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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북 식량원조에 조건 달면 핵무기 포기 설득 더 어렵다”(2021. 11. 26 20:58)
- 2021. 11. 26 20:58 경제
- ㆍ댄 스미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장 인터뷰 세계기아지수 보고서를 작성한 기관은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tockholm International Peace Research Institute·SIPRI)다. 이 기관은 분쟁, 안보, 군비, 군축을 전문적으로 조사하는 독립 연구기관이다. SIPRI는 1966년 타예 에를란데르 스웨덴 총리의 제안으로 설립된 후 스웨덴 정부가 출자했지만,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2014년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로더연구소가 발표한 미국 밖 싱크탱크 순위에서 3위에 올랐다. 댄 스미스 소장과는 지난달 화상인터뷰가 이뤄졌다. 이후 e메일을 통해 추가 인터뷰를 진행했다. 댄 스미스 스톡홀롬 국제평화연구소장이 화상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세계 기아의 원인은 무엇인가. “코로나19 발생 이전 6년간의 상황을 보면 기아가 증가하고 있었다. 30여년간 기아 감소를 위한 노력이 무색한 상황이었다. 코로나19 발생 전에 왜 이런 상황이 발생했는지 살펴보면 크게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분쟁, 두 번째는 기후변화의 영향이다. 식량 불안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평화구축이 선행돼야 한다.” -분쟁이 발생하면 왜 기아가 증가하나. “분쟁과 기아의 증가는 양방향 모두 작용하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기아가 증가하면 폭력 분쟁이 증가하고, 반대로 폭력 분쟁이 증가하면 기아가 증대한다. 첫 번째 연결고리를 보자. 식량 공급이 불안정해 식량이 부족하면 가격이 급등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배를 채울 다른 방법을 찾는다. 한 예로 극단주의 단체인 지하디스트 같은 단체는 식량이 부족한, 생계가 어려운 사람들을 요원으로 모집한다. 또는 농촌을 떠나 도시에 정착하기를 희망하지만, 정작 도시에 가면 이러한 폭력이나 분쟁 상황에 가담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두 번째 연결고리, 즉 분쟁이 증가하면서 기아가 증대되는 것은 다소 이해가 쉬울 것으로 생각한다. 식량을 재배할 토지가 부족해지면서 폭력이 일어나고, 식량 공급이 줄어드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폭력 상황으로 인해 기근을 무기화해 식량 공급이 나빠지고, 기아상태가 심해질 수 있다. 한 나라의 통치가 불안정하고 치안이 불안하게 될 때 그 원인이 어디 있는지 찾아보면 식량 불안정이 큰 원인이 되기도 한다. 식량은 평화로운 사회, 그리고 연대의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 국가별로 어떤 경로로 식량 불안정이 발생했는가를 살펴보면 사안별로 다르고 정확한 인과 경로는 다르겠지만 중요한 사실은 식량 불안정이 발생하게 되면 평화도 불안해진다는 점이다.” 케냐 수도 나이로비 인근에서 압수된 불법 총기 5250정이 불에 타고 있다. / AP연합뉴스 -코로나19가 기아와 분쟁을 더 악화시켰다고 생각하나. “논리적으로 보면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코로나19가 빈곤을 더 악화시켰으며 빈곤지역을 더 강타했다는 것이라는 건 추론할 수 있다. 영양실조나 부족을 겪고 있는 지역일수록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 노출도가 크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아동 영양상태가 가장 열악한 이유는 무엇인가. “복합적인 요소가 있다. 첫 번째가 폭력 분쟁 상황, 두 번째가 기후변화로 인한 영향, 세 번째가 선정(good governance)의 부재, 즉 정부가 실정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후변화로 인한 영향, 분쟁과 식품 공급과 같은 복합적인 이슈 중에서 핵심은 정부가 과연 이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실효성 있게 창의적인 해법을 찾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만약 일국의 정부가 실정을 일삼고 시민을 돌보지 않아 영양공급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고통을 받는 주체는 그 나라의 시민일 수밖에 없다.” -기아와 실정,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대표적으로 어떤 국가가 있는가. “기아와 실정이라는 2개의 연결고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국가로는 말리와 북부 분쟁을 포함한 나이지리아를 꼽고 싶다.” -나이지리아는 석유수출국으로 아프리카에서도 부국에 속하는데, 왜 기아와 분쟁이 발생하나. “특히 기후변화로 직격탄을 맞고 있는 곳이 나이지리아 북부 지역이다. 나이지리아 주민들이 집을 떠나 실향민이 되고 있다. 보코하람과 같은 극단주의 단체가 이를 이용해 세력을 불리고 있다. 너무 세력이 강해져 일부 주의 통치를 위협하는 수준이다. 해당 지역의 주민들은 거주지를 떠나 도시로 몰리고 있다. 그래서 식량 불안정성이, 그리고 기아가 발생하는 거다. 석유수출국인 나이지리아는 부국일 수 있지만, 상당수 나이지리아 주민들은 석유가 불러오는 부의 행운으로부터 배제돼 있고 소외돼 있다. 