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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총 62 건 검색)

대권 유·불리 따라 찬반…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40여년간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아 [신년기획, 더 나은 민주주의로]②
대권 유·불리 따라 찬반…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40여년간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아 [신년기획, 더 나은 민주주의로]②
2025. 01. 01 16:03정치
...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 노태우 전 대통령, 김종필 당시 신민주공화당 총재.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7년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제9차 개헌 이후 역대 정부마다 개헌 논의가 이뤄졌지만 번번이...
2025 신년기획
1987년 개관 이래 첫 독립기념관 광복절 경축식 취소···“김형석 관장의 가벼운 인식”
1987년 개관 이래 첫 독립기념관 광복절 경축식 취소···“김형석 관장의 가벼운 인식”
2024. 08. 12 10:57문화
... 천안시 제공 독립기념관이 자체적으로 매년 열어왔던 광복절 경축식을 올해 개최하지 않기로 했다. 1987년 기념관이 개관한 이후 처음으로, 최근 자질 논란이 불거지고 있는 신임 관장이 독립기념관 행사...
독립기념관광복절경축관장정부참석
왜 1979년이 아닌 1987년에 민주화가 됐나···전두환 정권 다룬 학술서 ‘제5공화국’ 출간
왜 1979년이 아닌 1987년에 민주화가 됐나···전두환 정권 다룬 학술서 ‘제5공화국’ 출간
2024. 06. 06 11:34문화
.... 이와 관련해 제기되는 중요한 질문은 ‘왜 한국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한 1979년이 아니라 1987년에 민주화를 이뤘나’라는 것이다. 강 교수는 1980년 광주민주화 운동과 1985년 2월12일에 치러진...
[미디어세상] KBS는 1987년 이전으로 회귀하려는가
[미디어세상] KBS는 1987년 이전으로 회귀하려는가
2023. 12. 17 20:22오피니언
... 표현의 자유는 진실을 알고자 하는 국민의 권리이지 언론사의 권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87년 이후 언론계에서는 내적 자유 보장을 위한 편집, 편성권의 자율성을 주장해왔다. 그 핵심이...
미디어 세상KBS박민 사장임명동의제대법원판례

스포츠경향(총 16 건 검색)

‘Peace & Prosperity’ 1987년 김만철씨 일가 탈북 조명
‘Peace & Prosperity’ 1987년 김만철씨 일가 탈북 조명
2023. 06. 14 01:04 연예
아리랑TV 13일 아리랑TV는 ‘Peace & Prosperity’ 207회에선 1987년 김만철씨 일가 탈북 사건에 대해 돌아봤다. 지난달 6일, 어린아이를 포함한 북한 주민들이 어선을 타고 서해 NLL을 넘어 화제가 됐다. 가족 단위 북한 주민의 바다 귀순하면 늘 거론되는 사건이 있다. 바로 1987년 일가족 11명의 목숨 건 탈출, 김만철 씨 가족의 탈북 사건이다. ‘Peace & Prosperity’ 는 당시 가족 중 한 명이었던 최정섭씨를 직접 만나보고, 탈북 과정의 생생한 상황과 심정을 들어봤다. 1987년 1월 20일, 칠흑 같은 어둠이 뒤덮은 일본 후쿠이현 앞바다에 국적 불명의 50t급 철선 한 척이 닻을 내렸다.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에 발견된 이 선박의 명칭은 ‘청진호’. 배에는 68세 노인부터 11세 어린이까지 모두 11명이 타고 있었다. 6·25 전쟁 이후 사상 최초의 집단 탈북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김만철 씨 일가족이었다. 함경북도 청진 의과대학병원에서 의사로 일하던 김 씨 일가는 북한의 삼엄한 경비망을 피해 청진항을 떠났다. 오랫동안 치밀하게 준비해온 기획 탈출이었다. 아리랑TV 김만철씨의 처남인 최정섭 씨는 ‘Peace & Prosperity’와의 인터뷰에서 탈북을 결심하게 된 과정을 전했다. 최 씨는 “북한에서 매부와 남동생, 큰누나가 큰 종이를 놓고 이야기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무언가 봤더니 세계 지도였다”며, “당시 북한 식량 사정이 매우 어려워 조카는 영양실조로 구루병에 걸릴 정도였다”, “의사였던 매부는 고위 간부들을 치료하면서 외부 세계가 잘 산다는 이야기를 듣고 탈북을 준비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주일 한국대사관에는 ‘특명’이 떨어졌다. 김씨 일가를 즉각 국내로 오게 하라는 긴급 훈령이 떨어진 것이다. 대사관 측은 일본 정부에 김씨 일가의 한국 망명을 공식 요청했다. 하지만 수 시간에 걸친 설득에도 일가족의 의견은 쉽게 통일되지 않았다. 김만철 씨 본인은 한국행을 원했지만, 최정섭 씨는 제3국행 혹은 북한으로 다시 돌아가길 희망했기 때문이었다. 최 씨는 ‘Peace & Prosperity’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당시 북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며 “조카들은 그런 삼촌이 없는 것으로 취급하겠다 했고, 동생은 심한 욕을 했다. 어머니조차 나를 괜히 데리고 왔다며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혼자 안 가겠다고 해도 가족들에게 끌려갈 것 같아 차라리 내 발로 가자는 마음에 한국으로 왔다”고 밝혔다. 최정섭씨가 북으로 돌아가길 희망했던 이유는 갑작스러운 탈북에 심적 준비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북한에서 받은 사상 교육 탓에 ‘남조선은 거지들이 득시글거리는 생지옥’이라는 편견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 같은 오해는 한국에 와서 첫 날 밤을 보내고, 서울의 발전상을 확인한 뒤 바로 풀어졌다. 아리랑TV 최씨는 “당시 환영 인파가 얼마나 많은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서 도로가 없어지다시피 했다”며 기억을 떠올렸다. 또, “밤에 명동에 차를 세워놓고 내렸는데, 불이 환한 명동을 보면서 이 풍요로운 세상을 왜 북한에는 전파를 안 시켰나”하는 생각이 들었고, 저절로 남한 사회에 동화가 됐노라고 밝혔다. 최씨는 “현재 한국을 찾은 가족들 중에 돌아가신 분은 어머님 한분인데, 90세까지 장수하셨다”면서, “식구들 모두 한결같이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배고픈 설움이 없어지지 않았냐”며 남한행에 후회는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빨리 통일이 돼서 이 자유로움과 풍요로움을 북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게 바람”이라고 전했다. 36년 전, 김만철씨 가족이 탈북 후 거처를 정하기까지 생생한 과정은 ‘Peace & Prosperity’를 통해 세계로 방송이 됐다.
