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355 건 검색)
- [금주의 B컷]옛 서대문형무소 찾은 아이는 독립운동가들의 외침을 들었을까
- 2025. 03. 05 20:19사회
- 일제강점기 때 태어났더라면 나도 독립운동을 했을까.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보고 나면 친구들과 이런 가정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무조건 했을 거라고 하기에는...
- 금주의 B컷
- “흔적도 없이 잊혀진 독립운동가…칼로 새기고, 가슴에 품습니다”
- 2025. 03. 03 21:22사회
- ... 목판화 작업을 해나가길 바랐다고 한다. 장준하 다음에도 독립운동가를 하려 한 건 아니다. 독립운동가를 포함해 노동운동가, 종교인, 민주화 투사 등 근현대사 여러 인물 자료를 뒤졌다. 이회영 관련...
- 이회영칼로새긴독립운동사이동환목판화미치광이연작
- [책과 삶] 일제에 맞서 우리를 도운 외국인 독립운동가들
- 2025. 02. 27 21:05문화
- ... 집필 배경을 밝혔다. 책은 일제에 맞서 한국인들과 함께 싸우고 국경을 뛰어넘어 연대한 외국인 독립운동가 20여명을 조명한다.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접한 이들과 비교해 읽어보는 재미도 있다. 한국 방문...
- 책과 삶
- ‘만세보’ 창간, 독립운동가 ‘장효근일기’ 완간
- 2024. 12. 30 20:35문화
- ... Ⅰ, Ⅱ권에 이어 간행한 것으로 장효근일기(1916∼1945) 전체를 완간한 것이다. 장효근일기는 독립운동가 장효근(1867∼1946)이 1916년 1월부터 1945년 12월까지 약 30년 동안 기록한 자료다. 장효근은...
스포츠경향(총 60 건 검색)
- 송혜교-서경덕 “여성독립운동가 ‘박차정’을 소개합니다”
- 2025. 03. 01 08:17 연예
- 서경덕 교수(왼쪽)와 배우 송혜교 ‘독립군 여전사, 박차정’ 영상 다국어로 제작 국내외 공개 제106주년 삼일절을 맞아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와 배우 송혜교가 의기투합해 ‘독립군 여전사, 박차정’ 영상을 다국어로 제작하여 국내외에 공개했다. 이번 4분 30초 분량의 영상은 서 교수가 기획하고 송혜교가 후원했으며, 한국어 및 영어 내레이션을 각각 입혀 국내외 누리꾼에게 널리 전파중이다. 영상의 주요 내용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사, 근우회 핵심 간부, 난징조선부녀회 창립,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서의 교관 활동 등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특히 유관순 열사에 이어 두 번째로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된 여성독립운동가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어 영상의 캡처 화면 영상을 기획한 서 교수는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재조명하고 국내외에 널리 소개하고자 정정화, 윤희순, 김마리아에 이어 네 번째 영상을 제작했다”고 전했다. 또한 그는 “향후 더 많은 여성독립운동가들에 관한 다국어 영상을 시리즈로 제작해 국내외로 꾸준히 알려나갈 계획이다”고 덧붙였다. 현재 유튜브 뿐만 아니라 각 종 SNS로 전파중이며, 전 세계 곳곳의 한인 커뮤니티에도 영상을 공유해 널리 알리고 있다. 한편, 서경덕과 송혜교는 지난 14년간 해외에 남아있는 대한민국 독립운동 유적지에 한국어 안내서, 한글 간판, 독립운동가 부조작품 등을 37곳에 기증해 왔다.
- 송혜교, 또 다시 선행···서경덕과 여성독립운동가 알리기
- 2024. 11. 15 08:30 연예
-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왼쪽)과 배우 송혜교. 서경덕 교수팀 제공 배우 송혜교가 순국열사 알리기에 나섰다. 서경덕 교수팀은 오는 17일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송혜교와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함께 ‘조선의 혁명 여걸 김마리아’ 영상을 다국어로 제작해 국내외 공개했다고 15일 밝혔다. 이번에 공개된 4분 30초 분량의 영상은 서 교수가 기획하고 송혜교가 후원했으며 한국어 및 영어 내레이션을 각각 입혀 국내외 누리꾼들에게 순국열사를 설명했다. 특히 여성 비밀결사대인 매한민국 애국부인회를 조직해 국내외 지부를 설치하고 군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등 다양한 독립활동을 재조명했다. 조선 여성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영상. 서경덕 교수팀 제공 이번 영상을 기획한 서 교수는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재조명하고 국내외 널리 소개하고자 정정화, 윤희순에 이어 세 번째 영상을 제작했다”며 “향후 더 많은 여성독립운동가들에 관한 다국어 영상을 시리즈로 제작해 국내외로 꾸준히 알려나갈 계획”이라고 했다. 서 교수와 송혜교는 지난 13년간 해외에 남아 있는 대한민국 독립운동 유적지 한국어 안내서, 한글 간판, 독립운동가 부조작품 등 37곳에 기증해 왔다.
