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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결집 속 이재명이 쏘아올린 ‘성장론’ 2030 무당층 잡을까
보수 결집 속 이재명이 쏘아올린 ‘성장론’ 2030 무당층 잡을까
2025. 01. 27 07:00정치
... 15%까지 줄어들었다. 하지만 젊은 유권자들은 결정을 내리지 못한 모습이다. 18~29세에서 자신을 무당층이라고 답한 비율은 30%에 달했다. 30대에서도 27%가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고 밝혔다. 40대(12%),...
‘성추문 입막음’ 유죄에…무당파 유권자 절반 “트럼프 사퇴해야”
‘성추문 입막음’ 유죄에…무당파 유권자 절반 “트럼프 사퇴해야”
2024. 06. 02 21:32국제
... 여론조사업체 모닝컨설트에 따르면 전날 미 성인 222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전체 무당층 응답자의 49%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선거운동을 끝내야 한다고 답했다. 공화당원의 15%, 트럼프...
트럼프재판유죄평결2024미국대선트럼프 2기
‘유죄 평결’ 트럼프 향해 무당파 유권자 절반 “사퇴해야”
‘유죄 평결’ 트럼프 향해 무당파 유권자 절반 “사퇴해야”
2024. 06. 02 13:28국제
... 여론조사업체 모닝컨설트에 따르면 전날 미국 성인 2220명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전체 무당층 응답자의 49%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선거 운동을 끝내야 한다고 답했다. 공화당원의 15%, 트럼프...
트럼프재판유죄평결2024미국대선
윤호중 “대통령 권한남용 제한·무당적화 원포인트 개헌 제안”
윤호중 “대통령 권한남용 제한·무당적화 원포인트 개헌 제안”
2024. 05. 13 12:24정치
...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3일 “22대 국회의 첫 임무로서 ‘대통령의 권한 남용 제한과 무당적화’를 위한 원포인트 개헌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윤호중 의원실 제공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3일...

스포츠경향(총 94 건 검색)

[종합] 무당 이건주, 이찬원 점괘 보니 “연애보단 일···상복 있어” (불후)
[종합] 무당 이건주, 이찬원 점괘 보니 “연애보단 일···상복 있어” (불후)
2025. 02. 01 22:06 연예
KBS ‘불후의 명곡’ 무속인 이건주가 이찬원의 점괘를 봤다. 1일 방송된 KBS ‘불후의 명곡’은 ‘2025 신년기획 3탄 : 제2의 인생 특집’으로 꾸며졌다. 게스트로는 이영하, 고명환, 이건주, 이켠, 김병현, 김정화가 출연했다. 이날 김준현은 최근 무속인이 된 이건주에게 “무속인은 본인의 인생을 점칠 수 없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이건주는 “재작년부터 우울증이 깊어져 극단적 생각까지 하게 됐다.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하나 싶을 정도로 위험했자.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우울증이 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귀에서 방울 소리가 들렸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꿈에 할아버지 5분 정도가 나오셔서 내 이마를 톡톡 치며 이제 일어나라고 했다. 이게 뭔가 싶었다. 그러다가 할머니 천도재를 지내다가 지금의 신아버지를 만나게 됐다”고 이야기했다. 또한 신을 받을 당시를 떠올리며 “신아버지가 보시다가 뛰라고 이야기하더라. 나는 신을 받아야 된다고 알게 됐다. 내 인생은 왜 이렇게 힘들까 싶었다. 조용히 지나가는 게 없구나 싶었다”고 전했다. KBS ‘불후의 명곡’ 하지만 방송 출연 이후 예약이 끊이질 않는다며 “쉬는 시간이 없다. 바쁘게 지내고 있는 건 사실. 방송도 하고 손님도 찾아주시니 시간이 없긴 한데, 이상하게 방송을 못 놓겠더라. 불러주시면 감사한 마음으로 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또한 지난해 ‘KBS 연예대상’을 받은 이찬원은 ‘불후의 명곡’이 2022년부터 3년 연속 최고의 프로그램상을 수상한 것을 언급하며 올해의 ‘불후의 명곡’의 운명을 물어봤다. 이에 이건주는 복비로 사진을 같이 찍어달라고 요구했고, 이찬원은 수락했다. 이건주는 “‘불후의 명곡’ 올해에도 상 받는다”며 “(프로그램의 흥해에는) 기한이 없다. MC들 역시 지금은 (해고될) 걱정 안 해도 된다”고 밝혀 웃음을 안겼다. KBS ‘불후의 명곡’ 이 밖에도 이찬원은 자신의 연애운을 물었다. 이에 이건주는 “연애보단 일이 우선인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2년 후 정도까지도 활발한 활동을 할 거다. 상복이 또 있다. 좋은 사람은 만나도 결혼운은 아직”이라고 전했다. 그런 가운데김병현은 자신을 “99년도에 메이저리그에 입단, 야구는 30년 했다. 지금은 요식업 대표와 방송인으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에 이찬원은 “당시 연봉 신기록이었다더라”라고 물었고, 김병현은 “아마추어 계약금으로는 아직까지 깨지지 않았다”고 답했다. 이때 자막을 통해 김병현의 누적연봉이 237억, 2천만 불이라고 공개됐다. 그러자 이찬원은 “메이저리그는 (일정 기간 소속되면) 연금이 나온다고 들었다. 매년 2억 정도 받나”라고 물었고, 김병현은 “(2억은 안되고) 1억 좀 더”라고 답해 놀라움을 안겼다.
순돌이 이건주, 무당은 다르네 “내 불이 꺼질 것” 예상 적중 (불후)
순돌이 이건주, 무당은 다르네 “내 불이 꺼질 것” 예상 적중 (불후)
2025. 02. 01 19:56 연예
KBS ‘불후의 명곡’ 아역 배우 출신 무당 이건주가 자신의 승패를 예측했다. 1일 방송된 KBS ‘불후의 명곡’은 ‘2025 신년기획 3탄 : 제2의 인생 특집’으로 꾸며졌다. 게스트로는 이영하, 고명환, 이건주, 이켠, 김병현, 김정화가 출연했다. 이날 김준현은 최근 무속인이 된 이건주에게 “무속인은 본인의 인생을 점칠 수 없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이건주는 “재작년부터 우울증이 깊어져 극단적 생각까지 하게 됐다.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하나 싶을 정도로 위험했자.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우울증이 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귀에서 방울 소리가 들렸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꿈에 할아버지 5분 정도가 나오셔서 내 이마를 톡톡 치며 이제 일어나라고 했다. 이게 뭔가 싶었다. 그러다가 할머니 천도재를 지내다가 지금의 신아버지를 만나게 됐다”고 이야기했다. KBS ‘불후의 명곡’ 또한 신을 받을 당시를 떠올리며 “신아버지가 보시다가 뛰라고 이야기하더라. 나는 신을 받아야 된다고 알게 됐다. 내 인생은 왜 이렇게 힘들까 싶었다. 조용히 지나가는 게 없구나 싶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방송 출연 이후 예약이 끊이질 않는다며 “쉬는 시간이 없다. 바쁘게 지내고 있는 건 사실. 방송도 하고 손님도 찾아주시니 시간이 없긴 한데, 이상하게 방송을 못 놓겠더라. 불러주시면 감사한 마음으로 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KBS ‘불후의 명곡’ 두 번째 순번이 걸린 이건주는 ‘세월이 가면’을 선곡했다. 선곡 이유에 대해선 “아역배우로 세상에 나왔는데 세월이 갈수록 잊히는 것도 두려웠다. 세월이 가면서 내가 새롭게 제2의 인생을 사는 것도 신기하다. 세월이 가도 저를 잊지 말아 달라는 의미로 선곡했다”고 설명했다. 무대가 끝난 후 이건주는 무당답게 “고명환 님이 무대를 잘했기 때문에 내 불이 꺼질 것 같다”고 예측했다. 예상대로 고명환이 1승을 하며, 이건주의 불이 꺼졌다.
