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2 건 검색)
- “‘무해한 관계’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양다솔의 ‘적당한 실례’ 연습기 [플랫]
- 2024. 03. 26 10:12문화
- ... 소통을 시도하는 것조차 검열을 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신간 <적당한 실례>를 출간한 양다솔 작가가 20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인터뷰 시작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 플랫
- [인터뷰]양다솔 “이 정도의 적당한 실례는 늘 하면서 살고 싶어요”
- 2024. 03. 25 12:55문화
- ... 실례>의 양다솔 작가 “선 넘어 ‘다정한 타박’ 듣고 살고 싶어” <적당한 실례>의 양다솔 작가가 20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인터뷰 시작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주간경향(총 31 건 검색)
-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31)오피스 샤워(2023. 11. 03 11:12)
- 2023. 11. 03 11:12 사회
-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내 샤워의 준비물은 미국 드라마 <오피스>다. 나는 매일 샤워를 할 때마다 미국 드라마 <오피스>를 본다. 그것은 거의 정해진 의식 행위에 가깝다. 휴대전화를 쥐고, 화장실에 간다. <오피스>를 틀고, 샤워기를 튼다. 어느 날은 무작정 샤워기를 틀고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생각했다. 뭔가 아닌데, 이게 샤워가 아닌데. 잠시 후에 답을 찾았다. <오피스>가 준비되지 않았던 것이다. 바디 워시는 없어도 되지만, 칫솔질쯤 하루 걸러도 되지만, <오피스>는 그렇지 않다. 몇 시즌의 몇 화가 됐든지, 마이클의 씩씩한 목청이 들려오지 않으면 샤워는 시작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뭔가 단단히 고장 난 샤워를 한 지가 벌써 몇 년이 흘렀다. <오피스>는 2005년부터 2013년까지 방영한 미국의 대하(?) 시트콤으로, 미국의 스크랜턴이라는 소도시의 작은 제지회사 직원들의 일상을 담은 코미디 드라마다. 나는 샤워를 하는 4년 이상의 시간 동안, 그러니까 1,000일 이상 그 드라마를 반복 주행하고 있다. 옷이라면 해졌을 것이고, 길이라면 닳았을 것이다. 대사를 외는 건 재작년쯤 끝냈고, 이제는 다음 대사가 나오기도 전에 내가 먼저 말한다. 그래서 어쩐지 드라마 속 캐릭터들이 내 말을 복창하는 것처럼 들리는 모양새가 돼버린다. 처음 몇 번 동안은 전혀 웃기지 않았던 농담이 한 스무 번쯤 돌려보았을 때는 완벽히 내 어딘가에 적중해 허리가 휘도록 웃으며 머리를 감은 일도 있다. 목소리만 들어도 누가 말하는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은 마치, 가장 사랑하는 친구에게 듣고 싶었던 바로 그 말을 딱 필요한 때에 듣는 것처럼, 나에게 꼭 알맞게 안착한다. 우리끼리 준비한 무대가 매일같이 열리는 느낌이다. 하여튼지 간에 매일매일 보아도 질리지를 않는 것이었다. 다른 날과 다를 것 없는, 아주 평범한 날이었다. 저녁이었고, 나는 언제나처럼 샤워를 하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그 순간 조금은 적막하다고 생각했고, 손가락을 몇 번 움직여 <오피스>를 틀었다. 그렇게 된 거다. 이제 나의 샤워실 안에는 시야는 확보되면서 물은 튀지 않는 적절한 공간에 전용 휴대전화 거치대까지 놓여 있다. 혹시라도 여행을 가거나 친구네 집에서 묵게 되는 날에도 마찬가지다. 창문 난간에든 휴지 걸이 위에든 올려놓고 <오피스>를 틀었다. 처음엔 단순히 좋아서 그런 줄 알았다. 그냥 재밌어서 시작된 작은 습관이지 싶었다. 