델타 지역으로 불리는 나이지리아 남부 지역에서 석유가 많이 생산되고 있는데, 이 지역에서는 환경적 재앙을 야기하는 주범으로 석유가 지목되기도 한다.” 에티오피아 / 컨선월드와이드 제공 -2021 세계기아지수에서 소말리아가 기아 위험이 가장 높게 나온 이유와 배경은 무엇인가. “소말리아는 지난 30년간 혼란 상태에 빠져 있다. 현재 국제사회의 지원에 힘입어 소말리아 정부에서 질서 구축에 나서고 있지만, 1990년대에 독재정부 전복 상황과 같이 대혼란의 상황에서 시민은 혼란의 수렁 한가운데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서 지하디스트 인 알샤바브라는 단체가 정부를 꾸릴 수 있을 규모로 세를 불리고 있다. 소말리아의 상황을 악화시킨 또 다른 요인은 바로 기후변화다. 1960년대 이래로 소말리아의 평균기온은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다. 매년 극심한 가뭄과 홍수가 소말리아를 강타하고 있다. 두가지 기후 재해로 인해 식량 생산이 어려워지고 생산 비용이 올라가고 있다. 특히 건조 지역에 홍수가 발발하면서 비옥한 토양이 씻겨 내려가는 참사마저 발생하고 있다. 나이지리아에서도 이제 농촌이나 농가를 떠나 소말리아 대도시 변방부에 머무르는 주민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것도 분쟁에 불을 지피는 요인이 되고 있다. 알샤바브는 정부보다 한걸음 빨리 식료품 지원을 제공하면서 주민들을 자신들의 대원으로 포섭할 수 있는 기회로 악용하고 있다. 세를 불리는 가운데 기후변화 영향은 더 악화하고 있다. 서로 기름을 붓고 있는 상황이다. 식량 불안정성으로 기아가 악화하고, 기아가 악화하면서 식량 불안정성이 더 악화하는 상황이 복합적으로 상호 추동적인 상황을 만들고 있다. 기아 상황이 분쟁을 야기하고, 분쟁이 또 기아를 불러오는 부정적 사이클이 있다. 반면 식량 안정성이 확보되면서 평화가 구축될 수 있는 긍정적 사이클이 있다. 즉 양면적 사이클이 이들 국가에는 공존한다고 생각한다.” -긍정적 사이클을 만들기 위해 국제사회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이런 커다란 방정식에서 첫 번째는 분쟁 요소의 복합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복합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단일한 해법은 없다는 상황을 인식해야 한다. 중요한 사실은 식량안보라는 것과 분쟁 해결, 즉 평화 구축이라는 2개 요소가 상호 연결되고 연동돼야 한다는 것이다. 분쟁을 겪고 있는, 또는 분단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역사회가 있다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식량 공급망을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 또는 어떤 식으로 식량을 재배할 것인가 하는 해법 모색을 통해 평화를 정착하는 지름길로 돌아올 수 있다. 덧붙이면, 식량위기 직격탄을 받은 국가의 주민들을 한 테이블에 모아야 한다. 해당 지역에 정확하게 무엇이 필요한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공유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제안하는 ‘푸드-피스 허브(Food and Peace Hub)’라는 개념이다. 푸드-피스 허브에서 지역사회, 기구, 전통적인 리더 역할을 하는 분들, 정부, 국제 NGO,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가 한데 모여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고 무엇이 최상의 해법인지를 함께 찾아야 한다.” 파키스탄 / 컨선월드와이드 제공 -아프가니스탄의 식량과 기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한국도 많은 원조를 했다. 그런데 탈레반의 복귀로 너무 쉽게 무너지자 한국인들이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케이스다. 가장 심각한 사례 중의 하나다. 우선 식량원조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갔고, 흘러갔다고 해도 근본적인 문제해결에 일조하지 못했다. 아프가니스탄은 자체가 통합된 단합된 국가일 수가 없다. 굉장히 분절, 파편화가 많이 돼 있고 많이 부족한 국가다. 1979년 서방권이 침투했을 때, 국가 차원에서 아프가니스탄이 파국의 길을 걷고 있었는데, 그 이후로 회복하지 못한 것도 하나의 이유다. 2001년에 서방에서 다시 아프간에 들어갔을 때 물론 동기나 계기 자체는 달랐겠지만, 분쟁은 개선되지 못하고 악화 일로를 걷고 있었다. 식량원조를 받아 국민에게 일정 부분 식량을 공급했지만, 근본적인 문제해결을 할 수 없었다. 식량원조가 시민의 생존에는 도움이 됐지만, 식량안보를 통한 평화유지라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데는 실패한 것이다. 왜 그럴까? 달성을 위한 효과적인 실천적 노력이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식량안보와 평화를 동시에 만들겠다는 노력이 없었다. 미국과 나토(NATO)는 탈레반을 격퇴하겠다는 일념으로 아프간에 들어갔다. 시작부터 잘못됐다. 아프간에 처음 들어갈 때 테러와의 전쟁을 목표로 들어갔기 때문에 포용적 사회와 평화 구축을 위한 슬로건이 너무 부재했다.”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는 북한도 식량난을 겪고 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식량을 지원하지 말자는 주장도 있다. “식량원조에 조건을 달면 북한 지도부가 핵무기를 포기하도록 설득하기 어렵다. 조건이 작동하려면, 지도부가 염두에 둔 해법을 강화하는 것이어야 한다. 아마도 북한은 자신들이 굴복하게 될 여지가 있는 원조를 거절할 것이라 생각한다.”
