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373 건 검색)
- 이재명·김경수·김부겸·박용진·이광재·임종석 다시 뭉쳤다, ‘윤석열 파면’ 단일대오
- 2025. 03. 12 16:37정치
- ... 열었다. 김경수 전 경남지사, 김부겸 전 국무총리, 박용진 전 국회의원, 이광재 전 국회사무총장,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참석했다. 이날 시국 간담회는 이 대표 제안으로 성사됐다. 김동연 경기지사는...
- 윤석열 탄핵 심판
- 이재명, 임종석 만나 “운동장 넓게 쓰자” 통합 행보 가속
- 2025. 02. 27 20:27정치
- ... 임 “쓴소리 많이 할 것” 대립각 이 대표 대항마 지지 의사 밝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27일 서울 여의도의 한 식당에서 오찬 회동을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 임종석 “이재명 넘어서려는 분들 지지할 생각”···이재명 “운동장 넓게 써야”
- 2025. 02. 27 16:04정치
- ...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27일 오후 서울 여의도의 한 식당에서 오찬 회동을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7일 친문재인(친문)계 임종석 전...
- 임종석 “민주당은 중도보수 아냐…이재명, 우클릭 강박관념”
- 2025. 02. 21 11:14정치
-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 연합뉴스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21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이 민주당을 ‘중도보수’로 규정한 것을 두고 “민주당은 중도 보수 정당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
스포츠경향(총 50 건 검색)
- 임종석, 2일 고민정 후보와 ‘차튜브’ 유세 나서
- 2020. 04. 01 20:03 연예
- 고민정 후보 측 제공.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4·15 총선 공식 선거운동 개시일인 2일부터 더불어민주당 후보들을 위한 지원 유세에 나선다. 임 전 실장은 이날 방송인 출신으로 청와대 대변인을 역임한 서울 광진을 고민정 후보와 함께 자양사거리에서 ‘차튜브(유세차+유튜브)’ 유세를 한다고 고 후보 측이 1일 밝혔다. 차튜브란 유세차 위에서 유튜브 생방송을 진행하며 온라인·오프라인으로 유권자를 만나는 선거운동 방식이다. 임종석 전 실장은 고 후보 이외에도 요청이 있는 곳에 나서서 지원유세를 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광주 등 호남을 비롯해 수도권, 영남 등 일부 지역구에서 유세를 할것으로 관측된다. 임 전 실장은 지난 달 초 전남 목포를 찾아 민주당 김원이 후보를 응원한 바도 있다. 임종석 전 실장은 지난해 11월 “제도권 정치를 떠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려 한다”며 “앞으로의 시간은 다시 통일 운동에 매진하고 싶다”고 밝히며 총선 불출마를 공식화했다. 당 지도부가 출마·공동선거대책위원장 역할 수행 등을 제안했지만 그는 고사했다. 임 실장은 이번 고 후보 지원유세를 시작으로 여당의 총선 승리를 위한 측면지원에 나선다.
- “제도권 정치 떠나겠다” 임종석, 정계은퇴 시사
- 2019. 11. 17 13:24 생활
-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 연합뉴스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17일 “제도권 정치를 떠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려 한다”며 “앞으로의 시간은 다시 통일 운동에 매진하고 싶다”고 말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임종석 전 실장의 내년 총선 출마 여부에 관심이 쏠린 가운데, 총선에 나서지 않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힌 셈이다. 나아가 ‘제도권 정치를 떠나겠다’고 발언하면서, 일부에서는 임 전 실장이 사실상 정계은퇴를 시사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임종석 전 실장은 이날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이같이 밝히며 “예나 지금이나 저의 가슴에는 항상 같은 꿈이 자리잡고 있다”면서 “한반도 평화와 남북의 공동 번영, 제겐 꿈이자 소명인 그 일을 이제는 민간 영역에서 펼쳐보려 한다”고 말했다. 임종석 전 실장은 “2000년 만 34세의 나이로 16대 국회의원이 됐고 어느새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환희와 좌절, 그리고 도전으로 버무려진 시간이었다”며 “그중에서도 대선 캠페인부터 비서실장까지 문재인 대통령님과 함께 한 2년 남짓한 시간이 제 인생 최고의 기쁨이고 보람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저는 이제 처음 정치를 시작할 때 마음먹은 대로 제도권 정치를 떠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려 한다. 앞으로의 시간은 다시 통일 운동에 매진하고 싶다”며 “서울과 평양을 잇는 많은 신뢰의 다리를 놓고 싶다”고 밝혔다. 임 전 실장은 “50 중반의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게 두렵기도 하다. 잘한 결정인지 걱정도 된다”면서도 “하지만 두려움을 설렘으로 바꾸며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향해 뛰어가겠다”고 언급했다. 임 전 실장은 또 “제 인생에 가장 소중한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나누고 싶다”고 덧붙였다. 임 전 실장의 이날 언급은 총선을 5개월여 앞두고 불출마 뜻을 밝힌 것에 더해, ‘연말·연초’로 예상되는 개각에서 입각할 가능성에도 선을 그은 것으로 해석된다. 나아가 이번 발언은 사실상의 정계은퇴 선언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제도권 정치’를 떠나 민간 영역으로 활동무대를 옮기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다만 일부에서는 이후에라도 남북관계 진전 상황 등에 따라 임 전 실장이 다시 정부 등에서 활동할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있는 것 아니냐는 해석도 동시에 나온다고 연합뉴스는 분석했다.