- 허미미, ‘현조할아버지’ 독립운동가 허석 선생 추모비 찾는다···“할아버지께 은메달 보여드리고 싶어”
- 2024. 08. 05 21:56 스포츠종합
- 허미미가 지난달 29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아레나 샹드마르스에서 열린 2024파리올림픽 유도 여자 57kg급 시상식에 참석해 은메달을 들어보이며 활짝 웃고 있다. 파리 |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2024 파리 올림픽에서 개인전 은메달, 단체전 동메달을 딴 유도 대표팀 허미미(경북체육회)가 현조부(고조부의 아버지)인 독립운동가 허석 선생의 추모기적비를 찾는다. 허미미는 6일 오전 대구광역시 군위군에 있는 허석 선생의 추모기적비에 참배할 계획이다. 허미미는 허석 선생의 5대손이다. 그는 파리 올림픽 일정을 끝내고 5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동료들과 귀국한 뒤 “올림픽 메달을 따면 현조 할아버지께 보여드리고 싶었다”라며 “내일 참배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허미미는 “(할머니의 뜻을 따라) 한국 (국적) 선택을 잘 한 것 같다”라며 “아쉽게 은메달을 땄지만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올림픽 기간 한국 국가대표로 경기에 나가서 행복했다”라며 “다음 올림픽까지 더 열심히 하고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허미미는 독립운동가 허석 선생의 5대손이다.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일본 국적을 갖고 살아왔지만 할머니가 2021년 세상을 떠나며 남긴 유언에 따라 한국으로 귀화했다. 일본에서 유도천재로 불렸던 허미미는 2022년 태극마크를 단 뒤 2년 만에 세계챔피언에 올랐다. 한국 유도가 세계선수권 우승을 차지한 것은 2018년 안창림(남자 73㎏급)과 조구함(남자 100㎏급) 이후 6년 만이며 특히 여자 유도 우승은 1995년 정성숙(여자 61㎏급)과 조민선(여자 66㎏급) 이후 29년 만이었다. 허미미는 지난달 29일 프랑스 파리 아레나 샹드마르스에서 열린 유도 여자 57kg급 결승에서 캐나다의 크리스타 데구치에 반칙패 해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속보] 허미미, 女 57㎏급 은메달···독립운동가 후손이 한국 女유도에 8년 만에 메달 안겼다독립운동가의 후손, 허미미(22)가 한국 여자 유도에 8년 만에 메달을 안겼다. 허미미는 29일 프랑스 파리 아레나 샹드마르스에서 열린 유도 여자 57kg급 결승에서 캐나다의 크리...https://sports.khan.co.kr/news/sk_index.html?art_id=202407300112003&sec_id=530601
- 국가보훈부, 허미미에게 축전 “위대한 독립운동가의 후손…우리 국민에게 큰 감동”
- 2024. 07. 31 18:55 스포츠종합
- 29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아레나 샹드마르스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픽 유도 여자 57kg급에서 은메달을 딴 허미미가 시상대에서 은메달을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국가보훈부가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알려진 유도 국가대표 허미미에게 축전을 보냈다. 국가보훈부는 2024 파리 올림픽 유도 여자 57㎏급에서 준우승한 허미미(경북체육회)에게 축전을 보냈다고 31일 밝혔다. 축전에서 강정애 국가보훈부 장관은 “허미미 선수의 현조부이신 허석 지사님은 항일 격문을 붙이다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 3일 만에 순국하신 위대한 독립운동가”라며 “독립운동가 후손이자 작고하신 할머니의 뜻에 따라 일본 국적을 포기하고 온전한 대한국인이 되어 이룬 성과는 우리 국민과 250만 보훈 가족들에게 큰 감동이 되었다”고 허미미의 활약을 격려했다. 강 장관은 이어 “저와 250만 보훈 가족은 허미미 선수를 언제나 응원하겠다”고 앞으로 활약도 기원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이상덕 재외동포청장도 허미미에게 축전을 보내 파리 올림픽 은메달 입상을 격려한 바 있다.
주간경향(총 10 건 검색)
- [이주영의 연뮤 덕질기](11)박제된 독립운동가들 21세기 청년으로 환생(2023. 09. 22 11:24)
- 2023. 09. 22 11:24 문화/과학
- ㆍ뮤지컬 ·· 뮤지컬 PAGE1 제공 독립운동가들 이야기는 대부분 신화적이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자신과 가족을 희생한 처절한 삶이 대두된다. 위인전기가 그러하듯 공(功)만 가득하다. 국가가 정해놓은 방향성에 맞춰 윤색된 경우도 많다. 그들도 인간이다. 나라가 주권을 잃고 헤매던 수십 년간 독립운동가들도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성장하고 좌절했다. 정치적인 이유로 잣대를 달리하고 새삼스레 과(過)를 논하기 전에 그들이 겪었을 인간적인 고뇌와 삶의 자락을 찬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마침 독립운동가들의 인간적 면모에 돋보기를 들이댄 작품들이 상연 중이다. 창작 뮤지컬 <곤 투모로우>(Gone Tomorrow)는 김옥균과 고종을 중심으로 갑신정변(1884)부터 경술국치(1910)까지를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상상을 더해 다루고 있다. 주권 학살을 함의하는 고종과 궁인들의 상복 같은 의상과 무대예술은 제목 <곤 투모로우>에 담긴 허무주의와도 상통한다. 