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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총 174 건 검색)

미 명문대 졸업생은 왜 보험사 CEO를 쐈나···SNS선 ‘영웅’ 응원도
명문대 졸업생은 왜 보험사 CEO를 쐈나···SNS선 ‘영웅’ 응원도
2024. 12. 11 15:54국제
“의료시스템 향한 미국 사회의 오랜 분노 반영” 총격범은 ‘영웅’·피해자는 ‘악당’?…뒤틀린 반응도 KFF “미국 성인 절반, 의료비 감당 어려워” 유나이티드헬스그룹 보험 부문 대표 브라이언 톰슨...
중국 명문대 나와도 갈 데가 없다···실질 취업률 20%도 안 돼
중국 명문대 나와도 갈 데가 없다···실질 취업률 20%도 안 돼
2024. 01. 11 14:23국제
.... AFP연합뉴스 취업난에 대학원 진학·유학 늘어 지난해 대학원 진학률은 53.1% 지난해 중국 명문대 졸업생들의 실질 취업률은 20% 안팎이라고 봉면신문 등 현지 매체들이 11일 보도했다. 상하이 명문...
취업중국
미 명문대 총장님들이 떤다…‘반유대주의’ 때리는 월가 큰손
명문대 총장님들이 떤다…‘반유대주의’ 때리는 월가 큰손
2023. 12. 13 22:01국제
헤지펀드 거물 빌 애크먼 ‘유펜’ 총장의 퇴진 끌어내 표현의 자유 억압 지적도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 발발 이후 미국 유대계는 하버드대와 펜실베이니아대(유펜), 매사추세츠공대(MIT) 총장 퇴진 운동을...
[시스루 피플] 대의인가, 사감인가···미 명문대 총장들의 저승사자가 된 남자
[시스루 피플] 대의인가, 사감인가···미 명문대 총장들의 저승사자가 된 남자
2023. 12. 13 15:37국제
... 제대로 관리 못 해” ‘헤지펀드 거물’ 애크먼 회장, 여론 이끌며 하버드·유펜·MIT 등 명문대 총장 퇴진 운동 빌 애크먼 퍼싱스퀘어캐피털 회장. 로이터연합뉴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 발발 이후...
시스루피플

스포츠경향(총 70 건 검색)

‘美 명문대생’ 윤후, 얼굴은 그대로…몸만 큰 근황
‘美 명문대생’ 윤후, 얼굴은 그대로…몸만 큰 근황
2025. 01. 06 17:12 연예
김송 SNS 가수 윤민수 아들 윤후의 근황이 공개됐다. 방송인 강원래의 아내 김송은 5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오늘 ‘아빠 어디가’의 윤후가 인사하러 교회에 왔는데 얼굴은 어릴 적 귀요미 그대로 몸은 멋지게 자란 모습을 보고 넘넘 뿌듯 감사!!”라며 여러 장의 사진을 게재했다. 사진 속 윤후는 모친과 함께 참석한 교회 예배에서 지인들과 셀카를 찍고 있는 모습이다. 어린 시절의 얼굴이 그대로 남아있는 반면 훌쩍 커버린 키가 시선을 모은다. 2006년생인 그는 현재 미국 명문대인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채플힐에 재학 중이다. 이와 관련해 김송은 “내일 다시 돌아갈 미국에서도 항상 건강하길, 부모 위해 기도하는 윤후 되길”이라며 응원했다. 또 “윤후를 잘 키운 윤후맘 기특하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 윤후가 입학한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채플힐은 수십 년간 미국 내 상위 5위에 이름을 올리는 공립대학교 중 하나로 유학생 입학이 어렵기로 유명하다.
‘무도’ 출연했던 노홍철 친형 ‘깜짝’ 끈황…日 명문대 교수 됐다
‘무도’ 출연했던 노홍철 친형 ‘깜짝’ 끈황…日 명문대 교수 됐다
2024. 11. 15 10:43 연예
노홍철 친형. 유튜브 캡처 MBC 예능 ‘무한도전’에서 노홍철의 형으로 출연해 화제를 모았던 노성철의 깜짝 근황이 공개됐다. 지난 14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노홍철 친형 노성철의 근황을 밝히는 글이 올라와 화제를 모았다. 현재 노성철은 히토츠바시 대학 경영관리연구과 준교수로 올해 4월 임용됐다. 히토츠바시 대학교는 도쿄 소재의 대학교로 사회과학 계열 연구 중립의 명문 대학교다. 노성철은 카이스트와 연세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맥길 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아 사이타마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무한도전’의 ‘환장의 짝꿍 특집’에서 노홍철과 판박이 모습으로 큰 인기를 끌었으며 지난 14일에는 노홍철의 개인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근황을 알리기도 했다. 노성철은 노홍철을 만나자마자 “어우 오늘 회의도 많았다”며 피곤해했고 이에 노홍철은 “아니 그 학교 쉽지 않네”라고 말했다. 노성철은 “MBA는 완전히 서비스업에 가까워 서비스업. 엄청 서비스 정신을 발휘해야 해. 서비스업 정신을 발휘 안하면 내 수업에 지원률이 떨어지고”라며 만만치 않은 교수 생활에 대해 언급했다.
장윤정♥도경완 子, 떡잎부터 달랐나…美 명문대 영재 프로젝트 합격 (내생활)
장윤정♥도경완 子, 떡잎부터 달랐나…美 명문대 영재 프로젝트 합격 (내생활)
2024. 09. 05 11:09 연예
ENA 제공 ‘내 아이의 사생활’ 3년 만에 예능으로 돌아온 ‘도도남매’ 연우, 하영이의 근황이 공개된다. 7일 ENA 새 예능 프로그램 ‘내 아이의 사생활’(이하 ‘내생활’)이 첫 방송된다. ‘내생활’은 품 안의 자식들의 생애 첫 도전을 통해 어른들은 몰랐던 아이들의 사생활을 지켜볼 수 있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도장부부’ 도경완-장윤정이 MC를 맡고, 이들의 자녀 ‘도도남매’ 연우와 하영이도 출연자로 함께한다. 이날 방송에는 KBS 2TV ‘슈퍼맨이 돌아왔다’ 이후 약 3년 만에 TV로 랜선 이모, 삼촌들과 만나는 ‘도도남매’ 연우와 하영이가 등장한다. 최근 진행된 녹화에서 공개된 VCR 속 연우와 하영이는 훌쩍 큰 모습으로 반갑게 인사했다. ENA 제공 이어진 근황 소개에서 연우는 현재 갖고 있는 사춘기에 대한 고민을 전했다. 현재 초등학교 4학년인 연우는 “사춘기가 오면 엄마가 갱년기”라며 심각하게 이야기를 꺼냈다고. 이에 스튜디오 안 모두가 폭소를 터뜨린 가운데, 연우가 엄마의 갱년기를 걱정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하영이는 최근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남사친’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나에게 결혼하자고 하는 친구가 있다”는 하영이의 말에 MC 도경완은 순간 얼굴이 굳는다. 연우 역시 “오빠로서 네 나이대에 그렇게 하는 게 이해가 안 된다”며 동생의 연애 이야기에 불만을 표했다는 전언이다. 연우와 하영이는 ‘내생활’을 통해 둘이서 미국 로스앤젤레스 여행에 도전한다. 연우가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교에서 후원하는 영재 발굴프로그램인 CTY에 합격하며 생애 첫 미국 학교생활에 도전하면서 하영이도 그 길에 함께 가게 된 것. 여기에는 꿈을 향한 연우의 강렬한 의지와 꼼꼼한 계획이 기반이 됐다고 하는데. 이번 미국 여행에 대한 연우의 계획을 듣던 장윤정은 “연우의 계획적인 성향은 날 닮았다”라며 흐뭇해했다는 후문. 이후 짐을 쌀 때도 연우는 ‘J’ 성향을 발휘해 꼼꼼하게 물건들을 챙기는 반면, 하영이는 극과 극으로 다른 성향을 보여주며 모두를 빵 터뜨렸다고 해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7일 오후 8시 30분 방송.
[SNS는 지금] ‘美명문대생’ 이동국 딸 재시, 입학식서 함박 미소
[SNS는 지금] ‘美명문대생’ 이동국 딸 재시, 입학식서 함박 미소
2024. 08. 23 12:20 연예
이수진 SNS. 이동국의 아내 이수진이 재시의 입학식 사진을 올렸다. 22일 이수진은 자신의 SNS에 “오늘은 평생 잊지 못할 대박패밀리의 역사적인 날이다. 아직도 재시가 대학생이 되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요즘은 책임감을 갖고 대학 생활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대견스럽다”는 글과 사진 여러 장을 올렸다. 이어 “이동국 딸 이재시가 아닌 세계적인 브랜드를 만들어내겠다는 큰 꿈을 꾸고 있는 재시에게 많은 응원 부탁드린다”고 덧붙였다. 이수진 SNS. 사진 속에는 재시의 입학식을 함께한 가족사진이 담겼다. 한편, 이동국과 이수진과 결혼해 슬하에 4녀 1남을 두고 있다. 특히 이동국은 자녀들과 KBS2 예능 ‘슈퍼맨이 돌아왔다’ 등에 출연해 큰 사랑을 받았다.
SNS는 지금

주간경향(총 4 건 검색)

[우리 모두가 행복한 교육]엄친아에 명문대 졸업 ‘두 여자의 일생’(2013. 10. 15 19:00)
2013. 10. 15 19:00 사회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은 130년 전에 출간됐는데도 오늘날 우리 주변의 이야기처럼 가깝게 다가온다. 귀족의 외동딸로 태어난 주인공 잔느는 엄격한 교육을 받고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디면서 장밋빛 꿈에 부풀어 있다. 모든 여성이 선망하는 잘 생긴 청년 줄리앙과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첫날밤 남편의 난폭한 야수성을 보게 되면서 결혼의 부푼 꿈은 사라지고 유산과 조산, 남편과 아들의 타락 등으로 신산한 삶으로 빠져든다. 심경선·전숙희(가명)씨는 지금은 모두 마흔을 넘긴 중년 여성이다. 이들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같이 다녔는데 둘 모두 모범생이었고 ‘엄친아’였다. 이들은 서울대에 나란히 합격해 같이 다녔다. 한 마디로 ‘잘난 여학생’들이었다. 이들은 마치 ‘여자의 일생’의 잔느처럼 부푼 기대를 안고 인생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한 이후 두 여성의 길은 사뭇 다르다. 중학교 때 경선씨는 전교회장, 숙희씨는 부회장을 했다. 둘은 같은 고등학교(남녀공학)에 입학했는데 경선씨가 전체 수석을 차지해 입학식 때 전교생 앞에서 선서를 했다. 입학 후 첫 모의고사에선 숙희씨가 전교 1등을 했다. 둘의 경쟁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일러스트·만화그리는 목각인형 특히 경선씨는 리더십도 뛰어나 늘 학생회 간부를 했고 아이들에게 인기도 많았다. 7남매 중 셋째인 경선씨는 자칫 형제들에 치여 부모의 관심을 못 받을 수도 있었지만 가장 뛰어나게 공부를 잘했기에 부모님의 지대한 관심과 남매들의 질투를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3녀 1남 중 둘째 딸인 숙희씨는 아버지가 사업에 망하면서 부모와 떨어져 아이들 넷이 방 한 칸에서 같이 지내며 숙식을 해결해야 하는 비참한 상황에도 열심히 공부하면서 그 힘든 시절을 잘 버텨냈다. 늘 전교 1~2등을 하면서 남들이 다들 부러워하는 대학교에 입학했다. 항상 당당하고 바르며 겸손했던 경선씨는 대학원에서 한 선배를 만나 연애를 했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한 경선씨는 키도 작고 평범해 보이는 남자에게 마음이 끌렸다고 한다. 경선씨는 “당시 저는 그 남자를 ‘이 시대의 마지막 니체’라며 사랑에 빠졌다”고 말했다.  그때 그녀의 친구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남편감이라고 충고도 해주었지만 막무가내였다. 콩깍지가 씌면 주위에서 아무리 말려도 하는 수 없는 법이다. 결혼식도 이색적이었다. 신랑신부가 손을 잡고 입장하고 맞절 대신 악수를 했다. 평등부부로 살겠다는 다짐이었다.  신혼집은 방 2개짜리 다세대주택에서 시작했는데 신부는 그래도 행복했다고 한다. 그런데 결혼한 지 석 달도 안 돼 이혼했다. 평등부부를 지향한다던 약속과는 달리 남편은 같이 밥을 준비하자는 아내의 부탁을 외면했다.  이들 부부는 사사건건 티격태격했고 급기야 남편의 폭력이 일상적이 됐다. 남편은 결국 흉기까지 들며 아내를 겁박했다. 기겁한 경선씨는 별거를 하다가 이혼했다. 정식 혼인신고도 하지 않은 채였다.  남편은 총각행세를 하며 다시 장가를 갔다고 한다. 경선씨는 이혼 후 5년간이나 정신과 치료를 받고 정상적인 생활을 못했다고 한다. 그녀는 지금 박사논문을 준비하면서 시간강사로 ‘시급’ 인생을 살고 있다. 아직 부모님이 살아계셔서 함께 살고 있는데 최근 아버지가 암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경선씨는 부모의 기대를 온몸에 받았는데 결혼 실패와 시급 시간강사라는 현실 앞에 절망감이 앞선다.  그녀는 명문대라는 학력이 족쇄가 되었다고 푸념한다. 전 재산이 100만원도 안 돼 독립은 꿈도 못 꾸고, 부모님 용돈조차 한 번 드린 적이 없단다. 경선씨는 “결혼을 다시 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만 이제는 점점 멀어져가는 꿈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담배는 하루 거의 3갑을 피울 정도라고 한다. 날씬했던 몸도 학업 등 스트레스로 아줌마 스타일로 변했다. 7남매를 반찬 장사 해가면서 키운 부모님께 죄송스러울 뿐이다. 집안에선 제일 공부 잘하던 딸이 가장 골칫거리가 되었다는 자책이 앞선다. 그녀는 ‘순수의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한다.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숙희씨는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거의 전교 1등만 한 학생이었다. 중학교 때 부모와 떨어져 서울의 한 칸 방에서 형제들과 살아야 했다.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었다. 숙희씨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학교 갔다 오면 일단 잤다”면서 “새벽 1시쯤 일어나서 그때부터 학교 갈 때까지 공부하곤 했다”고 말한다. 숙희씨는 라이벌이었던 경선씨와 함께 서울대에 합격했다.  숙희씨는 순수를 지향하던 경선씨와 달리 ‘가난한 현실’을 뛰어넘는 게 급선무였다. 행정고시에 도전한 그녀는 연거푸 떨어지자 차선으로 7급 공무원 시험에 도전했다. 꿈보다 우선 밥벌이를 하며 살아남는 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교육공무원이 되어 학교 행정실에서 근무하던 그녀는 현실에 안주할 수 없었다. 다시 도전해보고 싶었던 그녀는 국비 장학금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2년 석사과정을 마치고 미국 공인회계사 자격증도 땄다.  유학 중에 7년 연하의 미국 남자와 연애를 하게 됐고 결혼을 했다. 백인 우월주의에 자신이 너무 잘났다고 생각하는 남자였다고 한다. 숙희씨는 “한국에서는 가난한 공무원으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면서 “청각장애가 있지만 변호사로 부유한 집안의 미국인과 결혼이라도 하는 게 그나마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숙희씨는 회계사 사무실을 거쳐 블룸버그통신에 입사해 연구원으로 재직했다. 이어 연방정부 조사관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임신을 했지만 유산을 하고선 슬럼프에 빠졌었다고 한다. 남편과의 결혼생활도 무의미해질 정도였다. 미국에서 결혼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올까 수소문도 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연봉이 미국의 절반도 안 돼 포기했다고 한다. 한동안 위태하던 결혼생활은 최근 결혼 9년 만에 남편이 로펌에 취직하면서 부부 사이도 다시 좋아지고 있다고 한다. 숙희씨는 “이제 집을 사서 예쁘게 꾸미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말한다. 다들 부모라면 부러워했을 법한 ‘두 딸’은 대학을 졸업하면서 사뭇 다른 ‘여자의 일생’을 걸어왔다. 평등부부상을 보여주자던 경선씨는 남편의 폭력성과 이중성에 결국 큰 상처만 안고 결혼생활을 접어야 했다.  숙희씨는 가난한 현실을 하나둘 뛰어넘으며 ‘차선’의 삶을 ‘최선’으로 만들려고 노력했고, 결국 미국 연방정부 공무원으로 변신했다. 미국인 남편과의 결혼은 유산과 남편과의 ‘섹스리스’로 인해 한때 위기를 맞았지만 다시 행복을 찾기 위해 서로 노력하고 있다. 남자든 여자든 결혼은 인생에서 큰 전환점에 해당한다. 어쩌면 자녀교육 혹은 한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부’를 잘하는 것보다 ‘결혼’으로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배우자를 만나는 일이 아닐까. 결혼은 자칫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함정’이 될 수도 있지만 또 누구에게는 ‘축복’이 될 수 있다.경선씨가 힘든 삶을 살아가는 것은 바로 자신도 모르게 ‘결혼의 덫’에 걸렸기 때문이다. ‘여자의 일생’에서 부푼 꿈을 안고 인생을 시작하려던 주인공 잔느가 결혼 후 남편에게 당한 야수적 폭력성과 비도덕성으로 모진 세월을 살아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 ‘여자의 일생’은 130년이 지난 지금도 내 딸만큼은 잔느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두 여성의 여정에서 보듯이 인생은 결코 계획한 대로 되지 않고 때론 안개 속처럼 아득하기만 할 때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고 주어진 결과를 받아들이고 감사하면서 살다보면 그게 행복으로 이르는 길이 아닐까. “알고 보면 인생이란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좋은 것(행복)도 아니고 나쁜 것(불행)도 아닌가 봐요.” ‘여자의 일생’의 마지막 이 말은 어쩌면 모든 여성, 아니 모든 인간의 삶을 함축하고 있는 말일지도 모른다. 최효찬