‘어쩌다 마주친, 그대’ 김동욱, 1987년 청춘 그 자체
‘어쩌다 마주친, 그대’ 김동욱, 1987년 청춘 그 자체
2023. 05. 16 10:15 연예
김동욱. 키이스트 김동욱이 1987년 청춘 속으로 돌아갔다. KBS2 드라마 ‘어쩌다 마주친, 그대’(연출 강수연, 이웅희 / 극본 백소연)에서 어쩌다 시간 여행자가 되어 미스터리한 사건을 마주하게 되는 윤해준 역을 맡은 김동욱의 비하인드 스틸이 공개돼 몰입도를 더욱 끌어올리고 있다. 공개된 비하인드 컷에서 김동욱은 1987년으로 완벽히 회귀한 모습이다. 김동욱은 극 중 앵커이자 선생님답게 짧지만 단정한 헤어스타일을 선보이는가 하면, 1987년에도 전혀 위화감 없는 의상으로 ‘프로 시간 여행자’다운 면모를 자랑하고 있다. 또한 푸른 녹음을 배경으로 스틸 카메라를 지긋이 바라보며 설렘을 유발하는 동시에 촬영 중간 의자에 앉아 햇빛을 받으며 한껏 여유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다. 또 다른 스틸에서는 앞선 사진들과 달리 진중한 눈빛으로 더욱 더 완벽한 장면을 그려내기 위해 한 장면, 한 장면 놓치지 않고 모니터링 중인 김동욱을 볼 수 있다. 특히 김동욱은 캐릭터에 빠져들어 대본 숙지에 열중하며 스태프와 끊임없이 의견을 주고받는 등 집중력을 놓치지 않고 촬영에 임했다. 한편, 김동욱은 드라마 ‘어쩌다 마주친, 그대’에서 본인의 죽음을 마주한 뒤 공포에 사로잡힌 순간부터 어쩌다 타임머신을 얻게 된 후 과거로 돌아가 우정리 주민들과 자연스럽게 융화되어 가는 모습을 특유의 능글맞고 천연덕스러운 연기를 맛깔나게 표현해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볼거리를 선사하고 있다. 한편 KBS2 ‘어쩌다 마주친, 그대’는 매주 월, 화요일 밤 9시 50분에 방송된다.
진기주, 1987년에 갇히다 (어쩌다 마주친, 그대)
진기주, 1987년에 갇히다 (어쩌다 마주친, 그대)
2023. 05. 02 10:03 연예
진기주 스틸. KBS ‘어쩌다 마주친, 그대’ 화면 캡처. 배우 진기주가 현실적인 도시 여자로 완벽 변신하며 매력퀸의 귀환을 알렸다. 진기주는 1일 첫 방송 된 KBS2 새 월화드라마 ‘어쩌다 마주친, 그대’에서 시니컬한 사회성을 장착한 차도녀이자 실력파 출판 편집자 백윤영 역을 맡아 캐릭터에 완벽 변신하며 믿고 보는 배우로서 진가를 재입증했다. 백윤영은 베스트셀러 작가 고미숙(김혜은 분)의 신경질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열혈 직장인이자 현실적 인물이다. 그러나 엄마 순애(이지현 분)에게는 냉정한 말투와 까칠한 표정으로 일관하며 업무로 받은 스트레스를 풀어대는 시크한 딸이었다. 진기주는 극과 극 결을 지닌 인물을 디테일한 연기력으로 섬세하게 풀어냈다. 전문가답고 영리한 직장인이었다가 츤데레한 매력의 무심한 딸까지 인물의 상황에 따라 능숙하게 오가는 자연스러운 연기력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목소리, 손짓, 눈빛, 표정 등을 통해 캐릭터에 완벽 몰입한 모습으로 첫 방송부터 화제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또 엄마 순애의 갑작스러운 사망을 알고 엄마의 시신을 마주하는 장면에서는 울분을 폭발시키는 완벽한 눈물 열연으로 시청자의 가슴까지 뭉클하게 만들며 극의 몰입도를 증폭시켰다. 모든 것이 무너져내린 상황 속에서 엄마 죽음의 실마리와 연관된 듯한 ‘봉봉 다방’ 성냥갑을 발견한 백윤영은 우정리 굴다리에 들어간 직후 1987년에 갇힌 시간 여행자가 되면서 첫 회 강렬한 엔딩이 장식됐다. 이처럼 진기주는 믿고 보는 명불허전의 연기력을 입증하며 캐릭터에 설득력을 부여했다. 시간 여행자라는 판타지 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비롯해 사망 사고를 둘러싼 긴장감을 부르는 스릴미, 기자 출신 앵커이자 같은 시간 여행자인 해준(김동욱 분)과 얽히는 알콩달콩한 케미까지 인물이 가진 다채로운 매력들을 섬세하게 풀어나갈 예정이라 향후 활약에 시선이 모이고 있다. 한편, 진기주의 드라마 복귀작인 ‘어쩌다 마주친, 그대’는 1987년에 갇혀버린 두 남녀의 이상하고 아름다운 시간 여행기로 매주 월, 화 오후 9시 50분 방송된다.
