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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총 64 건 검색)

‘법정 밖’ 남욱 “김만배가 대장동 비리 주도···삼류 시나리오? 거짓말이면 등단해야지”
‘법정 밖’ 남욱 “김만배가 대장동 비리 주도···삼류 시나리오? 거짓말이면 등단해야지”
2022. 11. 22 17:30사회
... 대표를 겨냥한 자신의 폭로를 민주당이 부정하는 것에 대해선 ‘제가 거짓 증언을 했다면 (소설가로) 등단해야 한다’고 맞섰다. 남 변호사는 이날 서울 서초구 자택 인근에서 경향신문 등과 만나...
“그 시들이 내겐 작품이었는데…” 등단 꿈 앗아간 ‘노숙인 짐 무단 폐기’
2022. 07. 07 21:26지역
... 구두 통보했고, 안전상 조치” 서울역 등에서 10여년간 거리생활을 해온 김모씨(65)는 문단 등단을 꿈꾸는 노숙인이다. 거리를 떠돌면서도 틈틈이 떠오르는 상념을 적어 200쪽가량 되는 두툼한 노트를...
‘등단 않은’ 이기리 시인, 제39회 김수영문학상
등단 않은’ 이기리 시인, 제39회 김수영문학상
2020. 11. 16 22:08문화
... 시인(26·사진)이 선정됐다고 주관사인 민음사가 16일 밝혔다. 김수영문학상 제정 이후 처음으로 등단하지 않은 신인 작가가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수상작은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외 55편이다....
김수영문학상이기리 시인
제39회 김수영문학상에 이기리 시인…등단하지 않은 신인작가 첫 수상
제39회 김수영문학상에 이기리 시인…등단하지 않은 신인작가 첫 수상
2020. 11. 16 11:31문화
... 이기리 시인(26)이 선정됐다고 주관사인 민음사가 16일 밝혔다. 김수영문학상 제정 이후 처음으로 등단하지 않은 신인 작가가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수상작은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외 55편이다....
김수영문학상이기리 시인

스포츠경향(총 4 건 검색)

진태령 등단 시인됐다
진태령 등단 시인됐다
2021. 09. 02 13:28 연예
가수 진태령. 은설기획 제공통기타 발라드 가수 진태령은 지난달 25일 월간 신문예 출판사가 주관한 신인문학상 공모전에 응모해 ‘천리향’ 외 2편의 시가 신문예 신인 문학상 우수작으로 당선됐다. 평소 문학을 애정해온 진태령은 오랜 기간 습작으로 내면을 다졌고 매주 금요일 유튜브를 통하여 시 낭송을 해왔으며, 이번 등단으로 왕성한 활동이 예상된다. 가수 진태령의 문학의 옷을 입혀준 ‘월간 신문예(新文藝)’는 1980년에 창간된 대한민국의 종합 문예지이다. 신인 부분 수상작은 월간 신문예 109호(9월)로 10일 전국 서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편 만능 엔터테이너로 기량을 발휘하고 있는 진태령은 요즘 발라드 ‘사랑해요’가 역주행을 하고 있으며, 매주 월요일 저녁 8시에 7080 통기타 미니 단독 콘서트를 유튜브를 통하여 팬들과 소통하고 있다. 또한, 소속사 은설기획 은형일 대표는 “진태령은 라디오 가요프로그램 마포FM DJ로 2008년부터 현재까지 꾸준한 진행을 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조현민 대한항공 전무 여행동화 작가로 등단
조현민 대한항공 전무 여행동화 작가로 등단
2014. 07. 16 15:56 생활
조현민 대한항공 전무(사진)가 여행동화작가로 등단했다. 조 전무는 16일 서울 중구 서소문 대한항공 빌딩 12층 회의실에서 <지니의 콩닥콩닥 세계여행> 출판을 기념해 ‘작가와의 대화 시간’을 가졌다. <지니의 콩닥콩닥 세계여행>은 초등학교 5학년 지니가 혼자 해외로 여행을 떠나는 스토리를 담은 동화 시리즈다. 이번 작품의 배경은 일본 오키나와로, 지니라는 소녀가 주체가 돼 직접 여행을 준비하고, 떠나고, 경험하는 이야기와 함께 완성도 높은 정보가 담겨 있다. 특히 아이들이 스스로 계획하고 경험을 쌓아가는 스토리를 담아 여행동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대한항공과 진에어에서 광고와 SNS, 커뮤니케이션 전략과 마케팅 등 다양한 업무를 맡았던 조 전무는 일본 오키나와에 이어 미국의 역사가 살아 있는 ‘윌리엄스버그’를 소개할 예정이다.
이원문 마필관리사 시인 등단
이원문 마필관리사 시인 등단
2009. 05. 22 20:14 생활
과천 서울경마공원의 16조 마방 마필관리사 이원문씨(49·사진)가 시인으로 등단했다. 이씨는 월간 문학광장 6월호 시부문에서 신인상을 받았고 5월 말에는 이씨의 작품을 엮은 시집 ‘백마의 눈물’(책나무출판사, 7000원)이 출간될 예정이다. 이씨는 경주마 관리라는 고된 일을 하면서도 느낀 말에 대한 애정을 자신의 시에 담았다.
