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55 건 검색)
- [역사와 현실]영조의 개혁
- 2024. 10. 30 21:01오피니언
- ... 않게 되고 생각지도 못한 문제들을 일으킨다. 자동차처럼 제도도 고쳐가며 쓰든지 폐기해야 한다. 영조는 세금 개혁인 균역법을 실시했지만 그것만 했던 것은 아니다. 재위 17년째인 1741년에 관료제도...
- 역사와 현실이정철
- [이기환의 Hi-story] 영조는 '어느 개가 짖어!' 했고, 정조는 '탕탕평평평평탕탕!' 외쳤다
- 2023. 12. 25 08:00문화
- ... 밝힌 <어제대훈>을 펴냅니다. 영조는 “효종-현종-숙종의 혈통을 잇는 이는 경종과 과인(영조) 뿐이며, 신축년(1721년) 경종의 명으로 왕세제가 된 것”이라고 굳이 밝힙니다. ‘탕평’은...
- 탕평책 영조 정조 박세채 황극탕평 균역법 붕당
- [대전시] “공공영조물 배상 공제 보험 제도 운영”…대인 1인당 최대 3억 원·대물 10억 원 배상
- 2023. 12. 08 10:01사회
- ... 파손(타이어 펑크·타이어 휠 파손 등) 피해를 본 시민이 자치단체의 도로 부서에 관련 사진과 함께 영조물 배상 사고 보상 신청을 하면 보험사에서 현장 방문과 신청인 인터뷰를 통해 이를 심사 후 처리하게
- [이기환의 Hi-story] '법정 은퇴연령 70세인데…' 숙종·영조는 왜 50대에 노인대접 받았을까
- 2023. 04. 03 06:00문화
- ... 꼬집은거죠. 영조가 펄펄 뛰었습니다. “네가 감히 임금이 기로소에 들어가는 것을 반박하는가.” 영조는 ‘너 때문에 더러워서 임금 노릇 못해먹겠다’는 듯 “모든 정사는 앞으로 승정원이 알아서...
- 기로소 숙종 기사계첩 기사경회첩 영조
스포츠경향(총 29 건 검색)
- [카툰 공감] 영조 임금의 뉴딜 3편
- 2021. 02. 01 14:26 생활
- ‘카툰 공감’ 229호 제공
- 영조 임금의 뉴딜
- [카툰 공감] 영조 임금의 뉴딜 2편
- 2021. 02. 01 14:26 생활
- ‘카툰 공감’ 229호 제공
- 영조 임금의 뉴딜
- [카툰 공감] 영조 임금의 뉴딜 1편
- 2021. 02. 01 14:25 생활
- ‘카툰 공감’ 229호 제공
- [간밤TV]‘사도세자는 연쇄살인범?!’…‘선녀들’ 로운·김강훈도 푹 빠진 영조와 사도세자의 ‘부자의 세계’
- 2020. 05. 04 08:30 연예
- ‘선을 넘는 녀석들-리턴즈’. MBC 제공‘선을 넘는 녀석들’ 알면 알수록 복잡다단하고 입체적인 영조의 매력에 푹 빠진 탐사였다. 5월 3일(일) 방송된 MBC 역사 탐사 예능 ‘선을 넘는 녀석들-리턴즈’(이하 ‘선녀들’) 36회에서는 남보다도 못한 ‘부자의 세계’를 보여준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가 펼쳐졌다. 아들에게는 비정한 아버지였지만, 백성들에게는 세종대왕 못지않은 성군의 업적을 남긴 영조의 숨겨진 이야기들이 입체적으로 소개돼 시청자들의 흥미를 모았다. ‘선녀들’ 36회 방송은 전국 가구 시청률 5.5%(2부)로 집계됐으며, 분당 최고 시청률은 6%까지 상승해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다.(닐슨코리아 기준) 이날 설민석, 전현무, 김종민, 유병재는 SF9 로운, 김강훈과 영조 탐사를 함께했다. 설민석은 영조가 사도세자를 왜 뒤주에 가뒀는지, 사도세자는 왜 뒤주에 갇혀 죽게 됐는지, 그들을 둘러싼 다양한 의혹들을 제기했다. 공식적 기록인 조선왕조실록과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 등 역사적 기록들이 모두 달랐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선녀들’에게 큰 충격을 안긴 것은 ‘사도세자는 연쇄살인범이다?!’라는 주제였다. 설민석은 “(사도세자가) 하루에 6명 연쇄살인을 했다. 어림잡아 100여 명을 죽였다”고 말하며, 살인뿐 아니라 자결까지 시도했던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를 타박하고 미워했던 아버지 영조로 인해 사도세자는 울화증을 앓고 기행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비정한 아버지 영조의 면모도 충격을 더했다. 설민석은 “아들을 뒤주에 가둔 그날에도 영조는 제시간에 식사를 했다. 뿐만 아니라 ‘개선가(적을 징벌하고 돌아올 때 연주하는 음악)’를 연주하게도 했다”고 말했다. 또 사도세자의 죽음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하루 더 기다렸다가 뒤주를 열어 사망을 확인했다고. 남보다도 못한 ‘부자의 세계’에 전현무는 “원수도 그렇게 안 하지 않을 것”이라며 탄식했다. 김강훈은 실제 뒤주가 있었던 장소에서 듣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에 “(그때를 상상하니) 마음이 아프고 슬픈 것 같다”며 깊이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다. 로운은 “영조가 마냥 나쁜 사람 같아 보였는데, 모든 과정을 들어보니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았을까’ 안쓰러웠다”는 소감을 남겼고, 설민석은 “영조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도 역사를 넓게 보는 방법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선녀들’은 백성들의 아버지였던 영조의 모습을 만나러 갔다. 검소한 생활로 유명했던 영조는 사치품이던 여인들의 가체를 금지하고, 52년 재위 기간 내내 금주령을 내렸다고. 또 당시 나빠진 개천 수질로 인해 백성들이 피해를 입자, 대대적인 준천 사업을 펼치며 빈민구제까지 했다. 지금의 청계천을 있게 한 영조의 업적에 ‘선녀들’은 모두 놀라워했다. 뿐만 아니라 로운은 “영조가 중국 역사책 내용도 바꿨다고 들었다”라고 질문을 했다. 영조는 중국 역사책에 인조반정이 쿠데타로 표현되어 있자, 조선의 정통성을 위해 이를 바로잡았다고. 조선이 상대적 약소국이었기에 더 놀라운 업적이었다. 설민석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업적인 조선총독부 폭파와 일제의 잔재인 국민학교(황국신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변경한 ‘역사 바로잡기’와의 공통점을 말해 흥미로움을 더했다. 아들 사도세자에게 비정한 아버지였지만, 조선 후기 백성들에겐 세종대왕 못지않은 성군이었던 영조. 유병재는 “영조는 진짜 복잡다단한 사람인 것 같다”고 말했고, ‘선녀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이날 ‘선녀들’의 탐사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봤던 영조의 모습에서 나아가, 우리가 몰랐던 다양한 모습들을 입체적으로 조명해 색다른 재미를 안겼다. TV로 배우는 꿀잼 역사책 MBC ‘선을 넘는 녀석들-리턴즈’는 매주 일요일 밤 9시 5분 방송된다.
