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176 건 검색)
- 선관위, 윤석열 측 ‘중국 간첩’ 보도 거론에 “전혀 사실 아냐···계엄군 진입도 안 해”
- 2025. 01. 21 15:54정치
- ... 대통령의 지시로 계엄군의 침탈이 일어났던 경기 과천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모습. 한수빈 기자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21일 윤석열 대통령 측이 탄핵심판 2차 변론 중 ‘비상계엄 당일 중국 간첩이...
- 尹 탄핵심판 시작
- 주한미군, ‘계엄군이 중국인 간첩 체포해 인계’ 보도에 “전적으로 거짓”
- 2025. 01. 20 17:51정치
- ... 보도 촉구” 주한미군이 주둔하는 경기도 평택 캠프 험프리스의 전경. 경향신문 자료사진 비상계엄 당시 계엄군이 중국인 간첩 99명을 체포해 주한미군 측에 인계했다는 국내 언론의 보도는 “전적으로...
- 계엄 48일 만에 계엄군 장군들 ‘보직해임’…박정훈 때는 다음 날 조치
- 2025. 01. 20 17:16정치
- 계엄 가담 3성 장군 3명과 2성 장군 1명 보직해임 박안수 전 계엄사령관은 빠져…심의위 구성 안돼 다음 날 보직해임 당한 박정훈 대령과 형평성 논란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 부재 영향도 (왼쪽부터)12·3...
- [단독]특전사 국제평화유지 병력까지 계엄군으로 투입하려 했다
- 2025. 01. 13 17:22사회
- 12·3 비상계엄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관이 지난해 12월10일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원 질의에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 성동훈 기자 유엔이나 다국적군 평화 유지...
- 尹 탄핵심판 시작
스포츠경향(총 9 건 검색)
- “계엄군 한동훈 사살가동” 김어준, 내란선동죄 피고발
- 2024. 12. 18 10:04 연예
- 내란선동죄 등으로 피고발된 방송인 김어준. 경향신문 자료사진 ‘12·3 비상계엄 사태’ 당시 암살조가 있었다고 주장한 방송인 김어준씨가 내란선동죄 등의 혐의로 고발당했다. 시민단체 서민민생대책위원회(서민위)는 18일 김씨를 내란선동죄,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서울경찰청에 고발했다고 이날 밝혔다. 서민위는 이번 고발장에서 “황당하고 어처구니 없는 주장으로 여야 대표를 충동해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킨 것도 모라자 국제 정세를 흔드는 북한과 미국을 자극, 한반도에 전쟁 위기감을 조성한 기가 막힌 언행은 내란선동죄에 해당한다”고 했다. 김씨는 지난 13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현안 질의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지난 3일 비상계엄 사태 당시 암살조가 가동됐다는 제보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를 체포해 이동 중 사살하고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와 김씨 등 체포·호송 부대를 공격하는 시늉을 한 뒤 이를 북한 소행으로 발표한다는 내용이 담겼다고 주장했다. 서민위는 김씨뿐 아니라 조지호 경찰청장과 곽종근 특정사령관을 공무상비밀의 누설,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고발했다. 민주당은 국방위 내부 검토 문건에서 김씨의 주장이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하고 있다. 해당 문건에는 ▲과거의 제한적 지식을 가진 사람이 ▲정보 공개가 제한되는 기관 특성을 악용해 ▲일부 확인된 사실을 바탕으로 상당한 허구를 가미해 구성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봤다.
