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631 건 검색)
-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삶, 뮤지컬로 되살아난다...‘나의 대통령’ 12월 첫 무대
- 2024. 11. 29 14:25문화
- ... 이술아 음악감독, 최병규 안무가가 참여하며 각 분야의 실력파 제작진이 합심해 완성도를 높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 역은 배우 안덕용이 맡아 카리스마와 인간미를 동시에 보여줄 예정이며 이희호 여사 역은...
- [서울25]마포구 ‘김대중길’ 오는 20일 명명식
- 2024. 11. 18 11:20지역
- ... 대통령의 업적을 널리 알리고 기억하기 위해 김대중길을 명명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마포구는 김대중길 바닥에 바탕색을 칠하고 ‘김대중길’이라는 문구를 쓴다고 했다. 김대중길 구간 곳곳에는...
- 서울25
- 심재철 전 의원, ‘김대중 내란음모 허위자백 보도’ 손배소···대법 패소 확정
- 2024. 11. 07 12:00사회
- ... 믿을 상당한 이유 있다” 심재철 전 국민의힘 의원. 연합뉴스 심재철 전 국민의힘 의원이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당시 자신이 거짓 자백을 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쓴 언론사와 기자들을 상대로...
- 오세훈, 김대중 동교동 사저 문화재 지정에 “긍정적 검토”
- 2024. 10. 15 15:47지역
- ... 질의에 답변하던 중 웃고 있다. 정효진 기자 오세훈 서울시장이 서울 마포구 동교동에 위치한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사저를 문화재로 지정하고 기념공간으로 조성하는 데 대해 “마을을 열고 긍정적으로...
- 동교동사저문화재긍정적김대중
스포츠경향(총 79 건 검색)
- ‘THE 맛녀석’ 박정희·김대중 전 대통령 즐겨 찾던 맛집 방문···100년 식당 특집
- 2024. 11. 01 19:23 연예
- IHQ ‘THE 맛있는 녀석들’이 맛의 유산을 찾아 먹방을 펼친다. 1일 오후 8시에 방송되는 코미디TV ‘THE 맛있는 녀석들’에서는 100년 식당 특집으로 85년간 손맛을 지켜온 곰탕집과 96년 역사를 가진 원조 바싹불고기 맛집을 방문한다. 첫 번째 식당 곰탕집은 박정희, 김대중 전 대통령도 즐겨 찾던 곳으로 김준현도 “자다가 눈뜨면 먹으러 갔었다”라며 맛집이라고 소개한다. 국물을 맛본 문세윤, 황제성, 김해준은 “적당히 짭조름하면서 구수하다”, “맑은데 깊다”, “고깃국의 담백함을 넘어 달달함이 있다”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이어 각각 곰탕 세 그릇을 연이어 들이켰고 수육도 대자를 재 주문하는 등 만족스러운 먹방을 선보인다. 음식 접시들도 설거지가 필요 없을 정도로 싹싹 긁어먹어 폭소를 자아냈다는 후문. 두 번째 방문한 바싹불고기집도 4대째 이어오고 있는 곳으로 다양한 남도음식 먹방이 펼쳐진다. 김준현은 “톰 크루즈가 방문했던 곳이다. 이 맛 때문에 망명까지 생각했다”라고 소개해 웃음을 안긴다. 식당 입구에 도착한 멤버들은 옛날 화폐와 추억의 음료, 소주병, 카세트 등을 구경하며 100년 역사의 흔적들을 확인한다. 바싹불고기를 맛본 김준현은 “맛있게 잘 구워진 숯불 돼지갈비 같다”라는 소감을 남겼고 김해준은 “씹을 때마다 육즙이 국물처럼 나온다”라며 놀라워한다. 바싹불고기 두 접시를 먼저 주문한 멤버들은 밥 위에 이불을 덮듯 푸짐한 한 숟가락으로 먹방을 선보였고 촬영 5분도 지나지 않아 접시를 깨끗하게 비운다. 김준현은 “너무 맛있어서 이 집도 녹화가 조금 일찍 끝날 것 같다”라며 “같은 형태로 600번도 먹을 수 있다”고 말해 웃음을 안긴다. 김준현, 문세윤, 황제성, 김해준 ‘THE 맛녀석’ 멤버들이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곰탕과 바싹불고기 먹방은 오후 8시 코미디TV에서 방송된다.
- ‘길위에 김대중’ 11월 일본으로 상륙
- 2024. 10. 30 08:46 연예
- ‘길위에 김대중’ 일본판 포스터. 명필름 ·시네마6411 제공 연내 완성을 목표로 국민과 함께 제작을 진행하고 있는 영화 ‘대통령 김대중’의 전작 ‘길위에 김대중’이 일본에서 11월 1일 개봉한다. 11월 1일 도쿄를 시작으로 11월 23일 오사카, 11월 29일 후쿠오카, 교토, 12월 고베, 2025년 1월 요코하마에서의 개봉이 확정되었다. 현재는 도쿄 POLE POLE HIGASHINAKANO, 오사카 Dainanageijutu-Gekijo, 후쿠오카 KBC Cinema, 교토 kyoto Cinema, 고베 Motomachi-Eigakan 등의 상영관이 정해져 있으며, 3월까지 일본 전 지역으로 상영을 확대해 개봉관이 20~25관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일본 개봉을 기념해 11월 1일 영화의 연출을 맡은 민환기 감독의 온라인 GV가 열리고, 2일에는 80년대 서울 특파원의 토크와 3일, 한국영화로 보는 한국현대사 토크가 진행된다. 23일에는 ‘김대중 자서전’의 일본어 번역가이자 아사히신문 서울지국장을 지낸 기자의 GV 등 다양한 행사를 예정하고 있다. ‘길위에 김대중’의 일본 개봉을 추진한 일본 영화사 씨네콰논의 이봉우 대표는 “2002년, 1973년 도쿄에서 납치된 김대중 전 대통령 사건을 다뤘던 <KT>(사카모토 준지 감독)를 제작하기도 해서,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면서 “그런 분의 다큐멘터리 영화이기에 꼭 일본에서도 소개하고 싶었다”며 ‘길위에 김대중’의 일본 개봉에 대한 소회를 전했다. ‘길위에 김대중’ 후속작 ‘대통령 김대중’은 네 번의 도전 끝에 1997년, 마침내 대한민국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뤄낸 김대중 대통령과 국민들의 드라마틱한 여정을 그리며 김대중의 삶을 통해 대한민국 현대사의 주요 변곡점을 다룬다. 영화의 연출은 KBS 광복 50주년 다큐멘터리 ‘길’, MBC 특별기획 ‘평양으로 간 의사들’ 등 한반도 평화 이슈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온 정성훈 감독이 맡았다.
- 한강 노벨상 알리며 김대중 대통령 비하댓글 내보낸 SBS 결국 사과
- 2024. 10. 11 16:59 연예
- SBS가 소설가 한강의 노벨 문학상을 보도하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수상한 노벨 평화상 비하하는 댓글을 자료화면으로 쓴 것에 대해 사과입장을 냈다. SBS 방송화면 SBS가 소설가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을 전하며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을 비하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댓글을 방송으로 내보낸 것이 대해 사과했다. SBS는 11일 입장을 내고 “급하게 특보를 준비하면서 영상 검수에 소홀함이 있었다”며 “문제를 인지한 후 해당 영상을 삭제했고 보도국 내에서 엄중조치했다”고 밝혔다. SBS는 지난 10일 ‘뉴스특보’에서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을 알리면서 자료 화면으로 ‘노벨 병화상과 비교불가, 문학의 최고 존엄 짱’이라는 댓글을 내보냈다. 이를 두고 일부 누리꾼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을 비하하는 것이냐’는 취지의 항의가 이어졌고 SBS 또한 이를 인지하고 해당 영상을 비공개로 전환했다. SBS의 이번 입장은 해당 영상에 대한 사과 입장인 것이다. 스웨덴 한림원은 지난 10일 한강을 202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한국인이 노벨상을 받은 것은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은 두 번째다. 앤더스 올슨 노벨문학상 위원회 위원장은 성명에서 “그녀는 육체와 영혼, 산 자와 죽은 자 간의 연결에 대해 독특한 인식을 갖고 있고, 시적이고 실험적인 스타일로 현대 산문의 혁신가가 됐다”고 평했다.
- “쟤들도 똑같다” 쯔양에 故김대중 얼굴 합성해 조롱…가세연 과거?
