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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파·양파 ‘닥치고 수입’…기후 대응 이게 최선일까
대파·양파 ‘닥치고 수입’…기후 대응 이게 최선일까(2024. 09. 09 06:00)
2024. 09. 09 06:00 사회
강원도 정선에서 40년 넘게 고랭지 배추 농사를 지어온 정덕교씨가 동네 배추밭을 보여주고 있다. 고랭지인 이곳에서도 뜨거운 여름 탓에 배추가 병들었다. 폭염이 막바지 기승을 부리던 지난 8월 30일, 서울로부터 3시간을 달려 강원도 정선군 화암면의 고랭지 배추밭을 찾았다. 산비탈에 굽이굽이 들어앉은 초록빛 배추밭을 올려다보니, 구름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이곳 고랭지 배추밭의 해발고도는 800~1000m. 오랜만에 느껴보는 서늘한 기운에 감탄하고 있는 동안 동네 배추밭을 안내하던 정덕교씨가 한숨을 쉬었다. “쯧쯧, 여기도 다 망가졌네. 보세요, 노랗잖아요.” 배추 겉잎들이 노랗게 시들어 축 늘어져 있었다. 속은 그런대로 초록빛을 띠었지만 잎이 촘촘하진 않았다. 정씨는 “내다 팔 수 없는 배추”라고 했다. 가까이서 보니 병든 배추는 한두 포기가 아니었다. 배추밭 전체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초록 물결 속에 노란 점과 띠가 보였다. 서울의 남산보다 세 배 높은 곳에 있는 고랭지 배추도 올해 폭염으로 신음했고, 작황은 부진했다. 무름병, 반쪽시듦병을 비롯해 여러 바이러스 감염 증상이 나타났다. 정씨는 말했다. “올해 3만5000평을 지었는데 평소 같았으면 5t 트럭 110차(대)는 나왔을 거예요. 그런데 올해는 50차도 안 나왔습니다. 배추가 노랗게 되고 주저앉아버렸으니까….” 고랭지 배추가 잘 자라는 온도는 18~20도다. 그러나 정선, 태백, 평창, 강릉 등의 고랭지 배추밭에서도 지난달 최고기온은 30도를 넘나들었고 밤에도 25도를 자주 넘겼다. 고랭지 배추의 수난은 사실 어제오늘의 얘기는 아니다. 고랭지의 평균기온이 꾸준히 오르면서 재배면적이 매해 줄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고랭지 배추의 재배면적은 2000년 1만206㏊에서 2024년 4421㏊로 쪼그라들었다. 생산량 역시 절반(38만4715t→19만2130t)으로 줄었다. 30여 년간 정선에서 배추 농사를 지어온 김영돈씨 역시 배추 농사를 ‘포기’한 농부다. “작년에 배추의 밑동이 짓물러 주저앉더라고요. 고갱이가 망가지면 아예 먹지 못하는 배추가 돼요. 영농자재비 다 제하고 나니 다음 농사지을 돈도 안 나오더라고요.” 그가 올해 배추 대신 선택한 작물은 양배추. 김씨는 “올여름이 워낙 뜨거워 양배추도 잘 자라진 않았다”고 했다. 바야흐로 ‘기후플레이션’의 시대다. 기후와 인플레이션(물가 상승·inflation)의 합성어인 기후플레이션은 기후위기 탓에 농산물 생산량이 감소하면서 농산물 가격이 오르고, 물가도 덩달아 뛰는 현상을 말한다. ‘국민 채소’ 배추의 가격도 작황 부진의 영향을 받았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따르면 올여름 배추 가격은 한 포기에 7561원(지난 8월 27일 기준)까지 올랐다. 평년보다 32.84% 비싸다. 늦여름에 대거 출하된 강릉 안반데기 지역 배추가 가격을 조금씩 끌어내리고 있지만, 소비자는 냉정하게 다른 선택을 했다. 올해 김치 수입량(1~7월·17만3329t)이 역대 최대를 기록한 것이다. 국산보다 40% 저렴한 중국산 김치의 수입 규모는 2021년 ‘알몸 김치’ 동영상 파동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강원도에서 30년간 배추농사를 지었던 김영돈씨는 올해 배추를 포기하고 양배추를 심었다. 김영돈씨 제공 ■기후플레이션이 던지는 질문 기후위기가 농산물 가격을 높인다. 대책은 무엇인가. 취재의 출발선이 된 ‘질문’은 애초 이랬다. 그런데 배추 가격에 관한 대화 끝에 정덕교씨가 분통을 터뜨렸다. “금배추라고요? 언론 때문에 속이 터집니다. 농민 사정은 얘기 안 하고 비싸다고만 합니다. 농사 왜 짓습니까. 돈 벌려고 짓잖아요. 배추 재배면적이 줄어든 가장 큰 이유는 기후변화 자체가 아니에요. 농민들이 농사를 포기하는 건 잘못된 정책 때문입니다. 정책만 제대로 펼쳐도 폭염, 폭우 어느 정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고랭지채소강원도연합회장이기도 한 정씨는 그동안 여러 언론의 요청을 받고 ‘병든 배추’를 보여줬다. 그러나 잘못된 농정을 질타하는 그의 목소리는 번번이 ‘편집’됐다고 한다. “기자들은 변명도 간단하더군요. 위에서 잘랐다고들 해요. 이번에도 그렇게 될지 두고 봐야죠.” 질문은 수정돼야 했다. 정씨의 꾸짖음 때문이 아니다. ‘농산물 가격 인상 대책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철저히 소비자 위주다. 