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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 “원칙·소신 지킨 사람이 승리해야”(2024. 10. 29 10:51)
- 2024. 10. 29 10:51 사회
- 해병대 채모 상병 순직사건 수사 관련 항명 및 상관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가운데)이 10월 29일 오전 서울 용산구 중앙지역군사법원에서 열리는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해병대 채모 상병 순직 사건 관련 항명 혐의로 재판 중인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대령)이 “원칙과 소신을 지킨 정의로운 사람들에게 이정표가 되는 사건이 돼야 한다”고 밝혔다. 박 대령은 10월 29일 서울 용산구 중앙지역군사법원에서 열린 항명 재판 9차 공판 직전 기자회견에서 변호인인 정구승 변호사가 대독한 메시지에서 “작게는 박정훈 개인과 해병대 수사단의 명예와 인생이 걸린 사건”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박 대령은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자리에서 소신과 원칙을 지킨 정의로운 사람이 승리하는 모습을, 그리고 당장의 영달과 출세를 위해 원칙과 법령을 저버린 사람들이 처벌받는 모습을 통해 이 사회에 제2의, 제3의 박정훈이 나와 대한민국이 조금 더 정의롭게 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정 변호사는 며칠 전 박 대령에게 들은 이야기라며 이같이 전했다. 박 대령은 기자회견에 참석했지만 공판을 앞둔 피고인 신분이라며 발언하지 않았다. 박 대령은 채 상병 순직 사건 조사결과 민간 경찰 이첩을 보류하라는 김계환 해병대사령관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상관인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정 변호사는 “이미 법정 및 청문회에서 적법한 명령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충분히 소명됐기 때문에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오늘 출석하는 3명의) 증인에 대한 신문 이후 변호인단은 이번 공판을 끝으로 변론을 종결해달라는 의견을 재판부에 개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또 “본 항명 사건에서 (박 대령에 대한) 무죄 판결뿐만 아니라 대통령실의 외압과 그 이후 벌어진 수많은 불법 행위에 대한 처벌까지 이루어져야 원칙과 소신을 지킨 박정훈 대령 및 해병대 수사단의 명예가 진정으로 회복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 박정훈 대령 뒷배, 해병대 정신이란 무엇인가(2024. 01. 12 16:15)
- 2024. 01. 12 16:15 사회
- 상명하복보다 정의와 자유가 우선…예비역까지 “진상규명” 촉구 해병대 예비역들이 지난해 11월 5일 서울 용산 국방부청사 부근에서 해병대 군가를 부르고 있다. 이들은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전날 경기도 화성 해병대사령부에서 출발해 국방부청사까지 50㎞를 행군했다. 행군 도중 시민들로부터 메모지에 지지 서명을 받아 채 해병과 박정훈 대령의 이름을 쓴 펼침막을 만들었다. 김창길기자 이런 전개가 또 있을까. 해병대 장병의 사망 사고가 벌어졌고, 수사책임자는 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려 했다. 일단 사건이 있으면 덮기 급급하던 군에서는 못 보던 일이다. 더 놀라운 건 수사책임자가 항명죄로 입건되자 그 부하들이 직을 걸고 상관의 무고함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급기야 전역한 예비역 해병들까지 삼삼오오 모여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여기엔 지난해 전역한 MZ세대 해병 장교도 있고, 28년 전 3개월간 수사책임자와 동고동락한 동기들도 있으며, 군을 떠난 지 수십 년이 지난 월남전 참전 노병도 있다. 이들을 하나로 묶는 이름은 해병뿐이다. 조사를 둘러싸고 정권 차원의 외압이 있었다는 의혹이 나오는데도, 그 반대편에 선 예비역의 대오는 흔들림이 없다. “진상규명”이라는 요구 아래 사람들을 모으고, 집회 등 행사를 기획하고, 1박2일 행군에 나서는 일은 생업을 가진 이들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 예비역 해병은 “역시 해병대라는 말을 듣고 싶다(905기 해병 안신현)”고 했다. 세대도, 정치색도 다른 이들을 하나로 묶는 것. 해병이란, 해병대 정신이란 무엇인가.