- 2024. 07. 12 08:45 연예
- 과거 가세연이 올린 영상의 썸네일.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유튜버 가로세로연구소(가세연)가 과거 쯔양이 은퇴를 번복하자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얼굴을 합성한 썸네일을 제작해 올렸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2020년 11월 20일 가세연의 공식 채널에는 ‘먹방 쯔되중 은퇴 번복!’이라는 제목의 영상이 올라왔다. 해당 영상은 같은 날 쯔양이 은퇴 선언 3개월만에 복귀를 하자 이를 비꼬기 위해 만들었다. 문제는 썸네일에 쯔양과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얼굴을 합성했다는 점이다. 이는 과거 김 전 대통령의 은퇴 번복을 빗대 조롱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 전 대통령은 1992년 12월 14대 대선에 패배하면서 정계 은퇴를 했다가 2년 7개월 만인 1994년 7월에 정계 복귀를 고했다. 해당 썸네일 사진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퍼져나갔고 누리꾼들은 과거 가세연의 행태에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다. 누리꾼들은 “쟤들도 똑같은 인간이다”, “렉카 연합 까는 것도 악질 렉카짓의 연장선일 뿐이다”, “쯔양을 돕고 싶은 게 아니라 라이벌 렉카들을 묻고 싶었던 거지” 등의 댓글을 달았다. 쯔양. 방송 캡처 앞서 ‘가세연’은 지난 10일 쯔양이 ‘렉카 연합’으로부터 술집에서 일했다는 과거 등을 빌미로 협박당해 돈을 갈취당했다고 주장했다. 쯔양은 방송에서 대학 휴학 중 만나게 된 전 남자친구 A씨와의 교제 당시를 언급했다. 그는 “(A씨의) 폭력적인 모습을 보고 헤어지려고 했는데, 저 몰래 찍은 불법촬영 동영상을 유포하겠다고 협박했고, 우산 등의 둔기로 폭행하기도 했다”며 “자신이 일하던 술집으로 데려가 ‘앉아서 술만 따르면 된다’며 강제로 일을 하게 했다. 그때 번 돈도 A씨가 모두 빼앗아 갔다”고 주장했다. 이어 “‘일을 그만하겠다’고 얘기하자 다시 폭력을 쓰기 시작해 매일 같이 하루에 두 번씩은 맞았다”며 ‘돈은 어떻게 벌어다 줄거냐’는 협박에 유튜브 방송을 시작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쯔양은 “거의 매일 맞으며 방송했다”며 “방송이 커져서 잘 되기 시작하자 A씨가 소속사를 만들었다. 7(A씨) 대3(쯔양) 비율의 불공정 계약을 맺었지만, 그마저도 지키지 않아 광고 수익도 하나도 받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방송 시작한 지 5년이 됐는데, 그중 4년 동안 매일 같이 이런 일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주간경향(총 23 건 검색)
- [최재천의 책갈피]정치인이 아닌 ‘인간 김대중’(2010. 08. 11 17:41)
- 2010. 08. 11 17:41 문화/과학
- ㆍ김대중자서전1, 2 김대중자서전1, 2 / 김대중 / 삼인 “나는 아버지 장례식장에도 가지 못한 불효자가 되고 말았다. 아버지는 나를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시다 돌아가셨을까.” “하의도 동쪽 기슭 / 일제히 뒤집어지는 풀섶에서 / 흑염소들이 고개를 돌리고 바라보네 / 먹구름 밀어내는 은박(銀箔)의 바다를(황지우)”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다시 우리 곁을 찾아왔다. 자서전이다. 황망히 떠나느라 미처 남기지 못한 말들이 있었다. “나보다 먼저 세상을 뜬 사람도 있지만 나와 동시대를 호흡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이 진정 고맙다. 나 때문에 고통을 받고, 다치거나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많은 사람들을 울렸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눈물을 제대로 닦아 주지 못했다. 그들에게 진정 용서를 구하고 싶다.” 삶과 죽음 앞에서 우리처럼 나약하고, 우리처럼 슬퍼했던 그저 한 사람으로서, 김대중의 자서다. 대통령의 첫아이는 딸이었다. 그런데 첫아들을 얻자마자 홀연 세상을 떠났다. “아이를 차마 묻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때 친구가 소식을 듣고 지프차를 몰고 찾아왔다. 차에 죽은 아이를 싣고 산으로 향했다. 관이 너무 작았다. 그는 나를 한사코 따라오지 못하게 했다. 친구는 혼자서 딸을 묻고 돌아왔다. 지금도 그 아이를 떠올리면 아프다. 내게도, 생각하면 아려오는, 딸이 있었다. 이름은 소희였다.” “아내는 자주 가슴앓이를 했다. 그날도 가슴앓이가 심해 약을 먹었는데 그것이 어찌 잘못되었는지 혼수상태에 빠졌다. 의사와 함께 집에 오자 아내는 숨져 있었다. 병이 났어도 제대로 치료 한번 받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갔다. 나는 통곡했다.” 아내를 묻고 난 뒤, 두 아들의 손을 잡고 남산에 올라갔다.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어머니는 좋은 분이셨다. 너희도 알 것이다. 그런 어머니를 잊어서는 안 된다. 어머니는 저세상에서 너희들을 지켜보고 계신다.” 어린 자식들은 말이 없었다. “돌아서서 나는 또 울었다. 잔인한 세월이었다.” 5·16 혁명 직후 또 다른 불행이 찾아왔다. 누이동생은 이화여대 재학 중에 쓰러졌다. 병명은 심장판막증이었다.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동생의 죽음을 지켜보며 내가 한 일이라고는 눈물을 뿌리는 것뿐이었다. 내 무능을 원망하며 가슴을 쳤다. 정치로 나선 것이 그렇게 후회되었다. 나는 가난한 가장이었다. 동생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다. 암담한 정치 현실을 개탄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했기에, 내 한 몸 추스르기도 힘이 들었던 것이다. 누이동생 묘 앞에 서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회한이 밀려온다. 동생의 죽음 앞에 지금도 아무 할 말이 없다.” 1972년 5월, 이번엔 어머니 차례였다. 둘째 부인으로 회한의 삶을 살아온 어머니였다. 그 어머니에게 대통령은 “효도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선거에서 늘 떨어졌다. 감옥에 갇히고, 죽을 고비도 두 번이나 넘겼다. 이는 어찌 됐건 불효였다. 어머니는 늘 놀란 가슴으로 사셔야 했다.” 1974년 2월, 하의도에서 비보가 날아들었다. “연금 중이라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도 문병 한 번 못 드렸는데 끝내 돌아가셨다. 나는 아버지 장례식장에도 가지 못한 불효자가 되고 말았다. 천추의 한이고, 그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천근만근이다. 아버지는 나를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시다 돌아가셨을까.” 그럼에도 ‘사람’ 김대중은 결코 좌절하지 않고 역사와 국민을 믿었다. 첫 남북정상회담, 첫 노벨평화상 수상 등 대통령의 공생애(公生涯)는 이미 역사가 됐고, 일생은 위인의 반열에 올랐다. 그래서 이번엔 ‘사람’ 김대중을 얘기하고 싶었다. ‘사족’이란 단어의 용처를 알겠다. 대통령은 재임기간 중 재심신청을 하지 않았다. 사법부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어서였다. 2004년 1월,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재심재판이 있었다. “재심 공판에는 최재천 변호사가 시종 수고했다. 그의 논지는 매우 명쾌했다(2권 536쪽).” 최재천cjc4u@naver.com
- 최재천의 책갈피
- [독자댓글]856호 “김대중·노무현 이후의 리더십은” 外를 읽고(2009. 12. 30 15:53)
- 2009. 12. 30 15:53 사회
- “김대중·노무현 이후의 리더십은”을 읽고 기사에서 언급한 것처럼 시대에 맞는 대통령이 필요하다. 진보와 보수의 잣대로 편을 가르기보다는 시대를 이끌어갈 인물을 선택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다음 대통령은 갈라진 국민여론을 통합할 수 있고, 밑부터 감싸 안을 수 있는 리더십을 지닌 인물이 돼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그런 인물이 딱히 보이지 않아서 안타깝다. _ 다음 이놈 “서울시 홍보비 절반 이하로 깎겠다”를 읽고 원희룡 의원이 한 말에 상당 부분 동의는 한다. 문제는 선거시즌이 되니깐 이런 말을 쏟아낸다는 것이다. 살림살이, 꾸준히 어려웠다. 홍보비로 돈 새는 것, 상당히 오래됐다. 용산참사 1년이 됐다. 그동안 원 의원은 뭐 했나? 지켜만 보고 있지 않았는가? 시장 한 번 하겠다고 이제 와서 비판만 쏟아내는 모습이 안타깝다. 시장 자리에 연연하지 말고 국회의원으로서 먼저 나서라. 그런 모습 보인다면 지지하겠다. _ 다음 라라라 “광장은 2009년을 어떻게 기억할까”를 읽고 광장의 1년 사진을 보니 2009년 대한민국이 그대로 보이네요. 소통의 공간이 아닌 일방적인 의사표현 또는 이를 막는 공권력만 넘치는 공간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_ 다음 와따리가따리 “‘정치인 봉변’ 1위는 일본 지도자”를 읽고 언론을 장악한 베를루스코니는 그동안 온갖 스캔들 속에서도 “국민이 나를 지지한다”며 배짱을 부렸다…. 우리나라랑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뿐인가. _ 다음 xenatoss “중앙대 개혁 지켜봐 주십시오” 를 읽고 이사장님이 직접 편지를 쓰셨다는 부분은 참 인상적이네요. 글을 봐도 개혁에 대한 자신감이 대단한 것 같네요. 하지만 이사장과 대기업의 의도한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것에 대한 비판에 귀를 좀 기울여야 할 것 같아요. 대학의 주인은 기업이나 이사장이 아니라 학생입니다. 그리고 대학은 사업체가 아니라 학문의 장입니다. _ 다음 갈매기 “한식 세계화, 인삼 반찬부터 시작을”을 읽고 한식 세계화의 문제점에 대한 이야기가 부족한 것 같아 아쉽다. 정부가 앞장선 한식 세계화 바람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한식 세계화 때문에 한국음식학과도 생기고 이벤트, 사업 등이 벌어지지만 모두 일회성 쇼로 보인다. 조리사가 직접 나가서 활로를 뚫고 음식을 개발해야지 손에 물도 안 묻힌 사람들이 나서서 세계화를 외치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 밑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도록 지원을 충분히 해 주는 방식으로 가야 하지 않나? 그래야 진정한 세계화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듯. _ 네이버 sam****
- 독자의 소리
- [커버스토리]김대중·노무현은 우리에게 뭘 남겼나(2009. 12. 24 10:30)
- 2009. 12. 24 10:30 사회