[종합] ‘순돌이’ 이건주 “살고 싶어 무당 됐다…돈 목적 아냐” 해명 (라스)
[종합] ‘순돌이’ 이건주 “살고 싶어 무당 됐다…돈 목적 아냐” 해명 (라스)
2024. 12. 19 06:07 연예
MBC 예능 ‘라디오스타’ 아역 배우 출신 이건주가 신내림 받을 당시를 회상했다. 18일 방송된 MBC 예능 ‘라디오스타’(이하 ‘라스’)에는 여경래, 김형묵, 정성호 이건주가 출연했다. 이날 여경래는 ‘흑백 요리사’ 출연 계기에 대해 “사실 이미 현역에서 물러난 지 10년 정도 됐다. 그런데 출연하면 재밌을 것 같아서 나가게 됐다”고 밝혔다. 또 첫 대결에서 탈락한 것에 대해 “중식은 시각적인 부분도 굉장히 중요하다. 그런데 심사를 눈을 가리고 하더라. ‘이게 뭐지?’ 싶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조기 탈락에도 많은 호평을 받은 것에 대해선 “땡잡았다”고 말해 웃음을 안겼다. 지난 8월 신내림 받고 인생 2막을 연 이건주는 “신내림 받은 지 5개월 차다. 무속인의 길을 걷게 됐는데 너무 많이 좋아해 주셨다. 내년 11월까지 예약이 찼다”고 이야기했다. MBC 예능 ‘라디오스타’ 이어 “(신내림 사실을 밝힌 후) 문의가 몇백 개씩 들어왔다. 전화가 먹통이 됐다. 문자 알림 최대가 999개인데, 확인하고 새로 고쳐도 999 플러스가 된다”고 말해 놀라움을 자아냈다. 예약이 꽉 찬 와중에도 ‘라스’ 섭외에 하루 일정을 통으로 비웠다며 “‘라스’에 너무 나오고 싶었다. 손해가 막심하지만 여기서 기분 좋게 털고 가겠다”며 쿨한 모습을 보였다. 이어 그는 “요즘은 무속인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뀐 것 같다. 친근하게 바라봐주시고 저한테 ‘신내림을 받고 얼굴이 환해졌다’고 많이 말씀해주신다”며 웃었다. 그러면서 “관심을 받으려고, 돈을 벌려고 무당이 됐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많더라. 저는 살고 싶어서 무당이 됐다. 그런 이야기에 처음에는 속이 상했는데, 이제는 이해하게 됐다”면서 웃었다. 이건주는 작두도 탔다고 말하면서 “신내림을 받는 날에 작두를 탔다. 정말 날이 시퍼렇게 서 있어서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런데 막상 올라가니 눈물만 났다. 답답한 게 터진 거 같았다”고 회상했다.
순돌이→무당 된 이건주 “신내림 5개월 차···전화 먹통 돼” (라스)
순돌이→무당 된 이건주 “신내림 5개월 차···전화 먹통 돼” (라스)
2024. 12. 18 23:16 연예
MBC 예능 ‘라디오스타’ 아역 배우 출신 이건주가 무당이 된 근황을 공개했다. 18일 방송된 MBC 예능 ‘라디오스타’(이하 ‘라스’)에는 여경래, 김형묵, 정성호 이건주가 출연했다. 이날 이건주는 “8월에 신내림을 받아 5개월 차다. 무속인의 길을 걷게 됐는데 너무 많이 좋아해 주셨다. 내년 11월까지 예약이 찼다”고 이야기했다. MBC 예능 ‘라디오스타’ 이어 “(신내림 사실을 밝힌 후) 문의가 몇백 개씩 들어왔다. 전화가 먹통이 됐다. 문자 알림 최대가 999개인데, 확인하고 새로 고침을 해도 999 플러스가 된다”고 말해 놀라움을 자아냈다. 예약이 꽉 찬 와중에도 ‘라스’ 섭외에 하루 일정을 통으로 비웠다고. 이건주는 “‘라스’에 너무 나오고 싶었다. 손해가 막심하지만 여기서 기분 좋게 털고 가겠다”며 쿨한 모습을 보였다. 한편, 이건주는 1986년 방영된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에 문간방 세입자 가족의 장남 최순돌 역으로 출연해 얼굴을 알렸다. 이후 지난 8월 신내림을 받은 사실을 공개해 화제를 모았다.

주간경향(총 8 건 검색)

[주한 미 평화봉사단 이야기](3)“그쪽은 양반 대접, 우리는 상놈 취급···경쟁자는 무당(2023. 08. 25 10:54)
2023. 08. 25 10:54 사회
평화봉사단 본부와 한국 정부의 1순위 ‘온도차’ 주한 미 평화봉사단은 한국의 중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원어민 교사로 알려졌지만, 영어교사뿐만 아니라 보건 요원도 있었다. ‘평화봉사단=영어교사’라는 사람들의 인식 때문에 보건 요원을 맡았던 단원들은 종종 아쉬움을 나타냈다. 미 평화봉사단은 1966년부터 1981년까지 1200여명의 영어교사와 500여명의 보건 요원을 파견했다. 이들은 지방의 군청이나 면 소재지 보건소에서 결핵, 가족계획, 모자보건, 한센병 관리 등의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현미경을 이용해 환자의 객담 속에서 결핵균을 찾아내는 작업을 하고 있는 주한 미 평화봉사단의 보건 요원 / USC 한국학도서관 제공 1960년대 한국은 급속한 인구증가와 산업화로 보건 문제가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농촌에서는 의사가 존재하지 않는 무의촌 문제가 있었으며, 도시에서는 위생과 전염병이 골칫거리였다. 미 평화봉사단 본부에서는 평화봉사단을 파견하기에 앞서 한국에 대한 사전 조사를 했다. 그 결과 한국의 보건 문제가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보건 프로그램을 1순위로 두고, 영어 교육을 2순위로 뒀던 배경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의 생각은 달랐다. 영어 교육이 훨씬 시급하다고 판단해 더 많은 인원의 영어교사를 요청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은 ‘영어가 고픈(English-hungry)’ 나라였기 때문이다. 보건소에서 결핵 예방 접종 중인 평화봉사단의 모습 / USC 한국학도서관 제공 전문가와 일반인 사이에서 미 평화봉사단은 보건 프로그램(The Health Program)을 기획하면서 농촌에 방점을 둔 목표를 구상했다. 한국의 농촌지역에서 공중보건 여건과 전달체계를 개선하고 가족계획을 돕는 일을 구체적인 목표로 정했다. 보건에 관한 전문적이고 구체적인 계획이었다. 평화봉사단은 그러나 전문가나 고문을 파견하는 단체가 아니었다. 중간 수준(mid-level manpower)의 봉사단원을 파견할 뿐이었다. 당시 평화봉사단에 지원한 사람들은 대개 갓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이었다. 평균 나이 23세였으며, 인문사회 전공자가 가장 많았다. 그나마 보건 프로그램의 봉사단원들은 영어교사와 마찬가지로 3개월간 합숙훈련을 받았지만, 실습이 더 많이 배정되는 등 좀더 특별한 훈련을 받았다. 이를테면 결핵 피부 반응 검사, 객담 검사 후 현미경을 이용한 결핵균 진단, 결핵을 예방하는 BCG 접종, 위생 관리 방법 등을 사전 훈련에서 배웠다. 그렇다고 의학을 전공하지도 않은 보건 요원들이 3개월의 훈련으로 의료인이 될 수는 없었다. 농촌의 일반인들보다 좀더 나은 수준의 의료 지식을 갖추긴 했지만, 간단한 소독이나 드레싱 처치, 피하주사 등이 가능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너 몇 기야?” 