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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병대 전문작가 김환기에게 듣는 스타 현빈, 해병 김태평
- 2011. 08. 29 17:05 화제
- 지난해 말 연평도 포격 사건을 시작으로 총기 난사 사건, 그리고 현빈의 해병대 입대까지. 근래만큼 해병대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던 적이 없는 것 같다. 3년 동안 포항과 김포, 서해 5도를 돌며 해병대를 취재해온 김환기 작가와 함께 해병대의 속살을 들여다봤다. 모두가 그리워하는 남자, 현빈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우리가 해병대에 대해 오해하는 것 보통의 20대 여자가 그렇듯 기자 역시 군대에 크게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특히나 해병대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던 와중 지난 7월 해병대 내에서 일어난 총기 사건을 취재하며 해병대 관계자들을 만나게 됐는데 당시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해병대가 나쁜 곳이 아니다”라고 입을 모았다. 연이어 발생한 해병대 내 사건사고로 해병대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악화될 대로 악화된 때였으니 해병대 출신으로서 억울할 만도 하겠다 싶었다. 비(非) 해병대 출신인 김환기 작가 역시 “해병대는 나쁜 곳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지난 3년간 해병대를 ‘들락거리며’ 수많은 해병대 젊은이들을 만나온 그는 사람들이 최근 일어난 단편적인 사건만으로 해병대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가지고 있는 것을 우려했다. “꽤 많은 해병대 부대를 다녀봤지만 문제가 있어 보이는 병사나 이미 문제를 일으킨 병사는 찾아보기 힘들었어요. 물론 저는 외부 사람이었고 제가 보는 것만으로 해병대 전체를 규정지을 수 없지만 최근의 뉴스 보도나 인식은 분명 침소봉대된 면이 있다고 봐요.” 보통 막연하게 해병대는 힘든 곳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해병대원들이 얼마나 힘든 훈련을 받고 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해병대는 특수부대가 아니다. 하지만 그에 버금가는 강도의 훈련을 받는다. 보통의 군대와는 다르게 병사들을 직업군인처럼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곳이기 때문에 병사들이 감내해야 하는 고통은 굉장히 크다. 자원을 해서 온다고는 하지만 그리 많지 않은 선택지 중에 골라서 온 의무병들이다.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훈련병들이 고된 훈련을 이겨내는 것을 보면 기특할 때가 많다. “요즘 신세대들을 보고 정신력이 약하다는 얘기를 많이 하잖아요. 해병대에서 훈련하는걸 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힘든 훈련을 받고도 이내 밝은 표정을 지어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젊음의 에너지가 느껴지죠. 힘들 땐 힘들더라도 끝나면 금방 잊더라고요. 보고 있으면 보는 사람까지 젊어지는 기분이에요.” 전원을 지원병으로 모집하는 해병대의 특성상 비교적 적극적인 자세로 군에 입대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무엇이든 익히고 배워서 스스로를 성숙시키겠다는 의지도 강하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힘든 훈련을 기꺼이 참아 내는 건 스스로를 다잡는 의지 자체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땀 흘리고, 더 많이 견뎌야겠다는 선택이자 스스로와 한 약속인 셈이죠. 대한민국의 젊은이로서 해병대에 지원한다는 건 여전히 남다른 선택인 동시에 그 자체로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큼 적극적인 선택이에요.” 그가 지켜본 해병대 1137기 김태평 그런 남다른 선택지를 고른 사람들 중에는 그 자체로 남다른 인물도 있다. 바로 현빈이다. 현빈은 지난 3월 인기 절정의 순간 해병대에 입대했다. 그의 선택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눈과 귀가 해병대로 향해 있는 상태다. 해병대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해병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부쩍 관심이 많아졌다. 그를 입대부터 훈련 과정까지 지켜본 김환기 작가에게 ‘현빈’은 ‘김태평’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다. 본명을 사용하는 군대에서 그는 연예인의 이름을 버리고 서른 살의 청년 김태평으로 돌아갔다. “군대는 사회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해요. 그에게는 곧 대중으로부터 잊혀지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요. 군 입대를 앞둔 많은 남자 연예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이잖아요. 21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자신이 대중으로부터 잊혀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을 법도 한데 오히려 편안해 보였어요. 군대 자체도 중요하지만 제대 후 배우로서의 자기 인생이나 연기에 과연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에 골몰해 있더군요. 일반 군대보다 해병대가 인생 경험을 쌓기에 더 알맞은 곳이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30대 배우로서 재도약을 준비하는 데 외부로부터의 과도한 관심을 차단하고 스스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해병대가 나을 거라는 판단을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가 지켜본 현빈은 입대 이후 시종일관 모범적인 해병의 모습이었다. 동기들보다 늦은 나이에 해병대에 입대했지만 누구보다 잘 적응했고 훈련에도 열성적이었다. 나무랄 데 없는 훈련병이었고 맏형 역할까지 충실하게 해냈다. 훈련 3주 차에 실시되는 사격 테스트에서는 좋은 성적을 거둬 특등 사수가 되기도 했다. 일발필살을 강조하는 해병대에서 특등 사수가 된다는 것은 여간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다. 퇴소식 때는 별도의 포상도 받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자대가 있는 백령도에 간 뒤에도 7, 8세 아래 선임들을 깍듯이 대했고 발목 부상에도 모든 훈련에서 열외를 기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얼마 전까지 대한민국 최고 인기 스타였다는 것이 쉽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적극적이고 모범적이었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다른 훈련병들보다 나이가 많다고는 하지만 서른이면 그리 많은 나이가 아니에요. 