- ㆍWeekly경향 선정 2009년 올해의 인물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의 서거는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5월 29일 노 전 대통령의 국민장 영결식이 열린 시청 앞 서울광장을 추모 시민들이 가득 메우고 있다. <서성일 기자> <Weekly경향>이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데는 그리 긴 토론이 필요치 않았다. 두 사람의 죽음은 하나의 시대가 완결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상징하는 가치나 이들 집권 기간 10년의 성격은 아직 다 규명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작업은 이제부터 시작일 것이다. 두 전직 대통령 서거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에게 남긴 숙제는 무엇일까. 후대의 역사는 두 사람의 삶과 행적을 어떤 관점에서 기록할까. <편집자주>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다.”(노무현)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김대중)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의 서거 후 널리 인용된 말이다. 5월과 8월 서울시청 앞 광장을 메웠던 수십만의 인파. 외형적으로는 잠잠해 보인다. 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두 분의 서거가 너무 충격적이었다. 지난 여름 광화문에는 못 갔지만 동네에 만들어진 분향소에서 분향했다. 박정희 시절을 경험해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내가 자라온 지난 10년과 비교했을 때 우리사회가 후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려된다.” 지난 12월 17일 서강대에서 열린 노 전 대통령의 유고집 <진보의 미래>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박태준(17)·우재하(18)·최민재(18)군이 입을 모았다. 이들은 올해 수능시험을 치른 고3 학생들이다. 자원봉사자로 이날 행사에 참여한 김성례씨(전업주부·43)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지만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끊이지 않는 두 전직 대통령 추모 이명박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가 끝난 11월 28일 새벽. 인터넷 게시판에는 또 다른 ‘국민과의 대화’가 주목을 받고 있었다. 또 다른 ‘국민과의 대화’ 주인공은 노 전 대통령이다. 누리꾼들은 “지우지 말아 달라” “스크랩해 놓고 울적할 때마다 다시 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두 전직 대통령의 인기는 여전하다. 포털이 개설한 추모사이트도 마찬가지다. 포털 메인페이지에서 이들 추모게시판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그러나 누리꾼의 추모 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다시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어진다. 그 핵심은 이들이 삶 속에서 보여 준 인권과 민주주의를 향한 일관된 의지와 실천이다. 김 전 대통령의 정치 역정은 그 자체가 대한민국 민주주의 투쟁의 역사다. 노 전 대통령 역시 변호사로서 안정된 삶을 누릴 것을 포기하고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온몸을 내던졌다. 공통점은 또 있다. 시사평론가 김종배씨는 “반세기 동안 굳건하게 버텨 온 주류사회와 기득권의 카르텔을 깼다는 것”을 두 사람의 공통점으로 꼽았다. ‘지역주의 극복’을 화두로 삼았다는 것도 두 사람의 공통점이다. 김 전 대통령은 그 자신이 지역주의의 피해자였다. 정치평론가 고성국 박사는 “그가 대통령이 됐다는 것 자체가 지역적 소수파인 호남에 대한 지역주의 해소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라고 평가했다. 노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노 전 대통령은 영남의 정치적 다수파인 김영삼에 의해 발탁됐지만 3당 합당을 반대하고 영남 지역의 정치적 소수파를 자임하며 지역주의라는 거대한 벽에 맞서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고 박사는 “지금 논란이 되는 행정수도 이전 문제도 단지 정략적인 선택이 아닌 지역주의를 극복하고 지역담합 구조를 돌파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을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신자유주의 정권 규정 정당한가 두 전직 대통령의 집권 시기 노선과 정책에 대한 성격 규명은 아직 논란의 대상이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비록 IMF 환란이라는 한계 때문에 원래 생각했던 개혁을 다 펼 수는 없었지만 김대중 정부는 비교적 준비된 정부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외환 위기 극복이나 남북 화해 공존, 국가인권위원회로 대표되는 사회민주화뿐만 아니라 국민생활기초보장법과 같은 복지 기틀은 이미 국민의 정부 시절에 마련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그러나 이어 집권한 노무현 정부는 탈 권위주의 정치 문화를 만들어 낸 것은 업적이지만 실질민주주의, 경제민주화에 대한 준비는 부족했다고 평가했다. 이를테면 ‘비전2030’과 같은 사회복지 정책을 정권 후반기가 아닌 인수위 시절부터 정립해 일관되게 추진했다면 나중의 결과는 상당히 달랐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김 교수는 “2004년에 탄핵 사태를 겪고 복귀했을 때 4대개혁 입법도 중요했지만 복지정책에 드라이브를 걸었어야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집권 후반기에 제기한 개헌 문제나 2차 남북정상회담도 더 일찍 했더라면 지금처럼 사문화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2009년, 대한민국은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이 한꺼번에 세상을 떠나는 유례없는 사건을 경험했다. 지난 8월 시민들이 김대중 전 대통령 분향소에 마련된 ‘추모의 벽’에 글을 적고 있다. <김창길 기자> 신자유주의 논란도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진보 진영의 일각에서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노선과 정책에서 핵심이 신자유주의였다고 주장한다. 두 정권 시절 기틀이 형성된 사회 양극화나 준비 없는 시장 개방이 오늘날 청년실업과 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 노동 위기를 불러왔다는 시각이다. 현 집권 세력이 규정한 ‘잃어버린 10년’이 서민들에게 먹힐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현실의 반영이라는 설명이다. 고성국 박사는 “신자유주의라는 척도를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데는 동의하기 어렵다”라고 말한다. IMF 환란 시기에 IMF가 요구하는 경제개혁 조치 자체가 신자유주의적 경향성을 가하게 보였기 때문에 불가피한 측면은 있었지만 김대중 자신이 신자유주의자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작은 정부, 큰 시장’을 기본 입장으로 하고 있다. 사회안전망 확충이나 미래성장 사업에 대한 국가의 적극 개입을 정책 기조로 한 국민의 정부의 노선과 정책을 과연 신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는가.” 참여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 “신자유주의 좌파” 등의 발언이 있었지만 ‘2030비전’ 등 핵심 정책은 신자유주의와는 대척점에 서 있는 케인스주의적 성격이 뚜렷했다는 것이다. 이병천 강원대 경제학과 교수는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여러 척도 가운데 신자유주의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진보 개념이 협소해질 수밖에 없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오늘날 진보도 시장경제나 효율성·경쟁력을 무시할 수 없다”면서 “특히 보수가 깔아놓은 멍석 위에서 보수의 주제를 가지고 논쟁할 수밖에 없는 것이 한국사회의 특수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정권에 참여한 인사들은 더욱 적극적이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을 “보수의 나라에서 진보를 추구하는 지도자였다”라고 말했다. 이해찬 전 총리는 “지난 210년의 역사에서 유례없던 10년”이라고 규정했다. 개혁을 부르짖던 정조대왕이 1800년 사망한 이후 210년의 대한민국 역사 가운데 두 정권 10년 만이 유일하게 진보개혁이 집권한 예외적 시기라는 것이다. 나머지 200년은 수구기득권 세력이나 외세, 독재가 지배한 시기라는 주장이다.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은 좀 더 적극적으로 두 대통령의 노선과 정책이 ‘새로운 진보’라고 주장했다. “김대중 시대의 민주주의 시장경제, 햇볕정책, 중기재정계획, 인권위 설립 등 정책이 참여정부의 동반성장,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 지역균형발전전략, 비전2030, 과거사위원회 정책을 낳았다.” 김종배씨는 두 전직 대통령으로 상징되는 가치는 아직 본격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2007년 대선 이후 평가와 대안을 모색하는 진중한 자리가 있어야 하는데 연달아 터진 촛불시위와 서거 정국으로 본격적인 평가 작업이 미뤄져 왔다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의 유고집 <진보의 미래> 출판기념식에 참석한 한상진 서울대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이 남긴 개념 가운데 ‘지구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있다”면서 “한반도에서 민주화의 경험이 세계를 향해 보편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돌아보는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김대중·노무현은 진보였나 두 전직 대통령이 남긴 영향력은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김호기 교수는 “광복 이후 돌이켜봤을 때 1987년 이후를 민주화 1단계로 꼽을 수 있다. 이 국면을 주도한 민주화세력의 리더를 꼽는다면 당연히 김대중과 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그렇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의 서거가 우리 사회에 던진 충격은 지대할 수밖에 없었고, 동시에 현재 민주화세력 가운데 이들을 잇는 리더십이 취약하기 때문에 더욱이 두 사람이 자신의 삶과 재임 당시 보여준 가치나 의미가 두드러져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노 전 대통령은 유고집 <진보의 미래>를 통해 자신의 삶과 지난 두 정부를 돌이켜보면서 다음과 같은 여덟 가지 질문을 던졌다. ‘우리 아이들은 행복할 것인가’ ‘한국 민주주의 어디까지 왔나’ ‘보수·진보란 무엇인가’ ‘김대중과 노무현은 진보인가’ ‘세계는 진보의 시대로 가는가’ ‘보편적 세계시민은 가능한가’ ‘우리의 삶은 지속 가능한가’ ‘역사를 이끄는 주체는 영웅인가 시민인가’. 앞으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개척해야 할 사람들에게 노 전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남겨준 묵직한 화두이자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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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버스토리]김대중·노무현 이후의 리더십은(2009. 12. 24 10:29)
- 2009. 12. 24 10:29 정치
