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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총 362 건 검색)

트럼프 ‘719조원 약탈 청구서’ 압박…우크라 “식민지 협정” 반발
2025. 02. 23 21:15국제
... 우크라이나에 일방적으로 불리해보이는 광물 협정을 강요하는 데 대해 우크라이나 내부에선 “식민지 협정” “미국이 과거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한 행동과 마찬가지” 등 사실상 약탈에 가깝다는...
북, 러시아 파병
[책과 삶] 일본, 전후 식민주의에서 길을 잃다
[책과 삶] 일본, 전후 식민주의에서 길을 잃다
2025. 02. 20 20:15문화
..., 누구보다 급진적으로 일본을 바꿔놓으려 했던 혁명가들도 복잡하게 얽혀 있는 보편주의와 식민주의의 미로에서 길을 잃었다고 말한다. 고바야시 히데오, 가라타니 고진, 난바라 시게루, 와다 하루키 등...
책과 삶
‘식민의 상처’부터 ‘로맨스’까지…필리핀 소설, 한국 독자 만난다
식민의 상처’부터 ‘로맨스’까지…필리핀 소설, 한국 독자 만난다
2025. 02. 14 15:01문화
... ‘콘차 비달’이 배꼽이 두 개라는 설정을 통해 자신의 존재에 대한 혼란을 겪는 이야기로 필리핀의 식민 역사와 독립 이후의 정체성 문제를 은유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열대 고딕 이야기>는...
전쟁·식민지배 상흔 다룬 동남아 문학 작품 잇따라 번역·출간
전쟁·식민지배 상흔 다룬 동남아 문학 작품 잇따라 번역·출간
2025. 01. 30 11:18문화
...<산이 노래하다>(마르코폴로)는 베트남 소설가 응우옌 판 꾸에 마이(52)의 장편소설로, 프랑스 식민지 시기부터 베트남의 남북 분단과 전쟁에 이르기까지 20세기 격변의 역사를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스포츠경향(총 18 건 검색)

식민지배국을 포용하면서 정립된 모로코 정체성, 모로코는 강하고 부지런하며 개방적이다.
식민지배국을 포용하면서 정립된 모로코 정체성, 모로코는 강하고 부지런하며 개방적이다.
2022. 12. 15 10:52 축구
2022년 카타르월드컵 최고 인기팀 모로코가 결승행에 실패했다. 모로코는 15일 준결승전에서 프랑스에 0-2로 패했다. 아프리카 최초 월드컵 4강에 오른 모로코는 유럽·남미 이외 국가 최초로 결승에 진출하겠다는 꿈을 접었다. 왈리드 레그라귀 모로코 감독은 “그래도 우리 업적은 지워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모로코 축구대표팀 암바라트가 15일 프랑스에 패해 카타르월드컵 결승행이 무산된 뒤 아쉬워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모로코는 과거 자신을 지배한 국가를 연이어 꺾고 4강에 올랐다. 스페인은 15세기부터 모로코 항구를 점령했고 1912~1956년 북부 모로코를 통치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지금도 스페인은 모로코 지중해 연안에 있는 세우타와 멜리야에 집착한다”며 “모로코 본토와 이곳 사이 경계는 아프리카와 유럽 연합 간 유일한 육지국경”이라고 전했다. 포르투갈은 1415~1769년 모로코 해안 도시들을 점령했다. 프랑스는 1912~1956년 모로코를 지배했다. 모로코는 이들 3개국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고 있다. 스페인 축구는 지난 20년 모로코 시장을 지배했다. 모로코 어린이 2명이 만나면 서로에게 묻는 첫 번째 질문이 “바르샤? 레알?”이다. 스페인 축구단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 중 어느 팀을 좋아하느냐다. 워싱턴포스트는 “모로코 카페는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로 구분되기도 한다”고 전했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활약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모로코 인구 절반이 좋아하는 슈퍼 스타다. 프랑스는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모로코를 지배했다. 그런데 영향력은 무척 컸다. 모로코인들은 세계대전 참전을 위해 유럽으로 건너갔고 전쟁 후에는 공장과 농장에서 일했다. 워싱턴포스트는 “그들은 자기 문화를 가져와 프랑스 문화와 엮었다”며 “모로코 대표 요리 쿠스쿠스는 이제 프랑스 필수 요리가 됐고, 모로코인 등 북아프리카 사람이 없는 현대 프랑스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신문은 “40년 동안 모로코에서도 프랑스와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연결 고리가 생겼다”며 “모로코 어디에나 바게트와 크루아상이 있고 프랑스어는 엘리트 언어”라고 덧붙였다. 프랑스대표팀도 아프리카와 깊게 연결돼 있다. 1958년 월드컵에서 프랑스 대표로 골을 넣은 쥐스트 퐁텐은 프랑스가 식민 통치한 마라케시에서 태어났다. 킬리안 음바페, 지네딘 지단, 카림 벤제마도 북아프리카 출신이다. 현재 모로코 대표 26명 중 14명은 모로코 국적을 최종적으로 결정한 선수들이다. 미드필더 하킴 지예흐(첼시)는 네덜란드 청소년 대표팀에서 뛰었다. 소피안 암라바트(피오렌티나)도 유소년 시절 네덜란드에서 활약했다. 공격수 유세프 엔 네시리(세비아)는 전 생애를 스페인에서 보낸다. 모로코 선수들은 영어, 스페인어, 불어, 이탈리아어 등 여러 언어를 구사한다. 워싱턴포스트는 “이같은 유동성 있는 정체성은 모로코가 중동, 아프리카, 아랍, 대서양, 사하라, 지중해 일부임을 상징한다”고 해석했다. 모로코는 월드컵 기간 중 카타르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중동 심지어 미국 등 세계 각지에서 지지를 받았다. 세계에 흩어져 사는 모로코인들이 적잖다. 워싱턴포스트는 “모로코에 대한 열정은 식민 지배 관계 모순에도 불구하고 커진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포용하면서 커졌다”며 “모로코 선수과 가족의 초국적 이야기가 그들을 본질적으로 모로코인으로 만든 것 같다”고 해석했다. 모로코는 오는 18일 크로아티아와 3·4위 결정전을 치른다. 레그라귀 감독은 “부상 선수가 많지만, 정신적으로 잘 무장해 3위를 노리겠다”고 말했다. 레그라귀 감독은 “나는 프랑스에서 태어나서 많은 걸 배운 걸 자랑스럽게 여긴다”며 “우리가 세계 챔피언에게 패했다고 말하는 게 좋겠다”는 말로 프랑스 우승을 기원했다.
스경XWC 포커스
축구로 식민 역사 거스르는 모로코, 이번에는 프랑스다
축구로 식민 역사 거스르는 모로코, 이번에는 프랑스다
2022. 12. 13 17:59 축구
모로코 축구대표팀 선수들이 지난 11일 포르투갈과의 2022 카타르 월드컵 8강전에서 이긴 뒤 기뻐하고 있다. 도하 | AP연합뉴스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모로코의 토너먼트 대진은 모로코의 역사와 결을 같이 한다. 과거 식민지 종주국이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각각 16강, 8강에서 격파한 모로코는 이제 20세기 자국을 식민화했던 프랑스를 4강에서 만난다.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이베리아반도와 인접한 모로코는 중세부터 유럽의 침략을 자주 받았다.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는 포르투갈의 점령하에 있었고, 1904년부터 1956년까지는 스페인과 프랑스의 분할 통치를 받았다. 공교롭게도 이 세 국가가 모두 이번 월드컵 토너먼트에 진출해 모로코의 적수가 됐다. 고지를 코앞에 둔 모로코의 다음 상대는 프랑스다. 모로코는 지금까지 프랑스와 다섯 번의 공식 A매치를 치렀고, 1승 1무 3패를 기록했다. 가장 최근 맞대결이었던 2007년 친선경기에서는 2-2로 비겼다. 그러나 올해 모로코의 경기력은 과거와 다르다. 2002년부터 4회 연속 예선 탈락했고,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는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며 27위에 머물렀던 모로코는 이번 대회 조별리그에서 FIFA 랭킹 2위 벨기에를 2-0으로 눌렀다. 모로코는 이번 대회 16강과 8강에서 실점하지 않은 유일한 팀이다. 조별리그 캐나다와의 경기에서 딱 한 골을 실점했는데, 이마저 모로코의 자책골이었다. 프랑스에 이번 월드컵 득점왕을 노리는 킬리안 음바페가 있다면, 모로코에는 브루누 페르난드스와 케빈 더브라위너를 모두 막아낸 철벽 수비진이 버티고 있다. 모로코 축구대표팀 주장인 리우만 사이스(32·베식타스)와 수프얀 부팔(29·앙제)은 프랑스에서 태어난 모로코·프랑스 이중국적자다. 모로코의 무실점 승리를 이끌어 온 핵심 수비수 사이스는 지난 11일 포르투갈과의 8강전 도중 부상을 당해 들것에 실려 나갔다. 벤치에 앉아 경기를 지켜보며 눈물을 흘린 그는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몸 상태가 너무 좋지 않다면, 위험을 감수하고 준결승에 억지로 나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가능한 한 나의 모든 것을 바칠 것이다”라면서, “우리는 역사를 만들고 있고, 계속해서 역사를 만들어나가고 싶다”라고 투지를 밝혔다. 왈리드 라크라키 모로코 축구대표팀 감독도 모로코와 프랑스 국적을 모두 갖고 있다. 라크라키 감독은 포르투갈과의 8강전에서 승리한 후 기자회견에서 모로코를 영화 ‘록키 시리즈’의 무명 복서 록키 발보아에 빗대며 “꿈꾸는 데에는 비용이 들지 않는다. 유럽 국가들은 우승에 익숙해져 있다. 우리도 우승을 꿈꾸지 못할 이유가 없다”라고 말했다. 프랑스 통계청에 따르면 2019년 기준 프랑스에 거주하는 모로코인은 75만 명으로, 프랑스 내 전체 이민자 인구의 18%를 차지한다. 포르투갈전 직후 프랑스에 거주하는 모로코 축구팬들은 샹젤리제 거리에 모여 승리를 자축했다. 이 과정에서 소동이 벌어져 프랑스 경찰이 대규모로 배치되고, 100여 명이 체포되기도 했다. 한국시간으로 오는 15일 오전 4시, 모로코와 프랑스의 4강전 킥오프로 양국의 역사에 새로운 페이지가 쓰인다.