- 올해의 ‘범도교육상’에 고려인 김 발레리…‘범도전투상’은 계엄군 저지한 홍성일 보좌관
- 2024. 12. 13 05:47 생활
- 올해의 ‘범도교육상’을 수상한 김발레리 고려인민족학교 교사이자 변호사(사진 오른쪽), 소설 ‘범도’의 작가 방현석 교수(왼쪽, 중앙대) 항일무장투쟁역사학교(교장 방현석)는 12월 11일 국회의사당에서 ‘범도상’ 시상식을 열었다. 올해의 ‘범도교육상’은 고려인민족학교 김 발레리 교사가 수상했다. 김 발레리 교사는 홍범도 장군과 최재형 선생이 활약한 우수리스크에서 북을 배우고 상트페테브르크 인문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시상을 맡은 김은경 목사(전 기독교장로회 전 총회장)은 “변호사가 되었지만 우수리스크로 돌아와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고려인민족학교 아리랑예술단 단원들에게 민족혼이 담긴 북 지도를 계속해온 김 발레리 선생은 연해주 고려인사회의 귀감”이라고 치하했다. ‘범도전투상’을 수상한 홍성일 보좌관(사진 오른쪽, 이연희 국회의원실), 시상을 맡은 천도 스님(울산불교환경연대 대표). 올해의 ‘범도전투상’은 지난 12월 4일 밤 국회에 난입한 계엄군을 저지하는 데 앞장선 이연희 국회의원실의 홍성일 보좌관이 수상했다. 시상을 맡은 천도 스님(울산불교환경연대 대표)은 “홍성일 보좌관은 계엄군이 국회에 진입했을 때 야외의 최일선에서 몸싸움을 벌이며 국회 본관 내에서 바리케이트를 치고, 본회의장을 지킬 시간을 벌 수 있게 함으로써 ‘나를 희생해서 우리를 지킨다’는 독립군의 정신을 발휘했다”고 치하했다. 지난 12월 4일 밤 국회에 난입한 계엄군을 저지하는 데 앞장선 ‘범도전투상’ 수상자 홍성일 보좌관(이연희 국회의원실) 올해의 ‘범도인상’은 고려인민족학교의 항일무장투쟁영웅실 지원에 앞장서고, 청소년들의 항일무장투쟁 역사현장 교육을 후원해 온 김창일(고려인민족학교지원단) 선생이 수상했다. 김은경 목사(사진 왼쪽)가 범도인상 상패를 김창일 선생(대리수상)에게 수여하고 있다. 김창일 선생은 암투병 중이다. 한편 항일무장투쟁역사학교는 시상식에 앞서 아리랑예술단의 의상비 500만 원을 전달했다. 이날 오후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400여 석의 좌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 앞에서 내한 특별공연을 펼친 아리랑예술단은 고려인민족학교의 교사와 재학생들로 구성된 고려인사회의 대표적인 극단이다. 고려인민족학교의 활동 범도상을 제정 시상하는 항일무장투쟁역사학교는 만주와 연해주, 중앙아시아로 이어지는 홍범도 장군의 무장투쟁 현장을 중심으로 역사교육을 펼치는 ‘길 위의 역사학교-범도루트’를 운영하고 있다. 소설 ‘범도’의 작가인 방현석 교수(중앙대)가 교장을 맡고 있는 이 학교는 고려인민족학교와 아리랑예술단을 꾸준히 지원해오고 있다. 김발레리아 고려인민족학교 교사(산진 오른쪽), 소설 ‘범도’의 작가 방현석 교수(왼쪽, 중앙대)
- 707 출신 배우 이관훈, 계엄군 설득 “형이 너희 선배다”
- 2024. 12. 04 10:49 연예
- 배우 이관훈 SNS캡처 배우 이관훈(44)이 계엄군을 직접 설득하는 모습이 여의도 국회 현장에서 포착돼 화제다. 계엄령이 선포된 3일 유튜브 채널 황기자TV에는 배우 이관훈의 모습이 포착됐다. 제707특수임무단 출신인 배우 이관훈은 노란색 점퍼를 입고 국회로 진입한 계엄군 앞에 서서 이들을 직접 설득했다. 영상에서 이관훈은 차분한 말투로 “형이 707 선배야”라면서 “제대한지 20년 정도 됐고, 이관훈 중사라고 너희 선배이고 배우이기도 하다”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이씨는 “형 동기와 통화했다. 헬기 타고 다 넘어오고 있다는 얘기 듣고 걱정돼서 왔다”고 했다. 이관훈은 그러면서 “명령 받아서 온거 안다. 너희들이 진정해야 한다”면서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더라도 몸쓰고 막지 말아라. 너희도 다 판단할 수 있을거로 믿는다”고 부탁했다. 부산출신인 이관훈은 특전사 출신으로 5년간 직업군인으로 복무하다 2004년 중사로 전역했다. 각종 기업 브랜드 모델로 활동하다 배우 활동을 이으며 드라마 ‘대조영’ ‘선덕여왕’ ‘마의’ ‘로맨스는 별책부록’ ‘빅이슈’ 지난해 ‘꽃선비 열애사’ 등에 출연했다. 베우 이관훈. SNS캡처 한편, 윤석렬 대통령은 지난 3일 오후 10시 30분쯤 용산 대통령실에서 비상계엄령을 내렸다. 이후 무장계엄군이 계엄령 해제를 위한 투표를 위해 국회에 모여든 국회의원의 출입을 막고, 이재명 민주당대표 등을 체포하기 위해 건물 유리창을 깨고 시민들과 몸싸움을 하며 국회로 진입했다. 현장에선 국회의원 보좌진들이 의자와 집기 등으로 바리케이트를 쌓고 소화기를 뿌리며 계엄군을 막아섯으며, 국회는 191명 찬성으로 비상계엄해제 요구결의안을 가결했다. 이후 윤 대통령은 4일 오전 4시 27분쯤 비상계엄을 해제하고 군을 철수시켰다.
