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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총 99 건 검색)

[새책]미국 공산주의라는 로맨스 外
[새책]미국 공산주의라는 로맨스 外
2024. 11. 14 20:40문화
비비언 고닉(84)은 1969~1977년 페미니즘 운동 취재로 유명해진 미국의 전설적인 기자다. 책은 뉴욕의 좌파 노동계급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가 과거 공산당원으로 활동했던 수십명을 인터뷰해 1977년...
새책
[책과 삶] ‘공산주의’ 간과한 대가는 세계대전
[책과 삶] ‘공산주의’ 간과한 대가는 세계대전
2024. 09. 05 20:27문화
... 서술에서 수없이 반복돼온 한 ‘맹점’을 짚는다. 그것은 바로 “2차 세계대전의 기원들 가운데 공산주의가 핵심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그간 세계사 서술에서 배제되어왔던 ‘사상’이...
책과 삶
안창호, ‘동성애, 공산주의 혁명 수단’ 과거 발언에 “근거 있다”
안창호, ‘동성애, 공산주의 혁명 수단’ 과거 발언에 “근거 있다”
2024. 09. 03 21:41사회
... 않은 것 같다”고 지적하자 안 후보자는 “그렇지 않다”고 부인했다. 안 후보자는 “동성애는 공산주의 혁명의 핵심 수단” 등 자신의 과거 발언이 근거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여당에서도 논거가...
안창호인권위원장인권위
[책과 삶] 북한의 양심적 공산주의자들, 왜 사라졌나
[책과 삶] 북한의 양심적 공산주의자들, 왜 사라졌나
2024. 08. 02 08:00문화
.... 저자는 구소련 자료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바탕으로 앞선 두 해석을 모두 지양하고 ‘양심적 공산주의자들의 실패한 혁명’이라고 재평가한다. 전후 북한은 심각한 식량난과 열악한 보건의료 상황으로...
책과 삶

스포츠경향(총 14 건 검색)

고영주 전 방문진 이사장, 2심도 징역형 구형···“문재인 공산주의자, 적화되는 것은 시간문제” 주장
고영주 전 방문진 이사장, 2심도 징역형 구형···“문재인 공산주의자, 적화되는 것은 시간문제” 주장
2020. 06. 02 18:11 연예
허위사실을 주장해 문재인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고영주 전 방송문화진흥위원회 이사장이 2일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리는 2심 속행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허위사실로 문재인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고영주(71) 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에게 2심에서 다시 징역형이 구형됐다. 검찰은 2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9부(최한돈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고 전 이사장의 항소심 결심 공판에서 “원심 구형대로 선고해달라”고 밝혔다. 검찰은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구형했다. 고영주 전 이사장은 2013년 1월 보수 성향 시민단체 신년하례회에서 18대 민주통합당 대선후보였던 문재인 대통령을 가리켜 “공산주의자이고, 이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우리나라가 적화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2015년 9월 고 전 이사장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고, 검찰은 2년 만인 2017년 9월 허위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기소 했다. 이날 고영주 전 이사장 측 변호인은 문 대통령을 지목해 “영향력 있는 사람의 행태는 공동체의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이런 영역에서 특정 표현이 법원의 형사재판에서 유무죄를 가리는 문제가 되어선 안 된다”며 무죄를 선고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어 “본 재판은 공론장에서 최고 권력자를 비판할 자유가 얼마나 주어졌는지 가늠할 척도”라며 “표현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서 다양한 성향의 국민이 쟁취한 노력과 시민사회의 합의가 부당한 항소로 훼손돼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고 전 이사장은 최후진술에서 “검찰이 고소인이 대통령이라는 점을 의식해서인지 무의미한 항소와 무리한 공소 유지를 했다”고 주장했다. 앞서 1심 재판부는 “피고인의 자료나 진술 등을 보면 악의적으로 모함하거나 인격적인 모멸감을 주려는 의도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자유민주주의 체제라고 믿어 온 체제의 유지에 집착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명예훼손의 고의가 없다고 판단해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이 고영주 전 이사장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는 1·2심 모두 배상 책임을 인정해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고 전 이사장 명예훼손 항소심 선고 공판은 다음 달 9일 열린다.
트럼프 폭스뉴스 인터뷰 “샌더스 공산주의자, 엘리자베스 워런 포카혼타스”
트럼프 폭스뉴스 인터뷰 “샌더스 공산주의자, 엘리자베스 워런 포카혼타스”
2020. 02. 03 16:42 연예
2일(현지시간) 미국 민주당 대선주자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아이오와주 디모인에서 열린 슈퍼볼 선거 캠페인에서 군중에게 연설하는 가운데 한 지지자가 “버니가 트럼프를 이긴다”(Bernie beats Trump)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 AP·연합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일(현지시간) 아이오와주에서 첫 경선을 하루 앞둔 잠재적 대권 경쟁자인 민주당 대선주자들을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그는 또 상원 탄핵심판이 사실상 무죄 선고만을 남겨놓은 가운데 하원에서 민주당 주도로 이뤄진 탄핵 추진은 부당하다고 거듭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미국 프로풋볼(NFL) 결승전 ‘슈퍼볼’을 앞두고 폭스뉴스 특집방송 중간에 나온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는 3일 아이오와 코커스(당원대회)를 앞둔 민주당 주요 후보들에 대한 견해를 진행자가 묻자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을 향해 “졸린(Sleepy) 조”라며 “나는 그저 그를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바이든 아들을 거론, “헌터는 어디에 있나?”라며 헌터 바이든은 직업도 없지만, 우크라이나와 중국 등지에서 수백만 달러를 벌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원조를 지렛대로 삼아 바이든 부자에 대한 수사를 우크라이나 측에 압박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결국 탄핵심판에까지 회부됐다. 도널드 트럼프는 바이든과 치열한 1위 다툼을 벌이는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을 향해서는 “나는 그가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한다”며 “버니를 생각할 때면 공산주의가 떠오른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샌더스 의원이 모스크바에서 결혼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며 “사회주의자를 훨씬 넘어선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민주당 주자인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도 비난했다. 그는 5피트 8인치(172.7㎝) 키의 블룸버그 시장이 대선토론 참가 자격을 얻는다면 그가 밟고 서 있을 상자를 특별 요청할 거라고 주장했다. 블룸버그 시장 신장이 미국인 남성치고는 비교적 작다는 점을 부각하면서 그가 이런 점을 보완하기 위해 올라설 상자를 요청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왜 그가 서 있을 상자를 가져야 하냐. 왜 그가 그럴 자격이 있어야 하나”라며 “그럼 다른 사람도 모두 상자를 받는다는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이에 대해 블룸버그 캠프 측은 “거짓말”이라고 부인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민주당 ‘톱3’를 형성 중인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에 대해선 “포카혼타스”라며 “모든 것이 꾸며낸 이야기이다. 그는 진실을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원주민 혈통을 내세우는 워런 의원을 ‘포카혼타스’라고 부르며 조롱해왔다. 그는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이 당내 급진좌파에 떠밀려 탄핵 추진을 발표했고 “최악의 악몽”이라며 탄핵 과정은 불공평했다고 주장했다.