주한 미 평화봉사단 소식지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한국에서 평화봉사단끼리 만났을 때 ‘What’s your number?’라며 다짜고짜 숫자(number)부터 물어보지 맙시다. 아주 나쁜 버릇입니다.” 여기서 숫자란 기수(K-1부터 K-51까지)를 말한다. 마치 해병대 출신들 사이에서 기수를 묻는 것처럼 주한 미 평화봉사단 사이에서도 “너 몇 기야?”라며 기수부터 묻는 관행이 생겨나고 있었다. 소식지에서는 기수로 선배, 후배의 위계를 나누지 말라고 당부했다. 기실 K-1부터 K-51까지 기수를 통해 주한 미 평화봉사단원들은 파견 시기와 분야를 짐작할 수 있었다. 심지어 대략의 나이까지 유추 가능했다. 따라서 기수는 봉사단원들에게 아주 중요한 정보였다. 상대가 영어교사인지, 보건 요원인지도 기수를 통해 파악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K-1부터 K-3까지는 영어교사였으며, K-4와 K-6는 보건 요원이었다. 그쪽은 양반, 우리는 상놈 영어교사와 보건 요원은 주한 미 평화봉사단이라는 같은 단체 하에 있었지만 훈련지, 훈련내용, 근무지 등이 모두 달랐기에 평소에 마주칠 기회가 별로 없었다. 영어교사는 주로 도시에 배치됐지만 보건 요원은 무의촌인 농촌 지역에 주로 배치됐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원들과 만나서 인터뷰를 해보면 영어교사와 보건 요원은 한국에서 전혀 다른 경험을 했다. 그래서인지 묘하게 다른 정서가 있다.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한국 전통문화에 매료된 나머지 한국에 정착해 40~50년을 살았던 단원들은 대개 보건 요원들이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차이가 나타났을까. 보건 요원들은 1970년대 초반 인기를 끈 TBC의 형식을 빌려 오일장에서 주민을 대상으로 보건 및 위생교육을 했다. / USC 한국학도서관 제공 강원도 강릉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주한 미 평화봉사단원 출신의 밥 그라프(Bob Graff)씨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는 1971년부터 1973년까지 전라남도 영광군에서 보건 요원으로 근무한 뒤 미국에 돌아가 직장생활을 하다가 한국의 삼일회계법인으로 이직했다. 그 이후 한국에 귀화했다. 은퇴 후 지금은 강릉에 거주하고 있다. 그라프씨는 미국에서 거주한 세월보다 한국에서 거주한 세월이 훨씬 길다. 법적으로도 한국인이다. 그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영어 선생들은 어쨌든 선생이니까 대접을 받았어요. 어딜 가나 선생님, 선생님이었지요. 그 당시 한국은 선생님을 존경하는 분위기였으니까 더 그랬죠. 그리고 선생님한테 다들 영어를 배우기를 원했죠. 그래서 학생들도, 교사들도 선생님이 영어를 사용하기를 원했지, 한국말을 하기를 원치 않았어요. 그런데 우리는 보건소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한국말을 써야 했습니다. 영광군 보건소에 오는 사람 중에 누가 제대로 영어를 할 수 있었겠습니까. 한국말 매뉴얼을 만들어 문진 때 쓰는 표현부터 시작해 아예 달달 외웠어요. 문진하고 나면 또 이들이 얘기하는 증상 등을 받아적어야 하니까. 비유하자면 영어 선생들이 양반 대접받을 때, 우리는 상놈 대접받았다고나 할까요. 아무튼 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주민들의 객담(가래)이나 받으러 다니는 일꾼이었던 거죠. 그쪽은 양반, 우리는 상놈.” 경쟁업체는 무당 그라프씨의 구술대로 보건 요원들은 훨씬 생활 밀착적이었다. 이들은 보건 서비스 인프라 및 전달 체계 개선을 위해 직접 가정 방문을 하는 사례가 많았다. 대중교통이 거의 없는 농어촌 지역에선 보건소 방문 자체가 워낙 큰일이었던 까닭이다. 보건 요원들은 완행버스를 타고 집마다 방문했다. 오일장이 열리면 시장에서 인형극, 퀴즈쇼 형식으로 보건교육을 하기도 했다. 평화봉사단 K-4 프로그램 북 표지. K-4 사전 훈련의 목적, 협력기관, 훈련개요, 훈련강사 및 훈련생들의 프로필과 사진이 수록돼 있다. / USC 한국학도서관 제공 보건 요원들은 구급낭에 약을 가지고 다니며 관리 환자에게 약을 배포했고, 정기적으로 환자를 확인했다. 이런 활동을 한 보건 요원들의 경쟁자는 바로 무당이었다. 1960~1970년대만 하더라도 농어촌 지역 주민들은 환자에게 진료 대신 굿을 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봉사단원들은 무당과 굿을 낯선 눈으로 바라보았다. 보건 요원이 아닌 영어교사 중에서도 이 굿을 눈여겨본 단원이 있었다. 1971~1972년에 한국에 거주한 로렐 켄달(Laurel Kendall)은 다른 봉사단원들과 함께 굿을 볼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 소식지 ‘Noodle’(주한 미 평화봉사단의 소식지 ‘여보세요’는 1972년 제호를 바꾸었다)의 편집자로서 그는 주한 미 평화봉사단 K-16 단원인 데니스 할핀(Dennis Halpin)이 쓴 ‘서울 샤머니즘’(1972년 7월 ‘Noodle’ 2권 2호 수록)이라는 원고를 검토했다. 훗날 켄달은 인류학자로서 한국의 무속을 연구해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무당, 여성, 신령들 - 1970년대 한국 여성의 의례적 실천>(원제: Shamans, Housewives, and Other Restless Spirits)이라는 책을 1987년 7월에 출판(University of Hawaii Press; 1st edition)하기도 했다. 보건 요원의 원조, K-4 주한 미 평화봉사단 보건 요원에 대한 설명은 첫 기수인 K-4를 빼놓고 얘기할 수가 없다. K-4의 훈련은 미국의 보건교육후생성(US Department of Health, Education, and Welfare) 및 공중보건서비스국의 ‘인디언 건강과(Division of Indian Helath)’와의 협업으로 이뤄졌다. 한국에 파견할 보건 요원들은 주로 결핵 관리 업무를 담당하게 될 터였다. 문제는 미국 대부분 지역에서 결핵이 이미 사라져가고 있었기에 실습 장소를 찾기가 어렵다는 점이었다. 당시의 인디언보호구역으로 눈을 돌렸다. 미국에선 이례적으로 열악한 생활환경과 대가족 생활로 인해 인디언들 중에 결핵환자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화봉사단은 미국 남서부의 나바호족 인디언보호구역을 실습지로 설정하고, 1967년 9월부터 12월까지 뉴멕시코주의 고스트 랜치(Ghost Ranch)라는 캠핑장을 합숙 훈련장소로 삼았다. ‘유령 농장’으로 번역 가능한 고스트 랜치는 장로교에서 운영하던 곳으로, 아름다운 자연풍경에서 영적 훈련을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고스트 랜치는 매우 덥고 건조한 사막에 있다. 자연경관이 수려해 밤이면 쏟아지는 별들을 볼 수 있다. 