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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총 583 건 검색)

‘1보의 기적’…울산경찰청 러닝크루, 순직 경찰관 자녀에 기부
‘1보의 기적’…울산경찰청 러닝크루, 순직 경찰관 자녀에 기부
2025. 01. 07 20:09사회
... 있다. 순경부터 경무관까지 참여한다. 폴러너즈는 지난해 4월부터 1㎞를 뛸 때마다 100원을 순직 경찰관 자녀에게 기부하는 ‘1보의 기적’ 캠페인을 벌였다. 회원들은 한 달 단위로 뛴 거리를...
업무 차출·차출…주 62시간 근무 과로사 남원시 공무원 ‘순직’ 인정
2024. 12. 26 20:40사회
... 원래 업무에 더해 코로나19 관련 단속이나 총선 사전투표 차출 등으로 과로해오다 숨진 공무원이 순직을 인정받았다. 인사혁신처 공무원재해보상심의회는 지난달 전북 남원시 공무원 A씨(59)의 순직을...
[단독]산불감시에 사전투표에···과로 시달린 공무원, 순직 인정
[단독]산불감시에 사전투표에···과로 시달린 공무원, 순직 인정
2024. 12. 26 14:16사회
... 업무에 더해 코로나19 관련 단속이나 총선 사전투표 차출 등으로 과로를 해 오다 숨진 공무원이 순직을 인정받았다. 인사혁신처 공무원재해보상심의회는 지난달 전북 남원시 공무원 A씨(59)의 순직을...
민원 업무 중 신상 공개, 악성 댓글에 시달리다 자살…김포시 9급 공무원 ‘순직’ 인정
2024. 12. 03 21:18사회
... 열어 김포시 9급 공무원 A씨(37)의 순직을 인정했다고 3일 밝혔다. 인사혁신처는 구체적인 순직 인정 이유를 밝히지는 않았으나, A씨의 업무와 사망 간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포순직민원포트홀인사혁신처

스포츠경향(총 38 건 검색)

‘보살’ 이지혜, 순직 소방관에 1000만 원 쾌척
‘보살’ 이지혜, 순직 소방관에 1000만 원 쾌척
2024. 03. 28 14:43 연예
‘스모킹 건 2’ 제작발표회에 참석한 이지혜. KBS 제공. 가수 겸 배우 이지혜가 몰래 선행을 베풀어 화제에 올랐다. 지난 27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밉지 않은 관종 언니의 선행을 공유하고 싶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해당 글 작성자는 “누군가의 선행이 저에게는 용기가 됐다. 제가 받은 용기가 다른 분들에게는 일상의 작은 감동이 되었으면 한다”고 전했다. 그는 “작년 12월 1일 제주에서 고(故) 임성철 소방장이 순직한 사고가 있었다. 이후 많은 국민 여러분이 함께 애도해 주셨다“며 ”오늘 순직자 유족 지원 결과 문서를 봤는데, 각 시도별 동료분들도 많은 기부를 해주셨고 여러 단체와 개인, 기업에서도 기부를 해주셨다”며 설명했다. 이어서 “(그중에서) ‘밉지않은 관종언니’라는 정말 관종 같은 이름의 내역을 확인했다. 검색하니 이지혜님의 유튜브 채널명이더라”며 “참 정이 가고 익히 보살로 알려지신 분이라 친근해서 더 감동을 하였다”라며 이지혜의 선행사실을 밝혔다. 또 그는 “이지혜 님뿐만 아니라 이름 없는 개인으로, 단체로 위로를 동참해 주신 분들 덕분에 죽음이라는 최악의 결과가 예상되더라도 사명감을 가지고 현장에서 임무 수행할 수 있을 것 같다” 고마움을 전했다. 아울러 “생각지도 못했던 사고를 가까운 동료가 겪음으로써 앞으로의 현장 활동에 대해 고민이 많았는데, 이런 선행으로 잡고민은 사라지고 할 일을 해야겠다는 명확한 신념이 생겼다. 고맙습니다 이지혜님. 앞으로 평생 팬입니다”라고 덧붙여 훈훈함을 자아냈다. 해당 게시물에 따르면, 이지혜는 고 임성철 소방장을 위해 1000만 원을 기부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를 본 누리꾼들은 “이지혜는 항상 호감이다”, “진짜 좋은 사람이다”, “인성이며 실력이며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공식] 이천수 ‘뺑소니범 검거’ 포상금, 순직 경찰 자녀 지원 재단 기부
[공식] 이천수 ‘뺑소니범 검거’ 포상금, 순직 경찰 자녀 지원 재단 기부
2023. 07. 07 15:27 축구
전 축구선수 이천수ㅣ디에이치엔터테인먼트 축구 국가대표 출신 이천수가 음주운전 뺑소니범을 잡아 경찰에 인계한 공로로 감사장과 포상금을 받는다. 7일 스포츠경향 취재 결과 이천수는 18일 서울 동작경찰서에서 열리는 수여식에 참석해 감사장과 포상금을 받는다. 뺑소니범을 검거하는 데 일조한 매니저도 함께 참석할 예정이다. 이천수는 포상금에 이어 이번 일과 관련된 유튜브 영상 수익금을 더해 순직 경찰관 자녀 지원 관련 재단에 전액 기부할 계획이다. 이천수와 그의 매니저는 4일 오후 서울 동작역 부근 올림픽대로에서 음주운전을 하다 택시를 들이받는 사고를 낸 뺑소니범을 붙잡아 경찰에 넘겼다. 이천수와 매니저는 비가 오는 가운데 약 1km를 달려 음주 운전자를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천수 측은 매체와의 통화에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 그 상황에서는 누구든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라며 “아무도 모를 줄 알았는데 사람들이 알아봐 주신 것 같다.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알려져 쑥스럽다”는 입장을 전했다. 이천수는 현재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으며, TV조선 새 스포츠 예능 ‘조선체육회’에서 활약할 예정이다.
