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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총 329 건 검색)

경남 출신·활동 독립운동가 12명 서훈 신청
경남 출신·활동 독립운동가 12명 서훈 신청
2024. 12. 19 11:16사회
.... 일본 본토에서 항일운동 비밀결사대를 조직한 유학생, 3·1 만세운동에 앞장선 지역주민 등이다. 미서훈 독립운동가들은 지난 13일 ‘경상남도 독립운동 선양사업 자문단’ 회의를 거쳐 최종 선정했다....
검찰, 서훈 전 국정원장 특혜 채용 ‘혐의없음’ 불기소
검찰, 서훈 전 국정원장 특혜 채용 ‘혐의없음’ 불기소
2024. 07. 31 18:39사회
서훈 전 국정원장. 이준헌 기자 서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특혜 채용 의혹을 수사한 검찰이 ‘범죄 혐의가 없다’며 서 전 원장을 기소하지 않기로 했다. 서울중앙지검 공공수사1부(부장검사...
검찰, ‘특혜 채용 의혹’ 서훈 전 국정원장 조사
검찰, ‘특혜 채용 의혹’ 서훈 전 국정원장 조사
2024. 07. 29 21:39사회
... 수사 중 국가정보원 유관 기관인 국가안보전략연구원(전략연) 특혜 채용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이 서훈 전 국정원장(사진)을 피의자 신분으로 불러 조사했다. 29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검...
검찰, ‘특혜 채용 의혹’ 서훈 전 국정원장 소환조사
검찰, ‘특혜 채용 의혹’ 서훈 전 국정원장 소환조사
2024. 07. 29 11:51사회
서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지난해 11월1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북한 선원 강제 북송과 관련해 열린 국가정보원법 위반 첫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가정보원 유관기관인...

스포츠경향(총 17 건 검색)

홍익표 의원 “김정은 11월 부산 방문, 서훈 국정원장 북측과 협의”
홍익표 의원 “김정은 11월 부산 방문, 서훈 국정원장 북측과 협의”
2019. 09. 26 00:00 생활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의원. 연합뉴스.더불어민주당 수석대변인 홍익표 의원은 오는 11월 부산에서 열리는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참석 할 가능성과 관련 “국가정보원 차원에서 서훈 원장이 북측과 그런 문제를 협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홍 의원은 25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 가진 인터뷰에서 “한·아세안 정상회의에 김 위원장 참석하는 것에 대해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이미 한번 언급한 적도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앞서 국정원은 지난 24일 서훈 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국회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김 위원장의 부산 방문 가능성에 대해 “비핵화 협상 진행이 어떻게 되는지에 따라서 부산에 오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홍 의원은 이와 관련, “문 대통령이 ‘11월 말에 열리는 한·아세안 정상회의에 김 위원장을 초대해서 김 위원장을 국제무대에 데뷔시키는 것이 중요하고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얘기를 했다”고 설명했다. 홍익표 의원은 “지난해 9월 평양 정상회담에서 이미 김 위원장 답방 문제가 합의됐는데 적절한 시점에 답방해야 한다”며 “김 위원장이 부산에 온다면 한·아세안 정상회의에서 남북 관계의 국제적 협력을 지원받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 한층 더 의미 있는 남쪽 방문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홍 의원은 한미 간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 대해 “상당히 많은 높은 수준의 인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늘릴 수 있는 항목이 있다고 하더라도 제가 볼 때는 아무리 많이 늘려봤자 몇천억원 이상 늘리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홍익표 의원은 또 “그렇게 늘려준다 해도 주한미군 쪽에서 다 쓰기도 어려울 것”이라며 “실제로 지금도 주한미군이 우리가 준 돈을 다 쓰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고 덧붙였다.
