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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원 참사 1주기 ‘추모의 별’ 뜬다
- 2023. 10. 21 10:37 화제
- 이태원 참사 1주기, 추모의 별이 뜬다. 모이버 제공 이태원 참사 1주기를 맞아 ‘추모의 별’이 뜬다. 오는 10월 29일은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20일 증강현실 스타트업 ‘모이버’가 이태원 참사 1주기를 맞아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증강현실(AR) 추모의 별 ‘Remember 1029’를 제작했다고 전했다. 이 추모의 별은 모이버가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와 함께 참사 1주기를 맞아 증강현실 기술을 이용해 물리적인 거리의 제약을 넘어 범국민적인 추모 행렬을 일으켜 보자는 취지로 제작되었다. 전국 어디서나 증강현실로 된 추모의 AR 별을 하늘에 띄우는 챌린지를 통해 비극적인 참사의 희생자들을 기릴 수 있는 캠페인으로 진행된다. 이태원 참사 1주기를 맞아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증강현실(AR) 추모의 별 ‘Remember 1029’ 모이버는 ‘1029 이태원 참사’를 상징하는 주황색과 보라색을 품은 별을 3D 모델링으로 제작하고, 참사로 조각조각 흩어진 영혼의 별조각들이 하나로 모여 아름다운 별을 이루는 모습을 보여준다.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 이미현 상황실장은 “많은 곳에서 애도의 마음을 나누고 있을 시민들이 온라인상에서라도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함께 기억하기 위해 이 프로젝트를 기획했다”고 밝혔다. 모이버 김은영 프로는 “참사 1주기를 맞아 추모식을 이태원에서 개최하지만, 주변에 지방에 살거나 해외에 사는 지인들은 참석하고 싶어도 못해 아쉬움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모이버가 제작한 증강현실(AR) 인스타그램 효과를 사용하면, 누구든 어느 곳이든 하늘에 가상현실로 된 추모의 별을 띄워 캠페인에 마음을 보탤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추모의 별을 원하는 이들은 ‘1029 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나 ‘모이버’의 공식 인스타그램에서 공유할 수 있다.
- 고 김자옥 1주기를 보낸 남편 오승근의 첫 심경 고백
- 2016. 01. 25 16:47 연예
- 이젠 좀 추스른 거냐고, 사람들이 묻곤 한다. 하지만 자신도 그걸 잘 모르겠다. 그냥 어딜 좀 다니러 간 것만 같고, 일을 마치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은 사람인데, 무엇을 어떻게 추슬러야 하는 건지, 또 그게 맞는 건지 말이다. 오직 기억하는 것만이 자신에게 남겨진 몫인 것 같다. 사람들은 으레 오랫동안 투병을 해왔으니,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어떤 고비에 더 이상은 힘들지 않을까, 짐작도 했을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오승근(65)은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라고 말한다. “아내가 2008년부터 투병 생활을 했어요. 하지만 병을 안 순간부터 마지막 날까지 우리는 단 한 번도 희망이 없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런 말조차 어디 가서 해본 적도 없고요. 만약 제가 그런 비슷한 말이나 내색을 했다면, 아내는 그날로 포기했을 거예요. 남편이 저렇게 말할 정도면 나는 손을 놓아야 하는구나, 하고 말이에요.” 담담하게 이어가는 말 속에는 단단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오승근은 아내 김자옥이 자신에게 얼마나 의지하고 있었는지 잘 알았다. 그의 말, 표정, 행동 하나하나가 그녀의 버팀목이었다. 일반 병실에서 상태가 악화돼 중환자실로 가는 문제를 결정하는 그 순간까지도. “중환자실로 옮기고 딱 24시간 있다가 갔어요. 그곳에 가는 걸 정말 싫어했어요. 거기 가면 죽을 것 같으니까. 의사가 일반 병실에 있으면 2시간을 못 버티지만 중환자실에 있으면 기적 같은 일이라도 기대해볼 수 있다고 해서, 그래서 간 거예요. 그게 아니었으면 그 사람은 거기 안 갔어요. 살려고 간 거지…. 그 정도로 삶에 의지가 있었어요. 아내나 저나.” 