- 임종석·백원우 민주당 복당 신청
- 2019. 02. 19 00:00 생활
-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백원우 전 청와대 민정비서관, 남요원 전 청와대 문화비서관, 권혁기 전 춘추관장 등 4명이 18일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에 복당을 신청했다. 임 전 비서실장과 남 전 비서관, 권 전 춘추관장은 각각 서울시당에, 백 전 비서관은 경기도당에 복당 신청서를 제출했다. 임종석 전 비서실장은 “자랑스러운 민주당의 당원으로 복귀한다”며 “한반도 평화, 함께 잘 사는 나라를 향한 민주당 정부와 문재인 대통령의 노력에 당원으로서 최선의 힘을 더하겠다”고 소회를 밝혔다. 지난달 8일 임종석 전임 대통령비서실장(왼쪽)이 노영민 후임 비서실장과 함께 ‘2기 청와대’ 참모진 명단을 발표하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남요원 전 비서관은 “국민들께 지켜야 할 약속과 가야 할 길을 더불어민주당에서 실천해가겠다”고 말했다. 권혁기 전 춘추관장은 “국민과 한 약속을 지키는 신뢰의 정치를 민주당에서 배우고 실천하겠다”고 말했다.
- 김경수 법정구속에 침통한 임종석 “이럴 땐 정치 한다는게 죽도록 싫다”
- 2019. 01. 30 18:22 생활
-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30일 ‘드루킹’ 일당과 공모해 댓글 조작을 벌인 혐의로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김경수 경남지사의 법정구속과 관련해 “정치인 김경수를 한없이 신뢰하고 응원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임 전 실장은 이날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경수야, 우리는 널 굳게 믿는다. 사람 김경수를 좋아하고 믿는다”라며 이같이 언급했다.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왼쪽)과 김경수 경남지사가 지난해 10월 경주 화백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6회 지방자치의 날 기념식에 참석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임 전 실장은 “경수야! 이럴 땐 정치를 한다는 게 죽도록 싫다”라며 “‘정치 하지 마라’던 노무현 대통령님의 유언이 다시 아프게 와서 꽂힌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격과 함께 만감이 쏟아져 내린다”고 밝혔다. 이어 “항상 널 보며 친구로서 더 맑아지려 노력한다. 항상 널 보며 정치적 동지로서 더 반듯해지려 노력한다”고 말했다. 임 전 실장은 “견뎌내다오. 견뎌서 이겨내다오”라며 “미안하다”라고 덧붙였다.
주간경향(총 1 건 검색)
- [뉴리더]임종석 열린우리당 의원(2005. 12. 06)
- 2005. 12. 06 정치
- ‘중도통합’ 깃발 든 반미·자주화 1세대 학생운동 넘어선 386 정치인… 민족경제공동체 향해 ‘미래를 조직’한다 임종석 의원 약력 1966년 4월 24일 전남 장흥 출생. 4형제 중 3남.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이사. 1985년 용문고 졸업. 1986년 한양대 입학(1995년 무기재료공학과 졸업). 1987년 노래패 ‘소리새벽’에 가입, 6월항쟁 참여. 1988년 한양대 총학생회장에 당선. 1989년 서총련 의장, 전대협 3기 의장. 전대협 대표로 임수경 평양축전 파견. 수배 중 10여 차례 기자회견, 12월 18일 검거됨. 3년 6개월 복역(1993년 5월 출소). 1994년 청년정보문화센터 창립. 부소장. 2~4기 소장. 1999년 한국청년단체연합회(KYC) 창립. 회원으로 참여.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서울 성동 을). 국회 교육위원회 위원. 민화협 청년위원장. 새천년민주당 청년위원장·남북교류협력위원회 위원. 2001년 새천년민주당 대표 비서실장. 2002년 노무현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국민참여운동본부 사무총장. 국회 여성위원회 위원, 재정경제위원회 위원. 2003년 열린우리당 원내부대표·국민참여운동본부장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서울 성동 을).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위원. 열린우리당 대변인. 