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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창종자들]1947년 대구서 신불교 운동 표방(2008. 09. 04)
2008. 09. 04 문화/과학
진각종 손규상 현대 밀교종단의 모태 역할… 재가자 중심의 생활불교 강조 진각종을 창종한 회당 손규상 정사. 오래됐다고 낡은 채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종교는 현실을 담는 이념과 실천으로 거듭나 늘 새로운 모습을 유지해간다. 고목에서 새 가지가 뻗고 젊은 나무로 숲을 메우는 것과 같다. 대한불교진각종(이하 진각종)은 광복 직후 이땅에서 창종된 불교의 새로운 종파다. 불교 종파를 현교(顯敎)와 밀교(密敎)로 나누는 경우가 있다. 비유하면 현교는 경전을 통해 전해진 부처의 가르침을 신행의 중심으로 삼고, 밀교는 그 외에 부처의 마음이 비밀리에 전해진 수행을 본질로 삼는다. 진각종(眞覺宗)은 밀교를 표방한다. ‘옴마니반메훔’ 외우며 100일간 정진 우리나라에 밀교가 들어온 것은 신라 선덕여왕 때 명랑법사(明朗法師)가 창종한 신인종(新印宗)이 대표적이며 고려시대에도 교세를 떨쳤지만 이내 맥이 끊어졌다. 진각종은 1947년 6월 14일 손규상(孫珪祥, 1902∼1963)이 대구에서 신불교 운동을 표방하며 창종했다. 손규상은 울릉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이름은 덕상(德祥), 법호는 회당(悔堂)이다. 부친은 한약방을 경영했지만 그다지 유복한 형편은 아니었다. 울릉도에서 보통학교를 마치자 집에서 2년간 한의와 약에 관해 배우며 가업을 돕고 있었다. 20세에 규수인 배신(裵信)을 만나 결혼하고 부유한 처가의 도움으로 육지로 유학을 떠났다. 대구의 계성학교에 진학했으나 학교가 폐교되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쿄에서 낮에는 노동일을 하고 밤에는 야학에 다니던 것도 잠시,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그마저도 접고 울릉도로 돌아오고 만다. 이후 울릉도 도동에 가게를 열어 성공하자 포항으로 이사해 잡화상과 포목점으로 큰 성과를 일구었다. 이때 스스로 춘농(春農)이라는 자를 지어 가게 이름을 춘농상회라 불렀다. 사업은 번창했지만 인간적인 큰 슬픔을 겪었으니 울릉도에서 낳은 세 자녀가 차례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불교신자였던 모친의 권유로 포항시내 죽림사에서 재를 지내고 불상을 시주한 것이 불교와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됐다. 이때부터 그는 간간이 죽림사에 들러 불교 교리를 공부하고 신행을 시작했다. 절을 다니기 시작한 후 어느 날 그는 집안에 돌아와 외상장부를 모두 꺼내 불태웠다. 놀라는 가족들에게 “우리가 편히 먹고 지내는 동안 여기 적힌 사람들은 빚 때문에 전전긍긍했을 터이니 이제 그 빚에서 해탈시켜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해방이 되자 손규상은 현실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 ‘도덕정치론’이란 글을 써 배포하고 자금을 마련해 서울로 가 수 개월간 머물며 정치에 참여할 길을 모색했다고 한다.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을 뿐 아니라 건강도 잃었다. 애써도 병은 낫지 않고 수의까지 마련할 처지가 되자 가족들에 끌려 찾은 곳이 대구 인근의 농림촌이다. 농림촌은 당시 치병의 이적으로 소문난 박보살이란 노파의 명성으로 난치병에 걸린 사람들이 모여들던 곳이다. 농림촌에서는 주로 관세음보살을 외우는 기도로 사람들을 이끌고 있었다. 신비한 체험으로 병이 낫자 손규상은 이곳에 머물며 49일간 기도를 마쳤다. 이후에 아예 마당에 움막을 지어 ‘옴마니반메훔’을 외우는 100일간의 정진을 시작한다. 진각종 신도들이 ‘옴마니반메훔’진언을 외우며 수행하고 있다. 1947년 5월 16일 새벽, 마침내 손규상은 대각의 종교 체험을 이루었다. 이어 6월 14일 그는 창종을 선언했다. 교단이 구체적인 형식을 갖춘 것은 1948년 8월 3일 ‘교화단체 참회원’이란 명칭으로 종교단체로 등록하고 대구시장에 참회원(懺悔園)을 개설한 이후다. 참회원에서는 전통 불교에 비하면 종교개혁에 가까운 파격적인 신행이 이루어졌다. 진각대학원 김경집 교수는 그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당시 내세운 기치는 형식 타파,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수행, 복을 비는 의식보다 마음을 밝히는 자각의 불교였다. 광복 직후의 혼란기에 기존의 기복적인 불교로는 세상을 구제할 수 없다는 뜻에서 새불교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진언종·총지종 등 분파 떨어져나가 일제가 물러간 이후 미군정이 들어서고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민심은 참회원의 혁신에 귀를 기울였다. 회당 손규상은 대중에게 “깨달아 보라. 참회해 보라. 실천해 보라”를 외쳤다. 가장 큰 변화는 법당에서 불상이 사라진 것이다. 의지하려는 외부의 대상을 없앴다. 불교는 마음을 닦아 자성을 밝히는 종교이며 부처는 결국 자신의 마음속에 있음을 강조하고 나섰다. 종교적 구원이 절대자나 그 밖의 대상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닫고, 참회하고,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천명했다. ‘교화단체 참회원’으로 시작한 진각종은 몇 차례의 변화와 분열을 거쳤다. 1949년 12월 ‘심인불교(心印佛敎)’로 이름을 고치는데, 마음속 진리인 심인(心印)을 찾는다는 뜻에서다. 전쟁 중인 1951년에는 ‘심인불교 건국참회원’으로 정부에 등록하였다. 전쟁 중에도 손규상은 서울 왕십리에 교당인 밀각심인당(密覺心印堂)을 짓고 1953년 8월 ‘대한불교진각종’이라는 정식 교명을 정했다. 진각종의 초기 구성원은 곧바로 분열하여 진언종(眞言宗)을 이루었고, 1972년 일부가 떨어져나가 총지종(總指宗)을 설립했다. 진언종과 총지종 모두 밀교종단으로 진각종은 우리나라 현대 밀교종단의 모태 역할을 한 셈이다. 최초의 교단 본부인 대구 남산동 심인당 낙성법회에서 법문하는 회당. 진각종은 여타 불교종단에 비해 재가자 중심의 생활불교라는 점이 두드러진다. 창종 당시에는 출가자와 재가자의 2원 체제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모든 교직을 재가자가 맡고 있다. 교직자를 통칭 스승이라 하고 남자는 정사(正師), 여자는 전수(傳受)라 부른다. 일반적으로 승려가 되는 출가에 비해, 마음으로 거듭 난다 하여 심출가(心出家)라는 형식을 거친다. 진각종이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자리 잡은 데는 회당 손규상의 교육관에 힘입었다. 1953년 대구에 심인공민학교를 지어 이를 기반으로 1957년에 심인중·고등학교를 개교했다. 1977년 서울에 진선여중·고를 세우고 1996년 경주에 위덕대학을 설립했다. 그 밖에 전국 심인당에서 운영하는 30여 개의 유치원이 있다. 위덕대학 초대총장은 회당의 아들인 손제석 전 문교부 장관이 맡았다. 회당학원 최종웅 이사장은 진각종이 교육 사업에 힘을 기울인 배경을 설명했다. “손규상 대종사는 일제 강점기를 벗어나 혼란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교육을 가장 우선해야 할 사업이라 했다. 때문에 창종과 동시에 교육에 치중했다. 인간의 존엄성은 교육을 통해서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 불교가 비구·대처 분쟁을 거치며 소모적인 시간을 보낼 때 진각종은 교육을 통해 신세대에 다가서고 모든 경전을 과감히 한글로 바꾸었다. 신행공간을 현대화하고 산중보다는 철저히 마을 한가운데 교당인 심인당을 세웠다. 의식을 통일하고 마음을 닦는 신행법을 만들어 생활불교·실천불교를 확립한 것이다. 진각종이 서울에 자리를 잡고 우선한 것은 교리체계를 세우고 경전을 번역한 일이다. 불교 경전 중에서 밀교부에 해당하는 대일경·금강정경·보리심론 등을 번역하고 밀교의 역사와 계율 등을 모아 총지법장을 펴냈다. 모두 한글로 펴내 누구나 쉽게 읽고 알 수 있도록 했다. 총지법장 이후 교화에 필요한 실제적인 내용을 엮은 응화성전(應化聖典)을 펴냈다. 지금은 진각교전을 경전으로 쓰고 있다. 심인중·고와 진선여중·고 설립 일찍 교리를 집대성하고 수행체계를 만들며 교육 중심의 체제를 세운 까닭에 교조의 입적 이후에도 별다른 침체 없이 교세를 이어갈 수 있었다. 창종 60주년을 앞두고 전국에 6개 교구, 120여 개 심인당, 250여 명의 성직자가 있는 한국 불교 4대 종단으로 자리 잡았다. 진각종에서는 신도를 100만 명이라고 주장한다. 2005년 정부의 조사통계에 불교 신자로 응답한 이가 1000만 명이 조금 넘은 것에 비추어 보면 만만치 않은 교세임을 실감할 수 있다. 진각종 내부에서는 앞날을 낙관하고 있다. 물질만능의 시류가 계속될수록 심성을 되찾으려는 반성이 커지고 옳은 길을 보여주면 자연히 그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이다. 진각종은 젊은이들로부터 미래를 모색한다. 수원에 어린이도서관을 짓고 8000여 권의 불교 관련 책과 전자도서관을 갖춰 밀교가 어렵다는 생각을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있다. 종교는 옛 가르침을 통해 새로운 길을 열어간다. 시대에 맞는 실천으로 낡은 옷을 벗고 새로움을 지속해가는 것이다. 불교는 이 땅에 들어온 지 1500여 년 만에 진각종이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세상에 다가서고 있다. 회당 손규상은 “불교는 복을 비는 종교가 아니라 마음속의 깨달음으로 진리에 다가서는 종교”라며 진각종을 창종했다. 그 새로운 실천이 어떤 열매를 맺을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김천