그래서일까. 오승근은 여전히 슬펐다. 그는 아직 추스르지 못했다고 말했다. 햇수로 벌써 3년이나 됐다며 헛웃음을 지었다. 만으로 고작 1년하고 3개월이 채 안 됐는데 말이다. 마지막까지 열심히 살았다는 말을 하며 여전히 혼란스러워했다. 여전히 아내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기 때문이다. 호흡기를 끼고도 이따금 “아빠, 이제 집에 들어가. 가서 좀 쉬어”라던 아내의 말들이 잊히지 않는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아내의 모습, 말들이 머릿속에 계속 떠올라요. 그런 상태예요. 이런 걸 지워야 하는 건지, 아니면 더 악착같이 기억해야 하는 건지 사실 많이 혼란스러워요. 지금도 어디 외국 여행 간 것 같아요. 꼭 돌아올 것만 같아요. 그래서 저는 그냥 기다려야만 할 것 같아요. 그러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건강검진으로 우연히 알게 된 병 부부는 건강했다고 했다. 감기나 걸려야 약을 처방받으러 가까운 병원에 가는 정도. 김자옥은 병원이라면 애 낳으러 산부인과에 갔던 것이 전부였을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건강검진을 받아보자고 그녀가 제안했다. 처음엔 어디가 안 좋아서 그러는 건가 의아하기도 했다. 아내는 그저 “우리도 건강검진 받아볼 나이가 됐어”라며 가볍게 답했을 뿐이다. 2008년 4월경이었다. 부부가 함께 대장내시경을 받았다. 검사 과정에서 외려 용종에 선종까지 문제가 있는 쪽은 오승근이었다. 그 정도라 다행이라고 여기며 아내를 기다리는데 영 나오지 않았다. 긴 검사를 끝내고 나온 의사는 CT를 찍어보자고 했다. 뭐가 하나 더 보인다는 것. CT 촬영 후 돌아온 답은 더 정확하게 알아보기 위해 조직검사를 하자는 것이었다.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일주일이 걸린다고 했는데 5일 만에 나왔어요. 대장암 3기라고. 그 정도면 심각한 거잖아요. 초기도 아니고 말이에요. 검사 결과를 듣는데 아내는 덤덤했어요. 그런데 저는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제 아버님과 형님이 다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런 경험을 이미 했으니까 저는 무척이나 두려웠어요.” 대장암 3기, 병세가 깊어질 때까지 정말이지 아무런 증세가 없었다고 했다. 김자옥은 언제나처럼 밝고 건강해보였다. “아내도 바로 수술을 받겠다고 해서 최대한 날짜를 빨리 잡았죠. 5월 5일이 어린이날이라 5월 6일에 첫 수술을 했어요. 제가 날짜도 안 잊어버려요. 그래서 저는 5월이 되면 마음이 안 좋아요. 수술이요? 수술 자체는 잘됐어요. 하지만 3기 정도 됐으면 발병 부위가 깨끗하게 제거됐어도 어디로 또 전이가 됐을지 모를 일이에요. 그렇더라고요. 경험해보니.” 첫 수술 후 3년 동안 항암치료를 했다. 힘들기는 했지만 견딜 수 있었다. 암 환자들에게는 1년을 잘 넘기면 3년을 살고, 3년을 잘 넘기면 5년을 살고, 5년을 잘 넘기면 7년을 산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김자옥 또한 3년을 거의 채우며 치료를 잘 받았기 때문에 ‘아, 이제 됐구나’ 안도할 참이었다. 그런데 가혹하게도 운명은 3년을 채운 그 시점에서 새로운 암이 생겼음을 알렸다. “밖에서 일을 보고 있었는데 아내가 전화를 했더라고요. 그런데 이 사람이 말을 안 해요. 그러더니 ‘아빠, 병원에 한 번 가봐야겠어. 그런데 나는 겁이 나서 못 가겠어. 아빠가 가봐’ 하더라고요. 저를 아빠라고 불렀거든요. 전화를 끊고는 일이고 뭐고 스톱하고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죠. 그랬더니 이번에는 폐에 암이 생겼더라고요. 벌써 대여섯 개나. 내가 못 믿겠다고 검사 자료 가지고 아는 의사를 찾아가서 판독 좀 다시 해달라고 했다니까요.” 1주기는 가족과 함께 두 번째 수술로 김자옥의 투병 생활은 다시 시작됐다. 아내는 의사 말을 잘 듣는 모범 환자였다. 주위에서 뭘 먹어봐라, 어디 가봐라 등등 수많은 권유를 했지만 오로지 의사 말만 들었다고. 의사의 말이 곧 그녀의 법이었다. 그래서 종종 오승근도 아내를 설득할 일이 있다면 “선생님, 애 엄마한테 이렇게 얘기 좀 해주세요. 그래야 말을 들을 거예요”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김자옥은 7년여간 투병 생활을 하다 2014년 11월 16일 오전 7시 40분 향년 63세로 가족과 팬들의 곁을 떠났다. 그리고 오승근은 얼마 전 1주기를 맞았다. “1주기 되니까 지인들부터 기자들까지 정말 많이들 연락이 왔어요. 1주기 추모식은 어디서 하느냐, 함께하고 싶다, 취재하고 싶다고요. 