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432 건 검색)
- 천주교·원불교도 “윤석열 탄핵하라” 규탄 성명
- 2024. 12. 04 15:44사회
- ... 발표하게 됐다”고 밝혔다. 또 윤 대통령을 세례명인 ‘윤석열 암브로시오’라고 지칭하면서 “천주교 신자로서 너무도 부끄럽고 민망하다. 그이가 어떻게 변명하든 본래 천주교인이었다는 그 사실은...
- 탄핵, 국내외 영향
- 천주교·기독교 “윤 대통령 국민 앞에 사과하고 책임져야”
- 2024. 12. 04 12:52정치
- ...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고 밝혔다. 주교회의는 4일 ‘비상계엄 선포와 해제를 바라보는 한국 천주교회의 입장’을 발표했다. 주교회의는 “군사 정권 시절에나 선포되었던 계엄령이 2024년 오늘날...
- 탄핵, 국내외 영향
- “대통령의 사명 저버려…파면을 선고하자” 천주교 사제들도 목청
- 2024. 11. 28 20:55문화
- ... 촉구’ 시국선언 윤석열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시국선언이 대학가에서 확산하고 있는 가운데 천주교 사제 1460여명이 “대통령의 사명을 모조리 저버린 책임을 물어 파면을 선고하자”는 내용의...
- 천주교 사제 1466명 “어찌 사람이 이 모양!···윤석열에 파면 선고하자” 시국선언
- 2024. 11. 28 17:16문화
- ... 뽑을 권한뿐 아니라 뽑아버릴 권한도 함께 지닌 주권자이니 늦기 전에 결단하자”고 촉구했다. <천주교 사제 1466인 시국선언문> 어째서 사람이 이 모양인가!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스포츠경향(총 28 건 검색)
- ‘성지순례’ 개신교·불교·천주교 성직자 한 자리에···‘성소수자’ 토론
- 2023. 11. 13 10:57 연예
- MBC 에브리원 예능 ‘성지순례’ 14일 MBC 에브리원 예능 ‘성지순례’에서는 대한민국 3대 종교 성직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성 소수자(LGBTQ)’에 대해 다채로운 의견을 나눈다. 이날 방송은 SNS ‘핫 플레이스’들을 소개하는 ‘좋아요의 성지’ 특집으로 꾸며진다. 속세의 트렌드를 따라나선 개신교, 불교, 천주교 3대 종교 성직자들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기대가 모인다. 이날 방송에는 만능 재주꾼 차성진 목사, 카리스마 넘치는 송산 스님, 재간둥이 N잡러 유경선 신부가 새얼굴로 출연한다. 이태원을 방문한 성직자들은 성 소수자를 주제로 논의를 펼친다. MC 풍자는 “‘언젠가는 이 주제가 나오겠다’고 생각했다”며 본인의 의견을 전한다. 과연 성 소수자에 대한 성직자들의 의견은 무엇일지, 또 이날의 대화가 우리에게 어떤 생각을 안길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첫 만남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환상적인 성직자들의 케미가 안방극장에 유쾌한 웃음을 전한다. 방송은 14일 화요일 오후 8시 30분.
- [체널예약] ‘일타강사’ 다른 듯 비슷한 불교와 천주교의 만남
- 2023. 01. 09 17:36 연예
- MBC ‘일타강사’가 불교와 천주교, 두 종교의 허물없는 만남을 유쾌하게 그려낸다. 오는 11일 오후 9시 방송되는 MBC 강의 프로그램 ‘일타강사’에서는 ‘갓생’ 그 자체의 삶을 살고 있는 성진 스님과 하성용 신부의 다채로운 이야기를 들려줄 예정이다. 방송에는 불교의 성진 스님, 천주교의 하성용 신부의 색다른 만남과 함께 종교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 수강생들의 흥미를 제대로 자극한다. 성진 스님과 하성용 신부는 서로 다른 종교임에도 인연이 닿은 계기를 이야기하던 중, 수강생 노사연과의 필연 같은 우연을 발견한다. 이어 ‘만남 3인조’를 결성, 세 사람은 노사연의 대표곡 ‘만남’을 부르며 시작부터 강의 열기를 후끈 달아오르게 만든다. 완전히 다를 것 같은 두 종교에도 공통점이 있다고 해 이들 이야기에 눈길이 쏠린다. 김호영은 “대부분 신부님들이 어머님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라고 궁금증을 드러내고, 하성용 신부는 해명 아닌 해명을 하며 그 이유를 밝힌다. 덧붙여 하성용 신부의 평소 어머니와 5분 이상 대화하기가 힘들다는 이야기에 성진스님도 공감을 표하고, 그 이유를 들은 수강생들은 웃음을 참지 못해 그 내용이 더욱 궁금해진다. 성진스님과 하성용 신부는 어머니를 향한 영상편지를 쓰지만 금세 감동은 파괴되고 웃음만 남게 됐다는 후문이다. 절이나 성당에 갈 때, 공통적으로 ‘이곳’으로는 다니면 안 된다는 주의해야 할 점을 짚어주며 수강생들이 미처 몰랐던 사실도 알려준다. 불교와 천주교의 색다른 만남이 담긴 MBC ‘일타강사’ 9회는 오는 11일 수요일 밤 9시에 방송된다.