‘어쩌다 마주친, 그대’ 서지혜-이원정 “겪지 않았던 1987년, 세트 재밌었다”
‘어쩌다 마주친, 그대’ 서지혜-이원정 “겪지 않았던 1987년, 세트 재밌었다”
2023. 04. 27 16:25 연예
배우 이원정(왼쪽)과 서지혜가 27일 오후 서울 구로구 디큐브시티 더 세인트에서 열린 KBS2 새 월화극 ‘어쩌다 마주친, 그대’의 제작발표회에 참석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KBS KBS2 새 월화극 ‘어쩌다 마주친, 그대’에 출연한 배우 서지혜와 이원정이 겪어보지 않은 1980년대의 문물을 접한 소감을 밝혔다. 서지혜와 이원정은 27일 오후 서울 구로구 디큐브시티 더 세인트에서 열린 ‘어쩌다 마주친, 그대’의 제작발표회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는 연출을 맡은 강수연PD를 비롯해 주연배우 김동욱과 진기주, 서지혜, 이원정이 참석했다. 서지혜와 이원정은 극 중 1987년에 등장하는 인물로, 서지혜는 주인공 백윤영의 엄마로 현재에는 사망하고 없는 이순애 역을 연기했다. 이원정은 백윤영의 아버지로 현재에는 딸과 이미 관계가 틀어져 버린 백희섭을 연기한다. 서지혜는 1996년생, 이원정은 2001년생으로 배경이 되는 1987년을 경험한 적이 없다. 이들은 1987년 인물로, 그 시대를 사는 사람이었기에 젊은 배우들이 시대에 적응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서지혜는 “세트장이 많이 재밌었다. 디테일적인 부분에서도 1987년에 맞게 해놓으셨는데 액세서리나 문구, 벽지 등 그리고 오래된 가수인데 젊은 모습으로 있는 분들의 모습이 신기했다”고 말했다. 이원정은 오히려 덤덤했다. “신기한 부분은 없었던 것 같다”고 말한 그는 “분장과 세트장이 너무 잘 돼 있어 예전에 봤던 뉴스나 기사, 다큐멘터리와 똑같았다. ‘그 시절에는 이랬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 위화감이 딱히 들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어쩌다 마주친, 그대’는 타임머신을 발견해 과거로 가던 뉴스 앵커 윤해준(김동욱)이 평범한 직장인 백윤영(진기주)과 여행에 동반해 1987년으로 가는 이야기다. 거기서 백윤영 부모의 어린 시절을 보고, 거기서 일어나는 살인사건을 추적하며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다. 다음 달 1일부터 매주 월, 화요일 오후 9시50분 방송된다.

주간경향(총 7 건 검색)

[독자 댓글]1260호 “1987년 부산은 6월항쟁의 기폭제였다”外를 읽고
[독자 댓글]1260호 “1987년 부산은 6월항쟁의 기폭제였다”外를 읽고(2018. 01. 16 15:44)
2018. 01. 16 15:44 오피니언
1987년 부산은 6월항쟁의 기폭제였다 그 당시 영도에서 13번 버스를 타고 통학하던 남포동~대신동 구간에는 가스냄새가 가시질 않았지요. 버스로 도망 온 행님들, 잡으려고 버스 탄 하이바+청바지 아저씨들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땐 그게 이건 줄…. _다음 춥다문닫아라. 부산판만 따로 만들어도 드라마 32부작이다. 부산에서 두 달 반을 서면에서 부산역까지 줄을 이었다. 할머니부터 학생까지 100만명이 집회한 날도 있었다. 지하철 서면역·부산역 무정차, 버스 8대 8차로 서면에서 진압대 쪽으로 진격, 최고의 압권이다. 할 말이 너무 많다. 1987 부산. _다음 사실대로. 롯데엔터테인먼트 드디어 ‘1000만과 함께’ 영화도 좋아야겠지만 스크린 독점도 크지! 선택권이 별로 없는데…. _네이버 112a**** ‘하정우의 흥행’ vs ‘롯데의 망’ 누가 이길까 했는데. 올해 실적 좋은 듯. 첫 1000만 ㅊㅋㅊㅋ. _네이버 yhn5**** ‘부모협동 어린이집’의 우여곡절 문 대통령님. 이러한 문제를 귀 담아 듣고 관심을 갖고 해결하시고 도와주셔야 합니다. 이 땅에 아이들과 장애아들이 행복하길. 나은 환경이 하루빨리 조성돼서 성숙한 시민의식이 있는 나라가 되길 바랍니다. _네이버 pian**** 공무원의 일처리 방식도 욕먹을 만하지만 근본적으로 정부 지원책 규정이 미흡한 거 같네요. 암튼 힘내세요, 어머님들. _네이버 zhak**** ‘재벌 셀프개혁’ 지친 정부의 칼은 금산분리도 꼭 해야 한다. 특히 삼성 오너들의 뒷배를 채워주는 삼성 금융계열사들 심각하다. _다음 jerry1101 대물림 경영은 이제 종식해야 한다. 누구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기업 오너가 된다는 건 뜯어고쳐야 한다. 예를 들어 마이크로소프트가 빌 게이츠 자식에게 대물림되는 경우는 절대로 없다. 특히 범죄를 저지른 인간들은 절대로 경영에 재복귀하는 일이 없도록 원천 차단해야. _다음 leehangbock
독자의 소리
[표지이야기]1987년 부산은 6월항쟁의 기폭제였다(2018. 01. 09 13:41)
2018. 01. 09 13:41 사회
1987년 시민들의 민주화투쟁은 결국 독재정권의 ‘항복’을 받아냈다. 여기에는 부산지역의 꾸준한 투쟁도 한몫을 했다. 하지만 서울 중심의 역사는 그 사실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1987년의 부산은 서울보다 뜨거웠다. 지난해 6월 10일, 서울 시청앞 광장에서 ‘6월항쟁 3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고 이태춘씨의 어머니 박영옥씨(87)는 처음으로 서울에서 열리는 기념식에 참석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참석자들과 인사를 나누던 문재인 대통령이 박씨 앞에 멈춰 손을 잡았다. 박씨가 먼저 입을 뗐다. “내 태춘이 엄마라요.” “압니다.” “우리집에 온 것도 압니까.” “예. 아이고, 내가 영정도 노무현 대통령하고 나하고 서로 들었다 놨다 했는데요.” 이들의 인연은 3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아대 졸업생인 이씨는 1987년 6월 18일 부산에서 시위를 하던 중 고가도로에서 떨어져 숨졌다. 1987년 6월, 부산의 인권변호사였던 문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과 함께 이씨의 장례를 치렀다. 이들은 부산에서의 6월항쟁을 이끌었던 부산 국본(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집행부였다. 문 대통령은 자서전인 <운명>에서 “나는 6월항쟁의 역사를 정리하는 데 있어 부산의 역할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서울지역 중심으로 서술되는 것이 안타깝다. 서울 중심 사고의 산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며 “87년 초부터 달아오르기 시작한 민주화 열기는 특히 부산에서 더 뜨거웠다”고 썼다. 문 대통령의 회고처럼 1987년 부산은 뜨거웠다. 6월 10일, 부산 중구 대청동에서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부산시민대회’가 열렸다. 