삼일천하로 혁명에 실패한 급진 개화파 김옥균은 일본 망명 중에 청나라로 향하다가 고종의 지시로 주살된다. “죽어서 산다”는 유언을 가상인물 한정훈에게 남기며 독립의 대업을 계승케 한 김옥균은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해 팔도에 효수되기에 이른다. 천을 활용한 거대한 형상을 무대 중앙에 매달아 예술적으로 이를 시각화했다. 이때 고종이 부르는 ‘내가 너를 어여삐 하였거늘’은 경술국치 당시 한정훈이 친일파를 저격하며 부르는 ‘조선의 붕괴’와 함께 대표적인 넘버로 꼽힌다.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과 연이은 관동대학살이 배경인 창작 초연 뮤지컬 <22년 2개월>은 독립운동가 부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한국 이름 박문자)에 주목한다. 경술국치 이후 민중이 독립운동에 본격 참여하며 촉발된 1919년 3·1만세운동은 국내외로 빠르게 전파됐다. 평화적 시위를 무력 진압한 일제의 탄압은 무장독립운동을 견인하는 결과를 낳았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엘리트 청년 박열은 일본으로 피신해 흑우회, 불령사(不逞社) 등 비밀 결사대의 일원이 된다. 뮤지컬 아떼오드 제공 뮤지컬 네버엔딩플레이 제공 굵직한 실제 사건 사이에 가상의 이야기를 넣은 뮤지컬 <22년 2개월>을 관통하는 정서는 혼돈의 시대에도 희망을 잃지 않은 청년들에 대한 경이로움이다. 중소극장의 메커니즘을 잘 활용한 관동대지진 장면은 객석이 진동할 정도로 요란하지만, 정작 이보다 가슴을 뜨겁게 하는 장면은 청년 독립운동가들의 군무와 무대 위를 날아다니는 수천 마리의 나비다. 니체의 책이 해질 정도로 외운 박문자의 낭만과 23세에 감옥에서 스러진 그의 자유로운 영혼을 형상화한 나비 떼는 22년 2개월간의 감옥살이를 독립운동가로서 버틴 박열에 대한 경이로움이기도 하다. 진실이 아닌 것에 대해 항변하며 목숨을 건 박열의 결기는 그의 시 ‘나는 개새끼로소이다’에 곡을 붙인 넘버로 재해석됐다. 사형을 선고한 일본 재판관 앞에서 한복에 사모관대를 두르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20대 박열의 기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창작 초연 뮤지컬 <제시의 일기>는 임시정부(이하 임정)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 부부 양우조, 최선화가 큰딸 제시를 출산하면서 쓰기 시작한 8년간의 육아일기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이들의 외손녀 김현주씨가 정리해 1999년 출간한 책 <제시의 일기>는 임정 요원들의 세세한 일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귀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는 국권이 회복된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중년의 제시다. 1938년 7월 4일 중일전쟁의 포화 속에서 태어난 양제시는 부모의 육아일기를 읽으며 중국 전역을 떠돌았던 갓난아기 시절을 회상한다. 시간여행자처럼 부모 시대에 들어가 때론 어린 딸이 되고, 이웃이나 동료가 되기도 한다. 독립운동가로 살았던 부모를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하고 체험하는 구조다. 1·2차 세계대전 속에서 미국과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는 초보 아빠 양우조는 첫딸의 손가락, 발가락이 제대로 있는 것에 감격해 눈물을 흘린다. 출산 보름 만에 피란민 가득한 기차에 끼어 수유 중인 초보 엄마 최선화는 “내 딸이 사는 세상은 (임산부의) 몸조리도 가능하길” 기도한다. 임정 공동체에서 자란 제시에게 이동녕(신흥무관학교 초대 교장), 김구(임시정부 주석)는 사탕과 세뱃돈을 챙겨주는 가족이다. 제시는 이들의 희망이고 미래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육아 난도 최고점의 애물단지다. 아빠의 긴 출장과 엄마의 입원에도 아이다움을 잊지 않는 제시의 난장판은 배우와 관객 모두 배꼽을 잡게 만든다. 소극장의 반원형 무대는 제시가 성장한 중국 동남부 지역의 비경을 수채화처럼 담아낸 요람이자 생생한 육아 현장이다. 관객들은 어느새 제시와 함께 부모 혹은 조부모 세대에 잠입해 각자의 기원을 돌아본다. 극중 엄마의 뱃속 존재로 언급된 제시의 동생 양제니씨는 뮤지컬 <제시의 일기>를 보고 “90년 전 새내기 부부와 오늘날 부부의 모습이 다르지 않아 신기했다. 오랜만에 내 가족 전부를 같은 공간에서 만나보게 된 기적 같은 시간이었다”고 소감을 전했다고 한다. 유쾌하고 낙천적인 딸바보 독립운동가 양우조와 최선화의 육아일기는 일본 패망과 광복을 맞이하는 순간 이들이 기쁨보다는 고통과 당혹스러움을 드러내면서 마무리된다. 조민영 연출은 “원작 일기장에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가슴이 뛰고 어지러워 자리에 가서 누워야 할 정도였다’라고 적혀 있다. 우리의 힘으로 이뤄낸 해방을 꿈꾸고 광복을 준비했는데 외세에 의해 바라던 모습으로 해방되지 않은 상황에 대한 고뇌가 담겨 있어 최대한 살렸다”라고 전했다. 국제 정세를 꿰뚫어 본 임정 요원 입장에서 광복이 또 다른 간섭과 내전으로 이어질 것임을 예감한 현실적인 반응이었던 셈이다. <곤 투모로우>에서 고종에게 토로하는 독립운동가 한정훈의 피맺힌 절규가 귓전을 맴돈다. “조선이 조선으로 완전한 나라, 사람이 사람으로 당당한 나라, 그 나라가 이리도 갈 수 없는 나라입니까”라는 질문은 지금 이 시대에도 유효해 보인다. <곤 투모로우>는 10월 22일, <22년 2개월>은 11월 5일, <제시의 일기>는 10월 29일까지 상연한다.
