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옵션
닫기
범위
전체
제목
본문
기자명
연재명
이슈명
태그
기간
전체
최근 1일
최근 1주
최근 1개월
최근 1년
직접입력
~
정렬
정확도순
최신순
오래된순

경향신문(총 312 건 검색)

“이승만 이데올로기, 4·19 때 끝나…우상화는 헌법정신 위배”
이승만 이데올로기, 4·19 때 끝나…우상화는 헌법정신 위배”
2024. 12. 02 20:28문화
... 연재했던 ‘임헌영의 필화 70년’에서 범위를 확대하고 내용을 보충했다. 1권은 ‘미군정부터 이승만 집권기의 필화’를 다뤘고 내년 출간을 목표로 하는 2, 3권은 각각 ‘사월혁명부터 박정희 정권의...
[아침을 열며]이승만 시대를 사는 무사 대통령
[아침을 열며]이승만 시대를 사는 무사 대통령
2024. 11. 03 21:37오피니언
... 양보했다. 북한 흡수통일론을 제시하고, 한·미·일 대 북·중·러 신냉전 외교도 강화하고 있다. 이승만도 자유민주주의를 미국 주도 냉전체제에 편입되기 위해 한·미 동맹, 반공주의의 의미로 사용했다....
아침을 열며
드라마 ‘야인시대’ 이승만 역…원로배우 권성덕씨 별세
드라마 ‘야인시대’ 이승만 역…원로배우 권성덕씨 별세
2024. 10. 14 20:14문화
... 등을 수상했다. <야인시대> <영웅시대> <서울 1945> 등 드라마에 여러 차례 이승만 전 대통령 역으로 출연해 인기를 끌기도 했다. 고인은 2016년 연극 <햄릿> 출연 중 식도암...
‘야인시대’ 이승만 연기···원로배우 권성덕 별세
‘야인시대’ 이승만 연기···원로배우 권성덕 별세
2024. 10. 14 14:35문화
... 등을 수상했다. <야인시대> <영웅시대> <서울 1945> 등 드라마에서 여러 차례 이승만 전 대통령 역으로 출연해 인기를 끌기도 했다. 고인은 2016년 연극 <햄릿> 출연 중 식도암...

스포츠경향(총 24 건 검색)

윤석열 ‘비상계엄’·이승만 ‘부정선거’ 다룬 영화 ‘4월의 불꽃’ 나온다
윤석열 ‘비상계엄’·이승만 ‘부정선거’ 다룬 영화 ‘4월의 불꽃’ 나온다
2024. 12. 18 08:48 연예
윤석열 대통령(왼쪽)과 이승만 전 대통령. 라이트픽쳐스 제공 윤석열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사태’와 이승만 전 대통령의 ‘하야’를 소재로 다룬 영화 ‘4월의 불꽃’(가제)이 내년 초 극장을 찾는다. 배급사 라이트픽쳐스는 18일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후 전 세계의 이목이 한국으로 집중됐다며 이 전 대통령 역시 부정선거로 국민들에게 아픔과 슬픔 안겼다고 설명했다. 최근 김건희 여사 소재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퍼스트 레이디’가 주목 받으면서 제작사 레드 파노라마가 두 대통령의 사건을 다룬 영화 ‘4월의 불꽃’을 내놓는다. 현재 영화는 촬영을 모두 마친 상태로 내년 초 극장과 디즈니 플러스, 웨이브, 쿠팡 플레이 등에서 동시 개봉을 앞두고 있다. 영화를 연출한 송영신 감독은 “이번 영화로 MZ세대 들이 함께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며 “정성과 진정성을 영화에 녹여 냈고 국내 배급은 물론 미국 아마존 TV와 프라임 TV에서도 볼 수 있게 됐다. 한국 영화의 작은 울림이 해외에도 전해지길 바란다”고 했다. ‘4월의 불꽃’에는 배우 조재윤과 조은숙이 출연했고 송영신 감독과 도영찬 감독이 연출했다. 각본에는 정대성 작가가 감동과 슬픔의 절망을 담아내 필력을 발휘했다. ‘4월의 불꽃’은 편집이 끝나는 대로 정식 제목을 정할 예정이다.
‘이승만 전문 배우’ 권성덕, 84세로 별세
이승만 전문 배우’ 권성덕, 84세로 별세
2024. 10. 14 15:01 연예
드라마에서 이승만 역할을 잘 알려진 원로 배우 권성덕이 13일 별세했다. 방송화면 캡처 TV 드라마에서 이승만 대통령 역할로 잘 알려진 원로배우 권성덕이 13일 별세했다. 향년 84세. 한국연극배우협회 등 연극계에 따르면 권성덕은 오랫동안 암 투병 생활을 하다가 이날 유명을 달리했다. 1940년 전남 나주에서 태어난 권성덕은 중앙대 연극영화과 출신으로 1965년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1972년 국립극단에 입단해 20년 넘게 단원으로 활동했으며 1994~1995년 국립극단 단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80여 편의 연극에 출연한 그는 동아연극상을 두 차례 수상했으며 한국연극예술상, 이해랑연극상 등 여러 상을 받았다. 드라마에도 꾸준히 출연한 그는 특히 이승만 대통령을 빼닮은 외모로 ‘야인시대’ ‘영웅시대’ ‘서울 1945’ 등에서 이승만 역할을 해 대중에 크게 알려졌다. 틈틈이 ‘월간 에세이’ 등에 글을 발표한 그는 2004년 연극배우 50년 기념으로 에세이집 ‘대통령도 되고 거지도 되고’를 출판했다. 고인은 팔순을 넘긴 2021년에 암 투병 중에도 연극 무대에 오르는 등 무대를 향한 열정과 의지를 보였다. 빈소는 서울대 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16일 오전 9시.
[스경연예연구소] 광복절에 기미가요·이승만 다큐를?…나사 빠진 KBS
[스경연예연구소] 광복절에 기미가요·이승만 다큐를?…나사 빠진 KBS
2024. 08. 15 10:21 연예
KBS1 ‘KBS 중계석’에 방송된 ‘나비부인’ 한 장면. 사진|KBS 방송 캡처 공영방송이라던 KBS에 나사가 하나 빠진 걸까. 광복절에 기미가요를 틀지 않나, 이승만 전 대통령 미화 논란의 다큐 영화 ‘기적의 시작’을 편성해 빈축을 사고 있다. 15일 0시 KBS1 ‘KBS 중계석’에선 19세기 일본 게이샤와 미국 해군 중위의 사랑을 다룬 ‘나비부인’을 방송했다. KBS1 ‘KBS 중계석’에 방송된 ‘나비부인’ 한 장면. KBS 시청자 청원 게시판 캡쳐. 방송 직후 시청자 게시판은 초토화됐다. 극 중 등장인물들이 대부분 기모노를 입고 등장하는데다, 중간에 기미가요가 연주되는 것으로 알려진 이 작품이 광복절 당일 편성이 적절한가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한 누리꾼은 KBS 시청자청원 게시판에 “기모노 방송을 하다니 미쳤네. 공영방송 맞나요? 제정신입니까”라고 불만 섞인 목소리를 냈고, 또 다른 누리꾼은 “이게 제정신으로 한 편성이 맞습니까?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힙니다”라고 비판했다. 이 청원은 10시 기준 2683명의 동의를 받으며 많은 이의 분노를 입증했다. 이승만 다큐멘터리 ‘기적의 시작’ 공식포스터. 이뿐만 아니다. 이날 KBS1 ‘독립영화관’에선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독재 정권을 미화한 다큐멘터리 ‘기적의 시작’을 방영한다. ‘독립영화관’은 매주 금요일 방송되는 프로그램이지만 하루 전인 광복절에 굳이 추가 편성해 ‘기적의 시작’을 방송하는 셈이다. ‘기적의 시작’은 대한민국 건국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업적으로 표현하는가 하면, 3·15부정선거나 4·19혁명이 그가 아닌 사람들의 잘못으로 벌어진 것으로 묘사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앞서 영화진흥위원회에 독립영화 인정을 신청했다가 ‘객관성이 결여된 인물 다큐멘터리’ 등의 이유로 불인정 판단을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KBS의 이러한 결정 때문에 지난 12일엔 민주노총 언론노조 KBS본부, 민족문제연구소 등이 비판 기자회견을 열었고, 13일엔 KBS 전국기자협회 제주지회, KBS PD협회 제주지부, KBS 영상제작인협회 제주회원, KBS 아나운서협회 제주회원 등 KBS 제주방송총국 구성원들이 공동 성명을 발표하며 반발했다. KBS 시청자청원 게시판에도 이를 비난하는 청원글이 올라왔다. 지난 13일 게시된 ‘독재를 미화하는 영화를 광복절에 반영? 이게 정녕 한국 공영방송이 할 짓입니까?’란 글에는 1218명이 동의하며 비난에 불을 당겼다. KBS는 청원 게시 후 30일 동안 1000명에 동의를 받으면 KBS 관련 부서에서 답변을 해야한다. 상식과 위배된 광복절 기념 편성에 대해 KBS가 어떤 해명을 내놓을지 관심이 쏠린다.
