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34 건 검색)
- 북·러, ‘두만강 자동차 다리’ 내년 말 준공 추진
- 2025. 02. 04 11:00정치
- ... 말 준공을 목표로 추진한다. 4일 인테르팍스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 정부는 북·러 국경에 있는 두만강을 가로지르는 자동차 다리 설계 및 건설 계약자로 건설사인 톤넬유즈스트로이(TonnelYuzhStroy...
- 영화 <하얼빈>, 얼어붙은 두만강 건너 그곳으로 …고뇌하는 독립 투사들
- 2024. 12. 19 09:59문화
- ... 극한의 추위는 화면 밖을 뚫고 나온다. 그중에서도 동지를 모두 잃은 안중근(현빈)이 꽁꽁 언 두만강을 홀로 건너는 장면은 압도적이다. <기생충>, <곡성>으로 잘 알려진 홍경표 촬영...
- ‘두만강 자동차다리’ 진짜 생길까
- 2024. 06. 20 21:07정치
- ... 약속을 충실히 이행할지를 두고는 의구심도 제기된다. 이번 조약 체결을 계기로 북·러는 ‘두만강 국경 자동차다리 건설에 관한 협정’을 맺었다. 북한 라진시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하산 지역을...
- 푸틴 방북
- ‘두만강 자동차 다리’ 등 경제협력도···러시아 이행 여부 엔 의구심도
- 2024. 06. 20 18:13정치
- ... 라진시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하산 지역을 자동차 도로로 잇는 작업이다. 북·러는 2015년부터 두만강을 건너는 자동차 통행용 다리 건설을 협상해왔지만 진척을 내지 못했다. 건설 논의를 하는 다리는...
스포츠경향(총 2 건 검색)
- ‘눈물젖은 두만강’ 산실 ‘만춘려관’ 복원
- 2011. 07. 06 16:38 생활
- 민족의 애창곡 의 산실 ‘만춘려관’이 복원된다. 6일 연변 조선족자치주 도문시에 따르면 1930년대 두만강 변에 세워져 운영됐던 만춘려관 복원에 나서 이달 말 완공한 뒤 다음 달 8일 준공식을 할 계획이다. 도문과 북한 남양을 잇는 두만강 철교 상류에 위치한 두만강 나루터 부근에 세워지는 만춘려관은 ‘ㄴ’자 형태에 붉은색 벽돌을 쌓고 양철 지붕을 얹어 1930년대 만춘려관 모습을 재현한다. 복원되는 만춘려관은 원형에 가깝지만 원래 터에 이미 건축물이 들어서 있어 그부근에 건립되며 규모도 136㎡였던 옛 만춘려관보다는 다소 축소된 100㎡로 세워진다. 도문시 향토 사학자들은 객실 14개가 있었던 만춘려관은 일제 강점기였던 1930년대 도문 일대 최대의 여관으로, 독립운동이나 무역을 위해 두만강을 건너 간도를 오가던 조선인들이 즐겨 묵었고, 눈물 젖은 두만강 노래가 탄생한 산실로 보고 있다. 대중가요 연구가들에 따르면 1935년 간도 순회공연에 나섰던 유랑극단 ‘예원좌’가 만춘려관에 투숙했는데 이 극단의 지휘자 겸 작곡가였던 이시후씨가 밤새 흐느끼는 여인의 울음을 듣고 이튿날 여관 주인을 통해 사연을 물었다고 한다. 이 여인이 독립운동을 하던 남편을 수소문해 조선에서 두만강까지 찾아들었으나 이미 일본군에 의해 남편이 처형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밤새워 구슬피 울었다는 걸 알게 된 이씨는 밤을 새워 일제 강점기 두만강 유역에 서린 우리 민족의 애환을 담아 눈물젖은 두만강을 작사·작곡했다고 전한다. 예원좌의 소녀 가수 장성월이 간도 순회 공연에서 이 노래를 불러 관객들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고, 후에 서울로 돌아와 작곡가 김용호가 2, 3절의 노랫말을 짓고 1938년 고 김정구씨(1916-1998년)가 음반을 취입했다. 음반 발매 직후 조선총독부가 민족의식을 고취한다는 이유로 판매 금지 처분을 내렸던 이 노래는 해방과 함께 널리 불리면서 70여 년간 변함 없는 사랑을 받는 국민 애창곡으로 자리 잡았다.