탤런트 황준욱, 시나리오 작가 등단
탤런트 황준욱, 시나리오 작가 등단
2008. 10. 20 20:40 연예
탤런트 황준욱이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KBS 사극 ‘불멸의 이순신’ 이후 사업가로 변신했던 그는 최근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화 시나리오마켓에 2개의 작품을 선보여 시나리오 작가로 등단했다. 첫번째 작품 ‘인생은 아름다워’는 좋은 생각과 행동, 말을 해야 함을 강조하는 메시지를 담아 흐뭇하고 잔잔한 감동을 주는 휴먼 드라마물이다. 두번째 작품 ‘연우행별’은 ‘연기는 우주처럼 생각하고, 행동은 별처럼하라’는 예술하는 이들의 지침서인 스타니슬라브스키의 배우수업의 줄임말로 배우로서 자신의 경험을 녹여낸 휴먼물이다. 지난 9월 시나리오 등록을 마친 황준욱은 “제작자나 감독이 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지금까지 배우로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이야기는 물론 세상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등단 이유를 설명했다. 시나리오 작가로 첫발을 내딛었지만 지금까지 해왔던 연기를 포기할 생각은 아니다. 그는 “잠깐 해삼 유통사업을 하기도 했지만 연기를 결코 버릴 수 없다”면서 “연극, 뮤지컬, 드라마, 영화를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 연기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황준욱은 지난 70년대 아역스타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또 ‘아역 스타는 성공하지 못한다’는 불문율을 깨고 80년대는 손창민과 더불어 청춘스타로 성공적으로 거듭났다. 특히 모범생 이미지가 강했던 손창민과 대조적으로 거칠면서도 모성본능을 자극하는 반항아 이미지로 여심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황준욱은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 후 오랜 기간 공백을 가졌다.

주간경향(총 2 건 검색)

[박상미의 공감 스토리텔링]등단 60년 신경림 “남은 삶도 시만 쓰고 싶어”(2015. 06. 15 17:25)
2015. 06. 15 17:25 문화/과학
시인과 만남은 세 번째였다. 열일곱 살 때 동국대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시인을 처음 만났다. 무궁화호 밤 열차를 타고 부산에서 서울까지 올라온 나는 백일장이 열리는 오전 내내 잠이 쏟아져서 원고지 위에 엎드려 잠을 잤던 것 같다. 키 작은 할아버지 한 분이 다가와서 ‘일어나서 글을 써야지’ 하고 깨워 주었는데, 나중에 시상식장에서 보니 그분이 신경림 시인이었다. 다행히 상도 하나 받아서 상금 30만원을 덤으로 얹혀 왔는데, ‘먼 데서 온 사람이 상금을 받아서 참 좋다. 여비는 충분하겠구나’ 하시며 반달 같은 작은 눈으로 웃으시던 모습에 눈물이 핑 돌았던 기억이 난다. ‘열심히 글을 써서 5년 안에 시인이 될게요’ 했던 약속은 그 후로 까맣게 잊고 살아왔다. 두 번째 만남은 봉화 귀내마을 전우익 할아버지댁 사랑방에서였다. 외가 어른인 전우익 할아버지 집에 머물던 1999년 겨울, ‘내가 가장 아끼는 벗 신경림’이 오는 날이라고 들떠 있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16년 만에 정릉 댁에서 다시 만난 신경림 시인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여전히 반달 같은 작은 눈으로 웃으며 활짝 반겨주셨다. 나는 시인 신경림의 얘기를 하고 싶은데, 시인은 전우익 선생과의 추억에 젖어들어, 화제를 다시 시인 신경림으로 돌려놓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으나, 오래 머물고 싶은 따뜻한 시간이었다. 1936년 충청북도 충주군 노은면 연하리에서 4남 2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응식(應植). 한학을 한 할아버지의 형제들은 한글 전용과 농촌계몽운동에 적극 동참한 개화주의자였다. 아버지는 농협 서기로 일하면서도 광산사업 투자에도 적극적이었다. 외가는 독립운동에 비밀자금을 지원하던 만석꾼이었다. 독립운동을 한 대가로 징역을 살다 나온 젊은 지식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그들이 살길을 찾을 때까지 거두어 주던 집안이었다. 어머니는 학교를 다닌 적은 없으나, 그 청년들에게 공부를 배워서 책을 많이 읽은 교양 있는 분이셨다. /박상미 1943년, 노은국민학교에 입학했다. 4학년 때 시 ‘목계장터’에 등장하는 ‘목계’에 처음 가게 된다. 소년은 목계의 이미지를 선명하게 남겨놓고 싶었다. 목계 풍경을 쓴 일기를 본 담임선생님이 ‘시인’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셨다. 