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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총 43 건 검색)

내년부터 서울 연세로에 승용차 통행 허용…신촌 상권 쇠퇴 여파
내년부터 서울 연세로에 승용차 통행 허용…신촌 상권 쇠퇴 여파
2024. 12. 19 16:13지역
... 다니던 연세로에 일반 자동차들도 다닐 수 있게된다. 한때 서울을 대표했던 ‘신촌 상권’의 쇠퇴, 상주 학생인구 감소 등의 여파다. 서울시는 19일 공고를 통해 “내년 1월1일부로 연세로의...
쇠퇴한 제주시 원도심을 관광객 ‘핫플’로 ‘도전’
쇠퇴한 제주시 원도심을 관광객 ‘핫플’로 ‘도전’
2024. 11. 05 16:25지역
... 보실 수 있습니다> 제주시 원도심을 관광명소로 육성하는 사업이 5년에 걸쳐 추진된다. 인구 유출로 쇠퇴한 제주시 원도심이 다시 활력을 얻을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제주도는 원도심 상권 활성화를...
원도심제주도관광객쇠퇴제주시상권활성화칠성로지하상가중앙로
세계 최대 한라산 구상나무숲 2000년대 들어 ‘쇠퇴’ 가속화
세계 최대 한라산 구상나무숲 2000년대 들어 ‘쇠퇴’ 가속화
2024. 09. 18 12:44지역
... 숲이 지난 100여년간 절반 가까이 줄어든 것으로 분석됐다. 특히 2000년대 들어 기후변화로 인해 숲 쇠퇴가 더욱 빨라진 것으로 나타났다. 제주도 세계유산본부 한라산연구부는 한라산 구상나무 숲이 1918년...
한라산구상나무세계규모제주멸종위기기후변화기온상승
개발과 방목 축산 쇠퇴로 제주 마을공동목장 ‘반토막’
개발과 방목 축산 쇠퇴로 제주 마을공동목장 ‘반토막’
2024. 07. 04 15:28지역
... 방목된 소. 독자제공 제주 고유의 목축문화를 담고 있는 마을공동목장이 각종 개발 사업과 방목 축산업의 쇠퇴 등으로 절반 가까이 사라진 것으로 나타났다. 4일 제주도가 제주대 산학협력단에 의뢰한...
마을공동목장제주목장쇠퇴축산업탄소배출권제주고유목축문화방목개발

스포츠경향(총 5 건 검색)

손흥민 기량이 쇠퇴? 무슨 근거로 이런 평가를···英 매체의 한심한 주장 “손흥민, 다음 시즌 튀르키예서 모리뉴와 함께할 수 있어”
손흥민 기량이 쇠퇴? 무슨 근거로 이런 평가를···英 매체의 한심한 주장 “손흥민, 다음 시즌 튀르키예서 모리뉴와 함께할 수 있어”
2024. 06. 04 22:42 축구
손흥민. 게티이미지코리아 영국 축구 매체들이 비시즌 중 하는 일에는 ‘황당한 주장하기’도 포함되는 것처럼 보인다. 누가봐도 떠날 것 같지 않은 토트넘(잉글랜드)의 ‘캡틴’ 손흥민(31)이 잉글랜드를 떠나 튀르키예 리그에서 조제 모리뉴 감독과 함께할 수 있다는 터무니 없는 주장을 하고 나섰다. 영국 매체 ‘풋볼 365’는 4일 ‘페네르바체에서 모리뉴 감독과 함께할 수 있는 선수 5명’이라는 내용의 기사에서 뜬금없이 손흥민의 이름을 꺼내들었다. 이 매체는 “손흥민이 튀르키예에서 새로운 도전에 나설 수 있다”며 “모리뉴 감독이 토트넘에 있을 때, 손흥민은 토트넘 선수들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뛰었다”고 설명했다. 이 매체가 손흥민 외 언급한 다른 선수에는 로멜로 루카쿠, 아르만도 브로야(이상 첼시), 윌리안(풀럼), 빅터 린델로프(맨체스터 유나이티드)도 꼽혔다. 조제 모리뉴 감독. 