‘문재인은 공산주의자’ 발언 고영주, 1심서 명예훼손 무죄 판결
‘문재인은 공산주의자’ 발언 고영주, 1심서 명예훼손 무죄 판결
2018. 08. 23 10:07 생활
허위 사실을 주장해 문재인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고영주(69) 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이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1단독 김경진 판사는 23일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고 전 이사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고영주 방문진 이사장이 31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방송통신위원회 등에 대한 종합감사에서 의원들의 질의를 듣고 있다. 연합뉴스 연합뉴스에 따르면 고 전 이사장은 2013년 1월 보수성향 시민단체 신년하례회에서 18대 민주통합당 대선후보였던 문재인 대통령을 가리켜 “공산주의자이고, 이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우리나라가 적화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발언한 혐의로 기소됐다.
[속보] ‘문재인은 공산주의자’ 발언 고영주, 명예훼손 1심 무죄
2018. 08. 23 10:04 생활
[속보] ‘문재인은 공산주의자’ 발언 고영주, 명예훼손 1심 무죄

주간경향(총 4 건 검색)

“홍 장군이 공산주의자? 그 시대 맥락·상황 봐야”(2023. 09. 08 11:24)
2023. 09. 08 11:24 정치
ㆍ홍범도 연구 권위자 반병률 교수 인터뷰 사진 / 서성일 선임기자 역사가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다. 100년 전 민족의 영웅이 100년 후 주적과 사상적으로 동조한 인물로 평가가 바뀐다. 이대로면 앞으로 한국의 위인들은 100년 후 정치 변화까지 정확히 예측해 행동한 인물이어야 한다. 후손들은 2023년 역사에서 배운 그대로 자신들의 시대적·정치적 잣대로 100년 전 인물을 난도질할 수 있다. 자신들이 옳다고 믿고 국정을 운영하고 있을 윤석열 대통령, 이종섭 국방부 장관,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등도 예외가 아니다. 동일한 잣대라면 우파 자유주의라는 정치적 입장은 100년 뒤 시대 상황에 따라 ‘민족 반역’으로 평가받을 수도 있다. 의병이자 독립군 대장이며 민족적 자부심인 청산리·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에게 공산주의자라는 딱지가 붙었다. “항일 활동은 인정하지만”이라는 단서와 함께다. 하지만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돌아가실 때까지 공산당(원)으로서의 활동을 했다”는 주장임은 쉽게 알 수 있다. 육군사관학교에 세워진 홍 장군 흉상 이전, 해군 잠수함 ‘홍범도함’ 명칭 변경 검토 등이 이를 방증한다. 차라리 ‘반공’, ‘반북’ 등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홍 장군 지우기가 필요하다고 한다면 이해라도 쉽다. 국방부는 홍 장군 논란을 설명하며 자꾸만 ‘역사적 흔적’, ‘학계의 논란’ 등의 허술한 사회과학적 잣대를 동원한다. 실제로 지난 9월 4일에는 홍 장군의 공산주의 이력과 관련한 입장문 작성에 참고했다며 문서 목록까지 공개했다. 해당 목록에 두 번이나 이름을 올린 사람 중에는 국내 홍범도 연구의 권위자로 인정받는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명예교수도 있다. 반 교수는 국제공산당 국제대회인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이른바 ‘극동민족대회’) 개막식에 참석한 홍 장군이 촬영된 영상물을 발굴해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학자로도 알려져 있다. 평생 독립운동사를 연구한 권위자의 책, 논문을 참고했다고 하니 “국방부 주장이 맞나 보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난 9월 5일 경기도 광주에 있는 그의 연구실에서 만난 반 교수는 “내 책, 논문도 봤다고 합니까. 아니 대체, 어떻게 읽고 해석하길래 결론이 그렇게 나나”라며 한숨을 쉬었다. 홍 장군 논란이 불거진 이후 반 교수는 여러 차례 언론 인터뷰에 나섰다. 하지만 한 줄, 두 줄 정도 인용되는 그의 말만으로 입장문 발표, 언론 설명까지 하고 있는 국방부 논리에 대한 완벽한 반박은 이뤄지지 못했다. 이에 주간경향은 국방부가 발표한 내용을 그대로 들고 반 교수에게 하나하나 처음부터 물었다. 그 결과 기본적인 용어, 시대 상황, 국제정치적 움직임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홍범도는 공산주의자’ 주장의 허술함이 서서히 드러났다. 특히 “홍 장군을 둘러싼 논란 전후로 국방부나 정부에서 홍 장군에 관해 문의해온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한 번도 없었다"는 그의 대답에서 해당 논란이 여론, 학계, 언론 등의 동의를 목표로 진행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2021년 8월 17일 청와대에서 열린 홍범도 장군 훈장 추서식에서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우원식 이사장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전달하고 있는 모습./대통령실(청와대) 사진기자단 -독립군 대장 홍범도의 삶은 어떻게 봐야 하나. “홍 장군을 이해할 수 있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신분이다. 의병장이나 독립군 대장은 주로 유생, 양반, 고급관료 출신 등이 많았고, 경제적으로 보면 대체로 지주 출신이었다. 그런데 홍 장군은 이른바 ‘머슴’ 출신이다. 부모님이 어린 나이에 돌아가시면서 양반집, 부잣집 머슴으로 전전하며 살았다. 홍 장군의 행보를 보면, 계급적 억압·착취 등에 대한 반감을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이 시기 신분적·경제적 차별이 가치관 형성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열다섯 살에 나이를 속이고 군대에 가서 나팔수(곡호수) 생활을 했는데 차별을 견디다 못해 장교를 살해하고 쫓기는 신세가 된다. 이후 금강산의 유명 사찰 신계사에 몸을 의탁하며 1년 정도 승려의 길을 간 행적도 있다. 