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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총 33 건 검색)

역세권 입지 갖췄다···대전 ‘도마 포레나해모로’ 선착순 분양
역세권 입지 갖췄다···대전 ‘도마 포레나해모로’ 선착순 분양
2024. 12. 23 11:10경제
.... ㈜한화 ㈜한화 건설부문이 대전 서구 도마동 181-1번지 일원(도마·변동9재정비촉진구역)에 ‘도마 포레나해모로’를 선착순 분양한다고 23일 밝혔다. 해당 단지는 HJ중공업과 공동시공했다. 도마...
㈜한화 건설부문, 대전 ‘도마 포레나해모로’ 선착순 분양
㈜한화 건설부문, 대전 ‘도마 포레나해모로’ 선착순 분양
2024. 10. 23 11:56경제
... 서구 도마동 181-1번지 일원에 ‘도마 포레나해모로’를 선착순 분양한다고 23일 밝혔다. 도마 포레나해모로는 지하3층~지상34층 7개동 818가구로 이중 일반분양 물량은 568가구다. 전용면적 타입별로...
셀레나 고메즈, 젊은 억만장자 대열에 ··· ‘화장품 사업’ 지분
레나 고메즈, 젊은 억만장자 대열에 ··· ‘화장품 사업’ 지분
2024. 09. 07 11:04문화
...레나 고메즈. AFP =연합뉴스 미국에서 배우이자 가수로 활동하며 큰 성공을 거둔 셀레나 고메즈(32)가 젊은 억만장자 대열에 합류했다고 블룸버그 통신이 6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블룸버그가 집계한...
2만5000가구 미니 신도시 대전 ‘도마 포레나해모로’
2만5000가구 미니 신도시 대전 ‘도마 포레나해모로’
2024. 05. 26 20:10경제
... 대전 서구 도마동 181-1번지 일원에서 HJ중공업과 공동 시공하는 브랜드 아파트 ‘도마 포레나해모로’가 선착순 분양 중이다. 단지는 지하 3층~지상 34층, 7개동 전용면적 39~101㎡ 총 818가구...

스포츠경향(총 116 건 검색)

로레나 안토니아찌, 임사랑과 함께 한 2025 S/S 캠페인 공개
레나 안토니아찌, 임사랑과 함께 한 2025 S/S 캠페인 공개
2025. 03. 18 09:56 연예
레나 안토니아찌(LORENA ANTONIAZZI)가 배우 임사랑과 함께한 2025 ‘S/S 컬렉션’을 17일(현지 시간) 공개했다. 앞서 로레나 안토니아찌는 지난 1월, 국립발레단 발리리나이자 미스코리아 출신인 배우 임사랑을 브랜드 엠버서더로 발탁하며 화제를 모은 바 있다. 로레나 안토니아찌 사상 최초의 아시아 배우 출신 엠버서더로, 당시 로레나 안토니아찌 관계자는 “그녀가 가진 아름다움은 한국을 넘어 아시아, 나아가 유럽 전역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면서 “고유의 시크하고 우아한 분위기가 브랜드 이미지와 잘 어울려 좋은 시너지를 낼 것으로 기대한다”고 설명한 바 있다. 이탈리아 현지에서 촬영된 이번 캠페인은 지난 2025 밀라노 패션위크 기간 밀라노 시내는 물론 중세시대의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가득한 밀라노 인근의 유명 관광지, 아씨시를 배경으로 한다. 임사랑은 이 기간 로레나 안토니아찌의 밀라노 패션위크 애프터 파티에서 공식 소개되며 전세계 패션 관계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기도 했다. 이 날 공개된 로레나 안토니아찌의 2025 ‘S/S 컬렉션’은 스타일리시한 봄 스타일링에 활용하기 좋은 봄버 스타일을 주제로, 로레나 안토니아찌의 스테디셀러 아이템인 봄버 재킷에 고급스러운 소재와 다양한 디자인으로 봄에 가볍게 걸치기 좋은 아이템들로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 특히 시그니처 아이템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봄버 재킷의 경우 베이지, 라이트 그레이, 카멜, 네이비 등 다양한 컬러로 출시돼 선택의 폭을 넓힌 것은 물론, 고급스러운 스웨이드와 트위드 소재를 활용해 클래식하면서도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평이다. 로레나 안토니아찌는 지난 1993년 에르메스 남성 패션 디자이너인 로레나 안토니아찌가 직접 선보인 브랜드로, 이탈리아의 하이엔드 니트웨어로 출발해 ‘짜임의 여왕’이라는 별칭과 함께 니트웨어 뿐 아니라 소프트 캐시미어, 팬츠, 코트 재킷, 모자, 장갑, 스니커즈까지 다양한 아이템을 전 세계에 선보이고 있다.