우리 모두가 행복한 교육
[우리 모두가 행복한 교육]‘명문대 대물림’ 강요 말아야(2013. 04. 16 15:14)
2013. 04. 16 15:14 사회
흔히 서구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잇는 다재다능한 ‘르네상스형 인재’로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제일 먼저 꼽힌다. 괴테는 38세에 이탈리아 여행을 떠나 2년 만에 귀국,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와 동거에 들어가 41세에 아들 아우구스트를 얻었다. 괴테는 아들의 학습, 대학 진학, 취직, 여행, 군 입대 문제까지 직접 챙겼다. 심지어 전쟁 기간에는 상부에 청탁해 아들을 전투에서 빼돌리고 대신 후방에서 군수품을 공급하는 일을 맡도록 했다. 늦게 외아들을 얻은 괴테는 아우구스트를 과잉보호했는데, 괴테의 부성애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알코올 중독으로 병들고 시들어가고 있었다. 그런 아들의 재탄생을 위해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탈리아 여행을 권했다. 아버지의 ‘이탈리아 기행’과 다른 작품들을 길잡이 삼아 아들은 도착지마다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면서 충실하게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그리고 로마에 도착하고서 그만 알코올 중독의 후유증으로 죽고 만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스스로 성공한 인물이 자녀를 위해서도 균형 잡힌 아버지가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살아서 이미 당대의 현자로 알려졌던 괴테의 예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하물며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은 오죽할까. 일러스트·만화 그리는 목각인형 슬하에 2녀1남을 둔 서울지역 명문대 교수인 전승진씨와 이미영씨 부부(가명)는 지난 8년 동안 아들로 인해 어깨조차 펴지 못하고 마치 죄인처럼 지냈다. 친척이나 친구, 교회 사람들이 자식 자랑이라도 하면 매번 낭패감에 사로잡혔다. 특히 전씨는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대 출신에다 명문대 교수인데 공부 안 하는 아들 때문에 늘 주눅이 들었다. 두 딸은 늘 알아서 스스로 공부했다. 큰딸은 과학고에 이어 대학을 졸업하고 장학금을 받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둘째딸은 외고를 나와 현재 서울 소재 대학에 재학 중이다. 두 딸과 달리 아들은 늘 부모의 근심거리였다. 아들은 중학교에 들어가자 공부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공부도 잘했는데 사춘기가 오면서부터는 여자친구를 집에 데리고 와서 놀고, 심지어 담배도 하도 많이 피워 끊으라는 말조차 차마 못하고 줄이라고 했단다. 엄마가 학원 시간에 맞춰서 데려다주면 뒷문으로 빠져나가 PC방으로 직행했다. 학원에 데려다주고 오는 길에 이내 학원에서 “왜 아이가 결석했느냐”고 전화가 왔다. 아들은 부모를 속이고 늘 놀기 바빴다. 대학에 떨어지는 건 당연했다. 전 교수는 공부 못하는 아들이 부끄러워 1년 동안 각종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명문대 교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어머니 이씨는 요즘 주부와 달리 김치며 온갖 것들을 다 만든다. 아이들에게 먹이기 위해서였다. 외국에 잠시 살았을 때 스테이크 등 서양요리를 배운 덕에 요리솜씨도 수준급이다. 자기 외모나 살림솜씨, 남편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이 넘치고 패션감각도 모델급이다. 자녀 공부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파출부를 하거나 옷도 사입지 않고 몸매 등 자신을 돌볼 겨를이 없는 엄마들과는 달랐다. 세상 부러운 게 없이 살았는데 그만 공부 안 하는 아들로 인해 행복한 인생이 좌초될 위기를 만난 것이다. 그래서 시작한 게 종이학 접기라고 한다. 집안 곳곳이 이씨가 만든 다양한 색의 종이학을 담은 통들로 가득하다. 아들이 삼수를 하기까지 접은 종이학이 대략 5만 마리는 된다고 한다. 이씨는 “그 많은 종이학을 만들면서 ‘탕자 같은’ 아들이 마음을 다잡고 공부하기를 기도하면서 인고의 세월을 건너왔다”며 지금도 매일 종이학을 접고 있다고 한다. 결국 아들은 삼수 끝에 그나마 성적을 올려 지난 입시에서 모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교 이름을 대면 부모로서 겨우 불명예를 면할 수 있는 학교라고 한다. 우리나라 부모들은 자녀가 대학을 어디에 들어갔느냐에 따라 ‘부모 성적표’가 결정되는 것이다.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입에 올릴 수 없는 대학에 들어가면 부모 스스로 체면이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들 부부는 삼수 끝에 아들이 모 대학에 들어간 것만으로도 큰절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이들 부부는 그 학교가 성에 차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로 만족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고 한다. “부모로서 자식 자랑을 못하고 주눅들 때가 괴롭지만 그게 또 따지고 보면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명문대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은 부모의 욕심일 따름이죠. 자식이 명문대 진학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전 교수는 이런 생각이 들자 그때부터 아들에게 더 이상 명문대를 강요하지 않았다. 전씨가 교수로 재직 중인 대학교에서 졸업생들을 보면 명문대 간판은 대기업 취직 때 전혀 혜택이 없는 등 이제는 별 구실을 못하는 세상임을 실감하곤 한다. 심지어 대기업에서는 지방대생 채용 비율 가이드라인까지 정해놓고 있다. 이씨는 부잣집에서 커서 지금도 명품으로 자기 드레스룸을 가득 채울 정도로 산다. 아들에게도 항상 최고 비싼 것으로만 사줬다. 파카가 100만원이 넘어도 흔쾌히 사준다. 바지도 ‘발망’과 같은 명품이 아니면 사주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은 이렇게 럭셔리하게 키운 것이 후회가 된다고 한다. 아들이 고생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고 또 공부를 안 하게 된 것도 너무 좋은 환경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씨는 “아이를 키우면서 정말 마음고생을 너무 많이 했고, 그 덕에 인생 공부도 하게 됐다”고 말한다. 이들 부부는 “이제야 남들 시선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조금씩 마음의 짐도 덜어지고 집안에 평화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아들도 공부를 좀 하고 삼수 끝에 대학에 갔다”고 웃는다. 하지만 이들 부부에게 자녀로 인한 근심걱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들이 대학에 들어가서 한시름 놓는가 했더니 최근 유학간 딸이 좋지 않은 소식을 알려 왔다. 딸은 유학을 가면서 곧 결혼할 남자와 함께 갔다. 이들 부부는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유학을 보내는 게 왠지 찜찜했지만 딸을 믿기로 했다. 예감은 늘 나쁜 경우에 먼저 적중되곤 한다더니 얼마 전 딸로부터 남자친구와 헤어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남자 측에서 딸에게 “공부를 포기하고 남자를 뒷바라지하라”고 강요했다는 것이다. 이들 부부는 혹시 딸이 공부와 일에 대한 열정으로 결혼을 하지 못하면 어쩌나 또 다시 걱정이 태산이다. 우리 사회에서 명문대를 나온 대부분의 부모들이 자녀를 명문대에 보내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다. 솔직하게 말하면 명문대를 나온 부모일수록 자녀에게 명문대를 더 강요한다. 부모가 명문대를 나왔으니 자녀도 명문대를 쉽게 들어갈 수 있으리라고 아주 당연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부모의 ‘착각’일 뿐이다. 자녀교육은 과학의 법칙처럼 이루어지지 않는다. 더욱이 자녀교육 열정이 과잉상태가 되면 자칫 괴테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 현자인 괴테도 자녀교육에서 과유불급의 우를 범하고 말았다. 서두에 소개한 괴테의 자녀교육 사례는 지나칠 정도로 과잉교육을 하는 우리 시대의 부모 모습과 닮아 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끊임없는 인내와 기다림의 연속이라고 한다. 달리 말하자면 인내하고 기다림을 잘하는 부모가 훌륭한 부모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 최효찬
우리 모두가 행복한 교육
[친디아 리포트]최고 명문대학 명성만큼 비싸다(2008. 04. 16)
2008. 04. 16 국제
인도 IIT·IIM 등록금 3배 가까이 인상…학비부담 치솟아 파장 만만치 않아 최근 우리나라 대학의 등록금 인상이 논란을 빚고 있다. 대학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등록금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대학 측 주장과 대폭 인상의 근거가 미흡하다는 학생 측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한편 인도에서도 인도 경제가 급부상하는 원동력 중 하나로 꼽히는 명문 IIT(Indian Institute of Technology, 인도공과대학)와 IIM(Indian Institute of Management, 인도경영대학원)이 등록금을 3배 가까이 인상하겠다는 안을 발표했다. IIT와 IIM은 우리에게도 이름이 알려질 정도로, 세계적으로 우수한 대학의 반열에 올라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인도 IIT는 미국의 MIT대학을, IIM은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벤치마킹해 설립했다. IIT와 IIM는 한 캠퍼스로 운영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립대학들이 지방 캠퍼스를 운영하는데, 인도에서는 지역 균형 발전과 엘리트 교육 정책의 일환으로 연방정부가 여러 지역에 캠퍼스를 설립하고 자금을 지원한다. 이렇게 운영되는 캠퍼스가 IIT 7곳, IIM 6곳이다. 인도가 독립하기 전인 1946년에 전담위원회가 설치되어 공과대학을 동서남북에 하나씩 설립하도록 권고하는 ‘인도 고등기술교육기관 설립’ 보고서를 제출했다. 독립 이후 1951년에 처음으로 IIT-카라그푸르(웨스트벵갈 주 소재)가 개교했고, 1958년부터는 외국의 자금과 기술을 지원받아 뭄바이, 첸나이, 델리 등에 잇따라 IIT가 설립되었다. IIT는 4년제 학부와 대학원 과정을 두고 있는데, 1961년에 연방의회가 ‘IIT법’을 승인함으로써 국가 차원에서 고등기술교육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델리 IIT 전경. 인도 정부는 경영 분야에서도 세계적 수준의 대학원 설립을 추진했다. 그 결실이 1961년에 설립된 IIM-콜카타(웨스트벵갈 주)와 IIM-아메다바드(구라자르 주)다. 전자는 MIT 슬로운 경영대학원, 후자는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협력을 받아 설립되었으며, IIT와는 달리 IIM를 운영하기 위한 법이 별도로 제정되어 있지 않아 캠퍼스별로 위원회가 자율적으로 운영한다. IIT와 IIM 입학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다. 하버드대의 입시경쟁률이 8 대 1인 데 비해 IIT는 100 대 1 수준이다. 매년 5000여 명을 뽑는 학부 및 석사연계 과정에 35만 명이 응시한다. IIM의 경우에도 2007년에 1250명 모집에 23만 명이 응시했다. 합격률은 0.1~0.4%인데, 미국 일류 경영대학원의 합격률이 5~10% 수준인 것에 비하면 상당히 치열한 편이다. IIT와 IIM은 각각 JEE(Joint Entrance Examination)와 CAT(Common Admission Test)라는 입학 시험을 거쳐 학생을 선발하며, IIT의 경우 학생들은 시험 성적에 따라 캠퍼스를 배정받는다. 일단 입학만 하면 학과 성적이 하위 5%에 속하는 학생이라도 평생 경력을 보장받기 때문에 재수, 삼수는 기본이며, 전문 입시학원도 성황을 이룬다. 인도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대학 지난 3월에 IIM·방갈로르(IIM·B)와 IIM-콜카타(IIM·C)가 수업료를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IIM·B는 연간 수업료를 25만 루피(약 625만 원)에서 올해 40만 루피(약 1000만 원), 내년에는 50만 루피(약 1250만 원)로 인상하고, IIM-C는 2년 MBA 과정에 60만 루피(약 1500만 원)로 인상했다. 