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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총 363 건 검색)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 “1주기 때 시민들 연대로 버텨…수많은 ‘왜’ 꼭 밝혀낼 것”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 “1주기 때 시민들 연대로 버텨…수많은 ‘왜’ 꼭 밝혀낼 것”
2024. 09. 30 20:57사회
... 이태원 참사 2주기를 함께 기억하고 추모해달라고 당부했다. 이정민 유가협 위원장은 “지난 1주기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견딜 수 있었던 원동력은 지난해 10월 한 달간 함께해준 시민들의...
이태원 참사 2주기
[현장 화보] 강보경씨 산재 사망 1주기…“신속히 수사하라”
[현장 화보] 강보경씨 산재 사망 1주기…“신속히 수사하라”
2024. 08. 07 16:06사회
... 같다”고 했다. 곧이어 쏟아진 소나기는 “원통해하는 눈물 같다”고 했다. 고 강보경씨 산재 사망 1주기를 나흘 앞둔 7일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앞에서 1주기 추모 및 검찰 수사 규탄 기자회견이 열렸다....
현장 화보강보경중대재해검찰수사디엘이앤씨
채 상병 1주기, 군 사법개혁 역행한 ‘대통령실 외압 의혹’···재발 막으려면?
채 상병 1주기, 군 사법개혁 역행한 ‘대통령실 외압 의혹’···재발 막으려면?
2024. 07. 22 06:00정치
군 사법개혁 흐름 속 대통령실 개입 논란 국방부 견제하는 군 인권 시스템도 마비 “똑같은 일 또 일어날 수 있는 상황” 개선 필요 군 사법제도는 ‘지휘관의 영향력은 줄이고, 민간의 영향력은 늘리는’...
채 상병 1주기
“잊지 않겠습니다”…주말에도 이어진 ‘서초구 초등교사 1주기’ 추모물결
“잊지 않겠습니다”…주말에도 이어진 ‘서초구 초등교사 1주기’ 추모물결
2024. 07. 20 15:11사회
... 오후 서초구 서울교육대학교 대운동장에서 초등교사노동조합 주최로 열린 서이초등학교 교사 사망 1주기 추모식에서 교사들이 묵념하고 있다. 연합뉴스 1년 전 서울 서초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발생한 교사...

스포츠경향(총 115 건 검색)

‘그리운 아저씨’ 고 이선균 사망 1주기···협박범들은 중형
‘그리운 아저씨’ 고 이선균 사망 1주기···협박범들은 중형
2024. 12. 27 09:08 연예
배우 고 이선균이 지난해 12월 경찰의 조사를 받기 위해 세 번째 출석하는 모습. 연합뉴스 배우 고 이선균이 떠난 지 1주기를 맞이했다. 고인을 둘러싼 평가가 엇갈린 가운데 영화계의 애도와 추모는 이어지고 있다. 고인을 협박한 유흥업소 관계자들은 최근 중형을 선고받았다. 고 이선균은 지난해 12월 27일 서울 성북구의 한 주차장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다. 향년 48세. 마약 투약 의혹을 받고 경찰 수사를 받은 지 약 두 달 만, 세 번째 소환 조사를 받은 직후였다. 경찰의 내사 과정부터 마약 투약 혐의가 알려진 고 이선균은 혐의를 줄곧 부인해왔다. 유흥업소 관계자 A씨가 건넨 약물을 수면제로 착각해 투약했다는 입장이었다. 고 이선균은 1차 모발 정말감정에 이어 2차 체모 감정에서도 음성 판정을 받았다. 경찰은 물증 확보에 실패했지만 사건 관련자 진술이나 정황 등을 토대로 수사를 마무리한다는 방침이었다. 고 이선균은 지난해 12월 23일 세 번째 소환조사를 마치고 기자들과 만나 “경찰 조사에서 다 성실하게 말씀드렸다”고 했다. 고 이선균이 사망하면서 경찰은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을 종결했다. 고인은 수원시 연화장에 안치됐다. 고 이선균이 사망하자 영화계가 분노했다. 봉준호 감독, 장항준 감독, 가수 윤종신 등을 비롯해 문화에술 관련 단체가 문화예술인연대회의를 결성해 성명을 발표하고 경찰과 언론을 비판했다. 이후에도 영화인들의 추모는 이어졌다. 지난 7월 진행된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는 올해의 한국영화공로상 수상자로 고 이선균을 선정했다. ‘고인 사람, 이선균’ 특별 기획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고인이 출연했던 유작 6편을 대중에게 재상영했다. 29개 문화예술관련 단체로 구성된 ‘문화예술인 연대회의’가 지난 1월 12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고 이선균 배우의 죽음을 마주하는 문화예술인들의 요구’ 성명서를 발표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당시 배우 송중기는 고 이선균의 수상 당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그는 지난 24일 방송된 MBC FM4U라디오 ‘완벽한 하루 이상순입니다’에 게스트로 출연해 추천곡으로 고 이선균이 출연한 드라마 ‘나의 아저씨’ OST ‘어른’을 선정했다. 그는 “내가 너무 사랑하는 이선균 형님의 기일”이라며 “형이 또 보고 싶기도 했다”고 했다. 고 이선균을 협박한 유흥업소 관계자들은 최근 실형을 선고받았다. 인천지법 형사4단독 곽여산 판사는 지난 19일 공갈 등의 혐의로 기소된 유흥업소 관계자 A씨와 같은 형의로 기소된 전직 영화배우 출신 B씨에게 각각 징역 3년 6개월과 징역 4년 2개월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A씨의 범행으로 유명 배우였던 피해자는 두려움과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을 것으로 보인다”며 “B씨도 직접 피해자를 협박해 정신적 고통을 가중했다”고 했다. A씨는 지난해 9월 고 이선균에게 전화해 “휴대전화가 해킹돼 협박받고 있는데 입막음용으로 돈이 필요하다”며 3억원을 뜯어낸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A씨를 협박한 협박범은 B씨였다. B씨는 A씨가 필로폰을 투약한 정황뿐 아니라 고 이선균과 친하게 지낸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불법 유심칩을 이용해 해킹범 행세를 했다. B씨는 A씨로부터 돈을 받아내지 못하자 지난해 10월 고 이선균을 직접 협박해 5000만원을 뜯어냈다.
