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경향(총 7 건 검색)
- [우리는 피임을 모른다] 페루 강제 불임수술이 만든 '조용한 희생자'
- 2020. 05. 27 14:36 건강
- 1990년대 페루에서는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다. 1990년부터 10년간 집권한 알베르토 후지모리 정부는 30만 명의 여성과 2만 명의 남성에게 강제로 불임수술을 시켰다. 빈곤을 해결하기 위한 가족계획 사업의 일환이었고, 이 잔인한 피임의 대상은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후지모리 정부의 ‘생식건강과 가족계획 프로그램’은 원래 빈곤층에 혜택을 주는 자발적인 프로그램이었다. 국제기구와 원조기구에서도 캠페인에 자금을 지원했다. 그러나 ‘자발적인 불임수술’은 없었다. 각종 거짓말과 위협, 때로는 무차별적인 힘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불임수술을 받았다. 예를 들어 출산하고 얼마 후면 보건 공무원이 집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여성을 데리고 가서 수술을 시키는 것이었다. 제대로 된 마취나 수술 후 관리도 없었고, 심지어 수술 전 병원 청소를 시키기까지 했다. 만약 응하지 않으면 신생아를 등록해 주지 않거나 자녀를 더 낳으면 감옥에 보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수술을 받았지만 무슨 수술을 받았는지, 이후 몸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낙태수술도 예외는 아니었고, 출산 후 아기를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주로 외딴 고지대와 열대우림 지역에 사는 20~40세의 문맹 여성들을 대상으로 골랐는데, 피해자의 95%에 해당하는 약 30만 명이 케추아어를 사용하는 농촌 여성이었다. 최소 18명의 여성이 불임수술이 직접적 원인이 돼 사망했으며, 수천 명의 사람이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수술을 받은 탓에 합병증으로 고생했다. 페루의 토착 여성들은 ‘조용한 희생자’였다고 말한다. 이들은 국가로부터 차별을 받았고, 가부장적 사회에서 아이를 가질 수 없었으며, 아이를 가질 수 없었기에 쓸모없다고 간주됐다. 1997년이 돼서야 여성들은 입을 열기 시작했고, 사회활동가이자 인권변호사인 길리아 타마이의 노력으로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타마이 변호사는 1998년 국제사회에 페루의 강제 불임수술 만행을 알린 보고서를 발표했고, 후지모리 정부로부터 여러 차례 죽음의 위협을 받다가 스페인으로 망명했다. 타마이의 보고서에 의하면 자발적으로 불임수술을 받은 사람은 전체의 10%뿐이었고, 수술비용을 절약하고자 동물용 마취제가 사용됐다. 또한 의대생들이나 간호사들이 불임수술을 시술하기도 했다고 한다. 매월 불임수술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직원은 위협을 받았으며, 후지모리 대통령은 매월 보건부 장관을 통해 불임수술 현황에 관한 개별 브리핑을 받았다고 한다. 보고서 발표 직후 조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페루의 가족계획 프로그램을 지원하던 미국은 모든 지원 자금을 끊었다. 후지모리 정부는 불임수술의 사실관계와 책임을 부인했지만 자금 부족으로 가족계획 프로그램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후지모리의 불임수술 정책으로 1990년 여성 1명당 3.7명이던 출산율이 10년 뒤인 2000년에는 2.7명으로 감소했다. 후지모리가 저지른 만행의 공식적 피해자만 7000여 명에 이르고, 피해자들에 대한 법적 조치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김선형은 누구? 간호학을 전공하고 임상 간호사로 일하며 수많은 여성, 특히 일하는 여성들을 만났다. 그들이 처한 현실과 다양한 삶의 고충을 마주하면서 여성을 병들게 하는 것, 여성의 건강이 그들의 삶과 가정 그리고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갖게 됐다. 지금은 여성 건강과 인권에 관한 주제로 번역과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우리는 피임을 모른다’(도서출판 파람)가 있다.
- 우리는 피임을 모른다
- 감초 배우 김미경 “엄마라고 무조건 희생적일 수만은 없죠”
- 2010. 01. 06 15:06 연예
- 김미경은 숨쉬듯 연기하는 배우다. 이 성격 좋고 털털하고 바른 말 하기 좋아하는 배우는 작품 속에서도 자신과 꼭 닮은 인물들을 그려왔다. 캐릭터와 배우 사이의 벽을 허무는 연기력, 배우로 산 24년의 시간 동안 얻어진 것만은 아니다. 고생한 만큼 애틋한 ‘탐나는도다’ 배우 김미경의 첫 TV 출연작은 1999년 방영된 드라마 ‘카이스트’다. 일부 학생들은 그녀가 연기한 ‘석학의 집’ 주인 김미순을 보고 대학 매점 주인들은 다 그런 줄 알았다고 한다. 겉으론 까칠하지만 속으론 정 많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해 괜히 고민을 털어놓게 되는 큰언니 같은 조언자. 씩씩한 어머니 혹은 깐깐한 노처녀 역으로 친숙한 만큼 이제껏 그녀가 보여준 캐릭터의 공통분모는 ‘강한 여성’이었다. 지난여름 방영됐던 드라마 ‘탐나는도다’에서 역시 해녀들의 우두머리 대상군 ‘최잠녀’ 역으로 장군 같은 카리스마를 선보였다. “대본을 보니 고생길이 훤했어요. 제주도에 가서 직접 물질도 해야 하고 로케이션이기 때문에 서울에서 포기해야 할 것도 많았죠. 윤상호 감독님과는 드라마 ‘태왕사신기’에 이어 두 번째 함께한 작품이에요. ‘태왕사신기’ 촬영 때도 대장장이 ‘바손’ 역을 하면서 엄청 고생했거든요. 처음 출연 요청이 왔을 때 윤 감독님과의 의리도 있고, ‘태왕사신기’ 때는 한여름에 가죽옷 입고 불 앞에서 담금질도 해봤는데 이걸 못할까 싶어서 하기로 했죠. 그래서 용감하게 시작했는데 안 했으면 억울할 뻔했어요.” 사전제작으로 재작년 8월 8일에 첫 촬영을 하고 작년 8월 8일에 첫 방송을 했다. 편성 문제로 중간에 몇 개월 촬영을 중단하기도 했고 조기종영의 아픔도 겪었지만 그간의 우여곡절만큼 정도 듬뿍 든 작품이다. “작품을 하면서 짧게는 2박 3일, 길게는 일주일 정도 제주도와 서울을 오갔어요. 아예 제주도에 살림을 차리는 사람도 있었는데 저는 중학생 딸이 있어서 틈만 나면 올라와 아이를 챙겼죠. 바닷속 장면은 제주도와 완도, 6m 깊이의 수조를 번갈아 가며 찍은 거예요. 다른 해녀 역 배우들은 3개월 정도 잠수하는 법을 배웠어요. 전 다른 스케줄이 있어서 이틀 정도밖에 연습을 못하고 합류했는데 ‘설마 빠져 죽기야 하겠어’ 하는 심정이었죠(웃음).” 한여름 제주의 뜨거운 햇볕은 최대의 적이었다. 배우들과 스태프들 모두 온몸에 화상을 입은 건 기본, 특히 쪽진 머리의 가르마를 따라 물집이 생겨 머리 감는 것이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몸에는 선크림이라도 바르지만 귀 뒤쪽이랑 가르마는 어쩌질 못하니까 화상을 입었죠. 화상 때문에 생긴 물집이 터졌을 때는 어찌나 쓰라리던지…. 제 딸내미 ‘버진’ 역을 맡은 서우는 온몸에 2, 3도 화상을 입어 손도 못 댈 지경이었어요. 너무 힘드니까 엉엉 울고 와서 또다시 촬영하고, 감독님도 마음은 아프지만 그렇다고 안 찍을 순 없잖아요. 모두 그런 고생은 난생처음 해봤을 거예요.” 더위가 조금만 가셔도 살겠다 싶었는데 날이 쌀쌀해지니 물 속에 들어가는 게 더 고역이었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물 온도가 10℃ 가까이 떨어졌을 때 찍었다. “물에 들어가는 순간 살이 찢어지고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이야기할 때는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그렇게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끝날 때는 스태프와 배우들 모두 참 많이 울었단다. “드라마 촬영하면서 너무 힘드니까 ‘제주도에 유배 온 것 같다’는 후배들도 있었어요. 저도 처음엔 너무 힘들었죠. 해녀복 입는 것도 민망했어요. 근데 그렇게 제주에서 해녀로 살다 보니 정이 들어버렸어요. 전에도 제주도로 여행을 많이 갔지만 그때는 호텔에서 자고 차를 렌트해서 다녔거든요. 정말 ‘제주스러운’ 걸 느낄 겨를이 없었는데 원시의 제주를 경험하고 나니 ‘아, 해녀 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바다에 들어갔다 나와 다음 촬영을 기다리고 있으면 1분 만에 몸이 마른다. 해녀복 위로 느껴졌던 나른한 햇살의 감촉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지난여름의 추억이다. ‘여명의 눈동자’로 시작된 제주와의 인연 만화가 정혜나의 동명 만화를 드라마화한 ‘탐나는도다’가 독특한 이야기만큼이나 눈길을 끌었던 것이 있다. 바로 제주 방언을 해석한 자막이었다. 마치 의학드라마에서 의학용어를 설명하듯, 제주 방언으로 이루어진 대사들은 자막이 없으면 이해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제주도에 관한 이야기인 만큼 최대한 비슷하게 언어 구사를 하는 것이 작품의 리얼리티뿐만 아니라 그곳에 계시는 분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어요. 제주 토박이 선배가 하나 있는데 대본 나올 때마다 제가 무지하게 괴롭혔죠(웃음). 제주 말이 어려워요. 특히 억양이 굉장히 미묘해서 아무리 열심히 해도 토박이만큼은 절대로 안 되더라고요. 제 딴에는 열심히 했는데 강원도 사투리다, 이북 사투리다, 이런저런 말도 많이 들었어요.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고 그냥 서울말로 해달라던 의견도 있었고요.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는 게 연기자의 몫이죠.” 1회, 딸 버진이를 혼내는 장면에서 “입 다물어, 조용히 해!”