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20 건 검색)
- [박상훈의 민주주의 시간]정치의 정신
- 2025. 03. 16 20:48오피니언
- ... 할 운명이다. 막스 베버라면 그저 우애나 도모하고 살 사람들이 왜 정치하냐고 따져 물었을 것이다. 친문도 비명도 양념이 되었다. 민주당의 시대정신은 이재명이다. 박상훈 정치학자 ...
- 박상훈의 민주주의 시간
- [박상훈의 민주주의 시간]진보 없는 민주주의
- 2025. 02. 16 21:24오피니언
- ... 민주주의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만들어갈 것이다. 다른 목소리를 억압하려 들지 마라. 의견의 다양성 속에서 승리할 때만 민주주의는 전진한다. 그런 민주주의가 진보다. 박상훈 정치학자 ...
- 박상훈의 민주주의 시간
- [박상훈의 민주주의 시간]병든 민주주의
- 2025. 01. 19 20:40오피니언
- ... 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그런 정치가가 없다는 것이 상황을 더 어렵게 한다. 전보다 더 적대하는 민주주의, 갈수록 더 비호감인 대선이 또 다가오고 있다. 박상훈 정치학자 ...
- 박상훈의 민주주의 시간박상훈
- [신원철의 내 인생의 책]②민주주의의 재발견 - 박상훈
- 2019. 09. 02 22:29문화
- ㆍ민주주의를 위해 민주주의는 언제 위협 받을까? 대의 민주주의에서는 정당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는데, 정당이 상대 정당과 타협과 협의를 이루지 못하고 적으로 상정해 무너뜨릴 궁리만 할 때, 바로 그...
- 김동현의 내 인생의 책
스포츠경향(총 34 건 검색)
- 박성웅X박상훈, ‘맹감독의 악플러’로 뭉친다
- 2025. 02. 25 08:31 연예
- 배우 박성웅과 박상훈. 배우 박성웅과 박상훈이 MBC 새 드라마 ‘맹감독의 악플러’로 뭉친다. MBC 새 드라마 ‘맹감독의 악플러’ 측이 25일 박성웅과 박상훈의 캐스팅을 확정 짓고 본격적인 출발을 알렸다. ‘맹감독의 악플러’는 성적 부진으로 퇴출 위기에 놓인 프로농구 감독 맹공이 팀 성적을 위해 자신의 악플러 화진과 손잡으며 벌어지는 투 맨 게임 코미디를 그린 작품이다. 드라마 ‘미치겠다, 너땜에!’를 통해 인물의 감정이 돋보이는 섬세한 연출력과 영화 같은 영상미로 호평 받으며 단막극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뜨거운 화제성을 불러 일으킨 바 있는 현솔잎 감독이 연출을 맡아 다시 한번 웰메이드 드라마의 탄생을 예고한다. 무엇보다 ‘맹감독의 악플러’는 지난해 MBC 드라마 극본 공모전에서 “두 주인공의 흥미로운 관계성이 좋은 대사로 잘 구현된 작품”이라는 극찬을 받으며 최우수상에 선정, 이미 대본의 완성도를 인정받은 만큼 작품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감이 나날이 치솟고 있다. 여기에 믿고 보는 배우 박성웅과 차세대 기대주 박상훈이 출연을 확정, 두 사람이 선사할 신선한 케미가 뜨거운 관심을 모으고 있다. 먼저 박성웅은 3년 연속 플레이오프 탈락 위기에 처한 프로농구팀 ‘빅판다스’의 감독 맹공 역을 맡았다. 젊은 시절에는 이름 그대로 코트 위에서 맹공을 퍼붓던 스타 선수였으나 현재는 프로농구 대표 ‘젊은 꼰대’ 감독으로 더 유명한 인물. 대체 불가한 존재감과 한계 없는 연기 스펙트럼으로 시청자들의 무한한 신뢰를 받고 있는 박성웅이 입체적인 캐릭터 해석과 몰입감 넘치는 열연으로 극을 이끌어 나갈 예정이라 벌써부터 궁금증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박상훈은 ‘맹꽁멸종단’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맹공 전담 악플러 고화진으로 분한다. 경기를 초단위로 분석할 줄 아는 ‘농잘알’ 고3 학생으로 맹공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심을 품고 악플러가 된 캐릭터다. 영화 ‘보통의 가족’, 드라마 ‘원경’ 등에서 훈훈한 비주얼과 안정적인 열연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던 박상훈이 이번 작품에서는 화진 역에 완벽하게 동화, 그동안 탄탄하게 쌓아온 연기 내공을 유감없이 발휘할 예정이라 기대를 모은다. ‘맹감독의 악플러’ 제작진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싱크로율을 자랑하는 캐스팅이다. 박성웅와 박상훈이 선보일 신선한 케미와 유쾌한 티키타카를 기대하셔도 좋을 것”이라고 강조하며 “다채로운 캐릭터, 배우들의 열연, 그리고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중무장한 매력적인 작품이 탄생할 것이다. 첫 방송까지 많은 기대 부탁드린다”라고 전했다. ‘맹감독의 악플러’는 상반기 시청자들과 만날 예정이다.
- ‘원경’ 박상훈 “충녕대군 역, 큰 영광” 종영소감
- 2025. 02. 17 02:43 연예
- tvN, TVING 배우 박상훈이 드라마 ‘원경’ 종영 소감을 전했다. 지난 11일 종영한 tvN X TVING 오리지널 드라마 ‘원경’(극본 이영미,연출 김상호)은 파란만장한 서사를 배우들 탄탄한 연기로 매회 화제성과 높은 시청률로 사극 팬들 호평을 받으며 종영했다. 드라마 속 ‘충녕대군’ 역을 맡아 확실한 존재감을 각인시킨 박상훈이 감사한 종영 소감을 전했다. 그는 “군왕에 대한 내적 야망을 드러낼수 없는 충녕대군 역을 믿고 맡겨주신 감독님과 작가님 그리고 모든 스태프분들 덕분에 연기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tvN, TVING 특히 “현장에서 많은 조언 아끼지 않으신 차주영, 이현욱 선배님과 함께 호흡하고 촬영할 수 있어 매우 행복하고 감사한 시간이었다”고 진심 어린 소회를 전했다. 이어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대왕으로 평가받는 ‘세종’역으로 참여 하게되어 큰 영광이었다. 어제 보다 오늘이 나은 배우가 되도록 항상 노력하고 매 작품 성숙한 연기자가 되겠다”고 덧붙였다. 박상훈은 원경의 총애를 받을 만큼 명석한 두뇌와 군왕의 자질을 갖춘 충녕대군의 내적 야망을 섬세하고 깊이 있는 연기로 구축했다. 그는 캐릭터가 가진 미묘한 감정선을 폭넓게 드러내 시청자들의 극에 대한 몰입도를 높이며 호연을 펼쳤다. 박상훈은 ‘원경‘을 통해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지닌 배우임을 보여준 만큼 앞으로의 행보가 더 기대된다.