이런 가운데 IIM 중에서 가장 지명도가 높은 IIM-아메다바드(IIM-A)가 수업료 인상 바람에 불을 지폈다. IIM-A는 가장 대표적인 PG(Post-graduate) 프로그램의 수업료를 2년 과정에 44만 루피(약 1100만 원)에서 올해 6월 학기부터 115만 루피(약 2875만 원)로 2.6배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IIM-A의 수업료 인상 발표는 대학 명성만큼이나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연방정부 인적자원개발부의 아르준 싱(Arjun Singh) 장관이 IIM-A 이사회 의장을 불러 설명을 요구하기도 했다. IIM-A 이사회는 학교 운영 비용 증가로 경쟁력 약화가 우려되어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밝히면서, 실력은 있지만 학비를 조달하지 못해 공부하지 못하는 학생은 한 명도 없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이를 위해 IIM-A는 장학금 규모를 400만 루피(약 1억 원)에서 8500만 루피(약 21억 2500만 원)로 늘려 대상 학생들의 62%에 혜택을 주겠다고 했다. 또한 학비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가계소득 한도를 현재 연간 20만 루피에서 60만 루피로 조정하겠다고 밝혔다. IIM-A 발표 이후 IIM-코지코드(IIM-K)도 PG 프로그램의 수업료를 38만5000루피에서 60만 루피(약 1500만 원)로 인상하기로 했는데, 이로써 6개 IIM 중에서 4개 캠퍼스가 수업료 인상 계획을 발표했다. IIT 올 신입생부터 수업료 인상 IIT도 수업료를 대폭 인상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IIT는 1998년 이후로 한 번도 수업료를 인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면 수업료 인상은 당연해 보인다. 현재 IIT의 연간 수업료는 2만1000루피~2만7000루피(약 52만~67만 원)에 불과하다. 이를 올해 신입생부터는 5만 루피(약 125만 원)로 2배 이상 인상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IIM과는 달리 IIT는 법률에 따라 운영되기 때문에 정부 승인을 받아야 수업료를 인상할 수 있다. 그동안 정부는 IIT의 수업료 인상안을 계속 유보해왔으나, 지난 2월 IIT 상임위원회는 학교가 학생당 연간 지출하는 비용이 20만 루피를 넘어 수업료 인상이 시급하다는 제안서를 제출했다. 최근 등록금이 크게 인상된 인도경영대학원의 전경. 당초 IIT의 수업료는 국제 벤치마킹을 거쳐 책정되었다. 1953년에 MIT의 수업료는 1560루피였고, 영국 임페리얼 칼리지의 비용은 1420루피였다. 이에 근거해 IIT 수업료가 1500루피로 정해졌으며, 3분의 1은 학생이, 3분의 1은 IIT가, 나머지 3분의 1을 정부가 지원한다는 원칙에 따라 학생이 부담하는 수업료가 500루피(약 1만2500원)가 되었던 것이다. 이후 1998년에 처음 수업료가 개편되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IIM-A 이사회 의장은 학생들에게 충분한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으며 학생들이 졸업하자마자 대부분 연봉 250만 루피(약 6250만 원) 이상을 받게 되므로 수업료 인상이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IIM 졸업생들은 주로 세계적인 투자은행과 경영컨설팅 회사 등 유수 다국적기업들에서 채용 제의를 받으며, 채용이 될 때 회사 측에서 대출받은 학자금을 상환해주기도 한다. 올해 IIM 졸업생들은 미국의 서브프라임 위기와 경기 침체 여파를 전혀 느끼지 않았다. 올해 IIM-A의 졸업생들이 인도 국내 기업들로부터 제안받은 연봉 평균은 178만5000루피(약 4462만 원)로 지난해 137만 루피(약 3425만 원)보다 약 30% 증가했다. 또 파이낸스 마케팅 분야의 한 다국적기업은 1440만 루피(약 3억6000만 원)를 제의하며 한 졸업생을 채용하기도 했다. ISB 급성장에 위기의식 느낀 IIM IIM의 대폭적인 수업료 인상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어 보인다. 그동안 IIM은 연방정부가 설립한 인도 최고의 경영대학원으로서 확고한 위상을 다져왔다. 그런데 2001년에 인도 비즈니스 스쿨(Indian School of Business, ISB)이 설립되면서 위상이 도전받기 시작했다. ISB는 IIT 출신으로 맥킨지 월드와이드의 대표를 역임한 라자트 굽타(Rajat Gupta)가 포춘 500대 회사들과 안드라 프라데시 주정부의 협력하에 하이데라바드에 설립한 학교다. 이후 ISB 졸업생들이 제안받은 높은 연봉 수준이 신문 일면을 장식하고, 2006년에 부시 미국 대통령이 방문할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 더욱이 ISB는 파이낸셜 타임즈가 선정한 ‘2008년 세계 100대 비즈니스 스쿨’에서 20위에 올랐는데, 이에 반해 IIM은 한 캠퍼스도 순위에 오르지 못했다. 올해 ISB의 1년 과정 MBA 수업료는 150만 루피(약 3750만 원), 숙식비 등 부대비용까지 포함하면 176만 3000 루피(약 4400만 원)에 이른다. ISB 측은 세계적 수준의 비즈니스 교육과 경험을 제공하면서도 수업료는 미국과 유럽의 상위 10위권 학교들의 절반에도 미치지 않는다고 밝혔다. 2007년에 ISB 졸업생은 414명(입학 전 평균 직장경력 5년)인데, 외국계 기업들이 제안한 평균 연봉은 13만5000달러였고, 그중 최고액은 26만9000달러였다. 또한 국내 기업들이 제안한 평균 연봉은 150만3000루피(약 3757만 원)였고, 그중 최고 연봉은 439만1000루피(약 1억977만 원)에 달했다. 이러한 ISB의 급성장에 위기의식을 느낀 IIM은 명성과 교육의 질을 유지하기 위해 수업료를 인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인도 정부는 과학과 기술 분야의 발전과 고급 인력 수요 증가에 부응하기 위해 11차 5개년 계획(2007년~2011년)에서 IIT와 IIM 캠퍼스를 각각 8곳, 7곳을 신설할 방침이다. 이와는 별도로 연방정부가 지원하는 종합대학교(University)가 소재하지 않은 16개 주에도 1개교씩 설립할 예정이다. 그러나 이렇게 학교 수가 급증할 경우 교육의 질과 학생들의 실력이 유지될지는 미지수다. 또한 재정 적자에 시달리는 인도 정부가 자금 지원을 원활히 하고 철저한 자율 운영권을 계속해서 보장할지도 의문이다. 더욱이 공학 관련 인재들을 양성하겠다는 인도 정부의 의도와는 달리 시류에 편승하는 학생들의 진로 선택 문제도 심각하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공부한 IIT 졸업생들이 공학 분야에 진출하지 않고 IIM과 같은 경영대학원에 가서 MBA를 취득한 후 대우가 좋은 관리직이나 컨설팅직에 진출하기 때문이다. 또 학생 대다수가 부전공으로 IT 과목을 선택한 후 보수가 좋은 IT 기업에 취직하고 있다. IIM 학생들도 전공 편중이 심각하다. 대다수가 파이낸스와 마케팅을 복수 전공하기 때문에 인사 조직이나 전략 경영과 같은 다른 전공자를 찾기가 매우 힘든 상황이다. 임정성
친디아 리포트
외국 명문대학 "오라 한국으로"(2003. 10. 30)
2003. 10. 30 사회
우리나라 해외 유학생 수는 매년 15만 명 정도이다. 이들의 유학 비용은 연간 25억6천만달러 정도. 특히 지난해 미국으로 간 유학생 수는 4만9천여 명으로 전 세계 국가 중 3위를 차지했다. 글로벌 시대에 해외 유학은 국제경쟁력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에 이견을 달 사람은 별로 없다. 더욱이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이라는 서울대가 세계 대학 랭킹에서 150~200위권에 머물고 있어, 경쟁력 있는 '고품질' 교육에 대한 갈증이 심각한 상태다. 때문에 정부는 인천-부산-광양 등 경제특구 내에 외국 대학 분교를 유치, 내국인 입학을 허용할 계획이다. 물론 특구 내에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한 한 방편이지만 그만큼 국내에서의 '막대한 수요'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최근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를 발판으로 삼아 궁긍적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우회유학'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국내 교육단체는 교육의 종속화 등의 이유로 강력한 저지투쟁을 벌이고 있다. 과연 외국의 유명대학이 들어올 가능성이 있는 것일까, 또 분교 허용의 후폭풍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아울러 '우회유학'은 어떻게 이뤄지고 있을까. 그 현장을 살펴봤다. 〈편집자〉 '미국 스탠퍼드대-MIT(매사추세츠공대)-컬럼비아대-시카고대 등이 한국 수도권에 분교를 낸다.' 일부 학부모나 학생에게는 '복음'과 같은 이 말이 현실화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현행법에서도 국내 대학과 똑같은 기준과 절차에 의해 외국 대학의 설립이 가능하다. 하지만 초기투자비가 많이 들고 벌어들인 돈을 본교로 송금할 수 없는 등 법적 문제로 인해 외국의 학교법인이 국내에 대학을 설립한 사례는 전혀 없다. 하지만 경제자유구역법이 발효됨에 따라 세계무역기구(WTO) 교육개방 양허안에 의한 교육 개방과 별도로 외국 대학 분교 설립의 전면 허용이 추진되고 있다. 교육인적자원부는 현재의 고등교육 시장 개방 수준으로 외국 대학의 국내 진입이 사실상 제한되고 있어 '제주국제자유도시 및 경제자유구역내 외국 교육 설립-운영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계획하고 있다. 경제자유구역 현안을 총괄하고 있는 오갑원 경제자유구역기획단장은 최근 재정경제부-교육부 등 부처간 협의에서 외국대학 분교 설립의 뼈대에 대체로 합의를 봤다고 말했다. 이에 따르면 우수 외국 교육기관을 유치하기 위해 법인세-소득세 등 각종 세제상 혜택을 주기로 했다. 또 국내 사무소 설치와 외국 교육기관 설립 업무를 간소화하기 위한 각종 행정상 편의도 제공한다. 특히 결산상 잉여금이 발생할 경우 해외 송금도 허용할 방침이다. 이밖에 교육에 필요한 최소한의 시설을 갖추도록 하되 건물 등 시설의 경우에는 소유할 필요 없이 임차도 가능하도록 했다. 즉, 초기투자비가 적게 들도록 했다. 아울러 설립된 외국 교육기관은 국내법상 준수해야 할 권리와 의무가 배제돼 운영도 자율화된다. 물론 내국인도 자격제한 없이 입학이 가능하고 졸업 시 학력도 국내 대학과 동등하게 인정하도록 했다. 한마디로 외국 대학이 들어올 수 있게 모든 편의를 제공하는 셈이다. 그러나 인천시의 한 관계자는 "외국 대학은 들어오라고 사정해도 안 들어온다"면서 "이 정도의 혜택으로도 외국 대학 유치를 자신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英 브루넬-美 일리노이 대학 긍정적 그렇다면 지난 8월에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된 인천시의 외국 대학 유치는 어떻게 되고 있을까. 안상수 인천시장은 "미국 스탠퍼드-MIT와 접촉하고 있다"고 밝혔다. 현재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된 인천시에 분교를 내겠다고 관심을 보이고 있는 학교는 영국의 브루넬대학, 미국의 IIT(일리노이공대) 등이다. 영국 브루넬 대학은 송도 신도시에 건설될 예정인 정보기술(IT)-생명공학(BT) 산업단지의 연계 가능성을 타진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런던 서부에 위치한 브루넬 대학은 1928년 설립된 영국 내 중상위권 대학으로 환경공학 분야가 특히 우수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미국 일리노이공대도 미국 내에서 중상위권 정도로 꼽히고 있다. 인천시는 특히 명문대학 유치를 위해 외국 명문대학에 경제자유구역에 분교 설립시 인센티브, 법 문제 해결 방안 등을 담은 가이드를 보냈다. 이 중 대표적인 대학은 스탠퍼드대-MIT-시카고대-컬럼비아대-미시간대-듀크대 등이다. 인천시청 투자진흥관실 박성길 전문위원은 "영국과 미국 지역 대학들과 접촉 중"이라며 "그러나 아직까지 투자 의사를 밝힌 대학은 없다"고 말했다. 이는 경제자유구역 내 분교 설립에 대한 법률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육부가 10월 말쯤 입법예고할 '외국 교육 설립-운영에 관한 특별법'이 발효되면 외국대학 유치활동이 가속화될 전망이다. 특히 인천시는 교육부 등과 함께 '외국 대학 유치기획단'을 구성키로 했다. 또 오는 10월 30일 인천 남동구 구월동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에서 외국 대학 유치 관련 공청회도 개최할 예정이다. 국제자유도시로 지난해 4월에 지정된 제주도에는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네바다주립대(UNLV)의 분교가 설립될 가능성이 높다. UNLV의 호텔경영대학을 중심으로 제주도에 분교 유치를 추진하고 있는 ㄱ대학 ㄴ명예교수는 "제주도의 관광산업 육성 발전을 위해서는 국제 수준의 호텔경영대학 유치가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관광도시인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UNLV의 호텔경영대학은 교육 내용이 우수하고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ㄴ교수는 설명했다. 중국에서 유치하기 전에 먼저 성사시키려 하는 ㄴ교수는 "UNLV 총장-부총장-학장을 만나 국제 호텔이 체인화돼 있어 아시아 지역에 진출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설명했고, 이들도 관심이 있으니 추진해달라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법적 근거가 없어 설립이 회의적이었지만 최근에 교육부가 내놓은 법안에 의해 어렵지 않게 분교 설립이 가능할 것으로 ㄴ교수는 보고 있다. 일단 ㄴ교수는 제주도에 사무소를 개설할 예정이다. 교육프로그램을 만들면 교육부에서 가인가를 미리 해줘야 교수와 학생을 모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 안으로 법이 통과되면 여기에 맞춰 분교 설립인가를 신청해서 내년 9월부터 학생을 모집할 계획이다. 분교에는 단과대학으로 호텔경영대학-사회과학대학 등을 두고 호텔경영대학에는 관광-호텔경영-식음료 등 4~5개 학과를 둘 방침이다. UNLV 분교는 영어를 모국어를 하는 교수만 모집하는 등 본교 교육 내용을 그대로 가져오게 된다. 특히 영어 과정을 대폭 강화해서 졸업을 하면 전공뿐만 아니라 영어 실력도 미국 대학을 졸업한 것과 똑같이 할 계획이다. 제주 특성 살려 호텔경영대학 유치 ㄴ교수는 분교 교육의 회의적인 시각에 대해 "분교 교육이 부실하면 본교도 교육평가에서 문제가 된다"며 "따라서 본교보다도 더 잘해야 하고 학생들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 낙제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 중국 학생을 많이 유치해 외화도 벌어들인다는 것이 ㄴ교수의 복안이다. 