- ‘눈물젖은 두만강’의 진실
- 2005. 07. 08 19:57 연예
- 고(故) 김정구(사진)의 ‘눈물 젖은 두만강’이 만들어진 동기와 과정이 북한 월간지 ‘천리마’ 최근호(5월호)에 소개됐다. 이 잡지는 이 노래를 ‘계몽기 가요’(일제 강점기에 나온 노래) 중 대표곡으로 꼽으며, 1930년대 중반 중국 동북지방을 순회공연 중이던 극단 ‘예원좌’의 작곡가 이시우가 지린(吉林)성 투먼(圖們)시의 한 여관에 머물 때 만든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이 노래의 가사는 당시 문학청년인 한명천이 썼는데, 작곡가인 이시우가 머물던 여관 주인의 사연과 독립군 활동 중 체포돼 유명을 달리한 남편 때문에 가슴이 메는 한 여인의 이야기를 노랫말로 옮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노래는 극단 예원좌의 장월성이라는 소녀배우가 공연 막간에 불러 관객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후 김용호 시인이 노래 가사를 다듬어 김정구의 노래로 OK레코드사에서 음반을 냈다. 레코드에는 작사자가 김용호로 올라 있다. 따라서 잡지는 이 노래가 한명천 원작, 김용호 개작, 이시우 작곡이 정확한 것이라고 밝혔다. 〈강석봉기자〉
주간경향(총 8 건 검색)
- [정윤수의 ‘서문이라도 읽자’]이문구의 “두만강 눈송이를 바라보며 한없이 울었다”(2018. 05. 08 10:18)
- 2018. 05. 08 10:18 문화/과학
- “차가 두만강 철교를 근너가는디… 오! 두만강… 오 두만강! 내 눈에는 무엇이 보였겄네? 눈! 그저 그 눈! 쌓인 눈, 쌓이는 눈… 아무것두 안 보이구 눈 천지더라. 그 눈을 쳐다보는 내 마음은 워땠겄네? 이 내 심정이 워땠겄어?” 이문구의 이문구의 <관촌수필>, 그 중 한 편인 ‘공산토월’은 한국문학사의 독보적이고 위엄 있는 단편으로 1973년에 발표되었다. 그 시절의 문단 풍습대로 늘 갑작스레 손님이 찾아들고, 늘 밥 대신 술국을 말아먹고, 그러다가 밤을 함께 보내게 되고, 또 아침이면 해장술을 하던 풍경이 그려진다. 대전의 시인 박용래가 서울의 친우 이문구를 만나러 온 것이다. 이문구는 박용래를 ‘정과 한에 어혈이 든 눈물의 시인’이라고 묘사한다. 그 눈물의 시인과 함께 아침 9시부터 ‘난로가 후끈한 중국집 식탁에 늘어붙어 창밖에 쏟아지는 함박눈을 내다보며 고량주를’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시인이 ‘불쑥 밑동 없는 말’을 한다. “왜정 때, 내가 조선은행(한국은행)에 댕길 적에 말여….” 박씨는 전재민같이 야윈 손가락으로 고량주 잔을 삼키고 나서 말했다. “조선은행권 현찰을 곳간차에 가득 싣고 경원선을 달리는디, 블라디보스톡까지 논스톱으루 달리는디 말여….” “경비원으루 묻어갔었다, 그 말이라….” “야, 너 웨 그러네? 웨 그려? 이래봬두 무장 경호원이 본인을 경호하던 시절이 있어야. 현찰 운송 책임을 내가 자원해서 했던 거여. 너 참 이상해졌다야. 웨 그려? 오~ 그 눈 … 그 눈송이… 그 두만강….” ‘정과 한에 어혈이 든 눈물의 시인’ 박용래 블라디보스톡까지 논스톱으로 달리는 경원선 기차! 안타깝게도 ‘왜정’ 때 일이다. 해방이 되었으나 전쟁이 일어났고 곧 분단이 되어 경의선이며 경원선이며 다 끊겨버려서 우리는 ‘블라디보스톡까지 논스톱’으로 달리는 기차에 의한 그 대륙적인 상상력을 다 잃어버리고 말았다. 휴전선으로 인한 지리적 상상력의 한계. 서울에서 북쪽으로 한두 시간이면 이 상상력은 끝나고 만다. 공간지리학의 관점에서 기차는 근대의 탄생이며 그 속도이며 그 상징이다. 이런 관점의 고전이 볼프강 쉬벨부쉬의 <철도 여행의 역사>다. 기차가 도입된 19세기 유럽을 시공간적 배경으로 하여 이 새로운 교통수단에 의하여 유럽(훗날에는 세계 전역)이 어떻게 지리적으로 재편되었는지, 그리고 기존의 시공간적 개념이나 일상생활의 테두리가 어떻게 급변하게 되었는지를 대중적으로 풀어 썼다. 이 책에서도 인용되고, 또 여러 학자들에 의하여 19세기 유럽 문화사를 다룰 때 반드시 인용되는, 하인리히 하이네의 진술이 있다. 1843년 파리에서 루앙 사이, 오를레앙 노선을 탄 경험을 바탕으로 시인 하이네는 다음과 같이 썼다. “무시무시한 전율, 결과를 예상할 수 없고 예측할 수도 없는 엄청난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가 느끼는 그런 무시무시한 느낌이었다. 