스페인, 포르투갈에 이어 프랑스까지 잡을까. 식민 지배국을 향한 아프리카 대표국 모로코 ‘통쾌한 복수’
스페인, 포르투갈에 이어 프랑스까지 잡을까. 식민 지배국을 향한 아프리카 대표국 모로코 ‘통쾌한 복수’
2022. 12. 12 11:18 축구
과거 자신을 식민지배한 나라를 차례로 꺾으며 월드컵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모로코가 프랑스마저 잡고 월드컵 결승까지 진출할 수 있을까. 모로코는 오는 15일 오전 4시 카타르월드컵 준결승에서 프랑스와 맞붙는다. 아프리카 국가로서는 처음으로 월드컵 4강에 오른 모로코가 프랑스마저 누르고 결승에 진출한다면 사상 최초로 월드컵 결승에 오르는 비유럽·비남미 국가가 된다. 지금까지 유럽·남미 이외 국가가 4강 이상에 진입한 건 2002년 한일월드컵 한국 4위, 13개국이 참가한 1930년 우루과이월드컵 미국 3위, 이번에 모로코가 전부다. 모로코는 아프리카, 중동 국가들로부터 엄청난 지지를 받고 있다. 모로코는 중동·북아프리카(MENA·Middle East North Africa) 지역에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아랍에미리트 등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아프리카축구연맹(CAF)은 “대륙의 역사”라고 표현했고 아프리카연합의장 마키 살 세네갈 대통령과 마하마트 이드리스 데비 차드 대통령은 “역사적이고 환상적이며 특별하다”고 언급했다. 두바이 통치자 셰크 모하메드 빈 라쉬드는 “이번 월드컵에서 모로코보다 더 큰 목소리는 없다”고 트위트했다. 모하메드 시아 알수다니 이라크 총리도 트위터를 통해 “우리는 형제의 기쁨을 나누고 있다”고 썼다. 모하메드 쉬타예 팔레스타인 총리도 “아랍이 기쁘니 우리도 기쁘다”고 말했다. 압둘하미드 알드베이바 리비야 총리는 트위터에 “모로코 축구대표팀을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모로코 국기를 올렸다. 세계적인 공격수였던 디디에 드로그바(코트디부아르)는 “모로코가 해냈다. 영원하라, 아프리카”라는 글을 트위트했다. 카메룬 출신 공격수 겸 현 카메룬축구협회장인 사무엘 에투도 “믿을 수 없다. 아프리카 대륙 전체가 당신들을 응원한다”고 적었다. 세계적인 팝스타 샤키라(콜롬비아)도 트위터에 “지금은 아프리카를 위한 시간(This time for Africa)”이라고 썼다. This time for Africa(일명 WAKA WAKA)는 자신이 부른 2010년 남아공월드컵 공식 음반 제목이다. 세계적인 팝스타 샤키라가 부른 2010년 남아공월드컵 공식 음반 ‘This time for Africa(일명 WAKA WAKA)’ 뮤직 비디오 모로코는 이번 월드컵 16강전에서 스페인을, 8강전에서 포르투갈을 꺾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과거 아프리카를 침략해 식민 지배를 한 국가들이다. 외신들은 “역사적으로 북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삼은 국가들에 대한 승리”라며 “그래서 아프리카 전역이 모로코 승리를 아프리카 승리로 간주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에는 북아프리카를 탈출해 거주하는 사람들이 수십만명에 이른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거리에는 모로코 국기와 함께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One People, One Country)”라고 적인 포스터가 나붙기도 했다. 카타르월드컵을 관전하기 위해 카타르로 간 사우디아라비아 살레흐 알라예스는 “모로코는 언더독(약자)인데 이겼다”며 “아랍의 자랑이다. 모든 아랍권 국가들이 모로코를 지지하고 있다”고 AP통신을 통해 말했다. 모로코 팬 니자르 지아르디나는 “우리는 작은 아프리카 국가지만 스페인을 이겼고 포르투갈을 이겼고 프랑스도 이길 것”이라며 “적어도 100년 동안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은 나라에 대해 약간 복수하는 것 같아 기쁘다”고 말했다. 이제 모로코는 자신을 식민지배했던 프랑스를 상대로 또 한번 겁없는 도전에 나선다.
[단독]日 만화 ‘임금님 랭킹’ 식민지 왜곡 논란에 누리꾼들 갑론을박
[단독]日 만화 ‘임금님 랭킹’ 식민지 왜곡 논란에 누리꾼들 갑론을박
2020. 08. 03 11:06 연예
booklive 제공일본 판타지 만화 ‘임금님 랭킹’이 식민지 역사를 왜곡했다는 의혹이 잇따라 제기되고 있다.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토오카 소우스케의 작품 ‘임금님 랭킹’ 113화에 대한 갑론을박이 일고 있다. 113화에 따르면 갸쿠자국은 그동안 빼앗기며 살아온 가장 가난한 나라였고 대국과 인접하여 늘 지배 당했다. 또 늘 누군가를 속이며 부모는 아이에게 증오를 가르쳐 갸쿠자인의 인간성을 만들었다고 소개했다. 이를 불쌍히 여긴 호우마국은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여 갸쿠자국의 개혁이 몰두했고 그 결과 갸쿠자는 놀랄 만큼 풍족해졌다고 말했다. 갸쿠자국은 호우마국에 감사함을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시샘하며 자신들이 뛰어나다고 믿는다고 묘사했다. 그러면서 호우마국은 갸쿠자인의 극악무도한 행동에 피폐해졌다고 말했다. ‘임금님 랭킹’은 지난 2017년 5월부터 연재된 일본 인기 판타지 만화다. 한 왕자가 많은 사람을 만나며 성장해나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으며 최근 애니메이션 제작을 확정지었다. ‘임금님 랭킹’ 113화. mangahack 제공이 만화를 접한 일부 누리꾼들은 ‘임금님 랭킹’이 지난 1900년대 일본의 한국 침략과 식민지 지배와 관련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 것 아니냐며 비판에 나섰다. 한 누리꾼은 “만화를 보고 있으면 일본이 과거 우리나라에 저지른 식민지 시절이 떠오른다”면서 “도와준 국가에 대한 감사를 모르고 오히려 시샘한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누리꾼도 “일본의 한국 비하는 계속되고 있지만 이같은 내용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됐을 때 역사 왜곡이 더 심각해질 수 있다”며 ‘임금님 랭킹’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반면 “그냥 상상 속 식민지를 그려낸 것 아니냐” “해당 내용을 한국으로 단정짓는 건 앞서나갔다” 등 만화를 만화로만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도 적지 않다. ‘임금님 랭킹’ 113화는 현재 홈페이지에서 삭제됐다. mangahack 제공한편 논란이 된 ‘임금님 랭킹’ 113화는 현재 홈페이지에서 삭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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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총 19 건 검색)

“일제 식민지배로 경제 성장? 뉴라이트의 무식한 이야기”
“일제 식민지배로 경제 성장? 뉴라이트의 무식한 이야기”(2024. 09. 02 06:00)
2024. 09. 02 06:00 정치
정태헌 고려대 한국사학과 명예교수 인터뷰 정태헌 고려대 사학과 명예교수가 지난 8월 22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정효진 기자 2019년 출간된 책 <반일 종족주의>는 한국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근거 없는 ‘통념’을 반박한다는 이 책이 부정한 것은 일본제국주의(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한국사회의 인식이었다. 이들은 일제에 의한 쌀 ‘수탈’은 ‘수출’(김낙년 한국학중앙연구원장), 강제동원은 ‘신화’(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로 규정했다. 대표 저자인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은 책 도입부에 “한국의 거짓말 문화는 국제적으로 널리 잘 알려진 사실”이라며 힘을 실었다. 이들은 이른바 ‘뉴라이트’라 불리며 여전히 유사한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주로 경제학을 전공한 이들이 제기하는 이러한 주장은 ‘일제가 조선을 근대화했다’는 해묵은 ‘식민지 근대화론’의 연장선에 있다. 그런데 학문적 자유를 토대로 한 ‘소수 이론’이 주목받는 만큼 이를 논박한 책, 논문 등도 주목받는 것은 아니다. 이는 식민지 근대화론은 수치나 통계와 같은 ‘과학적 근거’가 있지만, 주류 역사학은 감정적인 ‘민족주의’에 입각해 있다는 착각을 만든다. 실제로 이들 주장은 학계를 넘어 이제 정치권에서도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지난 8월 22일 정태헌 고려대 한국사학과 명예교수를 서울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정 교수는 <반일 종족주의>의 저자들처럼 경제사학을 연구했다. 하지만 이들과는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 무엇이 차이를 만들었는지 물었다. “나는 단 한 순간도 우리 역사를 일부 수치와 통계만으로 비하하지 않았다.” 정 교수의 답변이었다. -뉴라이트는 ‘일제가 조선을 근대화했다’고 주장한다. “식민지 근대화론, 식민지 시혜론이라고 불리는 주장은 15세기 ‘대항해 시대’ 이후 지속해왔다. 기독교 입장에서 비기독교인을 야만으로 규정하고 개종시키는 것을 정당화한 것에서 시작해 자본주의 시스템을 활용한 제국주의의 식민지배까지 포괄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침략, 수탈, 차별, 제노사이드 등은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됐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창한 것 역시 침략의 주체들이었다. 그런데 한국 ‘뉴라이트’는 침략을 당한 쪽에서 이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마치 대감댁 머슴이 본인이 대감인 양 행동하는 꼴이다. 당연히 논리적 일관성도 정체성도 없다.” -정체성이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자신이 발 딛고 사는 곳이 사고의 중심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들 주장의 핵심은 결국 국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식민지배 하에서 ‘자본주의’가 도입됐고, 경제가 성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독립할 필요도 없고, 독립운동가는 자본주의 성장을 방해한 세력이라는 인식을 한다. 