배우 고아성, 유관순 열사 서훈 등급 상향 위한 서명운동 동참 호소
배우 고아성, 유관순 열사 서훈 등급 상향 위한 서명운동 동참 호소
2019. 02. 01 08:46 연예
배우 고아성이 유관순 열사 서훈 등급 상향을 위한 서명운동 동참을 호소했다. 고아성은 오는 27일 개봉을 앞둔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에서 주연 유관순 역을 맡는다. 1919년 3.1 만세운동 이후 서대문 감옥 8호실 속 유관순과 여성들의 1년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1일부터 3·1절까지 국내외에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유관순 열사 서훈 등급 상향 서명운동을 전개한다면서 첫 서명자로 고아성이 참여했다고 말했다. 배우 고아성. 서경덕 교수 제공사진.고아성은 “3·1 운동을 대표하는 유관순 열사의 서훈 등급이 공적과 상징성에 걸맞지 않게 5등급 가운데 3등급인 ‘건국훈장 독립장’(1962년 서훈)이라는 얘기를 듣고 아주 안타까웠는데 이번에 첫 서명자로 참여하게 돼 영광”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뉴욕타임스에 부고 기사로 유관순 열사가 소개되고, 뉴욕주에서는 3월 1일을 ‘유관순의 날’로 채택하는 등 해외에서 열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 정작 국내에서는 서훈 3등급으로 저평가돼 올해 3·1운동 100년을 맞아 서명운동을 추진한다고 서 교수는 말했다. 국민의 뜻이 담긴 서명지는 한데 모아 정부 부처에 전달할 예정이다. 국회에서는 더불어민주당 박완주 의원이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유관순 열사의 서훈변경을 위한 특별법’과 ‘유관순 열사 서훈등급 상향촉구 및 서훈변경을 위한 특별법 제정 결의안’을 대표발의를 했다.
[남북정상회담] 첫 회담 남측 서훈·정의용, 북측 김영철·김여정 배석···평양 노동당 청사서 진행
[남북정상회담] 첫 회담 남측 서훈·정의용, 북측 김영철·김여정 배석···평양 노동당 청사서 진행
2018. 09. 18 19:20 생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이 18일 평양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본부청사에서 진행됐다. 남측에선 문 대통령이 서훈 국가정보원장과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북측에선 김 국무위원장과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 김영철 당 중앙위 부위원장이 참석했다. 정처와대는 정상회담이 오후 5시45분 종료됐다고 밝혔다. 이는 애초 예상보다 30분 가량 늘어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본부 청사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서훈 국정원장, 문 대통령,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김영철 당 중앙위 부위원장, 김 국무위원장, 김여정 당 중앙위 제1부부장. 평양사진공동취재단이날 김정은 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을 노동당 본부청사 현관 밖으로 나와 맞았다. 문 대통령은 건물 1층 로비에서 김영철, 최룡해, 박광호, 리수용, 김평해, 오수용, 안정수, 최휘 등 8명의 노동당 부위원장단과 악수를 나눴다. 문재인 대통령은 정상회담에 앞서 방명록에 “대한민국 대통령 문재인”이라는 서명과 함께 “평화와 번영으로 겨레의 마음은 하나”라고 적었다. 정상회담 후에는 북한 고위 간부와 외국 주요인사 전용 면회장 목란관에서 공식수행원, 특별수행원, 일반수행원이 참석하는 환영만찬을 하게 된다.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만찬은 이날 오후 9시쯤 끝날 예정이지만 현지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다”고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후 평양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본부 청사를 방문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정상회담에 앞서 남긴 방명록. 평양사진공동취재단
평양문재인 대통령
[속보] 靑 “정의용은 중국, 서훈은 일본에 특사로 파견…방북결과 설명”
[속보] 靑 “정의용은 중국, 서훈은 일본에 특사로 파견…방북결과 설명”
2018. 09. 07 15:42 생활