- 박상훈, ‘원경’ 첫 등장
- 2025. 02. 05 15:58 연예
- 배우 박상훈. 배우 박상훈이 tvN X 티빙 오리지널 드라마 ‘원경’에 첫 등장했다 . 소속사 는 박상훈이 월화드라마 ‘원경’에 첫 등장하며 이목을 집중시켰다고 전했다. 현재 방송중인 ‘원경’은 남편 태종 이방원(이현욱)과 함께 권력을 쟁취한 원경왕후(차주영)를 중심으로,왕과 왕비,남편과 아내,그 사이에 감춰진 뜨거운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로, 높은 시청률과 화제성을 기록하며 많은 관심을 받고있다. 박상훈은 4일(10부)충녕대군으로 첫 등장하며,시청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원경의 총애를 받을 만큼 명석한 두뇌와 지혜를 갖추었음에도 내적 야망을 숨긴 인물이다. 앞으로 전개될 박상훈의 섬세한 연기가 더해 극의 몰입도를 높이며 극의 재미를 더할 예정이다. 박상훈은 스크린과 안방극장을 넘나들며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다. 넷플릭스 ‘퀸메이커’(강현우 역)’블랙의신부’(이준호 역),KBS2 ‘완벽한가족’(최상호 역) ‘두뇌공조’(김호영 역)으로 분하여 애잔한 연기와섬뜩한 연기로 강한 인상을 남겼으며, 영화 ‘보통의가족’에서 제이든 역 에 출연하며 폭풍성장한 인상깊은 모습을 보여줬다. 한편 박상훈이 출연하는 ‘원경’은 오는 10일 11일 오후 8시 50분에 tvN 에서 방영되며,매주 월요일 오후 2시 티빙에서 2회분이 선공개된다.
- 아이디병원 박상훈∙변일환 원장, ISAPS서 세계 최초로 가슴 유형별 수술 기법 발표
- 2023. 05. 10 11:07 생활
- 박상훈 아이디병원장과 변일환 아이디병원 원장이 국제미용성형수술협회(ISAPS)에서 세계 최초로 한국인의 체형을 고려한 오목가슴 및 새가슴 가슴골 수술법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고 10일 밝혔다. ISAPS는 세계 최고의 국제 미용 성형 전문 단체로 미용성형 분야의 방향과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아이디병원 측은 “세계 최초로 가슴 유형을 고려한 수술 기법을 제시한 것에 큰 의미가 있다”면서 “이번 논문 집필을 통해 아이디병원 가슴센터의 아이덴티티 ‘체(VOLUME), 선(BALANCE), 율(BOUNCE), 감(TOUCH)’을 다시금 정립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발표한 논문의 제목은 ‘Basic Strategies of Augmentation Mammoplasty in Patients with Tendencies of Pectus Excavatum and Carinatum’이다. 해당 논문은 사람의 체형을 오목가슴과 새가슴으로 분류해 각각의 유형에 적합한 보형물과 수술 기법에 대해 다뤘다. 더불어 수술 기법을 적용, 16개월 이후의 관찰 결과를 담았다. 해당 수술법은 가슴 수술 부작용을 0.76% 이하로 크게 낮춘 것이 특징이다. 132명의 가슴 수술 환자를 16개월간 관찰한 결과, 구형구축과 혈종 등의 합병증이 0.76%로 아주 낮게 나타났다. 더불어 합유증(symmastia)과 가슴골이 생기지 않는(lack of cleavage) 합병증까지도 발생하지 않았다. 아이디병원 관계자는 “아이디병원은 KRI 한국기록원으로부터 가슴성형을 포함한 7개 분야에서 4년 간 국내 최다 성형수술 집행 의료기관으로 인증 받은 이력이 있다”며 “이번 논문 발표로 학회의 인정을 받으며 가슴 성형 분야에서 아이디병원의 지위를 공고히 하게 됐다”고 말했다. 병원 측은 “원장님들은 많은 환자들이 본인의 체형 및 흉곽으로 인해 가슴 수술 결과에 대해 고민하는 것을 몸소 지켜봐 왔다”며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연구를 진행, 논물을 집필하게 됐다”고 언급했다. 이어 “고객들이 이번 연구로 인해 더욱 확고해진 아이디병원의 체선율감을 알아봐 주신다”며 “많은 환자분들이 본인의 체형을 문의하면서 아이디병원을 찾아와 주신다”고 덧붙였다.
주간경향(총 2 건 검색)
- [아주 특별한 인터뷰]정치 코멘테이터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2008. 05. 14)
- 2008. 05. 14 정치
- “한국사회는 보수편향, 균형 맞추려 진보에 관심” ‘위기’나 ‘불황’은 오랫동안 출판계를 수식해온 단어다. 그만큼 먹고살기 힘든 업종이 출판이다. 특히 사회과학서적을 전문으로 발행한다는 것은 돈 버는 일을 일정 정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재미’와 ‘속도감’을 추구하며 영상매체에 익숙한 요즘 젊은 세대는 정치학·경제학·지리학·역사학 등 인간 집단과 개인의 사회적 삶을 연구하는 어렵고 딱딱한 사회과학서를 멀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사회 흐름에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이 길을 걸으며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는 사람이 있다. 박상훈(44) 후마니타스 대표다. 정치학 박사로, 최근 부쩍 각종 언론매체에 코멘테이터(해설자)로 자주 등장하는 그는 어떤 사람일까. 도서출판 ‘후마니타스’(Humanitas)는 서울 종로구 신문로에 위치한 서울시교육청을 오른쪽에 두고 도보로 10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요즘 웬만한 출판사는 파주 출판단지에 둥지를 트는 추세지만 이제 갓 6살이 된 젊은 출판사인 후마니타스는 그들과 동떨어져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런데 왜 후마니타스일까. 이름이 낯설고 어렵다. 인사를 주고받은 후 박상훈 대표가 건네준 명함을 받고서야 그 뜻을 알았다. 명함 뒤편에 이름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적혀 있었던 것이다. 후마니타스는 ‘인문학’을 뜻하는 라틴어로, 원래는 신에 관한 학문에 대비되는 개념. 도서출판 후마니타스는 개인적·사회적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읽고 공감할 가치가 있는 좋은 책을 만든다는 것이다. “후마니타스는 영어로 휴머니티(Humanity: 인류애, 인간애)와 가까워요. 그런데 일반적으로 인문학이라는 의미로 쓰이죠. 출판사 이름을 라틴어로 하는 데 이견이 많았지만 한글을 안 쓰고 라틴어를 사용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사회과학 언어가 이념에 많이 오염해 있거든요. 그래서 다른 사람의 선입관이나 기존의 해석에 영향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 아예 생소한 단어로 의미를 담고 싶었어요.” 박상훈이라는 이름 석자가 일반인에 익숙해진 것은 출판사 대표로서보다는 정치학자로서다. 최근 1, 2년 새 일간지 등 언론매체의 정치면 코멘테이터로, 또 진보학회나 한국노동연구소 등이 주최한 각종 토론회 발제자로 그의 이름이 자주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는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공은 한국의 정당체계로, 대학원 시절 그의 지도교수는 진보학계의 대부로 꼽히는 최장집 교수다. 그가 언론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5년 한 인터넷 매체에 기고한 장문의 글이 계기가 됐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지역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대연정을 하자고 제안했는데, 박 대표가 대통령의 주장이 인과관계가 바뀌었다고 기고문을 통해 지적하면서 논쟁이 불붙은 것이다. 