- 윤석열 대통령, 계엄 해제 “계엄군 철수”
- 2024. 12. 04 04:49 생활
- 방송 캡처 윤석열 대통령은 4이 비상계엄 선포를 해제키로 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4시 27분쯤 용산 대통령실에서 생중계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전날 오후 10시 25분께 계엄을 선포한 지 6시간여 만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어젯밤 11시를 기해 국가의 본질적 기능을 마비시키고 자유민주주의 헌정 질서를 붕괴시키려는 반국가세력에 맞서 결연한 구국의 의지로 비상계엄 선포했다”며 “그러나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가 있어 계엄 사무에 투입된 군을 철수시켰다. 바로 국무회의 통해 국회의 요구를 수용해 계엄을 해제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즉시 국무회의를 소집했지만, 새벽인 관계로 아직 의결정족수가 충족되지 못해서 오는 대로 바로 계엄을 해제하겠다”고 덧붙였다. 윤석렬 대통령은 “거듭되는 탄핵과 입법 농단, 예산 농단으로 국가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무도한 행위는 즉각 중지해줄 것을 국회에 요청한다”고 덧붙였다.
주간경향(총 4 건 검색)
- [취재 후] 계엄군은 왜 충정로에도 출동했을까(2024. 12. 11 06:00)
- 2024. 12. 11 06:00 정치
- 김어준의 겸손은힘들다 뉴스공장 화면 캡쳐 ‘2024년에 비상계엄이라니.’ 대부분 비슷한 심경이었을 겁니다. 저 역시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해서 유튜브로 생중계되는 대통령 긴급브리핑을 켰습니다. 아래에 달린 자막에 ‘비상계엄 선포’가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진짜였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던 시간, 회사에 있었습니다. 회사 편집국이 술렁이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큰소리도 나왔습니다. 아마도 회사 인근에 있었을 기자들이 하나둘씩 복귀해 긴급사태 취재에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습니다. 한 시간쯤 지나 이른바 ‘계엄사령부 포고문(제1호)’이라는 게 나왔는데, 제3항은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라고 돼 있었습니다. 자정 무렵 퇴근했는데, 신문사 문을 나서면 군대나 적어도 경찰이라도 와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휑했습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건 뭐지?’라는 생각을 하며 버스정류장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런데 이날 이른바 소위 ‘계엄군’이 출동한 현장은 국회만이 아니었습니다. ‘겸손은힘들다 뉴스공장’을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딴지방송국의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사옥 앞에도 20여 명 이상의 군인이 완전무장하고 들이닥쳤습니다. 이 유튜브 방송을 진행하는 김어준씨 주장에 따르면 자신의 집에도 체포조가 출동했다고 합니다(사진). 이번 ‘계엄 사태’ 취재를 하며 들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밤에 전격적으로 이뤄진 윤석열 비상계엄의 ‘전조’가 낮에 있었다는 겁니다. 서울 영등포에 있는 인터넷 언론사 서울의소리 압수수색입니다. 수십 명의 경찰이 출동한 과잉수사라는 것이 서울의소리 측 주장입니다. 정용인 기자 한 정치평론가는 서울의소리와 김어준 방송의 공통점은 그들이 “국정운영에 심각한 걸림돌이라기보다 ‘여사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원흉”이라고 말합니다. 서울의소리는 대선 전에는 김건희 여사 7시간 녹취록, 그리고 대선 이후에는 김건희 여사 명품 가방 의혹을 제기한 매체입니다. 이 평론가의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김건희 여사의 한을 풀어주기 위한 계엄일 수도 있다. 윤석열의 권력 장악을 위한 친위 쿠데타라기보다 영부인 민원 해결용 쿠데타일 가능성이 있다는 거다. ‘오빠 쟤네 손 봐줘’ 하는.” 당장은 심증에 불과하지만, 국회와 별도로 김어준씨 집이나 충정로 병력 출동을 명령한 자가 누구인지, 실제 그런 체포계획이 있었는지 확인되면 진짜 쿠데타의 ‘몸통’은 밝혀지리라는 것이 이 평론가의 주장입니다. 독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취재 후
- [2010 연중기획] 계엄군 총소리, 겁에 질려 울었다(2010. 05. 12 16:18)
- 2010. 05. 12 16:18 사회
