해 낱말게임 성교육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이 교사가 실제 수업에서 활용하고 있는 낱말로 카드를 만들어 찍은 사진이다. 권도현 기자 청소년들에게 ‘성적 동의’를 제대로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례도 있다. 이유정 한국청소년성문화센터협의회 사무국장은 “청소년들에게 성폭력의 개념을 물으면 ‘동의 없는 성관계’라는 답변은 빠지지 않지만 ‘강요에 의한 동의’도 동의로 받아들이는 아이들이 많았다. 권력에 대한 이해가 없었기 때문”이라면서 일상 속 권력 관계에 대해 토론한 사례를 소개했다. 친구나 애인에게 일방적으로 내가 맞춰주고 있단 느낌 때문에 우울한 적은 없는지 등을 묻자, “나도 다른 친구 눈치를 보면서 싫다고 말 못 한 적이 있다. 그때 기분이 정말 좋지 않았다” 등의 자연스러운 답변이 이어졌다고 한다. ‘권력 관계 인식’ 역시 포괄적 성교육에서 권고하는 교육 내용이다. 유네스코는 12~15세 성교육 학습 목표 중 하나로 이런 내용을 제시한다. “불평등한 권력 관계가 어떻게 연인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분석할 수 있다.”, “젠더 규범과 젠더 고정관념이 어떻게 연인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지 떠올려 볼 수 있다.”(<국제 성교육 가이드>·유네스코·2018) 소설 수업을 통해 포괄적 성교육을 실천하는 국어 교사들도 있다. 고등학교 국어 교사이자 성평등국어교사 모임에서 활동하는 B씨는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을 입체적으로 읽어보며 성교육을 한다고 했다. 현대문학의 정수로 꼽히는 이 작품은 흐드러지게 메밀꽃이 핀 날 밤에 성 서방네 처녀와 관계를 맺은 추억을 평생 아름답게 간직하는 허 생원 이야기다. “이 작품의 주요 인물이 누구인지를 물어보면 ‘성 서방네 처녀’는 무조건 나와요. 그러면 성 서방네 처녀 입장에서 소설을 다시 읽어보게 하죠. 놀랍게도 성 서방네 처녀 시점은 작품에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아요. 성 서방네 처녀는 원치 않는 임신으로 집에서 쫓겨나 고생하며 살았는데, 허 생원과 성관계를 맺은 그 밤이 과연 아름다운 기억일까? 의문스럽지만 확인할 수 없는 거죠.” 성평등국어교사모임의 또 다른 교사는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을 김 첨지의 아내 시점에서 다시 쓴 <운발 없는 생>이란 작품을 읽히는 수업도 한다. 김 첨지가 사온 설렁탕에는 아픈 아내를 걱정하는 마음이 담겨 있지만, 김 첨지는 아픈 아내를 발로 차며 소리를 지르고 설렁탕을 내던지는 인물이기도 하다. B씨는 “100년 전의 문학작품 속에서 폭력이 사랑이란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에 대해 얘기하다 보면 오늘날의 가정폭력, 데이트폭력을 연결해 토론을 할 수 있다”고 했다. 포괄적 성교육을 한국의 교실에서 적용해볼 수 있도록 수업자료를 만들어 배포한 초등학교 교사들도 있다. 초등젠더교육연구회 ‘아웃박스’는 2021년 <학교 성교육 다시, 쓰기>라는 이름의 성교육 수업안을 만들어 누구나 무료로 내려받을 수 있게 했다. 이들은 성교육을 ‘다시 써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N번방 사건은 디지털 성폭력과 결합 된 뿌리 깊은 성착취 문화를 수면 위로 드러냈고, 그 중심에는 청소년들이 있었기에 더욱 충격적이었다. (중략) 실질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아이들을 비롯한 모두가 평등하고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로 바꿈 해야 한다. 그리고 공동체를 변화시키기 위한 그 힘은 교육에서 찾아야 한다.”(‘학교 성교육 다시 쓰기학교 성교육 실태 및 인식조사 분석을 통한 성교육 제언’·교육비평·2021) 유네스코가 권하는 포괄적 성교육은 8가지 핵심개념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핵심개념엔 여러 주제가 포함돼 있다. 포괄적 성교육은 이 핵심개념을 가지고 5~8세, 9~12세, 12~15세, 15~18세 등 연령대별로 성취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유네스코 <국제 성교육 가이드> 캡처 유네스코가 권하는 포괄적 성교육은 8가지 핵심개념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핵심개념엔 여러 주제가 포함돼 있다. 포괄적 성교육은 이 핵심개념을 가지고 5~8세, 9~12세, 12~15세, 15~18세 등 연령대별로 학습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위 내용은 ‘폭력과 안전’이라는 핵심개념 중 ‘동의, 온전한 사생활과 신체’ 분야의 학습 목표다. /유네스코 <국제 성교육 가이드> 캡처 유네스코가 권하는 포괄적 성교육은 8가지 핵심개념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핵심개념엔 여러 주제가 포함돼 있다. 포괄적 성교육은 이 핵심개념을 가지고 5~8세, 9~12세, 12~15세, 15~18세 등 연령대별로 학습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위 내용은 ‘젠더이해’이라는 핵심개념 중 ‘사회적으로 구성된 젠더와 젠더규범’ 분야의 연령대별 학습 목표다. / 유네스코 <국제 성교육 가이드> 캡처 ■정책의 울타리가 없다 다수의 교사가 이처럼 성에 관한 시민교육, 인권교육, 전인교육으로서의 포괄적 성교육을 시도해 보려고 애쓰고 있지만, 이들을 보호할 정책의 울타리는 없다. 좋은 성교육을 고민하는 많은 교사가 “악성 극우단체의 표적이 되어 홀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겪거나”(서울의 한 초등학교 교사 C씨), “선생님을 ‘꼴페미’라고 부르며 적대감을 드러내는 학생들 앞에서 아무도 나를 보호해주지 않는 현실”(고등학교 국어 교사 B씨)에 무력감을 느낀다. 