안창호 외손자 ‘건국전쟁’ 역사왜곡 비판···“이승만, 독립운동 방해한 권력자”
안창호 외손자 ‘건국전쟁’ 역사왜곡 비판···“이승만, 독립운동 방해한 권력자”
2024. 02. 19 16:34 연예
도산 안창호 선생의 외손자 필립 안 커디(Philip Ahn Cuddy)씨가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도산 안창호 선생 외손자 필립 안 커디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권력욕을 품은 지도자’라고 맹비판하며 영화 ‘건국전쟁’의 흥행을 우려했다. 필립 안 커디는 지난 15일 미주 한국일보에 기고한 ‘도산 안창호와 이승만’이라는 글에서 “이승만은 1890년대 독립협회 시절부터 도산 반대 입장에 주로 섰고 그에 대한 거짓 정보를 퍼뜨리기도 하는 등 독립운동 전체 기간 동안 꾸준히 도산과 우리 가족에게 큰 어려움을 끼쳤다”고 밝혔다. 이어 “현재 이승만의 역사적 평가에는 중요한 결합이 있다. 그는 과연 영예로운 독립운동가인가”라며 “독립운동이 활발하던 시절 그는 대한의 이익에 헌신하기보다는 이기적 권력욕을 품은 지도자에 가까웠다. 그가 독립운동을 위해 목숨을 바치던 애국자들을 여러 차례 배신한 것을 그들은 과연 알고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이승만은 동지회를 만들어 대한인국민회, 흥사단, 도산에 대적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보 기금을 횡령하고 상하지 지역 독립운동을 위해 모아진 자금을 빼앗기도 했다”며 “재미한족연합회는 어떻게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방해했는가에 대한 많은 공식 리포트를 남겼다”고 했다. 필립 안 커디은 이승만 전 대통령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를 계속해서 높였다. 그는 “1925년 이승만은 미국에 거짓된 보고서를 제출해 도산이 시카고에서 체포되도록 한 일이 있다. 도산이 볼셰비키(공산주의자)라고 허위로 신고했고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이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반미세력이라고 주장했다”며 “이승만과 동지회의 이런 주장은 1932년 홍커우 공원에서 일어난 윤봉길의 폭탄사건 이후 상하히에서 체포된 도산의 처지를 복잡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이뿐 아니라 “1949년 김구가 암살당한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을 때 도산의 가족은 아무도 이승만이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것이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며 “이승만은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과 달리 정직한 인물이 아니었다. 이승만을 옆에서 본 도산과 우리 가족이 알고 있는 역사는 현재 한국 미디어(건국전쟁)에서 나오는 이야기들과 사뭇 다르다”고 했다. 필립 안 커디는 “나의 할아버지(도산 안창호 선생)는 잔악한 일제 식민주의자들에게 체포, 감금 그리고 고문을 당한 끝에 죽음을 맞았다. 지금 한국 존재에 도움이 됐던 것은 도산의 진실된 리더십이지 이승만의 거짓된 행동은 아닐 터다”며 “왜곡된 역사를 사실처럼 믿고 있는 일부 한국인과 한국계 미국인들의 인식이 안타까울 따름”이라고 했다. 필립 안 커디의 이러한 칼럼은 한국에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업적을 중점적으로 다룬 ‘건국전쟁’의 흥행에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 ‘건국전쟁’은 18일 개봉 17일만에 누적 관객 60만명을 돌파하며 다큐멘터리 영화로써는 놀러운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이승만 재조명’과 ‘이승만 미화’라는 반응으로 나뉘어 정치적 이념 대립도 격화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최근 참모들에게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에 관한 진실을 담아내 역사를 올바르게 알 수 있는 기회였다”는 취지의 평가를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주간경향(총 11 건 검색)

뉴라이트의 이승만 활용…‘자기모순’이냐 ‘왜곡’이냐
뉴라이트의 이승만 활용…‘자기모순’이냐 ‘왜곡’이냐(2024. 09. 02 06:00)
2024. 09. 02 06:00 정치
1948년 8월 15일 열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 모습. 현수막에 ‘건국’이 아닌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고 쓰여 있다./국가기록원 제공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민국은 기미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 대한민국 30년 9월 1일. 대한민국 정부공보처 발행.” 1948년 9월 1일, 대한민국 정부가 발행한 관보 1호에 실린 문장이다. 당시 정부를 이끈 대통령은 이승만, 관보 내용은 제헌국회가 만든 헌법 전문이다. 이승만의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을 ‘대한민국 원년이 아닌, 대한민국 30년’으로 표기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닿는다. 초기 정부는 그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그로부터 76년이 지났다. 이승만은 ‘건국절’ 논란과 함께 일제강점기를 긍정적으로 본다고 비판받는 ‘뉴라이트’와 한데 묶였다. 정치적 평가와 별개로 이승만은 일제에 맞선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다. 1945년 이전 이승만의 행보 역시 ‘식민지 근대화론’을 이론적 기반으로 하는 뉴라이트 역사관과 전면 배치된다. 그가 식민지 조선의 경제성장에 기여한 바를 찾을 수 없는 반면,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를 해소하려 한 흔적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런데도 뉴라이트 세력은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하고 있다. 이는 자기모순이거나 이들이 역사를 선별적으로 보고 있다는 방증이다. 뉴라이트는 윤석열 정부 출범과 함께 외연을 확장했다. 이미 정부 산하 3대 역사 연구 기관으로 불리는 동북아역사재단,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 요직에 뉴라이트로 분류되는 인사들이 임명됐다. 김형석 신임 독립기념관장 역시 본인은 부인하고 있지만 뉴라이트와 관련 있다는 의혹을 받는다. 뉴라이트는 이제 1945년 광복과 1948년 건국의 가치를 따지는 쪽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이들이 역사적 기억을 어떻게 분해하고, 재조립하는지 짚어봤다. 뉴라이트는 누구인가 뉴라이트는 2004년 말을 기점으로 나타났다. ‘새로운 우파’라는 뜻을 가진 ‘뉴라이트’라는 말도 이즈음 언론에 등장했다.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특징을 보였다. 하나는 역사관, 또 다른 하나는 정치관이다. 뉴라이트 역사관의 특징은 2005년 초 설립한 ‘교과서 포럼’의 활동에서 나타난다. 이들은 몰가치적 실증주의 역사관을 주장하며 기존 ‘한국사 교과서’를 민족주의, 자학사관으로 비판했다. 그런데 정작 교과서 포럼 창립선언문 첫 구절이 “대한민국은 잘못 태어난 국가인가?”라는 물음이었다. 이는 역설적으로 이들이 역사교육에 투영하고 싶은 ‘가치’를 드러낸다. 실제로 이들의 활동은 박근혜 정부 시기 ‘국정 교과서’ 논란으로 번졌다. 역사학자 신주백은 논문 등을 통해 이러한 행보를 “일본의 식민 지배를 미화하고, 친일파에게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것”이라 비판했다. 뉴라이트 정치관의 특징은 표면적으로 기존 ‘보수’와 결별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보수’는 질서 유지와 점진적 개선을 주장하는 서구형 ‘보수’와는 의미가 다르다. 정해구 전 성공회대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의 보수는 국가이데올로기에 가깝다. 시작은 반공주의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한국전쟁, 냉전 등을 거치며 한국 보수의 가치는 ‘반공’에 맞춰졌다. 그러나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하며, 반공주의가 일시적 위기를 맞는다. 이를 수습한 것은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다. 국가이데올로기는 ‘반공’에 ‘경제성장’을 더한 것으로 확장됐다. 여기까지가 소위 올드라이트, 기존 보수다. 뉴라이트의 정치관 분석/정해구 전 성공회대 교수 제작 뉴라이트는 색깔론이란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반공주의’, IMF·세계경제위기 등으로 한계를 맞은 ‘성장주의’를 낡은 것으로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자유’를 꺼내 들었다.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의 강조다. 시작은 역시 2004년이다. 그해 11월, 과거 운동권 출신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연대가 창립됐다. 신지호 현 국민의힘 전략기획부총장이 대표였다. 이 시점 이후 ‘뉴라이트’라는 용어를 명패에 사용하는 단체가 속속 만들어졌다. 기존 단체를 계승하고, 유사한 성격의 단체와는 연합하는 방식이었다. 뉴라이트 이념을 정립한 ‘뉴라이트 싱크넷’, 산재한 뉴라이트 단체들을 하나로 묶은 ‘뉴라이트 네트워크’, 이를 다시 계승·발전한 ‘뉴라이트 재단’, 현재의 ‘시대정신’까지가 그 계보다. 이들 단체에 교과서 포럼 등에서 활동한 학자 등이 합류해 사상적 근거를 강화했다. 실제로 뉴라이트 명패를 붙인 단체들에서는 익숙한 이름들이 반복적으로 발견된다, 식민지근대화론의 주창자로 평가받는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 김영호 현 통일부 장관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과 다른 대중운동 성격의 뉴라이트 단체도 나타났다. 김진홍 목사가 주축이 된 ‘뉴라이트 전국연합’이다. 뉴라이트는 역사·정치 분야 모두에서 각각 목소리를 냈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세력, ‘자유’를 강조하는 세력이 모두 ‘뉴라이트’라는 이름을 썼다. 