배우 이영애, ‘K-9 순직 군인’ 자녀 학비 지원
배우 이영애, ‘K-9 순직 군인’ 자녀 학비 지원
2023. 06. 24 00:23 연예
이영애 SNS 배우 이영애가 순직한 군인의 자녀를 위해 써달라며 1억원을 쾌척했다. 육군부사관발전기금재단은 23일 “이영애씨가 최근 성금 1억원과 선물을 재단에 기탁했다”고 전했다. 기부금은 2017년 강원도 철원군에서 발생한 K-9 자주포 폭발 사고로 순직한 고 이태균 상사 아들의 교육비와 자녀를 6명 이상 둔 부사관 부부 15쌍의 양육비를 지원하는 데 쓰일 예정이다. 이태균 상사 유가족은 “6년 전 일을 잊지 않고 아들의 대학 졸업 때까지 학비 전액 지원을 약속해주신 이영애씨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다”고 말했다. 이영애 측에 따르면, 최근 이태규 상사 아들 이용재 군에게 학비와 함께 장학 증서를 직접 전달했다. 이 자리에서 “쌍둥이 엄마로서 육아의 고충을 잘 안다”며 “열악한 환경에서도 아이들을 건강하게 돌보는 아내 분들께 깊은 위로와 존경을 보내드린다”고 응원했다. 이영애는 6 ·25 참전용사 아버지, 육사 출신 참전 군인 시아버지 영향으로 군인들을 위해 꾸준한 기부를 해 온 바 있다. 지난 2015년 나라를 위해 희생한 용사들을 위한 ‘대한민국 부사관 사랑 음악회-더 히어로스’ 경비 4억원 전액을 후원했고, 같은 해 8월 북한 DMZ 지뢰 도발로 부상을 당한 김정원 하사와 하재헌 하사에게 위로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지난해 3월에는 우크라이나 대사관을 통해 전쟁 피해 어린이와 평화를 위한 구호금 1억원을 전달했다. 이영애는 tvN 새 드라마 ‘마에스트라’로 안방극장에 컴백할 예정이다.
[최영기 변호사의 알쓸신軍] 35년 지나 뒤 늦게 순직이 인정된 경우 국가배상을 청구할 수 있을까
[최영기 변호사의 알쓸신軍] 35년 지나 뒤 늦게 순직이 인정된 경우 국가배상을 청구할 수 있을까
2021. 05. 04 07:00 생활
1983년 10월 군입대 후 성실하게 군복무 중이던 A는 1985년 6월 스스로 수류탄을 폭파시켜 사망하였다. 당시 군 헌병대는 ‘A가 평소 폐쇄적인 성격으로 부대원들하고 어울리지 못했는데, 가정불화까지 겹쳐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며 A의 사망을 개인적 사유에 의한 일반 사망으로 판단하였다. 그런데 A의 가족들은 가정불화는 없었고 A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이유가 없다며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재조사를 요구하였다. 결국 A의 사건을 다시 조사한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2019년 망인이 선임병 등 상급자들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사망에 이르렀다며 뒤늦게 순직을 인정했다. 이에 A의 유족들은 그간 수차례 조사 요구에도 사망원인의 진실을 파악하지 못한 책임이 있다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였다. 최영기 변호사(법무법인 승전)위 사례는 필자가 최근까지 진행했던 실제 사건이다. 35년이 넘게 고통받아온 가족들을 보며 국가가 마땅한 책임을 져 줄 것을 기대한 사건이었기에 필자는 각별한 관심으로 사건을 진행했다. 그런데, 해당 국가배상 사건에서 1심 재판부는 ‘1985년 당시 헌병대 등 군 수사기관이 사망원인을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지만 가용한 여건하에서 최선을 다해 수사를 하였다는 점이 인정된다’며 A 유족들의 청구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2심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 2심 재판부는 “당시 군복무를 함께 했던 병사들이 망인이 선임하사의 욕설과 폭행에 시달렸다고 진술하고 있는 점, 망인을 관리했던 소대장에 대하여 아무런 조사를 진행하지 않은 점, 이 사건 기록에서 유서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였으나 일부 인원들이 당시 망인이 작성한 유서가 있었다고 진술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할 때, 군 수사기관의 부실 수사는 현저하게 불합리하거나 경험칙 또는 논리칙상 도저히 합리성을 긍정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다”고 적시하며 유족들의 국가배상 청구를 인용했고 망인의 유족이 그간 받을 수 있었던 보훈급여금 상당의 손해를 입었다고 판시하며 국가가 약 3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하였다. 물론 금전적으로 보상을 받는다고 하여 유족들의 상처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판결과 배상이 국가가 국방의 의무를 다하다가 사망한 국민과 그 가족들의 명예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그 사망의 원인을 철저히 밝히고 그에 대한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해야 함은 물론, 만약 그러한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 망인과 가족들이 피해를 입었다면 그 피해까지 완전히 보상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주간경향(총 3 건 검색)