- ㆍ두 대통령 이을 지도자는 누구… 비전 제시보다 비전 공유가 더 중요 왼쪽 위부터 _ 손학규 전 대표 | 서성일 기자, 정동영 의원 | 우철훈 기자, 유시민 전 장관 | 김문석 기자, 김문수 지사 | 경향신문 자료, 원희룡 의원 | 우철훈 기자.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은 현대 정치사에서 한 획을 그은 인물들이었다. 앞으로 김·노 전 대통령 같은 정치 지도자가 다시 나올 수 있을까. 정치 전문가들은 김·노 전 대통령의 뒤를 이을 후계자는 역으로 김·노 전 대통령의 정치를 답습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김대중’을 요구하는 시대정신이 달랐고 ‘노무현’을 요구하는 시대정신이 달랐듯이 ‘김대중·노무현’ 이후 시대의 지도자는 또 다른 리더십을 요구받기 때문이다. 김헌태 인하대 겸임교수는 “김·노 전 대통령을 맹목적으로 계승하는 것은 차기 지도자감으로 의미가 없다”면서 “‘김대중·노무현’을 극복하는 정치인이 오히려 ‘김대중·노무현’을 계승하는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이전부터 현대 정치사에서 대표적인 정치인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1954년 전남 목포에서 민의원 선거에 출마한 이래 올해 서거하기까지 무려 반세기 이상 현실 정치에 몸담아 왔다. 김 전 대통령은 남북대치와 군사독재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남북의 평화와 민주화를 이끈 지도자다. 이 같은 정치 역정을 통해 그는 다른 정치인들이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카리스마와 대중적 지지 기반을 확보했다. 암울했던 독재와 빈곤 시대의 국민들은 산업화·민주화를 단숨에 달성하기 위해 정당과 국민을 견인할 수 있는 강력한 리더십을 요구한 것. 정치평론가 고성국씨는 “김 전 대통령은 대선을 네 번이나 도전했을 뿐만 아니라 3단계 통일론, 대중경제론 같은 학문적 업적도 뛰어났다”면서 “앞으로 김 전 대통령과 같은 이력의 정치인이 다시 나오기는 힘들 것”이라고 진단했다. 소통과 조정을 통한 협력의 리더십 노 전 대통령은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의 권위를 스스로 없앤 인물이다. 노 전 대통령이 정치 경력에서 김 전 대통령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초라하지만 단기적 성과는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과도기 시대의 역사가 ‘노무현’을 요구한 것. 상대적으로 비주류 소수자였던 그였기에 국민과 정부 간 소통의 발판이 될 수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은 몸을 낮추고 국민과의 소통을 시도함으로써 국민 참여의 시대를 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소통의 수단으로 정치개혁을 시도했다. 공직후보자를 국민과 당원 스스로 직접 뽑도록 시도한 실험(국민참여형 경선제)이 대표적이다. 이렇게 김·노 두 전직 대통령은 시대적 소명을 자기의 것으로 소화시키면서 최고 지도자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면 앞으로의 시대정신은 무엇일까. 또한 국민은 누구를 지도자로 선택할까. 전문가들에 따르면 국민들은 소통과 조정을 통한 협력의 리더십과 경제 마인드를 갖춘 안정감 있는 지도자를 요구할 것으로 보고 있다. 첨예한 양극화 시대에 사회·경제적 정의를 몸소 실천하고, 정치·경제적 불안정 시대에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지도자를 요구하는 것이다. 신율 명지대 교수(정치학)는 “산업사회에서는 정치와 행정의 분리를 통해 능률을 중시했지만 지금과 같은 거버넌스(협치) 시대에는 사회 각 분야의 갈등을 조정하는 조정력이 지도자의 최고 덕목으로 요구된다”고 설명했다. 이런 자질을 갖춘 정치인들은 자연스럽게 오는 2012년에 치러질 대선에 유력한 후보로 떠오를 수 있다. 여야 구분 없이 ‘김대중·노무현’ 이후의 정치 지도자를 뽑는다면 야권에서는 민주당 손학규 전 대표, 무소속 정동영 의원, 국민참여당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과 여권에서는 김문수 경기지사, 한나라당 원희룡 의원 등이 꼽힌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소장은 “지금까지 지도자는 국민 앞에 어떤 비전을 제시하느냐가 중요했지만 앞으로는 비전을 국민과 공유하는 사람이 대통령으로 될 가능성이 높다”면서 “정치지도자의 캐릭터와 국민의 기대심리 및 교집합을 만들어 가는 사람이 국가를 통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민주당 손학규 전 대표는 한나라당 탈당 이후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되는 과정에서 숱한 시행착오를 거쳤지만 야당의 대표 정치인으로의 자리매김에 성공했다. 특히 그는 지난 총선에서 당의 부름을 받고 서울 종로에 뛰어들어 장렬히 ‘전사’했고, 두 번의 재·보선(인천 부평을, 수원 장안)에서 승리를 이끌어냄으로써 인물 경쟁력을 확보했다. 또한 그는 수도권에서 통하는 인물이라는 희소가치도 있다. 손 전 대표는 재야 운동권과 학계를 거쳐 한나라당과 그 전신인 민주자유당 및 신한국당 소속으로 3선 국회의원과 경기도지사를 지냈다. 무소속 정동영 의원은 지난 4월 재·보선 출마와 민주당 탈당 과정에서 많은 상처를 입었지만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여전히 지역적으로는 호남, 정치 성향으로는 중도개혁층의 유권자들이 그를 지지하고 있다. 정 의원은 최근 민주당 복당을 강력히 희망하고 있다. 민주당이라는 링 위에 올라가 차기 주자들인 정세균 대표, 손학규 전 대표 등과 일전을 벌이기 위해서다. 방송기자 출신인 그는 통일부 장관, 열린우리당 의장, 17대 대선 후보를 지냈다. 손학규, 정동영, 김문수, 원희룡 꼽혀 국민참여당 유시민 전 장관도 야권의 차기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분류되고 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경호실장으로 불릴 정도로 노 전 대통령과 정치적 행보를 함께해 왔다. 유 전 장관은 민주당의 아킬레스건을 파고들고 있다. 그는 친노 진영과 영남과 수도권 개혁 진영의 지지를 받고 있다. 국민참여당은 최근 그를 내년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후보로 추천하고 있다. 고원 상지대 교수는 “유 전 장관은 정치적 감수성이나 순발력 면에서는 타고난 경쟁력이 있지만 정치적 일관성 측면에서는 낮은 점수를 받고 있다”고 평가했다. 운동권 출신인 유 전 장관은 시사프로그램 진행자, 개혁국민정당 대표, 열린우리당 의원,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다. 한나라당 소속의 김문수 경기지사도 ‘김대중·노무현’을 이을 차기 지도자로 거론되고 있다. 김 지사는 민심의 척도인 수도권에서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과 행정적 경험을 갖췄다는 것이 플러스다. 민중당 출신인 그는 진보·개혁 성향층과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도 장점이다. 그러나 김 지사의 정치력이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는 일각의 비판도 있다. 그는 민중당 노동위원장, 3선 의원,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장 등을 지냈다. 최근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한 한나라당 원희룡 의원도 국민과 소통할 수 있는 차기 리더로 주목받고 있다. 그는 한나라당 내의 대표적인 개혁 성향 인물이다. 원 의원은 지난 2002년 이회창 총재 체제를 ‘제왕적 체제’라고 비판하는 등 한나라당 내에서 개혁적인 목소리를 내왔다. 제주 출신의 3선인 원 의원은 대입시험과 사법시험을 모두 수석합격해 남은 건 ‘정치 1등’이란 말을 듣곤 한다. 이 밖에 정운찬 총리, 송영길 민주당 최고위원,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등이 다크호스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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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故 김대중 전 대통령과 47년을 함께한 이희호 여사의 내조
- 2009. 09. 04 11:13 화제
- ㆍ“나는 헌신하되 간섭하지 않고, 지배하지 않고, 강요하지 않고, 기다리는 아내였다” 2009년 8월 18일, 대한민국 민주화에 그 누구보다 앞장섰던 거목,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후, 세간의 시선은 홀로 남은 이희호 여사에게로 향했다. 47년 동안 숱한 고난과 역경, 그리고 영광을 김 전 대통령과 함께해온 이희호 여사의 소리 없는 내조를 되돌아봤다. 생애 마지막 선물이 된 ‘벙어리장갑’ 지난 7월 13일 폐렴 증상으로 입원한 김 전 대통령은 폐색전증으로 병이 전이되어 8월 18일 오후 1시 43분경 향년 85세로 서거했다. 사인은 폐렴으로 인한 다발성장기손상과 호흡곤란증후군이었다. 김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후, 이 여사는 한동안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남편이 다시 기적적으로 살아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끝내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이 여사는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자신의 반쪽, 인생의 반려자이자 영원한 민주화 운동의 동지를 잃은 슬픔을 그 누가 가늠할 수 있을까. 올해 87세의 고령으로 기력이 쇠해 있었지만, 이 여사는 주위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김 전 대통령의 빈소를 지켰다. 도저히 몸을 가눌 수 없는 상태였지만, 이 여사는 끝까지 남편의 마지막 가는 길을 곁에서 지키길 원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김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날 때 두 손에 끼고 있던 것은 바로 이희호 여사가 직접 손뜨개로 만든 ‘벙어리장갑’이었다. 7월 말 남편이 병원에 입원한 후부터 체온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틈틈이 곁에서 뜨개질을 해서 만든 장갑이었다. 이희호 여사는 손재주가 좋았던 친정어머니를 닮아 평소에도 옷을 직접 만들어 입거나, 아이들에게 손수 뜨개질한 옷을 입혔다. 김 전 대통령이 1977년 재야인사들과 ‘3·1 민주 구국 선언’을 주도한 혐의로 진주교도소에 수감됐을 당시에도, 이 여사는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탔던 남편을 위해 손수 뜨개질한 조끼와 스웨터, 장갑을 보내기도 했다. 또 1980년 7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청주교도소에 수감된 남편을 위해 장갑을 보냈는데, 이때는 책을 좋아하는 남편이 쉽게 책장을 넘길 수 있도록 손가락 끝이 벌어져 있게 만들어 보냈다. 그와 더불어 남편이 옥중의 추위와 외로운 투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를 항상 기도했다. 그리고 남편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적처럼 감옥에서 나와 이 여사의 곁으로 돌아왔다. 김 전 대통령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이 여사는 다시 한번 기적을 바랐다. 하지만 기적은 또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임종을 앞둔 김 전 대통령은 아내가 만든 벙어리장갑을 낀 채, 눈빛으로 아내에게 이별의 인사를 전했다. 이에 이 여사는 남편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맞대고 “하나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저희에게 보내주세요”라고 울면서 기도했다. 그러나 남편의 임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은 이 여사는 세 아들과 함께 남편에게 “사랑해요”라고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 그가 편하게 눈감을 수 있도록 했다. 측근에 의하면 김 전 대통령의 마지막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평안해 보였다고 한다. 자신의 장갑 낀 손을 놓지 않고 꼭 잡고 있는 아내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서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벙어리장갑’은 고되고 험난했던 그리고 영광스럽고 행복했던 47년을 함께한 남편에게 주는 이 여사의 생애 ‘마지막 선물’이 됐다. “김대중과의 결혼은 모험이었다” 이희호 여사는 1922년 유복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서울 사범대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생활을 마친 뒤 이화여대 강단에 서기도 했던 당대 최고의 엘리트이자 신여성이었다. 평소 사회운동과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아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미래의 유력한 ‘여성 지도자’로 평가받기도 했다. 하지만 1962년 가난한 정치 재수생이었던 김 전 대통령을 만나 결혼을 결심하게 된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차용애 여사와 사별한 후 슬하에 홍일, 홍업 두 아들과 함께 셋방에서 살고 있었다. 