- 정수경 인천대교수 ‘스테인드글라스’ 천주교 인천교구 보호 예술품 지정
- 2021. 07. 19 16:11 생활
- 인천가톨릭대학교는 스테인드글라스연구소 소장 정수경 교수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이 천주교 인천교구 보호 예술품으로 지정됐다고 19일 밝혔다. 지정 작품은 인천교구 해안성당 본당 내 좌·우·뒤 측 12개소를 비롯한 총 20점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으로, 인천교구 보호 예술품 1-1호부터 1-9호까지이다. 해안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은 2020년 인천가톨릭대학교 산학협력단 주관 우수 연구용역 프로젝트(프로젝트명 : 인천교구 해안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제작 용역/ 연구책임자: 그리스도교미술학과 정수경 교수)의 결과물이다. 인천가톨릭대학교 송태일 총장은 “본 인천교구 보호 예술품 지정은 인천가톨릭대 특화 전공인 스테인드글라스가 가톨릭 종교 예술의 인적·물적 대학의 특화 자원으로 인정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김완욱 교수, 천주교 생명위원회 생명의 신비상 본상 수상
- 2020. 12. 07 15:26 생활
-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류마티스내과 김완욱 교수가 천주교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에서 주관하는 ‘제15회 생명의 신비상’ 생명과학분야 본상을 수상했다 생명의 신비상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관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구현하기 위해 학술연구를 장려하고 생명수호활동을 격려하는 등 생명문화를 확산시키고자 지난 2006년에 제정됐다. 서울성모병원 류마티스내과 김완욱 교수김 교수는 태반성장인자가 류마티스 관절염을 일으킨다는 기전을 세계 최초로 발견했다. 태반성장인자는 태반 내 혈관의 형성과 영양막을 단단히 만들어주고 성장을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김 교수의 이러한 연구결과는 태반성장인자를 조절하는 방식의 난치성 면역질환 치료제 개발을 위한 청신호라고 볼 수 있다. 지난 20년간 김 교수는 자가면역성 류마티스 관절염의 원인에 관한 연구를 꾸준히 수행, 2012년 이후 최고 권위의 면역학-의과학 잡지에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난치병 치료연구를 위해 헌신해온 공로가 인정돼 생명과학분야 본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김 교수는 “앞으로 더 큰 역량을 발휘하여 최선을 다하라는 의미로 이번 상을 주신 것이라 생각한다”며, “서울성모병원의 의사로서 가톨릭 생명윤리에 근거한 연구를 통해 보다 정확하고 환우들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연구와 진료에 매진하겠다”고 밝혔다.
주간경향(총 6 건 검색)
- [우정이야기]이 땅에 천주교가 시작되다(2021. 08. 20 14:40)
- 2021. 08. 20 14:40 경제
- 우정사업본부(우본)는 ‘2021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탄생 200주년을 맞아 기념우표 63만장을 8월 20일 발행했다고 밝혔다. 성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기념우표 / 우정사업본부 김대건 신부(1821~1846)는 한국 최초의 가톨릭 사제다. 유네스코는 지난 2019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40차 총회에서 김대건 신부를 2021년 세계기념인물로 확정한 바 있다. 유네스코는 “김대건 신부가 평등사상과 박애주의를 실천하고 ‘조선전도’를 제작해 유럽 사회에 알리는 데 기여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우본은 한국천주교회 200주년이기도 한 올해를 기념해 우표에 고 문학진 화백이 그린 ‘성 김대건 신부 성인화’를 담았다고 밝혔다. 우표 변지(우표가 인쇄되지 않은 가장자리에 붙어 있는 흰 여백)는 최영철 바오로 작가의 ‘한국 순교 성인상’으로 채웠다.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상 밑으로 김대건 신부가 십자가를 지고 가시밭길 위를 걷는 모습을 담은 이 상은 충남 당진 솔뫼성지에 있다. 김대건 신부는 1821년 9월 1일의 충남 당진시 우강면 송사리의 ‘솔뫼’에서 태어났다. 열다섯 살에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다가 1844년 중국 지린성 창춘의 가톨릭 교우촌 소팔가자(小八家子)에서 부제품을 받고, 1845년 8월 1일 상하이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후 제주도를 거쳐 충남 강경 부근 황산포 나바위에서 활동하다가 1846년 6월, 메스트르 신부 일행을 입국시키려던 게 발각돼 같은해 9월 16일 효수형으로 순교했다. 경기 성남에서 노숙인을 위한 급식·자활시설 ‘안나의집’을 운영해온 김하종 신부(64)는 이탈리아에서 왔다. 본명은 빈첸시오 보르도다. 지난 1월에 나온 경향신문 인터뷰 기사(‘코로나보다 두려웠던 배고픔…밥의 위기, 빛은 있다’)를 보면, 그는 1987년 사제 서품을 받고 1990년 한국에 와서 2년 동안 한국어를 배운 후 1992년부터 성남에서 빈민 사목을 시작했다. 외환위기 이후 급증한 노숙인들을 위해 1998년 세운 급식소가 현재의 안나의집으로 이어졌다. 코로나19 확산으로 모두가 대면을 꺼리게 되자 그는 식당 급식을 재빨리 도시락 배식으로 바꾸고 끼니를 잃은 노숙인들을 위해 밥을 짓고 있다. 처음 한국행을 결심한 당시에만 해도 ‘쌀’과 ‘매운 음식’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는 그는 지금은 “처음에 전혀 못 먹던 떡도 너무 좋아한다”고 한다. 2015년 헌신적 봉사활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한국 국적을 얻은 김 신부의 이름은 ‘하느님의 종’이란 뜻. 성은 김대건 신부에게서 따왔다고 한다. 코로나19의 터널 끝이 보이지 않는 지금, 올 초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그가 던진 말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세상은 배와 같아요. 배 안에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타고 있어요. 부자들은 ‘나는 돈이 많으니까 안전할 것’이라 생각할지 몰라요. 하지만 배가 엎어지면 다 죽어요. 모두 죽거나, 아니면 모두 사는 길밖에 없어요. 지금도 누군가는 안나의집에 귤을 보내오고 주스를 보내오고 마스크도 보내옵니다. ‘나’만 생각하면 이렇게 못 합니다. 이게 희망이라고 생각해요.”