그렇다고 ‘무정부 자본주의’를 주장하는 것도, ‘아나키즘’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면서 시장경제만 부르짖는 식이다. 자본주의는 민족경제, 즉 국가의 정책적 지원을 받으면서 출발했다. 자본주의 3대 주체가 개인, 기업 그리고 국가(정부)라는 사실을 망각하면 안 된다. 현대사회에서도 국가가 새로운 시장도 창출하고, 자국 기업을 보호하거나 이를 위한 정책을 만들지 않나. 그러나 일제강점기 조선인, 조선인 기업에는 그런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 ‘식민지 자본주의’ 운영 주체는 일본 정부, 조선총독부, 일본 기업이었다. 즉 일본의 경제와 대륙침략을 위해 한반도 경제와 조선인들에게 ‘불공정한 교환’을 강요했다. 이러한 관계를 무시하고 무턱대고 자본주의적 교환이 이뤄졌다고만 하면 안 된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수치·통계만으로 모든 걸 재단해 정작 자본주의의 본질적 특징을 호도한다. 식민지배나 민족 차별이라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경시하면 그 시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뉴라이트는 경제성장을 강조한다. “하나 마나 한 이야기로 혹세무민하는 것이다. 제국주의가 식민통치를 효율적으로 한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제대로 뽑아 먹겠다’는 의미다. 그러기 위해선 ‘개발’을 해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다. 즉 일제의 필요에 따라 ‘일본 자본이 주체가 된 개발을 통해 수탈한다’는 것이 식민지 경제의 기본 시스템이라는 의미다. 개발 추진 주체와 목적, 성과와 귀결, 한반도 경제의 산업 연관성 여부 등을 논외로 한 채 무턱대고 식민지배로 ‘경제가 성장했다’고 강조하는 것은 무식한 이야기다.” -뉴라이트는 수치나 통계를 근거로 제시하는데. “그럴듯해 보이지만 결국, 통계정치학이다. 심지어 정확하지도 않다. 일제강점기는 국내총생산(GDP) 개념, 측정 방법이 정립되기 전이기 때문에 당시의 경제성장 수치란 것도 결국 ‘추계’의 산물이다. 더구나 기준점이 되는 1910년대 전반기 통계는 통감부,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것으로 굉장히 부실하다. 즉 분모로 사용하는 1910년대 자료가 워낙 저점에 있다 보니 강제병합 이후 경제가 눈에 띄게 성장한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이마저도 1939년 본격적인 전시체제에 돌입하면서 절대치가 감소한다. 이들이 통계를 정말 일제강점기를 이해하기 위한 ‘학문’으로 접근했다면 당연히 많은 질문도 수반했어야 한다. 예컨대 ‘조선인과 일본인의 소득분배를 추론할 수 있는 자본소득비율(자본 소유주 소득/GDP)이나 노동소득비율은 어땠을까’, ‘조선인의 생활 수준을 유추해볼 수 있는 노동시간당 GDP(GDP/노동시간)는 어땠을까’, ‘식량 총생산량이 늘어났다면 쌀 소비량은 어떻게 변했을까’ 등이다. 그런데 덮어놓고 조선은 자본주의로 이행할 능력이 없었고, 일제강점기 경제총량은 증가했다로 얘기가 끝난다. 중요한 전시체제기는 논의조차 하지 않는다.” -통계의 진실은 무엇인가. “그 당시를 살아갔던 사람들이 남긴 연구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1931년부터 1935년까지 이여성, 김세용은 <숫자조선연구>라는 책을 통해 식민지 경제가 수치상 성장하고 있지만, 민족별 경제력 격차가 커지고 있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예를 들어, 당시 5개 도시(경성·평양·부산·대구·인천) 전체인구 중 약 74%를 차지한 조선인이 소유한 토지는 전체의 33%에 불과하지만, 약 26%의 일본인은 전체 토지의 63%나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1929년 기준 일본의 교육비는 세출의 8.1%였지만, 1930년 조선총독부의 교육비는 세출의 3.5%에 불과했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당시 교육 실태를 고려하면 이마저도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에게 대부분 쓰였다. 당시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도 조선총독부가 쓰는 재정이 조선인들에게 돌아가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쌀 소비로 당시 상황을 가늠해볼 수도 있다. 일본의 1인당 쌀 소비량(연 1.1석)은 안정적으로 유지됐지만, 조선은 증산에도 불구하고 소비량이 1911~1934년 사이 52%나 격감(연 0.79→연 0.38석)했다.” -통계로는 볼 수 없는 현실은 어땠나. “1930년대 농촌현실을 담은 채만식의 소설들이 있다. 소설 속 조선인 농민은 대부분 소작농이고, 고율 소작료와 고리 부채에 시달리고 있다. 경제총량이 늘어났다면 그만큼 조선인 생활 수준이 나아져야 할 것 아닌가. 1936년 울산 달리 지역에서 ‘농촌위생조사’가 진행됐다. 당시 사진촬영사로 참여한 미야모토 케이타로는 ‘조선 농촌에서는 1935년 전후에도 전등이 보급되지 않아 호롱을 사용하고, 이마저도 어려운 하층 농가는 어유를 태워 불을 밝힌다’고 썼다. 조사를 주도했던 최응석은 ‘동물 같은 원시적인 생활을 한다. 옷은 몸을 가리는 데 불과하고, 집은 흙으로 된 방이다. 길가에는 회충이 알을 까고 있다’고 적었다. 이 조사는 경제외적 수탈-약탈이 극심했던 전시체제기 이전에 진행됐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조선 경제’와 ‘조선인 경제’가 엄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경제가 성장했다고 하는데 한반도는 해방 직후 세계 최빈국이었다.” 정태헌 고려대 사학과 명예교수가 지난 8월 22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인터뷰하고 있다./정효진 기자 -뉴라이트 주장을 보면 일제가 아니었다면 결코 자본주의로 이행할 수 없는 것 같다. “‘가정의 정치학’이다. 자본주의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기존 신분 주도 사회에서 돈이 주도하는 사회로 바뀌는 것이고, 그러한 변화를 국가정책의 뒷받침을 통해 제도화하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 몰락 양반이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고, 개성상인이나 경강상인 등이 세를 드러내고, 흥부가 매를 맞아 돈을 버는 모습은 신분에서 돈이 주도하는 사회로의 이행을 보여준다. 변화의 흐름은 분명했지만 국가의 정책적 뒷받침이 취약한 가운데 일제가 자기 편의에 맞게 식민지화해버린 것이다. 변화가 지속했다면 어땠을지는 ‘가정’이기 때문에 말하지 않겠다. 반대로 일제에 의해 중단된 변화를 평가절하하는 것 역시 ‘가정’에 불과하다.” -일제에 의해 우리가 근대화된 것은 맞나. “근대의 특징은 ‘자본주의’, ‘주권 국가’ 그리고 ‘개인의 자유’다. 이 세 가지 개념 중 식민지 조선에서 적용 가능한 것이 하나라도 있나. 첫째로 일제강점기 자본주의는 국가를 상실한 식민지 자본주의라고 이미 지적했다. 둘째로 당연히 우리 민족의 ‘주권 국가’는 없었다. 셋째로 민족차별이 제도화된 식민지에선 ‘개인의 자유’는 설 자리가 없었다. 일제가 동화정책을 선전했지만 조선인에게 의무교육, 참정권 등은 없었다. 심지어 보통학교-소학교, 고등보통학교-중학교처럼 학교 명칭조차 징병을 위해 통일될 때까지 달랐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도 마찬가지다. 조선말이라도 자유롭게 쓸 수 있었나. 기업인이라고 다를 것 같나. 1910년대에는 회사령 때문에 회사를 설립하려면 조선총독부에 허가를 받아야 했다. 심지어 친일파도 일본인에게 쏠린 시장과 금융의 민족차별적 환경에 불만이 컸다. 이 모든 것을 제외하고 나면 중국 침략을 위해 부설한 철도 부설 정도만 남는다. 이것을 근대화라고 하기에는 너무 실체가 없는 것 아닌가.” -일제강점기가 한국이 달성한 경제발전, 근대화의 초석이란 주장은 어떻게 보나. “이런 얘기 자체가 국가 주권 문제를 가볍게 보는 천박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식민지 경제와 해방 후 경제가 어떻게 동일 선상에서 이어지나. 질적으로 다르다. 한국이 달성한 경제발전은 국가 주권을 회복하면서 비로소 가능했다. 한국 정부가 화폐·금융 주권을 발휘하고, 경제정책을 주도하면서 달성한 것이다. 기업가들은 경영환경 자체가 달라진 상황에서 활발하게 회사를 일궜다. 일제강점기는 청년 정주영이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없어 사채를 얻어 사업을 해야 했던 시대였다. 이런 식민지 상황에서 어떻게 현대나 삼성 같은 세계적 기업이 나오나. 상식적인 주장을 해야 한다. 기업인 중에도 뉴라이트 주장에 동조하는 경우가 있다. 국가의 존재 여부가 기업의 경영환경에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지를 모르는 무지의 소치다.” -같은 경제사학자임에도 뉴라이트와 정반대 분석을 한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나. “첫째로 나는 그들처럼 ‘한국사’를 비하하지 않는다. 그들의 특징을 보면 모든 기준이 ‘나’가 아닌 ‘남’이다. ‘국민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중요한 건 일본의 마음’이라고 하지 않나. 둘째로 그들처럼 ‘자본주의’만 보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성장 ‘수치’가 아닌 그 시대를 살아가는 구성원들의 ‘삶’이고 이들이 만들어 가는 ‘국가’다. 그렇기에 주권을 되찾고 식민지 자본주의를 극복하려 한 독립운동에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수치·통계만으로 모든 걸 재단해 정작 자본주의의 본질적 특징을 호도한다. 식민지배나 민족차별이라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경시하면 그 시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차별이 제도화된 식민지 자본주의 현실을 외면하고 역사를 보면 그들처럼 허상의 세계에 취하게 된다.”