가격에만 초점을 맞출수록 기후위기로 인해 더욱더 위태로워진 농가 경영, 농민의 현실에 관해 논의할 여지가 줄어든다. ‘농민 관점’은 장기적으로는 소비자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농민의 삶이 어느 정도 유지돼야 농산물이 안정적으로 공급돼 물가 안정도 꾀할 수 있다. 기후플레이션을 올바르게 다루기 위해 가장 먼저 갖춰야 할 것은 ‘관점의 균형’이다. 소비자와 농민 모두를 위한 기후플레이션 해법은 뭘까. 품목별 수입은 어느 정도가 적절하며 농가 보호는 어떤 수단이 효과적인가. 전 세계의 기후플레이션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으며, 쌀을 제외하면 식량 자급률이 한 자릿수인 한국은 대책을 강구하고 있는가. 기후플레이션의 현실적 해법 찾기는 여러 변수를 고려해야 하는 녹록지 않은 작업인데 확실한 것은 하나다. 눈앞의 농산물 가격만 낮추려는 지금의 정부 대책은 ‘언 발에 오줌 누기’에 가깝다. 2022년12월 서울 서초구 농협 하나로마트 양재점의 양파 판매대의 모습. 연합뉴스 ■저관세 물량 공세 윤석열 정부의 농산물 가격 상승 대응법은 한마디로 ‘닥치고 수입’이다. 수입 농산물 세금을 대폭 깎아주는 저관세 수입이 빈번하다. 대표적인 저관세 수입 경로가 관세법상의 ‘할당관세’다. 할당관세는 기본세율의 40% 범위에서 관세를 가감하는 제도인데 대개 관세를 거의 없애는 용도로 운용된다. 국민 채소 5종, 할당관세 얼마나 자주 이뤄졌을까한국인의 식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대파, 무, 양파, 배추, 감자에 대해 관세 인하가 이루어졌던 연도를 붉게 표시했다. 한눈에 봐도 지난 3년간 관세 인하가 빈번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각 연도별 기간, 적용 대상 물량 등은 본문 참고.출처: 기획재정부, 법령정보센터, ‘관세법 제71조에 따른 할당관세의 적용에 관한 규정’의 ‘별표’ <표 1>은 한국인의 식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대파, 무, 양파, 배추, 감자에 지난 5년간 할당관세가 얼마큼 적용됐는지를 정리한 것이다. 기획재정부는 할당관세 적용 때마다 관련 대통령령을 개정하고 관세를 낮춘 품목과 적용 물량을 공개하고 있다. 그중 5가지 채소 관련 명세를 추렸다. 대파는 2020·2021년 할당관세를 적용하지 않았고, 2022년 7월 20일~10월 31일 448t, 지난해 5월 1일~6월 30일 5000t, 지난해 11월 17일~12월 31일 2000t, 올해 1월 19일~4월 30일 6000t에 대해 관세를 없앴다. 무 역시 2020~2022년엔 관세가 정상 부과됐다가 2023년 5월 1일~6월 30일 수입 전량에 무관세를 적용했고, 올해에도 7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 무관세 수입이 계속되고 있다. 감자 역시 감자칩 제조용에 한해 2022년 5월 1일~11월 30일 1만2810t, 지난해 5월 1일~11월 30일 1만2810t씩 무관세가 적용됐다. 양파도 마찬가지다. 2022년 8월 17일~12월 31일 9만2000t에 대해 관세율 10%가 적용됐고, 지난해 1월 1일~2월 28일에도 2만t에 관세율 10%가 적용됐다. 양파엔 할당관세와 더불어 또 다른 관세 인하 수단이 동원됐다. ‘시장접근물량(TRQ·Tariff Rate Quota) 증량’이다. 저율관세할당으로도 불리는 TRQ는 세계무역기구(WTO)·자유무역협정(FTA)에서 정한 품목에 대해 ‘기본 물량’까지는 낮은 관세를 부과하고 이를 초과하면 높은 관세를 부과하는 제도로, 관련 시행규칙을 개정하면 낮은 관세가 적용되는 물량을 늘릴 수 있다. 지난해 정부는 수입 양파의 TRQ 물량을 약 2만t에서 11만t까지 늘렸다. 지난 8월 서울 동대문구 경동시장에서 한 시민이 장을 보고 있다. 문재원 기자 ■고추의 사례를 보라 농산물의 저관세 수입은 당장 농산물 가격은 낮출지 몰라도 국내 생산 기반에 충격을 준다. 경남 합천에서 양파 농사를 짓는 농민 A씨는 수입 양파가 쏟아진 이후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양파는 겨울작물이라 병해충이 별로 없었는데 수확기인 봄철이 최근에 너무 더워지고 있잖아요. 5월부터 30도를 넘으니 성장은 잘 안 되고 병해충은 창궐하고…. 생산량이 30%는 줄었어요. 생산비라도 건지려면 20kg 한 망에 1만5000원은 돼야 했는데 1만3000원 정도에 팔렸습니다. 작년에 농협하고 산지유통 상인들이 1만6000원에 사줬다가 수입 양파 때문에 값이 내려가 큰 손해를 봤거든요. 작년 경험 때문에 1만5000원에는 안 팔리는 겁니다. 올해는 정말 ‘양파 농사 더는 못 짓겠다’는 탄식이 절로 나옵니다.” 농가 경영이 지속해서 악화한 사실은 통계로도 확인된다. 