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2,364 건 검색)
- 트럼프 철강 관세 예고에 분주한 세계…“부당한 조처에 대응할 것”
- 2025. 02. 10 19:50국제
- 철강 제품. 기사와 직접적 관련 없는 사진. 로이터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이 10일(현지시간)부터 모든 철강과 알루미늄 수입품에 관세 부과하겠다고 예고하자 유럽 등 주요 교역국도 대응을 예고했다....
- 주한 중국대사, ‘한국 선거 개입설’ 주장에 “근거없는 연계 반대한다”
- 2025. 02. 10 17:56정치
- ... 중국대사(왼쪽)로부터 신임장을 전달받은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다이빙 주한 중국대사가 10일 최근 윤석열 대통령과 극우 유튜버들이 제기하는 ‘중국의 한국 선거 개입설’을...
- [사설]미국발 ‘대북·주한미군 정책 변화’ 신호, 우리도 대비해야
- 2025. 01. 26 18:15오피니언
- ... 25일 “귀중한 미군을 아껴야 한다”며 해외에 배치된 미군 병력의 축소를 시사했다. 한국의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증액 요구와 맞물려 현재 2만8500명인 주한미군 규모에도 변화를 주려는 것인지...
- 미 부통령 “귀중한 미군 아껴야”···주한미군 감축 논의되나
- 2025. 01. 26 11:27국제
- ... 주둔하고 있는 주한미군 규모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주한미군 규모를 약 4만명으로 부풀려 말하며 한국의 방위비 분담금 인상 필요성과 함께 주한미군 축소...
스포츠경향(총 427 건 검색)
- 키움 회식에 나타난 빅리거···반가운 푸이그와 마주한 이정후
- 2025. 02. 02 18:43 야구
- 샌프란시스코 이정후(오른쪽)가 1일 미국 애리조나에서 스프링캠프 중인 키움 선수단의 회식 자리에 방문해 야시엘 푸이그(왼쪽)와 한 테이블에서 식사하다 기념촬영 하고 있다. 키움 히어로즈 제공 메이저리거 이정후(26·샌프란시스코)가 키움 선수단 회식에 깜짝 등장했다. 미국 애리조나주 메사에서 스프링캠프를 진행 중인 키움 선수단은 지난 1일 숙소 인근 한식당에서 회식을 열었다. 다음날이 휴식이라 부담 없이 식사를 즐기던 선수들 앞에 이정후가 나타났다. 이정후는 지난해 샌프란시스코와 6년 총액 1억1300만 달러(약 1650억원) 계약을 맺고 메이저리거가 된, 키움 후배들에게는 진짜 ‘영웅’이다. 빅리그에 데뷔한 지난 시즌 수비 중 어깨를 다쳐 수술받으며 일찍 시즌을 마친 이정후는 올시즌 제대로 보여주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이정후의 소속 팀 샌프란시스코의 스프링캠프지도 애리조나의 스코츠데일이다. 메이저리그의 캠프는 아직 본격 시작되지 않았고 이정후는 개인 훈련으로 팀 훈련을 준비하고 있다. 이정후는 키움 구단을 통해 “며칠 전 몇몇 선수들을 집으로 초대해 식사했지만, 선수단 전체를 만난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정말 반가웠고 뜻깊었다. 이번 시즌 키움의 선전을 응원한다”고 ‘전 동료들’과 만난 소감을 전했다.
- “기울어진 운동장, 불공정의 극치···그래도 난 끝까지 완주한다!” 허정무의 단단한 각오
- 2025. 01. 03 16:28 축구
- 제55대 대한축구협회장 선거에 출마한 허정무 후보가 3일 서울 종로구 축구회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55대 대한축구협회 회장 선거에 출마한 허정무 전 국가대표팀 감독이 불공정·불합리한 절차 등을 이유로 낸 ‘회장선거 금지 가처분 신청’이 기각되더라도 끝까지 완주하겠다고 밝혔다. 허 후보는 3일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그동안의 선거 운동 진행 과정과 공약 등을 발표했다. 오는 8일 열리는 이번 선거에는 정몽규 현 대한축구협회장, 신문선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스포츠기록분석학과 초빙교수, 허정무 전 감독(이하 기호순)이 출마했다. 지난해 11월25일 출마를 공식 선언한 허 후보는 후보자 등록 후인 지난달 30일 ‘회장선거 금지 가처분 신청’을 서울중앙지법에 냈다. 선거가 온라인 방식 없이 오프라인 직접 투표로만 이뤄져 동계 전지훈련에 참가하는 프로축구 지도자·선수들이 선거에서 사실상 배제되는 데다 ‘개인정보 제공 동의서 미제출을 이유’로 규정(최대 194명)보다 21명이 적은 선거인단을 구성하는 등 선거 관리가 불합리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게 허 후보 측이 가처분 신청을 낸 이유였다. 제55대 대한축구협회장 선거에 출마한 허정무 후보가 3일 서울 종로구 축구회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허 후보는 이날 기자회견에서도 “처음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걸 알고 시작했지만, 축구협회와 선거운영위원회는 예상을 뛰어넘는 불공정의 극치”라고 주장했다. 가처분 신청을 한 데 대해서는 “축구 팬들이나 축구인들이 많은 것을 모르고 있어 이를 알리고, 이번에는 어떻게든 치르더라도 다음부터는 투명하고 공정한 선거가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다만 “언론 등에서 많은 관심을 가져줘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본다”면서 “(가처분 신청이) 제가 투표를 배제하거나 회피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축구하다가 심판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혹은 운동장 상태가 나쁘다고 중단하는 사례는 없다. 끝까지 완주하겠다”고 밝혔다. 허 후보는 후보 단일화와 관련한 질문에도 “완주에는 변함이 없다”고 재차 강조한 뒤 “후보 단일화는 항상 열어놓고 있다. (신문선 후보와) 한국 축구를 위한 마음이 통한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후보자 정책토론회도 제안했다. 출마 선언에서 투명, 공정, 육성, 균형, 동행을 실현하겠다고 밝혔던 허 후보는 지도자 선발 시스템 개선과 대표팀 경쟁력 강화를 통한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상위 10위권 진입, 심판연맹 신설 및 처우개선, 해외 거점을 통해 유소년 해외 진출 지원, 여자축구 활성화를 위해 도시별 순회대회 등 대회 확대, 여자 선수 연봉 제한, 2031년 아시안컵 남북한 공동 유치 등 축구 외교력 및 국제협력 강화 등의 공약을 제시했다. 제55대 대한축구협회장 선거에 출마한 허정무 후보가 3일 서울 종로구 축구회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 ‘렛츠고 파크골프’ 박정아X조주한, 팀원과 찰떡 호흡 자랑
- 2024. 12. 20 14:04 스포츠종합
- OBS ‘렛츠고 파크골프’ 캡처 배우 박정아, 가수 조주한이 나날이 성장하는 골프 실력을 입증했다. 박정아와 조주한은 지난 19일 방송이 된 OBS ‘렛츠고 파크골프’ 10회에서 게스트 개그맨 신윤승, 조수연과 함께 다채로운 매력을 발산하며 안방극장을 사로잡았다. 방송에서 박정아는 송민경과 여여 팀을, 조주한은 김경민과 남남 팀을 이루어 다양한 골프 게임을 진행했다. 특히 박정아는 우승 상품으로 문경 특산물이 걸려 있다는 소식에 의욕을 불태우며 열정적인 플레이를 예고했다. 1라운드에서 조주한은 첫 시작에 OB를 만들어버린 김경민의 공을 보고 고함을 질러 폭소를 자아냈다. 그는 특이한 자세로 볼을 치려고 하는 김경민과 티격태격하다가도, 홀인을 하자 격하게 축하하며 합동 삐끼삐끼 춤을 추는 등 남남 케미를 제대로 보여줬다. 박정아는 남연아 프로의 게임 설명 도중, 쥬얼리의 히트곡 ‘베이비 원모어 타임’ 안무를 선보이며 녹슬지 않는 춤 실력으로 폭발적인 반응을 끌어냈다. 이어 그녀는 얼굴을 맞대고 공을 옮기는 게임에서 송민경과 완벽한 호흡을 뽐내면서 깔끔하게 공을 홀인 시키며 멀리건을 따냈다. 조주한은 ‘힘주한’답게 뛰어난 타격감으로 스윙을 휘둘렀으나 OB를 만들었다. 이를 본 박정아가 “주한이가 OB를 안 하면 말이 안 되지”라고 말하자 “왜 이렇게 많이 나가지?”라는 그의 읊조림이 모두를 웃게 했다. 박정아는 4라운드 스피드 런 게임에 마지막 홀인 후 파트너와 취해야 하는 포즈로 ‘이마 뽀뽀’를 뽑아 이목을 집중시켰다. 고가의 프로필 촬영권을 두고 벌어진 대결에서 박정아는 열정적으로 샷을 쳤고, 마지막에 송민경에게 이마 뽀뽀를 해 화룡점정을 찍었다. 박정아와 조주한은 재치 있는 입담과 남다른 리액션으로 시청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방송마다 다채로운 매력을 가감 없이 뿜어내는 두 사람은 매주 목요일 오후 9시 방송되는 OBS ‘렛츠고 파크골프’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케이시, 신곡 ‘녹지않을게’ 라이브 공개···브루노 마스 오마주한 조영수와 ‘완벽 케미’
- 2024. 12. 19 21:56 연예
- 넥스타엔터테인먼트 제공 가수 케이시(Kassy)가 조영수 작곡가와 유쾌한 필승 조합을 선보였다. 케이시는 지난 18일 유튜브 채널을 통해 조영수 작곡가와 함께한 신곡 ‘녹지않을게’ 라이브 영상을 공개했다. 영상에는 팝가수 브루노 마스를 오마주한 조영수 작곡가와 케이시의 흐뭇한 투샷이 담겼다. 케이시는 어느 때보다 달콤한 보이스로 신곡 ‘녹지않을게’가 선사하는 행복한 분위기를 끌어올렸고, 조영수의 내공이 느껴지는 피아노 연주는 겨울의 몽글몽글한 추억을 생각나게 했다. 브루노 마스의 힙한 비주얼을 재현한 조영수 작곡가의 유쾌한 매력과 케이시의 흔들림 없는 라이브 퍼포먼스가 시너지를 이루며 리스너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넥스타엔터테인먼트 제공 영상은 기존 음원과는 색다른 감동을 선사하며, 케이시와 조영수의 음악적 시너지를 응원하는 리스너들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누리꾼들은 댓글로 “케이시X조영수는 말해 뭐 해”, “최고의 조합, 믿고 듣는 케미”, “한국의 브루노 마스는 조영수” 등의 반응을 보내오고 있다. ‘녹지않을게’는 케이시의 데뷔 첫 겨울 발라드로, 아름답게 빚어낸 가사와 로맨틱한 사운드가 오래도록 롱런할 케이시표 캐럴을 예고하고 있다. 지난 8일 발매 직후 온라인 음원사이트 멜론 HOT100(발매 30일 기준)에 초고속으로 진입한 후 기발매곡 ‘그때가 좋았어’와 함께 꾸준하게 동반 순위 상승 중이다. 케이시는 시네마∙녹음실∙스튜디오 버전의 라이브 클립, 야외 버스킹 등을 통해 신곡 ‘녹지않을게’를 다채롭게 들려주고 있으며, 화이트 크리스마스와 따스한 연말을 기다리는 수많은 음악팬들에게 진한 설렘을 선물하고 있다.