교육청 차원에서 국제표준인 포괄적 성교육을 시도하며 ‘울타리’가 돼준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울산시교육청은 고 노옥희 교육감이 이끌던 2020년 포괄적 성교육 도입을 선언하고 관련 수업안을 교육청 차원에서 만들어 배포했으며, 초등학교 5학년·중학교 1학년을 대상으로 한 성교육 집중학년제 등을 운영했다. 울산시교육청 관계자는 당시 사업에 대해 “포괄적 성교육은 학교나 교사 차원에서 개별 추진한 것이 아니므로 학교에 항의 전화가 오더라도 교육청으로 돌려 교육청 담당자가 응대하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현재는 관련 예산이 대폭 삭감돼 대부분의 포괄적 성교육 프로그램이 의무가 아닌 권고로 운영되고 있다. 이 관계자는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 교육청의 가장 빛나는 사업 중 하나였는데 자랑스럽게 내세우면 공격이 들어오더라고요. 성교육이 예민한 문제가 돼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울산시교육청이 고 노옥희 교육감 시절인 2020년 포괄적 성교육 도입을 선언하고 학교와 교사들에게 배포한 수업안(공동강의안) 일부. 지금은 관련 예산이 삭감돼 포괄적 성교육 프로그램 다수가 의무가 아닌 권고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울산광역시교육청 성인지교육집중학년 공동강의안 지도서’ 일부 / 울산시교육청 수업안 캡처 초등학교 5학년 자녀의 성교육을 고민하다 사교육 업체의 문을 두드렸던 한 양육자의 고민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학교의 ‘쉬쉬하는’ 성교육이 바뀔 기미는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사교육 시장에서라도 좋은 성교육을 찾는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다. 다만 성교육이 시장화되는 현상 앞에서 우리는 성교육의 본질에 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정체성 확립, 타인과의 관계맺기, 사회문화 등 인간의 삶 구석구석에 성의 문제가 자리하고 있는데, 양육자의 여건에 따라 아동 청소년들이 차별적으로 ‘좋은 성교육’ 기회를 받는 것은 온당할까. 나아가 올바른 성 가치관 확립이라는 성교육의 본령을 벗어난 ‘교육 상품’이 거래되는 현실도 외면할 수 없다. 주로 학교와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한 성교육 활동가는 ‘가해자 안 되는 교육’으로 흐르는 일부 과외 성교육 사례를 간접적으로 확인한 경험을 들려줬다. “학교 성교육 시간에 ‘누군가가 나의 동의를 받지 않고 사진 찍었을 때 어떻게 느끼는가’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을 때였어요. 한 남학생이 끼어들어서 소리치더라고요. ‘불법 촬영은 2000만원.’ 무슨 얘기냐 물었더니 과외 성교육에서 벌금 액수를 배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뭘 느꼈냐고 물었더니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해요. 돈 있고 없고, 처벌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자세를 갖춰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 성교육인데 뭔가 잘못된 흐름이 있다고 느꼈어요.” ■어떻게 바꿀까 지금의 금욕주의적 학교 성교육이 계속된다면 아동·청소년들은 성착취물 등을 통해 성을 접하고 왜곡된 성인식을 갖게 될 가능성이 크다. ‘성교육 사교육’으로 건강한 성 가치관을 확립시켜줄 수도 있겠지만 모든 아동·청소년에겐 좋은 성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점, “공동체를 변화시킬 힘은 공교육에 있다”(초등젠더교육연구회 ‘아웃박스’)는 사실, 성교육의 본령을 벗어난 상품도 거래되는 현실도 생각해야 한다. 학교 성교육부터 바로 세워야 하는 이유다. 성교육 도입 이래 순결주의, 금욕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수십 년째 그대로인데 변화는 어떻게 가능할까. 성평등에 기반한 성교육 등을 시도했다가 극우단체로부터 극심한 공격을 받았던 한 초등학교 교사는 성교육 정책 변화의 가능성을 묻자 이렇게 말했다. “사실 보호자들께 말씀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어요. 제대로 된 성교육, 적극적인 성교육을 해달라고 학교와 교육청에 민원을 해주시면 어떨까요. 좋은 사교육 강사를 고르는 것보다 더 중요해요. 좋은 민원으로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의 건강하고 안전한 삶이라는 공통의 목표 앞에서 양육자와 교육자가 손잡지 못할 이유는 없다. 오늘의 좋은 성교육은 내일의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학교 성교육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가정 내 성교육, 이렇게 해보세요성은 인간의 생애를 가로지르는 문제다. 몇 차례의 강의가 아니라 학교와 가정 내 일상에서 성교육이 지속해서 이뤄져야 하는 이유다. 주간경향은 ‘가정에서의 성교육을 고민하는 양...https://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dept=115&art_id=20240819060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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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봄학교·학폭조사관…학교는 지금 ‘시험’ 중(2024. 03. 14 06:00)
2024. 03. 14 06:00 사회