임사랑, 밀라노 거리를 수 놓다…로레나 안토니아찌 화보 촬영 현장 공개
임사랑, 밀라노 거리를 수 놓다…로레나 안토니아찌 화보 촬영 현장 공개
2025. 03. 06 09:50 패션
미스코리아 출신 배우 임사랑. 로레나 안토니아찌 제공 배우 임사랑이 이탈리아 명품 패션 브랜드, 로레나 안토니아찌의 글로벌 모델로 나선다. 로레나 안토니아찌는 한국 앰버서더 임사랑과 함께 밀라노 현지 화보 촬영을 마쳤다고 6일 밝혔다. 앞서 로레나 안토니아찌는 지난 1월, 국립발레단 발리리나 출신이자 미스코리아 미의 영예를 가진 배우 임사랑을 브랜드 엠버서더로 발탁했다. 이는 아시아 배우 최초로, 당시 로레나 안토니아찌 관계자는 “그녀가 가진 아름다움은 한국을 넘어 아시아, 나아가 유럽 전역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면서 “고유의 시크하고 우아한 분위기가 브랜드 이미지와 잘 어울려 좋은 시너지를 낼 것으로 기대한다”고 설명한 바 있다. 로레나 안토니아찌에 따르면 이번 화보 촬영은 이 기간 펼쳐진 2025 밀라노 패션위크 쇼의 일환으로, 밀라노 시내는 물론 중세시대의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가득한 밀라노 인근의 유명 관광지, 아씨시에서 연이어 진행됐다. 임사랑은 로레나 안토니아찌의 밀라노 패션위크 애프터 파티에서 공식 소개되며 현지를 찾은 패션 관계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로레나 안토니아찌는 지난 1993년 에르메스 남성 패션 디자이너인 로레나 안토니아찌가 직접 선보인 브랜드로, 이탈리아의 하이엔드 니트웨어로 출발해 ‘짜임의 여왕’이라는 별칭과 함께 니트웨어 뿐 아니라 소프트 캐시미어, 팬츠, 코트 재킷, 모자, 장갑, 스니커즈까지 다양한 아이템을 전 세계에 선보이고 있다. 임사랑과 함께 한 로레나 안토니아찌의 2025 S/S 화보는 이르면 3월 말 이탈리아 현지는 물론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각국에서 동시에 공개될 예정이다.
BEWAVE(비웨이브), 멤버 윤슬(YUNSEUL)·‘日 멤버’ 레나(LENA) 오픈
BEWAVE(비웨이브), 멤버 윤슬(YUNSEUL)·‘日 멤버’ 레나(LENA) 오픈
2024. 03. 15 21:52 연예
골드더스트엔터테인먼트 신예 걸그룹 BEWAVE(비웨이브)의 멤버가 공개됐다. 15일 SNS 채널을 통해 BEWAVE(비웨이브) 멤버 윤슬(YUNSEUL)과 레나(LENA)의 개인 프로필이 공개됐다. 먼저 윤슬(YUNSEUL)은 또렷한 이목구비로 청순함과 귀여움을 동시에 지닌 자신만의 매력을 발산하며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반면 스포티한 상의와 함께 허쉬컷으로 보이시한 분위기를 자아낸 멤버 레나(LENA)는 강렬한 눈빛과 카리스마로 독보적 존재감을 드러냈다. 멤버 윤슬(YUNSEUL)은 꾸준한 연습을 통해 완성도 높은 무대를 만들어내는 노력파 멤버다.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연습을 거듭해 자신의 단점을 강점으로 만들며 실력을 끌어올리는 동시에 팀 전체를 조율하는 결단력까지 갖추고 있어 앞으로의 활약을 기대케 한다. 유일한 외국인 멤버인 레나(LENA)는 귀여운 이미지와는 상반되는 수준급의 춤 실력이 돋보이는 멤버로 강렬한 카리스마와 절도 있는 동작, 깔끔한 춤선과 표현력을 갖추고 있어 팀의 퍼포먼스를 이끌어갈 멤버다. 또한 모국어인 일본어 작사 실력도 보유하고 있어 향후 일본 활동에서 두각을 드러낼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골드더스트엔터테인먼트 앞서 공개된 멤버 제나(ZENA)와 아인(AIN)에 이어 이날 윤슬(YUNSEUL)과 레나(LENA)의 프로필까지 공개, 데뷔에 앞서 점점 베일을 벗고 있는 BEWAVE(비웨이브)를 완성할 마지막 두 멤버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신예 6인조 걸그룹 BEWAVE(비웨이브)는 ‘BLUE WAVE’의 줄임말로 마치 파도처럼 때론 강하고, 때론 잔잔하게 다양한 매력을 선사하고 가요계에 이전에 없던 새로운 흐름과 유행을 대중 앞에 보여주겠다는 뜻을 담아 올해 상반기 중 정식 데뷔를 준비하고 있다.
‘맛있는 녀석들’ 유민상, 이수지 레나짱 성대모사에 버럭!
‘맛있는 녀석들’ 유민상, 이수지 레나짱 성대모사에 버럭!
2023. 11. 10 17:50 연예
IHQ 개그맨 유민상이 일본 애니메이션 레나짱 찐팬임을 인증했다. 10일 오후 8시에 방송되는 ‘맛있는 녀석들’에서는 맛있게 먹고 건강도 챙기는 버섯과 비건 요리 특집이 공개된다. 데프콘, 유민상, 이수지, 김해준은 직접 버섯을 키워 판매하는 버섯 샤부샤부 식당과 비건 요리 전문점에서 먹방을 펼친다 콩고기가 들어간 피자와 고사리 라구소스 밥의 칠리토푸엔칠라다를 시식하던 유민상은 “이런 거 먹여주면 비건 한다”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데프콘도 “소스로 혀를 속이는 것 같다”라며 일반식과 맛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이수지는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 취미생활도 같고 말도 잘 통한다. 그런데 오빠 나 비건이야. 오빠도 비건으로 바꿔주면 좋겠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라고 유민상에게 질문한다. 데프콘도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미소녀 스타일이다”라며 가상의 연인을 구체화시킨다. 그러자 유민상은 자신이 좋아하는 레나짱 캐릭터를 언급하며 “레나짱은 그러지 않는다”라고 답한다. 이수지는 한술 더 떠 레나짱 성대모사를 선보였고 이를 본 유민상은 “레나짱 비하하지마!”라 버럭해 폭소를 안긴다. 데프콘도 “제수씨한테 함부로 하지마”라며 유민상을 거들었고 이수지는 “예를 든 것이다”라며 울상을 지어 또 한 번 웃음을 자아낸다. 이후 유민상은 시청자들이 오해할까 걱정되었는지 “넷플릭스 마스크 걸을 따라한 것이 오해하지 마세요”라며 해명에 나선다. 일반식 만큼 맛있는 비건 요리와 깔끔하고 시원한 국물 버섯 샤부샤부 먹방은 오늘 저녁 8시 IHQ ‘맛있는 녀석들’에서 시청할 수 있다.