소년 신경림의 글재주를 처음 알아봐 준 분이었다. 어린 시절 고향 남한강의 풍경과 목계장터의 사람들은 훗날 신경림 시의 거름이 되었다. “우리 집안엔 책 읽는 사람이 많았어. 이광수·김동인의 소설과 시집도 꽤 있었고. 당숙들이 모두 신식공부를 했으니 책을 마음껏 빌려다 읽었지. 아버지도 시골에선 돈벌이를 좀 하던 분이셔서 읍내 나가면 늘 책을 사다 주셨어. 책 읽을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란 게 시를 쓰는 토양이 되었지. 가설극장에서 연극도 많이 보았어. 가마니 창고를 빌려서 주로 영화 상영, 연극 공연을 하던 곳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위험한 곳이었어. 몇백 명이 들어가서 공연을 보는데 무대 한편이 무너져서 사고가 난 기억도 나. 그래도 자주 가서 연극을 열심히 보았어.” ‘어려서 나는 램프불 밑에서 자랐다/ 밤중에 눈을 뜨고 내가 보는 것은/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조금 자라서는 칸델라불 밑에서 놀았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 지익지익 소리로 새파란 불꽃을 뿜는 불은/ 주정하는 험상궂은 금점꾼들과/ 셈이 늦는다고 몰려와 생떼를 쓰는 그/ 아내들의 모습만 돋움새겼다/ 소년 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 가설극장의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나는 세상이 넓다고 알았다, 그리고// 나는 대처로 나왔다(중략)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 내 망막에는 마침내/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았다// 내게는 다시 이것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내가 아마 6~7세쯤이었을 거야. 어머니는 항상 덤덤했어. 희로애락을 나타내지 않는 분이셨지. 할머니는 나에게 생을 건 사람이었어. 내가 서울에 공부하러 올 때는 따라와서 밥을 해주셨던 분이야. 두 분의 실루엣은 지금도 선명해. 램프불은 등잔불에 램프를 씌워놓은 것인데, 부잣집 아니면 없었는데 우리 동네엔 많았어. 우리 동네가 광산도 있고, 금전꾼들도 많이 왕래하던 곳이라 넉넉했던 것 같아. 중학교 때는 칸델라불을 썼어. 그건 광산에서 쓰는 불인데, 가스로 켜는 불이지. 새파란 불빛이 몇백 미터까지 밝혀주는 밝은 불이야. 우리 마을엔 전기도 나 초등학교 때 들어왔어. 이 얘길 하면 사람들이 깜짝 놀라. 읍내로 중학교를 갔는데, 거긴 전기가 거의 안 들어오더라구. 우리 아버지가 새 문물 들어오면 무조건 사야 하는 분이셨어. 호기심이 많은 분이어서 라디오, 전축 같은 물건이 집에 다 있었어. 그런 소재가 이 시에 다 등장하니, 나를 아주 부잣집 아들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진 않아.” 1948년, 충주사범병설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 시절 이광수, 김동인, 이기영, 김내성, 현덕 등 문학인의 책을 닳도록 읽었다. 중학교 3학년 때 6·25 전쟁이 터졌다. 나라도 풍비박산이 났지만, 그의 집안도 좌익과 우익 사이에서 풍비박산이 났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광산은 폐쇄되고, 당숙은 보도연맹 사건에 연루되어 목숨을 잃었다. 충주고등학교에 들어갔으나 공부는 안 하고 남한강가를 거닐며 책만 읽었다. 도스토옙스키와 투르게네프의 소설을 읽고 백석, 임화, 이용악, 오장환, 정지용의 시를 읽었다. 이용악과 백석의 좋은 시는 외우고 다녔다. 백석의 을 읽고 백석 같은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교지에 을 발표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55년 신경림은 동국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한다. 등 좌익 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1956년 에 시 ‘갈대’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함께 책을 읽던 친구가 진보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충격을 받고, 문단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스물셋부터 10여년 동안 광부·장사꾼·학원강사 등을 하면서 떠돌았다. 충주에서 영어강사 노릇을 할 때엔 영어로 된 의 문장을 가르치기도 했고, 술자리에서 정권을 비난하는 말을 했다가 붙잡혀 가서 한 달 만에 풀려나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집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읽고 외웠어. 