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1,498 건 검색)
- [현장 화보]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희생자 대부분 발인 마쳐…일부 유가족 공항 복귀
- 2025. 01. 08 18:33사회
- ... 희생자 179명 중 177명이 발인을 마쳤다. 무안공항에 설치된 텐트로 다시 돌아오겠다고 밝힌 희생자 가족은 111가족이다. 희생자 유가족들은 오는 11일 공항에서 회의를 열고 향후 대책 등을 논의한다....
- 현장 화보무안군무안국제공항제주항공여객기참사
-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희생자 177명 영면···남은 2명은 9일 발인
- 2025. 01. 08 14:28지역
- .... 발인은 지난 3일 10명, 4일 12명, 5일 22명, 6일 37명, 7일 80명, 이날 16명이 진행했다. 남은 희생자 2명의 발인은 오는 9일 치러질 예정이다. 무안공항은 현재 장례를 치른 뒤 다시 이곳을 찾을...
-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 정부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희생자, 가족 인도 마무리”
- 2025. 01. 06 11:41사회
- ... 꽃이 놓여있다. 연합뉴스 고기동 행정안전부 장관 직무대행은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로 숨진 179명의 희생자와 관련해 “오늘 가족 인도가 마무리될 예정”이라고 6일 밝혔다. 고 대행은 이날 오전 열린...
-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 대법 “이태원 참사 희생자 성적 모욕, 처벌 가능”
- 2025. 01. 05 20:50사회
- ... 밝혔다. A씨는 이태원 참사 직후인 2022년 10월30일 온라인게임 단체대화방에서 이태원 참사 여성 희생자들을 대상으로 성적 비하·모욕하는 게시글을 올린 혐의로 기소됐다. 재판에서 쟁점은 A씨가 작성한...
스포츠경향(총 186 건 검색)
- ‘오늘 계약 종료’ 프로미스나인 백지헌, 참사 희생자 추모
- 2024. 12. 31 17:09 연예
- 백지헌 SNS 캡쳐. 걸그룹 프로미스나인 멤버 백지헌이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31일 백지헌은 개인 인스타그램을 통해 한 장의 이미지를 게재했다. 이미지에는 국화꽃 한 송이와 함께 “깊은 위로와 애도를 표합니다. 항공사고 희생자를 추모합니다”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앞서 지난 29일 오전 9시 5분 무안국제공항에서는 태국 방콕발 제주항공 7C2216편 항공기가 착륙 중 활주로 외벽에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181명의 탑승자 중 승무원 2명을 제외한 179명이 사망했다. 많은 연예계 종사자들이 자신의 개인 소셜미디어 계정을 통해 애도를 표하고 기부금을 전달하는 등 희생자를 추모하는 마음을 나누고 있다. 방송사 역시 예능 및 연말 시상식을 결방하는 등 추모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다. 백지헌 SNS 캡쳐. 한편 프로미스나인은 이날을 끝으로 플레디스엔터테인먼트와의 전속 계약이 종료된다. 향후 활동에 대해선 아직 알려진 바 없다.
- [전문] 알리, 제주항공 참사에 광주 공연 취소→희생자 분향소 찾는다
- 2024. 12. 31 15:49 연예
- 가수 알리. 연합뉴스 가수 알리가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에 대한 애도의 뜻으로 공연을 잠정 연기한 가운데, 광주 분향소를 찾는다. 알리는 31일 자신의 SNS에 “저는 가족들과 함께 광주 분향소로 간다”며 “원래 계획은 광주에서 12월 31일 공연 후 하룻밤을 자고 1월 1일 가족들과 엄마 고향을 둘러보고 서울로 올라오는 일정이었다. 40년동안 한 번도 함께 내려와 본 적 없어서 이번 기회에 자리를 만들어 보았었다”고 밝혔다. 이어 “그러나 국가애도기간이기에 공연을 취소하였고 서울에 있을까 싶었으나, 우리 가족이 서로에게 또 언제 이런 기회가 허락될까 점점 세월을 먹어가는 부모님 생각에 미루고 싶지 않아 고심 끝에 내려가기로 결정했다”며 “또한 그 곳에서 공연을 하려고 했던 사람으로서 의미를 되새기며 마무리를 하려 한다”고 했다. 알리는 “아마 비행기에 오르셨던 분들 또한 가족들과의 추억이 필요한, 어렵게 시간 내어 여행길에 오른 분들이실 것”이라며 “그리고 저의 공연에 오시려 했던 관객 분들 또한 어렵게 시간 맞추어 잡으셨으리라 생각이 든다”고 전했다. 끝으로 알리는 “일부 장례가 시작된다고 한다. 공연 시작인 7시 반에 희생자 분들과 유족들을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기도하자”고 덧붙였다. 한편 지난 29일 오전 9시 3분께 태국 방콕발 제주항공 7C2216편 여객기가 무안공항 활주로로 착륙을 시도하던 중 추락해 활주로 외벽과 충돌했다. 이번 사고로 탑승객 181명 중 2명이 구조됐으며, 사망자는 179명이다. 정부는 무안군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하고, 1월 4일까지를 국가애도기간으로 지정했다. 이하 알리 SNS 글 전문 저는 가족들과 함께 광주 분향소로 갑니다. 원래 계획은 광주에서 12월 31일 공연 후 하룻밤을 자고 1월 1일 가족들과 엄마 고향을 둘러보고 서울로 올라오는 일정이었거든요. 40년동안 한 번도 함께 내려와 본 적 없어서 이번 기회에 자리를 만들어 보았었어요. 그러나 국가애도기간이기에 공연을 취소하였고 서울에 있을까 싶었으나, 우리 가족이 서로에게 또 언제 이런 기회가 허락될까 점점 세월을 먹어가는 부모님 생각에 미루고 싶지 않아 고심 끝에 내려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공연은 취소되었습니다) 또한 그 곳에서 공연을 하려고 했던 사람으로서 의미를 되새기며 마무리를 하려 합니다. 아마 비행기에 오르셨던 분들 또한 가족들과의 추억이 필요한, 어렵게 시간 내어 여행길에 오른 분들이시겠지요.. 그리고 저의 공연에 오시려 했던 관객 분들 또한 어렵게 시간 맞추어 잡으셨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아, 목울대가 갈피를 못잡네요. 우리 알리사랑이 오늘을 위해 준비한 이 간식들과 마카롱은 광주에서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던 스텝들에게 잘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가족들과 함께 나누겠습니다. 일부 장례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공연 시작인 7시 반에 희생자 분들과 유족들을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기도합시다.
- 안영미, 21년생 아기 희생자에 울었다 “나도 엄마라…” (두데)
- 2024. 12. 30 17:28 연예
- 안영미 SNS 화면 캡처. 코미디언 안영미가 라디오 생방송 중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희생자를 애도하며 눈물을 흘렸다. 안영미는 30일 방송한 MBC FM4U ‘두시의 데이트 안영미입니다’에서 “사람이든 일이든 때를 놓치지 말고 사랑한다, 고맙다 말해야 한다. 후회 없이 매일을 살아가는 것이 남은 우리가 하는 최선일 거다”라며 울먹였다. 이어 안영미는 21년생인 사고 희생자를 언급하며 슬퍼하는 한 청취자에게 “저도 그 뉴스를 보고 너무 가슴이 아팠다”라고 공감했다. 눈물과 함께 애도를 표한 안영미도 23년생인 아들이 있다. 안영미는 “여러분께 죄송하다. 여러분들도 힘이 안 나실 거라, 제가 힘을 드려야하는 위치인데 저도 아이의 엄마다 보니 뉴스를 보는데 너무 가슴이 아팠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여러분들께 힘을 못 드려서 너무 죄송하다”라며 사과했다. 그러면서 “세상을 떠난 분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고통 속에 계실 유가족분들께도 애도의 마음을 전한다. 당분간은 웃음보다 음악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달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은 좀 더 많은 사연과 음악으로 함께하겠다”라고 말했다. 한편 지난 29일 오전 9시 3분께 태국 방콕발 제주항공 7C2216편 여객기가 무안공항 활주로로 착륙을 시도하던 중 추락해 활주로 외벽과 충돌했다. 이번 사고로 탑승객 181명 중 2명이 구조됐으며, 사망자는 179명이다. 정부는 무안군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하고, 1월 4일까지를 국가애도기간으로 지정했다.
-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프로배구 올스타전 취소…“희생자분들에게 깊은 애도”
- 2024. 12. 30 16:52 스포츠종합
- 한국배구연맹 제공 한국배구연맹(KOVO)이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에 대한 애도의 뜻을 전하며 다음 달 4일 강원 춘천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2024~2025시즌 V리그 올스타전을 개최하지 않기로 했다. KOVO는 30일 “어제(29일) 있었던 여객기 사고로 국민 전체가 슬픔에 빠진 국가 애도 기간에 올스타전을 개최하는 건 매우 힘든 상황이고, 이벤트와 응원을 자제하며 진행하는 것도 올스타전 의미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다”며 “올스타전을 연기하는 것도 검토했지만, 리그 일정과 경기장 대관 문제로 어려움이 많았다”고 취소 사유를 설명했다. 이어 “올스타전에 관심을 보내주신 팬들께 죄송한 마음이며, 1월7일부터 재개되는 4라운드에 집중해 남은 리그를 원활히 마무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올스타전 티켓 환불을 비롯한 후속 조치에 대해선 조만간 공지하겠다”고 전했다. 연맹은 “이번 참사로 인한 희생자분들과 유가족분들에게 깊은 애도의 마음을 표한다”고 전했다.