이밖에 현재 스위스의 관광-호텔 전문인력 양성기관인 DCT 국제호텔학교가 분교 설립을 위해 남제주군과 마무리 협상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시도 외국 대학 유치를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경제자유구역이 아니기에 현행법 테두리에서 해야 한다. 서울시는 때문에 대학이 아닌 대학원-연구소를 유치할 방침이다. 현재 상암 DMC(디지털미디어센터)에 들어갈 대학원으로는 버지니아공대가 확정적이다. 버지니아공대는 미국 내 중상위권으로 평가받고 있다. 서울시는 설립시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어 교육부의 인가를 받지 않았지만 큰 문제 없이 대학원 설립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서울시는 DMC 산학연센터에 버지니아공대 연구 인력과 장비 등을 투입해 석-박사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할 방침이다. 센터에 들어올 버지니아공대 연구소로는 유전자정보연구소-나노공학연구소-알렉산드리아연구소-에너지개발연구소-버지니아미디어연구소-에디슨미디어연구소-전자상거래연구소 등이다. 서울시는 특히 대학원-연구소 설립을 위해 2005년에 버지니아공대와 미 투자회사로부터 1억달러의 투자 재원을 확보할 계획이다. 또 일산 신도시 차이나타운 예정부지에 칭화(淸華)대 과학기술대학원이 들어올 가능성도 있다. 동북아경제중심추진위원회는 정태인 기획조정실장은 "동북아 연구-개발(R&D) 클러스트 추진을 위해 지난 9월 말 중국을 방문, 칭화대 기업집단 쑹쥔(宋軍) 총재와 이같은 내용을 합의하고 현재 우리나라 과학기술부-교육부와 함께 세부계획을 논의 중"이라고 말했다. 중국 최고의 과학기술 명문대학인 칭화대는 이 대학원에서 우리나라 대학 및 연구기관과 함께 한방의 양약화, 정보통신 기술개발 등을 공동추진할 계획이다. 이뿐이 아니다. 현재 경제자유구역 지정을 추진하고 있는 부산과 광양 등도 지정을 받은 후 외국 대학 유치에 뛰어들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진행에 차질이 생기지 않는다면 이르면 내년부터 외국 대학의 분교가 선보인다. 하지만 국내 설립에 걸림돌도 많다. 무엇보다도 우선 전교조 등 교육단체에서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또 알짜배기 명문대 분교가 설립되지 않고 외국의 중하위권 대학의 분교가 들어올 경우 학생들로부터 외면받아 제도 자체가 유명무실해질 가능성도 있다. 때문에 외국 대학 분교 유치가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조완제 기자 jw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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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대입 경향 분석과 미국 명문대 입시 전략
2013. 07. 04 15:22 육아/교육
ㆍ하버드대 출신 교육 전문가 줄리아 더글러스 박사가 전한다 지난 6월 8일 캐나다 밴쿠버 소재의 한 고등학교 강당에는 7백여 명의 한국인 학생과 학부모가 모였다. 다민족 국가의 표본으로 불릴 만큼 다양한 민족이 살고 있는 이곳에서 한 장소에 이렇게 많은 학생과 학부모가 모인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현장에 모인 학생들의 연령대는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다양했다. 이들이 이 자리에 모인 이유는 바로 미국 명문대 입시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미국 명문대 입학하기 위해서는 ‘학부모 역할의 중요성’ 재차 강조 진지한 표정으로 부모의 손을 꼭 잡고 강당에 입장한 학생들. 이들은 모두 줄리아 더글러스 박사의 강연을 듣기 위해 모인 것이다. 하버드대 교육학 석사, 버지니아대 교육학 박사이자 다양한 교육 프로젝트 컨설팅 및 미국 내 교육 전문가로 활발히 활동 중인 줄리아 박사. 그녀는 현장에서 미국 대학 입시의 최신 경향을 분석하고, 2013-14년 입시 전략에 대한 강연을 펼쳤다. 또 교육심리학 전문가로서 학생 리더십 활동에 관한 전문가적인 어드바이스 그리고 생생한 최신 미국 교육 현장 소식도 들려주었다. 이는 미국 명문대 입학을 준비 중인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아주 귀중한 정보일 뿐 아니라 합격에 대한 염원을 갖게 하는 강연이었다. 이날 행사는 미국에 본사를 둔 글로벌 교육기관 엘리트어학원 주최로 이뤄졌다. 2시간가량 이어진 줄리아 박사의 강연은 최근 미국 명문대 입시와 관련한 심층 분석 및 향후 전망, 전공과 특별활동의 중요성, 미국 명문대 입시와 관련된 정보, 학년별 플래닝 등으로 나뉘어 상세히 발표됐다. 또 밴쿠버 엘리트어학원 출신으로 미국 명문대인 코넬대학에 입학한 후 졸업한 케빈 강의 ‘명문대 입학기&대학생활’에 대한 스토리도 공개돼 현장에 모인 학생과 학부모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줄리아 박사는 강연 중 ‘학부모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 몇 차례에 걸쳐 강조했다. 그녀는 “미국 명문 대학의 입시 경쟁률은 해마다 치열해지고 있다. 대학 입시에 대한 많은 정보와 학부모들의 교육열 그리고 새롭게 탄생되는 전문 교육기관 등으로 인해 경쟁은 과열 양상을 띠고 있다. 덕분에 미국 명문 대학의 위상은 나날이 높아져 이젠 성적뿐 아니라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학생이 아니면 입학하기 힘들어지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그녀는 “이렇듯 치열한 경쟁을 뚫고 미국 명문대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자녀가 원하는 대학에 관한 발 빠른 정보와 철저한 준비 그리고 사전 계획이 반드시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서는 누구보다 학부모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 줄리아 박사의 조언이다. “학생은 아직 모든 것을 스스로 계획하고 실행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다. 때문에 학부모의 적절한 개입이 필요하다. 트레이너와 같은 역할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학부모는 정확한 정보와 지도력 그리고 학생의 단점을 찾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야 한다. 사실 아무리 소중한 자녀라 해도 학생의 꿈을 부모가 정해줄 수도 없고 또 정해줘서도 안 된다. 대신 학생의 장점과 관심사를 최대한 살려 ‘Career Path(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길)’를 제시해야 한다. 그것이 먼 훗날 학생이 부모에게서 벗어나 스스로 더 높은 곳을 향해 도약할 수 있는 끈기와 인내심을 키워주는 현명한 방법이다.” 줄리아 더글러스 박사가 강조하는 대학 준비를 위한 4가지 핵심 요소 줄리아 박사는 강연 말미에 미국 명문대 입시에 필요한 몇 가지 팁을 소개했다. 이 중에는 1) 전 과목에서 높은 성적을 받도록 한다 2) 불필요한 과외활동으로 인한 성적 저하를 주의해야 한다 등의 조언이 들어 있다. 특히 여름방학 활용 전략을 강조하며 학생의 관심 분야를 기초로 플랜 짜기와 성적 점검 그리고 다음 학기 주요 과목 준비 등을 꼽았다. 또 학생의 흥미를 바탕으로 미국 명문대 입시에 대한 플랜을 짜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온 과정을 자신만의 이야기 형식으로 준비해놓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유는 대학 입시 원서를 쓸 때 진부한 에세이가 아닌 입학사정관을 사로잡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과외활동 역시 중요하다. 미국 명문대의 입학사정관의 눈에 띌 만큼 운동, 봉사활동, 경시대회 등에서 두각을 나타낸 학생은 좋은 점수를 받게 된다는 것.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은 얼마나 많은 대회에 참여했는지가 아니라 대회에서 어떤 성적을 받았는지와 참여도, 영향력 등 양보다 질이라는 것이다. 다음은 줄리아 박사가 강조하는 ‘대학 준비(College Readiness)’를 위한 4가지 핵심 요소다. 1 Initiative 학생 자신과 맞는 학교를 찾는 것이다. 이를 결정하는 데는 여가활동, 운동, 학교의 규모(Private or Public), 캠퍼스 문화 등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정확한 기준을 세운 뒤 자신의 실력에 맞는 학교 선택이 이뤄져야 한다. 이는 실현 가능하고 체계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하며 늦어도 중학교 1, 2학년 때까지는 완성돼야 한다. 2 Training 앞서 말한 것처럼 부모는 트레이너의 역할을 하고 학생들은 미리 계획해놓은 과정을 차근차근 끝없이 밟아가며 준비해야 한다. 이는 마치 히말라야를 등정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중학교 3학년을 베이스캠프로 빗대어볼 수 있다. 베이스캠프에서 바로 정상으로 올라갈 수 없듯이 학생들은 고등학교 1, 2학년 때 중간 거점인 전진캠프를 거치게 된다. 때문에 전진캠프는 그만큼 신중하게 결정하고 알차게 보내야 한다. 마지막 거점을 최종캠프라고 부르는데, 이때는 학생들의 성과가 평가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3 Passion 자신의 열정을 보여줄 곳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 운동이든, 공부든 끊임없이 도전하고 만족할 만한 결과를 통해 자신의 열정을 다시 한번 대학생활에서 보여줄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이는 대부분 경시대회, 운동, 봉사활동, 인턴십 등의 과외활동을 통해 이뤄진다. 4 Parents Support 부모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부모는 언제나 적정선을 지키며 내 아이가 가장 잘하는 것을 하며 원하는 길로 가게끔 인도해야 한다. 이렇듯 부모의 동기부여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이의 성향을 배려하지 않은 부모만의 계획은 기대 이하의 결과를 낳게 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부모들은 미리 학생들의 적성검사를 통해 그들의 재능과 공부 성향을 찾아 최상의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또 미국 대학 방문을 통해 학생들에게 꿈과 열정을 상기시켜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많은 학생들이 미국 대학 방문 후 꿈을 키우거나 목표의식이 생긴다. ‘나도 할 수 있다’라는 것과 ‘나도 미국의 명문대에서 공부하고 싶다’라는 마음가짐은 부모의 잔소리 없이 학생들 스스로를 움직이게 할 것이다. 케빈 강이 전하는 코넬대학 입학기 “목표를 정했다면 스스로 포기하지 않고 정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케빈은 지난 2002년 6월 밴쿠버에 왔다. 케빈보다 두 살이 많은 중학생 형과 어머니 그리고 케빈, 이렇게 세 식구가 교육을 목적으로 밴쿠버로 이주한 것. 케빈은 노스밴쿠버의 린밸리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7학년까지 다닌 뒤 아가일 중등학교에 진학했다. 초등학교 재학 시절 케빈의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F도 있었고 C-에 한국 학생들의 장점이라는 수학도 B를 받았다. 영어가 안 되니까 처음에는 학교 수업을 따라가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형이 있어서 학교생활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학교 공부도 형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중고등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9학년까지 성적이 좋지 않았고 공부에도 관심이 없었다. 친구들과 노는 것이 좋았고 학생들이 중심이 된 단체에도 가입하는 등 평범한 학교생활을 즐겼다. 그런데 9학년을 마친 후 생각이 달라졌다. ‘공부를 해야겠다’라고 마음을 먹었다. 등한시했던 공부를 다시 하려니 처음에는 잘 되지 않았다. 케빈은 어머니께 도움을 요청했다. 필요한 과목의 성적을 올리기 위해 과외를 받았고 프리스쿨 등에도 다녔다. 이즈음 SAT 공부도 시작했다. 요즘은 한국에서도 SAT를 많이 치르지만 미국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높은 SAT 점수가 꼭 필요하다. 과외, 프리스쿨, SAT 준비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했지만 대학 진학시 필요한 과외활동도 열심히 했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과 만나고 함께 지낼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케빈은 시험 성적을 올리기 위해 엘리트어학원에 다녔다. 개인 시간도 점차 가질 수 없었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했다. 고민 끝에 학교 선생님이 내준 숙제는 학원에 오기 전 학교에서 해결했다. 어머니께서 픽업을 오기 전에 학교 숙제는 학교에서 모두 마쳤다. 그리고 학교 수업이 끝나면 학원에서 다시 공부를 했다. 케빈은 10학년 때부터 SAT를 준비했다. 그리고 11학년 때 SAT 점수는 1,930점, 12학년 6월에는 2,200점, 12월에는 2,210점을 받았다. 그리고 대학 입학 서류 제출 때는 2,400점 만점에 2,250점을 받았다. 그동안 케빈은 열심히 공부했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공부에 올인했다. 케빈은 2009년 미국 명문 코넬대학에 입학했다. 처음에는 엔지니어링을 공부했다. 그런데 적성에 맞지 않아 경제학으로 바꾸었다. 대학생활은 어렵지 않았다. 형이 이미 코넬대학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기숙사에 머물지 않고 형과 함께 생활할 수 있었다. 케빈은 미국 명문대 입학을 준비 중인 학생들을 위해 경험에서 우러난 조언을 전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부모님의 도움 그리고 학원의 도움으로 성적을 올릴 수 있다. 하지만 대학은 그렇지 않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적성에 맞지 않으면 좋은 성적을 낼 수 없다. 대학에서는 관심 있는 과목은 모두 수강 신청을 하는 게 좋다. 많은 과목을 접하다 보면 적성에 맞는 과목을 찾게 된다.” 케빈 역시 처음 코넬대학 입학 때는 엔지니어링을 전공했지만 그 후 많은 과목의 수업을 들은 뒤 전공을 경제학으로 변경했다. 케빈은 “한국에서 미국 명문대 입학을 목표로 공부한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안다. 하지만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정진하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라고 전했다. 케빈은 현재 코넬대학을 졸업하고 로스쿨에 입학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Tip 미국 대학 입학을 위한 학년별 준비 사항 입학사정관제에서 유리하게 작용될 수 있는 활동은 지역 봉사, 학생회, 보이스카우트 등이며, 운동으로는 팀워크를 중요시 여기는 단체 종목생활을 꼽았다. 학생에게 적합한 학교를 선정하고 탐방 여행을 떠나는 시기는 아이들이 정신적으로 조금 성숙한 고등학생이 되는 봄방학이 가장 알맞은 시기라 조언했다. 이 시기에는 많은 리서치를 통해 학생 자신의 생각이 확고하게 잡혀야 한다고 덧붙였다. 적성검사 시기는 중학교 3학년 즈음으로 스스로 자기 앞날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할 때 할 것을 권장했으며, 원하는 대학의 원서 작성은 고등학교 진학 후 미리 보며 숙지하고 2학년 여름에 완성해 매해 9월 새롭게 나오는 대학 입학 요강에 맞춰 에세이를 마무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엘리트어학원은… 미국에 본사를 두고 있는 글로벌 네트워크 교육기관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LA 등에 18개의 분원이 있으며 캐나다 토론토, 밴쿠버 등에 8개 분원을 비롯해 중국 상하이, 인도네시아, 터키 등으로 진출해 명실상부한 글로벌 네트워크 교육기관으로서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한국에는 압구정 본원과 연희, 서초, 여의도 등 총 7개의 분원이 있다. 줄리아 더글러스 박사는… 현 미국 School-Connect 이사. 전 학교 기반 개입 프로그램 연구 및 프로젝트 컨설턴트, 전 워싱턴DC Character Education Partnership(CEP) 연구원 및 코디네이터, 전 미국 교육부 장관 수석 고문 보좌. 「고등학교 경험의 최대 활용법」의 주 저자, 「특성교육평가 Toolkit」의 제1 저자. 하버드대 교육학 석사(인간발달심리학), 버지니아대 교육학 박사(임상 및 학교심리학). <■기획 / 장회정 기자 ■글&사진 / 경영오(프리랜서) ■자료 제공 / 엘리트어학원(www.eliteprep.ca)>