주간경향(총 1 건 검색)

[박상미의 공감 스토리텔링]다문화가정 대안학교 설립한 가수 인순이…외로운 소녀 에레나, ‘해밀학교’ 엄마가 되다(2016. 05. 23 16:10)
2016. 05. 23 16:10 문화/과학
“문을 열어주세요. 어두운 동굴 문을 이제 그만 열어주세요. 에레나는 내 우울한 유년, 어두웠고 어려웠던 시절의 자화상이기도 하고, 온갖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움으로 인도하는 황금의 열쇠이기도 합니다.” 1987년 인순이의 솔로 음반 음반 케이스 뒷면에 인순이가 쓴 글이다. 그 음반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곡 ‘비닐장판 위의 딱정벌레’는 에레나의 외로움을 절절하게 담아낸 명곡이다. “이봐요, 에레나. 무얼하나. 종일토록 멍하니 앉아 어떤 공상 그리할까. 시집가는 꿈을 꾸나, 돈 버는 꿈을 꾸나. 정말 에레나는 바보 같아. 오늘 하루 이런 난리. 딱정벌레야 너는 아니. 비닐장판 위의 딱정벌레, 하나뿐인 에레나의 친구, 외로움도 닮아가네. 외로움이 닮아가면 어느 사이 다가와서 슬픈 에레나를 바라보네. 울지 마요….” ‘비닐장판 위의 딱정벌레’를 아는 사람이라면 인순이가 부르는 ‘거위의 꿈’을 듣고 느끼는 감동은 배가된다. 삶의 경험이 깊이 발효된 목소리가 전하는 감동은 묵중하다. 유년의 어두운 동굴 문을 열고 나온 에레나는 데뷔 39년차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로 우뚝섰고, 자신과 비슷한 유년을 보내고 있는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주고자 대안학교를 세웠다. 학비 없는 배움터 ‘해밀학교’ 설립자 김인순을 아이들은 ‘큰엄마’라고 부른다. “교무실에 쌍무지개가 피었다/ 인순쌤 구름이 비를 쏟아낸다/ 쌍무지개 더욱 짙게 피어난다/ 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개면 비로소 해밀이 된다.”(‘쌍무지개’ 해밀학교 학생 정은찬) ‘해밀’은 ‘비 온 뒤 맑게 갠 하늘’이라는 뜻이다. 피부색, 언어, 생활고 등 복합적인 문제로 다중 고통을 겪고 있는 7만명에 가까운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을 전문적으로 돌보는 학교가 필요하다고 오랜 시간 생각해 왔다. 아이들이 처한 어려움을 단점이 아닌 장점으로 키워주는 학교를 만들고 싶었고, 2013년에 꿈은 현실이 되었다.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을 전문적으로 돌보는 ‘해밀학교’를 세운 가수 인순이씨. / 박상미 뜻은 좋지만, 힘든 일이 많을 것 같아요. “학교를 운영하다 보면 해결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요. 하지만 하나씩 해결해나가는 재미가 쏠쏠해요.(웃음) 하나 해결하고 나면 세상을 다 얻은 것 같고, 몇 달 지나면 또 벽을 만나고요.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고 책임져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힘들면 놓을 수는 있으나 놓아서는 안 되는 일이죠.” 학생들이 선생님들과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는 전액 무료 중학교, 입학조건이 까다로울 것 같아요. “입학조건은 거의 없어요. 면담을 해서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아이가 아니라면, 웬만하면 저희가 다 감당하며 키울 수 있다고 생각을 해요. 다문화 가정 아이들 중에는 여기서 태어난 아이들도 있지만, 엄마가 재혼을 해서 한국으로 올 때 현지에서 낳은 아이를 데리고 입국하는 경우도 있어요. ‘중도 입국’이라고 하는데요, 그 아이들은 이미 열일곱, 열여덟 살이 돼서 들어와요. 기역 니은도 모르고, 한국말도 모른 채로요. 또 탈북한 아이들, 난민 아이들, 이들이 모두 ‘다문화’의 범주에 속해 있어요. 우리 학교에서 키워야 할 아이들이죠. 그리고 ‘학교 밖’ 아이들도 있어요.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도 저희가 데려와요. 다문화 학교로 만들었지만 부모가 키우기 힘든 아이들은 우리가 키우겠다는 마음으로 학생들을 받고 있어요. 엄마가 혼자 키울 수 없는 사정이 있으면 초등 6학년도 받아요. 가까운 데 초등학교가 있으니까 그 학교에서 공부하게 하고, 방과 후에는 우리가 키우면 돼요.” 최근에 학생과 페이스북 친구가 되었는데, ‘큰엄마’는 엄마보다 더 가깝고, 친구 같은 존재라고 하더군요. “제가 지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도 ‘해밀학교’ 아이들이에요. 우리 학교에 한국말을 하나도 못하는 필리핀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2년 반 만에 검정고시에서 60점을 돌파하고 합격했어요. 정확히 60.8점! 기적 같은 일이에요. 저는 이 아이들이 한국 사람으로서 한국 땅에서 자신의 자존감을 높이면서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건강하게 자라서, 인간관계도 지혜롭게 맺어나가는 사람이 되길 바라요.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 내가 싸워야 하는지, 참아야 하는지, 판단을 못할 때가 있잖아요. 우리는 공부는 물론이고, 이런 삶의 지혜를 알려주는 학교가 되고 싶어요. 4월 23일이 우리 학교 개교기념일이었어요.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연락을 해서 1~2년 다니다 떠난 아이들, 중간에 검정고시 합격해서 나간 아이들, 졸업생들이 다 모여서 잔치가 벌어졌어요. 모두 씩씩하게 자기 길을 가고 있어요. 