종합하면 홍 장군은 계급적·신분적 차별을 이유로 약자를 억압하는 것에 대한 분노가 체화된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다.” -차별에 대한 반감을 국가 간 관계로 확대하면,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으로도 볼 수 있지 않나. “실제로 두 번째 특징이 ‘항일 투쟁의 역사’가 어떤 독립군과 비교해도 빠르고 길다는 데 있다. 홍 장군 관련 자료 중 세간에 많이 알려진 것이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민족혁명단체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쓴 ‘입국신고서’다. 직업은 ‘의병’, 입국 목적과 희망은 ‘고려독립’이라고 적어서 화제가 됐는데 잘 주목하지 않는 부분 중 하나가 홍 장군이 의병이라는 직업과 함께 쓴 ‘28년’이라는 기간이다. 이를 토대로 역산해 보면, 홍 장군은 적어도 1894~1895년부터 의병활동을 한 것이다. 즉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을미의병 때부터 홍 장군이 항일운동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의병부터 독립군 활동까지 끊기지 않고 이어온 사람이 얼마나 될 것 같나. 손에 꼽을 정도로 희귀한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홍범도다. 특히 이렇게 여러 차례 의병, 독립군으로 나선 사례는 없다. 이런 홍 장군을 두고 국방부가 ‘1921년 자유시 참변 이후에 사실상 항일 무장 독립투쟁의 경력이 거의 없다’고 했는데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홍 장군이 1868년생이다. 비교 대상으로 언급하는 지(이)청천 장군은 1888년생이고, 김좌진 장군은 1889년생, 이범석 장군은 1900년생이다. 가장 나이가 많은 지 장군과 비교해도 스무 살 차이가 난다. 자유시 참변 이후라고 하면 홍 장군 나이가 최소 쉰셋이다. 국방부 말대로라면 연로한 장군이 대체 몇 살까지 만주, 연해주 등에서 무장 독립투쟁의 선봉에 있어야 한다는 것인가. 항일 투쟁 기간을 최소로 잡아도 28년이다. 다른 어떤 독립운동가와 비교해도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이다. 직업을 ‘의병’이라고 할 정도로 자기인식이 분명한 장군을 두고 독립투쟁의 역사가 어떻고, 업적이 어떻고 따지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홍범도 장군이 자필로 쓴 출입국 카드.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사장인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확대해 들고 있다. 홍 장군은 의병 옆에 (28년)이라는 활동기간을 명기했다. / 연합뉴스 -마지막 특징은 무엇인가. “홍 장군 가족이다. 나는 학자로서 홍 장군 일가를 ‘독립운동 명가’라고 부른다. 온 가족이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홍 장군의 부인 단양 이씨는 안타깝게도 실명이 알려지지 않지만, 의병 활동에 조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큰 아들 홍양순은 홍범도 부대 중대장으로서 1908년 정평 전투에 참전해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둘째 아들 홍용환 역시 독립군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홍 장군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고초를 겪었다. 당시 일본은 홍 장군을 체포할 수 없으니 가족을 인질로 잡고 회유하려 했다. 이를 주도한 것이 조선인 김원홍, 임재덕 등으로 구성된 일진회 간부들이다. 이들은 단양 이씨를 고문하며 홍 장군을 회유하는 편지를 쓰게 했다. 단양 이씨가 ‘홍 장군은 회유될 사람이 아니다’며 거부하니 편지를 조작하기까지 한다. 홍 장군을 회유하기 위해 여러 차례 사람들도 보냈는데 그때마다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자 큰아들 홍양순을 보낸 적도 있다. 아들은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때 홍 장군이 아들을 꾸짖고 총을 쏜 일화가 있다. 홍 장군 일가는 독립운동이라는 제단에 자신들의 목숨을 바쳤지만,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심지어 홍 장군 가족에 관해서는 일본군이 입수한 첩보로 추정해야 할 정도다. 항일 투쟁을 주도한 인물들이 주로 양반, 고위 관료 등의 명문가 출신이라는 점과 비교하면 이러한 특색은 더욱 두드러진다. 머슴 출신으로 사실상 나라의 도움을 받은 바가 없음에도 집안 전체가 항일 투쟁에 나섰다. 이런 사례는 정말 찾기가 힘들다. 홍 장군 집안이야말로 진짜 명문가다.” -그럼에도 국방부는 홍 장군 행적에 문제가 있다는 입장이다. 모든 논란의 시작과 끝에 1921년 발생한 ‘자유시 참변’이 있다. 국방부는 ‘홍 장군님이 1921년 소련 자유시로 이동한 이후 보인 행적이 독립운동 업적과 다른 평가가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학계에서 이런 논란이 있나. “국방부가 역사적 인물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려면, 가장 최신의 연구 성과까지 살펴보고 관련 연구자 등과도 충분히 논의한 뒤 문제 제기를 했어야 한다. 이 과정이 결여되다 보니 논리에 구멍이 뚫려 있다는 비판을 받는 것이다. 2021년이 자유시 참변 100주년이었다. 이때 학술회가 개최됐다. 당시까지만 해도, 자유시 참변 관련해서 풀리지 않는 몇 가지 의문점이 남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홍 장군이 참변에 대해 어떤 입장이었나, 책임이 있는가, 만약 있다면 어느 정도인가, 홍 장군을 대표로 하는 간도에서 올라간 독립군들은 참변의 가해자인가, 피해자인가 등에 관한 것이다. 이 부분이 논란이 된 것은 최근 이철규 국민의힘 의원이 공개하기도 한 ‘우리 고려 노동 군중에게’ 같은 문건 때문이다. 홍 장군 등 간도 독립군 지도자 5명이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공동명의로 1921년 9월 15일자로 발표한 이 문건에는 ‘우리의 수적(원수인 적)은 자못 일본침략주의자뿐 아니라 동족 사이에도 있나니라. 자세히 말하면 관료 및 유산자이며 홍(紅)O와 같은 외홍내백(外紅內白: 겉으로는 붉지만 속은 하얀)한 가면 공산당원들이로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문건만 보면, 홍 장군이 자유시 참변에 가해자로 가담한 것처럼 보인다.” -먼저 자유시 참변부터 정확히 좀 설명해 달라.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유시에 모인 독립군 부대들의 이합집산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당시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들을 통합해 하나의 체계로 일본군과 무장투쟁에 나서려고 했다. 