표지 이야기
[원희복의 인물탐구]‘농민수당’ 전도사 박경철 “식민지 농정 이제 끝내야”(2019. 11. 25 14:01)
2019. 11. 25 14:01 사회
11월 11일을 정체불명 ‘빼빼로데이’만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만, 이날은 엄연한 법정기념일인 ‘농업인의 날’이다. 그러나 잔칫날이어야 할 이날 농민들은 상복을 입었고, 박근혜 탄핵에 앞장선 ‘전봉준 투쟁단’ 트랙터부대가 다시 등장했다. 11월 13일 서울 여의도에서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의장 박행덕)이 주최한 ‘전국 농민 총궐기 대회’에는 농민 1만여 명이 참가해 정부를 규탄했다. 이렇게 농민이 분노하는 이유는 정부가 10월 25일 세계무역기구(WTO) 개도국 지위 포기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농산물 수입관세가 낮아져 외국산 농산물이 물밀듯 밀려온다. 게다가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까지 타결되면서 중국·호주·뉴질랜드 등 농업 강대국 농산물이 대거 들어온다. 이렇게 위기에 놓인 농촌문제를 풀 유일한 해결책이 ‘농민기본소득’ 혹은 ‘농민수당’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이미 일부 지방자치단체에 도입됐고, ‘농민기본소득 추진 전국운동본부’가 12월 19일 출범할 예정이다. 충남연구원 박경철 박사(49)는 오래전부터 전국을 돌며 ‘농민수당 전도사’를 자처해왔다. 지난 11월 15일 그를 만났다. ‘농민의 날’에 상복 입은 농민들 -최근 백남기 농민 4주기를 맞아 ‘백남기기념사업회’가 창립됐다. 그 자리에 여러 농민단체 지도부가 참여했는데, 의외로 현 정부의 농정에 대한 분노가 높더라. 사업회 초대 이사장이 된 정현찬 전 전농의장은 “문재인 정부는 이명박·박근혜 정권보다 나아질 것이란 희망을 가졌지만, 그 희망이 분노로 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왜 농민이 분노하고 있는가. “우리나라는 주요 20개국(G20)에 들어갈 정도로 경제선진국이지만 농업부문은 굉장히 열악하다. 우리는 소농 위주다. 외국과 경쟁 자체가 안 된다. 그래서 WTO에도 분야별 관세부과에 차등을 두고 있다. 우리가 농업분야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면 쌀 수입관세가 513%에서 154%로 낮아진다. 값싼 미국·중국·동남아산 쌀이 대거 들어올 것이다. 중국은 질 좋은 동북미를 우리나라에 수출하기 위해 이미 다롄에 선적항까지 다 만들어 놨다. 우리는 해충 반입 등을 이유로 사과 수입을 금지하고 있지만, 이것이 풀리면 우리 과수농사는 모두 망할 것이다. WTO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면 우리 농업은 소수 친환경·직거래만 남고 모두 사라질 것이다.” -정부가 면밀히 수출입 품목을 검토해 WTO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 아닐까. “이번 WTO 개도국 포기 결론은 합리적인 토론을 거쳐 나온 것이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90일 이내에 결정하라’고 압박했다. 미국은 우리를 먼저 쳐야 중국과 인도 관세장벽을 철폐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한편 미국은 더 많은 방위비 분담을 요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WTO 개도국 포기 카드를 사용했다. 마치 ‘방위비 더 낼래, 농업 포기할래’를 요구한 것이다. 그 압박에 우리는 농업을 포기한 것이다.” -정부 결정에 농민단체들이 대책위를 구성하고 항의시위를 하고 있다. 우리 정부 대책은 무엇이고, 어떻게 평가하나. “정부는 아직 완전한 대책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 식량안보 등에 필요하다면 ‘민감품목’ 등으로 지정해 약간 관세를 올릴 수는 있다. 쌀은 393%까지 올릴 수 있다. 정부는 이 점을 고려하는 것 같은데, 대신 의무적으로 쌀 수입 비율을 높여야 한다. 사실 그게 그것일 수 있다.” 어차피 값싼 농산물 수입은 피할 수 없는 ‘외통수’ 같아 보인다. 그에 맞서 우리 농업경쟁력을 키워야 하는 것이 정답이지만, 문제는 애당초 외국과 경쟁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전체 농민의 72.6%가 농지면적 1㏊ 미만이고, 평균 1.37㏊다. 이에 유럽은 평균 40~50㏊, 프랑스는 70㏊에 이르고, 미국은 82㏊, 호주는 373㏊에 이른다. 애당초 규모나 생산성에서 경쟁이 안 된다. 우리보다 평균 경작면적이 30~40배 큰 유럽조차 농업경쟁력을 잃고 각종 직불금으로 농촌이 유지되고 있다. 박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외국 농민도 다 어려워 정부가 직불금을 준다. 그러나 유럽은 농가당 평균 경작면적이 크기 때문에 직불금만으로도 기본소득이 가능하다. 여기에 친환경·경관 직불금·생물종 다양성 농업을 하면 허용보조를 더 받을 수도 있다. 독일도 우윳값이 물값보다 쌀 정도다. 모두 축산을 포기할 수밖에 없지만 직불금 주고 친환경 목축을 하면 추가 보조가 있어 축산이 유지된다. 서구의 목가적인 농촌풍경은 모두 직불금, 정부지원 때문에 가능하다. 유럽연합(EU) 전체 예산의 40%가 농업예산이고, 그중 72%가 농업직불금으로 나간다. 스위스는 농업예산의 85%를 아예 농민에게 직접 준다. 이들은 농촌을 자연, 혹은 힐링 공간 등으로 보존하면서 얻는 무한가치를 더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농민 72.6% 연 평균 직불금 겨우 40만원 우리나라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 도입된 직불금제도가 있다. 박 박사는 “직불금을 면적단위로 주다보니 상위 12%의 농가가 전체 직불금 절반을 가져간다”면서 “1㏊ 미만 농가가 전체 농민의 72.6%인데 이들이 받는 연간 평균 직불금이 40만원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1년에 40만원 수입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 직불금제도에는 크게 ‘허용보조’와 ‘감축대상보조’ 두 가지가 있다. 허용보조는 환경·생태농업에 보조하는 것으로 무한정 지원할 수 있다. 그러나 감축대상보조는 쌀 변동직불금처럼 가격정책에 따라 큰 차이가 나고, WTO 개도국 지위가 사라지면 이 부분이 대폭 줄어든다. 그는 “농민들은 쌀값 폭락 시 대책없이 변동직불금을 없애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 박사는 1990년대 초부터 농민기본소득에 관심을 갖고 중국(베이징대)에 유학할 때 스터디 그룹을 만들었다. 2014년 충남연구원에 ‘농민기본소득연구회’를 만들어 이를 본격 연구했다. 아마 그는 농민수당, 혹은 농민기본소득 제도를 체계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학자라고 할 수 있다. -농민수당이냐, 농민기본소득이냐를 놓고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보는 시각에 따라 약간 다르다. 전농·민중당은 농민수당이라고 쓰는데 이는 농업의 본래적 가치, 사회적 기여도를 감안해 당연히 받아야 할 ‘수당’으로 표현하고, 농민기본소득은 WTO와 도시화·개방화 과정에서 소외된 농정에 대한 생존권적 지원이라는 관점에서 ‘기본소득’이라고 쓴다. 그러나 학술적 용어와 대중적 용어 차이일 수도 있다. 농민들에게 기본소득이라면 잘 이해가 안 돼 그냥 ‘수당’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기본소득 원칙과 정신에 입각해서 쓴다.” -이미 일부 자치단체에서 농민수당을 도입했다. 그리고 내년부터 많은 자치단체가 이를 도입하기로 했다. 농민수당 도입역사는 어떤가. “2018년부터 전남 강진에서 농업인경영안정자금이라는 이름으로 연 70만원을 지원했다. 전남 해남은 자치단체 중 처음으로 지원조례를 제정해 논·밭·임업인까지 지원한다. 일부 자치단체는 농·어가에 지원한다. 전남·전북·충남·강원 등이 내년부터 도입하겠다며 준비를 하고 있다.” 11월 8일 국회에서 황민영 농민기본소득 추진 전국운동본부 위원장, 하승수 전 녹색당 운영위원장, 박경철 박사 등 참가단체 관계자들이 결성식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경기도가 농민기본소득을 내년 6개 시·군, 2021년 15개 시·군, 2022년에는 31개 전체 시·군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게다가 가구가 아닌 개인에게 지급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는 평가다. “그렇다. 농민기본소득은 개인에 대한 권리로 개인에게 직접 주는 것이 취지에 맞다. 지금까지 농민수당은 모두 ‘농가당’으로 지원해 농촌 여성·청년이 소외됐다. 그래서 농민 개인 모두에 주겠다는 이번 경기도 결정은 획기적이다. 지금까지 농가에 주면 관리하기 쉽고 행정적으로 편해 그리했다. 