라는 대사가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제주 말은 아니었고 현장에서 받은 대본이라 미리 물어볼 겨를도 없었다. 급한 마음에 지나가는 해녀 아주머니를 붙잡고 “아즈망, 이거 뭐라 함수까”라고 물으니 “속씀허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모르는 건 현장에서 배우면서 찍었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그렇게 몇 개월을 하다 보니 말에 속도도 붙고 슬슬 다른 배우들도 그녀에게 대사를 물어오기 시작했다. 지난여름 그녀가 경험한 제주 방언 체험담이다. “해녀 아주머니 두 분이 대화를 하시면 처음에는 정말 한 마디도 못 알아들었어요. 근데 슬슬 말이 들리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분들께 ‘이제 제주 사람 다 됐수다’라는 말까지 듣고 어쩌다 보니 돌팔이 사투리 선생님도 됐으니 제주도에서 어학연수 하나는 확실하게 한 셈이에요(웃음).” 사실 제주도는 그녀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다.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스크립터로 활동했던 그녀는 드라마를 준비하던 1980년대 후반 송지나 작가와 제주도를 찾은 적이 있다. “자료 조사차 제주도에 갔는데 ‘섭지코지’라는 재밌는 이름의 장소가 있더라고요. 당시에는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정말 시간이 멈춰버린 곳이었어요. 저 멀리 말 두 마리가 풀을 뜯고 있고 그 밑에 파도가 넘실대는데 한눈에 반해버려 ‘여명의 눈동자’에 썼죠. 작품이 끝나고 결혼을 해서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갔는데 이미 장사꾼들이며 관광객들로 너무 많이 망가진 상태였어요. ‘여명의 눈동자 촬영지’라는 팻말이 꽂혀 있는 걸 보고, ‘우리 때문에 섭지코지가 이 지경이 됐구나’ 싶어 마음이 아팠죠. 지금도 제주도는 참 애틋해요.” 그래서인지 감성이 풍부하고 섬세한 스타일이 아닌데도 제주 바다를 보면 눈물이 왈칵 쏟아지곤 한다고. 예전 제주가 그저 경치 좋은 곳, 편안한 곳, 쉴 수 있는 곳이었다면 이제는 제2의 고향처럼 언제나 생각나고 가고 싶은 곳이 되었다. ‘제주가 세계적으로 더 유명한 관광지가 될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차라리 알려지지 않았으면 하는 복잡한 심정이다. 그만큼 제주도를 아끼는 애틋한 마음이 큰 그녀다. “‘태왕사신기’도 그렇고, ‘탐나는도다’도 그렇고 정말 고생하며 찍은 작품이에요. 찍는 순간은 힘들지만 연기자라는 직업이 아니면 하기 힘든 경험이잖아요. 제가 언제 말을 타고, 언제 전력질주를 하고, 언제 바다에 들어가 물질을 해보겠어요. 무척 신나고 항상 다음 역할이 기대돼요. 이런 맛 때문에 제가 평생 연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 같아요.” 동지이자 친구인 가족에 대하여 딸만 넷인 딸 부잣집 셋째로 태어난 그녀는 어려서부터 무용과 운동, 그림 등 여러 방면에 끼가 많은 아이였다. 여성스러웠던 자매들과는 달리 유난히 활동적이었던 어린 시절, 그녀의 꿈은 수영선수였다. 좋아하기도 했고 재능도 있었다. 운동을 좋아했던 아이가 선화예중에 진학한 건 단발머리가 싫어서였다. 귀밑 1cm로 똑같은 헤어스타일을 한 언니들이 너무 웃겼다고. 중학교 땐 무용을 했는데 북 치고 장구 치는 사물놀이를 더 좋아했다. 북 소리, 꽹과리 소리만 들으면 시쳇말로 ‘미쳤다’고 한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재주가 많으셨어요. 라디오 방송 대본도 쓰셨고 바이올린도 켜셨고, 그림도 잘 그리셨고, 노래도 잘 부르셨어요. 그 끼를 자매들이 물려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아버지를 가장 많이 빼닮은 게 저예요.” 넘치는 끼에 진로를 고민하다 우연히 알게 된 선배 손에 이끌려 찾아간 곳이 극단 연우무대였다. 1985년 봄 입단해 처음 만난 작품이 문성근, 양희은 등이 출연한 ‘한씨 연대기’. 극장 앞에서 표 팔고 포스터 붙이느라 정작 공연은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매일 귀로 듣다 보니 대본이 저절로 외워졌다. 어느 날 갑자기 극에서 하차한 배우를 대신할 오디션에 덜컥 합격해 연극판에 뛰어든 지 어느덧 20년이 넘었다. 연기는 그녀에게 평생을 바쳐도 모자랄 열정과 행복, 그리고 가족을 선물해주었다. 1991년 연극 ‘동승’에서 만난 연출가 박근원씨와 1994년 결혼한 그녀는 현재 중학교 1학년인 딸을 두었다. “아이를 갖고 한동안 일을 쉬었어요.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이 아이를 두고 일을 하랴 싶어 들어오는 일 다 거절하고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까지 매일 옆에 끼고 살았어요. 그렇게 몇 년 지내다 보니 점점 바보가 되어가는 느낌이었어요. 그러던 중에 (송)지나 언니가 젊은 배우들과 연기하면서 감각을 잃지 말라며 준 배역이 드라마 ‘카이스트’의 ‘석학의 집’ 주인 김미순이에요. 매일 소극장에서 관객들 얼굴 마주하며 울고 웃던 사람이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려니 참 어색하더라고요. 얼마간의 적응기간을 거치고 그 다음 출연한 작품이 김종학 감독님의 ‘대망’이었어요.” 주인공 이요원의 몸종 ‘시월’ 역을 맡아 ‘실력 발휘’를 하자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배우냐’며 금세 소문이 났다. 자연스럽게 캐스팅 제의가 밀려들었다. 그 뒤 ‘드라마시티’를 비롯해 ‘상두야 학교가자’, ‘봄의 왈츠’, ‘열아홉 순정’, 영화 ‘궁녀’, 현재 출연 중인 아침드라마 ‘다 줄 거야’까지 다양한 작품에서 톡톡히 감초 역할을 하고 있다. 일단 배역을 맡으면 무섭도록 몰입하지만 한 가지 원칙이 있다. 바로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연극을 정말 하고 싶은데 적어도 2, 3달은 연습을 해야 해요. 공연 끝나고 밤늦게 집에 오면 아이를 챙길 시간이 없어요. 드라마는 그보다는 효율적으로 시간을 조율할 수 있죠. 지방 촬영 가면 아이를 데려갈 수도 있고요. ‘탐나는도다’ 때도 방학 때 아이와 남편이 제주도로 와서 저 촬영하는 동안 김녕 바닷가에서 놀았어요. 우리 딸내미도 엄마 덕분에 여기저기 구경 많이 다녔죠. 가화만사성이라는 말이 정말 맞는 말이에요. 가정이 편안하지 않으면 사람이 까칠해져요.” 그녀는 가족을 ‘동지’라 부른다. 열두 살 딸과는 친구 같은 사이다. 행여나 딸이 공부에 지칠까 딸보다 더 노심초사 하는 엄마다. ‘세상에는 공부 말고도 할 것이 너무 많다’는 게 부부의 교육관이다. 이처럼 틀에 얽매이지 않은 그녀의 성격은 연기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녀가 그리는 엄마가 전형적이지 않은 이유다. “TV에 나오는 엄마들의 모습은 딱 두 가지예요. 화려하고 못되거나, 지고지순하고 희생적인 엄마. 에이, 그런 엄마가 어디 있어요. 엄마도 사람이잖아요. 가끔은 화도 나고 욕심도 있고…. 그게 지극히 솔직한 제 모습이자 앞으로 배우로서 보여드리고 싶은 모습이에요.”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안진형(프리랜서) ■장소 협찬 / 커피프린스 홍대점(02-335-4510)
- 연인이 있어 더 행복한 이범수 “결혼은 희생과 배려”
- 2009. 12. 21 16:53 연예
- 최근 열애 중임을 당당히 밝힌 영화배우 이범수는 결혼을 “희생과 배려”라고 말했다. 그는 열애 소식이 전해지기 전 인터뷰에서 “결혼은 ○○○이다”라는 질문에 이 같이 답했다. “결혼은 희생과 배려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해야 가능하다”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이범수와의 인터뷰. 열세 살 연하 지성미 물씬 풍기는 연인 깜짝 공개 열애 소식이 전해지기 전 진행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범수는 열애설에 대해 부인했다. 하지만 지난 11월 초 이범수는 자신의 영어 선생이자 영어 칼럼니스트, OBS 아나운서로 활동하고 있는 열세 살 연하의 이윤진씨와 교제 중임을 깜짝 발표해 화제를 모았다. 이범수는 영화 ‘홍길동의 후예’에서 낮에는 고등학교 음악교사로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보내지만 밤이 되면 홍길동의 후예답게 의적 활동을 펼치는 홍무 역을 연기한다. 이미 오래전부터 꾸준히 해온 운동 덕분에 체지방률이 한 자릿수인 이범수는 영화 개봉을 앞두고 최근 공개된 화보를 통해 명실상부한 몸짱 배우로 거듭났다. “운동을 시작한 지는 오래됐고, 1년 반 전부터 식이요법을 병행하고 있어요. 운동선수들이 체중 감량하는 것처럼 직업이 배우이기 때문에 사적인 욕심을 배제하고 프로의식을 가지고 몸 관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비(정지훈), 이병헌과 비교요? 평소 좋아하는 이들과 비교된다면 기분 좋은 일이죠(웃음).” 오랜 무명 시절을 거쳐 이제 어엿한 주연배우로 자리매김했지만 ‘상복 없는 배우’로 불렸다. 하지만 전작 ‘킹콩을 들다’로 모든 한을 풀었다. ‘킹콩을 들다’는 국내 흥행은 물론 해외 영화제에 초청됐고, 이 영화로 이범수는 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상을 받게 돼 감사하다면서도 자신에게 과분한 것 같다고 겸손해하기도 했다. 특히 영화가 화려함으로 포장되지 않고 따뜻하고 진솔한 이야기로 진정성이 전달됐다는 점을 더욱 자랑스러워했다. “연기는 단순히 직업이나 일이 아니라 내게는 취미이자, 스포츠, 놀이, 게임이라서 신이 나죠. 하지만 프로의식과 책임감이 강해 촬영장에서는 진지해요. 신조가 ‘일을 즐겁게 하자’인데 그래야 배우로서 제 역할을 할 때 희열을 느낄 수 있고 팀워크도 좋아지죠. 또 관객들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범수는 자신을 특정하게 규정짓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이범수다운 것’이란 현재에 안주하거나 정체되지 않고 늘 실험과 도전을 좋아하는 것이다. 진취적인 도전정신으로 망설이지 않고 실천하는 것이 이범수를 지금의 자리에 있게 한 자산이자 원동력이다. “드라마 출연이요? 매력적인 작품이라면 언제든지 할 생각이에요. 시간이 흐르고 활동 영역이 넓어질수록 인접 분야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져요. 음반을 발매하고 노래를 부를 수도, 전시를 할 수도 있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람이 있기도 해요. 특히 독립영화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건강한 후배들과 함께 하고픈데 아직은 함께하자고 하는 이들이 없네요.” ■글 / 박준범(스포츠칸 문화연예부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 노래인생 50년 하춘화 “아버지의 사랑과 희생이 저를 만들었습니다”