- 표지 이야기
- [신간]핵과 인간-핵무기를 통해 본 전쟁의 이면(2018. 07. 30 15:01)
- 2018. 07. 30 15:01 문화/과학
- <핵과 인간> 정욱식 지음·서해문집·3만2000원 핵무기를 통해 세계 냉전의 역사를 톺아본 책이다. 2012년 저자가 출간한 <핵의 세계사>에 최신 미국의 비밀해제 문서와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외교문서 등의 내용을 넣어 보완했고, 후반부는 북핵문제에 초점을 맞춰 새롭게 집필했다. 제2차 세계대전부터 세계 역사의 흐름은 핵무기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2차 세계대전은 히로시마 등에 떨어진 최초의 핵폭탄으로 종결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저자는 각종 자료를 통해 일본 항복의 결정적 요인은 핵이 아니라 소련의 참전이었다고 지적한다. 미국의 핵 투하도 경쟁국인 소련에 대한 무력시위였다는 것이다. 이후 소련은 미국의 예상시점보다 빠른 1949년에 핵실험에 성공한다. 한국전쟁 역시 핵무기를 소유한 미국과 소련이 ‘핵의 위력’을 맹신하는 지점에서 발생했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미국은 핵전력이 크게 떨어지는 소련이 북한에 남한 공격을 명령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고, 반대로 소련은 핵개발에 성공한 소련을 상대로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봤다는 것이다. 북핵문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도 제시한다. 북핵문제는 통상 북한의 거짓말과 시간끌기의 반복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하지만 저자는 북한이 1993년 NPT를 탈퇴할 당시 북한과 미국 및 IAEA의 갈등, 한·미 팀스피릿 훈련 재개 등 외적 요인이 반영됐다고 주장한다. 1994년 제네바 합의가 체결된 후 북한은 8년간 핵개발을 동결했지만, 북한에 약속된 경수로는 중단됐고, 미국은 약속했던 ‘소극적’ 안전보장도 해주지 않았다. 북핵위기가 불거질 당시 미국 대북 강경파들의 석연찮은 행동과 주장도 살펴봐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리더의 말공부 | 박수밀, 송원찬 지음·세종서적·1만5000원 동양 고전에서 말하는 리더십의 가르침을 모았다. <논어> <맹자>부터 권필의 <석주집>, 윤형로의 <계구암집> 등 수백여 편의 저서, 편지, 일기, 문집에 녹아 있는 옛선인들의 통찰과 교훈이 담겨 있다. 유연한 사고와 능동성을 가진 진정한 리더의 가치와 미덕을 발견할 수 있다. ▲빈곤자본 | 아나냐 로이 지음·김병순 옮김·여문책·2만3000원 소액금융은 두 얼굴을 가졌다. 2006년 그라민은행이 노벨평화상을 받으면서 소액금융은 인구를 가난에서 구원할 방법 중 하나로 꼽혔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소액금융은 빈곤층을 통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방법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소액금융의 의미와 역할을 분석한다. ▲천 개의 태양보다 밝은 | 로베르트 융크 지음·이충호 옮김 다산사이언스·3만2000원 미국과 독일의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를 다룬 최초의 간행물이다. 1961년 출간돼 절판된 이후 재출간됐다. 핵분열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의미를 놓고 도덕적으로 고민한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국제사회가 핵무기를 바라보는 시각을 시대배경과 함께 더 밀접하게 이해할 수 있다.