저는 아이들이 하고 싶은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고, 행복하게 살길 바라요. 아이들이 하고 싶은 기술을 배울 수 있게 해주고, 재능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고 싶어요. 기회를 만나야 아이들이 재능을 펼칠 수 있으니까요.” 학교 근처에서 학생들과 송어체험 도중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인순이씨. / 인순이씨 제공 수업을 직접 하실 때도 있나요? 아이들과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나요. “아이들 속에 앉아서 같이 수업을 들을 때는 있지요.(웃음) 저는 같이 밥 먹고 놀면서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고민 속으로 들어가요. ‘야, 너네 엄마 아빠는 왜 사랑했다니? 왜 한국에서 우리를 낳았다니?’ 물으면 아이들도 ‘그러게 말이에요’ 하는 눈빛으로 저를 쳐다봐요. 그럼 제가 말하죠. ‘근데 내가 나이가 드니까 알겠더라. 사랑하는데 그걸 누가 말리니? 너희도 서로 좋아하는 사람 있잖아. 서로 사랑했으니까 우리를 낳은 거야.’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해요. 부모가 헤어지면서 상처받은 아이들은 사춘기를 수십 년 동안 끌고 갈 수 있거든요. 엄마, 아빠 두 사람의 사랑 문제, 부부 문제에 내 인생을 연결시켜서 우울하게 살지 말자고 저는 말해요. 나도 우리 엄마, 아빠 때문에 불행한 유년기를 보냈는데, 부모님 때문에 내 인생을 망가뜨리지 말자고 말해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은 세상에 한 사람도 없고, 우리는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싶어요.” 선생님의 아픔과 경험이 아이들에겐 가장 좋은 약이 되겠어요. “나도 어릴 땐 아버지를 원망한 적도 있죠. 제가 2년 전에 미주 투어를 다녀왔는데요, 그때 참전용사들을 초청해서 노래를 했어요. 공연 끝나고 난 후에 기념사진을 찍으면서 그분들께 ‘당신들이 한국전쟁에 왔을 때 몇 살이었어요?’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17살, 18살이라는 거예요. 유엔 공동묘지에도 17살짜리의 묘가 있어요. 아버지라고 생각하면 원망하는 마음이 들죠. 하지만 17살짜리 남자아이, 남의 나라 전쟁에 참전한 아이가 내 아들이라고 생각하면 이해 못할 게 없더라고요. 들어보지도 못한 남의 나라에 와서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해 있는데 얼마나 불안했겠어요. 그 불안한 마음을 이겨내려고 사랑을 찾고 여자를 만날 수도 있었겠죠. 그때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는 이유가 하나 더 생겼어요.” 해밀학교 1회 졸업식 때 예쁘게 화장하고 한복을 입은 졸업생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인순이씨. / 인순이씨 제공 ‘해밀학교’에는 마음 아픈 아이들이 많잖아요. 그 아이들의 가장 좋은 상담자 역할을 맡고 계시네요. “제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이해 못할 아이는 없어요. 저도 시도는 안 해봤지만, 자살 생각을 안 해봤다면 거짓말이죠. 약 먹고 죽으려니까 약값이 없고, 뛰어내리려니까 아플 것 같고.(웃음) 어느 날 새벽에 한 녀석이 문자를 보내왔어요. ‘선생님, 저 지금 학교 옥상에 와 있어요.’ 저는 바로 일어나서 자는 선생님들 다 깨워서 애를 찾아보라고 당부하고, 학교는 난리가 나죠. 하지만 저는 아주 침착하게 답을 해요. ‘달빛이 그렇게 좋으냐? 여기는 별도 안 보이는데, 거기 달빛은 어때?’ 이러면서 시간을 끌어요. 그러면서 계속 얘기를 나누죠. ‘추운데 얼른 내려와~ 집에서 자자. 응?’ 그러면 아이는 ‘나는 선생님이 이래서 좋아요’ 그래요. ‘그치? 나도 네가 얼마나 착한 아이인지 알아. 다음에 또 옥상에 올라가게 되면, 달 보면서 예쁜 시 하나 써주라!’ 이러죠. 왜 그러냐고 호들갑을 떠는 게 아니라 그냥 평소처럼 대하는 거예요. 농담처럼 이야기하다 보면 아이가 깔깔깔 웃다가 해 뜨기 전에 내려오게 되어 있어요.(웃음) 얼마 전엔 졸업생 하나가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 많이 힘든 것 같더라고요. 우리 집에 불러서 재우고, 부산으로 여행을 갔어요. 유엔 공동묘지에 가서 온종일 같이 기도했죠. 손잡고 다니면서 맛있는 거 먹고, 바다도 보고요. 아이들은 어른이 훈계하는 거보다 같이 있으면서 안아주고 얘기 들어주면 금세 마음 문 열고 얼굴이 밝아져요.” 심리학 전공한 사람보다 아이들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해주니까, 졸업을 해도 인순이 엄마를 떠나지 못하겠네요. 마음 다 털어놓아도 될 것 같은, 안겨서 울면 등 두드려 줄 것 같은 사람…. 늘 활기찬 모습이 보기 좋지만, 가끔은 저 사람 늘 웃느라 참 힘들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삶의 바닥 끝까지 내려가 본 사람은 더 내려갈 곳이 없어서 올라올 수밖에 없어요. 어려서부터 삶이 내게 가르쳐 준 것 같아요. 덕분에 저는 잘 참는 어른으로 자랐죠. 저는 술도 못 마시고 담배도 못 피기 때문에 아무리 힘든 일이 생겨도 혼자 참아야 해요. 가족 앞에서는 늘 밝은 목소리로 얘기하지만, 혼자 있을 땐 엉엉 울기도 해요. 얼마 전에 무척 힘든 일이 있었는데, 조찬 모임에 가서 밝게 웃으며 사람들을 만난 뒤에 혼자 차에 탔는데, 그때부터 눈물이 멈추지를 않는 거예요. 주차장을 빠져나올 때 엉엉 울면서 주차비를 드렸더니, 주차비 받는 분이 ‘왜 울어요. 울지 마세요.’ 하며 저를 위로해 주시는 거예요.(웃음) 무대가 아닌 곳에서 제가 우는 모습을 본 건 그 사람이 유일할 거예요. 