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825 건 검색)
- 진실화해위 노조 “이옥남 위원이 막아서 6·25 학살 수백건 심의 보류”
- 2025. 02. 27 17:01사회
- ... 지역별로 편차가 크게 벌어지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지부는 “미처리 사건 중국군과 경찰 등에 의한 학살사건은 331건이 보류된 반면, 인민군과 좌익 등 적대세력에 의한 학살사건은 14건이 보류됐다”며...
- [사설]시민 학살한 5·18 현장에서 ‘윤석열 내란’ 옹호하다니
- 2025. 02. 16 18:54오피니언
- 광주 금남로에서 지난 15일 열린 윤석열 탄핵 촉구 집회에서 한국사 강사 황현필씨가 “이곳에서 내란수괴 옹호 집회를 여는 건 홀로코스트가 벌어진 곳에서 나치 추종자가 집회하는 것과 다름 없다”며 반대...
- 머스크 “독일 과거 죄책감 넘어서야”…나치 ‘유대인 학살’ 부정 발언 논란
- 2025. 01. 27 07:00국제
- ... 것 같다. 그걸 넘어설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과거의 죄책감은 홀로코스트(나치의 유대인 학살)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독일에서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것은 불법이다. 머스크는 “정보에...
- “‘베트남전 한국군 학살’ 피해자에게 국가 배상해야”…항소심도 인정
- 2025. 01. 17 16:07사회
- ... 말했다. 법원, ‘베트남전 한국군 학살’ 국가 배상책임 첫 인정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 피해자들에게 한국 정부가 배상해야 한다는 1심 법원 판단이 나왔다.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 응우옌응우옌티탄베트남전쟁퐁니사건
스포츠경향(총 39 건 검색)
- 장항준 감독, “‘1923 간토대학살’ 역사적 희망으로 다가올 것”
- 2024. 08. 15 10:34 연예
- 장항준 감독이 관동 대지진 직후 시작된 조선인을 향한 학살을 다룬 첫 다큐멘터리 영화 ‘1923 간토대학살’(감독 김태영 최규석)을 강력추천했다. ‘1923 간토대학살’ 측은 15일 광복절 개봉을 하는 가운데 각계각층 전문가의 응원이 담긴 강력 추천 영상을 공개했다. ‘1923 간토대학살’은 1923년 9월 1일, 10만 5천 명 이상의 사망자를 발생시킨 관동대지진 직후 무고한 조선인을 향한 대학살을 본격적으로 다룬 첫 다큐멘터리 영화다. 조선인을 향한 대학살을 부정당한 101년, 진실을 밝히기 위한 증언의 목소리와 기록을 되짚는 다큐멘터리. 광복 79주년을 맞이함에도 여전한 상흔을 잊지 않고, 그 의미를 되새기고자 8월 15일 광복절에 개봉을 결정해 각계각층 전문가, 셀럽들의 응원이 끊이지 않았다. 개봉을 기념해 전문가들이 ‘1923 간토대학살’을 관람한 후 보다 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를 봤으면 해 강력 추천과 응원을 보냈다. 공개된 스페셜 영상에서는 먼저 장항준 감독이 “이 영화는 인류의 자기반성이자 책임감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역사적 희망으로 다가올 것”이라고 전했으며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은 “모든 학생들이 부모님과 함께 봤으면 한다. 슬픔과 거대한 분노를 느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여년간 잊혀진 이 역사를 알리기 위한 희망의 행진을 봤다”고 전해 어두운 역사적 사실을 다뤘지만 많은 이들이 역사 규명을 위해 노력했음을 전해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높인다. 또한 권칠승 국회의원은 “이 영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역사를 바로 알고 이를 토대로 우리나라의 발전을 기약하는 계기가 되었으면”이라고 전해 이 영화를 통해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 김준혁 국회의원은 “어려운 여건 속 훌륭한 다큐 영화. 영상 역사의 한 장르라고 생각”한다며 호평을 전했으며 김옥영 다큐멘터리 작가는 “기록되지 않는 기억은 사라진다. ‘1923 간토대학살’은 바로 그 기억을 역사로 만드는 영화이다”라고 이야기해 묵직한 여운을 던졌다. 101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기록하며 뜨거운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 ‘1923 간토대학살’은 전국 극장에서 절찬 상영 중이다.