농촌경제연구원의 ‘농식품 공급망에서의 물가 결정요인 분석 연구’(김종진 외·2023년)에 따르면 2000년 이후 농가의 생산물 판매가격은 연평균 2.6% 높아졌지만, 재료비와 인건비 등 농사를 짓는 데 들어간 비용은 연평균 3.5%씩 상승했다. 수익은커녕 비용도 건지지 못하는 상황이 장기간 계속됐다는 얘기다. 연구진은 “농업구입가격(농사에 투입된 비용)은 2010년 전후와 2022년에 급등하는 모습을 보여 이 기간 농업경영체의 경영 성과지표가 크게 악화했을 것으로 판단된다”라고 밝혔다. 농가의 고통은 정부의 저관세 수입 결정에 별 고려 요소가 되지 못한다. ‘시장접근물량 증량에 관한 규칙’에 따르면 농림축산식품부는 TRQ 물량을 증량할 때 ‘증량이 당해물품 생산농가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해 기획재정부에 제출해야 한다. 농림부가 임미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양파 TRQ 증량 자료’에서 농가에 미치는 영향은 단 한 줄만 언급됐다. “TRQ 증량 물량은 6월 수확기 이후 7월에 도입되어 국내 생산농가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할 것으로 전망.” 영향 분석이라 하기 민망한 수준이다. A씨는 말한다. “이듬해인 올해 농민들이 직격탄을 맞았는데 영향이 미미하다고요? 게다가 양파 자급률 10%가 날아갔어요. 양파도 결국은 고추처럼 될 겁니다.” 한국의 음식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양념채소 고추의 자급률은 2000년 89%에서 꾸준히 떨어져 지난해 40.1%까지 내려앉았다. 2011년 태풍 피해로 건고추 작황이 좋지 않자, 당시 정부는 건고추 TRQ 물량을 증량했고, 이때를 기점으로 원래 관세가 낮은 중국산 냉동 고추와 고추 다대기(다진 양념)도 대거 시장에 풀리기 시작했다. 이후 외식업체 등 대량수요처 중심으로 중국산이 시장을 잠식해 나갔다. 통계청에 따르면 고추 재배면적은 2004년 6만1894㏊에서 지난해 2만6436㏊로 약 3분의 1토막이 났다. 농가가 고령화된 상황에서 기후변화와 함께 제값을 받지 못하게 만드는 수입 정책으로 타격을 입은 탓이다. 배추도 마찬가지다. 고랭지를 포함한 전국의 배추 재배면적은 지난 24년간 41% 줄었다. 이 사실은 주로 기후변화 영향으로 소개되지만, 주요 원인은 하나가 아니다. 강원도 고랭지 채소를 연구해온 원재희 강원도농업기술원 과장은 “고랭지 배추 재배면적의 큰 감소엔 크게 세 가지 원인이 있다”면서 “첫 번째가 쌀 소비량 감소와 연동된 김치 소비량 감소 및 대규모 김치 수입이고, 두 번째가 기후변화, 세 번째가 ‘농사해도 돈이 안 된다는 것’으로, 이 원인은 서로 맞물려 있고 하나만을 주요 원인으로 꼽기 어렵다”고 말했다. 돌코리아 홈페이지 캡처 ■바나나 수입업체 영업이익 10배 무차별적 저관세 수입은 농민을 고통스럽게 하고 수입업자들의 배는 불린다. 윤석열 정부는 사과, 배 등 과일의 가격이 오르자 국내산을 대체할 수 있는 수입 과일의 관세를 없앴다. 수입 바나나, 파인애플, 망고의 경우 2020년·2021년엔 관세가 정상적으로 부과됐으나 2022년 말과 지난해 하반기 일정 물량에 한해 무관세로 수입됐고, 올해 1월부터 9월까지는 아예 수입 전량이 무관세다(표 2). 수입 과일을 취급하는 기업들은 전례 없는 호황을 맞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바나나와 파인애플을 주로 수입하는 ‘돌코리아’의 전자공시 재무제표를 보면, 지난해 영업이익은 전년도(33억원)의 10배인 337억원에 이르렀다. 수입과일 관세 인하 얼마나 자주했을까수입과일에 대한 관세인하가 지난 5년간 주로 언제 이루어졌는지를 붉게 표시했다. 최근 3년동안 두드러졌음을 알 수 있다. 연도별 구체적인 기간, 적용대상물량 등은 본문 참고.출처: 기획재정부, 법령정보센터, ‘관세법 제71조에 따른 할당관세의 적용에 관한 규정’의 ‘별표’ 할당관세는 주로 세금을 깎아주는 것이기 때문에 깎아준 만큼 정부가 예산을 지원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기획재정부의 2021~2023년 할당관세 부과실적 및 결과 보고서를 종합하면 정부의 ‘할당관세 세수 지원액’은 2020년엔 3742억원, 2021년엔 6758억원이었다가 2022년 2조원에 가까워졌고(1조9694억원), 지난해에도 1조753억원(추정)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모두를 위한 해법 찾기 물론 농산물 수입을 안 할 수는 없다. 문제는 소비자와 농민 모두를 포기하지 않는 ‘적정선’을 찾아가려는 노력이다. 품목별로 적절한 수입량을 고민하고 피해가 명확한 농가에 손실보전 수단을 마련해야 한다. 일단 저관세 수입 남발부터 막을 제도적 수단이 필요하다. 