게티이미지코리아 정말 말도 안되는 주장이다. 손흥민은 2023~2024시즌 17골·10도움의 빼어난 활약으로 자신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역대 3번째 10골·10도움 시즌을 만들었다. 웨인 루니, 무함마드 살라흐(이상 5회), 에릭 칸토나, 프랭크 램퍼드(이상 4회), 디디에 드록바(3회)에 이어 역대 6번째 기록이기도 했다. 하지만 풋볼365는 손흥민의 기량이 떨어지고 있다는 억지 주장을 펼쳤다. 이 매체는 “손흥민은 EPL에서 두자릿수 득점과 어시스트를 기록하고 시즌을 마쳤다”고 활약상을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그의 기량은 점점 쇠락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손흥민은 계약 마지막 해에 접어들어 유럽 명문 구단으로 떠날 수 있는 기회는 없어졌다. 하지만 튀르키예에서 새로운 도전에 나설 수 있고, 모리뉴 감독과의 만남이 실현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물론 손흥민은 토트넘을 떠날 생각이 없다. 지난해 막대한 오일머니로 무장한 사우디아라비아 리그에서 관심을 표명했을 때도 기성용의 일화를 들며 “돈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축구, 그리고 사랑하는 EPL에서 뛰는 것”이라고 일축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안지 포스테코글루 토트넘 감독이 최근 “손흥민은 우리 미래의 일부가 될 것”이라고 하며 변함없는 신뢰를 보인 상황이다. 손흥민. 게티이미지코리아
[西매체]“가가와, 손흥민 전까진 亞 최고였는데 너무 빨리 쇠퇴”
[西매체]“가가와, 손흥민 전까진 亞 최고였는데 너무 빨리 쇠퇴
2021. 01. 28 11:45 축구
가가와 신지. Getty Images코리아손흥민 전까지 아시아 최고였던 선수. 일본 축구대표팀 출신 가가와 신지(32)가 그리스에서 새출발을 하면서 모처럼 유럽 매체의 주목을 받는다. 그러나 손흥민 이전에 아시아 최고 선수였으나 지금은 위상이 많이 떨어졌다는 냉혹한 평가를 받았다. 스페인 매체 ‘돈발론’은 28일 “한때 아시아 최고 선수였으나 이제는 손흥민에게 자리를 내준 가가와 신지가 화려한 경력을 뒤로 하고 그리스에서 뛰게 됐다”고 전했다. 이 매체는 “가가와는 한때 세계적인 스타로 최고의 클럽이 그를 영입하기 위해 싸웠고,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도 관심을 보냈다”고 밝혔다. 이어 “독일 르트문트 위르겐 클롭 감독을 떠나면서 프리미어리그 맨유에서 뛰면서 관심을 받았으나 2014년 도르트문트로 돌아와서는 예전같지 않았다”고 과거를 소개했다. 터키 베식타스에서 임대로 뛰다 지난 시즌에는 스페인 2부리그 레알 사라고사에서 활약했던 그는 최근 방출됐다. 사라고사에서는 31경기에 출전해 4골을 기록했으나 전성기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축구 인생에 빨간불이 켜졌으나 가가와는 그리스 PAOK와 가까스로 계약하면서 새로운 도전을 나서게 됐다. 이 매체는 “그는 여전히 축구화를 신고 있지만 쇠퇴가 너무 빨리 왔고, 그의 플레이를 오래 즐길 수 없다는 것은 유감”이라고 밝혔다.