- ㆍ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 ㆍ1980년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던 본지 기자가 경험한 5·18 1980년 광주. 기자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그해 5월, 두 가지를 처음으로 알게 됐다. 하나는 최루탄. 이러다가 숨이 막혀 죽는 게 아니냐는 공포감이다. 또 하나는 진짜 총소리다. 같은 TV 프로그램 속 효과음과 ‘진짜’는 달랐다. 무지막지하게 큰 소리였다. 1980년 5·18 직후 광주시 금남로 4가 일대. 계엄군이 거리에 배치돼 있는 가운데 시민들이 오가고 있다. |경향신문 5월 18일은 일요일이었다. 교회를 다녀온 뒤 광주 시내를 쏘다녔다. 이상한 복장의 군인들을 봤다. 대인시장 옆 시민극장에서 본 영화 속 제국군대 같은 복장이었다. 그들이 쓴 투구는 기자가 다니던 초등학교 지붕 밑 다락에 먼지 쌓인 채로 방치된 일본 무사의 투구 같기도 했다. 전투경찰이었다. 충장로 파출소 앞, 한국은행 앞 시내 곳곳에 그들이 배치돼 있었다. 어디선가 대학생들이 뛰어왔다. 그들은 금남로와 중앙로가 마주치는 사거리에 주저앉았다. 100~200명 규모였다. 전남대 앞에서 군인들이 학생들을 닥치는대로 잡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불안과 공포. 전투경찰들이 몰려왔다. 최루탄이 터졌다. 구경하다가 최루탄을 맞은 나는 정신없이 하얀 페퍼포그 안개 속을 헤맸다. 숨이 막히면서 겁이 덜컥 났다. 금남로 옆 금남맨션 앞에서 수돗가를 발견했다. 그곳에서 눈을 닦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기자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광주 중앙국민학교(현 초등학교)였다. 금남로 도청에서 가장 가까운 초등학교다. 이튿날 수업이 제대로 될 수 없었다. 밖에서는 함성과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오전 수업만 마치고 학교 수업은 끝났다. 집에 돌아가야 했지만 집에 가지 않았다. 금남로 2가 쪽에는 대한항공사와 조선일보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대치선은 맞은편 관광호텔 쪽으로 이어졌다. 금남로는 수많은 군중으로 가득 찼다. 최루탄이 터졌다. 사람들은 도망쳤다. 최루탄 연기 사이로 방독면을 쓰고 몽둥이를 든 공수부대가 쫓아왔다. 도망치며 뒤를 돌아보니 10m 쯤 뒤에 한 시민이 머리에 최루탄 깡통(?)을 맞고 쓰러졌다. 쓰러지며 나뒹구는 남자의 머리에서 불꽃이 일었다. 1980년 5월, 금남로에서 본 것 그날 나는 언제까지 거기 있었는지 모른다. 지난해 돌아가신 아버지는 1980년 5월 이야기를 하신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그날의 ‘사건’과 관련해 생전에 딱 한 번 들을 기회가 있었다. “학교는 끝났다고 하는데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고… 걱정이 돼 관광호텔 앞 쪽으로 나가 보니 사람들이 장갑차를 불태운다고 지푸라기를 차 밑에 집어넣고 있는데, ‘펑’하고 폭발하니 글쎄 사람들에 섞여 저 놈(기자)이 만세를 부르고 있더라니까.” 금남로는 아수라장이었다. 시멘트로 만들어진 화단은 바리케이트가 됐고, 깨진 보도블록이 나뒹굴었다. 초저녁, 전투경찰들이 우리 집 앞 금남로를 가로질러 앉아 있었다. 지휘관쯤으로 보이는 군인이 동네 사람들에게 귀가를 종용하고 있었다. 나는 물었다. “군인 아저씨들이 왜 여기에 있어요?” 그들은 “서울에서 연세·고려대생들이 데모하러 내려왔다, 데모를 막으러 출동한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통금은 오후 8시부터였다. MBC 건물이 불탄 것은 5월 20일 밤이었다. 당시 MBC에서는 해인사 팔만대장경과 관련한 다큐멘터리가 방송 중이었다. 갑자기 화면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은 고층빌딩으로 가로막혀 있지만 당시 기자가 다니던 초등학교 위쪽에 자리 잡았던 MBC 건물이 우리 집 2층에서 보였다. “MBC가 불타고 있다”는 형의 말에 2층으로 올라갔다. MBC 건물은 화염에 휩싸여 밤하늘을 훤히 비추고 있었다. 금남로 변 골목 끝에 위치하고 있어 우리 집은 많은 사람의 피란처였다. 이름 모를 수많은 시민이 우리 집으로 들어와 몸도 씻고 밥도 먹고 피신도 했다. 10여 년 지난 1990년대 초에 할머니에게 장롱 속 옷가지가 뭐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광주사태’ 때 사람들이 갈아입고 간 옷”이라고 말했다. 막힌 골목이었지만 담을 두 개 정도 넘으면 광주공용터미널 쪽으로 빠져나갈 수가 있었다. 5·18 기간 내내 나는 슬쩍 들떠 있었다. 당시 우리 집은 개축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 일하던 인부들 및 공수부대에게 쫓겨 들어온 시민 몇 명과 함께 지하실에 숨어 있기도 했다. 광주시 금남로에서 시민군이 탄 버스들이 이동하고 있다. 가운데 오른편으로 멀리 보이는 9층짜리 건물이 당시 기자의 집 맞은편에 있던 광주중앙교회다. |경향신문 5월 21일, 아버지는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로부터 10여 일을 학교에 가지 않았다.