- 2009. 10. 05 13:49 연예
- 만 여섯 살 나이에 첫 음반을 내고 가수의 길로 접어든 지 벌써 48년. 하춘화의 노래 인생은 곧 50년, 반세기를 눈앞에 두고 있다. 그녀를 가수로 이끈 아버지가 없었다면, 그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하춘화’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그녀가 말하는 50년 노래 인생과 아버지 이야기. 존재만으로도 빛나는 선물, 아버지 하춘화(54)가 노래 인생 50년을 이야기한다.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그녀의 아버지다. 전남 영암 출신의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그는 ‘연예인은 모두 딴따라’로 폄하하던 시절, 남다른 혜안을 갖고 있었던 걸까. 그녀의 아버지는 자식의 숨은 재능을 발견하고 딸을 뒷바라지하며 가수로 살아갈 수 있도록 옆에서 이끌었다. 이미 아버지 하종오옹(89)은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반평생 가까운 날들을 딸, 하춘화를 위해 희생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격려를 아끼지 않은 사람도 아버지지만 아무도 하지 못했던 뼈아픈 충고 역시 언제나 아버지 몫이었어요. 대중 예술인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서 가수 생활과 공부를 철저히 병행시키셨죠. 밤이면 과외 선생님과 공부를 했고 낮이면 전국 각지를 누비며 순회공연을 다녔어요.” 하춘화는 이번에 아버지를 위해 특별한 선물을 마련했다. 가요 인생 48주년을 기념해 책을 발간한 것이다. 제목은 「아버지의 선물」이다. “남들은 자서전이라고 하지만 진짜 자서전은 80주년 공연쯤 돼야 낼 수 있는 거구요. 이번 책은 제 노래 인생 50주년을 정리하고 간접적으로는 1960, 70년대 가요사를 엿볼 수 있는 수필집 같은 것입니다. 가장 큰 목적은 저를 가수로 만들고 키워준 아버지에게 바치는 선물이고요.” 이 책은 욕심이나 욕망으로 아이를 키우려다 진정한 행복과 점점 거리가 멀어져가는 요즘 부모들에게 주고 싶은 삶의 지침서이기도 하다. “자식을 키우는 과정은 끊임없는 선택과 고민의 연속일 겁니다.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그 선택이 올바른지 의문이 들 거예요. 그런 분들에게 교육의 기본 메시지를 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녀가 가수를 시작했던 당시에는 대중 예술에 대한 폄하가 굉장히 심했다. 때로는 그녀의 아버지를 여섯 살 딸을 앞세워 재주놀음이나 시키는 몰상식한 사람으로 몰기도 했다. “그때 생각하면 어제 일처럼 생생해요. 처음 제 노래가 라디오 전파를 탄 때였죠. 그날 집안 식구들은 기뻐하며 모두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어요. 그러나 곧 ‘이렇게 어린아이까지 노래를 시키다니 참 한심한 세상입니다’라는 아나운서의 한마디가 온 가족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죠.” 당시 어린이 가수의 등장은 큰 화제와 더불어 사회적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보수적인 시대였던 만큼 그녀도 비난 여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저야 어려서 잘 몰랐지만 부모님은 알게 모르게 이런 비난과 야유를 숱하게 들었을 거예요. 중학교 때도 ‘어린 나이에 무슨 가요냐’는 소리에 늘 머리를 숙여야 했으니까요. 피아노, 바이올린, 미술을 잘하는 아이는 신동이지만 대중가요를 부르는 전 비난의 대상일 뿐이었죠.” 그녀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아버지에게 그동안의 힘든 세월을 어떻게 견뎠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새삼스레 물어보냐며 말을 아꼈지만 결국 짧게 말문을 열었다. “그땐 누가 뭐라 해도 안 들리고, 안 보이더라. 아무래도 그때 내가 뭔가 씌었었나 보다(웃음).” 그것은 섣부른 오만이 아니었다. 자식을 좋아하고 자식이 가진 재능을 키워줘야 한다는 아버지의 신념이자, 철학이었을 것이다. 기록의 여왕이 되다 50년 가까이 가수 활동을 한 하춘화에게는 ‘기록’이 많다. 그녀의 기록들을 보면 마치 살아 있는 한국 대중 예술의 역사를 보는 듯하다. 만 6세 최연소 음반 출시, 개인 공연 최다 횟수 등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됐고 최초의 평양 공연, 최연소 옥관 문화훈장 수상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첫 번째 기록을 세운 때는 세 살 때라고 말할 수 있어요. 라디오에 나오는 가요를 듣고 따라 하기 시작했고 전 3백여 곡의 레퍼토리를 가진 꼬마가 돼 있었죠.” 말도 제대로 못하고 엄마 무릎에서 떨어지기 싫어할 어린 나이에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랫소리가 좋아 한 번 듣고도 금세 따라 했었다. 아마 평생 노래로 살아가라는 운명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다들 아시다시피 세계적으로 최연소 가수 데뷔를 해 기네스북에 올랐죠. 당시 일본, 미국 등에서 기자들이 인터뷰를 하러 찾아올 정도로 화제가 됐어요. 그리고 지난 1991년 5월에는 1261일이라는 기록으로 ‘개인 공연 최다 횟수’를 달성했어요.” 하춘화는 곧 국내 최연소 음반사 전속 가수가 됐다. 첫 음반을 낸 후 가장 어린 가수라는 특징 외엔 히트곡도 인기도 없었던 그녀에게 미도파레코드(현 지구레코드)의 대표가 5년 전속 가수 계약을 제의했다. 아직 어리지만 앞으로 7년 안에 하춘화가 가요계를 제패할 것이라는 가능성을 보고 투자한 것이다. “당시 대졸 신입사원 월급이 3만원이었어요. 저는 1년에 3만원이라는 계약금을 받고 전속 가수가 됐죠.” 가수가 된 지 6년 만에 ‘물새 한 마리’라는 곡이 히트를 쳤다. 그녀를 사람들에게 알린 곡이기 때문에 지금도 가장 애착이 가고 무대에서 부르면 뭉클해지는 곡이다. 더불어 그녀의 기록은 점점 늘어났다. 1971년 8월 잡지기자협회로부터 받은 ‘핑크 리본상’을 시작으로 수백여 개의 상을 받았다. 1971~1977년 MBC 10대 가수상을 연속 수상했고 TBC 방송가요 대상 4회 연속 수상, TBC 7대 가수상 연속 7회 수상을 했다. “특히 TBC 방송가요 대상은 동일인이 4회 연속 수상할 수 없다는 규정을 깨고 수상해 더 특별히 기억이 남네요. 그렇지만 인기가 많으면 시기 질투가 많은 법, 안 좋은 기억도 많아요.” 1 1975년, 일본 도쿄에서 아버지 하종오옹과 함께. 2 아버지를 모시고 떠난 유럽 여행. 3 1991년 아버지 칠순 잔치에서 이주일·이상용씨가 사회를 보는 모습. 4 1960년, 부산 송도에서 즐거운 한때. 5 여섯 살에 데뷔한 꼬마 가수 하춘화. 6·7 가족사진. 8 1972년, TBC 방송가요 대상 시상식. 그녀가 활동했던 1970년대 최고 남자 가수라면 단연 남진과 나훈아였다. 두 사람의 광적인 인기는 함께 활동하던 하춘화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여자 가수로서는 제가 독보적이었고 두 사람의 인기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했던지라 여기서는 남진씨와 저기서는 나훈아씨와, 이렇게 번갈아 함께 수상한 적이 많았어요. 그러자 일부 열성 팬들의 항의가 이어졌죠.” ‘왜 네가 남진과 그 상을 받느냐?’ ‘왜 나훈아와 같이 받느냐’ 등의 항의에 시달렸던 것. 왜곡된 팬덤 문화는 요즘에 와서야 생겨난 것이 아니라 당시에도 존재했던 모양이다. 대중문화가 뜨겁게 성장하던 시절의 한가운데 그녀가 있었다.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성숙한 가요를 불러 힘들었던 적도 많았다. 가장 곤란했던 때는 민요풍 가요 ‘잘했군, 잘했어’를 불렀을 때다. “‘영감~, 왜 불러. 뒤뜰에 매어놓은…’ 하는 노래 있잖아요. 제가 열여섯 살 때쯤 녹음했던 노래예요. 상대 역할을 하던 남자 가수가 제 부모님 또래인 고봉산 선배님이었어요. 도저히 ‘영감~’ 하고 입이 안 떨어지더라고요.” 제작자는 이런 연기도 못하면 진정한 가수가 될 수 없다며 호되게 야단을 쳤다. 억지로 했지만 감정이 실리지 않았다고 프로듀서에게 또 혼이 났다. “무서워서 울다시피 하며 노래 녹음을 마쳤어요. 타이틀곡이 아니라 앨범 제일 밑에 편집된 곡이었는데 레코드 발매가 된 후에 무슨 일인지, 앨범 수록곡 중에 ‘잘했군, 잘했어’만 호응이 있는 거예요. 