철도의 등장은 인류에게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고, 삶의 색채와 형태를 바꾸어 놓는 숙명적인 사건이다. 이제 우리의 직관 방식과 우리의 표상에 어떤 변화가 생길 것임에 틀림없다! 심지어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들도 흔들리게 되었다. 철도를 통해서 공간은 살해당했다.” 여기서 ‘살해’라는 용어는 이중적이다. 이 말을 즉각적으로 들으면 기존의 ‘평화로운 농촌 공동체의 풍경’이 작살난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조금 골똘히 생각한다면 농촌경제 기반의 지리적 한계와 낡은 습속이 사라지고 근대문명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윌리엄 터너의 하이네는 음풍과 농월을 즐긴 고답적인 시인이 아니었다. 비록 ‘살해’라는 표현을 썼지만, 그것은 윌리엄 터너가 1844년에 그린 ‘비, 증기 그리고 속도’라는 그림과 같은 맥락이다. 그림의 왼쪽 하단에 보면, 엄청난 속도에 깜짝 놀라는 낚시꾼이 보인다. 기차는, 근대는 바로 그러한 목가적인 풍경을 ‘살해’한 것이다. 우리에게도 기차는 문명의 충격이고 충돌이었다. 이 분야의 독보적인 저작은 박천홍의 <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이다. 구한말에 부설된 각종 철도 노선에 의하여 이 한반도가 어떻게 재편되는지, 경성역(오늘의 서울역)을 중심으로 각지의 기차역들이 근대문명의 어떤 교두보가 되었는지, 그리하여 봉건과 근대, 식민과 독립의 모순과 긴장이 어떻게 철로 위에서 빚어졌는지 알 수 있다. 그 서문에서 박천홍은 “철도는 이성과 합리성의 세계를 열었다. 합리적 이성이 봉건적 전통과 관습을 짓누르며 우위를 점했다”고 썼다. 그러나 다만 그뿐일까. 박천홍은 그 압도적인 근대의 속도와 힘에 의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이 한반도의 작은 삶에 대해서도 바로 그 서문에서 애틋하게 덧붙였다. ‘블라디보스톡까지 논스톱’으로 달려 “기차는 내 어린 시절 기억의 서랍에 들어 있다. 내 고향은 전라남도 승주(현재 순천시)다. 고향마을의 맨 끝에 위치한 집에서 바라보면 멀리 기찻길이 보인다. 구례와 순천 사이를 굽이굽이 지나가는 전라선이다. 덜컹거리는 기차 소리는 논과 밭을 건너 희미하게 들려왔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철도공무원이었다(중략). 그에게는 유랑민의 흔적 같은 바람 냄새가 묻어 있었다. 아버지의 서늘한 품에 안기면 왠지 모를 서러움이 돋아났다.” 아 참, 이른 아침부터 중국집에 앉아서 술을 마시던 소설가와 시인 얘기를 마저 해야겠다. 실은 ‘4·27 판문점 선언’ 때문에 기차 타고 개성 거쳐 평양 가고 금강산 지나서 원산 가는 생각을 하다가 이문구의 소설을 떠올린 참이었다. 소설 속에서 박용래는 ‘블라디보스톡까지 논스톱’으로 가는 경원선을 추억하며 눈물을 흘린다. 아! 그렇게 먼 곳까지, 하염없이 내리는 거대한 폭설의 대륙을 가로지르는 기차를 타고 싶다. 조금 길지만 인용한다. 모두들 정독하여 훗날 ‘블라디보스톡까지 논스톱’으로 달리는 상상을 해보자. “이까짓 눈두 눈인 중 아네? 눈인 중 알어? 너두 한심허구나야…. 원산역을 지날 때 눈발이 비치더니, 청진을 지나니께 정신없이 쏟어지는디, 아, 그런 눈은 처음이었었어…. 아, 그 눈….” 박천홍의 그는 이미 떨리는 음성이었고 두 눈시울에는 벌써 삼수갑산 저문 산자락에 붐비던 눈송이가 녹으며 모여 토담 부엌 두멍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차가 두만강 철교를 근너가는디…. 오! 두만강…, 오 두만강! 내 눈에는 무엇이 보였겄네? 눈! 그저 그 눈! 쌓인 눈, 쌓이는 눈…. 아무것두 안 보이구 눈 천지더라. 그 눈을 쳐다보는 내 마음은 워땠겄네? 이 내 심정이 워땠겄어?” “워땠는지 내가 봤으야 알지유.” “그러냐. 야. 너두 되게 한심허구나야. 그래 가지구 무슨 문학을 헌다구. 나는… 나는 울었다. 그냥 울었다. 두만강 눈송이를 바라보며 한없이 한없이 그냥 울었단 말여….” 어느덧 그의 양어깨에 두만강 물너울이 실리면서 두 불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식민지 시대의 두만강이 흐르고 있었다.