그런데 해가 거듭될수록, 에피소드가 200개가 넘는 <오피스>의 대사를 달달 외우게 될수록 어쩐지 심오한 고민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오피스>가 없다면 더는 샤워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어쩌면 샤워에 있어 나에게 물보다 더 근원적인 요소는 <오피스>가 아닐까? <오피스> 샤워를 이토록 무의식적이고 절대적으로 고집하는 것은 나의 무의식과 어린 시절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지는 않을까? 어쩌면 나는 의지할 만한 사람이나 관계를 찾지 못해 이런 영상물에 지나친 의존을 하는 것은 아닐까? 프로이트나 칼 융이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주의 깊게 들여다보지 않을까? 다른 걸 틀어보려는 시도를 안 해본 것도 아니다. 즐겨 보았던 드라마나 영화로 슬쩍 바꿔보기도 했다. 그러나 곧 스르르 <오피스>로 되돌아갔다. 그것들은 너무 시선을 끌거나, 너무 재미가 없었다. 그 밸런스가 조금만 흐트러져도 샤워를 할 수 없거나, 시청을 할 수 없었다. 그나마 조금 대체할 수 있었던 것은 애니 <아따 맘마>였다. <오피스>가 샤워를 책임졌다면 <아따 맘마>는 일과를 책임졌다. 거실에서 하루 종일 끊기지 않고 <아따 맘마>가 재생됐다. 언뜻 보면 하루 종일 혼자서 밥을 해 먹고 글을 쓰고 할 일들을 하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사실은 혼자서 트로트를 뽑는 뽀글뽀글한 머리의 일본인 엄마에게서 밥을 얻어먹고 미국에 있는 제지회사에 출근하는 것이 나의 일과였던 셈이다. 그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메리고라운드, 영원처럼 느껴지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매 회차를 거듭하며 이야기는 나아가고 있지만, 삶의 하루하루처럼 반복되고 있기도 하다. 어디선가 그 세계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나를 그 사람들의 일부라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그러니까 <오피스>의 일부. 그곳의 그 평범한 직원들의 일원 말이다. 몇 년간 샤워 시간마다 <오피스>를 보며, 나는 그들이 스치듯 보여주는 표정, 가장 익숙한 시선, 대사의 음절 사이사이까지 스며들고 말았다. 이제는 길게 걸쳐진 그 시간의 어디에 놓여도 그 공간을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단순히 영상이 재생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친숙한 공간이 열리는 느낌이 들었다. 매일 샤워를 하러 드나드는 화장실보다 더 익숙하고 따뜻한 공간이. 친구들은 종종 “다솔아, 왜 난데없이 영어 대사를 외쳐?” 하고 물었다. 내가 <오피스>에서 자주 들은 대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에서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피스>는 거의 10년에 걸쳐 촬영된 드라마였고, 나는 실제로 그들과 10년은 알고 지낸 기분이었다. 이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얘기냐면, 정작 <오피스>를 제작한 제작진과 배우들은 나 같은 사람을 예상 시청자로 두지도 않았다. 2000년대에 제작된 미국 시트콤을 2023년에 한국에 사는 20대 여성 아시아인이 볼 거라고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으리란 말이다. 심지어 무려 4년에 걸쳐 매일 샤워할 때마다 제멋대로 그 사무실로 출퇴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을 것이다. 얼마 전에 환경과 관련된 행사에 참여하게 됐는데, 거기에 함께 참여한 한 기업이 제지회사여서 나는 혼자서 아무 이유도 없이 깊은 유대감을 느끼고 말았다. 처음으로 진짜 제지회사 직원들을 마주한 나는 혼자서 너무나 설레버리고 말았던 것이다(<오피스>는 제지회사를 배경으로 진행되는 시트콤이지만 종이와는 사실상 전혀 관련이 없다!). 