- 경기도, 다큐 영화 ‘1923 간토대학살’ 14일 도청서 상영···김동연 지사 “정부, ‘역사 잊은 민족에 미래 없다’ 말 되새겨야”
- 2024. 08. 13 20:40 연예
- 경기도 제공 경기도가 광복절을 앞두고 14일 오후 3시 도청 1층 대강당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1923 간토대학살’을 상영한다고 13일 전했다. 이 영화는 일제강점기인 1923년 9월 1일 일본 수도권이 있는 간토 지방에서 발생한 대지진 때 현지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자행된 학살을 조명한다. 당시 일본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한 가운데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거나 방화했다는 유언비어가 퍼져 집단적 분노의 표적이 되면서 무참히 학살당했다. 조선인 희생자는 6천명을 훌쩍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일본 학계와 시민사회에선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의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일본 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베트남 전쟁, 그 후 17년’(1993)과 ‘세계영화기행’(1995)으로 주목받은 김태영 감독이 최규석 감독과 함께 제작했으며, 배우 김의성이 내레이터를 맡았다. 영화에서는 간토대지진 후 중국에서 급파된 영국 함대 호킨스 기함의 조지 로스 장교가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간토 학살 사진이 최초 공개된다. 김동연 경기지사는 “나라를 팔아치운 것이 매국, 둘로 쪼개는 것이 밀정, 대학살을 알고도 침묵하는 것이 친일”이라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을 정부는 엄중하게 되새겨야 한다”고 영화 상영의 의의를 설명했다.
- 파리올리픽은 학살올림픽? 이 플래카드가 축구장에 내걸린 이유
- 2024. 07. 31 08:02 스포츠종합
- 학살 올림픽이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파리올림픽 축구 이스라엘-파라과이전이 열린 관중석에 내걸렸다. 게티이미지 파리올림픽 축구경기장에 ‘학살 올림픽(Genocide Olympic)’이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파리 경찰에 신고했고 파리 경찰도 조사를 시작했다. 31일 BBC에 따르면 파리 검찰청은 올림픽 축구 경기 중 발생한 반유대주의 혐의 사건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 IOC는 지난 29일 “이스라엘과 파라과이의 D조 경기 중에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현수막이 걸렸다”며 경찰에 고소장을 제출했다“고 밝혔다. 가자지구 전쟁을 언급하는 현수막이 내걸렸고 관련된 구호도 나왔다고 전해졌다. 프랑스 신문 르 파리지앵은 “반유대주의적 성격 도발적인 제스처를 모방했다”는 경찰 발언을 인용하기도 했다. 또한, 이스라엘 국가가 일부 관중으로부터 야유를 받았다. AFP 통신사는 “일부 이스라엘 지지자들은 ‘인질을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쳤다”고 전했다. 경기는 파라과이가 4-2로 이겼다. 파리올림픽조직위원회 대변인은 “이러한 행위를 강력히 규탄한다”며 “파리 올림픽은 모든 형태의 차별, 올림픽과 패럴림픽의 가치에 반하는 모든 행위에 맞서 싸우겠다”고 말했다. 검찰청은 경기 중 이스라엘 선수 3명이 살해 위협을 받는 것도 조사하고 있다. 가자지구 전쟁은 지난해 10월 7일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시작됐다. 이로 인해 약 1200명이 사망하고 251명이 인질로 잡혔다. 가자지구 하마스 운영 보건부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수개월 간 공격으로 3만9000명이 넘는 팔레스타인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 다큐멘터리 영화 ‘1923 간토대학살’···101년간 부정당한 진실을 파헤치다!
- 2024. 07. 16 18:04 연예
- 가톨릭문화원, 영화사청어람, (주)서울무비웍스 관동대지진 직후 시작된 조선인을 향한 학살을 다룬 첫 다큐멘터리 영화 ‘1923 간토대학살’이 8월 15일 광복절개봉을 앞두고 메인 예고편과 보도스틸을 공개했다. (감독: 김태영, 최규석 | 출연: 니시자키 마사오, 세키하라 마사히로ㅣ 제작: 김태영, (주)인디컴, 스튜디오 반ㅣ배급: ㈜영화특별시SMCㅣ공동 기획: 시민모임 독립ㅣ공동 제공: 가톨릭문화원, 영화사청어람, (주)서울무비웍스ㅣ 개봉: 2024년 8월 15일) 1923년 9월 1일, 10만 5천 명 이상의 사망자를 발생시킨 관동대지진 직후 무고한 조선인을 향한 대학살을 다룬 첫 다큐멘터리 영화 ‘1923 간토대학살’이 8월 15일 광복절 개봉을 앞두고 메인 예고편과 보도스틸 10종을 공개해 시선을 집중시킨다. 영화 ‘1923 간토대학살’은 조선인을 향한 대학살을 부정당한 101년, 진실을 밝히기 위한 증언의 목소리와 기록을 되짚는 다큐멘터리. 