주간경향(총 7 건 검색)
- 민주화운동 넘어 민중운동 희생자 삶도 부축(2021. 11. 26 20:58)
- 2021. 11. 26 20:58 사회
- ㆍ‘민주화운동 그 기억과 희망나누기’ 지원사업 확대 “10여명 정도 신청이 들어왔습니다. 받는 분들의 사연까지 지금 내놓는 건 쉽지 않을 듯하고요.” 연성만 ‘민주화운동, 그 기억과 희망나누기’ 운영위원장의 말이다. 지난해 11월 열린 ‘민주화운동 그 기억과 희망나누기’ 행사 참가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6월 민주항쟁 계승사업회 제공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는 “‘민주화운동 그 기억과 희망나누기(이하 희망나누기)’라는 이름으로 민주화운동에 헌신하다 먼저 가신 분들의 가족이 어려운 형편에서 자녀를 키우거나, 어려운 상황에서 투병생활하는 당사자에 대한 지원사업을 하는데, 그 대상자 신청을 받는다는 소식을 알리고 싶다”고 밝혔다. 신청은 11월 25일 마감됐다. 대상자를 선정해 지원자에게 전달하는 행사는 12월 14일에 열린다. 이번이 세 번째다. 과거 1회(지난해 1월)와 2회(지난해 11월) 때와의 차이는 과거 지원대상자였던 민주화학생운동(유신·5공화국·1990년대)을 넘어 민중운동(노동·농민·빈민)에 헌신한 이들의 유자녀나 현재 병환을 앓고 있는 본인까지 지원대상을 확대한다는 것이다. 희망나누기는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다 옥살이를 경험한’ 익명의 최초기부자가 “민주화운동에 헌신하다 먼저 가신 분의 가족 중 많은 분이 어려운 형편에서 자녀를 키우고 있다. 나라도 힘닿는 데까지 지원하고 싶다”며 연 1억원씩 3년간 기부약정을 하면서 시작됐다. 지원대상자를 선정하고, 기금을 모으는 등 운영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연성만 새날복지회 이사장은 “일단 5년 정도까지는 예정된 상태인데 그 뒤로는 어떻게 될지는 봐야 한다”고 말한다. “처음에 최초기부자가 마중물을 만들었고, 주변에서 ‘5년 모금 약정’을 한 분들이 나왔습니다. 1년에 100만원씩 500만원을 내겠다는 약정인데 현재는 자기 스스로 운동권이었다고 하는 사람들 사이의 일이긴 합니다. 각 대학 민주동문회 회원들에게 5년간 매년 100만원 정도 약정해달라고 부탁하는 단계죠.”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하면 3대가 흥한다’는 말이 있다. 민주화운동도 그런 것일까. “당연히 안 좋은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1차 때 과거 민청련 활동을 했던 김병곤(1990년 작고), 이범영 전 한청련 의장(1994년 작고) 유자녀가 받았는데, 이분들의 경우 그래도 서울대 출신이고 유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혼하고 가족관계에서 소원해진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추천은 민주화운동 관련 단체에서 하되, 매우 중요한 조건이 지속적으로 소통하는 겁니다. 아이들이 힘들기 때문에 도와준다는 취지가 아니라 그동안 관심을 가지지 못한 것을 미안해하면서 하는 겁니다. 추천서를 쓰는 과정에서도 담당자가 부인이나 유자녀와 소통하면서 쓰게 되니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상당한 정도를 더 알게 됩니다. 그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우리 방식으로 위로하는 거죠.” 당사자 본인의 경우 제일 어려운 사람들이 운동하다 그 후유증으로 정신질환을 앓다가 극복하지 못하고 요양원에 있거나 힘든 생활을 하는 케이스다. 그는 현재는 과거 민주화운동 참여자를 대상으로 하지만 2~3년 안에 소위 ‘스스로 운동권’이 아니라 민주시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까지도 운동의 범위를 확대하는 것이 또 다른 목표라고 덧붙였다. “아직은 과거 민주화·반독재 운동의 의미를 찾는 과정이지만, 촛불시민·민주시민도 자신이 했던 운동의 의미를 찾는 과정이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과거의 ‘민주화운동의 기억과 희망찾기’지만 현재와 미래의 연결고리를 찾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관련문의 희망나누기 운영위원회(02-363-0610, memhope77@gmail.com)
- “희생자 많다고 보상 안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돼”(2019. 04. 08 15:23)
- 2019. 04. 08 15:23 사회
- ㆍ배·보상 규정 명시한 4·3 특별법 발의한 오영훈 의원 “4·3은 2003년 희생자가 결정됐지만 아무런 조치가 없다. 그냥 방치한 것이다. 국가폭력 희생자로 결정됐다면 배·보상이 따라와야 한다” 1948년 제주도 인구는 25만명에서 30만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4·3과 관련해 정부에 공식 접수된 희생자는 현재까지 1만4000여명이고 유족은 6만명에 이른다. 적게 잡아도 당시 도민의 5%가 희생됐고 20%가 유족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오영훈 더불어민주당 의원(제주시을)도 유족 가운데 한 사람이다. 오영훈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4월 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4·3 진상규명 운동 사진전’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4·3 특별법은 1999년 제정돼 2000년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2003년 진상조사보고서가 나왔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가지도자로는 처음으로 희생자와 유족에게 사과를 했다. 하지만 이후 국가 차원의 진전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는 희생자 접수도 없었다. 20대 국회에서는 특별법 개정안 4건이 발의됐다. 당시 이뤄진 군사재판을 무효로 하고 희생자들에 대한 배·보상 규정을 명시한 오 의원의 법안이 대표적이다. 애초 이들 개정안은 모두 4·3 70주기였던 지난해 4월 통과를 목표로 발의됐다. 하지만 이들 법안은 71주기도 넘겨버렸다. 지난 4월 1일 오 의원을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났다. -4.3 특별법 개정안이 또 심사보류됐다. 이렇게 되면 연내 처리가 어려운 것 아닌가. “법안을 놓고 여야 간 의견차가 컸던 것은 아니고 정부의 입장과 계획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번 심의에서 의원들은 정부가 보상급 지급방식과 기간 등을 좀 더 명확하게 해줄 것을 요구했다. 군사재판 무효화에 대해서도 법무부의 의견을 추가로 듣고 검토할 예정이다. 향후 법안 통과는 긍정적으로 본다.” -특별법 개정안은 법률 명칭에 ‘보상’이라는 단어를 포함할 정도로 배·보상을 강조하고 있다. “다른 국가폭력 사건은 배·보상이 결정됐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법률에 근거해 1인당 4000만원가량을 보상받았다. 부마민주항쟁 관련자도 비슷하다. 하지만 4·3은 2003년 희생자가 결정됐지만 아무런 조치가 없다. 그냥 방치한 것이다. 국가폭력 희생자로 결정됐다면 배·보상이 따라와야 한다.” -지금까지 희생자와 그 유족에 대한 보상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됐나. “개인에 대한 보상은 전혀 없었다. 제주도에서 조례를 통해 의료비 지원을 한 게 전부다. 공동체 보상이라는 개념으로 4·3 평화공원, 4·3 평화재단 등이 만들어졌다. 2000년 특별법이 제정될 당시 배·보상 논의가 있었지만 해당 항목이 들어가면 반대가 심해 통과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분위기였다. 지금 상황에서 배·보상을 받으려면 각 개인이 소송을 하는 방법밖에 없다.” -1만4000여명이라는 희생자 수를 봤을 때 1조8000억원이 쓰인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어떻게 야당과 국민을 설득할 것인가. “제주 4·3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광범위한 학살이 일어난 사건이다. 국가에 의해 인간으로서 권리를 침해당했다. 이게 숫자로 논의되어서는 안 된다. 한 사람이 희생됐든, 수만 명이 희생됐든 국가가 책임져야 할 일은 책임을 져야 한다. 희생자가 많아 비용이 더 든다는 이유로 적게 보상하거나, 보상을 안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재정에 부담이 된다면 연금 지급방식이나 분할방식으로 할 수 있다.” -진상규명을 먼저 하고 배·보상은 이후에 논의하자는 의견이 있다. “1999년 특별법이 통과될 때 이미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과 합의를 했다. 그래서 법률이 통과됐다. 그 법률에 기초해 진상조사를 하고 희생자를 결정했다.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과를 했다. 올해 1월에는 사법부가 당시 수형인들이 무죄라는 결정을 내렸다. 모두 국가 차원에서 내린 판단이다. 지금 와서 배·보상 논의를 이후에 하자는 건 피해자들에게 또 다른 고통을 주는 것이다.” -제주 4·3에 대해 여전히 밝혀야 할 문제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맞다. 하지만 그 진상조사는 희생자 결정과정에 대한 것이 아니다. 4·3의 성격을 분명히 하고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가에 대한 진상조사다. 특히 미군정이 어떤 과정을 통해 작전을 진행했고 명령을 내렸는지 등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4·3 희생자들이 국가에 의해 피해를 당했다는 사실은 명확하다.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4·3의 성격은 아직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았다. 항쟁, 운동, 사건, 사태 등 명칭도 정해지지 않았다. “민감한 문제다. 4·3은 단순히 1948년 4월 3일에 일어난 일만으로 보기에는 미흡하다. 도민들은 1947년부터 단독선거와 단독정부를 반대했다. 해방된 공간에서 자유로운 나라를 세우려고 했던 거다. 제주도에는 일본에서 공부한 지식인들이 많았다. 1923년부터 제주도와 일본 오사카를 오가는 정기여객선이 있었다. 이승만 정부 입장에서는 이런 주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다. 그래서 그런 요구 자체를 ‘빨갱이 주장’이라고 덧씌우고 프레임을 짜서 공격했다.” -일각에서는 4·3 당시 좌익사상을 가진 ‘폭도’들이 있었다는 주장이 여전히 나온다. “폭도라는 단어는 사용해서는 안 되는 표현이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이 있었다. 이에 분노한 도민들이 경찰에 저항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무기를 든 사람들이 있었고 경찰서 습격사건도 2건 정도 있다. 무기를 들었다고 해서 다 죽여도 되나? 공권력을 가동해도 되나? 자위권적인 차원에서 생각해봐야 한다. 이후 미군정의 개입이 시작됐고 육지에서 서북청년단이 왔다. 서북청년단이 경찰 노릇을 하며 학살을 자행했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다. 4·3과 관련이 있나. “당시 제주도민의 10분의 1이 희생됐다고 한다. 조부모와 증조부모가 희생자다. 조부모는 1947년 5월께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활발히 활동했다고 들었다. 그때 어딘가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다행히 시신은 수습돼 안장했다. 이듬해인 1948년 10월 증조부가 돌아가셨다. 이유는 없다. 이 집안은 ‘빨갱이 집안’이라고 해서 잡아갔다고 들었다.”
