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14 건 검색)
- “노동자 짜내는 ‘21세기 평화시장’ 물류센터, 불안정 노동이 핵심”[새벽배송, 안녕하신가요④]
- 2022. 08. 17 16:40사회
- ... 마련을 위한 토론회’ 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현대판 막장” “21세기 평화시장”… ‘새벽배송’으로 대표되는 이커머스 업체들의 물류센터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처지를 자조하는...
- [오래 전 ‘이날’]11월19일 “매일 평화시장 근로개선 지켜보겠다”…이소선 여사의 집념
- 2020. 11. 19 00:03사회
- ... 어머니였습니다. 하지만 1970년 11월13일 이후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전태일 열사가 평화시장에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산화한 그 순간부터 이 여사는...
- 기타뉴스
- 전태일 분신 한 달 전, 경향신문이 보도한 평화시장 실태
- 2020. 11. 07 15:35사회
- ..., 어떤 경위로 실리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골방서 하루 16時間 노동”이라는 제목으로 당시 평화시장 노동실태를 다룬 경향신문 기사. 1970년 10월 7일 사회면 톱으로 실려 있다. 기사 작성자는 기남도...
- 동대문 제일평화시장 리뉴얼 마치고 4월 재오픈
- 2020. 04. 24 12:19경제
- ... 차별화된 디자인과 고퀄리티 제품으로 1979년 개장 이후 동대문 패션 업계를 이끌어온 제일평화시장이 지난 9월부터 올해 3월까지 대대적인 리뉴얼 공사를 진행했다. 이번 리뉴얼 공사는 작년 9월 화재...
스포츠경향(총 8 건 검색)
- 동대문 제일평화시장 화재 16시간만에 꺼져…불씨 확인작업은 계속
- 2019. 09. 22 18:05 생활
- 22일 오전 서울 중구 제일평화시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인근 지역이 연기로 뒤덮여 있다. 연합뉴스,22일 0시 38분께 서울 중구 신당동 제일평화시장 건물에서 불이 나 16시간여 만에 꺼졌다. 지상 7층, 지하 1층짜리 건물의 3층 의류매장에서 시작된 불은 1시간여 만인 오전 1시 41분께 큰 불길이 잡혔다. 그러나 시장 내 원단과 의류 속에 남아 있는 불씨들이 많아 소방당국은 화재 발생 16시간가량이 지난 지금까지도 진화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이 불로 3층에서 타일 공사를 하던 작업자 2명이 긴급 대피했고, 6층 화장실에 있던 상인 2명은 소방당국에 의해 구조됐다. 서울 중부소방서 관계자는 이날 오후 언론 브리핑에서 “화재가 발생한 3층은 창문이 없는 ‘무창층’으로 열과 연기가 빠져나갈 통로가 없었고, 옷가지 속에 숨은 작은 불씨들이 공기가 유입되면서 발화하는 ‘훈소’ 현상이 반복돼 화재 진압에 오래 걸렸다”고 밝혔으며 연합뉴스가 보도했다. 그러면서 “불은 오후 5시께 완전히 꺼졌지만, 소방관들이 안에 쌓인 섬유를 하나하나 들추면서 최종적으로 확인하고 있어 상황 종료까지는 시간이 더 걸릴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화재 당시 제일평화시장에는 점포 816개가 입점해 있었으며, 불이 난 3층에는 200여곳의 좌판식 점포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화재로 발생한 연기는 사고 현장 부근인 동대문 일대는 물론 바람을 타고 용산구 남영동 등 서울 도심 곳곳까지 퍼졌다. 서울시는 이날 오전 제일평화시장 화재로 인근 교통이 혼잡하다며 우회를 당부하는 안내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소방당국과 경찰, 한전 등은 향후 화재 원인을 밝히기 위한 합동감식에 들어갈 예정이다.