임미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할당관세는 문재인 정부 시절 사료, 비료, 농약 원료에 주로 적용되다가 윤석열 정부 들어 국내 농가 생산물과 직접 경합하는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대파, 당근, 배추 등으로까지 확대됐다”면서 “앞으로는 할당관세 부과 시 국내 농가 피해가 예상되는 경우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등이 대책을 마련하도록 해야 한다”며 이런 내용을 담은 관세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기후위기에 따른 작황 부진과 수입물량 등에 의한 가격하락으로 이중의 피해를 호소하는 농민들을 위한 안전망도 필요하다. 현재 채소가격안정제(정부가 제시한 수급조절 의무 이행하면 손실 80% 보전)가 유사한 취지로 시행 중이지만 가입률은 17%에 그친다. 농협이 손실보전 일부를 부담해야 하는데, 영세 지역농협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 이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민주당은 주요 농산물의 가격이 기준가보다 떨어질 때 차액을 예산으로 보전해주는 가격안정제도(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법 개정안)를 주장하고 있다. 반면 농림축산식품부는 농가에 일정한 보험료 부담을 부여하되 농가 소득이 기준 이하로 떨어지면 차액을 보험금으로 보전해주는 수입안정보험을 추진할 방침이다. 농가의 ‘최소한의 삶’ 유지를 위한 안전망이 필요하다는 점엔 양측이 인식을 같이하고 있지만, 적절한 재원 규모와 제도의 현실성을 놓고 견해차가 크다. 식량 자급률 높이고 수입국 다변화 해야 기후플레이션과 식량위기 어떻게 할 것인가 기후플레이션을 전 지구적 맥락에서 볼 필요도 있다. 기후위기로 인한 작황 부진이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올여름 커피와 초콜릿, 올리브유 가격 상승이 대표 사례다. 인스턴트커피에 많이 들어가는 로부스타의 가격은 올해 역대 최고를 기록했고(올해 평균가격 1t당 3807달러·aT식품산업통계정보), 고급 커피에 주로 쓰이는 아라비카의 가격 역시 2022년을 제외하면 올해가 역대 최고 수준(1t당 4690달러)이다. 베트남(로부스타), 브라질(아라비카)의 심각한 가뭄으로 생산량이 줄어든 결과다. 초콜릿의 원료인 코코아 가격의 상승세는 더 가팔랐다. 1년 만에 가격이 두 배 넘게 뛰었다(지난해 1t당 3309달러→올해 7722달러). 세계 코코아의 70~80%가 생산되는 서아프리카에 가뭄과 폭우가 덮쳐 생산량이 감소한 탓이다. 스페인 가뭄으로 인해 CJ, 샘표 등이 판매하는 국내 올리브유 가격은 30% 올랐고 브라질, 미국, 멕시코의 오렌지나무 병해충 확산으로 인해 오렌지주스 농축액 가격 역시 2년 전보다 두 배 이상으로 올랐다(1t당 3868달러→8712달러). 당장은 기호식품이나 과일 등이 문제인데 앞으로는 인류의 에너지원인 ‘곡물’을 둘러싼 식량위기도 심각해질 것이라는 경고가 나온다. 각종 저술과 강연을 통해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알려온 조천호 전 국립기상과학원장은 “한반도의 기후위기는 식량위기로 올 것”이라고 말한다. 조 전 원장은 “30년 안에 지구 인구는 100억명에 이를 것으로 보이는데, 인류 전체를 먹여 살리려면 사료까지 합해 곡물이 지금보다 70% 늘어나야 한다. 그러나 기온이 올라 곡물생산량이 줄어드는 마당이라 공급이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워질 것”이라면서 “과일, 채소와 달리 곡물은 생존의 문제다. 나중에는 돈이 있어도 곡물을 살 수 없는 심각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곡물자급률은 19.9%에 불과하다. 쌀은 96.2%로 높지만 보리는 25.7%에 그치고, 밀과 옥수수 자급률은 나란히 0.8%로 극히 낮다(농촌경제연구원 2022년도 식품수급표 기준). 미국(122.4%), 캐나다(169.9%), 중국(92.2%)은 물론 일본의 곡물자급률(27.6%)과도 격차가 상당하다. 곡물자급률은 단기간에 올리기 쉽지 않고 커피, 초콜릿, 올리브유 같은 품목은 해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선 두 가지 방향의 제안이 공존한다. 첫 번째는 수입국 다변화 전략이다. 남재작 정밀농업연구소장은 “정부가 주요 곡물자급률을 설정해 노력하고 있다지만 목표달성에 번번이 실패하는 실정”이라면서 “당장 자급률을 높일 수 없다면 수입국을 다변화해 170개국에서 농산물을 들여오는 싱가포르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식량안보’ 차원에서 곡물자급을 절대 포기해선 안 된다는 시각도 있다. 