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18 건 검색)
- [역사와 현실] 동아시아의 반공주의
- 2023. 06. 08 03:00오피니언
- ... 한·미 동맹을 체결했다. 그들의 운명은 판이했지만 당시 미국이나 유럽보다 더 강력했던 동아시아 보수 정치가들의 반공주의가 어떤 배경에서 나왔던 것인지 궁금해진다.
- 역사와 현실이승만동아시아반공주의공산주의자
- 예술로 역사적 상처 보듬고 동아시아의 평화 외치다
- 2019. 12. 18 20:45문화
- ... 비롯, 베트남·홍콩 등 모두 44명 작가의 70여점이 출품된 ‘섬의 노래’는 역사적 상처와 고통을 위로하고 동아시아 평화, 예술가들의 연대 의미를 담은 다양한 작품이 관객을 맞는다. 특별전은...
- 동아시아평화예술프로젝트 표현의 부자유 제주 오키나와 대만 일본 섬의 노래
- 이장희 교수 ‘동아시아 역사NGO포럼’ 상임대표 선출
- 2016. 03. 06 20:58인물
- ... 한국외국어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66·사진)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역사NGO포럼’ 신임 상임대표(이사장)로 선출됐다. 역사NGO포럼은 지난달 말 정기총회를 열고 이삼열 전 유네스코...
- “동아시아 역사 제대로 이해하려면 서구·근대 중심 시각에서 벗어나야”
- 2015. 12. 08 21:30문화
- ... ‘서구중심주의’에 입각한 역사인식으로는 동아시아의 역사적 경험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고... 있었다”면서 “오늘날 관료제가 문제라면 동아시아의 역사를 통해 그에 대한 극복방안도 고민할 수 있을...
스포츠경향(총 1 건 검색)
- [스경의 한 줄 책] 한중일 역사를 한 줄로 꿴 '옆으로 보는 동아시아 삼국지'
- 2018. 07. 01 17:47 생활
- <옆으로 읽는 동아시아 삼국지> 이희진 지음, 동아시아 펴냄 “반만년에 해당하는 역사를 정리하면서 느낀 점인데, 재정(財政)을 중심으로 한 내부 운영이 국가 존립의 핵심이라는 사실이다. 중원을 장악했던 대제국의 경우, 단순히 외부의 침략만으로 무너지는 경우는 보기 어렵다. 대부분 내부에서부터 무너져가는 상황에서 외부의 충격을 받고 붕괴되었던 것이다.” ***************** 고려사회의 내부는 폐쇄적으로 운영되었지만, 대외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문화적으로 동경하던 송과 활발하게 교류했음은 물론, 정치적으로경계하던 거란 등 북방 민족과의 무역도 폐쇄된 것은 아니다. 활발한 대외교류의 결과, 개경의 외항인 벽란도에는 중국, 일본, 아라비아, 페르시아 등지의 상인들이 와서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53쪽 원과 화의를 맺은 고려는 원의 일본 정벌에 동원되었다. 화친을 모색할 때부터 고려를 일본 정벌에 이용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원 세조 쿠빌라이는, 1266년 사절을 파견해 고려가 길잡이 역할을 해줄 것을 요구했다. … 쿠빌라이는 이후에도 일본 원정에 미련을 보였다. 여러 번 원정 준비가 반복되었고 고려는 그때마다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이렇게 반복해서 추진되었던 일본 원정은 1294년에 쿠빌라이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완전히 중단되었다. 그렇지만 고려는 원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226쪽 조선 전기의 여론은 재상이나 대신들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조선 후기의 여론은 낭관(郎官)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이것이 사림정치의 틀이다. 이러한 틀을 통하여 재상이 주도하던 고려와 조선 초기의 정국을, 사림이 주도하는 정국으로 바꾼 것이다. 이러한 틀은 1741년, 탕평정치를 시작하면서 전랑권(銓郞權)이 없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381쪽 14세기 이후 약 200년 동안 안정을 유지하던 동아시아는 16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조선의 주변 국가인 중국과 여진, 일본 모두 자체적인 혼란에 휩싸여 대전란의 조짐이 싹트고 있었다. 