- 동대문 제일평화시장 화재 16시간째 진화 작업 이어져…
- 2019. 09. 22 17:21 생활
- 22일 오전 서울 중구 제일평화시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소방대원들이 진화작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22일 0시38분께 서울 중구 신당동 지상 7층, 지하 1층짜리 제일평화시장 건물에서 발생한 화재 진압이 약 16시간째 이어지고 있다. 큰불은 1시간여 만인 오전 1시41분께 잡혔지만, 처음 불이 시작된 3층 곳곳에 잔불이 남아 있어 오후 5시까지도 계속해서 건물 사이사이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화재로 발생한 연기는 사고 현장 부근인 동대문 일대는 물론 바람을 타고 용산구 남영동 등 서울 도심 곳곳까지 퍼졌다. 의류 상가 특성상 불에 잘 타는 옷가지와 원단이 건물 내부에 쌓여 있고, 내부 구조가 복잡해 소방당국은 진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소방당국에 따르면 화재가 시작된 3층은 스프링클러가 설치되어 있지 않고, 창문이 금속 패널로 밀폐돼 있어 열기가 건물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해 화재 초기에 피해가 컸다고 연합뉴스가 보도했다. 오후 3시50분께 소방당국이 포크레인을 동원해 3층 외벽 패널을 뜯어내고 물을 뿌려 건물 내에 남아 있는 불꽃을 끈 뒤로 연기는 크게 줄어든 상태다. 1979년 처음 문을 연 제일평화시장은 당초 지상 3층, 지하 1층으로 지어졌으나 2014년께 4개 층을 증축하고 건물 외벽을 금속 패널로 덮었다. 스프링클러는 새로 지어진 4층부터 7층까지만 설치됐다. 소방청 측은 “건물에 밀폐된 공간이 많아 잔불 정리에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건물에 입점한 상인들은 이날 내내 마스크를 쓴 채로 먼발치에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화재 진압 현장을 지켜보았다. 제일평화시장 2층에서 여성복 매장을 운영하는 자영업자 ㄱ씨(38)는 마스크를 쓴 채 다른 상인들과 걱정 어린 눈빛으로 화재 현장을 바라봤다. ㄱ씨는 “불길이 잡히고 새벽 3시께 매장에 잠시 들어갔다가 멀쩡한 것을 확인하고 나왔는데, 오후까지 연기가 계속 나고 있다길래 다시 와 봤다”며 “가게가 불에 타지는 않았지만, 옷에 연기 냄새도 많이 배고 상가도 한동안 영업을 못 하게 될 것 같아 참담하다”고 말했다. 지하 1층에 입점한 상인 ㄴ씨(65)도 “아침부터 나와서 가족들과 교대로 현장을 지켜보고 있다”며 “가게가 무사한지 들어가서 확인하고 싶은데 지금은 들어갈 수가 없어 답답하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 서울 제일평화시장 새벽 화재…불 꺼졌어도 12시간 넘게 연기 계속
- 2019. 09. 22 15:49 생활
- 22일 오전 서울 중구 제일평화시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인근 지역이 연기로 뒤덮여 있다. 연합뉴스22일 0시 38분께 서울 중구 신당동 제일평화시장에서 불이 났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6층 건물의 3층 의류매장에서 시작된 불은 1시간여 만인 오전 1시 41분께 완전히 꺼졌다. 건물 안에 있던 2명은 소방당국에 구조돼 현장에서 응급처치를 받고 귀가했다. 다른 2명은 스스로 대피한 것으로 전해졌다. 불은 완전히 꺼졌지만, 시장 내 원단과 의류가 많아 화재 발생 12시간이 지난 현재까지도 연기가 계속 나고 있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일대는 연기가 자욱한 상태다. 소방당국은 소방장비 81대와 소방관 291명을 투입해 잔불을 정리 중이다. 비상대응 단계는 발령하지 않았다. 소방 관계자는 “현재까지 불이 다시 확산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며 “건물에 밀폐된 공간이 많아 잔불 정리에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서울시는 이날 오전 제일평화시장 화재로 인근 교통이 혼잡하다며 우회를 당부하는 안내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 [속보] 서울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인근 제일평화시장 화재 발생
- 2019. 09. 22 10:15 생활
- [속보] 서울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인근 제일평화시장 화재 발생
주간경향(총 2 건 검색)