나이에 비해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 굉장히 진중했어요. 자기를 끊임없이 계발하고 좋은 쪽으로 향상시키려는 노력형 인간이라는 게 느껴졌죠.” 그는 고된 훈련 속에서도 현빈이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며 혀를 내둘렀다. 악명 높기로 유명한 해병대 훈련이다. 아무리 자기 포장에 능숙한 연예인이라 하더라도 그 상황을 흐트러짐 없이 견뎌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힘든 훈련을 받고 있다가도 누군가 자신을 의식하는 시선이 느껴지면 믿을 수 없는 힘이 솟는 것 같아요. 얼굴 표정이나 눈빛, 자세, 이런 것들이 다른 훈련병들하고는 달라요. 체력이나 정신력이 뛰어난 것도 있겠지만 오랜 연기자 생활로 그런 자세가 몸에 배어 있지 않나 싶더군요. 그런 자세는 분명 그가 가진 장점이에요. 나중에 나이가 든 후에도 자기 중심을 잃지 않고 유지해나갈 기본적인 자질이 엿보였어요.” 칭찬 일색인 듯해 겸연쩍기도 하지만 그것이 그가 가까이서 지켜본 해병대원 김태평의 모습이다. 그는 인상 깊었던 현빈과의 일화를 또 한 가지 소개했다. “해병대 교육훈련단의 총 6주 차 훈련 중 5주 차에는 ‘극기주’ 훈련이 진행돼요. 식사량과 수면 시간을 반으로 줄이고 대신 훈련은 두 배로 늘리는 악명 높은 훈련이죠. 마지막 날 천자봉에 오르는데 그때쯤이면 거의 체력이 바닥난 상태가 돼요. 극한의 정신력으로 버티죠. 천자봉 등정을 마치고 나서 조금 무리해서 현빈씨와 30분 정도 인터뷰를 진행했어요. 밝은 표정으로 인터뷰를 하다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라며 일어나더니 화장실 가는 길에 현빈씨가 그만 기절을 했어요. 그 정도로 힘든데 전혀 티를 내지 않은 거예요. ‘이 사람이 보통 사람은 아니구나’ 싶더라고요. 틀림없이 앞으로의 군 생활도 훌륭하게 잘해낼 거예요.” 일부의 악습으로 해병대 전체 판단하지 말기를 김태평의 자대 사물함. 자대에 온 뒤로 그는 영어와 일어 공부를 시작했다. 해병대를 취재하며 그는 젊은 해병들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게 됐다. 어려움을 긍정적으로 이겨내고 밝게 군 생활을 하는 병사들을 보면서 그도 많은 에너지를 얻었다.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 ‘내가 가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지원했다는 친구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포스트 연평도 세대라는 게 완전히 허구는 아니라는 걸 느꼈죠. 나라가 어려울 때 나 몰라라 도망갈 친구들은 아니구나 싶어서 취재하는 내내 기분이 좋았어요. 나이 든 세대가 요즘 군대 너무 편해졌다고 많이 욕하잖아요. 제가 25년 전에 군대에 다녀왔는데 나는 그때 이 친구들만큼 열심히 했나, 하고 뒤돌아보게 되더군요. 군대가 일정 부분 편해진 면은 있어요. 그렇다고 나약해지거나 해이해진 건 아니라고 봅니다. 긍정적인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그는 최근에 일어난 몇몇 사건으로 해병대 전체를 판단하지 말아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해병대는 가장 군대다운 군대이자 우리나라 현실에서 꼭 필요한 군대예요. 해병대 군인들이야말로 건강하고 진취적인 젊은이들이에요. 일부의 악습을 도려내려는 노력을 조금만 한다면 가장 모범적이면서 가장 필요한 군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측면에서 해병대를 좀 더 입체적이고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계기가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글 / 노정연 기자 ■사진제공 / 원상희, 플래닛 미디어 ■참고서적 /「나는 해병이다」(김환기 저, 플래닛 미디어)>
- 해병대 총기사고로 사촌동생 잃은 개그맨 임혁필
- 2011. 08. 01 18:28 연예
- ㆍ“경호원 되고 싶어 했던 사촌동생 승렬이, ㆍ다시는 이런 비극 일어나지 않았으면…” 지난 7월 4일, 강화도 해병대 2사단 내무반에서 일어난 총기사고로 네 명의 꽃다운 청춘이 세상을 등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개그맨 임혁필(39)의 고종사촌동생인 이승렬 상병도 그 희생자 중 한 명이다. 가족이자 해병대 후배인 사촌동생을 잃은 그는 애써 슬픔을 다독이는 중이다. 휴가 때 술 한잔 제대로 사주지 못했다며 가슴 아파하던 그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임혁필을 만난 건 사건이 일어나고 일주일이 지난 후, 그가 공연을 하고 있는 대학로 공연장에서였다. 그와는 지난해 가을, 가족을 주제로 한 인터뷰를 통해 만난 적이 있다. 딸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 인터뷰 내내 웃음꽃을 피우던 그의 얼굴에는 미소 대신 슬픔과 피로가 가득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사촌동생을 떠나보내야 했던 지난 일주일. 하루하루 더디게 가던 시간은 어느새 저만치 달려 나가고 있었다. 비보를 접한 건 사건 당일 오후, 아내의 전화를 통해서였다. “방송 녹화를 마치고 오후 4시 반 정도 됐을 때였어요. 아내가 전화로 사고 얘기를 하기에 처음엔 ‘아휴, 무슨 소리야’라고 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뉴스에 사고 소식이 나오더라고요. 사망자에 이승렬 상병이 뜨는 걸 보고 ‘아, 이게 장난이 아니구나’ 싶은 거예요. 제가 해병대 출신이니까 군부대 쪽 아는 분께 연락을 드려서 상황을 확인했죠. 오전 11시 40분께 사고가 발생했고 그때 이미 승렬이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어요.” 승렬이의 부모님이신 고모와 고모부는 강화도 사고 현장에 계셨고 친척들은 병원으로 모이는 상황이었다. 그 역시 공연과 방송 등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저녁 8시쯤 시신을 태운 헬기가 병원에 도착했고 승렬이를 영안실에 들여보내고 나니 하루가 다 갔다. 건강하게 웃으며 해병대에 자원입대한 사촌동생을 하루아침에 저 세상으로 보내는 심정이 오죽했을까. 하지만 모두가 슬픔에 잠겨 있는 상황에서 그마저 넋을 잃고 있을 수는 없었다. 해병대 708기인 그는 다른 해병대원의 빈소에도 오가며 바쁘게 움직였다. 유가족의 입장을 해병대 측에 전달하고 유가족과 사령관의 면담을 주선하는 등 양쪽의 연결고리 역할을 톡톡히 했다. 유가족이자 해병대 출신이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이다. “저도 물론 충격이 컸지만 승렬이 부모님께서 받은 충격과는 비교가 안 되죠. 군대 간 자식이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왔다고 생각해보세요. 유가족들은 상당히 흥분된 상태였고 아무래도 이성적 판단이 힘든 상황일 수밖에 없었어요. 제가 나서서 할 수 있는 일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죽은 네 아이 모두 제 후배들이잖아요. 아이들을 붙잡고 슬픔에 잠겨 있기보다는 빨리 좋은 곳으로 보내줘야겠다는 생각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어요.” 