결국 맨 위로 재편집하고 레코드를 다시 냈죠. 그런데 그때 안 좋은 기억 때문인지 요즘도 무대에서 잘 안 불러요(웃음).” 전직 대통령들과의 크고 작은 인연 하춘화에게 1970년대는 최고의 황금기였다. 청와대에서 외빈들을 위한 만찬이 열리면 자연스럽게 한국 대표 가수로 노래를 부르는 일이 잦았다. 이후 대부분의 국가 행사에 초청을 받아왔기 때문에 그녀는 전직 대통령들과의 숨은 인연들이 많다. “육영수 여사께서는 노인들을 위한 잔치를 많이 여셨어요. 그럴 때면 아랫사람을 시키지 않고 직접 전화해서 ‘하양, 나 좀 도와줘’라고 말씀하셨죠. 그러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가 어르신들 앞에서 열창을 했어요. 너무나 인자했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해요.” 육영수 여사 별세 후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대신할 때도 여전히 자선 공연을 도왔다. 그 때문에 박 전 대통령은 그녀를 곧잘 격려했다. “‘너도 아버지와 같이 다닌다며? 우리 근혜랑 같구나. 요즘 아버지 잘 계시냐?’라며 안부를 물으셨죠. 어쩌다 피곤이 겹쳐 입술이 부르튼 채로 공연을 하러 가면 어깨를 토닥이며 ‘왜 입술이 이 모양이 됐지? 요즘 고단했구나?’라며 딸처럼 살갑게 대해주셨지요.”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이어 집권한 전두환 전 대통령과의 인연도 깊다. 재임 시절 남북 분단 40주년을 기념하는 ‘남북 예술인 교환 공연’이 평양에서 개최됐다. 분단 후 처음으로 열리는 평양 공연에 남자 가수 대표로는 나훈아가, 여자 가수 대표로는 그녀가 지목된 것이다. 이는 ‘하춘화는 꼭 가야 한다’라고 못 박은 대통령의 말 한 마디가 작용한 결과였다. 난생 처음 평양 땅을 밟고 북한 동포들이 지켜보는 무대에 선 것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이후 전 대통령을 만날 때마다 평양 공연은 대화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 소재가 됐어요. 사실 저의 오랜 팬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재임 시절부터 ‘무죄’와 ‘영암 아리랑’을 가장 좋아하는 노래로 꼽으신, 제 공연의 단골손님이시죠. 때로는 30~50명 참모들까지 동원해서 공연장을 찾으셨어요.” 그런가 하면 ‘베사메무초’를 가장 좋아했던 노태우 전 대통령과는 본인의 제안으로 청와대 공연 때 듀엣을 하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통령 신분이 아니었던 때 그녀의 공연장을 찾아 ‘목포의 눈물’을 신청했었다. “비록 제 노래는 아니었지만 고향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담아 애절하게 불렀어요. 그날 공연 덕분인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수차례에 걸쳐 청와대 공연에 불러주셨어요. 제 40주년, 50주년 공연에도 이희호 여사와 함께 오셔서 보고 가셨어요.” 이명박 대통령과의 인연도 있다. 이 대통령이 서울 시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환경미화원 돕기’를 주제로 45주년 공연을 열 때의 일이다. 공연을 앞두고 직접 서울의 모든 구청을 돌며 도움을 구했던 하춘화의 모습은 당시 이 시장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단다. “비서진을 통해 들은 바에 의하면 간부회의 때마다 당시 이 시장은 ‘하춘화 마인드’를 예로 들며 공직자의 바람직한 자세를 강조하셨다고 해요. 그래서였는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열린 ‘이명박 출판기념회’에 초대되기도 했어요. 이명박 정부 초창기에 ‘하춘화가 국회의원이 된다더라’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답니다.” 각 시대를 대표하는 대통령들과 크고 작은 인연을 맺어온 하춘화. 그녀가 느낀 점은 한 나라의 지도자라 하더라도 결국 보통 감성을 지닌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비록 겉으로는 냉철하고 강직해 보여도 노래를 좋아하고 노래를 통해 희로애락을 느끼고 있었다. 업적과 시대적 평가를 떠나 그녀가 전직 대통령들과 따스한 정서적 교감을 느낀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대통령의 제1 의무가 ‘국민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대중 예술인도 대통령 못지않은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대중에게 때로는 기쁨을 주고, 때로는 슬픔을 위로했던 가수 하춘화는 꿈이 하나 있다. 대중가요의 발자취와 가치를 엿볼 수 있는 기념관을 설립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자식 사랑에서 출발한 그 꿈은 50년 세월을 함께해왔고 점점 커지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될 꿈이 있어 그녀의 인생은 행복하다.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이성훈 ■자료 제공 / 「아버지의 선물」(중앙books)
- 네팔 헬기 사고 희생자 고(故) 박형진 대령의 미망인 신난수씨
- 2008. 04. 11 화제
- 지난 3일 네팔 산악 지대에서 추락한 유엔 네팔임무단(UNMIN) 헬기(MI-8) 탑승자 박형진 대령의 사고 소식이 들려왔다. 반드시 생존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랐던 온 국민의 바람은 이제 슬픔이 되어 울먹이고 있다. 사고가 난 지 보름째, 그가 남긴 빈자리는 너무 크다.2003년도 미국 군수교관시절 찍었던 가족사진 믿을 수 없는 소식 “아직 믿겨지지가 않아요. 그냥 저와는 상관없는 무슨 행사에 참석하고 온 것 같은 기분이에요. 남편이 평소에 몸이 아팠다든지 해서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있었으면 이렇게 힘들진 않을 텐데…. DNA 검사할 때 병원에 갔던 흔적이 한 번이라도 있으면 검사하기가 쉽대요. 그런데 병원 한번 간 적이 없을 정도로 굉장히 건강하셨거든요.” 이번 고(故) 박형진 대령(50, 육사 38기)의 파견은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그루지야에서 1년 반 동안 정전감시단 근무를 마치고 2006년 9월 귀국한 박 대령은 곧바로 유엔 네팔임무단 파견 제의를 받았다. 보통 해외 근무를 마치면 1년 동안 국내 근무를 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네팔로 처음 임무단을 파견하는 유엔은 경력자를 요청해왔다. 그루지야에서 돌아온 지 6개월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오랜만에 가족들과 보내던 오붓한 시간은 다시 미뤄둘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가지 않겠다고 하면 안 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루지야에서도 너무 고생을 많이 하고 온지라 가지 말라고 말렸는데 저를 설득하더라구요. 나는 이미 당신하고 결혼하기 전에 국가와 결혼했다고, 자신은 국가가 부르면 모든 사리사욕을 버리고 언제든지 가야 할 사명을 가진 사람이라고. 그 뜻을 꺾을 수가 없었어요.” 남편이 돈을 벌기 위해, 혹은 개인적인 일로 가겠다고 했으면 천 번 만 번 말렸을 거다. 하지만 신난수(48)씨는 남편의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붙잡을 수 없었다. 그렇게 떠난 남편은 귀국을 4개월 앞두고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내며 아빠와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아이들이 안쓰럽기만 하다. “2003년도에 남편이 군수 교관이 되면서 가족 모두 미국에 갔어요. 아이들은 그곳에서 대학을 다녔죠. 저와 남편은 아이들이 졸업하기 전에 근무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아이들과 떨어져 지내야 했거든요. 아이들은 계속 공부를 해야 하니까. 특히 딸아이는 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오자마자 아빠가 그루지야로 파견이 됐고, 그루지야에 다녀오자마자 다시 네팔로 파견돼서 아빠와 이야기할 기회가 별로 없었어요. 너무나 할 말이 많았는데 이제 다시는 할 수 없게 됐다며 가슴 아파해요.” 여러 해외 근무로 가족과 떨어져 있던 시간이 많았지만 고(故) 박형진 대령은 표현을 잘하는 자상한 아버지였다. 멀리서도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고, 혹여 자신의 빈자리에 아이들이 외롭진 않을까 항상 메일과 전화로 세심하게 챙겼다. “우리나라가 더 잘 살기 위해 아빠가 멀리 와 있는 거라며 이해해달라고. 누군가의 희생은 필요한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항상 아이들을 다독였어요. 아이들도 그런 아빠를 자랑스럽게 생각했구요. 다정하던 남편의 목소리가 그립습니다.”입버릇처럼 말하던 나라 사랑 고(故) 박형진 대령은 어딜 가든 나라 사랑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군수 교관으로 미국에 있을 때는 이웃집 낙엽 청소까지 도맡아 할 정도였다. 그에게 한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작은 일부터 시작됐다. “군수 교관으로 미국에 있을 때 각 나라에서 온 대표들이 한동네에 모여 살았어요. 옆집에 프랑스, 영국 대표가 살았는데, 남편이 새벽 4시 반에 일어나서 옆집 청소까지 다 하는 거예요. 버지니아는 가을에 낙엽이 많거든요.” 