즉 대통령은 지역주의 때문에 한국 정치가 문제라고 설명하면서, 지역주의를 해결하기 위해 대연정을 하자고 했지만 박 대표는 거꾸로 지역주의는 정치가 잘못됐기 때문에 만들어진 결과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대연정을 하겠다는 발상은 누구도 동의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자멸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게 박 대표의 발언이었다. 지난해 10월에는 최장집(가운데) 고려대 교수가 두 제자인 박 대표(왼쪽), 그리고 박찬표 목포대 교수(오른쪽)와 공동으로 ‘어떤 민주주의인가’를 펴냈다. 최장집 교수 밑에서 공부한데다 그동안 글을 통한 발언이나 행적 등을 종합할 때 그는 쉽게 진보학자로 분류된다. 하지만 그는 “잘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의외다. “과거와 달리 분명한 이념이나 신념을 갖기가 어렵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한국 사회가 워낙 보수편향적이고 큰 힘을 가진 사람에게만 유리하게 작용하니까, 그것을 비판하고 균형을 맞추기 위해 진보 진영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게 정확할 거예요. 후마니타스에서 진보적인 책이 많이 나온 것도 같은 맥락이에요. 출판계만 해도 진보의 목소리를 담는 출판사가 점차 줄고 있으니까요. 굳이 정치적 정체성을 말하라고 하면 중도좌파라고 하는 게 적합할 거예요. 이념적이고 신념적인 좌파보다는 오른쪽에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다면 총선을 얼마 앞두지 않고 민주노동당을 탈당한 심상정·노회찬 의원이 주축이 돼 진보신당을 창당하자, 그가 지지선언을 한 것은 무엇인가(진보신당이 창당한 직후인 3월 19일 한국의 진보를 대표하는 지식인 103명은 진보신당에 대해 ‘진보신당의 새로운 시작이 우리 사회의 희망’이라고 선언했다. 그 속에 그의 이름도 있었다). 이와 관련해 그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으로 분화되는 흐름에 대해 비판적 요소가 많았지만, 현실정치에 대한 차선책으로 이름을 올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새로운 종류의 진보적 정당에 대한 사회적 기대가 크다고 생각해요. 민주주의라는 게 대의제니까 사회 각 계층의 욕구와 열정을 정치적으로 대표하는 다양한 정당체제가 마련돼 있어야 하거든요. 하지만 지금까지 노동자, 농민, 빈민, 여성 등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가 정치적으로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어요. 지금 이대로라면 우리나라는 미국이나 일본처럼 각 계층의 욕구가 정당으로 표현되지 못하는 보수적인 민주주의로 안착할 가능성이 커요. 이런 사회는 대부분 범죄율이 높고 불평등하고 빈부 격차가 심하고 투표율이 낮고 사회가 불안정한 특성을 가지고 있어요. 반면 유럽의 경우는 사회 여러 계층의 욕구를 비교적 각 정당이 넓게 대표하기 때문에 문화적으로 풍요롭고 지나친 소비사회가 되지도 않죠.” 그는 “진보신당에 대해서도 불만이 있다”고 말했다. 민주노동당과 마찬가지로 엘리트 정당이라는 것이다. 빈곤층 등 소외 계층의 실질적 고통이 뭐고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뭔지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이념이나 가치의 실현에 목적을 두는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 같은 그의 발언은 심상정·노회찬 진보신당 공동대표를 겨냥한 것은 아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심상정·노회찬 대표가 좋은 정치인이라고 생각한다”면서 “문제는 당내 학생운동권 출신 활동가들”이라고 말했다. 박상훈 대표는 1964년 충남 청양군 청양면 읍내리에서 태어났다. 차령산맥 끝 두메산골인 이곳에서 그의 부모는 방앗간을 했으며 5형제를 내리 낳았다. 박 대표는 그중 막내다. 교육열이 높은 어머니의 뜻에 따라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4학년 때 형들이 먼저 올라가 자리를 잡은 서울로 전학했지만, 그로부터 1년 6개월 만에 다시 귀향했다.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진 것이다. 당시 대학을 다니던 첫째형은 군대를 가야 했고, 유난히 총명하고 어른스러웠던 둘째형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자퇴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집안 일을 돕겠다는 뜻에서였다. “어머니가 그렇게 되시고 나서 경제적으로 많이 곤궁했어요. 제가 대전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자취도 하고 하숙도 하다가 3학년이 돼 독서실에서 1년을 지냈는데 학력고사를 보고 집에 갔더니, 아버지가 ‘내일 학교 가야 하는데 왜 내려왔느냐’고 하셨어요. 생활에 쫓기다 보니 제가 학력고사를 본 것도 모르신 거예요. 저 역시 아버지나 형제들이 신경 쓰는 게 싫어 이야기를 안 했고요. 아버지는 ‘그때 그 일이 평생 마음에 걸렸다’고 하세요.” 후마니타스에서 나온 단행본들. 1983년 서울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그는 1학년 때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공부를 열심히 했다. 하지만 어느 날 한 선배와 이야기를 나눈 후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그가 대학생활을 한 시기는 전두환 정권이 집권하던 5공화국 때였던 것이다. 1학년 때 언더 서클에 가입한 그는 2학년 때부터는 수업도 거의 듣지 않고 활동에 매달렸다. 단과대 학생회에서 홍보부장 역할도 수행했다. 주로 대자보를 쓰거나 인쇄소에 오가면서 유인물을 만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학생운동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한 것은 아니”라면서 “당시 늘 불안하고 두려웠다”고 회고했다. 그런 그에게 깊은 인상을 준 인물이 1984년 서울대 학생운동 서클인 민주화추진위원회에서 활동하다 이듬해 8월 중순 수배돼 같은 해 10월 충북 영동군 경부선 철로변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사회복지학과 우종원씨다(2004년 4월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우씨가 1985년 경찰조사 과정에서 갖가지 잔혹한 방법으로 고문을 당했다고 밝혔다). “1학년 때 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에 잡혀 유치장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훈방된 적이 있어요. 그때 엄습한 공포감은 대단했죠. 한동안 언더서클에도 나가지 않았어요. 그때 저보다 2년 선배인 우종원 선배가 해준 말이 큰 위로가 됐어요. 평소 우 선배는 말이 없는 분이었어요. 늘 미소만 짓고 있었죠. 그런데 제가 서클에도 나가지 않고 움츠려 있자, 어느 날 캠퍼스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다른 말씀 없이 그러셨어요. ‘무섭재. 내도 그랬다. 지금 내도 두렵다’라고요. 그 선배의 얼굴이 돌아가신 후에도 제 가슴속에 아주 오래도록 남았어요.” 