그러나 요즘에는 별도 소득이나 실제 경작 여부를 쉽게 확인할 수 있어 부정수급 문제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농민수당을 지역화폐로 주자는 주장이 있다. 또 농촌 소상공인과 형평성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지역화폐로 주자는 것은 ‘신의 한 수’처럼 좋은 아이디어다. 시골에 가면 농민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소상공인도 매우 어렵다. 농촌인구의 30%만 농민이고, 70%는 비농민이다. 농촌의 소상공 자영업자는 지역화폐로 주는 것을 크게 반긴다. 지역경제 활성화 차원에서 지역화폐를 주는 것이 좋다.” -농민기본소득을 개인 모두에게 주겠다는 경기도의 결정은 재정력이 뒷받침되기 때문에 가능하다. 재정력이 약한 지방정부는 재원 마련이 어렵다. 결국 중앙정부 차원에서 도입해야 하는 문제 아닌가. “자치단체 재정력도 중요하지만 단체장의 철학과 의지도 중요하다. 정부도 지금까지 ‘생산주의 농업’에 한계를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농업의 공익·다원적 가치, 즉 식량안보나 생태·환경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공익형 직불제로 전체 농가의 45%를 차지하는 0.5㏊ 미만 농가에 월 80만~100만원 정도를 기본 지급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언제 이뤄질 지 기간과 예산확보가 관건이다.” 박 박사는 1970년 전북 고창 출신이다. 1894년 3월 동학농민혁명의 무장기포가 일어난 바로 그곳이다. 부모 모두 농사꾼이다. 전주 상산고를 나와 1989년 건국대 농학과에 입학했다. 농대 학생회 간부로 1993년 우루과이라운드 쌀 시장 개방에 반대하는 학내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국제협력단 해외봉사단(농업부문)으로 중국에 파견돼 베이징대와 다롄 농업과학연구소에서 2년간 공부했다.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석사·박사과정을 마치고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들어갔다가, 다시 중국 베이징대에 가서 2012년 박사학위(사회학)를 받았다. 농업에 쓴 수백조원은 다 어디로 갔나 귀국 후 충남연구원 ‘농촌농업연구부(현 지역도시문화연구실)’에 들어가 현재 책임연구원으로 있다. 그러니까 그는 대학 학부 때부터 지금까지 농업·농촌 연구에만 매달려온 셈이다. 요즘에는 시간만 나면 전국을 돌며 농민수당 도입 필요성을 설명하는 ‘전도사’를 자처하고 있다. 1997년 쌀시장 개방을 시작으로 피폐해진 농촌을 살린다며 정부는 수백조원 이상 예산을 투입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농민은 살기 힘들어하고, 농촌에 빈집은 늘어난다. ‘지방소멸’ 얘기가 나오고 농민은 트랙터를 몰고 아스팔트를 달린다. 대관절 농업을 살린다며 쓴 수백조원이 다 어디로 간 것일까. 박 박사는 농정에 대한 지금까지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어차피 극도로 영세한 우리 농업은 국제경쟁력을 갖추기 힘들다. 그동안 농촌 소득증대 사업이나 농촌개발사업 등은 20%의 농민에게만 혜택이 돌아갔고, 이마저 경쟁력을 잃고 빚으로 남았다. 이 과정에서 많은 농정예산은 비료·농자재 업자, 농업 관련 기관들이 차지했다. 이런 가운데 농민의 80%는 정부지원에서 소외된 채 사실상 방치됐다. 그는 “되지도 않는 농업경쟁력 운운하는 생산주의 농정은 이제 포기해야 한다”면서 “유럽처럼 농업예산의 72%, 스위스처럼 예산의 85%를 직접 농민에게 줘야 한다”고 단언한다. 그는 우리 농업예산은 15조원 정도로 농가당 월 50만원, 170만 명에 이르는 농민당 20만원만 월급방식으로 주더라도 5조~6조원이면 된다고 말했다. 그는 “부부 합해 월 90만원 정도면 농촌에서 버틸 힘이 된다”면서 “예산이 없어 못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지금도 농업예산의 35%만 농민수당으로 쓰면 농민이 거리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매우 간단하고, 지금이라도 당장 시행할 수 있는 이 해결책을 왜 못하는 것일까. 그는 ‘식민지 농정방식’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힐난한다. 박 박사는 “말 잘 듣고 빽 있는 농민이나 단체가 예산을 차지하고, 예산으로 농민을 통제하려는 방식은 전형적인 식민지 관리 농정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특히 우리는 농업 관련 기관·단체·공무원이 너무 많아 농정예산 상당액이 이들 차지가 된다. 힘없는 농민에 ‘기생’하는 탐관오리가 많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원희복의 인물탐구
[원희복의 인물탐구]식민지근대화론 비판 충남대 명예교수 허수열 “식민지근대화론 기초 통계부터 엉터리”(2019. 09. 27 14:37)
2019. 09. 27 14:37 사회
이영훈 이사장의 낙성대경제연구소가 펴낸 책 <반일종족주의>가 논란이다. 조국 법무부 장관이 “구역질 나는 책”이라고 비난하자 저자 6명이 모욕죄로 고소하기도 했다. 이러한 논란에 힘입어 <반일종족주의>는 베스트셀러 대열에 오르는 기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 책에 논란은 많지만 ‘학계’에서 정식으로 비평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다 보니 언론도 분명하게 비평·보도하지 못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충남대 허수열 명예교수(69)는 식민지근대화론을 ‘학술적’으로 비판하는 몇 안 되는 학자다. 그러나 그는 언론 인터뷰를 꺼린다. 학회에서 논쟁은 하지만 언론에 직접 얼굴을 내밀기는 아마 처음일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와 이 이사장은 고교(경북고)·대학(서울대 경제학과) 동기동창이고 그 역시 식민지근대화론 창립자인 안병직 교수 제자이기 때문이다. 이영훈과 고교 대학 동기동창 -이영훈의 책 <반일종족주의>는 소설가 조정래의 <아리랑>에 대한 비난으로 시작된다. 뉴라이트 기관지 격인 <시대정신> 2007년 여름호에 만경평야가 일본인에게 수탈당하는 것으로 묘사한 <아리랑>은 ‘허구’라고 주장한다. “이영훈의 글을 선입관을 빼고 읽어보면 틀림없이 ‘혹’한다. 그러나 하나하나 뜯어보면 모두 거짓말이다. 나는 국가기록원에 있는 일제하 수리조합·토지 개량사업 자료 해제작업을 많이 했다. 당시 조선총독부에 제출한 수리조합 설립신청서는 낙성대경제연구소도 보지 못한 자료다. 이 자료를 보면 만경강 북쪽 옥구·익산·군산은 1909년 이미 빈틈 없이 수리조합이 있고, 만경강 남쪽 동진강 호남평야도 수리조합이 설립신청서는 냈지만 허가 나지 않은 상태였다. 수리조합 설립을 신청했다는 것은 이미 농사를 지었다는 것이다.” -<아리랑>의 배경을 놓고 벌인 이른바 ‘벽골제 논쟁’의 핵심은 무엇인가. “이영훈은 벽골제가 바닷물 유입을 막는 방조제로 그 하류 <아리랑>의 주인공이 살던 지역은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바다·갯벌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수리조합 신청서에 첨부된 당시 ‘동진강 수리조합 구역도’를 보면 이 지역에 마을과 수로 표시가 있다. 갯벌에 수로 표시를 할 이유가 있을까. 서울대 규장각에 있는 1872년 지도에는 전북 김제군에 5개 장시(5일장)가 있는데 그 중 2개가 벽골재 하류에 있다. 갯벌 위에 5일장이 열릴 수 없다.” -식민지근대화론의 핵심은 조선후기 산업의 핵심인 농업이 몰락했고, 이를 일본 기술과 자본이 일으켜 결국 근대화를 이룩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허 교수는 조선후기 농업 몰락을 수치로 반박했다. “낙성대경제연구소 문건을 보면 ‘두락당 지대량의 장기 추세’ 그래프가 있다. 1685년부터 1945년까지 논 한 마지기에 지대를 얼마 받았느냐를 회귀분석을 통해 그래프로 그린 것이다. 지대가 떨어진 것을 생산량 하락으로 봤다. 그래프는 1910년 거의 바닥으로 농업이라는 산업기반이 무너진 것을 표시한다. 이 그래프에는 1685년 지대로 22말을 받았는데, 1935년에는 14말 받은 것으로 돼 있다. 1935년은 일제강점하 농업생산성이 가장 높았던 시기로, 1685년보다 토지생산성이 낮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조선 농업의 몰락 사실은 이영훈 교수의 학문적 근거이자 바탕이다. 이런 허술한 그래프가 이론적 바탕인 것이 놀랍다. “이 그래프는 30여개 지주 장부를 근거로 회귀분석한 것인데 회귀분석에서 유의성과 사실은 별개다. 이 지주 장부도 일관성이 없고, 연도별로 드문드문 있다. 그 중 전라도 영암 남평 문씨 문중 논에 대한 지대장부만 이런 추세를 보이고, 나머지는 대체로 일정하다. 이 1개 장부가 전체 통계를 왜곡시킨 것이다. 