초창기에는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 원동부와 연결된 이른바 ‘상하이파’가 대한의용군을 창설해 통합을 주도했다. 홍 장군 등의 간도에서 출발한 독립군 부대도 이 대한의용군에 가담한다. 그런데 논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의 후원을 받은 이른바 ‘이르쿠츠크파’가 고려혁명군정의회를 만들면서 주도권을 가져오게 된다. 통합의 주도권이 이동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홍 장군 등 간도 독립군도 대한의용군에서 고려혁명군정회의 쪽으로 옮겨 가게 됐다. 지휘부 구성과 통합군대의 편제 등을 둘러싸고 양측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1921년 6월 28일 고려혁명군정의회 측이 대한의용군에 대한 무장해제에 나선다. 이를 자유시 참변이라고 한다. 자유시 참변 이후 홍 장군 행보에 문제 제기를 하는 논거는 참변을 정당화하는 성명서에 이름을 올렸다는 것과 무장해제를 거부한 독립군을 재판하는 과정에 참여했다는 것 등이다. 자유시 참변 관련해서 과거 학계에서 논란이 있었던 부분도 이와 같다. 그런데 홍 장군 행보를 액면 그대로만 보기에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다.” -정확히 어떤 부분인가. “우선, 무장해제 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독립군들이 누구냐 하는 점이다. 당시 현장에서 피해를 입은 것은 최진동, 허근 등이 이끌던 부대가 합쳐져 만들어진 ‘총군부’라는 부대다. 무장해제 과정에서 현장에서 36~37명이 사살됐다. 그런데 피살된 독립군을 이끌었던 최진동, 허근은 안무, 지청천 그리고 홍범도와 함께 간도에서 올라간 독립군들이었다. 즉 대한의용군 쪽에서 고려혁명군정의회 쪽으로 간도 독립군들이 빠져나갔는데 미처 나가지 못한 총군부 소속, 정확히는 허근의 의군부 소속 독립군들이 일부 남아 있었고, 이들이 총살당한 것이다. 그런데 1921년 11월 초까지 이르쿠츠크파는 ‘(상하이파) 대한의용군 진압’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성명서를 잇달아 발표하는데 이들 문건에 의병대 영수로 홍범도, 최진동, 허재욱(허근), 안무, 지(이)청천의 이름이 나온다. 정리하면 홍 장군을 비롯한 간도 독립군 장군들이 자신과 함께한 부대가 피해를 입은 것이 정당하다고 옹호하고, 해당 부대를 공격하는 문건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굉장히 어색한 일이지 않은가. 이에 후속 연구가 진행됐고, 그 결과가 하나씩 나오고 있다. 우선 1921년 10월, 허근 등이 코민테른에 제출한 <자유시 참변에 대한 보고서>에는 ‘귀 의회정부가 총사령관을 보내 풍파를 야기하려 자유시에서 한국군대를 포위·공격했다’며 참변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문책을 강력하게 요구한 문서가 발견된다. 또 같은해 12월 14일자로 홍범도, 최진동, 허근, 지청천 등 간도 독립군 장교 28명이 상하이파의 핵심 인물인 김동한에게 참변 관련 협상에 대한 전권을 위임한다. 상하이파는 자유시 참변의 피해자다. 간도 독립군 지도자들이 피해 측 인사에게 협상 전권을 위임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자명하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1922년 2월,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에 참석했던 홍범도, 최진동이 김동한과 공동명의로 <조선유격운동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는데 여기에 ‘이렇게 부끄러운 성명서에 서명할 수 없었으며, 그들(이르쿠츠크파)이 최후통첩을 했지만 서명을 거부했다’며 ‘동의 없이 임의로 (우리) 이름을 넣었다’고 폭로하는 내용이 들어갔다. 즉 그동안 이해가 안 됐던 문건이나 홍 장군의 재판 참여 등의 행적이 실상은 명의도용이었고, 이르쿠츠크파의 속임수에서 비롯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유시 참변과 관련해 홍범도 장군 등의 이름이 포함된 성명서는 “동의없이 임의로 (홍 장군 등의) 이름을 넣은 것”이라는 입장이 담긴 조선유격운동에 대한 보고서 / 반병률 교수 제공 -그렇다면 국방부가 최신 연구는 보지 않고 섣부른 논란을 만든 것 아닌가. 국방부가 홍 장군 행보에 문제 제기한 논거를 보면 ‘소련공산당 군정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군 통합을 지지했다’, ‘소련공산당 자유시 참변 재판에 재판위원으로 활동했다’, ‘자유시 참변 발생 후 이르쿠츠크로 이동하면서 소련 적군 5군단 소속 조선여단 1대대장으로 임명됐다’는 것 등이다. 각각에 대해 어떻게 보나. “먼저 용어부터 제대로 써야 한다. 소련공산당 군정의회 그런 게 어디 있나. 1921년 당시 소련이 성립되지 않은 사실조차 알지 못한 것이다. 고려혁명군정의회를 소련공산당 군정의회라고 표현한 것 같은데 이런 식으로 용어를 섞어서 설명하면 안 된다. 당시 독립군 활동에 유리한 쪽이 어디였는지가 홍 장군이 고려혁명군정의회 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한다. 재판위원으로 참여했다고 하는 것은 맞다. 다만 독립군을 처벌하기 위해 들어갔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재판 관련해서 홍 장군은 1921년 6월 28일 자유시 참변 등과 재판 과정이 국제공산당 집행위나 소비에트 정부 혁명군정의회 등 중앙의 승인하에 진행된 것으로 오인하고 있었다. 국제공산당 동양혁명책임자인 슈미야츠키와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이 간도독립군 지도자들을 기만한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홍범도의 재판 참여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소련 적군 소속이었다고 비판하는 것은 스스로 당시 국제정세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과 같다. 국방부는 당시 러시아지역이 전부 소비에트러시아였던 것처럼 말하는데 극동지역의 공식 정부는 ‘원동공화국’이었다. 명목상 국가에 가까웠는데 시베리아에 진출(침입)한 일본군을 몰아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자본주의 체제를 운영하면서 소비에트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이른바 완충국가(Buffer State) 역할을 했다. 