네 남매 美 명문대 진학시킨 ‘명의’ 래리 곽의 아버지 역할론
2012. 07. 30 17:27 화제
ㆍ“아이들의 잠재력, 대화를 통해 아버지가 깨워주세요!” 텍사스 의대, 브라운·코넬·노스웨스턴 대학 등 자녀 네 명 모두를 미국 명문 대학에 진학시킨 래리 곽 박사 부부의 자녀교육 노하우를 엮은 책 「아이의 잠재력을 깨워라」가 미국의 한인 사회에서 인기다. 특히 아버지인 래리 곽 박사가 아이 네 명의 잠재력을 깨워주기 위해 무엇을 헌신했는지, 아이들과 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등 구체적인 방법이 책을 통해 모두 공개돼 더욱 흥미진진하다. 책의 국내 출간을 맞아 한국을 방문한 그가 부인 루스 곽과 함께 본지와 만났다. 하루 5분이면 충분한 아빠표 영재교육 네 명의 자녀를 모두 영재로 키운 아버지의 교육 비법은 과연 무엇일까. 특히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아버지다. 미국의 한인 사회에서 가장 본받고 싶어 한다는 ‘래리 곽’(53) 박사의 교육 철학이 최근 책으로 공개돼 화제다. 그는 자신의 네 자녀를 모두 미국 유수의 명문 대학교에 진학시켰다. 첫째는 텍사스대에서 의학을, 둘째는 브라운대에서 엔지니어링을 그리고 셋째는 코넬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으며, 넷째는 아버지의 모교 노스웨스턴대에서 의학을 전공 중이다. 이쯤 되면 래리 곽 박사의 교육관이 ‘명문대 진학을 위해서는 아빠의 재력과 엄마의 극성에서 출발한다’라는 공식을 무색하게 만들었다고 해도 좋겠다. 부인 루스곽과 공저한 「아이의 잠재력을 깨워라」라는 자녀교육서를 통해 그는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 강조한다. “이제 더는 아시아식 진학 교육의 대표적인 모델인 ‘타이거 마더(중국인 부모의 엄격한 교육 방식으로 두 딸을 키워낸 예일대 에이미 추아 교수의 저서 제목)’가 더 이상 경쟁력을 가지지 못해요. 가족을 우선으로 하는 ‘참여형 아버지’가 대세죠. 아이들은 태어나서부터 10년간이 평생을 좌우하거든요. 특히 아버지가 이 기간 동안 자녀들의 신체적·정신적·감정적·학문적 잠재력을 최대한 깨워줘야 합니다. 단순히 공부 잘하는 자녀로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덕체를 고루 겸비한 인재상을 목표로 영·유아기 때부터 아이의 잠재력 개발을 위해 부부가 팀워크를 이뤄내야 해요. 한국 부모, 특히 아버지들이 바로 이 대목에 주목해줬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세계 최고의 암 임상센터 텍사스 대학 MD 앤더슨 암센터 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2010년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으로 선정된 바 있다. 우리 몸의 면역 체계를 이용해 암세포를 죽이는 백신을 개발한 인물로 미국 내에서 명망이 높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쁜 병원 생활과 고된 연구 활동을 진행하면서도 참여하는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단 한 번도 소홀히 한 적이 없다고 한다. “3일에 한 번씩 밤샘 근무를 해야 하는 레지던트 시절에도 퇴근 뒤 집에 돌아오면 아이들에게 헌신적으로 시간을 할애했어요. 함께 놀아주고, 먹여주고, 목욕을 시켜줬죠. 침대에서 책을 읽어주면서 아이들이 잠든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비로소 집에서의 제 일과를 시작했어요. 한국 아버지들이 회사일로 바빠 자녀들과 시간을 함께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꼭 저와 같이 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에요. 아이들에게 낼 수 있는 시간이 하루 중 단 5분이어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시간만큼은 휴대폰을 끄고,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온전히 아이에게 집중해야 한다는 거죠.” 래리 곽 박사는 행복한 가족이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부의 지혜와 헌신이 필요하다고 충고했다. 아시아의 많은 아버지들은 자신의 존재가 자녀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면서 자녀들의 행복을 위해서는 아버지가 적극적으로 나서길 권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자녀에게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다가 아이의 학업 성적이 떨어지면 그저 아내를 탓하기에 바쁜 한국의 아버지들이 새겨들어 마땅한 이야기리라. 아이의 성적이 곧 엄마의 성적이라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 아닌가. 이와 관련해 비영리단체를 통해 봉사활동에 열심인 부인 루스 곽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와 함께하는 시간이 필요한 아이 “남편은 평생 결정을 내리는 매 순간마다 가족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할 가치로 생각했어요. 과학자 모임이 있어 다른 도시로 출장을 가더라도 최소한의 시간만 머물고 집으로 돌아올 정도였으니까요. 모든 휴가는 가족과 함께 보냈고, 휴가지에는 일을 가져가지 않았어요. 가정과 아이들에게 완전히 집중해줬죠. 함께 만들어가는 가정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러니 부부가 서로 잘잘못을 탓할 일이 없었죠.” 흔히 자기 분야에서 큰 업적을 이룬 사람들은 일에 몰두하느라 가정을 등한시한다는 편견은 래리 곽 박사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박사는 독자들에게 모두 자신처럼 생활하라고 책을 쓴 것은 아니라며 자녀교육에 대한 아버지 멘토링의 중요성에 대해서만 공감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하길 잊지 않았다. 노스웨스턴 대학 의학부 6년 만에 졸업, MD 앤더슨 암센터의 림프·골수종학과의 학과장이자 암 면역연구소의 부소장, 백혈병 연구 저스틴 기금 석좌교수 등 한 사람의 이력이자 직책이라고 하기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업적을 이룬 그는 수백만 달러짜리 연구 프로젝트 기금을 세 개 이상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부모님께서는 제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성취의 기쁨을 배우도록 무엇인가 해냈을 땐 인정해주고 상을 주셨어요. 학기 말에 높은 성적을 받으면 온 가족이 중국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었죠. 그게 그렇게 좋았어요(웃음). 소박한 포상이었지만 성취에 따른 만족감을 더 크게 느끼도록 해주었죠. 저희 아버지는 그러면서 늘 제게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말고 목표를 크게 가지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내과 의사와 과학자라는 꿈을 동시에 가지게 됐고 부모님의 가르침 덕에 그 목표를 이룰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래리 곽 박사가 이처럼 바람직하며 유난스러운(?) 아빠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영향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의외의 답을 했다. “아버지는 경쟁이 치열한 학계에 몸담고 계셨어요. 주중에는 연구와 학교일 외에는 다른 곳에 신경 쓸 여유도 시간도 없으셨죠. 그런 노력 덕분에 캔자스 주립대의 정교수가 되셨지만 대신 저희는 아버지를 오직 주말이나 휴일에만 볼 수 있었어요. 주중에 제가 하는 스포츠 활동에 한 번도 참석한 적이 없으신데…, 전 그게 못내 서운했어요. 그래서 결심했죠. 나는 아이들과 언제든 함께 있어주는 아버지가 되겠다고 말이죠.” 그는 아버지와 충분히 시간을 갖지 못한 유년 시절의 아쉬움이 있었기 때문에 내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할지 구체화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모습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고, 자신이 아버지로서 역할을 하는 데 중요한 본보기가 됐다면서 말이다. 간섭이 아닌 관심이어야 한다 미국 사회 내에서 아시아계 학생들은 아주 어린 나이부터 가정교사나 토요일 학교를 통해서 특별히 개인교습을 받는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아시아계 학생들이 많이 재학 중인 학교를 되레 서양 학생들이 피해 다닐 정도라고 하니 이 지독한 자식 사랑과 교육열은 더 설명할 필요 없겠다 싶다. 미국의 아시아계 부모들 역시 대체로 유명 대학에 자녀를 입학시키면 부모로서 자신의 임무를 잘 완수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래리 곽 박사는 유명 대학 입학만이 앞날의 성공과 출세를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그런 목표와는 철저히 다른 공부를 시켰어요. 아이들은 저마다 성장과 발달 속도가 다르기 때문이죠. 아직 준비되지 않은 아이에게 어떤 것을 하도록 강제로 밀어붙이면 때로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거든요. 물론 우리도 학업 성적을 강조했고 아이들이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기를 원했죠. 그러나 결코 명문 대학 입학이 최종 목표는 아니었다는 거죠.” 래리 곽 박사의 자녀들은 각기 다른 성격과 재능을 가졌다고 한다. 때문에 훈육 방법도 아이들 각자의 개성과 성향에 맞춰 이뤄졌다. 학습 방법도 네 아이 모두 서로 다른 형태로 진행됐다. 부부는 기본적인 환경들만 체계적으로 조성해주었을 뿐 이후 과정들은 각자 스스로의 방법으로 학습할 수 있도록 지켜봐주었다고 한다. 네 남매의 각기 다른 성향과 그에 따른 훈육 방법이 궁금했다. 간략하게 소개해달라고 묻자, 네 아이의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를 풀어냈기 때문에 일일이 설명하기엔 어려움이 따른다고 웃으며 답했다. “저희는 가정 내에 정해진 일과가 있어요. 저녁식사 이후에 주어진 집안일을 마치면 아이들은 자신의 방에서 숙제를 합니다. 책상 위에 각자의 스케줄 표를 붙여줬어요. 자신들이 해야 할 활동 중에서 숙제를 제일 먼저 하도록 했고, 어려운 과목을 그 다음에 하라고 권했죠. 정해진 일정을 표로 만들어두면 매일 효과적으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어요. 스스로 자신들이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파악하고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 거죠.” 어릴 때부터 좋은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는 규칙적인 일과가 매우 중요하다고 부부는 강조한다. 이러한 규칙성은 아이들에게 안정감을 주기 때문에 대부분의 아이들이 정해진 일과를 좋아하는 습성을 가진다고 한다. 또 이 방법으로 아이들을 양육하게 되면 입씨름을 하거나 잔소리를 늘어놓을 필요가 없게 된다고 덧붙였다. 물론 꾸준히 ‘지속하는 것’에 성공의 열쇠가 있음을 잊지 말라고 부부는 입을 모았다. 두 번째는 ‘부모의 관심’이라고 했다. “모든 아이들은 부모를 기쁘게 해주고 싶어 하기 때문에 꽤 효율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어요. 우리는 아이들에게 좋은 성적을 받기를 원한다고 솔직하게 전했어요. 그리고 우리 또한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아이들과 함께 노력해나갔죠. 격려하기도 하고 돕기도 하면서 말이에요. 또 저는 아이들의 선생님께 부가적으로 공부시킬 수 있는 자료에 대해 자주 물어보곤 했어요. 제가 집에서 직접 연습시켜서 아이들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죠.” 이 같은 노력 덕분에 아이들은 중학생이 돼서는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이 붙었다며 상기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부부는 노력한 대가를 얻게 돼 무척 기뻤다고 했다. “관심과 간섭은 달라요. 이를 착각하면 아이를 올바르게 이끌 수 없게 되죠. 관심은 관찰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해요. 관심 있게 지켜보다가 부족한 부분을 발견하고 함께 채워나가는 것과 성적만을 강조하며 아이의 학습을 간섭하는 것은 분명 다른 결과를 가져올 거라 확신해요.” 남편의 설명을 듣던 루스 곽은 만일 아이들이 열심히 하면서도 극도의 좌절을 보이면 부모는 한발 물러서서 그 일이나 과정이 아이에게 적합한지를 살펴봐야 한다고 수줍게 덧붙였다. 