방심했다가는 ‘제가 동종업계에서 일을 했었어서요’라고 말할 뻔했다! 나는 그들의 행동과 매무새를 주의 깊게 관찰하며 누가 마이클이고 누가 드와이트이고 짐이고 팸인지 맞춰보느라 심하게 신이 난 상태였다. 잠시 후에야 내가 조금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지금 내 안광이 어떨까! 어쩜, 그들 눈에는 수상하리만치 빛나고 있을 거야! ※이번 회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를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
-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30)앞집 언니(2023. 10. 06 11:06)
- 2023. 10. 06 11:06 사회
-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요즘 나는 앞집 언니가 있는 삶을 살고 있다. 그것은 이런 일들을 가능하게 한다. 저녁에 렌즈를 끼던 도중에 실수로 한쪽을 잃어버렸다. 분명 눈에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보니 사라지고 없었다. 자리에서 꼼짝도 안 하고 그 작고 투명한 것의 행방을 찾기 시작했다. 한참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 불현듯 어딘가에 전화를 건다. 건조하게 말한다. “언니, 나 또 불행한 일의 목전에 있어.” 순식간에 커다란 목소리가 수화기를 찢고 나온다. “뭐라고!” 잠시 후 창문 밖으로 눈 부신 빛이 보인다. 빛을 제외한 주변은 칠흑처럼 어둡다. 엄청난 빛이 성큼성큼 마당을 가로질러 온다. 작고 결연한 걸음걸이, 팔꿈치 아래까지 찰랑이는 검은 생머리. 그는 나의 앞집 언니다. 한 손에는 대마법사 간달프의 지팡이 같은 엄청난 조명 기구를 쥔 채다.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반딧불이 같다. 언니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우리 집 문을 열어젖힌다. 바닥부터 살피기 시작한다. 그가 가까이 가는 곳마다 그곳의 훤한 민낯이 드러난다. 언니는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나는 한번 안경을 벗으면 다시 안경이 어디 있는지 찾지도 못할 정도로 눈이 나쁘지만, 언니는 움직이는 모기를 손으로 잡을 만큼 눈이 좋다. 그러니까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언니의 눈에는 보인다는 얘기다. 나는 사건에 착수한 언니를 뒤로하고 다시 안경을 쓴 채 예정돼 있던 온라인 회의에 참석한다. 언니는 말없이 허리를 굽히고 내 방의 점·선·면을 꼼꼼히 살핀다.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읊조린다. “이건 정말 자존심이 달린 문제야.” 그것은 사실이었다. 렌즈가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곳에 있다면 그걸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이 마을을 통틀어 언니가 유일했다. 그것은 단순히 이 충청도의 작은 시골에서 나를 제외한 유일한 젊은이가 언니여서만은 아니다. 언니는 비건인 나를 위해 특별히 선인장 가죽으로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형태의 지갑과 에어팟 케이스를 만들어 선물해준 인물이었고, 트위터의 구체관절인형 커뮤니티에서 인형의 손을 가장 완벽하게 채색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무슨 게임이든 시작했다 하면 누구보다 뛰어난 전략과 승부욕으로 언제나 전국 순위 상위권에 랭킹되고는 했다. 그러니까 렌즈가 아니라 지뢰라도 찾아낼 사람이 바로 그였다. 언니는 사뭇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린다. “이렇게 내 능력을 시험하다니.” 저쪽 방에 있던 엄마가 기척을 느끼고 나와서 언니에게 속삭인다. 너 뭐 찾니? 뭐 잃어버렸대? 