이수미 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 부소장은 “코로나19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인해 밀 공급 차질을 겪었던 일본은 최근 ‘식량안보 확보’를 명시하고 자급률 향상 목표를 설정하는 등의 법 개정을 했다”면서 “우리도 국내 기반을 더 쌓아가려는 노력을 포기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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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중의 정책과 딜레마] (33) 대파 파동? 핵심은 기후 인플레이션(2024. 04. 12 16:00)
2024. 04. 12 16:00 경제
4월 10일 서울 마포구 마포농수산물시장에 대파가 전열돼 있다. 연합뉴스 선거 정국을 한동안 흔든 이른바 ‘대파 파동’은 앞으로 우리가 맞이할 미래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상당히 ‘징후적인 사건’이다. 대파 파동은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월 18일 서울 양재동 하나로마트에 가서 대파 한 단을 들고 “저도 시장을 많이 봐 봐서, 대파 875원이면 그냥 합리적이라고 생각이 되고”라고 말한 사건이다. 한 단에 2000~3000원이던 대파 가격이 4000~5000원까지 오른 탓에 ‘875원 발언’은 선거 정국에 커다란 논란을 일으켰고, 여당의 큰 악재였다. 혹자는 단순 실언이 아니냐고도 하지만, 대파 발언이 나오기까지 정부와 여당이 ‘운동권 심판’, 마구잡이식으로 감세와 지역개발 약속을 쏟아낸 ‘민생토론회’, “목련 피면 김포가 서울 된다”는 식의 비현실적인 공약 등으로 선거를 치르며 민생과 물가에 무심함을 드러냈기에 자초한 ‘파동’이었다. 문제는 대파 파동의 의미가 공론장에서 제대로 논의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선거가 끝난 시점에 이 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차분히 살펴보고자 한다. 대파가 알려준 ‘기후 인플레이션의 원년’ 이번 대파 파동은 2024년이 기후 인플레이션(기후위기로 인한 물가 상승)의 원년을 알렸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기후위기의 영향이 이상기후와 무역 규범의 변화를 넘어서 우리 먹거리인 농수산물 품목과 생산량의 변동으로 이어졌고, 이번에 처음으로 피부로 느껴지는 물가 상승으로 다가왔다. 문제는 올해가 시작이라는 점이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가 지구온도가 산업화 이전보다 1.5℃ 이상 높아지지 않도록 제시한 탄소감축량을 각국이 지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한국은 탄소배출량이 많은 ‘기후 악당’ 국가에 속한다. 결국 올해 처음 체감한 ‘기후 인플레이션’을 내년과 후년에 더욱 강력하게 경험할 것이 확실시된다. 전반적으로 더워지고, 때에 맞지 않는 일시적 추위와 더위, 국지성 집중호우, 일조량의 변화, 해충의 증가 등으로 대파와 사과뿐 아니라 감자, 양배추, 양상추, 딸기, 토마토, 참외 등의 가격도 쉽게 출렁거릴 가능성이 크다. 그나마 기후 인플레이션이 할 수 있는 긍정적인 역할이라면 ‘인식의 변화’다. 전 세계의 과학자들이 오래전부터 기후 문제를 경고했지만, 국내에서 기후가 와닿는 의제가 된 계기가 ‘미세먼지 문제’였던 것처럼 물가 상승은 체감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맞이한 상황을 ‘기후 인플레이션’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부터 따져보자. 통계청이 발표하는 소비자물가지수에서 2024년 3월 품목 성질별 동향을 보면 여러 품목 가운데 과실, 채소, 곡물의 물가 동향이 눈에 띈다. 전년 동월 대비 상승률을 보면 과실 40.3%, 채소 10.9%, 곡물 7.1%로 다른 품목들의 상승세를 압도했다. 농산물의 가격이 이 정도로 오른 사례 자체가 드물다. 2000년대 이후 인플레이션은 현실에선 사라진 유물 취급을 받았고, 심지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주요국들이 금융기관에 대규모 자금을 공급했는데도 인플레이션이 찾아오지 않았다. 다시금 인플레이션이 본격화된 시기는 코로나19의 확산세가 주춤해진 2022년 초였다. 특히 원자재 가격 상승이 두드러졌던 2022년 6월 기준으로 석유류 가격지수는 158.6을 기록했다. 이는 2020년의 물가지수를 100으로 상정했을 때 1.586배만큼 가격이 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가격지수가 2024년 3월 기준 과실 168.62, 채소 131.9에 달한다. 