- [광복 70년 역사르포](15) 전태일 분신 평화시장… 한국 노동운동의 순교자 ‘노동의 가치’를 일깨우다(2015. 06. 02 13:55)
- 2015. 06. 02 13:55 사회
- 역사에서 기원전과 기원후를 구분을 하는 A.D.와 B.C.는 ‘예수 탄생 이전과 이후’를 의미한다. 예수 탄생을 기점으로 세계 역사가 크게 달라졌다는 의미이다. 요즘 안전과 관련해 새로운 패러다임의 표현으로 ‘세월호 이전과 이후’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도 있다. 그만큼 시대를 구분하는 데 있어서 사건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 노동운동사에서 시대구분을 할 만한 사건을 꼽으라면 단연 ‘전태일 분신사건 이전과 이후’라고 할 수 있다. 1970년 평화시장 ‘삼동친목회’ 회원들은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노동청과 청와대 등에 제출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삼동회 회원들은 다시 평화시장 사업주 대표들과 노동시간, 노동환경 개선과 노동조합 결성을 요청했지만 거부됐다. 삼동회 회원들은 11월 13일 있으나 마나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이날 평화시장 주변에는 사업주들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많은 노동자들이 모여들었다. 경찰은 시위대가 외부로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평화시장을 에워쌌다. 시위대는 몇 번 구호를 외쳤지만 이내 플래카드를 경찰에 빼앗겼다. 결국 시위는 흐지부지 끝나는가 싶었다. 점심식사를 마친 오후 1시30분 젊은 재단사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휘발유를 뿌린 그의 몸에 라이터가 켜지더니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전태일은 불타는 몸으로 몇 걸음 뛰어나가다 그 자리에 쓰러졌다. 이때 누군가가 근로기준법 책자를 불타는 전태일의 몸을 향해 던졌다. 근로기준법 화형식은 그렇게 이뤄졌다. 전태일은 그날 오후 10시 병원 응급실에서 사망했다. 2005년 국민성금으로 세워진 전태일 동상은 일어서려는 모습으로 동쪽을 응시하고 있다. 전태일과 함께 불타버린 근로기준법 전태일 분신사건은 내외에 큰 충격을 줬다. 서울대 법대생은 전태일 유해를 인수해 학생장을 거행하겠다고 나섰고, 상대 학생 400여명은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전국 대학가에서는 전태일 추도식이 열렸고,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서울대는 무기한 휴업령을 내렸다. 이 전태일 분신사건으로 11월 27일 청계피복노동조합이 탄생했고, 이후 1970년대에만 2500개의 노동조합이 결성됐다. 전태일 분신은 한국 노동운동사의 새로운 전기를 연 계기가 됐다. 전태일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지 10년째, 무리한 경제개발 과정에서 축적된 여러 모순들이 폭발한 것이었다. 정부 주도 경제개발 과정에서 소외되고 희생된 노동자들을 인식하게 되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전태일 분신사건은 전태일 개인의 사건이기에 앞서, 당시 한국 사회의 모순이 응집되어 폭발한 하나의 민중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노동자와 농민, 도시빈민들의 생존권을 위한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안병무-시대와 민중의 증언자) 전태일 장례식장에서 영정을 들고 오열하는 모친 이소선 여사. 이 사진은 우리나라 노동운동사의 상징처럼 인식되고 있다. 전태일은 1948년 대구에서 봉제업자 전상수와 이소선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사업에 망하자 가족은 일거리를 찾아 서울로 올라왔다. 전태일은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종로 파고다공원 인근에서 구두닦이, 신문팔이, 동대문시장에서 리어카 뒤밀이를 하며 생활했다. 당시 짐을 잔뜩 실은 리어카를 서울역에서 동대문시장까지 뒤에서 밀어주면 30원을 받았다. 전태일은 1964년 봉제공장 미싱 보조로 평화시장에 발을 들인다. 평화시장 봉제공장은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혹사당했지만 월급은 형편 없었다. 당시 이들의 근로조건은 다음과 같이 경향신문에 폭로됐다.