[광복 70년 역사르포](14) 경부고속도로-추풍령…건설근로자 순직 위령탑 조근근대화 ‘날림의 유산’(2015. 05. 26 19:49)
2015. 05. 26 19:49 사회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물건은 무엇일까. 물론 국민이나 애국심 같은 무형의 재산은 제외하고 실제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 중에서 말이다. 민간·국가를 합해 장부가액으로 가장 비싼 것은 바로 경부고속도로다. 서울에서 부산을 연결하는 경부고속도로를 금액으로 환산하면 10조8806억원이다.(2013년 회계연도 국가결산 기준) 이는 대한민국 국유재산 총액 912조1000억원 중에서 단연 1위다. 건물로 가장 비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1·2단계를 모두 합해도 채 1조원이 안 된다는 점에서 경부고속도로의 재산가치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서울에서 목포까지 서해안고속도로는 6조5618억원짜리다.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 2월 착공해 1970년 7월 준공돼 45년이나 된 낡고, 땜질투성이 도로이지만 여전히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비싼 재산가치를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경부고속도로의 정 가운데 지점 철도도 마찬가지지만 경부고속도로 역시 우리나라 최초의 고속도로는 아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속도로는 경부고속도로보다 1년여 빠른 1969년 4월 개통된 서울~인천 간 경인고속도로다. 경인고속도로는 23.4㎞에 불과해 경부고속도로 428㎞의 10분의 1도 안 되기 때문인지, 고속도로 하면 경부고속도로가 연상된다. 게다가 경부고속도로는 비단 금전적 가치뿐만 아니라, 산업의 대동맥이나 조국 근대화의 상징 등 온갖 수식어를 달고 60년대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 현대사 연구가 박태균 교수(서울대 국제대학원)는 경부고속도로를 ‘1960년대의 결정체’라고 표현하고 있다. 경부고속도로 추풍령 휴게소에 있는 준공 기념탑에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찬사와 칭송이 가득하다. 경부고속도로 정 가운데 지점이 바로 추풍령이다. 전체 길이 428㎞의 중간인 214㎞에 위치한 추풍령 휴게소 하행선에 ‘서울·부산 중심점’ 탑이 서 있다.(현재 경부고속도로는 굽은 도로를 곧게 펴는 선형개량 공사로 총연장이 416㎞로 준공 당시보다 12㎞ 짧아졌다) 조그만 소공원으로 꾸며진 개통기념 표석 안내판에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한국 경제를 바꾼 가장 위대한 순간 1위’라고 설명하고 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구상은 1967년 대통령 선거 유세 과정에서 처음 나왔다. 역시 한국 경제를 바꾼 위대한 순간은 선거라는 정치적 국면에서 나온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3선 개헌을 처음 언급한 공화당 윤치영 의장서리의 개헌 필요성 발언(1967년 12월 17일)과 이어진다. 그래서 경부고속도로에 대해 정치적 논란이 많았다. 마치 이명박 대통령(MB)의 4대강 운하사업처럼 말이다. 경부고속도로는 1967년 12월 13일 임시 국무회의에서 경부고속도로 추진위원회를 구성하면서 본격 시작했지만, 설계도면이나 자금동원 계획 등 구체적 계획은 하나도 확정하지 못했다. 정부는 세계은행(IBRD)에서 자금을 빌리려 했지만 거부당했다. 결국 정부는 한·일 국교정상화 대가로 얻은 대일청구권 자금을 고속도로 건설에 투입했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근시안적인’ 야당이 건설현장에 드러눕는 등 방해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영웅을 만들기 위한 상징조작이다. 당시 야당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반대한 것은 사실이다. 