보통 동아시아의 정세는 대륙의 변화가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파급되는 것이 일반적인 양상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일본에서 생긴 분란이 한반도를 거쳐 명에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 만주의 여진족이 급속하게 성장함으로써 동아시아 정세는 더욱 긴박하게 돌아갔다. 이런 와중에 명의 국력이 쇠퇴하며 북방 이민족과 왜구의 침략이 잦아졌다.16세기 후반의 전란은 기본적으로 명의 쇠퇴가 원인이라 할 수 있다. -381쪽 조선이 1592년부터 수년 동안 일본과 전쟁을 치르고 1636년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노비들이 큰 공을 세움으로써 양인이 되기도 했다. 또한 국가에서는 부족한 재정을 보충한다는 목적으로 나라에 곡식을 바치면 양인이 되는 기회를 주었다. 한편 조선 후기에는 그동안 법으로 엄격하게 금했던 양인과 천인의 통혼이 흔해졌다. 그 때문에 그들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어떤 신분으로 할 것인지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492쪽
- 스경의 한 줄 책
주간경향(총 1 건 검색)
- [이곳&이야기]동아시아 한류 이끈 백제역사유적지구(2019. 07. 26 17:56)
- 2019. 07. 26 17:56 사회
- ㆍ세계문화유산인 충남 공주·부여, 전북 익산 등 3개 지역 8개 유적지 기원전 18년 건국해 660년 멸망할 때까지 700년간 존속한 고대왕국 백제는 고구려, 신라와 함께 초기 삼국 중 하나였다. 백제의 문화와 종교, 건축·예술미 등은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에서 만나볼 수 있다. 세계문화유산은 국제연합 전문기구인 유네스코가 인류문명과 자연유산 중 중요한 가치가 있는 유산을 전 인류가 공동으로 보존하고 이를 후손에게 전수해야 할 세계적 유산으로 지정하는 것이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백제의 옛 수도였던 충남 공주·부여, 전북 익산 등 3개 지역에 분포된 8개 유적으로 구성됐다. 최근 이동주 백제세계유산센터장 등의 도움을 받아 이들 지역을 돌아봤다. 충남 부여군에 위치한 정림사지. / 백제세계유산센터 제공 처음 찾은 곳은 전북 익산시에 위치한 미륵사지(사적 제150호)다. 미륵산(429.6m) 자락을 배경으로 펼쳐진 미륵사지는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사찰터였음을 짐작케 했다. 미륵사는 신라 선화공주와 결혼한 뒤 왕이 된 백제의 서동(무왕·재위 600∼641)이 자신의 고향에 세운 사찰이다. 동아시아 최대 사찰터 미륵사지 미륵사지에는 대형 목탑 양쪽에 동측 석탑과 서측 석탑(국보 제11호)이 있는 구조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훼손돼 20세기 초 목탑과 동탑은 사라졌고, 서탑은 6층까지만 남은 채 일부가 무너졌다. 서탑의 경우 일제강점기 때 무너져 내린 한쪽 면이 콘크리트로 덧씌워지기도 했다. 동탑은 1992년 재건됐고, 서탑은 2001년부터 콘크리트를 정으로 하나하나 깨고 걷어내는 작업을 거쳐 올해 4월 6층 규모로 복원됐다. 미륵사지에는 1997년 5월 문을 연 국립익산박물관도 위치했다. 5100여점의 출토 유물 일부가 전시돼 있고, 서탑 해체·복원 과정에서 발견한 부처의 사리를 봉안한 사리장엄구(보물 제1991호)도 볼 수 있다. 미륵사지에서 자동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는 왕궁리유적(사적 제408호)이 위치해 있다. 왕궁리유적은 무왕기에 조성된 왕궁터다. 1989년부터 실시된 발굴조사 결과 남쪽에는 정치와 관련된 건물이 위치했고, 북쪽에는 정원·후원 등이 배치된 것으로 확인됐다. 왕궁리유적에는 현재 왕궁리 5층석탑(국보 제289호)과 고대 화장실 등 건물이 있던 자리만 볼 수 있다. 최윤숙 왕궁리유적전시관 학예사는 “발굴조사 과정에서 이곳이 백제의 수도였음을 뜻하는 ‘수부’ 도장이 찍힌 기와 등 유물 1만2000여점이 출토됐다”며 “하지만 현재는 지상에 있던 건물을 고증할 수 있는 자료가 없어서 왕궁 건물 등에 대한 복원이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찾은 곳은 충남 부여군의 정림사지(사적 제301호)다. 이곳은 백제 사비시기(538∼660) 수도의 가장 중심에 위치한 사찰터다. 이 사찰터에서는 중문과 금당지, 강당지, 승방지, 화랑지 등이 확인됐다. 사지 중앙부에는 백제의 화려한 문화와 예술, 뛰어난 석조건축 기법을 확인할 수 있는 정림사지 5층석탑(국보 제9호)이 자리잡고 있다. 