긴 시간 울고 싶어서 홍천에 있는 학교로 차를 몰고 갔어요. 가는 동안 실컷 울고, 웃으면서 학교에 들어갔죠. 선생님들과 우리 아이들을 만나니 마음이 환해져서 집으로 돌아왔어요.” 해밀학교 학생들과 수업을 하고 있는 인순이씨. / 인순이씨 제공 늘 씩씩해야 하고, 쓰러져서는 안 된다는 강박이 있는 것 같아요. “청소년 시절부터 집안의 가장이었기 때문에 저는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동생을 제가 책임지고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고등학교 입학도 포기해야 했죠. 어릴 때 엄마 혼자 저를 키우느라 너무 가난했어요. 월말이 되면 구멍가게 주인이 외상값 받으러 오고, 집주인이 방세 받으러 와서 엄마 어디 있냐고 다그쳐요. 엄마는 방에 숨어서 ‘엄마 없다고 말해줄래?’ 그래요. 저는 망설이다가 ‘우리 엄마가… 없다고… 말해 달래요…’ 그랬어요. 어릴 때부터 거짓말은 못하겠더라고요.(웃음)” 페이스북을 통해서 가 문 연 날부터 지금까지 계속 지켜봤어요. 선생님, 마을주민, 학생들, 모두가 가족처럼 재밌게 지내더라고요. 1기 졸업식 때 예쁘게 화장하고 한복을 차려 입은 아이들이 눈부시게 환하더군요. “다섯 명이 졸업을 하고 고등학교로 진학했어요. 시집 보내는 마음이었죠. 최고로 유명한 곳에서 메이크업을 받게 하고 예쁜 한복도 입혔어요. 마을 어른들도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해 주시는지 몰라요. 같이 농사도 짓고, 축제 때는 돼지도 잡아 오고, 김장 담그기 행사도 같이하고요. 우리 선생님들도 천사가 따로 없어요. 그들이 다 모여 사는 곳이 ‘해밀학교’입니다. 우리의 꿈은 학교가 인가를 받는 거예요. 인가를 내면 선생님과 아이들의 자긍심도 달라지겠죠. 아이들이 국가에서 인증하는 졸업장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학교는 후원금으로 운영되나요? 학교 인가를 받는 건 많이 어려운가요. “처음 1년 동안은 제 돈으로 모든 걸 다 했어요. 그런데 지인들이 혼자 다 키우려고 하지 말고 많은 사람들이 마음으로 함께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후원을 받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300여명이 후원해 주세요. 매월 1만원, 2만원, 5만원 내시는 분들도 있고, 한 번에 500만원을 후원하는 분도 있어요. 우리는 작은 마음을 정기적으로 후원하시는 분들이 참 반가워요. ‘우리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 아이들도 느낄 수 있고요. 지금 학교 옆에 폐교를 하나 샀는데, 6억이 통장에 있다는 것을 증빙해야 국가 지원을 받을 수 있어요. 많은 분들이 마음을 모아주셔서 4억이 됐어요. 하지만 아직 2억이 모자라요. 후원금을 받으러 계속 다녀야 하는데, 지칠 때도 많아요. 어떤 사람들은 내가 왜 당신 사업에 후원을 해줘야 하느냐고 말해요. 우리는 사단법인이기 때문에, 제가 학교 일을 그만둬도 학교에 낸 수억원 중에 10원도 못 가지고 나와요. 해마다 학교 운영비의 절반을 제가 내기 때문에, 후원금을 요청할 때도 떳떳할 수 있어서 좋아요.” 해밀학교 학생들과 수업을 하고 있는 인순이씨. / 인순이씨 제공 방송에 ‘해밀학교’를 자주 소개하면 후원이 늘지 않을까요. “제가 원치 않아요. 그들은 자꾸 아이들이 눈물 흘리는 장면을 원해요. 아이들에게 밝은 미래를 보여주려고, 밝은 웃음을 찾아주려고 학교를 연 건데, 왜 아이들의 아픔을 들춰내고, 눈물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하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쉬지 않고 다니면서 도움을 청하면 돼요. 아이들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많이 웃고!(웃음)” 이제 다 이룬 것 같은데, 남은 꿈이 있나요. “전 앞으로도 열심히 일할 거예요. 아니 일해야만 해요. 힘들게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을 응원해 주고, 그들이 기술을 배우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주고 싶어요.” 그녀를 만나던 날, 그녀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고, 지금도 여전히 힘든 스물두살 제자 J를 데리고 나갔다. 함께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J가 힘을 얻게 될 것 같아서였다. 학생의 사정을 들은 그녀는 조용히 J의 전화번호를 입력해 갔다. 그리고… 그녀는 J에게 매일 문자메시지로 말을 걸고 있었다. “우리, 힘들어도 웃으면서 살자. 언제든 힘들면 내게 도움을 청해. 그리고 나랑 같이 좋은 강의 들으러 다니자. 난 모르는 게 많아서 강의 들으러 열심히 다닌단다. 답답한 날엔 같이 산에 갈래?” 학생이 보여준 문자메시지다. “밥 굶지 말라고 용돈도 주셨는데, 어떡하죠?” J의 눈이 빨갰다. J에게도 또 하나의 든든한 엄마가 생긴 것 같아서 더불어 기뻤다. 하나밖에 없는 딸, 박세인양은 미국 스탠퍼드대학교에서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 사이언스를 전공했고, 다음 달에 졸업한다. ‘해밀학교’ 아이들 자랑에 열정적이던 그녀가 세인이 이야기가 나오자 말을 아꼈다. 입학 당시에 ‘엄마를 닮아서 열심히 산다는 얘기를 듣고 싶다’고 말하던 소녀는, 얼마 전 세계인이 다 아는 글로벌 기업 신입 공채에 합격했다. 졸업식 날은 졸업생 상위 10% 이내에 든 학생에게만 주는 상도 받는다. 입사 이야기, 수상 이야기를 그의 지인에게서 듣고 축하 인사를 건네니, 그건 절대로 쓰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다. 이 글을 보면 그녀는 내게 화낼 것이다. 하지만, 해밀의 아이들과 엄마의 사랑을 나누어 가진 세인씨 참 장하다고, 엄마처럼 열심히 사는 모습 멋지다고 칭찬해 주고 싶다. 가난, 혼혈, 한부모 가정, 중졸…. 친구가 없던 외로운 소녀 에레나는 편견과 차별의 어두운 동굴 문을 활짝 열고 세상으로 나올 수 있는 법을 가르치는 ‘해밀학교’의 엄마가 되었다. 한국에서 가장 ‘개념 있는 여자’ 김인순. 지금처럼 강하고 따뜻한 엄마의 모습으로 더 많은 아이들을 안아 줬으면 좋겠다.(사단법인 인순이와 좋은 사람들-신한은행 100-028-968075)