국내 브라우저 시장, 인터넷익스플로어 쇠퇴하고, 구글 크롬 과반 이상 차지
국내 브라우저 시장, 인터넷익스플로어 쇠퇴하고, 구글 크롬 과반 이상 차지
2020. 10. 06 21:20 생활
김상희 국회 부의장.과거 국내 브라우저 시장에서 절대강자였던 인터넷익스플로어(이하 IE)가 쇠퇴하고, 구글 크롬이 과반 이상을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회 김상희 부의장이 지난 4일 발표한 ‘2020년 9월 기준 국내 브라우저 시장 점유율 현황’에 따르면 구글의 ‘크롬’ 브라우저가 56.93%로 가장 많은 점유율을 차지했고, 이어 ‘삼성인터넷’이 11.4%, 애플 ‘사파리’가 11.3% 순인 것으로 확인됐다. 해당 자료에 따르면 국내시장에서 외산 브라우저가 차지하는 비중이 81.73%에 달하는 것에 반해 ‘삼성인터넷’과 네이버 ‘웨일’ 등 국내 브라우저는 18.27%에 밖에 안돼 해외 사업자 쏠림현상이 심한 것으로 드러났다. 김상희 부의장은 “과거 MS사의 ‘인터넷익스플로어’(IE) 브라우저가 곧 인터넷 그 자체로 여겨지던 때가 있었지만, 느린속도와 웹표준에 맞지않는 기술로 인해 시장에서 퇴출되고 그 빈자리를 ‘익스플로어’(IE)에 비해 빠르고 보안성이 강화된 구글 ‘크롬’이 대체했다”며 “이 점을 국내 브라우저 기업들이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김상희 부의장은 “브라우저의 쿠키 및 방문기록 등을 통해 개인의 위치, 비밀번호, 소비패턴, 정치성향 등의 개인정보를 확보할 수 있으므로, 브라우저 시장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국내외 브라우저 기업들이 사활을 걸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상희 부의장은 “이런 브라우저 경쟁 속에서 이용자들의 개인정보가 침해되지 않도록 과기부와 방통위 등 정부당국이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구글크롬
한국 축구, 쇠퇴기와 성장통의 갈림길에 있다
한국 축구, 쇠퇴기와 성장통의 갈림길에 있다
2017. 09. 05 18:56 축구
신태용 한국 축구 대표팀 감독이 4일(현지시간)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분요드코르 경기장에서 2018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우즈베키스탄전을 하루 앞두고 열린 공식훈련에서 훈련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타슈켄트 | 연합뉴스 한국 축구는 갈림길에 서 있다. 쇠퇴기로 돌아갈지, 더 나은 곳으로 발전해나갈지 절체절명의 선택이 눈앞에 놓인 것이다. ‘통큰’ 결단이 필요하다는 교훈이 잇단 월드컵 예선을 통해 제기됐기 때문이다. 한국은 이번 2018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을 통해 이제 더 이상 아시아 축구의 맹주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인정해야 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을 시작으로 매번 최종예선까지는 어느 정도 안심을 하고 볼 수 있을 정도의 위치를 지켜온 한국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월드컵 본선이 문제가 아니라 아시아 최종예선마저도 장담을 할 수 없게 됐다. 대표팀 단장으로 우즈베키스탄에 온 김호곤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은 “이제는 예선에서 맞붙는 팀들이 모두 강팀이 됐다”고 말했다. 그동안 한국 축구의 상징은 투혼, 집중력 등 주로 정신적인 부분에 있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벨기에와 경기에서 머리에 붕대를 둘둘 말고 뛰었던 이임생, 2002년 한·일 월드컵 미국전에서 눈썹 위가 찢어져 피가 철철 나는데도 응급처치만 하고 뛰었던 황선홍이 한국 축구의 색깔을 대표하는 장면 중 하나였다. 이제는 정신력만 강조해서 될 시기는 지났다. 이번 2018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서도 한국 선수들은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물론 집중력이 부족했던 상황도 더러 있긴 했다. 그래도 게으르게 뛰지는 않았다. 정신력보다는 과거 어느 정도 차이가 있었던 한국과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수준이 이제는 얇은 종잇장 차이로까지 줄어들었다. 지난달 31일 열린 이란과의 아시아최종예선 A조 9차전은 한국 축구가 더 이상 아시아 축구를 호령하는 위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한 판이었다. 당시 경기를 관전한 김대길 스포츠경향 해설위원은 이란의 수비 움직임에 감탄을 금치 못하며 “이란 수비의 전술적인 움직임은 한국이 월드컵 본선에 가서라도 배울 부분이 많다”고 했다. 그 동안 한 발 앞서 가는 한국 축구를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추격하는 상황이었다면, 이제는 한국도 다른 아시아 국가들을 보고 배울 점이 생겼다는 뜻이다. 선수들도 아시아 국가들이 이전과는 다른 수준으로 올라왔다는 점을 어느 정도 수긍하고 있다. 이근호는 우즈베키스탄전에 앞서 “(우즈베키스탄이) 확실히 예전보다 더 강해진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신태용 대표팀 감독도 “더 이상 실력을 얕보면 안 된다”고 했다. 아직 태국, 오만 같은 나라들과 비교했을 때는 한국이 더 뛰어난 실력을 보이고 있지만 이란이나 우즈베키스탄, 일본, 호주처럼 본선행 티켓을 다툰 나라들과 비교해보면 한국은 대등, 또는 근소한 열세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됐다. ‘시간은 금’이라는 격언은 지금 한국 축구에 가장 어울리는 말이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진보를 거듭할 때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이룬 최초 원정 16강 진출 등에 도취된 한국은 그대로 정체해 있었다. 물론 이번 아시아 최종예선 과정에서 잔디 등 한국이 제대로 된 경기력을 보일 수 없었던 외부적인 요소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시 한 번 한국 축구의 현주소를 진지하게 짚어볼 때가 됐다.