주간경향(총 30 건 검색)
- [주한 미 평화봉사단 이야기](6)40여 년 만에 찾은 한국 “나 일하던 곳 어디 갔지?”(2023. 11. 16 07:00)
- 2023. 11. 16 07:00 국제
- 주한 미 평화봉사단 마지막 단장 제임스 메이어씨가 미국의 해외원조 총괄 기관인 ACTION에 보낸 제안서 표지 /제임스 메이어 단장 제공 1961년 존 F. 케네디가 창설한 미 평화봉사단(The Peace Corps)은 약 6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미국 최고의 봉사활동기구로 건재하다. 평화봉사단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봉사단원을 훈련해 해외로 파견 중이다. 1961년부터 2023년 5월까지 누적한 기록을 살펴보면 약 24만명의 봉사단원을 143개국에 파견했다. 코로나19 여파로 2020년 이후 평화봉사단원의 해외 파견 규모가 감소했지만 지금도 현재 53개국에서 1400여명의 봉사단원이 활동하고 있다. 내년에 다시 5000여명으로 단원 수를 늘릴 예정이다. 한때 평화봉사단을 초청했다가 프로그램을 종료한 국가는 80개국에 이른다. 대한민국 역시 80개국 중 하나다. 평화봉사단 프로그램을 종료한 사유는 국가마다 제각각이지만, 한국의 경우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인해 더 이상 기술원조를 필요로 하지 않는 국가가 됐기 때문이다. 미 평화봉사단 본부도 아시아의 신흥공업국 중 하나로 1970년대 후반 중진국에 들어선 한국에 대한 지원은 시급한 사안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한국보다 경제적으로 더 낙후한 국가를 지원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결정한 것이다. 이에 따라 1978년 평화봉사단 본부는 한국에서 점진적으로 평화봉사단을 철수하기로 했다. 완전 철수 시기는 1982년을 목표로 했다. 15년간 비약적 발전…1981년 9월 공식 철수 1981년 1월 출범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행정부의 해외 원조 긴축 결정과 맞물려 주한 미 평화봉사단은 1982년이 아닌 1981년 9월 공식 종료됐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을 파견했던 1966년부터 1981년까지의 15년간 한국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급속한 경제발전에 따른 산업화와 도시화로 한국의 모습은 나날이 달라지고 있었다. 1966년에 한국에 파견돼 봉사활동을 했던 단원들의 경험과 1980년에 한국에 파견돼 봉사활동을 했던 단원들의 경험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초창기 봉사단원들이 재래식 화장실에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치고, 길을 오가는 소달구지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면 1970년대 후반에 파견된 봉사단원들은 서울 시내에서 지하철을 타고 다니고, 트윈폴리오나 양희은의 포크송을 들으러 생맥줏집에 드나들었다.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는 고속버스를 타고 먼 지방으로 여행을 갈 수도 있었다.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1960년대 중반의 한국과 1970년대 후반의 한국은 큰 차이가 있었다. 2023 주한 미 평화봉사단 재방한단 행사에 참여한 제임스 메이어 단장 /서나래 제공 그럼에도 마지막 주한 미 평화봉사단 단장으로 파견된 제임스 메이어(James E. H. Mayer)는 평화봉사단 본부와 견해를 달리했다. 아직까지 평화봉사단이 한국의 농촌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으며, 한국에서 계획했던 사업의 목표 달성을 위해서라도 그는 평화봉사단이 좀더 남아 있기를 바랐다. 그나마 한국에서 가장 번화한 서울은 선진국 도시의 외양을 갖춘 듯했지만, 농어촌의 사회기반 시설은 여전히 낙후돼 있었다. 메이어 단장은 도농격차를 줄이려면 공중보건, 특히 결핵과 같은 감염병 예방과 모자보건 정책에 더 많은 인력을 투입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50쪽에 달하는 제안서를 작성해서 미국의 해외 원조기관을 총괄하는 기관인 액션(ACTION)으로 발송했다. 그 제안서를 통해 본부의 결정을 번복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본부의 입장은 단호했다. 1981년 9월 텅 빈 주한 미 평화봉사단 서울사무실을 끝으로 한국에 남아 있던 평화봉사단의 물리적 공간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추억 어린 교육회관 ‘향수병에 특효약’ 1966년 9월부터 1981년 9월까지 주한 미 평화봉사단은 서울 종로구 신문로1가에 있던 대한교육연합회 회관 7층 전체를 서울사무실로 사용했다. 당시 사람들은 1966년 준공된 이 건물을 교육회관이라고 불렀다. 교육회관은 새문안교회에서 광화문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는데 당시 엘리베이터를 갖춘 10층짜리 건물이 흔치 않아 이 지역의 랜드마크가 됐다. 지금도 이 건물은 정우빌딩이라는 이름으로 건재하고 있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원들에게 교육회관 7층은 특히 추억이 깃든 공간이다. 자신이 근무하는 시골 마을까지 도착하기 어려운 까닭에 단원들은 서울사무소 주소로 국제우편물을 받기도 했다. 교육회관에서는 미국에 있는 가족으로부터 전보나 국제전화를 받을 수도 있었다. 평화봉사단 소식지 ‘여보세요’의 편집부 역시 교육회관 7층에 있었다. 편집부 소속 단원들은 틈나는 대로 그곳에서 투고된 원고를 검토하고 소식지를 만들었다. 서울사무소에 달린 작은 도서실에는 한국에서 구하기 힘든 영미 서적들이 구비돼 있었다. 봉사단원들은 서울에 올라오면 우선 교육회관 7층 도서실에 들러서 필요한 책을 빌렸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 서울사무실이 있었던 구 교육회관 건물 /Daum 로드뷰 캡처 향수병이 걸린 봉사단원들의 발길이 무작정 향하는 곳도 교육회관이었다. 한국의 농어촌 생활이 낯설고 힘들어한 단원들은 종종 향수병에 걸렸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 서울사무실은 이들을 교육회관으로 불러들였다. 덕분에 이곳은 공공연한 ‘만남의 광장’ 임무를 수행했다. 한국 생활의 낯섦을 토로하는 차원을 넘어 심지어 눈물까지 흘리며 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울먹이는 단원들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평화봉사단 서울사무실은 특효약을 처방했다. 그렇다고 뭐 그리 대단한 약제는 아니었다. 밥심으로 살아가는 한국인들처럼 미국인들에게도 향수병을 누그러뜨리는 특효약은 교육회관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있는 미국 대사관 카페테리아에서 식사를 하는 일이었다. 낯설고 불편한 시골에서 근무하느라 고생한 단원들, 미국 음식이 너무나 그리웠던 단원들은 눈물과 콧물을 펑펑 쏟아가며 미 대사관 카페테리아에서 감격의 고향음식을 먹었다. 당시 미국 대사관 카페테리아는 뷔페식이었는데, 고향을 떠나 평화봉사단으로 낯선 땅에 온 20대 청춘들은 시쳇말로 배가 터질 때까지 빵과 수프와 고기를 먹었다. 미 대사관 직원들은 허겁지겁 식사하는 젊은 평화봉사단원들을 흐뭇한 미소로 바라봤다고 한다. 향수병으로 고생하던 단원들도 이곳만 다녀가면 빵빵해진 배와 더불어 서러웠던 기분이 누그러지고 다시 한국에서 일할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마지막 단장인 메이어의 최종 임무는 주한 미 평화봉사단 활동의 깔끔한 마무리였다. 메이어씨는 봉사활동을 지속하고 싶어한 단원들을 네팔, 필리핀 등 다른 나라의 평화봉사단으로 이첩했다. 서울사무실에서 근무하던 한국인 행정직원들도 미국 대사관, 캐나다 대사관, 한미교육위원단 등의 직장으로 이직할 수 있도록 추천서를 작성해줬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이 철수하면서 TESOL(영어교수법) 프로그램과 보건 프로그램은 함께 막을 내렸다. 보건 프로그램의 경우, 주한 미 평화봉사단이 담당하던 인력을 한국인 보건 요원이 이어받았다. 종료된 중등학교 원어민 영어 교사 프로그램은 한동안 재개되지 못하다가 주한 미 평화봉사단이 철수한 지 11년이 지난 1992년, 미국의 풀브라이트 영어 보조 교사 프로그램(the Fulbright Korea English Teaching Assistant Program)이 물려받았다. 한국 경험을 희망하는 미국의 대졸자들은 문화교류의 일환으로 한국의 농어촌 지역 중등학교에서 1년간 영어 보조 교사로 활동할 수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풀브라이트 코리아’라고 알려진 한미교육위원단(Korea-American Educational Commission)에서 관여했다. 미국인 사이에서 풀브라이트 영어 보조 교사 프로그램은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최근에는 한류의 인기 덕분에 경쟁률이 더 치솟는 중이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의 원어민 영어 교사 프로그램을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이 완벽히 대체하면서 평화봉사단은 한국에서 서서히 잊혀갔다. 적어도 2008년까지는 그랬다. 봉사단원들 다시 초청한 유일한 나라 2008년 한국국제교류재단이 한국에서 봉사활동을 수행한 미 평화봉사단 및 가족을 한국으로 초청했다. 원조를 받던 나라가 이제는 선진국이 돼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국가적인 보답 행사에 나선 셈이었다. 평화봉사단이 철수한 80개국 가운데 가장 잘 사는 나라가 한국이며 유일하게 봉사단원을 다시 초청하는 나라가 됐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남다르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 활동에 관여했던 단원이 2000여명에 이르기 때문에 한 번에 봉사단원을 모두 초청할 수는 없다. 한국국제교류재단은 2008년부터 지금까지 순차적으로 한국 방문을 희망하는 봉사단원과 가족을 초청한다. 행사는 매년 10월 일주일에서 열흘간의 일정으로 열린다. 2023년 미국 평화봉사단 재방한 초청 사업 행사가 지난 10월 22일(일)부터 10월 28일(토)까지 7일간 진행됐다. 재방한단으로 한국에 오는 평화봉사단원과 동행인은 왕복항공권과 일주일간의 숙박, 여행 경비 일체를 지원받는다. 이 행사를 가까이에서 직접 참관할 기회를 얻었다. 첫째 날, 오리엔테이션이 열렸다. 봉사단원이라 해도 15년간 2000여명이나 파견됐기 때문에 같은 기수이거나 같은 지역에서 근무하지 않으면 서로 전혀 알지 못한다. 한국의 재방한 초청사업에 참여해 처음 알게 된 사이도 꽤 많다. 이들은 자기소개 시간에 각별한 공을 들였다. 둘째 날 오전엔 그동안 한국이 이룬 경제 발전과 교육 발전을 주제로 연사를 초청해 특강을 들었다. 필자도 연사로 참여해 그동안 연구해온 주한 미 평화봉사단의 현황과 역사 및 의미 등을 간단하게 소개했다. 오후에는 이들과 함께 청와대를 비롯한 서울 시내에 들러 관광하는 시간을 가졌다. 셋째 날엔 특수학교인 한국우진학교와 장애인 복지시설인 임마누엘 하우스를 견학했다. 이들은 주한 미 평화봉사단 출신 친목단체인 ‘프렌즈 오브 코리아’ 명의로 기부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2023 주한 미 평화봉사단 재방한단 행사에 참여해 강의 중인 필자의 모습 /서나래 제공 근무지·하숙집 찾아가니 ‘상전벽해’ 넷째 날과 다섯째 날이 하이라이트였다. 봉사단원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대망의 본인 근무지 방문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20대 청춘 시절을 보낸 학교나 보건소는 지금 얼마나 어떻게 변했을까. K-51 보건 요원이었던 폴라 스트레인지(Paula J. Strange)는 40여 년 만에 본인이 근무했던 군위군 보건소를 찾았다. 역사학을 전공하고 군위에서 결핵 요원으로 일했던 그는 딸과 함께 한국땅을 다시 밟았다. 예전과 전혀 딴판으로 변한 보건소 건물을 보면서 그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1970년 낙후한 제주도 어촌 마을에서 근무했던 한 단원은 세계적인 관광지로 변모한 제주도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고, 충남 대덕군의 한 보건소에서 근무한 단원은 이제는 대전광역시 대덕구 연구단지로 변모한 동네를 가리키며, “내가 도대체 어디서 근무했던 말인가”라며 큰 소리로 묻기도 했다. 1박2일이라는 짧은 일정 안에 근무지를 돌아보고 하숙집 가족들과 동료들까지 만나야 한다는 점에서 많이 아쉽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40~50년 만에 가장 강렬하고도 뜨겁던 추억의 한 페이지를 들춰볼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이들에게는 엄청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40여 년 만에 군위군 보건소를 찾은 주한 미 평화봉사단원 폴라 스트레인지와 그의 딸, 그리고 군위군 보건소 공무원들 /군위군청 제공 한국은 분명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대부분의 단원이 자신이 살던 집, 일하던 직장의 위치를 쉽사리 찾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수소문 끝에 어렵게 찾아낸 옛 하숙집 가족들과 직장 동료들과 밥상에 둘러앉아 숟가락을 드는 순간, 그때 그 시절이 어제인 듯 되살아나는 듯했다고 한목소리로 말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까닭에 작고한 가족과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지었고, 쉽게 나오지 않는 한국어 실력을 탓하며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여섯째 날은 한국국제협력단인 코이카(KOICA)에 방문해 한국이 다른 국가를 대상으로 벌이는 개발협력 현황과 과제들을 확인했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이 철수한 지 10년이 지난 1991년부터 한국의 코이카는 봉사단원을 선발해 개발도상국에 파견 중이다. 미국 평화봉사단원들이 과거 한국에서 했던 것처럼 한국의 코이카 단원들은 지금 여러 개발도상국에서 한국어와 기술을 가르치고 있다. 이를 접한 평화봉사단원들은 연신 감탄사를 쏟아냈다. 2023년 10월 27일 열린 주한 미 평화봉사단 재방한단 행사의 공식 만찬주로 그 시절 추억을 샘솟게 하는 막걸리가 등장했다. 서나래 제공 ‘눈물 젖은 두만강’ 열창한 노년의 미국인들 마지막 날인 여섯째 날 저녁, 한국국제교류재단 주최로 송별 만찬이 열렸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원들뿐만 아니라 평화봉사단의 한국어 강사들까지 모두 함께하는 자리였다. 이들은 한강의 새빛섬 레스토랑에서 석양을 바라보며 저녁식사를 했다. 한국어 강사들은 매년 이 행사에 참여해 본인이 가르쳤던 제자들을 만난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에서 한국어를 가르쳤던 전보배씨는 “40년 만에 제자를 만났다”며 감격스러워했다. 송별만찬의 백미는 주한 미 평화봉사단원들의 장기자랑 시간이었다. 그중에서도 1973~1975년에 활동을 한 단원이 무대에 올라 방진오라는 한국어 이름으로 본인을 소개하더니 ‘눈물 젖은 두만강’과 ‘갑돌이와 갑순이’를 열창하던 장면이 가장 인상 깊었다. 그 시절 외웠던 노래를 지금껏 잊지 않고 다시 부르다니. 더 재미난 건 젊은 세대 한국인들은 정작 이 노래들을 몰라서 따라부르지도 못하는데, 노년의 미국인들은 신이 나서 이른바 ‘떼창’을 했다는 점이다. 2023년 주한 미 평화봉사단 재방한 초청사업 행사가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젊은 날을 한국에서 보낸 봉사단원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더불어 그들의 안녕과 건강을 기원한다. 한국국제교류재단 주최로 열린 재방한단 송별 만찬을 마치고 참석자들이 모두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서나래 제공 역대 미 평화봉사단원의 페이스북 그룹에는 일주일이 멀다고 부고가 올라온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으로 한국에 파견된 단원들은 현재 대부분 60대 중반~80대 초반이다. 재방한 초청사업 행사에 참여할 수 있는 봉사단원의 수 역시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미국에서 한국까지 장거리 비행을 견딜 수 있는 건강한 단원들만이 한국에 다시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재방한 초청사업을 이어갈 수 있을까. 해를 거듭할수록 이 행사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이번 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 [주한 미 평화봉사단 이야기](5)주한 미군 출신 ‘한국학 시조새’의 대를 잇다(2023. 10. 20 10:44)