- 간밤TV
주간경향(총 2 건 검색)
- [이기환의 Hi-story](114)영조는 “개가 왜 짖냐”…정조는 잠자리서도 ‘탕탕평평평평탕탕’(2023. 12. 26 07:00)
- 2023. 12. 26 07:00 문화/과학
- 김두량의 ‘삽살개’ 그림에 쓴 영조의 어제시. 짖는 입과 혀의 모양 그리고 옆으로 누운 귀, 바짝 곤두선 털, 치켜든 꼬리… 삽살개가 눈앞에서 사납게 짖어대는 듯하다. 이 어제시는 사납게 짖는 삽살개가 제 본분을 잊고 자기 당의 이익만을 위해 떠드는 붕당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해석된다. 개인소장·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탕탕평평…’. 국립중앙박물관이 영조 즉위 300주년을 맞아 개최 중인 특별전의 제목이 좀 ‘쨍’ 합니다. 영조(재위 1724~1776)와 정조(재위 1776~1800)가 ‘탕탕’하고 ‘평평’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펼친 ‘탕평’과 관련된 특별전입니다. 영·정조가 탕평책을 쓰면서 글과 그림을 통해 소통했던 방식을 한번 들여다보자는 것이라 합니다. 이 특별전을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는 ‘삽살개’가 등장하는 특별전 포스터가 그것입니다. 또 하나는 특별전 제목인 ‘탕탕평평’인데요. 이 대목에서 웃음이 터졌습니다. ‘탕탕평평’도 모자라 ‘탕탕평평평평탕탕(蕩蕩平平平平蕩蕩)’이라고 새긴 정조의 장서인(규장각 소장)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어느 개가 짖어!” ‘삽살개’ 그림을 살펴볼까요. 영조가 화원 김두량(1696~1763)의 ‘삽살개’ 그림에 직접 ‘어제시’를 남겼습니다. “밤에 사립문을 지키는 게 네 소임인데(柴門夜直 是爾之任) 어찌 대낮에 길에서 이렇게 짖고 있느냐(如何途上 晝亦若此).” 과연 화면 가득 그려진 삽살개가 고개를 치켜들고 이빨을 드러낸 채 사납게 짖고 있습니다. 삽살개는 원래 주인을 지키고 온갖 삿된 존재를 물리치는 충견으로 알려졌죠. 그러나 그런 삽살개가 주인에게 이빨을 드러내고 위협한다면 그 개는 주인을 무는 맹견일 따름입니다. 화가 김두량도 대단한 분이죠. ‘삽살개’뿐 아니라 김두량의 ‘사계산수도’에도 영조의 어제글(‘김두량도 본’)이 보입니다. 영조가 ‘남리’라는 호를 하사할 만큼 총애했던 화가였습니다. 그런 영조가 김두량에게 “사납게 짖는 삽살개를 그리라”는 명을 내리고 본분을 모르고 설쳐대는 무리를 꾸짖는 어제시를 남겼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개 그림은 어떨까요. 김두량의 다른 개그림인 ‘흑구도’는 두 마리 다 아주 노곤한 모습으로 평화롭게 앉아 있습니다. 이암(1499~?)의 ‘모견도’ 등 다른 작가들의 그림에서도 ‘삽살개’처럼 사납게 짖는 그림은 없습니다. ■침전 이름도 ‘탕탕평평실’ 이제 정조의 ‘탕탕평평평평탕탕’ 장서인을 보죠. 워낙 책벌레였던 정조였으니 소장본에 갖가지 장서인을 찍었습니다. ‘탕평’은 “붕당과 편파가 없으면 왕도(王道)가 탕탕하고, 평평하다”는 <서경>(‘주서·홍범’)에서 유래됐다. ‘탕평’의 핵심조건은 ‘임금이 표준을 세워 탕평을 이루는 황극탕평’이다. ‘마치 북극성(임금)을 여러 별이 옹위해 공평함을 이룬다’는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자료 그중 ‘뜻을 크게 갖고 정진하라’는 뜻인 ‘홍재(弘齋)’가 눈에 띄고요. ‘…만기(萬機)…’라는 장서인도 유독 많아요. 예부터 “천자(군주)는 하루에 만 가지 일을 처리한다”고 해서 ‘일일만기(一日萬機)’(<서경> ‘고요모’)라 했습니다. ‘만기친람’이 여기서 유래됐죠. ‘탕평’ 관련 장서인 중에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 있어요. ‘세상에 다양한 물(만천)이 있지만 달(군주)은 그 형태에 따라 똑같이 비춘다’는 뜻인데요. 세상의 주인인 군주는 백성의 다양한 능력을 골고루 활용하는 존재라는 뜻이죠. 하지만 모든 장서인 중 ‘백미’는 ‘탕탕평평평평탕탕(蕩蕩平平平平蕩蕩)’입니다. 얼핏 보면 아무리 봐도 ‘탕평평탕’으로만 보이죠. 그러나 ‘탕’ 자 밑에 ‘〃’, ‘평’ 자 밑에 ‘〃’ 자를 보십시오. 그게 반복부호입니다. 그렇게 읽으면 ‘탕탕평평평평탕탕’이 됩니다. 정조 임금이 얼마나 ‘탕평’에 목이 말라 있었으면 그렇게 ‘탕탕평평평평탕탕’을 반복했을까요. 정조는 당신의 침전 이름도 ‘탕탕평평실’로 지었습니다. “나는 …침전에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는 편액을 달고 ‘정구팔황(庭衢八荒) 호월일가(胡越一家)’ 글자를 크게 써서 창문 위에다 걸어 두었다. 아침저녁 눈여겨보면서 끝없는 교훈으로 삼아오고 있다.”(<정조실록> 1792년 11월 6일) ‘정구팔황 호월일가’는 ‘변방도, 오랑캐도 앞뜨락이나 한 집안처럼 여긴다’는 뜻입니다. ‘지역이나 당색에 따른 차별은 절대 없다’는 다짐을 잠자리에서까지 되새긴 겁니다. ■조제를 하듯 탕평 ‘탕탕평평’은 “붕당과 편파가 없으면 왕도(王道)가 탕탕하고, 평평하다”는 <서경>(‘주서·홍범’)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사진12024년 3월 10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탕탕평평’ 특별전. 영·정조가 탕평책을 쓰면서 글과 그림을 통해 소통했던 방식을 들여다보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 ‘탕탕평평’의 핵심조건이 있습니다. ‘황극(皇極), 즉 임금(황·皇)이 지극한 표준(극·極)을 세워 탕평을 이룬다’는 겁니다. 조선의 탕평책 이념은 소론의 영수였던 박세채(1631~1695)가 구체화했습니다. “…마치 북극성(임금)을 여러 별이 옹위하는 것처럼 서민부터 군자에 이르기까지 치우치거나 공정하지 못할 근심이 없게 됩니다.”