故 변희봉 18일 1주기…시간이 지나도 기억될 큰 별
故 변희봉 18일 1주기…시간이 지나도 기억될 큰 별
2024. 09. 18 17:17 연예
지난해 9월18일 별세한 배우 故 변희봉의 영정 사진 이미지. 사진 스포츠경향DB 배우 故 변희봉이 18일 사망 1주기를 맞았다. 변희봉은 18일 1주기를 맞았다. 변희봉은 지난해 과거 완치 판정을 받았던 췌장암이 재발해 투병을 이어오다 지난해 9월18일 향년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1942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변희봉은 연극배우로 활동하다 1966년 MBC 2기 공채 성우로 연예계에 데뷔했다. 이후 배우로 전업한 그는 드라마 ‘제1공화국’ ‘조선왕조 오백년:설중매’ ‘허준’ ‘동네변호사 조들호 2’ ‘불어라 미풍아’ 등의 드라마에 출연했다. 영화에서 조금 더 진한 족적을 남겼다. ‘화산고’ ‘국화꽃향기’ ‘선생 김봉두’ ‘공공의 적 2’ ‘주먹이 운다’ 등의 작품에 출연했고, 특히 봉준호 감독의 ‘페르소나’로 인기를 얻어 영화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괴물’ 등에서 활약했다. 고인은 약 50년간 대중문화 각계에서 활약한 공로를 인정받아 2020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영화 ‘괴물’로 제27회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故 해수 1주기, 장윤정이 어미새의 마음으로 품었는데···
故 해수 1주기, 장윤정이 어미새의 마음으로 품었는데···
2024. 05. 12 14:22 연예
SNS캡처 트로트 가수 해수(본명 김아라)1주기를 맞아 누리꾼들의 추모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5월 12일 故 해수는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향년 29세. 현장에서 고인의 유서가 발견되는 등 경찰은 사망 원인을 자살로 판단했다. 해수 측은 고인의 부고를 전하며 “해수님은 주변에 사랑을 베풀 줄 알았고, 또 정을 나눌 줄 알았으며 그만큼 받을 줄도 아는 따뜻한 사람이었다”고 전했다. 해수는 가수 장윤정이 아낀 후배로 주목 받았다. 이에 장윤정의 남편 도경완은 “제 아내 장윤정씨가 사랑하는 후배 해수에게 보내는 마음”이라며 글을 남겼다. 장윤정은 “제 둥지 안에서 사랑 받고 상처 치유하고 멋있게 날갯짓해서 날아 가길 바라는 어미새의 마음으로 품었는데 놓쳐 버렸다.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이렇게 아픈 이별을 하려고 그렇게 사랑스럽게 굴었나 보다. 마지막 날까지 웃어 보이고 제 품에 안기고 사랑한다고 아낌 없이 표현했던 해수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부디 고인의 명복을 빌어달라”고 애통한 마음을 전했다. 1993년생인 고 해수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판소리 전공한 후 2019년 1집 EP 앨범 ‘내 인생 내가’라는 곡으로 데뷔했다. MBC ‘가요베스트’로 데뷔 무대를 가졌다. 해수는 ‘불후의 명곡’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 ‘장윤정의 도장깨기’ 등 다양한 방송에 출연하며 대중과 만났다. 특히 사망 전날에도 팬들에게 도시락 선물에 대한 감사 인사와 사진을 올려 누구도 사망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글이 많았다. 누리꾼들은 “하늘에서 편히 쉬길” “당신의 노래는 영원할 거에요” “감사했습니다” 등 추모의 글을 이어갔다.
그리운 1주기…아스트로 진진, 故 문빈 목소리 담긴 ‘Fly’ 발매
그리운 1주기…아스트로 진진, 故 문빈 목소리 담긴 ‘Fly’ 발매
2024. 04. 19 10:00 연예
판타지오 제공 그룹 아스트로(ASTRO) 진진이 팬들에게 특별한 선물을 전한다. 진진은 19일 각종 음원 사이트를 통해 새 디지털 싱글 ‘Fly (Duet with. 문빈(ASTRO))’(플라이)를 발매한다. ‘Fly’는 진진이 직접 작사와 작곡에 참여한 곡으로 문빈을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는 팬들에게 전하는 선물 같은 노래다. 이 곡은 진진과 문빈이 함께 작업했고, 문빈의 목소리도 담겨 있어 팬들에게 더욱 의미 있는 선물이 될 예정이다. 아스트로 리더인 진진은 지난달 음악 프로젝트 ‘JIN LAB’(진 랩)을 론칭하며 첫 음원으로 진진만의 진솔한 감성을 녹인 ‘Good Enough’(굿 이너프)를 발매했다. 랩, 보컬, 프로듀싱 등 다방면의 재능을 갖춘 진진이 계속해서 들려줄 음악에도 기대가 모인다. 아스트로는 지난 2월 23일 데뷔 8주년 기념 스페셜 싱글 ‘Circles’(서클스)를 발매하고 팬들과 함께일 미래와 변치 않을 우정을 약속했다. 진진이 직접 작사, 작곡, 프로듀싱을 맡아 아스트로만의 청량한 팀 색깔을 담아내며 팬들의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다. 문빈의 1주기에 발매되는 진진의 디지털 싱글 ‘Fly (Duet with. 문빈(ASTRO))’는 19일 오후 12시부터 각종 온라인 음원 사이트에서 감상할 수 있다.

주간경향(총 4 건 검색)

[렌즈로 본 세상]‘자유인, 문화인, 평화인’ 노회찬 1주기(2019. 07. 26 17:57)
2019. 07. 26 17:57 사회
지난 7월 23일은 노회찬 전 의원이 타계한 지 1년이 되는 날이었다. 노 전 의원이 묻힌 경기 남양주 모란공원을 찾았다. 이곳은 민주주의와 통일, 인권을 위해 싸웠던 전태일, 문익환, 박종철, 김근태 등이 잠든 곳이다. 공원 입구 민족민주열사 묘역 안내도에는 아직 노 전 의원의 묘소가 어디인지 알려주는 이정표가 없다. 사흘 전 묘비 제막식을 한 터라 묘역은 어수선해 보였다. 유가족보다 먼저 도착한 노회찬재단 관계자들이 묘역을 정리했다. 제단을 물수건으로 깨끗이 닦은 뒤, 추모 1주기를 맞아 간행된 책자들을 노 전 의원의 사진 옆에 놓았다. 묘소에 놓인 고 노회찬 의원의 명패엔 이렇게 적혀 있다. ‘진보정당 대표의원,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
렌즈로 본 세상
세월호 1주기 가로막은 경찰의 ‘근혜산성’(2015. 04. 28 17:08)
2015. 04. 28 17:08 사회