정림사지 5층석탑은 백제인의 돌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유적 중 하나다. 목탑의 구조와 비슷하지만 돌의 특성을 살려 전체적인 형태가 우아하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다. 충남 공주시에 위치한 송산리고분군. / 백제세계유산센터 제공 부여군 관북리유적(사적 제428호)과 부소산성(사적 제5호)에서는 백제의 마지막 도성인 사비의 왕궁 유적을 볼 수 있다. 관북리유적지에는 1m 아래에서 발굴된 1450여년 전 백제의 도로가 재현돼 있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연못인 연지도 있다. 이동주 백제세계유산센터장은 “관북리는 백제 성왕의 아들인 위덕왕(재위 554∼598) 시기 정권이 안정되면서 추가적으로 조성된 왕궁의 확장 권역으로 보인다”며 “동서남북의 방향을 측정해 격자형 도로를 만들었던 점 등에 미뤄 1500년 전 백제 사람들이 천문지리에 익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왕궁의 후원인 부소산성은 위급할 때 방어시설로 이용한 성으로 대형 건물지 등 왕궁 주요 시설과 정교한 판축토성(진흙을 개어 켜켜이 쌓은 토성)이 확인됐다. 부여군 나성(사적 제58호)은 사비의 동·북쪽을 방어하기 위해 구축한 외곽성이다. 북·서·남쪽은 금강이 자연적인 방어벽의 역할을 했다. 나성은 현재도 부여읍을 감싸며 원래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나성은 도시 방어 기능뿐만 아니라 도시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상징적 경계 역할도 했다. 온전하게 발굴된 무령왕릉 나성 밖에 위치한 능산리고분군(사적 제14호)은 공주시 송산리고분군(사적 제13호)과 함께 왕릉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모두 7기로 이뤄져 있다. 이 능은 발전된 백제의 석실분 형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송산리고분군 중 무령왕릉은 도굴되지 않은 채 온전하게 발굴돼 현재까지 주인공과 축조시기(525)가 확인된 유일한 백제 왕릉이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공주시에 위치한 공산성(사적 제12호)이다. 이곳은 웅진시기(475∼538) 산성으로 금강을 최대한 활용해 축조했다. 웅진은 백제의 두 번째 수도로 공주의 옛 이름이다. 이 성은 백제시대 도읍지인 공주를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백제 때는 웅진성으로 불리다가 고려시대 이후 공산성으로 불리게 됐다. 공산성은 산성 안에 왕궁과 주요 시설 등이 확인된 독특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총 길이가 2.6㎞에 달하는 성벽은 대부분 석성으로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토성을 쌓았지만 나중에 여러 차례 고쳐 쌓으며 석성으로 변화됐다. 내·외성으로 구분되는 토성의 외성은 백제시대 쌓았던 것으로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5∼7세기 백제는 중국으로부터 도시계획, 건축기술, 예술 등을 수용해 한 단계 더 발전시킨 뒤 일본 등으로 전하며 동북아시아의 문화를 진일보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백제역사유적지구에서는 한·중·일 고대 왕국의 교류와 발전, 백제의 독특하고 탁월한 역사와 문화를 만날 수 있다. 이동주 백제세계유산센터장은 “백제가 중국의 선진기술을 과감히 포용하고 자신들의 감성과 기술을 더해 화려하게 꽃피운 문화를 증명하는 것 중 하나가 백제역사유적지구”라며 “백제는 자신들이 꽃피운 문화를 바다 건너 일본에 전파해 일본의 아스카시대를 열게 하는 근본 바탕을 제시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동주 백제세계유산센터장은 이어 “백제역사유적지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은 단일 유산의 예술적 조형성 등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동아시아 한류를 이끌었던 백제에 대한 평가 때문”이라며 “한반도 5000년 역사에서 동아시아 문화를 주름잡으며 외국에 영향을 끼친 게 백제”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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