- 정윤수의 ‘서문이라도 읽자’
- [간도오딧세이]“두만강과 압록강” 국경 인식을 깨자(2008. 10. 16)
- 2008. 10. 16 문화/과학
- 북한 교과서에 나타난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 천지 부분은 마치 북한 땅인 것처럼 표기해놓았다. 천지 옆으로 그어져 두만강 지류와 평행으로 연결한 것이 국경선이다. “이만하면 되지 않았나요?” 간도 이야기를 꺼내면 간혹 듣는 말이다. ‘이만하면’이란 뜻은 1962년 북한과 중국이 맺은 조·중 변계조약을 말한다. 이 변계조약에 따라 북한은 백두산 천지의 55%를 차지하고, 중국은 45%를 갖게 됐다. 두만강 경계선은 백두산 쪽 지류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홍토수를 기준으로 천지 경계선과 맞닿게 했다. 이 경계선으로 1909년 간도협약에 따른 석을수(두만강 지류) 경계선보다 약 280㎢이 늘어나게 됐다. 이 면적은 서울의 45%에 해당하는 넓이다. 북한과 중국이 맺은 비밀 협약이지만 ‘이만하면 만족스럽다’는 견해가 많다. 간도협약 때보다 땅덩어리가 많이 늘어났으며, 1712년 정계비 건립 당시 제외됐던 백두산 천지를 반쪽이나마 찾았기 때문이다. 이런 견해를 가진 이들의 영토 의식은 두만강과 압록강에 머물러 있다. 외교사를 전공한 노계현 전 창원대 학장은 ‘조선의 영토’(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부)라는 책의 서문에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19세기 후반까지 자유로이 왕래 두만강과 압록강은 국내 하천이나 군내(郡內) 하천 역할은 하였으나 국경 하천의 역할은 한 적이 없다. 따라서 이 지대를 지배하던 민족은 마치 오늘날 우리가 낙동강이나 한강을 넘나들 듯이 자유로이 왕래하였지 통제를 받거나 제어를 당하는 일이 없었다. 다만 두만강과 압록강을 국경이라고 규정지은 것은 1909년에 일본이 불법적으로 청국과 소위 간도협약이라는 것을 체결한 때부터다. 이 조약은 본문에서 상세히 설명한 바와 같이 원천적으로 무효다. 이 조약을 체결한 다음 해인 1910년에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이후 그들의 교육지침에 따라 두만강과 압록강이 국경이라고 교과서에 통해 가르쳤으며, 그 후로 두만강과 압록강이 우리에게 국경처럼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광복 이후에도 일본으로부터 교육받은 세대가 깊은 연구나 검토 없이 이 국경 문제를 그대로 후대에게 가르치고 있어 문제가 고착되어가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왜곡된 역사 인식을 타파하는 것이 우리 영토를 바로 볼 수 있는 첩경이다. 두만강과 압록강이 오래전 우리 조상의 국경선으로 생각되어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 노 전 학장의 주장이다. 20세기 이전만 하더라고 조선과 청은 뚜렷한 경계선을 갖지 못했다. 백두산 정계비조차 무리하게 그리고 잘못 경계를 짓는 바람에 혼돈만 불러일으켰다. 특히 19세기 후반에는 대다수 이주민이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가면서 우리나라의 국경의식은 확장됐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두만강 건너에서 남의 나라 땅에 산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들은 이곳에 정착해 벼농사를 지은 최초의 주민이었다. 북간도에 살던 사람들은 독립운동 시기를 거쳐 지금은 중국 내 조선족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들 덕분에 북한은 백두산 천지의 55%와 백두산 쪽 두만강 지류 중 가장 북쪽의 경계선이라는 양보를 중국에서 얻어냈는지도 모른다. 