[한국의 창종자들]갱정유도 서당, 교육의 장으로 개방(2008. 08. 28)
2008. 08. 28 문화/과학
갱정유도 강대성③ 화문산 경화궁서당 등 청소년에게 전통예절과 한문 가르쳐 갱정유도 한양원 도정. 꽃은 피면 진다. 꽃이 지면 화려한 시절은 사라져가지만, 다시 영화로운 세월을 기다리는 씨앗은 남아 있다. 한때 50만 명에 이르는 신자들이 도덕세계의 완성을 꿈꾸며 신앙하던 갱정유도는 지금은 그 자취를 찾기가 쉽지 않다. 대략 3만 명으로 추산되는 신자와 전국 36개 교당, 6곳 정도 남은 수련당이 있을 뿐이다. 전성기에 비하면 몹시 위축된 모습이다. 그래도 갱정유도 신자들은 미래를 낙관한다. 광복 직후 전성기의 갱정유도는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 했다. 교조 강대성이 순도하게 된 ‘대화중흥국 사건’이나 제2세 교조 김갑조가 주도한 외세 배척과 통일 주장의 만세 시위 사건 등은 도덕문명시대를 주도적으로 이루려 한 갱정유도의 현실 참여로 볼 수 있다. 대의명분을 중시하고 시운의 변화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상을 향해 외쳤던 것이다. 전국 36개 교당에 신자 3만 명 현재 갱정유도를 이끌고 있는 한양원 도정은 갱정유도가 대외적 발언과 실천에 앞섰던 이유를 설명했다. “갱정유도는 민족과 인류의 시운이 암흑에서 광명으로, 겨울에서 봄으로 바뀐다는 것을 굳게 믿는다. 봄이 되면 씨를 뿌리고 밭을 일구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원하는 미래는 기다린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다.” 그 대가는 가혹했다. 교단 간부들이 구속되는 일이 벌어졌고 언론은 갱정유도를 사교로 몰아갔다. 1954년 8월 16일 동아일보는 내무부에서 갱정유도의 근거가 되는 서당을 폐쇄하도록 문교부에 요청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당시 정권은 한자교육을 금지해야 한다는 법적인 논란까지 벌이면서 갱정유도를 압박했다. 영신당주 강대성의 친필. 경찰의 발본색원 방침에 따라 교세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열성적인 신자들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지리산 자락 청학동 골짜기나 여천, 논산, 변산, 거제도, 고창 등의 오지를 찾아 몇 가구씩 모여 살며 농사 짓고 글을 가르치는 은둔과 수양의 시간을 보냈다. 세상의 몰이해를 피해 높은 담을 쌓은 것이다. 최근 남원의 갱정유도 총본산과 몇몇 지부에는 젊은이의 발길이 하나 둘씩 늘었다. 낯선 삶의 방식과 가르침에 관심을 갖고 갱정유도에 입도하는 이도 생기고 있다. 10여 년 전 20대 초반에 갱정유도에 입도한 허은성씨는 “일반 학문은 지식을 가르치지만 갱정유도의 교육에서 인성과 사람의 근본을 배울 수 있었다”면서 “몸과 마음을 함께 수양할 수 있어 종교로 받아들이게 됐다”고 했다. 낡아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실용의 여지가 많다는 것이다. 농사짓고 글 가르치며 은둔과 수양 한국학연구원 윤용복 박사는 “물질만능의 현대 사회에 인간을 중시하고 도덕과 전통의 가치를 주목하는 갱정유도의 주장은 귀 기울여볼 만하다. 그들이 제시하는 이상적 가치가 현실 속에서 반드시 실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며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갱정유도의 의미가 분명해졌다고 지적했다. 회문산 경화궁서당, 군산 인원한문학원, 고창 용추골서당 등 갱정유도 서당은 청소년에게 전통예절과 한문을 가르치는 교육의 장으로 개방돼 주목받는다. 학교와 사회에서 가르치지 못하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곳으로 평가받는 것이다. 갱정유도가 최근 주력하는 것은 도덕성과 민족얼 회복 운동이다. 영신당주 강대성은 부응경에서 “도덕은 곧 선함에 마음이 그쳐, 모두에게 측은한 마음을 두어 하나도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다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했다. 그리고 밀려오는 서양의 물질문명에 얼을 빼앗겨 우리 것을 잃으니 세상의 대립과 모순이 더 커졌다고 했다. 갱정유도는 우리 얼을 되찾아 조화를 이루어야 상생의 시대가 온다는 것을 주장한다. 갱정유도의 낡아 보이는 옷과 가르침 속에는 오히려 새로운 세상을 위한 신념의 씨앗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인터뷰|한양원 도정 “폐쇄성 극복, 현대화 방안에 주력” 한양원 도정은 5년 전부터 도정으로 추대돼 갱정유도를 이끌고 있고, 한국민족종교협의회를 결성하여 24년째 회장을 맡고 있다. 갱정유도의 현안은 무엇인가. “여타 민족종교와 마찬가지로 갱정유도는 현대화·세계화의 과제를 안고 있다. 폐쇄성을 극복하고 현 시대에 다가갈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는 데 주력하려 한다. 젊은이에게 전통뿐 아니라 현대 학문을 가르치고 서양철학을 접목하도록 하고 있다. 교리와 경전을 현대적으로 펴기 위해 불가결한 일이다. 동·서양 학문의 조화는 교조인 영신당주의 가르침이기도 해 절실하다.” 현대화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설명해달라. “현대 사회에 필요한 것을 전하는 것이 우선이다. 서구적인 가치와 물질을 추구하면서 매몰된 전통 예절과 인간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민족의 얼과 정기를 살리는 일도 시급하다. 이것은 지금까지 갱정유도가 올곧게 지켜오고 있다고 자부한다. 현대인에게 정신적 가치와 삶의 목표를 되찾아주는 일에서 첫발을 내딛겠다. 세상이 필요한 것을 돌려주는 게 종교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민족종교협의회를 결성한 배경과 취지는 무엇인가. “민족종교를 통합하려는 노력은 몇 차례 있었다. 상해임시정부 참모총장을 지낸 유동열 장군이 광복 직후 통정원(統整院)을 만들어 민족종교를 통합하려 했지만 6·25 때 납북으로 지리멸렬됐다. 5·16 직후 박정희 대통령의 지원을 받아 이찬영씨가 민족신앙총연맹을 만들었지만 변질되고 말았다. 두 차례의 실패를 지켜보고 만든 것이 한국민족종교협의회다. 겉모습은 다르지만 민족종교는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세계 평화와 인류 구제라는 공통된 이념을 지향하고 있다. 민족정신을 지키고 겨레의 활로를 찾기 위해 종교의 차이를 떠나 함께 노력하고 있다.” 앞으로 갱정유도와 민족종교의 전망을 어떻게 보는가. “물질과 정신의 관계는 동양과 서양, 몸과 마음의 관계로 비유할 수 있다. 둘 중 어느 하나에 치우쳐 있으면 건강할 수 없다. 지금은 돈과 물질에 관심이 치우쳐 있지만, 진정 행복해지려면 정신적인 가치도 살려야 하고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고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이 물질문명이 극에 달했으니 정신과 도덕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그때는 민족의 정신과 갱정유도가 힘을 더하리라 믿고 있다. 모두 평화롭고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이 갱정유도가 추구하는 것이다.” 김천
[한국의 창종자들]“해인경을 읽어야 난세 피할 수 있다”(2008. 08. 20)
2008. 08. 20 문화/과학
갱정유도 강대성② 강대성이 머물던 남원 일대서 고난에 시달렸던 대중들에 널리 퍼져 1984년 3월 임진각에서 거행한 갱정유도의 남북통일 세계평화 기원대제. 종교는 현실과 비현실의 벽을 넘나든다. 해결할 수 없는 현실의 해답을 형이상학과 비현실적인 방식으로 대답하는 것이 종교다. 대부분 종교는 현실의 모순이 극에 이르러 일상적인 방법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해 보일 때 등장한다. 갱정유도도 마찬가지였다. 강대성은 세상의 고난과 문제가 사라진 이상세계가 반드시 오리라는 것을 예언했다. 일제의 가혹한 억압과 패망, 광복의 혼란, 남북의 분단과 전쟁을 거치면서 환란 없는 세상이 온다는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인 것은 늘 고난 속에 시달려야 했던 대중이었다. 강대성이 머물던 전라북도 남원 일대를 중심으로 해인경(海印經)을 읽어야 난세를 피할 수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00일 묵언으로 지내는 특별수련 갱정유도의 기본 경전은 부응경(符應經). 모두 365권으로 이루어졌고 강대성이 득도한 후 기록한 내용으로 국한문혼용에 대화체·일기체 등이라 읽기가 어렵고 일부는 유실된 채 전해진다. 부응경 중에서 가장 먼저 펼친 것이 해인경이다. 해인(海印)은 모든 물이 바다를 향해 흘러가듯 세상의 이치가 담긴 진리를 뜻한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이룬 경지를 해인삼매로 표현한 데서 유래하지만, 종종 종교적 진리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땅의 종교적 탐구자들이 해인의 비밀을 밝혀내고 얻으려 한 흔적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강대성의 해인경은 “우성재야 천지부모 궁을합덕 음시감혜 일심동력 세계소립 오주소립(牛性在野 天地父母 弓乙合德 牛時感惠 一心東力 世界所立 吾主所立)”으로 모두 28자의 짧은 주문이다. 