(그런데도 개근상을 받았다) 어머니는 양동이 하나 가득 쇠갈비를 받아 왔다. ‘우래옥’ 음식점에서 못 팔게 됐다는 걸 싸게 사 왔다는 것이다. 계엄군과의 격렬한 총격전이 있던 날에 우리 삼 형제는 집에서 놀았다. 5월 22일부터는 비교적 자유롭게 나갈 수 있었다. 아버지는 형제들을 자전거에 태워 시내에 나갔다. 초여름에 가까운 날씨였다. 도청 앞 상무관에는 시신을 담은 관이 있었다.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열린 문 너머로 눈에 들어온 푸르뎅뎅한 시신의 발들이 기억난다. 도청 앞을 지나 노동청을 거쳐 불에 탄 광주세무서까지 돌아본 게 그날의 여정이었다. 라디오에서는 “광주 일원의 사태는 고정간첩과 불순분자, 깡패들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는 방송만 반복해 나왔다. 그런데 배경음악이 ‘훌라송’의 원곡인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튿날 즈음에 대인시장 인근에서 군용트럭에 탄 시민군들과 조우했다. 그때 KBS 뉴스에 나온 사람을 봤다. “TV에 나온 사람이다”라고 소리쳤다.(나중에 에서 그 시민군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회고담을 읽은 적이 있다. 최근 다시 찾아봤지만 찾진 못했다) 진압되던 새벽에 들은 총소리 계엄군 헬리콥터는 부단히 광주 상공을 선회하며 전단을 뿌렸다. ‘폭도들의 행패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계엄군은 부득이하게 소탕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었다. 5월 26일 저녁. “광주 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쳐들어 오고 있습니다.” 확성기를 장착한 트럭이 금남로 인근을 돌아다녔다. 나중에 학교에 돌아가 만난 아이들은 ‘그 가두방송을 한 여자가 북한 간첩’이라는 소문을 전했다. 가두방송의 주인공은 전옥주씨였고, 물론 간첩은 아니었다. 그리고 진압. 새벽에 나는 잠에서 깼다. 집안 사람들은 모두 잠에 들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 불도 켜지 않고 앉아 있었다. 우리 집에서는 광주 중앙교회 9층 건물이 올려다보였다. 달 밝은 밤이었다. 7~8층쯤에서 번쩍번쩍 불꽃이 일었다. 진압당하는 순간이다. 총소리는 거기서 들렸다. 총소리는 상상 이상으로 컸다.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나는 겁에 질려 울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할머니는 “괜찮다”며 등을 쓰다듬어 줬다.이튿날 아버지는 마당에도 못 나가게 했다. 부엌 창문으로 내다봤다. 집 뒤편 남선빌딩 8층 꼭대기는 계엄군들이 시내를 향해 총을 겨눈 채 경계를 서고 있었다. 학교는 정상화됐다. 몇몇 아이들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금남로 주변의 상점들은 오랫동안 닫힌 채 방치된 곳이 많았다. 많은 사람이 광주를 떠났다. 긴 침묵이었다.
- 2010 연중기획
- [2010 연중기획] “계엄군 양쪽에서 버스에 집중 사격”(2010. 05. 12 15:23)
- 2010. 05. 12 15:23 사회
- ㆍ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 ㆍ5·18 주남마을 양민학살 목격자 유춘학씨 생생한 증언 1980년 5월 광주. 광주 도심에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던 공수부대와 계엄군은 작전명령 변경에 따라 5월 21일 도심에서 철수했다. 이튿날인 22일부터 광주는 ‘해방구’가 됐다. 시민군은 차량에 ‘계엄철폐’ ‘전두환 처단’ 등이 적힌 펼침막을 걸고 시내를 누비며 승리의 기쁨을 드러냈다. 전남도청 앞에서는 날마다 시민궐기대회가 열려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들의 온갖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 무렵 광주 외곽에서는 또 다른 참혹한 희생의 그림자가 광주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1988년 5·18 청문회 때 당시 평민당 김영진 의원이 지도를 들고 주남마을 학살 사건을 설명하고 있다. 버스에 탄 18명 중 17명 사살 당해 5월 23일 광주에서 화순 방향으로 4㎞ 지점에 있는 주남마을. 당시 주남마을 뒷산에는 5월 21일 조선대 뒷산을 따라 철수한 11공수부대와 7공수부대가 매복하고 있었다. 오후 2시쯤 전남도청에서 출발한 소형버스 한 대가 마을 입구에 들어섰다. 이 버스는 어디로 가고 있었을까. 공수부대가 물러난 뒤 도청에는 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됐다. 항쟁 기간에 사망한 시민들의 시신이 도청으로 몰려들었지만 수습할 관이 부족했다. 이 때문에 시민군이 도시 외곽으로 나가 관을 마련해 와야 한다고 요구해 대책위가 소형버스를 내준 것이다. 여고생 2명을 포함한 여성 4명과 시민군을 포함한 남성 14명이 타고 있었다. 