- 우정이야기
- [주목! 이 사람]시민사회단체 행사 ‘사회자’ 김덕진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 “집회 참가자들이 기억되어야”(2015. 12. 15 11:43)
- 2015. 12. 15 11:43 사회
- 12월 1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인권콘서트에서 사회를 보고 있는 김덕진 천주교 인권위원회 사무국장. / 이상훈 선임기자 “잠시만요. 인사만 드리고….” 바빴다. 오전 기자회견이 끝나고 점심시간에 경향신문사 인근에서 보기로 약속했다. 기자를 만난 김덕진 천주교 인권위원회 사무국장은 양해를 구한 뒤 길을 건너갔다. 기자회견 참석자들이 뒤풀이 장소로 향한 음식점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문 옆에 담뱃갑을 세워놓고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저건 무슨 인증샷일까. “이따 저녁에 다시 이곳에서 뒤풀이하기로 했거든요. 거기에 휠체어 타신 분이 참석하게 되어 있어요. 문턱이 있는데, 혼자 들어가시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서요.” 기자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관점’이다. 인터뷰를 섭외한 것은 시민사회단체 행사 ‘사회자’ 김덕진이라는 주제였다. 지난호에서 다룬 12월 1일 인권콘서트 때도, 그 주 주말인 12월 5일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2차 민중총궐기 행사 때도 그가 사회자로 나섰다. 하지만 그의 본업은 인권활동가다. “…말하자면 기능인이죠. 사회자가 직업이면 돈을 받아야 하는데, 돈을 받지 않으니 직업은 아니고, 제 직업은 인권활동가입니다.” 과거 이런 행사가 열릴 때 단골 사회자로 초청되는 사람은 ‘민주대머리’ 박철민씨였다. 말하자면 바통을 이어받은 셈인데, ‘전임’의 근황은 어떨까. “박철민씨 몰라요? 요즘 완전히 떴는데. SBS에서 방영하는 ‘주먹 쥐고 소림사’라고, 실제 중국에 가서 무술도 배우고….” 김덕진 사무국장이 본격적으로 사회자 일을 하게 된 것은 2000년대 중반 평택 대추리 집회 때부터다. 그 후 2009년 용산, 쌍용차, 제주 강정, 밀양 등지에서 열린 집회나 문화제 행사 사회를 도맡아 진행했다. 하나같이 오랫동안 ‘싸움’이 벌어진 곳들이다. “과거엔 skym이라고 했어요. 첫 글자만 따서. 쌍용, 강정, 용산, 밀양. 요즘에는 경북 청도의 345kV 송전탑하고 세월호까지 포함해서 ‘mcsky-세월’이라고 엮어서 부릅니다. 거기서 진행되는 행사 사회를 맡아 진행했었습니다.” 시민사회단체 행사의 사회를 보는 것은 쉽지 않다. 12월 5일 민주총궐기 행사 때 그는 사회를 보면서 “평화집회를 보장하는 것은 경찰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설명을 부탁했다. “경찰뿐만 아니라 종교인이나 정치인이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나섰다고 말하는 데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분들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취지는 알겠고 고맙지만, 그것 때문에 평화적 집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집회 나와서 재미로 경찰차 부수고 몸싸움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부당하게 통제하니 충돌하는 것인데, 저는 ‘적극적 평화’라는 개념을 말하고 싶습니다. 농민이나 노동자, 세월호, 성소수자와 같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슈를 해결하기 위해 거리에 나선 것이 아닙니까. 그 이슈가 해결되는 것이 ‘적극적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행사가 끝나고 사회자만 기억돼선 안 된다”고 덧붙였다. “사실 유명한 사람이 사회를 본다고 안 올 사람이 온다든가 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참여한 사람들의 발언이나 영상, 그 집회의 메시지가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부담스러운 일이긴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큰 집회보다는 참여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작은 자리들, 토크 콘서트 같은 행사의 사회를 보는 것이 더 좋습니다. 50분이든 100분이든. 참여한 사람들 모두에게 마이크가 돌아갈 수 있는….” ‘사회자의 역할’에 대한 그의 생각이다.