지금은 담담하게 이야기하지만 당시 상황에선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군의 입장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해병대이기 전에 그도 유가족이기에 복받쳐 오르는 감정에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동생의 해병대 지원에 자신이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에 가슴 아프고도 복잡한 심정이었다. “저희 아버님이 8남매세요. 승렬이는 막내고모의 아들이고요. 형제가 많다 보니 사촌들도 많은데 그중 저와 승렬이만 해병대에 갔어요. 아무래도 다른 아이들보다 더 마음이 갔죠. 승렬이가 해병대에 대해 묻기에 남자라면 한번 가볼 만한 곳이라고 했어요. 입대를 결정했을 때도 잘했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말을 했던 게 후회가 돼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더라면 기필코 말렸을 거다. 비극은 예고 없이 날아들었고 동생의 죽음이 자신의 잘못인 것만 같아 무거운 마음을 벗을 길이 없었다. 지난해부터 해오던 대학로 소극장 공연도 미루고 모든 방송 스케줄도 올 스톱했다. 3일 내내 장례식장에서 빈소를 지키고 영결식과 안장식, 삼우제까지 대전 묘역과 서울을 오가며 동생의 마지막 길을 동행했다. “승렬이에게 다섯 살 터울의 누나가 있는데 둘 사이가 각별했어요. 그런 동생을 보냈으니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어요. 고모도 그렇고, 승렬이 누나도 3일 내내 너무 울어서 이러다 또 무슨 일 나는 거 아닌가 걱정을 많이 했어요. 다행히 조금씩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승렬이가 제 사촌동생인 것이 알려지면서 많은 분들이 위로와 격려를 해주셨어요. 힘내라는 말씀도 많이 해주셨는데 무척 감사하죠. 하지만 저의 슬픔은 친가족들의 아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유가족들에게도 많은 응원 보내주셨으면 좋겠어요.” 기수열외, 구타, 왕따… 자극적인 이야기에 커져가는 유가족들의 슬픔 나이 차이가 스무 살 가까이 나는 승렬이는 아들 같은 사촌동생이었다. 마냥 아이 같았던 동생이 훤칠한 청년으로 자라 해병대에 간다고 했을 때 말릴 이유가 없었다. “고모부께서 태권도를 하셨고 승렬이도 태권도를 잘했어요. 경호학과에 다니며 경호원의 꿈을 키우고 있었는데 해병대에 가면 꿈을 꼭 이룰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이렇게 꿈이 사라지게 됐네요. 운동도 잘하고 성격도 좋고, 착한 녀석이었는데 안타까울 따름이에요. 뭘 해도 이룰 수 있는 나이었는데, 멀쩡하던 녀석이 그렇게 하루아침에….” 너무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동생을 회상하던 그가 말을 잇지 못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면회 한 번 제대로 가지 못했던 게 내내 가슴에 남는다. “제가 포항에서 군 생활을 했어요. 너무 멀어서 가족도 면회를 잘 안 왔는데 그때 유일하게 고모부께서 면회를 오셨어요. 멀리서 고생 많다고 등도 두드려주시고 격려도 많이 해주셔서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죠. 그래서 승렬이가 입대할 때 꼭 면회를 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못 갔어요. 사고가 나기 3주 전쯤 고모부네랑 시간을 맞춰 가기로 했었는데 그때 제가 일이 생겨서 못 갔거든요. 한 번 보고 올걸…. 그때 면회를 못 간 게 미안하고 그렇게 마음에 걸려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이런 거구나 싶어요. 그동안 이런 사건들이 발생할 때마다 저한테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닥치고 보니 어이가 없더라고요. 전쟁 중도 아니고 대한민국에서 총 맞아 죽는다는 게 참 일어나기 힘든 일이잖아요. 사건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죠.” 그의 말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고 그 결과 네 명의 안타까운 젊은이들이 세상을 등졌다. 군대 내에서 일어난 총기사고. 그것도 기강이 엄하기로 유명한 해병대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크나큰 희생을 치른 사건인 만큼 문제점을 바로 찾아 다시는 이런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기수열외니, 구타니, 왕따니 하는 자극적인 내용들로만 관심이 모아지며 유가족들은 또 한 번의 상처를 받고 있다. 해병대 출신인 그에게 ‘기수열외’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똑같은 질문이 되돌아온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기수열외가 뭐예요? 저한테 가르쳐주세요. 요즘 방송이나 인터넷을 보다 보면 가슴이 무척 아파요. 기수열외니, 구타니,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오는데 너무 자극적인 내용으로만 포커스가 맞춰지다 보니 유가족들의 아픔은 사라지고 없어요. 물론 잘못된 것은 고치는 것이 맞지만 그런 말이 나올 때 자식을 잃은 부모 마음은 어떨지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유가족들의 아픔과 슬픔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상처받은 모든 분들 다시 힘내셨으면… 사실 사건이 발생하고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그는 매우 조심스러운 입장이었다. 사건을 일으킨 김 상병이 “구타와 기수열외는 없어져야 한다”라고 진술하며 마치 피해자가 왕따 문제와 기수열외의 가해자인 것처럼 지목되는 상황이었고, 해병대와 유가족 양쪽 모두에 속한 그의 말 한마디가 또 다른 기사가 되어 슬픔에 빠진 누군가에게 가시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해병대가 아니면 해병대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고 유가족이 아니면 유가족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아달라”라고 당부했다. “많은 분들이 저에게 해병대 생활이 힘들지 않았냐고 물으세요. 해병대가 힘든 곳이라는 건 전 국민이 다 알아요. 그걸 알면서 지원을 했다는 건 그만큼의 각오와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자신이 선택한 거예요. 본인을 믿고 최선을 다해야죠. 제가 군대에 있을 때도 지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저만 힘들었던 게 아니에요. 아마 군대에 다녀오신 분이라면 다들 고생했던 기억이 있을 거예요. 해병대뿐만 아니라 육군도, 해군도, 공군도, 공익요원도, 면제받은 분들도 4주간의 훈련기간이 힘들 수 있어요. 힘들다고 생각하면 누구나 힘들어요. 해병대이기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이겨내지 못하면 힘든 거예요. 