경찰은 집회 초반부터 최루가스를 살포했고 최루탄 발사 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안전수칙도 지키지 않았다. 말 그대로 마구잡이 진압이었다. 이로 인해 시위와 관계없는 사람들이 다치기도 했다. 가령 최초 부상자인 김현숙씨는 어머니 대신 자갈치시장에 수금하러 나왔다가 얼굴, 손, 팔, 가슴에 최루탄 파편 70여개가 박히는 부상을 당했다. 광복로 로얄호텔 앞에서는 5세가량 되는 여자아이가 얼굴에 사과탄 파편을 맞았다. 과잉진압은 구경하던 시민들에게 겁은커녕 분노를 안겼다. 이후 매일 시위가 이어졌다. 12일 저녁, 서대신동 구덕운동장에서는 한국과 미국의 대통령배 축구경기가 한창이었다. 같은 시각, 대학생들은 구덕운동장 앞 광장에서 집회를 열었다. 축구경기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시민들과 합세하기 위해서였다. 400여명의 학생들이 구덕운동장 앞에서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치자 경찰은 최루탄과 최루가스를 쏘았다. 경찰이 쏜 최루가스는 시위대뿐 아니라 축구경기장에도 날아들었다. 최루가스가 날아들자 관중의 절반이 운동장을 빠져나갔고 일부는 “요금을 환불하라”고 항의했다. 경기는 30분 동안 중단됐다가 다시 시작됐다. 1987년 6월 27일 당시 노무현 변호사(가운데)와 문재인 변호사(왼쪽에서 세 번째)가 시위 도중 고가도로에서 떨어져 숨진 이태춘 열사의 노제를 이끌고 있다. /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문재인 대통령이 책에 쓴 당시의 기억 이튿날에는 야구장에서 해프닝이 일었다. 이날 대학생들은 사직동 쪽으로 가두시위를 벌였는데 사직야구장에서는 해태와 롯데의 경기가 열리고 있었다. 경기를 마칠 무렵, 응원구호는 ‘파이팅’ 대신에 ‘독재타도’로 변했고 시민들은 ‘우리의 소원’ ‘애국가’ 등을 불렀다. 결국 이들은 경찰에 의해 강제해산됐다. 이런 상황에서 15일, 서울 명동성당 농성이 해산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명동성당 농성은 6월항쟁의 ‘상징’이었다. 당시 명동성당 농성대는 △15일 해산이 천주교 측의 확고한 입장 같다는 점과 △국본이 18일에 최루탄 추방대회를 준비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해산을 결정했다. 하지만 부산은 달랐다. 명동성당 농성이 해산한 이튿날, 부산지역 대학에서 교내 출정식이 열렸고 1만명이 넘는 인원이 남포동을 뒤덮었다. 이들이 당시 시청 옆 MBC 방송국으로 향하자 경찰은 시청 앞을 최후의 저지선으로 삼아 차단했다. 그 중에는 백골단(사복경찰 체포조)도 있었다. “뛰어” 하는 소리와 함께 백골단이 달려 나갔고 전경들은 마구 최루탄을 쏘았다. 시민들은 근처 가톨릭센터 쪽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근처 공사장에서 철근과 벽돌, 시멘트 포대 등을 가져와 ‘바리케이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송도성당 주임신부였던 박승원 신부는 가톨릭센터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박 신부는 당시 상황을 회고하며 “주교님이 저한테 큰일났다고 전화가 왔다. 센터에 가보니 학생들이 경찰에 에워싸여서 오갈 데가 없었다”며 “마이크를 들고 학생 대표에게 나오라고 한 다음, 종교는 여러분을 보호할 의무가 있으니 돌과 화염병을 여기에 두고 가면 보호해주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가톨릭센터는 부산의 ‘명동성당’과 같은 역할을 맡게 됐다. 가톨릭센터의 농성 소식이 알려지자 부산은 고무되기 시작했다. 가톨릭센터 농성 이틀 뒤인 18일에 열린 ‘최루탄 추방의 날’이 대표적이다. 국본은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이한열의 죽음에 항의해 18일을 최루탄 추방의 날로 정했다. 이날 부산시내는 대학생과 시민들로 가득찼다. 그 인원이 30만명에 이르렀다. 노 전 대통령은 자서전인 <운명이다>에 이날에 대해 “그날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 나도 거기에 있었다. 부산 시위는 규모와 격렬함에서 서울을 능가했다. 최루탄이 다 떨어져 경찰은 더는 시위를 진압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며 ”노래를 부르면서 걸어가는 청년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함께 걸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고 썼다. 서울 명동성당 역할을 한 가톨릭센터 늦도록 시위가 끝나지 않자 경찰은 마구잡이로 최루탄을 쏘기 시작했다. 당시 시위대는 범일고가도로로 이어지는 좌천동 고가도로를 통과하려던 참이었다. 경찰은 엄청난 양의 최루탄을 난사했다. 시민들은 어떻게든 숨을 쉬기 위해 난간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어떤 이들은 난간을 뛰어넘어 교각 윗부분의 좁은 공간에 웅크리고 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 고가도로에서 한 사람이 떨어졌다. 이태춘씨였다. 밤색 바지와 상의는 최루가스로 범벅이 돼 있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김일석 시인은 “전경들이 최루탄 발사기를 들고 앞에 좌악 서 있고 그 뒤에 전경 병력이 몇 줄에 걸쳐 서 있고, 또 그 뒤에 최루탄 자동연발 발사기가 있었다. 경찰은 관공서와 언론사가 모여 있는 수정동으로의 진입을 막기 위해 필사적이었다”며 “시위대는 얼굴에 랩을 말고 마스크를 끼는 등 노력을 했지만 워낙 많의 양의 최루탄을 쏘아대서 호흡을 할 수가 없었다. 숨을 쉬기 위해 뒤로 달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1987년 6월 18일 부산의 시민·학생들이 도로를 가득 메운 채 시위를 벌이고 있는 모습. / 주간경향 자료사진 이후 전국적으로 시위는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6월 24일 대통령과 야당 총재의 이른바 ‘여야 영수회담’이 열리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시위에 참가하기보다는 일단 기대를 가지고 관망했다. 가톨릭센터에서의 농성 역시 여러 가지 이유로 22일 해산을 결정했다. 하지만 24일 영수회담은 아무 성과 없이 결렬됐다. 그리고 18일 밤, 고가도로에서 떨어졌던 이씨가 결국 숨을 거뒀다. 28살의 나이였다. 영수회담의 결렬과 이씨의 사망 소식에 다시 부산이 들썩였다. 부산 국본 지도부는 26일로 예정된 평화대행진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6월 26일 부산에서는 종교인들이 평화대행진 투쟁의 서막을 열었다. 