현재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간사. 열린우리당 연수원 부원장.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환상의 전술’로 시작해서 ‘신비의 탈출’로 끝난 6·30 한양대 투쟁으로 노태우 반통일 정권에 대하여 전술적 승리를 거둠으로써 전대협은 역사상 꺼지지 않는 불멸의 위훈을 세웠으며 전설적 신화를 창조하였다.”(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지음 ‘전대협’ 돌베개, 1991년) ‘임수경 대표 평양축전 참가투쟁’에 대한 전대협의 자체 평가다. 1989년 ‘임수경 방북 파문’은 ‘국내 세 번째로 정치적 영향력이 큰 집단’으로까지 불린 전대협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사건이었다. 국내적으로는 통일운동에 불을 지르는 한편 극심한 이념논쟁을 야기했고 대외적으로는 한반도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계기가 됐다. 학생운동사의 가장 화려한 장면이랄 수 있는 이 투쟁을 주도함으로써 그들의 표현대로 ‘불멸의 위훈’을 세운 전대협 3기 의장이 임종석 의원이다. 집권 열린우리당 재선그룹의 일원인 임 의원의 정치적 자산은 ‘8할이 전대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사에 보기 드문 강력한 학생조직’이라는 전대협의 전성기를 화려하게 구가한 전력 때문이다. ‘의장님’의 막강한 대중동원력과 ‘임길동’으로 불리기까지 한 신출귀몰한 행각은 전대협 세대는 물론 일반인에게도 쉬이 지워지지 않는 강렬한 기억이다. 이런 이미지와 상징성이 임 의원에게 정치적 발판이 된 게 틀림없지만 정치적 행동반경을 제약하는 족쇄가 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조금 세게 소신을 펴면 ‘학생운동가의 티를 벗지 못했다’는 비아냥을 듣고 정치적 타협을 하면 ‘변절했다’는 비난에 직면하기 십상이다. 전대협 전성기 이끈 ‘의장님’ 임 의원은 1966년생이다. ‘아직 486으로 업그레이드되지 않은’ 386세대다. 386세대, 전대협, 운동권 출신에 대한 세간의 비판에 가장 귀가 따가울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다. ‘너무 빨리 컸다’든가 ‘지름길로 왔다’는 등의 지적도 부담스럽다. 전대협 세대는 다른 학생운동 세대와는 분명한 차별성을 갖고 있다. 반미·자주화를 공개적으로 표방한 첫 세대로서 대중운동을 가장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점이 그렇다. 이들은 6월항쟁을 통해 ‘승리의 체험’을 맛보았고, 노무현 캠프에 집단적으로 참여한 2002년 대선을 통해 두 번째 정치적 승리까지 ‘쟁취’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반미에서 주사(주체사상)까지 운동권 선배세대조차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강한 이념과 노선으로 대중적 성공을 거둔 이들의 힘은 미스터리하기까지 하다. 이전 세대와 확연히 다른 이런 점 때문에 기성세대의 눈에는 불안하게 보일 법도 한 것이다. 새로운 리더십에는 당연히 새로운 세대의 꿈과 비전이 담겨야 할 것이다. 기성세대의 공감과 신뢰를 얻는 것이 그 다음이다. 물론 꿈이나 비전을 세우는 것보다 그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와 실현 가능성을 확보하는 일이 더 어려울 것이다. 이 점에서 임 의원은 ‘정치 뉴리더’에 부합하는 호조건을 갖췄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꿈과 비전은 젊은 세대의 그것을 가장 잘 대표하고 있고, 이를 현실정치에서 구현할 수 있는 위치에 가장 근접해 있기 때문이다. 임 의원은 당내 재선의원 그룹의 막내 축에 들지만 내년 초 전당대회를 통해 지도부 입성을 ‘권유’받는 입장이다. 다음 개각에서 통일부 장관 물망에 오르기도 한다. 그는 입각에 대해서는 “기자들이 재미삼아 쓴 것 같다”며 “지금은 파격인사를 할 때가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전대와 관련해서는 당 쇄신을 위해 “재선그룹의 집단 출마도 한 방법”이라며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그가 학생운동가로서 워낙 강한 이미지를 갖고 있으면서도 현실정치에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었던 것은 최대한 몸을 낮추면서 국민과 기성정치권의 신뢰를 얻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해왔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가 정치인으로서 가장 놓치지 않으려는 덕목이 균형감각과 책임감이라고 한다. 