메인 예고편은 ‘1923 간토대학살’이 다루는 뜻깊은 내용에 동참한 배우 김의성의 내레이션으로 몰입도를 높인다. 먼저 1923년 9월 1일 벌어진 관동대지진 이후 당일 저녁부터 당시 일본 정부를 향한 비난의 화살을 피하고자 내무성이 조선인에 대해 유언비어를 퍼뜨리기 시작했다는 증언으로 시작된다. 조선인이 방화, 폭탄 투기,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근거 없는 괴소문을 유포해 마을 자경단을 조직, 조선인 수천 명을 무참하게 살해한 유례없는 학살이었다. 가톨릭문화원, 영화사청어람, (주)서울무비웍스 일제 강점기였던 혼란한 상황 속에서도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간토 학살 희생자 수를 알아내려 총력을 기울였던 증거 자료, 일본 정부의 유언비어 자료가 이어지지만 “100여 년간 인정도, 사죄도 없는 일본 정부” 라는 카피와 함께 현재 일본 정부가 이를 부인하는 자료 영상이 이어져 분노를 유발한다. 아무런 죄 없이 희생당한 사망자 6,661명의 넋과 유족들은 101년간 공식적인 인정과 사죄를 기다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진실을 은폐하면서 부정하고 있는 일본 정부에 맞서 싸우고 있는 시민단체 관계자가 “우리는 뭉쳐야 합니다! 역사는 반복될 수 있습니다!”라고 외치는 장면은‘1923 간토대학살’이 보여줄 강렬한 메시지에 대한 기대감과 함께 짙은 울림을 선사한다. 함께 공개된 보도스틸 101년 동안 간토대학살에 대한 진실을 은폐하고 부정하고 있는 일본 정부에 맞서 세계 역사에 더욱 알려져 기억되고, 역사의 교훈을 잊지 않기 위해 싸우는 소수의 일본 정치인, 시민단체 관계자, 학살 피해자들의 고군분투가 담겨있다. 명백한 증거들로 일본 정부의 반성을 촉구하는 시민단체의 활동과 <1923 간토대학살>이 다루는 방대한 자료, 증언들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지 궁금증을 끌어올린다. ‘1923 간토대학살’은 MBC에 재직하며 다수의 역사와 문화, 사회를 주제로 한 완성도 높은 다큐멘터리를 연출하고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 등을 제작한 다큐 전문가 김태영 감독이 연출과 제작을 맡아 완성도를 높였다. 영화 ‘박열’, 애플TV ‘파친코’ 등 한국 근대사를 배경으로 한 콘텐츠에서 한국의 아픈 역사인 ‘간토대학살’을 배경으로 한 경우는 있었지만, 이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룬 첫 다큐멘터리 영화로 그 의미가 깊다. 잊힌 역사, 하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한국인 희생자들을 기리는 마음을 담아 오는 8월 15일 광복절에 개봉을 확정했으며, 앞으로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할 역사를 다시 한번 상기하길 바라는 염원을 담았다. 101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기록하며 지금 우리 세대와 다음 세대에 메시지를 전하는 다큐멘터리 ‘1923 간토대학살’은 8월 15일 전국 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주간경향(총 12 건 검색)
- [사물의 과거사](12)또렷한 ‘은반지’와 서산 부역혐의자 학살(2023. 07. 07 11:29)
- 2023. 07. 07 11:29 사회
- 충남 서산시 봉화산 교통호 ‘서산 부역혐의 희생사건’ 유해발굴 현장에서 은반지가 발견됐다. / 진실화해위원회 제공 세월이 흘렀지만, 그 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73년 만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비록 그 옛날의 반짝임은 사라졌지만, 흙도 아니고 ‘뼈’도 아닌 빛깔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은반지. 어느 집 여인이었을까. 상류층 집안 아니었을까. 어쩌다 이곳까지 와서 땅속에 묻혔을까. 은반지가 끼워져 있던 손가락은 이미 뼈까지 썩어 사라졌다. 남아 있는 은반지의 주인은, 사라진 손가락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대답할 리 없는 질문을 마음으로 던져본다. 충남 서산시 갈산동 176-4번지, 봉화산 교통호 현장.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 5월 10일부터 약 20일간 이곳에서 유해발굴 조사를 진행했다. 1950년 한국전쟁 중 인민군 점령기에 인민군이 전투를 대비해 파놓은 교통호. 하지만 군·경이 서산 지역을 수복한 뒤, ‘부역혐의자’로 지목된 민간인들이 이곳에서 학살됐다. “모퉁이에 호(교통호)를 파논 데가 있어요. 신작로서 끌고 올라가 하나 갖다 놓고 ‘팡’ 하고 총 쏘고 또 하나 놓고 ‘팡’ 하고 총 쏘고 몇 번을 그랬어요. 경찰들이 쐈지요. (중략) 처음에 ‘뜨르르르’ 갈기고, 도망간 사람이 있으니께 나중에 하나씩 세밀하게 죽이더구만요.”(참고인 이○○ 진실화해위원회 진술, 이하 <서산 8228; 태안 부역혐의 희생 사건 조사보고서> 2008. 인용) 현장에서 발굴된 유해의 모습은 당시의 ‘생지옥’을 떠올리게 했다. 폭과 깊이가 1m도 안 되는 좁은 교통호를 따라 유해가 빽빽하게 발견됐다. 오랜 시간이 흘러 작은 뼈들은 썩어 없어졌지만, 굵은 다리뼈뿐만 아니라 척추뼈와 갈비뼈까지 남아 있는 상태였다. 희생자들은 주로 옆으로 눕거나 고꾸라져 있었다. 