그렇게 온 동네 청소를 다 하다 보니 아침마다 마당에 낙엽 모은 봉지만 20~30개였다. “사람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낙엽 주우러 나왔다가 깜짝 놀라는 거예요. 이미 다 청소가 돼 있으니까. 한국 사람이 이렇게 부지런하고 성실한지 처음 알았다고 하더라구요.” 남편은 그렇게 항상 사소한 것, 조그만 일에 좋은 인상을 주었을 때 우리나라의 위상이 높아진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말뿐만 아니라 행동도 언제나 함께였다. 미국에 군수 교관으로 있을 때에는 각 나라에서 온 장교들 중 우수 장교로 뽑히기도 했다. 한국 사람으로는 처음이었다. 사령관이 남편에게 한국과 미국 군수 외교에 큰 힘이 됐다며 보답하는 의미에서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개인적인 부탁을 할 줄 알았던 남편은 사령관의 한국 군사학교 방문을 요청했다. “제대하고 나면 뭐를 해달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한국 군사학교를 방문해달라고 요청하니까 사령관이 깜짝 놀란 거예요. 직접 오셔서 우리나라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평가해달라고, 그래서 서로 더 좋은 군수물자를 교환하는 데 도와주셔야 할 부분들을 눈으로 확인해달라고 부탁을 드렸어요.” 결국 사령관은 약속을 지켜 한국을 방문했고 그 일로 인해 우리나라의 군수 교환에 가속도가 붙었다. 남편은 사령관이 방문했을 때 계획 장교로 통역과 번역을 도맡아 했다. 표창장도 받았다. 그때가 2004년이었다. 조그만 일부터 큰일까지 고(故) 박형진 대령은 언제나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군수에 대해 전문가였잖아요. 물자나 지원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강대국에 비해 얼마나 뒤떨어져 있는지 절감한 것 같아요. 자신이 열심히 함으로써 우리나라가 좀 더 앞서 갈 수 있지 않을까, 시간만 나면 영어 공부를 하셨어요. 특히 군사용어는 전문용어잖아요. 말 한마디에 엄청난 물자가 왔다 갔다 하니까 잠잘 시간도 아껴가며 철저하게 공부하셨어요.”엄마, 나 이제 아빠가 없는 거야? 자상했던 남편은 네팔에 근무하면서도 수시로 메일을 보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자신이 사는 막사, 네팔의 시장, 사람들까지 메일을 통해 그곳의 모습을 전해왔다. 멀리 떨어져 불안해할 가족들을 위한 배려였다. 때문에 신난수씨는 네팔에 가지 않아도 남편이 오늘은 무슨 일을 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곁에 있는 사람처럼 알 수 있었다. “지난 남편 생일에 전화가 왔더라구요. 같이 있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저는 미역국 못 끓여줘서 미안하다고 했죠. 가슴이 너무 아프더라구요. 생일날 혼자, 허름한 막사에서 지낼 남편을 생각하니까 눈물이 났죠. 그런데 남편이 자기네 집에 누가 방문을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친구하고 같이 있었대요. 제가 너무 반가워서 ‘누군데?’라고 물으니 도마뱀이라는 거예요. 네팔은 유엔이 처음 파견된 곳이라 아무것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요. 막사 천막에서 먹고 자는데, 도마뱀이랑 같이 생일을 보냈다는 얘기를 듣고 어찌나 속이 상하던지. 네팔에 가지 않고 한국 연합사에 근무했으면 집에서 아이들과 편하게 있었을 텐데, 아내가 차려주는 따뜻한 생일 밥 먹으며 오붓하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 저렇게 고생을 하는구나 싶어 그때도 많이 울었어요.” 그리고 며칠 후 남편으로부터 도마뱀 사진이 담긴 메일이 도착했다. ‘도마뱀 시리즈.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내일 캠톤먼트 부대를 위해 준비하는 중 황당한 사건이 일어나서…도마뱀은 이제 일상적으로 방 혹은 거실에서 같이 지내고 있는데 내 여행 가방 안에서 도마뱀 가족이 단체로 발견됐습니다. 네 마리 새끼 중 한 마리는 죽어 있었고 세 마리가 꿈틀거리고 있어서. 위의 두 사진은 새끼들 사진이고 아래는 부모.’ 자신의 막사에 들어온 도마뱀을 보고 아이처럼 좋아하는 남편의 모습에 그녀는 가슴이 아팠다. 남편이 보내온 메일을 보여주며 그녀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이런 곳에서 도마뱀이랑 살면서 너무너무 고생을 많이 했는데, 이게 남편이 있던 곳이에요. 이렇게 허름한 막사에서 흙바닥에서 밥 해먹으며 지냈어요. 한번은 전화가 왔는데 설사를 했대요. 물이 안 맞아서.” 하지만 그런 열악한 상황에 있으면서도 고(故) 박형진 대령은 불평 한번 하지 않았다. 언제나 근검절약하며 아이들에게도 무엇이든 아껴 쓰라고 당부했다. “어쩌다 한국에 오면 전에는 외식도 나가고 그랬는데, 거기서는 한 끼 먹는 게 너무 힘들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절대 밥 남기지 말라고.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에 감사하고 대한민국 국민임을 자랑스러워하라고 항상 아이들에게 당부했어요.” 아버지의 당부대로 아이들은 잘 자라주었다. 미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 아이들은 4년간 장학금을 받으면서도 수업이 끝나면 학교 식당에서 일하고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을 벌었다. 옷이나 운동화도 항상 제일 싼 것으로 살 정도로 아버지 말씀을 잘 따랐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함께 있는 것처럼, 언제나 큰 산이 되어 가족을 지켜주던 아버지를 잃은 슬픔은 아이들에게 크나큰 상처로 남았다. “어떠한 상황이 닥쳐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아빠가 길러줬어요. 그런 아빠가 이제 없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엊그제는 딸아이가 자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엄마, 나 이제 아빠가 없는 거야?’하고 묻더라구요. 그렇게 떨어져 있어도 한 번도 아빠가 안 계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는데 딸아이도 이제 실감을 하나 봐요. 한참을 울었어요.”남편의 선물 신난수씨가 남편을 만난 것은 남편이 생도 3학년 때였다. 육군사관학교 축제 때 파트너가 되어 만남을 이어오다 남편이 졸업하던 날 학교 잔디밭에서 프러포즈를 받았다. “남편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배우자를 위해 기도를 했대요. 그 배우자가 저라는 거예요. 만약에 자기가 나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 분명히 이혼할 거라고, 당신이 바로 하느님이 보내준 사람이라고 결혼해달라고 하더라구요.” 그때부터였다. 서로가 같은 생각을 하며 같은 곳을 바라보게 된 것이. 그렇게 두 사람은 졸업하는 날 약혼을 하고 7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군인의 아내로 스무 번이 넘게 이사를 다니며 고생도 많이 했지만 남편과 결혼한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다. “이제까지 결혼 생활하면서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어요. 외국에 있어도 항상 전화로 같이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꽃다발이나 목걸이, 향수 같이 작은 선물이라도 꼭 챙겼어요.” 남편에게 받은 선물 중에 몇 년 전에 받은 편지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군인의 아내로서, 아이들의 엄마로서 역할에 충실해줘서 고맙다는 내용이 6장의 편지지에 빽빽하게 담겨 있었다. “비싼 선물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정말 감동이 오더라구요. 그거 받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전 항상 그랬어요. 다시 태어나도 당신을 만날 거라고. 남편도 같은 마음이었구요.” 남편이 나라를 사랑했던 만큼 가정도 사랑했기에 나라 일에 바쁠 때에도 그의 빈자리가 크지 않았다. 함께 있지 않아도 그 마음이 충분히 와 닿을 정도로 자상하고, 또 사랑을 표현하던 남편이었다. 남편의 부재는 아직까지 믿을 수 없는, 믿고 싶지 않은 슬픔이다. “어제 사망신고 하고 집에 왔는데 이제 정말 남편이 없구나, 실감이 나는 거예요. 며칠 동안 전화가 없으니까, 그게 제일 커요. 매일은 아니었지만 남편과 통화하는 시간대가 있었거든요. 네팔 카트만두는 하루에 12시간이 정전이에요. 국제 전화하기가 쉽지 않으니까 전화할 수 있는 시간을 정해서 통화를 했어요. 그 시간대가 되면 저도 다른 일을 하다가 전화를 기다리곤 했죠. 항상 자상하게 전화해주고 메일 보내주고 그랬는데 이제 전화도 없고 메일도 없으니까 너무 가슴이 아파요. 그저께는 집에 있는데 남편과 항상 통화하던 시간에 전화가 온 거예요. 전 그 사람이 죽었다는 걸 순간 잊어버리고, 그 사람 전화인 줄 알고 안방에서 뛰어나와 ‘여보, 당신이야?’하고 전화를 받았는데 다른 사람이더라구요.” 혹시나 하고 메일도 확인해봤지만 더 이상 남편에게 온 새로운 메일은 없었다. 항상 곁에 있던 남편의 소식이 이젠 더 이상 없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슬픔이 밀려왔다. 지금쯤 하늘에 있을 고(故) 박형진 대령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없느냐는 물음에 그녀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전 매일 남편하고 얘기해요. 