(<숙종실록> 1683년 2월 4일) 박세채가 씨앗을 뿌려 영·정조 때 실행된 탕평책은 ‘북극성과 뭇별’의 관계처럼 임금이 표준을 세워 이뤄가는 이른바 ‘황극 탕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당파가 정권을 잡았을 때 다른 정파의 ‘쓸 만한 인물은 기용한다’는 ‘조제론’이 황극탕평의 요체라 할 수 있습니다. 약을 짓는 이치와 같은 겁니다. 물론 약의 처방은 군주의 몫인 겁니다. 어떤 당파가 정권을 잡으면 반대당이 깡그리 일소되는 ‘환국’과는 다른 입장이죠. ‘승자독식’과 ‘패자일소’의 구태에서 벗어나야 망국적인 당파싸움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겁니다. ‘임금이 중심이 돼 화해와 공존, 경쟁을 펼치는 정치’를 추구한 겁니다. ■경종의 석연치 않은 죽음에 연루?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난 영조는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올랐죠. 당시 소론은 경종(재위 1720~1724)의 편에 서 있었고요. 노론은 경종을 압박해 그들이 지지한 연잉군(영조)를 왕세제로 올렸습니다. 그런데 경종이 즉위 4년 만에 승하하는 과정에서 왕세제가 연루된 ‘시해음모설’과 ‘독살설’이 그럴싸하게 퍼집니다. 즉 왕세제(영조)가 경종의 와병 중에 상극의 음식인 게장과 생감을 올렸고, 막판에는 의사의 처방없이는 절대 같이 먹어서는 안 될 인삼과 부자를 드시도록 고집했다는 겁니다. 그것도 어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1724년 8월 21·24일)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영조는 인원왕후(숙종의 계비·1687~1757)와 왕세제에 우호적이었던 소론 온건파의 도움으로 겨우 왕위에 오르죠(1724). 하지만 마지막 고비가 남아 있었습니다. 영조의 정통성을 문제 삼은 이인좌(1695~1728) 등이 반란을 일으킵니다(1728). 이 반란은 소론 온건파 오명항(1673~1728) 등의 활약으로 천신만고 끝에 진압됩니다. ■“난 게장을 올리지 않았어” 이후 영조는 상처 입은 정통성 문제를 해결하고 민심을 추스르기 위해 <감란록>을 편찬했는데요. 영조는 서문에서 “반란의 뿌리는 붕당에 있다”고 못 박았습니다. 소론이 경종을, 노론이 왕세제(영조 자신)를 밀었기 때문에 죽기살기식 싸움이 벌어졌다고 본 겁니다<영조실록> 1729년 8월 18일자). 영조는 또 <어제대훈>에서 “효종-현종-숙종의 혈통을 잇는 이는 경종과 과인(영조)뿐이며, 신축년(1721) 경종의 명에 의해 왕세자가 된 것”이라고 굳이 밝힙니다. 경종독살설 관련, 최대 의혹사건인 ‘게장 사건’ 등을 해명하는 <천의소감>도 펴냈습니다. “황형(경종)께서 드신 게장은 (과인이 아니라) 수라간에서 올린 것”이라고 해명했습니다. 이후 영조는 본격적으로 ‘황극탕평(皇極蕩平)’을 추진하는데요. 1742년 성균관에 세운 ‘탕평비’에 ‘탕평의 의지’가 담겨 있답니다. 영조는 성균관 유생들에게 “…만약 당을 섬기는 마음이 있다면 과거장에 들어오지 마라”고 훈계했습니다. 그러면서 “두루 사귀고 치우치지 않음은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고, 치우치고 두루 사귀지 않음은 소인의 사사로운 생각”이라고 했죠. 사진5정조의 ‘탕탕평평평평탕탕’ 장서인. 얼핏 보면 ‘탕평평탕’ 글자만 새겨져 있는 듯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탕’ 자 밑에 ‘〃’, ‘평’ 자 밑에 ‘〃(땡땡)’ 부호가 보인다. 반복부호이다. 그러니 이 ‘탕평평탕’ 장서인은 ‘탕탕평평평평탕탕’을 새겨넣은 것이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자료 ■인사위원회에 참석한 정조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어땠을까요. 정조는 임금이 세운 큰 의리에 각 정파가 참여하는 이른바 ‘의리 탕평’을 주창했습니다. 학문이 신하들보다 뛰어난 정조는 ‘군사(君師·만백성의 어버이이자 신하들의 아버지)’를 자처했죠. 그랬기에 임금이 주도하는 ‘의리탕평’을 주도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인사행정도 온전히 왕에게 넘어갑니다. 영조는 성균관 유생들에게 “만약 당을 섬기는 마음이 있다면 과거장에 들어오지 마라”고 명했다. /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1785년(정조 9) 12월 창덕궁 중희당에서 열린 ‘친림 도목정사’(승진·좌천·보직이동 등을 결정하는 인사위원회)를 그린 ‘을사친정계병’을 볼까요. ‘인사위(도목정사)’에 참석한 정조가 인사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어좌 앞에 ‘3배수 후보자 명단(망단자)’이 보이고요. 임명장에 찍을 옥새가 전각 밖 붉은 탁자 위에 놓여 있습니다. 특히 규장각 관원의 위상이 눈에 띕니다. 규장각 관원이 승지들과 함께 내시와 사관 다음에 앉아 있습니다. 인사행정 담당인 이조와 병조 당상은 툇마루에, 이조와 병조 낭관은 전각 밖에 있는데 말이죠. 정조가 규장각 관원 등 측근 세력을 기반으로 왕권 강화를 모색한 겁니다. ■생각 없는 늙은이 같으니… 정조가 신하들과 격의 없이 주고받은 편지가 눈길을 끕니다. 특히 재상인 심환지(1730~1802)에게 보내는 ‘비밀편지’가 흥미로운데요. 이중 정조가 심환지에게 “사직상소를 올리라”고 사주하는 편지가 있어요. “경의 본직은 함께 물러난다는 의리로 사퇴 명분을 삼는 게 좋겠다. 내일 안으로 사직하고 임금의 답을 기다려라….”(1798년 1월 11일 밤) 정조의 사주에 따라 이틀 뒤(13일) 심환지가 사직상소를 올립니다. 그러자 정조는 짐짓 “함께 물러나겠다고 경이 고집하는데 옳지는 않지만 허락하겠다”면서 홀랑 사표를 수리해버립니다. 또 1798년 4월 6일 편지에서는 “…계속 궁궐에 들어오라는 금의 명을 어기도록 하라. 