그의 말대로 전대협이나 그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왜곡·과장된 측면도 있다. 생각보다 튀지도 않고 생긴 것도 가까이서 보면 ‘순하기’ 이를 데 없다. 가장 투쟁적인 모습을 보인 때가 이라크 파병 결정 때 단식에 들어간 것 정도다. 그는 “원래 나는 단식 반대주의자”라며 “앞으로 단식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임 의원은 자신의 이념적 지향을 ‘중도개혁’으로 설정하고 있다. 우파는 물론 좌파진영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우파는 과거지향적인 점에서, 좌파는 전세계적으로 주된 흐름을 역행하는 점에서 ‘반대를 조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국민은 중도세력에 훨씬 안정감을 느끼고 있는 만큼 이를 규합해 ‘미래를 조직’해야 한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지금은 되돌아갈 수 없게 됐지만 임 의원의 원래 꿈은 과학자였다. 운동권에 입문한 것도 대학 2학년 때 6월항쟁에 참여하면서부터다. 그 전까지는 순진한 공학도였고, 성격도 내성적인 편이었다. 고교 때는 학내 활동 경력도 없다. “깡촌 출신인 데다 고등학교에 갈 무렵 1년 반 동안 신장염을 심하게 앓아 주눅이 들어 있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내성적인 공학도에서 ‘구국의 강철대오’를 지휘하는 학생운동 지도자가 되는 과정은 그래서 소설처럼 극적이기까지 하다. 재수해서 한양대 무기재료공학과에 들어간 때가 1986년이었다. 김세진·이재호 분신사건 등을 겪으며 심한 심적 혼란을 겪기는 했지만 과학자의 꿈을 접지는 않았다. 자신도 뭔가 ‘참여’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소리개벽’이라는 풍물패에 가입하면서 학생운동에 발을 걸쳤지만 언젠가는 다시 전공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정치 참여로 ‘통일’의 꿈 대변 1987년부터 1989년까지 대학가는 집회·시위가 일상이 돼버렸다. 자연히 풍물패의 역할이 커지고 학생들에게 노출 빈도가 많아졌다. 이 와중에 그는 학생들의 눈에 띄었고, 1988년 여름 86학번 활동가 총회에서 총학생회장 후보로 나서라는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된다. 당시 총학생회장 출마는 곧 구속을 의미했다. 그는 이 제의를 수락하면서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들어섰다. 한양대 총학생회장, 서총련 의장, 전대협 의장에 연거푸 올라 1989년 12월 검거되기까지 약 1년 동안 현란한 활동을 펼쳤다. 5년형을 받고 3년 6개월 복역한 뒤 1993년 5월 출소한 그는 청년정보문화센터·한국청년단체연합회(KYC) 등을 결성, 전대협 세대 중심의 청년운동을 전개했다. 정치에 참여한 것도 전대협 세대의 집단적인 결정에 의해서였다. 그를 비롯한 전대협 1~3기 지도부 5명은 2000년 16대 총선에 새천년민주당 간판으로 출전했다. 그는 이 가운데 유일한 당선자가 됐다. 17대 국회에는 18명이 도전해 12명의 당선자를 냈다. 임 의원이 대변해야 할 이들의 꿈은 ‘통일’이다. 전대협 세대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부분이 민주화 이후의 통일문제이기도 했다. 한국사회의 앞날에 대한 그의 전망은 낙관적이다. 그는 “우리 사회는 고도로 민주화한 사회라고 본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지역갈등이라든가 과도한 권력투쟁이 사회 주요 기관들까지 정치화하게 만드는 점 등 몇 가지 이분법적 갈등이 민주주의의 질을 떨어뜨리는 면이 있지만 모든 것이 빠른 속도로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다는 게 그의 시각이다. 임 의원의 꿈의 출발점이 여기에 있다. “거기에 우리가 한 가지 더 이루고 싶은 것은 민족경제공동체다. 남북문제를 풀어야 우리가 선진국이 된다고 본다. 반북·반공 논리로는 선진국이 될 수 없다는 게 나의 확고한 생각이다. 이미 우리의 관심은 북을 어떻게 경영할 것이냐는 데까지 와 있다. 