학살 당시 희생자들을 고개 숙이게 한 뒤, 총으로 머리 뒤를 쐈으리라 추정된다. 일부 구역에서는 유해 다리 사이에 다른 유해가 또 발견돼 과거 시신이 위아래로 겹겹이 쌓여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이번에 발굴된 유해는 약 60구. 유해뿐만 아니라 총살의 흔적인 탄피와 단추, 고무줄 그리고 ‘은반지’도 발견됐다. 이것들은 죽은 자와 죽인 자를 밝히는 중요한 증거다. “(경찰이) ‘고개 다 땅에 대라’고 하더만. (중략) 요기다가(손가락으로 뒤통수를 가리키며) 그러니까 짹소리 못하지. ‘퍽’ 하면 그만이여. 한 명씩, 한 명씩 해야지. M1…. 아이! (머리가) 없어요. 그 양반 나중에 시체 찾아가라고 해서 도장집 보고 찾았어. (머리가) 아주 쫙 뻐그러졌어. 아주 윷가락처럼. 피 한 모금도 없어.”(당시 면 치안대원 최○○ 진실화해위원회 진술) 이들을 끔찍한 죽음으로 몰고 간 ‘부역혐의’란 대체 뭐였을까. 말 그대로 하면 인민군이 지역을 점령했을 때 인민군과 내통해 도운 혐의라는 뜻. 그런데 그 실체가 참 허망했다. 인민군에게 밥 한번 해줬다고, 사랑방 한번 내줬다고 부역혐의자가 되기도 했다. 이웃사람 부탁으로 뭔지 모를 서류에 도장 한번 찍어줬다가 좌익 명단에 이름이 오르기도 하고, 그냥 어느 집안과 사이가 나빠서 일가가 모두 ‘빨갱이’로 몰리기도 했다. “흑백을 분류하려니까(실제 부역행위자와 아닌 자를 구분한다는 뜻-필자 주) 함장이 오더니 ‘지금 무엇을 하는 거지?’ 내가 ‘흑백을 대별하려고 합니다’ 하니까. ‘흑백? 흑백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전부 일어서’ 하면서 다 끌고 나가는 겨. (…) 조금 지나니까 ‘탕탕’ 소리가 나더라고.”(당시 면 치안대장 최○○ 진실화해위원회 진술) 부역혐의자에 대한 학살은 어느 날 갑자기 터져나온 사건이 아니었다. 하나의 죽음이 또 하나의 죽음을 낳고, 그 죽음이 결국 참혹한 학살로 이어지는 ‘증오의 고리’가 존재했다. 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12일, 서산 지역 경찰들은 인민군에 밀려 후퇴하면서 보도연맹원들을 집단 살해했다. 그들이 향후 인민군에 협조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7월 18일 인민군이 서산을 점령하자, 이번에는 좌익세력에 의한 학살이 일어났다. 하지만 전세가 또 뒤집어져 10월 8일 군·경이 서산을 수복하자, 부역혐의자에 대한 학살이 일어난 것이다. 전쟁 발발 직후의 보도연맹 학살과 인민군 점령기 좌익세력에 의한 학살을 거치면서 주민들 사이에 갈등과 반목은 크게 쌓여갔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다시 저쪽에서 이쪽으로 학살이 반복되면서 ‘보복성’이 더 강해졌다. 이런 성격은 수복 이후 경찰의 부역자 처리 과정에 그대로 반영됐고, 부역과 관계없는 불특정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되는 원인이 됐다. “좌익들 잡아다가 면사무소 창고에 가득가득 잡아다 놓았지. (중략) (경찰) 지서 직원이나 근흥면 유지들을 앞에 놓고서 내가 ‘이 사람은 어떻게 할 거냐? 이렇게(손가락으로 총을 쏘는 모양을 하면서) 할 것이냐, 아니면 석방을 할 것이냐?’라고 하면 (지서 경찰과 유지들이) ‘이렇게 하자’라고 (후략).”(참고인 최○○ 진실화해위원회 진술) ‘빨갱이’라 믿으면 ‘빨갱이’가 됐다. ‘손가락총’ 한 번으로 살고 죽는 것이 갈라졌다. 학살 현장은 이번에 유해발굴이 이뤄진 봉화산 교통호 등 최소 30여 곳.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는 희생자 977명과 희생추정자를 포함한 1865명의 신원을 확인했다. 기록에 누락된 다수 희생자가 있기 때문에 실제 희생자는 2000명을 웃돌 것으로 진실화해위원회는 추정했다. 73년 만에 지상으로 나온 은반지의 주인 역시 그중 하나일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르겠다. 주인이 누군지도 모르는 그깟 반지 하나 꺼낸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왜 거기에 아까운 국민의 세금을 써야 하냐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대신해준 이가 있다. “발밑에 그분들(희생자들)을 두고,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됐다고 자랑하고 있잖아요. 그분들을 밟고 선 대한민국이 과연 자랑스럽나요? 저는 별로 자랑스럽지 않아요. 그런 비극들을 억지로 지워버리고 없는 척했기 때문에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소위 ‘빨갱이’ 담론이 망령처럼 우리를 괴롭히고 있잖아요.”(진실화해위원회 소식지 ‘진실화해’ 4호, 2021. 12) 다큐멘터리 영화 <206: 사라지지 않는>(2023. 6. 21 개봉)을 만든 허철녕 감독의 말이다. 시민들의 힘으로 이끌어온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의 발걸음을 기록한 영화다. 세월이 흘렀지만, 반지의 은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땅속에 잠들어 있던 진실 역시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들을 ‘지워버리고 없는 척’하고 싶었던 부끄러운 우리가 있을 뿐.