사직상소는 초고를 지은 뒤 반드시 보여주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결국 심환지는 임금의 명에 따라 4번이나 “궁궐에 들어오라”는 명을 어겼고요. 미리 사직상소의 초고까지 본 정조는 편지의 각본대로 심환지를 해임했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정조는 ‘비밀편지’에서 육두문자에 가까운 거친 언사로 심환지를 다그치는데요. “나는 경(심환지)을 이처럼 격의 없이 여기는데 경은 갈수록 입을 조심하지 않는다. ‘이 떡이나 먹고 말 좀 전하지 마라’는 속담을 명심하라. 매양 입을 조심하지 않으니 경은 ‘생각 없는 늙은이(無算之수)’라 하겠다.”(1797년 4월 10일) 이밖에 “과연 어떤 놈들이기에 감히 주둥아리를 놀리는가(乃敢鼓吻耶)”라든지, “그 자는 참으로 후레자식이라 하겠다(可謂眞胡種子)”는 등의 욕설을 내뱉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엔 왜 그리 당명이 많은가” 근본적인 의문이 생깁니다. 이와 같은 영·정조의 탕평책으로 조선이 확 바뀌었을까요. 영조는 ‘이인좌의 난(1728)’을 진압한 뒤 펴낸 <감란록>에서 “반란의 뿌리가 바로 당쟁”이라고 규정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1772년이면 영조가 즉위한 지 48년이 지난 때였는데요. 그런데 영조는 당파를 개탄하는 포고문을 발표합니다(8월 11일). “아! 50년 동안 한결같은 마음은 탕평인데… 우리나라의 당명은 어찌 그리 많은가? 처음에는 동서가 있었고, 다음엔 대북·소북이 있었으며, 또 남서가 있었는데, 그것도 부족해서 다시 노론·소론이라 하고, 지금은 청(淸)·명(名)이라 한다.” 영·정조의 탕평책이 붕당 정치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이 아니고요. 강력한 왕권으로 정파 간의 극렬한 다툼을 억누른 것에 불과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하고 순조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왕권이 약화하자 곧 세도정치라는 더욱 파행적인 정치 형태를 낳게 됐다는 겁니다. ■“뜻은 이뤄진다” ‘탕탕평평’을 그러나 너무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김두량의 또 다른 개 그림인 ‘검은 개(흑구도)’. 풀밭에 쪼그리고 앉아 뒷다리로 가려운 몸통을 긁고 있는 검은 개의 노회한 표정과 동작이 자연스럽고도 생동감 있게 묘사됐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왕권 강화든 뭐든 백성들의 삶에 보탬이 되면 그것은 업적이 아닙니까. 탕평으로 붕당의 갈등을 줄인 영조는 백성의 삶을 보듬는 정책을 펼쳤죠. 그분의 가장 큰 업적은 균역법과 준천(준설)이었습니다. 즉 1752년(영조 28) 양인(16~60세)이 군 복무 대신 해마다 부담해야 할 세금을 포 2필에서 1필로 감해주는 균역법을 전격 시행했습니다. 짓눌린 백성들의 어깨를 한결 덜어준 겁니다. 또한 준천, 즉 하천 정비작업도 펼쳤습니다(1760). 균역청의 업무지침을 수록한 <균역청사목>. 영조의 가장 큰 치적은 균역법이었다. 1751년 9월 시행된 균역법에 따라 양인이 군 복무 대신 해마다 부담해야 할 세금이 포 2필에서 1필로 줄어들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약간의 비만 와도 범람하기 일쑤였던 서울의 하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였죠. 여러 차례 현장에 나가 작업자들을 독려한 영조는 공역이 마무리된 후 <준천첩>을 만들어 신하들에게 배포했습니다. 이 첩에는 ‘뜻이 있으면 마침내 이뤄진다(有志竟成)’라는 고사가 담겨 있습니다. ‘꿈은 이뤄진다’는 2002년 한일월드컵 축구 구호가 연상되죠. 영조가 <서경>과 <시경>의 구절을 인용해 쓰고 그린 바위그림이 심금을 울립니다. “한쪽으로 치우쳐 백성을 돌보지 못하면 안 되네(維石巖巖).”, “백성의 험함을 돌아보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하네(顧畏民巖).” 영·정조의 ‘탕탕평평’이 백성을 향한 마음씨의 발로였다는 사실만큼은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 이기환의 Hi-story
- [이기환의 Hi-story](77)50대에 ‘노인 대접’ 요구···무리수 둔 숙종·영조(2023. 03. 31 11:22)
- 2023. 03. 31 11:22 문화/과학
- ‘기로(耆老)’라는 말이 있습니다. ‘늙을 기(耆)’에 ‘늙을 노(老)’이므로 노인을 가리키는 말인데요. 1719년(숙종 45) 4월 18일 숙종이 59세의 나이로 기로소에 입소한 뒤 그 기념으로 기로신 10명을 초청해 잔치를 벌인 모습을 그린 중 ‘경현당석연도’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예기> ‘곡례 상’은 “60세는 기(耆)이며, 남에게 일을 시켜도 되는 나이(六十耆指使)이고, 70세는 노(老)이며, 자기 일을 넘겨주고 은퇴하는 나이(七十曰老而傳)”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즉 ‘기로’는 예순 살(60)이 넘어가면 노인 대접을 받고, 일흔 살(70)이 되면 정년퇴직한다는 깊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물론 70세가 되더라도 물러나지 않는 법이 있긴 있었습니다. 임금에게서 궤장(?杖·의자와 지팡이)을 하사받는 것인데요(<예기> ‘곡례·상’). 예컨대, 신라 문무왕은 664년 70세가 돼 은퇴를 결심한 김유신(595~673)에게 궤장을 하사했습니다(<삼국사기> ‘열전·김유신’조). 