일출과 일몰을 보노라면 대자연의 위대함에 절로 숙연해진다. 2023년 촬영 / 서나래 제공 2023년에 촬영한 뉴멕시코주 고스트 랜치 숙소와 자연경관 / 서나래 제공 첫 보건 요원들의 훈련은 혹독했다. 교실에서 수업을 듣고 인근 학교에서 교생실습을 하는 영어교사들과 달리 이들은 인디언보호구역과 병원에서 어려운 실습을 했다. 그 과정에서 죽어가는 환자들을 목격하기도 하고 감염 위험에 노출되기도 했다. 처음에는 120명의 훈련생이 고스트 랜치에 모였으나 나중에 한국행 비행기를 탄 단원은 고작 67명이었다. 많은 단원이 탈락하거나 자진해서 그만두었다. 1967년 12월 K-4 단원들은 경상북도와 강원도 보건소에 배치됐다. 군 소재지 보건소에 이들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에 관한 세부계획까지 전달되지는 않았다. 영어가 통하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선생님 대접을 받았던 기존의 평화봉사단원들과 달리 이들은 ‘보건소 미국 아저씨’ 혹은 ‘보건소 미국 아가씨’로 불려야 했다. 의료 현장의 최전선을 지키며 봉사활동을 했다. 3개월마다 보건 요원들을 대상으로 의료 지식과 기술을 공부하는 콘퍼런스가 열렸다. 살아남은 K-4 단원들은 끈끈한 전우애로 뭉쳤다. 2023년 고스트 랜치에서는 한국에서 온갖 고생을 다한 K-4 단원들은 미국에 돌아간 이후에도 연락을 이어갔다. 평화봉사단 선발 5주년에는 고스트 랜치에서 재상봉 행사를 열기도 했다. 10주년에도, 15주년에도 고스트 랜치에서 재상봉 행사를 가졌다. 그때부터는 배우자와 아이들을 동반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은퇴하는 시점이 되자, 아예 본격적으로 매년 고스트 랜치에서 일주일간 재상봉 행사를 개최하기로 했다. 이제는 손자·손녀를 포함한 3대가 모이는 행사가 됐다. 2023년 8월 1일부터 7일까지 열린 K-4 재상봉 행사에 참여해 이들을 관찰하고 인터뷰했다. K-4 단원들은 1967년부터 지금까지 고스트 랜치의 바위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한 사람의 사진이 가족사진이 되고, 사진 속의 아이들이 자라나 어른이 되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K-4 단원들이 합심해 50여 년 넘게 이 모임을 지속하고 있다는 점, 가족을 동반해도 이 모임이 전혀 스트레스가 되지 않는다는 점에 필자는 큰 충격을 받았다. ‘K며느리’의 입장에서 시아버지 혹은 시어머니의 젊은 날 친목회에 남편과 함께 따라가 일주일이나 머문다는 건 도무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다. 이들은 50여 년간 축적된 모임의 사진과 자료 등을 모아 아카이브로 만드는 작업도 추진하고 있었다. 그 작업을 하는 분께 혹시 한국 어디서 근무하셨냐고 물었다. 돌아온 답은 이랬다. “그 당시에 사전 훈련은 아주 빡셌죠. 저는 한국에 가본 적이 없어요. 선발 과정에서 탈락(deselected)했거든요. 그래도 고스트 랜치가 좋고, 이 사람들이 좋아서 여태껏 이 모임에 나오고 있어요.” 이들이 매년 고스트 랜치에 모인다. 1967년 9월 고스트 랜치에서 사전 훈련이 어땠는지, 그해 12월 서울이 얼마나 추웠는지, 1968년 강원도와 경상북도의 보건소 상황이 어땠는지를 이야기한다. 손자·손녀를 모아놓고 한국 노래를 부른다. 이게 어디 상상이나 할 법한 일인가. 나도 잘 믿기지 않았다. 적어도 이번에 직접 가서 두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25% 무당층’은 누굴 선택할까?(2019. 10. 14 16:30)
2019. 10. 14 16:30 정치
ㆍ갤럽 4~10월 여론조사서 무당층이 4분의 1… 민주 37% 한국 24%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 42.2%. 과거의 어느 시점 이야기도 아니고, 다른 나라의 이야기도 아니다. 한길리서치가 10월 3일부터 6일까지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전화면접 조사한 결과다.(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인터넷 홈페이지 참조) 이 조사에서 ‘잘 모름/무응답’은 4.3%였다. 여기에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는 응답자를 더하면 모두 46.5%에 이른다. 절반에 가까운 응답자가 지지하는 정당이 없거나 잘 모르겠다, 응답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이다. 한길리서치 홍형식 소장은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고 할 경우 재질문을 하면 수치가 떨어지겠지만,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에서 제시하는 것처럼 재질문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첫 질문에서 나온 응답을 그대로 수치화했다는 것이다. 2018년 6월 지방선거 때 서울 홍은1동 제2투표소에서 유권자들이 투표를 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 조사에서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한 응답자는 28.4%, 자유한국당은 15.3%, 바른미래당 3.7%, 정의당 4.6%로 나타났다. ‘지지정당이 없다’는 세대별 구분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19∼29세에서 절반이 넘는 57.3%가 ‘지지정당이 없다’고 답변했고, ‘잘모름/무응답’은 8.4%였다. 합치면 65.7%에 이른다. 30대에서 ‘지지정당이 없다’고 답변한 응답자는 47.6%에 달했다. ‘잘모름/무응답’은 3.3%였다. 홍 소장은 “무당층을 보면 젊은 층이 많다”면서 “두 달 동안 이어진 ‘조국 정국’을 지켜보면서 젊은 층에서 정치에 대한 불신이 깊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4월 한길리서치에서 조사한 여론조사를 보면 ‘지지정당 없다’는 37.0%, ‘잘모름/무응답’은 7.9%였다. 무당층 비율 19∼29세에서 가장 높아 무당층이 많이 나온 최근의 다른 조사로는 추석 이후 SBS가 칸타코리아에 의뢰해 전화면접 조사한 결과가 있다. 정당지지율 조사에서 30.5%가 ‘지지정당이 없다’고 답했고, ‘모르겠다’는 8%에 이르렀다. 윤태곤 정치분석실장은 “‘반민비한(민주당에 반대하지만 한국당 지지는 아님)’ ‘비민반한(민주당 지지자는 아니나 한국당에 반대)’이 동시에 늘어나고 있다”면서 “최근에는 점차 증가폭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정치권에 대한 민심 이반이 이 같은 현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매주 여론조사를 해온 갤럽의 조사를 보면 무당층은 지난 4월부터 10월까지 6개월간 꾸준히 25% 안팎에 머물렀다. 