당시 야당 당수 유진오는 “경부고속도로 계획은 근대화의 기간인 도로 건설이라는 데서 그 취지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나 현 경제 실정에 비추어 사업의 우선순위에 의문을 갖고 있으며, 남북 간보다는 오히려 동서 간을 뚫는 길이 급한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동아일보 1968.1.11) 추풍령 휴게소는 경부고속도로의 중앙으로 이곳에 조그만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야당이 반대한 이유는 자금지원을 요청받았던 IBRD와 같은 맥락이었다. IBRD가 자금지원을 거부한 이유는 “남·북 종단도로 건설보다 동·서 횡단도로 건설이 경제적으로 더 필요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3선 개헌 반대투쟁에서 야당은 ‘하이웨이 전술’이라고 비난한 것을 보면 정치적 의도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신문을 보면 “경부간 고속도로 건설을 내세워 정부 실적 PR를 최대한 활용키로 한 것, 지난번 오산~천안 간 고속도로 개통식 때 많은 시민의 운집으로 톡톡히 재미를 본 이후 부상된 것” 등의 기사가 있다.(경향신문 1969.10.7) 이후 1971년 대선에서 야당 김대중 후보조차 “우선은 지방국도 포장, 2단계로 고속도로가 되어야 한다”는 공약을 내세우는 등 도로 건설은 선거 때마다 여야 단골 공약이 됐다. 아마 크던 작던 선거 때만 되면 도로 기공식이 벌어지는 ‘씁쓸한 전통’도 이때부터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대전인터체인지에서 대통령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개통식을 하고 있다. 높이 30.8m 준공 기념탑 우뚝 정치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1968년 2월 1일 16개 건설업체가 일제히 공사에 돌입했다. 여기에는 3개 군 공병단도 가세해 마치 전투 치르듯 공사가 이뤄졌다. 주요 공사는 현대건설이 맡았다. 당시 이명박 현대건설 사장(MB)은 나중에 “경부고속도로는 정상적인 공사가 아니었다. 전투였다. 정주영 회장은 민간 출신의 사령관이었다”고 회고했다.(이명박, 신화는 없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서 가장 난공사는 옥천 당재터널 공사였다. 당시 공사에 참가했던 현대건설 공영진 부사장은 “지층이 절암토사로 된 퇴적지층이라 공사 진척이 되지 않았다. 해결방법은 보통 시멘트보다 20배나 빨리 굳는 조강시멘트를 투입하는 수밖에 없었다. 흑자를 포기하는 결단이 요구됐다. 결국 이 공사는 조강시멘트를 투입하면서 대대적인 인력을 투입해 3개월 걸린다는 공사를 25일 만에 끝내 경부고속도로 개통 행사를 정시에 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매일경제 1995.6.14) 드디어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준공식이 열렸다. 불과 3년 5개월 만에 428㎞ 길이 4차선 고속도로를 뚫은 것이다. 원래는 1971년 준공할 계획이었지만 이를 1년이나 앞당겼다. 총공사비는 429억7300만원으로 1㎞당 1억원에 고속도로를 만들었다. 추풍령휴게소 상행선 방향에 웅장한 30.8m 높이의 경부고속도로 준공 기념탑이 서 있다. 서울대 미대 송영수 교수가 고속도로 인터체인지 형상으로 디자인한 것이다. 이 탑의 정면에는 낯익은 서체(박정희 서체)의 “서울 부산 간 고속도로는 조국 근대화의 길이며 국토 통일의 길이다”라는 휘호가 써 있다. 이 탑의 하단에는 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기본사항이 적혀 있다. 폭 22.4m(4차선) 도로로 100m 이상 교량이 29개소, 100m 이하 교량 281개소, 터널 상하 12개 4008m, 시멘트 663만2000대, 철근 4만8700톤, 연인원 890만명이 165만대의 장비를 동원해 만들었다고 기록돼 있다. 탑의 뒷면에는 당시 건설부 장관이 “이 고속도로는 박 대통령 각하의 역사적 영단과 직접 지휘 아래 우리나라 재원과 우리나라 기술과 우리나라 사람들의 힘으로 세계 고속도로 건설사상에 있어서 가장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조국근대화의 목표를 향해 가는 우리들의 영광스런 자랑이다”라고 써 있다. ‘역사적 영단’ ‘직접 지휘’ 등 찬사와 칭송으로 가득하다. 준공 기념탑이 높은 곳에서 당당하게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반면에 77명의 건설 순직자 위령탑은 멀리 떨어진 금강휴게소 한쪽 구석에 서 있다. 토목 만능 정치 이데올로기 남겨 시인 이은상이 지은 ‘고속도로의 노래’가 있다는 사실은 여기서 알았다. 