은퇴하지 말고 임금이 내려준 지팡이를 짚고 출근해 의자에 앉아 근무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삼달존’의 조건 그건 예외였습니다. <증보문헌비고> ‘직관·치사’조는 “70세가 되면 은퇴하고, 비록 70세가 되지 않더라도 사직을 청하면 대부분 허락한다”고 설명했습니다. 70세 이상의 은퇴 관리 중 정2품 이상의 문관 중 ‘기로소’로 입소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일종의 원로원이라 할까요. 물론 자격요건을 채우더라도 다 기로소 회원이 될 순 없었습니다. 우선 과거급제를 통하지 않고 관리가 되면 아무리 학문이 높고 명망이 두터워도 원칙적으로 입소할 수 없었습니다. 무관 출신도 역시 자격을 얻지 못했답니다.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조건이 한 가지 더 있었습니다. ‘덕(德)’이었습니다. <맹자> ‘공손추·하’는 “세상에서 존귀하게 여기는 세 가지가 벼슬(작·爵)과 나이(치·齒)와 덕(德)”이라 했습니다. 이것을 ‘삼달존(三達尊·존귀한 조건 세 가지)’이라 하는데요. ‘정2품 문관(爵)’으로서 ‘70세 이상(齒)’이 된 이라도 ‘덕(德)’을 겸비하지 못한 이는 기로회원이 될 수 없었습니다. 노인 대접 받겠다고 아우성친 임금 이렇게 ‘삼달존’의 원로대신만이 입소할 수 있는 기로소에 들어가겠다고 아우성친 임금이 두 분 있었습니다. 숙종(1661~1720·재위 1674~1720)과 그 아들인 영조(1694~1776·재위 1724~1776)입니다. 더욱이 이 두 분은 70세는커녕 60세도 안 된 59세(숙종), 심지어 51세(영조)에 기로소 입소를 강행했습니다. 숙종은 초대한 기로신 10명에게 다섯 잔씩 술을 마시도록 했다. 기로신들은 임금이 따라주는 술을 사양할 수 없어 만취했다.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두 분은 임금 신분으로서 들어갈 필요가 없는 기로소 입소가 뭐가 그리 급했을까요. 1719년(숙종 45) 4월 18일이었습니다. 59세에 기로소에 입소한 숙종은 기로신 10명을 초청하여 기념잔치를 벌였습니다. 당시 숙종은 눈병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았는데요. 그래도 “병든 몸이 궁전에 오르니… 여러 관리 모여 있고…. 이 연회는 본시 높이려는 뜻에서 나왔으니 가득한 술잔에 자주 손이 간들 어떠리”라는 어제시를 지었습니다. 숙종은 기로신들과 하루종일 어울리며 5차례에 걸쳐 다섯 잔씩 술을 마시도록 했습니다. 그날의 연회 내용을 글과 그림으로 제작한 것이 <기사계첩>(보물)입니다. 59세에 “노인 대접 받고 싶다” 숙종의 기로소 입소를 처음 거론한 이는 여성군 이집(1668~1731·인조의 고손자)이었습니다. 이집은 1719년(숙종 45) 1월 10일 “어차피 올 연말이면 (춘추 60을 앞둔) 성상의 기로소 입소를 준비할 것인데, 그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겠느냐”는 의견을 냅니다. 이때 대리청정 중이었던 세자(경종 1688~1724·재위 1720~1724)가 반색했습니다. “태조대왕께서도 60세에 기로소에 들어가셨단다. 성상(숙종)도 59세가 되셨으니 자식된 마음에 어찌 기쁘지 않겠느냐.” 하지만 법과 절차에 따라 추진해야 했습니다. 곧 난제가 생겼습니다. “‘태조가 60세에 기로소에 입소했다’는 내용을 <실록> 등 공식 기록에서 찾을 수 없다”는 보고가 올라온 겁니다. 조정은 지춘추 민진후(1659~1720) 등 춘추관 관리 2명을 실록이 보관된 강화 정족산 사고(史庫)에 급파했습니다. 민진후는 그러나 “두 사람이 <태조실 록> 첫권부터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출처를 확인할 수 없어 헛걸음했다”(<숙종실 록> 1719년 1월 22일)고 보고했습니다. 그러면서 “근거와 출처가 없으니 차라리 날씨가 따뜻해지기를 기다려 양전(숙종과 중전)을 위한 잔칫상을 베푸는 게 좋겠다”고 제안했습니다. 한마디로 관례도, 출처도 없는 군왕의 기로소 입소 행사 강행에 신중론을 개진한 겁니다. 이 말에 충격을 먹은 것일까요, 삐친 것일까요. 숙종은 “그래? 기록이 없다니 할 수 없지. 논의를 중지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이 무렵 <실록>을 읽으면 잘 짜인 각본 같습니다. 임금이 “야, 증거 없다잖아. 안 할래”라고 떼를 쓰자, 종친들이 상소문 릴레이를 펼치고…. 세자가 맞장구치고…. 급기야 연잉군 이금(영조) 등이 종신(宗臣·벼슬하는 종친)을 거느리고 나섭니다. “실록에 없다고 갑자기 논의를 중단하다니요. 아니 될 말씀입니다. 국초에는 사관들이 더러 빠뜨리고 기록했을 겁니다.” 기로소에 입소한 숙종은 눈병에 걸린 중에도 어제시를 지어 하사했다.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연잉군 등은 갑자기 “선조 말년에 태조대왕의 고사를 뒤쫓아 기로소에 입소하려고 했다가 미처 시행하지 못했다”는 가짜뉴스까지 동원했습니다. 선조(1552~1608·재위 1567~1608)는 57세에 승하했거든요. 또 <선조실록>에도 “선조가 기로소 입소를 도모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숙종은 “세자와 왕자, 여러 종친이 한목소리로 청하고… 선조의 고사까지 전해진다니 명백한 일이 아니냐”면서 기로소 입소의 명을 내렸습니다. 아무리 눈치 없는 신하들이기로서니 더는 반대할 수 없었습니다. 59세나 51세나 60 바라보는 건 매한가지 이 숙종의 기로소 입소 소동은 새 발의 피였습니다. 숙종의 아들인 영조는 51세에 기로소에 입소했으니까요. 영조는 “기로소에 입소한 뒤 국사를 원량(사도세자 1735~1762)에게 맡기고 한가롭게 지내는 것이 평생의 소원”(<영조실록> 1743년 1월 11일)이라 했습니다. 종신들이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1744년(영조 20) 7월 29일 여은군 이매가 “전하의 춘추가 ‘50을 넘어 60을 바라보게 됐으니’ 기로소 입소 자격을 갖췄다”는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51세=망육(望六·60을 바라보는 나이)’이라 하니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숙종은 59세였고 전하는 51세입니다. 