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지난해 9월 23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해병대 예비역들이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날 집회에는 해병대의 상징인 빨간 티셔츠를 입은 예비역 해병 400여명이 참석했다. 김세훈 기자 “저는 사실 해병대 정신 때문이 아니에요.” 해병대 1158기 정원철 해병은 지난해 8월 중순 채 상병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을 개설했다. 그는 전역 후 전우회 활동을 하거나 ‘해부심(해병대라는 자부심)’을 부리던 사람도 아니었다. 오히려 “해병대 예비역들 모여 있으면 서로 ‘내가 더 힘들었다’ 자랑하는데 내가 당한 악습이 무슨 자랑거리예요. 북한을 덜덜 떨게 하는 게 멋있는 거지”라고 생각했다. 그랬던 그가 오픈채팅방을 만든 건 채 상병 때문이다. 정 해병은 늦둥이, 외동아들이다. 수차례 시험관 시술을 통해 세상에 나왔다는 채 상병의 일이 남 일 같지 않았다. 그는 “우리 집에 대입해 봤는데, 제가 없다면 우리 집도 초상집이죠. 그 마음이 컸어요”라고 했다. 해병대 예비역을 대표하는 공식단체 해병대전우회가 지난해 8월 낸 성명이 행동에 나서는 직접적 계기가 됐다. 당시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채수근 상병의 사고를 조사하던 박정훈 대령은 수사 자료를 경찰에 이첩했다가 ‘집단항명수괴죄’로 입건됐다. 국방부 장관은 수사 자료를 경찰에 넘기겠다는 내용이 담긴 박 대령의 수사보고서에 사인했다가, 이틀날 돌연 이를 보류하라고 지시했다. 국방부 장관보다도 윗선의 수사 외압을 의심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해병대전우회는 “외부개입 없이 결자해지의 마음으로 군이 명확한 결과를 도출해야만 한다”는 내용의 점잖은 성명을 냈다. 이 성명을 예비역 해병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전우회 홈페이지에 달린 댓글을 보면 알 수 있다. “단순히 관망하는 제 3자의 입장문처럼 보인다” “해병대 전 가족들이 분개하고 있는 게 안보이느냐” “부끄럽고 창피하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정 해병은 “전우회가 밖에 나가서는 봉사활동도 참 많이 하는 가장인데 집 안에 제 자식은 안돌본다”고 느꼈다. 해병대 정신 때문에 나선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는 얼굴도 모르는 채 상병의 죽음도, 개인적 연이 없는 박 대령의 고난도 제 가족의 일처럼 바라봤다. 정원철 해병이 지난 1월 2일 대전 국립현충원에서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에게 채 상병에 대한 참배를 요구했을 때, 최병태 해병(76)도 그 곁에 있었다. 그사이 정 해병이 개설한 오픈채팅방은 ‘해병대 예비역 전국연대’라는 이름의 단체가 됐다. 600여명의 해병이 가입했다. 해병대 부사관 78기로 전역한 지 반세기가 다 돼가는 최 해병도 그 중 한명이었다. 인천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최 해병은 채 상병의 생일이던 이날 가게 문을 닫고 대전을 찾았다. 그는 “우리 후배가 억울하게 사망한 일이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고 하지 않나. 우리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날 정원철 해병의 참배 요구에 한동훈 위원장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최 해병은 “한 위원장이 그날 거기 오는 줄도 몰랐다. 기왕 왔으면 몇 발짝만 가면 되는데 못 들은 체하고 가더라. 채 해병 사건에 아예 관심이 없는 사람 같았다”고 했다. 최 해병은 1970년대 전쟁 중이던 베트남에 파병돼 분대장으로서 대원들과 몇차례 전투를 수행했다. 그는 “자기 부하를 부모 같은 마음으로 아끼고, 대원 잘못도 책임지는 게 해병 지휘관이다. 아랫사람 책임으로 미룬다면 지휘관 자격이 없다”고 했다. 이번 수사 외압 의혹의 핵심에는 채 상병 소속 부대의 최고 책임자인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소장)이 있다. 박 대령은 당초 임 사단장 등 지휘관 8명에게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가 있다고 봤다. 그를 보직해임하고 이 사건을 재조사한 국방부는 그러나 임 사단장의 이름을 빼고 대대장 2명의 혐의만을 적시한 수사기록을 경찰에 넘겼다. 외압이 있었다면, 그 목적은 ‘임성근 구하기’였을 가능성이 있다. 경찰에 입건된 대대장은 채 상병 사고의 원인인 수중수색이 임 사단장의 지시였다고 주장하는 반면, 임 사단장은 ‘수중수색 중인 걸 알지도 못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해 해병 장교로 전역한 20대 A해병은 임성근 당시 1사단장 휘하에서 군 생활을 했다. 