김자옥재단 설립 얘기도 알려지고 해서 더 관심이 많았죠. 그런데 제가 시끌벅적한 행사를 원하지 않았어요. 그저 조용히 보내고 싶더라고요. 가족하고만 있고 싶었어요.” 오승근은 외부 손님을 초대하는 1주기 행사는 생략하고 조용하게 가족과 보냈다. 가까운 지인들과 모여 김자옥재단 설립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것은 사실이다. 다만 아직은 외부에 구체적인 상황을 설명할 단계는 아니다. 준비를 시작하다 보니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준비할 것도 많았지만 남의 손을 빌릴 일도 아니었다. 결국 오승근 본인이 나서야 하는 일이었다. 본격적으로 움직이기엔 아직 심정적으로 추스르지 못해 숨을 고르는 중이다. 하지만 김자옥을 추모할 수 있는 공간에 대한 의지는 확고했다. “거창하게 재단이라기보단 김자옥 추모회 정도로 뭔가 하고 싶어요. 특히 지인들부터 팬들까지… 김자옥이 보고 싶을 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잖아요. 제가 그런 공간을 만들어놓지 못했어요. 그래서 김자옥이 보고 싶은 사람들은 누구나 찾아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들 계획이에요. 올해 안으로 그 정도만 해놓자, 하고 있어요.” 언론에는 김자옥의 마지막 말이 “나 잘게”라고 알려졌었다. 오승근은 따로 마지막 유언이나 유서 같은 것은 없다고 했다. ‘나 잘게’라는 말도 그녀가 수면제를 먹기 시작하면서 자주 한 말에 불과하다고 했다. 기관지까지 문제가 생겨 기침을 많이 해 물약을 달고 살다시피 했다. 그런데 잠이 들면 기침을 하지 않아서 수면제를 복용했었다고. 그녀가 남긴 흔적들은 모두 내일을 기약하는 현재진행형의 메모뿐이었다. 어떤 수첩엔 앞으로 할 일들만 적어놓은 것도 있을 정도라고. 그만큼 김자옥은 삶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꽃보다 누나’ 여행 탓에 병세 악화, 루머다 “결혼식에 참석할 줄 알았어요. 마지막 날까지도 우리는 아들 결혼 얘길 했어요. 아내가 결혼 날짜 잡는 것부터 식장, 신혼집, 예물, 예단까지 엄마로서 할 일은 누워서도 다 했어요. 그리고 힘이 없어서 누워 있었던 건 한 5일밖에 안 돼요. 가고 보니까, 준비를 다 해놓았더라고요. 내가 한 일은 예단이니 생략하고 간소하게 한 거, 아내의 메모를 보고 며느리에게 해주라는 것들 한 것밖에 없어요.” 아들은 지난해 봄 결혼식을 올렸다. 아내의 빈자리가 무척 절절하게 느껴지던 날이었다. 오승근은 그날을 떠올리며 “정말 많이 슬프더라고…”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화제는 김자옥이 투병 중 출연한 ‘꽃보다 누나’ 크로아티아 편으로 이어졌다. “마지막 해에 김수현 작가의 ‘세 번 결혼하는 여자’를 하면서 아내가 용기를 많이 얻었어요. ‘나, 할 수 있구나’ 싶었던가 봐요. 자기는 앞으로 김수현 작가 드라마만 할 거라고, 옛날부터 김수현 작가 대사가 정말 좋았다고 들떠서 그런 말까지 했어요. 그리고 ‘꽃보다 누나’도 그 사람 가고 보니까… 거기 갔다 와서 병세가 더 악화됐다는 소문도 있다던데, 아니에요. 그럼 제가 보냈겠어요?” 길어지는 투병 생활에 그녀는 알게 모르게 자신감을 많이 잃었던 모양이었다. 오승근은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가 어떤 터닝 포인트가 됐다고 했다. ‘꽃보다 누나’도 그녀가 무척 가고 싶어 했다고. 오승근은 여행 자체를 반대하지 않았고, 그저 장거리 비행이 아내의 몸에 무리가 될까 봐 걱정했을 뿐이었다. “아내가 ‘아빠! 나 거기 갔다 오면 살 것 같아. 아빠! 나 정말 가고 싶어. 여행 멤버도 정말 좋아’라고 하더라고요. 한 20일 다녀왔나? 출연자들, 스태프들 모두 그 사람 몸 상태를 알았고 수시로 카톡을 했어요. ‘진짜 좋아, 아빠!’ 하면서 파란 하늘도 찍어서 보내줬어요. 갔다 와서도 좋아했어요. 그 사이 다들 돈독해졌는지 장례식에도 모두 왔더라고요.” 오승근은 30년간의 결혼 생활 동안 아내와 여행 한 번 제대로 가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고 했다. 한번은 아이들 데리고 놀이공원에 갔는데 사진 찍어달라, 사인해달라 요청하는 사람들 속에 파묻혀 아이와 부부 모두 파김치가 돼 귀가한 적이 있었다. 그게 마지막 가족 여행이었을 거라고. “그 후론 어딜 가자고 하면 애들부터 싫다고 하니까 엄두를 못 냈어요. 그 사람은 여행을 참 좋아했는데…. 그 사람 떠난 해 12월에 같이 하와이 가기로 준비하고 있었거든요. 암 투병이란 게, 더위는 안 타는데 추위를 많이 타요. ‘아빠, 나 추운 거 싫어. 방사선 치료 끝나면 우리 하와이 가자. 가고 싶어’라고 하더라고요. 