- [만화로 본 세상]-용산 희생자들은 왜 망루에 올라야 했나(2018. 01. 29 16:12)
- 2018. 01. 29 16:12 문화/과학
- 희생자들이 철거민이 되기 전의 삶과 그 후의 삶 사이의 낙차를 통해 그 사실의 배경이 드러나고, 그들이 철거민으로서 져야 했던 경제적 부담과 용역과 경찰력으로부터 당해야 했던 물리적 폭력이 구체적으로 그려지면서 그 불가피함이 설명된다. 만화는 생각보다 품이 넓다. 꾸며진 이야기, 픽션으로서의 만화가 꾸준히 주류였지만 만화의 탄생부터 논픽션 혹은 현실을 보여주는 만화들의 명맥은 끊어진 적이 없었다. 그 가운데서도 내가 특히 주목하고 있는 장르는 르포르타주 만화(르포만화)다. ‘그래픽 리포팅(graphic reporting)’ 혹은 ‘정치적 저널리즘으로서의 만화’로도 불리는, 언론의 역할을 하는 만화다. 아트 슈피겔만의 <쥐>(1991. 한국어판은 아름드리미디어, 1994),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1997. 한국어판은 글논그림밭, 2002), 마르잔 사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2000. 한국어판은 새만화책, 2005)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단행본의 표지./보리 그들이 얼굴 없는 테러리스트라고? 몇 년 전 한국의 르포만화에 대해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나는 한국 르포만화의 계보에서 핵심적인 텍스트로 <내가 살던 용산>(보리, 2010)을 꼽았다. 용산참사 1년 뒤에 출간된, 참사의 막전막후의 삶을 담은 이 책이 이후 <떠날 수 없는 사람들>, <사람냄새>, <먼지 없는 방>, <사람 사는 이야기>, <섬과 섬을 잇다>, <단결툰> 등 이어진 한국 르포만화들의 모델이 되었다는 것이 발표의 중심 주장이었다. 이렇게 중요한 텍스트를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마침 최근 개봉한 영화 <공동정범>이 기억을 일깨워주었다. 영화를 아직 보지 못했지만 <내가 살던 용산>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면 더 깊이 읽힐 것 같았다. 영화가 생존한 철거민 5인의 참사 이후를 담아내고 있다고 하는데, 만화도 유사한 구성이기 때문이다. <내가 살던 용산>은 참사로 사망한 철거민 5인의 이야기를 유가족의 목소리를 통해 재구성했다. 10년에 가까운 시차를 감안해 영화와 만화를 함께 본다면, 용산참사 이후를 살아가는 우리가 배우고 궁리할 것이 더 선명해질지도 모른다. 하여, 오랜만에 다시 읽은 <내가 살던 용산>을 독자들에게 소개하려 한다. “좀 더 빨리 나왔더라면 우리 시대 양심 있는 모든 자들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무기로, 자성의 계기로, 내일에 대한 꿈의 거울로 삼았을 책”이라고 송경동 시인은 평한다.(희귀한 만화책 ‘내가 살던 용산’, <민중의소리> 2010. 1. 28) 취재와 작화에 걸린 시간이 8개월이니 만화의 속도를 감안할 때 그리 늦은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더 일찍 나오지 않았던 것을 시인이 아쉬워한 것은 용산참사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져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살던 용산>의 최초 기획자이자 참여 만화가인 김홍모 작가도 일찌감치 잊혀지는 것의 두려움을 느꼈다. “정말 큰 참사인데 너무 쉽게 잊히는 것 같았다. 나 스스로도 분노가 너무 빨리 사그라지는 것 같아 두려웠다. 이거 큰일나겠다. 이런 사건이 또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하는 두려움에 기획을 시작해 함께할 수 있는 작가들을 모았다.”(<SYNC> 13호 인터뷰) 우선 시급한 것은 참사에 대한 기억을 이어나가는 것이지만, 함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떤 기억인가다. 당시 주류 언론의 용산참사 보도는 남일당 망루에 올랐던 철거민들을 ‘도심 테러리스트’로 만드는 방식이었다. <내가 살던 용산>은 처음부터 이 시선에 문제를 제기하는 기획이었다. ‘얼굴 없는 테러리스트’들이 사실은 ‘얼굴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밝히고, 그것을 우리 사회가 함께 기억해야 할 용산참사의 내용 가운데 하나로 살려내는 것, 그것이 이 책 전체가 목표로 한 바다. 이런 문제의식 아래 지금도 각자의 확고한 작품세계를 이어나가고 있는 6인의 만화가(김성희, 김수박, 신성식, 앙꼬, 유승하, 김홍모 작가) 중 5인이 각각 돌아가신 이상림, 윤용헌, 양회성, 이성수, 한대성씨 유가족을 취재해 다섯 편의 단편을 내놓았다. 그리고 김홍모 작가가 철거민들이 한데 모였던 그날의 망루를 중심으로 사건을 다시 그렸다. 여섯 작품이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면서도 각각의 깊이와 울림이 있어 모든 작품을 소개하고 싶지만, 직접 읽을 독자를 위해 한 작품만 들춰본다. 기억을 일깨워준 영화 <공동정범> 앙꼬 작가(<나쁜 친구>, <삼십살> 등)는 고 이성수씨의 아들 상현이의 시점에서 사건 전후를 담아낸다. (이 작품 <상현이의 편지>는 인터넷 상에서도 열람 가능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을 것 같았던 어느날, 친구들과 어울리고 있던 고등학생 상현이는 집에 오지 말고 친구네서 자고 오라는 엄마의 전화를 받는다. 철거를 밀어붙이는 용역들로 인해 시달리고 있던 터라, 상현은 집으로 달려간다. 달려간 곳에서 상현이 본 것은 무너져버린 집들, 그 잔해 가운데 지붕이 사라진 채 벽만 남아있는 집 안에서 촛불을 켜고 앉아 있는 부모님이었다. 이것이 상현이가 용인에서 경험한 철거였다. 이후 상현도 알바로 살림에 보탬이 되려 하고, 부모님도 각자의 사랑 어린 노력을 이어나가며 상현네는 “춥지만 따뜻”한 천막생활을 해나갔다. 그러던 어느날 아빠가 며칠 서울에 다녀오겠다며 이렇게 말한다. “지금 우리처럼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 “우리가 서로를 돕지 않으면 누가 우리를 도와주겠니….” 다음날 아침 아빠를 배웅하는 상현과 엄마. “다녀오세요.” “조심히 다녀와.” 이성수씨는 바람이 담긴 그 인사에 부응하지 못했다. 이제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늘 상복 차림인 어머니와 함께 난방이 좋은 장례식장에서 생활하는 상현은 온 가족이 함께 누웠던 “춥지만 따뜻했던” 천막 시절이 그립다. 이렇게 앙꼬 작가는 망루에 올랐던 외부인 연대자 이성수씨의 얼굴을 보여주고 목소리를 들려준다. 그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남편이자 아버지였고 그를 기다리는 가족이 있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가 망루에 오른 동기까지 담아낸다. 다른 작품들도 시점과 정서의 차는 있을지언정 소중한 삶의 면모들을 망루까지 이으며 담아냈다는 점은 같다. 이처럼 맥락을 다시 밝혀낸 용산 희생자들의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진실은 ‘왜 희생자들이 망루에 올랐는가’ 하는 기초적인 사실이다. 희생자들이 철거민이 되기 전의 삶과 그 후의 삶 사이의 낙차를 통해 그 사실의 배경이 드러나고, 그들이 철거민으로서 져야 했던 경제적 부담과 용역과 경찰력으로부터 당해야 했던 물리적 폭력이 구체적으로 그려지면서 그 불가피함이 설명된다. 주류 언론이 ‘사건’만을 부각하며 외면하려 했던 삶을 <내가 살던 용산>은 망루에 오른 이들의 삶 속 얼굴을 그려내며 복원해 내는 것이다. 