이로 인해 별다른 설명도 없이 ‘식민지 근대화론’과 ‘자유주의’가 한데 섞였다. 일각에서 뉴라이트가 무엇을 지칭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그런데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지나며 뉴라이트 정치관으로 무장한 세력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다. 사라진 것이 아니다. 앞서 그들이 올드라이트라고 비판한 정치권으로 들어갔다. 정해구 전 교수는 이미 2006년 뉴라이트가 올드라이트에 편입될 가능성을 지적했다. 그는 기자와 통화에서 “주장에 설득력이 없어 뜯어보니 뉴라이트가 말하는 ‘자유’와 올드라이트의 ‘반공’이 다른 게 전혀 없었다”며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만큼 뉴라이트가 별도로 존속할 것으로 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8월 29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브리핑실에서 ‘국정브리핑 및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날 윤 대통령은 “저는 솔직히 뉴라이트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고 말했다./연합뉴스 정치권에 안착한 뉴라이트는 ‘친일’ 논란의 역사관과 계속 묶이는 것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정치권 인사 중 본인이 ‘뉴라이트’라고 인정하는 인물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찾아보기 어렵다. 지난 8월 27일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한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에게 2007년 대통령선거 당시 ‘이명박 대통령 후보를 지지하는 뉴라이트 지식인 선언 100명’에 이름을 올린 이유를 묻자 그는 “(나는) 뉴라이트가 아니다. 뉴라이트라고 이름을 쓴 것은 구태의연한 우파 보수를 벗어나서 신선하고 참신한 젊은 우파 보수 지식인이 되자는 의미였다”고 밝혔다. “1948년 8월 15일 이야말로 진정한 광복”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역시 “독립운동가를 폄훼하고 일제강점기의 식민지배를 옹호한다는 의미로 말하는 ‘뉴라이트’가 아니다”고 했다. 심지어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8월 29일 열린 ‘국정브리핑 및 기자회견’에서 “저는 솔직히 뉴라이트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고 말했다. 국민 대다수가 알고 있는 뉴라이트를 국가 권력자들이 모르는 상황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러한 모르쇠가 설명하는 것도 있다. 뉴라이트에게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아닌 ‘반공’과 ‘자유’를 강조할 수 있는 ‘새로운’ 역사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반공의 화신이자 한미동맹의 주창자이며 건국의 아버지로 포장된 ‘이승만’이 등장하는 이유다. 뉴라이트 역사관의 모순 식민지 근대화론을 대체할 이론적 배경은 다시 뉴라이트 학자들에게서 나왔다. 이들이 주목한 것은 해방 이후부터 1948년 정부 수립기까지다. 이를 ‘독립운동’과 맞대 ‘건국운동’이라고 한다. 실제로 안병직 명예교수는 2006년 뉴라이트재단 발족 기자회견에서 “대한민국이 출범부터 자주와 자생으로 출발한 것이 아닌, 국제관계 속에서 출발했고 대외협력관계를 통한 안보와 경제성장을 이룩했음에도 한국 근현대사를 침략과 저항의 역사로만 규정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민족주의 자주 노선에 맞선 글로벌리즘(국제주의)을 강조하겠다고 했다. 쉽게 말해, 대한민국 건국과 한미동맹을 이끈 이승만을 재평가하자는 것이다. 이는 ‘자유’(반공)를 강조하는 뉴라이트 정치관과도 부합했다. 서울 중구 한국자유총연맹에 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동상/권도현 기자 해당 시도는 이미 한 차례 큰 파동을 겪었다. 이명박 정부 당시 ‘건국절’ 추진 논란이 일었고,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철회됐다. 이후 15년 가까이 흘렀지만 당장 건국절을 추진해야 할 만큼 이승만의 업적이 추가로 밝혀지지는 않았다. 이에 뉴라이트가 어떤 방법으로 이승만을 재평가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사실 뉴라이트의 이론적 배경은 안 명예교수의 중진자본주의론이다. 저개발국이었던 한국의 1960년대 고도성장을 설명한다. 그런데 그 연원을 추적하다 보니 ‘일제강점기 고도성장이 있더라’는 식이다. 여기서 식민지 근대화론이 파생했다. 이를 ‘친일사관’으로 비판하자 뉴라이트는 ‘사실’과 ‘가치’를 구분하지 못한 것이라 반박했다. 자신들은 “일제 ‘때문에’가 아니라 일제 ‘동안에’ 이루어진 한국사회의 변동을 말한 것”이라는 논리다. 그렇다면 이승만 재평가에 있어서도 여전히 이들이 ‘사실’과 ‘가치’를 분리하느냐를 따져봐야 한다. 식민지 근대화론이 ‘소수 이론’으로라도 학계에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제시한 수치와 통계가 반증 가능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를 벗어나 ‘당위’나 ‘가치’를 주장하면 뉴라이트는 ‘정치 집단’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게 된다. 뉴라이트가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하는 이승만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보면 의문은 더욱 커진다. 첫째로 1945년 이전 이승만의 ‘반일사상’과 뉴라이트의 ‘식민지 근대화론’은 부딪힐 수밖에 없다. 이승만은 1875년 황해도 평산 출생이다.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된 후 배재학당에 입학해 서양의 사상과 문물을 접했다.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활동 등에 참여하다 박영효 정변 사건에 연루돼 1899년 ‘한성감옥’에 투옥됐다. 만 5년 7개월 감옥생활 동안 그는 여러 집필활동을 한다. 우선 1894~1895년 벌어진 청일전쟁을 주제로 한 <청일전기>라는 책이 있다. 당시 윤치호를 비롯한 이른바 개화 지식인들은 청일전쟁 결과 조선이 청나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것으로 인식하고 기뻐했다. 그 결과 친일로 변절한 경우가 많았다. 반면 이승만은 <청일전기>에 “실상을 생각하면, 이는 진실로 일본의 영광이오, 대한의 수치”라고 적었다. 이 책은 1917년 하와이 태평양잡지사에서 출간됐다. 그동안 그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친일’이 아닌 ‘근대화 학습 과정’을 긍정한 것인 만큼 관계가 없다고 반론할 수 있다. 그래도 문제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은 감옥에서 독립에 관한 또 다른 원고를 집필한다. 결과물 <독립정신>에서 그는 “국권을 보호하는 일에 대하야 조금이라도 남을 의지하던지 혹 남의 힘을 빌어 일을 하고저 하는 자는 곧 나라를 마지막 팔고 천만고에 대역이라 부디 조심하며 부디 경계할지어다”라고 적는다. 즉 외세에 힘을 빌리지 말아야 한다는 인식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의 핵심은 외부세력에 의한 근대화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이승만은 외부로부터 달성 가능한 근대화를 막는 시대착오적 인물이다. 심지어 광복 때까지 이를 깨치지 못한 둔재다. 이에 관한 뉴라이트의 이승만 비판을 기대했지만 찾아볼 수 없다. 둘째는 1948년 정부 수립에 관한 이승만의 인식 문제다. 이는 공문서에 사용된 ‘연호’ 논란으로 짚어볼 수 있다. 관보 제1호에 쓰인 대한민국 30년 외에도 1948년 9월 26일 담화나 1949년 10월 7일자 관보에 실린 개천절 경축사에서도 대한민국 30년, 31년 연호를 썼다. 이 시점은 1948년 9월 11일 단군기원연호법이 제헌국회에서 의결된 뒤였다. 대통령이 1948년을 대한민국 30년으로 지칭하는 일이 반복되자 관보 역시 제5호까지 대한민국 30년 연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했다. 이를 무시하고 1948년 건국,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지칭하는 것은 ‘가치’가 아닌 ‘사실’로 말한다는 뉴라이트 역사관에 맞는지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 셋째는 ‘자유’(반공)를 위해 이승만이 한미동맹을 넘어 일본과의 협력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인식이다. 주진오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명예교수는 “윤석열 정부에도 한·미·일 동맹은 난제인데 일본과의 동맹을 용인하지 않는 국내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남북 대립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 인식의 뿌리로 삼은 것이 이승만이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한·미·일 협력 관계에서도 여전히 일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드러냈다. 한국전쟁 이후 발표된 담화문에선 일본에 관대한 미국을 비판하기도 한다. 1954년 8월 30일 발표한 담화문 제목은 ‘침략주의 일본은 증오의 대상, 자유 아주 국가는 미국의 대아정책을 주시’다. 핵심 내용은 “미국이 일본의 뒤를 밀어준다는 것은 태평양 동맹의 회원국가로서 유망한 아세아 민족들을 상실하는 결과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뉴라이트와 정치권 일각에서 주장하는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은 인물에 대한 객관적 평가라기보다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 부각한 것에 가깝다. 뉴라이트는 연구자 모임이 아닌 정치집단이란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무엇보다 뉴라이트가 주장하는 이승만 관련 내용을 살펴보면 한 가지 근원적 질문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이승만이 살아 돌아온다면 과연 뉴라이트의 생각에 동의할까”라는 것이다.