거길 가지 못한 게 지금까지 마음에 사무쳐요.” 아내에게 조금 더 가깝게, 그렇게 오승근은 얼마 전 아내 김자옥이 잠들어 있는 추모 공원 근처로 이사를 했다. 산책하러 나가 아내를 보고 올 수 있는 거리다. 아내와 살던, 모든 것이 그대로인 집에 오로지 아내만 없다는 걸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혼자 있다 보면 방에서 아내가 나올 것 같고 막 헛것이 보이더라고요. 도저히 안 되겠어서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같이 살자고. 아들이 두말 않고 ‘알겠어요’ 하더라고요. 급한 마음에 전화를 했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며느리는 또 얼마나 불편할까 싶은 거예요. 그래서 내가 나가기로 한 거죠.” 아들 내외는 신혼집을 정리하고 부부가 살던 본가로 들어오고, 오승근은 아내가 있는 추모 공원 근처로 옮겼다. 이런저런 힘든 일이 많을 거라고 각오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내가 떠난 집에서 혼자 생활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 중 하나였다. 비록 집은 떠났지만 아내와 함께 쓰던 살림살이는 다 옮겨왔다. 흔적을 지우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그리고 요즘은 무대에 서는 스케줄도 곧잘 소화하고 있다. 아내가 떠난 후 4, 5개월 정도 완전히 활동을 중단했었다. “가만히 앉아 있어봐야 잡념만 생기고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무대에 오르고 노래를 했어요. 다들 힘들지 않느냐고 하는데, 저는 가수잖아요. 오히려 무대 위가 위로가 되더라고요. 얼마 전 감기에 걸려 한 달 정도 고생했어요. 그런데 무대에 서면 잊어요. 아픈 것도 사라져요. 그래서 다시 조금씩 스케줄을 잡고 활동을 하는 거예요.” 무대는 지금 오승근에게 유일한 위로이자, 스트레스 해소 통로가 돼주고 있다. 몇 년째 사랑을 받고 있는 메가 히트곡 ‘내 나이가 어때서’의 탄생 비화도 살짝 공개해주었다. 처음 작곡가에게 데모 테이프를 받았을 때만 해도 사실 오승근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했다. 히트칠 노래라고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 그때 한 번 불러보라고 권유한 사람이 김자옥이었다. “병원 가는 길에, 우연히 차 안에 데모 테이프가 있어서 틀게 됐어요. 아내가 ‘이거 뭐야?’ 하고 묻고는 금세 ‘내 나이가 어때서~’ 하고 따라 부르는 거예요. 그러면서 해보래요. 자기가 이렇게 따라 부를 정도면 사람들이 다 좋아할 거라면서. 그래서 이 노래를 부르기로 한 거예요.” ‘내 나이가 어때서’는 세대를 초월해 지금까지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오승근은 아내가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 자신에게 선물을 준 것 같다고 했다. 좋은 생각만 하고, 좋은 일만 하고, 좋은 말만 하면서 열심히 살았던 김자옥. 오승근은 날이 갈수록 아내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깊어진다고 고백했다. 그는 요즘 추모 공간을 만들 생각에 마음이 바쁘다. 내심 손주 소식도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차츰 생활이 변할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는 건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래서 당분간은 마음껏 아내를 그리워할 생각이다. 그렇게 김자옥을 계속 사랑할 것이다. 그게 오늘의 오승근이다. “…여전히 그립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아내의 모습, 말들이 머릿속에 계속 떠올라요. 그런 상태예요. 이런 걸 지워야 하는 건지, 아니면 더 악착같이 기억해야 하는 건지 사실 많이 혼란스러워요. 지금도 어디 외국 여행 간 것 같아요. 꼭 돌아올 것만 같아요. 그래서 저는 그냥 기다려야만 할 것 같아요. 그러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기획 / 장회정 기자 ■글 / 강은진(객원기자) ■사진 / 전현호(포커스온 미디어) ■메이크업 / 뮤토스타일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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