- 2023. 10. 20 10:44 사회
- (제임스 버나드 팔레·2008) / 산처럼 비교적 최근에는 한류의 유행으로 한국학을 전공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다. 한국의 드라마, 영화, 아이돌 등을 좋아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어를 익히고 한국의 사회나 역사나 문학 등에 관심을 가지는 듯하다. 그런데 한국이 개발도상국이던 시절에 이미 한국의 역사나 문학을 공부한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고 궁금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 문화가 해외에 잘 알려진 것도 아니고, 심지어 한국이 잘사는 나라도 아닌데 무엇이 그들에게 한국을 공부하도록 이끌었을까?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해외(주로 미국)에서 한국학을 연구한 사람들은 대부분 주한 미군을 배경으로 한다. 주한 미군 근무를 통해 한국을 알게 됐고 이를 계기로 한국의 역사, 철학, 문학, 사회 등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한국학자의 ‘시조새’라고 할 수 있는 에드워드 와그너(Edward W. Wagner·1924~2001)도 하버드대학교 재학 중이던 1943년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휴학하고 미 육군으로 입대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1946년부터 1948년까지 한국의 미 군정에서 외교업무를 담당하는 군무원으로 근무했다. 한국 근무를 하면서 한국학에 관심을 가지게 돼 미국으로 돌아간 이후 동 대학원에서 동아시아 지역학으로 조선시대 역사를 전공한 끝에 1959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35년 넘게 하버드대학교에서 한국학을 가르쳤고, 한국학연구소를 세웠으며, 많은 후학을 양성했다. (데이비드 맥캔, 존 미들턴, 에드워드 슐츠·1979) / 하와이대학교 한국학센터 한국학자의 또 다른 시조새인 제임스 팔레(James B. Palais·1934~2006)는 미 육군 외국어학교(Army Language School in Monterey) 출신이다. 재미있는 것은 팔레가 애초에 러시아어를 공부하기를 희망했으나 그 강좌에서 밀려나는 바람에 한국어를 배우게 됐다는 점이다. 그 덕에 그는 한국과 한국의 역사에 흥미를 가져 조선시대의 유학을 연구했고, 마침내 예일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훗날 그는 워싱턴대학교에서 30년 이상 근무하며 많은 한국학자를 배출했다. 저서 <한미관계 20년사>(U.S.-Korea Relations from Liberation to Self-Reliance)로 한국현대사 연구자들에게 유명한 도널드 S. 맥도널드(Donald S. McDonald·1919~1993) 역시 주한 미군사령부에서 장교로 근무한 바 있다. 미국의 한국학 연구자들을 세대로 나눌 수 있다면 이처럼 1세대는 냉전 시대의 초입 시기 주한 미군에서 일하며 한·미관계를 담당했던 게 계기가 됐다. 한국학자의 등용문, 주한 미 평화봉사단 주한 미 평화봉사단 또한 미국 내 한국학자의 등용문(登龍門) 역할을 했다. 등용문이란 <후한서>에 처음 등장한 표현으로, 전설 속의 잉어가 통과해 용이 되는 문을 일컫는다. 한국사회에서 등용문이란 입신양명이나 출세의 관문을 뜻한다. 뚜렷한 학문적 성취를 이뤄도 등용문이라는 말을 쓴다. 평화봉사단은 단원들이 2년의 복무 기간 동안 초청국 사람들(한국 사람들)이 미국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목표로 했다. 복무 후 미국으로 돌아가서는 미국인들이 한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했다. 가족이나 주변 이웃들을 상대로 한국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애써 한국에서 습득한 한국어와 한껏 고취된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을 그 정도 수준에서 그치기엔 아까웠던 봉사단원들은 한국을 좀더 공부하기로 한다. 1966년 주한 미 평화봉사단 첫 기수인 K-1 단원 중 상당수는 1968년 미국으로 돌아가 한국학을 공부할 수 있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이들의 대학원 진학 행보는 모쪼록 주목할 만하다. 선배 기수인 K-1이 대학원이라는 진로를 닦아놓음으로써 후배 기수들도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었으니 말이다. <표 1>은 K-1의 한국학 관련 대학원 석·박사과정 진학 현황이다. 98명의 단원 중 약 12%에 해당하는 12명이 대학원에서 한국학을 전공하거나 한국을 주제로 연구했다. 1968년 당시만 해도 미국에서 한국학을 공부할 수 있는 대학원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한국은 경제적으로는 미국과 비교가 안 되는 개발도상국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에는 그러나 200여 년에 그치지 않는 미국의 역사와 비교했을 때 확실한 비교우위를 가진 유구한 역사가 있었다. 오랜 세월 이어져온 전통과 문명을 엿본 미국 청년들은 한국의 신비와 매력에서 좀처럼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한국 공부에 뛰어든 배경이다. 에드워드 베이커(Edward J. Baker)는 주한 미 평화봉사단 합류 시점에 이미 석사과정으로 예일대학교 로스쿨 재학생이었다. 미국으로 돌아가서는 로스쿨을 마치고 하버드대학교 박사과정에서 한국사를 공부했다. 다른 단원들도 일부는 박사과정까지 진학했고, 이윽고 한국학 전공 학자가 됐다. 대학원에 진학한 K-1 단원들이 주축이 돼 1977년 1월 서울에서 ‘전환기의 한국학(Studies on Korea in Transition)’이라는 주제의 학술대회를 열기도 했다. 하와이대학교 출판부는 그 내용을 10개의 챕터로 나눠 책으로 출판했다. 책의 주제는 <표 2>와 같다. 한국이 어디인지도 잘 모르던 미국 청년들이 1966년 봄 주한 미 평화봉사단에 합류해 더듬더듬 한국어를 배웠는데, 그 단원들이 11년 만에 한국학자가 돼 전문적인 주제의 학술대회까지 열었으니, 실로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왼쪽부터) (브루스 커밍스·2023), (돈(도널드) 베이커·2012), (카터 에커트·2008) / 글항아리 / 푸른역사 한국학의 발전을 이끈 냉전 시대 장학금 K-1 선배들이 잘 닦아놓은 길을 따라 주한 미 평화봉사단 복무 후 대학원에 진학한 사람들도 상당했다. 이때 주류가 된 대학은 3개(하버드대학교·워싱턴대학교·하와이대학교)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하버드대학교와 워싱턴대학교에서 한국학을 가르쳤던 교수들은 주한 미군과 인연이 있지만, 그 이후의 대학원생들은 주로 주한 미 평화봉사단과 관련이 있었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 경험자들을 한국학 대학원 진학으로 이끈 또 다른 배경이 있다면, 그건 바로 장학금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선 지역학(area studies)이라는 학문 분야가 부상했다. 한국학 역시 지역학의 한 분과로 역할을 했다. 미국은 냉전 상황에서 전략적으로 해외 지역의 정보를 필요로 했다. 하지만 해당 지역의 문화와 언어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가진 전문가는 턱없이 부족했다. 미국의 사회과학연구협의회(Social Science Research Council)가 이런 미 연방정부의 요구에 부응해 지역학 발전의 거점이 됐다. 해외 지역학을 지원하고, 지역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했다. 아이젠하워 시절의 미 연방정부는 소련의 스푸트니크호 발사에 대한 충격으로 1958년 국가 방위를 강화하고 중요한 국가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확대하고 증진하는 국가방위교육법(National Defense Education Act)을 제정했다. 이 법령 제6조에 의해 외국어 연구와 지역학 연구센터, 언어교육원에 연구비가 책정됐다. 미 연방정부는 연구비뿐 아니라 대학 내 지역학 연구소 설치를 직접 지원함으로써 보다 직접적이고 광범위한 지역학 제도화의 기반을 마련했다. 역대 주한 미 평화봉사단원이 대학원에서 한국학을 전공해 연구자가 될 수 있었던 이면에는 한국에 대한 이들의 학문적 호기심 외에도 지역학으로서 한국학이라는 학문이 공식 프로그램이 됐다는 점과 연구비 수령이 용이하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국가방위교육법 내 외국어교육법 덕분에 아시아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장학금을 받고 공부할 수 있었다. (왼쪽부터) (로렐 켄달·2016), (에드워드 슐츠·2014), (김승경, 마이클 로빈슨·2020) / 일조각 / 글항아리 / 워싱턴대학교 한국학센터 2세대 한국학자, 주한 미 평화봉사단 그렇게 양성된 주한 미 평화봉사단 출신 한국학자들은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해외 한국학을 이끌었다. 최근 새롭게 번역된 <한국전쟁의 기원>의 저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나 <한국인의 영성>의 도널드 베이커(Donald Baker), <제국의 후예>를 쓴 카터 에커드(Carter Eckert), <무당, 여성, 신령들>의 로렐 켄달(Laurel Kendall), <무신과 문신>의 에드워드 슐츠(Edward Shultz) 등 미국의 한국학 관련 연구자 중에서 평화봉사단 출신을 쉽게 찾을 수 있다. 2세대 한국학자로, 미국에서 한국학 연구를 이끌었던 이들 주한 미 평화봉사단 출신 연구자들은 1940~1950년대생이 많다. 이미 학계에서 은퇴했거나 은퇴를 앞두고 있지만, 지금까지도 이들의 영향력은 건재하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이 한국에서 철수한 지 4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신냉전 시대가 도래했다는 분석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미국과 소련이 과거와 같은 수위로 체제 대결을 벌이는 상황까지는 아니다. 냉전 전략으로서 지역학의 의미도 퇴색한 지 오래다. 시대 변화에 발맞춰 한국학도 애초의 모습과는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역대 주한 미 평화봉사단 출신 연구자들의 한국학 박사학위 논문 주제를 살펴보면 한국 역사, 문학, 사회학, 지리학, 인류학, 법학, 교육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다양한 변주를 보여준다. 이를테면 한국 오일장의 경로 선택(노바코브스키), 한국 시조 운율 구조(맥캔), 18세기 한국 유교와 천주교의 만남(베이커), 고려시대 무신정권 최씨 일가(슐츠) 등의 주제는 냉전 전략과는 요원해 보인다. 순수학문으로서 한국학을 발전시킨 셈이다. 이는 평화봉사단 창설 과정에서도, 지역학 지원 시점에서도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전(前) 미국 평화봉사단원들의 조직인 프렌즈 오브 코리아(Friends of Korea)와 미 한국경제연구소(Korea Economic Institute of America), 워싱턴대학교 한국학센터 및 인디애나대학교 한국학연구소가 공동으로 2020년 12월 발간 기념 세미나를 열었다. 코로나19가 ‘심각’ 단계인 시기여서 참석자들은 줌(Zoom)과 유튜브로 만났다. 온라인 세미나에서 그 시절 한국에서의 생활과 일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저자들의 모습.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Donald Baker, Edward Shultz, Clark Sorensen, Katheleen Stepnens, 문옥표, Laurel Kendall / 미 한국경제연구소(KEI) Youtube 채널 캡처 전(前) 미국 평화봉사단원들의 조직인 프렌즈 오브 코리아(Friends of Korea)와 미 한국경제연구소(Korea Economic Institute of America), 워싱턴대학교 한국학센터 및 인디애나대학교 한국학연구소가 공동으로 2020년 12월 발간 기념 세미나를 열었다. 코로나19가 ‘심각’ 단계인 시기여서 참석자들은 줌(Zoom)과 유튜브로 만났다. 온라인 세미나에서 그 시절 한국에서의 생활과 일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저자들의 모습.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Michael Robinson, Bruce Fulton, Donald Clark, Edward Baker, Linda Lewis / 미 한국경제연구소(KEI) Youtube 채널 캡처 평화봉사단과 미국에서 한국학 만들기 2020년 8월, 주한 미 평화봉사단 출신 한국학자들(도널드 베이커·에드 베이커·도널드 클락·카터 에커트·브루스 풀턴·로렐 켄달·린다 루이스·에드워드 슐츠)과 사회학자 김승경, 인류학자 문옥표, 한국학자 클락 소렌슨, 평화봉사단 출신 전 주미대사 캐서린 스티븐스 등 모두 12명이 모여 <평화봉사단과 미국에서 한국학 만들기>(Peace Corps Volunteers and the Making of Korean Studies in the United States)라는 책을 출간했다. 은퇴했거나 은퇴를 앞둔 학자들이 그동안의 성과를 정리하고 미래에 한국학이 나아갈 방향을 조망한 책이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의 활동 시작 50주년을 기념하는 2016년, 주한 미 평화봉사단 출신 한국학자들이 미 인디애나대학교에 모여 평화봉사단이 자신들의 삶과 연구에 미친 영향에 대해 동명의 콘퍼런스를 열고 논의한 내용을 정리했다. 젊은 봉사단원들이 한국에서 ‘개고생’한 에피소드 대목에선 깔깔 웃음이 터져나왔고, 한국 민주화를 위해 애쓴 이들의 회고를 읽으면서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 책에 대해 할 말이 훨씬 많지만, 50여 년간 한국학 분야를 연구한 슐츠 교수의 조언으로 글을 마치려고 한다. 현재 해외에서 한국학은 한류의 확산으로 유례없는 인기몰이 중이다. 반짝인기가 아닌 지속가능한 한국학의 발전을 위해 슐츠 교수는 지켜져야 할 내용을 6가지로 정리했다. ①고급 한국어를 연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라. ②한국학을 공부하는 학부생들이 1년간 해외(한국)를 경험할 수 있는 컨소시엄을 구축하라. ③한국의 전(前)근대를 공부하는 학생들을 양성하고, 이들이 고전 한문의 문리를 틀 수 있도록 훈련하고 독려하라. ④성별 균형을 염두에 두라. ⑤학제 간의 다양성을 고려하라. ⑥박사 논문 연구 지원을 확대하라. 점점 위축되고 있는 한국의 인문·사회과학 분야 전체에도 해당하는 조언이다.