가격지수가 높은 다른 품목이 전기·가스·수도류(136.1), 석유류(124.49), 외식(120.21) 등이다. 인플레이션이 다시 찾아온 2021년 이후로 최근의 과실류, 채소류만큼의 가격지수를 보인 품목이 드물다. 2022년 6월 석유류의 가격지수가 158.6을 기록한 적이 있을 뿐이다. 이런 이유로 2024년 3월 소비자물가 총지수가 전년 동월 대비 3.1% 증가하며 1월 2.8%에서 0.3%포인트 올랐다. 지난 3월 31일 서울 시내 한 대형마트에 사과가 진열돼 있다. 국가·도시별 통계 비교 사이트 넘베오(NUMBEO) 조사에 따르면, 지난 3월 26일 기준 사과 1㎏의 가격은 한국이 6.82달러(약 9124원)로 1위를 기록했다. 연합뉴스 물론 과일, 채소, 곡물 등의 가격 상승이 전체 물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다는 반론도 가능하다. 한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Consumer Price Index)는 458개의 대표품목으로 구성돼 있고, 통계청은 이 대표품목의 선정기준이 1)전국 가구의 월평균 소비지출액이 일정비율 이상이고 2)동종 품목군의 가격을 대표할 수 있으며 3)시장에서 계속 가격조사가 가능한 품목이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렇게 선정된 대표품목들이 물가에 각기 똑같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쌀과 현미의 가격이 모두 1000원 올랐어도 우리가 주식으로 먹는 쌀가격의 변동은 다른 품목보다 더욱 물가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렇게 품목마다 물가지수에 차등적인 영향을 주는 수단이 ‘가중치’다. 전체 458개 품목의 가중치 총합을 1000으로 배정하고 품목마다 가중치를 부여하는데, 예를 들어 쌀의 가중치가 4.2이고, 현미의 가중치가 0.4다. 같은 값이 올랐어도 쌀이 현미에 비해 소비자물가지수에 10배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다. 이 가중치가 휘발유 24.1, 경유 16.3, 세차료 0.5, 주차료 1.2 등 품목별로도 차이가 크다. 그렇다면 과일류, 채소류, 곡물류의 가중치는 얼마일까. 각각 14.6, 14.3, 6.3이고, 모두 더하면 총 35.2다. 즉 과일과 채소, 곡물의 가중치를 모두 합쳐도 휘발유와 경유, 두 품목의 가중치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렇게 보면 과일, 채소, 곡물이 물가에 미치는 영향을 높게 평가하긴 어렵다. 하지만 최근 소비자물가지수의 다른 품목의 상승세는 둔화된 반면에 채소류, 과실류의 가격이 올랐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과실류와 채소류 다음으로 가격지수가 높은 전기·가스·수도류의 경우 가격지수가 1월 136.09에서 3월 136.10으로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 반면 과실류는 같은 기간 149.99에서 168.62로, 채소류는 123.65에서 131.90으로 올랐다. 따라서 최근 소비자물가지수로 표현되는 전체 물가의 상승은 고유가가 유지되는 상황에서 과실류, 채소류의 가격마저 오른 탓으로 볼 수 있다. 온난화와 이상기후로 과일 수확량 감소 그렇다면 왜 과실류와 채소류의 가격이 올랐을까. 농산물이 생산되는 현장에선 이미 예견된 가격 상승이었다. 예년과 눈에 띄게 차이가 나도록 생산량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2023년 사과 생산량은 전년 대비 30%나 줄어든 39만4000t이었다. 생산량 감소에는 재배면적 감소, 농촌 고령화 등 여러 요인이 있지만, 최근 눈에 띄는 것은 ‘기후변화’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지난 4월 5일 발표한 이슈보고서(김태후·채홍기)에 따르면 2010년대 기상 이변으로 인해 봄철 서리 발생 빈도가 증가 추세이고, 이로 인해 사과와 배 등 과수작물의 피해가 커졌다고 분석된다. 여기서 ‘서리’란 기온이 영하로 내려갈 때 공기 중의 수증기가 농작물 표면에 달라붙어 얼음이 되는 현상으로 서리가 발생하면 농작물의 조직이 파괴돼 수확량이 감소한다. 보고서는 지구온난화로 인해 과수 꽃이 평년보다 일찍 피지만, 봄철 서리도 더욱 빈번하게 발생해 피해를 더욱 키운 요인이 있다고 분석했다. 농작물재해보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2023년 피해 과실수의 사과 착과 수량은 전년 대비 16.5%, 배는 31.8% 감소했다. 연도별 지역별 봄 서리 발생 빈도(출처 :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기후 위기와 농업?