ㆍ18일 1주기 범국민대회… 경찰 1만3000여명·차벽 477개 도심 촘촘히 에워싸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더 오랫동안 싸우고 싶어서 남은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우리도 하루라도 빨리 집에 가고 싶다고요.” 4월 22일 서울 광화문에서 4·16연대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폭력시위 논란이 벌어진 이전 주말의 대규모 범국민대회에 이은 2차 범국민대회 개최 및 향후 일정을 알리는 자리였다. 경찰과 집회 참석자들 사이의 충돌 분위기를 두고 한 시민사회단체 상근자와 대화를 나누던 기자에게 한 유가족이 말을 붙였다. “지난 주말에도 경찰이 해산 방송을 하면서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잖아. 돌아가긴 가야지, 집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근데 가도 가족이 없잖아요. (경찰이) 방송을 해도 그렇게 말을 하는 게 참….” 4월 24일 서울 종로1가 거리가 집회 참가자들을 막기 위한 경찰 차벽으로 막혀 있다. | 연합뉴스 진상규명 메시지보다 충돌만 부각 세월호 유가족들과 집회 참가자들에게 ‘집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한 건 경찰이었다. 그런데 경찰이 도리어 귀갓길을 막았다. 유가족 20명을 포함해 연행자는 100명에 달했다. 세월호 참사 1주기 이후 첫 범국민대회가 열린 지난 18일 하루만의 기록이다. 광화문·종로 일대에 세워진 차벽만 477개에 안전펜스 101개가 추가로 세워졌다. 172개 부대 경찰력이 투입됐다. 경찰이 추산한 집회 참석인원 1만명보다 많은 1만3000여명의 경찰이 서울 도심을 촘촘히 에워쌌던 것이다. 유가족과 집회 참가자들은 물론 일상적인 통행을 위해 지나던 시민들의 보행도 막혔다. 집회·결사의 자유를 침해한 위헌적 조치라는 주장이 나왔다. 경찰과 보수진영에서도 즉각 반격이 나왔다. 경찰버스 유리창을 깨고 집기를 부수는 등의 폭력시위 분위기를 성토하며 맞불을 놓았다. 정작 경찰의 인벽과 차벽에 막혀 오도가도 못하다 경찰서로 연행된 유가족들의 목소리는 묻혔다. 문제는 5월까지 이어질 대규모 집회에서 같은 논란이 반복될 소지가 크다는 데 있다. 지난 18일 범국민대회에서도 집회 참가자들과 경찰 사이의 충돌은 예정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경찰의 집회 대응용 내부문건을 보면 청와대로 이어지는 삼청동과 인사동 일대는 물론 사직로와 신문로 등 도심 전역을 통제하는 차벽 및 경찰력 배치계획은 집회 시작 이전부터 치밀하게 짜여 있었다. 겹겹이 들어선 차벽 탓에 사실상 유인되듯 태평로 일대로 들어선 시위 인원과 그들을 둘러싼 경찰력 사이에서 유가족들은 손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아이고, 그래도 우리 위한다고 나온 사람들인데 우리가 뭐라 하겠어. 지금 이 상황까지 온 게 속 터질 일인 거지.” 곳곳에서 벌어진 충돌을 보며 ‘동혁 엄마’ 김성실씨는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것도 못하게 하고 (경찰은) 들어가라고 등 떠밀기만 하니 허탈하지요.” 4·16가족협의회와 세월호국민대책회의가 주축이 돼 꾸려진 4·16연대가 고심하고 있는 것도 이 지점이다. 1주기 추모주간에 거리로 나온 시민들의 규모는 작지 않았지만 정작 참사 진상규명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보다는 시위에서의 충돌양상만 부각됐기 때문이다. “2008년 촛불집회 때와는 다른 점이 있죠. 그땐 집회가 4개월 가까이 꽤 오랜 시간 지속됐어도 시민들 입장에서는 그리 오래된 문제라고 느낄 정도는 아니었는데, 지금 세월호는 어쨌든 1년이 지난 문제라 시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이 그때보단 덜할 수밖에요.”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앞으로의 여론전에서도 그리 유리한 입장만은 아니라고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현 정부의 지지도가 떨어져도 지지층이 결집하는 것을 보면 앞으로의 세월호 진상규명 문제는 이런 ‘물타기’를 얼마나 잘 피하느냐에 달린 것 같습니다.” 경찰 차벽 통제, 2011년 위헌 결정 경찰의 입장은 정반대다. 경찰이 다치고 장비·집기 등이 파손되는 등의 피해상황을 이례적으로 빠르게 집계해 언론에 브리핑하는 기민함을 보였다. 경찰에 따르면 경찰력 74명 부상, 차량 71대 파손, 캠코더 등 경찰장비 368점 피탈과 같은 피해가 있었다. 경찰 관계자는 “현장에서 ‘현행범으로 체포하라’는 지시가 나온 것은 엄연한 불법행위가 벌어지고 있고 과격한 시위로 경찰력의 피해도 늘어나는 상황이라 불가피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또 다른 경찰 관계자는 “우리로선 좀 강하게 대응해도 밑질 것 없다는 계산이 있으니 그때그때 완급을 조절해가며 나서는 건데, 일단 초반에 야무지게 봉쇄해놓는 방향으로 흐른 듯하다”며 강경대응이 미리 계획된 방침이었음을 내비쳤다. 이미 헌법재판소가 2011년 경찰 차벽 통제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음에도 경찰이 차벽 사용을 멈추지 않는 것 또한 대통령 ‘심기 경호’의 일환이라는 목소리가 경찰 안팎에서도 나오고 있다. 세월호 유가족 집회에서는 처음으로 물대포와 캡사이신이 사용된 것도 이전과는 달리 한 단계 강한 진압 방침이 내려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4·16연대 측은 이번 집회에서 쓰인 진압용 캡사이신의 주성분 ‘파바(PAVA)’ 역시 인체 독성이 심각하게 우려되는 물질인데도 경찰이 아무런 법적 통제 없이 남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박주민 변호사는 “하다 못해 경찰에게 소속이 어딘지, 법을 집행하는 근거가 뭔지 물어도 그에 대한 대답은 없이 ‘공무집행 방해로 처벌하겠다’는 엄포만 들었다”며 “오히려 적법한 절차를 거친 모습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말했다. 청와대의 ‘심기’도 보호하고 폭력시위 여론으로 명분도 챙긴 경찰에 비해 세월호 유가족들의 입지는 결과적으로 위축된 상태다. 4월 24일의 민주노총 총파업 대회와 5월 1일 노동절 대회에 유가족과 4·16연대 측이 적극적으로 결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당면한 우선 과제인 세월호 시행령 폐기 문제를 다루는 쪽으로 논의를 끌고갈 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노동계와 협조해 4월 25일과 5월 2일로 계획된 대규모 세월호 집회까지 이어가되 폭력시위 등 예기치 못한 불똥은 최대한 피하는 일이 급선무다. “지난 주말 추모대회에 들려보려고 해도 경찰에 꽉 막혀 있어 그냥 돌아갔거든요. 이번에는 도보행진이 미리 신고돼 있으니까 별탈 없이 추모하러 나갈 수 있길 빌어요.” 광화문 농성장의 추모미사에 참석한 시민 장경화씨는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이 더는 다치지 않게 경찰이 지켜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집회 현장에서 부상자가 속출하는 상황을 두고 유가족 김성실씨도 비슷한 말을 했다. “힘 보태주러 오신 분들, 제발 다치지만 말고 온전한 몸으로 집에 들어가요.”