윤석열 정부식 ‘속전속결’ 시행…준비 부족 탓 졸속 운영·실효성 의문 등 우려 2024년 새 학기를 맞은 학교에는 큰 변화가 두 가지 있다. 애초 2025년 전국 확대시행 예정이던 초등 ‘늘봄학교’가 1년 앞당겨진 이달부터 확대 시행됐다. 지난해 12월 정부가 ‘학교폭력 사안 처리 제도 개선안’ 발표를 통해 도입 계획을 밝힌 ‘학교폭력 전담 조사관(학폭조사관)’제는 석 달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전국 모든 시·도교육청에서 운영에 들어갔다. 늘봄학교는 윤석열 정부의 핵심 국가돌봄정책이다. 오전 7시부터 오후 8시까지 최장 13시간 동안 학교에서 학생들이 머무를 수 있도록 학교가 돌봄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골자다. 학폭조사관제는 퇴직경찰, 퇴직교원, 아동·청소년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조사관이 학폭 사안을 전담 조사해 교사들의 업무부담을 줄이고, 학폭 처리의 전문성과 투명성을 강화한다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두 제도가 시행되기까지 과정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충분한 시범운영이나 평가의 시간을 갖기보단 ‘속전속결’로 정책이 실행됐다. 정책 집행에 있어 ‘속도’를 강조하는 윤 대통령의 뜻이 반영됐다. 준비 미흡 문제로 일선 교사들 사이에서 “졸속 추진”이라는 우려와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것도 공통점이다. 늘봄학교는 전담 인력 및 공간 문제로, 학폭조사관제는 실효성과 효율성 문제를 놓고 각각 논란이 일고 있다. 학부모와 학생 대다수는 늘봄학교와 학폭조사관제를 올해 들어 처음 겪는다. 돌봄과 학폭은 일반 국민도 관심이 많은 사안이다. 제도의 성패를 놓고 학교가 시험대에 올랐다. 정부는 “오후 8시까지 돌봄”, 현실은 “하루 2시간이 끝” 경기도 안양에 거주 중인 A씨는 올 1월 초등학교에 입학 예정인 자녀의 학교 돌봄교실 입실을 신청했다가 추첨에서 떨어졌다. A씨는 회사에 사정을 읍소한 뒤 재택근무를 하며 하교한 자녀를 돌보기로 했다. 그러던 중 정부가 늘봄학교를 전국 확대 시행한다고 발표(2월)한 뒤 학교에서 “돌봄 인원을 더 받는다”는 연락을 받았다. A씨 자녀를 포함해 총 17명이 추가로 학교 돌봄을 이용할 수 있게 됐다. A씨는 기뻤지만 잠시뿐이었다. 학교는 “하루 2시간만 돌봄교실 이용이 가능하다”라고 통보해왔다. 아이들을 돌볼 인력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1학년인 A씨 자녀는 낮 12시 20분이면 수업을 마친다. 돌봄을 2시간 이용하면 오후 2시 20분에 자녀를 데리러 학교에 가야 한다. 출근은 여전히 불가능했다. A씨는 “정부에선 오후 8시까지 학교에서 돌봄이 가능하다고 했지만 현실은 2시간이 전부”라며 “급하게 돌봄을 늘린 탓인지 준비가 많이 미흡하다고 느끼고 있다”라고 말했다. 아직 모든 초등학교가 늘봄학교를 운영하는 건 아니다. 올해 2월 19일 기준 교육부 집계를 보면 전국 6175개 초등학교 중 2741개(44.3%)가 새 학기 늘봄학교 운영을 시작했다. 단계적으로 늘려 2학기 때는 모든 초등학교에서 늘봄학교를 운영한다는 게 정부 계획이다. 정부는 전체의 44.3%도 상당한 성과라고 말한다. 문제는 늘봄학교의 운영시간이나 방식 등이 학교별로 천차만별이라는 것이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 돌봄교실에서 어린이들이 책을 읽는 수업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일단 전담인력을 확보했는지가 늘봄의 ‘질’을 좌우한다. 정부는 “기존 교원들에게 업무부담을 주지 않겠다”며 기간제 교사를 뽑아 업무를 전담하도록 했다. 인력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학교가 많다. 늘봄학교를 운영하는 서울의 B초등학교는 학기 시작 전 기간제 교사를 구하지 못해 최근 재공고를 냈다. 교사를 구할 때까진 교감 등 기존 교원이 늘봄을 맡기로 했다. 기간제 교사를 채용했더라도 이들의 근무시간 외(오전 7~9시·오후 6~8시) 업무나 늘봄학교에 포함된 ‘맞춤형 프로그램(하루 2시간)’ 강사를 구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충남의 C초등학교, 울산의 D초등학교 등은 해당 인력을 구하기 위해 ‘시급 1만원’을 걸고 자원봉사자를 구하고 있다. 전담 인력을 구하지 못하면 늘봄학교가 파행운영되거나 기존 교사들에게 해당 업무가 떠넘겨진다. 이는 지난해 시범운영 단계에서부터 숱하게 문제점으로 지적됐는데도 해결되지 않은 채 전국 확대시행을 맞았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지난 3월 6일 “3월 4일부터 늘봄 실태조사를 한 결과 하루 만에 80여건의 파행 사례가 접수됐고, 절반 이상이 늘봄 업무에 교사가 투입된 사례”며 “늘봄 파행에 모든 수단을 동원해 강력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경기도의 한 교감은 “기간제 교사를 못 구한 학교들은 결국 교감들이 해당 업무를 울며겨자먹기식으로 떠맡고 있다”라며 “그런데도 교육부는 무슨 생각으로 2학기엔 6000여개 모든 초등학교에서 늘봄을 하겠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늘봄학교 운영에 필요한 돌봄교실 등 ‘공간’ 확보 문제도 있다. 녹색정의당 정책위원회의 ‘2022년 과밀학급 현황’ 자료를 보면 서울 강남(37.70%)·서초(35.90%), 경기 하남(35.90%)·김포(31.10%)·과천(30.50%) 등은 초등학교 과밀학급 비율이 30%를 넘었다. 경기 화성·용인·김포·수원 등은 초등 과밀학급수가 각각 400~600개에 달했다. 최재영 충남교사노조위원장은 “용인이나 수원은 물론 충남 천안·아산 등 지역별로 과밀이 심한 지역은 이미 학교 특별실이나 학생 휴게공간까지 교실로 쓸 정도로 공간 문제가 심각하다”며 “늘봄을 할 공간도 없는데 내년에는 학교에 ‘늘봄지원실’까지 만든다는 정부 발상은 현실과 괴리가 크다”고 밝혔다. 학폭조사관제 도입으로 ‘학폭 소송’ 증가 우려 학폭조사관제는 지난해 국가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됐다가 자녀 학폭문제로 사퇴한 정순신 변호사 사건, 서울 서초구 초등학교 교사 순직 사건 등으로 학폭처리 과정의 개선 필요성이 제기되자 도입됐다. 기존에는 학폭사건이 접수되면 교내 전담기구(교사·학부모·아동전문가 등 참여)에서 사안을 조사한 뒤 교내에서 자체 해결(피해자 동의 시)하거나 각 지방교육지원청의 학폭심의위원회(학폭위)에 사안을 넘겨 처분을 받았다. 