결국 본인의 문제가 가장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개인이 책임져야 할 문제로만 돌리기엔 희생이 너무 크다. 그 역시 시대에 흐름에 맞춰 병영문화도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실과 군대의 격차가 급속도로 멀어지고 있어요. 바로 어제까지 스마트폰과 인터넷으로 최첨단 시대를 살던 아이들이 하루아침에 바깥세상과 단절된 채 밀폐된 사회에 구속돼요. 현실은 나날이 발전해가는데 군대는 여전히 1970, 80년대 시설을 이용하고 20세기 사고방식으로 움직이니 그 차이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점점 심해지는 거죠. 병영문화도 시대의 흐름에 맞춰 변화가 필요하겠죠.” 군대 문제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꾸준히 노력한다면 이러한 비극으로 인해 눈물 흘리는 일은 분명 줄어들 거라 믿는다. 승렬이의 삼우제를 마치고 그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고 있는 중이다. 빈소를 지키느라 빠졌던 공연에도 다시 합류했다. 그는 현재 대학로 소극장에서 직접 연출한 퍼포먼스 옴니버스 쇼 ‘펀타지쇼’를 공연 중이다. 아직도 길을 가다 승렬이 또래들을 보면 울컥 가슴이 아프지만, 가족을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승렬이를 위해서 힘을 내려고 한다. “언제까지 슬픔에 잠겨 있을 수는 없잖아요. 승렬이네 가족도 다시 힘을 내셨으면 좋겠어요. 그게 승렬이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해요. 다시 힘을 내 열심히 살다 보면 승렬이도 어딘가에서 좋은 모습으로 지켜보고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다시 한번 많은 분들께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의 아픔을 잊지 말아주십사 당부드리고 싶어요.” 언제 슬픔이 가실지, 언제 눈물이 마를지 알 수 없지만 하루빨리 유가족들이 잃어버린 웃음을 찾을 날이 오기를 바라며, 그리고 다시는 이런 아픔을 겪는 희생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며 그는 애써 웃어 보였다. 그리고 다시 한번 비극적인 사고로 세상을 떠난 네 아들들의 명복을 빌었다. 갑작스러운 비보를 듣고 너무 놀란 가슴에 스케줄을 다 접고 국군수도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승렬이는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고 친척 어르신과 기자들만이 자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헬기가 도착했고 싸늘한 시신만이 검정 비닐 백에 싸여 있는 모습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 뒤가 되어 고모가 강화도 사건 현장에서 수도병원으로 왔습니다. 고모 얼굴을 보니 다시 한번 눈물이… 나도 모르게 흘렀습니다. 마련된 빈소에는 승렬이의 영정 사진이 있더군요. 해병대 훈단에서 훈련을 마치면 자대 배치를 받고 자대에 가기 전에 정복사진을 찍는데 그 사진이 영정사진이 되다니…. 그 해병 정복사진이… 영정사진이라니. 그 안에 있는 승렬이는 아주 잘생기고 멋진 해병대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또 한 시간이 흘러 고모부가 왔고 다른 때보다 훨씬 수척해진 모습에 안타까움이 밀려왔습니다. …다음날이 되었습니다. 거의 밤을 샜기 때문에 피곤함이 밀려옵니다. 하지만 서늘한 그리고 어두컴컴한 반 평도 안 되는 냉동고 영안실에 있을 승렬이를 생각하면 나의 피곤함은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슬슬 염을 해야 합니다. 마지막 가기 전에 승렬이가 엄마와 아빠 그리고 누나한테 인사하려면 예쁜 모습으로 맞이 해야 하니까요. 우리는 승렬이의 멋진 모습을 보려고 다들 안 자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게 되면 이제는 승렬이의 얼굴을 다시는 볼 수가 없습니다. 드디어 염이 끝났고 먼저 엄마 아빠 그리고 누나가 들어갔고 이제 친척들과 승렬이의 친구들이 들어가서 얼굴만 보고 나오면 되는데 줄이 줄어들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엄마하고 누나가 승렬이를 잡고 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도 봐야지” 하며 재촉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 모습에 고개 숙여 울고만 있을 뿐입니다. 근데 누나가 갑자기 쓰러집니다. 너무 많이 울었습니다. 누나를 부축하고 얼른 그 자리를 피하게 했습니다. 역시나 그 와중에도 아빠는 냉정함을 잃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압니다. 그 누구보다 마음속으로는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또 하루가 흐릅니다. 어느새 아침이 되었고 이제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합니다. 영결식을 하면서 승렬이는 난생처음 신기한 경험을 합니다. 대통령이 꽃을 보내고 국방부 장관을 눈앞에서 보게 되었고 해병대 사령관이 승렬이에게 칭찬을 하고 이름만 대면 다 아는 국회의원도 승렬이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합니다. 평생에 단 한 번도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일 수 있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승렬이는 그런 사람들한테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지금 이 순간 엄마랑 아빠랑 누나랑 함께 있고 싶을 뿐입니다. 엄마가 해주는 따뜻한 밥이 먹고 싶고 아빠랑 목욕탕에도 가고 싶고 누나랑 영화 한 편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제 승렬이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오늘은 바쁩니다. 영결식이 끝나면 부평에 갔다가 대전으로 가야 합니다. 이제 승렬이가 살아야 할 곳이 대전이니까요. 대전에 갈 일이 별로 없었던 승렬이는 대전이 낯설기만 합니다. 혼자서 그곳에서 이제 앞으로 살아가야 하니까요. 엄마 아빠 누나는 승렬이에게 보금자리를 마련해주고 이제 떠나야 합니다. 엄마 아빠 누나는 함께 살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발걸음을 뗍니다. 세상에 살아오면서 제일 무거운 발걸음입니다. 이제 스물 살밖에 안 된 아이를 대전에 두고 우리는 떠납니다. 마음도 무겁고 발걸음도 무겁지만 떠나야 합니다. 사랑하는데 무척이나 사랑하는데 떠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동생이면서 해병대 후배인 승렬아 좋은 데로 잘 가렴. 사랑한다. 해병대 708기 혁필 형이 2011년 7월 8일 임혁필의 트위터 멘션 中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안진형(프리랜서)>
- 아이돌 그룹 멤버, 현대무용수, 해병대 출신 탤런트 최필립의 모든 것
- 2006. 06. 01 연예