그는 지난해 7월 해병대 1사단이 경북 예천의 실종자 수색에 투입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도 의문이 들었다고 한다. 경북 예천에는 육군 부대가 이미 주둔하고 있는 데다, 해병대 1사단이 있는 포항에서 예천까지의 거리도 그리 가깝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관은 ‘지난해 1사단이 성공적으로 작전을 했기에 그 노하우를 전수하면서 대민지원을 나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2022년 태풍으로 인해 포항의 아파트 지하주차장이 물에 잠기는 일이 발생하자, 해병대 1사단은 상륙장갑차를 투입해 성공적으로 구조 작전을 수행한 바 있다. 지난해에도 상륙장갑차가 포항에서 예천까지 이동했지만, 급류로 인해 작전에 투입되지도 못했다. A 해병은 “사단장 지시 없이 부대가 타 도시로 이동해서 대민지원하기는 쉽지 않다. 대대장들 잘못도 있겠지만 부대가 예천에 투입되게 한 사단장 잘못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정의와 자유를 위하여 채 상병 순직 사건을 수사하다 해임된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이 지난해 9월 4일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보직해임 집행정지 신청 첫 심문에 출석하고 있다. 박 대령의 해병대 사관 81기 동기들도 이날 동행해 박 대령을 응원했다. 연합뉴스 해병대는 군기가 강한 부대다. 전역 후에도 기수로 선후배를 가린다. 군기의 핵심을 상명하복이라 할 때, 박 대령은 상부 지시를 불이행한 군인이라 볼 수도 있다. 이 이야기를 꺼내면 해병들은 하나 같이 “정의와 자유를 위하여”를 얘기했다. 이 문구는 금색 닻 위에 은빛 독수리가 앉아 있는 해병대 마크에도 담긴 문구로, 해병대가 존재하는 목적을 의미한다. 정원철 해병은 해병대 예비역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구전되는 부마항쟁 진압작전 이야기를 꺼냈다. 1979년 부마항쟁 당시 시위진압을 위해 부산에 투입된 박구일 해병대 7연대장은 대원들에게 ‘시민들이 때려도 맞아라. 총기만 빼앗기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정 해병은 “엄밀히 말하면 이것도 지시 불이행이거든요. 그렇지만 ‘정의와 자유를 위하여’라는 해병대 정신에 부합하는 거죠. 잘못된 지시는 따르지 않는 게 상식이죠”라고 했다. 김태성 해병대 사관 81기 동기회장(50)은 “윗사람의 잘못을 덮으라는 명령을 따르라는 건 해병대 정신이 아니다. 해병대 정신은 정의와 자유를 위한 정신이지, 맹목적 충성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박 대령과는 해병대 사관 동기인 김태성 회장은 해병대 예비역들이 이 사건에 관심을 갖도록 가슴에 불을 지핀 인물이다. 지난해 8월11일 박정훈 대령이 국방부 검찰단에 출석할 때 동행해 우산을 받쳐준 것을 시작으로 이 일에 발을 들였다. 이후 동기들과 함께 성명서를 내고, 광화문 이순신 동상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박정훈 대령이 영장실질심사(구속 전 피의자심문)를 받기 위해 군사법정에 출석할 때는 동기들과 함께 찾아가 해병대 군가 ‘팔각모 사나이’를 불렀고, 지난해 11월에는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1박2일간 50km를 행군했다. 박 대령과는 별 친분도 없었다. 1996년 3개월간 훈련을 같이 받은게 인연의 전부다. 그 스스로 말하듯 처음엔 단순히 “오지랖” 때문이었다. 그러나 속속 밝혀지는 사실관계는 박 대령이 잘못한게 없다는 확신을 줬다. 박 대령 휘하의 중앙수사대장(중령), 1광역수사대장(중령), 수사지도관(준위) 등은 모두 군검찰 조사에서 ‘임성근 사단장을 혐의자에서 제외하라’는 취지의 외압이 있었다고 진술했다. 김태성 회장은 “잘못되면 군생활이 끝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고 증언을 했다. 자기 목을 건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니다. 여론조사에서 이 사건에 대한 특검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73%가 나왔다. 이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이 상식선을 넘어서 있기에 국민들이 화가 난 것이다”라고 했다. 전국연대에서 각종 행사의 물품 지원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905기 안신현 해병(44)은 21대 국회 회기가 종료되기 전에 채 상병 사건에 대한 특검법이 통과되길 원한다. 