갱정유도인들은 의례 때는 물론이고 일상에서도 반드시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한 자씩 신성하게 외우고 있다. 그만큼 교리의 핵심이며 수행의 중심인 것이다. 종교적 상징의 언어라 통속적인 해석은 어렵겠지만 대략의 내용은 천지의 조화가 이루어지며 모두 천지부모를 알아 마음에 모시면 세상의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강대성의 도맥을 이은 계도선사 김갑조 초상. 강대성은 당대 이 땅의 종교들과 개벽의 시대를 함께 하고 있지만 그 성격에 대해서는 다르게 설명했다. 동학의 최제우와 증산교의 강증산, 원불교의 박중빈은 우리가 사는 절망의 시대 선천개벽의 시운이 끝나고 후천개벽의 시대가 온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강대성은 모든 선이 천상으로 모이고 땅에는 악이 모여 있는 지금까지의 후천음도(後天陰道) 세상에서 천지가 뒤바뀌는 선천양도(先天陽道) 세상이 온다고 주장했다. 이상세계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동일하나 그 원리는 달리 본 것이다. 당시까지 유행하던 개벽의 이치는 선천에서 후천으로, 양에서 음으로 변화였다. 갱정유도는 거꾸로 후천이 선천으로 회복되고 음이 지배하는 세상이 양으로 바뀐다고 주장한다. 미래의 시운도 일부에서는 결실의 가을이 온다고 밝히고 있으나 강대성은 세상 기운이 새롭게 움트는 봄과 같은 시대가 온다고 주장했다. 모든 성인과 충효열사, 도덕선심들이 지상에 다시 돌아와 유도(儒道)의 세상이 회복된다는 것이다. 갱정유도는 신앙의 대상으로 선당궁(仙堂宮)을 모신다. 원형의 천문도 주변에 24절기를 표시하고 중앙에 선당궁이란 글자 등을 쓴 도형이다. 신자들은 집 안의 가장 깨끗한 방의 동쪽에 선당궁을 모시고 아침 일찍부터 선당궁을 향해 치성을 올린다. 선당궁은 우주의 신령한 기운이 머무는 곳으로 그곳에서 제불신선과 선한영령이 수련자와 교감하는 곳이라 믿는 것이다. 그 밖에도 일상을 수련삼고 24절기에 올리는 치성과 산제, 대제가 갱정유도의 주된 종교 의례다. 개인적인 수행으로 농한기에 100일을 묵언으로 지내는 특별수련을 한두 차례 올리기도 한다. 과거의 복식과 예의범절 회복 강조 10여 년 전 갱정유도에 입도한 수련자 허은성씨는 “머리를 기르고 예법에 맞춰 옷을 갖춰 입는 것 자체가 사람다운 도리를 지키는 기본적인 수련”이라면서 “예스럽게 사는 것은 처음을 잃지 않는다는 수련의 마음을 지켜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갱정유도라는 교명 자체가 “유도는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니 그것이 흩어진 시대라 다시 고쳐 바르게 세웠다”는 점을 지적했다. 갱정유도에서 한문을 가르치고 예를 갖추어 사는 것은 사람의 도리를 닦아가는 가장 기본이라는 점이라 했다. 갱정유도의 겉모습보다는 무엇을 지키고 수련해가는지 주목해달라는 것이다. 변화를 기다리며 남들이 과거와 결별을 선언할 때 갱정유도가 오히려 과거의 복식과 예의범절로 돌아갈 것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데는 인간의 도리를 되찾자는 영신당주 강대성의 가르침이 있다.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철저하게 전통과의 단절을 경험한 시대라 갓 쓰고 도포를 차려 입은 갱정유도인들의 모습은 차라리 낯설다. 한국학연구원의 윤용복 박사는 “전통예절과 한문교육 등으로 갱정유도의 교육적 가치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지만 종교적인 확산은 쉽지 않을 것이다. 전통을 지키는 것이 과거지향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교리를 펼치는 일이 힘에 부친다”고 평했다. 강대성이 순도한 이후 갱정유도는 계도선사 김갑조(繼道先師 金甲祚)가 맥을 이었다. 그는 17살에 갱정유도에 입도한 이래 열심히 수련하다가 1958년에 도통하고 1962년에는 강대성의 딸과 결혼했다. 김갑조는 교조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하여 세상을 구제하기 위해 서울에서 대대적인 포덕을 계획했다. 1965년 6월 6일 오전 9시부터 전국에서 상경한 500여 명의 갱정유도 신도는 미리 준비한 30만 장의 전단을 배포하기 시작했다. 경찰이 용공유인물로 간주하고 강제연행하자 신도들은 중앙청을 향해 ‘단군창업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인 끝에 전원 연행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5·16 이래 반공이 국시가 되고 아무도 통일을 거론하지 못하던 시절 500명이 넘는 교인이 들고 일어나 외세를 물리치고 삼팔선을 없애 우리 것을 되찾자는 외침은 충격이었다. 갱정유도는 이후에도 줄곧 남북통일과 세계평화를 주장한다. 시대에 뒤져 보이지만 세상이 나가야 할 바를 진지하게 외칠 수 있었던 것은 갱정유도가 현실의 가치와 무관한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김천
[한국의 창종자들]강대성, 처자식과 함께 수련에 들다(2008. 08. 14)
2008. 08. 14 문화/과학
아들에겐 유교, 부인에겐 산신, 자신은 선도 수행 연신당주 강대성의 초상. 칠월칠석인 지난 8월 7일 갓 쓰고 도포를 차려 입은 30여 명이 계룡산 신도 안에서 산제를 올렸다. 갱정유도(更定儒道) 한양원 교정과 수도인들이다. 옷차림은 조선의 유생과 같지만 갱정유도는 영신당주 강대성(迎新堂主 姜大成, 1890∼1954)이 세운 이 땅의 종교다. 갱정유도의 정식 명칭은 무척 길다. ‘시운기화유불선동서학합일대도대명다경대길유도갱정교화일심(時運氣和儒佛仙東西學合一大道大明多慶大吉儒道更定敎化一心)’ 줄여서 갱정유도, 세칭 일심교(一心敎)가 교의 명칭이다. 세칭 ‘일심교’… 동학에서 영향받아 지리산 청학동에서 상투 틀고 전통대로 살기 시작했던 것이 갱정유도인들이다. 세간의 통속적인 관심이 쏠리고 세속화의 밀물이 닥치자 수도인들은 여기저기로 흩어져 자신들의 길을 가고 있다. 그들이 믿는 종교의 특색은 무엇일까. 한국학연구원 종교학과 윤용복 박사는 갱정유도의 종교적 성격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유불선의 가르침을 다 담고 있으나 유교적 흔적이 강하고 전통사상을 잇는 면이 짙다. 종교적 계보로 보면 동학에서 영향을 받아 교조인 강대성이 자기 방향을 설정한 종교다.” 강대성은 젊은 시절부터 종교적 관심이 컸다고 한다. 스무 살 즈음부터 세속의 일보다 천지간의 이치를 찾는 데 골몰했다고 한다. 스물아홉에 결혼하고 이듬해인 1919년 아들 용학(龍學)을 얻었는데, 그해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모친이 돌아가시자 3년상을 마친 후 정읍군 산내면으로 이사해 본격적으로 도를 구하기 시작했다. 당시 정읍 일대는 보천교의 교세가 막강하던 때라 곳곳에서 수도자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는 이름까지 기동(基東)으로 바꾸고 맹렬히 수련하던 중 하늘의 소리를 듣는 종교체험을 한다. 다시 순창의 처가 마을로 옮겨 천신에게 기도하는 생활을 계속한다. 당시 수련이 깊어 인간사의 길흉을 살피는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39세가 되는 해에 홀연히 “금강산 금강암으로 가라”는 천신의 소리를 듣고 회문산의 승강산(勝剛山) 금강암으로 자리를 옮겼다. 초가삼간를 지어 아들에게는 유교의 도를 닦게 하고, 부인에게는 칠성과 산신을 모시게 하고, 자신은 선도(仙道)를 수행했다. 처자식과 함께 종교적 역할을 맡아 수련한 것은 극히 드문 예다. 마당에 금줄을 쳐 바깥 사람의 출입을 금하고 엄격한 수련 끝에 1929년 7월 어느 날 마침내 득도의 순간을 맞았다고 한다. 54년 국가변란죄로 체포된 후 사망 종교적 득도는 현실의 벽을 넘어선다. 세속의 눈길과 언어로는 납득할 수 없는 비현실의 세계가 종교적 이적의 형태다. 강대성이 득도 이후 보인 몇 년간의 행적은 곧바로 취하고 미쳐버린 모습이다. 갱정유도의 시발을 알려주는 사건과 교리가 누건수교리(淚巾水敎理) 생사교역(生死交易)에 담겨 있다고 한다. 누건수교리란 강대성이 득도한 후 온 가족이 모여 대성통곡하며 흘린 눈물을 수건으로 받아 짜서 마시고 또 울기를 3일 동안 했다는 내용이다. 이후 부인이 목을 매 숨지자 시신을 방에 둔 채 여섯 달 동안이나 불을 때고 물로 씻어냈다고 한다. 영신당주 강대성과 제자들. 갱정유도 한재훈 포덕사는 그 내용을 “세상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죽음과 삶, 육신과 정신, 하늘과 땅, 남자와 여자,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선천과 후천의 세계를 바꿔야 하는데 인간적으로는 차마 할 수 없는 아픈 일이라 온 가족이 붙잡고 운 것”이라고 설명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겪어야 하는 강대성의 인간적인 고통과 번뇌를 보여주는 예화라는 것이다. 이후 몇 년간 강대성은 반쯤 미쳐서 보낸다. 아내의 시신을 아무도 모르게 묻고 순창과 남원 일대를 아들의 손을 잡고 유랑했다. 곳곳에서 병을 고치거나 세상 일을 예언하는 이적을 보여 세간의 눈길을 끌었다. 1934년 진안군 운장산에 머물면서 제자를 얻고 기본경전인 ‘해인경(海印經)’을 내놓는다. 이때부터 신자들이 하나둘 찾아와 기본적인 교세를 갖춘 것은 1942년 회문산 도령동에 최초의 성당(聖堂)을 짓고부터다. 