- 주목! 이 사람
- [광복 70년 역사르포](19)원주 원동성당-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유신 항거 ‘행동하는 신앙’ 태동하다(2015. 06. 30 11:16)
- 2015. 06. 30 11:16 사회
- 지난해 가 창간 69주년을 맞아 강원도민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수행 능력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전국 평균보다 무려 5.8%포인트 높았다. 또 ‘스스로 어떤 이념적 성향을 가졌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보수(37.7%)라는 응답이 가장 많고 중도(29.7%), 진보(21.9%) 순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전국 조사 결과(중도 37.8%, 보수 29.7%, 진보 16.7%)와 비교해 강원도민의 정치성향이 상당히 보수적이라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강원일보 2014년 10월 24일) 강원도 원주시는 도시라서 그나마 보수색채가 옅지만 이곳 국회의원 두 사람 모두 보수여당 출신이라는 점에서 원주 역시 보수적 정치성향의 도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곳 원주는 1970년대, 특히 유신시대를 통해 가장 야성이 강한 도시, 민주화를 열망한 저항의 도시였다. 1960년대 4·19 학생혁명 국면에서 마산·부산이 민주화의 발원지로, 1980년대 이후 전남 광주가 민주화의 성지로 평가된다면 1970년대 유신체제에 항거한 민주화의 성지는 강원도 원주를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명동성당보다 오래된 근대문화유산 원주가 1970년대 유신체제에 항거했던 발원지는 바로 원동성당이다. 시골도시의 조그만 원동성당은 민주화 역사에서 서울 명동성당을 능가하는 거대한 씨를 뿌렸다. 사실 원동성당은 서울 명동성당보다 2년 앞선 1896년에 건립된, 역사가 오래된 성당이다. 성당은 한국전쟁으로 파괴됐으나 복원돼 현재 문화재청의 근대문화유산(제139호)으로 등록돼 있다. 1971년 10월 5일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는 이곳 원동성당에서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를 규탄하고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때 발표한 ‘전국 가톨릭 교우에게 보내는 메시지’에는 “물가고, 세금고, 저곡가, 저임금, 중소기업의 대량도산, 대량실업 등 모든 경제파국 현상도 바로 그 원인이 부정부패에 있다”면서 “사랑인 그리스도교적 사회교리를 실천하기 위해 패배주의, 투항주의, 굴종의 감상적 신앙생활을 박차고, 성령의 감동하심에 따라 사회정의를 위해 일어납시다, 싸웁시다”라고 주장했다.(원동교회 100년사, 1998년) 원주 원동성당은 원주교구 주교좌성당으로, 종탑이 돔형이고 폭에 비해 길이가 긴 특징을 가지고 있다. 시위는 연좌 성토대회, 가두시위, 철야기도회 등 3일간이나 계속됐다. 이는 한국 가톨릭 역사상 ‘최초의 의미 있는 사건’으로 기록된다. 한국 가톨릭은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를 순순히 따랐고,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안중근 의사를 비판할 정도로 체제 순응적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반공을 앞세웠으며 현실문제에 소극적이었다. 그런데 체제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현실의 모순을 고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지 주교와 함께 일했던 원주가톨릭센터 관계자(이 분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말 것을 요청했다)는 “1965년 제2차 바티칸공회가 끝나고 원주교구가 춘천교구에서 분리되면서 지 주교가 취임했다”면서 “지 주교는 바디칸 공회가 요청하는 현대화된 교구를 만들기 위해 교구 원로와 신자들과 교회 개혁에 나섰다”고 말했다. 지 주교는 현실 모순을 고발하는 것이 바로 제2차 바티칸공회 정신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정권의 보복은 시작됐다. 1972년 10월 26일 지학순 주교는 부산으로 가기 위해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려다 계엄사령부에 연행됐다. 지 주교는 곧 풀려났지만 ‘유신’으로 무장한 정권의 보복은 집요했다. 결국 1974년 7월 6일 긴급조치 1·4호 위반으로 중앙정보부(중정)에 연행됐다. 7월 8일부터 11일까지 원동성당에서는 이를 규탄하는 특별기도회가 열렸다. 7월 10일 서울 명동성당에서는 주교회의가 열려 “정의의 실천은 주교의 의무”라며 지학순 주교를 지지하고 전국 교회에 지학순 주교를 위한 기도를 호소했다. 1975년 2월 지학순 주교가 석방된 후 시인 김지하와 함께 가두행진을 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현실모순 고발 시위 나선 지학순 주교 7월 16일 정권은 지 주교를 내란선동 및 긴급조치 1·4호 위반 혐의로 정식 기소했다. 7월 23일 비상군법회의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받은 지 주교는 김수한 추기경, 윤공희 대주교가 지켜보는 가운데 양심선언을 발표했다. 그는 양심선언에서 “소위 비상군법회의의 어떠한 절차가 공포되더라도 그것은 본인이 스스로 출두한 것이 아니라 폭력으로 끌려간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면서 “유신헌법은 민주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폭력과 공갈과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해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 주교는 당일 다시 연행됐고, 뒤이어 원주교구 신부들이 연행됐다. 지학순 주교의 투쟁은 한국 가톨릭의 전환점이 됐다. 7월 25일 주교회의에서 주교의 고통에 동참하기로 결의하고, 명동성당에서는 벨기에, 프랑스 대사가 참석한 시국 미사가 열렸다. 