이 여사의 주변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그 결혼을 반대하고 나섰다. 당시 이 여사가 소속돼 있었던 YWCA 연합회 회장을 지낸 김갑순씨는 “이희호 여사가 부드러운 성격에 강한 책임감으로 좋은 사회운동가 자질을 타고났는데, 조건이 나쁜 김대중씨와의 결혼으로 여성 지도자로 대성할 재목을 잃는 것이 아닌가 하는 노파심 때문에 결혼을 반대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이희호 여사의 결심은 이미 선 상태였다. 주위 사람들의 걱정 어린 만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여사의 마음은 이미 오래전에 결정이 돼 있었는데, 김 전 대통령은 좀처럼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여사는 워낙 자신의 형편이 어려워 감히 말 꺼내기가 쉽지 않았을 김 전 대통령을 위해 본인이 스스로 결정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그리고 찬 기운이 감도는 어느 날, 파고다공원에서 드디어 김 전 대통령이 이 여사에게 청혼을 했다. 1 이희호 여사의 눈물. 2 1962년 가난한 정치 재수생 김대중과 엘리트 신여성 이희호의 결혼식. 3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81년 청주교도소 수감 당시 이희호 여사가 넣어준 조끼와 지팡이. 4 1980년 군사재판에서 내란 음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청주 교도소에 복역 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을 면회온 부인 이희호 여사(사진 가운데), 장남 홍일(왼쪽), 차남 홍업씨와 만나고 있다. 5 지난해 11월 12일 63빌딩에서 열린 이희호 여사의 자서전 「동행-고난과 영광의 회전무대」의 출판 기념회. 6 15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있는 김대중 대통령과 그의 부인 이희호 여사. “당신도 알고 있듯이 나는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원대한 꿈이 있습니다. 이 땅에 참된 민주주의를 꽃피우고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필요로 하며 나와 아이들을 돌봐주기를 바랍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여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결혼을 회고하면서 “남녀간의 뜨거운 사랑보다 서로가 공유한 꿈에 대한 신뢰가 그와 나를 동여맨 끈이 되었다”고 밝혔다. 이희호 여사는 자서전을 통해 “김대중과 나의 결혼은 모험이었다. 그리고 ‘운명’은 문밖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거세게 노크했다”고 회고했다. 결혼한 지 열흘 만에 남편이 ‘반혁명 혐의’로 구치소에 갇혔기 때문이다. 이 여사의 결혼을 반대하던 사람들은 “그것 봐라, 우리 말을 안 듣더니…”라며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수사 결과는 모두 무혐의. 남편은 한 달여 만에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1971년에는 8대 총선 지원 유세 중이던 남편이 의문의 교통사고로 죽을 고비를 넘겨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고, 1972년에는 유신 계엄령 선포로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1973년에는 ‘동경 납치 살해 미수 사건’으로 가슴을 졸였고, 1980년에는 군사재판에서 남편의 사형선고를 지켜보며 절망했다. 감옥을 내 집 드나들 듯이 하는 남편의 옥살이를 뒷바라지하며, 가족의 생계도 책임져야 했고, 정권의 감시와 도청, 가택연금 등도 견뎌야 했다. 하지만 이 여사는 단 한 번도 불평불만하지 않았고, 오히려 남편의 정치적 활동을 그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홍일·홍업·홍걸 세 아들의 어머니 김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내외에게는 홍일·홍업·홍걸 세 명의 아들이 있다. 이 세 아들은 모두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았다. 이 중 큰아들인 김홍일 전 국회의원은 파킨슨씨병을 앓고 있다. 그는 투병 중으로, 수척해진 모습으로 아버지의 빈소에 나타나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김홍일 전 의원은 휠체어에 의존한 채 힘겹게 김 전 대통령의 빈소에 헌화를 했다. 김 전 의원은 거의 누워서 생활을 해오다가 최근 들어서는 상태가 호전돼 휠체어에 앉아서 생활할 수 있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언어 장애 때문에 말하기가 불편한 상태지만, 김 전 대통령의 임종 직전에는 “아버지”라고 강하고 짧은 한 마디를 내뱉었다고 한다. 김 전 의원은 세 아들 중에 유독 아버지와 정치적 궤를 함께해왔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맞섰던 1971년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고초를 겪는가 하면 1980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등으로 구속되는 등 힘든 시기를 보냈다. 김 전 의원의 파킨슨씨병도 당시의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발병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희호 여사가 큰아들 김홍일을 처음 만났을 때는 중학교 2학년으로 한창 사춘기를 보내고 있었다. 이에 큰 아들 김홍일은 “돌아가신 어머니는 우리 형제들을 데리고 외가나 중국집 나들이를 즐겼고, 새어머니는 영어로 책을 읽거나 신문을 보셨다. 어린 나에겐 이런 것도 괜히 낯설고 불만스러운 것이었다. 어머니께서는 우리의 환심을 얻기 위한 행동은 전혀 하지 않으셨다. 교육자답게 원칙을 지켰고 엄격한 자녀 교육을 하셨다”고 회고했다. 원래 덤덤한 성격의 이 여사는 결혼 후, 애써 아이들에게 잘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대신 가정의 모든 일상사를 아이들과 의논하고 지내면서 점차 한 가정이 되어갔다고 한다. 둘째 아들인 김홍업씨는 맏형과 함께 정치권에 몸을 담으며 아버지를 도왔다. 김 전 대통령 망명 시절엔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설립했고, 광고 이벤트 회사를 운영하면서 선거 홍보 책임을 맡아 아버지의 당선에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셋째 아들인 김홍걸씨는 이희호 여사와 김 전 대통령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이 여사가 임신을 했을 때, 시어머니와 남편 모두 기뻐하는 기색은 없었다고 한다. 특히 42세의 늦은 나이에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을 때도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 여사는 이때를 “돌아가신 친정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웠던 시절”이라고 회상했다. 원래 아이에 대한 욕심이 없어 무덤덤했지만 그런 주위의 관심에는 좀 섭섭한 마음이 든 게 사실이라고. 이 여사가 손수 아이의 옷을 챙기며 엄마가 될 준비를 할 동안, 남편은 선거를 보름 앞두고 목포에 내려가 있었다. 그 뒤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고 나서야 아이를 보러 왔고, 아이의 얼굴을 한 번 보고는 다시 정치인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김홍걸씨는 미국으로 건너가 두 형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하지만 2002년 5월 체육복표 사업자 선정 등과 관련해 기업들로부터 청탁과 함께 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이로 인해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는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면서 고개를 숙여야 했다. 김 전 대통령의 정권 말기, 이 사건으로 인해 그가 이룬 ‘정권 교체’와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의 쾌거는 크게 돋보이지 못했다. “아내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합니다” 지난해 출간된 이희호 여사의 자서전 「동행」 출판기념회에서 김 전 대통령은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한 뒤 “제가 수많은 고난을 이겨낼 수 있도록 힘을 준 것도 아내고, 제가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랐을 때 힘과 능력을 주고 내조를 잘해주었던 이도 아내입니다. 여러분 앞에서 아내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겠습니다”라며 아내의 두 손을 잡고 번쩍 들었다. 고난과 영광이 교차하는 자신의 삶을 함께 걸어온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담긴 최고의 헌사였다. 이희호 여사의 작별 편지는 그녀의 자서전 「동행」과 이별과 재회의 상징인 ‘손수건’ 그리고 이 여사가 손수 뜨개질해 투병 중인 남편의 찬 배를 감싸줬던 ‘덮개’, 김 전 대통령이 생전 즐겨 보던 「성경」과 함께 관 속에 넣어졌다. 이에 이 여사는 “우리 내외는 수십 년간 고난과 빈곤과 모험을 헤치고 살아왔습니다. 요즘도 가끔 남편과 함께 우리가 어떻게 오늘날까지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그 끔찍했던 과거를 회상하곤 합니다. 남편인 김 대통령이 저와 일생을 동행하며 저를 아끼고 도와준 데 고마움을 느낍니다”라고 화답했다. 이들 내외는 남편과 아내이기 전에 ‘동지’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 김 전 대통령 역시 아내를 평생의 ‘동지’로 생각했다. 서울 마포구 동교동 집을 살 때 “부부가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주자”며 부부의 이름을 나란히 문패로 만들어 달기도 했다. 남편은 하늘이라고 가르치던 시절, 더군다나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자신의 문패를 단다는 것은 당시로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문패는 아내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발로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문패를 대할 때마다 아내에 대한 동지 의식이 무럭무럭 자라났다”며 아내가 자신의 정신적 동지임을 밝혔다. 이희호 여사는 남편에게 그 어떤 잔소리나 요구도 하지 않고, 남편의 모습 그대로를 존경하며 살았다. 이 여사는 “나는 헌신하되 간섭하지 않고, 지배하지 않고, 강요하지 않고, 기다리는 아내였다”며 “그런 점에서 보자면, 나는 남편의 배우자로서 적합했을 것이라고 감히 생각한다”고 회상했다. 정치에 입문해 ‘다섯 번의 죽을 고비와 6년의 감옥생활, 10년의 망명과 연금생활’을 하면서 민주화운동의 상징이 된 김대중 전 대통령. 그가 정권교체를 이뤄 첫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고 노벨 평화상까지 받으면서 한국 현대사의 전설이 되기까지 47년을 곁에서 묵묵히 조용한 내조를 펼쳤던 이희호 여사는 영원한 ‘민주화의 반려자’로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 이희호 여사의 작별 편지는 그녀의 자서전 「동행」과 이별과 재회의 상징인 ‘손수건’ 그리고 이 여사가 손수 뜨개질해 투병 중인 남편의 찬 배를 감싸줬던 ‘덮개’, 김 전 대통령이 생전 즐겨 보던 「성경」과 함께 관 속에 넣어졌다. 이희호 여사가 김 전 대통령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 사랑하는 당신에게 같이 살면서 나의 잘못됨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늘 너그럽게 모든 것 용서하며 애껴준 것 참 고맙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의 품 안에서 편히 쉬시기를 빕니다. 너무 쓰리고 아픈 고난의 생을 잘도 참고 견딘 당신을 나는 참으로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당신을 뜨거운 사랑의 품 안에 편히 쉬시게 하실 것입니다. 어려움을 잘 감내하신 것을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승리의 면류관을 씌워주실 줄 믿습니다. 자랑스럽습니다. 2009. 8. 20. 당신의 아내 이희호 <■글 / 김민주 기자 ■사진 / 사진 공동 취재단, 경향신문 포토뱅크 ■참고 서적 / 「동행」(웅진지식하우스)>