- [주한 미 평화봉사단 이야기](4)농악과 민요에 폭 빠져버린 봉사단원들(2023. 09. 08 11:24)
- 2023. 09. 08 11:24 사회
- 수록곡을 연주하려 준비 중인 주한 미 평화봉사단원들의 모습 / K-4 Patricia Wilson 촬영. USC 한국학 도서관 제공 “6인치 규칙” 평화봉사단은 국가 간 협약으로 외국인 집단이 신생 국가인 대한민국에 대거 파견된 기회였다. 기존에 선교사나 주한 미군 등 한국에 파견된 외국인은 종종 있었지만, 해외의 선교본부나 군대 등 관리의 주체가 별도로 존재했기에 한국 정부가 그다지 개입하지 않았다. 초기 주한 미 평화봉사단은 사전 훈련에서 선교사나 주한 미군을 위한 어학 학습자료를 활용했다. 천주교와 개신교 교단에서는 한국에 파송한 선교사를 위한 한국어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평화봉사단이 필요한 한국어는 선교를 위한 한국어와 달랐다. 특히 일선 보건소에서 보건 요원들이 활용할 한국어는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에서는 훈련생을 가르치기 위한 교재를 맞춤 제작하기로 했다. 한국어 강사와 비교문화 강사들이 교재를 집필했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 사전 훈련의 교재는 단순히 어학을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었다. 평화봉사단이라는 외부인을 의식해 내용을 구성한 것으로, 취사선택된 교재였다. 당시 한국 문화와 미국 문화 간의 격차는 오늘날보다 훨씬 컸다. 이질적이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문교부는 평화봉사단이라는 이질적인 문화를 지닌 미국인 집단에 대해 좀더 알아보고자 연구에 착수했다. 1969년 문교부 산하의 중앙교육연구소(현 한국교육개발원)가 평화봉사단의 효과성에 관한 보고서(Effectiveness of the Peace Corps Program)를 작성했다. 보고서는 주로 평화봉사단에 의한 영어교육의 효과성에 대해 논하고 있지만, 이밖에도 평화봉사단과 함께 일하는 한국인 동료 교사들로부터 평화봉사단원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한국적 가치가 무엇인지를 설문조사했다. 미국인에게 가르치고 싶은 한국적 가치는 관용, 본심을 드러내지 않는 태도, 가족에 대한 책임감, 남녀 분별적인 태도 등이었다. 응답자들은 미국인들이 성(性)에 대한 관념이 별로 없기에 성에 대한 건전한 태도를 가르치고 싶으며 남성의 우월성, 소극적인 여성의 태도, 자유분방하지 않은 남녀 간의 관계 등이 미국에 소개하고 싶은 한국의 가치라고 답했다. 1977년 평화봉사단 K-43의 사전 훈련 프로그램 수업 자료를 보면 평화봉사단원에게 가르치고 싶어한 한국의 가치가 등장한다. 바로 유교의 덕목과 속담 등이다. 오륜(五倫)인 군신유의(君臣有義), 부자유친(父子有親),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과 함께 한국 속담이 영어로 정리돼 있다. 1977년 주한 미 평화봉사단 K-43의 사전 훈련 프로그램 수업 자료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1.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世不同席) Man and woman should not be together after age seven. 2. 찬물에도 선후가 있다. There are priorities(a ranking, order) even in drinking plain water. 3. 암탉이 울면 집안 망한다. When the hen cries, the home will be destroyed. 4. 친구 따라 강남 간다. When a friend goes to Kangnam(a remote place in China), his friend follows him. 5. 수부귀다남(壽富貴多男) The secret of happiness is health, wealth, and many sons 대한결핵협회 서울특별시지부와 주한 미 평화봉사단 보건 요원 57명의 협업으로 탄생(1969년 11월)한 음반 표지 앞면(왼쪽)과 뒷면 / USC 한국학 도서관 제공 ‘수부귀다남’에서 수는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 부는 금전적인 부유함, 귀는 권력과 명예, 다남은 아들이 많은 것을 일컫는다. 남자와 여자가 유별하게 살았던 1960~1970년대 한국사회에서 미국인 남성 단원과 여성 단원이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모습이 그다지 좋게 보이지는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행동이 한국사회에서는 잠재적인 위협이 될 수 있기에 주한 미 평화봉사단을 가르쳤던 한 한국어 강사는 수업 시간에 ‘6인치 규칙(six-inch rule)’을 만들었다. 남성과 여성 훈련생은 최소한 6인치(15㎝) 거리를 두고 앉아야 한다는 규칙이었다. 남녀칠세부동석의 재해석이었다. 하지만 1968년 미국과 유럽에서 일어난 자유민권운동인 68운동을 거친 세대는 성(性)에 거침이 없었다. 훈련생이나 단원들은 안전한 성생활을 위해 콘돔의 필요성을 주창했지만 문제는 한국에서, 특히 시골에서 미국만큼 질 좋은(?) 콘돔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란 점이었다. 일부 단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주한 미 평화봉사단 사전 훈련지나 서울사무소에 누구나 조용히 가져갈 수 있는 콘돔 상자를 비치했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 한국어 강사들에게 콘돔 상자는 일종의 문화 충격이었다. 평화봉사단원들의 관심은 훗날 장구로까지 나아갔다. 이들이 출연(2009년 3월)한 제2회 설장구보존회 발표회 프로그램북 / USC 한국학 도서관 제공 한국 민속의 재발견 문화의 측면에서 한·미관계를 조명한 기존 연구는 미국 대중문화의 무차별적인 수용, 미국문화의 종속, 이식 등을 논의했다. 하지만 주한 미 평화봉사단의 경우 전혀 양상을 보였다. 한국에 거주하며 여러 문화를 접한 봉사단원들은 이내 한국의 문화에 푹 빠져들었다. 특히 한국의 민속문화, 전통문화에 관심을 보인 이들이 많았다. 봉사단원 활동을 하면서 서예나 민화, 판소리, 태권도 등을 배우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일부 단원들은 전문가적인 수준으로 익혀나갔다. 그중에서도 단연코 돋보이는 인물은 고(故) 유게리(柳憩里·미국명 Gary Rector)와 고(故) 브라이언 배리(Brian Barry)였다. 유게리는 1943년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태어나 미시간의 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했다. 1967년 주한 미 평화봉사단 K-4 사전 훈련에 합류하면서 한국과 첫 인연을 맺었다. 브라이언 배리는 1945년 미국 코네티컷주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으며 유게리와 마찬가지로 K-4로 주한 미 평화봉사단에 합류했다. 3개월간 뉴멕시코주 고스트렌치에서 훈련을 받는 동안 유게리와 배리는 한국어를 너무 빨리 익혀 모든 훈련생과 강사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이들은 1967년 한국에 입국해 한국에서 살았다. 유게리와 배리는 각각 심장질환과 암으로 2018년과 2016년 한국 땅에서 눈을 감았다. K-4 보건 요원 중 불교에 입적한 브라이언 배리가 탱화를 그리고 있다. / www.wabei-mono.com/blog/2008/11/ 결핵없는 내일 한국에서 보건 요원으로 봉사활동을 하는 동안 유게리는 농악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는 언어만 빨리 배운 것이 아니라 각종 악기도 빨리 배웠다. 천부적인 작곡 능력까지 있었다. 유게리는 뮤지션으로 활동했는데, 그중에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음반이 <결핵없는 내일>이었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 보건 요원들은 결핵환자 관리뿐만 아니라 결핵에 대한 인식 전환, 보건 교육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대한결핵협회 서울특별시지부와 협업으로 주한 미 평화봉사단 보건 요원 57명은 1969년 11월 <결핵없는 내일>이라는 음반을 녹음해 발표했다. 음악 감독 및 타이틀곡 <결핵없는 내일>의 작사와 작곡을 유게리가 맡았다. 그는 당시 서구에서 유행하던 사이키델릭한 곡조에 계몽적인 한국어 가사를 붙여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만들었다. 가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라의 힘이 되는 국민의 건강/ 발전과 생산의 힘이요/ 내가 설마 하지 말고 검진받으면/ 결핵없는 우리나라의 보다 나은 내일/ 결핵이란 남녀노소 구별이 없이/ 옮겨지는 무서운 병인데/ 자기도 몰래 환자된 사람 많으니/ 가래검사, 엑스레이검사 둘다 해야지/ 어른 아이 빠짐없이 모두가 함께/ 한 해에 한 번 틀림없이/ 무료검진 치료하는 보건소에 가서/ 자기 건강 자랑 말고 확인해야지.”(유튜브에서 <결핵없는 내일>을 검색하면 찾아서 들을 수 있다.) 지금 가사를 들어보면 상당히 계몽적이다. 심지어 국가주의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불량한 보건 위생 상태나 전염병의 확산은 한국의 산업화·근대화에 걸림돌이었다. 공중보건 환경 개선은 당시의 국가적 과제일 수밖에 없었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 보건 요원들은 보건소에서 일하며 지역사회 공중보건 개선에 힘썼다. 이와 동시에 지역사회의 민속문화를 흡수했다. <결핵없는 내일> 음반에는 타이틀곡 이외에도 민요와 유행가, 자작곡 등을 수록했다. 봉사단원들이 가야금과 거문고, 피리, 장구 등 국악기를 배워서 직접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오봉산 타령’, ‘개타령’, ‘진도 아리랑’, ‘해녀 노래’, ‘밀양 아리랑’, ‘뱃노래’ 등을 녹음했다. 또한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패티킴의 ‘사랑하는 마리아’, 정훈희의 ‘안개’를 커버곡으로 해서 ‘전라도랑께’라는 자작곡도 함께 수록했다. <결핵없는 내일> 음반에 민요 연주를 싣기 위해 음악감독을 맡은 유게리는 훌륭한 음악적 스승을 찾아 모셨다. 이전까지 국악기를 들어본 적도, 다뤄본 적도 없는 미국인들이 음반을 내려면 수많은 레슨과 연습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유게리는 1968년 전라북도 정읍에 살고 있던 설장구의 대가 김병섭 명인을 서울로 불러들였다(설장구란 농악에서 장구재비의 우두머리인데, 즉흥 연주와 같은 개인기를 많이 보여준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원들은 김병섭을 스승으로 모시고 국악을 배우고 익혔다. 때론 서울 안국동에서 합숙훈련을 하기도 했다. 각고의 연습 끝에 보건 요원들은 마침내 민요를 연주하고 녹음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전북 김제·전주에서 보건 요원으로 활동했던 닐 랜드레빌이 ‘전주’ 풍경을 그린 수묵화(왼쪽)와 ‘수박’ 수묵화 / 서나래 제공 당신들은 대체… 유게리는 K-4 보건 요원으로 봉사단원의 임기가 끝난 이후에도 농악을 좀더 전문적으로 배우기 위해 한국에 남았다. 배리 역시 농악을 더 배우기로 했다. 유게리와 배리는 김병섭 호남우도굿 농악단에 들어가 8년 동안 각각 설장구와 꽹과리를 배웠다. 2009년 3월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고 김병섭 선생 20주기 추모공연 설장구보존회 발표회가 열렸다. 유게리와 브라이언 배리가 ‘지도선생님’으로 활약했다. 유게리가 한국에서 마당극, 국악 작곡을 하는 동안 브라이언 배리는 불교에 입적해 도해(道海)라는 법명을 받고 만봉 스님에게 탱화를 배워 탱화장으로 활동했다. 또한 조계종 국제포교사 양성 강의 등을 맡았다. 법정 스님의 수필을 영어로 옮기고, 한국의 불화를 세계에 알리는 역할도 했다. 비단 유게리나 브라이언 배리뿐만 아니라 한국의 전통문화, 민속문화에 빠져든 봉사단원도 상당히 많았다. K-1 단원으로 안동농업고등학교에서 근무했던 데이비드 맥캔(David McCann)은 한국의 시조에 푹 빠졌다. 김소월, 이육사, 윤동주 등의 시를 영어로 번역해 소식지 ‘여보세요(Yobosayo)’에 게재하는 한편, 시조를 쓰기도 했다. 훗날 하버드대학교의 교수로 임용된 그는 거기서 한국문학을 가르쳤다. 영문으로 된 한국문학 잡지 ‘Azalea(진달래꽃)’을 창간하기도 했다. 1969년부터 전북 김제·전주에서 보건 요원으로 활동했던 닐 랜드레빌(Neil Landreville)은 한국의 농촌생활에 매료된 나머지, 한국의 풍경을 수묵화로 옮겼다. 그는 정겨운 농촌 풍경과 활기찬 도시 풍경을 익살스러운 필치로 그려냈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의 마지막 기수인 K-51의 수잔나 오(Suzanna Oh) 단원은 1980년 보건 요원을 계기로 한국에 들어와 ‘김덕수 사물놀이패’에 들어가 풍물을 배웠다. 그 이후 매니저로 전직해 김덕수 사물놀이패의 해외 진출에 큰 역할을 했다. 현재 서울에 거주하며 한양도성 해설사, 궁궐 길라잡이로 활동 중이다. “나는 아직 이 나라를 떠날 준비가…” 우연한 계기로 20대에 한국에 오게 됐고, 봉사단원으로 활동하는 동안 한국 문화에 깊은 감화를 받아 평생을 한국에 살면서 한국 문화의 전수자가 된 사람들. 이들을 인터뷰하며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주한 미 평화봉사단으로 오기 전까지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잘 알지 못했지만, 김포공항에 내리는 순간 어떠한 기운을 느꼈다고 했다. 만일 내 전생이 있다면 이곳에서 전생을 보내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 봉사단원으로 2년 임기를 마친 시점에는 ‘나는 아직 이 나라를 떠날 준비가 되지 않았다(I am not ready to leave this country)’고 생각했단다. 서로 다른 봉사단원들을 인터뷰했는데도 잇따라 비슷한 언급을 하는 걸 들으며 순간 소름이 돋았다. 이들이 정말 전생에서 한국인이었던 건 아닐까.