하지만 지 주교는 8월 12일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1974년 9월 23일 원동성당에서 300여명의 사제들이 모였다. 밤을 새는 열띤 토론 끝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정의구현사제단)을 결성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튿날 사제단의 이름으로 신도 1500명이 참석한 첫 기도회를 열고 가두시위에 나섰다. 당시를 기억하는 원주가톨릭센터 관계자는 “가두시위는 워낙 삼엄한 경찰의 제지로 도심으로 가지도 못하고 300m 앞 인동사거리 정도에서 멈췄다”고 말했다. 1970년대 유신체제와 정면으로 맞선 원동성당은 지금 조용한 시골도시의 성당으로 돌아와 있다. 이것이 사실상 정의구현사제단의 첫 탄생이다. 하지만 정의구현사제단의 정식 탄생은 이틀 후인 9월 26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유신헌법의 철폐와 민주헌정 회복을 내세운 제1시국선언 발표부터로 삼고 있다. 제1시국선언문 핵심 내용은 ‘유신헌법 철폐와 민주헌정 회복’, ‘긴급조치 해제와 구속인사 즉각 석방’, ‘국민 생존권 보장과 언론·보도·집회·결사의 자유 보장’, ‘서민대중 생활을 보장하는 복지정책 확립’ 등이다. 명동성당에서 시국선언을 발표한 이들은 신부, 신도 등 2000여명과 함께 십자가를 앞세우고 시위에 나섰다. 정의구현사제단은 11월 6일 제2시국선언, 11월 20일 사회정의실천선언 등으로 이어졌다. 지 주교는 226일 동안의 옥고를 치르고 1975년 2월 18일 석방됐다. 그의 원주 귀향을 맞기 위해 3만명의 원주시민이 원주역 앞에서 기다렸다. 당시 원주시 인구가 10만명이었던 것에 비추어 대단한 환영인파였던 것이다. 지 주교가 원동성당에 도착할 때 한 청년이 외투를 벗어 길에 깔자 너도나도 외투를 벗어 길에 까는 모습은 마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모습과 비슷했다고 한다. 강원 원주가 1970년대 민주화 투쟁의 구심점이 된 것은 지 주교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지만 지역 출신 장일순의 역할도 컸다. 서울대 미학과에 다니다 한국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한 장일순은 고향에 내려와 원주에서 대성학원을 설립하고 교육사업을 했다. 장일순은 평소 ‘중립화 평화통일론’을 주장하다 5·16 직후 3년간 투옥되기도 한 진보적 소신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가 바로 이 원동교회 신도로 지학순 주교와 만난 것이다. 1974년 9월 23일 원동성당에서 300여명의 사제들과 신도들이 정의구현사제단을 결성하고 미사를 드리는 모습. / 원동성당 100년사 대한민국 민주화투쟁에서 중요한 역할 원주가톨릭센터 관계자는 “1965년 지 주교가 이곳에 와서 신도였던 장일순 선생을 만나 교회개혁과 부정부패 추방운동, 신용협동조합운동 등을 추진했다”면서 “지 주교 구속의 빌미가 된 민청학련사건 시인 김지하가 바로 장일순의 학교 제자였다”고 말했다. 결국 1970년대 지학순 주교, 장일순 선생, 시인 김지하로 이어지는 인맥이 원주를 반유신의 구심점으로 만든 것이다. 이즈음 지역 국회의원도 신민당 박영록 의원이 계속 당선될 만큼 원주는 야성의 도시였다. 1980년 광주 참상을 고발하고 쫓기던 김현장과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일으킨 문부식과 김은숙이 원주에 숨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원주의 반유신 정서 때문에 가능했다. 지학순 주교는 이후에도 민주화투쟁과 통일운동을 하다가 1993년 지병으로 선종했고, 장일순 선생은 1980년대에는 한살림운동과 생명사상운동을 펼치다 1994년 세상을 떠났다. 정의구현사제단에는 문서화된 규약이 없다. 단지 ‘하느님과 정의를 위해 투신한다’는 서약서에 서명하는 것만으로 사제단에 참여할 수 있다. ‘행동하는 신앙’을 추구하는 정의구현사제단은 이후 무수히 많은 일을 했다.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사에서 정의구현사제단을 빼놓고는 기술이 되지 않을 정도다. 정의구현사제단 홈페이지에 기술된 단체 소개에 그간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저희는 창립 후 지금까지 모순된 현실 안에서 행동하는 신앙인의 양심이 되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70~80년대 군사독재 하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들의 횃불로서의 역할을 받아 안으며 많은 사제들이 3·1 민주구국선언, 5·18 광주 민주항쟁 등으로 옥고를 치렀습니다. 특히 1987년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실을 폭로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은 조작되었다’는 제하의 성명서 발표는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70~80년대는 군부독재 타도와 민주화 운동에 주력하였으며, 80년대 말부터는 통일운동으로, 90년대 들어서는 교회쇄신운동으로 그 영역을 확대하였습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이후에도 많은 일을 했다. 오만과 독선 이명박 정부의 회개를 촉구하는 시국선언 발표(2010년 5월), 박근혜 정부에서는 불법 부정선거 규탄과 대통령 사퇴 촉구(2014년 2월)·쌍용자동차 희생자를 위한 225일간의 기도(2014년 2월)·통합진보당 해산은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과 폭거라는 선언 발표(2014년 12월)·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요구(2015년 5월) 등 주요한 사건과 고비마다 ‘용기 있는 소금’ 역할을 했다. ‘길 위에서’ 고통받는 사람과 함께하는 ‘행동하는 신앙’을 추구해 온 정의구현사제단은 “앞으로도 저희는 정의를 기초로 인간의 존엄과 인권, 이 땅의 민주화와 평화통일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스스로 다짐하고 있다.