대학 4학년이 돼 진로에 대해 고민하면서 그는 딜레마에 빠졌다. 취직을 할지, 자신의 존재를 버리고 노동현장에 갈지, 혹은 시위를 주동해서 감옥에 갔다가 민중적인 삶을 살 것인지를 두고 갈등했다. 그러나 어느 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는 대학원 진학을 선택했다. 사회과학을 공부하면 자신이 불안정한 이유를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다. 그는 학부생활 중 우연히 신문을 읽다가 깊은 인상을 준 글을 쓴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최장집 교수를 찾아갔다. 그리고 1987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최 교수 밑에서 수학했다. 그는 대학원 시절을 활동적으로 보냈다. 대외적인 심포지엄이나 집회에 참여하는 일이 많았고 한국정치연구회도 꾸렸다. 한국정치연구회는 1987년 8월 학술운동을 통한 진보적 정치학의 발전이라는 목표를 내걸고 발족된 정치학 연구단체다. 이수인, 최장집, 김세균 교수 등 진보적 정치학자가 후원했다. 박사과정을 밟을 때는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의 연구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몇 년 전 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한 독자가 편지를 보내왔다. 자신처럼 가난하고 힘 없고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책을 내달라는 내용이다. 사진은 그 편지를 들여다보고 있는 박 대표. 박사학위를 마칠 즈음 그는 학교에 남지 않기로 결심했다. 교수를 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교수로 취직하기 위해 모든 인맥을 동원하며 자신을 포장해 파는 과정이 싫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는 “논문을 마치고 교수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공부하며 살겠다고 결정한 것은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내린 유일한 결정이었다”고 말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의 삶이 주체적이기보다는 시대와 타인에 의해 다소 끌려다닌 느낌이었다고 한다. 그 대신 2000년부터 2005년까지 최장집 교수가 소장으로 있는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로 5년간 재직했다. 그런 가운데 한국정치연구회에서 만난 정민용 부사장, 안중철 편집장과 의기투합해 2002년 후마니타스를 설립했다. 생계 문제를 해결하면서 공부도 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그동안은 대학 2학년 때 후배 소개로 만나 6년 연애 끝에 대학원 시절 결혼한 아내가 집안의 경제를 도맡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후마니타스라는 이름을 달고 출간된 책은 50종 정도. 최장집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어떤 민주주의인가’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비롯해 발레리 줄레조의 ‘아파트 공화국’, 로버트 달의 ‘미국헌법과 민주주의’ 등 주목할 만한 책이 이곳에서 나왔다. 그러나 이처럼 나름대로 굵직굵직한 사회과학서를 펴내고 있다고 해도 수익은 겨우겨우 직원들 월급을 주는 수준이다. 얼마 전엔 1억 원을 차입하기도 했다. 박 대표의 바람은 올해 후마니타스의 이름으로 36종의 신간을 내는 것과 함께, 처음 출판사를 세울 때부터 꿈꿨던 새로운 방식의 공부 모임을 만드는 것이다. “정치를 공부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가르칠 수도 있는 공부 모임을 많이 만들려고 계획했었어요. 출판사 한쪽 공간을 그런 모임을 위해 마련해야겠다는 꿈도 가지고 있었지요. 같이 공부하면서 그 결과물로 책도 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직 출발조차 못하고 있어 마음이 조급하네요.” 직접 정치에 나설 생각은 없는 것일까? 이에 대해 그는 “성격이 내성적이어서 국회의원 등 선출직은 맞지 않지만, 위정자가 좋은 정책을 펼 수 있도록 이론적인 뒷받침을 하는 참모 역할은 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가장 마음 아픈 책은 송두율 교수의 ‘미완의 귀향과 그 이후’ 후마니타스에서 나온 책 중 지금까지 가장 많이 팔린 책은 최장집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다. 사회과학서로는 대단한 성과라고 할 수 있는 3만5000부가 팔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위 시간으로 치면 지난 1월 출간된 ‘법률사무소 김앤장’이 가장 빠르게 판매되고 있다. 발매 10일 만에 6000부가 팔리고 지금까지 1만3000부가 팔렸다. 박 대표는 “출간하는 책마다 나름의 사연이 있는데, 그중 재독 사회학자인 송두율 교수의 ‘미완의 귀향과 그 이후’가 가장 마음을 아프게 했다”고 말했다. “그 책은 제가 독일에서 우연히 송두율 교수를 만난 후 만든 책이에요. 송 교수가 그동안 발표한 글을 실으면서 맨 뒤에 제가 송 교수와 인터뷰한 내용도 더한 책이죠. 그런데 책이 전혀 주목받지 못했어요. 팔린 것도 3000부가 안 돼요. 전 언론을 통해 송 교수를 접하면서 어떤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지만 직접 그를 독일에서 만나보면서 인간적인 매력을 느꼈어요. 무엇보다 그 사건을 다시 들여다보면서 아주 중요한 사건이라는 판단이 섰지요. 전 ‘미완의 귀향과 그 이후’라는 책을 계기로 송 교수가 다시 한국 사회에 자유롭게 들어오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었어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한국이 몹시 획일적이고 폐쇄된 사회라는 사실을 절감했지요.”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지식인들조차 송 교수의 책을 평가하기를 꺼려했다고 한다. 그들은 송 교수가 의제화되는 것 자체를 원치 않았다는 것. 박 대표는 “송 교수도 국가보안법 체제의 희생자인데, 국가보안법 체제라는 것이 단순히 법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인들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 부지불식간에 갖게 된 획일화한 이데올로기와 연결돼 있음을 보며 실망도 하고 이념에 대해서 다시금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면서 “이로 인해 더 외로워졌을 송 교수께 몹시 미안한 마음”이라고 토로했다. ●약력 1964 충남 청양 출생 1983. 2 (대전) 대성고등학교 졸업 1987. 2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1990. 2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대학원 석사학위 취득 1990. 8 ~ 1991. 2 군복무(석사 장교) 1995. 2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대학원 박사학위 취득 1998. 4 ~ 1999. 3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연구원 2000. 2 고려대학교 정치학 박사학위 취득 2000. 4 ~ 2005. 8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 재직 2002. 2 ~ 2007. 7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주간 2007. 8 ~ 후마니타스 대표