- 이주영의 연뮤 덕질기
- [이기환의 Hi-story](50)독립운동가의 서훈 등급, 재평가 필요하다(2022. 09. 16 14:50)
- 2022. 09. 16 14:50 문화/과학
- 임진왜란 발발과 함께 의주로 줄행랑친 선조의 말을 끌던 마부 오연이 호성공신(3등)으로 선정되면서 받은 교서 /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소장 ‘쑨원(孫文), 장제스(蔣介石), 쑹메이링(宋美齡), 천치메이(陳其美), 천궈푸(陳果夫)….’ 이분들이 누구냐고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1만7588건) 중에서도 최고등급인 ‘대한민국장’을 받은 33건 중 외국인 명단인데요. 5명 모두 중국인입니다. 이중 중국 혁명의 아버지인 쑨원(1866~1925), 중국 국민당 주석이자 중화민국 총통을 지낸 장제스(1887~1975)와 그 부인인 쑹메이링(1897~2003) 정도는 알 것이고요. 세 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쑨원)와 독립운동(장제스·쑹메이링)을 지원한 공로로 최고등급인 대한민국장을 받았답니다. 독립유공자 1·2등급에 포함된 중국인 15명 그런데 같은 ‘대한민국장’ 수여자인 천치메이(1878~1916)와 천궈푸(1892~1951), 두 사람은 좀 낯설죠. 천치메이는 1910년대 신규식(1879 ~1922) 선생과 함께 신아동제사를 조직해 한중 혁명 활동을 전개했답니다. 천궈푸는 1913년 조소앙(1887~1958) 선생 등과 함께 대동당을 조직해 항일 합동 투쟁을 전개했고요. 1942년 중국 정부의 중앙조직부장으로서 광복군과 함께 항일전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중국 땅에서 펼쳐야 했던 항일투쟁에서 쑨원이나 장제스, 쑹메이링 같은 중국 지도층의 협력과 지원은 절대적이었죠. 또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천궈푸와 천치메이 같은 분들의 도움도 컸을 겁니다. 역시 같은 이유(독립운동 지원)로 대통령장(2등급)을 받은 92건 중 중국인이 10명(11%)이나 됩니다. 대한민국장(33건)과 대통령장(92건) 등 1·2등급 서훈대상자(125건) 중 12%(15명)가 중국인이라는 얘기죠. 헐버트와 베델의 서훈 제가 간과했던 문제가 얼마 전에 제기됐는데요. 호머 헐버트 박사(1863 ~1949)의 73주기 추모식에서 “헐버트 박사의 서훈 등급(3등급·독립장)을 하루빨리 1등급(대한민국장)으로 높여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 겁니다. 헐버트 박사가 누구입니까. 1886년 왕립 영어학교(육영공원) 교수로 입국한 이후 한국을 위해 평생을 바친 분이죠. 최초의 한글 세계지리서인 <사민필지>를 펴냈고, 한글의 우수성을 미국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렸죠. 또 세 번이나 고종의 특사로도 활약했습니다. 이 헐버트 박사에게 고작 3등급인 독립장이 수여됐습니다. 어니스트 베델은 1904년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해 통감부의 탄압에 맞서 한국의 국권수호를 위해 필봉을 휘둘렀다. 특히 호머 헐버트와 함께 일본 궁내부 장관 다나카 미쓰야키의 경천사 10층탑 강탈사건을 집요하게 파헤쳐 반환을 이끌어냈다. / 어니스트 베델(1872~1909) / 국가보훈처 소장 영국 출신의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1872~1909)은 어떨까요. 1904년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분이죠. 이후 통감부의 탄압에 맞서 한국의 국권수호를 위해 필봉을 휘둘렀죠. 헐버트와 함께 일본 궁내부 장관 다나카 미쓰야키(田中光顯·1843~1939)의 경천사 10층탑 강탈사건을 집요하게 파헤쳐 반환을 이끌어냈고요. 그런 베델은 독립유공자 서훈에서 2등급(대통령장)을 받았습니다. 결단코 베델의 서훈 등급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고요. 한글 연구와 보급, 한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헐버트 박사가 3등급이라는 게 잘못됐다는 얘기입니다. 또 두 분의 등급이 같은 외국인으로서 1등급 대우를 받은 천치메이, 천궈푸에 견줘 왜 낮은 건지도 의문이 듭니다. 들쭉날쭉한 서훈 등급 아닌 게 아니라 서훈 등급의 문제점이 계속 지적돼왔는데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낸 이동녕(1869~1940) 선생과 독립협회 부회장으로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던 이상재 선생(1851~1927), 역사학자이자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조직에 참여한 신채호(1880~1936), 대한광복회의 총사령관을 지낸 박상진 선생(1884~1921) 등도 2등급(대통령장)을 받았습니다. 