가택수색을 당할 때 시집을 다 빼앗겼어. 판금된 시집이니 다시 구할 수도 없고. 암기하고 있는 시들을 외우면서 허탈함을 달랬지. 등단한 후에도 시는 안 썼어. 전쟁 직후라 상이군인도 많고, 시골 젊은이들은 할 일이 없으니 전부 서울에 올라와 있었어. 모든 게 허망해서 아무것도 쓸 수가 없었어. 신명이 나야 시가 되는데 신명이 안 나더라구. 10여년간 건달 생활을 했지.” 그럼 언제부터 시를 다시 쓰기 시작하신 거예요. “서른 즈음, 결혼할 무렵에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시 쓰는 일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어. 잘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거야.” 장남이 시 쓰는 걸 사업가 아버지는 어떻게 받아들이셨어요. 시 쓰는 청년에게 시집을 온 새색시는 어떤 분이었을까요. “시 쓰는 남자인 걸 모르고 시집 왔지(웃음). 조그맣지만 똑똑하다는 평판은 받았으니까. 아내도 착하고 무덤덤한 사람이어서 결혼한 후부터 본격적으로 시를 쓸 수 있었지. 아버지는 내가 시를 쓰고 살겠다니까 크게 실망하셨지. 시인이 되면 굶어죽는다는데 어떡하냐고(웃음). 그래도 강요는 안 하셨어.” 남은 삶도 좋은 시를 기회 있는 대로 많이 쓰고 싶다는 신경림 시인. | 박상미 집안의 몰락과 문단에 대한 실망이 겹쳐 낙향하지 않았더라면, 농민들의 애환과 가난한 이웃들의 아픔을 노래하는 시들이 태어나지 못했겠지요. 독자 입장에서는 건달 생활을 하며 길 위에서 보낸 10년이 참 고마운 기간이에요.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궁핍해진 농민들의 애환이 드러난 시들을 쓸 수 있으셨구요. 다시 서울로 와서 1971년 가을호에 ‘농무’, ‘서울로 가는 길’ 등을 발표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으셨어요. “김관식 시인이라고 서정주 시인의 동서인데, 반골기질로 유명하지. 어느 날 시내에서 술에 취한 김관식 시인을 만났는데, ‘신경림이 안 쓰면 나도 안 쓴다’며 시를 쓰라고 떼를 쓰더군. 무허가촌 산동네인 서울 홍은동 자기집 문간방을 내주어서 아내와 올라왔지. 쌀이며 김치, 연탄까지 다 대주며 6개월 동안 지내면서 시를 쓰게 해 줬어. 그 친구 덕분에 다시 시를 쓸 수 있었어. 서른여섯에 요절하는 바람에 갚지도 못했지.” 는 떠돌면서 만난 민초들, 삶의 주변부로 밀려난 광부, 노동자, 빈민, 농민, 건달, 아편쟁이들이 주인공이다. 1973년에 시집 가 출간되자, 빼어난 사실주의적인 작품들은 문단에 충격을 던졌고, 한국 현대문학사에 민중시의 토대를 닦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개인적으로 많은 아픔을 겪는 동안 첫 시집이 나왔다구요. “70년에 안양으로 이사를 하고, 할머니와 부모님을 다 모시고 살았지. 그 해에 아내가 암으로 죽고, 71년에 6년 동안 중풍으로 고생하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치매를 앓던 할머니도 돌아가셨어. 100여 가구가 단지를 이룬 마을이었는데, 우리가 사는 7년 동안 마을에서 우리 집만 장례를 세 번이나 치렀지. 그 집에 사연이 있었던 걸까? 사람들이 흉가라고 부르더군. 77년에 그 집 떠났어.” 그 시절은 어떻게 견디셨어요. “사람 삶이 다 그런 거라고 생각했어. 우리 어머니가 고생하셨지. 초등학생 3남매를 우리 어머니가 다 키우셨어. 2001년에 돌아가실 때까지 나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셨지. 그런데 효도를 못했어. 늘 어머니를 괴롭혔지.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며칠 전까지도 내가 안 들어가면 저녁을 안 잡숫고 계셔. 밤 12시가 되어도 내가 들어가면 함께 식사를 하셨어. 나는 효도하려고 모임에 가도 아무리 맛있는 게 있어도 안 먹고 집에 가서 어머니랑 된장에 밥 먹었지. 그게 효도인 줄 알고 말이야. 그런데 지나고 보니 어머니를 괴롭힌 거였어.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야 깨달았어.” 1980년 7월, 선생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고은, 송기원 선생과 함께 서대문구치소에 갇혔다가 두 달 만에 풀려나기도 했다. ‘자유실천 문인협의회’, ‘민주화청년운동연합’, ‘민족민주통일운동연합’ 등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아 활동하고, 1984년에는 ‘민요연구회’를 만들어서 본격적인 민요 채집운동을 하는 데 힘을 쏟았다. 신경림 시인의 시는 길 위에서 쓴 시라고 말해도 될 만큼 유랑에서 얻은 소재들이 많은데요. 광산노동자, 부랑노동자, 도시빈민이 많이 등장해요, 역마살이 있으신 것 같아요. 