- [주한 미 평화봉사단 이야기](3)“그쪽은 양반 대접, 우리는 상놈 취급···경쟁자는 무당”(2023. 08. 25 10:54)
- 2023. 08. 25 10:54 사회
- 평화봉사단 본부와 한국 정부의 1순위 ‘온도차’ 주한 미 평화봉사단은 한국의 중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원어민 교사로 알려졌지만, 영어교사뿐만 아니라 보건 요원도 있었다. ‘평화봉사단=영어교사’라는 사람들의 인식 때문에 보건 요원을 맡았던 단원들은 종종 아쉬움을 나타냈다. 미 평화봉사단은 1966년부터 1981년까지 1200여명의 영어교사와 500여명의 보건 요원을 파견했다. 이들은 지방의 군청이나 면 소재지 보건소에서 결핵, 가족계획, 모자보건, 한센병 관리 등의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현미경을 이용해 환자의 객담 속에서 결핵균을 찾아내는 작업을 하고 있는 주한 미 평화봉사단의 보건 요원 / USC 한국학도서관 제공 1960년대 한국은 급속한 인구증가와 산업화로 보건 문제가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농촌에서는 의사가 존재하지 않는 무의촌 문제가 있었으며, 도시에서는 위생과 전염병이 골칫거리였다. 미 평화봉사단 본부에서는 평화봉사단을 파견하기에 앞서 한국에 대한 사전 조사를 했다. 그 결과 한국의 보건 문제가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보건 프로그램을 1순위로 두고, 영어 교육을 2순위로 뒀던 배경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의 생각은 달랐다. 영어 교육이 훨씬 시급하다고 판단해 더 많은 인원의 영어교사를 요청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은 ‘영어가 고픈(English-hungry)’ 나라였기 때문이다. 보건소에서 결핵 예방 접종 중인 평화봉사단의 모습 / USC 한국학도서관 제공 전문가와 일반인 사이에서 미 평화봉사단은 보건 프로그램(The Health Program)을 기획하면서 농촌에 방점을 둔 목표를 구상했다. 한국의 농촌지역에서 공중보건 여건과 전달체계를 개선하고 가족계획을 돕는 일을 구체적인 목표로 정했다. 보건에 관한 전문적이고 구체적인 계획이었다. 평화봉사단은 그러나 전문가나 고문을 파견하는 단체가 아니었다. 중간 수준(mid-level manpower)의 봉사단원을 파견할 뿐이었다. 당시 평화봉사단에 지원한 사람들은 대개 갓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이었다. 평균 나이 23세였으며, 인문사회 전공자가 가장 많았다. 그나마 보건 프로그램의 봉사단원들은 영어교사와 마찬가지로 3개월간 합숙훈련을 받았지만, 실습이 더 많이 배정되는 등 좀더 특별한 훈련을 받았다. 이를테면 결핵 피부 반응 검사, 객담 검사 후 현미경을 이용한 결핵균 진단, 결핵을 예방하는 BCG 접종, 위생 관리 방법 등을 사전 훈련에서 배웠다. 그렇다고 의학을 전공하지도 않은 보건 요원들이 3개월의 훈련으로 의료인이 될 수는 없었다. 농촌의 일반인들보다 좀더 나은 수준의 의료 지식을 갖추긴 했지만, 간단한 소독이나 드레싱 처치, 피하주사 등이 가능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너 몇 기야?” 주한 미 평화봉사단 소식지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한국에서 평화봉사단끼리 만났을 때 ‘What’s your number?’라며 다짜고짜 숫자(number)부터 물어보지 맙시다. 아주 나쁜 버릇입니다.” 여기서 숫자란 기수(K-1부터 K-51까지)를 말한다. 마치 해병대 출신들 사이에서 기수를 묻는 것처럼 주한 미 평화봉사단 사이에서도 “너 몇 기야?”라며 기수부터 묻는 관행이 생겨나고 있었다. 소식지에서는 기수로 선배, 후배의 위계를 나누지 말라고 당부했다. 기실 K-1부터 K-51까지 기수를 통해 주한 미 평화봉사단원들은 파견 시기와 분야를 짐작할 수 있었다. 심지어 대략의 나이까지 유추 가능했다. 따라서 기수는 봉사단원들에게 아주 중요한 정보였다. 상대가 영어교사인지, 보건 요원인지도 기수를 통해 파악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K-1부터 K-3까지는 영어교사였으며, K-4와 K-6는 보건 요원이었다. 그쪽은 양반, 우리는 상놈 영어교사와 보건 요원은 주한 미 평화봉사단이라는 같은 단체 하에 있었지만 훈련지, 훈련내용, 근무지 등이 모두 달랐기에 평소에 마주칠 기회가 별로 없었다. 영어교사는 주로 도시에 배치됐지만 보건 요원은 무의촌인 농촌 지역에 주로 배치됐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원들과 만나서 인터뷰를 해보면 영어교사와 보건 요원은 한국에서 전혀 다른 경험을 했다. 그래서인지 묘하게 다른 정서가 있다.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한국 전통문화에 매료된 나머지 한국에 정착해 40~50년을 살았던 단원들은 대개 보건 요원들이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차이가 나타났을까. 보건 요원들은 1970년대 초반 인기를 끈 TBC의 형식을 빌려 오일장에서 주민을 대상으로 보건 및 위생교육을 했다. / USC 한국학도서관 제공 강원도 강릉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주한 미 평화봉사단원 출신의 밥 그라프(Bob Graff)씨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는 1971년부터 1973년까지 전라남도 영광군에서 보건 요원으로 근무한 뒤 미국에 돌아가 직장생활을 하다가 한국의 삼일회계법인으로 이직했다. 그 이후 한국에 귀화했다. 은퇴 후 지금은 강릉에 거주하고 있다. 그라프씨는 미국에서 거주한 세월보다 한국에서 거주한 세월이 훨씬 길다. 법적으로도 한국인이다. 그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영어 선생들은 어쨌든 선생이니까 대접을 받았어요. 어딜 가나 선생님, 선생님이었지요. 그 당시 한국은 선생님을 존경하는 분위기였으니까 더 그랬죠. 그리고 선생님한테 다들 영어를 배우기를 원했죠. 그래서 학생들도, 교사들도 선생님이 영어를 사용하기를 원했지, 한국말을 하기를 원치 않았어요. 그런데 우리는 보건소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한국말을 써야 했습니다. 영광군 보건소에 오는 사람 중에 누가 제대로 영어를 할 수 있었겠습니까. 한국말 매뉴얼을 만들어 문진 때 쓰는 표현부터 시작해 아예 달달 외웠어요. 문진하고 나면 또 이들이 얘기하는 증상 등을 받아적어야 하니까. 비유하자면 영어 선생들이 양반 대접받을 때, 우리는 상놈 대접받았다고나 할까요. 아무튼 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주민들의 객담(가래)이나 받으러 다니는 일꾼이었던 거죠. 그쪽은 양반, 우리는 상놈.” 경쟁업체는 무당 그라프씨의 구술대로 보건 요원들은 훨씬 생활 밀착적이었다. 이들은 보건 서비스 인프라 및 전달 체계 개선을 위해 직접 가정 방문을 하는 사례가 많았다. 대중교통이 거의 없는 농어촌 지역에선 보건소 방문 자체가 워낙 큰일이었던 까닭이다. 보건 요원들은 완행버스를 타고 집마다 방문했다. 오일장이 열리면 시장에서 인형극, 퀴즈쇼 형식으로 보건교육을 하기도 했다. 평화봉사단 K-4 프로그램 북 표지. K-4 사전 훈련의 목적, 협력기관, 훈련개요, 훈련강사 및 훈련생들의 프로필과 사진이 수록돼 있다. / USC 한국학도서관 제공 보건 요원들은 구급낭에 약을 가지고 다니며 관리 환자에게 약을 배포했고, 정기적으로 환자를 확인했다. 이런 활동을 한 보건 요원들의 경쟁자는 바로 무당이었다. 1960~1970년대만 하더라도 농어촌 지역 주민들은 환자에게 진료 대신 굿을 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봉사단원들은 무당과 굿을 낯선 눈으로 바라보았다. 보건 요원이 아닌 영어교사 중에서도 이 굿을 눈여겨본 단원이 있었다. 1971~1972년에 한국에 거주한 로렐 켄달(Laurel Kendall)은 다른 봉사단원들과 함께 굿을 볼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 소식지 ‘Noodle’(주한 미 평화봉사단의 소식지 ‘여보세요’는 1972년 제호를 바꾸었다)의 편집자로서 그는 주한 미 평화봉사단 K-16 단원인 데니스 할핀(Dennis Halpin)이 쓴 ‘서울 샤머니즘’(1972년 7월 ‘Noodle’ 2권 2호 수록)이라는 원고를 검토했다. 훗날 켄달은 인류학자로서 한국의 무속을 연구해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무당, 여성, 신령들 - 1970년대 한국 여성의 의례적 실천>(원제: Shamans, Housewives, and Other Restless Spirits)이라는 책을 1987년 7월에 출판(University of Hawaii Press; 1st edition)하기도 했다. 보건 요원의 원조, K-4 주한 미 평화봉사단 보건 요원에 대한 설명은 첫 기수인 K-4를 빼놓고 얘기할 수가 없다. K-4의 훈련은 미국의 보건교육후생성(US Department of Health, Education, and Welfare) 및 공중보건서비스국의 ‘인디언 건강과(Division of Indian Helath)’와의 협업으로 이뤄졌다. 한국에 파견할 보건 요원들은 주로 결핵 관리 업무를 담당하게 될 터였다. 문제는 미국 대부분 지역에서 결핵이 이미 사라져가고 있었기에 실습 장소를 찾기가 어렵다는 점이었다. 당시의 인디언보호구역으로 눈을 돌렸다. 미국에선 이례적으로 열악한 생활환경과 대가족 생활로 인해 인디언들 중에 결핵환자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화봉사단은 미국 남서부의 나바호족 인디언보호구역을 실습지로 설정하고, 1967년 9월부터 12월까지 뉴멕시코주의 고스트 랜치(Ghost Ranch)라는 캠핑장을 합숙 훈련장소로 삼았다. ‘유령 농장’으로 번역 가능한 고스트 랜치는 장로교에서 운영하던 곳으로, 아름다운 자연풍경에서 영적 훈련을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고스트 랜치는 매우 덥고 건조한 사막에 있다. 자연경관이 수려해 밤이면 쏟아지는 별들을 볼 수 있다. 일출과 일몰을 보노라면 대자연의 위대함에 절로 숙연해진다. 2023년 촬영 / 서나래 제공 2023년에 촬영한 뉴멕시코주 고스트 랜치 숙소와 자연경관 / 서나래 제공 첫 보건 요원들의 훈련은 혹독했다. 교실에서 수업을 듣고 인근 학교에서 교생실습을 하는 영어교사들과 달리 이들은 인디언보호구역과 병원에서 어려운 실습을 했다. 그 과정에서 죽어가는 환자들을 목격하기도 하고 감염 위험에 노출되기도 했다. 처음에는 120명의 훈련생이 고스트 랜치에 모였으나 나중에 한국행 비행기를 탄 단원은 고작 67명이었다. 많은 단원이 탈락하거나 자진해서 그만두었다. 1967년 12월 K-4 단원들은 경상북도와 강원도 보건소에 배치됐다. 군 소재지 보건소에 이들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에 관한 세부계획까지 전달되지는 않았다. 영어가 통하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선생님 대접을 받았던 기존의 평화봉사단원들과 달리 이들은 ‘보건소 미국 아저씨’ 혹은 ‘보건소 미국 아가씨’로 불려야 했다. 