부부는 부모가 자녀들의 인생에 관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리기 위해 책을 집필했다고 털어놨다. 아울러 부모는 아이의 잠재력을 깨우기 위해 독립을 원하는 자녀와 책임을 다 해내야 하는 부모 사이에서의 적절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성공의 열쇠는 부모와의 대화 우리는 아이들을 양육하는 데 있어 공통의 홍역을 치르게 된다. 2차 성징이 나타나며 정신적으로 자의식이 높아지고 성숙기에 접어드는 시기. 개인차가 존재하나 대체로 예민하게 다가오는 그 이름 ‘사춘기’다. 이 시기 아이들과 대화를 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 중 하나지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래리 곽 박사는 이 시기에 그가 그토록 강조했던 열린 대화를 잘 해내지는 못했다며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대신 자유롭고 활발한 부인이 잘 이끌어주었다고 회고했다. 이 얘기를 듣고 있노라니 부부가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며 가정 분위기의 균형을 얼마만큼 잘 만들어갔을지 쉬이 짐작이 됐다. 사실 이들 부부의 대화 방식은 확연히 달랐다. 남편은 좌뇌가 발달돼 논리적이고 생각이 간결하다면, 부인은 우뇌가 발달돼 감정과 직관이 생각과 결론에 영향을 주는 타입이랄까. 전형적인 한국사회의 아빠, 엄마 모습이다. “우리 부부의 다른 성향이나 대화의 접근 방식은 상호 보완이 돼요. 그로 인해 아이들과 열린 대화를 잘 유지해나갈 수 있었어요. 어릴 때 아이들은 언제나 부모와 함께 시간을 보내길 원하지만 청소년기가 되면 친구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합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죠. 청소년기 동안 열린 대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주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대화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중요해요.” 부부는 아이들과 대화를 통해 기분이 나쁜지, 좋은지, 어떤 것을 원하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애쓴다고 했다.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고, 원활한 대화를 이룰 수 없는 경우도 있지만 특유의 인내심으로 아이가 답할 때까지 다각도로 질문하고 기다린단다. 자녀를 통제하지 않고 의사 결정을 인정해주면서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힘을 길러주는 과정인 것이다. 래리 곽 박사는 아이들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정서적 안정을 느낀다고 얘기한다. 자존감이 형성되고, 이를 바탕으로 무엇이든 자신감 있게 행동할 수도 있게 되는 거라고. “자녀 양육은 인생에서 겪는 일들 가운데 가장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어요. 저는 아이들의 약점과 강점을 살펴봤고, 그들이 어디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지 들으려고 애썼죠. 신체적·정신적·감정적·영적·학문적 잠재력들을 위해 체계적인 환경을 조성하고 끊임없이 아이들을 격려해주었어요. 대학 입시보다는 대학 졸업 이후에 어떤 직업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 얘길했죠. 지금도 함께 고민 중이고요. 실질적인 경험을 공유하고 싶었어요. 앞으로 계속해서 주변 사람들과 자녀교육에 대한 의견을 나누려고요.” 하루 24시간 중 5분. 그 5분의 완전함이 래리 곽 박사를 아버지로 성장시켰다. 물론 그는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아이들에게 선물했다. 그 시간만큼 자녀들은 더 크고 넓게 성장했고 말이다. 그는 네 자녀를 키우며 겪은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과거 부모의 희생과는 다른 개념의 양육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무척이나 인상적으로 각인시켰다. 무엇보다 이 같은 양육을 통해 자신도 함께 성장했다는 래리 곽의 마지막 얘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네 명의 자녀를 모두 감성 영재로 키워낸 래리·루스 곽 부부는 진정한 자녀교육의 멘토이자 롤모델이다. <■글 / 강은진(프리랜서) ■사진 / 원상희 ■장소 협찬 / 밀레니엄 서울 힐튼 ■헤어&메이크업 / 니케 인 뷰티(02-514-4425)>
세계 명문대 동시 합격, 김푸른샘 어머니 정미영씨의 만점 교육법
세계 명문대 동시 합격, 김푸른샘 어머니 정미영씨의 만점 교육법
2009. 12. 21 16:06 화제
훌륭하게 성장한 아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언제나 그 뒤에는 훌륭한 부모가 있다. 독서와 시 쓰기를 즐기던 꼬마, 공부방에서 꾸준히 자원봉사를 하고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일하며 ‘사회학적 상상력’을 실현하는 데 최선을 다했던 소녀, 하버드대를 비롯한 세계 명문대에 동시 합격하며 모두를 놀라게 한 고교생. 뛰어난 능력과 올곧은 인성을 갖춘 김푸른샘양에게는 흔들림 없는 원칙과 모범으로 딸과 아들을 멋지게 키워낸 엄마 정미영씨가 있었다. 어릴 때 심어준 자립심이 성공의 열쇠 서울대 자유전공학부를 비롯해 미국의 하버드대, 예일대, 다트머스대, UCLA, UC버클리, 영국의 옥스퍼드대, 런던 정경대까지. 내로라하는 명문대로부터 합격 통보를 받은 김푸른샘양. 고2 때 이미 SAT Reasoning Test에서 만점인 2,400점을 얻었고 전국 중고생 자원봉사대상을 수상하며 이듬해 대한민국 인재상까지 거머쥔 이 소녀는 지난 8월 하버드대에서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해 한국을 떠났다. 현재 군 복무 중인 푸른샘양의 오빠 김온빛누리 또한 서울과학고를 조기졸업한 뒤 카이스트에 진학한 수재다. “아이들 이야기를 듣고 ‘아이들이 공부에 푹 빠져 살았나 보다’, ‘엄마가 아이들한테 얼마나 매달려 살았겠느냐’고 묻는 이들이 많아요.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책을 읽고 퍼즐을 맞추며 보내는 시간이 훨씬 많았고, 중·고등학교 때도 봉사활동하는 데 시간을 많이 투자했어요. 저 또한 늘 아이들에게 ‘엄마도, 너도 함께 잘 살자’라는 말을 많이 했어요. 직장을 가진 엄마로서 ‘나’와 ‘엄마’의 삶을 균형 있게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자신의 삶을 잘 꾸려 나가면서도 아이들에게는 좋은 엄마가 되어주기 위해서 정미영씨가 택한 길은 아이들에게 자율성을 길러주는 것이었다. 스스로 좋아하는 일, 해야 할 일들을 찾아서 할 수 있게끔 어릴 때 일정한 ‘틀’만 잡아준다면 특별한 투자를 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레 아이가 똑바로 길을 걸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제가 목표를 세워주고, 공부를 가르쳐주고, 요령을 일러주는 게 당장은 쉬울 수 있어요.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렇게 일일이 먹여줄 수는 없잖아요. 학습에 있어서도 어릴 때 좋은 습관을 만들어주고 방향 설정하도록 도와준다면 그 다음부터는 아이들이 스스로 찾아서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아이가 즐거워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을 찾도록 도와주고, 그에 맞는 지원을 아끼지 않은 덕에 두 아이는 자립심 강하고 밝게 자라났다. 호기심 많고 긍정적인 아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찾아 원하는 방식으로 공부를 했고, 그 결과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결과를 얻게 됐다. 독서와 다양한 경험이 인생의 밑거름 엄마 정미영씨가 아이들을 키우며 가장 많이 신경 쓴 부분은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내면에 잠재된 무한한 가능성을 아이가 스스로 끄집어내기 위해 부모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그 가능성을 건드려주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영어나 수학의 공부 ‘스킬’을 얻는 데 몰두하기보다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잠재된 자질과 적성을 발견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리고 이러한 여러 놀이 활동과 경험은 아이들의 삶을 즐겁고 풍요롭게 만든 것은 물론 학업적인 성취를 얻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정미영씨는 푸른샘과 온빛누리가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체험을 하게 했다.“초등학교 때까지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게 하는 데 투자를 많이 했어요. 집에서는 퍼즐놀이, 스티커놀이, 레고 등을 하고 주말이면 연극·영화를 보러 다니거나 박물관, 생태체험, 주말농장 등을 찾아 즐겁게 놀았죠. 무엇보다 아이들이 책을 읽고 글 쓰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고, 또 아이 교육에 있어 독서가 가장 좋은 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책 읽는 시간을 많이 가졌어요.” 처음 시작은 퍼즐놀이였다. 푸른샘이 엉금엉금 기어 다닐 때부터 가지고 놀던 퍼즐은 집중력을 키우기에 가장 적합한 도구였다. 정미영씨는 아이들이 오랜 시간 공부를 하지 않아도 결과가 좋았던 데 대해 “퍼즐놀이를 많이 했기 때문”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퍼즐은 무척 좋은 장난감이자 교육도구예요. 큰아이가 세 살 때 우연히 상가에서 멋진 그림의 퍼즐을 발견하고 갖고 놀게 했는데, 그 작은 손으로 정말 진지하게 퍼즐을 맞추는 거예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어떤 날은 같은 색끼리 모아서, 어떤 날은 주인공부터, 어떤 날은 가장자리부터 맞춰 나가면서 다각도로 생각하고 몰입하더라고요. 나중에는 단계를 높여가면서 가족이 거실에 모여 함께 모여 맞추는 ‘가족놀이’가 됐어요.” 그림이나 풍경을 완성시키는 퍼즐놀이는 아이가 커감에 따라 자연스레 문자퍼즐로 옮겨갔다. 자음과 모음을 떼서 글자 만들기를 하며 여러 단어를 만들고 글을 익혀 나갔다. 아이들은 조각을 맞추며 눈과 손의 협응력을 키우고 다양한 지각 능력도 키울 수 있었다. 아이가 조금 더 자랐을 때는 그림책을 장난감 삼아 책에 흥미를 붙이고 글도 익힐 수 있게 했다. ‘놀이’를 통해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자연스레 공부에 대한 흥미와 습관을 길러주려 한 것이다. “레고와 같은 장난감도 적극적으로 활용했어요. 저는 아이들이 어릴 때 특히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고 구성하게 하는 활동을 많이 시켰는데 조직적인 사고나 논리력이 형성되는 것은 물론이고 창의력을 키우는 데도 무척 좋은 방법이었어요. 온빛누리가 과학자의 꿈을 키우게 된 것도 아마 블록놀이의 영향이 컸을 거예요. 손으로 뭔가를 만들 때면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 붙이길 좋아하던 푸른샘이가 문학적 상상력을 키우는 데도 도움이 됐겠죠?” 하지만 정미영씨는 무엇보다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워낼 수 있었던 비결로 독서를 꼽는다. 따로 무언가를 가르치거나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책을 통해 아이 스스로 감성을 키우고 지식을 획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다양한 이야기를 접하면서 사람답게 사는 법과 타인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며 좋은 습관도 형성해 나갔다. “독서만큼 중요한 것은 없어요. 공부에 있어서도 독서가 밑거름이 되죠. 부모는 아이가 책 읽는 습관을 들일 수 있도록 반드시 노력해야 해요. 태어나기 전부터 혹은 태어나자마자 규칙적으로 책을 읽어주고 지속적으로 대화하는 것이 중요해요. 그리고 부모가 먼저 책 읽는 모습을 보여주고요. 저는 아이가 읽었던 책을 다 읽었어요. 함께 어떤 부분이 재미있었는지도 이야기하고 그 부분을 글로도 옮겨보게 했어요. ‘엄마는 이랬는데 너는 어땠니?’라고 생각도 나누고요.” 독서와 연계한 글쓰기 활동도 정미영씨가 강조하는 부분이다. 가장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일기부터 독서감상문, 시, 동화 짓기 등을 통해 아이들은 상상을 하고 생각을 정리하며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 여행을 다녀오거나 공연, 영화, 연극 등을 보고 나서도 함께 감상을 나누고 기록장을 만들어 글로 남겼다. 아이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찾아 적극적으로 지원 어릴 때부터 책을 읽고 이야기를 상상해 만들어 노는 것을 좋아하던 푸른샘은 문학적 소질이 뛰어난 편이었다. 어릴 적 별명이 ‘꼬마 시인’이었을 정도로 표현력이나 감수성이 남달랐다. 시나 동화를 쓰는 것을 즐기는 것은 물론, 언어적 감각이 뛰어나 또래에 비해 뒤늦게 영어를 접했으면서도 곧잘 따라 하곤 했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불구하고 푸른샘이 “영국에 유학을 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 과감히 보내준 것도 딸의 언어적 재능을 믿고 키워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푸른샘이 처음 의사를 밝혔을 때,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봤어요. 그저 충동적인 희망이 아니라 꽤 오랫동안 깊이 생각해온 거더라고요. 남편과 일주일가량 이것저것 알아보기도 하고 고민을 많이 했죠. 본인이 간절히 원하고 있고, 또 아이의 문학적 재능을 살리는 데 영어를 깊고 넓게 공부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아이가 워낙 스스로 자신의 일을 잘 찾아서 하는데다 악착같은 면이 있다는 것도 잘 알기에 믿어보자 싶었어요.” 하지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영국에 초등학교 5학년 된 어린 딸을 혼자 보내기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잘 적응할 수 있을지,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지 염려도 됐고 막상 보내고 나서도 그리움과 걱정에 잠 못 이루는 날도 많았다. 특히 같은 시기, 남편의 사업이 실패해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시달려야 했다. “그 시간은 저희 가족의 최대 위기였어요. 