천주교 신부들과 신도 2500여명은 중앙성당에서 ‘민주화와 인권회복을 위한 특별미사’를 연 다음 행진을 시작했다. 서면에서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등이 시국기도회를 마치고 대형십자가를 앞세우고 행진을 시작했다. 운수노동자들도 적극 가세했다. 시내버스, 택시, 트레일러까지 시위대의 ‘바리케이드’ 역할을 한 것이다. 문현동에서는 시내버스 7대가 시위에 동원됐다. 시위대는 시내버스를 앞세우고 문현로터리까지 시위행진을 벌였다. 이런 흐름 속에서 27일 이씨의 장례식이 열렸다. 국본 부산본부장으로 치러진 장례행렬의 제일 앞 줄에는 노 전 대통령과 문 대통령이 섰다. 당시 상임집행위원장이던 노 전 대통령이 이씨의 영정을 들었다. 보도통제로 이날 장례식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노 전 대통령이 이씨의 영정을 든 사진은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결국 6월 29일 군부독재는 항복을 선언했다.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는 6·29 선언을 한 것이다. 여기에는 부산지역의 꾸준한 ‘투쟁’도 한몫 했다. 하지만 부산 투쟁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문 대통령의 말처럼 “서울 중심으로 역사가 쓰였기 때문”이다. 고호석 정치개혁부산행동 상임대표는 “가톨릭회관과 그 이후 부산 시위가 없었으면 (6월항쟁이) 사그러졌을 가능성도 상당히 많았다. 당시 시위가 크게 전개됐던 도시에서도 17~18일에는 시위의 열기가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있었다”며 “그런데 부산에서는 30만명이 모여 다시 전국적으로 불을 붙였다”고 말했다. 부산 30만 인파가 전국 열기 확산시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도 <6월항쟁과 국본>이라는 백서를 통해 부산에서의 일련의 흐름에 대해 “6월 16일의 부산 시위가 가톨릭센터 농성으로 이어져 ‘부산판 명동사건’이라 불리면서 전두환 정권의 폭력성과 그에 맞서는 부산 시민들의 저항정신과 용기를 온 국민들에게 보여준 점 등은 군사독재정권의 종말이 머지않았다는 희망을 안겨주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부산의 열기가 이토록 달아오른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조직된 투쟁본부다. 이를 두고 이명곤 노무현재단 부산지역위원회 운영위원장은 “지도부가 세팅이 잘 되어 있었다. 모양만 갖춰진 지도부가 아니라 80년대 내내 투쟁을 이끌었던, 실제로 항쟁을 주도할 수 있는 실질적인 지도부”라고 평가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노 전 대통령이다. 그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은 것을 두고 문 대통령은 2002년 6월 월간 <말>과의 인터뷰에서 “나도 집행위원이었지만 가두연설을 한다든지, 경찰과 직접 몸을 맞대고 투쟁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노변’은 흔쾌히 거리를 돌고 행동하고 투쟁했다”고 말했다. 1979년 부마항쟁의 경험 역시 영향을 미쳤다. 소설가 김하기씨는 <6월항쟁>에서 “부산과 광주의 집회 열기가 서울을 압도한 것은 김영삼과 김대중, 양 김의 지역연고 때문이라는 답이 나오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며 “부산과 광주는 그리 멀지 않은 기간 전에 군사독재 정권과 전면전을 벌인 경험이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박 신부 역시 “당시 부산지역에서 광주항쟁 사진전이 개최되고 있었고 이를 보려는 시민들의 줄이 1㎞를 넘어가기도 했다”며 “이런 경험이 당시 부산 항쟁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했다. 1987년의 부산은 서울보다 뜨거웠다. 6월항쟁 대표사진 ‘아! 나의 조국’ 찍은 고명진씨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 고명진 제공 “그 주인공을 찾으려고 애를 많이 썼어요. 언론사에서도…. 뒤에 태극기를 들고 있던 친구들은 한겨레에서 확인했는데.” 1987년 6월항쟁을 대표하는 사진 한 장. 웃통을 벗은 깡마른 청년이 뛰어나오며 절규하는 사진이다. ‘아! 나의 조국’이라는 타이틀로 알려진 사진이다. 고명진 영월미디어기자박물관 관장(67)의 말이다. 그는 당시 한국일보 사진기자였다. 1987년 6월 26일 오후 4시. 부산 문현로터리 앞이었다. 워낙 유명한 사진이다보니 ‘설’들도 많았다. <주간경향>과의 통화에서 고씨는 “‘최루탄을 쏘지 마라!’고 절규하는 것은 확실히 들었어요.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으니까요”라고 말했다. 이날은 당시 항쟁을 지도했던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가 지정한 ‘국민평화 대행진의 날’이었다. 부산에서는 하나의 행사가 더 열렸다. 박종철 추모 타종행사였다. 부산은 87년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박종철의 고향이다. “지금도 생생하게 그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 문현로터리는 지하철 공사로 파헤쳐져 있었어요. 사진은 지하철 건설공사 현장 가설문에 올라가 찍은 것입니다.” 6월항쟁을 기록한 유명 사진들 중에는 고 관장이 찍은 사진들이 많다. 영화 <1987> 개봉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배우 우현(강민창 치안본부장 역)이 태극기를 들고, 우상호 의원이 이한열의 영정을 들고 있는 사진 역시 그의 작품이다. 87년 당시 우 의원은 연세대 총학생회장이었고, 우현씨는 총학생회 사회부장이었다. 고 관장이 부산과 서울, 그리고 전국의 ‘현장’ 사진을 찍은 셈이다. “1980년 5월 광주항쟁을 보면 우리 기자 손으로 기록된 것이 별로 없었어요. 80년대 중반 즈음에 ‘우리 민주화운동을 우리 손으로 기록해야 한다’고 결심했죠. 그래서 여기저기 부지런히 다녔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쉽지는 않았다. 경찰 채증반으로 오해를 받아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워낙 언론에 대한 불신이 깊어 ‘어용기자’, ‘군부 앞잡이’라는 인식이 있었어요. 신문기자가 찍어 정보과에 넘긴다는 루머도 있었고….” 시위대에 필름을 뺏긴 적도 있었다. 고 관장은 그런 어려움은 사소한 일이었다고 덧붙였다. “더 어려웠던 것은 보도통제였습니다. 