강대성은 종종 일본의 패망과 세계사의 흐름에 대해 예언하기도 했다. 1940년 5월 6일 용산경찰서장은 일심교인 박수남을 불온인물로 체포한 보고서를 내놓았다. 일제의 조선신궁(神宮)과 군수물자운송열차에 ‘조선독립만세’ 등의 격문을 썼다는 혐의다. 재판부의 기록에 따르면 일심교는 “일심만능(一心萬能), 군교통일(群敎統一), 세계평화(世界平和)”를 내세우고 독립을 꾀하는 유사종교집단이라는 것이다. 갱정유도의 당시 교세는 미미했지만 반일정서가 뿌리 깊고 독립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광복이 되자 그동안 기록해 모아둔 경전을 펴내고 포교에 전력했다. 광복 직후의 혼란은 역설적으로 갱정유도의 교세가 정점에 이르는 계기가 됐다. 곧 난세가 닥치고 해인경을 읽어야 난리를 피한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1954년 3월 갱정유도인 5명은 ‘세계평화를 이룰 대성인’이 나셨다는 소식을 이승만과 자유당에 전하려다 모두 체포된다. 이후 아시아 반공대회장에 교인 15명이 찾아가 같은 내용을 전하려다 국가위신 손상죄로 체포돼 1개월의 구류를 살았다. 이에 굴하지 않고 강대성은 갱정유도의 누건수교리를 영문으로 번역해 유엔과 미국 대통령에게 보냈고, 결국 이 일이 화근이 되어 불상사를 겪었다. 1954년 6월 1일 전북경찰국의 무장경찰 50명은 갱정유도 본부로 들이닥쳐 무차별 구타하고 강대성과 57명의 교단 간부를 체포했다. 강대성은 체포 당시의 모진 폭행으로 병보석으로 나왔으나 치료 3개월 만에 세상을 떴다. 당시 이들에게는 국가를 전복하고 대화중흥국(大和中興國)을 세우려 했다는 국가변란이라는 죄목이 씌워졌다. 1954년 8월 16일자 동아일보는 전라북도 일원에만 갱정유도인의 서당이 157개 약 1500명의 학동이 교육받고 있으며 이들을 사교를 믿는 무리라고 보도했다. 적지 않은 교세를 펼치고 있었지만 결국 교조의 죽음과 세상의 몰이해, 정부의 가혹한 압박으로 갱정유도는 시류와는 무관한 길을 걷게 된다. 옛 모습을 지키며 수양으로 세상을 구하기를 꿈꾸는 그들은 반세기가 지나서도 여태 세상과 등진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김천
[한국의 창종자들]남북 분단 후 교세 급격히 하락(2008. 08. 07)
2008. 08. 07 문화/과학
1920년대 교인 수 200만… 기독교 35만, 불교는 20여만 명에 불과 천도교 김동환 교령이 수운 최제우의 초상 앞에 앉아 있다. 매주 일요일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수송동 천도교 서울대교당에 200여 명의 천도교인이 모여 종교의식을 치르고 있다. 천도교는 일요일을 한울님을 모시는 날이란 뜻으로 시일(侍日)이라 하고 의식을 시일식이라 한다. 현재 천도교 교구는 전국에 105개, 그중 실제로는 85곳이 활동 중이며 미국과 일본에 각각 한 곳의 교구가 있다. 교인 수는 어림잡아 10만 명이 채 안 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1926년 7월 10일자 동아일보는 조선 종교현황 중에 천도교인 수를 200만 명으로 보도하고 있다. 같은 기사에 기록된 기독교 35만 명, 불교 20여만 명과 비교하면 압도적인 수다. 1930년 잡지 삼천리 10월호에서 천도교 핵심 인사 최린은 교당 수를 군 단위에 400개소, 면 단위까지 합하여 1000개소 이상이라고 밝히고 있다. 국내뿐 아니라 도쿄, 런던, 미주 일대와 심지어 쿠바에까지 천도교 교당인 종리원이 있었다는 것이다. 평안도·함경도에서 가장 번성 천도교는 초창기인 동학 때부터 극심한 내부 분열을 겪었다. 제2대 교조 해월 최시형이 동학혁명을 이끌 때 남접과 북접이 노선 차이로 대립했고, 제3대 교조 의암 손병희가 교통을 물려받을 때도 국내파의 반발에 부딪혔다. 이후 천도교는 신파와 구파의 분열, 천도교에서 출교당한 송병준 일파의 시천교, 기타 동학계열 교파들과 대립을 거친다. 일제는 천도교의 분열을 조장하여 회유와 탄압의 수단으로 삼기도 했다. 광복은 역설적으로 천도교 교세가 급격히 쇠락하는 전기가 됐다. 앞서 인용한 삼천리의 기사에서 최린은 “천도교는 평안북도와 평안남도, 함경남도가 가장 번성하는 곳이며, 이곳의 신도가 전체의 3분의 1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분단으로 가장 강력한 기반을 북에 남겨두게 되며 남북의 천도교는 분열과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뿐 아니라 급격히 밀려든 서구문물과 가치관은 종교로서 천도교의 위상을 위협했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9월 2일 청년운동조직으로 출발한 천도교 청우당(靑友黨)은 해방과 더불어 현실정치에 참여할 것을 선언한다. 1945년 10월 31일 ‘민족통일결성촉진, 전재동포구제, 실업대책’을 내세우며 지방대표 1000명이 모여 부활전당대회를 개최했다. 이후 임정 지지, 반탁 성명 발표 등을 주장하여 현실정치에 뛰어들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북한의 천도교인도 1946년 2월 8일 북조선 천도교 청우당을 창당했다. 당시 북한 전역에 100여 개에 이르는 조직을 갖춰 소련 군정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북조선 청우당은 1948년 3·1절을 기해 남북통일 시위를 꾀하다 실패해 1만7000명의 간부가 검거되는 불상사를 겪는다. 이 사건으로 남쪽에서는 북의 교단 간부들이 배신했다는 소문을 들어 격렬히 비난하면서 결별하고야 만다. 이후 남과 북의 정권은 정치적 이해 타산에 따라 청우당을 정략적으로 이용해 천도교에는 대중들의 지지를 잃는 계기가 됐다. 1970년대 초 천도교는 박정희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한때 교세를 되살리는 전기를 잡았다. 정전협정 남측 대표, 외무부 장관을 거쳐 서독대사로 근무하던 최덕신은 박 대통령의 권유로 귀국해 천도교 교령이 됐다. 박 대통령의 지원으로 수운 최제우가 득도한 경주 용담정이 복원됐고 현 천도교 중앙총부 건물인 수운회관이 건립됐다. 최덕신은 교단 내부의 분쟁으로 출교당하고 결국 미국 망명을 거쳐 1986년 월북한다. 그가 어린 시절 김일성과 함께 부친 최동오에게 동학을 배웠다는 설도 월북의 유력한 이유로 추측되고 있다. 1997년 오익제 전 교령 월북 충격 천도교 중앙총부 건물인 수운회관. 이후 1997년 오익제 전 교령도 월북해 세상의 충격을 주었다. 이 두 사건은 천도교가 위축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교세 위축의 근본적인 원인을 내부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 천도교 중앙총부 교화관 관장인 이선영 선도사는 “현대의 교육 문화 수준에 맞는 교리 개발의 부재와 교역자 양성의 부진이 교세 위축을 가져왔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개인적 기복을 권하지 않는다’는 천도교의 신행관이 신도 수를 확장하는 데 장애가 된다는 것이다. 지금 천도교는 새로운 도약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천도교 교리를 정립하고 교역자를 체계적으로 양성하기 위해 대학원 대학의 설립과 해외 포덕을 위한 인력 양성을 준비 중이다. 유명무실한 교구의 재정비도 계획하고 있다. 천도교인들은 정신적 가치를 잃은 물질문명과 현대사회의 모순은 선천세계의 마지막 그림자로, 이미 열린 개벽의 시대를 막을 수 없음을 굳게 믿는다. 오늘도 민족 통일과 인류 번영은 결국 수운 최제우의 가르침대로 ‘사람이 곧 하늘’인 이치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으며 시운의 변화를 예비하고 있는 것이다. 인터뷰 | 천도교 김동환 교령 “민족정신 되찾아야 민족도 번성” 김동환 교령은 작년 4월 천도교 수장으로 선출됐다. 그는 지금이 우리 민족과 천도교의 미래를 위해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말했다. 천도교를 적극적으로 전하기 위한 방안을 설명해주십시오. “우선 교역자를 양성하고 교육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내부 교육기관인 종학대학원의 내실을 기하고 대학원 대학의 설립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천도교의 이념은 민족을 떠나 세계적인 구원의 대안이므로 외국어로 포덕할 수 있는 인력을 키우겠습니다. 최근 블라디보스토크 일대에서 천도교가 독립을 위해 애쓴 공을 인정받아 러시아 정부와 토지 임대에 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습니다. 실현되면 해외 수련원을 건립해 젊은이들에게 민족혼을 교육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겠습니다.” 일제에 강탈당한 천도교의 재산에 관한 이야기가 화제가 되고 있는데 어떤 내용입니까. “일제가 예금동결, 압수 등으로 강탈한 재산이 확실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만 당시 화폐 128만6000원, 지금 돈 약 500억 원입니다. 그밖에 몰수 토지 등 일제가 빼앗은 재산은 당시 독립을 열망하며 천도교에 기부했던 신도들의 사유재산입니다. 앞으로 우리 정부가 나서서 일본으로부터 정당한 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역점 추진사업은 무엇입니까. “내년이 3·1운동 90주년입니다. 학자들과 함께 3·1정신의 전모를 밝히는 학술대회를 추진 중입니다. 시대적 배경과 역사 사실을 총망라해 3·1운동의 모든 것을 담은 전범을 만들려고 합니다. 3·1운동은 계층과 종교, 남녀노소를 떠나 민족이 하나가 된 계기였습니다. 그것을 천도교가 이끌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고, 오늘 우리 현실을 위해서도 반드시 되돌아봐야 할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인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천도교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모두 한울님을 모시고 있어 평등하고 귀합니다. 그것을 사무치게 알아 서로 존중하면 계층 간 갈등과 빈부 문제, 정치적 불평등, 남북 통일, 자연 파괴와 환경 재앙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내 안의 한울님을 돌아보고 상대방 안의 한울님을 모실 수 있는 실천이 필요합니다.” 김천