원동공화국은 ‘인민혁명군’이라는 자체 군대도 갖고 있었다. 이런 시대적·국제적 배경에서 당시 러시아지역에서 활동한 독립군들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를 봐야 한다. 당시 일본은 소비에트러시아든 원동공화국이든 독립군을 후원하는 것에 강력히 항의했다. 독립군이 별도의 군대로 활동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이에 독립군이 아닌 원동공화국 소속 ‘인민혁명군’, 소비에트러시아 소속 ‘적군’으로 명목상 편재되는 것이 하나의 대안이었다. 실제로 홍 장군은 원동공화국인 자유시에 있을 때는 ‘인민혁명군 제2군 29연대 소속’이었고, 소비에트러시아인 이르쿠츠크로 이동한 후에는 ‘적군 5군단 소속’이 됐다.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렇다면 실질은 독립군 그대로였다는 것인가. “그렇다. 명목상 편재라는 증거는 또 있다. 당시 독립군이 인민혁명군이든 적군이든 그 지위는 간도 시절의 지위에 부합하는 직책을 부여받았다. 예를 들어 홍 장군은 간도에서 지휘했던 부대 규모가 대대급이어서 제1대대장으로 되고, 지(이)청천은 사관학교 교장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임명되는 식이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라. 홍 장군이 진짜 소비에트러시아 적군의 대대장이면 기록도 남고, 시베리아 내전이 끝난 후에는 장교로서 승승장구해야지 그대로 물러나는 것이 말이 되나. 소비에트러시아, 원동공화국, 일본과의 관계 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소련’, ‘반공’ 등만 앞세워 역사를 설명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대체 역사자료를 어떻게 보고, 연구해서 이런 결론을 낸 것인지 모르겠다.” 반병률 한국외국어대 사학과 명예교수가 지난 9월 5일 경기 광주시 퇴촌면 무돌국제한국학연구소에서 홍범도 장군 논란과 관련해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반 교수는 국내 홍범도 연구의 권위자로 알려져 있다. / 서성일 선임기자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홍 장군이 공산주의자인가. “논리적으로 따져보자. 첫째로 홍 장군은 소련공산당에 가입해 어떠한 직책도 맡은 적이 없다. 기껏해야 소련공산당에 뒤늦게 입당한 평당원이다. 둘째로 당시 홍 장군이 가입한 소련공산당을 어떻게 볼 것이냐 문제다. 홍 장군이 공산주의자라는 이들은 공산당의 개념부터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러시아공산당(혁명 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소비에트 정부 수립 후 러시아공산당으로 개칭)은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기 위한 전위정당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무장하고 갖은 회유에도 끝까지 철의 규율로 무장한 자신의 이념을 지키는 이들이 가입한 그런 정당이다. 그런데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공산당은 사회를 변혁시키고 이념으로 무장하고 그런 정당이 아니다. 사회주의 국가가 건설된 사회에서 대중정당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즉 일정한 자격이 있고, 문제가 없으면 가입할 수 있는 정당이 된 것이다. 홍 장군은 1927년 소련공산당에 가입했다. 셋째로 만약 홍 장군이 정말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무장한 공산주의자라면 그 이전 시기 공산당에 가입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 1918년 한인사회당, 1921년 고려공산당, 1925년 국내에서 창립한 조선공산당도 있었다. 그런데 이들조차 홍 장군을 영입하려고 하지 않았다. 1920년대 한인 공산주의자들이 볼 때 홍범도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홍 장군은 왜 뒤늦게 소련공산당에 가입했나. “생계 문제다. 1929년이면 홍 장군이 연금생활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는데 공산당원과 비공산당원이 받을 수 있는 지원 격차가 컸다. 당시 홍 장군은 재혼도 하고, 가족이 늘어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생활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또 자신을 평생 믿고 따라준 독립군 부하 중 만주나 국내로 돌아가지 못하고 정착한 이들이 있었다. 이들을 위해 집단 농장을 꾸려가야 했다. 정부에 땅을 신청하고 불하받고 각종 시설 제공 등 혜택을 받으려면 공산당원 자격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홍 장군에게 좋은 땅이 주어진 것도 아니다. 황무지에 가까운 땅을 불하받고 개척하는 상황에서 무슨 공산주의를 선전하고, 이념 투쟁을 하고, 혁명을 한다는 말인가. 심지어 홍 장군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강제이주까지 당한다. 정말 홍 장군이 소련공산당의 핵심 당원이고 유력 인사라면 아랄해에 가까운 카잘린스크라고 하는 시골로 70세에 가까운 노인을 보내버리겠나.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럼에도 왜 국내로 돌아오지 않았는지까지 따지는데. “홍 장군은 1908년에 러시아로 간다. 1943년 사망할 때까지 살았으니 30여 년간 산 셈이다. 일생의 약 절반은 러시아에 머물렀던 셈이다. 홍 장군을 비판하는 이들이 왜 김좌진, 이범석 장군처럼 국내로 돌아오지 않았느냐 묻는 것을 봤다. 두 장군과 홍 장군의 활동 근거지가 다르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 지적이다. 김좌진, 지(이)청천, 이범석 장군처럼 만주가 활동 근거지인 사람들과 러시아가 활동 근거지인 사람을 비교하면 어떡하나. 게다가 홍 장군은 국내에서도 하층민에 속하는 머슴 출신이다. 이 분이 국내에서 성장한 환경과 비교할 때 노동자·농민의 생활권을 강화하고 러시아 혁명 이후 토지까지 재분배하는 상황은 충분히 기회라고 느낄 수 있다. 1900년대 초반 활동한 인물을 재평가하면서, 2023년의 잣대를 들이대면 어떡하나. 적어도 그 시대 상황, 맥락은 살펴보고 인물을 평가하는 것이 정당한 것 아닌가.” 