그렇다. 나는 이 사안을 바로 옆방에 있는 엄마에게는 얘기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언니는 내 회의에 방해가 될까 속삭이며 상황을 전한다. 엄마가 작게 기함한다. 이제는 두 사람이 집안을 개미핥기처럼 돌아다닌다. 그러고 보니 언니는 내가 언니라 부르는 유일한 존재였다. 따로 이름을 붙일 필요도 없이, 거의 그에게만 쓰는 단어라고 해도 무방했다. 어느 순간부터 내 삶에는 대부분의 관계명사가 사라졌다. ‘오빠’라는 단어가 제일 먼저 실종됐다. 친구 사이에서 위아래로 스무 살 정도는 그냥 이름을 부르고 평어를 썼다. 심지어 어머니도 어머니라 부르지 않고 아버지도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다. 아빠는 스님이어서 스님이라고 부르고, 어머니는 전화번호부에 ‘옆방 아주머니’라고 저장돼 있었다. 딸린 형제자매도 없었다. 앞집에 사는 언니는 나에게 유일하게 살아남은 관계명사였다. 마치 직함처럼 부여된 이름이었다.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제는 좋은 일이 있어서, 주로는 안 좋은 일이 있어서, 대부분은 아무 일도 없어서였다. 나에게는 심심찮게 사건들이 닥쳤고, 어느 순간부터 언니는 전화를 받으면 “여보세요” 대신 “또 무슨 일 있어?”하고 묻게 됐다. 마침 나는 내 삶에 될 대로 심드렁해진 참이었다. 이곳저곳을 뒤져봤지만 렌즈는 보이지 않았고, 열심히 찾는다고 해서 나올 것 같지도 않았기에 그냥 두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원래대로 돌려주곤 했던 마음의 고무줄이 한없이 너절해져 있었다. 나는 내 삶을 어딘가 버려두고 떠나가고 싶었다. 나에게서 깨끗이 씻겨지고 싶었다. 그때 나를 잡아당긴 것은 언니의 말이다. “절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아.” 언니는 여전히 방을 빙빙 돌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순간 웃음이 삐져나왔다. 한 통의 전화로 언니는 내 삶의 주인이 된 것 같았다. 나는 그 자리를 비운 지 벌써 오래였다. 모든 일이 그렇듯 또 나의 실수였고,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이었고 그뿐이었다. 나는 웃으며 “언니 미안, 미안해”라고 말했다. 언니는 대답 대신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종내 그것을 찾지 못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언니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없어.” 한껏 풀이 죽어서 고개를 숙인다. “찾지 못했어. 어디에도.” 나는 말한다. “괜찮아. 정말 고마워.” 빙그레 웃는다. 내 입꼬리 무게를 언니가 나눠지고 있는 것 같다고 느끼며. “뭐가 고마워. 찾지 못했는데.” 나는 손사래 친다. “아냐, 아냐. 잊어버려.” 마치 무언가를 잃은 쪽은 언니인 것처럼 말한다. 삶에는 그런 일들이 흔하게 일어난다. 갑자기 말도 안 하고 사라져서는 돌아오지 않는 것들투성이다. 울기도 웃기도 애매한 불행과 실종으로 가득하다. 또 어딘가에 무책임하게 방류됐을 것이다. 나는 웃으며, 앞이 보이지 않은 채로 며칠을 지내고, 이 시골까지 렌즈가 오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더 이상 중요한 일이 아니다. 나는 근래에 일어났던 가장 기쁜 일에 대해 쓰고 있으니까. 전화 한 통으로 30초 안에 엄청난 빛을 뿜으며 등장할 사람이 있다는 것은 유익하고 든든하고 그리고, 정말 웃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마을에는 정말로 반딧불이가 산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존재다. 밤이면 창문 너머로 별처럼 밝은 작은 빛이 깜빡깜빡 날아다닌다. 그러나 가장 거대한 반딧불이는 언니다. 언니는 커다란 빛을 가지고 온다. 그것도 아주 금방 온다. 사건은 계속해서 일어나지만, 그것은 지나간다. 그 모든 것은, 언니의 덕이다.