[한국의 창종자들]‘사람이 하늘’ 교리로 민중 사로잡다(2008. 07. 31)
2008. 07. 31 문화/과학
천도교 수운 최제우③ 최제우, 모두 상생하여 함께 어우러져 사는 지상천국 꿈꿔 수운 최제우가 태어나고 수행한 용담정에 세워진 동상. “사람이 하늘이다.” 천도교의 교리와 목적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엄연한 차별과 모순을 해결하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종교는 세상을 보는 다른 눈과 방법을 제시하여 빈부와 신분의 벽을 한꺼번에 해소하려 한다. 종교적 가르침 안에서는 한울님에게 수운 최제우가 들은 것처럼 ‘한울의 마음이 나의 마음’인 평등의 세상이 가능해진다. 수운 최제우가 종교적 깨달음 속에서 본 세상은 사람이 주인이 되고, 모두 상생하여 함께 어우러져 사는 곳이다. 그는 새로운 개벽이 일어나 지상천국이 이루어지기를 꿈꿨다. 서울대 종교학과 윤이흠 명예교수는 “천도교는 우주론적 종말론인 개벽사상이 핵심이며 오늘의 현실이 구제할 수 없도록 혼돈에 빠지면 빠질수록 후천 이상세계는 그만큼 더 장엄하고 화려하다”며 당시의 시대적 조건과 맞물려 민중을 사로잡았음을 강조했다. 한문체 동경대전 식자층이 대상 최제우의 개벽사상은 이후 이 땅의 신종교에 하나의 이정표가 된다. 증산교와 원불교, 심지어 통일교까지 후천개벽의 구현을 목표로 삼게 되었다. 그를 실현하는 주체와 방법은 달랐지만, 수운이 밝힌 선천개벽시대의 몰락과 후천개벽시대의 시작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사람을 세상의 근본으로 보는 인본(人本)과 평등, 상생의 가르침도 여타 신종교의 모범이 되어 각자 그의 가르침을 극복하거나 이어받아 교리를 세워 갔다. 한마디로 최제우의 가르침은 근대정신의 정형이 된 것이다. 천도교의 기본 경전인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용담유사(龍潭遺詞)는 최제우가 직접 지은 것이다. 동경대전은 한문체로 적은 경전이다. 종교 체험과 한울님과 만남의 과정을 적은 포덕문(布德文), 수행의 요체인 주문의 해석과 무극대도의 종교임을 밝힌 논학문(論學文), 도를 닦음에 지켜야 할 법도를 적은 수덕문(修德文), 철학적 탐구를 편 불연기연(不然其然)의 4편으로 그의 사상과 수행의 도리를 밝히고 있다. 당시는 교육받은 유학자만 한문을 읽을 수 있던 때라 동경대전이 식자층을 대상으로 했음을 알 수 있다. 내용들이 비교적 체계적으로 저술돼 있고 철학적·종교적 깊이가 있어 그가 상당히 오랫동안 당대의 문제와 해결책을 고심하고 있었다는 점을 느끼게 된다. 수운 최제우가 지은 용담유사의 한글 가사.용담유사에는 한글 가사체 8편이 실려 있다. 아내를 위해 지은 안심가(安心歌), 자녀와 조카를 위해 지은 교훈가(敎訓歌) 등 누구나 쉽게 읽어 깨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피상적으로 세상을 구원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 곁의 사람부터 마음을 일깨우고 삶을 바꿀 수 있도록 호소한 것이 독특하다. 천도교가 후에 남녀평등에 앞장서고 소파 방정환을 내세워 어린이운동을 이끈 것도 교조의 이런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 한마디로 일찍부터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언어와 가르침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연세대 사회과학연구소 오문환 박사는 “최제우의 하늘이란 종교적인 대상인 동시에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세상”이므로 시천주(侍天主)의 가르침으로 하늘을 모시는 일은 “세상의 사람을 모시는 것과 다르지 않아서 종교와 사회와 역사가 따로 떨어질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의 가르침이 종교에 국한되지 않고 적극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변혁의 가르침이 된 것은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2세 교조 해월 최시형은 더 나아가 “사람이 하늘이어야 한다”고 절규했다. 1918년 조선총독부는 천도교인 수를 14만8000여 명으로 파악했다. 동학혁명의 좌절과 국권의 침탈에도 불구하고 교세는 여전히 꺾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3·1운동 이후 천도교는 내부로 눈을 돌려 교역자 양성과 교육에 나섰다. 미주에서 독립운동 관련 소식을 전하던 신한민보는 1922년 3월 23일자 기사에 천도교 종학원 설치 소식을 상세히 싣고 있다. 천도교가 ‘시대의 변천과 인문의 발달에 순응’하고 ‘종법사와 포덕사를 양성하기 위해’ 종학원을 설립했다는 것이다. 교육연한은 예과 1년에 본과 3년으로 따로 속성과 1년을 두고 있었다. 천도교 교리와 세계 종교사를 비롯하여 철학, 외국어, 수학, 역사, 심리학 등 고등교육 전반을 가르치고 있었다. 손병희는 전국에 수백 곳의 종학원을 세웠다. 세상을 바꾸는 개벽의 길을 교육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천도교는 주목할 만한 잡지들을 창간하여 교리를 널리 펼쳤다. 1906년 일간지 만세보(萬歲報), 1910년 천도교월보, 1920년 월간지 개벽(開闢), 1922년 월간지 부인(婦人), 1923년 월간지 어린이, 1926년 월간지 신인간(新人間) 등 일제하 언론사(史)에 주목할 만한 잡지를 두루 출판했다. 일간지 만세보·월간지 개벽 펴내 특히 개벽은 1926년 일제가 강제 폐간할 때까지 잡지의 왕으로 불릴 만큼 대중적인 인기가 높았다. 김일성은 그의 자서전 ‘세기와 더불어’에서 10대 시절 잡지 개벽을 통해 “동학의 교리를 이론적이고 철학적으로 접할 수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천도교는 일제하에 혁신적인 방법으로 대중을 이끄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최제우의 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의 가르침이 종교적으로나 철학적으로 지금도 낡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천도교를 상징하는 주문인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에는 분열로 대표되는 현대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가 담겨 있다고 주목한다. 오문환 박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시천주 안에는 창조의 존재와 변화시키는 기운이 합해진다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 근대에 와서 인간과 자연이 분열되고 영성과 인간성이 동떨어져 혼돈을 겪고 있다. 그러나 최제우는 이것이 결코 나눌 수 없는 것임을 일깨웠다.” 수운 최제우의 가르침은 세상의 조화와 변화 속에 계속 혁신된다는 것이다. 내 안의 하늘을 모시고, 마음속의 신성과 영성을 깨달아 자연과 우주의 기운을 회복하는 과정이 후천개벽이라는 해석은 천도교가 아직도 진행 중인 오늘의 종교임을 일깨운다. 김천
[한국의 창종자들]해월 최시형 2대 교조로 인정받다(2008. 07. 24)
2008. 07. 24 정치
최제우 가르침 모아 경전인 동경대전·용담유사 펴내 (왼쪽)동학의 제2대 교조 해월 최시형, 동학의 제3대 교조 의암 손병희. 동학을 세운 수운 최제우는 무정한 시대에 개벽의 횃불을 들었다. 자신들의 권력과 유교적 질서를 지키는 것조차 힘들었던 구한말의 정권은 어둠 속에 감춰둔 학정과 세상의 한탄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웠다. 세상을 어지럽혔다는 혹세무민(惑世誣民)과 좌도난정률(左道亂正律)의 죄목으로 최제우의 목을 베어 돌아선 민심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옛 세상은 끝났고 새 시대가 온다는 그의 가르침은 이미 사람들의 마음에 뿌리를 박고 있었다. 최제우의 순교 이후 조정의 기대와 달리 교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최제우의 횃불을 세상을 불태운 들불로 만든 것은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 1827~1898)과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 1861∼1922)다. 최시형의 본명은 최경상. 후일 동학의 교조가 된 후 “도(道)는 용시용활(用時用活)하니 때와 짝하여 나가지 않으면 죽은 물건과 같다”면서 “이 뜻을 후세 만대에 보이기 위하여 스스로 이름을 고치겠노라”고 이름을 시형으로 바꾸었다. 그도 경주 사람으로 최제우처럼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머슴살이부터 온갖 어려운 일을 다 겪었다. 