조금 차이는 나지만 ‘육순을 바라보는 것은 매한가지(望六旬則一)’입니다.” 그런 억지춘향이 어디 있습니까. 영조는 그러나 “기로소 입소가 내 소원이기 때문에 겸손 떨지 않겠다”면서 “선조(숙종)의 고사를 따르려면 59세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몸이 아픈 내가) 어찌 될 줄 알겠느냐”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영조실록>은 이 대목에서 “영조의 하교가 누누이 수백 마디에 달했다”고 표현했습니다. 보다 못한 우의정 조현명(1690~1752)이 “성교(聖敎·임금의 지시)가 너무 장황하고 번거롭다”고 일침을 놓았답니다. 영의정 김재로(1682~1759)가 가세했습니다. “태종·세종·세조·중종·선조 같은 분들은 50세를 넘겼지만 모두 기로소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기다렸다가 의논하더라도 늦지 않습니다.”(8월 11일) 59세에 기로소 입소를 추진하려던 계획은 실록 등에서 그 근거와 출처를 찾을 수 없다는 이유로 반대의 목소리에 부딪혔다. 그러나 종신(벼슬에 나선 종친)들이 상소릴레이를 펼치고 급기야 왕자인 연잉군 이금(훗날 영조)까지 앞장서자 일사천리로 강행됐다. /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영조는 평소 “기로소에 입소하는 것이 일생의 소원”이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남들은 젊어 보이려고 흰 머리털 뽑는데… 정승들까지 앞장서서 반대하자 영조가 어린아이같이 생떼를 부립니다. “자네들이 나를 아비라고 여긴다면 8년을 기다리라고 했겠느냐. 역시 아들이 아버지 생각하는 마음과 너희 같은 신하들이 임금 생각하는 건 다르구나.”(8월 19일) 이에 조현명이 일침을 놓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늙는 것을 싫어해 족집게로 흰 머리털을 뽑기까지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젊어 보이려 애쓰는데 임금이라는 분은 왜 저렇게 노인 대접을 받으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죠. 하지만 어느 누가 임금의 고집을 꺾을 수 있겠습니까. 조현명 등은 “정 그러하시다면 특별 교서로 명하시면 불가하지 않겠다”면서 항복했습니다. 마침내 극심한 반대여론을 잠재웠다고 의기양양한 영조 앞에 새까만 관리가 나섰습니다. 사헌부 지평(정5품) 박성원(1697~1767)이었는데요(8월 29일). 박성원은 “성상께서는 100세까지 사실 수 있을 것 같은데… 뭐 그리 급하시냐”고 꼬집은 거죠. 영조가 펄펄 뛰었습니다. “네가 감히 임금이 기로소에 들어가는 것을 반박하는가.” 영조는 ‘너 때문에 더러워서 임금 노릇 못해 먹겠다’는 듯 “모든 정사는 앞으로 승정원이 알아서 처리하라”는 명까지 내렸습니다. 결국 박성원은 영조의 역린을 건드린 죄로 절도(남해)에 유배됐습니다. 이 지경이니 누가 반대 목소리를 내겠습니까. 영조는 1744년(영조 20) 9월 9일 ‘60을 바라보는 나이(망육·望六)’라면서 기로소에 입소했습니다. 이때 입소를 기념해 제작한 계첩도 있습니다. 바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기사경회첩>입니다. 초조했던 59세, 51세 임금 숙종·영조 부자는 왜 말도 안 되는 생떼를 쓰면서까지 기로소 입소를 ‘소원’했을까요. 갖가지 해석이 나오지만 역시 건강문제를 들 수 있겠네요. 조선 임금들의 평균수명은 48세(한국나이) 정도였는데요. 27명 중 환갑을 넘긴 이는 태조(74), 정종(63), 광해군(67), 숙종(60), 영조(83), 고종(67) 등 6명입니다. 숙종의 경우 병치레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기로소에 입소하기 2년 전인 57세 때는 다리가 저리며 양쪽 눈이 어지럽고 잘 보이지 않는 증세에 시달렸습니다. 세자(경종)에게 대리청정을 명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과연 숙종은 기로소에 입소한 직후 급격하게 쇠약해졌습니다. 1720년(숙종 46) 1월 예순을 맞이했는데요. 그 해가 마지막이 됐죠. 6월 8일 승하할 때까지 6개월 이상 병석에 누워 있었습니다. 숙종은 60을 맞이하기도 어려운 몸 상태를 알고 기로소 입소를 강행한 것 같습니다. 영조는 어떨까요. 83세까지 산 영조는 조선 임금 가운데 가장 장수한 왕이죠. 그러나 ‘골골 팔십’이라는 말이 꼭 맞았습니다. 특히 기로소에 입소할 무렵인 50세 때는 담증과 근육통, 어지럼증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영조가 “선조(숙종)의 고사를 따르려면 59세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어찌 될 줄 알겠느냐”고 조바심을 낸 겁니다. 또 영조는 무수리 출신인 숙빈 최씨(1670~1718)의 소생이었습니다. 출생 콤플렉스가 만만치 않았죠. 게다가 이복형(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이 평생 따라다녔습니다. 영조는 기로소에 입소한 부왕 숙종의 모습과 자신을 대비시키면서 왕권의 정통성을 입증하려 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습니까. 두 임금이 59세, 51세에 기로소에 입소하겠다면서 생떼를 썼죠. 만백성의 어버이로서 천근만근 국정의 무게를 짊어졌던 군주였으니 그 정도는 애교로 봐줄까요. 영조가 기로소에 입소한 기념으로 제작한 중 ‘영수각친림도’. 모든 반대를 묵살한 영조는 1744년 9월 9일 평소 소원하던 기로소에 입소했다.