그 중 “꿈에도 내 소원 조국의 번영/달려라 자주의 길/달려라 부강의 길/천리를 주름 잡는 고속도로/…달려라 자유의 길/달려라 평화의 길/세기를 앞당기는 고속도로/…달려라 승리의 길/달려라 통일의 길/역사를 창조하는 고속도로”라는 대목이 인상 깊다. 기념탑 정면에 있는 박 대통령의 ‘통일의 길’이라는 대목과 노랫말에 등장하는 ‘자주·부강·자유·평화·승리·통일’이라는 단어가 조금은 의외다. 솔직히 경부고속도로의 경제성과 효용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부정적 유산도 많이 남겼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기념탑에 새겨진 세계 최단 기간 건설이라는 자랑은 ‘날림공사’ ‘부실공사’와 비슷한 말이다. 경부고속도로는 개통 1년 만에 전 구간을 다시 포장해 총건설비의 10%가 추가됐다. 건설비 절감을 위해 고속도로 안전에서 매우 중요한 중앙분리대를 설치하지 않은 채 개통한 것은 세월호 참사의 근원과도 연결된다. 무엇보다 부정적 유산은 토목 만능 정치 이데올로기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경부고속도로의 경우 과학자나 공학자들이 정치적으로 함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과학자와 공학자의 양심이 살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참여했던 MB는 박정희 유산을 재연하려 했다. 4대강 운하가 바로 그것이었다. MB의 문제는 ‘댐’을 ‘보’라고 우기며 과학과 공학을 왜곡했다는 점이다. 그 토목 만능 정치 이데올로기에 과학자와 공학자들이 동원됐음은 물론이다. 그런 점에서 MB는 과학과 공학을 정치논리에 함몰시킨 커다란 ‘우’를 범했다.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 한편에 조그만 위령탑이 있다. 건설 순직자 위령탑이다. 3년여라는 짧은 기간 ‘전투’ 같은 공사로 77명의 근로자가 사망했다. 도로공사는 매년 7월 7일 이곳에서 위령제를 연다고 한다. 이 위령탑은 그 순직자를 기리기 위한 탑으로 고속도로 준공과 함께 건립했다. 의문스러운 것은 기념탑과 위령탑을 왜 이렇게 각각의 장소에 건립했을까 하는 점이다. 찬양과 경축의 자리와 추모의 자리는 한곳에 있어선 안 된다는 발상이었을까. 기념탑이 추풍령 위에서 내려보듯 서 있다면 위령탑은 계곡 아래에서 자신이 만든 고속도로를 훔쳐보는 형국이다. 숨진 이들에게 주어진 ‘훈장’은 ‘산업전사’라는 호칭이었다. 이곳 위령탑에 시인 이은상은 이들을 ‘그들은 실로 조국근대화를 향한 민족행진의 산업전사’라고 헌정했다. 하지만 지금도 산업전사라는 훈장 하나로 많은 노동자들이 죽어가고 있다. 아예 훈장도 없이 숨지는 해고노동자도 적지 않다. 2009년 쌍용자동차 사태 이후 28명의 노동자가 숨졌다. 경부고속도로 준공 이후 45년이 지난 지금도 매년 9만명, 하루 251명의 노동자들이 재해를 당하고 있다.(2015년 1월 노동부 통계) 이젠 ‘산업전사’라는 이름 하나로 그들을 위무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광복 70년 역사르포
[정동늬우스]안타까운 순직과 반짝 대책(2011. 12. 14 15:25)
2011. 12. 14 15:25 사회
재난에 처한 인간을 향하여, 그 재난의 한복판으로 달려드는 건장한 젊은이들이 저렇게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인간다움이 아직도 남아 있고, 정부와 국가의 기능이 정확하고도 아름답게 작동되고 있다는 신뢰감을 느끼게 한다. 인간만이 인간을 구할 수 있고, 인간만이 인간에게 다가설 수 있으며, 인간만이 인간을 위로할 수 있다는 그 단순명료한 진실을 나는 질주하는 소방차를 바라보면서 확인한다.(김훈 ‘인간에게 다가오는 인기척’ 중에서) 2003년 3월 어느 화재현장에서 불길에 맞선 한 소방대원이 뜨거운 불길과 매케한 연기를 무릅쓰고 불길을 잡고 있다. /서성일 기자 12월 3일 오전 경기 평택시 서정동 가구전시장에서 화재 진압과 인명 구조작업을 하던 송탄소방서 119구조대 이재만 소방장과 한상윤 소방교가 숨졌다. 이들은 철수를 하다 무너진 천장 구조물에 깔려 죽었다. 각각 부인과 자녀 두 명을 두고 있다. 올 들어 소방공무원 6명이 죽었다. 소방관들은 죽음에 직면해 있다. 불타는 구조물과 잔해는 그 자체가 무기이자 날벼락이다. 수많은 소방관들이 깔려 순직했다. 1977년 9월 14일 남대문시장에서 큰 불이 나 300여 점포가 전소됐다. 상인들 인명피해는 없었다. 미8군 소방대 이재곤 부대장이 무너져내리는 건물벽에 깔려 순직했다. 1978년 11월 1일 수원 삼성전자 공장에서 불이 났다. 덜 꺼진 담뱃불이 화인이었다. 수원 중부소방서 윤상욱 소방관이 지붕에서 내려앉은 철근에 맞아 숨졌다. 그는 보증금 10만원 월 6만원짜리 삭월세방 한 칸에 부인, 남매와 함께 살았다.  2011년 3월 23일 서울 서대문구 아현동 가구상가 밀집지역에서 불이나 소방관들이 연기 속에서 화재진압 작업을 하고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1988년 3월 6일 충북 충주시 새한미디어 공장 화재로 충주소방서 이성우 소방교가 순직했다. 