제도가 도입된 지난 3월 1일 이후부터는 학폭 접수 시 교육지원청이 위촉한 학폭조사관이 사안을 조사한 뒤 교내 자체 해결, 학폭심의위 이관 등의 절차를 밟게 된다. 학폭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교사들이 받는 업무 부담을 줄이는 것 제도 도입의 주요 취지다. 이는 교사노조나 교원단체들이 줄곧 요구해온 사안이다. 지난해 12월 정부가 제도 도입을 밝혔을 때 교원단체 등은 “환영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시도교육청별로 관련 연수가 진행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제도 도입 이후에도 학교(교사)가 학폭 사안 접수 및 1차 확인서·접수보고서 등을 작성해야 하고, 학폭조사관의 학생 조사 시 교사가 배석해야 하는 등 여전히 교사가 학폭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교사노조연맹은 “학폭 업무 경감은커녕 조사 일정 조율 및 조사 시 배석 등 교사 업무가 오히려 증가할 가능성이 있다”며 “학폭 조사업무를 완전히 이관해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벼운 사안도 학폭조사관이 조사하면서 필요 이상으로 행정력과 예산이 소요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교육지청 소속 학폭심의위원은 “제도 시행 전 학교에 접수되는 학폭의 60~70%는 교내 자체 해결됐고, 심의위에 올라온 사안도 60~70%가량은 경미한 사안”이라며 “이렇게 경미한 사안들까지 전문 조사관을 투입해 비용(1건당 18만~40만원)을 들여가며 조사하는 게 얼마나 실익이 있을지 의문”이라고 밝혔다. 조성백 서울시교육청 장학사는 “일선 학교에 배포한 가이드라인을 통해 ‘경미한 사안의 경우 종전대로 학교에서 조사하고 종결처리하는 방안도 가능하다’라고 안내했다”고 밝혔다. 이주호 교육부 장관이 12월 7일 정부세종청사에서 학교폭력 사안처리 개선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교육부 제공 법조계에선 학폭조사관제 도입으로 ‘학폭 소송’ 등 법적 대응 비용이 증가할 것으로 내다본다. 강민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2월 27일 공개한 ‘학폭조사관 직군별 현황’ 자료를 보면 전국 15개 시도교육청이 위촉한 1743명의 학폭조사관 중 ‘퇴직경찰’이 658명(38%)으로 가장 많았다. 한 학폭전문 변호사는 “수사 전문가인 퇴직경찰이 투입되면 조사의 신빙성이나 보고서의 완성도는 분명 높아질 것”이라면서도 “반대로 조사를 받는 학생이나 학부모 입장에서는 전문가의 조사에 대비하기 위해 초기 단계부터 변호사를 구하는 등 법률 대응에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올해 3월 1일부터는 학생생활기록부(학생부)에 기재되는 ‘가해학생 조치사항’의 보존기한도 늘었다. 이전에는 학폭 수위에 따라 6호(출석정지), 7호(학급교체), 8호(전학) 등의 처분을 받으면 ‘졸업 후 2년’까지 해당 조치사항이 보존됐다. 시행령이 개정되면서 보존기한이 4년으로 늘었다. 학폭 조사와 처분의 수위가 모두 높아진 만큼 ‘학폭 소송’ 역시 증가할 것이란 게 법조계의 견해다. 학폭조사 과정에 퇴직경찰이 개입하는 게 맞는가에 대한 논란 역시 계속되고 있다. 한성준 좋은교사운동 대표는 “조사에 엄밀함을 더한다는 이유로 전직 수사전문가 앞에 아이를 결국 세우는 것인데, 학생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배려가 있어야 한다”며 “학폭을 예방하거나 학폭에 대한 교육적 해결을 모색하기보단 처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만 정책이 집중되는 게 아쉽다”고 말했다. 임이랑 법률사무소 률 변호사는 “현행 학교폭력예방법을 보면 지나치게 경미한 사안까지 학폭의 범주에 포함돼 부모 간 감정싸움, 법적 다툼 등으로 일이 커지는 측면이 있다”며 “학폭 적용 대상과 범위를 일부 축소하고, 교내 학폭 전담기구의 역할을 강화하는 등 법률 개정을 통해 교육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윤형중의 정책과 딜레마](31) 성공해야만 하는 늘봄학교
[윤형중의 정책과 딜레마](31) 성공해야만 하는 늘봄학교(2024. 02. 28 06:00)
2024. 02. 28 06:00 사회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지난 2월 5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2024년 늘봄학교 추진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겪어봐야 아는 분야를 꼽는다면, 아마도 ‘자녀 양육’이 상당한 순위를 차지할 가능성이 크다. 24시간 돌봐야 하는 새로운 생명 앞에서 양육자들은 예기치 못한 일을 자주 마주치게 된다. 그렇게 새로 알게 되는 것 중에 보육 환경도 있다. 아이를 낳으면 누구나 보육시설을 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까운 곳에 있는 국공립 보육시설은 언감생심이다. 직접 양육하며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주변에 불편을 준다는 냉랭한 시선뿐 아니라 아예 아이가 들어올 수 없다는 노키즈존을 적지 않게 마주한다. 웬만한 곳에선 아이 기저귀를 갈기 위한 공간조차 찾기 쉽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일도 중노동이 된다. 나열하면 끝도 없다. 그렇게 영유아 시기가 지나면 한시름 덜었을까. 육아 선배들이 한목소리로 ‘진짜 폭풍은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몰아친다’고 말한다. 그때부터 오전 이후 돌봄 공백이 발생하는 이른바 ‘초등 돌봄절벽’이 본격 시작되기 때문이다. 오만가지 저출생 대책? 실질적인 보육 대책부터 이미 골든타임을 지나도 한참 지났지만, 최근 들어 저출생 담론이 더욱 뜨거워졌다. 전 세계에서 유례없는 합계출산율 수치인 0.78(2022년)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동안 오만가지 정책이 시행됐고, 최근 정부와 여야 정치권이 새로운 정책을 더 얹고 있다. 