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노인 대접 받는 법? 요즘 ‘노인 연령’ 문제가 반드시 풀어야 할 화두로 등장했는데요. 1981년 제정된 노인복지법 등에 따라 제도적으로 통용되는 ‘노인 연령 기준’은 만 65세입니다. 평균수명이 길어지고 고령화가 가속화하면서 그 기준을 늘려야 한다는 논의가 일고 있죠. 2025년이 되면 5명 중 1명이 노인으로 분류된다면서요. 그럼 그런 노인들을 부양해야 할 젊은이들의 부담이 너무 커질 것 같네요. ‘정년 연장’ 문제도 함께 논의돼야 할 것 같고요. 저도 환갑이 넘은 지 몇 년 돼서 만 65세를 향해 가고 있는데요. 곧 ‘노인 대접’을 받게 됩니다. 각오는 하고 있습니다. ‘낀 세대’라는 푸념도 해보지만 어쩌겠습니까. 이대로라면 우리 자식들 부담이 너무 커지잖습니까. 무엇보다 ‘기로(60~70세)’에 접어든 분들은 옛사람들이 강조한 ‘삼달존’을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 ‘나이’란 시간이 지나면 쌓이는 것이고요. 그렇다면 ‘벼슬(작·爵)’을 얻은 분들이나, 필자 같은 장삼이사라면 ‘덕(德)’이 필요하겠네요. ‘노인 대접’을 제대로 받으려면….
- 이기환의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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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성용의 보약밥상]영조 임금과 명의 허준도 좋아한 ‘송이’
- 2022. 09. 22 07:27 건강
- 맛과 향이 뛰어나 최고의 버섯으로 불리는 송이버섯. 경향신문 자료사진 찬바람 부는 버섯 채취의 계절이 오고 있다. 그중 송이는 양식 기술도 없고 채취도 쉽지 않아 가격이 비싼 게 흠이지만 맛과 향이 뛰어나 최고의 버섯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귀한 버섯이기에 과거에도 주로 왕의 진상품, 사신에게 접대하는 음식으로 서술된 기록이 있디. 송이를 예찬하는 시나 문장도 적지 않다. 조선시대 영조도 최고의 별미 음식 중 하나로 꼽았다고 한다. 지금도 양식이 어렵기 때문에 송이는 여전히 비싸고 귀한 음식이다. 그러나 송이 채취 철에 해당 지역에 가면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즐길 수 있다. 가을이면 자연산 송이로 만든 레스토랑 및 호텔의 프로모션이 시작된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송이가 이렇다 보니 동의보감에도 당연히 예찬하는 기록이 있다. ‘성질이 평(平)하고 맛이 달며[甘] 독이 없다. 맛이 매우 향기롭고 솔 냄새가 난다. 이것은 산에 있는 늙은 소나무 밑에서 솔 기운을 받으면서 돋은 것인데, 나무버섯 가운데서 제일이다[속방].’ 여기서 ‘맛이 달고 독이 없다’라는 것은 약보다는 음식으로서 서술한 것이지만 그다음에 적힌 문장들은 그냥 송이에 대한 예찬이다. 특히 동의보감 자체가 여러 서적을 통합해 모은 백과사전 격인데 ‘속방’이라는 것은 저자 허준이 직접 서술한 부분을 의미하는 것으로, 허준도 송이를 좋아했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송이는 버섯 중에서는 수분 함량이 적고 단단한 편으로 식감에도 영향을 주지만, 다른 버섯보다 영양소 함량이 전체적으로 조금 더 높은 편이다. 특징적으로는 비타민D 함량이 높은 편이고, 셀라제·헤밀라제·벤트라제 등 섬유분해효소가 많아 소화에도 좋다. 특히 다른 버섯에 비해서 더 많이 함유돼 있어 주목을 받는 글루칸은 불소화성 다당류다. 버섯에 들어 있는 베타 글루칸은 그 작용이 매우 우수해 항암식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구운 송이버섯을 더한 생선 튀김 요리. 경향신문 자료사진 TIP1. 새송이, 양송이? = 송이는 특유의 예민한 성장환경으로 인해 양식이 안 돼 가격이 비싸다 보니 기존 버섯들을 개량해 새로운 버섯이 나오면 송이의 이름을 자주 도용한다. 새송이버섯은 느타리버섯, 양송이버섯은 주름버섯, 이슬송이버섯은 표고버섯, 황금송이버섯은 팽이버섯을 각각 개량한 것으로 송이와는 관련이 없다. TIP2. 점차 먹기 어려워지는 송이 = 송이는 꾸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양식 자체가 되지 않는다. 주로 한국과 일본에서 생산·소비되며 소나무 군락이 필요한데, 한국은 화재와 병균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줄어들고 있으며 일본도 비슷한 이유와 화산활동 등으로 인해 생산량이 줄어들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2020년 7월 9일, 국제자연보전연맹(IUCN)이 국제 멸종위기종으로 지정했다. TIP3. 송이 채취 금지법 = 송이는 비싼 임산물로 허가권을 판매하기 때문에 허가 없이 채취하다가는 5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을 수 있다. 산주나 채취허가권(보통 3년 최고가 입찰)을 얻은 주민들로부터 민법이 적용되는 소송까지 당할 수 있으니 송이 채취는 절대 금물이다. 만약 송이 채취를 경험해 보고 싶다면, 지역별로 개최하는 송이축제 현장에서 산주의 허락하에 하는 채취 체험 행사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임성용은 누구?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현재는 사상체질을 기반으로 하는 치료와 입원 프로그램을 통한 추나치료로 정골 추나뿐 아니라 근육·인대까지 교정하는 경근 추나를 활용해 척추 질환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엘:에스 한방병원에서 원장으로 진료하고 있다. 남양주시 한의사협회 이사, 심평원 장기요양등급판정위원을 맡고 있다.