전우익 선생과도 여행을 많이 다니셨구요. 신경림 시인께 드린다고 서울 오실 땐 늘 냄새 나는 간고등어를 싸들고 오셨지요. “전 선생이 서울 오면 우리 집에서 함께 잤지. 어머니가 ‘넌 웬 노인 친구가 다 있냐?’ 그러셨지(웃음). 간고등어를 너무 많이 가져와서 나중에 처치곤란이었지. 그걸 어디 글에 썼더니 담부턴 안 가져왔어. 냉장고엔 고등어가 넘쳐나는데, 나 혼자 먹으려니 다 먹을 수가 있나(웃음). 우린 좋은 친구들이 많았어. 권정생, 이오덕과도 친했지만 우리 둘이 제일 친했지. 판화가 이철수가 옛날식 소주를 잘 담가, 그 독한 소주 먹으러 자주 갔지. 전우익 선생과 안동·영주 여행을 많이 했어. 산속의 약초 같은 사람이지. 참 그리운 시절이야. 사랑채에서 군불에 된장 끓여주면 정말 맛있었는데…. 전 선생과 소백산 올라갔을 때가 벌써 20년 전이네. 장비도 없이 한겨울에 둘이 올라갔어. 눈을 잔뜩 맞고, 미처 하산하지 못한 서른 명 정도가 작은 산장 안에서 선 채로 밤을 샜던 기억이 나. 친했던 벗들이 이젠 다 가고 없어…. 요즘은 채현국이랑 종종 만나서 옛날 얘기를 해. 그 친구는 아직 힘이 펄펄 나. 요즘 인기도 아주 많고(웃음).” 한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신경림 시인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목계장터’, ‘갈대’, ‘가난한 사랑 노래’는 고등학생들이 가장 많이 아는 시이자 언어영역 시험에도 많이 나오죠. 선생님 시로 출제된 학교 시험문제를 풀어본 적이 있으세요. “있지. 어려워서 나도 못 풀겠더라고. 답도 틀렸어. 시만큼은 시험문제를 달리 내면 어떨까? 가령, 이 시를 읽고서 무엇을 느꼈나, 틀린 거 하나 찾기. 어때? 그게 좋겠어. 시는 한 가지로 읽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로 읽는 거잖아. 진짜 아닌 거 하나만 찾기. 폭넓게 가르치면 어떨까? 그런데 교사들이 안 된대. 차별성도 없고 문제로서 제구실을 못한다고 하더군.” 손주들이 학교에서 할아버지 시로 시험볼 때 기분이 어떨까요. “외손주가 그래. 할아버지 시가 문제로 나오면 제일 어렵다고(웃음). 그리고 우리 할아버지라고 해도 친구들이 안 믿는대(웃음).” 지난 4월에는 신경림 시인과 일본의 거장 시인 다니카와 슌타로가 대시집(對詩集) 를 내고 시낭송 콘서트를 열었다. 양국 출판사가 공동 기획한 시집이 두 나라에서 동시에 나왔다. 두 사람이 주고받으며 짓는 시를 일본에서는 ‘대시(對詩)’라고 한다. 두 거장은 2012년 일본 쿠온출판사에서 번역 출간한 신경림 시집 출간기념회에서 처음 만났다. 슌타로 시인이 쓴 서평에서 한국 시인 신경림을 높게 평가하면서 인연이 시작되었다. 한·일 양국의 출판사가 공동 기획한 이 시집은 정치적 대립의 이면에 공존하는 따뜻한 문학적 연대감을 담고 있다. 슌타로 선생이 시를 먼저 보내오면 신경림 시인이 대답하는 기분으로 답시를 썼다. 그렇게 13편을 주고받는 데 6개월이 걸렸다. 요시카와 나기의 번역 또한 큰 몫을 했다. 남쪽 바다에서 들려오는 비통한 소식/ 몇백 명 아이들이 깊은 물 속/ 배에 갇혀 나오지 못 한다는/ 온 나라가 눈물과 분노로 범벅이 되어 있는데도 나는/ 고작 떨어져 깔린 꽃잎들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신경림) 숨 쉴 식(息)자는 스스로 자(自)와 마음심(心)자/ 일본어 이키(숨)는 이키루(살다)와 같은 음/ 소리내지 못하는, 말하지 못하는, 숨이 막히는 괴로움을/ 상상력으로조차 나누어 가질 수 없는 괴로움/ 시 쓸 여지도 없다(다나카와 슌타로) 밤새껏 물속에서 허우적대다가/ 눈을 뜨니 솜이불이 가시덤불처럼 따갑다/ 아랑곳없이 아침햇살이 눈부신 앞뜰에는/ 목련이 지고 작약이 피고/ 이렇게 봄은 가고 있는데(신경림)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담은 선생님의 시와 슌타로 선생이 보내온 답시를 읽으며 마음이 먹먹했어요. 두 시인이 각자의 유년을 추억하는 에세이도 흥미로웠어요. 일본 식민지하에서 태어난 조선 소년 신경림과 2차대전의 폭풍 속에서 유년기를 보낸 소년 다나카와 슌타로의 이야기 말이에요. 광복 70주년에 두 나라의 어른이 이런 작업을 함께 하는 건 정말 의미 있는 일 같아요. “문학, 특히 시를 통해서 일본과 한국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보는 건 의미 있는 일이지. 앞으로도 양국의 문학인들이 이런 작업을 이어나가면 좋겠어.” 올해 등단 60년째예요. 다시 태어나도 시인이 되실 거지요. “벌써 60년이야? 그러네. 글쎄, 태어나봐야 알겠지만, 내가 할 만한 일이 시 말고 또 있을까? 내 삶은 그렇게 행복한 삶은 아니었지만, 그만하면 사람답게 살았다는 생각을 해. 하고 싶은 말 다하고, 하고 싶은 일 다 했어. 여행도 많이 하고, 글도 실컷 썼지. 남은 삶도 좋은 시를 기회 있는 대로 많이 쓰고 싶어. 오로지 시만 쓰고 싶어.”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신경림 ‘낙타’ 지난밤, 꿈을 꾸었다. 낙타 두 마리 길동무 되어 느리게 걸어오는 꿈을. 가장 어리석은 사람, 가장 가엾은 사람은 ‘바로 너’라고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며 얼굴 마주하고 웃는 신경림 선생과 전우익 선생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박상미의 공감 스토리텔링