되도록 큰 부담 없이 북쪽을 자립할 수 있게 하고 개혁·개방할 수 있게 해서 경제공동체를 만들고, 그래서 우리가 대륙으로 북방경제시대를 열고… 관심이 그렇게 와 있는데 계속 우리한테 과거의 것을 물어본다. 물어보고, 또 물어보고….” [인터뷰]임종석 열린우리당 의원 “국민 신뢰얻는 노력부터 해야” 과거 전력 때문에 늘 두 가지 상충되는 주문을 받는 것 같다. ‘성숙한 모습을 보여라’ ‘과거의 소신을 지켜라’ 가운데 어디에 더 비중을 두는가. “시민단체나 재야운동을 하는 분들의 몫이 있고 정치인의 책임이 따로 있다. 정치에 와 있는 이상 정치인으로서 책임감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가치나 철학 등에서는 균형감각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바깥에 있는 분들에게는 늘 모자라고 때로는 변절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일시적으로는 여론의 뭇매를 맞을 때도 있다. 지금까지 과격하다고 욕먹어 본 경험은 없는 것 같다. ‘너 변했다’, 이런 쪽이었던 같다.” 이수일 전 국정원 차장 자살사건 뒤 김대중 전 대통령이 ‘6·25를 통일전쟁이라고 한 사람에게는 관용을 베풀고 공산당을 잡은 사람들은 구속시켰다’는 취지의 말을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지난번 맥아더 동상 철거 논란이나 강정구 교수 발언 파문 때 당이나 정부가 조금 더 높은 목소리로 더 분명하게 정리해서 얘기를 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되도록이면 그 얘기는 다른 사람들보다 우리가 하는 게 좋았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그렇게 하려고 의견조율을 하다가 시기를 놓쳤다. 그때 기자들이 물어서 나는 ‘완전히 정신 나간 소리’라고 했다. 문제는 정신 나간 사람의 인권은 어떻게 할 것이냐지…. 전체적으로는 얘기를 안 한 것은 아니지만 당이나 정부에서 그런 문제에 대해 좀더 단호하고 분명하지 못했던 것이 케케묵은 논란을 초래한 빌미가 됐다. 지금 와서 반공 논란이 일어나는 것은 이성적이거나 지성에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한국사회의 특수성이 있기 때문에 분명하게 얘기해줄 필요가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의 지적에 공감한다는 말인가. “그렇다. 나도 두 분 국정원장 구속에 대해 정치권에 들어와서 제일 독한 소리를 했다. 검찰에 대해 ‘편협하고 편파적이고 이중적인 싸구려 정치다’라고 했다. 특히나 두산그룹 일가에 대한 불구속 방침 직후에 이 건으로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고 정치적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최근 중도세력의 결집을 주장하는 이유가 뭔가. “열린우리당의 목표가 혁신정당이라든가 선명한 개혁정당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완전히 번지수가 틀린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다시 국민의 신임을 받아서 집권할 수 있는 정당으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 중도세력의 통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단순히 민주당과 합하자, 그렇게 해서는 문제가 안 풀린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요구되는 지도자의 덕목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남북문제에 대한 미래지향적 비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는 성장잠재력 확충과 함께 양극화돼가는 사회에 대한 따뜻한 철학이다. 지속가능한 성장이라 하면 성장잠재력 확충과 함께 양극화 해소인데, 이런 문제들에 대해 한나라당 주도세력은 과거지향적이거나 편향된 시각을 갖고 있다고 본다. 진보운동, 소위 좌파운동하는 분들도 전 세계적인 주도흐름에 대해서 반대를 조직하고 있는 것이지 현실에 닥쳐 있는 국가적인 문제, 국민들의 필요, 이런 것을 책임지고 국정운영을 해갈 수 있는 준비는 안 돼 있다. 그래서 중도세력의 대통합을 통해서 다시 한 번 국민의 신뢰를 얻는 노력을 열린우리당이 하자는 것이다.”
- 뉴리더
레이디경향(총 1 건 검색)
- 탄핵안 막으려 온몸 던진 최연소 국회의원 임종석 & 김소희 부부