한 개의 데이터가 매우 특이할 때 통계에서 그것을 제외해야 하는데 이영훈은 그리하지 않았다. 또 하나 문제는 조선후기로 들어와 소작제도가 변화하면서 지대를 받는 방법이 달라졌다. 그걸 감안하지 않고 장부상 수치만 보다 오류가 생겼다.” 사실 낙성대경제연구소는 실증적 연구와 수학을 동원한 수량경제학을 강조한다. 조선후기 농업을 전공한 이영훈을 비롯한 낙성대경제연구진이 전국 수리조합 창고를 뒤져 장부를 발굴해 쓴 <근대조선 수리조합 연구>는 조선후기·일제하 농업연구의 기반이 되는 연구서로 식민지근대화론의 이론적 바탕이 되는 책이다. 그런데 일제하 공업·노동을 전공한 허 교수가 이 책의 기반을 흔들었다. 2005년 <개발 없는 개발>이라는 책으로 식민지 시대 개발을 비판한 그는 2011년 <일제 초기 조선의 농업>이라는 책으로 아예 식민지근대화론자의 이론적 근거인 농업부문 허구를 폭로했다. 경제학자로서 치밀하게 수치로 반박 낙성대경제연구소(김낙년 <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5> 370쪽)가 추계한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실질농업생산액은 빠르게 증가한 것으로 돼 있다. 이후 1930년까지 평탄한 수준을 유지하다 다시 1940년까지 급속히 상승한다. 그리고 1942년까지 평탄하게 유지되다 끝난다. 결국 1910년부터 1942년까지 조선의 농업생산량이 급속히 성장한 것은 일본의 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허 교수는 이 통계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때는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한 기간으로 생산량이 증가할 합리적 이유가 없고, 토지조사사업으로 경지면적을 정확히 파악한 결과일 것이라는 것이다. 허 교수는 “일제가 산미증식운동을 벌인 1930년대 이후 농업생산량이 비슷한 것도 오류”라고 말했다. 특히 이 그래프는 1942년 일제가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하면서 급격히 악화한 경제를 반영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허 교수는 “1943년 이후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수준까지 떨어졌다”면서 “이것을 빼고 일제가 경제성장을 이뤘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개발이 조선인 생활을 향상시켰다는 주장도 “일제의 하천개수사업은 철저히 일본인과 일본군을 위한 사업”이라고 말했다. 그는 농업생산량은 해방 후 급격히 늘었고, 한국 경제는 일본에 의해 성장한 건 아니라는 게 그의 결론이다. 허수열 교수가 이영훈 통계의 허상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허 교수가 이렇게 치밀하게 수치로 반박할 수 있었던 것은 경제학자라서 가능했다. 숫자와 통계를 들이밀며 얘기하면 국사학계 학자들은 반박을 못한다. 허 교수는 “이영훈의 특징은 숫자를 들이밀며 얘기해 반박하기 어려운데, 문제는 그 숫자가 모두 엉터리라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영훈 이사장과 고등학교 동기동창에 대학도 같은 과를 다녔으니 매우 친하다. 학회에서 치열하게 논쟁을 하다가도 점심 때 같이 웃으며 식사하는 사이다. 허 교수도 “이영훈은 학생운동을 하다 군대에 끌려간 운동권으로 나를 ‘의식화 교육의 대상’으로 삼았다”면서 “나는 달라진 것이 없는데, 그들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뭐가 달라졌을까. 이영훈 이사장은 1970년 전태일이 분신했을 때 제일 먼저 달려간 서울대생이며 대학생 시절 위장취업을 한 노동운동가다. 이 이사장은 학생운동으로 제적돼 군대에 강제로 끌려갔다가 제대 후 겨우 복학했을 정도다. 사실 운동권에서 역사문제는 매우 치열한 ‘주제’였다. 특히 원시 공동사회-고대 노예제 사회-중세 봉건사회-산업혁명 이후 근대 자본주의 사회를 거쳐 공산주의로 가는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은 1930년대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 이후 광범위하게 확산됐다. 마르크스 이론을 우리에게 맞추려면 조선에서 농업의 몰락과 자본주의 시작을 어디로 볼 것인가가 매우 중요하다. 경제사학자 중에 운동권·진보 성향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이사장 역시 백남운 이론에 심취하다 1980년대 17세기 조선의 노비 인구가 오히려 줄고 19세기 조선 농업이 몰락하는 것을 발견, 백남운 이론에서 탈피했다. 이 이사장의 스승인 안병직 교수 역시 진보적 학자로 일제강점기를 ‘식민지반봉건사회론’으로 설명했다. 이는 해방 후 미국 식민지로 이어져 80년대까지 운동권의 주요 이론이 됐다. 그러나 지금은 식민지근대화론의 ‘시조’로 평가받는다. “학문의 세계도 정치판과 비슷” 식민지근대화론은 1980년대 중반 ‘사회 구성체 논쟁’ 때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당시 진보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한말·일제침략하 자본주의 근대화론’ 논쟁이 일었다. 1922년 반식민지 민족해방 투쟁을 포기한 부르주아 민족주의자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혔다. 허 교수는 “1970~80년대 고도성장의 부작용이 드러나던 시기에 중국 사회주의가 평등사회 모델로 많이 언급됐다”면서 “그러나 1991년 사회주의 환상이 무너지자 운동권이 대거 식민지근대화론으로 옮겨갔다”고 말했다. 이것이 ‘뉴라이트’의 탄생이다. 그는 “극좌에서 중간까지만 갔으면 좋았는데, 극우로 간 것이 문제였다”면서 “비극은 거기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반일종족주의>를 쓴 낙성대경제연구소는 일제 강제징용과 종군위안부의 정부 강제성이 없다고 주장한다.(연세대 류석춘 교수의 위안부 발언이 논란이 되고 있다) “일제하 공업·자본·노동이 내 전공이다. 1930년대 주로 북한지역에서 공업화가 빠르게 이뤄지면서 노동수요가 증가한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조선총독부는 국가총동원법을 만들어 노동규제를 실시한다. 1942년 미드웨이 해전 패배로 일본·조선 경제가 급속히 악화되면서 강제징용이 시작된다. 조선총독부는 알선이라 하지만 실제는 강제다.” -일본이 계속 주장하고, 우리나라 학자상당수도 종군 위안부 모집에 정부의 강제성 문건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정말 없는 것인가, 학자들이 찾지 못한 것인가. “그런 문건을 조선총독부가 남겨 두겠는가. 8월 15일 일왕이 항복을 선언하고 9월 미군이 들어오기 전까지 조선총독부는 계속 서류를 소각했다. 더 중요한 자료는 일본 방위성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개하지 않는다.” -스스로 경제사학계의 ‘소수파’라고 했다. 식민지근대화론을 논박하는 교수들이 별로 없어 보인다. 혼자 고군분투하는 것 같다. “학문의 세계가 합리적이고 논리적 질서가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정치판과 비슷하다. 식민지근대화론을 신봉하는 교수 아래서 반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나. 경제사학을 전공해 밥먹고 살려면 서울대 이외에는 힘들다. 충남대의 내 밑에서 경제사학을 전공해 어느 대학 교수로 갈 수 있을까. 현실이 그렇다. 다수가 그러니 그냥 침묵하고, 나와 같이 엉덩이에 뿔난 사람만 소리치는 것이다.” 허 교수는 1951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경북고, 서울대 경제학과 70학번이다. 이영훈·김문수 전 경기지사 등과 동기동창으로 친하게 지냈다. 대학 때 이영훈만큼 운동권은 아니었다. 조교를 거쳐 안병직 교수로부터 1985년 박사학위도 받았다. 1978년부터 충남대에서 강의를 하면서 일본 교토대 초빙교수, 미국 하버드대 방문교수 등을 지내고 정년퇴직했다. 지금은 명예교수로 저술과 강연활동을 하고 있다. 가만히 허 교수를 보고 있으면 ‘점잖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카메라 앞에서 기자의 뺨을 때린 친구 이 이사장과 180도 달라 보였다. 우정보다 진실이 더 중요했겠지만 그래도 친구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원 기자가 임종국상 수상자이지 않았으면 인터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터뷰하기 전 2006년 임종국상 수상소감을 기자에게 보여줬다. 그 수상소감에는 13척으로 330척과 맞선 명량해전을 앞둔 이순신 장군의 말이 인용돼 있다. ‘一夫當逕 足懼千夫(일부당경 족구천부)’. ‘한 명의 병사가 길목을 막으니 족히 천 명의 사내가 두려워한다’는 의미다. 식민지근대화론이 횡행하는 지금 그의 심경을 정확히 대변하는 것 같다.