표지 이야기
이승만·트루먼 동상 왜 칠곡군 다부리에(2023. 08. 11 15:14)
2023. 08. 11 15:14 사회
ㆍ다부동전적기념관에 백선엽 동상과 함께…명분도 사회적 합의도 없이 “높은 분들 결정” 경상북도 칠곡군에 있는 ‘다부동전적기념관’에 설치된 이승만과 전 대통령(오른쪽)과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 동상 /김찬호 기자 경상북도 칠곡군은 한국 현대사의 변곡점을 간직한 곳이다. 대구, 안동, 구미 등 주변 도시에 가려져 있지만 역사적 가치로만 보면 이들 지역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특히 전쟁사에 열광하는 이들에게 칠곡군 가산면은 성지와도 다름없다. 대구에서 북쪽으로 22㎞ 떨어진 곳, 상주와 안동에서 대구로 통하는 5번·25번 도로가 합쳐지는 곳, 왜관으로 향하는 908번 지방도로의 시발점이 되는 곳, ‘다부동’의 존재 때문이다. ‘다부동’은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라는 행정구역을 지칭한다. 하지만 이곳은 지명보다 역사적 사건으로 더욱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 시기에 있었던 사건을 일컫는 고유명사 ‘다부동 전투’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일방적’ 남침으로 시작한 한국전쟁에서 국군은 초반 열세에 놓였다. 전 국토의 10% 정도만 남은 그해 8월, 국군과 미군이 주축이 된 연합군은 낙동강을 낀 최후 방어선을 구축하고 약 55일간 치열한 사수전을 펼쳤다. 자료에 따라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낸 ‘6·25전쟁 주요전투’에 따르면 이중 8월 2일부터 28일까지 칠곡군 왜관읍과 가산면 다부동 일대에서 북한군 제1·제13·제15사단 및 제105전차사단의 진격을 저지해 대구를 사수한 일을 통칭 ‘다부동 전투’라고 부른다. ‘다부동 전투’는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라”라는 김일성의 지시를 꺾는 시발점이었다. 특히 승리의 주역 중 하나가 한국군 제1사단이라는 점이 더욱 큰 의미를 부여한다. 당시 사단장이 백선엽 장군이었다. 이를 기리기 위해 1981년 ‘다부동전적기념관’이 문을 열었고, 희생한 사람들을 위한 충혼비, 전승비 등을 세웠다. 1951년 주민들이 세웠다는 백 장군 ‘호국구민비’ 역시 2003년 기념관 내로 옮겨왔다.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사실 그대로의 역사만 남긴 셈이다. 관람객이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기념관은 모범사례에 가까웠다. 문제는 관점이 달라지는 경우였다.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있는 그대로의 역사’는 도움이 되질 않았다. 그 결과 지난 7월, 딱 한 달 동안 다부동전적기념관에 동상 세 개가 들어섰다. 모두 역사적 인물을 대상으로 만든 동상이다. 특정 인물의 동상은 개인에 대한 추모, 참배의 도구가 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정치적 이용도 가능하다. 이 때문에 다원화된 사회에서 인물 관련 동상을 제작하거나 국가 관련 공간에 동상을 세우는 일은 쉽지 않다. 특히 인물의 공과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사회적 합의가 쉽지 않은 경우 더욱 그렇다. 지역 주민들은 동상 세 개를 두고 “높은 분들의 결정에 의해 섰다”고 했다. 이들 동상의 주인공은 각각 이승만 전 대통령, 백선엽 장군, 해리 S.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이다. 대체 왜 이곳에 동상이 섰나 경상북도 칠곡군에 있는 ‘다부동전적기념관’에 설치된 이승만과 전 대통령(오른쪽)과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 동상 /김찬호 기자 지난 8월 7일 경상북도 칠곡 현장을 찾았다. 최고 37도를 넘나드는 ‘폭염’이 한창이었다. 다부동전적기념관은 다부 나들목(IC) 지척에 있었다. 서울에서 출발하면 차로 세 시간, 부산에서 출발하면 두 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였다. 주변에는 산, 도로 등을 제외하면 관광지, 유흥거리 등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동상을 세운다고 해서 많은 이들이 찾을 만큼 접근성이 뛰어난 곳은 아니었다는 의미다. 실제로 이날 점심 무렵 방문한 전적기념관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없었다. 기념관 부지는 설치된 계단을 기준으로 총 3개 층으로 나눌 수 있었다. 1층에는 주차장과 행정건물 그리고 각종 전차, 장갑차, 곡사포 등 군사 관련 무기가 전시돼 있었다. 가장 주요한 건물인 기념관은 별도의 건물로 3층에 있었다. 만약 7월 이전에 방문했다면, 2층은 관람객들이 쉬어갈 수 있는 쉼터 정도라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난 한 달 동안 동상 세 개가 해당 공간을 채웠다. 경상북도 칠곡군에 있는 ‘다부동전적기념관’에 설치된 백선엽 장군 동상 / 김찬호 기자 어느 방향으로 접근하든 계단을 이용하면 무조건 동상과 마주친다. 3층에 있는 기념관 건물로 향한다면 피해갈 수 없다는 뜻이다. 이중 하나는 지난 7월 5일, 2층 한 구역에 세운 백선엽 장군의 동상이다. 백 장군은 실제로 다부동 전투에 참전했다. 인물에 대한 의미를 더하고, 빼며 논란을 자초하지 않는다면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지난 7월 27일 백 장군 동상이 정면으로 바라보는 지점에 높이 4.3m, 넓이 1.57m, 무게 3t으로 제작해 세운 동상 두 개다. 동상을 정면에서 바라봤을 때 오른편에 있는 동상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다. 그 옆에 똑같은 크기로 나란히 선 동상은 해리 S.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이다. 한·미 두 전직 대통령이 경상북도 칠곡에 나란히 동상으로 서 있다. 동상에 대한 관람객의 생각을 들어보기 위해 약 6시간 남짓 머물렀다. 가족 단위 나들이객을 포함해 모두 24명의 관람객을 만났다. 이중 ‘기념관에 세워진 동상의 존재를 미리 알고 왔다’거나 ‘이승만·트루먼 동상이 이곳에 세워진 이유를 안다’고 답한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동상에 대해 설명한 후 돌아오는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다. 대구에서 남편과 함께 나들이를 나온 A씨는 “이승만 동상인지 몰랐고, 저게 왜 여기 세워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저 동상은 여기 있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실제 전투에서 돌아가신 분도 아니고 그 옆에는 미국 대통령도 있던데 무슨 기준으로 동상을 세우는 것이냐”고 되물었다. 반면 영천에서 왔다는 김주섭 목사는 “이승만 대통령은 세계 최고의 엘리트 공부를 한 사람이자 건국 기초를 세운 사람이고,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전쟁에 개입해 공산화를 막았다”며 “동상이 들어설 만하다”고 말했다. 이들 외에 방학을 맞이한 아이들과 함께 온 관람객이 많았다. 대구에서 온 B씨는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긴 했는데 아이들이 누구인지 잘 모르고, 논란도 있는 만큼 굳이 설명해주진 않았다”고 말했다. 이들 동상을 왜 여기 세운 것인지 기념관 관계자에게 물었다. 해당 관계자는 “동상을 세우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건 꽤 됐는데 결정이 나지 않다가 7월에 급물살을 탔다”며 “기념관 측이 제작 비용을 대거나 한 것은 없고, 부지만 제공했다. 만료 시점 같은 것은 따로 없었다”고 말했다. 인물들을 둘러싼 논란 등에 대한 질문에는 “실제로 동상이 세워진 후 항의하는 사람들이 찾아오고, CCTV를 추가 설치하는 등의 조치는 있었다”며 “다만 기념관은 동상제작과 아무런 상관도 없고, 올해 1월 1일부터 기념관이 칠곡군 소속에서 경상북도 소속으로 변경된 만큼 동상 관리 및 예산편성은 그쪽에서 할 것”이라고만 답했다. 지난 7월 5일 경북 칠곡군 다부동전적기념관 앞에서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 회원들이 백선엽 장군 동상 제막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연합뉴스 정리하면 이렇다. 