[표지이야기]“1주기 맞춰 슬픔과 공감 폭발 주말 지나면 또 잊혀질까 우려”(2015. 04. 14 10:51)
2015. 04. 14 10:51 사회
ㆍ‘애도의 정치, 기억의 정치’ 주제 천정환-정원옥 전문가 대담 자식 잃은 슬픔. 그 비극에 대한 공감은 진보냐 보수냐를 따질 수 없었다. 한국 사회는 이 비극 앞에서 다 함께 애도했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가 정부의 무능이라는 민낯을 드러내자 다급해진 정부는 한국 사회를 보수와 진보로 빠르게 갈라놓기 시작했다. 이른바 51대 49 ‘두 국민 전략’이다. 정부와 새누리당은 경제논리와 보상·특혜 문제를 동원해 애도의 정서를 끊어내고 유가족을 고립시켰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6일 앞둔 지난 4월 10일 ‘애도의 정치, 기억의 정치’라는 주제로 천정환 성균관대 국문학과 교수와 정원옥 문화과학 편집위원이 대담을 나눴다. 천정환 “우리가 지난해 4월 16일부터 지금까지 본 것은 무엇일까. 먼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지극한 슬픔과 공감하는 애도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공감하는 애도만이 아니라 그와 정반대되는 비공감과 적대의 감정들이 있었다. 슬픔이 깊고 높을수록 반슬픔도 컸다. 희생자에 대한 보상문제, 그리고 김영오씨의 단식농성 등을 소재로 한 보수진영의 선동과 여론몰이는 비공감과 반애도의 정서를 자극, 확산시켰다. 올해 들어 정부는 다시 세월호 배·보상금 이야기를 언론에 흘리면서 반애도의 정서를 자극했다. 반애도의 정서는 한 번 물결이 거세게 일었다가 세월호 1주기가 다가오면서 일단 잠잠해졌다. 대통령도 선체 인양 쪽으로 가닥을 잡는 발언을 하면서 반애도의 분위기는 일단 가라앉은 상황이다.” 정원옥 “정부가 특별법 시행령을 강행하려고 하면서 애도의 정치가 다시 폭발하는 상황들이 전개되고 있다. 정부의 시행령은 진실규명을 할 의지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가족들은 이에 저항해 삭발식을 단행했다. 정부의 시행령 강행과 1주기가 맞물려 애도의 정치가 다시 전개되고 있다. 천 교수님 말씀대로 여기에 대한 반애도나 비공감이 아직 본격적으로 표출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1주기인 4월 16일, 그리고 그 주 주말이 지나고 나면 이런 반애도 적대가 또다시 본격화될 것 같아서 우려스럽다. 지난해 유가족에 대한 증오의 발언이 극렬하게 표출되는 것에 대해 이를 어떻게 봐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가족은 자식 잃은 피해자다. 그런데 그들에 대한 증오와 모욕이 그렇게 표현될 수 있다는 데 대해 놀랐다.” 천 “여러 가지 층위가 같이 있을 것이다. 적극적인 비공감이나 반애도가 우리 사회에 만연한 것은 어쨌든 2010년대 한국 정치를 규정하는 증오의 정치, 양극화의 정치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 큰 틀 안에서 각각의 결들은 조금씩 다르다. 일반 서민들이 7억~8억원의 배·보상금 문제로 돌아서는 문제, 새정치민주연합 김현 의원의 음주사고 문제, 일베 내에서의 조롱 문제, 모두 다 층위가 조금씩 다르다. 다만 이러한 문제들의 배경에는 양극화 정치가 큰 틀로 자리 잡고 있고, 이를 매개하는 것이 정부의 ‘두 국민 전략’이다. 한마디로 51대 49로 국민을 나누는 것이다.” 정 “세월호 참사는 이념대립과 무관한 사건이다. 그런데 이것이 진영논리로 가면서 사건의 본질이 이상하게 전달된다. 정부가 국민들을 분열시키는 방식으로 사건의 본질을 흐려놓았다.” 천 “정부가 잘못한 게 있기 때문이다. 비어 버린 7시간 논란처럼 정부의 무능, 해경의 무능, 청와대의 무능, 국가의 무능이 깊다. 자기들에게 쏟아지는 비판을 역으로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돌리는 식이다. 대통령의 세월호 사건과 유가족에 대한 잔혹성과 반공감은 철저히 정세에 따른 것이다. 대통령은 여론이 유가족에 대해 가장 동정적이거나 대통령에 대해 비판적일 때인 4·16 직후와 교황 방문 때 제스처 몇 가지를 취했다. 대신 그 반대의 경우엔 철저히 유가족을 외면하거나 사건을 대충 덮고 무마하는 계산된 행동을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진영정치의 구도에서 얻는 이득이 더 많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정 “세월호 사건마저도 49대 51의 논리로 해결하려고 한다면 이보다 더한 사건이 벌어진다고 해도 정부는 이 전략으로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정부의 ‘두 국민 전략’은 정교했다. 말씀하신 대로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국민들의 여론이 자신들에게 유리해지면 얼굴을 바꿨다. 문제는 여기에 대해 시민사회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랐다는 것이다. 아마도 정보수집 능력이 상대가 안 될 것이다. 당장 팽목항에서부터 엄청난 숫자의 경찰들이 깔려 있었다고 한다. 그런 것들만 봐도 정보수집력이나 대응력이 상당하다고 생각한다.” 천 “세월호 기사에서 이런 댓글도 봤다. 애들은 불쌍하지만 그 부모는 꼴보기 싫다는 식의 댓글이다. 보수진영은 여론을 그렇게 분리하는 데까지 성공한 것이다. 애도의 주체는 부모이고, 애도의 극한을 겪고 있는 사람도 부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요구하는 게 정권의 뜻과 배치되고 정권을 비판하면 이러한 여론까지 차단하는 것이다.” 정 “정부의 공안정치도 이러한 여론 차단에 한몫을 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공안정치는 1970년대 중앙정보부가 활동했을 때나 가능했던 말이지 지금 시대에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도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본다. 최근 시국 전단지를 배포한 것만으로 당사자뿐만 아니라 출판사까지 조사한 사건이 있었다. 내가 현 정부에 대해 어떤 비판 발언을 하면 결국 내 신상이 다 털리고 불이익이 돌아올 거라는 공포심을 불러일으킨다.” 천 “결국 이 문제가 해결되려면 현 정부 안에서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현 정부 안에서는 그런 정치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세월호가 제기한 구체적인 진실규명과 근본적 문제 모두 사실 이 정권 전체와 결부돼 있기 때문이다.” 정 “그런 상황에서 세월호 사건 이후 강화된 우경화 또한 문제이다. 광화문에 어버이연합이 나와 주변을 에워싸면서 위협하는 게 너무 심했다. 엄청난 앰프, 수백개의 의자. 도대체 이분들의 재원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했다. 정부의 두 국민 전략이 그 공간에서 그대로 재현되는 것 같았다. 한 국민은 국가가 동원하고 다른 한 국민은 탄압하는 방식이다.” 천 “한국 사회가 이제 담론과 행동 모두 가장 저열하고 증오에 가득 찬 비이성적인 부류가 주도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지난해 9월에 일베와 자유대학생연합이라는 단체의 소속원들이 광화문 광장에서 ‘먹기 퍼포먼스’를 벌였다. 단식에 맞서 싸구려 음식 따위를 먹는 퍼포먼스로 맞선다는 것은 현재 한국 정치의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쓰레기 같은 행동으로 슬프지만 숭고한 가치를 훼손해버리는 식이다. 