[속보] 靑 “정의용은 중국, 서훈은 일본에 특사로 파견…방북결과 설명”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오른쪽)과 서훈 국정원이 대북특사 파견을 하루 앞둔 4일 오후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외교·안보 장관회의에서 만나 대화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북특사로 파견되는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서훈 국정원장 등 5인의 특사단과 외교·국방·통일부 장관, 청와대 국가안보실 관계자들을 소집해 회의를 열었다. 연합뉴스

주간경향(총 3 건 검색)

[이기환의 Hi-story](50)독립운동가의 서훈 등급, 재평가 필요하다(2022. 09. 16 14:50)
2022. 09. 16 14:50 문화/과학
임진왜란 발발과 함께 의주로 줄행랑친 선조의 말을 끌던 마부 오연이 호성공신(3등)으로 선정되면서 받은 교서 /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소장 ‘쑨원(孫文), 장제스(蔣介石), 쑹메이링(宋美齡), 천치메이(陳其美), 천궈푸(陳果夫)….’ 이분들이 누구냐고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1만7588건) 중에서도 최고등급인 ‘대한민국장’을 받은 33건 중 외국인 명단인데요. 5명 모두 중국인입니다. 이중 중국 혁명의 아버지인 쑨원(1866~1925), 중국 국민당 주석이자 중화민국 총통을 지낸 장제스(1887~1975)와 그 부인인 쑹메이링(1897~2003) 정도는 알 것이고요. 세 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쑨원)와 독립운동(장제스·쑹메이링)을 지원한 공로로 최고등급인 대한민국장을 받았답니다. 독립유공자 1·2등급에 포함된 중국인 15명 그런데 같은 ‘대한민국장’ 수여자인 천치메이(1878~1916)와 천궈푸(1892~1951), 두 사람은 좀 낯설죠. 천치메이는 1910년대 신규식(1879 ~1922) 선생과 함께 신아동제사를 조직해 한중 혁명 활동을 전개했답니다. 천궈푸는 1913년 조소앙(1887~1958) 선생 등과 함께 대동당을 조직해 항일 합동 투쟁을 전개했고요. 1942년 중국 정부의 중앙조직부장으로서 광복군과 함께 항일전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중국 땅에서 펼쳐야 했던 항일투쟁에서 쑨원이나 장제스, 쑹메이링 같은 중국 지도층의 협력과 지원은 절대적이었죠. 또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천궈푸와 천치메이 같은 분들의 도움도 컸을 겁니다. 역시 같은 이유(독립운동 지원)로 대통령장(2등급)을 받은 92건 중 중국인이 10명(11%)이나 됩니다. 대한민국장(33건)과 대통령장(92건) 등 1·2등급 서훈대상자(125건) 중 12%(15명)가 중국인이라는 얘기죠. 헐버트와 베델의 서훈 제가 간과했던 문제가 얼마 전에 제기됐는데요. 호머 헐버트 박사(1863 ~1949)의 73주기 추모식에서 “헐버트 박사의 서훈 등급(3등급·독립장)을 하루빨리 1등급(대한민국장)으로 높여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 겁니다. 헐버트 박사가 누구입니까. 1886년 왕립 영어학교(육영공원) 교수로 입국한 이후 한국을 위해 평생을 바친 분이죠. 최초의 한글 세계지리서인 <사민필지>를 펴냈고, 한글의 우수성을 미국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렸죠. 또 세 번이나 고종의 특사로도 활약했습니다. 이 헐버트 박사에게 고작 3등급인 독립장이 수여됐습니다. 어니스트 베델은 1904년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해 통감부의 탄압에 맞서 한국의 국권수호를 위해 필봉을 휘둘렀다. 특히 호머 헐버트와 함께 일본 궁내부 장관 다나카 미쓰야키의 경천사 10층탑 강탈사건을 집요하게 파헤쳐 반환을 이끌어냈다. / 어니스트 베델(1872~1909) / 국가보훈처 소장 영국 출신의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1872~1909)은 어떨까요. 1904년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분이죠. 이후 통감부의 탄압에 맞서 한국의 국권수호를 위해 필봉을 휘둘렀죠. 헐버트와 함께 일본 궁내부 장관 다나카 미쓰야키(田中光顯·1843~1939)의 경천사 10층탑 강탈사건을 집요하게 파헤쳐 반환을 이끌어냈고요. 그런 베델은 독립유공자 서훈에서 2등급(대통령장)을 받았습니다. 결단코 베델의 서훈 등급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고요. 한글 연구와 보급, 한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헐버트 박사가 3등급이라는 게 잘못됐다는 얘기입니다. 또 두 분의 등급이 같은 외국인으로서 1등급 대우를 받은 천치메이, 천궈푸에 견줘 왜 낮은 건지도 의문이 듭니다. 