- 죽을 고비 함께 넘기며 해로한 김대중·이희호 부부의 동행
- 2008. 12. 11 화제
- 오랜만에 공식 석상에 나선 김대중·이희호 부부는 고령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건강한 모습이었다. 김 전 태통령의 유머러스한 언변과 이 여사의 확신에 찬 말투도 여전했다. 이희호 여사의 자서전 「동행: 고난과 영광의 회전무대」 출간을 맞아 이들 부부의 46년간의 역사를 전한다.지난 11월 12일 63빌딩에서 열린 이희호 여사(86) 자서전 「동행: 고난과 영광의 회전무대」의 출판 기념회. 김대중 전 대통령(84)이 와인 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정에는 없던 축배 제의에 장내가 술렁였다. “아내의 출판 기념회에 오신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아내의 날이니까 저는 조용히 있으려고 했지만, 우리 부부의 젊은 시절 사진이 걸려 있어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대에는 이희호 여사의 어린 시절 사진부터, 김 전 대통령과 함께한 여러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 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부부가 주방에서 컵을 행주로 닦으며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이 사진에 얽힌 일화를 소개했다. “미국 망명 시절 「피플」지에 실렸던 사진인데 이번 자서전의 표지에도 썼더군요. 그동안 이 사진을 두고 아내에게 ‘내가 외조를 잘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냐’고 말해왔습니다(웃음). 사실 결혼 46년 동안 제대로 가사 일을 도와준 적이 없었네요. 아내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제가 수많은 고난을 이겨낼 수 있도록 힘을 준 것도 아내고, 제가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랐을 때 힘과 능력을 주고 내조를 잘해주었던 이도 아내입니다. 여러분 앞에서 아내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겠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이희호 여사의 손을 꼭 잡고 허리를 굽혀 인사한 뒤 이 여사의 팔을 번쩍 들어올렸다.민주주의의 꿈과 남녀평등의 꿈의 만남 여성운동가와 야당 정치인의 만남이었다. 결혼할 당시 김 전 대통령은 아내와 사별 후 두 아들을 키우며 노모와 병을 앓고 있는 여동생과 셋방에 살고 있었다. 또 1954년 처음 정치에 입문해 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이후, 후보 등록 취소 등 세 번이나 고배를 마신,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정치 재수생이었다. 한편 이희호 여사는 미국 유학 후 돌아와 활발히 활동하고 있던 유망한 사회운동가이자 여성운동가였다. 모두가 반대하던 결혼이었다. 가족은 물론, 그가 몸담고 있던 YWCA, 여성계 선후배들이 극구 반대했다. 당시 YWCA 연합회 회장을 지낸 김갑순씨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이희호 여사가 부드러운 성격에 강한 책임감으로 좋은 사회운동가 자질을 타고났다고 기대했던 YWCA 관련 어른들은 김대중씨와의 결혼을 반대하기로 했다. 조건이 나쁜 그와의 결혼으로 헤어 나오기 어려운 함정에 빠져 좋은 일꾼 하나 빼앗기고 앞으로 여성 지도자로 대성할 재목을 잃는 것이 아닌가 하는 노파심에서 결혼이 성사되지 못하도록 공작을 폈다.” 이들의 첫 만남은 6·25 전쟁 때 피난 온 부산에서 이루어졌다. 자서전에 따르면 당시 김 전 대통령은 “20대 중반의 잘생긴 멋쟁이로 사업 근거지를 고향인 목포에서 임시 수도 부산으로 옮겨 와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우연히 한 모임에서 둘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 여사는 “토론에서 늘 조용히 듣는 편이었지만 코드가 맞았는지, 누구에게나 친절한 내가 누님 같았는지 나와는 말을 잘 했다”고 말한다. 이들은 가끔 교외 감천을 걸으면서 당시 개헌 소동이나 정치 파동을 보며 함께 분노하기도 했다. 결혼 반지와 옥중에서 주고 받았던 편지들.이로부터 6년 후 운명과 같은 재회가 이루어졌다. 이 여사는 결혼 대신 유학을 하고 돌아와 유명한 사회운동가이자 여성운동가가 되어 있었고, 그는 아내를 잃고 정치에 뛰어들어 고전을 겪고 있었다. 우연한 재회 이후 만남이 잦아졌고, “곤궁하고 울적한 그는 퇴근 무렵이면 YWCA가 있던 명동으로 나왔다”고 회고했다. 김 전 대통령이 야당 의원으로 고초를 겪던 어느 날 무척 핼쑥한 얼굴로 이 여사를 찾아왔다. 그리고 찬 기운이 감도는 저녁 파고다공원에서 청혼을 했다. 그의 청혼은 무척 정치적이고 논리적이었다고 한다. 프러포즈의 말은 다음과 같다. “당신도 알고 있듯이 나는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원대한 꿈이 있습니다. 이 땅에 참된 민주주의를 꽃피우고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필요로 하며 나와 아이들을 돌봐주기를 바랍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들 부부에게는 남녀 간의 사랑을 뛰어넘는 끈끈한 동지애적인 연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쉽지 않았던 어머니 역할과 결혼 생활 이 여사는 결혼과 동시에 아무런 준비 없이 두 아들의 엄마가 됐다. 더구나 아이들은 중학교 2학년과 1학년으로, 예민한 사춘기를 지나고 있었다. 훗날 장남 홍일씨의 회고에 의하면 새 가족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 수 있다. “지금의 어머니께서는 돌아가신 어머니와는 여러 면에서 분위기가 달랐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우리 형제들을 이끌고 외가나 중국집 나들이를 즐기셨다면, 새 어머니는 주로 영어로 된 책을 읽으시고 신문도 영자지를 보셨다. (중략) 어머니께서는 우리의 환심을 얻기 위한 행동은 전혀 하지 않으셨다. 교육자답게 원칙을 지켰고 엄격한 자녀 교육을 하셨다.” 이 여사는 바쁜 와중에도 살림과 양육을 시어머니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했다. 이 때문에 아이들과 일상사를 이야기할 수 있었고, “점차 한 가정이 되어갔다”고 돌아본다. 그러던 중 이들 부부에게 막내 홍걸씨가 태어났다. 그러나 두 아이들 때문이었는지 시어머니는 반기는 기색이 없었고, 남편도 크게 기뻐하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출산 준비뿐 아니라 제왕절개로 출산할 때 역시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처음부터 알콩달콩한 행복을 바란 결혼은 아니었지만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웠다”고 회고했다. 출산하던 날 김 전 대통령은 총선을 보름 앞두고 있었고, 국회의원 당선자가 돼서야 아들의 얼굴을 처음 대면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아이가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요?”라고만 물었고, 이내 정치인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세 아이에게 골고루 사랑을 주려고 했으나, 여성운동으로, 강의로 집을 수시로 비운 서툰 엄마였다. 막내 홍걸씨가 두 살 때의 일이다. 정부 측과 협의 중 아이가 발을 데어서 병원에 갔다는 연락을 받았다. 끓는 주전자 물에 심한 화상을 입은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병원에 갔으니까 괜찮겠지’라는 생각으로 일을 다 마치고 저녁에야 집에 들어갔다. 이 여사는 밤새도록 우는 아이를 안고 죄책감으로 가슴이 아팠다고 한다. 또 선거 유세로 바쁠 때는 막내를 친척 집이나 친구 집에 맡기는 날도 많았다. 두 사람은 다른 점이 많았다. 김 전 대통령은 섬에서 나고 항구에서 자란 남도 출신이고, 이희호 여사는 집안 대대로 사대문 안에서 살아왔다. 이 여사의 집안은 기독교 집안으로 차례나 제사 대신 추모 예배를 드리고, 설도 신정을 쇠었다. 고사와 굿을 구경한 적도 없을 정도였다. 이 여사는 찬송가를 들으며 자랐고, 김 전 대통령은 판소리를 들으며 성장했다. 그녀는 연극을 좋아했고, 그는 동물과 꽃을 사랑했다. 식탁에서 기독교인 이 여사가 식사 기도를 하면, 천주교인인 김 전 대통령은 성호를 그었다. 그리고 일요일이 되면 그는 두 아이와 서교 성당으로 가고, 그녀는 혼자 창천교회로 갔다. 이 여사는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한국인의 가치 판단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남편은 내 신앙 원칙을 존중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 표가 아쉬운 선거에서도 나의 신앙심을 지켜주었다”고 밝혔다. 처음이자 마지막 보금자리인 동교동 178-1의 집을 마련했을 때의 일이다. 처음으로 마련한 이들의 보금자리에는 두 개의 문패가 달렸다. 김 전 대통령은 부부의 이름이 박힌 문패 두 개를 내밀면서 “가정은 부부가 함께 이뤄나가는 거 아닙니까? 부부가 동등하다는 것을 우리가 먼저 모범을 보입시다”라고 말했다. 남녀가 유별하고 남편을 하늘이라 믿고 따르라고 가르친 그 시대에, 더욱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며느리 문패를 단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이에 대해 김대중은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가끔 아내에게 억지를 부리곤 한다. 노처녀를 구제해줬으니 나한테 감사해야 한다고 말이다. 물론 농담이다. 아내가 얼마나 어려운 결정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전시용 문패라고 했다. 그러나 전시용이 필요 없을 때부터 우린 그렇게 살아왔다. 아내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발로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막상 그렇게 하고 나니 문패를 대할 때마다 아내에 대한 동지 의식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감정이었다.”미국 망명시절 ‘피플’지에 실렸던 사진. 김대중은 이 사진을 두고 외조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농담해왔다.나란히 걸린 문패처럼 평생 동행해 이들 부부는 지난 46년간 롤러코스터를 타듯 험난한 시절을 함께했다. 기념일 한 번 챙기지 못했다. 결혼한 지 열흘 만에 김 전 대통령이 감옥에 갔고, 결혼 10주년에는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으며, 결혼 20주년에는 김 전 대통령이 청주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생일 역시 교도소 아니면 가택 연금 중으로 선물은 고사하고 미역국도 끓이지 못할 때가 허다했다. 이 부부가 서로의 기념일을 챙기게 된 건 미국으로 망명을 갔을 때부터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 전 대통령은 이순신 장군 탄생일은 기억하지만 가족 생일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여사의 생일에 외국인 친구가 케이크와 꽃으로 축하해준 모습을 본 이후, 이들 부부에게도 기념일에 서로 선물하는 전통이 생겼다. “내가 받은 많은 선물 중에서 그가 준 자수정과 진주 반지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에게 주로 셔츠, 스웨터, 넥타이 등을 선물했죠. 그리고 아들 내외, 손녀, 손자의 생일과 기념일도 기록해놓고 잊지 않아요. 