서울 용산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홍범도 장군 흉상 / 김창길 기자 -평생 독립운동을 연구한 역사학자로서 이번 논란을 어떻게 보나. “일부 국민이나 국방부는 공산당 하면 김일성의 조선노동당만 떠올리는 것 같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시기의 공산당 개념은 이와는 다르다. 이론상으로는 양립이 불가능함에도 민족주의자이면서 동시에 공산주의자였던 분들도 계셨다. 이승만 전 대통령조차 임정대통령으로서 소비에트러시아에 임시정부 외무차장 이희경과 안공근을 파견했고, 1933년에는 모스크바를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공산주의가 독립운동의 한 방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이었다. 독립운동가마다 만들고자 한 나라의 형태는 다를지언정 모두의 1차 목표는 일제로부터의 ‘독립’이었다. 이를 이제 와서 ‘반공’이라는 잣대로 재평가한다면 군주제를 신봉한 의병이나 복벽주의자들, 무정부주의(아나키스트)를 표방한 독립운동가들은 또 어떻게 되나. 이들도 재평가해야 하는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다 목숨을 잃은 분들이 남북이 분단될지, 이념으로 갈라질지 어떻게 알았겠나.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은 끊임없이 민족통합을 모색했고 임시정부 아래에서조차 좌우합작 등의 통합 방향으로 발전해 갔다. 이 점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이 한 권의 책]팬데믹 패닉-현재 재난 상황은 새 공산주의 발명 절호의 기회
[이 한 권의 책]팬데믹 패닉-현재 재난 상황은 새 공산주의 발명 절호의 기회(2020. 08. 21 15:20)
2020. 08. 21 15:20 문화/과학
아직 가을의 문턱에 불과하지만 2020년은 단연코 코로나19가 세계를 뒤흔든 해로 기억될 것이다. 여전히 진행 중인 팬데믹 상황은 우리뿐 아니라 전 세계에 미친 영향이 그만큼 크다. 아직 때 이른 관심이긴 하지만 과연 세계는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견해가 갈리지만 그렇게 되기 어렵다는 쪽이 우세하다. 우리 시대의 대표 철학자 가운데 한명인 슬라보예 지젝은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현재의 재난적 상황을 새로운 공산주의의 발명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재난은 과연 어떻게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인가. 슬라보예 지젝 지음·강우성 옮김·북하우스 몇 년 전 100주년을 맞았던 러시아혁명의 사례를 보자. 1917년 러시아에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났지만, 볼셰비키를 주축으로 한 혁명세력은 러시아 전역을 장악할 만한 충분한 역량을 갖지 못했다. 당시 수도 페트로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손에 넣었음에도 곧바로 반혁명세력의 반격을 받게 되었다.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겠다는 포부를 당차게 품었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예기치 않게 혁명군과 반혁명군 사이의 내전이 전개되었고, 이때 탄생한 것이 ‘전시 공산주의’다. 생필품을 포함한 물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기라 이를 징발하고 배분하는 데 매우 혹독한 통제가 이루어졌다. 현재의 팬데믹 상황은 또 다른 의미에서 전쟁 상황이다. 다만 이번에는 러시아뿐 아니라 전 세계가 코로나바이러스와 벌이는 전쟁이다. 러시아는 당시 사회주의혁명이 확산될까 두려워하던 자본주의 국가들에 포위돼 있었고, 이는 전시 공산주의라는 기형적 체제를 낳았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에 의해 하나로 통합된 세계에서 팬데믹은 국경봉쇄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트럼프의 “미국 먼저!”라는 주문도 아무 소용이 없다. 킹 목사의 말을 지젝이 다시 인용하는 것은 그래서이다. “모두 다른 배를 타고 왔을 수는 있지만, 우리는 지금 같은 배를 타고 있다.”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운명공동체로서의 자각은 현재 상황이 전 지구적 협조와 협력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는 주장에 동의하도록 해준다. 팬데믹은 전 지구적 문제이기에 개별 국가적 수준의 대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국수주의적 포퓰리즘도 시장 메커니즘도 해결의 방책이 될 수 없다. 조건 없는 전면적 연대와 전 지구적으로 조율된 대응이 필요하고 정보의 공유와 그에 따른 계획의 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지젝이 말하는 공산주의란 바로 그러한 새로운 협력체제를 가리킨다. 이조차도 낭만적으로 들린다면 현실적인 대안은 무엇인가? 연대와 협력을 축소하거나 포기함으로써 봉착하게 될 한계상황을 영국의 저널리스트는 이렇게 상상한다. 영국에서 코로나19 집단감염이 진행되어 병원마다 환자들이 넘쳐나는 의료 마비현상이 발생한다면 ‘세 명의 현자’ 지침에 따라 각 병원의 세 명의 선임상담자가 산소호흡기와 병상의 배분을 결정해야 한다. 과연 그러한 상황에서 상담자들은 어떤 기준으로 환자들에게 기회를 배분할 수 있을까. 과연 누가 생존의 권리를 박탈당하게 될 것인가. 그러한 선택과 배제가 과연 어떤 명목으로 정당화될 것인가. 지젝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아무리 문명의 외피를 쓰고 있더라도 그것은 야만이라고. 그렇다면 지젝의 주장은 이상적인 것도, 낯선 것도 될 수 없다. 이 양자택일은 지극히 현실적이며 냉정하다. 곧 “우리 앞의 선택은 야만이냐 아니면 어떤 형태로든 재발명된 공산주의냐다.”
이 한권의 책
[신간] 나는 공산주의자다 1·2 外
[신간] 나는 공산주의자다 1·2 外(2010. 05. 12 14:34)
2010. 05. 12 14:34 문화/과학