의료 현장의 최전선을 지키며 봉사활동을 했다. 3개월마다 보건 요원들을 대상으로 의료 지식과 기술을 공부하는 콘퍼런스가 열렸다. 살아남은 K-4 단원들은 끈끈한 전우애로 뭉쳤다. 2023년 고스트 랜치에서는 한국에서 온갖 고생을 다한 K-4 단원들은 미국에 돌아간 이후에도 연락을 이어갔다. 평화봉사단 선발 5주년에는 고스트 랜치에서 재상봉 행사를 열기도 했다. 10주년에도, 15주년에도 고스트 랜치에서 재상봉 행사를 가졌다. 그때부터는 배우자와 아이들을 동반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은퇴하는 시점이 되자, 아예 본격적으로 매년 고스트 랜치에서 일주일간 재상봉 행사를 개최하기로 했다. 이제는 손자·손녀를 포함한 3대가 모이는 행사가 됐다. 2023년 8월 1일부터 7일까지 열린 K-4 재상봉 행사에 참여해 이들을 관찰하고 인터뷰했다. K-4 단원들은 1967년부터 지금까지 고스트 랜치의 바위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한 사람의 사진이 가족사진이 되고, 사진 속의 아이들이 자라나 어른이 되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K-4 단원들이 합심해 50여 년 넘게 이 모임을 지속하고 있다는 점, 가족을 동반해도 이 모임이 전혀 스트레스가 되지 않는다는 점에 필자는 큰 충격을 받았다. ‘K며느리’의 입장에서 시아버지 혹은 시어머니의 젊은 날 친목회에 남편과 함께 따라가 일주일이나 머문다는 건 도무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다. 이들은 50여 년간 축적된 모임의 사진과 자료 등을 모아 아카이브로 만드는 작업도 추진하고 있었다. 그 작업을 하는 분께 혹시 한국 어디서 근무하셨냐고 물었다. 돌아온 답은 이랬다. “그 당시에 사전 훈련은 아주 빡셌죠. 저는 한국에 가본 적이 없어요. 선발 과정에서 탈락(deselected)했거든요. 그래도 고스트 랜치가 좋고, 이 사람들이 좋아서 여태껏 이 모임에 나오고 있어요.” 이들이 매년 고스트 랜치에 모인다. 1967년 9월 고스트 랜치에서 사전 훈련이 어땠는지, 그해 12월 서울이 얼마나 추웠는지, 1968년 강원도와 경상북도의 보건소 상황이 어땠는지를 이야기한다. 손자·손녀를 모아놓고 한국 노래를 부른다. 이게 어디 상상이나 할 법한 일인가. 나도 잘 믿기지 않았다. 적어도 이번에 직접 가서 두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레이디경향(총 7 건 검색)
- 박순구 대표이사, 주한글로벌기업대표이사협회 신임회장 맡아
- 2020. 04. 21 09:33 재테크
- 박순구 리치텍코리아 대표이사 산업통상자원부 소관 사단법인인 주한글로벌기업대표이사협회(G-CEO) 신임 회장으로 박순구 리치텍코리아 대표이사가 선임됐다. ‘G-CEO’ 사무총국 김종철 상임대표는 20일 “제3대 회장으로 박순구 리치텍코리아 대표이사가 선임됐으며, 수석부회장은 아레이몬드코리아 김종세 대표이사가 맡게 됐다”고 전했다. 박순구 신임 회장은 미국 서던켈리포니아대학(USC)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은 전문 글로벌 경영인으로, 2000년 페어차일드코리아에 입사한 이후 리치텍코리아 매니저를 거쳐 2010년부터 현재까지 리치텍코리아 대표이사로 재직 중이다. 대만에 본사를 둔 리치텍은 반도체·회로 설계 부문 글로벌기업으로, 판교 테크노밸리에 한국지사가 위치해 있다. 1100여 명의 직원이 대만과 한국·중국·미국·유럽에서 근무하고 있다. 신임 박회장은 “G-CEO는 2005년 설립 이후 현재까지 15년간 외국계기업 한국지사장들의 대표적 모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며 “더 많은 회원사가 함께할 수 있도록 협회 외형 확장을 위해 노력하고, 5만여 외국계기업 한국지사장들의 권익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수석부회장으로 선임된 김종세 대표이사는 “신임 회장을 도와 모임이나 행사 때 즐겁고 유익한 시간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어레이몬드는 프랑스에 본사를 둔 자동차 부품 기술 분야의 선도기업으로 전 세계 25개국에서 7200여 명의 전문가들이 일하고 있다. 한국지사는 화성시 동탄에 있으며, ‘2019년 하반기 경기도 일자리 우수 기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한편 ‘G-CEO’는 전 세계 500여개 주한외국기업의 대표이사들로 구성된 비영리 사단법인으로, 자기 성장을 위해 세미나를 열거나 회원사 간의 네트워킹을 통해 비즈니스 교류에 힘쓰고 있다. 사회공헌 활동도 벌인다.
- ‘세 가지 삶을 사는 그녀’ 주한피지관광청 지사장 박지영
- 2015. 03. 02 15:59 화제
- 30대 중반에 한국인 최초로 주한피지관광청 지사장 자리에 오른 박지영은 두 아이의 엄마이자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지역학 석사과정을 수료하고 박사과정을 준비하고 있는 학생이다. 회사, 가정, 학교에서 각기 다른 세 가지 삶을 살고 있지만 어느 하나 소홀한 것이 없다. 24시간이 부족할 만큼 꽉 찬 하루하루를 보내는 그녀의 삶을 들여다봤다. 여행으로 행복을 전하는 사람 남태평양의 333개 푸른 보석의 섬들로 이뤄진 나라 피지. 태초의 자연을 고스란히 간직한 이곳은 매년 6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방문하고, 특히 정재계 인사들과 할리우드 스타들이 가장 즐겨 찾는 관광지로 유명하다. 박지영(36) 주한피지관광청 지사장은 13년째 국내에 피지라는 국가를 알리고 여행을 통한 양국 문화 교류를 위해 힘쓰고 있다. 2002년 피지명예총영사관에 공채로 입사한 이후 피지관광청 대표를 거쳐 3년 전 지사장으로 임명된 그녀는 풍부한 현장 경험과 성실하고 열정적인 태도로 업계에서 인정받는 커리어 우먼이다. “제 직함을 듣고 피지에서 오래 살았냐고 질문하는 분들이 많아요. 대학 시절 1년 반 정도 미국에서 유학한 경험이 전부인 한국 토박이예요(웃음). 영사관에 입사하면서 피지라는 나라와 인연을 맺게 됐는데, 우연인 동시에 행운이었어요. 당시 대한항공에서 인천-피지 직항 운항을 시작하면서 국내에서 피지가 여행지로 주목받게 됐거든요.” 남태평양의 낯선 나라가 한 번쯤 꼭 가보고 싶은 관광지로 자리매김하기까지, 박 지사장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영수증 처리, 공문 결재 같은 행정 업무부터 각종 이벤트, 홍보 행사 등 피지 관광과 관련한 모든 일을 총괄하는 그녀다. “관광업이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아요. 1년에 3회 정도 현지 출장을 가는데, 휴양지에서도 밤낮으로 회의하기 바쁘죠. 그래도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밝은 일을 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관광지는 흉볼 게 별로 없잖아요(웃음), 좋은 것만 듣고 보여주다 보니 생각이나 가치관도 밝고 긍정적으로 변하는 것 같아요. 다양한 인종의 친구들을 사귀다 보니 사람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견도 많이 줄어들었어요. 누굴 만나도 공평하게 대하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죠.”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박 지사장은 결혼 후 둘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로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지역학 공부를 시작했다. 피지·남태평양 전문가로 성장하겠다는 꿈을 위해서였다. 지역학 박사 학위를 딴 뒤 저개발 국가들을 돕는 게 그녀의 목표다. “보통 직장인들은 퇴근 뒤에 수업을 듣는데, 저는 아이들을 돌봐야 하기 때문에 야간 수업은 못 들어요. 일반 학생들과 함께 주간 수업을 듣고 과제도 철저히 해가죠. 서울대학교는 직장인이라고 봐주질 않거든요(웃음). 다행히 관광청은 업무 시간을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는 편이라 일을 빨리 끝내고 학교로 달려가요. 요즘은 공부에 재미가 붙어서 어려운 과제를 받고 헤쳐 나가는 과정 자체를 즐기고 있어요.” 완벽주의 성격 탓에 대충 하는 걸 못 본다는 그녀는 이수 학점을 꽉 채워 들으면서도 평점 평균 B+ 이상의 훌륭한 성적을 유지했다. 욕심이 많아 일과 육아, 학업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으려 애쓰다 보니 주어진 하루, 24시간이 부족하기만 했다. 석사과정을 마치기까지 2년 동안 4시간씩 자며 독하게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스스로를 이토록 극한 상황으로 몰아붙이는 이유는 뭘까. “저는 에너지가 너무 많아서 주체가 안 되는 사람이에요(웃음). 일하고, 아이들 돌보고, 공부하면서도 매일 피트니스센터를 가요. 인생은 마라톤이라고 하는데, 하루하루를 100m 달리기하듯 살고 있네요. 그럼에도 지치지 않는 이유는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새로운 것들을 끊임없이 보고 듣고 성장하는 일이 뿌듯해요.” 유난히 지독한 감기 같았던, 지난날 억대 연봉을 받는 워킹 맘이자 좋은 학벌, 아름다운 외모, 법조인 남편까지 부족한 것 없어 보이는 그녀지만 온실 속의 화초로 자란 건 아니다. 구로공단에서 일하던 아버지의 월급은 네 가족 생활비로 빠듯했고, 고등학교 3학년 무렵에는 부모님의 이혼 소송을 지켜봐야 했다. 유년 시절에 받은 마음의 상처가 깊다. “중학교 때만 해도 공부를 못했어요. 소위 ‘날라리’ 같은 친구들이랑 어울려 놀기 바빴죠.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정동길을 걷다가 지금의 모교인 이회여자외국어고등학교를 봤어요. 그 동네가 워낙 예쁘잖아요. 구로동 변두리가 제 세계의 전부였는데, 정말 예쁜 세상을 발견한 거죠. 이 학교에 다니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3개월간 독서실 바닥에서 자면서 공부했어요. 참고서가 해질 때까지 보고 또 봤더니 시험에 덜컥 합격했지 뭐예요(웃음).” 그때부터 ‘하면 된다’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대학 재학 시절 편도 항공권과 100달러만 들고 미국 유학을 떠난 것도 스스로를 믿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베이비시터로 일하고 학교 화장실 청소를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당시 학교 식당의 밥 한 끼가 2달러였는데 그 돈이 아까워서 밥을 못 먹었어요. 일주일에 한 번 차이나타운 근처에 있는 시장에 가서 장을 봐서 볶음밥을 만들고, 그걸 얼려놓았다가 데워 먹으며 살았어요. 유학 생활이 제게 가르쳐준 가장 큰 한 가지를 꼽으라면 어디 가서 뭘 해도 살아남을 수 있는 자생력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웃음).” 그녀의 사회적 출발선은 결코 남들보다 앞서 있지 않았다. 스스로가 욕심내 일구고 쟁취하며 만들어온 삶. 대학 졸업 뒤 뉴저지 상무성의 공무원을 거쳐 피지명예총영사관에 입사할 때만 해도 이만하면 잘해온 거라고, 힘든 시절은 다 지나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산다는 건 늘 뒤통수를 맞는 일이라더니. 스물셋에 희귀 암 선고를 받았다. ‘인생이란 정말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어서 절대로 우리가 알게 앞통수를 치는 법이 없다’라던 어느 극본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암이라고…. 무통 주사를 10대씩 맞을 정도로 통증이 심했어요. 다행히 초기에 발견해서 수술로 제거했고, 지금껏 큰 문제없이 살고 있어요. 그렇게 인생의 큰 고비를 넘기고 나니 주어진 일과 시간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됐어요. 힘든 상황이 닥쳐도 불평하기보다는 이번엔 어떤 교훈을 얻을까 기대하는 든든한 배짱도 생겼고요.” 고치지 못하는 병이 아니라서, 어느 날 갑자기 큰 사고를 당해 몸 한 부분이 불편해진 것도 아니라서, 무엇보다 살아 있어서 오히려 감사했다고 하니 타고난 성격이 무던하고 낙천적이다. 잘되고 못되는 것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중심을 묵직하게 잡고 흔들리지 않는 자세가 그녀의 성공 포인트가 아닐까. “저는 문제가 생기면 이성적으로 행동해요. 물론 당황하고 섭섭한 마음도 들지만 그건 잠시 뿐이고 냉정하게 해결 방법을 고민하죠. 아이가 아플 때도 마찬가지예요. ‘왜 하필 우리 애가 독감에 걸리느냐’, ‘속상해 죽겠다’라는 식으로 감정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어디서 어떻게 치료해야겠다’라고 생각을 정리해요. 