의병장 유인석(1842~1915)과 신돌석(1878~1908),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진 이봉창(1901~1932), 매국노 이완용을 습격한 이재명(1887~1910), ‘여자 안중근’ 남자현(1872~1933) 선생 등도 대통령장을 받았습니다. 6형제가 전재산을 팔아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펼친 이회영 선생(1867~1932)은 고작 3등급(독립장)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정부가 독립유공자의 명단 208명을 발표한 때가 1962년 2월 23일이었는데요. 이때 김구·안창호·안중근 등 18명이 1등급, 신채호·신돌석·이위종·이상설 등 58명이 2등급, 유관순·김도현·김마리아·장지연·이회영 등 132명이 3등급을 받았습니다. 심사는 <조선독립운동혈사> 등 문헌자료 12권을 바탕으로 했는데요. ‘국시(國是) 위배’, ‘정치적 과오’, ‘납북’, ‘변절’, ‘해방 후 월남하지 않은 자’, ‘확인할 만한 기록이 없는 경우’ 등 6가지 예외 규정을 두었답니다. 1962년이라면 해방된 지 20년도 채 지나지 않은 때였습니다. 해방~한국전쟁~4·19혁명~5·16군사정변 등 어수선한 정국에서 정확한 자료에 의한 심사가 제대로 이뤄졌겠습니까. 3·1운동의 상징인 유관순 열사가 왜 1등급 대우를 받지 못했는지도 의아한 대목이고요. 더욱이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음에 따라 친일행적이 드러났거나 의심스러운 자들이 유공자로 신분세탁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 분단과 전쟁, 냉전의 와중에 상당수 독립운동가가 공산주의자와 부역자의 낙인이 찍혔고요. 세월이 지나 새로운 자료가 나오고, 정세도 바뀌면서 등급의 재심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됐는데요.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동일한 공적에 대해서는 훈장 또는 포장을 거듭 수여하지 않는다”는 ‘상훈법’ 제4조가 걸림돌입니다. 그래서 등급 조정 여론이 거셌던 유관순 열사와 여운형 선생(1886~1947), 2021년 카자흐스탄에서 유해가 송환된 홍범도 장군(1868~1943) 등 세 분은 기존의 대통령장(2등급) 외에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가’했습니다. 현행 상훈법에 따라 재심사 절차가 마련돼 있지 않아 ‘공적 추가’의 형식을 쓴 겁니다. 2022년 9월 현재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1만7588건 가운데 1등급(대한민국장)과 2등급(대통령장) 대상자는 125명이다. 그중 외국인은 대한민국장 5명, 대통령장 11명 등 총 16명인데 중국인이 15명이다. 전체 1·2등급 대상자의 12%에 달한다. 그들의 공적은 ‘독립운동 지원’이다. / 국가보훈처 소장 내시·마부가 공신록 오른 이유 이 대목에서 조선조 선조 때의 공신 서훈을 둘러싼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선조실록> 1604년(선조 37) 기사를 볼까요. “호종공신이 80명이 넘는다니 과하다. 그중 내시가 24명이며 미천한 자들이 또 20여명이다”(6월 25일)라 했는데요. 이날 발표된 선조의 공신 교서 내용을 전한 사관의 논평이 의미심장합니다. “임진왜란 때 정인홍(1535~1623)·김면(1541~1593)·곽재우(1552~1617)는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김천일(1537~1593)·고경명(1533~1592)·조헌(1544~1592)은 충청과 호남에서 죽었다. 그들의 공적은 너무도 찬란하고 열렬하여….” 사관의 논평을 정리해보죠. 하나는 공신 중에 허접한 인물이 너무 많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곽재우 등 의병들의 공이 너무 폄훼됐다는 겁니다. 대체 어떤 내막이 있었을까요. 이날 발표된 공신은 세 부류로 나뉘었는데요. 임진왜란 때 선조의 의주행을 수행한 86명은 ‘호성(扈聖)공신’이 됐습니다. ‘임금(聖)을 호위(扈)한 공신’이라는 거죠. 또 전쟁터에서 왜적을 토벌한 장수 등 18명은 ‘선무(宣武)공신’이 됐습니다. ‘무공(武)을 떨쳤다(宣)’는 의미죠. 또 전란 도중(1595) 터진 이몽학(?~1596)의 반란을 진압한 5명은 ‘청난(淸亂)공신’이 됐습니다. 어째 좀 이상하죠. 7년이나 전쟁을 치렀는데, 전장에서 공을 세운 선무공신(18명)보다 의주로 도망간 임금을 수행한 호성공신의 숫자(86명)가 5배 가까이 많으니까요. 특히 호성공신 중에는 신분이 낮은 인물이 많았습니다. 내시가 24명이 포함됐고요. 임금의 어가를 모는 마부 6명, 의관 2명, 왕명을 전달하는 하급관리 2명이 들어갔습니다. 의관 중에는 <동의보감>을 편찬한 허준(1539~1615·호성 3등)도 포함됐죠.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삼십육계 줄행랑을 택했죠. “임금이 경성을 떠날 때… 명공 대신들이 임금 곁을 떠났고, 의주까지 따라간 문무관은 겨우 17인이었다. 그밖에 환관 수십명과 어의 허준 등이… 떠나지 않았다. 임금이 ‘사대부가 너희만도 못하구나!’ 하고 한탄했다.”