- 사물의 과거사
- [사물의 과거사](6)보도연맹 학살과 ‘고무신’···애도에 자격이 필요한가(2022. 11. 18 11:20)
- 2022. 11. 18 11:20 사회
- 2007년 충북 청원군 ‘분터골’ 유해발굴 현장. 57년 만에 땅 위로 나온 고무신 한짝에 사람들의 눈길이 집중됐다. 밑창에 선명하게 찍힌 세 글자 ‘大同江(대동강)’. 고무신의 상표였다. 이 상표를 추적하면, 57년 전 이 고무신을 신고 분터골까지 와서 이곳에 삶의 마지막 발자국을 남긴 ‘그 사람’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 터였다. 1950년 7월 청주·청원지역 국민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된 충북 청원군(지금의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고은리 분터골에 사망자들을 기리는 원혼비가 박혀 있다. / 최규화 전 주무관 ‘대동강’의 정체는 1956년 발간된 <충북연감>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당시 청주에 있던 ‘청주합동고무신공업사’의 상표. 1948년 개업한 이 공업사는 직원 약 160명 규모의 큰 공장이었다. ‘大同江’ 세 글자가 찍힌 고무신 한짝은 분터골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이 청주 주민이거나 그 가까이에 살았을 거라는 점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물증’이 됐다.(<청원 국민보도연맹 사건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2008) 충북 청원군(지금의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고은리에 있는 분터골.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4일부터 11일까지 청주경찰서와 청주형무소에 수감된 재소자들과 청주·청원지역 보도연맹원들이 경찰과 헌병대, CIC(방첩대) 등에 의해 이곳 분터골에서 학살됐다. “후퇴하기 전에 죽였어. 옛날 트럭이야. 하얀 윗도리를 입었는데 형무소에서 끌려나온 것 같더라고. 경찰들이 장총 들고, 정장 모자(턱에 끈이 달린 모자) 쓰고, 죄 엮어서 오더라고. 줄로 엮어서 20명씩을 한데다 묶었어. 그러니까 앞에 있는 사람 허리를 묶으면, 또 묶고, 또 묶고 해서 도망을 못 갔어.”(<2007년 유해발굴 보고서> 제2권·진실화해위원회·2008) 학살 목격자 이재우 옹(가명·당시 15세)이 기억하는 1950년 ‘그날’의 풍경이다. 2006년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진상규명 충북대책위원회는 300~400명의 청주형무소 재소자들이 트럭에 실려가 분터골에서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또 청주·청원지역 보도연맹원 약 700명도 같은 곳에서 학살당했고, 시신을 흙으로 덮어 가매장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청주·청원지역에서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희생자 수는 약 1500명. 그중 분터골에서 희생된 수만 약 1000명에 이른다. 분터골은 충북지역 최대의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지다. 추정 희생자 1000명… 충북지역 최대 학살지 1949년 좌익 전향자를 ‘바른길로 이끈다’는 명목으로 만들어진 국민보도연맹. 가입자 중에는 실제 남로당원도 일부 있었지만, 당국의 강요로 강제 가입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보도연맹의 성격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그 때문에 자신이 죽을 거라고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래서 소집명령에 바로 응했고, 구금 중에도 탈주하지 않고 석방을 기다렸다. “거기(분터골) 가니께 경찰관들이 보초를 서 있어. 고 언저리에 수천명이 피란민이 서 있어. 못 가게 막았나봐. 하거나 말거나 자전거를 타고 고개 7부쯤인가 8부쯤에 올라갔더니, GMC 자동차 두 대가 청주 쪽을 앞을 두고 서 있더라고. 그래 ‘어떻게 되었느냐’고 하니까, ‘다 끝났어요’ 하길래, ‘하이고 살릴 사람이 있는데’ 그랬더니 ‘할 수 없죠’ 그래. 드문드문 총소리가 나는데, 저게 확인사살 하는 거라고 그래.”(<2007년 유해발굴 보고서>) 당시 청주에서 우익 청년단체 활동을 한 장풍연 옹(가명·당시 25세)은 ‘분터골에 가봤느냐’는 조사관의 물음에 위와 같이 답했다. 57년이 지났지만 ‘그날’의 기억만은 생생했다. 그날의 총소리가 남긴 참상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가 2007년과 2008년 진행한 유해발굴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다. 2007년 118구, 2008년 214구의 유해가 발굴됐다. M1·카빈총 소총의 총탄과 옷감, 단추, 고무줄, 신발 등이 출토됐다.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는 분터골 학살 조사결과를 포함해 ‘청원 국민보도연맹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165명. 92%가 20~30대였다. “여기(분터골)가 충북 도내 최대의 학살지라면 저거(안내판) 달랑 하나 세워놓는 게 아니라 역사의 아픔이 서려 있는 현장이라는 걸 알 수 있게 만들어놔야 하는데…. 