물론 각각의 정책이 의미가 있겠으나,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바뀌지 않는데도 무언가 하는 척만 요란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저출생 대응이든, 양육자 경력 단절 방지든, 어떤 이유든 간에 양육자가 사회인으로서 삶을 유지할 수 없는 돌봄 독박의 문제는 여전한데 1만 가지 정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게 아니면 획기적인 근로시간 단축으로 일과 돌봄의 병행이 가능한 사회가 돼야 하겠으나, 그건 보육 정책의 확대보다 더 요원한 일로 보인다. 두 가지 모두 신경 써야 하지만, 정부가 직접적인 재정 투입으로 당장 확충할 수 있는 분야는 보육이다. 하지만 이 연재에서 여러 차례 다뤘듯, 대대적인 투자로 보육의 양과 질을 대폭 확충했어야 할 시기에 보육 예산을 줄이려다 두 차례 보육 대란이 발생했다(정책과 딜레마 20. ‘보육 문제와 정책의 시간차’). 수혈을 받아야 할 시기에 헌혈을 강요당했으니, 환자의 상태가 나빠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보육 문제의 해법은 사실 간단하다. 그동안 모든 대통령이 공약한 대로 국공립 보육시설을 대거 확충하고, 초등 돌봄정책을 펴면 되는 일이다. 다른 정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국공립 보육시설을 꽤 늘린 문재인 정부는 이 비중을 40%로 공약했으나, 실제론 22.7%를 달성하는 데 그쳤다. 이 역시 국공립 시설을 늘린 영향보다는 아이의 숫자가 줄어든 탓이 컸다. 초등돌봄의 문제 역시 그나마 제대로 다루기 시작한 문재인 정부가 ‘온종일 돌봄’이란 정책을 통해 방과후교실과 돌봄교실을 확대했으나,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그 결과 2022년 대통령선거에서 여야는 공통으로 초등돌봄의 확대를 공약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공약집에서 “모든 초등학교는 오후 5시까지 방과후학교 운영, 희망하는 초등학생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고, “희망하는 초등학생은 누구나 초등돌봄교실을 이용할 수 있도록 모든 초등학교에 저녁 8시까지 운영하는 초등돌봄교실 설치”를 공약했다. 민주당은 “국제적 추세에 맞춰 초등학교 전 학년 동시 오후 3시 하교”를 내세웠고, 방과후학교와 초등돌봄교실을 확대해 “오후 7시까지 운영시간 연장”을 공약했다. 초등 돌봄절벽의 문제가 제기된 지 이미 오래됐으니, 정치권도 문제는 다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지자체와 학교 간 실랑이로 학원 떠도는 아이들 문제는 실행이다. 추상적 선언 수준의 공약이 구체적인 정책이 돼 현실에서 집행되기까지 상당한 준비와 과정을 요한다. 관건은 이해관계의 조정이다. 국공립 보육시설의 확충도 민간 어린이집과 민간 유치원의 핵심 이익을 건드리는 사안이었다. 초등 돌봄정책도 정부와 학교, 학부모 사이의 이해가 엇갈린다. 교사 단체들은 학교 내 돌봄을 확대하는 정책이 시행될 때마다 ‘학교는 보육기관이 아니다’라는 논리로 반대해왔다. 정부는 그동안 이해관계를 적극 조정하지 않고, 공약대로 정책을 제대로 집행하는 노력도 보이지 않았다. 이번엔 과연 다를 수 있을까. 일단 교육부가 지난 2월 5일 발표한 ‘2024년 늘봄학교 추진방안’의 내용부터 살펴보면 ‘늘봄학교’란 정책은 세 가지 특징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기존의 방과후과정과 돌봄교실이란 두 가지 프로그램을 통합한 과정이고, 둘째는 희망하는 초등학생 누구나 이용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방과후과정은 치열한 추첨 경쟁으로 유명하고, 돌봄교실은 신청 자격이 제한적이고 과소 공급돼왔다. 셋째는 하루 두 시간씩의 기본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무료라는 점이다. 기존엔 방과후과정 한 학기 1과목당 10만~15만원의 비용을 내곤 했다. 운 좋게 매일 한 시간씩 방과후과정을 수강한다면 1학기당 최소 50만원 이상의 비용이 드는 셈이다. 언론에서 자주 보도되는 ‘늘봄학교’의 특징은 오전 7시부터 밤 8시까지 돌본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아이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학교에 두는 것이 ‘학대나 다름없다’라는 얘기도 나온다. 하지만 오전 7시부터 밤 8시까지는 늘봄학교의 운영시간일 뿐이다. 대다수의 아이는 그 시간 중에서 선택적으로 늘봄학교를 이용한다. 지금은 오후 12시 30분~오후 2시에 하교하면 그때부터 학원 뺑뺑이가 시작된다. 한국 초등학생들이 받는 사교육은 사실상 민간 시장에 내맡겨진 ‘사적 돌봄’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이 학교와 학원, 학원과 학원 사이를 오가면서 교통사고의 위험도 크다. 이 위험을 덜기 위해 등하교·등하원 도우미 등의 서비스도 성행한다. 이 모든 것을 감수하지 않기 위해 많은 양육자, 그중에서도 다수의 여성이 ‘경력 단절’을 선택하고, 이는 지표로도 여실히 드러난다. 2021년 기준 한국의 25~29세 여성 고용률은 70.9%로 OECD 평균(67.7%)보다 3.1%포인트 높지만, 35~39세 여성 고용률은 57.5%로 OECD 평균(68.9%)보다 11.4%포인트 낮다. 그나마 이 수치가 빠르게 개선 중이다. 2023년 기준으로 35~39세 여성 고용률은 64.7%였다. 2013년 54.4%에 비해 10%포인트 이상 상승했다. 이들 나이대 여성 중에 자녀 양육으로 인한 경력단절의 우려가 없는 비혼, 무자녀 여성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전국공무원노조 교육청 본부 소속 회원들이 지난 2월 6일 정부세종청사 교육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규 전담 인력 충원 없는 늘봄학교 추진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늘봄학교의 성패는 디테일에서 갈려 정부는 3월부터 시작되는 1학기에 2700개 초등학교에서 늘봄학교 사업을 시행해 2학기엔 6000여개의 전국 모든 초등학교로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올해엔 1학년 학생에게만 늘봄학교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내년엔 2학년까지로 확대한다고도 밝혔다. 