- 광복 70년 역사르포
- [원희복의 인물탐구]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40년- 함세웅 신부, 늘 약자들의 구원자·치유자·해방자(2014. 09. 30 11:50)
- 2014. 09. 30 11:50 사회
-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74년 9월 23일 강원도 원주 원동성당에서 가톨릭 성직자 세미나가 열렸다. 세미나에 참석한 신부는 300여명. 이날 세미나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긴장되고 무거웠다.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에 대해 사제들의 입장을 정해야 했다. 한참 토론한 끝에 마침내 결론이 내려졌다. “사제는 예언자적 입장을 지켜 시대적인 요구에 따라 희생해야 하며, 예언자적 입장에서 현실 참여에 뜻을 같이하는 신부만이라도 함께 행동해야 한다.” 1974년 창립결의문 낭독 이날 결의로 만들어진 행동하는 신부들의 모임이 곧 정의구현사제단이었다. 여기서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을 간략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학생운동이 계속되던 시절,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는 가톨릭 신도이던 시인 김지하에게 도피자금을 지원했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의 전신)는 간첩조직인 민청학련에 자금을 지원해 ‘내란음모’를 꾀했다는 혐의(긴급조치 위반)로 지 주교를 구속했다. 이에 지학순 주교는 7월 23일 유신헌법은 폭력과 공갈, 사기극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무효라는 양심선언을 발표하며 저항했다. 하지만 유신체제는 지 주교의 내란음모를 인정해 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 김문석 기자 9월 26일 한국순교복자대축일에 명동성당에 모인 전국의 사제들이 제1차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세상에 그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을 적극 지지한다. 이 땅의 민주주의가 회복되고 인간 존엄성과 기본권이 보장될 때까지 우리 사제단은 기도회를 계속한다”는 결의문을 발표하고 가두시위에 나섰다. 당시 정의구현사제단의 대변인으로 결의문과 성명을 발표한 사람이 바로 함세웅 신부(아우구스티노)였다. 두 차례 투옥, 감옥서 ‘서울의 봄’ 맞아 정의구현사제단은 곧 민주화운동 세력의 핵으로 자리 잡았다. 각계가 연대해 유신에 정면으로 저항한 민주구국선언문 발표(1976년 3월 1일), 5·18 광주항쟁 진상 폭로(1980년 5월 30일), 6월 항쟁의 시작을 알리는 직선제 개헌 촉구 선언(1987년 4월 23일), 정권의 야만을 알린 박종철군 고문치사 수사조작 폭로(1987년 5월 17일),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단식기도(1999년 9월 7일), 이라크 파병 철회 촉구(2004년 6월 28일) 등등 정의구현사제단의 역사는 곧 대한민국 민주화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의구현사제단에는 함세웅 신부의 성직관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는 “예수님은 루카복음 4장 18~19절의 말씀대로 가난하고, 감옥에 갇히고, 눈 멀고, 억압받는 모든 분들을 위한 구원자이자 치유자이며 ‘해방자’이다”라면서 “이런 예수님이 내 실존의 근거와 목적”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예수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옮겼다. 가난하고 억압받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 대한 구원과 치유, 나아가 해방을 위해 헌신하는 일에 매진했다. 최근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르침과 너무나 닳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당에서 나와 고통받는 사람들의 현장으로 가라. 빼앗긴 사람들의 현장에 가서 손잡고 우리들 사제에게 흙물이 튀겨도 현장으로 가라”고 말했다. 함 신부도 그랬다. 고난의 현장, 특히 감옥에 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1974년의 민주회복국민선언과 1976년의 명동 3·1 민주구국선언에 참여해 유신체제에서 두 차례 투옥됐다. 1979년 현직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암살되는 10·26 사건 때도 수감 중이었다가 1979년 12월 18일 겨우 출감했다. 그 후에도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을 위한 단식기도, 길거리 미사, 반전·평화 미사 현장에는 늘 함 신부가 있었다. 그의 오랜 ‘민주화를 위한 고행’은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비로소 ‘휴지기’에 들어섰다. 이후 함 신부는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장 등을 지내며 친일문제 청산과 남북화해문제(민족 화해와 통일을 위한 종교인협의회 공동대표)에 진력했다. 그리고 오랜 민주화운동 경력을 살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정리하고 기념하는 일을 맡았다.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 다시 거리로 불행한 건 그의 싸움이, 정의구현사제단의 싸움이 40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인권과 민주주의의 퇴행이 노골화됐고, 함 신부는 다시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함 신부는 국민보다 정권, 서민보다 가진 자를 우대하던 이명박 정부를 꾸짖었다. 그는 “쌍용자동차 노동자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사업 등 전체적으로 본다면 다 반인간적·반자연적·반역사적 길을 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등장한 박근혜 정부는 훨씬 더 노골적이었다. 국가정보원이 대통령선거에 개입하고, 간첩을 조작하더니, 내란음모 혐의로 정당까지 해산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무엇보다 친일파가 득세하고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일이 다반사로 이뤄지고 있다. 함세웅 신부가 지난 3월 25일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권 부정선거와 증거조작 특검 촉구, 부정선거 감시 호소 각계 시국선언’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심지어 지 주교에게 내란음모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한 것과 같은 ‘가톨릭 탄압’ 분위기가 재연되는 분위기다. 지금 경찰은 정의구현사제단 박창신 원로신부(72)의 사법처리 수순을 밟고 있다. 박 원로신부는 지난해 11월 22일 군산 수송동 성당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대통령직 사퇴를 촉구하는 시국미사를 집전하면서 북한의 연평도 포격을 정당화하는 발언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평소 친일 청산과 민주 회복, 남북화해를 주창해온 그로선 너무 참담한 일이었다. 2013년 9월 23일 사제단은 국정원의 불법 대선개입 사건을 규탄하는 시국미사를 열고 박근혜 대통령의 사퇴를 촉구했다. 