(<선조수정실록> 1592년 6월 1일) 선조는 임진왜란 공신책록이 끝난 지 1년 만인 1605년 무려 9060명에게 ‘선무원종공신’의 작위를 줬다. 이때 곽재우 등 의병장들도 대거 포함됐다. 그러나 선무공신이 아닌 선무원종공신은 선심성 대접에 불과했다. / 국가보훈처 소장 선조는 의주 도망길에 ‘명공대신’과 ‘사대부’의 배신을 목도했습니다. 그랬기에 어려운 시기에도 임금을 끝까지 지켜준 측근들에게 공신의 직위를 내리고 싶었겠죠. 비록 천한 신분이었지만 제 몸보신을 위해 줄행랑친 지체 높은 자들보다 훨씬 의리 있는 사람들이죠. 그런 면에서 사관들의 비판은 과한 측면이 있습니다. 의병장 홀대한 못난 임금 사실 선조의 공신 서훈이 문제가 된 것은 따로 있습니다. 무공을 세운 장수와 의병장들을 홀대했다는 겁니다. 즉 선조는 공신 책록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이상한 말을 합니다. “이순신(1545~1598), 원균(1540 ~1597), 권율(1537~1599) 등은 다소간의 전공을 세웠다…. 적을 평정한 것은 오직 중국 군대의 힘…. 조선군은 제힘으로는 적병 한명도 베지 못했고, 적진을 한곳도 함락시키지 못했다.”(<선조실록> 1601년 3월 14일) 다음 말이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중국 군대가 지원군을 보낸 연유가 무엇인가. 과인을 호종한 신하들 덕분이다. 이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따라 의주까지 갔기 때문에 내가 중국에 호소할 수 있었다. 그래서 왜적을 토벌하고 강토를 회복하게 됐다.” 이것이 호성공신(86명)이 선무공신(18명)을 압도한 이유입니다. 기가 찬 발언이죠. 따져봅시다. 전란이 일어나자 임금은 줄행랑치기에 바빴죠. 그러나 어떻습니까. 전국 각지에서 못난 임금을 향한 충성심 때문에, 부모형제를 위한 효심 때문에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죠. 이분들이 사대부를 중심으로 천민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지에서 활약한 의병들이었죠. 다급했던 선조는 처음에는 의병장들에게 관직을 제수하면서 의병의 봉기를 크게 북돋아주었죠. 의병장 곽재우에게는 “내가 그(곽재우)의 이름을 늦게 들은 것이 한스럽다”고 했고, 또 다른 의병장 고경명·김천일의 서울수복 의지를 담은 보고를 접한 뒤에는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라고 했습니다. 선조는 “전국의 백성은 분연히 왜적과 맞서야 한다”면서 “너희(의병)가 힘을 합해 경성에 들어와 나(선조)의 행차를 맞으면, 너희는 아름다운 이름을 누리고 그 은택은 대대손손 미칠 것”(<난중잡록> 1592년 8월 4일)이라고 약속합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어떻게 했습니까. “너희(조선군대와 의병)가 한 일이 뭐냐”고 깔아뭉갰습니다.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요. 못난 임금은 전란으로 피폐해진 백성이 의병장의 지휘 아래 무능한 조정을 향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했을 겁니다. 곽재우의 공이 9060분의 1? 18명의 선무공신 명단에 들지 못한 곽재우 등 의병장들은 이듬해(1605) 4월 16일 선무원종공신 명단에 이름을 올립니다. 그러나 정공신(正功臣)이 아니라 원종(原從), 즉 ‘공신대우’의 대접을 받았습니다. 이때 인정된 원종공신의 수가 무려 9060명입니다. 아무렴 곽재우를 비롯한 김면·김천일·고경명 등 의병장들의 공이 고작 ‘9060분의 1’이라는 말입니까. 그런데 선조가 원종공신 교서를 내리면서 또 한 번 대못을 박습니다. “너희들의 공은 작고, 중국의 은혜는 크다…. 그러나 그대들의 공이 작을지라도 갚지 아니할 수 없기에….” 독립운동가들이 유공자 서훈을 받으려고 투쟁을 벌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분들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해야 하는 것이 후손들의 몫이다. 첫 번째 명단을 발표한 것(1962)이 꼭 60년이 지났다. 이제 재평가 작업을 벌여야 할 때가 됐다. / 국가보훈처 소장 참으로 속 좁은 군주의, 참으로 지긋지긋한 ‘중국’ 타령이 아닙니까. 이후 여러차례 조정에 나와 출사하라는 명령에 곽재우 장군의 언급이 심금을 울리죠. “신은 왜적의 토벌로 관직에 제수됐습니다. 왜적이 물러갔으면 신 역시 마땅히 물러나야 합니다. 훗날 국가에 변란이 있을 경우 마땅히 다시 나와 사졸들의 선봉이 되겠습니다.”(<광해군일기> 1617년 4월 27일) 지금 이 순간, 독립유공자 서훈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분들이 무슨 등급이나 잘 받으려고 독립운동을 했겠습니까. 하지만 친일파가 호의호식할 때 나라의 국권 수호와 독립을 위해 피를 흘린 분들이 아닙니까. 그분들의 자취와 흔적을 찾아주고 제대로 대접하는 것이 후손의 몫이겠죠. 독립유공자들의 명단을 첫 번째 발표한 후 꼭 60년이 지나고 있네요. 재평가 작업, 반드시 해야 할 과제가 아닐까요.