들쭉날쭉한 서훈 등급 아닌 게 아니라 서훈 등급의 문제점이 계속 지적돼왔는데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낸 이동녕(1869~1940) 선생과 독립협회 부회장으로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던 이상재 선생(1851~1927), 역사학자이자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조직에 참여한 신채호(1880~1936), 대한광복회의 총사령관을 지낸 박상진 선생(1884~1921) 등도 2등급(대통령장)을 받았습니다. 의병장 유인석(1842~1915)과 신돌석(1878~1908),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진 이봉창(1901~1932), 매국노 이완용을 습격한 이재명(1887~1910), ‘여자 안중근’ 남자현(1872~1933) 선생 등도 대통령장을 받았습니다. 6형제가 전재산을 팔아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펼친 이회영 선생(1867~1932)은 고작 3등급(독립장)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정부가 독립유공자의 명단 208명을 발표한 때가 1962년 2월 23일이었는데요. 이때 김구·안창호·안중근 등 18명이 1등급, 신채호·신돌석·이위종·이상설 등 58명이 2등급, 유관순·김도현·김마리아·장지연·이회영 등 132명이 3등급을 받았습니다. 심사는 <조선독립운동혈사> 등 문헌자료 12권을 바탕으로 했는데요. ‘국시(國是) 위배’, ‘정치적 과오’, ‘납북’, ‘변절’, ‘해방 후 월남하지 않은 자’, ‘확인할 만한 기록이 없는 경우’ 등 6가지 예외 규정을 두었답니다. 1962년이라면 해방된 지 20년도 채 지나지 않은 때였습니다. 해방~한국전쟁~4·19혁명~5·16군사정변 등 어수선한 정국에서 정확한 자료에 의한 심사가 제대로 이뤄졌겠습니까. 3·1운동의 상징인 유관순 열사가 왜 1등급 대우를 받지 못했는지도 의아한 대목이고요. 더욱이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음에 따라 친일행적이 드러났거나 의심스러운 자들이 유공자로 신분세탁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 분단과 전쟁, 냉전의 와중에 상당수 독립운동가가 공산주의자와 부역자의 낙인이 찍혔고요. 세월이 지나 새로운 자료가 나오고, 정세도 바뀌면서 등급의 재심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됐는데요.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동일한 공적에 대해서는 훈장 또는 포장을 거듭 수여하지 않는다”는 ‘상훈법’ 제4조가 걸림돌입니다. 그래서 등급 조정 여론이 거셌던 유관순 열사와 여운형 선생(1886~1947), 2021년 카자흐스탄에서 유해가 송환된 홍범도 장군(1868~1943) 등 세 분은 기존의 대통령장(2등급) 외에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가’했습니다. 현행 상훈법에 따라 재심사 절차가 마련돼 있지 않아 ‘공적 추가’의 형식을 쓴 겁니다. 2022년 9월 현재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1만7588건 가운데 1등급(대한민국장)과 2등급(대통령장) 대상자는 125명이다. 그중 외국인은 대한민국장 5명, 대통령장 11명 등 총 16명인데 중국인이 15명이다. 전체 1·2등급 대상자의 12%에 달한다. 그들의 공적은 ‘독립운동 지원’이다. / 국가보훈처 소장 내시·마부가 공신록 오른 이유 이 대목에서 조선조 선조 때의 공신 서훈을 둘러싼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선조실록> 1604년(선조 37) 기사를 볼까요. “호종공신이 80명이 넘는다니 과하다. 그중 내시가 24명이며 미천한 자들이 또 20여명이다”(6월 25일)라 했는데요. 이날 발표된 선조의 공신 교서 내용을 전한 사관의 논평이 의미심장합니다. “임진왜란 때 정인홍(1535~1623)·김면(1541~1593)·곽재우(1552~1617)는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김천일(1537~1593)·고경명(1533~1592)·조헌(1544~1592)은 충청과 호남에서 죽었다. 그들의 공적은 너무도 찬란하고 열렬하여….” 사관의 논평을 정리해보죠. 하나는 공신 중에 허접한 인물이 너무 많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곽재우 등 의병들의 공이 너무 폄훼됐다는 겁니다. 대체 어떤 내막이 있었을까요. 이날 발표된 공신은 세 부류로 나뉘었는데요. 임진왜란 때 선조의 의주행을 수행한 86명은 ‘호성(扈聖)공신’이 됐습니다. ‘임금(聖)을 호위(扈)한 공신’이라는 거죠. 또 전쟁터에서 왜적을 토벌한 장수 등 18명은 ‘선무(宣武)공신’이 됐습니다. ‘무공(武)을 떨쳤다(宣)’는 의미죠. 또 전란 도중(1595) 터진 이몽학(?~1596)의 반란을 진압한 5명은 ‘청난(淸亂)공신’이 됐습니다. 