- “남다른 이력도, 아쉬운 사랑도 제 연기의 자양분이 되는 것 같아요” MBC-TV 월요 시트콤 ‘소울 메이트’에서 이지적인 이미지를 선보이고 있는 신인 탤런트 최필립은 할 얘기가 참 많은 친구다. 평범하지 않은 과거(?)를 이제 오롯이 연기에 쏟아 붓고 싶다는 옹골찬 한 남자의 도전장. 인사를 나누고 마주 앉아서 커피까지 한잔 하며 제법 편안하게 얘기한다 싶었는데, 언뜻 그가 쥐고 있던 1회용 종이컵을 보니 가장자리에 잘근잘근 씹힌 흔적이 남아 있다. 이 남자 은근히 긴장하고 있었나 보다. 데뷔 2년 차, 미니시리즈 한 편에 이어 일명 시트콤 드림팀이 제작하는 작품의 주인공으로 전격 발탁되어 선전하고 있는 신인 탤런트 최필립. 안정적인 톤으로 대화를 이어나가던 그의 목소리가 흔들리기 시작한 건, “그럼, 무명시절이 없었던 거네요?”라는 질문을 받은 뒤부터였다. 미소년 발레리노, 해병대 가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는 학교에서 소문난 춤꾼이었다. 얼굴도 작고 팔다리가 길었던 그는 주변의 권유로 중학교 3학년 때 발레를 시작했다. 결코 이른 시기가 아니었음에도 그는 발군의 실력을 보였고 무난히 예고에 진학해 콩쿠르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무대에 서면 무용수와 관객의 기 싸움이 치열합니다. 좀 과격하게 얘기하자면 그 순간은 관객들의 에너지를 내가 잡아먹어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거죠. 하지만 무용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다고나 할까요.” 연예 활동이 금지된 학교에 다니던 그는 그 시절 춤 좀 춘다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스트리트 댄스를 단련했다. 그 무렵 사귄 친구 충재는 이후 그룹 신화의 멤버가 되어 전진이라는 예명을 얻었고 지금도 자주 만나 술잔을 기울이곤 한다. 98년 성균관대 무용학과에 진학하기가 무섭게 최필립은 5인조 댄스그룹 ‘JR(주니어 리퍼블릭)’의 멤버로 가요계에 데뷔했다. 그가 굉장히 쑥스러워하며 ’장미 한다발‘이라는 노래를 불러줬는데, 어딘가 멜로디가 귀에 익다. 생각만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탓에 이내 무대를 내려온 그는 1년 넘게 후유증에 시달렸다. 캠퍼스로 돌아와 다시 무용에 매진하던 그가 선택한 돌파구는 해병대 입대. 무용 콩쿠르 입상은 곧 군 면제 혜택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남자 무용수는 오직 거기에 매진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는 2년 동안 군대를 다녀오는 게 얻는 것이 많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남자 무용수는 남자답지 못하다는 선입관을 깨고 싶은 의지도 강했다. 하나 해병대 출신 하나 없는 집안의 아들, 심지어 방위 아버지를 둔 그는 집안의 걱정거리였다. 가입소 일주일 기간 중 체력 테스트를 통해 부적격자를 가려낸다는 사실을 안 어머니는 분명 일주일 안에 집으로 돌아올 거라는 확신에 훈련소 입소 날 담담하셨다. 그러나 열흘이 지나도 아들이 돌아오지 않자, 그때부터 눈물로 세월을 보내셨다고. “눈이 좋지 않아서 신검 때 3급 판정을 받았거든요. 시력 때문에 해병대 떨어질까봐 콘택트렌즈를 끼고 시력 측정을 했어요. 그렇게까지 해서 합격했을 때는 정말이지 대학 붙었을 때보다 좋더라고요.” 한 번에 두 여자를? 실제론 엄두도 못 낼 일 어려서부터 소풍이니 운동회니 교내 행사 때마다 나서기 좋아하던 그는 군복무 시절에도 3군 노래자랑, 국군의 날 특집 행사, 국군방송 ‘위문열차’ 등등에 출연해 상을 휩쓸었고, 덕분에 포상 휴가도 넉넉하게 받았다. 공수 교육대 점프 마스터(조교)로 복무한 경험은 ‘소울 메이트’에서도 돋보였다. 애인인 민애가 뺑소니 혐의를 받고 경찰 조사를 받고 있을 때, 마침 해병대 출신 피해자를 만나서 “해병대의 한 기수는 하나님과 친구이며, 부처님과 동기동창이고…”라고 읊어대며 문제를 해결한 설정도 그렇게 탄생한 것이었다. 또 한 가지 ‘소울 메이트’에 숨어 있는 최필립의 비하인드 스토리. 극중 연인 수경이 그에게 선물한 말티즈 강아지의 이름이 ‘필순이’인데, 이는 최필립의 본명이다. 도울 필(弼)에 순박할 순(淳), 외조부가 지어주신 이름은 뜻은 좋지만 어려서는 꽤 많은 스트레스를 줬다. “원래 제 본명으로 데뷔하려고 했어요. 정감 있고 좋잖아요? 오디션에서 저를 발탁한 MBC 이재갑 국장께서 당시 극중 이름이었던 필립을 권해주셨거든요. 요즘은 휴대폰으로도 개를 키운다는데, 어느 분의 개 이름이 필순이라는 얘기를 들으니까, 처음엔 재밌다가도 슬쩍 기분이 나빠지더라고요. 아니 소중한 내 이름을(웃음).” ‘영재의 전성시대’에서 유학 시절 만난 여자로 인해 약혼녀를 배신하는 펀드 매니저 역할을 맡아 강한 인상을 남겼던 그의 이번 역할 역시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두 여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5년 된 연인 수경이를 버리고 섹시하고 도발적인 매력의 민애를 택하고야 만다. 이러다가 선배 탤런트 이종원의 뒤를 잇는 ‘배신남 전문 배우’가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서는데…. 그래도 그는 여자들에게는 ‘나쁜 놈’으로 찍혔지만, 남자들에게는 공감을 얻고 있다는 항변 아닌 항변을 했다. “저라면 수경이를 버리지 않았을 거예요. 설마 바람둥이 민애에게 끌렸겠어요? 남자는 결국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돌아가게 마련이니까, 필립도 앞으로는 수경이에게 돌아가 진심을 보여주지 않을까 싶어요.” 올 초 최필립은 1년 반가량 사귄 연인과 헤어졌다. 평범한 학생이었던 그녀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연인의 직업을 힘들어했다. 아무리 바빠도 커피 한잔 마실 여유를 내지 못하는 그에게 아쉬움을 표시하는 그녀에게 최필립은 그만 “그런 것도 이해 못해줄 거면 나를 만나면 안 되지 않겠느냐”는 말을 하고야 말았다. 당시 그는 막 새 작품을 앞두고 한창 예민한 상태였다. “알고 보니 그날 편입시험에 합격했다는 얘기를 하러 나온 거였더라고요. 제가 편입을 권했기 때문에 기쁜 소식을 알리려고 하던 상황이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헤어지자고 했으니….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었죠. 수경과의 이별 장면을 촬영할 때 그 친구 생각이 많이 났어요.” 이제 막 신인 딱지를 떼려는 그는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아직 연기력은 짧아서 답답하다”고 했다. 브라운관에 비치는 모습은 늘 아쉽기만 해서 “성형하고 싶다”고 했더니, 부모님께서 “왜 외모로 승부하려 하느냐, 연기력으로 승부해야지! 잘생긴 배우들이 얼마나 많은데”라고 말씀하셔서 한참을 웃었다는 최필립. 그의 목표는 한창 의욕에 불타던 시절의 순수한 열정을 되찾는 거다. 그의 소박한 소년다움이 신선하고 참 반갑다. 글 / 장회정 기자 사진 / 김이석(buri 스튜디오)
- [독도는 우리땅]출생지가 독도인 최초의 한국인 해병대 조강현 일병
- 2005. 05. 01 화제