농촌의 대응: ④ 봄철 동상해(서리피해)>) 국내에선 기후변화가 식량 물가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연구가 드물지만, 해외에선 관련 연구가 이미 꽤 진행됐다. 여러 연구 가운데 최신의 연구로는 지난 3월 22일 국제학술지 ‘네이처(Nature)’의 지구·환경과학 전문 저널인 ‘커뮤니케이션즈 지구와환경(Communications Earth & Environment)’에 실린 ‘인플레이션 압력을 부추기는 지구 온난화와 폭염’이란 보고서가 있다. 이 연구를 수행한 독일 포츠담기후영향연구소 연구팀은 총 121개국에서 30년간 집계한 월별 소비자물가지수와 날씨 데이터 총 2만7000개를 분석해 지구온난화로 인해 2035년 식량 물가상승률이 전년 대비 최대 3.2%포인트, 전체 물가 상승률이 1.18%포인트 상승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국제적으로도 위기에 처한 품목이 늘고 있다. 지구온난화로 바나나의 뿌리를 썩게 만드는 곰팡이가 급격히 퍼지고 있고, 오렌지는 녹화병이 확산하면서 수확량이 줄고 있다. 카카오나무도 달라진 기후로 병충해의 피해를 보고 있고, 커피콩은 온도, 습도의 변화로 생산량이 급감하고 있다. 국제적으로도 기후 인플레이션이 본격화되고 있다는 의미다. 과일 직수입이 아닌 장기적 대책이 필요 대파 파동에서 정부의 대응은 1500억원의 자금을 긴급 투입한 할인 지원과 외국 과일의 직수입이었다. 정부의 미세 조정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만, 이것만 하면 안 된다. 기후위기 시대에 각 농수산물의 재배적합 지역, 특징 등이 크게 바뀌고 있다. 사과 과수원을 하루아침에 귤 농장으로 바꾸기 어렵기 때문에 종합적이고도 선제적인 연구가 더욱 필요한 시점이다. 농업에 대한 관점을 물가 안정과 식량안보의 관점으로 다시 볼 필요도 있다. 농업에 대한 관점을 전환하기 위해 도시 거주자들의 텃밭농사를 지원하는 정책을 통해 농사를 직접 경험하게 하는 것도 방법이다. 매년 봄마다 씨감자를 심는 주말 농부들은 농사를 망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매년 여름이 앞당겨지는 것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농업 안에서도 하우스 냉난방 등의 탄소 배출을 줄이는 저탄소 농업으로 전환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후 대응을 비용의 관점이 아닌, 우리가 직면할 여러 위험을 줄인다는 관점에서 보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지금 당장 비용이 더 든다고 기후 대응을 외면한다면 머지않아 더 큰 비용을 감수하게 된다. 이제 시작된 기후 인플레이션이 분명한 신호를 보내고 있다.
윤형중의 정책과 딜레마
[주간 舌전]“대파 한 단 875원…음, 합리적이군”
[주간 舌전]“대파 한 단 875원…음, 합리적이군”(2024. 03. 25 06:00)
2024. 03. 25 06:00 정치
윤석열 대통령//대통령실사진기자단 “대파 한 단에 875원이면 합리적인 가격 같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월 18일 농협 하나로마트 양재점을 방문해 이같이 말했다. 한국농수산물유통센터 농산물유통정보 기준, 당시 대파 한 단(1㎏) 평균 소매가격은 3018원이었다. 해당 발언이 알려지고 대파 한 단 가격을 875원으로 아는 윤 대통령을 향해 “세상 물정을 모른다”라는 지적이 쏟아졌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 3월 20일 인천을 방문해 대파 한 단을 들고 “여러분, 850원짜리가 맞느냐”며 “(대파 한 단이) 5000원이랍니다. 5000원”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를 겨냥해 “무식한 양반들아, 돈이 돌아야 경제가 산다”고 말했다. 신현영 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 대변인도 국회 브리핑에서 “(윤 대통령이) 대파 한 단이 875원이면 합리적인 가격 같다는 말로 국민의 복장을 뒤집어놓고 있다”며 “세상 물정에 어둡고 국민 삶에 얼마나 무관심한지 새삼 확인하며 국민은 오만정이 다 떨어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파 한 단에 9000원, 배추 한 포기에 5000원이 넘는다”고 덧붙였다. 이민찬 국민의힘 중앙선대위 공보단 대변인은 “억지 비판이 도를 넘고 있다”며 “정부 지원금과 할인쿠폰 등이 더해져 일부 대형마트에선 대파 한 단 가격이 875원으로 내려간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민주당은 억지 비판을 멈추고, 물가 안정을 위한 정부·여당의 노력에 동참하시라”고 덧붙였다.