백범 김구도 해주서 교인으로 그는 최제우의 득도 소식을 듣고 곧바로 달려가 제자가 되어 해월(海月)이라는 호를 받았다. 철저한 수련으로 곧바로 종교적 신비를 체험하고 열렬히 수행하여 일찍부터 교조의 인정을 받았다. 곧 닥칠 박해를 예감한 최제우는 최시형에게 교통을 전했다. “오늘부터 도운(道運)이 그대에게 돌아가고 도법(道法)이 그대에게 전해졌으니 힘써 나의 마음을 어기지 말라”는 말로 제2대 교조의 일을 맡긴 것이다. 삼엄한 감시와 박해 속에서 최시형이 한 일은 교조의 가르침을 정리해서 펴는 일이었다. 1880년부터 최제우의 가르침과 저술을 모아 동학 경전인 동경대전(東經大典)과 용담유사(龍潭遺詞)를 곳곳에서 찍어 펴냈다. 동학은 세상의 소문이 아니라 경전 속의 가르침으로 세상에 다가서게 됐다. 최시형이 교조로서 처음 행한 설법은 신분의 귀천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한울이라 평등이요 차별이 없나니 사람이 인위로서 귀천을 가리는 것은 한울님 뜻에 어긋나리라”고 했다. 나라 밖은 이미 변해가고 있었지만 조선의 위정자는 외면하고 있던 시대의 흐름이었다. 연세대 사회과학연구소 오문환 박사는 “동학은 세상의 흐름과 함께 간다는 가르침을 내세웠으니, 도(道)란 시대 상황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역사와 함께 나가는 것임을 주장하고 실천했다”며 최시형은 현실과 종교를 밀착시킨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종교가 세상 한복판으로 나아가 사람들의 아픈 삶을 직접 구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시형은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보은에 숨어 소리 없는 포교를 계속해갔다. 뜻을 가진 이들이 속속 동학에 입교하니 그 무렵 백범 김구도 해주에서 교인이 됐다. 19세의 김구는 1983년 보은으로 최시형을 찾아가 팔봉 접주의 첩지를 받았다. 한 해 뒤 그는 농민군의 선봉으로 해주성 공략에 앞장선다. 최시형도 순교… 손병희가 뒤이어 농민혁명 직전은 동학의 최고 전성기였다. 전국 곳곳에 신도 조직인 포와 접이 조직해 있었고 무엇보다 민심을 돌려놓았다. 각지에서 수십 명에서 100명씩 지방관청에 몰려가 탄원서를 내고 있었다. 천도교 경전인 동경대전의 목판. 구한말의 역사를 기록한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은 그들이 대궐에까지 몰려온 정황을 적고 있다. “죽은 최제우의 죄를 씻어주기 위해 2월 중 대궐 앞에 수천 명이 엎드려 상소했다. 성균관 유생들은 먼저 성토해야 한다는 여론을 내고, 그들을 다 처형하여 난을 방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현과 같은 유학자들은 동학을 교조의 신원을 내세우는 혹세무민의 무리로 낮추어 보고 있었다. 그러나 상소의 핵심은 ‘탐관오리의 화를 입어 죽어 나가는 사람이 그치지 않으니 조정은 도탄에 빠진 민정을 공평히 살펴 헤아려주기 바란다’는 민초들의 요구였다. 상소 끝에 돌아온 대답은 오히려 동학을 금하며 수괴를 잡으라는 명령이었다. 최시형은 이에 맞서 폭정으로부터 민중을 구하고 외세를 물리칠 것을 부르짖어 팔도 교도의 소집을 요청했다. 수만 명이 보은에 모여 돌로 성을 쌓고 관과 맞섰다. 결국 농민군의 봉기가 일어나자 정부와 유생, 일본과 청나라, 외세와 수구세력이 한편이 되어 혁명의 싹을 밟아버렸다. 갑오년인 1894년 최시형은 체포되어 교수형을 당했다. 그의 나이 72세였다. 죄명은 동학의 수괴. 이미 통령 신분으로 농민군을 이끌었던 의암 손병희는 그의 뒤를 이어 제3대 교조가 된다. 손병희는 박해를 피해 일본으로 망명해 있었다. 본디 미국으로 가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일본에 머물며 오세창·박영효 등의 망명객과 교류하며 지냈다. 손병희가 본 것은 근대 개혁의 영향과 시대의 변화였다. 결국 종교와 정치사상의 민주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며 동학의 자기 변신을 준비하고 있었다. 손병희는 망명 중에도 여러 차례 국정의 개혁을 요구했다. 그는 주권이 민중에게 있어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가야 함을 주장했다. 천심이 민심에 있다는 동학의 가르침은 그에 이르러 구체화된다. 서울대 종교학과 김종서 교수는 동학의 지도자에 따른 하늘관의 변화를 이렇게 설명했다. “수운 최제우가 말한 것은 시천주(侍天主), 즉 하늘을 모시자는 것입니다. 최시형은 양천주(養天主), 우리 안의 하늘을 길러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손병희에 이르러 인내천(人乃天), 즉 사람이 하늘이라는 메시지가 드러납니다. 손병희가 일본에서 민주주의와 평등주의를 경험한 것이 교리에 드러난 것입니다.” 점점 하늘을 대하는 행위가 적극적으로 변해갔다는 것이다. 을사늑약으로 나라를 빼앗기자 손병희는 1905년 12월 1일 동학의 교명을 천도교(天道敎)로 바꿨다. 동학교도가 기반이 된 진보회를 일진회가 흡수하여 친일에 나서자 세간에는 동학이 친일에 앞장선다는 원성이 자자했던 것도 큰 이유가 됐다. 손병희는 서울에 중앙총부를 세우고 교세의 복원을 서둘렀다. 일진회의 수장이던 이용구 등을 출교하여 친일세력과 일정한 획을 그었다. 교구조직을 정비하며 교조가 한울님에게서 받은 궁을기(弓乙旗)를 상징으로 내세우고, 일요일을 시일로 삼아 의례를 체계화했다. 손병희의 천도교는 안팎의 개혁을 이끌며 또 다른 민심과 천심의 폭발을 예비하고 있었다. 1919년 3·1운동을 준비하고 전국에서 조직적인 시위에 나선 것도 천도교인들이었다. 천도교는 줄곧 현실 개혁과 종교의 갈림길에서 고심했다. 김천
[한국의 창종자들]동학은 근세 민족종교의 시발점(2008. 07. 17)
2008. 07. 17 사회
혁명의 실천에서, 사회운동과 문화·정치·이념에까지 영향 수운이 수행하고 득도한 경주 용담정. 정자는 최근 새로 복원했다. 천도교를 낳은 동학(東學)은 근세 민족종교의 시발점이다. 종교적 가르침을 넘어 때로는 혁명의 실천으로, 때로는 사회운동과 문화에 이어 정치와 이념에 이르기까지 근현대사의 구석구석에 동학과 천도교의 영향은 뿌리가 깊다. 동학을 세운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1824∼1863)는 경주 인근 몰락한 양반의 늦둥이로 세상에 났다. 어릴 적 이름은 복술이, 본명은 제선(濟宣)이고 자는 도언(道彦)이다. 그는 자신의 시대만큼 불우한 삶을 살았다. 여섯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열일곱 살에 아버지를 잃었으며, 스무 살 때 얼마 되지 않은 가산마저 모두 불에 타버렸다. 이듬해 가족을 처가에 맡기고 행상으로 전국을 유랑했다. 10년을 떠돌며 그가 본 것은 길 잃은 조선의 절망이었다. 그는 몽중노소문답가(夢中老少問答歌)에서 “임금과 신하와 아비와 자식이 제 도리를 하지 못하는” 시대에 팔도를 다 돌아봐도 “혹은 궁궁촌을 찾아가고 혹은 만첩산중에 들어가고 혹은 서학에 입도”하여 서로 옳다 주장하지만 맞지 않음을 느꼈다고 적고 있다. 체제의 모순은 극에 달했고 무력을 앞세운 서양 세력이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현실 속에 국가는 이미 붕괴 직전인 위태로운 현실을 절감했다. 사람들은 각자 살길을 찾아 옛 예언서를 들고 우왕좌왕하거나 서학(西學)인 천주교에 귀의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세상은 마음 둘 곳을 잃어버렸다. 유랑을 끝낸 그는 처가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한동안 조용히 지냈다. 일상 중에 몇 차례 종교적 신비를 체험하자 본격적인 종교 수련에 나서기로 했다. 비몽사몽간에 금강산에서 왔다는 승려에게 49일 동안 기도하라는 말을 듣고 난 후다. 해를 넘겨 서른세 살에 양산 통도사 내원암에서 수도의 길에 발을 내딛고, 이듬해 산 속 동굴에서 49일 동안 간절한 기도를 마쳤다. 최제우, 경주 인근 몰락 양반가 늦둥이 수운 최제우 초상. 이후 가족을 이끌고 다시 고향마을 용담으로 돌아갔다. 불타버린 집 대신 부친이 세운 용담정 정자에 머물며 도를 얻지 못하면 세상에 나가지 않을 것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때까지 쓰던 제선이란 이름을 버리고 수운(水雲)이란 호를 짓고 제우(濟愚)로 이름을 고쳤다. 용담정에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셈이다. 1860년 4월 최제우는 기도와 명상 속에서 드디어 한울님을 만났다. 한울님은 “나의 마음은 너의 마음(吾心卽汝心)”이라는 진리를 들려주었다. 줄곧 찾아나섰던 구세와 구원의 길이 시작됐다. 비로소 ‘사람이 하늘(人乃天)’이며 ‘천심이 곧 인심(天心卽人心)’이라는 새로운 가치와 깨달음이 그의 마음속에서 드러난 것이다. 서울대 종교학과 윤이흠 명예교수는 최제우의 자각이 갖는 의미를 “동양정신사의 일대 전환”이라고 지적한다. “유교나 불교와 같은 동양의 전통적인 세계관이 지배하던 시기가 지나갔고 서양의 종교가 지배하는 것도 아니며 그야말로 새로운 길의 시작을 알린 것입니다. 장엄한 개벽의 새 시대가 오는 것을 예측하고 그 대응으로 최제우는 동학을 제시했습니다.” 여자종을 면천시켜 수양딸로 삼아 모든 것이 끝장나기를 바라던 고통의 세월은 선천개벽의 시대로 막을 내리고, 지상천국이 이루어지는 후천개벽의 시대가 시작됐으니 이는 최제우 자신이 얻은 도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도를 “지금도 들어보지 못하고 옛날에도 들어보지 못한” 무극대도(無極大道)라 표현했다. 남존여비 반상차별의 유교체제와 달리 그의 도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한 존재였다. 깨친 지 1년이 지나자 아내인 박씨에게 처음으로 도를 권했다. 