[문화인]‘이지연…’으로 작가 등단 안은영
[문화인]‘이지연…’으로 작가 등단 안은영(2008. 11. 06)
2008. 11. 06 문화/과학
“나만의 문체 만들고 싶어요” 2006년 출판계의 ‘올해의 키워드’ 중 4위를 차지한 것이 ‘20대 여성 자기계발서’였다. 자기계발서는 오래전부터 꾸준하게 팔리는 스테디셀러지만, ‘20대 여성’이라는 구체적인 타깃을 내세운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대표 주자는 와 였다. 특히 는 사랑, 일, 가족 등 여성이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상황을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 구체적인 메시지를 전하면서 큰 사랑을 받았다. 예를 들면 ‘작업 기간은 2주를 넘기지 마라’ ‘예쁘고 성능 좋은 콘돔을 준비하라’ ‘배고픈 상태에서 쇼핑하지 마라’ 등 사소하지만 궁금했던 내용을 콕콕 짚어서 이야기해 40만 부나 팔렸다. 여성 잡지에서나 볼 수 있었던 내용이 책으로 출간되면서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셈이다. 이 책의 저자는 가요 담당 연예부 기자로 시작해 영화 담당 등을 거친 안은영씨다. 현재는 무료일간지에서 생활팀장을 맡고 있다. 이 책을 쓴 후 안씨는 수많은 사람의 ‘언니’가 됐고, 지금도 매년 수백 통씩 고민을 상담하는 메일을 받고 충고를 해주는 멘토 역할을 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조언을 하는 게 싫다”지만, 그의 조언을 통해 힘을 얻는 사람이 많다. 이후 여전히 ‘언니’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2, 30대 여성의 성장통을 생생하게 그려낸 소설 을 펴내 소설가로 등단했다. 작가는 여성의 복잡다변한 심리를 꿰뚫고 있기에, 작품 속에서 여성의 다양한 심리가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사랑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꿰뚫고 있다고 생각했던 34살 이지연이 사랑 때문에 좌절하는 경험이나 결혼이라는 관문 앞에서 오랫동안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지게 된 27살 이지연의 심리 변화를 보면서 “맞다 맞아”라고 무릎을 치는 독자도 많았을 것이다. 그는 이 작품을 쓴 이유에 대해서 “20대 여성이 30대 여성을 바라보면서 ‘저렇게 살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다 똑같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고 대답했다. “아주 구체적이고 쉽게 쓰는 게 장점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27살 이지연과 34살 이지연의 사건이 중첩되면서 빠르고 재미있게 진행된다. 소설이 나온 후 “혹시 내 이야기 아니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고, “내 이야기인 것 같아서 좋았다”는 칭찬도 많이 들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작가에 대한 꿈을 키웠다.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 행사에서 대본을 쓸 정도로 글쓰는 것을 좋아했다. 영문학을 전공하고 사회에 나와 기자로 활동하면서 책은 마흔이 넘은 후에 쓰고 싶었다. “마흔이면 인생을 관조할 나이인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라이선스 잡지에 쓴 글이 한 포털 사이트 블로그에 올라가면서 기자 안은영이라는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출판사 해냄에서 그 글을 보고 20대 여성 계발서를 기획했고, 그것을 그에게 맡긴 것. 책을 쓴다는 부담감 때문에 계속 거절했지만, 출판사의 설득으로 맡게 됐다. 하지만 는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판매고를 올렸고, 기자라는 타이틀에 베스트셀러 작가까지 붙었다. 은 전작에 비해서는 조금 팔렸지만, 불황으로 흔들리는 출판계에서 2쇄 인쇄에 들어갔으니 어느 정도는 성공한 셈이다. 안은영씨는 “작가로서 인정받고 싶고, 나만의 문체를 만들고 싶다”고 포부를 드러냈다. 소설 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이 꼭 거치는 아픔과 고통 그리고 희망을 재미있게 보여주고 있다.