주간 舌전
[허브에세이]대파의 흰 부위 ‘총백’ 효능 다양(2019. 11. 01 15:52)
2019. 11. 01 15:52 건강
어느 나라를 가도 우리만큼 밑반찬에 관대한 곳은 없다. 특히 국밥집에서 나오는 김치, 깍두기 항아리를 외국인들은 정말 신기하게 바라본다. 거기에 송송 썰어진 신선한 파를 볼 때면 우리나라 인심이 정말 좋다는 걸 새삼 느낀다. 진료가 많아 피로에 몸살감기가 올 듯하면 설렁탕집으로 간다. 소뼈와 고기를 넣고 뽀얗게 우려낸 곰국을 받으면 우선 흰 국물이 안 보일 정도로 파로 덮는다. 거기에 약간 간을 강하게 하고 일부러 스카프나 겉옷을 입고 먹는다. 한 그릇 먹고 나면 땀이 이마와 얼굴에 송글송글 맺힌다. 다음날 일어나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진이 빠졌다’ 할 때 진기를 빠르게 보충하는 나만의 방식 중 하나다. 곰국으로 진하게 영양을 채워주면서, 기력이 빠져 순환이 약하면 체기(滯氣)가 오기 쉬우니 소화를 돕고, 땀으로 겉의 한기를 흩어내는 데 파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대파/경향DB 백합과에 속한 다년생 초목인 파의 흰 부위, ‘총백(蔥白)’은 흔히 우리가 보는 대파의 아랫둥이다. <동의보감>에는 꽤나 적극적으로 그 효능과 쓰임이 적혀 있다. “맛은 맵고 독이 없다. 감기로 오한발열이 있고 과한 바람을 쐬어 얼굴과 눈이 붓는 것과 인후염을 치료한다. 태동이 불안한 것을 든든하게 하며, 눈을 밝게 하고, 간의 사기(邪氣)를 제거한다. 오장을 잘 소통하게 하고, 온갖 약독을 풀며, 대소변을 잘 나오게 한다.” 총백이 들어가는 대표적 처방 중 하나가 오적산(五積散)이다. 풍한(風寒)이나 찬 음식에 상해 오한발열이 있고, 온몸이 쑤시고 뼈마디가 아프면서, 목을 돌리기 힘들고 허리가 뻐근한 데다가, 소화불량이나 복통이 함께 오는 병을 치료한다. 필자도 제법 많이 쓰는데, 한 번 끓일 때면 탕전실에 파 냄새가 진동한다. 한 제에 총백이 60뿌리 넘게 들어가니 오죽하랴. <동의보감>은 상세한 설명을 더한다. “동총(冬蔥)이라고 하는 것은 겨울을 지나도 죽지 않기 때문에 붙인 것이다. 파 밑을 쪼개어 심은 것은 씨가 맺히지 않는데, 이것이 식용이나 약용으로 가장 좋다. 단지 양념에만 쓸 수 있고, 많이 먹으면 안 된다. 관절을 열고 땀을 내어 사람을 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라고 되어 있다. 감기에 약으로 쓸 때는 푸른 잎을 버리는데 그 성질이 뜨겁기 때문이다. 권혜진 원장 이밖에 다양한 활용법이 있다. 파의 열매는 눈을 밝게 하고 속을 데우며 정을 보태준다. 뿌리는 감기로 인해 이마 앞부분 두통을 치료한다. 잎은 상처가 바람에 노출되거나 물이 들어가 붓고 아프다가 파상풍이 된 것을 치료한다. 꽃은 명치 통증에 주로 쓴다. 임산부들은 늘 먹는 것을 조심하게 된다. 종종 태아가 커지면서 횡경막을 밀어 올려 가슴이 답답해하시는 분들이 온다. 총백은 기운이 따뜻하면서도 막힌 것을 치료하기에 태아를 안정시키면서도 임산부의 소화불량을 완화해준다. <동의보감>에는 즙으로 내어서 마실 정도로 안전하다고 나온다. 임산부 감기나 명치가 뭉치고 소화가 힘들 때는 요리에 함께 넣어 먹어도 좋을 것이다.
허브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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