원희복의 인물탐구
[1930년대, 우리 시대의 뿌리를 찾아서]전쟁 속의 학문, 식민지 경성제대의 현실(2017. 11. 06 18:26)
2017. 11. 06 18:26 사회
1930년대 경성제대가 식민지 조선에서 겪었던 궤적은 1930년대 대학의 특징을 명쾌하게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의 대학은 1930년대 경성제대가 겪었던 이런 딜레마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워졌을까. 1931년 10월 도쿄제대 법학부 교수 야마다 사부로(山田三良)는 번민 끝에 경성제대 총장직을 수락했다. 그는 일찍이 ‘조선합병’의 근거를 마련하는 중요한 법적 조언을 한 바 있는 국제법의 전문가였다. 또 조선총독부가 식민지에 신설대학을 설립할 당시에는 도쿄제대 법학부장으로 있으면서 제자들의 식민지행을 이끌기도 했다. 그런 만큼 식민지와의 인연이 녹록지 않았던 그였다. 하지만 제국대학이라고는 해도 식민지에 세워진 신설대학을 맡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대학의 기틀을 마련했던 초대 총장인 핫토리 우노키치(腹部宇之吉)는 총독부와의 알력 끝에 2년도 못 채우고 그만두었다. 의학부를 만드는 데 산파 역할을 했던 3대 총장 시가 키요시(志賀潔)도 교수들 내부의 갈등과 알력 속에서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일본으로 떠나버렸다. 그나마 두루 무난했던 관료 출신의 2대 총장 마쓰우라 시게지로(松浦鎭次郞)마저도 일본 본토의 규슈제대 총장으로 허무하게 뺏기지 않았던가. 야마다는 자신이 경성제대 교수들이 바랐던 총장 1순위가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돌고 돌아서 자신에게 떨어진 경성제대 총장이라는 자리. 야마다의 고민이 깊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1934년 5월 개학 10주년을 맞아 전시회를 개최하는 경성제대 법문학부 풍경. 경성제대는 1926년 학부 설립에 맞춰 개학식을 거행하려 했으나 다이쇼 일왕의 죽음으로 취소됐고, 야마다 사부로 총장 시절인 1934년에야 기념식을 열었다./서울대 고문헌자료실 소장 만주 시찰에 나선 경성제대 총장 어렵사리 총장직을 수락한 그가 경성에 부임한 후의 첫 행보는 만주 시찰이었다. 당시 만주는 1931년 9월에 일어난 만주사변으로 관동군에 의해 장악된 상태였다. 만주 시찰 당시는 관동군의 주도로 ‘괴뢰’ 만주국이 탄생하려는 찰나였다. 야마다 총장은 국제법학자로서 구축한 인맥을 총동원해서 만주사변의 주동자인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와 이타가키 세이지로(板垣征四郞)와 접촉했고 그들과 비밀 회담을 가졌다. 만주국의 고위 인사들과 접촉할 기회도 가졌다. 경성으로 귀환하자 그는 대학의 공식행사를 통해 만주 시찰의 성과를 보고하는 한편, 준비작업을 거쳐서 1932년 말 ‘만몽문화연구회’의 결성을 발의했다. 법문학부와 의학부, 예과를 막론하고 경성제대에서 ‘만몽(滿蒙)’ 즉 만주와 몽골을 연구할 수 있는 교수들을 모두 집결시켰고, 학생들에게 연구와 답사에 참여하는 길도 열었다. 이렇게 대학총장이 비공식적인 연구조직을 ‘전학적(全學的)’으로 만든 것은 제국대학으로선 전례가 없었다. 당시 경성제대의 사정이 얼마나 절실했는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1926년 ‘동양문화의 권위’를 표방하며 출범했던 경성제대는 몇 년 되지 않아 ‘아시아 대륙문화의 개발자’라고 자기규정을 바꿔가면서까지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그리고 그 노획물인 ‘기회의 땅’ 만주에 대학의 사활을 걸었던 것이다. 경성제대의 때 이른 위기는 어쩌면 이미 예견된 사태일지도 모르겠다. ‘식민지 최초의 제국대학’, ‘대륙 유일의 제국대학’ 등 화려한 수식어가 더해졌지만, 경성제대는 애초부터 식민지 사회와는 철저히 고립된 채로 설립되었고, 이후에도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부유(浮遊)하는 상태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애초에 경성제대의 탄생은 대학 설립에 대한 식민지인들의 열망을 찍어 누르고자 했던 식민권력의 의도와 밀접한 관련을 가졌다. 병탄 직후부터 조선인들이 단독으로, 때로는 선교사들과 결합하는 형태로 독자적인 대학 설립을 모색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특히 3ㆍ1운동 시기 보여준 학생들의 활동은 설령 일본을 통해 배웠을지언정 근대지식이 해방의 원동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예시였다. 20년대 초반 조선인 사회의 대학 설립 열기는 뜨거웠고, 식민권력은 어떻게든 이 열망을 큰 저항 없이 잠재워야 했다. 무리를 해서라도 설립을 서둘러 ‘첫 대학’이라는 명분을 장악하고, 본토의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제국대학의 형식을 관철시켜, 이후 혹시라도 있을 대학 설립의 시도를 막겠다는 의도였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경성제대였는데 결과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식민통치가 끝날 때까지 경성제대는 식민지조선의 유일한 대학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조선, 일본 모두에 환영 못받은 설립 물론 이 때문에 경성제대가 치렀던 대가도 만만치 않았다. 시간을 다투는 사안이라 식민당국은 조선인 사회는 물론 심지어 재조일본인들조차 대학 설립과정에서 배제시켰다. 조선인 사회만큼이나 재조일본인 집단이 느꼈던 소외감은 컸다. 조선인 사회가 조선인 학생 입학에 대한 식민당국의 차별적 대우에 분노했다면, 재조일본인은 식민지에서 대학은 아직 시기상조라는 입장이었다. 식민지 운영에 필요한 전문적·실용적 지식이 부지기수인데 법과와 문과 편향의 제국대학이 웬말이냐는 것이다. 조선인은 일본인 편중이 아니냐, 일본인은 조선인의 비위를 너무 맞춘 것 아니냐 하며 서로를 비난했다. 심지어 독단으로 대학 설립을 밀어붙인 총독부마저도 대학에 대한 관심은 제한적이었다. 문화통치의 상징으로 경성제대가 설립되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제국대학의 형태를 채택한 것도 민간의 대학 설립 시도를 압도하여 좌절시킨다는 정치적 의도가 컸다. 대학의 설립까지는 사력을 다했지만, 정작 대학의 운영에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은 이런 사정과 관련이 깊다. 이처럼 시작도 하기 전에 경성제대는 이미 천덕꾸러기 신세였던 것이다. 1930년대 경성제대 도서관의 내부 풍경. 일제는 식민지 조선인들의 대학 설립운동의 의지를 꺾기 위해 대학을 설립했지만 충분한 예산과 대학자치의 원칙을 보장해주지 않았고, 경성제대는 본국의 전쟁과 만주 식민지화에 영합하는 학술 연구로 대학의 정체성을 확보하려 했다./서울대 고문헌자료실 소장 치명적인 위기는 곧 찾아왔다. 그것은 재정위기에서 시작되었는데, 총독부는 대학의 제도가 대략 갖춰졌던 1929년부터 경상경비를 대폭 삭감했다. 쇼와공황에 따른 긴축재정을 이유로 들었는데, 본토의 제국대학에 비교하면 엄청난 감소 폭이었다. 1932년의 경상경비는 한창 때의 75%로 최저점을 찍었는데 이후 점차 회복되기는 했지만 1939년이 되어서야 감소되기 이전 수준을 회복했을 정도였다. 교직원이 기본적으로 총독부 관료였고 따라서 인건비는 경상경비의 삭감에도 보존되었기에 대학운영의 감소폭은 더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1929년 첫 졸업생을 배출했지만 쇼와공황의 여파로 취업시장은 꽁꽁 얼어붙었고, 조선인 학생들은 입학 당시의 기대와는 달리 대학당국이 조선인에게는 학문의 길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교수와 조교수의 상당수는 제대 교수가 되기 위해 현해탄을 건넜지만, 제국대학의 대표적인 특권적 관행인 자율적인 대학운영(대학자치)과 학문적 자율성이 식민지라는 특수성과 재정적 궁핍 속에서 조기에 실종될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경성제대란 곳이 제국대학은 허울뿐이며 한갓 식민대학에 다름 아니라면, 우리는 왜 인생을 걸고 조선으로 건너왔을까. 경성제대의 사람들은 ‘제국대학’의 위상과 전통을 확인함으로써 이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 식민지조선이란 입지조건에 합당한 경성제대 고유의 국책(國策)을 설정하고, 제국 전역에 이와 같은 국책적 연구에 대한 필요성을 어필하여 학리(學理), 즉 전문성과 자율성을 구축하는 물적 기반을 확보하겠다는 발상이다. 이를테면 제국대학 특유의 국책과 학리의 공존을 모색한 것이라 하겠는데, 야마다 총장의 만주행을 계기로 ‘아시아대륙의 문화개발’, 즉 만몽과 대륙이 경성제대를 대표하는 국책 과제로 전면적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국책과 학리의 공존’이라는 과제 이후 경성제대가 보여주는 방향전환의 시도들은 지금의 관점으로는 전형적인 방법이다. 우선, 교수들은 외부에서 연구비를 획득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제국학사원, 외무성 문화사업, 일본학술진흥회, 핫토리보공회 등은 그 자체가 국책적 기관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만몽’을 내세운 경성제대 교수들의 연구과제에 대한 호응은 컸다. 1934년부터는 매해 10건 이상의 연구과제가 선정되었으며 수령액은 연 1만4000 엔 규모까지 늘어난다. 만몽을 내세우고 있는 만큼 현장조사의 필요성이 커지는데, 다양한 학제의 연구자 사이의 공동연구가 활기를 띠어간다. 특히 의학부 해부학교실의 경우에는 교실 단위의 연구자 및 학생들이 장기간에 걸쳐 체계적으로 현지조사를 수행하였는데, 그 결과 단기간에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해당 학계의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만몽문화연구회’와 그 후신인 ‘대륙문화연구회’는 경성제대의 연구자들과 외부 연구지원기관을 연결시키는 창구, 요즘 대학의 ‘산학협력단’과 같은 역할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구축된 국책연구들의 성과들을 기반으로, 경성제대는 시국적 관점과 ‘학술지식의 대중화’를 결합하는 대규모 대중강좌를 기획했다. 대표적인 것이 1939년과 1942년 두 차례에 걸쳐 ‘대동아의 기초지식’을 보급할 목적으로 개최된 대륙문화강좌였다. 참여강사가 2회 통틀어 총 46명, 전체 강의시간이 138시간에 이를 정도로 대규모 강의였고 청강자 수도 1만에 가까울 정도로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 당시 경성제대의 입장에서 이런 호응은 오랜 고립에서 벗어나 식민지 사회와 ‘결합’하는 순간으로 비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제 경성제대 앞에 펼쳐졌던 현실은 ‘국책과 학리의 공존’과는 거리가 멀었다. 경성제대는 ‘만주의 발견’을 계기로 ‘국책에 기여하는 학리’를 표방하며 돌파구를 마련하려 했지만, ‘전쟁’을 기회로 삼아 ‘학리’를 확보하고 국책과 균형을 이루겠다는 발상 자체가 애초에 불가능에 가까운 과업이었기 때문이다. 경성제대는 시국적 인식의 강화라는 통치상의 필요성에 부응하는 동시에, 대륙 진출을 둘러싼 대중들의 세속적 욕망에 영합함으로써 ‘대륙 유일의 제국대학’이라는 자기정체를 선명하게 각인시킬 수 있었지만, 그 반대급부로 지식생산의 도구화, 학술지식의 도구화를 초래했다. 더욱이 전쟁의 최전선에서 이루어졌던 대륙연구들은 실제로는 학리는커녕 군사작전에 다름없었다. 군대를 대동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그렇게 수집된 정보를 연구의 후원자들에게 보고하는 일련의 연구조사 절차는 점령지에서 이뤄지는 선전전이나 정보전에 정확하게 대응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학리’가 존속할 수 있는 최소 기반이 되었던 대학자치가 경성제대에서는 1939년 결정적으로 훼손됨에 따라 국책은 학리를 압도하게 된다. 학리는 빈껍데기만 남고 학자들은 전쟁을 위한 진짜 첨병이 되어갔던 것이다. 그렇다면 30년대 식민지의 대학 현실이란 지금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 지금까지 별로 알려지지 않은 경성제대의 운명을 이렇게 시시콜콜하게 다뤘던 이유는 이 이야기 가운데서 지금 우리 대학의 친숙한 모습이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세계적 관점에서 볼 때 1930년대는 1차 대전 이후 총력전의 사상이 확산되면서 ‘지식과 학술의 전쟁 동원’이 중심과제로 등장하던 시기였다. 근대 초기 국민국가의 이념과 정당성에 기여했던 대학은 이번에는 분과학문을 총력전과 연결시키는 제도적 장치로서 다시 한 번 중심적인 역할을 부여 받았고, 2차 세계대전의 사상·심리전을 통해 유용성을 인정 받았다. 1930년대 경성제대가 식민지 조선에서 겪었던 궤적은 이런 현대 대학의 출발점으로서의 30년대 대학의 특징을 도리어 명쾌하게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의 대학은 30년대 경성제대가 겪었던 이런 딜레마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워졌을까. 이야기를 읽으면서 드는 기시감을 체제의 지속으로 읽는다면 너무 과장일까.