사제들이 대통령 사퇴를 요구한 것은 사태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구속사건도 그의 마음을 허탈하게 했다. 함 신부는 “자신과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고 정치적 박해가 용인되는 사회, 종북이라는 딱지 하나로 공공의 적이 조작되고 만들어지는 사회, 이 비정상의 사회가 만들어낸 유령이 내란음모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함 신부는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세월호 특별법 해법에 대해서도 명쾌하다. “첫째 진상을 규명하고, 둘째 진상규명 결과에 따라 죄 지은 사람을 처벌하고 나타난 문제에 대한 대책을 강구한 후 배상과 보상을 절차에 따라 공정하게 처리하고, 셋째 다시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공동체가 함께 기억하고 감시하면 된다.” 함 신부는 “세월호 특별법 하나 처리하지 못하고, 정부와 여당, 야당이 어쩜 저렇게 무능할 수 있느냐”고 한탄했다. 그는 평생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구원자·치유자·해방자인 ‘청년예수’를 닮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운동권 신부, 종북 신부, 심지어 사제단을 좌익 혁명기지로 만든 장본인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비난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 그분의 삶을 전해주는 복음서의 증언에 따라 살기로 약속한 ‘가톨릭 사제’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다. 사제는 이웃을 위한 이타적 존재이다. 나는 바로 그런 사제들 중의 한 사람이다.” “두 추기경은 시대고민 없는 수구적인 분들” | 김문석 기자 1974년 정의구현사제단 창립을 주도한 입장에서 40년을 맞는 감회가 남다를 것으로 봅니다. “저는 사목현장에서는 은퇴한 사제입니다. 한 세대가 지나가고 이제는 새로운 세대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일들은 늘 새 세대와 함께합니다. 한 시대의 주체가 되는 시간과 사람은 달라져도 ‘인간 존엄’의 가치는 여전히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제들에게 ‘감회’ 같은 단어는 잘 어울리지 않지요. 충실한 삶, 늘 최선을 다하는 생활, 그런 마음으로 사는 것이 사제들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이 준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사람은 보통 머리로 생각하고 종합하며 입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교황님은 가슴과 심장, 마음으로 말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에게 새롭게 일깨워 주셨습니다. 저도 많은 분들의 감동과 예찬에 공감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반추하고 있습니다. 교황께서 가장 많이 사용하시는 단어가 ‘가난’입니다. 성서의 핵심이지요. 가난한 이웃과 함께하고 함께 나누는 삶, 그 실천을 위해 스스로 가난해져야 한다는 가르침을 우리 사회 공동체 특히 교회 공동체에 속한 분들이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저항적 가난’의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수도자와 스님의 자발적 가난은 아름답지만, 불의와 부정부패, 탐욕의 결과인 비참한 가난도 있습니다. 비참한 가난을 퇴치하는 아름다운 가난이 바로 ‘저항적 가난’입니다. 불의한 정권과 불의한 기업, 탐욕에 종속된 우리 시대의 많은 종교인들도 깊이 반성해야 할 내용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달리 우리 정진석·염수정 두 추기경은 매우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과거 한 명(김수환 추기경) 시절보다 추기경의 존재감이 없다는 비판이 많습니다. “보수는 참된 가치와 진리를 보존하고(保) 지키는(守) 아름다운 일입니다. 따라서 참된 보수는 필연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진보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러한 분입니다. 현재 한국에서는 보수란 말이 참뜻을 잃어버리고, 남용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보수적인 분입니다. 사람들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민주화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요구에 동참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동시에 진보적 가치를 지닌 분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 두 교구장은 보수적인 분들이 아니고 시대에 대한 고민을 갖고 있지 않은 수구적인 분들이라고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용공’이라는 이름이 요즘은 ‘종북’이라는 이름으로 횡행하고 있습니다. 내란음모를 꾀했다며 정당까지 해산하려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미 역사적으로 평가가 이루어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승만 독재정권이 죽산 조봉암 선생님을 사법살인하고 당시 진보당 등록을 취소했습니다.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은 조봉암 선생님의 사건에 대해 52년 만에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현 정부는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를 무서워하는 것 같습니다. 감추어야 할 것이 많은 까닭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정희 정권도 이념 갈등과 정보부를 이용한 간첩공작으로 정권을 유지하려다 결국 죽음을 자초하고 파멸했습니다. 평가는 역사를 통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만, 불법·부정행위에 대한 징벌적 배상과 손해배상에 대한 법률 보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제도를 통한다면 불법행위에 대한 최소한의 예방조치는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약력 1942년 서울 출생. 가톨릭대학, 그레고리안대학교 대학원 신학박사.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인권위원장.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장·이사장.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기쁨과희망 사목연구원 원장(현).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현).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고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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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주교 세례받은 비, 김태희와 결혼 초읽기일까?