조·중 변계조약은 실리적으로 많은 것을 얻어냈을 수 있다. 하지만 두만강-압록강 국경선을 사실상 인정해줌으로써 명분상으로 많은 것을 잃었다. 영토란 실리의 개념이 아니다. 예를 들면, 독도에 풍부한 에너지 자원이 있다고 해서 우리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독도가 역사적으로 우리땅이기 때문에 주장하는 것이다. 간도 역시 마찬가지다. 간도 영유권은 실리를 얻기 위해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두고 명분을 지키기 위해 주장하는 것이다.
- 간도오딧세이
- [간도오딧세이]“공험진 위치는 두만강 이북 700리”(2008. 09. 25)
- 2008. 09. 25 문화/과학
- 1404년(태종4년) 5월 19일 태종실록에는 ‘계품사 김첨이 여진 지역을 조선에서 관할하기를 청하는 글과 지도를 가지고 명에 가다’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두만강 이북에 선춘령과 고려경이 표시된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전도. “조사해보건대, 본국의 동북 지방은 공험진으로부터 공주·길주·단주·영주·웅주·함주 등 고을이 모두 본국의 땅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요나라 건통 7년(1107년)에 동여진이 난을 일으켜서 함주 이북의 땅을 빼앗아 웅거하고 있었는데, 고려의 예왕 왕우가 요에 고하여 토벌할 것을 청하고 군사를 보내어 회복하였습니다…. 성조 홍무21년 2월에 호부의 자문을 받았사온데, 호부시랑 양정 등 관원이 태조 고황제의 성지를 흠봉하기를, ‘철령 이북·이동·이서는 원래 개원의 관할에 속하였으니, 군민을 그대로 요동 관할에 소속시키라’ 하였습니다. 본국에서 즉시 상항의 사건으로 인하여 배신 밀직 제학 박의중을 보내어 표문을 받들고 조정에 가서 호소하여 공험진 이북은 요동에 환속하고, 공험진 이남에서 철령까지는 본국에 환속시켜주기를 빌었습니다. 당년 6월 12일에 박의중이 경사에서 돌아와서 예부의 자문을 받아 보니, 본부 상서 이원명 등 관원이 당년 4월 18일에 성지를 흠봉하기를, ‘철령의 일로 인하여 왕국에서 말이 있다’ 하시고, 전과 같이 관리를 정하여 관할해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고려시대 윤관이 세운 9성 중 하나 태종실록 기사에서 주목해볼 부분은 ‘공험진’이라는 명칭이다. 명나라에서 공험진 이북은 요동에 환속한 반면, 공험진 이남은 조선의 땅으로 인정했다는 것이 이 기사의 요지다. 당시 명은 여진이 차지한 땅을 고스란히 자신의 영토로 삼으려 했다. 이때 태종은 여진족을 직접 다스리려던 명의 의지를 꺾고 공험진 이남의 땅을 조선의 땅으로 인정받았다. 공험진은 고려시대 윤관이 여진족을 무찌르고 개척한 9성 중 가장 북쪽에 위치했다. 윤관은 공험진의 선춘령에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는 비를 세웠다. 고려의 땅이라는 경계비를 세운 것이다. 최근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공험진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은 우리의 땅이 공험진과 선춘령에 미친다고 생각해왔다. 문제는 공험진이 현재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나라 학자들은 공험진이 두만강 이북 700리에 위치해 있다고 주장하고 있고, 중국 학자들은 공험진이 두만강 이남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태종은 하륜에게, 나중에 세종은 김종서에게 이 비석을 찾아볼 것을 명했다. 이 비석이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다면 공험진의 위치를 갖고 논쟁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이 비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영조 때 만든 것으로 추정하는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전도에는 두만강 북쪽에 선춘령과 고려경이라는 표시가 나타나 있다. 당시 영토의식이 반영된 지도다. 고려시대 윤관이 여진족과 싸웠던 것처럼, 또 조선시대 명나라를 상대로 태종이 공험진 이남을 우리 땅이라고 주장했던 것처럼, 아직도 이 지역을 둘러싼 역사적인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중국이 추진하고 있는 동북공정이 이 논쟁이 아직 종식되지 않았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 간도오딧세이