버스가 광주천 부근 지원동을 지나 주남마을 입구에 들어설 즈음 도로변에서 군인 한 명이 정지신호를 보냈다. 버스 운전사 김윤수씨는 멈추지 않았다. 그 일대에 군인들이 매복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는 상황에서 무장한 시민군들이 타고 있는 버스를 세울 수는 없었다. 달리는 버스를 향해 총알이 날아들었다. 운전사 김씨가 총에 맞아 즉사하면서 버스는 멈췄다. 그러나 공수부대의 집중사격은 멈추지 않았다. 3명을 제외한 나머지 탑승자는 모두 버스 안에서 사망했다. 1차 사격에서 부상을 입고 살아남은 이들은 주남마을 뒷산으로 끌려갔다. 공수부대는 그 가운데 2명의 남성마저 사살했다. 당시 여고생이던 홍금숙씨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아 병원으로 이송됐다. 모두 17명이 학살당한 참사다. 지난 5월 6일 낮 12시쯤 주남마을을 찾았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광주광역시 동구 월남동인 주남마을은 광주역에서 차량으로 20여 분 거리다. 도심을 완전히 빠져나와 양쪽이 산으로 둘러싸인 화순 방향 도로로 달리다 보면 ‘주남마을’이라고 새겨진 표지석이 서 있다. 마을은 바로 뒤 작은 산들에 감싸여 있고 도로 건너편에는 주유소와 차량기지가 있다. 대개 단층 양옥으로 된 이 마을 주택은 50여 채에 불과해 보였다. 도심 외곽인 데다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있는 탓인지 마을은 농촌 지역 특유의 아늑함을 품고 있었다. 집 밖에 나와 있는 주민들은 거의 없었다. 마을 입구 경로회관에서 TV를 보고 있는 이 마을 노인들에게 당시 일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돌아온 답은 “오래 전 일이라 기억나지 않고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정말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 말하기를 꺼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실제로 5·18 관련 사료나 증언을 뒤져보아도 주남마을 주민들의 증언은 많지 않다. 목격자 유씨도 현장서 관통상 입어 당시 상황을 목격한 이는 5.18민주묘역 내 매점에서 만날 수 있었다. 2006년부터 매점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유춘학씨(46)는 당시 16살이었다. 또래들이 고등학교에 다닐 나이였지만 유씨는 열 세 살 무렵부터 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터였다. 1980년 당시에는 목공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당시 유씨는 광주 외곽 지원동에 살고 있었지만 광주 시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열흘 동안의 5·18 항쟁 기간 첫날인 18일 아침에도 그는 광주 시내에 있었다. 당시 전주에 살고 있던 형이 그와 동생을 데리고 사직공원에 놀러간 것이다. 버스를 타고 도청 앞에서 내렸을 때 전남대 학생들과 전경이 대치하고 있었다. 주위는 이미 최루탄 가스가 자욱했다. 광주~화순 간 도로변에 위치한 주남마을 입구 표지석. 1980년 5월 23일 지원동에서 주남마을 입구로 들어가는 도로변에서 광주시민 18명이 탄 차량이 공수부대의 총격을 받아 1명을 제외하고 모두 사망했다. |정원식 기자 20일 저녁 목공소 사장이 당분간 출근하지 말라고 했다. 할 일이 없게 된 유씨는 21일 하루 동안 광주 시내에 있었다. 지원동 버스 종점 부근에서 시민들이 타고 있던 트럭 한 대에 올라타 광주 시내를 돌아다녔다. 그는 “당시 트럭에 시민들의 시체 2구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유씨는 “30년 전 일이지만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소형버스에 공수부대가 무차별 사격을 가하던 23일 오전에 아침을 먹은 유씨는 광주천에서 물놀이를 하기 위해 동네의 또래 친구들과 함께 화순 방향으로 걸어갔다. 처음에는 10여 명이었지만 나중에는 유씨를 포함해 셋만 남았다. 요란한 총성을 들은 건 광주천 근처 한 민가 앞마당에 있던 딸기를 몰래 따먹고 담을 넘어 나오는 길이었다. 셋은 하천가의 움푹 들어간 곳에 엎드린 채 도로 쪽을 바라봤다. 도로에는 붉은색 소형버스가 서 있었고, 양쪽 숲에서 모두 30명 정도의 계엄군이 버스를 향해 사격을 하고 있었다고 유씨는 기억을 떠올렸다. 그 나이 또래 청소년들의 호기심 때문이었는지 유씨는 무섭다는 느낌은 없었다고 했다. 그는 “무섭지 않았기 때문에 30여 분이나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버스가 집중사격을 받는 모습은 목격했지만 버스 안에서 벌어진 자세한 상황에 대한 기억은 없다. 그 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 한 명만 빼고 모두 죽었다는 건 나중에야 알게 됐다. 총성이 멎은 뒤 군인들이 숲에서 나와 버스 안을 조사하면서 근방을 함께 수색했다. 셋은 담 뒤에 숨었다. 담은 유씨를 완전히 가려 주지 못했다. 오른쪽 가슴팍이 노출됐다. 