레이디경향(총 1 건 검색)

마흔일곱 살에 신춘문예 등단 굴삭기사 이종률씨의 꿈
마흔일곱 살에 신춘문예 등단 굴삭기사 이종률씨의 꿈
2008. 02. 15 화제
신춘문예는 마약이다. 문학에 꿈을 가진 사람들은 습관처럼 글을 쓰고, ‘신춘 시즌’이 되면 어김없이 출품한다. 몇 번의 고배를 마셔도 열정은 죽지 않는다. 이종률씨도 마찬가지다.“소설은 사회에 대한 기여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사로운 담론이나 농담 같은 소설보다는 서사의 뼈대가 확실한 작품을 쓰고 싶어요. 문장은 소설의 피부고, 서사는 골격이니까요” 문학과 ‘포크레인’ 굴삭기와 문학의 조합은 어색하다. 굴삭기가 문학의 소재가 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어도, 굴삭기사가 소설가가 되는 일은 흔치 않다. 누구나 소설을 쓸 수는 있지만, 신춘문예에 당선됐다면 얘기가 또 달라진다. 30년 가까이 굴삭기를 몰아온 이종률 씨(48)는 200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에 당선됐고, ‘등단작가’가 됐다. 한국소설가협회가 주는 ‘올해의 한국소설 신인상’ 수상자로도 선정됐다. 그동안 각종 언론사에서 주최하는 신춘문예에 출품한 횟수는 20회가 넘는다. 1990년대 초반부터 매년 출품했다. 좁다란 굴삭기 조종석의 ‘유리 상자’는 그에게 ‘창작의 공간’이었다. “덤덤해요. 거쳐 가야 할 과정을 통과했다고 생각합니다. 운이 좋았죠. 한꺼번에 두 개의 상을 받았으니까요(웃음).” 이종률씨는 고교 졸업 직후부터 굴삭기를 몰았다. 18세 때 굴삭기 조수로 일을 시작했다. 먹고살기 위한 선택이었다. 6, 7년은 참을 만했다. 그러나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문예반에서 활동했던 예민한 감성은 굴삭기 조종석에 갇혀 있길 거부했다. 천생 ‘문학청년’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낙동강을 건너 학교를 다녔습니다. 다리가 없어서, 홍수가 나면 선산을 돌아가곤 했죠. 학교에 도착하면 이미 오전 10시가 넘을 것 같고, 그러면 그냥 안 가는 거죠. 공부에 흥미도 없었고, 강의 유혹에 빠졌다고 할까요. 그것도 고 3 때(웃음).” ‘땡땡이’ 친 손에 든 것은 종이와 연필이었다. 버드나무 밑에 앉아서 소설을 읽거나 시를 썼다. 강물에 들어가 멱을 감기도 했다. 그는 “안 잘린 게 다행”이라고 웃으며 회상했다. 그때 쓴 시들은 입대 직전 불살랐다. “인생은 한 번뿐이잖아요. ‘내 인생이 포크레인 유리 상자에 갇혀서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 안에서 공상했죠. 이야기를 만들었고, 어원(語原)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면서 저녁에 집에 돌아와 정리했어요.” 수상작은 좧탑리에는 숨 쉬는 비아그라가 있다좩라는 단편소설이다. 작중 화자도 소설가다. 근근이 원고 청탁을 받기도 하지만 고료는 우스운 수준이다. 소설에서는 ‘비아그라 세 알’을 고료로 받는다. 작품은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린다. 회원들은 때로는 진지한, 때로는 가볍기 이를 데 없는 댓글 혹은 비평을 한다. 누구나 글을 쓰는 시대, 오늘날의 문학이 얼마나 가벼워졌는지를 시사한다. 화자의 소설은 ‘비아그라 세 알’ 의 교환 가치를 가진다. 심사평은 작품을 두고 “오늘날의 글쓰기 행태가 너무나 사사로운 담론 주고받기에 빠지고 말았다는 통렬한 비판이자 신랄한 조롱”이라고 썼다. “소설은 사회에 대한 기여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사로운 담론이나 농담 같은 소설보다는 서사의 뼈대가 확실한 작품을 쓰고 싶어요. 문장은 소설의 피부고, 서사는 골격이니까요.”맨땅에서 맨손으로 ‘소설가가 된 굴삭기 기사’가 환기하는 이미지는 ‘가난’이다. 그러나 이종률씨는 구미에 굴삭기 12대, 몽골에 5대를 소유하고 있는 중기업체의 대표다. 그는 “이거 다 팔아도 서울 가면 열 평짜리 아파트도 못 산다”고 농을 쳤지만, 그 모든 것은 맨손으로 시작해 일군 결과다. 그의 명함에는 “대한중기 신화창조팀”이라고 써 있다. “제가 처음 일을 시작할 때는 굴삭기 한 대에 기사가 두 명이었어요. 교대로 일했죠. 굴삭기를 타지 않는 시간이 아까워서 못을 줍기 시작했어요. 버린 못을 줍다 보니 동료에게 담배 한 갑 정도 사줄 수 있는 용돈은 벌 수 있었죠(웃음).” 남는 시간에는 공사 현장을 돌아다니며 못을 주워 팔았다. 고물상에서 무게를 달아 값을 쳐줬다. 하루에 네 깡통 정도 주우면 당시(1980년대 중반) 화폐 가치로 3천원 정도를 받았다. 지금 돈으로는 7, 8천원 정도다. 굴삭기 기사로 일한 돈은 차곡차곡 저축하고, 못을 주운 돈으로 생활비와 용돈을 썼다. “그렇게 못을 주우면 하루에 담배 두 갑, 주전자 막걸리 한 되 먹을 정도가 됐죠. 