- 신간
- [세계]이스라엘 핵무기 판매 시도 ‘탄로’(2010. 06. 02 19:50)
- 2010. 06. 02 19:50 국제
- ㆍ1970년대 중반 남아공과 접촉… ‘핵 보유’ 사실 새로운 증거 이스라엘이 1970년대 중반에 아파르트헤이트(흑백분리) 시절 남아프리카공화국 백인 정권에 핵무기를 판매하려 한 문서가 공개되면서 이스라엘 핵 문제가 다시 관심을 끌고 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이 입수해 5월 23일 폭로한 문서는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글로 쓰인 첫 증거라는데 의미가 있다.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대통령이 5월 5일 예루살렘 대통령 관저에서 체코 외무장관과 회담 도중 웃고 있다. 예루살렘/AP연합뉴스 남아공의 기밀문서가 공개되기 이전까지 이스라엘 핵 보유 가능성을 보여 주는 근거로는 두 가지가 언급됐다. 하나는 1986년 이스라엘 내부고발자가 영국 일간 선데이타임스에 폭로한 디모나 핵시설 관련 자료다. 또 하나는 1979년 이란 혁명 후 이란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입수한 문서로, 이란 국왕이 핵무기 개발과 관련해 이스라엘에 관심을 표명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가디언이 폭로한 남아공 기밀 문서는 두 근거보다 구체적이다. 문서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남아공에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예리코 미사일 판매를 공식 제의한 것은 1975년 3월 31일이다. 그러나 본격 협상은 두 달 뒤인 6월 4일 이뤄졌다. 페레스 대통령 보도내용 전면 부인 당시 피터 윌렘 보타 남아공 국방장관과 현 이스라엘 대통령인 시몬 페레스 국방장관은 스위스 취리히에서 핵 협상을 위해 만났다. 당시 회의록에 따르면 보타 장관은 ‘적당한 탄두’를 탑재할 수 있는 제한된 숫자의 ‘샬레’에 관심을 표명했다. ‘샬레’는 이스라엘산 예리코 미사일의 암호명이다. 페레스 장관은 “‘적당한 탄두’는 세 가지 사이즈를 이용할 수 있다”고 답변했다. 가디언은 세 가지 사이즈 탄두는 재래식·화학·핵무기를 지칭하며, 보타 장관이 ‘적당한 탄두’라는 완곡어법을 쓴 것은 이스라엘이 핵무기 문제에 민감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보타 장관은 비용 문제 때문에 협상을 진전시키지 않았다고 전했다. 가디언은 또 양국 국방장관이 핵 협상을 하기 두 달 전인 4월 3일 합의 내용을 한쪽이 일방적으로 공개하지 못하도록 하는 등 군사동맹에 관한 비밀 합의에 서명했다고 밝혔다. 페레스 이스라엘 대통령 측은 가디언 보도 이튿날인 5월 24일 성명을 통해 “이스라엘은 남아공과 핵무기 거래 협상을 한 적이 없다”며 보도 내용을 전면 부인했다. 성명은 “유감스럽게도 가디언 기사는 확고한 사실이 아닌 남아공의 문서에 대한 선택적 해석에 근거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문서 등을 남아공 정부로부터 입수해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남아공과 이스라엘 간 관계를 다룬 책 <무언의 동맹(Unspoken Alliance)>을 최근 출간한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 어페어스>의 부편집장인 사샤 폴라코프서랜스키는 페레스 대통령 측에 대해 반박했다. 그는 25일 미국의 TV·라디오 프로그램인 <디모크러시 나우>에 출연해 “내가 책에서 밝힌 것은 가디언이 공개한 문서뿐만 아니라 네 가지 문서에 바탕해 해석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스라엘은 왜 남아공과 핵무기 거래를 하려고 했을까. 해답은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남아공과 이스라엘의 끈끈한 유대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가디언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 때부터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비판적이었다. 이 때문에 1960년대까지 아프리카 신생 독립국들과 유대관계를 맺어 왔다. 그러나 1973년 ‘4차 중동전쟁’ 이후 아프리카 국가들은 이스라엘을 새로운 식민주의 국가로 인식하면서 이들과 관계가 멀어졌다. 새로운 아프리카 동맹국을 찾아 나선 이스라엘은 남아공을 대상으로 삼았다. 이스라엘 디모나 핵시설 전경. | 연합뉴스 이스라엘 핵무기 판매 제의가 있은 이듬해인 1976년 존 포르스터 당시 남아공 총리는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나치에 학살된 600만 유대인을 기리기 위해 만든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찾았다. 포르스터가 나치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남아공 파시스트라는 점은 하등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츠하크 라빈 당시 이스라엘 총리는 포르스터를 자유의 지도자라고 찬미하고 환영 만찬에서는 “이스라엘과 남아공의 공동 이상, 정의와 평화적 공존을 위한 희망을 위해” 건배할 것을 제의했다. 이스라엘에 부정적이던 남아공이 적극적으로 돌아선 이유는 무엇일까. 남아공이 1976년 말에 제작한 연감에서 찾을 수 있다. 연감은 남아공과 이스라엘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적시했다. 