(1970년 10월 7일) “천장의 높이가 겨우 1.6m 정도밖에 안 돼 허리를 펼 수도 없을 정도… 밝은 조명을 해 이들 대부분은 밝은 햇빛 아래서는 눈을 똑바로 뜰 수 없고… 이런 환경에서 하루 13~16시간의 고된 근무를 하고 있으며… 휴일에도 작업장에 나와 일을 하고 여성들이 받을 수 있는 생리휴가 등 특별휴가는 생각조차 못할 형편… 옷감에서 나온 먼지가 가득한 방안에서 하루 종일 일해 폐결핵, 신경성 위장병까지 앓고… 노동청에서는 건강진단을 나왔으나 공장 측은 1개 공장종업원 2~3명만 진단받게 한 후모두가 받은 것처럼 했다.” 5월 29일 전태일 분신 45주년 기념 심포지엄을 알리는 포스터. 청계천 버들다리 가운데 기념동상 공장 친목회 모임은 노조 결성을 위한 결의체로 바뀌면서 전태일은 문제의 근본을 따져봤다. 그 결과 근로기준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는 노동청과 청와대 등에 근로기준법을 지켜달라고 수없이 진정하고 요청했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육신을 태우기로 결심했다. 전태일이 분신하기 직전 친구에게 보낸 편지가 공개됐는데 사실상 유서였다. 이 편지는 “사랑하는 친우(親友)여, 받아 읽어주게”라고 시작해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꺾어버린다고 해도…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쉬러 간다네… 내 생애 다 못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라고 적었다. 전태일 분신을 기리는 사업은 꾸준히 이어졌다. 1970년대에는 기독교 청년들이 중심이 돼 전태일 추도식이 열렸다. 1980년대 전태일은 ‘노동운동가’로 재평가되고 1984년 전태일기념사업회가 만들어졌다. 1985년에는 전태일기념관, 전태일재단이 만들어져 ‘전태일문학상’과 ‘전태일노동상’을 제정하고, 그가 분신한 매년 11월 전국 노동자대회가 열리고 있다. 2000년 전태일 분신 30주기를 맞아 평화시장 앞 보행로에 표석이 설치됐다. 2002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전태일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 분신 현장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 2005년 청계천 복원공사가 끝난 후 청계천 버들다리 가운데에 전태일 기념동상을 세웠다. 국민 모금으로만 4억원가량이 모였다. 동상 앞 보도에는 성금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과 글귀를 새긴 동판 4000여장이 설치됐다. 동판은 노무현·김대중 전 대통령의 것도 있다. 노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 김 대통령은 ‘행동하는 양심 전태일! 영원한 우리들의 영웅 전태일’이라고 썼다. 상반신 동상은 동쪽을 보며 땅을 짚고 하늘을 향하는 모습이다.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은 “죽은 지 100년이 지나지 않은 인물의 기념상을 세운 사례가 없다”며 동상 건립에 반대했다. 하지만 노동계와 시민단체는 이를 밀어붙였다. 전태일의 여동생 전순옥은 2014년 3월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됐다. 그렇게 죽은 지 35년 만에 전태일은 재평가됐고, 또 새롭게 태어났다. 많은 민주화운동 관련자, 그 어떤 민주화 열사보다 단연 앞선 것이다. 그만큼 전태일의 분신이 이 사회에 미친 영향이 지대했기 때문이리라. 전태일 분신 45년이 지난 평화시장 그 자리는 여전히 번화하다. 서울 중구 청계천로 274번지 평화시장 A·B동 사이가 바로 분신의 현장이다. 평화시장은 도매시장으로 주로 야간에 성시를 이루지만, 주변은 낮에도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인다. 전태일이 리어카를 밀며 30원을 벌었던 이곳은 지금도 물건을 운반하는 노무자들로 붐빈다. 단지 운반수단이 리어카에서 오토바이로 바뀌었을 뿐이다. 전태일이 분신한 평화시장 A동과 B동 사이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어린 여공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미싱기를 돌리던 봉제공장은 모두 사라졌다. 봉제공장은 동남아로 떠나고 일부는 종로구 창신동 등으로 옮겨갔다. 남평화시장 김용민 관리사무소장은 “현재 이곳 남평화시장에만 도매상 700여개가 있고 과거 봉제공장은 한 곳도 없다”고 설명했다. 바로 옆에 있는 동평화시장 도매상가는 이곳보다 규모가 크다고 한다. 요즘 이 일대는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패션과 디자인의 거리로 변모했다. 특히 동대문 일대는 한국을 찾는 유커(遊客·중국인 관광객)로 넘쳐난다. 