몇십억 들여 위령비를 세우자,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시민들에게 알리는 일을 전혀 안 하는 거예요. (돈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예요, 의지의 문제.”(박만순 충북역사문화연대 대표, 유튜브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허락되지 않은 기억을 찾아서-분터골’ 2022. 1. 14.) 직접 분터골을 찾아가 보니 박만순 대표의 분노가 이해됐다. 지난 10월 30일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가 주최한 ‘예술과 함께하는 한국전쟁 기억여행’ 답사에 함께했다. 국도변 식당 앞에 차를 대고, 차가 갈 수 없는 좁은 길을 걸어 올랐다. 200m쯤 걸으니 좁은 길조차 아예 사라졌다. 펜션촌을 짓느라 세워놓은 낮은 옹벽을 타고 올라 현장에 도착했다. 무성히 자란 풀밭 사이 진실화해위원회 안내판이 보였다. 그 발치에는 높이가 두뼘 정도 될까,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회가 세운 작은 원혼비가 살짝 기울어진 채 ‘박혀’ 있었다. 보이는 건 그게 전부였다. 분터골의 오늘은 너무도 초라하고 쓸쓸했다. 마침 그날은 10월 30일. 자고 일어난 사람들의 귀에 이태원 참사의 소식이 들려온 날이었다. 답사에 참가한 사람들도 충격과 놀라움, 추모와 애도의 말들을 서로 나눴다. 그리고 다시 이곳 분터골로 눈을 돌렸을 때, 우리는 한없는 비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을 다룬 기사에는 늘 ‘빨갱이라서 죽었는데 무슨 애도를 하고 무슨 보상을 하나’ 하는 댓글이 달린다. 학살의 가해자인 국가의 태도 또한 다를 바 없다는 점은 충북 최대 학살지, 분터골의 ‘폐허’가 말해주고 있다. 아직도 이 사회는 분터골의 원혼들을 향해 ‘애도 받을 자격’을 의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난 72년간 그래왔듯이. 1950년 당시에는 없었을 것 같은 어린나무에 가지고 간 실을 걸어두고 왔다. 죽음의 땅을 뚫고 올라온 새로운 생명. 실은 기억과 감정을 엮고 잇는다. 분터골, 그날의 참극과 오늘의 애도가 이어지기를. 그리고 마침내 그날의 원한과 내일의 화해가 이어지기를. ※청원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1950년 6월 말부터 충북 청주·청원지역 보도연맹원을 포함한 예비검속자들이 청주경찰서 경찰과 헌병대, 청주CIC에 의해 경찰서와 각 지서, 형무소 등에 소집·구금됐다가 7월 초부터 7월 중순까지 청원군과 보은군 일부 지역에서 사살된 사건이다.
- 사물의 과거사
- 푸틴 입에서 재등장한 ‘집단학살론’(2022. 02. 25 15:00)
- 2022. 02. 25 15:00 국제
- “지금 우크라이나가 돈바스 지역에서 집단학살(genocide)을 저지르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크림반도 강제합병 이후 8년 만에 우크라이나에 의한 ‘집단학살’ 카드를 다시 꺼내들었다. 푸틴 대통령이 ‘집단학살’ 표현을 재활용함으로써 우크라이나 침공과 제국주의적 야심을 정당화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2월 21일(현지시간) 대국민 TV연설을 통해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의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과 루간스크인민공화국(LPR)의 독립을 승인하고, 해당 지역에서 우크라이나에 의한 집단학살이 일어나고 있음을 강조했다. / AP연합뉴스 푸틴 “우크라이나는 학살 주동자” 푸틴 대통령은 지난 2월 15일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와의 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지금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은 집단학살”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푸틴 대통령의 ‘집단학살’ 발언은 러시아 고위관리들과 관영매체를 통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뱌체슬라프 볼로딘 러시아 하원(국가두마) 의장은 지난 2월 18일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우크라이나군이 돈바스 지역에서 민간인을 상대로 학살을 저질러왔음을 은폐하려 한다는 내용의 글을 자신의 텔레그램 채널에 올렸다. 같은 날 러시아 외교관들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에서 “우크라이나가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과 루간스크인민공화국(LPR)의 민간인들을 멸종시키고 있다”는 내용의 문서를 배포했다. 푸틴 대통령도 지난 2월 21일 대국민 TV연설에서 “자칭 문명화된 세계는 현재 400만명을 대상으로 한 집단학살이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며 다시 한 번 돈바스 지역에서 시민들이 집단학살로 고통받고 있다고 강조했다. 유엔이 1948년 채택한 ‘집단학살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에 따르면 집단학살이란 ‘특정 국가, 민족, 인종, 종교 집단의 전체나 일부를 파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행한 행위’를 뜻한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 집단학살이 일어났다는 증거는 없다.