집안의 여자종을 면천시켜 수양딸과 며느리를 삼으니 주변의 관심이 쏠렸다. 소문을 듣고 사방에서 가르침을 구하려고 몰려들었다. 후에 동학 2대 교조가 된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도 그 무렵 용담을 찾아와 제자가 됐다. 새 시대를 갈망하던 민심이 그를 주목하자 기득권층과 유생들은 당연히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여기저기서 비난이 빗발치자 그는 전라도 남원의 작은 암자 덕밀암으로 몸을 피한다. 조용히 경전을 저술하여 자신이 얻은 바를 정리하는 시간을 맞았다. 당시 세상의 의심은 그의 가르침이 천주를 섬기는 서학과 상통한다는 것이다. 최제우는 ‘권학문(勸學文)’을 지어 자신의 도를 ‘동학(東學)’이라고 밝혔다. “내가 또한 동방에서 태어나 동방에서 도를 얻었기에 도는 비록 천도이나 학은 동학이다(道雖天道 學則東學).” ‘무극대도’는 비로소 ‘동학’이라는 이름을 얻어 세상 속으로 번지고 있었다. 이때 그의 행적 중에 주목할 만한 것은 칼을 노래하는 ‘검가(劍歌)’를 짓고 칼춤을 추었다는 사실이다. 칼춤은 동학의 수도 방법으로도 널리 퍼졌다고 전한다. 경상감사 서헌순은 동학에 대한 동태를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하루는 ‘요사이 바다 위에 배로 오고 가고 하는 것은 모두 서양인들인데 칼춤이 아니고는 제어할 수 없을 것이다’라며 검가 한 편을 주었습니다.” 최제우는 남원 교룡산성에서 반 년 정도를 머물다가 해를 넘겨 경주로 돌아갔지만 분란과 체포가 기다리고 있었다. 교인이 점차 늘자 독창적인 신도 조직을 만드니 접(接)이라는 체계다. 도를 전한 사람이 접주(接主)가 되어 신앙조직인 접을 이끌어가고 후일 동학농민혁명 때는 접을 묶어 포(包)라는 조직을 만든다. 들불처럼 번지는 세력과 조직은 체제를 위협하는 불온세력으로 의심받기에 충분했다. 각지의 유생이 나서서 탄원하자 드디어 관이 나섰다. 조정의 명을 받은 선전관 정운구는 동학을 조사하러 경주로 향했다. 정운구는 왕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문경새재를 지나 경주까지 이르는 고을마다 동학 이야기와 주문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적고 있다. 선전관이 올 것을 알고 신도들이 수운에게 피할 것을 권하자 그는 “도가 나에게서 나왔으니 내 스스로 당할 것이다. 어찌 몸을 피하여 그대들에게 누를 미치게 하겠는가”라는 말을 남겨 닥칠 운명을 기다렸다고 전한다. 용담에서 최제우와 23인의 신자가 체포됐다. 고종시대사 1집에 나온 1864년 3월 2일자 기사에는 승정원 일기와 고종실록을 참조하여 ‘동학교조 최제우의 목을 베고’라는 기사에 “최제우 등은 서양의 술수를 따라 명목을 옮겨 어리석은 백성을 현혹함으로써 황건적과 백련적과 같은 류라 하여 경중에 따라 처리하였다”고 적었다. 망해가는 국운을 앞두고 허약한 왕조는 동학과 최제우를 종교를 빙자하여 나라를 전복하려는 반란의 무리로 파악한 것이다. 그의 가르침은 그만큼 두렵게 다가오고 있었다. 곧 새 세상이 온다는 개벽의 예언을 남기고 깨달아 도를 편 지 4년 만에 최제우는 세상을 떴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을 좇아 열렬히 세상을 바꾸려 한 동학의 교도들은 순교를 피하지 않고 줄을 이었다. 김천
[한국의 창종자들]창종 100주년 앞두고 새 도약 준비(2008. 07. 10)
2008. 07. 10 문화/과학
원불교 소태산 박중빈④ 포교와 사회사업 집중… 원음방송 세우고 군종장교 배출 현재 원불교를 이끌고 있는 제5대 종법사 경산 장응철 종사. 전국 520개 교당, 해외 19개국 60개 교당, 현직 성직자 1500명, 입교자 70만 명, 2005년 통계청 인구조사 원불교 응답자 13만 명. 창종 93주년이 된 원불교의 현재 모습이다. 원불교가 지나온 역정을 살펴보면 큰 영광도 없고 큰 좌절도 없다. 소리 소문 없이 일하고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가고 있다. 원불교는 창종 100주년을 앞두고 올해부터 7년 동안을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정했다. 2년 전 원불교의 수장을 맡은 경산 장응철(耕山 張應哲) 종법사는 무엇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체제와 제도의 개혁에 힘을 모으겠다고 밝혔다. 원불교를 적극 포교하고 신앙생활에 힘을 기울이며 어려운 이웃을 위해 종교적 실천에 앞설 것을 권했다. 포교와 사회사업에 힘을 집중하여 활로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교단의 내적으로는 창립 정신으로 돌아가 원불교적인 문화를 만들어가자고 강조한다. 어린이집 등 복지기관 184곳 운영 앞서 종법사를 맡았던 좌산 이광정(左山 李廣淨) 종사가 내세웠던 기치가 ‘밖으로 미래로 사회로 세계로’였던 점과 많은 부분에서 대비된다. 좌산 종사는 6년 임기의 종법사를 두 번 연임하면서 원불교의 대외적인 위상을 높였다고 평가받고 있으며, 원음방송을 세우고 원불교 교무의 군종장교 진출을 성사시켰다. 원음방송은 총부가 있는 익산과 서울, 부산에 이어 올해부터 광주에서 방송을 시작했고 대구에서 개국을 준비하고 있다. “원불교가 군소 종단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방송과 군종장교를 성사시켜야 한다”는 것이 좌산 종사의 강렬한 의지였다. 결국 꿈을 세운 지 20년 만에 방송국을 설립하는 데 성공했고, 원불교만의 특색 있는 전파를 발사한 지 10년이 지났다. 원음방송은 진행자를 비롯해 방송 제작 대부분을 교역자인 교무(敎務)들이 전담하고 있어 종교방송의 특징이 두드러진다. 원불교역사박물관에 모신 소태산 박중빈 좌상. 원불교는 여성 교역자의 비중이 크다. 전체 교역자 중 정녀(貞女) 비율은 60% 정도이며 교화 현장에서는 80% 정도를 차지한다. 이들은 초기부터 절대적인 헌신으로 교단의 발전과 안정을 이끌었다. 변화된 시대 상황은 여성 교역자들이 개혁을 이끄는 역할에 나서도록 한다. 흰 저고리에 검정치마, 쪽진 머리의 전통적인 정녀의 모습도 변화의 요구를 맞고 있다. 발단은 미국 포교 현장에서 시작됐다. 동양의 전통적인 모습은 이국적인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평등이라는 원불교의 가치를 전하는 데 장애가 됐다. 결국 현장 정녀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머리를 자르고 눈에 띄지 않는 옷으로 바꿔 입도록 했다. 3년의 실험기간이 끝나가자 복식을 원위치해야 한다는 교단 원로들의 보수적인 주장과 변화를 인정해달라는 요구가 격론을 벌이고 있다. 원불교는 매년 9월 출가교화단총단회라는 이름으로 전체 교역자가 모여 현안을 논의한다. 제도 개선이나 복식 문제 등 민감한 사안을 주제로 삼아 1박 2일 동안 토론하고 교단 전체의 방향을 정해가는 것이다. 제시된 의견을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수위단 회의에 올리면 투표로 결정하는 방식이다. 원불교가 초기부터 주력한 것은 사회사업이다. 서울대 종교학과 윤이흠 명예교수는 “새로운 시대를 맞자는 원불교의 이념은 개벽의 실천으로 사회운동에 주목했고, 민족종교 중에서 특히 사회 개발에 헌신한 특성이 두드러진다”면서 “다른 민족종교가 항일에 나섰다가 급격히 탄압받은 데 비해 사회운동에 전력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박해를 피해가는 원인이 됐다”고 평가했다. 저축조합과 간척사업, 양잠운동과 선농일치의 농업활동 등 사회운동적인 원불교의 활동은 해방 이후 적극적인 사회구제와 교육사업으로 이어졌다. 원불교에서 운영하는 교육기관은 20개, 어린이집 150개를 비롯해 전체 184개의 복지기관이 있다. 전국 14개에 이르는 노인복지법인은 한 곳에서 수용과 치료, 요양보호사 교육까지 모두 이루어진다. 원불교의 교세에 비하면 과할 정도로 복지기관을 운영하고 있어 종교가 사회를 위해 실천해야 할 역할을 보여준다. 시국대법회 통해 사회적 관심 동참 교육사업은 교단 초기부터 힘을 모은 영역이다. 원광대를 비롯해 6곳의 중·고등학교와 교당마다 운영하는 유치원, 기타 교육기관 등 인재 양성과 교육은 원불교의 역량을 보여주는 또 다른 분야다. 교육기관 중 특히 주목할 곳은 8개의 대안학교다. 원불교의 영산 성지고등학교는 국내 최초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대안학교로 교육계의 눈길을 끄는 곳이다. 인성교육을 목표로 제3의 교육을 제시하고 모범적으로 이끌고 있다는 것이 전반적인 평가다. 일례로, 원불교는 탈북 청소년을 교육하기 위해 안성 한겨레중·고등학교의 운영을 맡고 있다. 탄탄한 활동에 비추어 밖으로 드러난 원불교의 분위기는 보수적이고 은둔적이다. 지난 10년 동안 원불교의 교세는 크게 늘지 않았다. 그야말로 정체기인 것이다. 원불교 중앙총부 나상호 기획실장은 전망이 나쁘지만은 않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일단 원불교의 의사결정 과정이 민주적인 만큼 복잡합니다. 규모에 비해 조직이 방만한 면도 있고 예산 집행도 중복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당장은 힘들더라도 교단 내부에서 공감하고 있는 부분부터 차근차근 조정해나갈 것입니다. 소태산 대종사가 행한 대로 교육·교화·자선에 힘쓰면서 시대에 맞춰간다면 원불교 진리의 가르침을 널리 펼 수 있을 것입니다.” 6월 8일 오후 6시 서울시청광장에 300여 명의 원불교 교무와 2000여 명의 신도가 모인다. ‘국민주권회복과 평화를 위한 원불교 시국대법회’를 위해서다. 좀처럼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원불교 교무들이지만 사회적 관심에 적극 동참하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 원불교 내부에도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과 같은 성격의 단체가 있다. 사회개벽교무단이다. 그들은 1987년부터 통일과 평화, 생명운동의 현장을 묵묵히 지키고 있다. “종교는 반드시 평화와 생명 존중과 인간의 가치에 대해 나서서 대답해야 합니다. 원불교의 사명은 평화와 생명과 은혜입니다. 그것을 현실에서 이끌기 위해 나설 때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갈등과 폭력이 가득할 때 폭력을 멈추고 꽃을 들게 하는 것이 종교의 힘입니다.” 원불교 사회개벽교무단 정상덕 교무의 이야기다.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의 대각 이후 10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끊어지지 않고 흘러온 법맥이 발전과 쇠락의 기로에 서 있다. 원불교 교단은 다시 개교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한 세기 전처럼 지금도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기치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를 앞둔 정신의 개벽은 과연 어떤 것인지 자신과 세상을 향해 진지한 질문을 던질 때다. 김천 mindtemple@gmail.com