나는 공산주의자다 1·2 허영철 선생은 1954년 북한 공작원으로서 남파돼 활동하다가 1955년 무기형을 선고받고 36년을 복역했다. 그의 자서전을 만화로 옮긴 이 책은 굴곡진 역사의 무게, 목판화를 연상시키는 작화와 구성의 완성도에서 아르트 슈피겔만의 에 비견할 만하다. 허영철 원작·박건웅 만화·보리· 각권 1만1000원·1만2000원 간송 전형필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은 국보급 문화재의 보고다. 이 미술관의 소장품을 제외하곤 한국회화사를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책은 간송미술관 설립자인 조선 제일의 수집가 간송 전형필(1906~1962) 평전이다. 간송의 맏아들인 전성우 화백이 책 내용을 감수했다. 이충렬 지음·김영사·1만8000원 주거 신분사회 민간 싱크탱크 희망제작소와 창비가 함께 발간하는 ‘우리시대 희망찾기’ 시리즈의 아홉 번째 책이다. 기본 얼개는 시리즈의 전작들과 같다. 전문가들이 부동산 관련자와 시민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중심으로 문제를 진단하고 해법을 모색한다. 책은 주거지역이 사회적 신분을 결정짓는 주택문제를 총 6개 장으로 나눠 다뤘다. 최민섭 외 지음·창비·1만5000원 휠체어 위의 우주여행자 스티븐 호킹 세계적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최근 외계인이 존재할 수 있고 시간여행도 가능하다는 주장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대중적 명성에 대해서라면 군말이 필요 없다. 애니메이션 에 카메오로 등장한 적이 있을 정도다. 정작 호킹의 전기는 많지 않다. 책은 호킹의 일생과 과학자로서 그의 업적을 평이하게 풀어내고 있다. 크리스틴 라센 지음·윤혜영 옮김·이상·1만3000
신간
[현대사 아리랑]된바람 차가운 눈보라 헤쳐온 늙은 공산주의자 홍덕유
[현대사 아리랑]된바람 차가운 눈보라 헤쳐온 늙은 공산주의자 홍덕유(2009. 07. 09)
2009. 07. 09 정치
제2차 조선공산당의 핵심요원 조선공산당 사건을 다룬 신문기사. "21년 전 일입니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이 늙은 몸에 열혈이 끓어오르는 듯합니다. 지금 반도호텔 옆에 있는 아서원(雅?園)에 각 도당 대표들이 극비밀리에 참집하여 역사적인 조선공산당 제1차 대회가 열리었든 것입니다. 오늘날을 당하야 그 대회에 참가하고 이미 세상을 떠난 김재봉(金在鳳)·주종건(朱鍾建)·진병기(陣秉基) 세 동무를 생각하면 강개함을 금할 수 없읍니다.” 1946년 4월 17일치 조선공산당 창립 21주년 기념 특집 기사이다. ‘장안 복판에 뜻깊은 거사’ ‘당 창립식에 참석한 홍덕유씨 담’ “그때 그 대회에 참집한 사람은 일생을 조선민족 해방운동에 바치겠다는 강철 같은 의지의 혁명가들이었읍니다. 그 대회가 서울서 개최되었든 것은 김재봉·박헌영 동무들의 피눈물나는 노력과 희생적 투쟁의 결정입니다. 표면으로는 4월 15, 16 양일에 전조선기자대회를 소집하고 기자대회를 이용하여 지방당원들을 상경케 하고 4월 19일에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를 개최한다 하야 경찰의 혈안을 이상 양 대회에 총집중시킨 다음 예정되었든 4월 17일에는 전기 기자대회로 하여금 동대문 외 상춘원(賞春園)에 화유회(花遊會)를 개최케 하여 장안 전경찰의 신경을 상춘원으로 총집중시키고 그 틈을 타서 우리는 제1차 대회를 백주에 장안 복판 아서원에서 열었든 것입니다. 일경의 압박과 감시가 혹심하였든만치 우리의 기술공작 역(亦) 혈루의 노력이 필요하였고 따라서 그 공작을 우리는 언제나 자랑거리로 생각하고 있읍니다.” ‘조공·형극의 길 21년’이라는 큰 제목 밑에 쓰여진 머릿글이다. 1925년 4월 17일 지금으로부터 21년 전의 이달 이날은 우리 민족해방의 전위부대인 조선공산당이 창건된 날이다. 악독한 일제의 탄압 아래의 21년이란 길고도 길었다. 강도 일본의 합병의 마수가 뻗인 지 15년. 3·1운동의 고배를 맛본 지 6년. 당시 도도히 흘러오는 세계사적 조류에 발마추어 가장 애국적이오 혁명적인 전위투사들로서 맺어진 조선공산당의 형극의 길은 이날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제 해방의 백광(白光)에 쌓인 합법적 무대에서 남조선에 있어서만 이미 3만여 명의 당원을 옹(擁)하고 민족의 진두에서 정당정당한 정전(政戰)을 개시하게 된 오늘날 동 당의 영광 그 어듸다 비길 것인가. 의의 깊은 동 당 창립 21주년 기념일을 마지하야 당시 당 창립의 중심인물로서 신출귀몰의 활약을 하고 동 당이 재건된 오늘날에 있어서도 제일투사로 그 일흠을 떨치는 분들의 회고담을 간명(肝銘)하야 앞날의 지침을 삼기로 하자. 홍덕유(洪德裕)는 1882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 아호가 소죽(蘇竹)이니- 소비에트 모둠살이를 이루어내기 위하여 대나무처럼 끼끗하게 살겠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된바람 차가운 눈보라 속에서 힘차게 솟아오르는 죽순처럼 살아나가겠다는 매운 다짐으로 보인다. 1916년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돌아온 것이 1919년이었다. 경리부장과 공무국장을 한 것이 다음해이니 39살 때인데, 그때까지 살아온 샅샅 자취는 알 수가 없다. 1923년 ‘신사상연구회’ 가입 1922년 11월 민립대학 기성준비회 준비위원이 되었고, 1923년 7월 사상두럭인 ‘신사상연구회’를 얽는데 들어갔다.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앞장서 이끌겠다는 다짐으로 모인 홍명희·홍증식·윤덕병·구연흠·원우관·이재성·조봉암 같은 먹물 든 젊은이들이었다. 24년 9월 조선기근대책강구회 준비위원이 되었다. 11월 19일 ‘신사상연구회’를 ‘화요회’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맑스가 태어난 11월 19일이 화요일이었기 때문이다. 홍명희·홍증식·조봉암·윤덕병·김재봉·박일병·조동호·김찬·박헌영·김단야·임원근 같은 피끓는 주의자들이 회원이었다. 김재봉·김두전(약수)·유진희·권오설·김상주·진병기·주종건·윤덕병·송봉우·독고전·홍덕유·조봉암·김찬·조동우(호) 등은 재작년 사월 십칠일 오후 한시경에 시내 황금뎡 아서원이란 중국요리집에 모히어 조선을 일본의 긔반으로부터 버서나게 하는 동시에 조선의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할 목적으로 조선공산당이란 비밀결사를 조직하야… 조선공산당을 세우는 데 화요회 회원들이 앞장섰으므로 조공을 ‘화요회공산당’이라고 불렀을 만큼 조선공산주의운동에서 고갱이 구실을 한 것이 ‘화요회’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거의 모든 회원들이 잇달아 왜경에게 붙잡혀 감으로써 무너지기까지 한 18개월 동안 조공운동 채잡이가 되었다. 조공 채잡이 가운데서도 가장 먹물이 많이 들고 움직임이 거쿨졌던 사람들은 열에 아홉이 화요회 회원이었고,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신문·잡지·출판 같은 언론 동아리에 몸붙이고 있었다. 6·10만세운동을 일으켰다가 허리가 부러진 제1차 조공 책임비서 김재봉에게 강달영을 다리 놓아 제2차 조공을 세우게 하는 홍덕유는 지방부장이었고, 강달영도 진주지국장이었다. 박헌영·김단야·임원근·김재봉·조봉암·조동호·주종건이 신문기자였다. 유진희·송봉우·김찬·김두전 같은 이들도 잡지나 기관지를 펴내는 언론인이었다. 평양음악학교 학생들이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들고 북조선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서 경축대행진을 하고 있다.