우리가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공공의 덕성이나 공공선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데 이들은 그 반대로 공공선을 더 후퇴시켜버리고 사회를 더 비천하게 만든 셈이다. 문제는 이런 일베에서 뭔가 나오면 그게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언어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 사회 우경화의 한 징후이며, 한국 사회의 퇴행을 보여준다. 정부가 제기하는 ‘돈의 논리’도 그렇다. 정부는 배·보상 금액부터 들먹이면서 계산되지 않는 것, 계산할 수 없는 것을 교환가치로 환치하고 이를 전시한다. 이 ‘돈 문제’는 정부가 주로 악용하려는 정치적 수단이다. 세월호 특위와 선체 인양 문제도 ‘돈 문제’를 둘러싸고 찬반 여론이 갈린다. 무슨 돈을 들여 어떻게 할 것이냐를 둘러싸고 전 국민적인 갈등과 ‘바닥 여론’이 형성되고, 또 그를 이용하려는 정치가 이루어질 것이다. 세월호 때문에 경기가 나빠졌다, 유가족들이 얼마만큼의 돈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돈의 프레임은 언제나 강력했다. 그러므로 이쪽에서는 특위와 인양 등에 드는 사회적 비용에 대해 설득력 있게 계산하고 발언할 필요가 있다.” 정 “그런 점에서 안산은 오히려 건강하다. 안산은 사실 지금 심한 내부갈등을 앓고 있는 중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받는 상처가 멀리 있는 사람이 하는 욕보다 더 아플 수밖에 없다. 이웃사람의 이야기가 곧 상처가 되다보니 유족들이 이사를 간다거나 집밖에 안 나간다거나 하는 일이 있다. 안산에서 세월호 이후 장사가 안 된다, 안산의 이미지가 나빠진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그들 자식의 생명이 걸린 문제일 수 있고, 삶이 걸려 있는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갈등을 통해서 극복할 수 있는 힘도 나온다. 지금 안산과 일부 수도권을 제외하고 세월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다른 지역은 고민조차 없는데 안산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시할 필요가 있다. 얼마 전 안산에서 1000인 원탁토론회를 했다. 세월호가 처음 발생했을 때 안산에서는 보수·진보 할 것 없이 자원봉사단을 꾸려서 같이 유족들을 도왔는데, 그게 특별법 제정문제가 불거지면서 보수·진보로 나누어졌었다. 지난해 12월에 다시 보수·진보 할 것 없이 처음 봉사단을 꾸렸던 사람들을 모두 모아서 자리를 만들었다. 사실 지역 통·반장 하시는 분들 중 보수가 많다. 아는 후배가 통·반장들이 많은 토론조에 배치가 됐는데 다들 ‘경제가 안 좋다’ ‘세월호 때문에 경기가 안 좋아 경기를 살려야 한다’는 이야기만 하는 통에 앉아 있는 게 좀 괴로웠다고 하더라. 그런데 그분들이 마지막에 내린 결론이 뭐였냐 하면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진실규명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게 너무 놀라웠다. 실컷 경제 얘기를 했는데 결국 토론을 통해 내린 민주적 합의는 ‘진실규명’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좌우로 갈릴 문제도 아니고, 진보·보수로 갈릴 문제도 아닌데 박근혜 정부가 이를 이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원상회복해야 한다.” 천 “결국 민주주의 문제라고 본다. 민주주의의 회복은 곧 공공적 특성의 회복이다. 궁극적으로 정치란 그런 시민적 덕성을 발휘해서 공공선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런 안산의 사례로 봤을 때 지난 세월호 1년이 한국 사회의 비관적이고 절망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줬지만, 안산의 경우처럼 작지만 긍정적인 가능성을 보여준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정 “세월호 유가족들을 돕기 위해 일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많이 참여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자원봉사하는 분들이 상당히 많았다. 안산의 심리치유센터인 ‘이웃’은 100명의 자원봉사자들이 꾸려간다고 한다. 할 수 있는 만큼 밥하고 청소해 놓으면 유가족들이 와서 쉬었다 간다는 것이다. 자원봉사자들은 와서 봉사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고 말한다. 자기가 도움을 줄 수 있어서 미안함이나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어 고맙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라고 작은 일을 찾아서 하는 사람이 많다. 새로운 정치다. 이 문제를 피해자의 문제로 보는 게 아니라 내가 연루된 문제로 보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대거 늘어났다. 처음이다. 이런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아직도 세월호 사건에서 유가족이 중심이 되는 게 당연한 것처럼 이야기되는 것은 좀 아쉬운 점이다. 유가족이 중심이 되면 피해자 운동처럼 되어버린다. 세월호에 대한 진실규명, 배·보상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침몰했다는 것에 대해서 새롭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세월호는 대한민국을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사건이 된다. 이때 우리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유가족을 고립시키지 않을 수 있다. 유가족 때문에 집회를 하고 세월호 문제에 힘을 보태는 피해자 중심의 운동으로 가면 안 된다. 그러나 이게 잘 안 돼서 유가족들이 끊임없이 공격의 대상이 된다. 사실 더 많은 시민단체들이 힘을 모아서 유가족들을 보호하면서 가야 하는데 지금의 시민사회가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유가족이 공격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막아주지 못해서 안타깝다.” 천 “세월호 1년을 돌아보며 비관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다. 사실 지금은 1주기가 가까워오니 언론에서도 기사를 많이 쓰고 하는데 4월 16일 그리고 그 주 주말이 지나면 또 사그라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든다.” 정 “결국 ‘잊지 않겠습니다’가 가장 강력한 메시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싸움은 지난할 것이고 금방 해결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어쩌면 유가족들은 팽목항에서의 3일을 통해서 감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3일 동안 그들이 느꼈을 온갖 감정들. 희망, 기대, 분노, 배신, 좌절, 억울함. 이 숱한 감정들을 짧은 시간 동안 겪어내면서 어떤 상상할 수 없는 것을 결의하게 만들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다. 그들이 말하는 ‘잊지 않겠습니다’는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기획이 어려운 상황에서 이 사건을 끊임없이 현재형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표지 이야기