그는 테이프조립실과 성형실 사이 무너진 벽돌더미에서 발견됐다. 2000년 10월 25일엔 소방관 임은종씨가 강서구 화곡본동 2층 건물에서 진압하다 건물벽과 바닥이 무너져 숨졌다. 스물다섯 나이였다. 2007년 11월 28일 경기 이천시 CJ 이천공장 화재현장에서 숨진 윤재희 소방사는 당시 스물아홉 나이로 결혼식을 2개월 남겨두고 있었다. 2001년 3월 4일 서울 서대문구 홍제1동 2층 주택 화재 때 진화작업과 생존자 구출작업을 하던 서울 서부소방서 소속 박동규 소방장(45) 등 6명이 숨졌다. 한꺼번에 6명이 숨지기는 처음이었다. 2008년 8월 서울 은평구 대조동의 한 나이트클럽 화재 진압에 나갔던 은평소방서 소속 조기현·김규재 소방장, 변재우 소방사가 갑자기 무너진 천장 구조물에 깔려 순직했다. 화재현장에서 연기에 질식해 숨지는 일도 다반사다. 1970년 4월 9일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 4가 상아탑 지하다방에서 불이 났다. 연탄난로가 과열되면서 줄에 널었던 수건에 인화돼 일어난 화재다. 영등포소방서 박영서 소방사(32)는 14명을 구하고 연기에 질식해 숨졌다. 그는 1959년 12월 소방경찰이 된 후 700여회 출동했다. 발을 헛디뎌 죽고, 불연소 가스가 폭발해 죽는다. 분초를 다투며 출동하다 죽기도 한다. 1970년 영등포소방서 박영서 소방사의 살신성인 구조담을 전하는 기사. /경향신문 자료 지난 4일 낮 화재현장에 출동하다 소방차가 뒤집혀 순직한 서울 성동소방서 방호주임 고상묵씨는 근속 26년에 출동횟수 9000회의 기록을 가진 소방 ‘베테랑’. 일제 때부터 큰 화재는 거의 다 겪은 그는 “1만번 출동하고 물러나겠다”던 게 소원이었다.(1966년 8월 5일자, 불길 속에 보낸 일생) 1983년 같은 소방서 소속 우종섭 소방사도 화재현장에 출동하다 차량 충돌사고로 순직했다. 일반인들은 흥청거리는 명절이나 경축일, 연말연시에는 더욱 화재가 잦아 비상근무를 해야 한다. (중략) 소방관들은 자신들의 직업을 ‘창살 없는 감옥’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하나같이 온몸이 상처투성이라는 점이다. 손등은 쭈글쭈글하고 굳은 살이 박혀 있는가 하면 얼굴과 목·팔다리 등이 화상으로 얼룩져 있다. (중략) 화재현장에서 입은 상처로 어깨 허리 무릎 등에 신경통을 앓기도 하고, 식사를 제때 하지 못해 위장이 약한 사람도 있으며, 연기를 많이 마셔 기관지가 약해지거나 시력이 나빠진 사람도 있다.(경향신문 1983년 6월 18일자, 재난 전선 지키는 안녕의 파수꾼들 소방관) 1983년 경향신문이 전한 소방관들의 상황은 지금도 그닥 나아지지 않았다. 소설가 김훈은 소방관들의 출동에서 “정부와 국가의 기능이 정확하고도 아름답게 작동되고 있다는 신뢰감을 느낀다”고 했지만, 소방관들에 대한 처우와 대우에선 국가와 정부의 기능이 작동하지 않거나 오작동한다. 소방관이 죽고 다쳐야 반짝 대책을 내놓을 뿐이다. 국가와 정부의 영역은 소방관들에게 또다른 재난현장이다. 1998년 경남 사천소방서 소속인 이정근씨는 경남 하동군 덕천강에서 물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다 급류에 휩쓸려 죽었다. 유족은 2000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를 냈다. 소장에서 로프와 자일 등 원시적인 구조장비를 지적했다. 이들은 고위공직자들도 비판했다. “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국무총리, 장관, 국회조사단, 여야 총재 등이 현지 방문을 하는 바람에 구조대원들은 바쁜 와중에도 도로 청소, 브리핑 자료 준비 등에 매달리고 있다.” 서울 대조동 나이트클럽 화재사고로 순직한 조기현, 김규재, 변재우 소방관의 유족들이 은평초등학교에서 열린 합동 영결식에서 통곡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 국립묘지 안장은 수십년된 숙원이었다. 소방관은 지방직 일반공무원이란 신분 때문에 국립묘지에 묻히지 못했다. 1994년에야 안장될 수 있었다. 하지만 군사정권의 하수인과 친일파들은 쉽게 가도, 소방관들은 웬만해선 가기 힘든 곳이다. 지난 7월 고양이를 구조하다 로프가 끊어져 추락사한 김종현 소방교의 국립묘지 안장은 아직 결정나지 않았다. 2001년 5월 서울 관악소방서 채희수 소방교가 봉변 여대생을 돕다 흉기에 맞아 숨졌다. 소방서 측은 공무원연금관리공단에 ‘순직’으로 인정해 달라며 유족보상금 지급을 신청했지만, 공단은 규정을 이유로 거부했다. 2000년대 들어 소방관들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문제가 나왔다. 일부 지자체가 부분적으로 진단을 하고 있지만, 국가적이고 근본적인 대책은 없다. 지난 5월 전남지역에서 3명이 잇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들은 우울증을 앓았다. 2001년 3월 소방관 6명이 숨진 홍제동 화재사고 때 작전에 나갔던 동료 한 명은 그 당시 상황을 기억 못했다.