- 아주 특별한 인터뷰
- [CEO열전]인터브랜드코리아 박상훈 대표(2008. 03. 27)
- 2008. 03. 27 경제
- “국가 브랜드 키우면 전 국민이 혜택” 자유로운 사고와 직원 역할 최대 보장… 브랜드 컨설팅으로 기업 가치 끌어올려 박상훈 대표와의 인터뷰는 수차례 조정된 끝에 진행됐다. 국내 최고의 브랜드컨설팅 기업의 대표로, 몸도 마음도 바쁘기 때문이다. 그는 30여 개의 정기모임에 꼬박꼬박 참여할 정도로 사람 욕심, 아이디어 욕심이 많은 CEO다. 성능이나 품질이 비슷하고 디자인도 괜찮아 보이는 물건이 가득할 때 소비자들이 상품을 고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바로 브랜드다. 제품이나 기업의 이름, 즉 브랜드가 잘 알려진 제품이라면 가격이 조금 비싼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세계적으로 브랜드 가치가 가장 큰 기업은 코카콜라. 지난해 ‘글로벌 100대 브랜드’ 순위에서 1위를 차지한 코카콜라의 브랜드 가치는 자그마치 653억 달러로, 총 자산가치의 거의 절반에 이른다. 국내 기업으로는 삼성전자가 브랜드 가치 169억 달러로 소니를 따돌리고 21위를 차지했고, 현대자동차가 45억 달러로 72위, LG가 31억 달러로 97위에 올랐다. ‘글로벌 100대 브랜드’는 세계적인 브랜드 컨설팅 그룹 인터브랜드가 매년 7월 발표해왔다. “브랜드 가치는 기업자산의 36%” 1974년 영국에서 출발해 미국 본사와 세계 각지에 지사를 거느리고 있는 인터브랜드는 1988년 브랜드 자산 가치를 측정할 수 있는 독자적인 방법론을 개발한 뒤 지금까지 3000개 이상의 세계적 브랜드를 평가해왔다. 매년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직원들이 추천한 1300개 기업의 리스트에서 100개 업체를 선정해 시장점유율, 연령과 국적을 초월한 호소력, 신뢰도, 성장성 네 가지 항목으로 점수를 매기는 것이다. 박상훈 인터브랜드코리아 대표는 “‘제품을 파는 게 아니라 브랜드를 판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요즘 브랜드에 대한 주목도가 높다”며 “기존의 네이밍, 디자인 등을 넘어 경험 가능한 모든 것, 즉 상품이나 문화공연까지 브랜드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설명했다. 그가 말하는 좋은 브랜드란 ‘소비자의 가슴과 지갑을 모두 여는 것’. 그 때문에 브랜드를 관리하는 데 기업과 소비자의 신뢰관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브랜드는 고객과 기업이 만드는 메이크업”이라는 박 대표는 “이를 위해선 일관성 있고 콘셉트와 디자인이 확실하며, 상호간 신뢰를 만들 수 있는 관계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한 번의 위대한 창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소비자들의 기대와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지속적인 투자와 노력이 수반될 때 그 가치가 유지되고 향상된다는 것. 그는 “브랜드 가치는 기업 자산의 36%를 차지할 정도로 중요하다”고 말했다. 2002년부터 인터브랜드코리아를 지휘하고 있는 박상훈 대표는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경영학 석사(MBA) 출신으로 동서식품, 베네통, 지방시코리아 ·피리스버리코리아 등에서 마케팅 능력을 인정받았다. 특히 브랜드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음식료·패션 ·화장품 등 다양한 분야를 경험한데다 브랜드 이론에도 밝아 브랜드 컨설팅에 제격이란 평가다. 그는 “첫 직장에서 마케팅 회계 경영기획 분야에서 일했고, MBA 이후 베네통 등 외국계 회사의 마케팅을 담당했다”며 “직원이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회사, 그래서 인재로 성장할 수 있는 회사가 글로벌기업”이라고 밝혔다. 국내의 경우 브랜드 관련 업체로는 디자인 분야 40여 개, 네이밍 분야에 30여 개가 있다. 그러나 브랜드 컨설팅까지 가능한 회사는 인터브랜드코리아가 거의 유일하다. 인터브랜드코리아는 지난해 신한·LG카드 통합 브랜드 선정 작업에서 그 능력을 나타냈다. 신한금융지주로 성공적으로 전환했지만 지난해까지만 해도 브랜드 이미지에선 국내 금융회사쯤으로 여겨졌던 신한은행. 파이낸셜그룹, 원토탈금융그룹 등 글로벌한 이미지를 원했던 신한은행에 인터브랜드가 설정한 콘셉트는 ‘당신의 더 넓은 금융 세상’. 우선 기존에 신한은행이 유지했던 초록색을 과감히 버리고 글로벌 이미지, 하늘과 바다를 상징하는 파란색으로 기업 색깔을 잡았다. 또한 그룹 CI를 지구를 연상시키는 공 모양으로 바꾸고 S자를 집어넣었다. 시장의 반응은 뜨거웠다. “이를 위해 만 개 이상의 로고 디자인을 제작했다”는 그는 “브랜드 컨설팅은 단순히 클라이언트의 주문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고민해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그동안 수행한 메이저 프로젝트는 삼성물산 ‘래미안’ BI와 네임 개발, 한국관광공사 ‘코리아 스파클링’ 비주얼. 옥션 브랜드와 CI, 롯데칠성 ‘2% 부족할 때’ 패키지 디자인, 기업은행 ‘IBK’ 브랜드와 CI, 롯데칠성 ‘오늘의 차’ 브랜드 네이밍과 패키지 디자인, 진로 ‘참이슬’ 패키지 디자인 등이다. “도시 중심적 브랜드가 상당히 중요” 브랜드 네이밍 등 브랜드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 인터브랜드 코리아는 직원들의 자유로운 사고와 역할을 최대한 보장한다. 가장 중요한 것이 오픈 마인드. 특히 생각과 아이디어를 서로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사내뿐 아니라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해 세계 곳곳의 사무실과 대화하고 기획한다는 것이다. 박 대표도 열린 사고가 필요한 직장의 CEO로서 게을리하지 않는다. 주로 사람을 만나 대화하면서 신선한 아이디어를 얻는데, 현재 정기적인 모임만 30여 개. 하루에 2, 3곳에 참여하는 것은 기본이다. 그는 강남구상공회가 주관하는 청담압구정 패션페스티벌의 넥타이패션쇼에 서기도 했다. 박상훈 대표는 “기업 브랜드를 키우면 기업만 혜택을 받지만 국가 브랜드를 키우면 전 국민이 이익을 얻는다”고 강조했다. “외국인들을 만나보면 한국에 대해 너무 모른다. 한국만의 특별한 것도 없고 중국이나 일본과 다른 점도 없다고 한다. 이는 모두 국가 브랜드가 없기 때문에 나오는 현상”이라며 그 대안으로 ‘브릿지 국가’와 ‘세계 2위 메트로폴리스’ 등을 들었다. 브릿지 국가는 중국과 일본이라는 두 개의 거대 경제권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연결하는 다리가 된다는 의미로, 중국과 일본 양대 슈퍼 파워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그는 또 “전 세계 메트로폴리스 가운데 도쿄·오사카가 1위이고 서울·인천이 2위”라며 “코리아는 작게 들리지만 ‘세계 2위 메트로폴리스가 있는 도시’는 외국인들이 관심을 끌 만한 요소가 되고 이를 통한 브랜딩 작업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중계무역도시로 성장한 싱가포르가 1990년대 들어 중계 기능이 줄어들자 ‘Uniquely Singapore(독특한 매력이 있는 싱가포르)’라는 구호로 관광객을 끌어들였고, 호주 또한 정부 차원에서 천연 관광지의 신비로운 매력을 적극적으로 브랜드화해 외국인 투자를 이끌어냈다는 설명이다. 