유씨는 “군인 한 명이 나를 보는 순간 정신을 잃었다”고 말했다. 총알이 오른쪽 가슴팍을 관통해 갈비뼈가 부서지고 폐를 다쳤다. 정신을 차렸을 때 친구들은 그 자리를 피한 뒤였다. 현대교통 직원 두 명이 유씨를 업고 뛰었다. 그 가운데 한 명은 와이셔츠를 찢어 관통당한 유씨의 등을 틀어막았다. 유씨는 이날 전남대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장악한 27일 새벽에 전남대 병원 간호원들은 창문을 가리고 창 부근에 있던 환자들을 복도 쪽으로 옮겼다. 오전 9시쯤 군인들이 병원에 들어왔다가 사라졌다. 낮 12시쯤 군인과 의사들이 환자들을 조사해 총상환자로 분류된 유씨는 다른 환자 10명과 함께 10층 입원실로 옮겨졌다. 한 달쯤 뒤 그는 병원 원장실에서 군인과 경찰 앞에서 총에 맞게 된 상황을 자세히 진술했다. 조사 과정에서 입원 환자 몇 명은 잡혀가기도 했다. 다행히 그는 별일 없이 퇴원했다. 유씨는 후유증이 없느냐는 질문에 가슴께를 가리키며 “갈수록 힘이 떨어진다. 더 이상 설명하기는 복잡하다”고 힘겨워 했다. 일과 시간 중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는 “일하러 가야 한다”면서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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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 연중기획]“계엄군 진입 총소리 잊지 못해”(2010. 05. 06 10:26)
- 2010. 05. 06 10:26 사회
- ㆍ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 ㆍ5·18 당시 ‘거리 언론’ 만든 김태종씨의 회고 1980년 5월 공수부대와 계엄군이 광주로 들어가는 길목을 차단하고 학살극을 벌이던 당시 광주는 철저하게 고립된 섬이었다. 막힌 건 길목만이 아니었다. 언로도 차단됐다. 주요 신문과 방송은 무자비한 국가 폭력의 현장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 보도하는 경우라도 사실은 묻히고 맥락은 비틀렸다. 외부와의 소통이 차단된 자리는 ‘유인물’로 채워졌다. 당시 학생과 노동자들은 각종 유인물을 발간해 광주 시민들의 눈과 귀 역할을 했다. 언론이 사라진 자리에서 언론 구실을 한 셈이다. 당시 광주 YWCA 건물을 근거지로 유인물 제작과 배포에 참여한 김태종씨(51·당시 전남대 국문과 4학년)를 4월 29일 오후 광주에서 만났다. 김씨는 현재 ‘5.18 30주년 기념 뮤지컬 추진위원회’ 추진위원으로 있으면서 5월 15일 막을 올리는 뮤지컬 <화려한 휴가>의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5월 18일 광주에 공수부대가 투입되면서 열흘간의 항쟁이 시작됐다. 전날 밤인 17일에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한 세대가 지났다. 시민들은 화해를 원한다. 그러나 가해자들은 아무 말이 없다.”“당시 전남대생인 나는 ‘광대’라는 이름의 극단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거의 날마다 YWCA 회관에서 <한씨연대기> 공연 연습을 했다. 17일 저녁에는 광대 멤버인 김선출·이윤기, 군대에서 휴가 나온 박석면 등과 함께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YWCA에서 있었던 함석헌 선생 강연회 뒤풀이였다. 그날은 집에 들어가지 않고 광천동까지 걸어서 박선면의 형인 박석무씨(현 한국고전번역원장) 집으로 갔다. 자려고 하는데 형님이 운동하던 선배들이 다 잡혀 갔는데 지금 잠이 오냐고 호통을 쳤다. 17일 밤 12시를 기해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광주 지역 재야인사와 학생운동 간부들이 예비 검속에 걸려 다 잡혀 갔다는 얘기였다. 이튿날인 18일에는 오전 10시쯤 YWCA 회관에서 연습을 하고 있는데 밖에서 함성과 최루탄 터지는 소리가 났다. 그때 전남대에 있던 후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학교 앞에서 공수부대가 학생들을 곤죽으로 만들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유인물 배포 작업은 어떻게 시작됐나. “사방에서 난리가 난 상황이어서 도저히 연습을 할 수가 없었다. 김선출, 김윤기와 함께 일단 전남대에 가 보기로 했다. 가는 길에 들불야학 강학(전태일 열사 분신 이후 대학생들 사이에서 야학 운동이 시작됐다. 당시 학생들은 스스로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뜻으로 ‘교사’라는 말 대신 ‘강학’이란 표현을 썼다) 출신인 전용호를 만났다. 우린 결국 쿠데타가 난 것으로 보고 지금 상황을 광주 시민들에게 정확하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등사기를 구해 김선출의 친구 이현철이 살고 있는 무등육아원으로 갔다. 공용터미널은 이미 난리가 난 상태였다. 공수부대가 젊은 남자들을 무작정 잡아다 패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 흩어졌다가 밤에 무등육아원에서 다시 모였다. 