르포만화 <내가 살던 용산>의 다른 보기와 말하기는 그 전후로 출간되었던 르포 및 문집 <여기, 사람이 있다>(김일숙 이선옥 등, 삶창, 2009.4),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작가선언69, 실천문학사, 2009.12) 등 출판물이나 전시와 콘서트 등 문화적 기억 형식과 함께 울리며 용산에 대한 사회의 기억을 재구성해나갔다. 그런 바탕 위에서 <두개의 문>과 같은 다큐멘터리와 용산참사를 모티브로 한 <소수의견> 등의 영화가 제작될 수 있었을 것이다. 작년에야 서울시에서 발간한 용산참사 백서 <용산참사, 기억과 성찰>도 용산참사의 진실을 붙든 이들의 애씀이 이어진 결과다. 이제 참사 후 10년째 되는 해에 다른 보기와 말하기는 <공동정범>에서 되살아난다. <내가 살던 용산>이 복원하려 애쓴 그 삶들이 9년 동안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이번 주말에는 반드시 <공동정범>을 보리라. 그리고 다시 한 번 궁리할 것이다. 용산참사 이후의 삶을. 세월호 이후의, 구럼비 발파 이후의,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이후의, 많은 잃어버린 것 이후의 삶과 함께. <조익상 만화평론가>
- 만화로 본 세상
- [신간]악성 나르시시스트와 그 희생자들外(2017. 03. 06 15:33)
- 2017. 03. 06 15:33 문화/과학
- 악성 나르시시스트와 그 희생자들 장 샤를르 부슈 지음·권효정 옮김 바다출판사·1만5000원 유럽에서 큰 이슈로 떠오르는 악성 자기애자(나르시시스트)라는 인격장애의 한 영역을 본격적으로 소개한다. 악성 나르시시스트는 자기 내면의 불안과 악한 감정을 타인에게 전가해 고통과 죄책감으로 몰아넣고 자신은 만족과 평안을 누린다. 책임감 강하고 타인에게 거리두기를 못하는 이들이 희생자가 된다. 고상만의 수사반장 고상만 지음·삼인·1만4000원 존속살인 혐의로 수감 중인 완도 여성 무기수, 경찰과 법원의 괘씸죄 표적이 돼 차례로 전과자로 몰릴 뻔한 충주 부부 등 감옥에 갇혀 있거나 수사기관에 의해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의 법정싸움과 목소리를 담았다. 국민TV 에서 방송한 내용과 못 다한 이야기를 담았다. 나는 당당한 페미니스트로 살기로 했다 린디 웨스트 지음·정혜윤 옮김·1만5800원 유쾌한 페미니스트가 세상을 바꾸는 법. 여자는 날씬하고 순종적일 것을 요구하고 스탠딩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자연스럽게 강간을 소재로 올리는 현실에서 페미니스트 활동가이자 칼럼니스트인 저자는 따뜻한 시선과 유머를 잃지 않으면서도 부당함과 맞서 싸우고 증오와 외로움을 이겨내는 법을 안내한다. 김정일 프로덕션 폴 피셔 지음·제 엘리자베스 옮김 한울엠플러스·2만5500원 1978년 영화배우 최은희와 감독 신상옥이 납북됐다. 기획자는 김정일. 몇 년이 지나 북한 영화산업은 빛나는 성취를 기록했다. 영화제작자 폴 피셔가 ‘신상옥-최은희 납치사건’을 파헤쳐 데탕트 시대 남북관계의 변화 양상과 북한 이미지 정치의 탄생과정을 생생하게 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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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경향(총 4 건 검색)
- [우리는 피임을 모른다] 페루 강제 불임수술이 만든 '조용한 희생자'
- 2020. 05. 27 14:36 건강
- 1990년대 페루에서는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다. 1990년부터 10년간 집권한 알베르토 후지모리 정부는 30만 명의 여성과 2만 명의 남성에게 강제로 불임수술을 시켰다. 빈곤을 해결하기 위한 가족계획 사업의 일환이었고, 이 잔인한 피임의 대상은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후지모리 정부의 ‘생식건강과 가족계획 프로그램’은 원래 빈곤층에 혜택을 주는 자발적인 프로그램이었다. 국제기구와 원조기구에서도 캠페인에 자금을 지원했다. 그러나 ‘자발적인 불임수술’은 없었다. 각종 거짓말과 위협, 때로는 무차별적인 힘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불임수술을 받았다. 예를 들어 출산하고 얼마 후면 보건 공무원이 집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여성을 데리고 가서 수술을 시키는 것이었다. 제대로 된 마취나 수술 후 관리도 없었고, 심지어 수술 전 병원 청소를 시키기까지 했다. 만약 응하지 않으면 신생아를 등록해 주지 않거나 자녀를 더 낳으면 감옥에 보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수술을 받았지만 무슨 수술을 받았는지, 이후 몸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낙태수술도 예외는 아니었고, 출산 후 아기를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주로 외딴 고지대와 열대우림 지역에 사는 20~40세의 문맹 여성들을 대상으로 골랐는데, 피해자의 95%에 해당하는 약 30만 명이 케추아어를 사용하는 농촌 여성이었다. 최소 18명의 여성이 불임수술이 직접적 원인이 돼 사망했으며, 수천 명의 사람이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수술을 받은 탓에 합병증으로 고생했다. 페루의 토착 여성들은 ‘조용한 희생자’였다고 말한다. 이들은 국가로부터 차별을 받았고, 가부장적 사회에서 아이를 가질 수 없었으며, 아이를 가질 수 없었기에 쓸모없다고 간주됐다. 1997년이 돼서야 여성들은 입을 열기 시작했고, 사회활동가이자 인권변호사인 길리아 타마이의 노력으로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타마이 변호사는 1998년 국제사회에 페루의 강제 불임수술 만행을 알린 보고서를 발표했고, 후지모리 정부로부터 여러 차례 죽음의 위협을 받다가 스페인으로 망명했다. 타마이의 보고서에 의하면 자발적으로 불임수술을 받은 사람은 전체의 10%뿐이었고, 수술비용을 절약하고자 동물용 마취제가 사용됐다. 또한 의대생들이나 간호사들이 불임수술을 시술하기도 했다고 한다. 매월 불임수술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직원은 위협을 받았으며, 후지모리 대통령은 매월 보건부 장관을 통해 불임수술 현황에 관한 개별 브리핑을 받았다고 한다. 보고서 발표 직후 조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페루의 가족계획 프로그램을 지원하던 미국은 모든 지원 자금을 끊었다. 후지모리 정부는 불임수술의 사실관계와 책임을 부인했지만 자금 부족으로 가족계획 프로그램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후지모리의 불임수술 정책으로 1990년 여성 1명당 3.7명이던 출산율이 10년 뒤인 2000년에는 2.7명으로 감소했다. 후지모리가 저지른 만행의 공식적 피해자만 7000여 명에 이르고, 피해자들에 대한 법적 조치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김선형은 누구? 간호학을 전공하고 임상 간호사로 일하며 수많은 여성, 특히 일하는 여성들을 만났다. 그들이 처한 현실과 다양한 삶의 고충을 마주하면서 여성을 병들게 하는 것, 여성의 건강이 그들의 삶과 가정 그리고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갖게 됐다. 지금은 여성 건강과 인권에 관한 주제로 번역과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우리는 피임을 모른다’(도서출판 파람)가 있다.