박상미의 공감 스토리텔링

레이디경향(총 2 건 검색)

‘32세’ 셀레나 고메즈, “나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
‘32세’ 셀레나 고메즈, “나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
2024. 09. 11 10:15 연예
배우이자 가수 셀레나 고메즈가 베니티 페어와의 인터뷰에서 가족계획에 대해 공개했다. 그는 2013년 루푸스 질환을 진단받아 신장을 이식받는 등 투병 중이다. 영화 <레이니 데이 인 뉴욕> 스틸컷 할리우드 배우이자 가수 셀레나 고메즈(32)는 “자신의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미국 매체 베니티 페어와의 인터뷰에서 현 남자 친구 베니 블랑코와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하던 중 가족계획을 언급하며 지병에 대해 털어놨다. 고메즈는 “나는 나와 아기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많은 의학적 문제가 있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 2013년 만성 자가면역 질환인 루푸스 진단을 받았다. 화학 치료 요법을 받는 중 루푸스 신염이 발병해 신장 이식을 받기도 했다. 또 고메즈는 2022년 음악잡지 롤링스톤과의 인터뷰에서 양극성 장애 진단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복용하고 있는 약물 또한 임신을 방해한다고 언급했다. 그는 미래의 자녀 계획에 대해 ‘대리모’나 ‘입양’을 고려 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대리모와 입양은 엄마가 되고 싶은 사람을 위한 다른 대안이며 나 역시 그것을 기다리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 여정이 어떤 모습일지 기대되고 현실은 다를 것으로 생각하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어떤 방식으로 만났든 내 아기니까”라고 말했다. 고메즈가 입양에 대한 긍정적인 발언을 한 배경에는 어머니의 영향도 있다. 연극배우 출신인 어머니 맨디 티페이 역시 입양아였다. 그는 “(어머니가 입양되지 않았다면) 아마 저는 여기에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삶 또한 어땠을지 모르겠다. 어머니와 나의 인생이 순탄하게 흘러간 것에 대해 매우 감사하고 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일흔살 소녀’가 간직한 50년의 사랑 레나테 홍의 망부가
‘일흔살 소녀’가 간직한 50년의 사랑 레나테 홍의 망부가
2007. 10. 22 화제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가 말했다. 만남과 이별이 익숙한 요즘 사람들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감동받아서가 아니다. 헤어질 때를 알고 돌아서는 뒷모습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둔한 남자의 순정이 답답해서다. 요즘은, 영화에서도 소설에서도 영원한 사랑을 노래하지 않는다. 그러나 푸른 눈의 독일 할머니 레나테 홍의 가슴속에는 영원한 사랑’으로 남아 있는 한 남자가 여전히 살아 있다. 북한 유학생과 독일 여학생의 사랑 그의 이름은 홍옥근(73)이다. 북한 남자다. 레나테 홍(70)은 1961년 이별한 뒤 생사도 알 수 없는 남편을 가슴에 품고 46년을 살았다. 지난 8월 23일 열린 기자회견장에서 이제 일흔이 된 여자의 마음에 살아 있는 풋풋한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남편을 회상하는 할머니의 눈에는 금세 눈물이 차올랐고, 옛 사진들이 담긴 앨범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주름진 손은 가늘게 떨렸다. “남편은 어떤 사람이었나”라는 질문에는 “무척 쾌활하고 똑똑한 미남이었다. 첫눈에 매혹당했다”고 말하며 소녀처럼 웃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지난 1954년 독일 예나 대학의 화학 강의 시간이었다. 홍옥근은 175cm의 훤칠한 키에 21세의 미남이었다. 당시 18세였던 레나테는 수줍은 많은 소녀였고, 쾌활하고 유머러스한 홍옥근에게 호감을 가졌다. “신입생 환영 파티에서 그가 멋지게 왈츠를 추며 내게 다가온 것이 사귀게 된 계기가 됐죠. 그는 꽃잎을 말려 선물할 정도로 낭만적이고 자상했어요. 졸업 당시에는 최우수 성적을 받을 정도로 똑똑했고, 독일어도 완벽했습니다.” 지난 1월 Q채널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다시봅시다’에서 레나테는 홍옥근과 처음 만난 강의실을 찾기도 했다. 그가 주로 앉았던 뒷자리와 홍옥근이 주로 앉았던 앞쪽 자리를 정확하게 기억했다. 낡은 나무 책상을 만지며 “옥근은 주로 저 앞줄에 앉았어요. 예전과 똑같군요. 신기합니다”라며 추억에 잠겼다. 홍옥근은 당시 ‘사회주의 국제연대’를 표방했던 동독 정부의 주선으로 장학금을 받고 예나 대학에 유학 중이었다. 