가장 귀한 생일 선물은 교도소에서 온 카드입니다.” 이 여사는 자서전을 집필하면서 험난했던 결혼 생활을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이 중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을 기억해냈다. “남편이 오랜 야당 생활 끝에 국회에 들어갈 때까지 고난과 탄압과 빈곤을 이겨내야 했던 시절과 1963년 국회 등원 이래 1971년 대통령 선거까지 약 8년 동안 국민적 지지 속에 화려한 야당 역할을 했던 시절이 기억에 남습니다. 1972년 유신체제 후 납치, 투옥, 사형언도, 망명 등 절정의 고난시대도 잊을 수 없죠. 또 국민적 지지로 대통령이 되어 갖가지 국가적 난제 해결과 남북 간 관계를 냉전 시대로부터 화해협력의 시대로 물꼬를 튼 일 역시 잊을 수 없는 사건이네요.” 이희호 여사는 김대중 대통령과의 만남을 인생의 전환점으로 꼽았다. “우리 내외는 수십 년에 걸쳐 고난과 빈곤과 모험을 헤치고 살아와야 했습니다. 요즘도 가끔 남편과 함께 우리가 어떻게 오늘날까지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그 끔찍했던 과거를 회상하곤 해요. 남편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인생을 동행하면서 저를 아끼고 도와준 데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이 여사의 내조는 ‘바가지를 긁지 않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들은 긴 시간 동안 한 번도 큰 소리를 내며 언쟁을 벌인 적이 없었다. “저는 남편이 하는 일에 대해서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런 면이 도움이 되지 않았겠어요? 우리 부부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동행’이라는 책 제목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서로 인격을 존중하며 살았어요. 우리 집에 나란히 달린 문패처럼, 모든 것을 의논하고 동행하면서 살아왔습니다.” 3년 동안 집필한 「동행」에는 일제시대, 6·25 전쟁, 민주화 운동 등부터 지금까지의 역사가 담겼다. 한 사람의 개인사이기보다는 생생한 현대사를 읽는 듯하다. “일제 시대를 겪고, 80년이 넘도록 살아온 사람으로서 젊은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제가 살아온 인생을 귀중하게 생각합니다. 의롭게 살다가 고통받은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아내가 붙인 제목 ‘동행’의 부제 ‘고난과 영광의 회전무대’는 남편이 직접 지었다. 이희호 여사의 자서전이지만 김 전 대통령의 역사이기도 하다. 민주화에 앞장선 정치인과 여성운동가의 모습을 넘어, 평생 존중하며 협력해온 이들 부부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글 / 두경아 기자 ■사진 / 인성욱 ■참고 자료 / 이희호 자서전 「동행」(웅진지식하우스)
- 친구 같은 아빠, 친구 같은 아들…김대중·김선돌 부자
- 2008. 11. 13 화제
- 「나의 꿈 10억 만들기」,「10억을 만든 사람들의 돈 IQ, EQ」 등 재테크 관련 베스트셀러의 저자로 유명한 재테크 전문가 김대중씨가 이번에는 자신과 아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냈다. 책 제목은 「친구 같은 아빠 되기」. 아들에게 전수하는 재테크 비법이라도 있을까 들여다보았더니 바르게 세상 사는 법에 대한 ‘잔소리’ 가득한, 그야말로 알찬 ‘육아서’다.아빠와 아들, 심장박동을 맞추다 역시 단독주택은 찾아가기가 힘들다. 100m 밖에서도 한눈에 보이는 고층 아파트에만 익숙하다 보니 동 뒤에 바로 숫자가 나오는 주소를 보면 겁부터 난다. 매우 친절하고 자세하게 찾아오는 길을 일러준 김대중씨(45)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골목을 헤맨 이유다. 북한산 기슭에 산호색 벽돌로 지어진, 마당에 큰 은행나무가 있는 집. 김대중씨 세 가족이 두 달 전 보금자리를 꾸민 집이다. “중계동 아파트에서 두 달 전에 이사했어요. 20년 전 보증금 50만원, 월세 7만원짜리 단칸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며 언젠가 마당 있는 집을 갖는 게 꿈이었는데 그 꿈을 이루게 됐네요.” 작은 집에서 조금 큰 집으로,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집으로 집을 넓히는 과정에서 느끼는 행복은 겪어본 사람만이 알 것 이다. 금전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자식들에게 큰 집을 사주는 경우도 많은데 그렇게 되면 그런 행복을 빼앗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김대중씨는 그 행복감을 아들에게도 꼭 맛보게 하고 싶다. 「친구 같은 아빠 되기」(브렌즈)는 아들에게 보물을 주기보다 스스로 보물을 찾아가게끔 조언하는 책이다. 유난히 친구 같았고 지금도 친구처럼 지내는 아버지 김대중씨와 아들 김선돌군(20)의 평범하고도 진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선돌이가 태어날 당시만 하더라도 산아 제한 정책이 있었어요. 아이를 둘 이상 못 낳게 하고 셋째부터는 의료보험 혜택도 주지 않았죠. 넉넉지 않은 살림이었으니 저희도 선돌이 하나만 낳아서 잘 기르자 했어요. 아이를 외동으로 키워야 하는 입장인데 제 친구 자식 중 외아들을 보면 외동으로 자란 티가 나더라고요. 외로움도 많이 타고요. 아이가 외롭지 않도록, 선돌이한테 동생은 없지만 내가 형이 되어줘야겠다는 생각이 컸던 것 같아요.” 어려운 형편이라 유모차도 없었다. 허리가 안 좋은 아내 대신 김대중씨가 늘 아이를 안고 다녔다. 꼭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그는 아들을 품에 안는 것을 좋아했다. 아이를 안고 점퍼의 지퍼를 올리면 품 안으로 쏙 들어왔다. 아빠 품 안에서 빼꼼히 고개만 내민 선돌이 때문에 붙은 별명이 ‘캥거루 아빠’. 그렇게 아빠와 아들은 심장박동을 맞췄다. 그러다 보니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비슷해졌다. 친구 같은 아빠가 된 건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엄마와 아이는 이미 열 달 동안 심장박동을 맞춘 상태예요. 그래서 본능적으로 엄마는 자식을 알고 자식은 엄마를 알아요. 하지만 아빠는 다르잖아요. 아이가 태어날 때 보는 아빠는 타인일 뿐이죠. 엄마만큼의 친밀도를 만들려고 되도록이면 제가 직접 우유도 먹이고 기저귀도 갈아주고 잠도 재웠어요. 선돌이는 네 살 때까지 제 배 위에서 낮잠을 잤다니까요.” 아이가 걸어 다닐 때 즈음에는 어디든 데리고 다녔다. 회사 야유회든, 회사 동료의 결혼식이든, 김대중씨 곁에는 선돌군이 늘 함께했다. 심지어 주말에 출근을 하는 날에도 사무실에 데려가 아이와 시간을 보냈다. “아이디어는 내기 나름이에요. 새벽같이 회사에 출근해서 아이들이 잠들고 난 후에야 집에 돌아와도 요즘에는 휴대폰이나 이메일처럼 좋은 것들이 많잖아요. 선돌이가 말문이 트였을 때쯤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아빠, 나한테는 아빠가 둘이 있어. 실제 아빠와 전화기 속의 아빠’라고요. 정해진 시간을 얼마나 활용하느냐는 아빠의 부지런함에 달렸어요.” 아빠와 아들, 대학동문이 되다 자신의 배 위에서 평화롭게 낮잠을 자던 그 조그맣던 녀석은 어느새 훌쩍 커 이미 아버지의 키를 넘긴 지 오래다. 고려대학교 화학과 07학번인 김선돌군은 같은 대학 통계학과 82학번인 김대중씨의 25년 후배이기도 하다. 민족사관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카이스트와 고려대학교를 놓고 고민한 끝에 선돌군은 고려대학교를 선택했다.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고·연전에 자주 데리고 다녔어요. 초등학교 교가보다 고대 응원가를 더 먼저 배웠을 정도였죠. 하지만 대학 선택은 전적으로 선돌이에게 맡겼어요.” 강원도에 있는 민족사관고등학교를 다니며 3년 동안 가족과 떨어져 지냈는데 또 대전으로 대학을 가게 되면 4년을 더 떨어져 있게 되는 셈이었다. 유난히 엄마 아빠와 사이가 돈독했던 선돌군이었기에 가족과 함께 사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선돌군은 어릴 때부터 과학에 대한 호기심이 남달랐다. 집 안에 실험실을 만들어 여러 가지 실험을 직접 해볼 정도로 과학에 대한 열정이 컸고 그러한 열정은 그를 과학자의 꿈으로 이끌었다. 국제환경탐구올림피아드, 화학올림피아드, 과학창의력대회 등 다수의 과학대회와 발명대회에서 수상하고 특허에도 관심이 높아 ‘전화기 버튼 구조 변경에 관한 건’으로 실용신안을 획득하는 등 7건의 실용신안도 가지고 있다. 민사고 재학 시절에는 초등학교 때부터 기록해온 일기를 모아 「과학 일기」라는 책도 냈다. “많은 분들이 어떻게 아들을 잘 키웠냐고 물어오세요. 그럼 이렇게 대답하죠. ‘저는 아이를 키운 적이 없어요. 아이는 스스로 커갑니다’라고요. 아이란 존재는 부모가 만들고 키워나가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커나가는 존재예요. 그리고 부모도 아이를 키우며 함께 성장한다고 믿습니다. 물론 아이들이 달리면서 코스를 벗어날 때에는 다시 코스로 돌아오도록 해야겠죠. 하지만 코스를 잘 달리는 아이들은 그저 응원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아이가 하고 싶은 것은 아이가 결정하고 부모는 그것을 도울 뿐이라는 것이 김대중씨의 교육 철학이다. 과학 영재를 키운 아버지로서 그는 ‘내가 한 일은 아들이 컴퓨터에 호기심을 느낄 때 못 쓰는 디스켓을 직접 분해해 보여주고 화학 실험에 재미를 붙일 무렵 베란다에 실험실을 꾸며준 것뿐’이라고 말한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부모가 제일 좋은 선생님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나라 초등 과정은 기본적인 교양이라 누구나 가르칠 수 있거든요.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따로 학원에 보내지 않고 제가 직접 가르쳤어요. 중학교에 들어가고 경시대회를 준비하면서 손을 놨죠. 어떤 친구는 딸아이 수학을 가르쳐주다 책을 찢어버렸다고 하더라고요. 아이를 가르칠 때 절대로 화를 내서는 안 돼요. 근데 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게 잘 안 되죠(웃음).” 선돌군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스스로 공부에 욕심이 많기도 했고 무엇보다 목표가 분명했기에 부모로서 막을 이유가 없었다. 아들의 학원 수업이 끝나는 시간은 주로 밤 12시에서 새벽 2시. 학원이 소규모였던지라 학원 버스는 운영하지 않았고 운전이 서툰 아내를 대신해 그가 매일 학원 앞에서 아이를 기다렸다. 밤늦게 차에 앉아 아이를 기다리다 보면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공부를 시켜야 하나’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들이 좋아서 하는 것이니 그냥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복잡한 마음을 감추곤 했다. 하고자 했던 것이 분명했던 선돌군은 언제나 자신감이 넘쳤고 아버지는 묵묵히 지켜볼 뿐이었다. 그러한 기다림과 믿음의 시간을 보내고 아들은 어느새 어른이 되었다. “민족사관고등학교는 여러모로 특이한 학교지만 그중에서도 특이한 것은 성년식을 한다는 점이에요. 하루 날을 정해 그해 성년이 된 아이들을 모두 강당으로 불러 모아요.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쓰지요. 갓을 쓴다는 것은 어른이 됐다는 뜻이잖아요. 그날 제가 참 많이 울었어요. 선돌이가 왜 우냐고 화를 냈을 정도로요. 선돌이가 무사히 성인이 됐다는 생각에 뿌듯함과 눈물이 함께 밀려오더라고요. 그땐 정말 선돌이가 남자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니까요. 만약에 딸이어서 나중에 시집갈 때가 되면 또 얼마나 많이 울까 하고요(웃음).”애정 듬뿍 담긴 ‘잔소리’ 책에 담아 「친구 같은 아빠 되기」는 크게 2부로 나눠져 있다. 1부는 선돌군이 태어나서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의 기록이다.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고 어떤 방식으로 친해졌으며 어떤 방식으로 훈육했는지에 대한 내용이다. 2부는 김대중씨가 선돌군에게 하는 ‘잔소리’다. 