-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
-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29)모임(2023. 09. 01 10:56)
- 2023. 09. 01 10:56 사회
-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지금 이곳은 구름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습니다. 물기를 가득 머금고 뿜지 않고 있어요. 숱 많은 머리를 축 늘어뜨린 근사한 버드나무 아래 앉았어요. 짙은 녹색의 머리칼 사이로 작은 빗방울들이 툭툭 나를 건드립니다. 잔잔히 흐르는 강이 내다보이는 정자로 자리를 옮기며 모임은 시작됩니다. 들이치는 비를 맞으며 자신의 이름을 맞히는 게임을 합니다. 이름은 방금 옆 사람이 지어줬어요. 오늘은 신경숙과 황정은, 미셸 푸코와 토베 얀손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신경숙은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130㎞를 달려 이곳에 왔습니다. 황정은은 설레 잠을 한숨도 못 잤대요. 토베 얀손은 틈만 나면 이유 없이 손뼉을 칩니다. 미셸 푸코는 내가 올여름에 본 가장 크고 듬직한 부채를 들고 다닙니다. 충주 우체국에서 줬대요. 그는 생각보다 신발 끈이 자주 풀리는 사람. 길가에 자주 멈춰 섭니다. 보다 못한 토베 얀손이 끈을 직접 묶어주겠다고 나서요. 푸코는 웃으며 쭈그려 앉아 끈을 묶습니다. 두 번이나요. 네 사람은 안으며 인사합니다. 미셸 푸코와 황정은은 오늘 처음 만났지만, 서로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모임의 이름은 자주 모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서울에 살지 않는다는 것. 오늘의 모임을 위해 이들이 이동한 거리는 307㎞에요. 그들이 있던 곳을 점으로 잇는다면 대한민국을 포근한 이불처럼 덮을 수도 있어요. 물리적 거리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시대에 그들이 움직인 거리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각각에게는 엄숙한 의무가 있습니다. 황정은은 도시락, 신경숙은 편지, 토베 얀손은 운전, 미셸 푸코는 가이드 담당이에요. 신경숙이 약속한 편지를 꺼내놓네요. 네 개의 봉투에는 귀여운 여우가 그려져 있습니다. 네 사람은 푸코가 태어났을 때부터 살았던 동네에 갈 생각입니다. 이것은 작은 문학기행입니다. 그들은 푸코가 지난 1년간 쓴 모든 문장을 읽었거든요. 그런고로 그곳의 방앗간과 공원에 볼일이 있습니다. 특히 푸코의 마당은 그들에게 성지입니다. 그처럼 아름답게 묘사된 마당을 본 적이 없거든요. 그들은 4인용 경차에 꼭 맞고, 커다란 교회 옆에 차를 세웠어요. 푸코가 울적할 때나 심심할 때 정처 없이 몇 시간이고 걷는다는 동네를 넷이 걷습니다. 그 거리에 쌓인 무수히 많은 장면을 상상해 봅니다. 저기 그가 다닌 초등학교가 보여요. 푸코는 프랑스 사람이 아니냐고 묻지 마십시오. 그는 충주 사람이고, 이곳의 사과를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어요. 레즈비언으로 알려진 토베 얀손은 학교 앞 분식집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군요. 방금 하교한 아이들이 저마다 떡꼬치와 컵볶이와 콜라 맛 슬러시를 들고 있는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네요. 마치 그의 과거를 멀리서 바라보는 것 같아요. 푸코의 아빠가 매일 같이 맨손체조를 했다는 공원을 지나갑니다. 저기 야트막한 언덕 너머에서 불량한 학생들이 모여 놀고는 한대요. 미셸 푸코는 옥동자, 황정은은 요맘때, 토베 얀손은 와일드 바디를 들고 방앗간을 지납니다. 