- 이기환의 Hi-story
- [우정이야기]혁혁한 공을 세운 여성 독립운동가 4인(2019. 03. 18 14:11)
- 2019. 03. 18 14:11 경제
- “그럼 누가 합니까.” 유관순 열사를 다룬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에 나오는 대사다. 유관순은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한 옥중투쟁을 멈추지 않는다. 배식을 담당하던 이가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요?”라고 묻자 내놓은 답이다. 주체적 인간의 면모를 느끼게 한다. 우정사업본부는 3월 15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에 헌신한 여성운동가 4명의 모습을 담은 우표를 발행했다. 일제의 강압적 식민통치에 맞서 한민족의 자주독립을 외친 여성은 유관순 열사만이 아니다. 역사 속에 여성 독립운동가는 묻혔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우정사업본부가 독립운동사에 혁혁한 업적을 남긴 여성 독립운동가 4명을 우표로 소개했다. 안경신(1888~?)·김마리아(1892~1944)·권기옥(1901~1988)·박차정(1910~1944) 선생이 그 주인공이다. 안경신 선생은 ‘항일투쟁의 여전사’였다. 독립을 위해 무력 사용도 불사했던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다. 그는 서간도에서 대한애국부인회 결성을 주도했다. 대한애국부인회는 3·1 독립선언서보다 한 달 앞서 ‘대한독립여자선언서’를 채택했다. 안 선생은 대한애국부인회의 교통부원으로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안 선생은 1920년 8월 3일 평남도청에 폭탄을 투척했다. 거사 당시 안 선생은 임신 중이었다. 이 폭탄 투척사건으로 10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김마리아 선생은 여성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다. 그는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이를 이끌었다. 전국에 흩어져 있던 여성 독립운동단체와 운동가를 하나로 묶은 단체였다. 당연히 여성 독립운동단체 중 규모가 가장 컸다. 그는 1919년 재일 유학생이 주도한 2·8 독립선언에 참여했다. 선언문을 국내로 반입했다. 또 미국으로 건너가 1928년에 ‘근화회’를 조직했다. 한인의 애국심을 일깨우고 서방국가에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단체였다. 밀고자에 의해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활동이 일본 경찰에 알려졌다. 결국 모진 고문을 당했다. 후유증으로 평생을 고생하다 광복을 1년 앞두고 운명했다. 권기옥 선생은 민족시인 이상화의 형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상정의 아내였다. 또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공군비행사였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공군 창설의 산파 역할을 했다. 여성 독립운동사는 물론 여성사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그는 평양 숭의여학교 재학 시절 학교 비밀결사대인 송죽회에 가입하면서 독립운동과 인연을 맺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채를 판매하는 등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했다. 평양청년회 여자전도대를 조직했다.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공작과 자금 모금, 무기 수급 등 다양한 활약을 했다. 이 때문에 두 차례나 옥고를 치렀다. 중국 공군에서 비행사로 근무하면서 1935년 일본 도쿄 비행 명령을 받았다. 일왕의 궁전에 폭탄 투하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비행 계획이 철회되면서 그의 계획도 수포로 돌아갔다. 박차정 선생 집안은 독립투사의 가문이다. 아버지 박용한 선생은 자결로 일제에 항의했다. 둘째오빠 박문호 선생과 사촌오빠 김두봉 선생도 독립투사(의열단원)였다. 일찍이 항일의식이 몸에 배었다. 일신여학교(동래여고 전신) 재학 시절 부산에 있는 11개 여학교가 연대시위를 벌인 ‘근우회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옥고를 치렀다. 둘째오빠의 활동무대였던 중국으로 망명했다. 여기서 의열단 단장이던 약산 김원봉 선생을 만나 결혼했다. 박 선생은 의열단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여성 교관으로 활동했다. 그는 민족혁명당 산하기관인 남경조선부인회를 결성, 여성·민족 해방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으로 항일 무장투쟁도 전개했다. 1939년 중국 곤륜관 전투에서 일본군 총탄에 맞고 큰 부상을 입게 된다. 결국 그는 해방을 한 해 앞둔 1944년 먼 타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 우정이야기
- 무대에 오르는 여성 독립운동가 이야기(2019. 02. 18 15:32)
- 2019. 02. 18 15:32 문화/과학
- 그동안 잘 부각되지 않았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만큼 문화계에서도 공연을 비롯한 기념사업 및 행사 열기가 뜨겁다. 100년 전 3월 1일. 일제가 강점한 한반도는 물론 세계 곳곳의 한인 거주지역에서 시민의 자발적 저항운동이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했다. 3·1운동이 확산되면서 1919년 4월에는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수립됐다. 헌법에도 명시할 정도로 지금의 대한민국 정부가 뿌리를 두고 있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이 100주년을 맞는 만큼 문화계에서도 공연을 비롯한 기념사업 및 행사 열기가 뜨겁다. 특히 관객의 눈길을 끄는 부분은 그동안 잘 부각되지 않았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는 점이다. 2·8독립선언 100주년을 맞은 2월 8일 서울 정동 배재어린이공원에서 ‘항일독립운동여성상’ 제막식이 열리고 있다. / 강윤중 기자 그동안 독립운동가를 재조명해온 흐름에는 몇 가지 특징적인 분기점이 있었다. 해방 이후부터 독립운동가로 명망이 높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숨겨져 있던 친일 행적이 밝혀지면서 재평가를 받는 경우, 그리고 사회주의 이념에 바탕을 두고 독립운동을 했지만 분단 이후 월북했다는 등의 이유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다 뒤늦게 빛을 본 경우다. 이런 맥락에서 3·1운동 및 임정 수립 100주년을 맞아 활발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재조명은 새로운 흐름인 셈이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100년 전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달라진 상황에서 시대적 한계에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통해 여성들이 주체적 입지를 다진 출발점을 돌아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융·복합 무용극을 표방하는 <여성독립운동가열전>은 이러한 흐름을 잘 반영한 공연이다.