군 장병이 목숨을 잃은 사건에 대해 진상을 규명하는 것은 국가의 당연한 의무라고 본다. 회사일을 마치고 밤늦게까지 전국연대 집행부 회의를 이어가야 하는 그로서는 “얼른 일상을 회복하고 싶다”는 소박한 마음도 있다. 그는 “해병대의 명예가 무너져 가는 게 싫어 나서기도 했지만, 제 자식이 가야하는 군대일 수 있다는 생각도 컸다. 이런 일이 또 일어나선 안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김태성 회장은 장기전을 준비 중이다. 오랫동안 문제가 풀리지 않더라도 시민들이 잊지 않도록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예정이다. 올해에는 해병대 2사단이 있는 김포 애기봉에서 출발해 대전 현충원과 예천 사고 지점을 거쳐 포항까지 가는 행군을 준비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씩 주말에 1박2일 행군을 진행한다면, 약 2년만에 포항에 닿을 수 있다는 계산이 섰다. 예비역 해병들은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 참여의 폭도 넓힐 계획이다. 그는 “해병대의 모토는 ‘안 되면 될 때까지’다. 전시에 총알이 빗발치는 상륙작전에 투입되는 해병대는 무모한 도전이 그 근간에 깔려 있다. 이 사건이 올바르게 끝날 때까지 행군을 멈추지 않겠다”고 밝혔다. 동기들에게 연신 미안해하는 박정훈 대령에게 김태성 회장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다소 오글거리고 촌스러울 수 있지만, 예비역 해병들을 움직인 것은 이런 마음일 수도 있다. “너만 해병이냐, 나도 해병이다.”
- 특집
- [오늘을 생각한다]해병대의 몫(2023. 10. 06 11:05)
- 2023. 10. 06 11:05 오피니언
- 7월 19일, 경북 예천 내성천에서 채 상병과 함께 급류에 휩쓸렸던 병사가 있다. 한참을 떠내려가던 그는 가까스로 물에서 건져지자마자 강둑을 따라 하류로 뛰었다.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전우를 찾아야겠다는 급한 마음. 사고 이후 어머니와의 통화에서 남긴 첫 마디는 그랬다. “엄마, 내가 수근이를 못 구했어.” 사고가 발생한 것도, 끝내 동료를 잃은 것도 그가 감당할 몫이 아니지만 자꾸 몫을 찾아 헤맨다. 사고 이후 두 달이 지났다. 그 사이 임성근 해병대 1사단장은 물에 빠졌던 부대원들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한다. 예천에서 채 상병이 실종됐을 때도 인근에서 수색 작업을 시찰 중이던 사단장은 사고 현장에 오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부하들이 까닭 없이 만난 생사의 갈림길에 자기 몫은 없다고 여긴 것일까. 혹여나 그 자리에 서면 부정할 수 없는 몫이 생길까 두려웠던 것일까. 사고가 발생한 것도, 끝내 부하를 잃은 것도 지휘관이 감당해야 할 몫이지만 여전히 사단장 자리를 지키고 앉은 그는 자꾸 몫을 피해 숨는다. 박정훈 대령에게 항명죄를 덮어씌워 요란스레 수사를 시작한 지도 한 달 반이 지났다. 수사하는 사람도 한평생을 군인으로 산 박 대령이 징역을 살고 연금수급권도 날아갈 항명죄를 범할 동기를 설명하지 못한다. 아마 알면서도 얘기를 못 하는 것일 터다. 부당한 수사개입의 공범이 되길 거부한 것. 그 선택이 상관인 해병대 사령관과 부하들을 모두 살렸다. 그렇게 그는 자기 몫의 안위를 버리고, 자기 몫의 책임을 지켰다. 며칠 전엔 사령관이 항명죄 수사 개시 직후 박 대령 휘하의 중앙수사대장과 나눈 통화 내용이 공개됐다. 사령관은 “우리는 진실되게 했기 때문에 잘못된 건 없다”며 부하의 무고함을 인정하면서 “나중엔 내 지시사항을 위반한 거로 갈 수밖에 없을 거다”며 겪게 될 고초도 예견한다. 잘못된 것이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임 사단장 등을 업무상과실치사죄로 민간에 이첩하는 것을 중단하라 지시했고, 부적절한 지시로 인해 부하는 곤경에 처하고 자신은 권력의 노여움을 비껴갈 수 있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그는 자기 몫의 안위를 지키고, 자기 몫의 책임은 버렸다. 9월 23일, 서울시청광장에서 해병대 한국전쟁 서울수복기념행사가 열렸다. 해병대가 중요하게 여기는 연례행사다. 그 자리에 사령관은 검은 옷을 빼입은 경호원들을 잔뜩 대동하고 나타났다. 같은 날 용산 전쟁기념관 앞에선 예비역 해병대원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박 대령의 복직과 채 상병 사망 원인 규명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그곳엔 박 대령, 채 상병과의 공통점이 ‘해병대’뿐인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다들 저마다의 몫을 맴돌며 산다. 부끄러운 삶과 부끄러움을 걱정하는 삶, 그 사이 어딘가에서.