- 2004. 04. 01 화제
- “외동딸 동아가 준 결혼 기념 선물은 탄핵의 몸싸움에서도 잃어버리지 않았어요” 국회의원 임종석의 인터뷰다. 그 역시 16대 국회의원이기에 ‘최악의 국회’라는 오명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그 오명의 마지막을 비명으로 장식하게 한 국회에서 비통한 그의 모습을 보았기에, 그후 수많은 여론조사에서 그의 선택이 옳았다는 판정을 받았기에 그를 옹호한다. 이 기사의 시작은 여론조사에 의지해 지지도가 많은 사람들의 입장으로 작성된 것이다. 경도된 기사인 만큼 뜻과 의를 달리하는 분이 읽으면 역겨울 수 있으니 일독마저 삼가시길. 이후 임종석과 김소희란 평등부부의 이야기를 그들의 육성으로 담았다. 격전이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이전투구! 막는 놈이나 들어가겠다는 놈이나 다 그렇고 그렇다고 치부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뭔가 ‘게임’이 안 되는 싸움은 시작부터가 심상치 않다. 후닥닥, 단 몇 분을 버티는 게 고작인 시시한 싸움. 하나씩 들려나가는 군상들, 무에 그리 서럽다고 목놓아 울어대는지…. 그 떨림은 저미는 아픔이 되고 풀어헤쳐진 그들의 옷매무새는 씁쓸한 현실이 되어 보는 이로 하여간 설움을 복받치게 한다. 승자에 대한 축하는 그만! 방송 카메라를 향해 흔쾌히 만세를 외치던 모습으로 가늠할 뿐. 패자에 대한 안타까움 역시 이제 그만! 아픔을 내내 읊조리기엔 국민이란 사람들이 처절히 불쌍할 터이니. 우리가 국민이라며 70%가 되어, 80%로 치달으면서 민심의 향배를 보라 해도 어차피 힘없는 백성의 탄식인 것을…. 잊자, 잊자! 그러나 그날의 잔상은 아직도 머리를 휘감는다. 한 정치인이 운다. 까무잡잡 미소 띤 얼굴하고 말쑥하게 정장을 차려 입은 그지만 단 몇 분 사이로, 처절한 용틀임을 눈물로 쏟아내는 상처 입은 표범이 된다. 그치지 않고 데굴데굴 구르듯 탈진해가는 그의 모습은 그후에도 수차례 우리의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불이 되고 물이 되었다. 우리의 심장을 벌렁이게 한다. 분명 누군 옳을 것이고 누군 그를 것이다. 세상사처럼 누군 힘이 있었으면 누군 힘이 없었을 게다. 멀쩡한 심장이 벌렁이듯 춤을 추는 것은 옳긴 옳은데 힘이 없는 탓이다. 임종석(38). 그는 국회의원이다. 광화문 거리에 모인 인파가 ‘근조’라 외쳐대는 대한민국 제16대 최연소 국회의원. 80년대와 90년대 초반의 격랑 속에 ‘전대협 의장’이란 이름으로 국민들의 뇌리에 남아 있는 그가 바로 그랬다. 탄식하고 통곡하고 들려나갔으며, 탈진하도록 비분강개했다. 정치적인 편린 속에 투영된 모습! 혹자는 작위적이라고 저건 쇼라고 힐난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연기를 너무 잘한다. 아마추어를 프로라 평가절상하는 것도 잘못이고 꿍꿍이다. 결국 비통함을 풀어내는 장면은, 그의 심정이고 생활이며 뜻이었으니 가능한 모습이었을 게다. 하여간 그날의 정치 다큐멘터리는 그랬다. 어차피 16대는 종언이다. 격정도 종언! 격전은 종식! 이미테이션이 다이아몬드보다 아름답다 결혼식 기념으로 외동딸이 전한 커플링 다시 현실로 온다. 임종석 의원과 그의 아내 김소희씨를 마주했다. 임 의원은 조금은 피곤한 모습이다. 아직 그때의 곤혹스러움을 기억하고 있는 듯. 그의 아내는 조용한 낯빛으로 목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럽다. 격한 감정보다는 조용히 그날을 돌아보기로 했다. 임 의원은 갑자기 새끼손가락에 헐겁게 걸려 있는 은빛 반지를 빼 보였다. “동아가 결혼기념일이라고 선물한 거예요.(미소) 3월 9일이었으니까 탄핵안 가결이 있기 며칠 전이었죠. 그날 허리띠까지 어디로 달아났나 모를 지경이었어요. 혹시 이것마저 달아나지 않을까, 바지 주머니에 넣어두어 그나마 잃어버리지 않았어요. 그 일이 있고 나서 동아가 그랬대요. ‘아빠, 싸우는 곳에 가지 마!’ 뭐라 할 말이 있어야죠. 그래도 반지는 안 잃어버렸다고 하니까 좋아하더라고요. 친구들에게 그런대요. 아빠 허리끈도 잃어버렸지만 자기가 선물로 준 반지는 안 잃어버렸다고요.” 동아는 그의 외동딸이다. 이제 초등학교 1학년. 동아가 선물한 헐거운 반지는 약지에 들어가기는 버겁고 새끼 손가락에 끼는 남는 크기라 평상시 끼고 다니기엔 불편하기 그지없을 터. 하지만 그의 말처럼한동안 벗어두고 다니지는 못할 것 같은 분위기다. 결혼반지마저 어디 둔지 모르는 그지만 제대로 된 숙제를 하나 안은 셈이다. “동아가 친구들하고 문방구에 간다고 해서 2천원을 줬어요. 그게 아마 2월 20일쯤이었을 거예요. 