즉 당장 3월부터 2700개 초등학교의 1학년 학생들은 추첨에 당첨될지 우려하지 않고, 원하면 누구나 지금의 방과후과정과 유사한 늘봄학교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 오후 2시부터 저녁 7시까지 학원 스케줄을 짜느라 골머리를 앓았던 학부모들의 고생을 덜게 된 것이다. 교육부가 1월 1일부터 8일까지 초등 1학년 예비학부모 총 34만명 가운데 5만2655명을 조사한 결과 전체 응답자 중 83.6%(4만4035명)가 늘봄학교 참여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정책에 대한 찬반을 묻는 말이 아닌, 정책 수요를 묻는 말에 이 정도의 참여 의향을 밝힌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교사들의 반대는 거세다. 교원단체 교육정책디자인연구소가 지난 1월 31일부터 2월 4일까지 초등학교 교원 1만1000여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 중 92.4%가 반대한다고 밝혔다. 준비 미흡은 더욱 큰 문제다. 애초 2025년 전면 시행하기로 한 늘봄학교의 시행 시기를 1년 앞당기면서 인력, 공간, 추진체계 등의 모든 면에서 준비가 부족한 상태다. 당장 3월부터 시작될 1학기에 늘봄학교가 시행될 2700개 학교도 지난 19일에야 발표됐다. 정부는 학교마다 늘봄지원실을 신설해 공무원을 파견하고, 1학기부터 기간제 교사 2250명을 채용해 늘봄학교 신규 업무에서 교사 업무 부담을 해소하겠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현장에선 늘봄학교 업무를 담당할 기간제 교사 채용부터 학생들을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할 강사 구인까지 미흡한 부분들이 터져 나온다. 공간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교실 리모델링을 포함한 늘봄학교에 공간을 내준 교사에게 연구비, 학급운영비 추가 지급 등의 인센티브를 내걸었고, 학교 밖에도 거점형 늘봄센터를 신축하거나 지정하고, 대학과 지자체의 유휴 공간 등을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하지만 여전히 현장에선 딱딱한 책걸상뿐인 교실 외에 아이들이 여러 활동을 하고 휴식을 취할 만한 공간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결국, 관건은 예산과 소통, 두 가지다. 일단 교육부는 2023년 방과후과정과 돌봄교실에 투입된 8729억원보다 4927억원 많은 1조3656억원을 늘봄학교를 포함한 초등돌봄 예산으로 책정했다. 구체적 예산 내역이 공개된 것이 아니라 쉽게 평가하긴 어렵지만, 한국사회가 맞이한 ‘초등돌봄 절벽’ 문제에 비하면 많은 예산이라고 보기 어렵다. 안 그래도 준비가 미흡하기에 정부는 반대하는 교사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해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야 한다. 혹자는 학교에 보육 책임을 맡기는 것이 해법이 될 수 없다고 한다. 지자체가 더 역할을 해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일견 타당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누가 더 책임을 맡을지를 두고 싸울 때가 아니다. 각자가 책임을 더 맡겠다고 싸워도 지금의 저출생이 해결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한국은 영유아와 초등학교 저학년 보육을 오랫동안 방치했다. 비록 준비가 미흡하다고는 하지만, 늘봄학교와 같은 정책이 늦어도 너무 늦게 나왔다. 더 이상 늦어선 곤란하다. 윤석열 정부가 초등돌봄이란 문제 하나만 제대로 해결해도 정책적으로 큰 업적을 남긴 정부가 될 것이라고 본다.
윤형중의 정책과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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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프리뷰]바튼 아카데미-텅 빈 학교서 특별한 우정…미국판 ‘응칠’(2024. 02. 21 05:30)
2024. 02. 21 05:30 연예
영화가 시작되면 등급 표시와 영화사 로고부터 1970년대에 사용되던 형태로 삽입된다. 놀라운 것은 단순히 과거를 재현한 정도가 아닌, 실제 1970년대 작품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만든다는 것이다. /유니버설 픽쳐스 마치 10월의 마지막 날이면 가수 이용의 노래 ‘잊혀진 계절’이, 봄이면 버스커 버스커의 ‘벚꽃 엔딩’이 라디오 신청곡으로 쇄도하는 것처럼, 특정 시간이나 계절이면 그때마다 반복해 소환되며 더 오랜 생명력을 얻는 창작물들이 있다. 연말연시 역시 다양한 형태로 창작물의 소재가 된다. 국내에는 소개조차 되지 않지만, 미국에서는 매해 연말이면 성탄절을 소재로 한 수십 편의 (대부분 TV를 위한) 영화가 만들어진다. 성탄절과 송년의 시기를 포함하는 일명 ‘홀리데이 무비(Holiday Movie)’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한국에서는 <나 홀로 집에>(Home Alone·1990)가 압도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한동안 성탄절이면 텔레비전 단골 메뉴로 지겹도록 방영됐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프랭크 카프라 감독, 제임스 스튜어트 주연의 <멋진 인생>(It’s a Wonderful Life·1946)을 최고의 홀리데이 무비로 꼽는다. 이유는? 역시 TV에서 가장 많이 방영됐기 때문이다. 당시 이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최고 스타 제임스 스튜어트의 배우 복귀작이라는 사실만으로도 큰 화제가 됐다. 