어째 좀 이상하죠. 7년이나 전쟁을 치렀는데, 전장에서 공을 세운 선무공신(18명)보다 의주로 도망간 임금을 수행한 호성공신의 숫자(86명)가 5배 가까이 많으니까요. 특히 호성공신 중에는 신분이 낮은 인물이 많았습니다. 내시가 24명이 포함됐고요. 임금의 어가를 모는 마부 6명, 의관 2명, 왕명을 전달하는 하급관리 2명이 들어갔습니다. 의관 중에는 <동의보감>을 편찬한 허준(1539~1615·호성 3등)도 포함됐죠.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삼십육계 줄행랑을 택했죠. “임금이 경성을 떠날 때… 명공 대신들이 임금 곁을 떠났고, 의주까지 따라간 문무관은 겨우 17인이었다. 그밖에 환관 수십명과 어의 허준 등이… 떠나지 않았다. 임금이 ‘사대부가 너희만도 못하구나!’ 하고 한탄했다.”(<선조수정실록> 1592년 6월 1일) 선조는 임진왜란 공신책록이 끝난 지 1년 만인 1605년 무려 9060명에게 ‘선무원종공신’의 작위를 줬다. 이때 곽재우 등 의병장들도 대거 포함됐다. 그러나 선무공신이 아닌 선무원종공신은 선심성 대접에 불과했다. / 국가보훈처 소장 선조는 의주 도망길에 ‘명공대신’과 ‘사대부’의 배신을 목도했습니다. 그랬기에 어려운 시기에도 임금을 끝까지 지켜준 측근들에게 공신의 직위를 내리고 싶었겠죠. 비록 천한 신분이었지만 제 몸보신을 위해 줄행랑친 지체 높은 자들보다 훨씬 의리 있는 사람들이죠. 그런 면에서 사관들의 비판은 과한 측면이 있습니다. 의병장 홀대한 못난 임금 사실 선조의 공신 서훈이 문제가 된 것은 따로 있습니다. 무공을 세운 장수와 의병장들을 홀대했다는 겁니다. 즉 선조는 공신 책록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이상한 말을 합니다. “이순신(1545~1598), 원균(1540 ~1597), 권율(1537~1599) 등은 다소간의 전공을 세웠다…. 적을 평정한 것은 오직 중국 군대의 힘…. 조선군은 제힘으로는 적병 한명도 베지 못했고, 적진을 한곳도 함락시키지 못했다.”(<선조실록> 1601년 3월 14일) 다음 말이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중국 군대가 지원군을 보낸 연유가 무엇인가. 과인을 호종한 신하들 덕분이다. 이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따라 의주까지 갔기 때문에 내가 중국에 호소할 수 있었다. 그래서 왜적을 토벌하고 강토를 회복하게 됐다.” 이것이 호성공신(86명)이 선무공신(18명)을 압도한 이유입니다. 기가 찬 발언이죠. 따져봅시다. 전란이 일어나자 임금은 줄행랑치기에 바빴죠. 그러나 어떻습니까. 전국 각지에서 못난 임금을 향한 충성심 때문에, 부모형제를 위한 효심 때문에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죠. 이분들이 사대부를 중심으로 천민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지에서 활약한 의병들이었죠. 다급했던 선조는 처음에는 의병장들에게 관직을 제수하면서 의병의 봉기를 크게 북돋아주었죠. 의병장 곽재우에게는 “내가 그(곽재우)의 이름을 늦게 들은 것이 한스럽다”고 했고, 또 다른 의병장 고경명·김천일의 서울수복 의지를 담은 보고를 접한 뒤에는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라고 했습니다. 선조는 “전국의 백성은 분연히 왜적과 맞서야 한다”면서 “너희(의병)가 힘을 합해 경성에 들어와 나(선조)의 행차를 맞으면, 너희는 아름다운 이름을 누리고 그 은택은 대대손손 미칠 것”(<난중잡록> 1592년 8월 4일)이라고 약속합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어떻게 했습니까. “너희(조선군대와 의병)가 한 일이 뭐냐”고 깔아뭉갰습니다.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요. 못난 임금은 전란으로 피폐해진 백성이 의병장의 지휘 아래 무능한 조정을 향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했을 겁니다. 곽재우의 공이 9060분의 1? 18명의 선무공신 명단에 들지 못한 곽재우 등 의병장들은 이듬해(1605) 4월 16일 선무원종공신 명단에 이름을 올립니다. 그러나 정공신(正功臣)이 아니라 원종(原從), 즉 ‘공신대우’의 대접을 받았습니다. 이때 인정된 원종공신의 수가 무려 9060명입니다. 아무렴 곽재우를 비롯한 김면·김천일·고경명 등 의병장들의 공이 고작 ‘9060분의 1’이라는 말입니까. 그런데 선조가 원종공신 교서를 내리면서 또 한 번 대못을 박습니다. “너희들의 공은 작고, 중국의 은혜는 크다…. 그러나 그대들의 공이 작을지라도 갚지 아니할 수 없기에….” 독립운동가들이 유공자 서훈을 받으려고 투쟁을 벌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분들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해야 하는 것이 후손들의 몫이다. 첫 번째 명단을 발표한 것(1962)이 꼭 60년이 지났다. 