워낙 둘이 얘기하는 걸 좋아했거든요. 아무 일도 아닌 이야기로 밤새도록 이야기하곤 했어요.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서 기도하며 어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오늘은 누구를 만나는지 다 얘기했어요. 그리고 부탁했어요.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천국에서 우리를 잘 지켜봐달라고.” 신난수씨의 미소는 굵은 눈물이 되어 손등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이제 남편 대신 국민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남편이 그동안 해왔던 일들을 보면서 얼마나 나라가 소중한지 느꼈습니다. 남편은 이제 없지만 우리에게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군인이 무엇인지, 충성하는 것이 무엇인지, 평화를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가셨다고 생각합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듯이 남편의 죽음도 많을 열매를 맺었으면 좋겠어요.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맡은 바 임무를 열심히 이뤄가며 나라를 위한 마음을 조금씩만 가져주셨으면 해요. 그게 바로 남편이 바라던 바였으니까요.” 고(故) 박형진 대령은 훌륭한 군인이자 자상한 남편, 다정한 아버지였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겠지만, 또다시 일상이 시작되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가 남긴 많은 것들로 인해 우리는 또 다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눈물을 멈추기 전에, 다시 힘을 내기 전에 한 번 더, 고(故) 박형진 대령의 명복을 빈다.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원상희
- 사금융 18조 시대의 슬픈 희생자
- 2007. 06. 20 재테크
- 빚을 갚기 위해 빚을 내는 서민들. 변제능력을 상실한 채무자만 500만 명이다. 사금융시장의 규모는 무려 18조원. 바야흐로 전 국민이 사채시장에 노출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채를 썼다 파산한 중소상인, 카드깡으로 깡통인생이 된 직장인, 생계형 급전으로 가정파산한 50대 여성… 이들 모두 사채 수렁에 빠진 대한민국의 슬픈 희생자들이다.빚을 갚을 능력을 상실한 과중 채무자는 우리나라 총인구의 10%에 해당하는 약 500만 명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나타났다(송태경 민주노동당 민원정책실장-한국 과중 채무 및 고리대부업 시장 현황과 대책). 금융기관의 신용정보관리 대상자와 기타 연체자(고리대부업 이용자, 보증채무 및 주택담보대출 연체자, 신용회복위 및 배드뱅크 등 탈락자)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들은 사실상 제1, 2금융 접근권이 차단되어 있다. 이들이 자급자족적 경제운영을 통해 대출금을 상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 빚을 갚기 위해 빚을 다시 내는 ‘사금융 수렁’의 늪에 더욱 깊이 빠져들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사금융 시장의 규모는 18조원(한국은행)이다. 이자제한법 폐지(1998년) 이전 가계 부분의 사채 규모는 4조원(한국갤럽)에서 4조9000억원(한국은행·1993년 기준)이다. 규모면에서 4배 정도 증가한 것이다. 사금융 산업에서는 등록업체가 1만7000개, 미등록업체는 3만5000~4만5000개로 추정되고 있다. 사채업자 수의 최소한 4~5배에 달하는 전주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대부사업자가 3000여 개에 지나지 않던 1997년 통계와 비교하면 사채시장이 얼마나 팽창했는지 짐작이 간다. 송태경 민주노동당 민원정책실장은 “지난 1년 동안 대부업 실태를 조사(민생경제 SOS, 민생지킴이 전국 탐방)했다”면서 “전 국민이 사채시장에 노출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실제로 여러 금융회사에 채무를 지고 있는 신용불량자(다중채무자)들에게 빚탕감, 채무액 유예 등의 방법을 통해 채무조정의 기회를 부여하는 개인워크아웃(파산면책)을 신청하기 위해 민노당에 상담한 건수(2004년 10월~2006년 12월)는 무려 1만5137건(전화·인터넷 면담 제외)이나 된다. 권오재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 간사는 “1998년 이자제한법 폐지로 그만큼 돈놀이가 쉬워졌기 때문”이라면서 “건강한 투자자원의 왜곡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사금융이 확대되는 것보다는 사금융의 약탈적 대출이 더 큰 문제다. 금융감독원의 자료(2006년 말 현재)에 따르면 사금융의 평균이자율(1년 기준)은 223%라고 밝히고 있다. 법이 정한 이자 상한(2007년 3월 부활된 이자제한법·연금리 66%)을 비웃고 있는 것이다. 특히 카드빚을 갚거나 병원비, 학자금, 생활비 등 생계형 자금의 필요에 의한 개인사금융 수요가 ‘폭발’하고 있다. 결국 생계형 사채를 쓸 수밖에 없는 서민들이 가혹한 이자 부담에 시달리는 피해를 입고 있다. 권오재 간사는 “과거엔 사금융이 서민들이 마지막으로 찾는 서민 대출의 보루였다”면서 “그러나 이제 보편화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심각성을 지적했다. 사금융은 채권 회수의 위험성이 큰 만큼 이자는 비싸다. 그동안 정당이나 시민사회단체도 금리규제를 중심으로 대응해옴에 따라 고금리 피해는 사실상 방치되어왔던 게 지금까지 상황이다. 고리대금의 수렁에 빠져들면 그것은 곧 파산을 의미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 실례와 문제점을 사례별로 찾아본다. (1)사례 중소상인의 돌려막기 사업을 하던 곽경숙씨(가명·26·봉천동)는 아버지가 1995년 부도로 가출한 상태에서 그 빚을 어머니가 떠안게 됐다. 생계를 돕게 된 곽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곗돈 3000만원, 어머니가 얻은 사채를 보태 서울 동대문 밀리오레에 조그만 옷가게를 열었다. 옷은 말 그대로 날개돋친 듯이 팔렸다. 하지만 그것은 허울 좋은 개살구였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어머니가 곽씨의 신용카드를 부도빚을 돌려 막는 데 사용하고 있었다. 그는 결국 사채에 손을 댄다. 2005년 8월 29일 그는 대출업 사무실도 아니고 차에서 대출서류를 작성하고 700만원을 대출했다. 하루에 8만2600원씩 100일 동안 826만원을 갚는 조건이었다. 연체를 반복했고 3차례 ‘대치기’(원금 잔액과 연체금액을 합쳐 다시 일수로 빌려주는 것)를 했고 결국 그가 부담한 이자율은 무려 308.6%이나 됐다. 빚을 갚기 위해서 더 많은 돈을 빌려야 했다. 결국 20여 개 대출업체에서 돈을 빌려 쓰면서 빚이 얼마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기하급수로 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2005년 2월 1억1000여만원이던 빚이 이듬해 11월 1억8900여만원으로 늘었다. 그는 개인파산도 신청하기 어려운 상태다. 빚 갚을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돈을 빌렸는지 그 여부(사기죄 적용 여부)를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사채업자의 맞고소로 법정다툼 중이다. 권오재 간사는 “은행 빚을 갚기 위해 사채시장의 돈을 쓰는 일이 발생했다”면서 “이는 은행의 보수화가 낳은 결과”라고 지적했다. 결과적으로 ‘메이저 금융기관’(제1·2금융권)이 경제질서 유지에 무책임함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얘기다. 거대금융권 스스로 영세하고 신용도가 낮은 중소상인이나 중소기업인들을 위해서는 공적금융(Micro Credit)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2)사례 카드깡은 ‘깡통인생’을 만든다 김민영씨(가명·경기 부천)는 1999년 카드가 남발될 때 신용카드를 발급받았다. 그는 당시 입시학원 강사로 일하고 있었다.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동생도 그가 맡아 거두고 있었다. 2000년 500만원 현금 서비스를 받았던 게 이듬해 1060만원으로 늘어났다. 이 중 일부를 상환하기 위해 상호저축금고에서 320만원을 빌렸다. 대출금액이 불어나면서 연체가 늘어났고 2002년 급기야 그의 신용도는 평가절하됐다. 카드서비스대출 한도도 기존의 3분의 1 수준이 된 것. 결국 카드깡에 손을 댔다. 백화점에서 상품권을 구입하는 형식으로 1200만원을 빌렸지만 이듬해 그의 빚은 2200만원으로 늘어났다. 사채업자의 채권추심이 시작되자 동네 목욕탕, 교회 등에서 생활을 하는 등 한동안 도망자 생활을 했다. 지금은 월 임대료 10만원을 내는 13평 임대아파트에서 기초수급생활자로 살고 있다. 그는 현재 개인파산(개인워크아웃)을 신청한 상황이다.(3)사례 생계형 급전이 낳은 가정파괴 50대의 한 여성은 2003년 시부모의 병원비를 대기 위해서 카드 돌려 막기를 했다. 결국 대부업자에게 손을 대 급전 700만원을 빌렸다. 당시엔 시부모님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그 역시 사채를 얻어서 사채를 갚았다. 그가 그동안 상환한 돈은 3000만원이나 된다. 