하지만 남편과 ‘2년은 부족하다, 기왕 보낸 것 3년 정도 공부해서 확실하게 얻고 돌아오도록 도와주자’고 합의하고 푸른샘에게 편지를 썼어요. ‘평생 부모가 줄 수 있는 경제적인 부분을 3년의 유학에 몰아준다고 생각해라. 최선을 다해 뒷받침하는 것이니 너도 최선을 다해라’라고요. 아이가 부담을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다행히 푸른샘은 우리의 진심을 잘 받아들여줬고 더 열심히 했어요.” 힘들기는 딸도 마찬가지. 여행용 가방 하나, 책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낯선 런던 히드로공항에 발을 디뎠을 때 느꼈던 두려움은 지금도 잊지 못할 정도라고. “잘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치며 감행한 유학이었지만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 눈물짓는 날도 많았다. 하지만 자유로운 영국식 공부법에 익숙해지고 밤새워 좋아하는 책을 붙들고 지새우는 날이 계속되면서 푸른샘은 안팎으로 넓어졌다. 그 사이 월반도 두 번이나 했고 학교에서 1년 동안 가장 많은 상장을 받은 아이, 친구와 이웃을 배려하는 아이가 되어 무사히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부모는 아이에게 ‘몸’으로 말을 거는 사람 한국으로 돌아온 푸른샘은 ‘나누는 삶’에 풍덩 빠져 시간을 보냈다. 좋아하는 영어를 더 깊이 배우기 위해 외국어고등학교에 진학한 푸른샘은 스스로 관심 있는 일을 찾아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공부방에서 저소득층 아이들의 선생님이 되어 5년간 아이들에게 영어, 수학, 음악 등을 가르쳤고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인턴으로 활동하며 장애인 공공시설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푸른샘은 특히, ‘장애인을 무조건 돕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환경이나 시설을 갖추는 것이 진정한 더불어 사는 삶이다’라는 생각에 3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국가인권위원회, 국민권익위원회, 서울특별시철도공사 등과 접촉하며 시설 개선에 앞장섰다. 서울지하철 오목교역의 장애인용 여성화장실, 신정네거리역 등의 리프트가 모두 그녀의 제안에 의해 설치된 결과물이다. ‘국제청소년인권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여하고 청소년 인권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 발표하기도 했다. “처음 봉사활동을 권유한 건 저예요. 제가 좀 외진 지역의 중학교에서 8년 정도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교육적 혜택은커녕 다양한 기회조차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 현실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보며 고민을 많이 했거든요. 그러다 우연히 그 지역 어린아이들을 위한 공부방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놀랍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해서 그 길로 달려갔죠. 그때부터 쭉 그곳에서 제 전공을 살려 아이들에게 책을 읽히고 그림일기를 쓰게 하고 글을 가르치고 있어요. 그리고 한국에 돌아온 푸른샘에게 ‘네가 배운 것을 나눠보면 어떨까?’ 하고 권유했죠.” 엄마의 권유로 시작한 봉사활동이었지만, 어느새 푸른샘 스스로 푹 빠져들었다. 단순히 시간을 채우거나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봉사가 아닌 마음에서부터 비롯된 실질적인 나눔을 실천하게 된 것이다. 푸른샘이 특히 관심을 가진 부분은 ‘인권’. 막연하게만 느껴지던 인권에 대해 책을 읽고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보며 아이는 성장했다. 적극적으로 찾아다니며 관련된 경험을 쌓은 덕에 서울시자원봉사대축제 서울시장상, 전국중고생자원봉사대상, 국가인권위원회 인권논문 우수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녀만의 경험을 오롯이 녹인 에세이에 하버드대, 예일대를 비롯한 명문대학 입학사정관들도 감동하며 반드시 자신의 학교에 진학해달라는 답장을 보내왔단다. “저는 부모가 ‘몸의 언어’를 구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책 읽어라, 바른 생활습관을 가져라, 열심히 공부해라, 남과 나눠라 하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봤자 아이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해요. 봉사도 마찬가지죠. 처음부터 아이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갈 수 있도록 부모가 먼저 바른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것 아닐까요. 부모가 먼저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고 나를 원하는 곳은 없는지’ 주변을 둘러봐야죠.” 정미영씨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에 대해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었다고 말한다. 다른 일들은 잘못을 깨달았을 때 고치고 다듬어 나가면 되지만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은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드라마 ‘카이스트’를 보고 과학고에 진학하겠다며 학원을 보내달라던 큰아이의 성화에 처음으로 종합학원을 보냈을 때, 친구들과의 격차에 좌절한 아이가 울면서 “엄마는 왜 내게 미리 공부를 시키지 않았느냐”고 소리치던 그 날, 정미영씨는 좌절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소신 때문에 아이를 불행하게 만든 것은 아닌지 오래도록 고민했다. 하지만 그 또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중요한 것은 아이가 스스로 원하는 것을 찾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다만, 아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이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대화하고 합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데 다다랐다. 그리고 ‘잘하는 것은 밀어주고 힘들어하는 부분은 힘껏 도와준다’는 원칙을 지금껏 지켜왔다. 지금은 그런 부모를 믿고 잘 따라준 아이들이 고맙고 자랑스러울 뿐이다. 이제 정미영씨는 아이들과 함께해온 20여 년의 여행을 돌아보며 더 많이 보듬어주고 일구어 나갈 새로운 여행을 준비 중이다. 자신은 엄마로서 아이들을 ‘키운’ 것이 아니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스스로도 자라고 거듭나는 과정을 겪었다고 말하는 정미영씨. 그 행복한 ‘엄마 여행’은 오늘도 진행형이다. ■글 / 이연우 기자 ■사진&제공 / 이성훈, 정미영
세 자녀 모두 美명문대 보낸 타블로 어머니 김국애 원장
2009. 09. 04 11:13 연예
“아이들이 저희에게 준 추억과 기억만으로 빚은 다 받았다고 생각, 공부 때문에 아이를 외롭게 만들지 마세요\" 김국애 헤어포엠 원장(62)에게는 꽤 오래전부터 인터뷰 요청을 해오던 차였다. 방송에서 보여지는 타블로의 예의 바르고 영민한 모습에 ‘어머니는 어떤 분일까?’ 하는 개인적 호기심이 반이었고, 타블로를 비롯한 세 자녀 모두 미국 명문대에 보낸 교육 비법 또한 궁금했다. “아무리 부모라 해도 장성한 자식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조심스럽다”며 인터뷰를 거절해오던 김 원장을 여름이 가기 전 만날 수 있었다.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체구에 앳된 미소, 김 원장은 환갑이 넘은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생기 있는 표정과 따뜻한 에너지를 가진 분이었다. 가난했던 부부, 누구보다 확고했던 자식교육에 대한 꿈 “아이 셋을 어떻게 키웠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그럴 때마다 남편이 70%를 했다고 대답해요. 결혼 전부터 남편은 가족과 자식에 대한 완고한 철학이 있었거든요.” 데뷔 때부터 ‘스탠퍼드 대학원 출신의 수재’로 화제가 되었던 가수 타블로. 얼마 전 형과 누나도 각각 미국의 명문 컬럼비아대학원과 코넬대학교를 졸업한 사실이 알려지며 ‘엄친아 가족’으로 다시 화제를 모았다. 어머니 김국애 원장은 45년 동안 미용업에 종사해온 미용인이다. 자식 셋을 모두 미국으로 대학을 보냈을 정도면 부모가 굉장한 재력가일 것이라는 게 많은 이들의 생각이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들 부부의 시작은 매우 가난했다. “남편과 저 둘 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그 시절엔 누구나 가난했지만, 전쟁고아로 고아원에서 자란 남편은 상상할 수도 없는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하고 자수성가한 사람이에요. 저 역시 11형제 중 6째로 집안 형편이 풍족하지 못했죠. 그런 환경을 겪어서인지 결혼해서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모범적인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생각을 꿈처럼 품고 있었어요. 특히 자식을 낳으면 최고의 교육을 시키겠다는 확고한 목표가 있었죠.” 가난한 전쟁고아와 섬처녀가 만나 그런 꿈을 꾸었다니, 지금 생각하면 참 허무맹랑한 꿈이었다. 하지만 자식들을 세계의 중심이 되는 국제인으로 키우겠다는 남편의 의지는 ‘신성불가침’과 같은 것이었다고 김 원장은 말한다. 목사님의 소개로 서울대 토목과에 재학 중이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고 30만원짜리 셋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면서 이들 부부는 한 걸음 한 걸음 꿈을 키워 나갔다. “워낙 어렸을 때 힘들게 자란 남편은 고생하는 것에는 겁이 없는 사람이에요. 저 역시 미용 일을 하고 있었고, 둘 다 기술이 있으니 열심히 살면 이루지 못할 게 없었어요. 우리 모두에게는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이 있다는 걸 남편을 만나고 자식들을 키우며 알게 됐죠.” 가족은 함께 있어야 한다는 철칙, 고심 끝에 떠난 캐나다행 아이들을 외국에서 교육시키는 게 어떻겠냐고 말을 꺼낸 것은 남편이었다. 혈연과 지연, 학연에 묶여 있는 한국사회의 고질적 모순에 아이들이 재능을 펼치는 데 한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건설 쪽 일을 하며 일년에 반 이상 해외 출장을 다니며 보아온 선진국의 교육 시스템도 그런 생각에 한몫을 했다.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곳에서 합리적인 교육을 받기 위해 아이들을 외국에서 키웠으면 좋겠다고 남편이 먼저 얘기를 했어요. 미용사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상태에서 한국에서 미용으로 성공하고 싶었던 전 반대했죠. 남편이 ‘당신이 아무리 크게 성공해도 아이들이 당신 어깨의 별이 되는 것보다 값진 것이겠소’라고 절 설득하더라고요.” 1 세 살 무렵의 타블로. 2 미국으로 떠나기 전 올림픽공원에서 촬영한 가족사진. 3 캐나다에서 3남매. 4 발리 가족 여행. 5 큰아들과 브라운 대학에서. 마침 인도네시아로 가게 된 남편이 가족 모두가 함께 가자고 제안을 했고 복잡한 마음에 김 원장은 미용실을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당시 패션의 중심지 명동에 미용실을 개업했을 때였다. 남편을 따라가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무엇이 아쉬워 해외에 나가 고생을 하나’라는 반응이었다. “남편의 철칙 중 하나가 자식들이 어렸을 때 절대적으로 외롭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굶어죽지 않는 한 같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잦은 출장으로 가족과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았죠.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해주지 못하는 것에 미안해하다 더 이상 가족을 외롭게 하지 못하겠다며 함께 인도네시아로 가자고 하더군요. 저도 그동안 무리해서 일하며 몸이 많이 약해진 상태였고 아버지와 많은 시간 떨어져 있었던 아이들에게 빚을 갚는 의미로 함께 떠나기로 했어요.” 큰아들과 둘째 딸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이었고, 막내 타블로가 막 태어났을 때였다. 남편의 건강 악화로 2년 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어린 시절 해외에서 보낸 경험은 큰아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는 큰아들의 바람에 온 가족이 다시 한번 짐을 싼 건 1988년 88올림픽 직전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간 큰아이가 유학을 가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인도네시아에 있었을 때 영어를 좀 했는데 영어 공부에 대한 갈증이 있었나 봐요. 절대로 혼자는 보낼 수 없다는 남편의 불호령이 떨어졌죠. 당시에는 아이를 혼자 쉽게 유학을 보낼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고 저 역시 엄두를 못 냈어요.” 장남이니만큼 한국에서 열심히 공부해 자리를 잡은 후에 외국에 나가도 되지 않겠냐는 김 원장의 설득에도 큰 아들은 유학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그렇게 어영부영 시간만 흘러갔다. 결국 데이브가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야 가족은 고심 끝에 캐나다로 떠나게 됐다. 이 역시 가족은 함께 있어야 한다는 남편의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그동안 모아놓은 돈으로 아이들 학비를 마련하고 남편은 오랫동안 몸담았던 회사를 그만두고 캐나다에서 개인사업을 시작했다. “어중간한 시기에 유학을 시작해서 큰아들이 고생이 많았어요. 한국인이 거의 없는 사립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지내며 주말에만 가족을 볼 수 있었으니 많이 외로워했죠. 아이를 외롭게 두지 않기 위해 가족 전체가 캐나다까지 왔는데도 힘들어하는 아들을 보며 저도 많이 울었어요. 그래도 본인의 목표가 있으니까 그 시간을 잘 참고 이겨냈어요.” 브라운대 경제학과를 나와 컬럼비아대학원에서 국제경제학을 공부하고 월스트리트에서 증권 트레이더로 7년 넘게 일한 큰아들은 좋은 대학에 진학해 제대로 된 직업을 갖기까지 모범적인 틀 안에 충실했다. 