하지만 도매시장으로 밤에 주로 영업하는 평화시장과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동대문시장은 매출에서 온도 차이가 크다. 상인들은 평화시장 경기가 예전 같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김용민 관리소장은 “중국인 관광객 대부분은 동대문시장의 밀레오레나 두타 등에서 쇼핑하지 이곳 평화시장을 이용하지 않는다”면서 “국내 경기가 워낙 불황이어서 폐업까지는 아니지만 이점(점포를 옮기는 것)과 공점포(빈 점포)가 발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상인들은 내수침체와 온라인 쇼핑몰로 인해 예전처럼 평화시장이 활기차지 않다고 한다. 서울시는 지난해 연말 전태일 분신 현장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했다. 미래유산이란 100년 후 미래세대에게 전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무형의 ‘보물’을 말한다. 여기에는 중요한 인물이나 사건을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물건이나 장소, 음악도 포함된다. 서울시는 이곳을 미래유산으로 선정한 이유로 “산업화 과정에서 희생당하던 노동자의 삶이 사회문제로 크게 부각되는 계기를 마련하는 등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신호탄이 된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한 장소이므로 보존가치가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전태일 분신 이후에도 노동자들의 좌절은 이어지고 있다. 노동운동의 양적 발전은 이뤄졌지만 질적 변화는 없다는 주장도 많다. 마침 5월 29일 참연구소(한국패션봉제아카데미 부설 연구소)가 주최하고 전태일 재단이 후원하는 ‘전태일 열사 45주년 기념 특별 심포지엄’이 열렸다. 주제는 ‘상징의 재해석; 2015년 전태일’이다. 이날 노동분야의 주제발표를 맡은 김승호 사이버노동대학 대표는 “전태일을 이해하는 흐름에는 ‘최소한의 인간적 요구’라는 자유주의자들과 1980년대에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변혁을 요구한 ‘노동해방의 요구’가 있다”면서 “하지만 진정한 전태일의 생각과 주장은 이것을 뛰어넘는 ‘인간해방’이다”라고 설명했다. 전태일의 분신 아니 노동의 가치는 계속 재해석, 진화되는 것이다.
- 광복 70년 역사르포
- [2010 연중기획] 희미해진 평화시장의 ‘전태일 기억’(2010. 01. 06 17:04)
- 2010. 01. 06 17:04 사회
- ㆍ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 ㆍ주변 상인 “40주기가 나와 뭔 상관 있나요” 서울 중구 을지로 6가 17번지에 자리 잡고 있는 평화시장. 전태일거리가 조성된 버들다리에는 승합차들이 주차돼 있었다. 며칠 전 내린 눈은 흙먼지와 섞여 바닥의 동판들을 덮고 있었다. 승합차들 너머로 동상이 어둠 속에 서 있었다. 기자가 평화시장을 찾은 날은 2009년 12월 30일. ‘패션원조’라는 문패 아래 ‘평화시장’의 네온사인이 밝히고 있었다. 낮보다는 활기를 보였다. 이날 점심, 거의 대부분 닫혀 있던 가게들은 문을 열었다. 오고가는 손님도 눈에 띄지만 북적거릴 정도는 아니었다. 점포를 지키는 사람들 가운데 의외로 젊은 층이 많았다. 낮엔 장년층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이 ‘포커’를 하는 게 눈에 띄었다면 밤에 본 젊은 사람은 컴퓨터를 켜고 홀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스타크래프트’를 하고 있던 한 청년이 기자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게임 세계로 빠져든다. 입구에서 만난 경비원은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점원일 것”이라고 말했다. 한 가게 앞에서 물건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최은경씨(가명·55)는 은평구에서 아동복을 판다. 손님이 사 간 바지가 맞지 않아 반품을 받았다. 구입처를 방문해 ‘7호 사이즈’가 있는지 물어 봤다. 주인 부부가 아동복 더미에서 찾아봤지만 헛수고였다. 그냥 돌아설 수밖에 없다. 봉제의류공장은 인근 주택가로 이동 저녁 손님은 주로 안쪽 통로를 통해 오간다. 인도변에 위치한 한 모자 가게. 밖의 유리문은 닫고 안쪽에서 손님을 상대하고 있다.전태일이 안타까워 했던 3층의 다락방 ‘시다’들은 다 어디 갔을까. 다락방은 진작 없어졌다. 이날 낮 평화시장 사무실이 있는 옥상 휴게실에서 만난 박평기씨(가명·78)는 “그 사건(전태일 분신)이 나고 직후부터 관에서 사람이 나와 다 때려 부쉈다”고 회상했다. 