이한열 노제 지낼 때 시청 주변의 모든 건물을 경찰 정보과나 안기부에서 못 올라가게 했어요. ‘플라자호텔’에서 찍은 시청 앞 분수대 쪽 행사 장면이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공개됐는데 그게 당시 시청 직원이 찍은 겁니다. 벌써 30년이 흘렀는데 지금에야 나온 것을 보면, 그게 노출되면 신변에 불이익을 받을까봐 두려움이 있었던 게죠.” 그는 영화 <1987>의 세밀한 고증과 재현이 놀랍다고 덧붙였다. “실제 당시 기자들이 썼던 언어에서부터 미도파백화점 앞 집회현장까지 어쩌면 저렇게 정교하게 재현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도 아는 범위 내에서 다 이야기해줬는데 그보다 더했던 것도 많았어요. 영화는 오히려 감정을 억누르고 최대한 냉정하게 상황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찍었는데, 그래서 아주 잘 나온 것 같습니다.” 현역에서 은퇴한 그는 강원도 영월로 귀촌해 군의 지원을 받아 폐교를 활용해 ‘영월미디어기자박물관’을 열었다. “폐교가 마을공동체의 중심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골에 내려와보니 학생들 수가 너무 적어요. 매년 졸업생 수가 6~7명에 불과하니까요. 사진기자를 했기 때문에 폐광지역의 농촌학교 앨범을 6년째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졸업생 숫자가 적으니 원래 앨범을 제작할 수 없는데, 농어촌공사로부터 실제작비를 지원받고 또 사진 찍고 편집하는 것은 귀농귀촌하는 분 가운데 같이 도와주시는 분들이 있어 만들고 있는데 너무들 좋아해요. 학교나 학부모들이나.” 다시 87년의 기억에 대해 물었다. “영화를 보면 엔딩크레딧에 문익환 목사가 열사들의 이름을 부르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목격한 장면이랄지, 여러 가지 기억이 많이 납니다. 그런 아픔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이 있겠죠. 저는 아직도 ‘ing’라고 생각합니다. 민주화라는 것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이루는 중이에요.” 참고문헌 <부산민주운동사> 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 1998. <87년 부산의 6월은 왜 그토록 뜨거웠을까>,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2017 <운명> 문재인, 2011.
표지 이야기
[표지이야기]“1987년 태어난 아들과 함께 봤다”(2018. 01. 09 11:52)
2018. 01. 09 11:52 사회
ㆍ을 본 부산시민들의 반응, 관람 후 자연스레 2016년 촛불 이야기로 영화 <1987>의 누적 관객 수가 300만명을 넘었다. 영화진흥위원회의 최신 개봉작 통계에 의하면 1월 4일 기준으로 총 302만9589명이 <1987>을 관람했다. 영진위의 지역별 통계자료에 의하면, 수도권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관객이 찾은 지역은 바로 부산광역시다. 1월 4일까지 전체 관객의 8.1%인 24만6000여명이 부산의 영화관에서 <1987>을 봤다. 1월 4일 오후, 부산의 중심가 부산진구 서면교차로 인근 영화관에서 <1987>을 보고 나온 부산 시민들을 만났다. 서면교차로는 6월항쟁의 불씨를 되살린 1987년 6월 18일 ‘최루탄 추방의 날’ 당시 30만명에 가까운 시위대가 운집한 현장이기도 하다. 부산 6월항쟁의 상징이었던 중구 대청동의 부산 가톨릭센터. 1987년 당시의 외관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앞쪽에 6월항쟁 기념 표지석이 서 있다. “나도 작게나마 한몫 했구나” 수도권의 영화관과 마찬가지로 부산에서도 1987년에 20대를 보낸 50대 관객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메가박스 서면점에서 만난 50대 중반 남성 김호식씨(가명)는 손으로 연신 눈물을 훔치며 영화관에서 내려왔다. 그는 <1987>을 두 번째 보러 왔다고 말했다. 김씨는 “주말에 부인과 6월항쟁이 있던 해에 태어난 아들과 함께 영화를 봤다가 또 보고 싶어서 영화관에 왔다. 그때도 지금도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라고 말했다. 김씨는 6월항쟁 당시 주말에 한두 번 서면로터리 집회에 나가고, 주중에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 출근했다고 한다. 그는 “마음속으로는 민주세력을 지지해 왔지만 그들의 행동에 함께하지 못한 부채의식이 내 깊은 곳에 있는 것 같다. 이 부채의식이 나를 다시 영화관으로 끌어간 것 같다”며 “영화가 부산을 무대로 펼쳐진 건 아니었지만, 저도 조금이나마 경험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더 특별했다. 동창회 단체채팅방에서 ‘내가 영화에 나오는 단역배우 한 명이라도 된 것 같다’는 소감을 말하는 친구들이 여럿 있었다”고 말했다. 1987년 부산에서 6월항쟁을 주도했던 부산의 민주화세력은 <1987>을 보고 서면교차로와 부산 가톨릭센터 등에서 있었던 당시의 날들을 떠올렸다. 이명곤 노무현재단 부산지역위원회 운영위원장은 <1987>이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다룬 <변호인> <택시운전사>와 결이 비슷하지만, 본인은 또다른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 위원장은 6월항쟁의 서막을 올린 1987년 2월 7일 박종철 열사 추도식 때 부산대 학생운동 지도부 중 한 사람으로 항쟁에 참여했다. 이 위원장은 영화를 본 뒤 같이 민주화운동을 했던 이들뿐만 아니라 직장인, 사업가 등으로 평범하게 살고 있는 대학생 시절 친구들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고 말했다. 그는 “영화를 보고 나서 울컥하기도 했지만 삶의 행복과 자부심을 얻게 됐다는 반응도 많이 접했다”며 “198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변호인>이나 <택시운전사>에서도 울컥할 수 있다. 하지만 <변호인> <택시운전사>를 보고 난 뒤에는 ‘당시에 그런 일이 있었구나’라는 느낌에 가까웠다. 그런데 <1987>을 보고 난 뒤에는 ‘나도 역사의 물꼬를 트는 데 작게나마 한몫 했구나’란 생각에 지금 삶이 힘들어도 활력을 얻었다는 그런 반응이 많았다”고 말했다. 이 위원장은 영화가 1987년대에 20~30대를 보낸 이들뿐만 아니라 지금의 20~30대에게도 인기를 끄는 이유로 2016년 촛불집회를 들었다. 그는 “영화를 보면 2016년 촛불집회가 오버랩 안될 수가 없다. 1987년은 한국 사회가 민주주의로 나아간 시기라고 한다면, 2016년은 잘못된 길을 가던 민주주의를 바로잡은 시기”라며 “부모세대가 자녀들과 함께 영화를 본 뒤 자연스레 2016년 촛불집회 이야기가 나왔고, 자녀들과 공감대가 커졌다는 반응이 많았다”고 말했다. 