그런데 갔다 와서 뭘 샀는지 얘기를 하지 않더라구요. 자기 것이 아니라는 것밖에요. 수다쟁이인 동아가 열흘 넘게 용케도 참아내 3월 9일 아침에 선물로 내놓은 거죠.” 가만히 보니 의원의 아내에게도 은빛 반지는 소담스레 손가락을 감싸고 있다. 동아가 준비한 것은 커플링이었다. 동아 칭찬에 입이 마르지 않을 즈음, 샛노란 그러나 개구쟁이답게 조금은 땟물이 흐르는 초등학교 체육복을 입고 그들의 딸 동아가 나타난다. 동아를 위해 가족사진을 먼저 찍었다. 역시 초등학교 1학년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필름 한 롤이 돌아가고 나서야 그나마 만족스런 가족의 모습을 담았다. 동아는 친구의 손을 잡고 뛰어나간다. 얘기는 다시 이어진다. 예의 조용한 아내와 의원인 남편의 삶은 내조나 외조하고는 거리가 먼 듯하다. “그 일이 있은 후 집에 돌아온 동아 아빠는 피곤하다면 잠자리에 들었어요. 몇 가지 인터넷으로 체크할 것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대신해주기로 하고 자게 놔두었지요. 제가 하는 내조가 그래요. 솔직히 잘 못하나 봐요. 그 다음날 몇몇 동료 의원의 사모님들과 통화할 일이 있었는데, 그분들은 안마도 해드리고 손도 따드리고 했대요. 뭘 해주었나 묻기에 그냥 자게 놔두었다고 했더니 야단들이세요. 그러면 그날의 피로가 안 풀린다고요. 저도 아니다 싶어 어린이도서관 엄마들에게 마사지하는 법을 배웠죠. 맨소래담 로션을 이용해서 하는 것인데, 어렵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아직 로션을 못 구해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어요.” 평등부부의 평등 세상 만들기 서로의 할 일 인정하다 아내 김소희씨는 솔직히 고백한다. 살림 잘 못한다고. 그녀 역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도 환경운동 쪽에서는 나름대로 지명도를 가진 ‘환경지킴이’였다. 93년부터 환경운동연합에서 발간하는 월간 「환경운동」의 기자로 활동했다. 또한 99년 5월, 자신이 그간 취재해온 지식을 바탕으로 지구 생태 이야기를 다룬 책 「생명시대」를 펴내기도 했다. “한번은 시어머니가 와 계신데, 동아가 와서 배고프다며 밥을 녹여달라는 거예요. 그 말을 들은 시어머니의 눈이 동그래지셨죠. 밥을 미리 해서 냉동실에 보관했다가 녹여 데우면 갓 한 밥 같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먹은 것인데, 시어머니는 혀를 끌끌 차며 ‘네 남편도 그렇게 주냐?’고 정색을 하셨죠. 어머니 입장에서는 당연한 꾸중이었고요.” 결혼한 지 8년이면 살림을 잘하진 못해도 제법 시늉은 할 만한데, 아예 그럴 생각이 없는 것처럼도 보였다. 한편으로는 임종석 의원이 무던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평등부부로 상대의 삶을 존중하는 가운데 나온 자연스런 생활 방식이란 느낌을 받았다. “결혼할 때 동아 아빠가 이런 말을 했어요. ‘임종석에게는 임종석의 할 일이 있고, 김소희는 김소희의 길이 있으니 그 길을 가라’고요.” 그 말대로 김소희씨는 지금 어린이도서관을 운영하면서 지역 어머니들과 아이들을 위한 놀이방과 공부방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내 일을 하다 보니, 사실 정치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 처음에는 지구당 분들에게 핀잔도 많이 들었죠. 동아 아빠가 참석하지 못하는 행사에 내가 대신 나가야 한다고 성화셨어요. 그런데 동아 아빠가 그런 요청을 많이 막아주었어요. 사실, 일부 의원들 같은 경우엔 그분들 아내가 출마해도 당선된다는 말을 농담처럼 할 정도로 내조와 외조를 가리지 않고 하시거든요. 하지만 우리 도서관 회원 중엔 제가 국회의원의 아내란 사실을 모르는 분도 있으니까요.” 관습적인 정치인의 행보와 달리 가는 것은 임 의원만이 아닌 듯싶다. 김소희씨 역시 다른 세상 사람처럼 여겨지는 순간이었다. “오늘은 의상이 좀 나은 거예요. 사진 촬영한다고 해서요. 평상시에는 찢어진 청바지도 입고 다녀요.” 정치, 절망의 터널을 떠나 희망으로 외동딸 예쁘게 자라는 모습도 못 봐 그렇다고 정치인의 아내로서의 삶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한번은 택시를 타고 국회 앞을 지나는 데, 택시 기사 왈.“저 안에 누가 사는지 아세요? 개자식들이 살아요. 개 말이에요.” 대답을 어찌 해야 할지 몰라 머쓱해하는 표정을 할 밖에. 그리고 속으로 ‘정말, 내가 개와 같이 사는 건가?’라며 실소가 흘렀다고. 