박씨는 40년 넘게 평화시장에서 일했다. 박씨의 기억에 따르면 그렇다고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인근 동화시장 등으로 옮겨갔을 뿐. 평화시장 내에 있던 봉제의류공장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이날 만난 상인의 기억에 따라 모두 달랐다. 1990년대 초반까지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1980년대 초·중반쯤으로 기억했다. 공장은 대신 주택가로 파고들어 갔다. 인근 창신동, 숭인동, 신당동 지역 주택가 반지하에 자리 잡고 있다. 김정호 서울지역의류제조업노동조합 위원장에 따르면 이런 의류봉제업 공장 대부분은 ‘반응생산’을 한다. 반응생산은 상대적으로 디자인 등에 민감한 여성복 위주로 ‘원단이 아침에 들어와 저녁에 만들어지는’ 형태의 생산이다. 상대적으로 유행을 타지 않는 남성 기성복 시장은 대부분 중국으로 넘어갔다. 다시 평화상가. “창신동 일대의 봉제공장도 옛말이고, 이제는 다 중국산이에요.” 지하상가에서 만난 이을설씨(63)의 말이다. 이씨는 “전태일과 동갑”이라고 말했다. 분신 당시에도 청계천에서 일했다. “여기 사람이 많을 때는 이틀, 사흘 간격으로 지방에서 버스를 타고 올라오는 주인들이 드나들었어요. 그때는 현금 좀 만졌는데….” 한 1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지방에서 버스를 대절해 단체로 물건을 떼러 오는 의상실 주인들이 그래도 꽤 됐다. 생각해 보니 밖에 주차해 놓은 차량 가운데 승합차 정도는 보였지만 버스는 없었다. 지금은 지방에서도 발품을 파는 대신 온라인으로 결제하고 택배로 주고받는 경우가 많아 더욱 한산해 보인다는 것이 이씨의 설명. 청계피복노조 1988년에 합법화 점심시간 무렵 모습. 원래는 오후 8시와 밤 10시부터 두 차례 운영하지만 낮에는 철시하는 가게가 많다. 밤에는 낮보다 손님이 꽤 있었지만 많은 편은 아니었다.비전은 있는 것일까. 평화시장㈜의 차경남 총무부장은 “전반적으로 경기가 좋지 않은 건 사실”이라면서도 “그래도 인근에 있는 두산타워나 밀리오레에 비해 평화시장의 옷값이 30~40% 싸기 때문에 도매를 중심으로 한 유통은 지금도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씨에 따르면 특히 요즘에는 동유럽 등 거래처가 다양화되면서 외국손님도 꾸준히 늘고 있다. 홍남식 평화시장 대표이사는 “평화시장의 가장 큰 경쟁력은 서울 중심가에 자리 잡은 입지 조건”이라면서 “평화시장에서 거래되는 의류 상품들이 저렴하면서도 품질이 뛰어나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알려 나갈 것”이라고 피력했다. 옥상의 평화시장 주식회사 옆에 자리 잡았던 가건물 형태의 ‘청계피복 노조’ 사무실은 1970년대 말에 없어졌다. 청계피복 노조는 1980년대 초부터 인근 신발상가 B동 411호에 자리를 잡았다. 합법화된 것은 1988년. 10년이 지난 1998년엔 서울지역의류제조업노동조합으로 이름을 바꿔 재편됐다. 벌써 40년이 된 사건이지만 평화시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기억은 여전히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많았다. 전태일이 분신할 당시 현장에는 가보지 않았고 일하고 있었다는 박평기씨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때도 말이 많았어. 만날 일은 안하고 패로 어울려 사람들 만나러 다닌다고 하더니… 김대중이가 와서 민주화니 뭐니 치켜세워 주니 그런 건데, 자기 몸에 불지른 것이 무슨 민주화운동이야.” 의견을 말해 달라고 다시 부탁하니 말을 흐렸다. “내가 직접 본 것도 아니고, 그런 말을 하던 사람은 이제 다 저세상 사람이 됐으니…. 어쨌든 1980년대까지는 난리도 아니었는데 지금은 그 사람들도 다 어디로 간지도 모르겠고, 나는 소일거리 삼아 나오고 있습니다.” 다시 평화시장. 가게를 지키고 있던 한 젊은이에게 말을 걸었다. 이 청년은 인터넷으로 내려받은 오락프로그램을 보고 있다. 패딩점퍼가 주 품목이다. 전태일에 대해 그는 고등학생 때부터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고등학생 때 역사선생님이 운동권이었는지 강하게 말씀하시는 편이었다.” 1975년생인데 장가는 아직 안들었다. 올해가 전태일 40주기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물음에 대한 그의 답이다. “아이구, 나와 뭔 상관이 있나요. 그저 새해엔 돈만 많이 벌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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