정동늬우스
[우정사서함]순직 정보통신종사원 추모비 제막
[우정사서함]순직 정보통신종사원 추모비 제막(2006. 02. 14)
2006. 02. 14 사회
몸 바쳐/사랑과 희망을/전해주는 날개가 되어/주셨던 분들에게/깊은 감사를 드립니다./우리들의 사랑속에 편히/ 잠드소서.” 충남 천안 유량동 정보통신공무원교육원 야외음악당 한켠 산자락이 닿는 곳, 나지막한 추모비에 새겨진 비문이다. 우정사업본부(본부장 황중연)가 숙원사업 중 하나인 순직 정보통신종사원에 대한 추모비 제막식을 지난 2월 3일 가졌다. 연금관리공단 자료에 의하면 1992년 이후 순직 종사원은 191명이며 우정사업본부 자체 조사에 의하면 광복 이후 순직 종사원은 10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무성 우정사업본부 노사협력팀 사무관은 “체신박물관 등에 개인별 추모상이나 추모비는 있었으나 각종 재해나 사고로 순직한 정보통신 종사원의 숭고한 넋을 합동으로 기리는 추모비는 없었다”면서 “우정사업본부는 제3기 우정사업본부 출범에 맞춰 추모비 건립을 추진했다”고 말했다. 화강석으로 제작된 추모비의 작품명은 ‘혼불’. 불꽃을 형상화한 모양으로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영혼불멸의 이미지와 함께 불꽃처럼 열정을 가지고 일했던 종사원들의 영혼의 안식처가 되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내포하고 있다. 이 작품은 조각가 구재산씨(한뫼현대조형연구소 대표)가 제작하고, 비문은 우애령 작가가 지었다. 지난 2월 3일 제막행사에서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은 “정보통신사업 발전을 위하여 헌신하시다 순직한 종사원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넋과 혼을 위로하기 위해 추모비를 건립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앞으로 무고한 재해와 사고로 희생당하는 일이 없도록 종사원들의 안전사고 예방 및 근무환경 개선에 적극 노력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한편 우정사업본부는 어린이의 건전한 취미생활 육성과 우표문화 확산을 위해 ‘대한민국어린이우표전시회’를 2월 3일부터 7일까지 5일간 광주학생교육문화회관(광주시 서구 쌍촌동)에서 개최했다. 우정사업본부가 주최하고 광주광역시와 광주시교육청이 후원하는 이번 전시회는 초등부 115명과 중등부 63명 등 180명이 출품한 우표작품 198틀과 함께 우표원도, 우표 120년사 및 북한우표 5틀 등이 전시되는 전국 규모의 어린이 우표전시회다. 광기의 전위예술가 백남준 떠나다 “예술은 사기”라고 외쳤던 천재 예술가 백남준이 타계했다. 이 ‘사기’라는 표현은 총체적인 예술에 대한 에둘림의 표현이 아닌가 싶다. 세계 최초의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우리의 가락 아리랑을 읖조리고 ‘엄마’라는 단어를 되뇌며 세상을 마감했다. 천재의 속성에는 약간의 광기를 지녔듯이 백남준 역시 광기넘치는 기인이었다. 피아노를 부수고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가위로 잘라 버리고 바이올린을 질질 끌고 가던 게 백남준의 최고의 행위예술이었다. 또 미래예술의 천재로 1984년에는 ‘조지 오웰’의 소설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서울·뉴욕·파리를 동시에 연결한 거대한 TV쇼로 방영된 적이 있었다. 이 작품은 기성관념을 송두리째 앗아 기상천외의 퍼포먼스로 승화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인생 자체가 전위예술의 재료였다. 모든 형태물은 퍼포먼스 도구였고 과학과 미술의 만남을 이끌어 영감을 퍼포먼스로 폭발시킨 백남준이었다. 그는 토털 아티스트(시인, 작곡가, 피아니스트, 화가, 철학자)였음이 틀림없다. 그는 세계인이자 분명한 한국인이었다. 생전의 유언에 따라 화장된 유해는 한국·미국·독일에 안치된다. 이 3국은 오늘 3월께 대대적인 추모행사를 치를 예정이다. 2008년께 경기도 용인시에 개관될 백남준 전시관에서 그 특유의 웃음에도 퍼포먼스를 오버랩시켜 볼 수가 있을까. 1997년에는 독일 중부지방에 위치한 캇셀에서 현대미술전이 열렸다. ‘도큐멘타 캇셀 1997’이었다. 그때 백남준의 작품도 한 점 소개되었다. 독일 우정성은 소형 시트 형식으로 백남준 우표를 발행했다. 여해룡〈시인·칼럼니스트〉 yhur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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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에서 순직한 전재규씨의 동생 전정아씨…세상을 향한 공개 호소문
2004. 05. 01 화제
“전재규 홈페이지 폐쇄 권고로 인해 가족 모두 땅을 치고 울었어요” 지난해 말 남극에서 불의의 조난사고로 순직한 세종과학기지 전재규 대원의 여동생 전정아씨가 최근 한국해양연구원(KORDI)에 입사했다.  한국해양연구원 극지연구소측에서 행정직 근무를 제안했고, 이를 받아들이면서 오빠의 뒤를 이어 이곳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녀는 많이 야위어 보였다. 오빠를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배신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모 업체에서 운영하는 전재규 대원의 개인 홈페이지 게시판을 폐쇄하겠다는 공고를 했다. 당초 영구 보전하겠다던 회사측은 입장을 바꿔 5월부터 홈페이지 게시판을 막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에 전정아씨(27)는 두 번에 걸쳐 항의 메일을 보낸 상태다. 하지만 일상적인 답신만 도착했을 뿐 구체적인 해결 방안은 제시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국립묘지 안장을 추진하고 있지만 결과를 기다리라는 말만 들릴 뿐. 그녀는 인터넷 카페를 운영하며 네티즌과 다양한 정보를 주고받고 있었다. 