이제 재평가 작업을 벌여야 할 때가 됐다. / 국가보훈처 소장 참으로 속 좁은 군주의, 참으로 지긋지긋한 ‘중국’ 타령이 아닙니까. 이후 여러차례 조정에 나와 출사하라는 명령에 곽재우 장군의 언급이 심금을 울리죠. “신은 왜적의 토벌로 관직에 제수됐습니다. 왜적이 물러갔으면 신 역시 마땅히 물러나야 합니다. 훗날 국가에 변란이 있을 경우 마땅히 다시 나와 사졸들의 선봉이 되겠습니다.”(<광해군일기> 1617년 4월 27일) 지금 이 순간, 독립유공자 서훈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분들이 무슨 등급이나 잘 받으려고 독립운동을 했겠습니까. 하지만 친일파가 호의호식할 때 나라의 국권 수호와 독립을 위해 피를 흘린 분들이 아닙니까. 그분들의 자취와 흔적을 찾아주고 제대로 대접하는 것이 후손의 몫이겠죠. 독립유공자들의 명단을 첫 번째 발표한 후 꼭 60년이 지나고 있네요. 재평가 작업, 반드시 해야 할 과제가 아닐까요.
이기환의 Hi-story
[숫자로 보는 정치-22명]마땅히 박탈해야 할 서훈(2016. 10. 18 14:59)
2016. 10. 18 14:59 정치
ㆍ12·12 및 5·18 관련자 중 176명 취소됐으나 아직도 22명 유지 우리가 흔히 말하는 12·12사태는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이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등 국군 주요 인사를 강제 연행하면서 군부를 장악한 사건이다. 이들 신군부는 다음해 5·18 민주화운동을 억압하고 정치권력까지 장악했다. 여기에 가담한 인물 34명은 서훈을 받았다. 이들 중 12명은 2006년 참여정부 시절 과거의 서훈이 취소됐다. 당시 정부는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과 공무원, 군인, 경제계 인사 등 176명의 서훈을 취소했는데, 여기에 이들 인물 12명이 포함된 것이다. 하지만 34명 중 22명에 대한 서훈이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소병훈 의원(더불어민주당)이 이번 국감 자료를 통해 확인한 결과 아직도 22명의 서훈이 취소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의 명단에는 박준병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 권정달 보안사령부 정보처장, 유학성 국방부 군수차관보(서훈 당시 직위) 등의 이름이 있다. 소 의원은 “행정자치부는 신군부 인사를 특정할 수 없기 때문에 서훈의 취소 여부를 파악할 수 없다는 입장”이라면서 “하지만 1995년 5·18특별법 제정과 함께 1997년 대법원 96도 3376 전원합의체 판결은 12·12를 군사반란으로, 5·18 진압을 신군부에 의한 내란사건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이들 관련자는 서훈을 마땅히 취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상훈법 제8조에 의하면 서훈의 취소 사유로는 서훈의 공적이 거짓으로 밝혀진 경우, 국가 안전에 관한 죄를 범한 사람으로서 형을 받았거나 적대지역으로 도피한 경우, 형법·관세법·조세범 처벌법에 규정된 죄를 범하여 사형, 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형을 받은 경우이다. 10월 12일 행자부의 국감에서 소 의원은 법원에서 판결이 난 5·16이나 5·18의 경우 서훈이 취소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홍윤식 행자부 장관은 “관련 근거를 종합적으로 검토하도록 하겠다”고 답변했다. 5·18뿐만 아니라 5·16쿠데타로 서훈을 받은 인물들도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소 의원은 “5·16쿠데타는 2011년 6월 대법원에서 군사혁명이 아닌 쿠데타로 규정됐다”면서 “5·16쿠데타로 받은 서훈도 마땅히 취소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5·16 군사혁명 영도’라는 공적으로 1963년 12월 17일과 1964년 12월 17일 각각 보국훈장 통일장과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소 의원은 이 두 훈장도 취소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거짓과 허위 공적이 난무하면서 취소돼야 할 서훈이 여전히 유지되는 가운데 민주화 인사에 대한 서훈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행자위 국감에서 야당 의원들은 이에 대한 서훈을 정부에 요청했다. 소 의원은 “헌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독립의 가치와 4·19 민주이념이라는 민주화의 가치를 가장 최우선의 가치로 규정하고 있으면서도 민주화 인사들에 대해서는 별도의 훈장이 없다”고 강조했다.