그러나 정작 극장 흥행에 있어 그리 좋은 결과를 얻진 못했다. 저작권 보호 시한인 28년이 지난 1974년, 판권을 가지고 있던 리퍼블릭 픽처스가 저작권 연장에 실패함으로써 이 작품은 어디서나 자유롭게 상영·방영할 수 있게 됐다. 사실상 공짜가 돼버린 이 영화는 성탄절이면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작품이 됐다. 고전적 현대영화가 만들어내는 박애와 품위 <바튼 아카데미>를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모처럼 잘 만들어진 최신 홀리데이 무비를 만났다는 것. 그러나 이런 단순한 좁은 틀 안에 가둬둘 수 없는 비범한 작품이다. 1970년, 기숙학교 바튼 아카데미. 겨울방학과 연말을 맞이해 대부분의 교직원과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간다. 나름의 사정이 있어서 갈 곳이 없는 학생들은 학교에 남게 되고, 이들을 관리하기 위해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기로 소문난 역사 교사 폴 허넘(폴 지아마티 분)과 얼마 전 베트남전에서 금지옥엽 외동아들을 잃고 실의에 빠진 주방장 메리 램(더바인 조이 랜돌프 분)이 이들과 함께 머물게 된다. 영화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등장하는 등급 표시와 영화사 로고부터 1970년대에 사용되던 형태로 삽입했다. 이후 과거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놀라운 건 단순히 과거를 재현한 정도가 아닌, 문득문득 실제 1970년대 작품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만든다는 점이다. 인물의 성격, 관계의 설정, 이야기의 전개나 마지막에 전달되는 훈훈한 교훈까지 마치 고전영화 한 편을 뒤늦게 발견한 듯한 푸근함을 영화 내내 경험할 수 있다. 따뜻한 연출로 빚어낸 배우들의 연기 호흡 이는 단순히 외형적인 기교가 아니다. 물론 과거의 풍경을 최대한 되살리기 위한 로케이션과 미술, 의상에 많은 공을 들이긴 했다. 하지만 이에 앞서 감독은 “스스로 나 자신을 1970년에 영화를 만들고 있는 감독이라고 속이며 영화를 만들었다”고 고백할 정도로 당시의 정서와 영화 문법을 최대한 답습하고자 노력했다. 감독 알렉산더 페인은 늘 사람들 사이의 상호관계와 이해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어왔다. 대부분 작품이 범작 이상의 평가를 받고 있지만, 특히 <일렉션>(1999)과 <사이드웨이>(2005), <네브래스카>(2013) 등의 작품은 꼭 챙겨보길 추천한다. 어쩔 수 없이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 언급해야만 하는 영화다. 주연을 맡은 세 배우의 개별적인 역량은 물론이고, 함께 만들어내는 시너지가 대단하다. 특별히 <사이드웨이> 이후 알렉산더 페인과 두 번째 호흡을 맞춘 폴 지아마티의 연기는 일생일대의 호연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오는 3월 10일 개최 예정인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남우주연상(폴 지아마티), 여우조연상(더바인 조이 랜돌프), 각본상, 편집상 등 5개 부문의 후보로 지명됐다. 개인적으로 감독상 후보에 오르지 못한 점이 아쉽지만, 여우조연상은 더바인 조이 랜돌프의 수상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예측이 지배적이다. 제목: 바튼 아카데미(The Holdovers) 제작연도: 2023 제작국: 미국 상영시간: 133분 장르: 드라마, 코미디 감독: 알렉산더 페인 출연: 폴 지아마티, 더바인 조이 랜돌프, 도미닉 세사 개봉: 2024년 2월 21일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체리 주빌리’ 아이스크림 이름이 아니다! https://ediblesiliconvalley.ediblecommunities.com ‘현장학습’을 핑계로 보스턴에 1박2일의 나들이를 나섰던 세 사람은 마지막 날 저녁, 근사한 식당에 모여 짧은 일탈을 마무리한다. 옆 테이블에서 웨이터가 화려한 퍼포먼스를 벌이는 걸 보고 음식 이름을 묻자, 웨이트리스가 답한다. “체리 주빌리(Cherries Jubilee)예요.” 뜻밖에도 익숙한 이름이다. 서른한 가지 종류의 아이스크림을 돌려가며 파는 매장에 가면 꾸준히 사랑받는 스테디셀러로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몇몇 품목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름이 원래 고급 디저트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주빌리는 축제, 축전, 환희 등 여러 뜻이 있지만 몇 해마다 돌아오는 기념일의 의미도 있다. 기록에 의하면 체리 주빌리가 세상에 첫선을 보인 것은 1897년 프랑스 태생의 전설적 요리사인 오귀스트 에스코피에(Auguste Escoffier·1846~1935)에 의해서라고 한다. 오귀스트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현대 프랑스 요리의 새로운 장을 연 인물로 평가된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요리사로서는 최초로 국가가 존경을 표하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기도 했다. 당시 영국 런던에 머물며 주방장 일을 하고 있던 오귀스트는 때마침 맞이한 빅토리아 여왕의 ‘다이아몬드 주빌리’(즉위 60주년)를 축하하기 위해 여왕이 좋아하는 체리를 이용한 새로운 음식을 고안하게 된다. 접시에 체리와 키르슈(Kirsch·체리 증류 브랜디)를 담고 당시 유행하던 플랑베(flambe·재료에 알코올을 첨가해 화염을 폭발시키는 요리 절차) 기술로 완성했다. 처음에는 아이스크림이 없었지만, 이후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곁들이는 것이 굳어져 지금의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시네프리뷰
행정직도 교사도 거부…학교 빈대 누가 잡죠?