인생 선배로서 느낀 많은 것들, 술은 어떻게 마셔야 하는지, 여자친구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부부 싸움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등 사소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삶의 지침들을 조근조근 아들에게 전하고 있다. 여기에는 ‘면도는 이렇게 해라’라는 챕터도 있다. <면도를 할 때는 부드러운 부분부터 먼저 밀고 그 다음 빳빳한 부분으로 옮겨가면서 미는 것이 좋단다. 먼저 귀 밑 부분을 밀고 그 다음 목 부위, 그 다음 턱 부위, 마지막으로 코 밑의 수염을 밀면 된다…> 어느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토록 자상하고 세세하게 면도하는 법을 전할까. 책 속에 담겨 있는 문장 하나하나 애정을 담지 않은 것이 없다. 아이에 대한 넘치는 애정은 자칫 부모의 욕심으로 비춰질 수 있다. 극성 아빠이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아내 김현심씨가 나선다. “남편은 한 번도 선돌이가 하는 일에 대해 강요한 적이 없어요. 솔직히 공부에 대해서는 제가 더 신경을 썼죠. 남편은 선돌이 학원 보내고 공부 시키는 것에 대해서 지켜보기만 했지 꼭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두 사람은 미장원에도 같이 가요. 둘이 너무 붙어 다니니까 가끔 사람들이 엄마가 소외감 느끼지 않느냐고 물어보는데, 가족이잖아요. 부자지간 사이좋은 걸 엄마가 싫어할 리가 없죠(웃음).” 지난여름까지 두 사람은 학교도 같이 다녔다. “제가 고대 경영대학원에서 MBA 과정을 밟았거든요. 제 수업이 끝나면 밤 10시였는데 선돌이 화학 실험이 끝나는 시간과 비슷했어요. 제가 이과대학으로 가기도 하고 선돌이가 경영대학으로 오기도 하면서 수업이 끝나면 함께 집에 왔죠.” 가끔 MBA 수업을 듣는 사람들과 술자리가 있을 때는 선돌군도 자연스럽게 합석을 했다. 술을 좋아하는 선돌군 덕분에 부자는 이제 서로에게 가장 좋은 술친구가 됐다. “제가 스무 살이 됐을 때 아빠와 제일 먼저 했던 일이 바로 집에서 캔맥주 마신 거예요. 그 뒤로도 아빠가 퇴근하시면 가끔 맥주 한 잔씩 해요. 아빠가 술 드시고 퇴근할 때 전화하면 제가 마중 나가기도 하고요.” ‘이제 같이 늙어간다’는 아버지의 말에 선돌군이 “아직 스물둘이라고요!”라며 발끈한다. 장난스럽게 투닥거리는 모습이 정말 친구 같다. 아버지와는 다르게 재테크에는 관심이 없는 선돌군이지만 선돌군의 말마따나 ‘서당 개 20년’이다. 이제 주식 이야기도 주고받는다. 비밀이 없는 두 사람, 서로에게 바라는 점은 뭘까. “여자친구 생기면 품위 유지비로 한 달에 20만원씩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아직 없는 것 같더라고요. 3층 집이니까 나중에 선돌이가 결혼하면 며느리랑 둘이 3층에 살라고 하고 싶어요. 아들에게 특별히 당부하고 싶은 말은 없어요. 자기 인생은 자기가 살아야죠. 여느 아버지들처럼, 깊이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기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저도 특별히 당부하고픈 말은 없고요. 언제나 지금처럼, 더 나이 드신 후에도 친구 같은 아빠로 제 곁에 계셨으면 좋겠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대문을 나서는데 김대중씨가 마당의 감나무에서 홍시 하나를 따 쫓아 나온다. 올해 첫 홍시다. 홍시를 들고 대문을 나서니 가을은 더 깊어져 있다. 깊어가는 가을만큼, 부자의 정도 깊어져간다.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원상희
- 국내 최초 전직 대통령 이름을 딴 ‘김대중 도서관’
- 2003. 12. 01 재테크
- 1만6천여 권의 책, 그림, 소장품 등 드디어 세상 밖에 드러나다! 지난 11월 3일, ‘김대중 도서관’이 개관식을 가졌다. 국내외 각계각층 인사가 대거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 이 행사장에는 좀처럼 대문 밖을 나서지 않던 김대중 전직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이 도서관은 국내 최초로 전직 대통령의 이름을 딴 도서관이라는 점 때문에 언론의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다. 도서관 5층은 김 전대통령의 집무실 동교동에 위치한 ‘김대중 도서관’을 찾아가는 길.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한바탕 쏟아진 때문인지 거리엔 시민들의 모습보다 무전기를 들고 경비를 서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더 눈에 띄었다. 삼엄하고 경직된 분위기는 도서관 입구까지 이어졌다. 일반 도서관과는 달리 이렇듯 삼엄하게 경비를 하는 이유는 도서관 맨 꼭대기 층인 5층에 김대중 전직 대통령의 집무실이 있기 때문이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는 퇴임 후 7년까지 이어진다. 김 전 대통령은 일주일에 두서너 번 집무실에 들러 다양한 서적을 읽고 국내외 유명 인사들의 방문을 맞는다고 한다. 김 전 대통령의 집무실인 5층에는 연구실 두 곳과 비서실, 경호실이 있다. 이곳에는 바로 지하로 연결되는 전용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어 김 전 대통령과 도서관 직원들이 만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도서관 개관 전,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기는 했으나 “수고한다. 고생이 많다” 등의 간략한 대화가 전부였다고 한다. 이희호 여사 역시 도서관 방문은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것이 도서관 측의 설명이다. 이 건물은 처음부터 도서관의 운명을 타고나지는 않았다. 사무실과 연구실 전용으로 지어졌으나 도서관으로 확정되면서 6개월간의 리모델링 과정을 거쳤다고. 도서관 건물은 수십만 권의 책 무게를 견뎌야 하기 때문에 일반 건물보다 단단한 철제 버팀목이 필요하다. 이렇게해서 완성된 도서관에는 1만6천여 권의 도서가 전시되어 있다. 이 모든 도서는 김 전 대통령이 소유했던 것. 김대중 도서관이 개관한 이후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책, 그림, 소장품 등을 기증하겠다’는 문의가 쉬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고. 얼마 전에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연구 자료 등을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 의견은 받아들여져 내년 3월경 새로운 기증품들이 전시될 예정이다. 김대중 도서관은 전직 대통령의 이름을 딴 최초의 도서관이기 때문에 내국인보다 외국 관광객들의 발길이 활발하다고 한다. 도서관의 1층 열람실에 들어서면 눈앞에 펼쳐진 엄청난 양의 서적들로 인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이중에는 낡고 헤어져 누렇게 색이 바랜 책도 쉽게 눈에 띈다. ‘마음에 드는 책은 몇 번이고 읽는다’는 김 전 대통령의 오래된 습관 덕분이다. 이곳 도서관에 기증된 책들 중에 새 책의 모양을 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중에서도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이재범 경기대 교수의 '슬픈 궁예' 등은 유난히 낡은 책이다. 이곳에는 소설에서부터 사회과학 전문 도서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갖가지 종류의 책들이 전시되어 있다. 관리는 연세대학교 도서관 열람실을 그대로 인용한 분류 시스템으로 갖춰져 있다. ‘김정일 위원장과 경향신문 보며 흐뭇해했다’는 후문 책 이외에도 다양한 기념품이 전시되어 있다. 2000년 ‘남북공동선언’ 서명에 사용한 만년필, 마닐라 공항에서 암살당한 필리핀 아키노 상원 의원에게 선물받은 수동 타자기, 남아공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감옥에서 차던 손목시계 등. 이중 넬슨 만델라 대통령의 손목시계는 1996년, 새정치 국민회의 창당대회 때 만델라 대통령의 딸이 전달해주었다고 한다. 이외에 눈에 띄는 책 한 권이 있다. 김 전 대통령은 1992년 대선 실패 후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체류했다. 당시 이웃에는 스티븐 호킹 박사가 살고 있었는데 고뇌와 상념에 찬 김 전 대통령과 스티븐 호킹 박사는 가까이 지내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말벗이 되었다고 한다. 지난 2000년 9월, 스티븐 호킹 박사는 청와대를 직접 방문해 '시간의 역사'라는 자신의 책을 선물했다. 또한 진열품 중에는 이희호 여사와 관련된 것도 있다. 바로 1백94개의 골무가 그것. 이것은 포항에 사는 한 할머니가 손수 만들어 이희호 여사에게 선물한 것이다. 도서로 가득 찬 1층과는 달리 2층 전시장엔 사진과 신문 등 다양한 기증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세계 유명 잡지 시사 18개의 표지모델이 되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다양한 표정을 보며 들어선 2층 전시장에는 도난과 손상의 위험으로 인해 아직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않은 기중품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서울대학병원에 감금당했던 시절, 일체의 필기도구를 사용할 수 없던 김 전 대통령에게 유일한 필기도구였던 ‘못’이 눈길을 끈다. 그 당시 김 전 대통령에게 이희호 여사는 세상과 통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김 전 대통령은 누런 음식물 포장지에 자신의 생각과 사상 등을 못으로 꾹꾹 눌러 써두었다가 몰래 화장실에 두고 나오면 이희호 여사가 그것을 찾아 외부에서 활동중이던 동지들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그때의 처절했던 상황을 한번에 느끼게 해주는 ‘녹슨 못’은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채 전시되어 있다. 이와는 대조적인 필기도구 만년필. 이것은 김 전 대통령이 대통령으로 재직하던 당시 사용하던 것으로 녹슨 못과는 대조를 이루는 전시품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전시품은 전세계 단 하나뿐인 ‘영국 바스명예대십자훈장’. 이것은 영국 최고의 훈장으로 수여자가 사망한 후에야 그 다음 수여자에게 전달된다. 때문에 김 전 대통령의 사후에는 영국 왕실에 반납해야만 한다. 이곳에는 김정일 위원장과 만났던 역사적인 순간을 포착한 신문도 진열되어 있다. 당시 경향신문에서는 1면 하단의 광고를 없애고 전면 전체에 김 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악수하는 사진을 실었다. 다음날 함께 경향신문을 본 두 사람은 “내 평생 이렇게 기분 좋은 신문은 처음이다”라며 흐뭇해했다는 후문이다. 이외에도 전시장에는 김 전 대통령이 정치생활을 하는 동안 중요한 발표나 성명이 있을 때마다 녹음해놓은 테이프가 2층 한 벽면을 장식했고 수십 년간의 정치 생활을 담은 사진 앨범 역시 방 하나를 독차지할 만큼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다. ‘김대중 도서관’ 지킴이 신동천 관장 신동천 관장(48)은 통일연구원 원장과 김대중 도서관 관장을 겸임하고 있다. 그는 관장이 된 후 김대중 전직 대통령과 세 번 정도의 만남을 가졌다고 한다. “김 전 대통령과는 짧은 시간 동안 만났고 짧은 대화를 나눴지만 그때마다 카리스마와 박식함을 느낄 수 있었다며 “앞으로 김대중 도서관을 통일, 평화, 민주주의, 인권 등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기관으로 전문화할 예정이다. 미국의 ‘카터센터’처럼 후원회를 조성하겠다는 주위 분들의 의견을 수렴해 좀더 발전할 수 있는 도서관으로 만들겠다”라며 김대중 도서관의 앞날에 대한 청사진을 밝혔다. 현재 김대중 도서관은 일반인에게 공개되며 이용시간은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토요일은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이다. 단 일요일과 공휴일은 휴관이며, 신분증만 있으면 일반인도 대출이 가능하다. 글 / 강수정(자유기고가) 사진 / 강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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