공통점은 “두 나라는 대부분 흑인들이 사는 적대적인 세계 안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다. 남아공은 억지력 차원과 주변국에 대한 잠재적인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미사일이 필요했던 것이다. 폴라코프서랜스키에 따르면 1970년대 중반 남아공은 핵 확산 방지를 위해 우라늄 농축 원료로 사용되는 옐로케이크 통제에 관한 안전장치를 풀 정도로 발전한다. 그 대가로 이스라엘은 남아공에 열핵무기 제작에 필요한 트리튬(삼중수소) 30g을 제공했다. 트리튬 30g은 핵무기 몇 개를 제조할 수 있는 양이다. 남아공, 이스라엘 무기 최대 고객 당시 양국의 긴밀한 유대관계의 중심에 시몬 페레스 국방장관이 있었다. 페레스는 5년 전 아파르트헤이트 백인 정권과의 유대관계에 관한 도덕성을 묻는 가디언 기자의 질문에 “당시 남아공 흑인운동 단체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 함께 우리를 반대했다.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는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비난을 중단하지 않았으며 동의하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1974년 당시 남아공 내무장관에게 보낸 서한에서 “불의에 대한 공동의 증오와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흔들리지 않는 토대”에 대해 강조했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남아공 백인 정권에 대한 깊은 애정은 페레스뿐만 아니라 라파엘 에이탄 전 참모총장, 아리엘 샤론 전 총리도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은 1980년대 후반 아파르트헤이트 남아공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력이 고조되자 관계 단절을 모색했다. 그러나 보안기관이 반대했다. 알론 리엘 전 남아공 주재 이스라엘 대사는 “1986~1987년 무렵 백인에서 흑인으로 관계 전환을 모색하려 하자 보안기관은 ‘미쳤냐, 자살행위나 다름없다’고 했다. 그들은 과거 1970년대 중반에 우리의 주고객이던 남아공이 아니었다면 방위산업과 항공산업은 존재할 수 없었다. 그들이 이스라엘을 구했다. 어쨌든 그것은 사실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북한, 인도, 파키스탄과 함께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하지 않은 이스라엘은 그동안 핵무기 보유에 대해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핵 모호성’ 정책을 고수해 왔다. 페레스 대통령의 전면 부인에서도 보듯이 이번 문서 공개로 이스라엘의 핵 정책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아랍 국가들이 모색하고 있는 ‘중동 비핵화’ 구상은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 [포커스]핵무기 탑재 능력은 아직 미지수(2009. 06. 04)
- 2009. 06. 04 정치
- 북한 핵 기술 어디까지 왔나, 고도의 소형화 개발은 시간 걸릴 듯 장소는 같다. 북한이 2차 핵실험을 강행한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는 2006년 9월 북한이 1차 핵실험을 했던 지역이다. 위력은 커졌다. 기상청은 이번 핵실험으로 발생한 인공지진의 강도가 리히터 규모 4.4라고 발표했다. 1차 핵실험 때는 이보다 0.8 낮은 규모 3.8이었다. 국내 전문가들은 이 수치를 토대로 이번 핵실험으로 발생한 에너지는 1차 때보다 20배가량 큰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통상 리히터 규모 1이 증가할 때마다 에너지는 30배가량 증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지질조사국의 관측은 규모 4.7(1차 때에 비해 0.5 증가)로 우리 기상청 관측과 차이가 나지만, 1차 때와 비교해 지진 강도가 증가했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3년 전보다는 확실히 발전 핵무기의 실제 폭발력도 강화됐다는 평가다. 1차 핵실험 때 폭발력은 1kt 미만이었다. 이상희 국방부 장관은 핵실험 당일 국회국방위에서 “(폭발 위력이) 1kt 이상은 분명하며 최대 20kt까지 되는 실험일 수 있다”고 말했다.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핵폭탄의 폭발 규모는 각각 15㏏과 22㏏ 정도였다. 반면 CTBTO(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기구)는 “산하 전 세계 39개 관측소의 관측을 종합한 결과 폭발력은 ‘낮은 한자릿수 kt 범위’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핵공학 전문가인 시그프리드 헤커 미국 스탠퍼드 대학 국제안보협력센터 소장의 말을 인용해 “이번 핵실험의 폭발력은 3년 전 1차 때의 2~4배인 2~4kt으로 소규모”라고 전했다. 평가 주체에 따라 핵실험의 실제 폭발력에 대한 추정치는 최소 2배에서 최대 20배까지 차이가 있지만, 북한의 핵기술이 3년 전에 비해 분명히 발전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견해가 일치하는 셈이다. 