동상이 이곳에 세워진 명분에 대해서는 관람객도, 기념관 측도 모른다. 민원이 제기됐고, 경상북도가 받아들여 동상을 세우고, 향후 예산을 편성해 관리한다는 것이 밝혀진 내용의 전부다. 동상이 필요하냐를 두고는 의견이 엇갈린다. 이는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닌 해당 인물들에 대한 역사적·사회적 합의가 아직 없다는 의미다.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더라도 동상 설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쪽의 목소리가 더 큰 데 따른 일시적 결과일 뿐이다. 이들이 누구였는지는 쉽게 추정해볼 수 있다. 이승만·트루먼 전 대통령 동상은 2017년 제작됐다. 건립부지를 찾지 못하다가 최근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동상을 ‘왜 칠곡에 세웠느냐’라는 물음의 답은 제막 기념식 당시 이철우 경북도지사가 한 발언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지사는 “2021년에 ‘이 동상이 2017년도에 완성이 됐는데 세울 데가 없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너무나 아팠다”며 “경북도가 우리나라에서 땅이 가장 넓으니 아직도 이런 분 모실 장소가 많이 있다. 추천해 주면 잘 모시겠다”고 말했다. ‘왜 이승만·트루먼 동상인가’ 하는 점은 윤석열 대통령이 설명한다. 제막식 당일 윤 대통령은 화환과 함께 강승규 사회수석을 보내 메시지를 전달했다. “6·25전쟁 당시 한·미 두 나라 정상의 동상은 바로 자유민주주의와 한미동맹의 표상”이라며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야말로 역사의 원동력이라 확신했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기초해 이 나라가 나아갈 비전과 전략을 마련한 선각자셨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한·미 두 전직 대통령을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한 정치적 동반자로 여기는 모양새다. 정말 그럴까. 동상은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을까 이승만·트루먼 동상이 나란히 서 있는 장면은 알고 보면 진풍경이다.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야 할 한국전쟁 중에 여러 차례 정치파동을 만들었다. 1952년의 부산정치파동이 대표적이다.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발췌개헌안’ 통과가 핵심이었다. 본인의 집권 연장이 목표였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은 5월 25일 0시를 기해 임시수도 부산을 포함한 영남과 호남 지방에 잔여 공비 소탕을 명분으로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또 50여명의 국회의원을 국제공산당과 관련이 있다는 명분으로 연행했다. 이어 최종 8명을 구속했다. 당시 미국 트루먼 행정부는 방미 중이던 존 조지프 무초 대사를 한국으로 급히 귀환시키고, 5월 30일 계엄령의 조기 해제를 촉구하는 입장을 이승만에게 전달했다. 이승만은 미국이 내정에 간섭한다고 화를 냈다. 결국 미 국무부는 같은날 계엄권을 유엔군이 인수하는 방안에 대해 당시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 장군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빨리 회신하라고 지시했다. 31일 클라크 장군은 미 합참에 전문을 보내 이승만 정부를 대신할 과도정부를 수립할 방안을 검토한다. 1952년 이후 주요 국면마다 계속해서 나오는 미국의 ‘이승만 제거계획’의 시작이다. 트루먼 역시 이승만에게 경고 메시지를 전달했다. 6월 2일 이승만은 국회가 24시간 내에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키지 않는다면 국회를 해산시키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미 대사관 대리대사 라이트너는 트루먼이 이승만에게 발송한 친서에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경고를 트루먼의 승인을 받아 첨가했다. 결과적으로 클라크 장군이 1952년 7월 5일 ‘비상계획안’이란 이름으로 미 행정부에 보고한 이승만 제거계획은 시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1953년 이른바 ‘에버레디’ 계획 등을 준비하며 미국은 지속적으로 이승만 제거를 염두에 뒀다. 반공포로 석방을 비롯한 휴전문제가 엮인 1953년 이후 상황을 배제하더라도 트루먼과 이승만을 동일 선상에 놓는 것은 역사에 대한 무지에 가깝다. 윤 대통령이 말한 한미동맹의 표상이 상대국 지도자를 제거하는 작전까지 포함하는 것인지도 의문이다. 누가 역사를 이용하는가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6월 5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이처럼 역사적으로 보면 한 공간에 선 동상 3개가 모두 논란의 대상이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보면 정해진 수순을 잘 따라가는 것처럼도 보인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장관급으로 격상한 국가보훈부는 두 가지 눈에 띄는 업무를 추진했다. 하나는 백 장군 재평가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지난 6월 30일 서울 영등포구 공군호텔에서 열린 ‘백선엽 기념재단 창립대회‘에서 축사한 데 이어, 7월 5일 열린 동상 제막식에도 참석했다. 그리고 지난 7월 24일 국가보훈부는 국립대전현충원 누리집에 백 장군을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적은 문구가 법적 근거가 없다며, 이 내용을 삭제했다고 밝혔다. 국립대전현충원 누리집 ‘안장자 검색 및 온라인 참배’란에서 ‘백선엽’을 검색하면, 비고에 나오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2009년)’이라는 문구를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또 다른 하나는 이승만 재평가다. 특히 김황식 전 총리가 추진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승만기념관 건립을 지원한다. 이는 윤 대통령이 추진하는 사업으로도 알려져 있다. 실제로 윤 대통령은 지난 8월 9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독립유공자 및 유족 158명과의 오찬에서 이종찬 광복회장에게 기념관 건립을 도와달라는 뜻을 전했고, 이 회장 역시 “적극 돕겠다”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장은 지난 8월 1일 미리 배포한 ‘대한민국 정체성 선포식’ 개최 인사말에서 “이런 괴물기념관이 건립된다면 광복회는 반대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를 두고 오락가락하는 행태는 이철우 지사의 말을 통해 이해해 볼 수 있다. 이 지사는 “세계 각국을 돌아봤을 때 선진국일수록 영웅들의 동상이 우후죽순 많이 서 있다”며 “그분들이 다 공만 있고 과가 없느냐? 공과가 다 있다. 그런데 공이 크고 과가 작으면 공을 위주로 그렇게 동상을 많이 세운다”고 말했다. 쉽게 말해, 공이 크면 과는 덮을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공과 중 무엇이 더 큰가를 평가할 기준이 없다. 해당 논리대로라면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하루아침에 평가를 바꿔도 문제될 것이 없다. 기념관, 동상에 집착하는 것 역시 정치적 의도를 의심케 한다. 개인적 기억이 집단의 기억, 즉 역사가 되는 데는 사회적 의미를 매개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이를 가장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기념관, 동상 등의 존재다. 1인 독재 체제의 북한, 역사적 인물을 신격화한 군국주의 일본에서 이러한 장치들을 정치에 잘 활용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8월 9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독립유공자 및 유족 초청 오찬에서 이종찬 광복회장의 발언을 듣고 있다./대통령실 제공 전문가들은 정치적 필요에 따라 역사를 부각하고 빼는 행위를 경계하고 비판한다. 