몇 명이 밖에 나가서 상황 정보를 취합해 오면 안에서 문안을 작성하고 찍어서 밖에 나가 배포하는 식이었다. 유인물은 ‘민주시민투쟁위원회’ 이름으로 발행했다. 보통 하루에 2000장쯤 찍었다. 유인물은 광대 팀 이외에 들불야학 팀에서도 발행했다. 두 팀은 서로 따로 유인물을 찍다가 나중에는 ‘투사회보’라는 이름으로 통일했다. 25일 도청에 항쟁지도부가 구성되면서부터는 YWCA로 자리를 옮겨 항쟁지도부의 홍보부 역할을 했다. 이때는 수동윤전기를 사용해 인쇄 부수가 수만부로 늘어났다. 명칭도 ‘민주시민회보’로 바꿨다.” 5월 21일 계엄군이 물러난 뒤 22일부터 분수대 앞에서 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궐기대회는 어떻게 시작됐나. “22일 궐기대회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시민들이 저마다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쏟아냈다. 23일부터는 범시민궐기대회라는 이름으로 청년 운동권이 궐기대회를 조직했다. 여기에는 사정이 있다. 22일 오후 상무대 전남북 계엄분소를 방문하고 온 수습대책위원회가 협상보고대회를 열었다. 요지는 무기를 반납하고 계엄군과 협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윤상원 형을 비롯해 나중에 항쟁지도부를 구성한 광주 지역 청년 운동권 멤버들은 그것이 일종의 투항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그 이전까지 광주 시민들의 싸움은 무엇이 되는가. 수습대책위에 맞서 전열을 정비하려면 시민들의 뜻을 모아 지지를 받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래서 범시민궐기대회를 조직한 것이다. 나는 23일부터 26일까지 이어진 범시민궐기대회 당시 사회를 봤다.” 당시 시민군은 무력에서 계엄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항전을 결의한 이유는 무엇인가. “청년들은 일주일만 버티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국제적인 여론이 신군부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데다 우리의 싸움이 다른 지역으로 알려지면 저항이 전국적으로 일어나 신군부가 버티기 힘들 것이라고 봤다. 개인적으로는 26일 가두행진을 마치고 패배의 기운을 강하게 느꼈다. 궐기대회를 마치고 나면 수천명이 가두행진을 했는데 26일에는 참여 시민 수가 수백명으로 줄었다. 가장 뼈저리게 느낀 건 고립감이었다. ‘전국 언론인에게 보내는 글’이란 제목의 유인물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이번 광주의거를 몇십년 뒤의 사건비화나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로 만들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걸고 사실 그대로 보도하여 주시기를 600여 사망자들의 피맺힌 원혼과 80만 광주시민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촉구하는 바입니다’라고 썼다.” 계엄군의 폭력 앞에서 광주 시민들이 싸울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라고 보나. “광주에는 농촌 지역의 정서적 유대가 남아 있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이 있었다. 시민들은 젊은 사람들이 맞고 찔리고 잡혀가는 걸 자기 가족의 일처럼 느꼈다. 한편으로 계엄군의 폭력이 워낙 상상을 초월했다. 당시 금남로 지하도 공사를 하고 있던 인부들이 각목을 들고 계엄군과 싸웠다. 군이 너무 잔인하니까 그랬던 것이다.” 마지막 날 기억은. “나는 YWCA 건물에서 먹고 자면서 도청과 YWCA를 오갔다. 26일 밤에는 궐기대회를 진행하면서 쌓인 피로 때문에 정신없이 잠들었다. 27일 새벽에 계엄군이 도청에 들어갔다면서 사람들이 날 깨웠다. YWCA 뒷담을 넘어 피했다. 도망가는데 총소리가 들렸다. 계엄군이 광주에 진입하면서 M16 소총을 자동발사하는 소리였다. 광주 사람들은 그날 그 총소리를 잊지 못할 것이다.” 30년이 지났다. 광주항쟁의 상흔은 이제 다 치유된 것일까. “한 세대가 지났다. 시민들은 화해를 원한다. 그러나 가해자들은 아무 말이 없다. 나는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 우리 내부의 해원부터 시작하는 것이 맞지 않겠나 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원하는 건 전두환으로 대표되는 신군부 세력의 진심 어린 사과다. ‘우리 때문에 군인도 죽고 시민들도 죽었다. 미안하다’라고 말하는 걸 듣고 싶다. 인간성을 파괴한 데 대한 자기성찰이 있어야 진정한 화해가 가능하다. 안 그러면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
- 2010 연중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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