이래서 결혼한다고 했을 때 그런 말을 한지 모르겠단다. “처음 동아 아빠와 결혼한다는 얘기를 사람들에게 했을 때 주변에서 ‘내조하기 힘들겠다’며 걱정을 하더라고요. 혹시 동아 아빠가 정치라도 하게 된다면 정치인의 아내로서 할 일이 만만찮을 거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러나 이들의 콩깍지를 벗겨내기엔 역부족인 충고였다. 92년 원주교도소에 복역할 때다. 수인(囚人)에게 편지처럼 반가운 것이 있을까. 임종석 의원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3년 6개월 형을 언도받고 ‘조신하게’ 수형 생활을 하고 있을 때, 낯선 여자 후배의 편지를 받았다. 좋은 벗이 생긴 것이다. 학생운동의 방향과 사회에 대한 고민이 담긴 편지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개인적인 관심사로 이어졌다. 이 편지는 임 의원에게는 바깥 세상을 보는 창이었고, 김소희씨에게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경험한 사회의 이질적인 모습에서 오는 불안함을 상쇄시키는 일기와도 같았다. 이듬해 5월, 출소해 만난 이들은 더욱 가까워졌다. 청년정보문화센터를 만든 임 의원은 김소희씨에게 운영위원으로 들어와 같이 일하자고 제안했다. 삶의 코드를 맞춰가던 이들에게는 서울 종로구 청진동 해장국 골목이 단골 데이트 코스가 되었다. 우정이 쌓여 단단해진 사랑은 임 의원의 ‘여보’란 농담마저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드디어 96년 수덕사에 들렀다가 내려오는 길에 임 의원이 “결혼하자”고 프러포즈했고, 같은 해 3월 9일 웨딩마치를 울린 것. 결혼한 이듬해에 두 사람 사이에서 딸 동아가 태어났다. 동아는 부부에게 새로움을 선사했다. 동아가 네 살 되던 해 경북 봉화의 농촌시인 전우익씨를 찾아간 적이 있다. MBC-TV ‘느낌표’ 열번째 선정 도서(꼭 이래야만 설명이 가능하니)인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라는 책을 지었고, 나무에 푹 빠져 나무만큼 정직하게 살고 있는 분이다. 그분이 던진 “소희야, 네 딸은 햇빛을 좋아하는구나”란 말 한마디에 충격을 받았다고. 그저 다른 아이보다 영특한 것 아닌가, 라는 생각만 해오던 터라 미안하기까지 했다고. 부부는 당장 이사를 결심했고, 모든 것을 감수하고 넓은 창과 마당 같은 베란다를 갖춘 집으로 이사했다고. 부부는 콘크리트 베란다를 채소밭·꽃밭으로 만들었다. 시골에서 자란 임 의원이 두 팔을 걷어붙이고 화단을 만들었다. 변화는 그런 것인가 보다. 도회에 살고 있는 어린 동아는 식물의 성장이나 자연의 변화에 대해 깨우쳐갔고, 식물들과 자신의 관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화초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했고 씨 뿌리고 물 주고 자기의 간식을 나눠주면서 꽃들과 얘기를 나눴다. 그러나 정치인 임종석이 되고 나서는 여러 가지를 포기해야 했다. 햇빛을 좋아하는 동아가 커 가는 재미를 모르는 아빠가 된 것이 가장 아쉽다고. 서로 알지 못하면 같이 있는 시간이 버거울 수 있다. 이제 아빠 임종석은 외동딸 동아와 단 30분을 놀기에도 힘에 부치고 따분해진 아빠가 돼버린 것. 결혼 초에 아침밥도 차리고, 설거지도 하던 임 의원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기가 쉽지 않다. 김치와 돼지고기를 비법대로 주물러 찌개를 끓이는 모습도 아련하다. 지역구 행사에 가면 몇 순배를 돌도록 잔술을 말술로 받아마셔야 하고, 집이라고 들어오면 긴장했던 밖에서의 조아림이 갑갑했든 지, 그냥 정신을 놓고 잠에 빠져드는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세태에 찌들거나 현실에 야합하는 수는 배우는 머리가 없는 듯. 어릴 적 두 손 가득한 아카시아 잎사귀를 어린 종석의 머리에 뿌리며 ‘산화공덕’의 축원으로 “훌륭한 사람 돼라” 명하던 아버지, “우리 종석인 코도 흘리지 않는다”며 끝없는 애정을 보여주신 어머니, 젖은 수건으로 곤한 잠에 빠진 남편의 시름을 씻어 내리는 아내와 아빠처럼 사람 사랑하는 것을 배우며 크는 동아의 공덕이 그를 지키는 것일 수도… 나아가 정체성을 잃어가는 386의 ‘불멸의 모범’이란 상징성이 그를 지켜내는 것일 수도 있다. 그에게도 선거는 다가온다. 글 / 강석봉 기자 사진 / 황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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