한국우즈베키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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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내시경]명동-한류로 번성했지만 코로나로 쇠퇴의 길(2021. 08. 13 14:57)
2021. 08. 13 14:57 사회
명동은 서울에서 땅값과 임대료가 가장 비싼 곳으로 꼽힌다. 가장 번화하고 화려하며 최근까지 국내외 인파가 몰리던 곳이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사태가 터지고 급격히 변한 곳을 들라면 단연 명동을 꼽을 수 있다. 곳곳에 관광객과 유람객으로 붐비던 골목과 가게는 모두가 버리고 떠나버린 도시의 모습으로 보였다. 명동의 모습은 사람이 버리고 간 도시를 떠올리게 한다. 서울 지하철 4호선 명동역을 나와 북쪽으로 뻗어 을지로까지 통하는 완만한 내리막길이 명동의 중심 골목이다. 화려하게 들어섰던 유명 상점들이 하나같이 철수해 빈 가게에 붙은 임대표지만이 눈에 띈다. 유리문 안으로 고지서와 급전 알선 광고들이 가득 쌓여 문을 닫은 것이 어제오늘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골목 안 상점의 열에 일곱은 문을 닫았다. 유명 스포츠 의류매장이 건재한 채 있는데, 들고 나는 손님은 눈에 띄지 않았다. “명동은 한류 때문에 엄청 번성했다가, 코로나로 망했다”는 것이 약국 주인의 이야기다. 예전에도 패션과 미용, 유행과 유통의 중심이었지만 최근 20년 이상 불어온 한류 열풍으로 명동은 필수 관광코스가 됐다. 약국 주인은 “성형외과와 피부과 처방전이 매출의 절반이 넘었는데, 지금은 인근 상가에서 철거 작업하는 인부들 파스가 제일 많이 팔린다”는 푸념도 곁들였다. 골목 군데군데 트럭이 서 있고 내부를 뜯는 철거 공사 현장이 흔하게 보인다. 명동은 철시 중이다. 코로나19 이후, 명동은 철시 중 19세기 말 명동성당이 들어서면서 중국대사관이 들어오고 청국인 거주지가 됐다가, 일제강점기 일본인의 주된 상업지역이 되면서 명동시대의 막이 열렸다. 일본인은 이곳에 혼마치(本町)란 이름을 붙였는데,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북쪽은 조선인 상권 명동일대는 일본인 상권이라는 암묵적인 선이 그어졌다. 명동이 본격적으로 커지고 시대의 중심이 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의 일이다. 피란에서 돌아와 명동 중심으로 금융과 상업지대가 자리 잡았다. 지금의 명동예술극장 자리에 있던 국립극장 인근에 문화예술인도 진을 치고 있었다. 명동의 황금시대가 시작됐다. 유네스코 회관 건너편 골목길 초입에 돌로 새긴 표석이 있다. ‘문화예술인이 찾았던 은성주점 터’ 예술인과 명동 이야기가 나올 때면 빠지지 않는 막걸릿집 은성이 있던 자리다. 배우 최불암의 어머니가 하던 막걸릿집은 인심이 후해 누구라도 외상을 청하면 거절하지 않았다고 한다. 막걸리로 요기와 취기를 겸할 수 있었기에 세상에서 탈락하지 않으려 모진 애를 썼던 예술인들이 구김 없이 드나들 수 있었던 곳이다. 국내 최고 임대료를 자랑하는 매장도 손님의 발길이 없다. 은성을 거쳐간 인물과 당시의 사건은 수많은 후일담을 만들어냈다. 명동백작 이봉구를 중심으로 시인 김수영과 김관식 하며 박인환과 전혜린 등이 은성을 드나들었다. 이봉구의 별명인 명동백작은 문학과는 상관없이 박노식 주연의 활극 영화로 만들어진 바 있다. 한동안 명동의 건달을 그린 액션영화가 줄을 이었다. 지금 명동파출소 옆 좁은 골목길 한편 지하에 명동백작이란 주점이 있고, 가파른 계단 너머 영화 <명동백작 명동에 나타나다>의 빛바랜 포스터가 붙어 있다. 은성뿐 아니라 명동 곳곳의 다방은 문인들이 글을 쓰거나 외상 커피를 마시며 죽치는 공간으로 유명했다. 