워킹 맘들은 아이가 아프거나 집에 우환이 있으면 자신을 자책하면서 괴로워하잖아요.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받아들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의외로 단순하게 접근할수록 해결 방법도 심플해지곤 해요.”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딸과 여섯살 난 아들을 키우면서도 최연소 피지관광청 지사장으로 승진한 그녀이기에 일하는 엄마들을 위한 조언이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새벽 2시, 워킹 맘이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 한국보다 4시간 빠른 피지의 시계에 맞춰 하루를 보내는 그녀. 벌써 10년째 동도 트기 전인 새벽 4시에 업무를 시작한다. 대학원에서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는 가뜩이나 이른 기상 시간을 2시간 앞당겼다. 아이들이 깨기 전 일어나 수업 과제를 하고 책을 읽기 위해서다. “새벽 시간은 회사, 남편, 아이들로부터 해방돼서 오롯이 저 혼자만을 위한 ‘선물’ 같은 거예요. 여러 가지 역할에 묶여 있다 보면 박지영이라는 이름으로 사는 순간이 별로 없잖아요. 공부도 하고, 이런저런 생각과 고민들을 떠올리다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정리가 좀 돼요. 매일 새롭게 스스로를 알아가는 거죠. 그래서 새벽에 일어나는 일이 보이는 만큼 괴롭거나 힘들지 않답니다(웃음). 30분이라도 먼저 일어나서 도전해보세요.” 그녀는 매 순간을 충실히 살고 있다. 새벽엔 자신에게, 퇴근 뒤 저녁엔 남편과 아이들에게 집중한다.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척척 해내는 원더우먼 같은 박 지사장이 밝힌 의외의 원칙. 욕심내지 말고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하라! “퇴근 뒤 2시간 동안은 아이들과 놀아주고 대화하는 데만 모든 신경을 쏟아요. 아이들과 그렇게 약속했거든요. 피곤하고 쉬고 싶지만 ‘2시간의 원칙’은 반드시 지켜요. 아이들도 그걸 아니까 그 이후에는 엄마가 바쁘다고 해도 이해해줘요. 서로가 약속을 지키면 아이들도 저도 짜증내고 싸울 일이 없어요. 지금 자신이 있는 곳에서 집중하면 돼요. 회사에서 집 걱정하고, 반대로 퇴근 뒤에도 회사 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지 않나요?” 첫아이를 키우면서 박 지사장은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 살기 시작했다. 10분도 허투루 쓰는 법이 없다. 시간을 돈으로 환산할 수는 없겠지만 그녀에게 시간이란 본인이 가진 가장 값비싼 명품이다. “아이들 학원 데려다주고 나면 10분씩 자투리 시간이 남아요. 멍하니 앉아 있거나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면서 보낼 수도 있지만, 저는 그럴 때 책을 읽거나 해야 할 과제를 정리해요. 피지 현지로 이메일을 보내기도 하고요. 해야 할 일을 앞두고 마음은 분주한데 정작 결과물이 시원치 않다면 시간 관리를 잘했나 돌아볼 때예요. 빈 자투리 시간들이 분명 있을 거예요.” 집요할 만큼 자신을 관리하고 헌신적으로 일하며 살고 있지만 삶의 우선순위는 가족이다. 성공과 가족의 행복이 양립할 수 없다면 그녀는 후자를 택할 거라고 했다. “아직은 큰 어려움 없이 일과 육아를 잘 병행해왔지만, 앞으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순간을 맞닥뜨릴 수도 있겠죠. 만약 크게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오더라도 아이들이나 남편이 원하지 않으면 그 길로 가지 않을 거예요. 제 겉모습이 워커홀릭처럼 보여도 실제 집에서는 매일 아침 아이들 밥 먹여 보내느라 전쟁 치르는 열혈 엄마일 뿐이에요(웃음). 유치원 엄마들 모임에도 빠지지 않고 나가고요.” 아이들에게 “엄마처럼 살고 싶다”라는 말을 듣는 게 꿈이라는 박 지사장은 그래서 자신의 삶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한다고 했다. 매사에 자신감 넘치는 태도와 여유 있는 미소를 보면 누구라도 그 말이 진실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를 위해 열심히 투자하고 있어요. 명품 가방이나 옷을 사는, 그런 의미의 투자 말고 지식을 쌓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좋은 기운도 얻죠. 여행을 통해서 세상도 넓게 보려 하고요. 만나는 이들에게 좋은 향기를 풍기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아이들에게는 닮고 싶은 엄마가 되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는 제가 먼저 멋진 사람이 돼야 하잖아요. 박지영이라는 사람이 분초를 아끼며 열심히 사는 이유예요.” 박지영 지사장은 선명한 사람이다. 목소리도, 말투도, 생각과 의사 표현도 거침없이 시원시원하다. 그래서 몇 시간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상대의 머릿속에 또렷하게 새겨놓는다. 열렬히 뜨거운 마음과 집요하리만큼 파고드는 집중력으로 세 가지 인생을 살아가는 그녀의 현재가 눈부시게 아름답다. <■글 / 서미정 기자 ■사진 / 장태규(프리랜서) ■사진 제공 / 주한피지관광청 ■의상 협찬 / DINT(02-3442-0220) ■헤어&메이크업 / W 퓨리피(02-549-6282)>
- 두 아이와 함께 희망의 레이스 완주한 션
- 2012. 06. 29 18:15 연예
- 생각해보면 과연 살면서 한 번이라도 겪어본 적이 있었던가 싶다. 가슴이 터질 만큼 벅찬 마음으로 달려본 경험 말이다. 이제는 ‘가수 션’이라는 이름보다는 ‘기부 전도사’로 불리는 션은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 멋진 경험을 맛봤다. 가난으로 고통받는 전 세계 어린이들을 위해 하랑, 하율 두 아이와 함께 의미 있는 레이스를 펼친 것. 뙤약볕이 내리쬐던 여름날, 날씨보다 더 뜨거운 의지로 숨을 헐떡이며 달리던 션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보는 이들의 마음까지 감동으로 벅차오르게 만들었다. 기적을 선물하기 위해 달린다 지난 6월 10일 아침 서울 송파구 올림픽 주경기장에는 ‘일요일의 여유’ 대신 뜨거운 에너지로 중무장한 이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스포츠 브랜드 ‘뉴발란스’의 주최로 열리는 미션 러닝 페스티벌 ‘2012 뉴레이스(NEW RACE)’에 참여하기 위한 사람들이었다. 친구와 함께, 연인과 함께, 가족과 함께 경기장을 찾은 참가자들은 대회 시작 전 두근거리는 긴장감을 안고 부지런히 몸을 풀기 시작했다. 땀 흘리고 달리며 즐거운 추억도 만들고 행복한 성취감을 맛보고자 모여든 1만5천여 명의 참가자들은 밝은 얼굴로 완주를 다짐하며 출발선 앞에 섰다. 설레는 얼굴로 출발 신호를 기다리고 선 사람들 사이에서 무척 낯익은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단단히 운동화 끈을 조여 맨 채 유모차 한 대를 앞세우고 서 있는 션(41)이었다. 아들 하랑이(6)와 하율이(4)를 나란히 유모차에 태우고 10km 달리기에 나선 션은 한국컴패션 홍보대사로서 생각을 같이하는 후원자들과 함께 나눔을 전하기 위해 마라톤에 참가하게 됐다. ‘션과 후원자의 ONE ACT’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이번 프로젝트는 하나의 행동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의미를 담은 ‘ONE ACT 캠페인’의 일환으로, 가난의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선물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다. “제가 무사히 완주를 해내면 미리 약속하신 100분께서 각각 한 명의 어린이들에게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시는 거예요. 방법은 어렵지 않아요. 한 달에 4만5천원 정도의 금액을 지원하면서 그 아이와 편지도 주고받고 교감하고 그 아이들의 삶을 응원해주는 거예요. 경제적인 부분에 대한 도움뿐 아니라 사랑과 믿음을 심어주는 일이죠.”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션·정혜영 부부는 지난 2010년부터 한국컴패션의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전 세계 26개국 가난한 어린이들을 후원자와의 1:1 결연을 통해 성인이 될 때까지 양육하는 한국컴패션. 이 곳을 알게 된 2005년 맺은 6명의 어린이와 결연을 시작으로 꾸준히 후원을 지속해온 부부는 현재 전 세계 400여 명 어린이의 부모가 됐다. 이와 더불어 션은 이 아름다운 나눔을 더욱 많은 사람들이 알고 실천할 수 있도록 돕는 데도 적극적으로 앞장서고 있다. 마라톤 대회 참여 역시 나눔의 기쁨을 알리고 실천하기 위한 활동의 일환이다. 션은 2009년부터 후원자 100명 결연을 목표로 계속해서 마라톤에 출전해왔고 매년 100여 명의 후원자를 나눔의 세계로 이끌었다. 지난해부터는 아이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아빠의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달리고 있다. “제가 그동안 후원 대상 아이들이 사는 나라에 몇 번 가봤는데요. 정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열악하고 힘든 환경에서 아이들이 자라고 있었어요. 잠 잘 집도 변변치 않고 심지어 무덤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살기도 해요. 후원을 실천하는 것은 그런 아이들의 배고픔을 해결해주고, 꿈과 희망을 키워나갈 수 있는 기적을 선물해주는 굉장한 일이에요.” 세상에 좀 더 많은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는 션의 레이스에는 그와 특별한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박지훈(38)·은총(10) 부자도 함께했다. 여섯 가지나 되는 불치병을 갖고 태어난 중증 장애아 은총이에게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고자 철인 3종 경기를 완주한 아버지 박지훈씨의 사연을 접한 션은 이들 부자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에 연락을 취하게 됐고, 그 후로 지금껏 끈끈한 관계를 지속해오고 있다. 지난해 마라톤 대회에도 함께 참여한 션과 박지훈씨는 선의의 경쟁을 통해 무사히 10km를 완주해내자며 서로를 격려하며 끝까지 달렸다. 더 많은 이들과 함께하는 나눔의 실천 올해로 네 번째 참여하는 ‘나눔 마라톤’을 앞두고 좋은 성과를 올리기 위해 부지런히 준비와 연습을 해온 션이지만, 그래도 10km를 완주하기란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두 아들을 태운 유모차의 무게도 꽤 되는데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흐를 정도로 무더운 날씨에 수많은 인파 속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헤쳐가며 뛰어야 했기 때문이다. 또 자신의 발걸음에 후원을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의 내일이 달렸다는 책임감도 묵직하게 다가왔다. 직접 뛸 수가 없기에 유모차를 탈 나이가 지났음에도 레이스 내내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하는 하랑·하율이도 힘든 표정이 역력했다. 무사히 완주할 수 있도록 힘을 달라는 기도와 함께 들려온 출발 총소리. 션은 힘차게 발걸음을 뗐다. 아이들에게 최대한 충격이 가지 않도록 부드럽게 유모차를 밀며 앞서 나가는 다른 참가자들이 방해받지 않도록 배려하는 여유까지 보였다. 잠실대로를 지나 코스의 절반 정도를 지나는 몽촌토성역 부근에서는 살짝 속도가 늦춰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주변 사람들의 응원에 힘입어 곧 다시 페이스를 회복했다. 곳곳에 경사진 부분이 있어 참가자 대부분이 힘들어했던 올림픽공원 외곽 코스 또한 순조롭게 지나 마침내 올림픽공원 88잔디마당에 설치된 결승선을 멋지게 통과했다. 션의 완주 결과는 53분 30초. 지난해(1시간 3분 30초)에 비해 10분이나 단축한 기록이었다. 땀으로 범벅된 얼굴로 ‘피니시라인’을 통과한 션은 세상 어느 누구보다 뿌듯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갑갑한 유모차에서 내린 하랑·하율이도 아빠에게 매달리며 아빠의 도전 성공을 축하했다. 