그는 “‘프랑스 가고 싶은 것이 아니라 파리로 가고 싶다’는 식으로 도시 중심적인 브랜드가 상당히 중요하다”며 “하지만 무언가 빨리 장만해 사람들을 끌어들이기보다 체계적인 플랫폼을 세우고 비전을 만들어 단계별로 진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문화 브랜드는 내용이지 겉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손꼽는 국내 최대의 인물 브랜드는 ‘MB(이명박 대통령)’다. 현재 가장 주목받는 사람일뿐더러 많은 일이 그의 결정에 따라 진행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 활동 속에 국가 브랜드의 지속 가능성이 달려 있다는 설명이다. 약력 1961년 광주 출생/ 1985년 연세대 경제학과 졸업/ 1991년 조지워싱턴대학 MBA/ 1985년 동서식품 입사/ 1992년 베네통 마케팅 과장/ 1994년 IDK 마케팅&세일즈 부장/ 1998년 지방시코리아 지사장/ 2000년 필스버리코리아 대표/ 2002년~ 인터브랜드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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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대통령 이명박 당선인 선거포스터 사진 찍은 박상훈
- 2008. 02. 15 화제
- 지난 선거는 이미지 전쟁이었다. 누가 좀 더 마음에 와닿는 이미지로 유권자들의 감성을 붙잡는지가 승부의 관건이 됐다. 미디어의 발달로 영상 광고와 UCC까지 등장했지만 그래도 후보의 이미지를 압축해 단번에 보여주는 것으로는 포스터 사진만 한 것이 없다. 당선자의 후보 사진은 누가, 어떤 고민을 거쳐 만들어낸 것일까. 박상훈 사진작가가 들려주는 사진 촬영 뒷이야기, 그리고 그의 사진 이야기. 당선됐다는 즐거운 생각이 만든 편안한 표정 12명이나 되는 후보자가 나오는 바람에 여느 때보다 치열했던 17대 대통령 선거는 후보자들의 포스터가 진열된 벽보 전쟁으로도 유명했다. 이명박 당선인의 포스터 사진을 촬영한 박상훈(55) 사진작가는 환하게 웃는 이 당선인의 사진을 찍고 나서 지난 대선의 승리를 예감했다고 한다. ‘웃는 표정’이 아니라 진짜 ‘웃고 있는’ 이 당선인의 얼굴을 프레임 속에 잡아냈기 때문이다. 보통 수백 장의 사진을 찍어놓고 서로 비교해가면서 가장 나은 것을 고르는데, 이 사진을 보는 순간 ‘더 볼 것도 없이 딱 이거다’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솔직히 이 당선인이 사진 촬영하기에 만만한 스타일이 아니라 촬영 전에 걱정이 있었죠. 좀 딱딱해 보이기도 하고 포토제닉한 느낌도 없고(웃음). 제가 고민했던 건 과장되지 않은 범위 내에서 ‘어떻게 하면 부드럽고 친근감 있게 표현할까’였어요. 최종 결정된 이 사진은 억지로 만들지 않은 자연스러운 느낌이라 마음에 들었죠.” 카메라 앞에서 긴장하게 마련인 모델에게서 연출이 아닌 자연스러움을 이끌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바쁜 선거 일정에 치인 탓인지 스튜디오 문을 열고 들어선 이 당선인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을 가지시라고 한 가지 주문을 했죠. 지금 후보 사진을 찍는 게 아니라 당선 축하 기념사진을 찍는다고 생각하라고 했어요. ‘지금 제가 청와대에서 대통령 사진을 찍고 있는 겁니다’라고 했더니 표정이 부드러워지시던데요.” 이 ‘즐거운 상상’은 이 후보의 얼굴에 편안함뿐 아니라 자신감을 새겨 넣으며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뒀다. 후보 느낌이 역력한 다른 후보 포스터들에 비해 이 당선인은 실제로 대통령이 된 것 같은 당당함이 배어나와 유권자들에게 더욱 신뢰감을 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이 당선인은 처음에 “내가 눈이 작아서 웃으면 눈이 안 보이는데…”라며 신경을 많이 썼는데, 촬영한 사진을 본 후에는 웃는 모습이 시원스럽게 나왔다고 만족해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자기 얼굴의 단점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사진이 나오면 그것만 주의 깊게 봐요. 하지만 매력적인 웃음을 보면 거기에 끌리는 거지 누가 눈만 들여다보나요. 저는 눈이 이 당선인보다 더 작은데도 이렇게 활짝 잘 웃잖아요(웃음). 콤플렉스를 의식하지 않게 하는 것도 사진가가 할 일이죠.” 그렇다면 사진에 대한 확신만큼 이명박 후보의 당선도 예감했을까. 박 작가는 이 당선인에게서 당당한 힘을 느꼈다고 했다. ‘내가 사진을 찍어줬으니까 잘됐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진 촬영을 하며 “아직 멀었느냐”고 보채는 편인데 이 당선인은 힘든 기색 하나 없이 적극적으로 촬영에 임하는 모습에 모델로서의 점수도 높게 주었단다. 이번 대선은 워낙 출마 후보가 많았던 탓에 각 후보 진영마다 포스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굉장한 노력을 쏟았다. 심지어는 사진을 찍고도 시간을 쪼개 두 번이나 재촬영을 감행한 후보가 있을 정도. 다른 후보들 사진이 신경 쓰일 법도 하지만 박상훈 작가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전·현직 대통령과의 특별한 인연 요즘 그를 두고 항간에서는 ‘대통령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002년 대선 때 ‘부르튼 입술’의 노무현 대통령 포스터 사진을 찍은 이도 그이기 때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기념사진 또한 그의 작품이니 대통령과 인연이 예사롭지 않다. 이명박 당선인도 지난 대선에서 노 대통령 포스터를 찍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았다고 한다. “노 대통령과는 포스터 촬영 전에 두어 번 만났죠. 「노무현 죽이기」라는 책이 있는데 그 표지를 제가 촬영했거든요.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희호 여사께서 오슬로 기념관에 걸 사진을 새로 찍으려고 작가를 물색하다 제 포트폴리오를 보고 낙점해서 만나게 됐구요. 평화상을 수상하러 여사님이 함께 오슬로에 가셨다가 역대 수상자들 사진을 보니까 다들 멋있는데 남편 사진만 어색하고 이상하니까 속상하셨던 거죠.” 3대에 걸쳐 대통령들과 인연을 만들어오면서 기억에 남는 일도 많다. 촬영에 비교적 의욕적이었던 노 대통령, 이 당선인과 달리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사진 찍는 것을 어려워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전날 있었던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와의 영수회담 결과가 나빴던 탓에 얼굴이 더욱 굳어 있었다. 기분을 풀어보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특별한 인연을 찾아냈다. 김 전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한 프로그램에서 남대문 상인이 되어 ‘골라골라’를 외치며 좌판을 벌였던 적이 있는데 그 프로그램 담당 PD가 박 작가 동생의 부인이었던 것. 지금도 가끔 이야기할 정도로 그 경험이 재밌었다는 김 전 대통령의 얼굴이 화사해진 건 당연했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김 전 대통령의 연륜과 무게감을 담은 사진이 탄생할 수 있었다. 