- 우리는 피임을 모른다
- 네팔 헬기 사고 희생자 고(故) 박형진 대령의 미망인 신난수씨
- 2008. 04. 11 화제
- 지난 3일 네팔 산악 지대에서 추락한 유엔 네팔임무단(UNMIN) 헬기(MI-8) 탑승자 박형진 대령의 사고 소식이 들려왔다. 반드시 생존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랐던 온 국민의 바람은 이제 슬픔이 되어 울먹이고 있다. 사고가 난 지 보름째, 그가 남긴 빈자리는 너무 크다.2003년도 미국 군수교관시절 찍었던 가족사진 믿을 수 없는 소식 “아직 믿겨지지가 않아요. 그냥 저와는 상관없는 무슨 행사에 참석하고 온 것 같은 기분이에요. 남편이 평소에 몸이 아팠다든지 해서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있었으면 이렇게 힘들진 않을 텐데…. DNA 검사할 때 병원에 갔던 흔적이 한 번이라도 있으면 검사하기가 쉽대요. 그런데 병원 한번 간 적이 없을 정도로 굉장히 건강하셨거든요.” 이번 고(故) 박형진 대령(50, 육사 38기)의 파견은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그루지야에서 1년 반 동안 정전감시단 근무를 마치고 2006년 9월 귀국한 박 대령은 곧바로 유엔 네팔임무단 파견 제의를 받았다. 보통 해외 근무를 마치면 1년 동안 국내 근무를 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네팔로 처음 임무단을 파견하는 유엔은 경력자를 요청해왔다. 그루지야에서 돌아온 지 6개월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오랜만에 가족들과 보내던 오붓한 시간은 다시 미뤄둘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가지 않겠다고 하면 안 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루지야에서도 너무 고생을 많이 하고 온지라 가지 말라고 말렸는데 저를 설득하더라구요. 나는 이미 당신하고 결혼하기 전에 국가와 결혼했다고, 자신은 국가가 부르면 모든 사리사욕을 버리고 언제든지 가야 할 사명을 가진 사람이라고. 그 뜻을 꺾을 수가 없었어요.” 남편이 돈을 벌기 위해, 혹은 개인적인 일로 가겠다고 했으면 천 번 만 번 말렸을 거다. 하지만 신난수(48)씨는 남편의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붙잡을 수 없었다. 그렇게 떠난 남편은 귀국을 4개월 앞두고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내며 아빠와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아이들이 안쓰럽기만 하다. “2003년도에 남편이 군수 교관이 되면서 가족 모두 미국에 갔어요. 아이들은 그곳에서 대학을 다녔죠. 저와 남편은 아이들이 졸업하기 전에 근무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아이들과 떨어져 지내야 했거든요. 아이들은 계속 공부를 해야 하니까. 특히 딸아이는 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오자마자 아빠가 그루지야로 파견이 됐고, 그루지야에 다녀오자마자 다시 네팔로 파견돼서 아빠와 이야기할 기회가 별로 없었어요. 너무나 할 말이 많았는데 이제 다시는 할 수 없게 됐다며 가슴 아파해요.” 여러 해외 근무로 가족과 떨어져 있던 시간이 많았지만 고(故) 박형진 대령은 표현을 잘하는 자상한 아버지였다. 멀리서도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고, 혹여 자신의 빈자리에 아이들이 외롭진 않을까 항상 메일과 전화로 세심하게 챙겼다. “우리나라가 더 잘 살기 위해 아빠가 멀리 와 있는 거라며 이해해달라고. 누군가의 희생은 필요한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항상 아이들을 다독였어요. 아이들도 그런 아빠를 자랑스럽게 생각했구요. 다정하던 남편의 목소리가 그립습니다.”입버릇처럼 말하던 나라 사랑 고(故) 박형진 대령은 어딜 가든 나라 사랑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군수 교관으로 미국에 있을 때는 이웃집 낙엽 청소까지 도맡아 할 정도였다. 그에게 한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작은 일부터 시작됐다. “군수 교관으로 미국에 있을 때 각 나라에서 온 대표들이 한동네에 모여 살았어요. 옆집에 프랑스, 영국 대표가 살았는데, 남편이 새벽 4시 반에 일어나서 옆집 청소까지 다 하는 거예요. 버지니아는 가을에 낙엽이 많거든요.” 그렇게 온 동네 청소를 다 하다 보니 아침마다 마당에 낙엽 모은 봉지만 20~30개였다. “사람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낙엽 주우러 나왔다가 깜짝 놀라는 거예요. 이미 다 청소가 돼 있으니까. 한국 사람이 이렇게 부지런하고 성실한지 처음 알았다고 하더라구요.” 남편은 그렇게 항상 사소한 것, 조그만 일에 좋은 인상을 주었을 때 우리나라의 위상이 높아진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말뿐만 아니라 행동도 언제나 함께였다. 미국에 군수 교관으로 있을 때에는 각 나라에서 온 장교들 중 우수 장교로 뽑히기도 했다. 한국 사람으로는 처음이었다. 사령관이 남편에게 한국과 미국 군수 외교에 큰 힘이 됐다며 보답하는 의미에서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개인적인 부탁을 할 줄 알았던 남편은 사령관의 한국 군사학교 방문을 요청했다. “제대하고 나면 뭐를 해달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한국 군사학교를 방문해달라고 요청하니까 사령관이 깜짝 놀란 거예요. 직접 오셔서 우리나라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평가해달라고, 그래서 서로 더 좋은 군수물자를 교환하는 데 도와주셔야 할 부분들을 눈으로 확인해달라고 부탁을 드렸어요.” 결국 사령관은 약속을 지켜 한국을 방문했고 그 일로 인해 우리나라의 군수 교환에 가속도가 붙었다. 남편은 사령관이 방문했을 때 계획 장교로 통역과 번역을 도맡아 했다. 표창장도 받았다. 그때가 2004년이었다. 조그만 일부터 큰일까지 고(故) 박형진 대령은 언제나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군수에 대해 전문가였잖아요. 물자나 지원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강대국에 비해 얼마나 뒤떨어져 있는지 절감한 것 같아요. 자신이 열심히 함으로써 우리나라가 좀 더 앞서 갈 수 있지 않을까, 시간만 나면 영어 공부를 하셨어요. 특히 군사용어는 전문용어잖아요. 말 한마디에 엄청난 물자가 왔다 갔다 하니까 잠잘 시간도 아껴가며 철저하게 공부하셨어요.”엄마, 나 이제 아빠가 없는 거야? 자상했던 남편은 네팔에 근무하면서도 수시로 메일을 보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자신이 사는 막사, 네팔의 시장, 사람들까지 메일을 통해 그곳의 모습을 전해왔다. 멀리 떨어져 불안해할 가족들을 위한 배려였다. 때문에 신난수씨는 네팔에 가지 않아도 남편이 오늘은 무슨 일을 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곁에 있는 사람처럼 알 수 있었다. “지난 남편 생일에 전화가 왔더라구요. 같이 있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저는 미역국 못 끓여줘서 미안하다고 했죠. 가슴이 너무 아프더라구요. 생일날 혼자, 허름한 막사에서 지낼 남편을 생각하니까 눈물이 났죠. 그런데 남편이 자기네 집에 누가 방문을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친구하고 같이 있었대요. 제가 너무 반가워서 ‘누군데?’라고 물으니 도마뱀이라는 거예요. 네팔은 유엔이 처음 파견된 곳이라 아무것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요. 막사 천막에서 먹고 자는데, 도마뱀이랑 같이 생일을 보냈다는 얘기를 듣고 어찌나 속이 상하던지. 네팔에 가지 않고 한국 연합사에 근무했으면 집에서 아이들과 편하게 있었을 텐데, 아내가 차려주는 따뜻한 생일 밥 먹으며 오붓하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 저렇게 고생을 하는구나 싶어 그때도 많이 울었어요.” 그리고 며칠 후 남편으로부터 도마뱀 사진이 담긴 메일이 도착했다. ‘도마뱀 시리즈.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내일 캠톤먼트 부대를 위해 준비하는 중 황당한 사건이 일어나서…도마뱀은 이제 일상적으로 방 혹은 거실에서 같이 지내고 있는데 내 여행 가방 안에서 도마뱀 가족이 단체로 발견됐습니다. 네 마리 새끼 중 한 마리는 죽어 있었고 세 마리가 꿈틀거리고 있어서. 위의 두 사진은 새끼들 사진이고 아래는 부모.’ 자신의 막사에 들어온 도마뱀을 보고 아이처럼 좋아하는 남편의 모습에 그녀는 가슴이 아팠다. 남편이 보내온 메일을 보여주며 그녀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이런 곳에서 도마뱀이랑 살면서 너무너무 고생을 많이 했는데, 이게 남편이 있던 곳이에요. 이렇게 허름한 막사에서 흙바닥에서 밥 해먹으며 지냈어요. 한번은 전화가 왔는데 설사를 했대요. 물이 안 맞아서.” 하지만 그런 열악한 상황에 있으면서도 고(故) 박형진 대령은 불평 한번 하지 않았다. 언제나 근검절약하며 아이들에게도 무엇이든 아껴 쓰라고 당부했다. “어쩌다 한국에 오면 전에는 외식도 나가고 그랬는데, 거기서는 한 끼 먹는 게 너무 힘들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절대 밥 남기지 말라고.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에 감사하고 대한민국 국민임을 자랑스러워하라고 항상 아이들에게 당부했어요.” 아버지의 당부대로 아이들은 잘 자라주었다. 미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 아이들은 4년간 장학금을 받으면서도 수업이 끝나면 학교 식당에서 일하고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을 벌었다. 옷이나 운동화도 항상 제일 싼 것으로 살 정도로 아버지 말씀을 잘 따랐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함께 있는 것처럼, 언제나 큰 산이 되어 가족을 지켜주던 아버지를 잃은 슬픔은 아이들에게 크나큰 상처로 남았다. “어떠한 상황이 닥쳐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아빠가 길러줬어요. 그런 아빠가 이제 없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엊그제는 딸아이가 자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엄마, 나 이제 아빠가 없는 거야?’하고 묻더라구요. 