마음으로 응원하며 그의 레이스를 지켜보던 이들도 뜨거운 환호로 함께 성공의 기쁨을 나눴다. 또 아주 근소한 차이로 아깝게 ‘션 형님을 이겨보겠다’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은총이 아빠 박지훈씨에게도 모두들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웃으면서 달리니 혼자 연습할 때보다 좋은 기록이 나왔네요. 내년에는 더 열심히 준비해서 40분대 기록을 내고 싶어요. 흔히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잖아요. 저뿐만 아니라 같이 뛴 모든 분들에게 오늘의 경험이 앞으로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될 거라 믿어요. 더불어 후원을 통해 한 아이의 손을 잡아줌으로써 다른 사람의 인생에도 꿈과 희망을 선물했으니 더욱 값지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해요.” 대회를 주최한 뉴발란스는 ‘2012 뉴레이스’ 참가자의 참가비 중 일부로 기금을 마련해 컴패션 어린이센터에서 1:1 후원을 받는 어린이들의 양육 환경을 개선하는 데 기부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자녀의 돌잔치 비용으로 불우한 이들을 돕고 전 세계 수백 명 아이들의 부모가 되어 그들의 삶을 응원하며, 광고의 수익금을 기부하고 어려운 환경에 처한 이들을 위한 다양한 일들을 기획하는 등 생활 속에서 언제나 나눔을 실천하고 있는 션·정혜영 부부. ‘나눔’으로써 더욱 행복해지는 그들의 모습은 주변 사람들에게 커다란 감동과 더불어 함께하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을 저절로 품게 만든다. 앞으로도 부부의 나눔 레이스는 계속해서 우리의 심장을 뛰게 만들 것 같다. <■글 / 이연우 기자 ■사진 / 박동민>
- 35년간의 인연! 주한 美대사 캐슬린 스티븐스의 한국 이야기
- 2010. 12. 03 15:48 화제
- ‘한국은 내게 아주 특별한 나라입니다. 아니, 특별하다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한국은 많은 면에서 내게 제2의 고향입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미국 남서부와는 매우 다르지만 한국은 낯설지 않습니다. 내 한국어가 유창하지는 않지만 친절한 한국 사람들 덕분에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35년 전 평화봉사단원으로서 이곳에서 일하던 초기 시절뿐 아니라 주한 미국 대사로서 근무한 지난 2년 동안에도 한국 사람들의 따뜻함과 큰 관심은 늘 변함이 없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심은경입니다.”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국 대사의 도착 성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975년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 와 충청남도 예산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기 시작해 이후 2008년 9월 주한 미국 대사로 부임한 그녀는 한미 수교 후 첫 여성 미국 대사로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녀와 한국의 인연은 특별하다. 1975년 미국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을 처음 찾았고 충청남도 예산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하며 외교관 시험에 합격해 1978년부터 여러 나라를 돌며 외교관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 후 1984년에 다시 한국에 돌아와 1987년까지 주한 미국 대사관 정무팀장으로 근무했다. 그녀는 인생에서 가장 보람찬 순간으로 한국에서 평화봉사단원으로 활동했을 때를 꼽는다. 당시 동료 교사가 지어준 심은경이라는 한국 이름도 있다. 이제 중년이 된 학생들은 여전히 그녀를 따뜻한 선생님으로 기억한다.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한국 문화를 누구보다 잘 이해해 한글 홍보대사로도 활동 중이다. 임기가 시작된 2008년부터는 ‘cafe USA’와 ‘심은경의 한국 이야기’라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글을 올리며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11월 중순, 그녀는 그동안 보고 느낀 한국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담은 에세이 좥내 이름은 심은경입니다좦를 출간했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하는 그녀가 궁금하다. SayⅠ 외교관 엄마의 교육법, 함께 터득하며 살기 나는 미국 남서부 지역에서 태어나 독립심과 개척정신을 몸으로 익히면서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어릴 적부터 이사를 많이 다녔고 그 과정에서 배운 도전에 대한 열정은 내가 조국을 떠나 먼 나라에서 살아갈 때마다 나를 굳건히 지탱해주었습니다. 1986년에 아들이 태어나면서 나 또한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아들을 기르는 데 전념했습니다. 나의 직업상, 아들이 어떤 학교에 갈 수 있는지, 언제 학교에 들어가야 하는지도 고려해야 했습니다. 내가 어디에서 일을 하는가도 아들의 진로를 위해 고려해야 할 사항이었습니다. 또 내 아들은 나를 따라 계속 이사를 다녀야 했기 때문에 사회에 적응하는 데 융통성이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그런 점을 교육시키려 좀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가령 우리가 유고슬라비아로 가기로 결정했을 때 나는 그곳에 내전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미국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나와 아들은 항상 어떠한 상황에서도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을 키워야만 했습니다. 나는 가급적 틈날 때마다 집중적으로 아들과 많은 추억을 가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함께 등산을 하고 자전거를 타는 등 외부 활동으로 아들과의 연대감을 잃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어릴 적 아들은 바쁜 외교관 엄마 때문에 많이 힘들어했지만 지금은 나보다 훨씬 진취적이고 독립적인 성인이 돼 자기의 삶을 잘 이끌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보람을 느낍니다. 아들은 지금 보스턴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는데 자신의 일과 삶에 매우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SayⅡ 삽살개 두 마리가 가르쳐준 한국 2008년 한국에 오면서 한 가지 서운했던 점은 13년 동안 나의 동반자가 돼주었던 개가 세상을 떠나 함께 오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 존스홉킨스대학교에서 봤던 강아지들이 불현듯 떠올라 즉시 온라인으로 삽살개를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충청남도 홍성에 삽살개를 분양해주는 사람이 있다고 해 그곳으로 내려가 암수 한 쌍과 그들이 낳은 일곱 마리의 강아지를 만났습니다. 한 마리만 가져오기에는 강아지들이 너무 예뻐서 결국 암컷 두 마리를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돌아오면서 강아지들한테 지어줄 이름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마침 강아지 분양자가 나에게 준 명상에 관한 책 두 권이 눈앞에 보였습니다. 한 권은 「여유」라는 책이었고, 다른 한 권은 「무심」이라는 책이었습니다. ‘여유’와 ‘무심’이란 단어가 강아지를 키우기에 좋은 마음가짐을 표현하는 아주 멋진 단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강아지들에게 각각 ‘여유’와 ‘무심’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여유와 무심이라는 단어를 영어 단어 하나로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이에 관해 한국 친구들에게도 조언을 구하고 미국 친구들에게도 이 단어에 대해 설명하고자 노력했지만 결국 깨달은 것은 번역이 안 되는 개념들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이야기들을 하다 보니 어느새 철학이나 사고방식 같은 더 큰 주제를 얘기하게 됐고, 나에게 한국 문화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이 생기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언어를 잘 모른다고 해도 배움은 그만 한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제 여유와 무심이는 이름을 부르면 반응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는 아직도 그들의 이름을 정확히 어떻게 번역하고 설명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SayⅢ내가 처음으로 배운 한국어 “물 주세요” 많은 분들이 내게 한국어를 어떻게 배웠는지 물어봅니다. 나는 아직도 처음으로 배운 한국어를 생생히 기억합니다. 1975년 7월 서울에 왔을 때는 날씨가 매우 더웠습니다. 에어컨은 어디에도 없었고 나는 목이 너무 말라 거의 탈수 상태였습니다. “물 주세요.” 이것이 내가 처음으로 배운 한국어 문장입니다. 그 이후부터 나는 예산으로 발령이 나 이동하기 전까지 청주에서 10주 동안 한국어를 배웠습니다. 예산에서 근무하면서 한국어가 갖고 있는 음악적인 부분들도 익혔고, 그때의 경험은 내가 외교관이 된 이후에 보다 공식적인 언어 교육을 받을 때 도움이 됐습니다. 모국어와 너무도 다른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오페라와 같은 고차원적 음악을 배우는 것과 비슷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페라가 지닌 아름다움과 풍부함에 더욱 매료되듯, 나는 한국어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글의 아름다움은 언제나 나를 매료시킵니다. 한국어가 만들어내는 소리와 훌륭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데 대한 나의 존경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만 갑니다. 한글 홍보대사로서 내가 한글에 대해 꼭 알아야 하는 사항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고민하게 됐습니다. Say Ⅳ워싱턴에서도 한식 예찬, 평생 먹고 싶은 맛 한국에 다시 돌아와 느꼈던 가장 큰 기쁨 중 하나는 언제나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수년 동안 내가 근무한 곳에서 항상 한국 음식을 찾았습니다. 나는 워싱턴DC에서도 한국을 전혀 방문해본 적이 없는 친구들에게 한식을 대접하는 것을 즐겼으며, 내 친구들은 한식의 다양성과 창의성에 놀라움을 표현했습니다. 1970, 80년대 한국에 살 때 나는 집에서 먹든 외식을 하든 전체 식사에 어울리는 반찬을 정하는 데 고심했던 기억이 납니다. 반찬과 금방 지은 밥, 맛있는 국, 그리고 마지막에 내오는 뜨끈한 숭늉이 있는 정통 한정식 식당을 찾아가는 것을 즐겼습니다. 이 같은 식사의 핵심에는 늘 신선한 나물이 있었습니다. 내게 한식이란 항상 신선한 채소였습니다. 예컨대 나는 백반과 제철 반찬들을 좋아합니다. 맛, 건강, 음식의 수준 유지에서 한국은 최고 중 하나입니다. 만약 누군가 내게 평생 한 종류의 음식만 먹고 살아야 하니 선택하라고 하면 아마도 한식일 것입니다. 다만 좋아하는 한국 요리를 딱 한 가지만 고르라고는 하지 마세요. <■ 정리 / 윤현진 기자 ■사진제공 / 중앙북스 ■참고 서적 / 「내 이름은 심은경입니다」(캐슬린 스티븐스 저, 중앙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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