전체 응답자의 4분의 1이 무당층인 셈이다. 지난 10월 첫 주 조사에서는 무당층이 25%였다. 오차범위 이내이기는 하지만 한국당의 지지율 24%보다 더 높은 수치였다. 민주당은 37%였고, 정의당 8%, 바른미래당 7%였다. 갤럽의 무당층 수치에는 ‘지지정당 없음’ ‘모름/응답거절’이 포함돼 있다. 무당층 25% 중 ‘지지정당 없음’은 19%였다. 무당층 비율은 19∼29세에서 가장 높았다. 19∼29세에서 무당층은 40%(지지정당 없음은 28%)였다. 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 소장은 “무당층은 20대가 가장 많고, 다음으로 30대, 50대, 60대 순”이라면서 “진보성향인 20대와 30대의 무당층은 선거 때가 되면 민주당 또는 정의당 투표로 회귀할 가능성이 있고, 50대와 60대의 무당층은 아직 한국당을 지지하지 않지만 선거에서는 보수성향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갤럽의 10월 조사에서는 무당층과 관련해 특이한 점이 눈에 띄어 정가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바른미래당)가 차기 지도자 조사에서 이낙연 총리(22%), 황교안 대표(17%)에 이어 7%로 3위를 차지했다. 무당층에게서는 차기 주자들 중 가장 높은 지지율인 14%를 차지했다. 윤태곤 의제와전략그룹 ‘더 모아’ 정치분석실장은 이에 대해 “안 전 대표는 제3세력의 상징성과 문재인 대통령의 경쟁자 이미지를 모두 갖고 있어 반사이익을 거두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엄경영 소장은 “조국 정국으로 정치불신이 심화하면서 기존 정치인이 아닌, 현실정치와 거리를 둔 안 전 대표가 부각된 것”이라면서 “안 전 대표의 지지가 20대와 50대에서 많이 나온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라고 말했다. 전화면접 조사와는 달리 ARS(자동응답시스템) 조사에서는 무당층이 적다. 리얼미터의 정례조사에는 무당층이 10%대 초반으로 나타난다. 자동응답 조사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조사에 참여하는 응답자 특성상 무당층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무당층에 관한 한 전화면접 조사가 더 정확하다고 보고 있다. 내년 총선과 관련해 주목해야 할 점은 무당층의 선택이다. 이들이 일단 선거에 참여하느냐를 두고 각각 엇갈린 평가가 나오고 있다. 때문에 무당층의 선거 참여 여부가 투표율 상승 또는 하락을 결정짓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무당층 선거 참여 여부가 투표율 결정 현장 민심을 체감하는 지역구 의원들로부터는 투표율이 상승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서울에 지역구를 두고 있는 한 민주당 의원 측은 “조국 정국 이전에는 지역구가 조용해 내년 총선에서 굳이 투표할 필요까지 있나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면서 “하지만 최근 정국이 바뀌면서 지역구에도 긴장감이 돌아 내년 총선에서 투표율이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의원 측은 “올해 연말에 ‘개혁 대 반개혁’의 프레임이 짜여지면서 무당층이 줄어들고 선거 분위기가 고조될 것”으로 예측했다. 영남에 지역구를 둔 한 한국당 의원 측 역시 “보수와 진보의 진영 대결이 격화되면서 투표율이 올라갈 것으로 본다”면서 “노년층은 원래 투표율이 높으므로 투표율 상승이라는 것은 결국 무당층이 많은 청년층에서 투표에 많이 참여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전제조건을 달기는 했지만, 대부분 무당층이 많아지면 일반적으로 투표율이 하락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홍 소장은 “무당층이 많은 20대와 30대 일부는 내년 총선에서 투표를 안 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엄경영 소장은 “정치불신 심화는 대안이 없는 한 투표율 저하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예견했다. 정치평론서 <정치의 귀환>의 저자인 유창오씨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무당층이 투표를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50%대의 투표율에 머무를 것”이라고 예상했다. 2016년 20대 총선의 투표율은 58.0%였다. 가장 최근인 2018년 지방선거 투표율은 60.2%였다. 유씨는 “투표율이 낮을수록 전화면접 조사보다 오히려 ARS 조사가 더 투표 결과에 근접하게 예측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투표율이 상승하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윤태곤 정치분석실장은 “투표율을 지금 이야기하는 건 너무 빠르다고 생각한다”며 “정당에 대한 심판 정서가 커지면 투표율은 상승하게 된다”고 밝혔다. 홍형식 소장은 “무당층이 투표장에 나오기 위해서는 정치권에서 가시적인 정치개혁과 참신한 인재 영입,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이뤄져야 한다”면서 “지금까지는 아직 그런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숫자로 보는 정치-무당층 23%]‘정당 지지도 2위’ 위력은(2017. 03. 28 17:30)
2017. 03. 28 17:30 정치
ㆍ지지정당 없는 응답자 중 50%가 대선 지지후보도 없어 최근 여론조사 정당지지도에서 1위는 단연 더불어민주당이다. 그렇다면 2위는 어디일까. 국민의당이나 자유한국당이 될 것이다. 하지만 우스갯소리로 말하자면 정답은 무당층이다. 무당층은 3월 4주 한국갤럽 조사(3월 21~23일 조사)에서는 23%로, 민주당 지지율 42%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수치가 됐다. 실제로 여론조사 결과를 그래프로 그려 놓으면 무당층 그래프에 눈길이 간다. 두 번째 높은 곳에 위치한다. 갤럽 조사의 설문을 보면 ‘귀하는 이 중 어느 정당을 지지하십니까’라고 물어 ‘없음’ ‘모름’일 경우 ‘그럼, 어느 정당에 조금이라도 더 호감이 가십니까’라고 재질문하도록 돼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없음’ ‘모름’이라고 고집한 이들이 무당층이다. 어떨 때는 무당층 비율이 1위 정당 지지율보다 더 높아, 정치권에서는 정당 이름을 ‘무당층 정당’이라고 만들면 1위를 차지할 수 있다는 농담까지 돌았다. 무당층은 국회 탄핵소추안이 논란이 되던 지난해 11월과 12월에 30%대에 달했다. 하지만 올해 들어 20%대 후반에서 점차 20%대 전반으로 내려왔다. 