그렇게 떨어져 있어도 한 번도 아빠가 안 계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는데 딸아이도 이제 실감을 하나 봐요. 한참을 울었어요.”남편의 선물 신난수씨가 남편을 만난 것은 남편이 생도 3학년 때였다. 육군사관학교 축제 때 파트너가 되어 만남을 이어오다 남편이 졸업하던 날 학교 잔디밭에서 프러포즈를 받았다. “남편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배우자를 위해 기도를 했대요. 그 배우자가 저라는 거예요. 만약에 자기가 나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 분명히 이혼할 거라고, 당신이 바로 하느님이 보내준 사람이라고 결혼해달라고 하더라구요.” 그때부터였다. 서로가 같은 생각을 하며 같은 곳을 바라보게 된 것이. 그렇게 두 사람은 졸업하는 날 약혼을 하고 7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군인의 아내로 스무 번이 넘게 이사를 다니며 고생도 많이 했지만 남편과 결혼한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다. “이제까지 결혼 생활하면서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어요. 외국에 있어도 항상 전화로 같이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꽃다발이나 목걸이, 향수 같이 작은 선물이라도 꼭 챙겼어요.” 남편에게 받은 선물 중에 몇 년 전에 받은 편지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군인의 아내로서, 아이들의 엄마로서 역할에 충실해줘서 고맙다는 내용이 6장의 편지지에 빽빽하게 담겨 있었다. “비싼 선물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정말 감동이 오더라구요. 그거 받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전 항상 그랬어요. 다시 태어나도 당신을 만날 거라고. 남편도 같은 마음이었구요.” 남편이 나라를 사랑했던 만큼 가정도 사랑했기에 나라 일에 바쁠 때에도 그의 빈자리가 크지 않았다. 함께 있지 않아도 그 마음이 충분히 와 닿을 정도로 자상하고, 또 사랑을 표현하던 남편이었다. 남편의 부재는 아직까지 믿을 수 없는, 믿고 싶지 않은 슬픔이다. “어제 사망신고 하고 집에 왔는데 이제 정말 남편이 없구나, 실감이 나는 거예요. 며칠 동안 전화가 없으니까, 그게 제일 커요. 매일은 아니었지만 남편과 통화하는 시간대가 있었거든요. 네팔 카트만두는 하루에 12시간이 정전이에요. 국제 전화하기가 쉽지 않으니까 전화할 수 있는 시간을 정해서 통화를 했어요. 그 시간대가 되면 저도 다른 일을 하다가 전화를 기다리곤 했죠. 항상 자상하게 전화해주고 메일 보내주고 그랬는데 이제 전화도 없고 메일도 없으니까 너무 가슴이 아파요. 그저께는 집에 있는데 남편과 항상 통화하던 시간에 전화가 온 거예요. 전 그 사람이 죽었다는 걸 순간 잊어버리고, 그 사람 전화인 줄 알고 안방에서 뛰어나와 ‘여보, 당신이야?’하고 전화를 받았는데 다른 사람이더라구요.” 혹시나 하고 메일도 확인해봤지만 더 이상 남편에게 온 새로운 메일은 없었다. 항상 곁에 있던 남편의 소식이 이젠 더 이상 없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슬픔이 밀려왔다. 지금쯤 하늘에 있을 고(故) 박형진 대령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없느냐는 물음에 그녀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전 매일 남편하고 얘기해요. 워낙 둘이 얘기하는 걸 좋아했거든요. 아무 일도 아닌 이야기로 밤새도록 이야기하곤 했어요.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서 기도하며 어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오늘은 누구를 만나는지 다 얘기했어요. 그리고 부탁했어요.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천국에서 우리를 잘 지켜봐달라고.” 신난수씨의 미소는 굵은 눈물이 되어 손등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이제 남편 대신 국민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남편이 그동안 해왔던 일들을 보면서 얼마나 나라가 소중한지 느꼈습니다. 남편은 이제 없지만 우리에게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군인이 무엇인지, 충성하는 것이 무엇인지, 평화를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가셨다고 생각합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듯이 남편의 죽음도 많을 열매를 맺었으면 좋겠어요.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맡은 바 임무를 열심히 이뤄가며 나라를 위한 마음을 조금씩만 가져주셨으면 해요. 그게 바로 남편이 바라던 바였으니까요.” 고(故) 박형진 대령은 훌륭한 군인이자 자상한 남편, 다정한 아버지였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겠지만, 또다시 일상이 시작되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가 남긴 많은 것들로 인해 우리는 또 다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눈물을 멈추기 전에, 다시 힘을 내기 전에 한 번 더, 고(故) 박형진 대령의 명복을 빈다.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원상희
- 사금융 18조 시대의 슬픈 희생자
- 2007. 06. 20 재테크
- 빚을 갚기 위해 빚을 내는 서민들. 변제능력을 상실한 채무자만 500만 명이다. 사금융시장의 규모는 무려 18조원. 바야흐로 전 국민이 사채시장에 노출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채를 썼다 파산한 중소상인, 카드깡으로 깡통인생이 된 직장인, 생계형 급전으로 가정파산한 50대 여성… 이들 모두 사채 수렁에 빠진 대한민국의 슬픈 희생자들이다.빚을 갚을 능력을 상실한 과중 채무자는 우리나라 총인구의 10%에 해당하는 약 500만 명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나타났다(송태경 민주노동당 민원정책실장-한국 과중 채무 및 고리대부업 시장 현황과 대책). 금융기관의 신용정보관리 대상자와 기타 연체자(고리대부업 이용자, 보증채무 및 주택담보대출 연체자, 신용회복위 및 배드뱅크 등 탈락자)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들은 사실상 제1, 2금융 접근권이 차단되어 있다. 이들이 자급자족적 경제운영을 통해 대출금을 상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 빚을 갚기 위해 빚을 다시 내는 ‘사금융 수렁’의 늪에 더욱 깊이 빠져들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사금융 시장의 규모는 18조원(한국은행)이다. 이자제한법 폐지(1998년) 이전 가계 부분의 사채 규모는 4조원(한국갤럽)에서 4조9000억원(한국은행·1993년 기준)이다. 규모면에서 4배 정도 증가한 것이다. 사금융 산업에서는 등록업체가 1만7000개, 미등록업체는 3만5000~4만5000개로 추정되고 있다. 사채업자 수의 최소한 4~5배에 달하는 전주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대부사업자가 3000여 개에 지나지 않던 1997년 통계와 비교하면 사채시장이 얼마나 팽창했는지 짐작이 간다. 송태경 민주노동당 민원정책실장은 “지난 1년 동안 대부업 실태를 조사(민생경제 SOS, 민생지킴이 전국 탐방)했다”면서 “전 국민이 사채시장에 노출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실제로 여러 금융회사에 채무를 지고 있는 신용불량자(다중채무자)들에게 빚탕감, 채무액 유예 등의 방법을 통해 채무조정의 기회를 부여하는 개인워크아웃(파산면책)을 신청하기 위해 민노당에 상담한 건수(2004년 10월~2006년 12월)는 무려 1만5137건(전화·인터넷 면담 제외)이나 된다. 권오재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 간사는 “1998년 이자제한법 폐지로 그만큼 돈놀이가 쉬워졌기 때문”이라면서 “건강한 투자자원의 왜곡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사금융이 확대되는 것보다는 사금융의 약탈적 대출이 더 큰 문제다. 금융감독원의 자료(2006년 말 현재)에 따르면 사금융의 평균이자율(1년 기준)은 223%라고 밝히고 있다. 법이 정한 이자 상한(2007년 3월 부활된 이자제한법·연금리 66%)을 비웃고 있는 것이다. 특히 카드빚을 갚거나 병원비, 학자금, 생활비 등 생계형 자금의 필요에 의한 개인사금융 수요가 ‘폭발’하고 있다. 결국 생계형 사채를 쓸 수밖에 없는 서민들이 가혹한 이자 부담에 시달리는 피해를 입고 있다. 권오재 간사는 “과거엔 사금융이 서민들이 마지막으로 찾는 서민 대출의 보루였다”면서 “그러나 이제 보편화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심각성을 지적했다. 사금융은 채권 회수의 위험성이 큰 만큼 이자는 비싸다. 그동안 정당이나 시민사회단체도 금리규제를 중심으로 대응해옴에 따라 고금리 피해는 사실상 방치되어왔던 게 지금까지 상황이다. 고리대금의 수렁에 빠져들면 그것은 곧 파산을 의미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 실례와 문제점을 사례별로 찾아본다. (1)사례 중소상인의 돌려막기 사업을 하던 곽경숙씨(가명·26·봉천동)는 아버지가 1995년 부도로 가출한 상태에서 그 빚을 어머니가 떠안게 됐다. 생계를 돕게 된 곽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곗돈 3000만원, 어머니가 얻은 사채를 보태 서울 동대문 밀리오레에 조그만 옷가게를 열었다. 옷은 말 그대로 날개돋친 듯이 팔렸다. 하지만 그것은 허울 좋은 개살구였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어머니가 곽씨의 신용카드를 부도빚을 돌려 막는 데 사용하고 있었다. 그는 결국 사채에 손을 댄다. 2005년 8월 29일 그는 대출업 사무실도 아니고 차에서 대출서류를 작성하고 700만원을 대출했다. 하루에 8만2600원씩 100일 동안 826만원을 갚는 조건이었다. 연체를 반복했고 3차례 ‘대치기’(원금 잔액과 연체금액을 합쳐 다시 일수로 빌려주는 것)를 했고 결국 그가 부담한 이자율은 무려 308.6%이나 됐다. 빚을 갚기 위해서 더 많은 돈을 빌려야 했다. 결국 20여 개 대출업체에서 돈을 빌려 쓰면서 빚이 얼마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기하급수로 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2005년 2월 1억1000여만원이던 빚이 이듬해 11월 1억8900여만원으로 늘었다. 