- [간도오딧세이]‘사이섬 간도’ 두만강에 존재(2008. 08. 14)
- 2008. 08. 14 문화/과학
- 두만강 사이의 섬, 이 땅을 초기에 간도라고 불렀다. 한때 독도를 주권 미지정으로 분류한 미국 지명위원회의 국립지리정보국 사이트에서 압록강과 두만강의 섬들에 대해 주권 미지정으로 분류한 것으로 나타났다. 1962년 북한과 중국은 조중변계조약을 통해 천지와 백두산 지역의 경계선을 그으면서 두 강의 섬에 대해서도 귀속을 분명히 했다. 일부는 북한에, 일부는 중국에 속하도록 한 것이다. 한국과 중국의 국경으로 여겨지는 압록강과 두만강에 섬이 거의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역사 속에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섬이 있다. 위화도라는 섬이다. 이곳에서 고려시대 때 태조 이성계가 요동을 정벌하러 나섰다가 회군했다. 위화도는 북한 땅으로 속해 있다. 조중변계조약 자료에 따르면 총면적이 1550만㎡이다. 사람도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중변계조약’에 명칭 사용 큰 의미 압록강과 두만강에는 모두 451개의 섬과 모래톱이 있다. 포항공대 인문사회학부 박선영 교수가 중국사 연구 제34호(2005년 2월 간행)에 실은 논문에 따르면 압록강에 205개, 두만강에 246개가 있다. 조중변계조약 자료를 분석한 결과다. 압록강에 있는 섬과 모래톱 중 127개가 북한에 속하고, 78개가 중국에 속한다. 두만강에 있는 섬과 모래톱 중 137개가 북한에, 109개가 중국에 속한다. 북한이 더 많은 섬과 모래톱을 차지하고 있다. 압록강·두만강의 대부분 섬과 모래톱에는 거주민이 없지만 북한에 귀속한 섬 중 11개 섬(압록강 10개, 두만강 1개)에는 거주민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에 속한 섬은 모두 무인도였다. 다만 두만강의 1개 섬이 중국령으로 거주민이 있다. 모두 한자 이름이 붙은 이들 섬 중 눈에 띄는 섬이 하나 있다. 간도(間島)라는 섬이다. 사이섬이라는 한글 명칭으로 불리는 이 섬은 19세기 후반 함경도 사람들이 몰래 건너가 농사를 짓던 곳이다. 이 섬의 명칭이 나중에는 확대돼 북간도와 서간도로 이어졌다는 것이 간도에 대한 명칭의 유래다. 두만강에 있는 이 섬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면적은 4만3800㎡이다. 박 교수는 이 논문에서 간도라는 정식 명칭이 조중변계조약에 존재한다는 것에 큰 의미를 뒀다. 한국과 중국 사이에 간도 문제가 첨예하게 대두됐을 때 중국은 간도라는 명칭을 조선인과 일본인이 날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간도의 명칭 자체를 부인하는 태도를 취한 것이다. 2000년대 들어 두만강변에 세워진 사이섬이라는 비석이 몇 년도 안 가 부서졌다. 간도 영유권이라는 영토 문제가 부각되면서 사이섬이라는 명칭이 문제가 된 것이다. 깨부수고 없앤다고 한들 이름이나 역사가 사라지랴. 백두산 정계비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은 비가 없어지고 주춧돌만 남아 있지만 탁본은 아직 남아 있다. 중국이 고구려를 억지로 자신의 역사로 만들려 하고, 자신들에게 불리한 역사를 없애려고 하면 할수록 간도 영유권에 대한 우리의 주장은 더욱더 설득력을 얻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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