헌법재판소가 탄핵 판결을 내리고, 5월 9일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면서 정치의 불확실성이 어느 정도 사라지자 무당층이 점점 줄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다 탄핵 초반 어느 정당을 지지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다가, 탄핵국면이 정리되면서 서서히 특정 정당을 지지한 것으로 해석된다. 3월 4주 조사에서 무당층은 대구·경북(TK)에서 가장 많았다. 30%에 이른다. 원래는 새누리당을 지지했던 응답자들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이후 지지할 정당을 못 찾은 것으로 보인다. 탄핵에 책임이 있는 정당을 선택하기도 그렇고, 같은 당 대통령을 탄핵하고 탈당한 의원들의 정당을 선택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해서 야당을 선택하기도 그런 응답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부산·경남·울산(PK)에서도 무당층은 29%였다. 연령별로 보면 60대 이상에서도 30%의 무당층이 나타났다. TK·PK의 무당층과 비슷한 성향의 응답자인 것이다. 특이한 것은 성별이다. 남성(19%)보다 여성(27%)이 더 많았다. 무당층은 대선후보 지지에서도 ‘무후보층’을 자처했을까. 동일한 갤럽 조사에서 ‘지지하는 대선후보가 없거나 유보’라고 답한 이는 19%였다. 무당층 23%와 비교하면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19% 중 ‘지지 후보가 없다’고 대답한 이는 13%였고, ‘모름’ ‘거절’은 6%였다. 지지 정당이 없다고 한 233명(23%)의 응답자 중 끝까지 지지 후보가 없다고 한 응답자는 50%에 이르렀다. 나머지 응답자들은 안희정 후보 20%, 문재인 후보 10% 순으로 지지했다. 다른 후보들은 5% 이하였다. 그나마 무당층의 마음을 끌고 있는 후보가 안 후보라고 볼 수 있다. 예전에는 무당층의 위력이 대단했지만 이번 선거에서는 ‘문재인 대세론’ 때문인지 예전의 위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팽팽한 접전이 이뤄질 경우 이들은 선거에 나서지만, 그렇지 않다면 투표하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당층은 명색이 정당지지도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번 대선에서 이들이 어떤 정당의 후보를 선택할지 각 정당에서는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여론조사의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공정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숫자로 보는 정치
[영화 속 경제]-무당이 굿으로 벌어들이는 ‘사업소득’(2016. 06. 07 17:38)
2016. 06. 07 17:38 경제
마을 사람들이 괴질에 걸리고 이유 없이 죽어나간다. 악령과 무당이 나오고 굿과 주술이 판친다. 나홍진 감독의 은 한국판 엑소시스트(퇴마사) 영화다. 배경이 되는 마을의 이름은 ‘곡성’이지만 전남 곡성과는 다른 영화상 상상의 무대다. 줄거리는 이렇다. 마을에서 의문의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난다. 경찰은 집단 야생 버섯 중독으로 잠정 결론을 내리지만 어쩐지 이상하다. 민심은 흉흉해진다. 일본에서 온 낯선 외지인이 나타난 뒤 마을사람들이 죽는다는 소문이 돈다. 경찰인 종구(곽도원 분)는 외지인을 만나 사흘 안에 마을을 떠날 것을 요구하지만, 딸 효진도 괴질에 걸린다. 다급해진 종구는 무속인 일광(황정민 분)을 불러 딸을 낫게 해 달라며 굿을 요청한다. 일광은 종구에게 “이번 굿은 아주 세게 해야 하기 때문에 ‘살굿’을 하려면 1000만원이 필요하다”며 “돈을 구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종구는 멈칫하다 “구해야죠”라고 답한다. 하나뿐인 딸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데, 마다할 아비는 없다. ‘겁나게’ 용한 무당은 비싸다. ‘정성이 담긴’ 제수를 마련하는 데도 돈이 많이 든다. 경제학적으로 볼 때 영험한 굿판이 비싼 이유는 영험을 가진 무당이 적기 때문이다. 공급이 적으니 가격이 올라간다. 굿은 귀신을 물리치는 제의이지만 동시에 무당에게는 사업이다. 무당은 굿을 해서 밥벌이를 한다. 일광이 굿을 한 대가로 벌게 되는 1000만원은 세법상 어떤 소득이 될까? 국세청에 따르면 무당의 굿은 ‘사업소득’으로 분류된다. 사업소득이란 개인이 계속적으로 행하는 사업에서 생기는 소득을 말한다. 무당은 ‘굿’이라는 서비스 용역을 불특정 다수에게 반복적으로 제공하기 때문에 굿으로 벌어들인 소득은 사업소득이 된다. 만약 무당이 아닌 옆집 신들린 할머니가 급한 김에 굿을 대신 해주고 1000만원을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이럴 때는 ‘기타소득’이 된다. 기타소득이란 ‘일시적이면서도 불규칙적으로 발생하는 소득’을 의미한다. 세법상으로는 이자소득, 배당소득, 부동산소득, 사업소득, 근로소득, 퇴직소득, 양도소득 등에 포함되지 않는 소득을 통칭한다. 기타소득과 사업소득 구분이 중요한 것은 세율 때문이다. 통상 기타소득은 분리과세가 많고, 세율도 소득세에 비해 낮다. 기타소득과 사업소득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해당 소득이 일시적인지, 고용관계가 있는지, 사업적인 요소가 있는지 등을 따져야 한다. 대표적인 기타소득으로는 강연료, 복권·경마 당첨금, 상금, 현상금, 사례금, 인세 등이 있다. 특이한 것은 2018년부터 과세하기로 한 종교인소득도 기타소득으로 분류된다는 점이다. 종교인소득은 종교단체로부터 받는 소득이어서 근로소득의 성격이 짙다. 하지만 종교계는 “종교활동은 근로가 아니다”라고 주장해 끝내 이를 관철시켰다. 종교인들은 같은 소득을 얻는 노동자나 자영업자에 비해 세금을 적게 내게 돼 상당한 실리를 얻게 됐다는 얘기가 나온다. 강연료는 통상 기타소득으로 잡히지만 사업소득이 될 수도 있다. 강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여러 곳에서 강연을 한다면 기타소득이 아닌 사업소득이 된다. 만약 특정단체와 장기계약을 맺고 정기적인 강연을 한다면 이 역시 사업소득이다. 고용관계가 맺어졌기 때문이다. 은 유근기 곡성군수의 센스 100점짜리 대응으로 더 화제가 됐다. 그는 곡성의 이미지가 훼손될 우려가 커지자 “행여 ‘영화 곡성(哭聲)’을 보고 공포가 주는 즐거움을 느낀 분이라면 꼭 ‘우리 곡성(谷城)’에 오셔서 따뜻함이 주는 즐거움 한 자락이라도 담아갔으면 좋겠다”며 되레 영화의 성공을 기원했다. 많은 관광객들이 곡성을 찾는다면 사업소득이든 기타소득이든 주민들의 소득이 늘 것은 틀림없다.