동독 정부는 당시 북한뿐 아니라 베트남, 중국 등의 우수한 과학도에게 장학금을 지원해 유학의 길을 열어줬다. 유학생들은 학업을 마친 후 본국으로 돌아가 자신이 습득한 기술과 지식을 환원해야 했다. 홍옥근도 이 중 한 명이었다. 북한 유학생들은 독일 현지에서도 동독 후원인의 감시를 받았다. 일상도 통제됐다. 외국인 거주지역에서 살며 저녁 10시에는 귀가해야 했다. 기숙사 방문자들의 이름은 철저하게 기록됐다. 이런 제약들은 그러나, 그들의 사랑을 가로 막는 장애물이 될 수 없었다. 레나테는 대학 학생회관 내 댄스홀에서 자주 홍옥근을 만났다. 산책을 즐기고 극장에 가서 영화를 봤다. 외식을 즐기기도 했다. 그는 레나테에게 수학과 물리를 가르쳤고, 레나테는 홍옥근에게 독일어를 가르쳤다. 시간이 갈수록 돈독한 정이 쌓여갔다. 1960년 4월, 두 사람이 결혼할 때 레나테는 첫째 아들 페터를 잉태하고 있었다. 그들의 결혼은 쓸쓸했다. 레나테의 부모는 “피부색과 문화가 전혀 다른 동양인을 맏사위로 맞을 수 없다”며 참석을 거부했다. 단칸방에서 시작한 신혼살림은 그래도 행복했다. 레나테는 남편을 위해 쌀로 밥을 짓고, 배추가 없어 양파로 김치를 담갔다. 그해 여름 큰아들 페터가 태어났다. 홍옥근도 학업을 마치고 화학 섬유 공장에 일자리를 얻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이었지만, 두 사람의 단꿈은 오래가지 않았다.역사의 흐름에 휘말린 이별 1961년 4월, 북한으로부터 느닷없는 강제 소환 명령이 떨어졌다. 동서 냉전의 상징이던 베를린 장벽이 들어서던 해였다. 194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소련이 관할하던 동베를린을 포함한 동독 지역에는 공산정권이 들어섰다. 동독 주민은 자유를 억압하는 정권에서 벗어나려 대량 탈출을 시도했다. 1949년부터 장벽이 건설되기 전까지 서독으로 넘어간 동독 주민의 수는 약 2백70만 명에 이른다. 당시 동독에는 3백50명의 북한 유학생이 있었고, 북한은 일부 북한 유학생들이 서독으로 탈출하려는 움직임을 감지했다. 서둘러 유학생들을 북한으로 소환했다. 갑작스러운 소환 명령, 홍옥근은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책과 옷가지를 급히 챙겨 기차에 올랐다. 러시아와 중국을 거쳐 북한으로 돌아가야 했다. 생후 10개월인 페터를 안고 남편을 보내는 레나테는 둘째 아들을 임신 중이었다. “평생 가장 슬픈 순간이었습니다. 남편이 기차에 오르는 순간, 10개월 된 페터가 ‘아빠’라고 비슷한 발음으로 그를 불렀어요. 눈물로 얼룩진 그의 얼굴을 봤습니다. 그런 얼굴은 처음이었어요. 저는 둘째를 임신 중이었고, 그는 더 힘들었을 겁니다. 잊혀지지 않아요.” 둘째를 임신 중이던 레나테의 몸은 2주간의 기차여행을 감당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둘은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서로를 보냈다. 헤어지던 순간의 영상이 기자회견장에 상영될 때 레나테는 눈물을 흘렸고, 여러 번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45년 전의 첫사랑이 마지막 사랑이 됐습니다. 그를 다시 만난다면, 50년 전에 그랬듯 그냥 물끄러미 바라볼 것 같아요. 그리고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리겠죠.”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1961년 이별의 아픔은 레나테의 가슴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현실이다.이별로 다시 시작된 사랑 두 사람의 행복한 사랑은 차마 역사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다. 그러나 역사의 거센 흐름은 레나테 홍의 마음 또한 거스르지 못했다. 남편을 향한 그의 사랑은 그때부터 다시 시작됐다. 홍옥근의 눈매를 꼭 닮은 두 아들이 곁에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얻은 두 아이, 그리고 그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이 저를 지탱하는 힘이었어요. 건강하게 잘 자라주는 것이 너무나도 행복했습니다.” 큰아들 페터 현철씨(47)는 ‘현철’이라는 한국 이름을 버리지 않았다. 아버지 사진을 볼 때마다 ‘언젠가는 우리를 찾아오시겠지’라고 기대했다. 동생 우베시(36)와는 아버지에 대한 대화를 의도적으로 피했다. 서로에게 상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아버지 없이 자란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속이 늘 뭔가 채워지지 않고 부족한 느낌이었죠. 이름을 바꾸겠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아버지가 주신 이름이고, 아버지를 기억하고 싶어서죠.” - 큰아들 페터 현철 1961년, 북한으로 돌아간 홍옥근은 부지런히 레나테에게 편지를 보냈다. 레나테도 열심히 답장을 썼다. 홍옥근은 항구 도시 함흥에서 살았고, 화학섬유 공장 실험실 책임자로 있다는 소식도 전했다. 이들이 편지를 주고받던 초기, 남편의 편지에는 레나테가 아이들을 데리고 자신을 따라 북한으로 따라 들어올 것을 기대한다고 쓰여 있다. 하지만 곧, 북한에서의 생활 여건이 결코 쉽지 않다는 편지도 이어졌다. 레나테가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연꽃잎은 지난 1962년 북한에서 보내온 편지에 동봉된 것이다. 북한에서 보내오는 선물은 모두 검열 대상이기 때문에, 다른 것은 보낼 수 없었다. 홍옥근은 “내가 다시 예나로 돌아갈 수 있도록 힘써보라”는 편지도 보냈지만, 베를린 주재 북한 대사관은 레나테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들의 편지 왕래도 1963년 2월 26일이 마지막이었다. “사랑하는 레나테, 당신과 아이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오. 