오빠를 그리며 쓴 일기 형식의 글을 올리며 네티즌에게 위로받고 있는 셈이다. 그녀가 직접 쓴 글을 공개한다. 오빠는 한 평도 허락받지 못한 땅 2004/03/03 3월이라고는 하지만 한겨울만큼 너무 추워졌어요. 옷장 속에 정리해두었던 겨울옷을 다시 꺼내야 할 것 같네요. 요즘에 장군묘 봉분 문제로 국방부가 쓴소리를 듣고 있다는 거 아시죠? 이번에 드러난 이 문제로 오빠의 국립묘지 안장에 다시 한번 희망을 걸어봅니다. 자세한 내용은 ‘관련 기사글’에 실려 있으니 한번 들러보시구요. 오빠의 국립묘지 안장과 함께 현 국립묘지의 문제점을 근원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관련 기사글에 덧붙이자면, 장군의 아내까지 국립묘지에 장군과 똑같은 대우로 안장한다는 내용도 입법 예고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하더군요. 전재규 동생 2004/04/02 어릴 때부터 저에겐 별명이 있습니다. 이름 때문도 성격 때문도, 외모 때문도 아닙니다. 이유는 오빠 때문이었습니다. 항상 ‘전재규 동생’이라고 불렸으니까요. 같은 초등학교에 다니던 오빤 항상 전교 1등에 심성도 착했죠. 전 그런 오빠의 그늘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영월이라는 곳이 좁은 동네라, 중학생이 되어도 고등학생이 되어도 여전히 전재규 동생이었습니다. 항상 오빠의 그늘 밑에 있는 저는 우울했고, 벗어나고 싶은 맘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영원히 ‘전재규 동생’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토록 싫었고 벗어나고만 싶었는데… 이젠 그렇게 살려고 합니다. 아니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이곳 해양연구원에서, 그것도 극지연구소에 일하게 됐습니다. 오빠가 있었던 곳. 여기저기서 오빠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슬프지만 이렇게 오빠에 대한 추억과 함께 하려고 합니다. 중원사에 다녀왔습니다 2004/04/12 지난 주말엔 중원사에 다녀왔습니다. 부모님은 2주에 한 번씩은 가시지만, 전 정말 오랜만이었습니다.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들더군요. 진달래, 개나리 꽃을 추모비 앞에 꽂아주었습니다. 조화여서 오빤 보고만 있어야 할 듯하네요. 아버진 부처님께 108배를 하셨고 어머닌 아주 많이 흐느끼셨습니다. 아직 우리에겐 오빠를 잃은 슬픔이 남아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너무나 우울했습니다. 말조차 하기 싫더군요. 부모님을 위로해드릴 사람은 저뿐이데도 제 감정만 추스리느라 부모님께 너무 소홀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슬퍼지는군요. 연구원 생활 2004/04/19 제가 극지연구소로 자리를 옮긴 지 20일이 다되었네요.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땐 너무 두렵고 무서웠는데 이젠 제법 익숙해져갑니다. 통근버스 타고 출퇴근하는 것부터 언니들과 많이 친해졌고, 동갑내기 친구도 생겼어요. 첫 출근 전날엔 부모님과 작별인사를 하며 얼마나 울었는지. 아빠도 엄마도 저두 모두 울었죠. 멋지게 인사드리고 싶었는데… 눈물이 흐르는 건 막을 수가 없더라구요. 그날 밤엔 엄마 몰래 집에서 가져온 오빠 사진을 앨범에 정리했어요. 엄마가 또다시 슬퍼질까 봐. 나 혼자 오빠 사진을 보며 슬픔을 감당하려 했죠. 작년 여름에 활짝 웃고 찍은 오빠 사진을 보니 또 눈물이 나더라구요. 매일 출퇴근할 때나 사무실에서 오빠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어요. 늘 머릿속엔 불쌍한 오빠 생각에 속으로 울어야 했죠. 가끔 부모님이 오셔서 기분 전환도 해주세요. 떨어져 있으니까 제 걱정으로 오빠를 잃은 슬픔을 조금이나마 잊으시는 것 같아요. 우리집에 새로운 식구 강아지가 생겨서 그나마 부모님을 웃음 짓게 하네요. 배신감에 잠을 이룰 수 없어요 2004/04/19 “야, 이거 봐~ 넘 멋있지 않냐?” 예전에 오빠가 제 방에서 모니터를 보고 씨익 웃으며 한 말입니다. 홈페이지를 완성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스스로도 아주 흐뭇해하더라구요. 은근히 자랑하고 싶어하면서. 그때의 오빠 얼굴이 생각납니다. 그토록 고생스럽게 만들어 은근히 인정받고 싶어하던 홈페이지. 오빠의 숨결이 아직도 느껴지는 곳인데… 짧았던 남극 생활에서도 유일하게 쉴 수 있는 보금자리였는데… 근데 오빠의 달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너무 쉽게 무너지는 건 아닌지 걱정입니다. 오빠의 홈페이지에 5월부터 게시판을 사용할 수 없다는 글이 있더군요. 관리자의 로그인이 필요하대요. 이렇게 오빠가 없다는 걸 또다시 느껴야 하는군요. 마지막 순간에도 오빨 외롭지 않게 해야 했는데 또다시 이렇게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니. 미치도록 맘이 아픕니다. 심장이 터질 듯합니다. 영구 보전하겠다는 드림위즈에 대한 배신감과 저의 무능에 화가 납니다. 드림위즈 전화번호도 알 수 없구… 오빠의 홈페이지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지 메일을 보냈는데도 답변이 없습니다. 날짜는 하루하루 가고 이렇게 5월이 다가오는데… 휴~ 지금 답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답변이 늦어지면 직접 찾아가봐야 겠네요. 오빠의 흐뭇해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오빠의 열정을 지켜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리 / 강수정(객원기자)  사진 / 장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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