그는 개인파산도 신청하기 어려운 상태다. 빚 갚을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돈을 빌렸는지 그 여부(사기죄 적용 여부)를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사채업자의 맞고소로 법정다툼 중이다. 권오재 간사는 “은행 빚을 갚기 위해 사채시장의 돈을 쓰는 일이 발생했다”면서 “이는 은행의 보수화가 낳은 결과”라고 지적했다. 결과적으로 ‘메이저 금융기관’(제1·2금융권)이 경제질서 유지에 무책임함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얘기다. 거대금융권 스스로 영세하고 신용도가 낮은 중소상인이나 중소기업인들을 위해서는 공적금융(Micro Credit)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2)사례 카드깡은 ‘깡통인생’을 만든다 김민영씨(가명·경기 부천)는 1999년 카드가 남발될 때 신용카드를 발급받았다. 그는 당시 입시학원 강사로 일하고 있었다.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동생도 그가 맡아 거두고 있었다. 2000년 500만원 현금 서비스를 받았던 게 이듬해 1060만원으로 늘어났다. 이 중 일부를 상환하기 위해 상호저축금고에서 320만원을 빌렸다. 대출금액이 불어나면서 연체가 늘어났고 2002년 급기야 그의 신용도는 평가절하됐다. 카드서비스대출 한도도 기존의 3분의 1 수준이 된 것. 결국 카드깡에 손을 댔다. 백화점에서 상품권을 구입하는 형식으로 1200만원을 빌렸지만 이듬해 그의 빚은 2200만원으로 늘어났다. 사채업자의 채권추심이 시작되자 동네 목욕탕, 교회 등에서 생활을 하는 등 한동안 도망자 생활을 했다. 지금은 월 임대료 10만원을 내는 13평 임대아파트에서 기초수급생활자로 살고 있다. 그는 현재 개인파산(개인워크아웃)을 신청한 상황이다.(3)사례 생계형 급전이 낳은 가정파괴 50대의 한 여성은 2003년 시부모의 병원비를 대기 위해서 카드 돌려 막기를 했다. 결국 대부업자에게 손을 대 급전 700만원을 빌렸다. 당시엔 시부모님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그 역시 사채를 얻어서 사채를 갚았다. 그가 그동안 상환한 돈은 3000만원이나 된다. 그러나 빚이 줄기는커녕 1억원으로 늘어났다. 그 과정에서 빚에 쪼들리던 남편은 자살했고 두 명의 자녀는 모두 가출했다. 절망적으로 살다가 지난 5월 민주노동당 민원정책실을 찾아 도움을 요청했다. 빚이 늘어나면 보통의 직장인이 생활수급대상자로 전락한 경우다. 국가재정은 재정대로 축을 내고 피해자는 피해자대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이다. 신용도가 비록 낮더라도 대출상환 의지가 있는 경우 사회연대은행 등을 활성화해서 신용사각지대에 있는 서민들이 회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경제학)는 “대안은행을 찾는 노력이 없다면 그것은 국가의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조제현 변호사(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는 또 은행의 휴면계좌를 이용하는 방법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휴면계좌엔 4000억원 정도가 있다. 이를 소액대출 연체자 혹은 신용불능자에게 재대출해서 회생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봐야 한다는 제안이다. 금융감독원도 “공영원리에 의한 정책적 차원의 전문 대안금융기관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했다.(4)사례 강탈적인 사채업자의 돈놀이 정정미씨(가명)는 가사도우미로 어렵게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다. 그는 300만원의 급전이 필요했다. 2006년 6월 13일 한 사채사무실을 찾았다. 사채업자는 “우리는 500만원 이상 대출해준다”고 했다. 그는 150일간 하루에 3만8500원씩 갚기로 약정(이자율 166%)하고 500만원을 빌렸다. 그가 받은 것은 수수료, 법정비용, 선이자 등을 땐 400만7500원이었다. 일수가 밀리고 채권추심이 들어왔다. 사채업자는 “몸을 팔아서라도 돈을 갚으라”고 협박성 독촉을 했다. 6월 13일 남은 상환액은 273만3500원이었는데 이 빚을 갚기 위해서 500만원을 같은 조건으로 다시 대출할 것을 강요받았다. 대출금은 500만원이었지만 상환금, 선이자 등을 떼고 그의 손에 남은 돈은 불과 110만원이었다. 1000만원을 빌렸지만 그가 만져본 돈은 불과 500만원을 조금 넘는 것이었다. 또 다른 조건이 따라붙었다. 5개월 내에 전액을 상환하지 않으면 채권추심을 하겠다는 각서를 섰다. 물론 사업업자가 불러준 대로 받아쓴 것이었다. 사채업자는 현재 채권추심에 나서 전세금을 가압류했다. 청구금액은 700만원이었다. 정정미씨는 현재 이 대출업자를 민법 103조·104조 위반으로 고발한 상태다. 이런 경우 법원이 개인간 사적 계약을 중시한다면 정정미씨는 사기죄에 해당될 가능성이 높다. 최근 대법원 판례처럼 사회적 풍속에 반하는 계약(민법 103조·104조)으로 본다면 사기죄는 면할 수 있다. 송태경 실장도 “사실 불법적 사채업자에 대한 패널티(처벌)가 너무 가볍다”면서 “신체적 가해가 없는 경우 거의가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게 통례”라고 말했다. 이헌욱 변호사(참여연대 민생희망운동본부 실행위원장)는 “무엇보다 불법채권추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사법당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5)사례 신체포기 각서 민노당 송태경 민원정책실장은 지난해 11월 7일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고리대부업 피해자였다. 40대 여성으로 들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채무변재를 못해 신체포기 각서를 작성했다”고 말했다. 그는 “채권추심자는 며칠 동안 집 주위를 서성거리고 초·중학교에 다니는 자녀에게도 접근하고 있다”면서 “겁이 나서 신고를 하지 못하겠다”며 벌벌 떨면서 말했다. 송 실장은 “‘신체포기 각서는 법적 효력이 없으니 개의치 말고 경찰서에 신고하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신체포기 각서는 보통 ‘… 계약에 따라, 담보물로 설정된 주요 장기를 비롯한 신체 전부에 대한 권리를 사업자 ○○○에게 양도하며, 이를 확인하여 분란의 여지를 없애고자 이 각서를 작성합니다’라고 정형화되어 있다. 송태경 실장은 통화를 끝내고 자신의 블로그(blog.naver.com /urisaju/ 150010743412)에 글을 올렸다. 그는 ‘단속해야 할 경찰이 버젓이 고리 대부업을 부업으로 하는 세상, 실태조사와 필요한 조치는커녕 불법광고조차 제대로 단속하지 않는 시·도와 금융감독원, 고작해야 집행유예나 벌금형으로 끝내는 법원, … 덕분에 집값이 미친 것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광기로 얼룩진 고리대부업 시장은 어제도 오늘도 잘도 돌아갑니다. 오늘도 누군가는 신체포기 각서를 썼을 것이고, 오늘도 누군가는 자살을 택했을 것이지만, ‘그 누군가에 속하지 않은 당신’은 이런 문제를 알지 못하고 지냅니다”라고 적었다. 권오재 간사는 “추심방법을 엄격하게 규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채무 상태에 대해 “가족 혹은 회사에 알리거나 심지어 송태경 실장과 통화한 사람처럼 신체포기 각서를 쓰게 하는 일이 심심찮게 발생한다”고 말했다. 송태경 실장도 “포기각서를 쓴 채무자도 신체포기 각서가 법적 효력이 없음을 잘 안다”면서 “불법채권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약탈적 갈취에 대해 어떤 대응도 하지 못하는 게 보통이다”고 말했다. 이는 치안이 동반되지 않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예다. 관리감독과 처벌의 실효성을 동반해야 한다는 지적인 셈이다. 사채업자들의 악랄한 추심방법 ‘가족 몰살’ 협박부터 신체포기 각서까지살인적인 이자에 시달리는 사채 피해자가 빚 독촉을 피하기 위해 제2의 범죄로 나서는 일은 이미 흔한 일이 되었다. 채권추심에 나선 사채업자들로부터 어떤 시달림을 받기에 사회적 낙인이 찍힐 것이 뻔한 범죄까지 저지르는 것일까. 유석호 쇼테크 사장(38)은 2000년 회사가 어려울 때 사채를 빌려 썼다. 신체포기 각서도 썼다. 죽을 각오로 ‘마이링거’ 개발에 성공하면서 사채업자들의 협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가 3월 21일 한양대학교가 개설한 CEO 특강에서 “군복을 입은 노인들이 온 적도 있고 종교단체에서 온 분들이 찬송가를 부르기도 했고, 팔다리가 없는 분들이 와서 돈을 갚으라고 회사에 온 적도 있었어요”라고 말했다. 물론 직접적으로 신체적 위협을 가하는 일도 흔하다. 2006년 6월 ㄱ씨는 경북 청송군 현동면 한 식당에서 ㄴ씨(48)를 흉기와 가스통 밸브를 열어 협박하고 폭행하는 등 모두 7차례에 걸쳐 이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는 게 포항북부경찰서의 설명이다. ㄱ씨는 여성들만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해오는 사업업자로 자신의 돈을 빌린 ㄴ씨가 빚 독촉과 협박에 못 이겨 달아나자 소재 파악을 위해 피해자를 폭행한 것. 경기 수원경찰서는 2006년 7월 중소기업체 사장인 김모씨에게 10일 후 갚는 조건으로 1500만원을 빌려준 뒤 약속한 날짜에 돈을 갚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족을 몰살시키겠다’고 협박, 3500만원을 갈취했다고 밝혔다. 여성에게는 성폭행·감금·납치 등도 적지 않게 동원되는 방법이다. 서울 강동경찰서는 지난해 7월 24일 남모씨가 유흥업소 종업원 도 모씨를 일당의 오피스텔에 16일 동안 감금한 혐의로 구속했다. 유흥업소 여종업들에게는 ‘선불금의 족쇄’가 가장 흔한 방법이다. 불법적인 우편물을 이용하는 것도 빚 독촉의 한 방법이다. 직장인 ㄷ씨는 최근 수십 통의 빚 독촉 우편물을 받았다. 법원압류통고장, 강제집행착수예정문, 법적 소송결정문 등 제목만 봐도 섬뜩한 것이었다. 이 독촉장은 대부업체로부터 채권을 위임받은 자산관리회사가 보내는 것이다. 마치 법원, 경찰성 등 국가기관에서 작성한 공문서처럼 꾸며 겁을 주는 행태다. 물론 이들 서류는 법적 근거가 없다. 또 직장인 ㄹ씨는 법원이나 경찰서 등 대표번호가 발신번호로 찍힌 전화도 자주 받았다. 발신번호를 임의로 지정할 수 있는 인터넷 전화를 이용해 위협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피싱사기’에도 자주 사용된다. 지난해에 채무자를 살해한 후 그 보험금을 갈취하려 한 사채업자가 경찰에 잡힌 일도 있다. 전북지방경찰청은 지난해 7월 채무자 사망시 자신이 수억원의 보험금을 지급받을 수 있는 종신보험에 가입한 후 교통사고를 위장해 채무자를 살해하려는 등 수차례 채무자를 협박하고 폭행했다고 밝혔다.