대부분의 다방은 그들로부터 받지 못한 커피값이 쌓이고 밀려 문을 닫고 말았다는 전설이 있다. 현대문학 구성원들이 주로 진을 치던 문예살롱과 연극인 등이 드나들던 동방살롱 2곳이 유명했다. 그 밖에도 남대문로에서 국립극장을 거쳐 명동성당으로 이르는 긴 골목 주변에 있던 갈채, 모나리자 등이 문인들의 아지트였다. 김팔봉, 이봉구, 조연현, 조지훈, 천상병, 구상, 김동리, 서정주, 황순원, 계용묵, 신석초, 오상원 등 유명 문인들을 골목과 다방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었다. 작가들은 골목을 명동 산맥이라 표현하고 다방은 토끼굴, 술집은 옹달샘이란 은어로 불렀다. 문화예술인들의 시대였던 50~60년대 지금도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 교육방송(EBS) 제작 장편 드라마 <명동백작>은 그 시절 명동의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 정하연은 대학시절 명동을 드나들며 문학을 꿈꿨던 터라 생생히 당시 모습을 그렸다. 1950년대와 1960년대의 명동은 문학의 시대였다. 외국인 관광객 뿐 아니라 내국인의 발걸음도 끊겼다. 일본인이 들어서기 전 명동 일대가 중국인의 거리였던 흔적은 중국대사관과 한성 소학교에 남아 있다. 중국과 국교를 맺기 전까지 중국대사관은 지금의 타이완, 자유중국으로 불렸던 중화민국 대사관이었다. 국제사회에서 중화민국이 퇴장하면서 그 자리를 중국대사관이 차지했으나 자유중국의 흔적은 아직도 골목 곳곳에 남아 있다. 카페로 바뀐 고풍의 옛 화교 회관 건물 복판엔 아직도 자유중국을 상징하는 푸른 바탕 흰 태양의 청천백일 문양이 살아서 골목 넘어 중국대사관을 바라보고 있다. 국민당 계열의 화교들이 돈을 모아 세운 도서관 건물은 유명 중국음식점들이 들어서 있어 미식가들의 순례지가 됐다. 그 아래 소학교 학생들에게 문구와 책을 파는 서점이 있다. 주인에게 근황을 묻자 “학생이 줄어 한류 상품 중심으로 바꿔봤는데 이젠 그나마도 안 될 일이다. 길이 열려야 살길도 생길 것 같다”라고 답한다. 책방 두곳 중 한곳은 아예 업종을 바꿨다. 그 옆 오향장육과 물만두로 이름난 중국집도 문을 닫았다. 대사관 앞 이름 높던 원조 중국요리 골목이 스산해졌다. 한성화교소학교 담을 따라 줄줄이 붙어 있던 노점은 말끔히 사라졌다. 국공내전 시절 산동성에서 건너왔다는 연로한 주인에게 엽차며 호랑이 연고 따위를 샀던 기억은 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됐다. 명동엔 화려한 상가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명동 길 사이사이에 샛골목이 숨어 있고 나름대로 명성을 쌓은 식당도 있다. 길 건너에서 이사와 명동에 터를 잡은 곰탕집은 문을 연 지 70년이 됐다 하나 여전히 유명하다. 그 앞으로 샛골목이 있는데 이곳엔 삼겹살을 두툼하게 썰어 끓인 김치찌갯집이 여럿 숨어 있다. 불황을 모를 듯 번성하던 모습은 가게 간판에 쌓인 먼지처럼 허망한 꼴이 됐다. 종업원에게 어떠냐 묻자 “근근이 문은 안 닫고 있는데, 한계가 온 것 같다”고 답했다. 은성이 있던 자리 윗길에도 골목 안 찌갯집들이 숨어 있다. 오징어나 해산물 등을 넣어 끓인 섞어찌개가 일품인 집이 여럿 있는데, 한가롭기는 마찬가지였다. 명동교자 옆 사이 골목의 삼겹살집과 찌갯집은 점심시간에도 손님을 볼 수 없었다. “아예 사람이 안 보여요”라는 이야기가 실감 난다. 명동 전체 상권이 철시한 상태다. 길을 걷기 힘들 만큼 빽빽하던 사람들은 어디론가 다 사라졌다. 비단 중국과 일본, 동남아 각지에서 오던 관광객만 발이 끊긴 것이 아니라 국내 유람객도 자취를 감췄다. 명동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 뒷골목에 철물과 잡화를 파는 오래된 가게가 있다. 그 안주인은 “아마도 명동이 생긴 이래 지금 같은 때는 없는 것 같다. 