(1946년 11월 3일) 3·1운동 때 종교계 목대잡이들은 물렁물렁한 짓거리를 보이다가 인민들한테 자빡맞는 판에서 독립운동 근터구는 언론계였다. 그때에 먹물 든 사람들은 언론계로 몰렸는데 먹물들이 해볼 수 있는 일자리가 막혀 있는 탓이었다. 총독부 공다리가 되거나 학문갈닦음에 몸붙일 수 있는 길은 아주 적었다. 언론계만이 열려 있었다. 주의자가 된 언론계 사람들은 일동무들을 끌어들였고, 인쇄공·판매부원·신문배달부같이 언론과 이음고리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꼬리를 물어 끌어들일 수 있었다. 코민테른에서 조선공산당을 맡고 있던 쿠시넨이 “조선공산당에서 노동자는 눈을 씻고도 찾을래도 찾을 수 없다”고 했을 만큼 조선공산당원 50% 위가 먹물 든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벌잇줄을 가진 부르조아지 또는 소부르조아지였다. 거의가 직업혁명가라고 부를 수 있는 정치운동가와 전문학교와 고등보통학교 재학생 또는 문필가와 여러 가지 학교 교원들이었다. 옹근 노동자는 화이트칼라를 넣어서도 당원 가운데 11.6%에 지나지 않았다. 노동자 가운데도 육체노동자는 6%였고 참된 프롤레타리아트의 거지반을 차지하는 농민은 13%였다. 신문기자라고 하더라도 품삯을 넉넉하게 받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경제적으로 시원찮은 젊은 먹물들이었다. 푼푼하지는 못하나 고등교육을 받은 정치엘리트 동아리가 조공을 끌고 나갔던 것이다. 강달영과 더불어 2차 조공 조직 조선의 젊은 먹물들은 여러 가지 사상철학 가운데 하나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놓고 그 갈피를 따져들어 가며 깊이 파고들었다. 그런데 파고들어 따지기만 할 때는 괜찮았으나 그렇게 따지면서 파고든 이론을 실천으로 옮겼을 때는 곧바로 감옥에 갔다. 그야말로, 말깨나 하는 놈 재판소 가고/일깨나 하는 놈 공동산(共同山) 간다/아깨나 낳을 년 갈보질 하고/목도깨나 메는 놈/부역을 간다/는 판이었다. 당원 146명·후보당원 119명. 1926년 3월 제2차 조선공산당이 코민테른에 보낸 조공당원 숫자이다. 책임비서 강달영. 차석비서 이준태(李準泰). 조직부 김철수. 선전부 이봉수(李鳳洙). 검사부 목대잡이는 홍덕유였다. 당원이 되기 위해서는 누구나 먼저 후보당원 동안을 거쳐야 하였는데, 출신계급에 따라 다름이 있었다. 노동자·농민 3개월,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는 소공업자는 6개월, 사무원 및 기타는 1년 위로 되어 있었는데, 그렇게 울을 두른 것이 강달영과 홍덕유였다. “합병 후 조선에서는 일제의 폭압으로 말미아마 꼼짝할 수 없게 되여 특별한 조직적인 운동이 없었읍니다. 그러다가 3·1운동을 계기로 무단정치가 소위 문화정치라는 일종의 회유정책으로 전환하야 언론이라든지 출판 혹은 집회 등에 대해서 다소의 자유는 허용하여 민족자본가들은 회사조직 기타 기업의 자유를 얻게 되여 3·1운동으로부터 6·10운동까지의 사이에 벌써 민족주의적 정치운동가들은 전향하야 왜놈들 앞에 무릎을 꿇고 일제의 품안에 들어가고 또는 탈락해버렸든 것입니다.” 65살 된 늙은 공산주의자가 한 말이다. 1946년 6월 9일 편집국이었다. 양재식·박래원·이천진·조두원과 둘러앉아 6·10운동을 되돌아보는 자리였다. 신문사 쪽에서는 고재두 편집주간·임화 주필 외 기자 4명이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자본가는 일제의 품안에 조공만이 불굴의 투쟁 회유정책에 국내대립 격화 1947년 66세로 세상 떠나 본사 “바쁘실 텐데 오시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여러분이 몸소 체험하신 6·10만세사건에 관하야 말씀을 듣고저 해서 오날 이 자리에 모시게 된 것입니다. 먼저 당시의 국내 일반 정황을 홍선생 말씀해 주시지요.” 홍 “그런 가운데에서 끝까지 타협하지 않고 꾸준히 반제투쟁을 하고 독립운동을 계속한 것은 공산주의자와 및 그 영도 하에 있는 진보적 학생 소시민 노동자들이 있읍니다. 그런데 1925년 12월에 이러난 제1차공산당사건으로 공산당의 대부분 간부가 피검되였으나 이에도 굴하지 않고 남어지 사람들은 다시 진영을 정돈확대하여 가지고 운동을 전개하고 있든 중 1926년 4월 25일 이조 최후의 왕 이척이 서거하였든 것입니다. 이에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는 왜놈들한테 눌려서 신음하는 조선민족에게 반일적 감정을 고취하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6월 10일을 기하야 반일대시위를 결행하기로 결정하고 각 단체와 연락하야 운동을 계획한 것이 그만 미숙에 발각된 것입니다.” 본사 “그때 해외와도 연락을 한 모양인데 그 상태의 방법은 어떠하였읍니까?” 박 “상해에서 그 삐라를 전해오기는 김단야 동지가 안동까지 가져오고 거기서 또 손을 바꾸어서 서울까지 가져왔읍니다.” 본사 “그때 운동의 지도부 구성은 어떻게 하였든가요?” 홍 “전반 지도는 조공에서 하기는 하였지만 그때 당은 지하에 있었음으로 당의 결정으로 동원 준비 재무 등 일체 공작의 책임을 권오설 동지가 지고 총지휘를 하였읍니다. 그리고 지방 연락은 여기 앉아 계신 박래원 동지가 주로 하기로 되였었죠. 학생 동원 연락에는 조두원 이천진 동지가 수고 많이 하였읍니다. 그리고 박래원 양재식 동지는 특히 인쇄물 관계로 권오설 동지와 밀접하였지요?” 1926년 3월 조선공산당 검사위원회 책임비서 겸 당중앙 후보위원이 되었다. 같은달 조공 경성부를 맡았다. 6월 ‘제2차조공사건’으로 3년 징역을 살았다. 1930년 감옥을 나와 경리부장과 공무국장을 하였다. 1943년 화요파 공산주의자그룹을 짜는데 들어갔다. 8·15를 맞아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후보위원, 11월 전국인민대표자대회 중앙위원, 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 및 조직부장이 되었고, 12월 남조선노동당 중앙감찰위원이 되었다. 1947년 6월 25일 눈을 감았다. 향수 66. ※ 김성동의 현대사아리랑 연재를 마칩니다. 애독자들과 작가 김성동 선생께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김성동 |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19세에 출가, 10여 년간 스님으로 정진했다. 1978년 소설 로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소설집 등을 냈다. 현재 경기 양평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현대사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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