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가 무고한 시민들을 대량학살한다는 이유로 침공할 명분을 얻으려 했다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2014년 5월 23일(현지시간) 친러 보스토크 대대 대원들이 이른 아침 우크라이나군과 충돌을 빚은 후 우크라이나 도네츠크 지역의 피스키 마을에 모여 있다. / 게티이미지 러시아는 2014년 크림반도 강제합병과 뒤이은 돈바스 지역 침공 때도 우크라이나에 의한 집단학살이 일어나고 있다는 명분을 내세운 바 있다. 2014년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 채널1 등 러시아 국영방송이 퍼뜨렸던 ‘슬라뱐스크 소년’ 가짜뉴스가 대표적인 사례다. 우크라이나군이 친러 무장세력으로부터 동부지역 슬라뱐스크를 탈환한 뒤 세 살짜리 소년을 어머니 앞에서 공개 처형하는 등 러시아계 주민들을 상대로 잔학행위를 저질렀다는 내용이었다. 해당 보도 내용이 현지 증언과 일치하지 않았고, 이를 뒷받침할 실제 목격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는 사실은 나중에서야 밝혀졌다. 포린폴리시에 따르면 우크라이나가 집단학살을 저질렀다는 가짜뉴스는 당시 러시아인들의 분노를 자극하는 데 성공했고, 우크라이나 공격을 정당화하는 기반이 됐다. 일각에선 푸틴 대통령이 ‘집단학살’이라는 표현을 통해 서방세력을 적으로 규정하고, 러시아가 구소련 지역 러시아 주민들의 정당한 보호자라는 이미지를 구축하려 한다고 말한다. 뉴욕타임스는 “집단학살이라는 표현은 적대적인 서방세력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러시아가 구소련 지역 러시아 주민들을 보호한다는 모스크바의 믿음을 반영한 것”이라면서 “이 같은 관점에서 보면 러시아의 영향권에서 이탈하려는 모든 시도는 러시아 민족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된다”고 지적했다. 푸틴의 참모였던 세르게이 글라지예프 역시 ‘집단학살’ 주장을 통해 서방세력이 러시아를 망친 주범이라고 꾸준히 주장해온 인물이다. 그는 1991년부터 1998년까지 러시아에서 행해진 급진적인 경제개혁으로 경제시스템이 파괴된 것을 일종의 집단학살이라 보았다. 집단학살은 실질적인 물리적 폭력뿐만이 아니라 한 민족이 생존할 수 없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도 포함하기 때문에 개혁가들이 러시아인들을 대상으로 경제적 집단학살을 자행했다고 해석한 것이다. 글라지예프는 개혁가들의 진짜 동기는 “러시아와 러시아 문화를 증오하고, 러시아 문명을 무너뜨리려는 욕망”이었다며 그 기원은 서양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했다. 지난 2004년 탈러시아 성격의 오렌지 혁명 이후 집권한 빅토르 유센코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1934년 우크라이나인들이 대량 아사한 ‘홀로도모르’가 스탈린 정권의 계획 하에 이루어졌다며 이를 집단학살 범죄로 규정하자고 국제사회에 호소했다. ‘홀로도모르’는 우크라이나어로 ‘기아에 의한 죽음’ 또는 ‘기아에 의한 살인’이라는 뜻이다. / 게티이미지 집단학살 주장은 소련 붕괴 후 독립한 신생국들에서 집권 세력이 집권을 정당화하거나 적을 공격하는 논리로 사용하기도 했다. 앞서 2004년 탈러시아 성격의 오렌지 혁명 이후 집권한 빅토르 유셴코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1930년대 스탈린 정권 하에 200만명이 넘는 우크라이나인들이 대량 아사한 ‘홀로도모르’ 사태를 집단학살 범죄로 규정하자고 국제사회에 호소하면서 정치적 기반을 다졌다. 구소련 국가였던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를 둘러싸고 자존심 대결을 펼치면서 둘 다 상대측이 자국민을 대상으로 집단학살을 저질렀다는 혐의를 제기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는 아제르바이잔 영토지만, 주민의 대다수가 아르메니아계라 두 국가가 영유권을 두고 다툼을 벌이는 곳이다. 조지아 내 자치 공화국이었던 남오세티야·압하지야도 2008년 분리독립 선언 후 조지아와 집단학살 범죄의 책임을 놓고 공방을 벌였다. 에브게니 핀켈 존스홉킨스대 교수는 “국가가 불안정한 상황에서 구성원들이 부당한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이에 대한 요구를 무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집단학살’이라는 정치적 수사를 사용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집단학살’ 가짜뉴스, 이번에도 통할까 우크라이나가 집단학살을 저지르고 있다는 러시아 정부의 여론전이 크림반도 합병 때처럼 이번에도 러시아인들의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킬지는 미지수다. 지난해 12월 러시아 현지 여론조사기관인 레바다 첸트르가 실시한 조사에서 ‘우크라이나에 반감을 갖고 있다’고 한 이들은 응답자의 43%를 차지했다. 2014년 11월 조사에서 응답자의 60%가 ‘우크라이나에 반감을 갖고 있다’고 답한 것과 견줘 크게 줄었다. ‘우크라이나에 호감을 갖고 있다’고 답한 이들은 7년 전보다 16%포인트 늘어나 전체 응답자의 45%를 기록했다.