노르웨이 기념관에 걸려 있는 그 사진은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영원히 보게 될 소중한 작품이다. 노무현 대통령 포스터 사진은 당시로선 새로운 시도였다. 이마에 깊게 파인 주름, 부르튼 입술이 적나라한 노 대통령의 모습은 ‘포샵질’ 한번 거치지 않고 담벼락에 그대로 나붙었다. 흰머리 한 올, 주름 하나 없이 깨끗한 타 후보와 달리 피부결이 거칠게 드러났다. “노무현 대통령은 ‘투박한 질그릇’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뚝배기같이 친근하지만 단단하다는 느낌. 그분이 가진 소탈하고 서민적인 모습이 바로 유권자들이 그분에게 바라는 모습이라 생각했고 그 모습을 좋아할 것 같더라구요.” 배경으로 썼던 태극기도 낯선 것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태극기는 고리타분하고 강건하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그때가 바로 2002 월드컵으로 태극기가 하나의 문화 코드가 됐던 때였어요. 디자인적 가능성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태극기는 한 나라를 상징하는 의미도 있으니까 대통령 후보 포스터 배경으로 적당하다 싶어서 썼죠. 그땐 우리 포스터에만 있었는데 이번에 보니까 태극기가 많이 나왔더라구요. 생각나는 대로 마음껏 연출했는데 나중에 남들이 그걸 쫓아오는 재미가 사진을 하는 큰 즐거움이 돼요.” 포스터 사진을 찍으며 노 대통령을 만났을 때도 ‘이 사람 되겠구나’ 하는 느낌이 있었다. 당시 여론 조사 결과가 상당히 열세였는데도 불구하고 자신감 있는 ‘환한’ 모습에 어떤 직감 같은 것을 느꼈다고. “설득력이 굉장히 뛰어난, 논리적인 분이었어요. 촬영 중간 장난도 잘 치시고, 어렵지 않고 솔직한 모습이 인상 깊었어요. ‘대통령 되실 것 같다. 청와대에서 만나자’라고 말씀드렸죠. 사람의 기운이라는 게 있나 봐요.”분야를 넘나드는 편안한 그의 이야기 포스터 사진으로 또 한번 관심이 높아졌지만 원래 그는 풍경 사진, 광고 사진 등으로 이름을 떨쳐온 작가다. 특히 뉴욕페스티벌 한국인 최초 금상, 칸 국제광고제 금사자상을 수상하는 등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의 스튜디오는 유명 스타들의 사진이 벽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들도 “아, 이거!”라고 할 만큼 알려진 그 사진들은 하나같이 담백하고 편안하다. “저는 꾸미는 게 싫어요. 속에 있는 것을 건드려 내면을 끌어내려고 하죠. 사람들은 결국 ‘진짜’를 보고 싶어 하지 않을까요? 제 사진을 좋아하는 분들은 양념 맛이 아니라 재료 본연의 맛을 음미하고픈 분들이에요.” 수많은 스타들의 사진을 찍으며 그들이 가진 뒷모습을 발견해온 그다. 그중에서도 ‘주름이 만든 카리스마’라는 컨셉트로 찍은 안성기와 ‘눈물이 빛나는’ 김희애의 사진이 마음에 남는다고. 본인들도 그 사진을 가장 마음에 들어 할 정도로 특별했던 작품. 특히 김희애의 남편은 그 사진을 가지고 다니며 자랑할 정도 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가 스타나 상품 사진을 잘 찍는 ‘상업적인’ 작가라고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십 년 넘게 새벽 사진을 찍어온 그는 여명의 오묘함을 담아낸 ‘새벽 시리즈’로 풍경 사진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나같이 똑같은 일출, 산세 풍경 대신 흐트러진 일상의 시작에 주목했던 것이다. “풍경 사진은 어떤 면에서는 많이 고통스러워요. 생각해보세요. 새벽에 잠도 안 자고 추울 때 나가기가 얼마나 싫겠어요. 기다리고 참고 고통을 즐길 수 있어야 좋은 풍경을 내 눈에 안을 수 있죠. 하지만 시시때때로 변하는 자연을 보면서 겸허함도 느끼고 자연 속에서 나란 어떤 존재인지 생각하게 되죠. 자연과 나, 나와 타인. ‘관계’라는 것에 대해 고민하게 해요.” 풍경, 인물, 광고 사진까지. 아직도 사진에 대한 ‘열정’으로 목마른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흐름은 바로 ‘소통’이다. 사람과 제품과 자연에 끊임없이 말을 걸고 생각을 나눌 때 그는 가장 행복하다. 그리고 그 소통의 결과를 책으로, 전시로 내놓으며 또 다른 소통의 길을 만드는 것이 흥미롭다. “한때는 완벽한 작품을 만들어야겠다고 나를 옭아맨 적도 있었죠. 하지만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알았어요. 이 세상에 완벽한 게 어디 있어요. 완벽하려는 노력 대신 사진을 좋아하는 열정을 거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고, 사람을 알아가는 게 좋아요. 아마 죽을 때까지 사람을 찍고 있을 겁니다.” 박상훈 작가는 아직 해보고 싶은 것이 많다고 했다. 꾸준히 진행하고 있는 작업의 결과물들을 선보일 사진전도 준비 중이다. 최근에는 현대인이라는 존재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내’가 들어 있는 이 도심 속의 사람들에 집중하고 있다. “목표는 거창하지 않아요. 그저 좋은 작가, 훌륭한 작가가 되고 싶은 게 제 바람이에요. 나름 이런저런 결과물을 내놓았고 좋은 평가도 받았지만 아직 나는 ‘좋은’ 작가가 되지 못했어요. 운 좋게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됐고 타고난 예술적 기질이 조금은 있다는 데 감사해요. 그런 열정을 원천으로 삼아 더 많이 노력할 겁니다.” 그에게 사진이란 무엇일까.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같은 질문을 받지만 그때마다 다른 대답을 내놓는다고. 그만큼 사진이 가진 다양한 힘에 매료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진은 어쩌면 물방울 같은 것이 아닐까요. 물방울은 하나의 작은 방울이지만 독립된 게 아니라 그릇을 이루고 바다가 되면서 의미를 만들잖아요. 세상 모든 것과 연관되어 있죠. 사진도 한 컷 그 자체만으로 완전한 것이 아니라 많은 이야기를 만들고 다양한 의미를 갖는 거예요. 소통의 매개가 되는 거죠.” 제17대 대통령 선거 당선인인 이명박도 그랬고, 그의 카메라 앞에 섰던 이들은 모두 “잘 찍어줘서 정말 고맙다”라는 인사를 남겼다. 하지만 그는 말한다. 없는 것을 억지로 만들어낼 수는 없다고. ‘잘 나왔다’고 생각되는 그 모습은 모델 본인이 가진 원래의 모습 중 한 단면이다. “저는 그 모습을 잘 찾아낸 것뿐이죠”라는 박상훈 작가. 억지로 애쓰지 않고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편안한 그의 사진이 정말 고맙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글 / 이연우 기자 ■사진 / 민영주
- 음악적 재능 선보이는 탤런트 박근형의 아들 박상훈
- 2005. 09. 01 연예