그러나 빚이 줄기는커녕 1억원으로 늘어났다. 그 과정에서 빚에 쪼들리던 남편은 자살했고 두 명의 자녀는 모두 가출했다. 절망적으로 살다가 지난 5월 민주노동당 민원정책실을 찾아 도움을 요청했다. 빚이 늘어나면 보통의 직장인이 생활수급대상자로 전락한 경우다. 국가재정은 재정대로 축을 내고 피해자는 피해자대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이다. 신용도가 비록 낮더라도 대출상환 의지가 있는 경우 사회연대은행 등을 활성화해서 신용사각지대에 있는 서민들이 회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경제학)는 “대안은행을 찾는 노력이 없다면 그것은 국가의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조제현 변호사(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는 또 은행의 휴면계좌를 이용하는 방법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휴면계좌엔 4000억원 정도가 있다. 이를 소액대출 연체자 혹은 신용불능자에게 재대출해서 회생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봐야 한다는 제안이다. 금융감독원도 “공영원리에 의한 정책적 차원의 전문 대안금융기관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했다.(4)사례 강탈적인 사채업자의 돈놀이 정정미씨(가명)는 가사도우미로 어렵게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다. 그는 300만원의 급전이 필요했다. 2006년 6월 13일 한 사채사무실을 찾았다. 사채업자는 “우리는 500만원 이상 대출해준다”고 했다. 그는 150일간 하루에 3만8500원씩 갚기로 약정(이자율 166%)하고 500만원을 빌렸다. 그가 받은 것은 수수료, 법정비용, 선이자 등을 땐 400만7500원이었다. 일수가 밀리고 채권추심이 들어왔다. 사채업자는 “몸을 팔아서라도 돈을 갚으라”고 협박성 독촉을 했다. 6월 13일 남은 상환액은 273만3500원이었는데 이 빚을 갚기 위해서 500만원을 같은 조건으로 다시 대출할 것을 강요받았다. 대출금은 500만원이었지만 상환금, 선이자 등을 떼고 그의 손에 남은 돈은 불과 110만원이었다. 1000만원을 빌렸지만 그가 만져본 돈은 불과 500만원을 조금 넘는 것이었다. 또 다른 조건이 따라붙었다. 5개월 내에 전액을 상환하지 않으면 채권추심을 하겠다는 각서를 섰다. 물론 사업업자가 불러준 대로 받아쓴 것이었다. 사채업자는 현재 채권추심에 나서 전세금을 가압류했다. 청구금액은 700만원이었다. 정정미씨는 현재 이 대출업자를 민법 103조·104조 위반으로 고발한 상태다. 이런 경우 법원이 개인간 사적 계약을 중시한다면 정정미씨는 사기죄에 해당될 가능성이 높다. 최근 대법원 판례처럼 사회적 풍속에 반하는 계약(민법 103조·104조)으로 본다면 사기죄는 면할 수 있다. 송태경 실장도 “사실 불법적 사채업자에 대한 패널티(처벌)가 너무 가볍다”면서 “신체적 가해가 없는 경우 거의가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게 통례”라고 말했다. 이헌욱 변호사(참여연대 민생희망운동본부 실행위원장)는 “무엇보다 불법채권추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사법당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5)사례 신체포기 각서 민노당 송태경 민원정책실장은 지난해 11월 7일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고리대부업 피해자였다. 40대 여성으로 들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채무변재를 못해 신체포기 각서를 작성했다”고 말했다. 그는 “채권추심자는 며칠 동안 집 주위를 서성거리고 초·중학교에 다니는 자녀에게도 접근하고 있다”면서 “겁이 나서 신고를 하지 못하겠다”며 벌벌 떨면서 말했다. 송 실장은 “‘신체포기 각서는 법적 효력이 없으니 개의치 말고 경찰서에 신고하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신체포기 각서는 보통 ‘… 계약에 따라, 담보물로 설정된 주요 장기를 비롯한 신체 전부에 대한 권리를 사업자 ○○○에게 양도하며, 이를 확인하여 분란의 여지를 없애고자 이 각서를 작성합니다’라고 정형화되어 있다. 송태경 실장은 통화를 끝내고 자신의 블로그(blog.naver.com /urisaju/ 150010743412)에 글을 올렸다. 그는 ‘단속해야 할 경찰이 버젓이 고리 대부업을 부업으로 하는 세상, 실태조사와 필요한 조치는커녕 불법광고조차 제대로 단속하지 않는 시·도와 금융감독원, 고작해야 집행유예나 벌금형으로 끝내는 법원, … 덕분에 집값이 미친 것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광기로 얼룩진 고리대부업 시장은 어제도 오늘도 잘도 돌아갑니다. 오늘도 누군가는 신체포기 각서를 썼을 것이고, 오늘도 누군가는 자살을 택했을 것이지만, ‘그 누군가에 속하지 않은 당신’은 이런 문제를 알지 못하고 지냅니다”라고 적었다. 권오재 간사는 “추심방법을 엄격하게 규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채무 상태에 대해 “가족 혹은 회사에 알리거나 심지어 송태경 실장과 통화한 사람처럼 신체포기 각서를 쓰게 하는 일이 심심찮게 발생한다”고 말했다. 송태경 실장도 “포기각서를 쓴 채무자도 신체포기 각서가 법적 효력이 없음을 잘 안다”면서 “불법채권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약탈적 갈취에 대해 어떤 대응도 하지 못하는 게 보통이다”고 말했다. 이는 치안이 동반되지 않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예다. 관리감독과 처벌의 실효성을 동반해야 한다는 지적인 셈이다. 사채업자들의 악랄한 추심방법 ‘가족 몰살’ 협박부터 신체포기 각서까지살인적인 이자에 시달리는 사채 피해자가 빚 독촉을 피하기 위해 제2의 범죄로 나서는 일은 이미 흔한 일이 되었다. 채권추심에 나선 사채업자들로부터 어떤 시달림을 받기에 사회적 낙인이 찍힐 것이 뻔한 범죄까지 저지르는 것일까. 유석호 쇼테크 사장(38)은 2000년 회사가 어려울 때 사채를 빌려 썼다. 신체포기 각서도 썼다. 죽을 각오로 ‘마이링거’ 개발에 성공하면서 사채업자들의 협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가 3월 21일 한양대학교가 개설한 CEO 특강에서 “군복을 입은 노인들이 온 적도 있고 종교단체에서 온 분들이 찬송가를 부르기도 했고, 팔다리가 없는 분들이 와서 돈을 갚으라고 회사에 온 적도 있었어요”라고 말했다. 물론 직접적으로 신체적 위협을 가하는 일도 흔하다. 2006년 6월 ㄱ씨는 경북 청송군 현동면 한 식당에서 ㄴ씨(48)를 흉기와 가스통 밸브를 열어 협박하고 폭행하는 등 모두 7차례에 걸쳐 이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는 게 포항북부경찰서의 설명이다. ㄱ씨는 여성들만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해오는 사업업자로 자신의 돈을 빌린 ㄴ씨가 빚 독촉과 협박에 못 이겨 달아나자 소재 파악을 위해 피해자를 폭행한 것. 경기 수원경찰서는 2006년 7월 중소기업체 사장인 김모씨에게 10일 후 갚는 조건으로 1500만원을 빌려준 뒤 약속한 날짜에 돈을 갚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족을 몰살시키겠다’고 협박, 3500만원을 갈취했다고 밝혔다. 여성에게는 성폭행·감금·납치 등도 적지 않게 동원되는 방법이다. 서울 강동경찰서는 지난해 7월 24일 남모씨가 유흥업소 종업원 도 모씨를 일당의 오피스텔에 16일 동안 감금한 혐의로 구속했다. 유흥업소 여종업들에게는 ‘선불금의 족쇄’가 가장 흔한 방법이다. 불법적인 우편물을 이용하는 것도 빚 독촉의 한 방법이다. 직장인 ㄷ씨는 최근 수십 통의 빚 독촉 우편물을 받았다. 법원압류통고장, 강제집행착수예정문, 법적 소송결정문 등 제목만 봐도 섬뜩한 것이었다. 이 독촉장은 대부업체로부터 채권을 위임받은 자산관리회사가 보내는 것이다. 마치 법원, 경찰성 등 국가기관에서 작성한 공문서처럼 꾸며 겁을 주는 행태다. 물론 이들 서류는 법적 근거가 없다. 또 직장인 ㄹ씨는 법원이나 경찰서 등 대표번호가 발신번호로 찍힌 전화도 자주 받았다. 발신번호를 임의로 지정할 수 있는 인터넷 전화를 이용해 위협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피싱사기’에도 자주 사용된다. 지난해에 채무자를 살해한 후 그 보험금을 갈취하려 한 사채업자가 경찰에 잡힌 일도 있다. 전북지방경찰청은 지난해 7월 채무자 사망시 자신이 수억원의 보험금을 지급받을 수 있는 종신보험에 가입한 후 교통사고를 위장해 채무자를 살해하려는 등 수차례 채무자를 협박하고 폭행했다고 밝혔다.어느 사채업자의 고백 “돈 받아내려니 그럴 수밖에요”서울 강남구 역삼동에서 대부업체를 운영 중인 김항주씨는 ‘대부업자들의 인터넷 카페’인 ‘착한 역삼동의 대부업자’를 운영하고 있다. 회원은 7000여 명. 그는 대부업 7년 경력을 갖고 있다. 그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막사채업자’였다. 채권추심을 위해 채무자에게 폭언을 가리지 않는 사채업자였다는 얘기다. 그는 대부업의 인식을 전환시키는 데 일조하겠다는 뜻에서 이 카페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대부업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예. 그는 “‘신분증을 위조할 수 있느냐’ ‘청부살인을 해달라’ ‘빚 독촉을 피해 중국으로 도망가려고 하는 데 밀항선을 알선해달라’ ‘성폭행을 당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등과 같은 황당한 전화를 받은 일도 있다”면서 “한마디로 대부업자를 ‘도둑놈’으로 인식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역시 대부업에 자부심을 갖고 있지 못하다. 