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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총 13 건 검색)

[포토뉴스] 제101주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희생자 추모제
[포토뉴스] 제101주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희생자 추모제
2024. 09. 01 20:47사회
... 백두산 국선도, 한민족운동단체연합 등 시민사회단체가 1일 서울 서대문구 순국선열 독립관에서 제101주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희생자 추모제를 열고 있다. ...
[현장 화보]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희생자 추모제
[현장 화보]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희생자 추모제
2024. 09. 01 15:17사회
... 순국선열 독립관에서 제101주년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희생자 추모제를 열고 있다. 문재원 기자 관동대지진 101주년을 맞은 1일 조선인 학살 희생자 추모제가 서울 서대문구 순국선열 독립관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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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을 괴롭힌 주범은 ‘가짜뉴스’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을 괴롭힌 주범은 ‘가짜뉴스’
2023. 08. 13 16:40문화
..., 학살 부정의 진상>(이규수 옮김, 삼인)에서 이 논문을 주요하게 다룬다. 1980년대 후반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의 방화, 강도, 독 살포 등이 유언비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는데도, 가짜뉴스 활용은...
관동대지진가짜뉴스일본검사장도부인한유언비어
일본인이 쓴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다룬 책 파문
2014. 07. 11 19:49국제
일본인들이 1923년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에게 자행한 학살을 다룬 책이 일본 사회에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리랜서 저술가인 가토 나오키(47)가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을 소재로 지난 3월 펴낸 ...

주간경향(총 1 건 검색)