숫자로 보는 정치
[줌인]서훈은 남북정상회담 위한 포석?
[줌인]서훈은 남북정상회담 위한 포석?(2006. 12. 12)
2006. 12. 12 정치
국정원 대북담당3차장 임명 배경은… “김정일과 자주 접촉 신뢰 얻어” 김대중 정권 후반기 얘기다. 김 대통령의 외교안보 측근 참모로서 알려져 있던 ㄱ씨는 언론인들과 가진 사석모임에서 긴 한숨을 쉬었다. ㄱ씨 말의 요체는 이렇다. 북한이 그동안 김정일 정권과 긴밀하게 접촉해오던 대북 3인방을 만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ㄱ씨가 밝힌 이른바 ‘대북 3인방’은 국정원 3차장 김보현씨, 3차장 산하의 대북전략기획국장 서영교씨, 그리고 과장급이던 서훈씨다. 김씨와 양 서씨로 구성된 이들 3인방은 수시로 북한을 드나들며 심지어 필요한 경우 김정일 국방위원장과도 면담할 수 있었다고 이 측근은 전했다. 한 마디로 당시 대북 접촉의 얼굴마담이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과 임동원 청와대 특보였다면 막후 핵심은 이 3인이었다는 게 ㄱ씨의 설명이었다. 2002년 임동원 특보 김정일 면담 때 배석 특히 이중 가장 관심을 끄는 인물은 서훈씨였다. 최근 외교안보 라인 개편에서 북한담당 책임자인 국정원 3차장을 맡은 바로 그 사람이다. 당시 40대 후반이었던 서씨의 북한 내 행보 중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2002년 4월 임동원 특보가 방북해 김정일 위원장을 면담했을 때 서씨는 그를 수행해 면담과 만찬에 모두 배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박지원 실장이 밀사로서 북한과 남북정상회담을 협의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실무를 맡아 뒷바라지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불법 송금과 관련해 서씨는 특별검사의 조사를 받았다. 그는 신포 경수로 공사 건설현장에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요원으로 근무했다. 서씨와 김 위원장의 관계에 틈이 생긴 것은 2002년 10월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 개발 의혹이 제기되면서다. 서씨는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강하게 방북을 시도했으나 과거와 달리 북한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남북관계가 큰일이다. 가장 효과적인 통로마저 막혔다. 걱정스런 상황이다.” 남북문제에 나름대로 개입하고 있던 ㄱ씨는 그때 이같이 당혹감을 표시했다. 서씨가 국정원의 대북 전문가 라인인 최준택-김보현-서영교를 뒤이어 북한문제를 총괄하는 3차장에 오른 것은 전문성의 측면에서, 그리고 국정원 업무의 연속성을 생각할 때 당연한 귀결일 수 있다. 그렇지만 서씨의 3차장 취임이 단순하게 보이지 않는 이유는 남북정상회담 때문이다. 서씨는 김대중 대통령-김정일 위원장의 2000년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막후인물로 남북정상회담 추진에는 최적의 인물이다. 더욱이 서씨는 참여정부 초기 이종석 국가안보회의 사무차장 밑에서 정보관리실장을 맡은 적이 있어 현 정부 실세들과 코드를 맞추어 왔다. 한 외교안보소식통은 김만복 신임 국정원장은 사실 ‘해외통’이고 기본적으로 보수적 성향을 갖고 있다며, 만일 정부가 정상회담을 추진한다면 김 원장이 아니라 서훈 차장이 주 통로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서씨가 청와대에서 국정원으로 복귀한 이후 그동안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비밀접촉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문이 간헐적으로 터져나왔다. 하지만 정부가 이를 부인하고 있을 뿐 아니라 비밀접촉도 ‘설’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서씨가 3차장으로 승진하면서 적어도 남북정상회담은 가시권에 든 셈이다. 이창원〈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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