결혼 당시 자신의 직업을 배후자에게 ‘펀드매니저’라고 속였을 정도. 그는 이어 “돈을 빌려주면서 욕 먹을 필요가 있겠느냐”면서 “법 안에서 경제활동을 왜곡시키지 않는 수준에서 대부업을 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신체포기 각서 등을 요구하는 악덕업체들 때문에 등록해서 세금 내는 업자들도 많은 피해를 보고 있다”고 역설하면서 “대부업자 스스로 인식을 바꿔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남은 사실 생계자금이 필요한 대출자가 있는 곳은 아니다. 그 역시 “여기엔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이 돈을 이용하지는 않는다. 주로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했다. 담보대출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그는 전주와 관련, “정치인·의사·기업인들도 있다”면서 “대기업을 운영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둔 사람이 50억원 정도 자금을 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오희성씨(가명·34)는 서울 영등포에서 ‘일수놀이’를 하다가 대부업체에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다. 채무자가 돈을 갚지 않아 망한 경우다. 그는 “영등포 지역만 해도 7000개가 넘는 ‘일수회사’가 있고 하루에 3~4개의 일수회사가 생긴다”면서 “일수쟁이는 한두 군데만 돈이 막혀도 도저히 회사를 운영하지 못할 정도로 영세한 업체가 대부분”이라면서 “나도 빌려준 돈을 상환받지 못하면서 결국 손을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일수업자들은 억척스럽게 돈을 회수할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협박과 불법적인 방법이 동원되는 것이라고 말했다.■글 / 김경은 기자(뉴스메이커)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 ‘동백림 사건’의 희생자 공광덕 박사 부인 조병옥
- 2006. 10. 01 화제
- “내가 붙잡은 건 그 사람의 손이 아니라 보다 확실한 내 인생이었어요” 수기라지만 때로는 완벽한 단편이나 연작소설처럼 느껴지는 「라인강변에 꽃상여 가네」의 저자 조병옥. 그녀는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일어난 반정부 간첩단 사건인 동백림 사건의 허구도, 민주화 운동 투사의 모습도 아닌 사실 그대로의 ‘어미의 삶’을 자식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밤을 지새우며 글을 써내려갔다. 특별한 삶과 특별한 죽음 ‘동백림 사건’에 연루됐던 공광덕 박사의 부인 조병옥씨가 수기 형식의 이야기 「라인강변에 꽃상여 가네」라는 책으로 펴냈다. 촉망받는 음악가이자 이화여대 교수였던 저자는 어린 시절 쌀밥이 먹고 싶어 일본군 병사에게 순결을 잃었던 이야기에서부터 공 박사와 결혼하게 되기까지의 과정, 독일에서 부부가 벌였던 민주화 운동, 암 선고를 받은 남편이 42일간 단식하며 투병 생활을 했을 때의 심정 등을 여과 없이 담았다. 더불어 독일에서 윤이상 선생, 이응노 화백과 교류했던 이야기와 리영희, 홍세화, 이해동 목사, 작고한 안병무 교수, 이삼열 교수, 오석근 박사, 북측의 여연구, 루이제 린저 등과의 친분도 실었다. 이 책은 동백림 사건의 허구성을 밝히기 위해 쓴 것이 아니다. 동백림 사건으로 인해 전과자 신분으로 방황하던 공광덕 박사와 결혼하면서 민주화 운동에 눈을 뜬 여교수의 고발서는 더더욱 아니다. 자식에게 어미의 삶을 물려주고 싶은 마음에 특별한 인생을 담았다. 오랜 외국 생활을 한 탓에 한글로 책 한 권을 완성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문학적 필력이 뛰어나 읽는 묘미가 있다. 남편의 암 치료 과정은 32편의 단식 일기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저자와의 일문일답 제목 ‘라인강변에 꽃상여 가네’는 무슨 의미인가? 라인강변은 외국의 상징이다. 왜 우리나라의 꽃상여가 라인강변에 있겠는가? 우리나라 산천에 묻혀야 할 사람들이 왜 라인강변에 있어야 하나. 그런 느낌을 담고 싶어 지은 이름이다. 처음 글을 쓰는 것이라 많이 힘들었을 텐데? 엄마로서 자식들에게 물려줄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던 차에 아들이 “엄마의 삶을 갖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외국에서 오랜 세월 살았기 때문에 한글 표현 능력이 모자라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상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눈에 걸리는 책은 모두 필사했다. 정치적인 색이 짙은 책인 줄 알았는데 내용은 사랑 이야기다. 남편은 학자에 가까운 사람이다. 나 역시 민주화 운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내가 동백림 사건에 관한 글을 쓴다면 언어도단이다. 물론 나는 제3자는 아니다. 동질감은 있었지만 깃발을 들고 앞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책을 쓰면서는 몰랐지만, 다시 읽어보니 꼭 이런 얘기까지 해야 했나 싶은 곳이 있더라. 하지만 그걸 따져볼 생각을 못했다. 그냥 팬 가는대로 거침없이 쓰다 보니까 책이 완성됐다. 사상범과 여교수,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내가 먼저 그를 잡았다. 물론 물리적으로는 내가 그 사람을 붙잡았지만, 내가 붙잡은 것은 그 사람의 손이 아니라 보다 확실한 인생을 붙잡은 것이다. 다른 사람이 보면 손해 보는 장사를 한 것 같겠지만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목마름을 채울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걸 수 있다. 공광덕 박사에 대한 첫인상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눈에 선하다. 찰리 채플린을 연상시키는 옷차림, 앞단추가 잘 여며지지 않는 오버코트에 짧은 소매, 그리고 퇴색한 로이터 안경을 쓰고 있었다. 아무도 곁에 없는 것처럼 외로워보였다. 공광덕 박사에게 미안한 마음이라고 당시 나는 전남편과 이혼한 상태였다. 공 박사를 사랑했지만 그와 결혼해야겠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결혼는 형식적인 조건 때문에 했다. 아이들을 독일로 데리고 가야 하는데, 아버지가 있어야 갈 수 있었다. 부모는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살아간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세상을 뚫고 나가서라도 부딪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하지만 양부는 좋은 선생님일 수밖에 없다. 좋은 교육 원리를 가지고 아이들을 대하게 된다. 남편은 아이들과 허물없이 지냈고, 아이들도 남편을 믿고 따랐다. 하지만 나 때문에 거기까지가 전부였다. 남편은 아이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지만, 항상 내가 먼저 아이들을 안았다. 나로 인해 남편이 또 한 번 외로운 삶을 살았던 것 같아 미안하다. 인생관, 결혼관을 듣고 싶다. 나는 ‘관’자가 들어가는 논리적인 얘기를 잘 못한다. 대신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사랑만 있으면 다른 건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오늘 같은 가을날, 거리에서 만난 노점상이 정감 있게 보이고, 뭔가 정겨운 목소리를 듣고 싶고, 마음이 촉촉이 젖어 있는 누군가를 만날 것 같은 기분, 그게 사랑이다. 결혼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과 평생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나는 결혼은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인생은 반쪽밖에 될 수 없다. 별명이 ‘깡병옥’이라고? 나는 어려서 씻기 힘든 아픔을 겪고 무엇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살았다. 이 세상에 밝힐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한 사람은 세상이 두렵다. 나는 세상에서 도망치다가 어느 순간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음을 알았다. 쥐가 구석에 몰리면 고양이를 물 듯이 모험심이 생기더라. 남편을 만나고 나서는 그 사람 곁에서 편안한 휴식을 느꼈다. 바라던 소망 하나가 이루어졌다. 책이 출간되니까 더 깊은 꿈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 같다. 한 지인은 “그럼 언제 꿈에서 깨냐?”고 묻는데, 나는 꿈일 때만 사는 것 같다. 애초에 자식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마음으로 글을 썼다. 이제 내 몫은 끝났다. 책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너무나 뜻밖이고, 그들이 이 책을 가슴에 안아줘서 고맙고, 감동을 받았다. ■글 / 김성욱 기자 ■ 사진 / 박원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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