어느 사채업자의 고백 “돈 받아내려니 그럴 수밖에요”서울 강남구 역삼동에서 대부업체를 운영 중인 김항주씨는 ‘대부업자들의 인터넷 카페’인 ‘착한 역삼동의 대부업자’를 운영하고 있다. 회원은 7000여 명. 그는 대부업 7년 경력을 갖고 있다. 그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막사채업자’였다. 채권추심을 위해 채무자에게 폭언을 가리지 않는 사채업자였다는 얘기다. 그는 대부업의 인식을 전환시키는 데 일조하겠다는 뜻에서 이 카페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대부업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예. 그는 “‘신분증을 위조할 수 있느냐’ ‘청부살인을 해달라’ ‘빚 독촉을 피해 중국으로 도망가려고 하는 데 밀항선을 알선해달라’ ‘성폭행을 당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등과 같은 황당한 전화를 받은 일도 있다”면서 “한마디로 대부업자를 ‘도둑놈’으로 인식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역시 대부업에 자부심을 갖고 있지 못하다. 결혼 당시 자신의 직업을 배후자에게 ‘펀드매니저’라고 속였을 정도. 그는 이어 “돈을 빌려주면서 욕 먹을 필요가 있겠느냐”면서 “법 안에서 경제활동을 왜곡시키지 않는 수준에서 대부업을 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신체포기 각서 등을 요구하는 악덕업체들 때문에 등록해서 세금 내는 업자들도 많은 피해를 보고 있다”고 역설하면서 “대부업자 스스로 인식을 바꿔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남은 사실 생계자금이 필요한 대출자가 있는 곳은 아니다. 그 역시 “여기엔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이 돈을 이용하지는 않는다. 주로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했다. 담보대출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그는 전주와 관련, “정치인·의사·기업인들도 있다”면서 “대기업을 운영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둔 사람이 50억원 정도 자금을 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오희성씨(가명·34)는 서울 영등포에서 ‘일수놀이’를 하다가 대부업체에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다. 채무자가 돈을 갚지 않아 망한 경우다. 그는 “영등포 지역만 해도 7000개가 넘는 ‘일수회사’가 있고 하루에 3~4개의 일수회사가 생긴다”면서 “일수쟁이는 한두 군데만 돈이 막혀도 도저히 회사를 운영하지 못할 정도로 영세한 업체가 대부분”이라면서 “나도 빌려준 돈을 상환받지 못하면서 결국 손을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일수업자들은 억척스럽게 돈을 회수할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협박과 불법적인 방법이 동원되는 것이라고 말했다.■글 / 김경은 기자(뉴스메이커)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 ‘동백림 사건’의 희생자 공광덕 박사 부인 조병옥
- 2006. 10. 01 화제
- “내가 붙잡은 건 그 사람의 손이 아니라 보다 확실한 내 인생이었어요” 수기라지만 때로는 완벽한 단편이나 연작소설처럼 느껴지는 「라인강변에 꽃상여 가네」의 저자 조병옥. 그녀는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일어난 반정부 간첩단 사건인 동백림 사건의 허구도, 민주화 운동 투사의 모습도 아닌 사실 그대로의 ‘어미의 삶’을 자식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밤을 지새우며 글을 써내려갔다. 특별한 삶과 특별한 죽음 ‘동백림 사건’에 연루됐던 공광덕 박사의 부인 조병옥씨가 수기 형식의 이야기 「라인강변에 꽃상여 가네」라는 책으로 펴냈다. 촉망받는 음악가이자 이화여대 교수였던 저자는 어린 시절 쌀밥이 먹고 싶어 일본군 병사에게 순결을 잃었던 이야기에서부터 공 박사와 결혼하게 되기까지의 과정, 독일에서 부부가 벌였던 민주화 운동, 암 선고를 받은 남편이 42일간 단식하며 투병 생활을 했을 때의 심정 등을 여과 없이 담았다. 더불어 독일에서 윤이상 선생, 이응노 화백과 교류했던 이야기와 리영희, 홍세화, 이해동 목사, 작고한 안병무 교수, 이삼열 교수, 오석근 박사, 북측의 여연구, 루이제 린저 등과의 친분도 실었다. 이 책은 동백림 사건의 허구성을 밝히기 위해 쓴 것이 아니다. 동백림 사건으로 인해 전과자 신분으로 방황하던 공광덕 박사와 결혼하면서 민주화 운동에 눈을 뜬 여교수의 고발서는 더더욱 아니다. 자식에게 어미의 삶을 물려주고 싶은 마음에 특별한 인생을 담았다. 오랜 외국 생활을 한 탓에 한글로 책 한 권을 완성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문학적 필력이 뛰어나 읽는 묘미가 있다. 남편의 암 치료 과정은 32편의 단식 일기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저자와의 일문일답 제목 ‘라인강변에 꽃상여 가네’는 무슨 의미인가? 라인강변은 외국의 상징이다. 왜 우리나라의 꽃상여가 라인강변에 있겠는가? 우리나라 산천에 묻혀야 할 사람들이 왜 라인강변에 있어야 하나. 그런 느낌을 담고 싶어 지은 이름이다. 처음 글을 쓰는 것이라 많이 힘들었을 텐데? 엄마로서 자식들에게 물려줄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던 차에 아들이 “엄마의 삶을 갖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외국에서 오랜 세월 살았기 때문에 한글 표현 능력이 모자라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상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눈에 걸리는 책은 모두 필사했다. 정치적인 색이 짙은 책인 줄 알았는데 내용은 사랑 이야기다. 남편은 학자에 가까운 사람이다. 나 역시 민주화 운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내가 동백림 사건에 관한 글을 쓴다면 언어도단이다. 물론 나는 제3자는 아니다. 동질감은 있었지만 깃발을 들고 앞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책을 쓰면서는 몰랐지만, 다시 읽어보니 꼭 이런 얘기까지 해야 했나 싶은 곳이 있더라. 하지만 그걸 따져볼 생각을 못했다. 그냥 팬 가는대로 거침없이 쓰다 보니까 책이 완성됐다. 사상범과 여교수,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내가 먼저 그를 잡았다. 물론 물리적으로는 내가 그 사람을 붙잡았지만, 내가 붙잡은 것은 그 사람의 손이 아니라 보다 확실한 인생을 붙잡은 것이다. 다른 사람이 보면 손해 보는 장사를 한 것 같겠지만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목마름을 채울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걸 수 있다. 공광덕 박사에 대한 첫인상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눈에 선하다. 찰리 채플린을 연상시키는 옷차림, 앞단추가 잘 여며지지 않는 오버코트에 짧은 소매, 그리고 퇴색한 로이터 안경을 쓰고 있었다. 아무도 곁에 없는 것처럼 외로워보였다. 공광덕 박사에게 미안한 마음이라고 당시 나는 전남편과 이혼한 상태였다. 공 박사를 사랑했지만 그와 결혼해야겠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결혼는 형식적인 조건 때문에 했다. 아이들을 독일로 데리고 가야 하는데, 아버지가 있어야 갈 수 있었다. 부모는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살아간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세상을 뚫고 나가서라도 부딪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하지만 양부는 좋은 선생님일 수밖에 없다. 좋은 교육 원리를 가지고 아이들을 대하게 된다. 남편은 아이들과 허물없이 지냈고, 아이들도 남편을 믿고 따랐다. 하지만 나 때문에 거기까지가 전부였다. 남편은 아이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지만, 항상 내가 먼저 아이들을 안았다. 나로 인해 남편이 또 한 번 외로운 삶을 살았던 것 같아 미안하다. 인생관, 결혼관을 듣고 싶다. 나는 ‘관’자가 들어가는 논리적인 얘기를 잘 못한다. 대신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사랑만 있으면 다른 건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오늘 같은 가을날, 거리에서 만난 노점상이 정감 있게 보이고, 뭔가 정겨운 목소리를 듣고 싶고, 마음이 촉촉이 젖어 있는 누군가를 만날 것 같은 기분, 그게 사랑이다. 결혼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과 평생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나는 결혼은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인생은 반쪽밖에 될 수 없다. 별명이 ‘깡병옥’이라고? 나는 어려서 씻기 힘든 아픔을 겪고 무엇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살았다. 이 세상에 밝힐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한 사람은 세상이 두렵다. 나는 세상에서 도망치다가 어느 순간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음을 알았다. 쥐가 구석에 몰리면 고양이를 물 듯이 모험심이 생기더라. 남편을 만나고 나서는 그 사람 곁에서 편안한 휴식을 느꼈다. 바라던 소망 하나가 이루어졌다. 책이 출간되니까 더 깊은 꿈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 같다. 한 지인은 “그럼 언제 꿈에서 깨냐?”고 묻는데, 나는 꿈일 때만 사는 것 같다. 애초에 자식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마음으로 글을 썼다. 이제 내 몫은 끝났다. 책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너무나 뜻밖이고, 그들이 이 책을 가슴에 안아줘서 고맙고, 감동을 받았다. ■글 / 김성욱 기자 ■ 사진 / 박원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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