더 이상 편지를 쓰지 못할 것 같소. 오늘 편지는 내가 생존해 있다는 마지막 신호가 될 것 같소”라는 내용이다. 레나테는 독재사회에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조바심이 났다. 아이와 함께 찍은 사진을 넣어 서둘러 답장을 보냈지만 1964년 8월 20일 반송됐다. 이어 “당신 때문에 걱정이 많으니, 답장 좀 해줘요”라고 쓴 편지에는 ‘수취인 불명’ 도장이 찍혔다. 레나테 홍 할머니와 두아들 페터와 우베.이후 1989년, 레나테는 동독이 붕괴되기 직전 동독에서 두 명의 북한인을 만난다. 한 명은 동베를린 북한 대사관 직원이었고, 다른 한 명은 논문 발표를 위해 예나를 방문한 물리학 교수였다. 이들은 “홍옥근이 여전히 연구원으로 일하며 함흥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려줬다. 남편의 생존은 새로운 희망의 씨가 됐고, 작년 11월 레나테의 순애보가 중앙일보를 통해 한국에 보도됐다. 유력 독일 일간지들은 앞 다퉈 그의 사연을 다뤘다. 독일 외무부와 적십자사도 레나테가 그의 남편을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나섰다. 지난 8월 21일의 방한은 28일 예정됐던 남북 정상회담에 맞춰 추진한 일정이었다. 방한의 기쁨과 아쉬움 10박 11일간의 방한 기간 중 그는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청와대에 전달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 이홍구 전 총리, 한완상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만났다. 금강산 관광으로 북한 땅을 밟기도 했다. 금강산은 50년 전, 남편 홍옥근과 꼭 같이 가자고 약속한 곳이었다. 레나테는 “수직으로 깎아지를 듯 내려 뻗은 절벽이 남편이 얘기한 그대로”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앙지대에서 주변 경관을 설명하던 북측 안내원이 “함흥이 이곳에서 멀지 않다”고 하자 “남편이 살고 있는 곳이 지척이라니…”라며 추억에 잠겼다. 한편 남편 홍옥근은 북한에서 재혼해 살고 있다고 알려졌다. 레나테는 기자회견에서, “지금 와서 같은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남편의 재혼 사실이)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46년 동안 남편과 재회할 날을 생각하며 버텨온 사랑이 이별로 굳어질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해하지만 가슴이 아프다”고 말하는 그의 눈시울은 금세 붉어졌다. 남편 홍옥근씨가 편지에 동봉한 말린 연꽃잎.처음 한국 땅을 밟았을 때 그의 심경은 복잡했다. “드디어 남편이 있는 땅에 왔구나” 하는 기쁨과 “나는 왔지만 남편은 북에 있으니 만날 길이 없다”는 슬픔이 공존했다. 그리고 한국에서의 일정을 숨 가쁘게 소화한 그는 지난 8월 31일 인천공항을 통해 독일로 출국했다. 한국에서의 공식 일정으로 여러 사람을 만나고 이북 땅을 밟은 그의 가슴속에는 새로운 희망이 싹텄을까.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난 5월 16일 베를린 자유대학 내 접견실에서 레나테 홍을 만나 “50년 넘게 남편을 기다리는 그 사랑을 높게 평가한다”며 “부인의 남편 상봉도 도와주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부인의 간절한 소망이 북한에 전달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반기문 유엔(UN) 사무총장도 지난 2006년 12월, “유엔이 하는 일 중에서도 인도적 지원과 인권 보호는 매우 중요하다”며 “유엔 차원에서 레나테 홍 할머니의 가족 상봉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검토해보겠다”고 말했다. 레나테 홍과 홍옥근의 사랑은 역사와 체제 속에서 격랑에 휘말렸다. 몇 번의 결혼 프러포즈에도 북한에 있는 남편만을 생각하며 수절해온 레나테의 순애보는 드라마틱하다. 이들의 아름다운 사랑은 그러나, 이산의 아픔이 비단 북한과 한국 사이의 문제만이 아니었다는 사실 또한 일깨운다. 독일에는 레나테 홍 외에도 북한 남성과 사랑에 빠져 ‘생이별’한 가족들이 여전히 북한에 있는 남편을,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다. 아울러 남북의 상황도 환기시킨다. 정부의 추산에 따르면, 6·25를 전후해 남과 북으로 흩어져 휴전으로 헤어진 이산가족 수는 남북을 합쳐 1천만 명에 달한다. 북한에 생존하고 있는 국군 포로와 납북자의 수도 1천 명이 넘는다. 레나테 홍의 ‘46년 망부가’가 전해주는 먹먹한 감동은 그들 각각의 애절한 사연 또한 짐작케 한다. 30년 전에 납북된 고교생 아들의 밥그릇을 아직도 매 끼니 가득 채운 채 애타게 기다리는 모정을 그 어떤 사랑에 비할 수 있을까. 레나테 홍은 기자회견 말미, 낡은 교본으로 남편과 함께 공부한 한국어 한마디를 건넸다. 그는 홍옥근과의 사랑과 재회의 희망을 담아 한 음절씩 또박또박 발음했고, 아쉬움이 남는 듯 몇 번 반복했다. 그의 한마디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가족과 생이별한 채 수십 년의 세월을 견뎌온 한국과 독일 이산가족의 염원 또한 담고 있었다. “다시, 봅시다. 다시, 봅시다.” ■글 / 정우성 기자 ■사진 / 이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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