- 오늘을 생각한다
- [사회]해병대캠프 참사 ‘대책 불감증’(2013. 12. 17 16:07)
- 2013. 12. 17 16:07 사회
- ㆍ유가족이 1인시위에 나선 까닭, “책임자들 빠져나가고 하청업체만 처벌” 폭설이 내리던 12월 12일 오후 청와대 사랑채 앞. 한 여인이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옷을 대여섯겹 껴입은 채로 마스크까지 썼다. 바람이 심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이 담긴 팻말이 쓰러지지 않게 간신히 붙든 상태로 우두커니 한참을 서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팻말에는 청와대 회의를 주재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사진 속 박 대통령은 지난 7월 공주사대부고 2학년 학생 5명이 숨진 태안 해병대 캠프 참사를 언급하며 “원인을 철저하게 규명하고 더 이상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확실하게 관리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태안 해병대 캠프 참사 유족들이었다. 지난 12일 서울 효자동 청와대 사랑채 앞에서 태안 해병대 캠프 유가족이 1인시위를 하고 있다. | 백철 기자 11일 오후 서울 여의도에서 유족 대표 이후식씨(48)·ㄱ씨(47) 부부와 이상민씨(53)·ㄴ씨(47) 부부를 만났다. 이상민씨는 인터뷰가 이어지는 동안 손에서 약봉지를 놓지 못했다. 약이 없으면 제대로 잠이 들 수 없기 때문이다. 유족들은 지난 12월 3일부터 청와대 앞에서 릴레이 1인 시위를 시작했다. 그 전날 검찰은 4개월여의 수사를 마치고 해병대 캠프 관련자들에게 1년에서 5년 사이의 금고형을 구형했다. 일부 언론은 업무상 과실치사의 법정 최고형이 5년이라는 점을 들어 “검찰이 최고 형량으로 구형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유족들은 허탈했다. 해병대 캠프 업체에 하청을 준 유스호스텔 대표 오모씨에게는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가 적용되지 않았다. 사고 현장검증 조사도 이뤄지지 않았다. 유족들은 “검찰은 이미 피의자들이 혐의를 인정한 상황에서 굳이 현장을 볼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었다”고 전했다. 생업 접고 청와대 사랑채로 출퇴근 검찰은 해당 유스호스텔의 실질적 주인인 H기업에 대해서도 수사하지 않았다. 해병대 캠프 운영을 감독할 책임이 있는 태안군, 충남교육청, 해경 중 그 누구도 실질적인 책임을 지지 않았다. 교육부는 참사 유족들을 위한 장학재단 설립과 적절한 보상을 약속했지만 이 역시 5개월이 지나도록 지켜지지 않고 있다. 3일부터 유족들은 무기한으로 1인 시위를 진행하기로 하고 청와대 앞으로 출퇴근을 시작했다. 충남 공주시에서 첫 차를 타고 아침 일찍 서울 효자동에 위치한 청와대 사랑채에 도착해 오후 4시까지 1인 시위를 진행한 후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유족들의 일상이 됐다. 이상민씨 가족은 아예 자가 주택을 팔고 전셋집으로 이사했다. 생업을 접고 청와대가 자신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까지 이사하고 남은 돈으로 생활하겠다는 의지였다. ㄴ씨는 “어차피 우리 아이들을 나라에서 데려간 거잖아요. 그럴 바에야 우리 부모들도 다 데려가라, 이런 각오로 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1인 시위에 참여하는 유족들은 숨진 학생들의 부모들이다. 이후식씨는 자신의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답답하다”고 말했다. 사고가 난 지 한 달여쯤, 이씨의 부친이 갑자기 쓰러졌다. 애지중지하던 손자를 잃은 뒤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끝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씨의 아들 고 이병학군은 집안에서 촉망받는 아이었다. 장손이었던 이군은 초등학교 3학년부터 집안 어른들로부터 “너는 우리 집안의 대들보다”라는 말을 들어왔다. 이씨가 말했다. “그렇게 아끼던 손자한테 사고가 나서인지 아버님께서 계속 식사도 못하시다가 쓰러지신 거죠. 일주일 정도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시다가 겨우 건강을 되찾으셨어요. 하지만 지금 아버님의 모습은 사고 전의 반도 안 될 정도로 몰라보게 변하셨어요. 아버님만 생각하면 또 제 가슴이 답답합니다….” 공주사대부고는 전교생의 절반을 전국의 중학교에서 선발하고, 나머지 절반은 인근 중학교에서 뽑는다. 