- “전역을 하고 나서 독도에 관한 영화나 연극 만들려구요” 독도 출생지 한국인 1호로 기록되고 있는 조강현 일병. 그는 요즘 밀려드는 인터뷰 요청으로 몸살(?)을 앓고 있을 정도다. 지금은 군인 신분이기에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말하는 일본인들에게 자신의 속내를 말하지 못하지만, 전역 후에는 독도에 관한 작품을 만들어 독도 사랑을 실천할 계획이다. 아버지의 손에 46일간 이끌려 독도에서 살아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에 있는 작은 섬. 36개의 암도와 암초로 구성된 섬이다. 평균 기온은 영상이고 강수량이 연중 고루 분포하지만, 해풍이 심해 사람이 살기에는 어려운 땅이다. 하지만 이제 한국인의 가슴속에 커다란 섬이 되었다. 그 작은 섬의 이름은 ‘독도’. 일본 시네마현의 ‘다케시마의 날 조례안’ 발표는 한국인의 가슴에 ‘독도 사랑’ 불을 질렀다. ‘독도는 우리 땅’은 이제는 아무리 외쳐도 지겹지 않는 구호가 되었다. 독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 가족이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독도의 유일한 주민이었던 고 최종덕씨 일가. 1965년부터 어로채취권을 얻어 독도에서 생활해왔다. 5평짜리 움막을 짓고, 빗물을 받아서 생활해야 할 정도였다. 식수를 구할 수 없어 자연샘인 ‘몰골’을 직접 만들었고, 이곳까지 이어지는 998계단을 놓기도 했다. 독도에서 생활하기 위해 수중 창고를 마련하기도 하고, 전복 수정법과 특수 어망도 개발했다. 경운기 엔진으로 자가발전을 해서 생활을 할 정도로 고인은 독도에 인생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1987년 태풍으로 인해 생활 터전이 모두 파괴되었고, 그 충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독도는 또다시 무인도가 될 위기에 처했지만, 한 사람이 고인의 유지를 받들었다.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독도에 들어가 생활한 이는 사위 조준기씨(49)다. 울릉도에서 해병대 하사로 근무하다 고인의 딸과 결혼을 했고, 장인이 세상을 떠난 후 독도 사랑을 이어가기로 한 것. 제대 후 스물여섯 살이 되던 1985년 7월부터 1993년 8월까지 8년 동안 독도에 살았다. 자연스럽게 조준기씨의 주소지는 독도로 되어 있었다. 아들 조강현 일병(21)은 울릉도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주소지를 따라서 출생지가 독도가 된 것. 독도출생지 한국인이 된 것이다. 독도가 많은 입에 오르내리면서 조강현 일병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됐다. 특히 아버지의 뒤를 따라 해병대에 근무했다는 사실까지 알려지면서, 많은 매체에서 그를 취재하려고 열을 올리고 있다. 갑자기 ‘뉴스 메이커’가 된 사실 때문에 그는 어리둥절할 정도다. “아주 어렸을 때 독도에 살아서 솔직히 기억은 잘 안 나요. 요즘 인터뷰 요청이 많은데, 난감해서 아버지께 여쭤보기도 하고 그래요. 아버지는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라세요.” 사실상 조강현 일병이 독도에서 산 날은 46일 정도밖에 안 된다. 조 일병이 두세 살 때 조준기씨는 독도 출생으로 되어 있는 아들이니까 독도에서 살아봐야 한다고 생각해 데려가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조 일병이 기억하는 독도는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기억 속에는 꽤 넓은 집이 5평짜리 움막이라는 것도 요즘 알았다고 한다. 예전에는 모르던 독도 생활은 아버지의 이야기와 일기장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언뜻 본 아버지의 일기장에는 ‘나무도 심고, 토끼도 키우던’ 이야기들이 나왔다. 아버지는 계단 난간을 그물로 막고, 조강현 일병의 몸을 끈으로 묶어놓기도 했다. 어린아이가 독도에서 사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 수 없다는 곳, 독도에서 아버지가 삶의 터전을 만들어 살아낸 일에는 자부심을 느낀다. 학창 시절 ‘독도 소년’이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모두 아버지 덕분이다. “수업 시간에 독도 이야기가 나오면 선생님들이 모두 저를 지목했죠. 아버지가 독도에서 생활하셨다는 것을 아셨거든요. 저 때문에 교육적인 효과가 높았을 거예요.(웃음)” 어렸을 적부터 집 안에 수도 없이 붙어 있는 독도 사진들을 보면서 커왔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독도에 관한 애정은 많다. 하지만 군인 신분에 독도에 관한 이야기를 해달라는 요청은 곤혹스럽기만 하다. 지금은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인들에게 말을 아끼고 있지만, 제대 후에는 독도에 관한 영화나 연극을 만들어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을 것이라고 한다. 아버지의 ‘끼’ 물려받아 배우의 꿈 키우고 있어 조강현 일병은 동국대학교 연기전공 03학번이다. 학창 시절부터 학교에서 MC도 보고, 연극으로 대상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배우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그러다가 지난해 해병대에 자원 입대했다. 남들은 모두 힘들어서 기피하는 해병대에 자원한 것은 아버지 때문이다. “아버지가 해병대 하사관 출신이잖아요.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해병대를 친숙하게 여겼던 것 같아요. 해병대 간다고 하니까 아버지도 좋아하시던데요.(웃음) 군대는 좋은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곳이에요. 몸은 힘들지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거든요.” 조 일병의 아버지 조준기씨는 ‘끼’가 많은 사람이다. 그 끼를 이어받아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연기를 시작했다. 고등학생 시절 ‘백지나무’라는 청소년 극단에서 연극을 하며 대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연극·영상학부에 들어가기 위해서 준비한 것은 거의 없었다. 아니 준비를 거의 하지 못했다. 수능을 마치고 실기시험을 위해서는 선배가 알려준 연기학원에 4일 동안 다닌 것이 유일한 준비였을 정도. 강원도에 살면서 정보가 많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조강현 일병은 요즘 학교에서 스타가 됐다고 한다. 독도 관련 기사에 자신의 이름이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조 일병이 나온 기사를 스크랩해놨을 정도다. 조 일병은 2006년 7월 제대하면 독도에 관한 작품을 만들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연극이 될지, 영화가 될지 아직 정해진 것은 없다. 독도 출생지 1호 한국인 조강현 일병이 제작할 독도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글 / 최영진 기자 사진 / 백성우 독도에서 태어날 뻔(?)한 조강현 일병의 동생 한별이 조강현 일병의 동생 한별(16)은 독도에서 태어날 수 있었다. 조준기씨는 한별이의 출생일에 맞춰 독도에 들어가기로 계획하고 준비를 해놨다. 의료진은 출산일에 맞춰 울릉도에 들어오기로 되어 있었고, 방송국에서는 헬기도 마련해놨다. 하지만 독도에 들어가려던 날 기상 악화 때문에 배가 뜨지 못했다. 큰 이벤트가 됐을 법한 일이었지만, 독도에 들어가는 일은 그만큼 어려웠다.