부기사에게 담배를 사주기도 하고, 그러면 부기사는 ‘우리 사수 짱이다’라며 좋아했어요(웃음).” 돈 대신 받아온 고장난 자전거를 수리해서 타고 다니면서 더 많은 못을 주워 팔 수 있었다. 일을 하고 못을 줍는 동안 헌 자전거는 50cc 오토바이가 되고, 곧 포니 승용차로 바뀌더니 작은 굴삭기 한 대를 구입할 수 있는 정도까지 됐다. 한국과 몽골에서 굴삭기 열일곱 대를 가지고 회사를 꾸릴 수 있었던 저력이다. “제가 하는 것이 ‘신화창조’예요. 신화를 일구면서 살아야죠(웃음). 젊었을 때부터 하고자 한 일은 일구지 않은 것이 없어요. 하고자 했던 일이 안 될 때는 스스로에게 물어요. ‘사력(死力)을 다했느냐’고. 그게 좌우명입니다.” 굴삭기를 몰았던 30년이나 소설을 쓰고 신춘문예에 출품을 계속해온 십여 년이나 차이는 없다. 먹고 살기 위해 굴삭기 핸들을 잡은 손으로 저녁에는 글을 썼다. 굴삭기는 몸을 살렸고, 글쓰기는 마음을 살렸다. “즐기면서 썼어요. 처음에는 먹고살기가 어려웠죠. 제대하고 돌아왔을 때 아이가 둘이었으니까요(웃음). 머리가 채 길기 전에 결혼식을 올리고, 사글세방부터 시작했어요.” 네 가족이 열 달 사글세방에서 살았다. 굴삭기를 몰고, 못을 주워서 돈을 모으니 열 달 후에는 전세값이 모였다. 2년 후에는 구미에 있는 8평 주공아파트로 이사했다. 그동안 굴삭기는 두 대가 됐다. 구미 공단이 활성화되면서 사업도 확장했다. “이제는 내리막이죠. 경기도 좋지 않고, 나이도 있으니까요. ‘낙법’ 익혀야 하는 나이입니다. 중기로는 더 이상 키우는 게 불안하고, 이제는 어디로 ‘엎어져야 할지’를 고민해야죠(웃음).” 60세가 되면, 개인택시를 몰 생각이다. 그토록 바라던 ‘등단작가’가 됐지만 글만 쓸 생각은 없다. 일과 체험이 있어야 글도 쓸 수 있다고 믿는다. “손님 있으면 태우고, 없으면 말고”라며 웃는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이다. ‘등단’이 선사한 자유 “해마다 그랬습니다. 남다른 비애를 느끼는 거죠. 다름 아니라 신춘문예 때문입니다. (중략) 어떤 ‘눔’은 나를 종심이 형이라고 부른답니다. 최종심만 일곱 번. 그 별명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지요. 나는 왜 안 되죠? 딴 사람 다 되는데….” 지난 2006년 12월 26일, 이종률씨가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에 올라와 있는 글이다. 제목은 ‘‘씰씰’하고 비애스럽고 쪽 팔리는 연말’이다. 1990년도부터 도전한 신춘문예에 또 한 번 고배를 마시고 쓴 글은 절절하다. “홍사는 신춘에 안 되면 중견이고 되면 신예인데 뭐 하려고 도전하느냐”는 이규리 시인의 조언에는 “규리 언냐! 모르시는 말씀이에요, 전 꼬리표가 없어요”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제 신춘문예 때문에 비애를 느낄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괜찮은 글을 써야죠. 독서량도 부족했어요. 인식과 사유의 지평을 넓혀야죠. ‘문단의 금옥’이 된다거나 ‘베스트셀러’를 쓰겠다는 얘기는 할 수 없어요. 되지도 않고요(웃음). 제 마음에 드는 글을 꾸준히, 지속적으로 쓰는 자세. 그게 신화가 아니겠어요?” 집필 중이거나 구상 중인 소설이 없으면 ‘직무 유기’라는 생각이 든다. 글을 쓰는 것은 ‘숙제’가 됐다. 10년 전부터 그랬다. 그때부터는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고, 사명감도 느껴졌다. “저는 ‘일회성’ 삶을 살고 있지만, 역동적인 상상력으로 화자의 입장에서 사유하고 소설 속에서 상상의 지평을 넓혀가고 싶어요. 주인공을 통한 간접 체험으로 다양한 삶을 살 수 있는 거죠.” ‘신춘문예 등단작가’라는 타이틀을 위해, 그동안 일정한 틀에 맞춘 글을 써온 것도 사실이다. 신인다운 패기, 실험적인 언어와 구성, 그리고 작가로서의 가능성이 신춘문예의 기준이다. 당선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유를 선물했다.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을 써야죠. 타이타닉 침몰 사고가 터지기 전에 좧타이탄좩이라는 소설이 먼저 나온 것처럼, 사회적 문제를 먼저 ‘때려줄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어요.” 고령화 시대 ‘노인의 성(性)’을 다룬 소설을 구상하고 있다. 사사로운 담론과 농담이 넘쳐나는 시대, 이홍사(필명)의 소설에 담길 이야기의 무게는 사회를 향한다. ■글 / 정우성 기자 ■사진 / 이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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