북한의 핵 관련 기초연구는 1950년대 시작됐다. 1955년 김일성종합대학 물리학부에 핵물리강좌가 개설됐고 이듬해 과학원 수학물리연구소에 핵물리실험실이 설치됐다. 1965년쯤에는 소련의 도움을 받아 영변에 우라늄을 사용하는 IRT-2000 연구용 원자로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1973년에는 김일성종합대학에 물리학과와 방사화학과를 만들었고 김책공업종합대학에는 핵물리공학부를 설치했다. 북한은 이 무렵부터 핵 관련 외국 전문서적을 본격적으로 번역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너지난이 심화한 1980년대에는 원자력을 이용한 전력 생산을 추진했다. 1986년 UF6(6불화우라늄) 생산공정을 개발했고, 1986년에는 영변 5MWe 원자로가 가동을 시작했다. 1989년에는 재처리시설인 방사화학실험실이 부분적인 가동에 돌입했다. 탄도미사일 기술 아직은 의문 핵에 대한 북한의 접근이 에너지 확보 차원에서 군사적 차원으로 이동한 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다. 북한은 1986년 기존 원자력위원회를 원자력공업부로 개편하고 이듬해에는 영변지역을 노동당 군수공업부가 관할하도록 했다. 국방부는 북한이 1983년부터 70여 회 고폭실험을 실시하고, 1993~1998년에는 기폭장치 실험을 실시한 것으로 보고 있다. 과학정책연구원이 5월 15일자로 발행한 보고서 ‘북한의 핵 및 로켓기술 개발과 향후 전망’에 따르면, 북한은 1만5000t량의 우라늄 자원과 5MWe 흑연감속로를 사용해 연간 6~7㎏의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고 그동안 양성한 전문인력은 5000명 정도, 핵무기 생산에 관여하는 인력은 200여 명인 것으로 파악된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핵무기 제조 능력을 이미 확보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북한은 현재 6~8기의 핵무기를 제조하는 데 충분한 양의 플루토늄을 생산하고 핵폭발 장치 1기를 이미 완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핵무기 제조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해서 북한이 곧장 핵보유국이 될 수는 없다. 우선 핵확산금지조약(NPT)이 걸림돌이다. 이 조약 9조3항은 핵무기 보유국을 “1967년 1월 1일 이전에 핵무기 또는 기타 핵폭발 장치를 제조하고 폭발시킨 국가”로 규정하고 있다. 이 기준을 충족하는 국가는 미국, 러시아, 중국, 역국, 프랑스 5개국뿐이다. 다른 국가는 모두 핵비보유국가로 분류되며, 핵보유국이 이들 국가에 핵무기나 핵무기 제조기술을 이전하는 것은 금지돼 있다. 이 때문에 북한이 요구하는 것은 NPT체제 밖에서 핵보유를 ‘사실상’ 인정받는 것이다. 선례가 없지는 않다. 인도는 1998년 사막에서 지하 핵실험을 했으나 NPT 가입은 거부했다. 이에 당시 클린턴 행정부는 인도에 대해 경제재재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미국은 2006년 추가 핵물질 생산과 추가 핵실험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인도를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고 민수용 핵기술과 핵연료 제공을 약속했다. 문제는 북한과 인도의 입장이 확연히 다르다는 점이다. 한 국책연구기관 연구원은 “미국이 북한을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건 어렵다”면서 “인도에 대해서는 중국 견제라는 전략적 고려가 작용했다. 파키스탄도 대테러 전쟁 협력을 조건으로 기득권을 인정해줬다. 그러나 북한을 인정하면 일본과 한국으로 핵이 확산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기술적인 문제도 걸림돌이다. 북한은 핵무기 제조 능력은 보유하고 있지만 핵무기를 실어나를 수 있는 기술까지 갖추고 있는지는 미지수다. 여기서 관건이 되는 것은 소형화 기술과 탄도미사일의 성능이다. 일반적으로 미사일에 장착할 수 있는 핵무기의 중량은 미사일 적재 가능량의 3분의 1 수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핵무기를 미사일에 장착하려면 강한 폭발력을 갖는 것을 전제로 탄두 무게를 1t 이하로 줄여야 한다. 북한은 아직 이 정도 수준의 소형화 기술을 보유하지는 못한 것으로 파악된다. 인공위성 발사라는 명분으로 수차례 로켓발사 시험을 했지만, 탄도미사일 기술 수준도 아직 본궤도에 올랐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 문제는 북한이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북한이 추가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통해 핵무기의 폭발력과 제어력을 확보하고 미사일 기술을 더욱 개선한다면 기술적 난점을 극복하는 것은 시간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장용석 평화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고도의 소형화 기술 개발에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초보적인 소형화 기술은 이미 공개돼 있다”면서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스커드 미사일은 구 소련에서 도입해올 당시부터 전술핵 탑재력을 갖추고 있었고 대포동 계열 미사일도 발사각 조절로 사거리를 6000㎞로 늘릴 수 있다는 얘기도 있다. 미국이 보유한 전술 핵무기 수준은 어려울지 몰라도 폭발력을 줄인다면 저위력 소형 핵무기 정도는 만들 수 있다”고 우려했다.