- 해병대 사상 첫 여성 교관탄생 이미희 중위와 이지애 하사
- 2005. 02. 01 화제
- “여군은 훈련도 다르지 않냐구요? 천만에요! ‘귀신 잡는’ 해병대는 남녀가 똑같습니다!” 해병대 창설 이후 처음으로 여성 교관 2명이 탄생했다. 포항 해병대 교육단 소속인 이미희 중위와 이지애 하사가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소대장 교육과 훈련교관반 교육 과정을 수료한 것이다. 이들은 남자들도 선뜻 도전하지 못하는 해병대에 지원해서 눈길을 끌고 있다. 계급을 따지자면 꽤 차이가 나지만 동갑내기 두 여성 교관의 대화는 무척 자연스러웠다. 포항에 있는 해병대 교육관을 방문했을 때 이미희 중위(26)와 이지애 하사(26)는 커피를 마시며 지나온 시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교육 훈련 과정중 벌어졌던 에피소드를 떠올리며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당시엔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돌아보면 자신이 대견하다는 생각이 든다는 이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사적인 대화를 나눌 때도 어김없이 ‘~습니다’로 음는다. 훈련병에게 모범이 돼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얼굴 표정부터 자세까지 뭐 하나 흐트러짐 없는 모습이다. 이미희 중위(이하 중위) 계급 사회에선 계급이 우선이지. 나한테 존댓말 하는 게 어색하진 않았나? 이지애 하사(이하 하사) 아닙니다. 오히려 중위님과 가까이 지낼 수 있다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계급 조직에선 중위와 하사가 같이 만나 일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데 중위님 덕분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중위 일반인이었으면 친구 삼아도 됐을 텐데… 난 어릴 때부터 군인이 되고 싶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해병대 제복에 대한 환상이라고 할까. 아빠가 해병대 소속 군인이거든. 지금도 연평대 부대에서 근무하고 계시지. 계명대학교 회계학과 4학년 가을 무렵, 우연히 해병대에서 첫 여군을 뽑는다는 기사를 봤다. 그 순간 머릿속이 멍해지는 걸 느꼈지. 바로 엄마와 상의했는데 적극 찬성하시더라고. 하지만 아빠가 반대하셨지. 군대 생활이 힘들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그러셨을거야. 하사 그러셨습니까. 저도 가족들이 심하게 반대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무척 대견스러워하십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운동을 좋아하던 저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사이클을 시작했습니다. 공을 가지고 하는 운동이라면 절대 지지 않았는데, 하루는 체육 선생님이 사이클을 타보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선수들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한 운동인데 전 너무 늦지 않느냐는 반문에도 아랑곳없이 사이클을 시작하라고 권하셨습니다. 그래서 운동을 시작했죠. 한번 ‘필’이 꽂히면 한눈 팔지 않고 정신없이 밀어붙이는 근성 때문에 뒤늦게 시작한 운동이지만 남들보다 빨리 정상의 수준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영산포여자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인 운동에 돌입했죠. 고등학교 1학년 10월, 전국체전에서 사이클부문 3등에 입상했습니다. 운동을 시작한 지 불과 1년 만에 거둔 성과였습니다. 동신대학교 체육학과에 진학해서 운동은 제 삶의 목표가 됐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킬레스건에 염증이 생겨서 운동을 계속하면 위험하다는 진단을 받았죠. 그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합니다. 꿈이 사라지는 순간이었으니까요. 그때부터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이클은 그만두더라도 체육 교사에 대한 꿈은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체육 교사가 되기 위해선 교육대학원에 가야 했지만 집안 사정 때문에 그것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꾸준히 공부하며 생활체육지도자 자격증도 땄습니다. 스포츠센터에서 일해 동생들 학비도 보태주고 생활도 꾸려가면서 성실하게 살았죠. 스포츠센터에서 일한지 1년 만에 팀장이 됐습니다. 생활은 안정이 됐지만 정신적으로 무척 공허했습니다. 스포츠센터 팀장직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표현은 절대 아닙니다. 도전할 꿈이 없다는 것이 답답했죠. 그러던 어느 날 경찰 시험을 준비하던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 해병대 1기생을 뽑는다는 공고를 봤습니다. 2003년 7월이었죠. 혹독하다는 해병대 훈련을 받고 나면 뭔가 정신적으로 완전 무장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남자들이 자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중위 하사는 군인이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다.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완전 무장된 상태거든. 꾸준히 운동을 했으니 체력도 거의 남자들 수준과 맞먹겠는 걸. 하사 고맙습니다. 3년 동안 해병대에 다녀오면 진로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윤곽이 드러날 것 같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입대지원서를 작성했습니다. 중위 나는 1차 서류 심사를 거친 후 국어, 국사, 영어, 전공 과목을 치렀지. 하사 저도 그랬습니다. 중위 하사도 네 과목을 치렀나. 하사 네, 그렇습니다. 시험 수준만 다를 겁니다. 중위 합격 발표 날 제일 먼저 연평부대에 계신 아버지께 전화를 했지. 그때는 무척 좋아하시더군. 친구들도 하나같이 합격을 예상했다는 분위기였지. 하사 저는 합격통지서를 받은 날 전라도에 계신 어머님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걸쭉한 사투리로 그러시더군요. 해병대에 가겠다는 소리에 ‘드디어 일 저질렀구나’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중위 (웃음) 양쪽 집안 분위기가 거의 비슷했군. 앱대 전날 머리를 자르기 위해 미장원을 갔는데 진짜 눈물이 나더군. 아무리 손으로 닦아도 저절로 주르르 흐르던걸. 남자들이 입대할 때 눈물을 흘리잖아. 그 기분을 알 것 같더라니까. 긴 생머리를 자르고 숏커트 하는데 그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 그때 사귀던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같이 미장원에 갔거든. 뒤에서 내 모습을 보더니 같이 눈물을 흘리는 거야. 여자친구 군대 보내는 사람은 자기밖에 없을 거라면서 훌쩍대거리걸. 하사 그분이 아주 특이한 경험을 하셨군요. 그 남자친구 분 아직도 만나십니까? 중위 고무신 거꾸로 신는다거나 군화 거꾸로 신는다는 표현 있잖아. 그거 딱 맞더라고. 입대한 연인을 기다리기엔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하잖아. 자연스럽게 헤어졌지. 갑자기 입대일이 생각난다. 그날 부모님도 함께 오셨는데 얼마나 눈물을 흘리시던지… 물론 나도 그랬지만. 부모님과 헤어지고 난 뒤 가족들이 안 보이는 곳에 도착하면 전체 분위기가 확 달라지잖아. 군대 갔다온 남자들이 하는 말 있잖아. 코너 돌면 분위기 확 바뀐다는 말. 그 말 맞더라고. 존댓말은 사라지고 일단 소대장의 목소리 톤부터 확 달라지잖아. 군인이 되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더욱 긴장하는 것 같아. 사복은 입대일 밤에 벗어서 차곡차곡 정리한 뒤 군복으로 갈아입잖아. 주머니 속 소지품까지 다 꺼내는 소리를 듣고 내가 질문을 했었지. 