그렇게 모인 학생들이 하루종일 기숙사에서 생활한다. 경쟁은 치열하고 부모와 함께할 시간은 적은 셈이다. 고 이준형군의 모친 ㄴ씨는 아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이 한으로 남았다. “제 아들도 그렇고 다들 어린 시절부터 마음껏 놀지 못하고 자라서 공주사대부고로 진학을 했어요. 여기가 기숙사 학교다 보니 부모와 보낼 시간도 거의 없고, 방학 때도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요. 아이가 고등학생이 된 이후에는 밥 한끼도 제대로 먹이지 못했는데….” 이후식씨와 유족들은 철저한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기 위해 지난 4개월 동안 직접 현장을 다녔다. 검찰이 가지 않은 사고현장도 직접 살펴보고, 기소된 유스호스텔 대표 뒤에 H기업이 있다는 점도 밝혀냈다. “이 사건은 인권문제로 봐달라” 유족들은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대전지검 서산지청도 방문했다. 유족들은 “교관들의 행위를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으로 볼 순 없느냐고 물었지만 부정적인 답변만 받았다”고 전했다. 시간만 지나고 수사는 더디게 진행되자 유족들은 돈을 모아 지역의 유명 변호사를 섭외하려고도 시도했다. 대검과 교육부를 찾아 정확한 진실을 규명해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 바로 청와대 앞 사랑채였다. 지난 7월 19일 한 공주사대부고 학생이 사설 해병대 캠프에서 목숨을 잃은 친구의 책상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연합뉴스 이씨와 유족들이 정부 기관의 무관심보다 더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보상을 노리는 것 아니냐’는 시선이었다. 이씨는 “이 사건은 인권문제로 봐달라”고 말했다. 그는 “교육현장에서 학생들이 사지로 내몰린 것만큼 인권이 유린된 일이 없죠. 철저한 수사도 없이 실질적 책임자들이 빠져나가는 것은 우리 아이들을 두 번 죽이는 것 아닌가요”라고 반문했다. 현재 태안 해병대 참사 유족들은 “사설 해병대 캠프가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후식씨는 확실한 자격을 갖춘 해병대 캠프만 유지가 된다면 해병대 캠프 자체는 반대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사건에서 인명구조사 자격증을 갖춘 교관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마저도 사건 당일에는 다른 캠프에 나가 있었다”며 “돈벌이에만 혈안이 된 사설 해병대 캠프는 없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ㄴ씨는 해병대 캠프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애초에 군대 갈 나이가 아닌 학생들에게 군대를 체험하게 한다는 것 자체가 21세기식 창의적 교육과 거리가 멀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제가 학생일 때는 교련과목도 있었지만 지금은 다 없어졌어요. 또래들과의 협동심을 기르기 위해 꼭 군대식 교육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왜 교육부에선 문화유적 답사 등 다른 여러 가지 창의적인 캠프는 생각하지 못할까요.” ㄴ씨의 남편 이상민씨는 해병대 캠프가 오히려 학생들에게 군대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심어줄까봐 걱정된다고 말했다. 이씨는 “지금 전국적으로 고등학교 해병대 캠프를 실시하고 있는데, 거기서 학생들이 처음으로 군대문화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며 “부실하게 운영되는 해병대 캠프를 통해 학생들이 ‘군대는 무조건 나쁜 것’으로만 생각할 것 같아 걱정된다”고 말했다. 이상민씨는 또 태안 참사의 이면에는 안전불감증뿐만 아니라 뿌리 깊은 하청구조가 자리잡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사건처럼 하청에 재하청을 거듭하다 보면 좀 더 값이 싼 사람을 쓰게 되고, 안전이 뒷전으로 밀리는 건 너무나 당연하잖아요. 대통령이 나서서 진상을 규명하겠다고 말했음에도 하청을 받은 당사자들만 처벌하고 넘어간다면 과연 안전불감증에 대해 사회적으로 경각심을 줄 수 있을지 의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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