- [요즘 이 책]북한은 과연 핵무기를 포기할 것인가(2009. 04. 23)
- 2009. 04. 23 문화/과학
- 오바마의 미국과 한반도, 그리고 2012년 체제 정욱식 지음·레디앙 대안은 이렇다. 한반도 비핵화를 단순한 북핵문제의 해결이라는 좁은 틀에서 이해하지 말고, ‘핵무기 없는 세상’이라는 큰 관점에서 접근할 것을 주문한다. 한반도는 대혼돈의 시기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의 로켓 발사가 유엔결의안 1718호 위반이라고 규정했다. 북한 외무성 성명은 “북핵 6자회담에 다시는 절대로 참가하지 않을 것”이라며 “기존 6자회담의 어떤 합의에도 더 이상 구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과연 북한은 핵무기를 포기할 것인가. 북한을 의심하기는 너무도 쉽다. 2005년 9·19 공동성명이 있다. “6자는 6자회담의 목표가 한반도의 검증 가능한 비핵화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달성하는 것임을 만장일치로 재확인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계획을 포기할 것과 조속한 시일 내에 핵확산금지조약(NPT)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안전조치에 복귀할 것을 공약하였다.” 2005년 6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을 만났을 때, 한반도 비핵화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고 말했다. 북한은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포기가 한반도 비핵화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이렇듯 국제사회에 대한 북한의 핵 포기 의지와 약속은 확인됐다.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특사로 임명된 스티븐 보즈워스는 “북한은 핵무기를 목적이 아니라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평가한 바 있다. 문제는 북한의 약속을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 따라 어떻게 실천으로 이끌어내느냐에 있었다. 17대 대선이 코앞이었던 2007년 11월, 김양건 북한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이 남한을 방문했다. 당선이 예상되는 이명박 정권의 대북정책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 탐색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보수진영 인사들은 ‘보수까지 껴안을 수 있는 우리가 더 잘할 수 있다’고 했다. 저자 정욱식씨는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6자회담 참가국이자 미국의 동맹국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한반도 비핵화 프로세스에 제동을 걸고 있는 것은 ‘악의적 무시’의 정책적 표현”이라며 “1기 부시 행정부 때 네오콘의 정책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라고 혹평했다. 북한 외무성 성명은 ‘자체의 경수로발전소 건설’을 언급했다. ‘고농축 우라늄(HEU) 프로그램 개발’ 카드까지 꺼내들었다. ‘오바마’ 미 대통령의 이름을 내건 책은 30권도 넘게 출간됐다. 대부분 오바마의 ‘입신양명’에 대한 소소한 관찰 수준이다. 성공학의 아류들이다. 책 제목에 오바마의 이름을 붙여도 무방할 책은 어쩌면 이 책이 처음일 것이다. 저자는 ‘2012년 체제’라는 용어를 새로 만들었다. 한반도 현대사에서 ‘체제’라고 부를 수 있는 전환기를 만들어보자는 의지의 표현이다. 저자는 오바마의 대북정책에 냉정하다. 현재 거론되는 포괄적 접근 방안에는 미국 핵 위협의 근본적 해소와 군축 조치, 이른바 ‘군사적 상응 조치’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공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것이다. 대안은 이렇다. 평화협정 체결과 북·미 수교를 한반도 비핵화의 수단으로 간주하지 말 것, 한반도 비핵화를 단순한 북핵 문제의 해결이라는 좁은 틀에서 이해하지 말고, ‘핵무기 없는 세상’이라는 큰 관점에서 접근할 것, 북한과의 협상 목표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군사정책을 자제할 것 등을 주문한다. 북핵 문제 20년의 역사에 대한 증인이자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전략가인 임동원 전 장관의 (2008)와 부시 행정부와 네오콘들의 북핵 문제 실패를 다룬 찰스 프리처드 전 대북협상특사의 (2008)도 필독서가 될 것이다. 최재천 cjc4u@naver.com
- 최재천의 책갈피
- [포커스]북한 핵무기 보유 ‘선언 불퇴’(2005. 04. 19)
- 2005. 04. 19 정치
- 최고인민회의서 핵무기고 증설 천명 계획… 내부적 최후 통지 의미 “최고인민회의서 핵무기고 증대 실천 결정” “4월 11일 최고인민회의 제11기 3차회의에서 우리의 핵무기 보유에 대한 지지와, 핵무기고 증대 방침을 실천할 데 대한 결정을 하게 될 것이다. 또 이런 회의 내용을 대외에 공개할 것이다.” 서울과 워싱턴의 외교소식통들 따르면 북한의 한성렬 유엔대표부 차석대사는 최근 미국 관리들과의 비밀회동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는 또한 당초 3월 4일 열릴 예정이던 최고인민회의가 이런 결정을 하기 위해 연기됐음을 시사하기도 했다고 한다. 최근 중국을 방문한 북한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도 미국의 적대시정책이 계속되는 한 북한은 자위 차원에서 핵무기 개발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면서 최고인민회의의 핵무기고 증대 결정 방침을 통지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예산 심의와 각종 법령을 승인하는 역할만 주로 해온 최고인민회의가 핵문제와 관련한 결정을 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내부 사정에 대해 철저히 비밀을 유지해온 북한이 고위인사를 통해 장래의 조치를 사전 통보한 것은 더더구나 없던 일이다. 