[한국의 창종자들]“불법이 생활이고 생활이 불법이다”(2008. 07. 03)
2008. 07. 03 문화/과학
원불교 소태산 박중빈③ 교리와 경전에 담긴 핵심, 이론 중심 떠나 현실적인 실천 행동 강조 1924년 전라북도 익산군 북일면 신룡리(현 익산시 신룡동)에 세워진 원불교 총본산에서 소태산 박중빈 종사가 종무를 보던 집무실. 한 개인의 각성은 교리와 조직과 의식을 더하면서 종교로 발전한다. 원불교는 비교적 일찍부터 교리를 체계화하고 성직자 조직을 갖추는 데 성공했다. 소태산 박중빈과 함께 초기 교단을 만든 아홉 명의 제자는 각자 일산(一山)부터 팔산(八山)과 정산(鼎山)이라는 법호를 얻었다. 초기 교단은 이들에서 비롯되고, 이로써 교리의 기본과 교단의 역사가 시작된다. 원불교의 교의를 담은 기본 경전은 교전(敎典)이다. 교전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정전과, 소태산의 언행을 모으고 초기 제자들의 해석을 담은 대종경(大宗經)으로 이루어졌다. 정전은 소태산이 직접 지은 것이다. 총독부가 출간을 저지하자 불교정전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간행했다. 교전을 기본으로 불교경전을 모은 불조요경과 원불교예전, 정산종사법어, 원불교교사 등을 합하여 7종교서 혹은 9종교서를 기본 교과서로 삼는다. 교단 초기부터 여성 교역자 양성 원불교대학원대학교 원불교학과 박희종 교수는 원불교 교리와 경전에 담긴 핵심 가치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원불교는 이론 중심을 떠나 현실적인 실천 행동을 강조합니다. ‘불법시생활(佛法是生活), 생활시불법(生活是佛法)’, 즉 불법이 생활이고 생활이 불법이라는 대종사의 가르침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회와 소통하는 종교의 모습으로 구체화되어 발전해갑니다.” 종교적 허례보다는 실제 생활을 바꾸어가는 것이 원불교의 지향점이라는 것이다. 소태산은 개벽(開闢)을 내세우며 종교를 세웠다. 당시 동학과 증산의 가르침, 천도교 등에서도 개벽을 주장하고 있었다. 실제로 세상이 뒤집어지고 모든 질서가 재편되는 사회혁명적인 후천 세계를 기다렸지만 현실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상황이 지속되어 가난과 억압이 이어지고 있었다. 한국종교학회 김탁 박사는 소태산의 개벽은 당시 팽배하던 개벽관과 양상을 달리한다고 지적한다. “개벽이 이루어진 새세상이 곧 온다는 주장에 민중들의 기대감이 커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언이 실패하고 좌절이 깊어진 상황에서 소태산은 개벽의 성격을 달리 규정했습니다. 세상의 변혁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개벽으로 보고 이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벽은 갑자기 닥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애써서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원불교의 가르침입니다. 소태산 박중빈이 직접 지은 불교정전. 원불교는 교역에 전념하는 출가자를 전무출신(專務出身)이라고 한다. 그중 여성교역자는 원불교 교단이 정착하는 데 비교적 큰 힘이 되었다. 당시 시대상은 남녀불평등이 극에 달한 때였다. 원불교에 앞선 천도교 등도 남녀평등을 주장했으나 여성이 실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것에 비하면 원불교는 교단 초기부터 여성 교역자를 적극 양성했다. 원불교 여성 교역자는 정녀(貞女), 즉 정절을 서약한 여성이다. 이들은 익산총부가 생기면서 낮에는 고무공장 노동자로 일하고 밤에는 교리공부를 하며 초기 교단을 이룬 주인공이다. 1920년 소태산이 주요 교리로 발표한 사요(四要) 중 첫 번째는 남녀권리동일의 조항이다. 남녀는 모두 자체로서 일원의 성품을 갖추고 있으므로 동등하다는 것이다. 그는 남녀가 동등하지 못하고 서로 의존적인 것이 세상의 병 중 하나라고 보았다. “나는 남녀권리동일 과목을 내어 남녀에게 교육도 같이 시키고 의무 책임도 같이 지우며 지위나 권리도 같이 주어서 서로 자신의 힘을 장려한다.” 선언적인 의미뿐 아니라 교단의 실제 운영에도 남녀권리동일이 반영됐다. 소태산이 제정한 교단규약에는 최고의사결정기구로 수위단(首位團)을 두는 데 남녀 동수로 구성했다. 교단제도부터 남녀평등제로 확고히 만들어간 것이다. 미주선학대학원 세워 포교 세계화 여성 교역자들은 5년에 한 차례씩 정녀선서라는 독신선언을 하고 있다. 2001년 11월 정녀선서를 앞둔 교무 64명 중 31명이 선언을 거부했다. 여성에게만 선서를 강요하는 것은 명백한 남녀 차별이라는 것이다. 원불교 여성회 한지현 회장은 정녀선서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철저한 양성평등이 교조의 교리입니다. 원래의 교리에는 정녀선서가 없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일정 기간이 지나면 마음을 다잡고 결심하는 의미로 정녀선서를 하는 것이 관례가 된 것입니다.” 남성 교역자의 90%가 결혼을 한 현실에서 여성에게만 정절을 강요하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다는 문제 제기다. 그러나 정녀들의 선언 거부는 찻잔 속의 태풍으로 그치고 말았다. 원불교는 교단의 주요 사항을 수위단 회의에서 논의하여 결정한다. 교역자로 구성된 정수위단은 남녀 각 9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재가자는 남녀 4명씩으로 호법수위단을 구성해 교단 운영에 참가한다. 정녀의 선언 거부는 원불교 개혁의 한 지표로 사회적인 주목을 받았지만 정작 교단 내에서는 논의가 없었다. 수위단 회의에 상정하면 결정해야 하는데 아직은 거론 자체가 시기상조라는 것이다. 원불교의 집단적인 의사 결정은 민주적이고 이상적이지만 한편에서는 추진력이 떨어진다는 비판도 있다. 종교 조직의 특성상 시간이 지나면서 활력을 잃고 현실에 안주한다는 지적도 받는다. 사회가 안정되면서 원불교가 초창기에 가지고 있던 혁신적인 동력을 잃었다는 자성도 나오고 있다. 소태산의 창교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내부의 목소리도 점차 커지고 있다. 나 없이 모든 이를 위해 헌신하자는 무아봉공(無我捧供), 작은 것으로써 큰 것을 이룬다는 이소성대(以小成大), 여한 없이 행한다는 사무여한(事無餘恨)의 근본정신이 옅어지면서 교단이 정체됐다는 반성이다.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윤이흠 명예교수는 최근 원불교 학자들이 교리에 대해 새로운 정립을 모색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새로운 발전의 전거를 마련하기 위해 젊은 학자들은 불교적인 모습에 더 주목하자고 주장합니다. 그 이전 세대는 원불교만의 독창적인 부분이 더 강하므로 그것을 더 살펴봐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지금 학자들 사이에서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치열한 자기 점검의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원불교의 주된 교리를 연구 교육하고 교역자를 양성하는 기관은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와 영산선학대학, 원불교대학원대학이 있다. 최근 들어 원불교의 세계화를 내걸고 미국 펜실베이니아에 미주선학대학원을 세웠다. 미주 지역에 교역자 양성의 기반을 만들어 국제 포교 활성화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개벽이 외부에서 갑자기 닥치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준비되고 만들어지는 것인 것처럼 원불교의 활로도 안으로부터 시작될 전망이다. 건강한 집단이라면 구성원의 고뇌와 문제 제기가 거듭될수록 자기 한계를 뛰어넘는 힘은 더 강해지기 때문이다. 김천 mindtem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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