첫째와 둘째가 힘든 과정을 거친 데 비해 학창 시절을 외국에서 시작한 타블로는 더욱 다양한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자유롭게 자랄 수 있었다. 신중하고 합리적인 첫째와 둘째, 엄마를 닮아 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타블로 어렸을 때부터 타블로는 엄마를 잘 도와주는 가정적인 아이였다. 엄마와 함께 음식 만드는 걸 좋아해 과자를 구울 때도 한 손에는 항상 책이 들려 있었다. 김 원장이 어린 시절 막내아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책으로 얼굴을 덮고 잠들어 있는 모습이 떠오를 정도로 타블로는 책을 좋아했다. “큰아들이 대학을 결정할 무렵 아이들을 데리고 스쿨 투어를 떠났어요. 미국 동부와 서부를 돌면서 여러 학교를 둘러봤는데 스탠퍼드대학교 교정에서 철없이 뛰어놀던 막내에게 ‘장차 네가 올 학교야’라고 얘기해줬죠. 그때 뭘 알았는지 막내도 ‘엄마, 나 이 학교 꼭 올게요’라고 대답했던 게 기억나네요. 교정에서 아이들이 꿈을 이룰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게 엊그제 같아요.” 김 원장은 둘째 딸 선주씨가 코넬대에 입학했을 때 “아들을 코넬대에 보내려고 유치원부터 준비했다”는 어느 미국인 학부형이 했던 말을 지금도 기억한다. 코넬대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둘째 딸은 국내 법학대학원을 졸업 후 미국 로스쿨을 거치지 않고 미국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미국 변호사 시험 응시자격은 원칙적으로 미국변호사시험위원회(ABA: American Bar Association)가 인정하는 로스쿨(Law School: 법학대학원) 졸업자와 주별로 ABA 인증 교과과정을 운영하는 로스쿨 졸업생들에게 주어진다. 미국 로스쿨을 졸업하지 않고 곧바로 미국 변호사 시험을 통과한 것은 영국과 독일의 일부 대학 출신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으며 아시아에서는 최초였다. 변호사 시험 합격 후 선주씨는 외교통상부에서 1년, 미연방법원에서 1년 동안 일하다 지금은 미국 로펌 ‘폴 헤이스팅스’에서 일하고 있다. 미국에서 치과의사와 결혼해 조만간 엄마가 될 준비를 하고 있는 딸을 위해 김 원장은 얼마 전 태어날 아기 이름을 지어 보내줬다. 심성이 착해 언제나 엄마를 위로하고 격려해주던 딸이 엄마가 된다고 생각하니 대견스럽고 가슴이 뭉클하다. 문학뿐만 아니라 영화, 미술, 음악에 소질이 많은 타블로까지, 공부 잘하고 다재다능한 아이들을 키우며 엄마 아빠가 얼마나 신났을까 부러움의 시선을 보내는 사람이 많을 만하다. 하지만 항상 좋은 날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맨 처음 이민 갔을 때 남편이 캐나다에서 건축업을 하며 고생을 참 많이 했어요. 본인이 원하기는 했지만 엄격한 규율의 기숙사 생활을 하며 힘든 시간을 보낸 큰아들을 보며 울기도 많이 울고, 오빠 때문에 이민을 와서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했던 둘째 딸도 맘고생이 많았죠. 형과 누나에 비해 자유로웠던 타블로는 또 자유로운 만큼 자기 안에서 생각과 갈등이 많았어요.” 겉으로 보기엔 남부러울 것 없는 최고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타블로지만 예민하고 풍부한 감수성 탓에 외로움도 많았고 혼란의 시기도 거쳐왔다. 타블로는 얼마 전 스탠퍼드대 재학 당시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등지에서 쓴 글을 엮어 만든 소설집 「당신의 조각들」을 펴내며 “글쓰기는 혼란스럽던 현실에 대한 탈출구였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큰아들과 둘째 딸은 아빠 성격을 많이 닮았어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신중해요. 남편이 얼마나 신중하냐 하면 제가 ‘돌다리를 두들겨보고도 건너지 않을 사람’이라고 할 정도예요. 막내아들은 저를 많이 닮아서 다혈질에 감수성이 풍부하고요.” 6 스탠퍼드대에서 연극 감독을 하던 시절의 타블로. 7 스탠퍼드대 졸업식에서 엄마와 함께. 8 고등학교 때 졸업 최우수상을 받으며. 9 Youth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담당했던 타블로. 10 스탠퍼드대에서 타블로의 고등학교 은사님과 함께. 자식교육을 위해 이민까지 가서 갖은 고생을 다 했지만 그래도 지금 각자의 길에서 잘 헤쳐 나가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대견하고 감사하다. 아이들이 자신에게 심어준 아름답고 값진 추억들, 함께 행복했던 시간만으로 충분히 그 빚을 받았다고 김 원장은 생각한다. 아버지께 속죄하는 마음으로 써온 글, 지난 가을 「창조문예」에 등단 종종 방송에서 밝혔듯이 타블로가 가수 데뷔 당시 부부의 반대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특히 아들이 법대에 진학하기를 원했던 남편의 실망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미용실을 하며 누구보다 연예인들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던 김 원장 역시 아들의 결정을 마냥 반길 수만은 없었다. “발만 삐끗하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는 게 연예계”라는 말로 아들의 마음을 돌려보려고도 했지만 아들이 진심으로 하고 싶어 하는 일을 막을 수는 없었다. “물론 저희도 자식들에게 바라는 게 있었죠. 왜 없었겠어요. 완고한 남편에 비해 저는 굉장히 자유로운 여자였어요. 제 아버지가 저에게 자유로운 삶을 살길 원하셨기에 저 역시 타블로가 가진 기질을 200% 표현하며 살길 바랐어요.” 전남의 작은 섬 거금도에서 태어난 김 원장은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도 아버지가 자신에게 베풀어준 사랑으로 그 누구보다 풍요로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문학청년이셨던 아버지가 위로 오빠 다섯을 두고 11형제 중 여섯째로 태어난 그녀를 위해 지어주신 시는 그녀 인생의 첫 번째 선물이었다. “국화 국(菊)자에 사랑 애(愛)자의 이름과 함께 ‘일백 꽃이 필 때 너는 피지 않다가 네가 만약 피려 하니 일만 꽃이 다 죽더라’라는 시를 지어주셨어요. 제가 생각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예요.” 지금도 아버지를 떠올리면 항상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딸이 문학가가 되기 원하셨던 아버지 역시 그녀가 미용 일을 시작할 때 반대를 많이 하셨다. “웬만큼 반대하셨던 게 아니라 정말 심하게 반대하셨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 문학은 정말 춥고 배고픈 일이었거든요. 아버지께서 항상 저에게 하셨던 말씀이 ‘비록 가난하고 힘들지만 넌 귀한 사람이다’예요. 그 처절한 가난에서 아버지가 제게 주셨던 사랑은 정말 차고 넘치는 것이었죠. 그렇게 반대하시던 미용 일을 시작하고 아버지께 속죄하는 마음으로 틈틈이 글을 써왔어요. 미용은 물로 씻고 나면 지워지고 없어지지만 글은 영원히 남는 거잖아요.” 그렇게 틈틈이 쓴 글 중 ‘참으로 아름다운 것은’과 ‘아름다운 동반자’라는 작품으로 지난 가을 「창조문예」에 등단까지 했다. 타블로가 이런 자신과 닮았다는 것을 알기에 10가지 중 9가지 남편 편을 들던 그녀는 아들 편에 서서 남편을 설득했다. “남편한테 ‘여보, 이런 명문대학 나와서 설마 굶어죽겠어요’라고 했어요. 제 아버지도 저에게 꼭 돈 잘 벌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지라고 말씀하지 않으셨거든요. 공부했던 것과 전혀 다른 일을 하더라도 경험은 다 재산이에요.” 여리고 눈물이 많아 과연 이 아이가 연예인을 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됐지만 위기를 만났을 땐 누구보다 강한 아들이다. 무엇보다 영혼이 깊고 따뜻한 막내아들을 믿기에 아들이 하는 일에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는 그녀는 타블로와 스탠퍼드대학원 졸업식 때 있었던 일화를 소개했다. “타블로가 대학원 졸업할 때 남편이 몸이 아파서 저 혼자 비행기를 타고 갔어요. 그때 워낙 급하게 가느라 한국 돈 10만원 정도와 공항에서 신용카드를 만들어 갔는데 공항에 도착해보니 카드가 안 되는 거예요. 10불도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아이 졸업식을 치르나 눈앞이 막막했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타블로가 제 어깨를 툭툭 치더니 ‘엄마, 지금부터 돈 없이 졸업식 치르고 5일 동안 살기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거야’라고 하더라고요.” 두 사람은 일단 중국집에 가서 제일 싼 음식을 시켜 둘이 나눠 먹었다. 그림을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서 오픈된 무료 미술관을 찾았고 서점에 가서 하루 종일 책을 봤다. 졸업식 때 꽃은 교회에 장식돼 있던 꽃을 잠시 빌렸고 엄마가 평소 존경하던 마틴루터 킹을 자주 인용해왔던 것을 생각해 타블로가 마틴루터 킹 동상 앞에 함께 가 사진도 찍어줬다.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타블로와의 추억이다. “3년 반 동안 미국에 있던 아이의 짐이 바지 하나, 양말 두 켤레, 책 한 상자였어요. 졸업식 때 입었던 석사복을 넣을 가방이 없어서 공항에서 ‘가방 하나를 사자’고 했다가 얼마나 혼났는지 몰라요.” 타블로는 ‘엄마가 나의 미래 와이프상’이라며 엄마 같은 아내를 만나고 싶다는 말로 가슴을 설레게 하기도 했다. “엄마는 언제나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 편에 서 있었고 항상 아버지와 함께해줬어요”라는 말도 덧붙여서 말이다. “제 자식이지만 제가 배울 게 많아요. 그렇게 듬직하고 따뜻할 수가 없어요. 그 누구보다 아들과 아들의 선택을 믿습니다.” 준비 없는 조기유학은 아이 가슴에 불을 품게 하는 것 자식 셋을 모두 미국에서 졸업시킨 학부모로서 조기유학을 바라보는 김 원장의 시각은 매우 회의적이다. 무엇보다 아이가 어린 시절을 가족과 떨어져 보낸다는 것이 가장 우려되는 부분이다. “요즘 어머니들은 정말 용감한 것 같아요. 요즘에야 예전만큼 해외여행이나 유학이 힘든 시절이 아니지만 그래도 아이를 부모 곁에서 떠나보내게 되면 아이가 가슴에 불을 품고 사는 것과 다름없어요. 아이들에게 부모가 제일 필요한 때가 사춘기 시절이에요. 그때는 자식이 아무리 부모 애를 먹여도 부모와 자식은 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이와 함께할 수 있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부모 욕심으로 아이들의 환경과 미래를 설정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부부가 함께 있어도 열심히 노력해야 가정을 잘 지킬 수 있습니다. 저도 남편의 일 때문에 자주 떨어져 있어봤기에 잘 아는데 엄마가 아이들 데리고 조기유학을 떠나거나 아이 혼자 유학을 보내는 것은 정말 말리고 싶어요. 그렇게 해서 영어 잘하고 크게 성공해도 가족이 주는 안정과 중심을 잃어버리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저희가 한국에서 누리던 물질적인 풍요를 다 접고 아이의 뜻에 따라 미국으로 떠난 건 가족은 함께 있어야 한다는 부부의 신념 때문이었어요.” 조기유학의 성공률은 30% 정도라고 본다. 나머지 70%는 실패, 그것도 아이와 가족에게 아주 치명적인 상처를 남길 가능성이 크다는 게 경험자로서 김 원장의 조언이다. 낯선 환경과 인종차별에 시달려야 했던 아이들의 유학생활에서 자신과 남편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다. “아이들은 순수하기 때문에 유혹을 순진하게 받아들여요. 천장에서 기름이 떨어져도 그것 때문에 불이 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한 채 아름답게만 보는 게 아이들의 눈이에요. 그런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아이를 공부시키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정말 가정의 철학이 확고하게 뒷받침되어 있고 부모와 자식 간에 믿음이 있다면 걱정할 것 없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에요.” 한국에서 성적이 떨어지거나 해외에 가면 무언가 더 좋은 것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에 유학을 가는 건 더더욱 위험하다. 아이를 유학 보냈을 때 드는 경제적·심리적 비용과 부담, 아이가 느낄 외로움까지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치밀하게 계산한 후에 그 노력을 한국에서 활용할 방법을 찾는 것이 우선이다. 외국에 보내려면 3~5년은 철저히 준비하고 실질적인 준비 외에 아이가 자신을 관리할 수 있는 주관과 능력을 심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만약 어쩔 수 없이 아이를 혼자 보내야 하는 상황이라면 줄기차게 연락하고 편지를 쓰세요. 저희도 큰아들이 기숙사에 있을 때 주말마다 데리러 갔고 격려차 자주 얼굴을 보였어요. 아이가 학교에 다녀왔을 때 엄마가 금방 와서 편지를 써놓고 간 것처럼 해야 아이가 외로워하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어요. 타국에서 혼자 느끼는 외로움은 겪어보지 않으면 몰라요. 아이에게서 가족과 함께할 추억을 빼앗지 마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그녀라고 왜 자식들에게 서운한 점이 없겠는가. 훌륭하게 자란 세 아이들이 있지만 지난날의 희생과 아픔을 생각하면 작은 위로라도 받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때마다 아이들이 준 추억과 기억들, 그리고 아이들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소홀했던 시간들을 돌이켜 생각해본다. 나머지 삶은 반성하는 마음으로 자신과 남편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 하나님께 최선을 다해 살고 싶은 마음이다. 서울시 강남구 도곡동에서 압구정동으로 다시 자리를 옮긴 ‘김국애의 헤어포엠’은 지금 공사가 한창이다. 페인트 대신 산소가 풍부한 점토와 백토를 이용해 친환경적 공간으로 새 단장을 하며 그녀 역시 새롭게 시작하는 기분이란다. 얼마 전에는 직원들과 함께 고향 거금도에서 3일 동안 미용봉사도 하고 돌아왔다. 자폐아 가족들과 수련회에 참가하며 지금까지 자신이 받은 행운과 축복을 이제 다른 이들에게 돌려줘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혹자는 자식들을 위해 그녀의 삶을 희생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충실히, 그리고 최선을 다해 삶을 일군 아름다운 어머니다.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이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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