최고인민회의는 형식적으로는 인민의 대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최고인민회의의 지지 결정은 핵무기 보유 선언에 대한 행정적 최후 절차다. 외무성 성명을 통한 핵무기 보유선언이 대외적 통지라면 최고인민회의의 지지 결정은 내부적 통지가 되는 셈이다. 북한은 이제 핵보유 사실을 철회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핵무기고 증대 방침에 대한 결정은 한층 심각하다. 핵무기를 늘리기 위한 실천적 움직임이 행정 및 당 조직을 통해 대대적으로 이뤄질 것임을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핵무기 보유 선언과 6자회담의 군축 의제 포함 주장에 이어 또다른 ‘폭탄선언’을 한다는 것이다. 1990년대 중반의 1차 북핵위기를 주도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당시 강경책으로 일관한 점을 감안하면 한 차석대사의 말은 실현 가능성이 낮지 않다. 우리 정부도 최고인민회의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정부 당국자는 당초 지난 3월 4일 개최예정이던 최고인민회의가 연기된 것과 관련해 “최고인민회의 연기가 핵문제와 관련된 것이라면 이번 회의를 통해 어떤 식으로든 그와 관련한 가시적 결정을 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북한에 대한 비행금지구역 설정? 더욱 큰 문제는 미국의 반응이다. 북한이 6자회담 참석을 거부하고 초강경 입장을 계속하는 것을 언제까지고 무시할 수만은 없으며, 대응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일부 강경파 사이에서는 군사적 대응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고 한다. 서울의 외교소식통은 “미국 내에 북핵문제의 외교적 해결을 구하는 의견이 여전히 많지만 군사적 대응을 할 때가 됐다는 견해가 국방부 관리들을 중심으로 무게있게 제기되고 있다”고 전했다. 만약 북한 최고인민회의가 한 차석대사 발언대로 핵무기고 증대를 결정하고, 이의 실천에 들어간다면 미국은 군사적 대응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고 그는 덧붙였다. 이르면 4월 셋째 주에 미국이 그같은 계획을 발표할 것이란 첩보도 있다. 그 계획에는 일본과 태평양에 전략무기를 증강배치하는 것이 포함돼 있다고 이 소식통은 전했다. 미국은 작년 중반부터 일본에 2척의 항공모함과 이지스함 등을 전진배치한 바 있다. 또 다른 외교소식통은 “미국 내 일각에서는 북한에 대한 비행금지구역(레드 존) 설정과 대량살상무기확대방지구상(PSI) 활동의 대폭 증대 등의 방침을 강구해야 한다는 말도 있다”고 설명했다. 비행금지구역 설정과 PSI 활동 증대는 북한이 전쟁선포로 간주할 수 있는 엄중한 조치다. 그는 또 주한미군 고위인사가 최근 주한미군 병원 관계자들을 불러 “언제라도 전투에 투입할 수 있도록 의사와 간호사들이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전하기도 했다. 미국 내에서 6자회담 무용론이 또다시 강하게 제기되는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북한과 미국의 강경 방침이 맞부딪치는 끔찍한 시나리오가 이달 또는 내달 안에 전개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이쯤 되면 북핵문제의 유엔안전보장이사회 회부는 상대적으로 유화적 조치가 되는 셈이다. 중국의 고위관리들도 북·미간 군사적 충돌 가능성을 시사하기 시작했다. 최근 미국을 방문한 외교부 고위관리는 공개석상에서 “두 나라간 군사 충돌이 있을 경우 중국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협상용인가 물론 최고인민회의의 핵무기고 증대 방침에 대한 추인을 핵무기 보유 기정사실화와 6자회담에서의 협상력 강화 의도로 보는 시각도 있다. 북한은 지난 2월 10일의 핵보유 선언에 이어 지난 3월 31일에는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우리가 핵무기 보유국이 된 만큼 6자회담은 마땅히 참가국들이 평등한 자세에서 문제를 푸는 군축회담으로 돼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핵무기 보유 기정사실화를 꾀하면서 미국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것을 내세워 6자회담 불참명분을 쌓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은 이미 부시 미 행정부와는 대화를 포기했다는 말을 들은 바 있다. 대미 외교 공세를 통해 그럭저럭 시간을 끌려고 하는 의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라고 말했다. 북핵문제의 또 하나의 관건은 한반도 정세의 이상기류다. 한국 정부의 동북아 균형자론과 한·중간 군사교류 움직임 등에 대해 미국이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그러잖아도 소원한 한·미간 거리가 더욱 멀어지는 조짐을 보이는가 하면 북핵 공조체제를 이뤄온 한국과 일본이 독도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최근 이라크 주둔 중인 자이툰부대 병력 조정을 하면서 274명을 줄인다고 밝히자 미 국방부 관계자가 주미한국대사관측에 사전조율이 없었다며 감정 섞인 항의를 한 것이 그 증거다. 찰스 캠벨 미8군사령관이 방위비 분담금이 줄어 운영비를 절감하는 차원에서 주한미군에서 일해온 한국인 근로자 1000명을 감축하겠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하는 일도 있었다. 정부 당국자는 “최근 한·미·일 간의 불화 조짐은 3국이 균열되고 있다는 잘못된 신호를 북한에 줄 수 있다. 이는 한반도 정세와 북핵문제 해결에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고 우려했다. 북핵문제가 심각성을 더해가는 가운데 유일한 희망적 메시지는 후진타오 중국 주석의 올 상반기 북한 방문이다. 한반도 비핵화를 거듭 천명해온 후주석이 어떤 방식으로든 김위원장을 설득할 수 있다면 북핵 문제의 해결은 어렵다고 해도 최소한 위기 심화는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도 여기에 기대를 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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