역사학자 알렉스 폰 턴즐만은 “조각상은 역사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역사적 기억에 대한 기록”이라며 “조각상은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지에 관해 특정 시점의 누군가가 생각한 것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지금,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헬렌 카는 “우리가 얼룩진 과거를 무비판적으로 고집할 때, 우리는 계속해서 현재를 더럽힌다”고 말했다. 헬렌 카는 역사학자 E. H 카의 증손녀다. 윤석열 정부는 역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논란이 있는 인물의 공을 부각하는 방식으로 재평가를 시도하고 있다. 특히 윤 대통령 지지층을 중심으로 이들 인물에 대한 긍정 평가가 높다는 점은 다양한 비판을 낳는다. 사회통합을 해칠 뿐만 아니라 국민 사이에 갈등의 골만 깊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윤석열 정부가 역사를 수정해 지지층 결집을 노린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특집
[원희복의 인물탐구]임정기념관건립위원장 이종찬 “이승만부터 김원봉까지 다 아우르겠다”(2018. 03. 19 14:46)
2018. 03. 19 14:46 사회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는 최순실의 국정농단도 중요한 요인이지만 그보다 중요한 배경에는 ‘역사전쟁’이라는 요소가 있다. 건국절로 상징되는 친일·독재세력과 항일·민주화 세력의 대결이 그것이다. 뉴라이트 생각을 가진 인물을 중용한 박근혜는 교학사 역사교과서를 넘어 국정 역사교과서까지 나가는 무리수를 범한다. 이 국정 역사교과서를 거부한 전교조 선생님과 역사학자·민주화운동가들에 의해 촛불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바로 그 촛불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항일역사를 확고히 하고 있다. 그동안 지지부진(사실상 중단)했던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임정기념관)을 국비로 신축하기로 했다. 정부는 현재 서울 서대문구의회 자리에 2020년 8월까지 지상 5층·지하 1층(연면적 6236㎡)의 임정기념관을 짓기로 결정했다. 1월 31일 정부 차원의 건립추진위도 출범시켰다. 민·관이 함께하는 이 임정기념관건립추진위원장을 이종찬 우당장학회 이사장(전 국정원장)이 맡았다. 이 위원장은 “국가보훈처에서 수립한 건립계획을 더욱 발전시킬 것”이라며 “내년 4월 11일 임정기념식에 맞춰 착공해 2020년 완공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임정기념관은 세 가지를 강조하려 한다. 첫 번째는 1919년이 우리 5000년 역사에서 제국에서 처음으로 ‘민국’으로 온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국민주권시대를 연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건국이라 하지 말고 국민주권시대, 즉 민주공화제의 시작으로 역사를 정리하자고 했다. 두 번째는 임시정부를 세울 때 좌·우파 이념이나 지역·세대 구분이 없었다. 이승만에서 김원봉까지 모두 모여 나라를 세우자고 한 것이다. 임정기념관도 그 정신을 담아야 통일시대에 기여할 수 있다. 세 번째가 임정은 나라만 찾자고 한 것이 아니라 세계평화·인류공영에 이바지하자는 것이었다. 이 정신은 당시 대단한 것이다. 임정기념관은 이 세 가지 정신을 표현하고 담아야 한다.” 내년 4월 착공, 2020년에 완공 -외국의 독립기념관이나 레지스탕스 박물관을 가보면 국민과 매우 친숙하게 다가온다. 임정기념관은 천안 독립기념관과 백범기념관 등과 또 달라야 한다. “당연히 차별화해야 한다. 임정기념관의 차별성은 앞서 세 가지 특징으로 할 것이다. 임정기념관은 특히 ITC 강국답게 최첨단 5G(세대)기술로 꾸밀 생각이다. 그런데 이 분야에 마땅한 전문가가 없어 고민이다.” -이승만에서 김원봉까지 포괄하기 위해 이승만 아들 인수씨를 찾아간 것인가. “찾아가 ‘밖에 있지 말고 참여하라’고 했다. 이승만은 그래도 임정 초대 대통령이다. 안창호 후손도 찾아갔다. 임정기념관은 백범에만 기울어져 있어서는 안된다. 이승만에서부터 김원봉까지 다 들어와야 한다.” -김원봉은 북한 정부 수립에 기여하고, 6·25전쟁에 가담한 사람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다. “김원봉은 김일성에게 비참하게 죽었다. 일제가 김원봉을 잡기 위해 백범보다 10배 넘는 현상금을 걸었다. 그런 김원봉이 대한민국 천지에 갈 데가 없다. 김원봉 영혼이 구천에 떠도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일이다. 김일성만 빼고, 김두봉도 넣어야 한다.” 매우 파격적인 ‘화해’다. 지금까지 정부는 일제강점기 아무리 항일투쟁 사실이 커도 북한 김일성 정권 수립에 가담했으면 서훈하지 않았다. 김원봉·김두봉은 뛰어난 항일투사였고 1958년 김일성에 의해 숙청됐지만 북한정권 수립은 물론 6·25전쟁에도 가담한 전력이 있다. 따라서 임정기념관은 매우 폭넓은 ‘역사적 화해’의 장이 될 것이다. 화해의 자리는 올 6월 1~2일 이념을 초월하는 음악회를 통해 선보일 예정이다. 바로 정률성과 한유한 통합음악회다. 두 사람 모두 1930년대부터 항일투쟁을 한 음악가로 정률성은 좌파, 한유한은 우파로 분류된다. 이 위원장은 “정치색을 뺀 서정적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라며 “서울 예술의전당에서만 공연하려 했는데, 반응이 좋아 부산에서도 공연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 공연은 성남시립교향악단과 합창단이 함께 한다. 임정기념관건립추진위는 8월에 ‘레지스탕스 영화제’를 열고, 11월 23일 임정요인들이 귀국한 날을 기념해 여성독립운동가를 발굴·소개하는 행사를 열 계획이라고 한다. 이 이사장은 “임정기념관 건립과 별도로 이들 사업을 통해 분위기를 잡고 내년부터 더 확대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 위원장은 이들 사업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부지런히 뛰고 있다. 이종찬 임정기념관건립위원장이 우당 이회영 흉상 앞에 서 있다. 우여곡절 많았던 임정기념관 건립 임정기념관 건립에는 우여곡절도 많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회장 김자동)가 설립된 것은 2004년이다. 기념관 건립을 위해 2015년 건립추진위를 구성했지만 정부는 법인승인조차 하지 않았다. 이 위원장은 “2015년 청와대 이병기 비서실장을 찾아가 ‘지금이라도 사업을 시작해야 박 대통령도 역사에 남는다’고 설득해 겨우 10억원의 예산을 확보했다”면서 “그런데 정작 박승춘 보훈처장이 이를 2000만원만 사용하고 반납해 버렸다”고 말했다. 다음해 이 위원장이 야당 예결위원장을 찾아가 다시 10억원의 예산을 확보했는데 박 보훈처장은 “국민 모금해 짓고 국가에 기부채납하라”며 다시 거부했다. 정부에서 나몰라라 하던 이 사업은 다행히 서울시가 서대문구의회 건물을 제공하면서 풀리기 시작했다. 아쉬운 대로 건물을 리모델링하기로 했다가 문재인 정부에서 건물 신축으로 가닥을 잡은 것이다. 이 위원장은 “박원순 시장이 220억원대 부지를 제공하고, 문 대통령이 건물 신축을 결정했다”면서 “좀 비좁긴 하지만 서대문형무소가 보이고, 독립문과 남산까지 다 보여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위치”라고 말했다. 사실 프랑스 에펠탑은 프랑스혁명 100주년 기념물이고, 미국 자유의 여신상은 독립 100주년 기념물이다. 우리도 오래전부터 3·1혁명 100주년 기념물을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이어지면서 이런 움직임은 쑥 들어갔다. 그나마 임정기념관이라도 만들어지는 것에 만족해야 할 처지다. “임정 100주년 기념사업회 이사장이 한완상 전 통일부 장관이다. 지난 삼일절에 한 위원장에게 기념조형물은 관심 밖이니 서두르라고 했다. 기념물은 뭘 어떻게 만드느냐는 국민적 컨센서스(공감대)가 있어야 한다. 이건 순전히 개인적 생각이지만 광화문의 충무공 동상은 충무로 로터리로 옮기고, 거기에 100주년 기념물을 세워야 한다.” 