지난해부터 부산에 6월항쟁 표지석 등장 실제로 영화관에서는 20~30대로 보이는 이들도 많이 보였다. 김호식씨도 “1987년에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젊은이들이 영화관에 많아서 놀랐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오늘도 젊은 사람들이 더 많이 보인다. 젊은 연인들이 손잡고 영화관에 와서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는 것을 보고 ‘저 친구들은 <1987>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했다”고 말했다. 영화관을 찾은 젊은 세대에게도 영화를 본 소감을 물었다. 이들은 부산의 6월항쟁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1990년대 이후 부산이 오랫동안 보수세력의 아성으로 자리잡으면서 부산에는 6월항쟁을 기념하는 변변한 기념물 하나 찾기 어렵다. 부산의 젊은 세대가 ‘부산의 6월항쟁’을 잘 모르는 것도 이상하게만 볼 현상은 아니다. 지난해 6월 14일, 부산지역 일간지 <국제신문>은 부산의 6월항쟁 기념물 현황을 기사로 담았다. ‘민주항쟁 기억의 공간 가꾸자’라는 제목의 기사에 의하면, 6월항쟁 당시 많은 학생들이 참여한 동아대에만 일부 기념물이 있었다. 동아대 교수회관 벽면에는 1988년 제작된 6월항쟁도가 있으나 오랫동안 방치돼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고 한다. 2007년 동아대 공대 뒤편에 민주항쟁 기념비가 세워졌으나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1989년 부산대 중앙도서관 앞에 횃불 모양의 민중항쟁탑이 세워졌으나 이는 1979년 부마항쟁을 기념하는 성격의 기념물이다. 5·18 민주항쟁이 일어난 광주광역시가 시 차원에서 5·18 관련 기념물들을 보존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부산진구 서면교차로에 설치된 6월항쟁 기념 표지석의 모습. 6월항쟁 당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 사무국장으로 활약한 고호석 정치개혁부산행동 상임대표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3당야합 사건 이후 부산의 정치지형이 보수색으로 확 바뀌었다. 민주주의 이야기를 하기 꺼리는 사람들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기념물들이 내팽개쳐졌다”고 말했다. 부산 민주화운동 활동가들에게 있어 <1987>은 가슴 아픈 영화이기도 하다. 고 대표는 <1987>이 개봉한 지난해 12월 27일, 박종철 열사의 고등학교 동기들과 함께 영화를 관람했다. 고 대표는 “영화 초반은 사실 밋밋한 느낌이었다. 오랫동안 6월항쟁에 대한 자료를 모아 왔고, 언론과 여러 차례 인터뷰도 했기 때문에 제 입장에선 영화가 ‘이미 다 아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런데 뒤로 가면서 고문 장면, 최루탄 장면이 나오면서 무척이나 아팠다. 제가 직접 그 일들을 겪었기 때문에 뒤로 갈수록 영화가 너무 아프게 다가왔다. 다시 <1987>을 보자고 하면 못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부산의 민주화세력은 6월항쟁 당시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젊은 세대에게 6월항쟁의 기억을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는 지난해부터 부산시내에 6월항쟁을 기념하는 표지석을 세우기 시작했다. 지난해 10월, 기념사업회는 6월항쟁 30주년을 맞이해 매일 8차선 도로가 꽉 차도록 집회가 열렸던 서면교차로(표지석 위치는 부산지하철 서면역 5번출구 앞)와 6월항쟁의 작전본부 역할을 한 중구 부산 가톨릭센터 앞 두 군데에 표지석을 세웠다. “지금의 일상이 많은 희생으로 이뤄져” 고 대표는 지난해 두 군데 표지석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기념사업회 차원에서 부산시내 곳곳에 6월항쟁을 기리는 표지석을 설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국민운동 부산본부 사무실이 있던 부산지하철 1호선 범내골역 인근 건물, ‘아 나의 조국’ 사진이 찍힌 현장인 문현동 교차로, 2·7 박종철 열사 추모대회가 열렸던 중구 남포동 비프광장 등이 표지석 추가 설치 후보지라고 고 대표는 설명했다. 한편, <1987>을 계기로 부산의 6월항쟁에 관심이 생겼다는 이들도 만날 수 있었다. 롯데시네마 부산본점에서 만난 20대 중반 석사과정생 여성 이수진씨(가명)는 자신이 ‘영화광’이라며, <1987>의 예고편이 나온 때부터 관심있게 지켜봤다고 말했다. 이씨는 “2010년 지방선거 때 생애 첫 투표를 했다. 그런데 기성세대에서 몰표가 나와 계속 새누리당만 당선됐다. 그래서 부산에서는 민주화운동 같은 게 별로 없었나보다 생각한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영화 개봉일이 다가오면서 6월항쟁에 대해 여러 글을 읽었다. 그 덕분에 매주 영화 보러 나오는 서면로터리에서도 6월항쟁 때 많은 일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조금은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씨는 “사실 슬픈 영화를 봐도 잘 울지 않는 편인데,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가 우는 장면에서는 결국 눈물이 나왔다. 제가 이렇게 마음 편히 영화 보러 다니고 커피 마시는 소중한 일생이 많은 분들의 희생으로 이뤄진 것이라는 점을 느꼈다”고 말했다. 20대 초반 대학생 남성 박성일씨(가명)는 “요새 인기 있는 영화라서 친구들이랑 보러 왔다. 학교에서 6월항쟁을 배운 기억은 얼핏 나지만 정확한 내용을 모르고, 영화를 보고 나서도 1987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박씨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솔직히 ‘잘 만든 영화를 봤구나’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런데 영화관 한쪽 구석에서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올 때까지 꽤 연세가 있어 보이는 아저씨가 고개를 숙이면서 훌쩍이고 계시더라. 