- 임성용보약밥상
- [신상TMI리뷰]영조 임금의 입 맛을 찾아 온 별미장 ‘조선고초장’
- 2022. 01. 17 11:00 요리
- 조선 21대 왕 영조가 입맛을 잃었을 때 찾았다는 고초장. 샘표는 10년에 걸쳐 전통 비법의 별미장을 연구했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 고초장’을 출시했다. 샘표 제공영조는 조선시대 왕들 중 평균 수명을 훌쩍 넘는 83세까지 장수하는 삶을 살았다. 먹거리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영조가 한때 입맛을 잃어 신하들이 아연실색한 적이 있다. 각 지역 산해진미를 섭렵한 끝에 찾아낸, 그의 입맛을 돋운 음식이 조씨 집안 종부의 비법이 담긴 고추장, ‘고초장’이었다. 최근 샘표가 전통 고초장 제조법과 자사만의 발효기술을 접목해 현대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을 ‘조선고초장’을 만들어냈다. 전통 비법을 지키면서 현대인의 입맛에 맞는 배합을 찾기위해 연구원들은 수만 번 테스트로 ‘고초’를 겪었다는… ‘고초장’ 탄생의 TMI를 들어본다. 1. ‘잘 만든 장 맛을 알아야 좋은 장을 만들 수 있다.’ 샘표 연구원들은 각 지역 내로라하는 장을 찾아다니며 맛본 결과, ‘장 소믈리에’의 경지에 이르러 ‘전국 장맛 지도’까지 만들어내었다고. 2. 연구원들은 우리 전통의 깊은 맛을 제대로 담은 고추장 맛을 구현하기 위해 고추장 비법이 기록된 수백 권의 고서까지 찾아 읽었다. 가장 참고가 된 고서는 고초장 기록이 담긴 <소문사설>이었다. 3. 전통 비법만으로 현대인의 입맛을 맞출 수 없는 법. 자연스러운 단맛을 내기 위한 비밀 재료로 쌀발효액과 함께 토마토가 사용됐다. 토마토를 곱게 갈아 개어서 넣었고, 쌀발효액으로 요리에 적합한 단맛과 향을 더했다. 경향신문 1955년 7월 28일자 샘표 고초장 지면광고 이미지.4. 사실 샘표 ‘조선 고초장’의 원조가 있다. 1955년 탄생한 ‘샘표 고초장’으로 경향신문 1955년 7월28일자를 보면 “진짜 고초장이 드디어 등장(登場)”이란 광고 문구를 확인할 수 있다. 즉 산업화가 본격화하기 전 샘표는 전통 고초장 맛을 구현했던 것이다. 이후 66년 만에 임금이 즐기던 프리미엄 고초장이 출시됐다. 5. 조선 고초장의 연구 개발 기간은 무려 10년. 그간 주부와 전문가 단체 약 500여 명이 맛 검증에 참여했다. 6. 고추장의 쓰임은 국물요리부터 무침, 볶음, 전까지 다양하다. 고초장은 어떻게 먹어야 가장 맛있을까? 정답은 전천후로 사용해도 맛있단다. 모든 레시피에 대응할 수 있는 최적의 고추장을 만드느라 오랜 시간이 소요됐다고. 7. 조선고초장과 최고의 요리 궁합을 꼽는다면 국물요리나 구이요리다. ‘연구원피셜,’ 고추장찌개를 만들 때 사용하면 칼칼하면서 깊고 구수한 국물맛을 낼 수 있다. 텁텁하지 않고 매콤한 국물이 자작하게 스며든 건더기 맛이 일품이라는 후기. 고슬고슬한 흰 밥에 건더기를 얹어 먹으면 한 그릇이 금세 뚝딱이란다. 8. ‘장 맛’에 진심인 샘표. 기나긴 연구 과정 속에서 큰 성과도 있었다. 지난해 9월 ‘유기농 고추장’이 영국에서 열린 세계적인 권위의 식음료 시상식 ‘그레이트 테이스트 어워즈(Great Taste Awards)’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한식의 기본인 고추장으로 세계인의 입맛까지 사로잡은 것이다. 2021년 9월 영국 ’Great Taste Awards’에서 대상을 수상한 샘표 유기농고추장 이미지.9. ‘그레이트 테이스트 어워즈’ 출전 당시 표기한 고추장의 영어명은 ‘Red-pepper paste’가 아닌 ‘GOCHUJANG’이었다. 우리 고추장의 정체성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10. 샘표 연구소는 콩, 곡물, 채소 발효 등을 위해 전통 메주 및 발효식품 등으로부터 확보한 우수 미생물 총 3천 여 종을 보유하고 있다. 이 균주은행에 출입 가능한 사람이 총 3명으로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샘표 사장도 못 들어감).
- 신상리뷰T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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