건국절로 상징되는 뉴라이트 역사관을 가진 인물이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 득세하면서 항일·독립운동가에 대한 예우와 선양사업은 크게 위축됐다. 이 위원장은 “지금 뉴라이트들이 몰라서 그렇지 이승만 대통령의 제헌의회 모든 기록에 대한민국은 기미년부터 시작했다고 돼 있다”면서 “이승만이 지하에서 ‘이런 괘씸한 놈들, 나를 팔아도 이렇게 파냐’고 할 것”이라고 일갈했다. 그는 또 당시 독립선언 어디에도 스스로 식민지로 인정한 대목이 없다면서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에게 ‘타락한 인간들’이라고 혹평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뉴라이트, 식민지 근대화론자를 중용한 것은 부친의 친일사실을 숨기려 했기 때문 아닐까. “이건 내가 실제로 겪은 것으로 1967~68년 중앙정보부에 ‘<광복군>(저자 박영박) 책을 모두 거둬들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어렵게 책을 수거해 봤더니 ‘박정희가 광복군 활동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박 대통령이 그것을 읽고 ‘이런 거짓말을 해선 안된다. 해방 후 김학규 광복군 3지대장이 만주에 있던 한국 국적 군인을 모았다. 그때 잠시 구대장으로 사병을 모아 훈련시킨 적이 있다. 이것은 해방 이후로 내가 장준하나 김준엽처럼 일제때 독립군을 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래서 책을 거두어들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종찬 임정기념관건립위원장이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박정희가 직접 그런 지시를 했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그렇다며 나에게 직접 지시했다. 그래서 내가 그 책 수거작업을 했다.” -박정희도 역사왜곡은 하려 하지 않았다는 증언이다. 부친의 이런 사실을 박근혜 대통령이 알았다면 뉴라이트 세력을 옆에 두고 역사왜곡을 안 했을 것이다. “박정희도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는 일종의 콤플렉스가 있었고, 그 대목에서는 정직했다. 박근혜는 아버지를 몰랐던 것이다. 이승만 양자인 인수씨도 잘 모른다. 이승만의 뜻도 요즘 뉴라이트의 주장이 아니다.” 이 위원장은 1936년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이고 종조부 역시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부통령 이시영이다. 그는 10세 때 해방을 맞아 김구 등 임정 어른과 귀국해 경기중·고와 육사(16기)를 나왔다. 중앙정보부로 자리를 옮겨 영국대사관 참사관, 중정 기조실장을 거쳐 1980년 전두환 정권의 민주정의당 창당을 주도했다. 이후 제11~14대 4선 국회의원을 지내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맞섰다. 1997년 김대중 정부에서 안기부를 개편한 초대 국가정보원장이 됐다. 따라서 그는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 등 전직 대통령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몇 안되는 인물이다. 이승만·박정희 다음 전두환 전 대통령의 역사의식이 궁금했다. 민정당 창당 주역, DJ정권 국정원장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두환 집안은 일제강점기 먹을 게 없어 만주에서 살다 왔다. 전두환은 싫은 얘기라도 경청하는 장점이 있다. 민정당 창당할 때 내가 ‘정권의 정당성을 담보하려면 독립운동 세력을 기초로 해야 한다’고 말했고, 전두환이 승낙했다. 그래서 집 없이 떠돌던 유석현 선생(그는 폭탄과 권총을 국내에 반입하는 영화 <밀정>의 실제 인물이다)을 찾아 ‘모시러 왔다’고 했다. 그때 유 선생의 첫마디가 ‘나는 일제 때도 요시찰 인물이었고, 이승만·박정희 때도 요시찰 인물이었는데, 뭐하러 찾아왔나’라고 하더라. 내가 그분을 민정당 창당주비위원장으로 모셨다. 그리고 송지영(독립운동가 겸 언론인)·윤길중(진보당 간사장) 등 진보적 인사를 정계에 진출시켰다.” 그는 3당 합당할 때 노태우 대통령에게 “그래도 독립운동가를 기반으로 세운 민정당인데 그렇게 자신이 없느냐”고 덤볐다. 나중에 YS와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맞붙었지만 전당대회 연설 기회조차 주지 않는 불공정 경선에 분노해 탈당했다. 그는 YS정권 내내 고난의 길을 걷다 아들이 있는 영국에 갔다가 마침 영국에 있던 DJ를 만나 의기투합했다. 그는 “DJ가 1995년 조순을 서울시장에, 나를 경기지사에 출마시키려 했는데 이기택 총재가 견제해 결국 출마하지 못했다”면서 “결국 DJ가 화가 나 신당(새정치국민회의)을 창당했다”고 말했다. 1996년 그는 DJ 공천으로 종로에서 다시 도전했다. 그는 “그때 YS는 나를 낙선시키기 위해 이명박을 공천했다”면서 “노무현 후보와 표가 분산되는 바람에 둘 다 낙선해 이명박이 국회의원이 됐다”고 말했다. 이후 이명박 의원은 비서의 금권선거 폭로로 의원직을 잃고, 재선거에서 노무현이 국회의원이 된다. 종로에서 맞붙었던 세 사람 중 두 사람은 대통령이 됐다. 참 교묘하게 얽히고 설키는 것이 정치다. 그는 “건국절을 처음 얘기한 사람이 바로 이명박”이라며 “노골적으로 임시정부를 폄훼한 사람은 이명박·박근혜밖에 없었다. 전두환·박정희도 그러지 않았다”고 말했다. 독립운동을 폄훼한 두 전직 대통령이 나란히 감옥에 가는 현실을 보면서 ‘역사는 현재다’라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원희복의 인물탐구
[광복 70년 역사르포](6) 김창룡 암살현장-원효로 1가…이승만 독재 하수인을 응징하다(2015. 03. 31 10:15)
2015. 03. 31 10:15 사회
59년 전 3면에 한 사건의 약도가 실렸다. 워낙 중요한 사건이었으니 현장 약도까지 실었을 것이다. 위치는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 1가 21번지, 자혜병원 앞이다. 약도에는 120m 언덕 위 자택에서 점선으로 내려오는 표시가 있다가 자혜병원과 미장미장원 중간에 엑스표, 즉 ‘사건 현장’이 표시돼 있다. 지금은 그 자택도, 자혜병원도, 또 미장미장원도 없다. 그러나 2015년 3월 59년 전 신문의 약도를 들고 다시 찾은 현장의 골목은 신문에 실린 약도 그대로이다. 단지 자혜병원은 용산경찰서로, 미장미장원은 ‘OK전산’이라는 컴퓨터 복사기 매장과 고시텔로, 자택은 빌라로 바뀌었을 뿐이다. 심지어 범인이 숨어 있다가 뛰쳐나온 좁은 골목과 숨은 전봇대까지 그대로이다(물론 전봇대는 콘크리트로 바뀌어 당시 전봇대는 아닐 것이다). 1956년 1월 30일 김창룡 특무대장이 암살된 현장. 지금은 용산경찰서 민원실 앞으로 당시 왼쪽 좁은 골목과 전봇대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일본 헌병에서 국군 정보군인으로 변신 하지만 이곳에서 과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현대사에서 무슨 의미를 가진 현장인지 아무런 설명도 없고, 또 알지도 못한다. 무심히 사람만 오갈 뿐, 용산경찰서 정문에 서 있는 전경도 이곳이 어떤 사연을 간직한 곳인지 모른다. 이곳은 1956년 1월 30일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 소장이 암살된 현장이다. 김창룡 암살사건은 단편적인 육군 내부의 파워게임에 의한 일개 육군 소장의 죽음을 넘어서 현대사에서 적잖은 의미를 가진 사건이다. 김창룡 암살이 무슨 의미를 가졌는지 알기 위해선 먼저 그가 누구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김창룡은 함경도 영흥 출신으로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일제 만주국 정보요원을 하다가 관동군 헌병으로 특채된다. 워낙 악랄한 방법으로 일제 항일투사를 소탕한 공로로 헌병 오장(하사급)까지 진급했다. 해방이 되자 ‘전범’으로 지목된 그는 고향에 숨었지만 친척의 고발로 붙잡혔다. 북한 소련 군정에서 사형이 선고된 그는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려 남한으로 내려온다. 월남한 그는 1947년 조선경비사관학교(오늘날 육사) 3기생으로 들어가 단기 과정을 마치고 소위로 임관했다. 국군 제1연대 정보소대 소대장으로 군 생활을 시작한 김창룡은 오직 ‘정보군인’으로 일관했다. 만주에서 광복군을 고문하고, 조직을 밝혀내던 자신의 특기를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승승장구했다. 