[조대엽의 눈]광주 30주년과 노무현 1주기
[조대엽의 눈]광주 30주년과 노무현 1주기(2010. 05. 19 13:22)
2010. 05. 19 13:22 사회
5·18 광주항쟁이 30주년을 맞았다. 광주항쟁은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의 뒤틀린 집권 야욕이 빚은 절정의 현대사 비극이었다. 163명의 사망자와 65명의 실종자, 87명의 항쟁 후 사망자, 3076명의 부상자, 429명의 구속자, 662명의 연행 및 구금자를 낳은 이 엄청난 비극이 벌써 30년 전의 역사가 됐다. 1980년대를 돌이켜보면 당시 대학생들에게 5월 약 열흘 동안 발생한 이 비극은 과거가 아니라 언제나 현재였다. 해마다 5월이면 캠퍼스의 구릉을 타고 비장하게 흐르는 5월의 노래 속에 학생들은 습관처럼 신발 끈을 조여 맸다.  ‘사과탄’ ‘지랄탄’ 등 뷔페처럼 차려진 최루탄의 거리를 뚫고 광주는 마침내 1987년 6월 항쟁으로 분출했다. 신군부의 집권기가 끝난 뒤 광주의 진상이 국회 차원에서 규명되고,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 있었고, 기념일이 제정돼 제도적으로 그날을 기리기까지 힘겹고 긴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이제 광주는 역사가 됐다. 광주의 원죄를 지은 신군부의 집권 시기였던 1980년대에 5·18 광주항쟁은 민주화운동의 뿌리이자 저항문화의 원천이었다. 이제 광주는 ‘역사’로 기념된다.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광주는 현재적 가치로 재현될 때 ‘기념’의 의의가 그만큼 커진다. 이제 곧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1주기가 다가온다. 내 기억으로는 역사로서의 광주 또는 광주의 현재적 정신에 대해 노 전 대통령만큼 의미 있는 평가를 내린 분도 없는 것 같다. 광주민주화운동 26주년 기념식에서 당시 노 대통령은 광주의 가치를 ‘화해’와 ‘통합’에서 찾았다. “5·18 광주가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은 화해와 통합의 역사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5·18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의 분출이기도 했지만 오랜 소외와 차별, 권력 유지를 위해 국민을 분열시킨 데 대한 저항이기도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은 또 화해와 통합의 역사를 이루기 위한 상생과 공존의 ‘균형사회론’을 강조했다. “지역 간, 계층 간, 산업 간, 근로자 간의 격차를 줄여 균형 잡힌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아울러 노 전 대통령은 5·18 광주가 도덕적 시민상과 진정한 공동체의 모범을 보였다면서 “생명이 위협받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너나없이 주먹밥을 나누고 부상자를 치료했으며, 시민들의 자치로 완벽한 치안을 유지했습니다”라고도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은 광주로부터 ‘자치’와 ‘자율’의 가치를 확인한 것이다.  광주의 당사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을 제외한다면 노 전 대통령만큼 진정성으로 광주를 대면한 분도 없을 듯하다. 광주에 대한 그의 진정성은 사회통합과 시민적 자율정치에 대한 진정성과 같을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이 광주로부터 찾아낸 사회통합과 균형사회의 전망은 우리 사회에서 중단됐다. 오히려 소통과 정치 없는 기이한 정치질서와 균열 및 해체가 난무하는 시장주의는 사회통합과 균형사회에의 꿈조차 빼앗았고, 시민사회에서 자율과 자치의 에너지마저 고갈시키고 있다. 최근에 개최된 광주항쟁 기념 학술회의에서 손호철 서강대 교수는 광주의 적자는 ‘촛불’이라고 말했다. 그 하루 전날 이명박 대통령은 스스로 반성한 것을 잊은 탓인지 촛불집회에 대해 납득할 수 없는 ‘말씀’을 쏟아냈다. 나는 우리 사회에서 ‘촛불’은 시민적 진정성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가끔 노 전 대통령이 촛불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촛불 없는 어둠이 너무 짙어진 것일까? 광주항쟁 30주년과 노 대통령 서거 1주년을 맞으며 온갖 번뇌가 무성한 가운데 무엇보다 진정성의 정치가 그립다.
금주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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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1주기 ‘추모의 별’ 뜬다
이태원 참사 1주기 ‘추모의 별’ 뜬다
2023. 10. 21 10:37 화제
이태원 참사 1주기, 추모의 별이 뜬다. 모이버 제공 이태원 참사 1주기를 맞아 ‘추모의 별’이 뜬다. 오는 10월 29일은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20일 증강현실 스타트업 ‘모이버’가 이태원 참사 1주기를 맞아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증강현실(AR) 추모의 별 ‘Remember 1029’를 제작했다고 전했다. 이 추모의 별은 모이버가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와 함께 참사 1주기를 맞아 증강현실 기술을 이용해 물리적인 거리의 제약을 넘어 범국민적인 추모 행렬을 일으켜 보자는 취지로 제작되었다. 전국 어디서나 증강현실로 된 추모의 AR 별을 하늘에 띄우는 챌린지를 통해 비극적인 참사의 희생자들을 기릴 수 있는 캠페인으로 진행된다. 이태원 참사 1주기를 맞아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증강현실(AR) 추모의 별 ‘Remember 1029’ 모이버는 ‘1029 이태원 참사’를 상징하는 주황색과 보라색을 품은 별을 3D 모델링으로 제작하고, 참사로 조각조각 흩어진 영혼의 별조각들이 하나로 모여 아름다운 별을 이루는 모습을 보여준다.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 이미현 상황실장은 “많은 곳에서 애도의 마음을 나누고 있을 시민들이 온라인상에서라도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함께 기억하기 위해 이 프로젝트를 기획했다”고 밝혔다. 모이버 김은영 프로는 “참사 1주기를 맞아 추모식을 이태원에서 개최하지만, 주변에 지방에 살거나 해외에 사는 지인들은 참석하고 싶어도 못해 아쉬움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모이버가 제작한 증강현실(AR) 인스타그램 효과를 사용하면, 누구든 어느 곳이든 하늘에 가상현실로 된 추모의 별을 띄워 캠페인에 마음을 보탤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추모의 별을 원하는 이들은 ‘1029 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나 ‘모이버’의 공식 인스타그램에서 공유할 수 있다.
고 김자옥 1주기를 보낸 남편 오승근의 첫 심경 고백
고 김자옥 1주기를 보낸 남편 오승근의 첫 심경 고백
2016. 01. 25 16:47 연예