행정직도 교사도 거부…학교 빈대 누가 잡죠?(2023. 11. 24 16:40)
2023. 11. 24 16:40 사회
정부, 업무담당 지정도 없이 ‘구제·예방’ 공문만 적은 인원·업무분장 ‘힘겨루기’에 학생들 볼모로 빈대가 출몰한 대구의 한 대학교 기숙사에서 방역 담당자들이 침대를 소독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한민국의 모든 교육행정공무원은 빈대와 전혀 무관함을 선언한다.” 11월 9일. 한국노총 교육청노동조합연맹에서 성명서가 나왔다. 내용은 이렇다. 빈대 확산 우려에 따라 정부가 합동대응팀을 만들어 확산 방지에 나선 가운데 학교에도 어김없이 ‘빈대 예방 공문’이 내려왔다. 그런데 일부 학교에서 빈대 예방 및 관리에 관한 업무를 교육행정직 공무원에게 시키려는 움직임이 노조에 포착됐다는 것. 이에 엄연히 ‘보건 업무’인 빈대 문제를 절대로 교육행정직 공무원들이 맡지 않겠다는 것이다. 며칠 뒤인 11월 16일. 이번엔 충남교사노동조합에서 성명이 나왔다. “빈대 방제는 학교와 교사의 교육업무가 아닌 상시적 시설관리 업무”라는 주장이다. 충남교사노조는 “빈대는 감염병을 일으키지 않는 모기, 파리, 바퀴벌레와 같은 유해 해충의 일종”이라며 “유해 해충을 잡는 일도 보건 교사의 일인가”라고 반문했다. 양측의 성명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학교 행정직 공무원들은 빈대 예방 및 관리 업무가 (보건) 교사의 일이라고 주장한다. 반대로 교사들은 빈대 문제가 시설관리 등 학교 행정업무라고 맞선다. 결과적으로 양측 모두 “빈대 방제를 못 맡겠다”로 압축된다. 빈대 확산 우려를 팬데믹에 빗대 ‘빈대믹’이라고 부르는 요즘이다. 행정공무원도, 교사도 싫다면 학교 빈대는 누가 잡아야 할까. ■‘교통정리’ 안 해준 정부, ‘빈대 싸움’으로 정부는 11월 3일부터 행정안전부 등 10개 관련 부처가 참여하는 ‘빈대 정부합동대책본부’를 꾸려 방제 및 확산 문제에 대응 중이다. 빈대 대응을 위한 행동요령이 발표됐고, 매주 빈대 대응 회의가 열리고 있다. 대책본부에는 교육부도 참여한다. 학교는 학생 다수가 모여 머무르는 곳이라 감염·전염 등 보건 문제에서 취약하다. 코로나19나 신종플루 시기에도 학교는 주요 감염 전파장소였다. 교육부는 정부 지침에 따라 일선 교육청에 빈대 구제 및 예방 등을 위한 활동에 나서줄 것을 요청했다. 교육청은 다시 일선 학교에 이 같은 내용을 공문으로 보냈다. 정부의 대응이 발 빠르게 이뤄졌다. 하지만 학교에 “빈대 업무를 하라”고 지시했을 뿐 ‘누가’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은 없었다. 미흡한 ‘교통정리’ 탓에 행정노조와 교사노조가 각각 성명을 내며 신경전을 벌이는 상황이 벌어졌다. 한 지역 교육청 관계자는 “애초에 교육부에서 공문이 올 때 업무 담당이 누구인지 정해지지 않아서 우리도 그대로 학교에 전달한 것”이라며 “학교 사정에 맞게 학교장이 업무 담당자를 정하면 될 일”이라고 말했다. 이한경 행정안전부 재난안전관리본부장이 11월 3일 정부세종청사에서 ‘빈대 확산방지를 위해 정부합동대책본부 첫 긴급대책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연합뉴스 빈대 업무가 어떻길래 서로 “못 하겠다”고 하는 것일까. 지방의 한 교육청에서 제시한 ‘빈대 관리 방안’을 보면 이해가 된다. 우선 빈대 담당자가 되면 학교 환경에 따라 자체 점검 계획을 수립해 이를 주기적으로 실시해야 한다. 교실, 당직실, 통학버스, 교내 휴게실, 학교 기숙사 등 학교 곳곳을 다니며 주기적으로 빈대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 기록하게 돼 있다. 학생이나 교직원 중 빈대에 물린 이가 있는지, 신고는 했는지 등도 파악해 적어야 한다. 빈대가 안 나오도록 예방 방제도 해야 하고, 혹여 빈대가 나오면 사후 방제도 해야 한다. 여기에 빈대 예방교육, 빈대 관련 학부모 안내 및 응대까지. 통상 학교에는 보건 교사가 1명이다. 6학급 이하 소규모 학교에는 보건 교사가 따로 없다. 행정직 공무원도 마찬가지다. 대도시의 큰 학교에야 2~3명이 근무하지만 작은 학교에는 1~2명인 경우도 많다. 보건 교사든, 행정공무원이든 기존의 업무를 하면서 위에 나열된 빈대 업무를 ‘추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왜 양측이 성명서를 내가며 다투는지 한편으론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다만 정부 대책본부가 11월 3일부터 학교 내 빈대 발생 현황을 집계한 결과 의심신고된 곳이 4곳, 이중 빈대가 확인된 곳은 한 곳뿐이다. 빈대 담당자가 되더라도 교사나 행정공무원이 실제 현장에서 빈대를 찾아다닐 상황이 많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업무영역 놓고 ‘교사 vs 행정직’ 갈등 반복 이번 빈대 싸움 문제뿐만이 아니다. 일선 학교에서 업무영역이나 분장을 놓고 교사와 교육행정직이 대립하는 일은 수시로 벌어진다. 누구의 업무인지 ‘애매한’ 경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 지방교육청의 장학사는 “예컨대 학교의 정수기 관리, 수돗물(수질) 관리, 공기질 관리 등은 보기에 따라선 (보건) 교사 몫인 보건·환경 업무이기도 하고 행정공무원 몫인 시설관리 업무이기도 하다”며 “교육부나 교육청 입장에서도 담당자가 누군지 지정해 공문을 보내기가 쉽지 않은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교육부나 교육청이 공문에서 업무 담당을 특정할 경우 해당 노조 등의 반발이 일 것을 우려해 ‘눈치’를 보는 경우도 있다. 관련 법 규정이나 방역체제 등의 미정립, 정부 차원의 지원 부족이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라는 지적도 있다. 학교보건미래비전연구회는 “코로나19를 거쳐오고 인플루엔자가 계속 유행하고 있음에도 방역·소독업무 등 학교 감염병 관리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며 “빈대 문제에 있어 학교 내 부서별 역할과 업무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충남교사노조 관계자는 “보건 교사가 방역 등을 포괄하는 ‘환경’ 관련 업무를 하도록 명시하는 현 교육법 시행령은 1990년대 마련돼 시대 변화를 담지 못하고 있어 개정이 시급하다”며 “적어도 해충 구제나 방제 문제에 있어선 지역 교육지원청 등에서 일괄 관리하는 등의 지원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수도권 한 초등학교 교장은 “보건교사든, 행정직공무원이든 일단 업무를 맡지 않겠다고 버티고 나서면 강제로 업무를 부여하기가 학교장 입장에서도 쉽지 않다”며 “빈대 문제만 해도 관련 학생 건강이나 위생관리, 교육 등은 교사가 맡고 소독이나 방제 업무는 행정에서 맡는 등 적절하게 서로 업무를 나눠 맡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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