- [이 한권의 책] 손님-신천 양민학살사건의 진실(2020. 12. 18 14:58)
- 2020. 12. 18 14:58 문화/과학
- 2000년대 벽두에 “황석영이기에 가능한” 소설로까지 격찬을 받았던 소설 <손님>을 뒤늦게 읽었다. 한국전쟁 시기 황해도 신천의 학살사건(1950)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사후 50년 만에 그 역사적 진상이 문학적 프리즘을 통해 드러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작가의 노고 덕분이다. 1989년 방북 시기에 북한 측의 안내를 받아 직접 학살 현장을 방문하고, ‘미제 학살기념 박물관’도 견학한 작가는 공식적인 진실과는 ‘또 다른 진상’이 있지 않을까라는 의심을 가졌다고 한다. 이후 10년간의 조사와 준비 끝에 학살의 진실을 새롭게 밝힌 소설이 <손님>이다. 황석영 지음·창비 주인공은 미국에서 목회활동을 하는 류요섭 목사다. 고향방문단의 일원으로 고향인 황해도 신천의 찬샘골을 찾게 돼 같은 미국 이민자인 형 요한을 찾지만 그는 동생의 방북을 마땅찮게 생각한다. 요한은 전쟁 때 마을 사람들에 대한 학살에 앞장선 전력이 있다. 그렇지만 늦게라도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동생의 제안에 화를 낸다. 당시 빨갱이들은 마귀의 무리였고, 자신은 신의 뜻에 따른 십자군이었다는 것이 요한의 생각이다. 요한은 동생의 제안을 거절한 채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동생 요섭은 화장한 형의 뼈 한조각을 갖고서 방북길에 오른다. 그의 방북은 북한에 남아 있던 형의 가족과 재회하는 여정이면서 고향을 찾아 형의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려는 속죄의 여정이다. 그렇다고 형을 대신한 대속은 아닌데, 죽은 형과 형에게 죽임을 당한 고향 사람들이 환영으로 그와 동행하는 여정이어서다. 이 환영의 증언을 통해서 요섭이 마주하게 되는 진실은 해방 직후에 북한에서 벌어진 한국현대사다. 이미 일제강점기에 북한에서는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가 적극 유입되었고, 이는 전통시대의 계급적 대립을 대체했다. 해방과 함께 기독교와 공산당의 대립은 차츰 격화했다. 양 진영의 테러가 자행되던 형국에서 전격적으로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기조로 한 토지개혁이 단행되고 이는 갈등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다. 무산계급 농민의 입장에서는 더없이 반길 만한 혁명적 조처였지만 교인들의 다수를 구성했던 지주와 자본가 계급에는 청천벽력이었다. 전체 주민 중 4분의 1에 해당하는 3만5000여명이 희생당한 신천 학살사건이 터지게 된 배경이다. 구체적인 학살 장면도 포함돼 있지만 <손님>은 여러 인물의 목소리를 통해 학살의 사회적 배경을 묘사하는 데에도 주력한다. 확장된 시야에서 보자면 그 배경은 보편적인 계급투쟁의 한국판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이행과정에서 지주와 농민의 계급적 충돌은 불가피하다. 더구나 한국사회에서는 그러한 이행과 변화가 단기간에 급속하게 이루어져 갈등의 폭발력이 클 수밖에 없었다. <손님>은 미군의 양민학살이란 공식적인 설명 너머로 신천 학살의 진실이 기독교와 공산당으로 분열된 민족 내부의 학살극이었다는 사실을 밝힌다. 작가는 ‘황해도 진지노귀굿’ 열두마당의 형식을 차용해 이 비극적 사건의 해원을 시도한다. 죽은 뒤에야 고향을 다시 찾은 형 요한은 아우에게 “이제야 고향땅에 와서 원 풀고 한 풀고 동무들두 만나고 낯설고 어두운 데 떠돌지 않게 되었다”고 말한다. 과연 그러한 화해가 넋굿의 형식으로 가능한가는 의문이지만 잊힌 역사적 사건을 다시 불러내 현재적 비극으로 읽게끔 한 것만으로도 <손님>의 가치는 충분해 보인다.
- 이 한권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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