그 모습을 보고 부모님께 1987년 부산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메가박스 서면역 인근 커피숍에서 만난 50대 남성 최기준씨(가명)는 젊은 세대가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1987년 세대’가 더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등학생인 최씨의 아들은 최씨에게 “왜 공무원들이 저렇게 사람들을 고문하고 괴롭히냐”고 물었다고 한다. 최씨는 “아들에게 저때는 나쁜 공무원들이 많았고 지금은 그런 사람들이 없어졌다고 설명했지만 솔직한 대답은 아니었다”며 “지금도 전·현직에 있는 선배들을 만나면 ‘요새는 조직의 기강이 무너졌다’느니 ‘젊은이들이 너무 방탕하게 산다’며 전두환 때처럼 국가 기강을 잡아야 한다는 말을 심심찮게 듣는다. 그분들이 영화를 봤다면 나라일 하는 사람을 나쁘게 그렸다고 오히려 화를 냈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최씨는 “영화를 보고 내 나이가 50이 넘었는데 과연 자녀세대가 살기 좋은 세상이 됐는지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1987년 6월을 경험한 우리 세대가 더욱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한편, 고호석 정치개혁 부산행동 상임대표는 부산의 6월항쟁에 대해서도 <1987>과 같은 예술작품이 탄생했으면 좋겠다는 뜻을 밝혔다. 민주화운동의 역사도 서울 중심으로 쓰여졌다는 문제인식을 갖고 있는 고 대표 등 부산의 민주화세력은 지난해 6월 1980년대 부산의 민주화운동을 다룬 책을 펴냈다. 책도 좋지만 부산 6월항쟁을 제대로 알리는 데 ‘문화의 힘’ 만한 게 없다는 취지다. 고 대표는 “아직은 어려운 상황이지만 부산의 긴박했던 6월항쟁 드라마를 이번 영화처럼 완전히 픽션도, 완전히 다큐멘터리도 아닌 형식의 작품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기대와 욕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표지 이야기
[터치스크린]초현실적인 시공간, 1987년(2017. 12. 26 18:59)
2017. 12. 26 18:59 문화/과학
제목 1987 감독 장준환 주연 김윤석, 하정우, 유해진, 김태리, 박희순, 이희준 상영시간 129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17년 12월 27일 영화를 보고 난 다음 전화했다. “어 그래, 오늘 저녁에 시사회 한다고 하더라.” 아, 저는 기자시사회로 방금 봤어요. “영화 찍는다고 감독도 만났는데 실명으로 영화에 등장시켜도 되냐고 묻더라. 뭐 상관없다고 답하긴 했는데.” 이종창. 이한열이 쓰러졌을 때 뒤에서 그를 안았던 인물. 그의 캐릭터는 영화에서 실명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나는 그에게 영화의 고증에 대해 물었다. 그래도 꼼꼼하게 챙긴 듯하다. 여전히 내가 알고 있는 1987년 박종철·이한열 등 ‘그들’의 동선과 다른 부분은 있지만. 역시 1987년을 다룬 최규석의 만화 는 6월항쟁 때 소나기를 맞으며 도로에 누워 농성을 하던 주인공이 진지모드로 ‘승리’를 확신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이제야 최종적으로 승리했다. 다행히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과 등치될 수 있었다. 사실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감독이 일반관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장치’는 등장하는 순간부터 간파할 수 있었다. ‘우리의 최종적인 승리’라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은 ‘그 운동권’ 청년의 정체가 얼굴을 들어 자신을 노출하는 순간, 배우 강동원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때였다. 물론 시사회장 관객들이 내던 작은 탄식(?)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의미는 아니었을 것이다. 운동권의 배후로 김정남이라는 인물이 등장했을 때 어떤 사람들은 웃었다. ‘겨울비’라는 제목의 노래에서 어떤 사람은 전영록을 떠올리고, 어떤 사람은 김종서를 떠올리듯, 웃은 사람들은 올해 2월에 사망한 김정일의 아들을 떠올리거나 가공의 인물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역시 아는 사람은 알지만 진짜다. YS 정권에서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을 역임한 그 김정남. 영화를 보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지점은 역시 실존인물인 박 처장이라는 악역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 영화가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에서는 박 처장이라고만 나왔지만, 실제 인물은 박처원 전 치안감이다. 고문경찰로 유명한 이근안의 보스였다. 실제 이북 출신으로, 가족의 몰살을 목격하고 혈혈단신 월남한 박처원은 조폭적 의리파 인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이 소재로 대중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라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1980년대 사회운동을 정면으로 다룬 영화라면 생각나는 게 (1989)나 (1992)와 같은 그 시절에 제작된 독립영화들뿐이기 때문이다. (1990)를 상영했을 때는 상상도 못했던 학교 뒷산 속에 번쩍이는 화이바를 쓴 백골단(사복경찰 체포조)들의 출현을 동시에 목격하기도 했다. 영화를 트는 걸 막겠다고 경찰병력을 투입하다니! 농담처럼 들리는 이야기지만 진짜다. 영화의 가제는 ‘보통사람’이었다. 역시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저 ‘보통사람’은 그해 말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가 자신의 군부경력을 희석시키고자, 미국의 선진적 홍보기법을 도입해 만들어낸 이미지 메이킹이었다. 생각해보면 당시 집권당이었던 민정당이 내세운 가치, ‘민주주의’와 ‘정의사회 구현’도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반역자들이 트레이드마크로 내세울 가치는 아니었다. 영화는 찰나적 순간이었을지 모르지만 기표와 기의가 일치하는-언론도 검찰도 본연의 자기 역할을 하는, 어떻게 보면 초현실적인 시공간이었던 1987년의 사건과 사람들을 담아냈다. 수작이다. 가족들의 손을 잡고 극장 관람, 강추한다. 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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