[사람의 길]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진상 규명을 위하여(2008. 09. 25)
2008. 09. 25 문화/과학
기억하지 않은 역사는 되풀이된다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을 학살하는 자경단.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도쿄, 카나가와, 치바, 사이타마, 시즈오카, 야마나시, 이바라키의 1부 6현에 강도 7.9의 대진재가 일어났다. 화재도 일어나 사망자 9만9331명, 행방불명 4만3476명, 가옥 전괴 12만8266호, 반괴 12만6233호, 소실 44만7128호에 달했다. 극도로 혼란해진 정국을 안정시키려는 목적으로 일본 정부는 9월 2일 제국헌법 8조가 정하는 긴급칙령에 의해 계엄령을 선포했다. 지진과 화재가 일어나는 와중에 약탈과 방화, 우물에 독극물을 넣는 등의 불령스러운 행동을 하는 자들이 있어 재난을 당한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목이었지만 이것은 일본 정부의 매우 치밀한 계획 속에 펼쳐지게 될 대학살의 지침이었다. -2007년 9월 1일, 대한민국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유기홍 의원 기자회견 중에서 1923년 일본 정부는 관동지방에서 일어난 대지진 당시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를 유포하여 재일조선인 6661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일본 정부는 두 가지 사실을 몹시 두려워했다. 그것은 조선에서 일어난 3·1운동의 영향과 그후 조선을 넘어 중국·일본으로 번져가는 조선인의 해방운동이었으며, 또 하나는 재일조선인 사회주의자 및 노동자가 일본 사회주의자 및 노동자와 연대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일본 정부는 대지진의 혼란 속에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하여 계엄령을 포고한 결과, 군대와 경찰뿐 아니라 민족적 편견을 가진 일본 민중들이 자경단을 조직해 조선인 학살에 합세했다. 그러나 조선인 폭동은 없었다. 그런데도 일본은 조선인 학살의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고 그 흔적을 없애기 위한 작업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피해 당사자인 조선인들에게 학살의 원인 제공자로 누명을 씌웠다. 한편, 한국 정부는 해방 후 63년이 지나도록 일본 정부를 향해 재일동포의 인권유린과 학살에 대한 그 어떤 진상조사 요구도 하지 않았다. 지난 9월 7일, 서울 향린교회에서는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사건 85주년을 맞아 1923년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한·일·재일 시민연대(공동대표: 강덕상, 야마다 쇼지, 서굉일) 주최로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추도식을 열었다. 8월 9일, 재일본 한국YMCA에서 있은 ‘동대진재 85주년 조선인 희생자 추도 심포지엄’에 이어 올 들어 두 번째로 열리는 추도행사였다. 이날 추도식에는 관동대지진 다큐멘터리 ‘아아! 관동대진재(SBS 제작)’ 상영에 이어 추도 예배가 있었지만, 원래 계획한 유가족의 증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재 목포에 살고 있으면서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에 있던 일가친척 5명 중 4명을 잃은 김대원(82)씨가 증언을 약속했으나 고령에다 건강이 좋지 않아 끝내 상경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왼쪽 _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 경찰 및 자경단의 조선인 학살. 오른쪽 _ 일본 치안당국은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를 만들어 각 신문사로 보냈다. 시민연대의 한국상임대표로 있는 아힘나운동본부 김종수(45) 목사의 아쉬움은 컸다. 그가 관동대지진 문제를 처음 접한 것은 작년 아힘나(아이들의 힘으로 만들어가는 나라, 뉴스메이커 780호)의 일본 교류 캠프 때였다. 당시 아힘나는 일본에서 여러 가지 학습활동을 펼쳤는데, 그 중 재일한국인의 역사를 아이들이 직접 조사하기로 한 것을 계기로 ‘관동대지진사건’에 대한 생생한 증언과 사진, 고려박물관의 패널들을 접하게 되면서 그는 큰 충격과 함께 심한 분노에 휩싸였다. 그동안 이런 사실을 역사에 묻어놓고 왔던 데 대한 죄책감도 일었다. 그는 이 사건의 진실을 제대로 규명하고 또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은 이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특별법안을 만들고, 국제적인 조사 작업에 착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힘을 쏟은 결과, 2007년 9월에는 대한민국 국회 유기홍 의원의 기자회견이 있었고, 그해 11월 7일, 일본 도쿄에서 마침내 한·일·재일 시민연대가 출범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진상규명을 위한 자료와 증언이 절실했다. 그런 가운데 김대원씨와 만남은 마치 예정해놓은 어떤 길과도 같았다. 1년 전쯤, 시모노세키에 사는 평화운동가 쿠와노 야스오는 김 목사가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인 조건치(재일동포 2세)씨를 소개해주었다. 야스오는 작년 국회 행사 때 조씨와 함께 직접 한국으로 왔다. 조씨는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그에게 관동대지진 문제는 유가족을 만나야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며, 자신이 유가족 한 분을 알고 있으니 찾아가 보라고 연락처를 주었다. 그 사람이 바로 김대원씨였다. 그는 연락처를 받고 몇 차례 전화 통화를 시도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아 옛 주소려니 생각하고 한동안 연락을 접고 있었다. 그러다가 8월 9일 일본 도쿄에서 열리는 심포지엄을 앞두고 혹시나 싶어 연락을 취했는데 용케도 연결이 되었다. 처음 연락했을 당시엔 몸이 많이 편찮아 병원을 오고갔던 모양이어서 제대로 연결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연락이 닿은 후 김 목사는 7월 말께 김씨를 만나러 목포로 달려갔다. 김씨는 관동대지진 때 일본에 있던 일가친척 중 유일하게 살아 돌아온 큰아버지뻘 되는 고(故) 김동진씨에게서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뒤엔 내가 이 일은 나 혼자만이라도 해야 쓰겄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뭐냐, 그러면 돌아가신 양반들의 영을 위해서 너무 불쌍하잖아. 창으로 찔러서 죽이고 톱으로 썰어서 죽이고 이런 짓거리를 했단 말입니다. 그 사람들이 사람들을 그렇게 죽였어. …일본말로 말하면 가라묘시벤인지, 그렁께 헛묘여. 그러고서 옷을 묻어주고, 무엇을 묻어주고. 고향에 헛묘를 만들어서 관동대지진 때 돌아가신 양반들, 유족들 한번 나와 봐라. 우리 요런 일이라도 한번 해보자. 그런데 나오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어. 하도 오래 되어서. 그래서 우리 집안 사람들이라도, 내가 위해서라도 해야 쓰겄다. …그 당시에 내가 이것을 하나 뜯었어(뗐어). 이것이 구호적부입니다. 옛날에 말하던 호적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나오지만, 호적보가 대적보라고 하는 것인데, 여기를 쭉 봤어요. 쭈욱 보니깐 대정이라고 써있네. 대정 몇 년, 그렇게 써졌지요? 아사쿠사구. 이 사람들이 이만저만해서 어떻게 어떻게 해서 죽었다. 요것이 근거란 말입니다. 왼쪽 _ 향린교회에서 열린 추도식. 가운데 _ 목포에서 김대원씨를 만나 대담하는 김종수 목사. 오른쪽 _ 김대원씨와 다카하시 신코 대표. 조건치씨와 김대원씨의 관계는 이랬다. 김씨가 관동대지진 문제를 풀기 위해 일본을 오고 가면서 알게 된 재일동포 2세인 조씨를 양자로 삼았던 모양이다. 조씨는 태평양유족회와 관계도 있었는데, 관동대지진 문제에 대해 태평양유족회에서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주기를 희망했고, 일본에서도 나름대로 문제를 풀어보려고 노력했으나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문제를 푸는 데 한계를 느낀 조씨는 양자관계를 정리하고 이 문제를 잊고 지낸 지 약 5년 후에 친구 야스오한테서 아힘나에서 관동대진재 조선인 학살 진상 규명 문제로 노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으로 온 것이다. 김대원씨는 그동안 돌아가신 어르신들의 억울한 원혼을 풀어드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고 한다. 해방 후 박정희 정권에서는 말도 못하고 지내왔지만,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자 그래도 한줄기 희망을 가졌던 모양이다. 그런데 박지원 비서실장을 통해 진상 규명을 요청했지만 형식적인 대답뿐, 이렇다 할 정부의 조치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고 한다. 참여정부 들어서도 이런저런 노력을 기울이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몸져누웠다가 최근에야 겨우 기운을 차렸다는 것이다. 김 목사는 추도식을 마친 후 김대원씨를 만나러 다시 목포로 내려갔다. 시민연대의 활동 소식을 듣고 그렇게 기뻐할 수가 없었는데…. 추도식 때의 증언에 대해서도 평생의 한을 푸는 것 같다며 학수고대하지 않았던가. 이번 목포행에는 김 목사가 일본에서 관동대지진 문제를 처음 접하는 자리를 마련해주었던 일본 시민단체 아시아하우스의 다카하시 신코 대표가 동행했다. 목포로 내려가는 마음이 그렇게 무거운 것만은 아니었다. 이제 실마리는 찾았으니 그나마 희망은 있지 않은가. 게다가 김씨의 소개로 전남 신안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유족들을 인터뷰할 계획까지 세워두었다. 학살 사건 이후에 일본에서 헌병이 와서 200원을 주었고, 김씨는 그 돈으로 땅을 사서 지금도 농사를 짓고 있다는 증언도 들었다. 일본 헌병이 와서 한국의 유가족을 찾아 위로금을 주었다 하면 당시 그 유가족 명단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고, 그 문서를 찾으면 중요한 단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그조차 없다 하더라도 결코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기억하지 않은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역사적 교훈이 아니더라도,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인권을 지켜주지 못하는 사회는 살아있는 자들의 인권 역시 지켜줄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람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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