영화 속 경제

레이디경향(총 2 건 검색)

‘국사 무당’ 심진송이 말하는 북한 김정일의 관한 예언
‘국사 무당’ 심진송이 말하는 북한 김정일의 관한 예언
2008. 10. 13 화제
지난 7월 말이었다. 무속인 심진송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요즘 빈번하게 북한 관련 꿈을 꾼단다. 아무래도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김일성 사망 예언을 시작으로 국내 정세의 굵직한 사건을 맞히고 ‘국사 무당’이라는 호칭이 붙은 무속인이다. ‘설마’ 하며 만남을 차일피일 미루다 일이 터지고 말았다. 지난 9월 9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건강 위독설 보도가 워싱턴 AP통신을 통해 흘러나온 것이다. 북한 김정일, 예전의 당찬 모습 되찾기는 힘들 듯 “왜 이제 왔어? 그렇게 오라고 할 때는 안 오더니.” 기자를 대면한 심진송(58)의 첫마디다. 김정일(66) 국방위원장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 것 같다는 전갈을 받은 지 두 달 만에 그를 만났다. 사실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때도 건강한 모습이 언론에 공개됐던지라 갑작스러운 그의 말을 쉽게 수긍하지 못했다. 기억에서 가물가물 잊고 지낼 즈음 사건이 일어났다. ‘김정일 건강 이상설’에 관한 외신과 국내 기사가 봇물처럼 터져나온 것.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린 것이 기억났다. “내가 인터뷰하자고 할 때 했어야지. 이제 와서 뭐라고 할 건데? 이제 이 인터뷰가 나와 봤자 기자랑 나랑 짜고 했다고 하지, 누가 믿겠어?” 심진송은 늦은 만남에 대한 섭섭함을 그대로 드러냈다. “나도 실향민이야. 신의주가 고향이라 그곳에 그리움을 가지고 있어서일까? 북한에 대한 꿈을 자주 꾸는 편이지. 김일성 사망 때도 꿈을 많이 꿨어. 북한의 논두렁, 밭두렁 풍경이 펼쳐지고 호랑이같이 큰 흑견이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서 우는 모습을 봤지.” 최근 그의 꿈속에도 북한의 풍경이 눈앞에 나타났다고 한다. 북한 주민들의 빈곤한 생활상이 그대로 그려졌다는 것. 김일성 사망 때와 똑같은 패턴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배고파서 울고 있더라구. 그리고 황구가 울고 있는 거야. 지난번 꿈처럼 큰 덩치는 아니었지만 말이야. 그때 꿈에서 깨고 딱 생각이 나는 거야. 아무래도 김정일이 자기 아버지하고 같은 병으로 쓰러져서 못 일어나겠구나!” 그의 말을 빌리면 현재 당뇨와 혈압 문제로 쓰러진 김정일 위원장은 쉽게 일어나기 힘든 상황이라고 한다. “그 사람은 결국 예전 모습을 찾기는 힘들어. 씩씩하고 당찬 모습으로 돌아가기는 무리란 말이야. 북한 정세가 혼란스럽더라도 그 쪽은 사상 무장이 돼 있으니 버틸 거야. 하루아침에 붕괴되지는 않겠지. 본격적으로 문제가 발생하는 건 다음 승계가 결정되는 내년부터 일거야.” 북한의 권력 후계 문제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촉각을 곤두세우는 부분이다. 중심을 잃은 북한의 앞날은 누가 권력을 잡느냐에 따라 극단적인 결과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차남 김정철(27) 쪽으로 가닥을 잡는 듯했다. 그리고 그는 민감한 시기인 만큼 신중한 외교 정치가 필요하다고 누누이 언급했다. “우리나라는 유감이지만 올해보다 내년이 더 안 좋을 거야. 소의 해거든. 우리(무속인) 세계에서는 ‘이변이 많은 해’라고 하지. 내년에 아마 미국 대통령도 결정되지?” 그리고 그는 북한이 우리와 같은 말, 같은 풍습을 가진 우리 민족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족이 어려우면 도와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 그는 김일성 사망 10주기에 큰 이벤트를 계획했었다. 북한 백두산 계곡 밑에서 6·25전쟁 당시 죽은 군인과 민간인들을 위한 영혼제를 지내려 했다. 그러나 주위의 만류로 무산되고 말았다. “요즘 좌파, 좌파 하는데 나도 그 쪽으로 몰릴 수 있다고 언론계 지인들이 극구 말렸어. 간첩으로 오인받을 수 있다는 거야. 그걸 허락받으려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보낼 장문의 편지도 준비했었는데 말이야.” 그는 틈만 나면 중국을 통해 신의주 다리 중간까지 가서 고향 땅을 바라보곤 한다. 가슴이 답답할 때는 자유로를 타고 임진각 통일동산을 찾는다. 그런 그가 아직도 금강산을 가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의아했다. 여기에 놀라운 사실이 숨겨져 있었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만류 때문이었다. 황 전 비서관으로부터 ‘절대 이북에 가지 말라’는 신신당부의 말을 들었다는 것. 그가 노동당 비서로 있을 당시 김정일 위원장이 그의 에세이집 「신이 선택한 여자」와 「또 하나의 세상」을 읽었다는 것이다. “황장엽씨 말로는 김정일 책상에 내 에세이 두 권이 놓여 있었다는 거야. 그러면서 ‘이 애미나이 꼭 한 번 만나야겠다’라고 했다네? 그 말을 듣는 순간 섬뜩한 거야.”하늘하고 땅을 섞어서 맷돌질로 갈아야 북한의 향후 사정도 중요하다. 하지만 요즘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건 경제 침제와 암울한 전망들이다. 심진송에게 우리나라 경제가 언제 좋아지는지, 언제 서민들의 입에서 “이제 좀 살 만하다” 소리가 나올 수 있는지를 물었다. 정답을 알려준다면 영혼이라도 팔고 싶을 정도로 우리 상황이 절실하지 않은가. “한 가지만 이야기할까? 나, 올해 재수굿(집안에 재수가 형통하기를 비는 굿) 한 번도 안 했어. 나라 운이 기본이 돼야 그것도 하는 거야. 전부 다 죽어가는데 굿한다고 돈이 벌리겠어? 안 벌려.” 그는 요즘 사람들 만나기가 두렵다. 입만 벌리면 “죽겠다. 언제 괜찮아지냐?”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신에게 매달리는 사람들에게 해줄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안쓰러운 마음에 부적을 써주는 것이 최선이다. 공짜 부적은 효력이 없으니 단돈 만원, 5천원, 아니 천원이라도 받고 써준다. “나도 매일 기도하고 답을 기다려. 할아버지(신)께 ‘몇 월부터 괜찮아지겠냐?’고 묻지만 답을 안 주셔. 그저 그러셔. ‘너희가 보릿고개를 모르냐? 허리띠를 더 졸라매’ 그러면 내가 미치는 거야. 사람들은 이런 대답을 원하는 게 아니잖아. 지금도 충분히 허우적대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주 죽으라는 얘기지.” 그는 우리나라 경제가 앞으로 몇 년간 힘들 거라 전망했다. 요즘에는 시도 때도 없이 전화벨이 울린다. 새벽 3시에도 전화를 걸어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자신에게 뭘 원하는지 잘 알고 있다. “내일은 오늘보다 좋아질 것이다”라는 희망의 말 한마디다. “오늘 아침에 아는 은행 직원이 찾아왔어. ○○은행이 합병되면 직원을 다 자를 것 같대. 자신은 어찌 될 것 같나 묻는데 딱 보니까 잘리겠더라구. ‘너 마누라 뭐 하지?’ 하고 돌려 말하는데 벌써 얼굴이 새파래져. 눈치를 챈 거지.” 말 한마디로 그들이 돌아가서 얼마나 번민에 휩싸일까. 그 생각만 하면 그도 우울증에 빠진다. 요즘은 신당에서 울면서 기도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우리 사회가 중산층이 없어졌잖아. 나라가 힘들어질수록 죽는 건 우리 서민들뿐이야. 빈부가 막 섞여야 돼. 그래야 되는데…. 아이고 답답해.” 그는 손으로 가슴을 탕탕 치며 통탄했다. “나도 마음이 약해지나봐. 웬만하면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주려고 해. ‘조금만 고생하면 된다. 마흔세 살이면 빌딩이 보여’ 이렇게. ” 그는 삶이 팍팍해지고 민심이 흉흉해도 어려움을 넘으면 더 참된 삶을 만들 수 있는 것 아니겠냐고 반문했다. “사람이 길이 있는 곳을 가는 건 의미가 없어. 없는 길을 발견해서 가야 보람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절망하지 말고 힘을 내보자구.” 그는 높으신 분(?)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전했다. 무속인으로서 아니,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말이다. “자고로 없는 살림에 가정을 잘 꾸려나가야 ‘그 집 며느리 살림 잘한다’고 칭찬을 했어. 다 갖춰져 있다면 누군들 못할까. 그러니까 지금 힘든 시기가 진짜 실력자에게는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는 거지.” 그를 단지 무속인일 뿐이라고 치부한다면 그렇게 봐도 좋다. 하지만 그는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카운슬러이며, 나라를 위해 매일 물을 떠놓고 기도를 하는 국민의 한 사람이다. 그의 이야기가 맞는지 틀리는지는 시간이 지나보면 자연스레 알게 될 일이다.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이성훈, 심진송 제공