아이스크림은 달콤하고 빠르게 녹아가고 있어요. 신경숙이 고른 것은 사과와 파인애플 맛이 번갈아 난다고 하네요. 푸코가 묻습니다. “그것은 신식 아이스크림인가요?” 그러자 토베 얀손이 정정합니다. 새로운 아이스크림이냐고 물어야지. 푸코가 태어난 집의 대문은 검은색. 이제 모두가 그의 집 열쇠가 어디 있는지 알게 됐어요. 대문이 검은색인 것에 대해 별 유감은 없대요. 하지만 그 대문이 초록색이거나 노란색이거나 빨간색이라면 어땠을까 상상해 보는 것은 재미있습니다. 앞 골목에는 커다랗게 권태연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어요. 권태연씨는 더 이상 그곳에 살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당에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진귀한 모양의 돌들이 모여 있어요. 새가 날개를 펼치고 있고 연인이 키스하고 있고 바다 너머로 일몰이 지고 있어요. 돌의 나이는 천만년이라는데, 그들이 그곳에 모이기 위해 이동한 거리는 얼마일까요? 황정은은 그 공간의 구석구석에 동요합니다. 푸코의 문장으로 지어진 거푸집에 색을 채워 넣고 있어요. 푸코의 집에서 네 사람은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방식으로 정렬된 가족의 사진을 봅니다. 그 집에서 나고 자란 네 사람이 아주 작을 때, 작을 때, 클 때, 아주 클 때 찍은 사진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각 맞춰 정렬돼 있어요. 그 사이에 시간이 숨어 있습니다. 그렇게 작고 아름답고 위대하고 가지런한 역사를 또 볼 수 있을까요. 그때 신경숙이 말하네요. “눈물 나요.” 그는 키가 크고 사파리 직원 같은 차림을 하고 있으며 스스로 그네를 잘 탄다고 확언합니다. 태어나서 한국을 떠나본 적이 없고 무슨 음식이든 가리지 않는다는 황정은은 보리밥을 비벼 먹을 때 고추장이 필요하냐고 묻습니다. 토베 얀손이 고등어구이 위에 누워 있던 레몬 조각을 맨손으로 집어 꾹 짜서 즙을 뿌렸을 때 황정은은 “정말 자상하세요”라고 말했어요. 모임에 참석한 네 사람은 동네를 떠나 곧 산도 보이고 강도 보이고 탑도 보이는 곳으로 이동합니다. 강가의 탁 트인 시야에 훅 솟아 있는 탑을 보며 토베 얀손이 물어요. “저거 오래된 거야?” 미셸 푸코가 답합니다. “응.” 탑은 1000년 됐습니다. 1000년은 오래일까요? 네 사람은 정자에서 들이치는 비를 맞으며 자신의 이름 맞히기 게임을 합니다. 그 이름은 방금 옆 사람이 지어줬어요. 자신이 누군지 아무도 맞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간은 아이스크림처럼 빠르게 녹아 없어지고 있어요. 아무래도 그들은 책을 좀더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미셸 푸코는 자신을 맞히는 것을 포기합니다. 황정은은 도시락을, 신경숙은 원고지를 꺼냈어요. 비가 잦아들고 있네요. 하나둘 배를 깔고 누워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한참 말이 없습니다. 작가들 아니랄까 봐 누구도 그만 쓰자는 말이 없네요. 글을 낭독하는 소리가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를 닮았습니다. 황정은이 싸온 떡 강정은 웃음이 나는 맛입니다. 그것은 네 사람에게 상상력을 주었고 수분을 가져갔어요.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모두 먼 길을 가야 합니다. 토베 얀손은 검지를 들어 올립니다. “일, 이, 삼, 사, 오, 육, 칠.” 탑은 칠층입니다. 탑 앞에는 탑과 똑같이 생긴 자그마한 모형이 서 있어요. 모형을 만져도 좋습니다,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 작은 모형을 손으로 여러 번 쓰다듬습니다.