이젠 좀 추스른 거냐고, 사람들이 묻곤 한다. 하지만 자신도 그걸 잘 모르겠다. 그냥 어딜 좀 다니러 간 것만 같고, 일을 마치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은 사람인데, 무엇을 어떻게 추슬러야 하는 건지, 또 그게 맞는 건지 말이다. 오직 기억하는 것만이 자신에게 남겨진 몫인 것 같다. 사람들은 으레 오랫동안 투병을 해왔으니,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어떤 고비에 더 이상은 힘들지 않을까, 짐작도 했을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오승근(65)은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라고 말한다. “아내가 2008년부터 투병 생활을 했어요. 하지만 병을 안 순간부터 마지막 날까지 우리는 단 한 번도 희망이 없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런 말조차 어디 가서 해본 적도 없고요. 만약 제가 그런 비슷한 말이나 내색을 했다면, 아내는 그날로 포기했을 거예요. 남편이 저렇게 말할 정도면 나는 손을 놓아야 하는구나, 하고 말이에요.” 담담하게 이어가는 말 속에는 단단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오승근은 아내 김자옥이 자신에게 얼마나 의지하고 있었는지 잘 알았다. 그의 말, 표정, 행동 하나하나가 그녀의 버팀목이었다. 일반 병실에서 상태가 악화돼 중환자실로 가는 문제를 결정하는 그 순간까지도. “중환자실로 옮기고 딱 24시간 있다가 갔어요. 그곳에 가는 걸 정말 싫어했어요. 거기 가면 죽을 것 같으니까. 의사가 일반 병실에 있으면 2시간을 못 버티지만 중환자실에 있으면 기적 같은 일이라도 기대해볼 수 있다고 해서, 그래서 간 거예요. 그게 아니었으면 그 사람은 거기 안 갔어요. 살려고 간 거지…. 그 정도로 삶에 의지가 있었어요. 아내나 저나.” 그래서일까. 오승근은 여전히 슬펐다. 그는 아직 추스르지 못했다고 말했다. 햇수로 벌써 3년이나 됐다며 헛웃음을 지었다. 만으로 고작 1년하고 3개월이 채 안 됐는데 말이다. 마지막까지 열심히 살았다는 말을 하며 여전히 혼란스러워했다. 여전히 아내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기 때문이다. 호흡기를 끼고도 이따금 “아빠, 이제 집에 들어가. 가서 좀 쉬어”라던 아내의 말들이 잊히지 않는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아내의 모습, 말들이 머릿속에 계속 떠올라요. 그런 상태예요. 이런 걸 지워야 하는 건지, 아니면 더 악착같이 기억해야 하는 건지 사실 많이 혼란스러워요. 지금도 어디 외국 여행 간 것 같아요. 꼭 돌아올 것만 같아요. 그래서 저는 그냥 기다려야만 할 것 같아요. 그러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건강검진으로 우연히 알게 된 병 부부는 건강했다고 했다. 감기나 걸려야 약을 처방받으러 가까운 병원에 가는 정도. 김자옥은 병원이라면 애 낳으러 산부인과에 갔던 것이 전부였을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건강검진을 받아보자고 그녀가 제안했다. 처음엔 어디가 안 좋아서 그러는 건가 의아하기도 했다. 아내는 그저 “우리도 건강검진 받아볼 나이가 됐어”라며 가볍게 답했을 뿐이다. 2008년 4월경이었다. 부부가 함께 대장내시경을 받았다. 검사 과정에서 외려 용종에 선종까지 문제가 있는 쪽은 오승근이었다. 그 정도라 다행이라고 여기며 아내를 기다리는데 영 나오지 않았다. 긴 검사를 끝내고 나온 의사는 CT를 찍어보자고 했다. 뭐가 하나 더 보인다는 것. CT 촬영 후 돌아온 답은 더 정확하게 알아보기 위해 조직검사를 하자는 것이었다.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일주일이 걸린다고 했는데 5일 만에 나왔어요. 대장암 3기라고. 그 정도면 심각한 거잖아요. 초기도 아니고 말이에요. 검사 결과를 듣는데 아내는 덤덤했어요. 그런데 저는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제 아버님과 형님이 다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런 경험을 이미 했으니까 저는 무척이나 두려웠어요.” 대장암 3기, 병세가 깊어질 때까지 정말이지 아무런 증세가 없었다고 했다. 김자옥은 언제나처럼 밝고 건강해보였다. “아내도 바로 수술을 받겠다고 해서 최대한 날짜를 빨리 잡았죠. 5월 5일이 어린이날이라 5월 6일에 첫 수술을 했어요. 제가 날짜도 안 잊어버려요. 그래서 저는 5월이 되면 마음이 안 좋아요. 수술이요? 수술 자체는 잘됐어요. 하지만 3기 정도 됐으면 발병 부위가 깨끗하게 제거됐어도 어디로 또 전이가 됐을지 모를 일이에요. 그렇더라고요. 경험해보니.” 첫 수술 후 3년 동안 항암치료를 했다. 힘들기는 했지만 견딜 수 있었다. 암 환자들에게는 1년을 잘 넘기면 3년을 살고, 3년을 잘 넘기면 5년을 살고, 5년을 잘 넘기면 7년을 산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김자옥 또한 3년을 거의 채우며 치료를 잘 받았기 때문에 ‘아, 이제 됐구나’ 안도할 참이었다. 그런데 가혹하게도 운명은 3년을 채운 그 시점에서 새로운 암이 생겼음을 알렸다. “밖에서 일을 보고 있었는데 아내가 전화를 했더라고요. 그런데 이 사람이 말을 안 해요. 그러더니 ‘아빠, 병원에 한 번 가봐야겠어. 그런데 나는 겁이 나서 못 가겠어. 아빠가 가봐’ 하더라고요. 저를 아빠라고 불렀거든요. 전화를 끊고는 일이고 뭐고 스톱하고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죠. 그랬더니 이번에는 폐에 암이 생겼더라고요. 벌써 대여섯 개나. 내가 못 믿겠다고 검사 자료 가지고 아는 의사를 찾아가서 판독 좀 다시 해달라고 했다니까요.” 1주기는 가족과 함께 두 번째 수술로 김자옥의 투병 생활은 다시 시작됐다. 아내는 의사 말을 잘 듣는 모범 환자였다. 주위에서 뭘 먹어봐라, 어디 가봐라 등등 수많은 권유를 했지만 오로지 의사 말만 들었다고. 의사의 말이 곧 그녀의 법이었다. 그래서 종종 오승근도 아내를 설득할 일이 있다면 “선생님, 애 엄마한테 이렇게 얘기 좀 해주세요. 그래야 말을 들을 거예요”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김자옥은 7년여간 투병 생활을 하다 2014년 11월 16일 오전 7시 40분 향년 63세로 가족과 팬들의 곁을 떠났다. 그리고 오승근은 얼마 전 1주기를 맞았다. “1주기 되니까 지인들부터 기자들까지 정말 많이들 연락이 왔어요. 1주기 추모식은 어디서 하느냐, 함께하고 싶다, 취재하고 싶다고요. 김자옥재단 설립 얘기도 알려지고 해서 더 관심이 많았죠. 그런데 제가 시끌벅적한 행사를 원하지 않았어요. 그저 조용히 보내고 싶더라고요. 가족하고만 있고 싶었어요.” 오승근은 외부 손님을 초대하는 1주기 행사는 생략하고 조용하게 가족과 보냈다. 가까운 지인들과 모여 김자옥재단 설립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것은 사실이다. 다만 아직은 외부에 구체적인 상황을 설명할 단계는 아니다. 준비를 시작하다 보니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준비할 것도 많았지만 남의 손을 빌릴 일도 아니었다. 결국 오승근 본인이 나서야 하는 일이었다. 본격적으로 움직이기엔 아직 심정적으로 추스르지 못해 숨을 고르는 중이다. 하지만 김자옥을 추모할 수 있는 공간에 대한 의지는 확고했다. “거창하게 재단이라기보단 김자옥 추모회 정도로 뭔가 하고 싶어요. 특히 지인들부터 팬들까지… 김자옥이 보고 싶을 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잖아요. 제가 그런 공간을 만들어놓지 못했어요. 그래서 김자옥이 보고 싶은 사람들은 누구나 찾아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들 계획이에요. 올해 안으로 그 정도만 해놓자, 하고 있어요.” 언론에는 김자옥의 마지막 말이 “나 잘게”라고 알려졌었다. 