무당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사이에서’ 이창재 감독
무당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사이에서’ 이창재 감독
2007. 01. 15 연예
무당의 삶을 담은 영화 ‘사이에서’가 역대 다큐멘터리 최고 흥행 기록을 갈아 치웠다. 영화감독 이창재는 이 독특한 영화를 찍으면서 어떤 일을 겪었을까? 엉뚱하면서도 진지한 그의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본다.“저는 인터뷰 날짜가 어제인 줄 알았어요” 무당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사이에서’. 지난해 개봉한 이 영화는 한 달여 기간 동안 약 2만8천 명의 관객을 끌어 모으며 역대 다큐멘터리 최고 흥행 기록을 갈아 치웠다. 흥행 기록은 제쳐두고라도 이 독특한 내용의 영화를 만든 감독의 뇌 속이 궁금했다. 영화 ‘사이에서’를 만든 이창재 감독(40·중앙대학교 영상예술학과 교수)과 인터뷰를 하기 위해 전화통화를 몇 번 하는 동안 받은 느낌은 ‘이 사람 인터뷰하기 까다롭겠다’였다.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는 직함이 주는 무게감과, 영화 ‘사이에서’가 풍기는 알 수 없는 영적 기운에 눌려 잔뜩 ‘질문거리’를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정작 중앙대학교 교수실을 찾았을 때 그는 자리에 없었다. 전화를 걸자 “죄송해요. 저는 인터뷰 날짜가 어제인 줄 알았어요”란다. 보통 사람 같으면 전날 “왜 안 오냐”고 전화라도 할 법한데 안 오는 줄 알았단다. 특이하다. 약 30분 정도 흐른 뒤 그가 나타났다. 가죽 재킷에 짙은 눈썹. 누가 감독 아니랄까 봐 고집스럽게 생겼다. 그런데 말투는 다르다. 경상도 사나이 특유의 억양은 남아 있지만 부드럽다. 거기다 원래 ‘쟁이’들이 한번 말이 트이면 멈추질 않는다. 느릿한 말투지만 쉴 새 없이 나오는 이야기보따리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백과사전을 소설책으로 둔갑시킨 감독 이창재 감독은 처음부터 영화 ‘사이에서’를 휴먼 다큐멘터리로 제작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애초에 NGC(내셔널지오그래픽) 방송용으로 시작한 기획은 대무(大巫) 이해경 선생을 만나면서 방향을 급선회했다. “처음에는 문화인류학적인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서 해외에 팔려고 했어요. 그러다 이해경 선생님을 만나고 나서 제가 중심을 잃었죠. 이해경 선생님의 황해도 굿은 좀 전투적이에요. 황해도가 갖는 지리적·역사적 아픔이 고스란히 묻어 있죠. 무당의 신기도 세요. 그런데 사람 속으로 들어가 보니 이야기가 넘쳐나더라고요.” 이 경상도 사나이는 제작사와 상의 없이도 백과사전을 소설책으로 둔갑시켰다. 그에게 “신과 인간 사이에 놓인 사람들을 만나면서 어떤 경험을 했냐?”고 묻자 “원래 귀신을 안 믿어서 그런지 특별한 일은 없었다”고 한다. 하긴 겉으로 보이는 인상이나 인터뷰 시작부터 담담하게 말하는 투로 봐서는 정말 귀신도 안 무서워할 것 같기는 하다. 그에게 “정말 기이한 일이 한 번도 없었냐?”고 다시 묻자 촬영하면서 겪은 얘기를 들려줬다. “산 속에서 새벽 2시에 신 내림을 받는 장면을 찍을 때였는데, 그날 갑자기 조명이 방전돼 손전등이랑 촛불 몇 개에 의지해 촬영했어요. 비록 촬영이지만 촛불 몇 개만 켜놓고 깜깜한 새벽에 신내림을 받는 사람과 그 길을 인도해주는 사람을 촬영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날은 저도 소름이 돋더라고요.” 그날 스태프 중 한 명은 무섭다며 차 안에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있었고, 나머지 스태프와 카메라 감독은 반대편 산 위에서 그 광경을 찍었다. 소형 카메라를 들고 그들의 모습을 담는 이창재 감독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고.“붙이는 테이프 아니었어요?” ‘수인들의 희망지대’ ‘미국전쟁략사’ ‘EDIT’ 등으로 세계 각종 영화제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이창재 감독은 사실 법학도다. 대학 시절부터 고시에는 흥미가 없었던 이 감독은 고민 끝에 ‘글쟁이’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에는 소설과 시를 써서 신춘문예에 도전했지만 결과는 낙방. 이후 그가 도전한 직업은 기자다. 졸업 후 그는 국내 한 중앙 일간지에 입사했다. 그리고 6개월 수습 기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사직했다. 그 다음에 발을 붙인 곳이 케이블 방송사다. “서른이 될 때까지 잘하는 게 없었어요. 점수에 맞춰서 학과를 선택하다 보니 고시에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걸 좋아해서 신춘문예에 도전해보기도 했지만 떨어졌죠. 기자 생활은 워낙 잠깐 동안이라 얘깃거리가 못 되고요. 케이블 방송사에 입사해서도 테이프 가지고 오라는 선배의 말에 붙이는 테이프를 내밀 정도로 어리숙했죠(웃음). 그때 일은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네요.” 그는 케이블 방송사에 신입 시절 한동안 아무도 직접 맡아서 가르치겠다는 선배를 만나지 못할 정도로 문제 사원이었다. 때문에 동기들이 모두 자신의 프로그램을 맡아 입봉할 때 여전히 보조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면서도 남들이 하지 않는 다큐멘터리에 고집스럽게 매달렸다. “아무도 저를 맡으려고 하지 않아서 제가 좋아하는 다큐멘터리 두 개를 화면이 바뀌는 시간, 구성 등 처음부터 끝까지 빠짐없이 외웠어요. 그리고 실전에 투입되니 막히는 게 없어지더라고요.” 어제의 케이블 방송사 문제 사원에서 이제는 국가대표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우뚝 섰다. 영화 ‘사이에서’를 성공적으로 끝낸 그에게 다음 영화에 대해 묻자 “상업영화를 찍을 것”이란다. 조금만 얘기해달라고 했더니 별 말이 없다. 일부러 말을 안 하는 게 아니라 원래 게으른 탓에 머릿속에 큰 그림은 그렸는데 아직 말할 게 없단다. 올해 마흔인 그는 늦게 만난 인연 덕에 곧 첫아이를 만나게 된다. 인터뷰를 끝내고 사진을 찍는 그에게 “아들이 좋아요, 딸이 좋아요?”라고 철없는 질문을 던지자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으니 빨리 세상에 나와 얼굴 좀 봤으면 좋겠다”고 한다. 2007년 그의 분신이 고운 모습으로 빨리 세상에 나오길 바란다. ■글 / 김성욱 기자 ■사진 / 안진형(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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