이를 뒤에서 돌봐준 사람이 이승만 대통령이다.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과 장기집권을 위해 정보군인·정치군인이 필요했고, 김창룡은 김창룡대로 자신의 친일 전력을 덮어줄 배경이 필요했다. 김창룡은 좌익 색출이라는 명분으로 이승만의 정적을 제거하는 ‘공작’에 앞장섰다. 특히 김구 암살범 안두희는 1992년 “단정 수립에 반대하는 백범을 제거해야 한다고 김창룡 특무대장이 세뇌시켰다”고 증언, 김창룡이 김구 암살에도 깊숙이 관여했음을 고백했다. 군과 경찰이 김창룡 특무대장 암살범을 검거, 현장 검증을 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김창룡은 이러한 정치공작을 인정받아 1949년 소령, 1951년 육군 특무대장, 1953년 준장, 1955년 소장으로 초고속 진급을 거듭했다. 그의 권력과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훨씬 계급이 높은 육군 참모총장도 그에게 절절맬 정도였다. 그런 김창룡은 1956년 1월 30일 아침 7시30분, 지프를 타고 당당하게 출근 길에 올랐다. 당시 상황을 자세히 기록한 을 보자. “전신주 앞(피살 지점)에는 청색이 혼합된 녹색 지프가 서 있어 박 중사(김 소장 운전사)가 클랙슨을 누르며 비키라고 신호하였으나 이 괴상한 지프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때 돌연 전신주 뒤에 숨어 있던 괴한 1명과 뒷골목에 숨어 있던 괴한 1명이 지프 문을 열고 권총 3발을 김 소장에게 발사했다.”(어법을 현대식으로 수정) 이승만 반공 히스테리를 실천한 인물 3발의 총탄 중 2발은 김 소장의 가슴을 관통하고 1발은 턱에 명중됐다. 다른 2발은 운전사 박 중사가 맞았다. 김 소장은 즉시 적십자병원을 거쳐 수도육군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미 숨진 상태였다. 그의 사망 소식에 이승만 대통령은 직접 적십자병원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중장으로 추서하는 담화를 발표하고 빠른 시일 내에 범인을 잡으라고 지시했다. 전군에 외출 금지가 내려진 가운데 2월 3일 김창룡의 장례식이 대한민국 최초의 육군장으로 치러졌다. 이승만은 장례식 조사에서 “충렬의 공을 세웠다”고 극찬했다. 역사학자 이병도는 그의 묘비에 ‘간첩 부역자 기타를 검거, 처단함이 근 2만 5천 명’이라고 썼다. 신속한 수사 결과 같은 특무부대에 근무했던 허태영 대령의 지시로 송용고와 신초식이 암살을 결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허태영은 검거되는 순간, “내가 했다. 하나에서 백까지 모두 내 책임이다. 송과 신은 상관인 내 명령에 따랐을 뿐이므로 그들을 닦달하지 말라”고 외쳤다. 그리고 허태영은 재판 내내 정치군인·친일군인을 처단한 것은 명예로운 행동이었다고 주장했다. 허태영은 재판 도중 라는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김창룡이 만주의 악질 일본 관동군 헌병으로 많은 애국지사를 고문하고, 포로수용소 감시원으로 포로를 학대한 친일 전범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김창룡은 조선방직 사건, 조병창 화재 사건, 김종평 장군 사건 등 수많은 사건을 허위 날조하고, 침소봉대했다고 폭로했다. 나중에 재판과정에서 김창룡이 군수품을 빼돌린 것은 물론 밀수에 개입해 막대한 치부를 한 것이 드러났다. 허태영의 사형이 확정되자 그 부인이 배후를 탄원, 추가로 헌병사령관인 공국진 준장, 2군 사령관인 강문봉 중장, 그리고 그 윗선으로 정일권 참모총장까지 혐의점이 불거졌다. 하지만 이승만은 군부의 동요를 우려, 강문봉 중장까지만 기소했다. 그리고 군사법원은 강문봉, 허태영, 송용고, 신초식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강문봉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김창룡 특무대장은 오전 7시30분 자택(왼쪽 골목 끝 흰색 8층 빌라)에서 출근, 오른쪽 언덕 아래 자혜병원 앞에서 암살됐다. 김창룡 자택은 지붕에 청기와를 올려 ‘청기와집’으로 불렸다. 허태영은 1957년 9월 24일 공범과 같이 총살형 집행대에 묶였다. 그 사형집행 현장을 지켜본 경향신문 기자는 “허태영은 사격수들이 방아쇠를 당길 찰나, ‘애국가를 부르자, 우리는 떳떳한 일을 했으니 저승에서도 떳떳하게 만날 수 있지 않느냐’면서 끝까지 군인답게 죽었다”고 기록했다. 전북대 강준만 교수는 에서 ‘김창룡을 알면 이승만과 1950년대가 보인다’면서 “1950년대 이승만 반공체제의 히스테리, 바로 그것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실천한 인물이 김창룡이었다”고 규정했다. 강 교수는 “이승만의 ‘빨갱이 사냥’은 늘 정치적이었고 정치와 연관되었다”면서 “이런 이승만의 정치적 빨갱이 사냥을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수하, 그게 바로 김창룡이었다”고 말했다. 김창룡 집 자리에 8층 빌라 들어서 비단 반공 히스테리만이 아니다. 일제 관동군 출신의 친일파 문제 역시 김창룡 암살에 깊숙이 내재해 있다. 당시 특무부대에는 일제 관동군 헌병 출신, 조선군 헌병 출신, 일제 고등형사 출신 등 세 부류가 치열한 파벌을 형성하고 있었다. 조선군 헌병 출신의 허태영은 관동군 헌병 출신의 김창룡을 ‘친일파’로 여겼다. 결국 김창룡은 친일파 척결 문제, 정보군인·부패군인·정치군인의 문제, 공작정치 특히 용공조작의 문제 등 우리 현대 정치사의 악성 DNA를 모두 이식한 상징적 존재였던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친일·반공·부패 군부세력이 연대해 권력을 형성하고 ‘갑’의 위치에서 일방적으로 독주하던 시대였다. 반민특위 해체에서 시작해 김구·여운형 암살, 제주 4·3의 비극, 발췌개헌과 사사오입개헌, 국회 프락치 사건에서 폐간까지 이승만 권력의 독주는 거칠 것이 없었다. 특무대장 김창룡 암살은 지금까지 억눌려 있던 피해자 즉 ‘을’의 반격이었다. 그것도 이승만의 장기집권과 독재의 하수인을 ‘눈에는 눈’ ‘총에는 총’으로 응징한 것이다. 당연히 그 ‘역사적 현장’에는 그 어떤 기념비도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그 ‘역사적 현장’인 자혜병원 앞은 그 후 서울시립 남부병원을 거쳐 지금은 용산경찰서 앞으로 바뀌어 있다. 용산경찰서 정문 앞에서 남부약국을 경영하고 있는 양모씨(74·여)는 “약국 앞에 있던 남부병원 옆 3·1교회 담벼락에 김창룡 사건 당시 총탄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서 “용산경찰서가 들어서고 정문을 고치면서 그 총탄 자국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김창룡 살해 지점에서 당시 출근길을 거슬러 올라 김창룡 자택이 있는 곳까지 120m는 옛 약도 그대로이다. 김창룡 자택이 있던 자리에는 거대한 8층 빌라가 들어서 있다. 마침 골목 모서리에서 46년간 장사를 했다는 ‘하나수퍼’ 류모씨(81)는 친절하게 김창룡 집 약도까지 그려준다. 그리고 그 옆집이 장도영(5·16 쿠데타 당시 육군 참모총장으로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을 지냈으나 나중에 숙청됐다)의 집, 앞에는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김계원 장군의 집이라는 설명까지 더해준다. 류씨는 “김창룡 살해범이 튀어나온 좁은 골목과 전봇대도 바로 그 위치에 그대로 있다”면서 “옛날 이 일대는 일제 적산가옥이 즐비했는데 그때 김창룡 집은 청기와를 올려 청기와집이라 불렸다”고 말했다. 자신의 집에 청기와를 올릴 정도였다는 것은 그만큼 김창룡의 위세가 하늘을 찔렀다는 의미일 것이다. 과연 그때 그 골목, 전봇대만 그대로일까. 김창룡은 59년 전 사라졌지만 김창룡이 이식한 악질 DNA는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59년 전 친일군인의 문제는 지금도 친일청산 논란으로 이어지고 있다. 정보·정치군인은 이후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으로 이어졌다. 최근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인 방위산업 비리는 정치·부패군인 문제가 여전히 진행형임을 말해준다. 무엇보다 정보기관을 동원한 정치공작의 문제는 최근 국가정보원과 군사이버사령부의 정치개입 비리에서도 재연됐다. 59년 전과 지금, 비록 김창룡 개인은 사라졌지만 좁은 골목과 전봇대만 그대로인 것이 아니다.
광복 70년 역사르포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