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남성 중심 독립운동사에서 보조적인 역할만을 담당했을 것으로 여겨진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한국적인 음악과 춤, 당시 영상과 사진자료를 활용해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아내인 이은숙 여사(1889∼1979)가 대표적이다. 이 여사는 우당과 결혼 2년 만인 1910년 12월 해외에서 독립운동의 터전을 일구겠다는 각오로 낳은 지 1년도 안된 딸을 안고 온가족과 함께 서간도로 망명했다. 당시 우당을 비롯한 고성 이씨 집안 6형제는 모든 가산을 처분하고 이주해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등 막대한 돈을 들여 독립운동을 지원했기 때문에 집안 살림을 맡았던 이 여사의 어려움은 더 커졌다. 융·복합 무용극 <여성독립운동가열전> 주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살림을 꾸려가는 녹록지 않은 삶의 모습은 그의 회고록 <서간도 시종기>에 자세히 담겨 있다. “하루 잘해야 일중식(日中食·점심 한끼)이나 하고 그렇지 않으면 절화(밥을 짓지 못함)하기를 한 달이면 반이 넘으니 생불여사(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이나 비슷한 곤궁)로다”라고 회고록에 적을 정도였다. 이런 환경에서도 이 여사는 수시로 집에 방문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융숭한 대접을 아끼지 않았다고 전해졌다. 결국 이 여사는 여성이라는 장점을 활용해 직접 국내로 들어와 독립운동 자금을 구하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일제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아낙의 모습을 하고 한반도와 간도를 넘나들며 독립운동에 헌신한 것이다. 이 여사는 “매일 빨래하고 만져서 주야로 옷을 지어도 한 달 수입이란 겨우 20원가량 되니,…우당장(이회영)께서는 무슨 돈인 줄도 모르시면서 받아쓰시니 이렇게 해서라도 보내 드리게 되는 것만도 나로서는 다행일 뿐”이라고 자금 확보와 전달과정에서의 어려움을 기록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우당에 비해 이 여사는 지난해 광복절에야 건국훈장을 받았다. 부부 모두의 독립운동이 후세의 평가를 받기까지 56년의 세월이 걸렸던 것이다. 감시가 덜한 여성이라는 점을 이용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역할을 맡은 점은 정정화 여사(1900~1991)의 독립운동 활약상도 비슷하다. 정 여사는 중국과 한반도를 오가며 10여년 동안 임정의 자금모금책이자 연락책으로 활동했다. 이은숙 여사가 간도에 자리잡은 독립운동 세력의 살림꾼 역할을 했다면 정정화 여사는 상하이를 중심으로 활동한 임시정부 전반의 안주인 역할을 맡았다. 중국에 망명한 27년 동안 김구, 이동녕 등 임정요인 및 그 가족들을 돌보는 일을 도맡는 한편, 1940년에는 한국혁명여성동맹을 조직하고 1943년 대한애국부인회 훈련부장이 되는 등 여성에게 주어진 역할만을 수용하는 대신 주체적인 활동에도 앞장섰다. 그러나 정 여사 역시 임시정부의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로 당대에는 알려졌지만 후대의 재평가는 뒤늦었다. 해방 후 미군정의 홀대 때문에 1946년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한 데 이어 오랫동안 함께 활동했던 김구 선생이 암살되며 정치적 입지가 축소된 탓이다. 한국전쟁 중 남편인 김의한 선생이 납북되면서 남한에 남은 정 여사는 부역죄로 투옥되기도 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1982년에야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을 정도로 해방 후 일생이 순탄치 못했지만 생전에 훈장을 받고 회고록도 남겨 이번 <여성독립운동가열전> 등의 공연에서도 생생한 이야기가 담겼다. 이은숙·정정화 여사, 자금 모금책 유관순 열사 외에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이 크게 주목받지 못한 한계는 유관순 열사의 스승이었던 김란사 여사(1872~1919)가 본명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점에서 잘 나타난다. 창작 노래극인 <100년 후, 꿈꾸었던 세상>이 기리는 김란사 여사는 그동안 남편의 성이 붙어 ‘하란사’로 이름이 잘못 알려지는 등 역사적 조명을 받지 못했던 인물이다. 김 여사는 일제강점기 이화학당 학생단체인 ‘이화문학회’를 지도하면서 유관순 열사에게 이문회 가입을 권유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독립운동 과정에서 진행한 구체적인 행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김 여사는 1916년 미국에서 열린 세계 감리교 총회에 평신도 대표로 참석하는 한편 고종의 지시로 1919년 6월 파리 강화회의에서 독립을 승인받도록 열강들을 설득하는 특사로도 활동했다. 김 여사가 고종의 특사로 해외를 누비다 중국 베이징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기까지 활동하는 모습은 인천시립극단과 무용단, 교향악단, 합창단 등 4개 예술단이 합동 공연하는 이번 공연에서 재구성돼 무대에 오른다. 김 여사의 생애를 중심으로 역사의 그늘에 가려졌던 여성들의 독립운동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는 주제의식이 담겼다. 최원종 연출가는 “독립운동 관련한 많은 자료를 모으고 작가적 상상력을 대입하면서 3·1운동 정신을 계승하는 한편, 동시대성도 살릴 수 있는 여성 독립운동가 김란사 여사에게 주목했다”며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 외에도 전면에 나서지 못한 채로 역사 속에 묻힌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있다는 점이 연출 의지를 북돋웠다”고 말했다. 알려지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총망라하는 작업은 학술연구를 통해 진척되고 있다.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가 3·1운동 및 임정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발간하는 <여성독립운동가 인명록>, <나는 여성이고, 독립운동가입니다> 등의 관련 서적이 출간을 앞두고 있다.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심옥주 소장은 “특히 작년과 올해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공적을 인정받고 발굴되었지만 아직도 무명의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너무 많다”며 “발굴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여성 독립운동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여성 독립운동 연구센터 건립 등 국가적 관심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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