- 2014. 08. 29 14:49 연예
- 지난해 1월 교제 사실 인정 후 공개 연애를 이어가고 있는 비·김태희 커플. 얼마 전 비가 가톨릭 신자인 연인 김태희를 따라 천주교 세례를 받은 것이 알려지며 두 사람의 결혼 임박설이 제기되고 있다. 가수 겸 배우 비가 지난 7월 경기도 남한산성 순교성지 성당에서 가까운 지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미카엘.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 스무 살 넘은 성인이 천주교 신자가 되는 것이 무슨 큰일인가 싶지만 그의 연인인 김태희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김태희는 연예계 대표 ‘성당 누나’다. 일반적으로 예비부부가 성당에서 혼인미사를 원할 때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이 천주교 신자가 아닌 경우 결혼식을 앞두고 세례를 받는다. 두 사람이 결혼을 위한 준비 단계에 돌입했다는 말이 나오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 비와 김태희 역시 천주교식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이러한 절차를 치른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다. 배우 설경구 역시 천주교 신자인 송윤아와의 결혼식을 앞두고 세례를 받은 바 있다. 이날 비는 통상적으로 일반인 천주교 신도들이 단체로 세례를 받는 방식이 아닌 소수의 지인들만 자리한 가운데 세례를 받았다. 연인 김태희와 그녀의 어머니를 비롯해 가까운 지인들, 영화계 대선배인 배우 안성기가 비의 대부로서 함께 자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표적인 천주교 신자 연예인인 안성기는 김태희와 종교 관련 활동을 함께하며 전부터 친분이 있는 사이다. 두 사람은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을 맞아 제작된 홍보 영상 ‘코이노니아’에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안성기는 흔쾌히 비의 대부가 돼 천주교 신자가 된 그를 축하해줬다. 김태희와의 친분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소수의 지인들만 모인 세례식에 김태희의 모친이 참석한 것은 그녀의 가족이 비를 가족과 같은 가까운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비 역시 마찬가지다. 비의 소속사 큐브엔터테인먼트는 “비의 가톨릭 세례는 오래전부터 계획된 것이다”라며 “구체적인 결혼 계획은 아직 없으니 확대해석하지 말아달라”라는 입장을 밝혔다. 실제로 비가 단순히 김태희와의 결혼만을 위해서 세례를 받은 것은 아닐 것이다. 천주교 세례는 상당한 기간과 노력이 필요하며 신앙 없이 종교를 갖는다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재 거주하고 있는 서울이 아닌 멀리 떨어진 수원교구 남한산성 순교성지를 찾아 세례를 받은 것은 신앙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3백여 명의 천주교도들이 순교한 곳으로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비는 현재 삼성동에 거주하고 있으며 김태희 역시 서울 옥수동성당에 교적을 두고 있다. 비는 세례를 받은 후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가까운 천주교 지인들은 그를 ‘형제’라 부르며 반기고 있다는 후문이다. 지난해 비와 김태희는 열애 사실이 공개되며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두 톱스타의 만남을 질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고, 비의 군 전역이 가까워진 시점에선 두 사람의 결별이 임박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하지만 묵묵히 서로에 대한 믿음을 지켜나갔고 이제 같은 종교를 공유하며 신앙생활을 함께하게 됐다. 현재 비는 SBS-TV 드라마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로 4년 만의 브라운관 컴백을 앞두고 있다. 김태희 역시 중국에서 40부작 사극 드라마 ‘서성왕희지’ 촬영 중이다. 두 사람의 스케줄로만 봐서는 결혼이 임박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두 사람의 마음이 결별설이나 불화설 따위에는 흔들리지 않을 만큼 가볍지 않다는 것, 그리고 진지한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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