-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
-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28)인천 기행(2023. 08. 04 11:21)
- 2023. 08. 04 11:21 사회
-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다음 버스까지는 18분이 남았다. 버스 배차간격을 확인하는 일은 서울에 살게 된 이후로 없어진 습관이다. 나는 다른 버스를 고른다. 일단 타고, 도착하면 방법은 얼마든 있을 거였다. 그 동네라면 훤했으니까. 인천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일은 10년 만이다. 그곳으로 향하는 버스는 모두 빨간색이다. 빨간색 버스가 수시로 정류장을 드나들며 인천의 곳곳으로 사람들을 실어나르지만, 사실상 같은 버스는 30분의 한 대꼴로 온다. 서울을 나오는 날이면 버스 배차 시간부터 확인하곤 했다. 무턱대고 나왔다가는 한참을 기다리게 됐으니까. 내가 기억하는 인천의 절반은 빨간 버스다. 평생 많은 버스를 타봤지만 잠을 자기에는 빨간 버스만 한 것이 없다. 관광버스처럼 등받이 각도를 조절할 수 있는 좌석이 있고, 한 번 고속도로에 들어가면 정차하지 않고 일정한 속도로 앞을 향해 매끈하게 내달렸다. 덕분에 잠에 빠지면 깰 일이 거의 없었다. 버스를 탔지만 목적지에 도착하는 데는 실패하는 날이 많았다. 내가 줄기차게 빨간 버스를 타던 시절은 중·고등학생 때였으니, 생각해보면 한창 잠이 많던 시기였다. 한창 클 때의 아이와 빨간 버스가 만나면 무한 루프의 슬리핑 버스가 된다. 나는 서울과 인천을 가로지르며 깊은 잠에 빠졌다. 인천 끄트머리에 있던 우리 동네에서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뜨면 신촌이었다. 서울역의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내려야지 하고 눈을 뜨면 거짓말처럼 다시 인천에 도착해 있었다. 분명 여러 번을 내렸고, 내려서 학교에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몸은 여전히 빨간 버스 안에 있었다. 버스에서 내릴 즈음에는 키가 조금 더 자라 있었다. 학교에는 점심때가 다 돼야 도착했다. 혼비백산으로 뛰어오느라 진이 다 빠진 얼굴로 어버버하며 어떻게 늦었는지도 설명하지 못했다. 친구들과 선생님은 외계인을 보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알 수 없는 억울함에 부아가 치밀고 토가 나올 것 같았다. 빨간 버스와 함께 와서 해명을 하고 싶었다. 헐레벌떡 내리느라 버스에 두고 내린 물건들이 종일 눈에 아른거렸다. 그런 날이 줄줄이 이어지고, 학교에 가는 건지 버스에 타는 건지 알 수 없는 날들이 이어져도 인천에서 서울로 학교에 다니는 것을 문제 삼은 적은 없었다. 서울이 좋았던 건지, 버스가 좋았던 건지 알 수 없다. 나는 그저 매일 아침 빨간 버스에 올랐다. 간혹 드물게 잠들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때는 울었다. 잠 다음으로 많은 것이 생각이었으니까. 빨간 버스에서 가장 울기 좋은 자리는 맨 뒷줄 가운데 자리다. 자칫했다가는 언제든 앞으로 데굴데굴 구르기 딱 좋은 텅 빈 복도가 쭉 뻗어 있다. 버스에 타는 모든 승객이 가장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버스에서 가장 위험한 좌석. 그곳에 앉으면 천장에 난 작고 네모난 창문을 볼 수 있다. 그곳이 열려 있으면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향해 불어왔다. 그것은 그 시절 나에게 울 장소로는 요동 벌판 다음으로 적절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장소에 걸맞은 의식처럼 보였다. 무릇 산 정상에 오르면 “야호!” 하고 외치듯이. 모두가 앞을 보고 있고, 모두가 앞으로 향하고 있으며, 짝수로 앉은 사람들 사이에서 유일한 나머지수가 되어 앉아 있었으니까. 