전쟁 때도 지금 보다 나았다고 한다”고 한숨을 쉰다. 명동성당 담을 따라 계성여고 뒷문이 있는 골목에 가톨릭 전진상회관이 있다. 명동은 문학의 시대가 끝난 후 70년대 정치의 소용돌이가 닥쳤는데, 전진상회관과 명동성당이 유신에 반대하는 인사들의 중심지가 됐다. 함석헌은 만년까지 전진상회관에서 기독교 사상과 노자 등의 고전 강의를 했었다. 10·26사태 이후 삼엄한 계엄 치하 윤보선과 함석헌 등을 중심으로 대통령 간선제에 반대했던 YWCA 회관 위장결혼식 사건은 명동이 또 한차례 세계의 이목을 끄는 계기가 됐다. 6월항쟁 기록 영상을 보면 명동 거리에 와이셔츠를 걷고 구호를 외치는 인근 직장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명동성당에서 살짝 비킨 샛골목 안에 지금은 떠난 향린교회가 있었다. 민주화 운동사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명소였다. 민주화 열기가 높던 때 명동의 길목과 골목은 그 화로의 불길을 태우던 현장이 됐다. 향린교회 골목은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80년대 젊은이들이 몰려 밤을 불태우던 ‘제3지대’ 등의 나이트클럽은 사라진 지 오래다. 명동 입구를 지키던 중앙극장도 오래전 폐업했다. 무엇을 해도 활황을 누리지 못했던 코스모스 백화점 자리에 쇼핑몰과 극장 체인이 들어왔다. 관광기념품 가게들이 특히 타격을 입었다. “전쟁 때도 지금보다 나았다” 전진상회관 뒷골목에는 오래된 흥미로운 가게들이 살아 있다. 골목 안 냉면집은 보기보다 오랜 연륜으로 건재하고, 식탁 서너개를 두고 라면과 백반을 파는 작은 밥집은 가게문 연 지 반백년은 넘었다고 한다. 근처 직장인들이 소리소문없이 드나드는 숨은 곳이라 힘겨운 시절에도 문을 열 여력이 남아 있었다. 타격을 가장 크게 입은 곳은 아무래도 숙박시설인데, 한류 열풍이 불면서 상업용 건물을 작은 호텔로 바꾸는 일이 유행했다. 지금 그 호텔들은 문을 열 여력조차 없어 보인다. 대형 호텔과 호텔 체인점들은 호캉스와 장기 이용권을 싼 상품으로 내놓고 있다. 보름권과 한달 숙박권은 인근 고시원만큼 싼 가격이다. 급하긴 급한 모양이다. 골목 깊숙한 곳에 오래된 맛집이 숨어 있다. 대연각 빌딩 뒤편으로 수십년 자리를 지켜온 음반가게 ‘부루의 뜨락’은 여전히 문을 열고 있었다. 한류 덕분에 회생하는가 싶더니 음반보다 스트리밍이 대세가 된 시절 저 가게를 언제까지 명동에서 볼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명동성당 쪽 오래된 음반가게 ‘돌체’는 진즉 폐업을 했고 그후 들어온 가게들도 수없이 업종을 바꿨다가 이제는 빈 점포로 남아 있다. 얼마 전 명동 일대의 공실률이 60%를 넘어섰다는 기사가 보도됐는데, 길가에 붙은 업소의 공실률은 그를 훌쩍 뛰어넘어 보인다. 우리 사회에서 성공이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지 질병 사태를 겪으면서 확인할 수 있다. 관광객과 상관없이 칼국수 솜씨를 뽐내던 오래된 식당이며 콩나물국밥을 싸게 팔던 밥집도 함께 문을 닫았다. 다 같은 사정으로 명동이란 무대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더라도, 고난은 서민들의 설자리를 빼앗아갔다. 질병은 자연의 현상일 수 있지만 그 늪을 건널 수 있도록 힘을 보태는 길은 함께 찾아야 한다.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닥친다는 사실을 기억해 이 고난의 시기를 버티는 이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을 떠올렸으면 좋겠다.
골목 내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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