오승근은 따로 마지막 유언이나 유서 같은 것은 없다고 했다. ‘나 잘게’라는 말도 그녀가 수면제를 먹기 시작하면서 자주 한 말에 불과하다고 했다. 기관지까지 문제가 생겨 기침을 많이 해 물약을 달고 살다시피 했다. 그런데 잠이 들면 기침을 하지 않아서 수면제를 복용했었다고. 그녀가 남긴 흔적들은 모두 내일을 기약하는 현재진행형의 메모뿐이었다. 어떤 수첩엔 앞으로 할 일들만 적어놓은 것도 있을 정도라고. 그만큼 김자옥은 삶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꽃보다 누나’ 여행 탓에 병세 악화, 루머다 “결혼식에 참석할 줄 알았어요. 마지막 날까지도 우리는 아들 결혼 얘길 했어요. 아내가 결혼 날짜 잡는 것부터 식장, 신혼집, 예물, 예단까지 엄마로서 할 일은 누워서도 다 했어요. 그리고 힘이 없어서 누워 있었던 건 한 5일밖에 안 돼요. 가고 보니까, 준비를 다 해놓았더라고요. 내가 한 일은 예단이니 생략하고 간소하게 한 거, 아내의 메모를 보고 며느리에게 해주라는 것들 한 것밖에 없어요.” 아들은 지난해 봄 결혼식을 올렸다. 아내의 빈자리가 무척 절절하게 느껴지던 날이었다. 오승근은 그날을 떠올리며 “정말 많이 슬프더라고…”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화제는 김자옥이 투병 중 출연한 ‘꽃보다 누나’ 크로아티아 편으로 이어졌다. “마지막 해에 김수현 작가의 ‘세 번 결혼하는 여자’를 하면서 아내가 용기를 많이 얻었어요. ‘나, 할 수 있구나’ 싶었던가 봐요. 자기는 앞으로 김수현 작가 드라마만 할 거라고, 옛날부터 김수현 작가 대사가 정말 좋았다고 들떠서 그런 말까지 했어요. 그리고 ‘꽃보다 누나’도 그 사람 가고 보니까… 거기 갔다 와서 병세가 더 악화됐다는 소문도 있다던데, 아니에요. 그럼 제가 보냈겠어요?” 길어지는 투병 생활에 그녀는 알게 모르게 자신감을 많이 잃었던 모양이었다. 오승근은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가 어떤 터닝 포인트가 됐다고 했다. ‘꽃보다 누나’도 그녀가 무척 가고 싶어 했다고. 오승근은 여행 자체를 반대하지 않았고, 그저 장거리 비행이 아내의 몸에 무리가 될까 봐 걱정했을 뿐이었다. “아내가 ‘아빠! 나 거기 갔다 오면 살 것 같아. 아빠! 나 정말 가고 싶어. 여행 멤버도 정말 좋아’라고 하더라고요. 한 20일 다녀왔나? 출연자들, 스태프들 모두 그 사람 몸 상태를 알았고 수시로 카톡을 했어요. ‘진짜 좋아, 아빠!’ 하면서 파란 하늘도 찍어서 보내줬어요. 갔다 와서도 좋아했어요. 그 사이 다들 돈독해졌는지 장례식에도 모두 왔더라고요.” 오승근은 30년간의 결혼 생활 동안 아내와 여행 한 번 제대로 가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고 했다. 한번은 아이들 데리고 놀이공원에 갔는데 사진 찍어달라, 사인해달라 요청하는 사람들 속에 파묻혀 아이와 부부 모두 파김치가 돼 귀가한 적이 있었다. 그게 마지막 가족 여행이었을 거라고. “그 후론 어딜 가자고 하면 애들부터 싫다고 하니까 엄두를 못 냈어요. 그 사람은 여행을 참 좋아했는데…. 그 사람 떠난 해 12월에 같이 하와이 가기로 준비하고 있었거든요. 암 투병이란 게, 더위는 안 타는데 추위를 많이 타요. ‘아빠, 나 추운 거 싫어. 방사선 치료 끝나면 우리 하와이 가자. 가고 싶어’라고 하더라고요. 거길 가지 못한 게 지금까지 마음에 사무쳐요.” 아내에게 조금 더 가깝게, 그렇게 오승근은 얼마 전 아내 김자옥이 잠들어 있는 추모 공원 근처로 이사를 했다. 산책하러 나가 아내를 보고 올 수 있는 거리다. 아내와 살던, 모든 것이 그대로인 집에 오로지 아내만 없다는 걸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혼자 있다 보면 방에서 아내가 나올 것 같고 막 헛것이 보이더라고요. 도저히 안 되겠어서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같이 살자고. 아들이 두말 않고 ‘알겠어요’ 하더라고요. 급한 마음에 전화를 했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며느리는 또 얼마나 불편할까 싶은 거예요. 그래서 내가 나가기로 한 거죠.” 아들 내외는 신혼집을 정리하고 부부가 살던 본가로 들어오고, 오승근은 아내가 있는 추모 공원 근처로 옮겼다. 이런저런 힘든 일이 많을 거라고 각오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내가 떠난 집에서 혼자 생활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 중 하나였다. 비록 집은 떠났지만 아내와 함께 쓰던 살림살이는 다 옮겨왔다. 흔적을 지우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그리고 요즘은 무대에 서는 스케줄도 곧잘 소화하고 있다. 아내가 떠난 후 4, 5개월 정도 완전히 활동을 중단했었다. “가만히 앉아 있어봐야 잡념만 생기고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무대에 오르고 노래를 했어요. 다들 힘들지 않느냐고 하는데, 저는 가수잖아요. 오히려 무대 위가 위로가 되더라고요. 얼마 전 감기에 걸려 한 달 정도 고생했어요. 그런데 무대에 서면 잊어요. 아픈 것도 사라져요. 그래서 다시 조금씩 스케줄을 잡고 활동을 하는 거예요.” 무대는 지금 오승근에게 유일한 위로이자, 스트레스 해소 통로가 돼주고 있다. 몇 년째 사랑을 받고 있는 메가 히트곡 ‘내 나이가 어때서’의 탄생 비화도 살짝 공개해주었다. 처음 작곡가에게 데모 테이프를 받았을 때만 해도 사실 오승근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했다. 히트칠 노래라고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 그때 한 번 불러보라고 권유한 사람이 김자옥이었다. “병원 가는 길에, 우연히 차 안에 데모 테이프가 있어서 틀게 됐어요. 아내가 ‘이거 뭐야?’ 하고 묻고는 금세 ‘내 나이가 어때서~’ 하고 따라 부르는 거예요. 그러면서 해보래요. 자기가 이렇게 따라 부를 정도면 사람들이 다 좋아할 거라면서. 그래서 이 노래를 부르기로 한 거예요.” ‘내 나이가 어때서’는 세대를 초월해 지금까지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오승근은 아내가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 자신에게 선물을 준 것 같다고 했다. 좋은 생각만 하고, 좋은 일만 하고, 좋은 말만 하면서 열심히 살았던 김자옥. 오승근은 날이 갈수록 아내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깊어진다고 고백했다. 그는 요즘 추모 공간을 만들 생각에 마음이 바쁘다. 내심 손주 소식도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차츰 생활이 변할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는 건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래서 당분간은 마음껏 아내를 그리워할 생각이다. 그렇게 김자옥을 계속 사랑할 것이다. 그게 오늘의 오승근이다. “…여전히 그립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아내의 모습, 말들이 머릿속에 계속 떠올라요. 그런 상태예요. 이런 걸 지워야 하는 건지, 아니면 더 악착같이 기억해야 하는 건지 사실 많이 혼란스러워요. 지금도 어디 외국 여행 간 것 같아요. 꼭 돌아올 것만 같아요. 그래서 저는 그냥 기다려야만 할 것 같아요. 그러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기획 / 장회정 기자 ■글 / 강은진(객원기자) ■사진 / 전현호(포커스온 미디어) ■메이크업 / 뮤토스타일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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