구슬 똥 같은 눈물방울을 쉬지 않고 뚝뚝 흘렸다. 그때 운 것을 모아 말렸으면 소금 한 통은 거뜬할 거다. 울었던 기억은 선명한데, 이유는 모두 녹아버렸다. 삶은 그때도 마음처럼 되질 않았던 모양이다. 아무렴 버스에 타고 내리는 것도 되지 않았던 것을. 어떤 이유에선가 이곳에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다. 이곳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고 믿고 싶었다. 마치 종료된 게임 서비스처럼, 도메인을 잃은 홈페이지처럼. 그런데 그곳에 가는 일은 우스울 정도로 금방이었다. 창문 밖으로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 시작됐고, 한산한 오후의 경인고속도로를 시원하게 질주하던 버스는 순식간에 나를 그곳에 데려다 놓았다. 나는 앞쪽 창가 자리에 앉아 눈을 크게 뜨고 밖을 바라보았다. 나는 더 이상 내릴 곳을 지나칠 정도로 잠이 많지 않았고, 눈물을 뚝뚝 흘릴 만큼 촉촉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인천은 그대로였다. 마치 10년 전에 내 방 책상에 두고 간 지우개와 연필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처럼. 풍경들은 즉각적으로 기억들을 불러냈다. 매일 같이 드나들던 지하철역 입구, 자전거를 세워두던 골목, 저기 저 하천에서는 놀다가 너구리를 마주친 적이 있었고, 그 옆에는 언젠가 일했던 편의점이 있었다. 그 동네에서 우리 가족도 잠깐 집이란 걸 가졌다. 단 한 동짜리 작고 낡은 아파트의 10평짜리 집이었다. 엄마는 지금까지도 종종 그때의 이야기를 한다. 우리도 집이 있었다고. 꿈이라도 꾼 듯이 말하곤 한다. 그때 그걸 안 팔았으면 지금쯤 얼마일까? 이따금 나한테 물었다. 궁금하지만, 팔을 걷어붙이고 알아볼 만큼 궁금하지는 않은, 딴소리 같고 혼잣말 같은 말이었다. 아빠는 경제위기가 닥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덜컥 집을 팔았다. 우리는 다시 월세를 살았고, 예고했던 경제위기는 오지 않았다. 그 일을 두고 아빠는 갖는 것도 뭐든지 가져본 애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 이후로 우리 가족이 뭔가를 가져본 일은 없다. 그 시절 나는 내 집이고 아니고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몰랐다. 나에게 집은 엄마·아빠, 그리고 지붕이었을 따름이다. 다만 한껏 들뜬 엄마·아빠와 방마다 어떤 벽지로 도배를 할지 고르러 다니고, 화려하고 밝은 와인색 싱크대로 부엌을 단장하는 과정이 신났을 뿐이다. 우리는 딱 한 개만 고르지 못해 결국 방마다 다른 벽지를 발랐다. 내 방은 갖가지 꽃장식이 그려진 싱그러운 연두색이었다. 엄마가 그 집을 나오면서 그 벽지들을 하나하나 오래도록 바라보았던 것을 기억한다. 아파트는 기억 속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외벽의 흰색 페인트가 세월에 비해 바래지 않은 걸 보니 근 몇 년 사이에 페인트칠을 한 모양이다. 나는 아파트 입구 바로 옆에 있는 작은 부동산 앞을 기웃거렸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영진아파트 왔어. 옆에서 듣고 있던 이모가 묻는다. 어디래? 엄마가 말한다. 아, 영진아파트. 이모가 되묻는다. 그 영진아파트? 영진아파트라는 단어는 우리 가족에게 대명사다. 우리 집이라는 대명사. 나는 영진아파트 앞에 있는 영진부동산에 나붙은 영진아파트의 매매가를 그들에게 불러준다. 10년 전에 산 가격에서 딱 두 배 올랐다. 그것은 내가 자취하는 집의 전세보증금에도 못 미친다. 나는 말한다. 자, 봐봐. 이 집 갖고 있었어도 횡재수는 못 됐겠지? 엄마는 힘없이 웃는다. 어쩌다 거길 갔어? 나는 말한다.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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