- “연기할 때만큼은 아버지가 최고에요” 중견 탤런트 박근형의 막내아들 박상훈이 음악 활동중이다. R&B 그룹 ‘멜로 브리즈’를 통해 타고난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그. 연기와 음악이라는 분야만 다를 뿐,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는 모습은 아버지를 쏙 빼닮았다. 이제 막 음악활동을 시작한 아들이 털어놓은 부자 이야기. “음악을 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가 반대했었죠” 180cm가 넘는 훤칠한 키는 아버지를 닮았으나 외모는 좀 다른 느낌이다. 카리스마 넘치는 아버지와 달리 박상훈(25)은 친근하고 귀여운 이미지다. 그에게 “외모가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고 했더니, 아닌게아니라 가족 중 쌍꺼풀이 없는 사람은 그뿐이란다. “쌍꺼풀이 있었다면 아버지를 따라 연기를 했을지도 모르겠다”며 농담을 건네는 그는 중견 탤런트 박근형의 막내아들이다. 현재 가족과 떨어져 호주에서 유학중인 그는 방학 때마다 한국을 오가며 음악 활동에 여념이 없다. R&B 음악을 선보이는 ‘멜로 브리즈’라는 팀에서 프로듀서와 작사, 작곡을 맡고 있으며 실력파로 통한다. 그의 전공은 신문방송학.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남다른 애정이 있던 박상훈은 음악 관련 학과 진학을 꿈꿨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컴퓨터공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적성에 잘 맞지 않아 올해 신문방송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그가 전공을 바꾼 이유 중에는 학과 수업이 음악과 연관될 수 있겠다는 기대감도 숨어 있다. 호주에서 공부하던 박상훈은 우연한 기회에 자신이 만든 데모테이프를 한국에 보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음악을 시작했다. 처음 그가 음악을 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반대를 했다. 그러나 지금은 묵묵히 지켜보시는 중이다. 지난 7월에 열린 콘서트에 어머니와 함께 직접 공연장을 찾으셨다. “아버지가 콘서트를 보러 오신다고 해서 긴장을 많이 했어요. 제가 너무 부담이 돼서 처음엔 오시지 말라고 했죠. 그런데 저 모르게 매니저 형들과 다 연락이 됐더라구요. 공연하면서 아무래도 부모님이 어디에 계신지 찾게 되잖아요. 그런데 찾을 필요도 없었어요. 무대 바로 앞에, 그것도 특별석으로 만든 자리에 두 분이 앉아 계시더라구요.(웃음) 공연 끝나고 아버지, 어머니가 대기실로 오셔서 잘했다며 용돈도 주시더라구요.(웃음)” 음악을 반대하던 아버지가 그의 콘서트를 보러 올 만큼 달라진 이유에 대해 그는 “제가 얼마나 음악을 좋아하는지 아시기에 한번 지켜보기로 한 게 아닐까 싶어요”라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형제간의 우애와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서 최고가 돼라고 말씀하시던 아버지. 그는 아들에게 한 가지 일을 시작하면 끝을 본다는 각오로 열심히 해야 후회도 없고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는 것이라고 얘기하곤 했다. “아버지가 저랑 비슷한 점이 많아요. 아버지는 건강이 좋지 않은 할아버지 때문에 의사가 되려고 하셨대요. 의대에 가려고 시험을 쳐서 서울 휘성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연극을 보고 마음을 다 빼앗겨서 연기자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그러시더라구요. 제가 대학에 입학한 후 진로를 바꾼 거나 가족과 떨어져 유학 생활을 한 부분들이 아버지가 예전에 처한 상황들과 비슷한 것 같아요. 그래서 저를 이해하시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아버지는 세상에서 제일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운 분 박상훈은 중학교 1학년 때 호주로 건너갔다. 형, 누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그에게 자립심을 길러주려는 부모의 선택 때문이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가족과 떨어져 살면서 생기는 외로움을 견뎌야 했지만, 다행히 호주에 이모 가족이 살고 있어서 그곳 생활에 어렵지 않게 적응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나이가 어려서 문화적인 충돌이나 이질감도 적었다고. 그곳에서 사춘기를 보내고 자아가 형성되었지만 한국에서 활동하면서도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를 크게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가끔 자신의 행동으로 상대방이 상처 받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제가 좀 직설적인 편인데 가끔 아무 뜻 없이 말한 걸 상처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걸 여기 있는 분들은 제가 호주에서 살다 왔기 때문이라고 하시더라구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뭔가 제안을 받았을 때 예의상 한 번은 거절하잖아요. 그러면 다시 권하고 그러는데, 저는 한 번 권해서 거절하면 싫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다시 권하지 않거든요.(웃음)” 어린 나이에 유학을 간 탓에 박상훈은 아버지와 함께 한 기억이 그리 많지 않다. 그래도 아버지는 촬영이 없을 때나 드라마 한 편을 끝내고 쉴 때면 호주로 날아오곤 하셨고, 편지도 자주 써주셨다고. 자상했지만 한편으로는 엄하고 무뚝뚝한 아버지이기도 했다. 사랑을 표현하는 데 적극적이었지만 아들이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는 굉장히 무섭게 야단을 치셨다. 보수적이고 무뚝뚝하고, 좋고 싫음이 분명하고, 좋아하는 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그의 성격은 모두 아버지를 닮은 것 같다고 한다. “어렸을 땐, 아버지가 워낙 유명하니까 어딜 가든 주목받는 게 싫었어요. 동네 슈퍼마켓에 가도 사람들이 쳐다보고 그랬거든요. 너무 쑥스럽고 창피하고, 아버지를 보는 건데 괜히 절 보는 것 같아 어색하고…. 사실 지금도 좀 그래요.” 그러나 그가 세상에서 제일 자랑스럽고 존경하는 분은 역시 아버지다. 브라운관을 통해 보는 아버지는 ‘아빠’라는 느낌보다 ‘연기자, 배우 박근형’이라는 느낌이 든다고. 연기할 때만큼은 아버지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받아들여지며 아버지가 최고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아버지랑 동급으로 보는 배우가 한 명 있어요. 로버트 드 니로. 연세도 비슷한 걸로 알고 있어요. 풍기는 카리스마나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하는 모습이 로버트 드 니로와 비슷하게 느껴지거든요. ‘로버트 드 니로가 미국의 박근형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웃음) 아버지가 외국에서 태어나셨다면 좀더 세계적인 배우가 되지 않았을까….” 박상훈은 음악보다 연기가 매력적인 것 같다고 말하지만, 아버지를 따라 연기를 해보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단다. 타고난 재능이 다를 뿐더러, 자신에게 연기의 재능이 있다고 해도 아버지를 뛰어넘는 연기자는 되지 못할 것 같다고.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대한 꿈을 키워온 만큼, 또 우연히 기회가 찾아온 만큼 박상훈은 음악에 몰두할 생각이다. 다행히 자신에게 어느 정도 음악적 재능이 있고, 그것을 더 발전시키고 싶은 것이 그의 바람이다. 그는 많은 사람이 자신의 노래를 들어주고, 따라 불러줬으면 좋겠다고 한다. 글 / 신현화 기자 사진 / 전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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