1930년대, 우리시대의 뿌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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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희·우제원의 독서연애] 식민지 일상에 맞선 ‘조선의 페미니스트, '가장 불온한 여성’ 낙인
[박세희·우제원의 독서연애] 식민지 일상에 맞선 ‘조선의 페미니스트, '가장 불온한 여성’ 낙인
2020. 10. 26 15:43 문화/생활
intro 청년 제원은 똑똑한 세희와 사랑에 빠졌다. 세희는 재원에게 단 하나의 연애 조건을 요구한다. ‘존중할 것!’ 처음엔 이 조건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밑도 끝도 보이지 않는 조건이었다. ‘알 수 없으면 읽으면 되지!’ 세희와 제원은 연애를 위한 독서를 함께 해보기로 한다. ‘박세희·우제원의 독서연애’는 99년생 페미니스트 대학생 세희와 기독교학을 전공한 93년생 제원의 연애독서일기다. 세희와 제원이 함께 읽은 열여덟 번째 책은 ‘조선의 페미니스트’(이임하 지음 / 철수와 영희)다. 이번엔 세희가 쓴다. ▶세희와 제원의 대화(라면 대첩) 세희: 제원아, 엄청난 문제가 발생했어! 긴급이야 긴급! 제원: 뭐야? 무슨 일인데? 세희: 라면 먹고 싶어서 현기증 나. 제원: 아, 깜짝 놀랐잖아! 세희: 뭐, 진짜 긴급이란 말이야. 라면 끓여 줘. 제원: 못 말려 진짜. 뭐 계란이랑 콩나물 잔뜩 넣고 끓여줄까? 시원하게. 세희: 허, 아직도 나를 이렇게 몰라? 아무것도 넣지 말고 끓여줘. 제원: 어휴, 그걸 무슨 맛으로 먹니? 세희는 라면은 다 좋아하잖아. 뭐가 들어가도 라면인데, 콩나물 넣는 것은 싫어? 세희: 라면이니까 싫지는 않아. 그래도 취향의 문제는 있지! 존중해 주시죠? 근우회 발회식 광경. 근우회는 1927년에 창립했다가 1931년에 해산된 여성 항일구국운동 및 여성지위향상운동 단체다.▶ 뭐든지 본질이 중요해. 세상엔 맛있는 음식이 많다. 하지만 절대 바뀌지 않는 나의 최애 식품은 빨간 국물에 꼬불꼬불한 면, 적절한 건더기 수프가 들어간 라면이다. 식사로, 간식으로 그리고 해장으로도 완벽한 음식. 인간에게 필요한 영양소 모두를 섭취할 수 있는 식품을 두고 ‘완전식품’이라고 한다지만, 어느 상황에나 든든하고 만족스럽게 배를 채워 주는 라면이야말로 ‘나만의 완전식품’이다. 제원이도 나도 라면을 사랑한다. 하지만 콩나물과 계란을 넣고 싶어하는 제원이와 완전식품의 순수함에 무언가를 첨가하는 것을 용납하고 싶지 않은 나 사이에서 벌어진 ‘라면 대첩’은 어언 1년째 반복되고 있다. 제원의 말대로 ‘다 같은 라면’이라지만 어쩌겠는가! 그의 취향은 내 취향이 아닌 것을…. 근우 전국임시대회 모습.라면을 두고 제원이와 투닥거리다가 오늘은 느닷없이 라면을 통해 페미니즘을 설명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란라면’도 ‘파라면’도 모두 라면이듯이 페미니즘이라는 라면 역시 ‘성 소수자’ ‘노동자’ 혹은 ‘이데올로기’ 등 다양한 재료가 각자 적절하게 자신의 존재와 역할을 투영함으로써 평범한 라면맛으로부터 구분될 수 있지 않을까? 페미니즘 역시 본질은 유지한 채 더 많은 사람이 각자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선 이런 다양성의 추구를 ‘변질’로 취급하려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라면에 파를 넣으면 ‘파라면’인 것이지, 이걸 두고 굳이 ‘파국물에 라면 사리를 넣은 라면 맛 파스타’ 따위로 부를 이유는 없다. 만약 누군가가 굳이 이렇게 부른다면 그것은 조롱의 의미를 드러내려는 것뿐이다. 존중이 없는 이런 태도는 무시해 버려도 좋다. 어떤 맛의 라면이 더 필요한지가 아니라, 이제 세상이 좋아졌으니 라면 따윈 먹지 말라는 식의 주장을 펼친다면, 그것 역시 무시해도 좋다. 나는 내 자유롭고 주체적인 선택에 따라 앞으로도 계속 라면을 먹을 것이다. 근우 창간호 표지▶불온하고 불완전한 게 어때서? 나는 소중한 페미니즘 논의를 지키기 위해 한국 페미니즘의 시작점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래서 선택한 책이 바로 ‘조선의 페미니스트 - 식민지 일상에 맞선 여성들의 이야기’다. 이 책은 한반도에서 ‘여성 인권 향상’ 운동으로부터 전개된 한국 페미니즘의 시작점을 찾아가고 있다. ‘조선의 페미니스트’는 일제강점기라는 격랑에 맨몸으로 내던져진 여성들이 자립을 꿈꾸고 여성 인권의 향상을 위해 투쟁하는 내용을 담은 일종의 투쟁기다. 기생이었던 정칠성, 도쿄 여의전을 나온 엘리트 유영준 등 사회적·경제적으로 다양한 계층의 여성들이 일제 치하에서 민족 해방과 여성 인권의 향상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그들이 당시 신문 등에 투고한 글과 연설문 등을 통해 보여준다. 특히 저자인 역사학자 이임하 교수는 당시의 페미니즘에 대해 ‘단순히 외국의 개념을 수입한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페미니스트들의 주체적 움직임으로부터 시작되고 성장한 것’이라는 점을 밝힌다. 사회주의 여성운동 단체 ‘조선여성동우회’ 회원이었던 여성 독립운동가 고명자의 모습.책을 읽으며 가장 눈에 띈 것은 당대 페미니스트들이 본인과 다른 선택을 한 여성들을 비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식민지 시대의 한반도는 다양한 시간이 겹쳐진 시기이기도 했다. 신식 복장과 헤어스타일의 소위 ‘신여성’이라고 불리던 부류와 조선시대 의상과 전통적인 쪽찐 머리를 바꾸지 않은 여성들이 같은 시·공간에 공존했다. 남들과 다른 모습의 신여성들은 쉽게 비난의 대상이 됐다. 어떤 식으로든 주류에서 벗어난 소수자를 두고 굳이 차별을 해야만 되겠다는 굳건하고 무지한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별로 변화가 없다. 당시에는 신여성이 소수자였다. 그들은 선망의 대상임과 동시에 차별의 대상이기도 했던 것이다. ‘신여성은 사랑 없이 돈만 보고 결혼하는 족속’이라는 식의 논의가 신문 칼럼에도 등장할 정도였다고 한다. ‘돈을 아예 보지 않고 결혼하는 것은 단지 미련함일 뿐이며, 신여성이 돈만 보고 사랑 없이 결혼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훗날 조선부녀총동맹 중앙집행위원장 등을 지낸 정치인이자 당시 독립운동가였던 여성 유영준은 이런 반박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 당시 신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어떤 양상이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는 또한 ‘남성은 지키지 않는 정조관을 여성에게만 들이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도 주장했다. 유영준은 비록 본인이 신여성은 아니었지만, 다양한 여성이 자신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을 옹호했다. 쉽게 짐작할 수 있지만, 이 땅의 초기 페미니스트들은 당대로부터 ‘가장 불온한 여성’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정조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 머리는 대중의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유교적 문화가 답습되던 20세기 초반의 시·공간에서 이런 발언은 사회적 자살행위에 가까웠다. 책을 읽으며, 예나 지금이나 페미니스트의 숙명은 ‘가장 불온한 방식으로 시대의 고정관념에 맞서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 독립운동가 박진홍이 체포됐을 때의 모습.여전히 페미니스트들의 이야기는 불온한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 ‘불온’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사상이나 태도 따위가 통치 권력이나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맞서는 성질이 있음’이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하늘이 부여한 인간의 존엄성 앞에서 감히 순응을 강요하는 체제의 논리가 훨씬 불온하지 않은가! 그러니 스스로를 불온함이라 여기며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페미니즘은 인간을 중심으로 옳음과 정의를 제시하는 우리의 과업일 뿐이니까 말이다. ‘조선의 페미니스트’는 바로 이런 점을 환기해 준 멋진 책이다. ■제원의 한마디 토마토가 유럽에 처음 소개됐을 때는 독이 있는 식물로 알려져 식용을 하지 않았다고 해. 토마토의 훌륭함을 설명할 언어가 없었기 때문이지. 다양성에 대해서도 똑같이 생각해 보면 어떨까? 다름을 기어코 틀림이라고 선언하고 싶은 우리의 충동은 다름을 이해하고, 설명할 만한 언어가 아직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 아닐까. 페미니스트는 언어를 새로 만들어야 하니까 늘 시끌벅적할 수밖에 없겠지. 나는 연금술사의 방과 같은 이 시끄러움이 늘 신나!
박세희·우제원의 독서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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