눈썹 그리는 펜슬은 가지고 들어가도 되냐고. 그때 교관의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 아무 답변도 하지 않던 교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땐 알 수 없었어. 근데 시간이 지나고 지금 생각해보니 참 한심한 행동을 한 거야. 난 그때까지 군인이 되겠다는 준비가 덜됐던 거지. 그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하사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누구나 시행착오는 겪는 것 아니겠습니까? 중위 내가 이래서 하사를 좋아한다니까. 서로 의지도 되고 말이지. 입대 하자마자 일주일 동안 교육 기간인데 새벽 5시 45분에 기상해서 6시부터 연병장을 2km 뛰지. 거의 30분 정도 소요되는 거리를 뛰고 나면 땀으로 뒤범벅이 되고 아침밥도 꿀맛이야. 건강은 훨씬 좋아지지 않았나? 하사 네, 그렇습니다. 입대하고 군살은 쏙 빠지고 건강을 찾았습니다. 중위 그날 기억나나? 추운 겨울 야외에서 텐트 치고 자던 날 말이야. 하사 그날은 잊을 수 없습니다. 12월 초로 기억됩니다. 보통 군인들은 25kg 정도 되는 배낭을 메고 훈련을 가지만 여군들은 그 무게의 70% 정도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야외 훈련 장소는 사격장이었습니다. 그곳으로 가는 데 3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도착해서 텐트를 치는데 중위님과 한 텐트에서 잠을 잔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잖습니까. 교육단 소속 여군이 둘뿐이니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제겐 잊을 수 없는 날이었죠. 도착해서 저녁을 먹기 위해 함구에 쌀을 씻어 넣는데 매스컴을 통해서 보던 일을 제가 직접 하고 있다는 생각에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중위 ‘함구’라고 하면 일반인들은 잘 모를 거야. ‘짬통’이라고 하면 남자들은 알아들을 것 같군.(웃음) 땅을 파서 고체 연료를 넣고 밥과 국을 끓였지. 주먹만한 고체 연료를 나도 처음 봤으니까. 무척 신기했어. 그건 절대 꺼지지 않더라고. 음식을 다 만든 후에 흙으로 덮어야 확실히 꺼지지. 차가운 바닥에서 침낭 속에 들어가고 잠을 청하는데 정말 춥더라고. 하사 부모님의 소중함이 느껴지는 날이었습니다. 따뜻한 방에서 맛있는 밥 챙겨주는 엄마가 너무 그립더라고. 그래서 군대 오면 철든다고 하는가 봅니다. 중위 군인들이 민간인만 보면 난리라는 말 많이 들었지. 나도 그렇게 되더라고. 교육 기간 동안 군대 안에서 생활할 뿐만 아니라 밖을 볼 수도 없잖아. 일주일 지난 시점인가? 여군들은 산부인과 진단을 받기 위해 군대 밖으로 나가지. 차를 타고 밖에 나가는데 눈을 감게 하잖아. 아무래도 심리적인 동요를 막기 위해 그런 듯싶어. 근데 계속 눈을 감고 있진 않잖아. 자꾸 보고 싶은 충동이 생기게 마련이니까. 실눈을 뜨고 밖을 보는데 얼마나 반갑던지. 평상복 입은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되더라고. 알록달록한 간판 색깔을 보는데 이건 ‘별천지’가 따로 없는 느낌이었어. 환경이란 게 무서운 거야. 하사 군대 간 남자친구들이 ‘초코파이’가 무척 먹고 싶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도 초코파이가 얼마나 먹고 싶던지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군대 가기 전에도 주말이면 교회에 다니곤 했는데 입대한 후 일요일이면 꼭 교회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초코파이를 나눠주는 시간을 정말 눈물 나게 기다렸으니까요.(웃음) 중위 맞아. 나도 그랬으니까. 하사 어디선가 동료가 구한 건빵 두 봉지를 열 명이 나눠 먹은 적도 있습니다. 봉지를 뜯지 않은 채로 잘게 부숴 나눠 먹었습니다. 배가 고팠던 건 아닌데 군것질을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으니까요. 중위 군대에서 먹는 건빵만큼 맛있는 것도 없지. 하사 군대에 와서 오히려 식사시간에 육류는 자주 먹습니다. 한 끼도 빠지지 않고 나오니까요. 엄마가 해주는 반찬보다 맛있다고 농담을 했더니 섭섭해하시더라고요.(웃음) 중위 예전과 많이 달라졌지. 군대도 상황이 많이 좋아졌어. 아빠한테 듣던 예전 모습과는 많이 다르니까. 세상이 변하니까 군대도 현대식으로 점차 변하면서 좋아진 거지. 하사 요즘엔 친구들 만나면 저만 왕따 당하는 기분이 듭니다. 전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가 더 재미있는데 그들은 드라마 이야기, 남자친구 이야기, 쇼핑한 물건들을 꺼내놓고 자랑하느라 정신없습니다. 중위 (웃음) 나도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가 더 재미있지. 자꾸 군대 생활 이야기를 꺼내니까 친구들이 만나자는 말을 뜸하게 하더라고. 하사는 축구를 무척 좋아하기도 하고 잘하잖아. 많이 부러워. 남자 군인들과 겨뤄도 절대 지지 않잖아. 체력이 놀랍다니까. 하사 전 공을 가지고 하는 운동이 제일 재미있습니다. 달리는 것도 즐겁습니다. 중위 지난번 80명이 달리기 했을 때도 그때 2등 했지? 하사 네. 중위 여군은 하사 한명뿐이었잖아. 하사 네, 맞습니다. 중위 하사가 뛸 때 뒷모습을 보면 솔직히 남자 군인과 구분이 안 가.(웃음) 머리도 짧고 키도 그다지 작지 않아서 말이지. 자네 키가 거의 170cm 정도 되잖아. 하사 네, 그런 말 많이 듣습니다. 중위님은 카리스마가 대단합니다. 중위 자네의 카리스마도 대단하지. 소대장 교육과 훈련교관(DI)반 교육 과정이 사람을 많이 변하게 한다. 50명이 넘는 신병들을 교육하는데 첫 수업에 떨릴 것 같지만 그런 긴장감은 하나도 없었지. 오히려 교육 기간이 더 긴장되지 않았나? 하사 네, 맞습니다. 그렇게 긴장하면서 배웠기 때문에 한 치의 실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중위 교관되기 전에 ‘훈육관’으로 여러 번 훈련병 앞에 섰기 때문에 동생들 다루듯이 자연스럽고 절도 있게 행동할 수 있는 듯해. 자그마한 실수가 커다란 사고로 번질 수 있기 때문에 까다롭고 형식적인 절차를 안 할 수 없는 거지. 일반인들에겐 불필요해 보이는 일도 말야. 남자 군인들과 함께 여군으로서 충분한 역할을 해내면 된다고 생각해. 하사 훈련중 여자이기 때문에 ‘열외’라는 말은 절대 들을 필요도 없고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열외’이길 바란다면 군대에 오지 말았어야죠. 그렇다고 남자 군인들과 싸워 이기고 싶다는 게 아닙니다. 육군, 해군, 공군 중 해병대 여군들이 역시 대단하다는 말을 듣고 싶다는 표현이 더 솔직할 것 같습니다. 남자 해병대 군인들이 대단한 실력을 보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남자 군인들이 하는 스타일과 차별할 수 있는 교관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중위 인격적인 교관이 되겠다는 포부로 들리는군. 하사 네. 처음 해병대를 지원할 땐 의무 기간만 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 곳에서 생활하면서 해병대에 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더욱 노력해서 선배들의 뒤를 이어 절대 부족함이 없는 성실한 교관이 되겠습니다. 이들은 교육 기간 도중 하루에 세 번 ‘구령법’을 익혔다. 대부분 식사를 마친 후 곧바로 10여 분 동안 구령 연습을 했다. 쉴 새 없는 연습에 목소리는 점점 허스키해지고 어느새 교관의 낮은 저음으로 변했다. 작은 실수가 큰 사고로 번질 수 있다는 긴장감 때문에 눈매는 더욱 날카로워졌다. 항상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도 이들의 경험담을 듣는 데 성공했다. 솔직한 심정 속에 군인으로서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멘트도 빠지지 않았다. 이들을 통해 훈련받을 훈련병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여군으로서 장점을 더욱 살려 확실한 교관이 되겠다는 이들의 포부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글 / 강수정 기자 사진 / 백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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